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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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耿純
(? ~ 37년)
1. 개요2. 일화

1. 개요

후한의 인물로, 자는 백산(伯山). 기주 거록군(鉅鹿郡) 송자현(宋子縣) 사람이다. 광무제를 도운 운대 28장의 공신 중 하나.

2. 일화

경순의 아버지 경애(耿艾)는 왕망 정권으로부터 관직을 받아 제평윤(濟平尹)을 지내고 있었다. 당시 장안(長安)에서 유학 중이던 경순 또한 관직에 임용되어 납언사(納言士)가 되었다.

경시 원년(23년), 왕망이 패망하고 경시제 현한 정권이 들어섰다. 경시제 유현(劉玄)은 각지에 사신을 파견해 순시하면서 투항을 권했는데, 이때 아버지 경애는 사신으로 온 무음왕(舞陰王) 이일(李軼)에게 항복하여 제남태수로 임명받았다. 이일 형제는 경시제 치하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 그의 곁에는 언제나 빈객들이 들끓었다. 경순도 이일과의 만남을 청했으나 오랜 기다림 끝에 겨우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경순이 이일에게 말했다.
"대왕께서는 용호(龍虎)의 자태로 풍운이 일어나는 때를 맞아 재빠르게 일어나신 덕에 한 달만에 형제가 왕을 칭하게 되었습니다. 하나, 백성에게 아직 덕망과 신의를 베풀지 않은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총애와 녹을 받으셨으니, 이는 지혜로운 자라면 꺼리는 바입니다. 지금은 전전긍긍 하시면서 스스로를 위태롭다 여기시고 총애와 녹이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 하셔야 할 때임에도, 오히려 스스로 만족하고 계시니 어찌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이일은 경순의 말을 기의하게 여겨 그의 뒤를 조사하니, 머지않아 그가 거록의 유력가 출신임을 알아내, 승제하여 기도위로 삼고 부절을 주어 조(趙), 위(魏) 땅을 평정하도록 했다.

유수가 경시제의 명령을 받들어 하북의 군현을 위로하기 위해 한단(邯鄲)에 이르렀다. 경순은 유수가 장병들을 다스리는 것이 여타 경시제의 장수들과 다름을 알아보고는 유수를 따르기로 마음먹고 말과 비단 수백 필을 상납하였다. 유수는 이내 북진하여 중산(中山)으로 떠났고 경순은 그대로 한단에 머물렀다. 그 해 12월, 한단의 점쟁이 왕랑이 반란을 일으키고 유수의 목에 거액의 현상금을 걸었다. 유수는 계성(薊城)에 머물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현상금을 탐내 유수를 노리니, 유수는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장수들만 거느려서 동남쪽으로 도주했다. 유수는 왕랑에게 복종하길 거부한 신도군(信都郡)에 이르러 병사를 징발하고 군대를 정비한 뒤, 본격적인 왕랑 토벌에 나섰다.

유수군이 허장성세의 계책으로 당양(堂陽)을 항복시키고 다시 북서쪽으로 이동할 동안, 경순은 사촌동생 경흔(耿訢), 경숙(耿宿), 경식(耿植) 등 자신의 친척과 빈객 2,000여 명을 거느리고 육현(育縣)에서 유수군을 영접하였다. 유수는 경순을 전장군에 임명하고 경향후(耿鄕侯)에 봉하였으며, 경흔, 경숙, 경식을 모두 편장군으로 삼아 경순과 함께 선봉에 서도록 하였다. 이들은 고향인 송자현(宋子縣)을 항복시키고 유수를 수행해 하곡양(下曲陽)과 노노(盧奴)로 향하였다.

