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서(後漢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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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盧植(123년?[1] ~ 192년)
고대 중국 후한 말의 정치가, 학자, 장군이자 자는 자간(子幹)으로 노육의 아버지.
키가 무려 8척 2촌(약 194cm)[2]이나 되었으며,[3] 목소리는 종소리처럼 우렁찼다고 한다. 삼국지 팬들에게는 유비와 공손찬의 스승으로 잘 알려져 있다. 주준, 황보숭과 함께 황건적의 난 토벌에 힘썼기 때문에 이 둘과 엮이곤 한다. 즉 학자, 문관 이미지이지만 덩치도 좋고 목소리도 크고 군사적 실적도 어느 정도 있던 문무겸비형이었다. 유주 탁군 탁현 출신으로 유비, 장비와 동향이다.
2. 생애
어린 시절에는 정현과 함께 당대의 대학자인 마융의 밑에서 수학했다. 젊었을 때부터 청렴하고 강직해 고위 관리에게도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항상 세상을 구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고 사(辭)와 부(賦)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마융에게 배울때 마융이 주변에 여창들로 하여금 춤추고 노래부르게 해도 전혀 눈길을 주지 않아 스승의 존중을 받았다. 술 한석을 마실 수 있었다고 한다.167년에 환제가 승하하고 영제가 즉위하자, 환제의 장인인 두무는 제후에 봉해졌다. 이때 노식은 고위 관직자로서 제후직을 겸손하게 사양할 것을 그에게 권했지만 지신의 간언은 무시 당했고, 후에 두무는 십상시 세력을 공격하다 오히려 당했다.
노식 또한 두무가 환관들에게 관광당한 169년의 2차 당고의 화 사건을 전후로 벼슬을 사퇴한 것으로 보이며 이후로도 주, 군에서의 연이은 천거를 모두 사양했지만 희평[4] 말년에 박사로 임용되었다는 기술을 보면 몇 년 뒤에 복직한 것으로 보인다.
175년에 구강군과 여강군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3부에서 문무에 뛰어난 인물로 일제히 추천되어 구강태수가 되었고 성공적으로 반란을 진압하였다. 난을 평정한 후 그는 병을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곧 고향으로 돌아가 저술 활동과 후학 양성에 주력했다.[5]
훗날 조정의 부름에 응하여 복직하였다. 그는 주로 오경의 교정이나 한기의 편찬에 기여했으며, 178년에는 당고의 화로 면직된 관리들을 복직시켜줄 것을 영제에게 청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4년에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는 주준 그리고 황보숭 등과 함께 난을 진압하게 된다. 황보숭이 좌중랑장으로 연주와 예주 등 중원지역의 진압군을 총괄하고, 우중랑장 주준이 형주와 양주 등 남부지역을, 그리고 노식은 북중랑장에 임명되어 장각이 이끄는 황건군의 주력이 밀집해 있던 기주 방면의 진압군을 통솔했다. 그는 병력면에서 크게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연전 연승을 거듭해 수만명의 적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고, 마침내 광종(廣宗)으로 패주한 장각의 군세를 포위해 공성전에 들어가는 등 위기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전장을 감찰하러 나온 환관 좌풍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모함을