경순은 송자를 떠나기 전, 경흔 등 자신을 따라나선 친척들이 변심할 것을 염려해 고향집을 불태우게 하였다. 유수가 경순에게 이유를 묻자 경순이 대답했다.
"제가 보건대, 명공(明公)께서는 수레 한 대를 타고서 하북으로 오셨지만, 창고에 수많은 재물을 비축해 놓지도 않으셨고, 후한 상과 달콤한 미끼로 사람을 모은 것도 아니며, 오직 은덕으로 백성들을 품으셨기 때문에 백성들이 기꺼이 따랐던 것입니다. 지금 한단이 스스로 독립하여 북주(北州) 사람들이 의혹을 품고 있습니다. 제가 비록 모든 친척을 다 명공의 명에 따르게 하고 노약자도 따르게 하였으나 친족과 빈객 중 절반은 다른 마음을 품고 있을 것이라 염려되었기 때문에 가옥을 전부 불살라서 그들의 뒤돌아 볼 생각을 끊어버린 것입니다."
유수는 그의 충성심에 감탄하였다. 유수군이 호(鄗) 땅에 이르렀을 때, 유수는 객사(客舍)로 들어가 잠시 머물렀다. 호의 호족 소공(蘇公)은 왕랑과 내통하여 몰래 왕랑의 장수 이운(李惲)을 불러들였다. 하지만 사전에 소공의 꿍꿍이를 간파해 미리 대비를 해두었던 경순은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 이운의 군대를 습격하여 전멸시켰다. 이후로도 유수를 따라 한단성까지 함락시키고 마침내 왕랑 세력을 멸하였다.

유수를 수행해 관도와 포양산(蒲陽山)에서 동마적과 싸워 이들을 격파하였다. 이때 도적떼 적미(赤眉), 청독(靑犢), 상강(上江), 대동(大彤), 철경(鐵脛), 오번(五幡) 등의 무리 100,000명이 사견(射見)에 주둔해 있었는데, 유수는 동마에 이어서 이들을 공격했다. 경순의 부대는 선봉이라 다른 부대와 몇 리 정도 떨어져 있었다. 이에 도적들은 밤을 틈타 경순의 부대부터 전멸시키기 위해 기습하였다. 도적들이 화살을 비 오듯 퍼붓자 경순 진영에 사상자들이 속출했다. 하지만 경순은 부하들을 진정시키고 굳게 지키며 자리를 움직이지 않았다. 이후 결사대 2,000명을 선발해 각자 강노(彊弩) 하나와 화살 세 발씩 쥐어주고 조용히 행군하여 적군의 후방으로 이동했다. 경순이 결사대에게 일제히 함성을 지르고 화살을 쏘도록 지시하니, 적들은 예상치 못한 공격에 크게 놀라 도주하기 시작했다. 경순은 도적들을 끝까지 추격하여 대파한 뒤, 기병을 보내 유수에게 보고하였다. 다음 날 아침, 유수는 제장들을 거느리고 경순의 진영을 방문해 그를 위로하며 말했다.
"어젯밤은 곤란하지 않았는가?"
경순이 대답했다.
"명공(明公)의 위엄 덕분에 다행히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유수가 다시 말했다.
"대병(大兵)은 야간에 이동시킬 수 없는 법이라 서로 구하지 못한다네. 군영의 진퇴에는 정해진 것이 없으니, 앞으로 경의 친족들을 군중에 거주하게 하지 말도록 하게."
지금까지 경순의 가솔들은 유수를 향한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비전투인원이라도 경순을 따라 전장에 다니며 진중에 남았다. 이에 유수는 경순의 친척 경급(耿伋)을 포오현(蒲吾縣)의 장(長)으로 삼아 친족을 거느리고 포오에 거주할 수 있게 하였다.

건무 원년(25년) 6월, 유수가 황제를 칭하자 고양후(高陽侯)에 봉해졌다. 그 해, 경순은 현한의 양왕(梁王) 유영(劉永)을 제음(濟陰)에서 공격하고 정도(定陶)를 점령하였다. 경순은 일전에 왕랑을 토벌하던 중 낙마하여 어깨에 부상을 입은 적이 있었는데, 이번 전투를 마치고 부상이 덧나는 바람에 수도 낙양으로 귀환해 회궁(懷宮)에서 광무제를 알현하였다. 광무제가 경순에게 그를 대신할 만한 인재를 추천해달라 하자, 경순은 사촌동생 경식을 천거하였다. 광무제는 경식에게 경순의 군대를 거느리도록 하고 경순을 그대로 전장군에 남게 하였다.

그 무렵 진정왕(眞定王) 유양(劉揚)이 당시 유행하던 예언서를 조작해, 「적구지후 영양위주(赤九之後 癭揚爲主)」라는 문구를 퍼뜨렸다. 여기서 '적(赤)'은 화덕(火德)을 섬기던 한나라의 국색이나 마찬가지며, '구(九)'는 한고조의 9대손인 광무제를 의미한다. 그리고 '영양(癭揚)'이란 혹이 난 양(揚) 즉, 담낭증을 앓고 있던 유양을 말하니, 이는 곧 유양이 광무제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다는 뜻이었다. 유양은 이런 예언서로 군중을 현혹하는 동시에 면만적(綿曼賊)과 교류하면서 세력 확장을 도모하였다.

건무 2년(26년) 정월, 광무제가 기도위 진부(陳副), 유격장군 등륭(鄧隆)을 보내 유양을 소환하였으나, 유양은 성문을 닫아걸고 불응하였다. 이에 광무제는 다시 경순을 불러 부절을 지니고 유(幽), 기(冀) 땅으로 가 사면령을 내리는 동시에 지나는 곳의 왕후(王侯)를 만나 위로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보여주기식 명령이었고 경순에게는 유양을 만나거든 사로잡으라는 밀명을 전했다. 경순은 관리 백여 명을 거느리고 원씨(元氏)에서 진부, 등륭과 합류해 진정으로 갔다. 유양은 병을 핑계로 만나려 하지 않았으나, 경순과는 친척 사이라 그가 객사에 들어갔을 때 은밀히 사람을 보내 따로 만나자는 의사를 전했다. 경순도 유양에게 답장을 보냈다.
저는 황제의 사신으로서 왕후(王侯), 목(牧), 태수(太守)를 만나야 하므로 먼저 나아갈 수 없습니다. 만약 만나고 싶거든 친히 객사로 나와 주십시오.
유양은 자신의 동생 임읍후(臨邑侯) 유양(劉讓)과 사촌형 유세(劉細)가 각자 10,000여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있었기에, 경순이 설마 자신을 해치리라 의심하지 않았다. 유양은 객사로 행차하여 안으로 들어가고, 그의 형제들은 날렵한 병사를 거느린 채 밖에서 대기하였다. 경순은 유양을 예를 다해 극진히 맞이하고 밖에 있는 두 형제들에게도 안으로 들어오라 청하였다. 유양과 두 형제가 객사 내로 들어오자, 경순은 즉시 태도를 돌변하여 미리 숨겨둔 병사들을 발동해 세 사람을 모두 참수해 버렸다. 워낙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진정 사람들은 두려워 감히 저항하지 못하였다. 광무제는 유양을 소환해 조사할 참이었지만 되려 죽어버렸으니, 이를 불쌍히 여겨 유양의 아들 유득(劉得)을 진정왕에 봉해 아버지의 뒤를 잇게 하였다.

경순은 유양을 처단하고 수도로 돌아와 광무제에게 아뢰었다.
"신(臣)은 본래 관리 집안의 자손이나, 다행히 대한(大漢)이 부흥하고 성제(聖帝)께서 천명을 받으시는 때를 만나 장군을 지내고 후작에 올랐습니다. 이제 천하가 평정되어 신은 재능을 발휘할 데가 없으니, 한 군(郡)의 관리로 부임하여 최선을 다해 다스려 그 효과를 거두기를 원합니다."
광무제가 웃으며 말했다.
"경은 지금까지 무치(武治)를 하였건만, 이제 문치(文治)를 하고 싶은 것이오?"
그리고는 경순이 원하는대로 동군태수(東郡太守)에 임명하였다. 당시 동군은 아직 평정되지 않은 상태였으나, 경순이 부임한 지 몇 개월만에 도적들은 사라지고 지역은 안정을 되찾았다.

건무 4년(28년), 경순은 광무제의 명령을 받아 과거 경시제가 임명한 동평태수 범형(范荊)을 치고 그의 항복을 받아냈다. 경순은 더 나아가 태산(太山), 제남(濟南), 평원(平原)에서 날뛰던 도적들까지 공격하여 전부 토벌하였다. 그 해에 발간현(發干縣)의 장(長)이 죄를 짓자 경순은 군사를 거느려 현장을 포위하고 광무제에게 상주하였다. 하지만 광무제의 명령을 받기도 전에 현장이 그 자리에서 자살하니, 경순은 이 일로 면직당하고 봉조청(奉朝請)이 되어 의례나 행사가 있을 때에만 조정에 참석하였다.

광무제가 동해(東海)의 군벌 동헌(董憲)을 정벌하기 위해 친정에 나설 때, 경순도 황제를 수행하여 종군하였다. 광무제의 군대가 동군을 지나려는데, 동군의 백성들이 나와 길을 막고 울면서 경순을 다시 부임시켜달라 청하였다. 이 광경을 본 광무제는 자신을 따르던 공경(公卿)들을 향해 말했다.
"경순은 젊었을 적부터 갑주를 입고 군리(軍吏)의 일만 하였다. 그런데도 군을 다스리자 백성들이 그를 그리워하는 것이 이와 같을 수 있는가?"[1]

건무 6년(30년), 동광후(東光侯)로 전봉되었다. 경순이 봉지를 사양하자 광무제가 말했다.
" 문제(文帝)께서 주발(周勃)에게 이르길, 『승상은 내가 중히 여기니, 군(君)은 나를 위해 제후를 거느리고 봉국을 취해 주시오』라 하였는데 지금도 그와 같구려."
광무제의 간곡한 부탁에 못 이겨 경순은 조서를 받고 봉국으로 떠났다. 경순이 봉국으로 가던 도중 업(鄴)에 이르렀을 때 광무제가 곡식 10,000 휘(斛)를 하사하였다. 마침내 봉국에 도착한 경순은 죽은 자를 조상(弔喪)하고 병든 자를 위문하니, 백성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건무 8년(32년), 동군(東郡), 제음(濟陰) 땅에서 도적떼가 일어났다. 광무제는 대사공 이통(李通)과 횡야대장군 왕상을 보내 도적을 진압하게 하였다. 광무제는 경순의 위신이 위(衛) 땅에 현저히 높음을 알고 사신을 파견해 그를 태중대부에 임명한 뒤, 병사들을 거느리고 동군으로 향하게 하였다. 경순의 군대가 동군에 들어섰다는 소식을 들은 동군의 도적떼 9,000명이 모두 싸우지 않고 항복하였다. 광무제가 서신을 보내 그를 다시 동군태수로 삼자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건무 13년(37년), 동군태수로 재직하던 중 사망하고 그의 아들 경부(耿阜)가 아버지의 작위를 이었다. 시호는 성(成). 경순의 시신은 봉지이자 고향인 거록에 묻혔는데, 명나라에서 이를 발굴하려다가 너무 땅 속 깊숙이 묻혀 있어 실패하고 대충 그 위치에 묘비만 세워두었다고 한다. #


[1] 경순이 젊었을 적 지냈던 납언사는 한나라의 상서부(尙書府) 소속 관리와 마찬가지라 광무제가 군리(軍吏)라 표현한 것이다. 전한 말기에 상서가 가졌던 권한을 생각한다면 틀린 말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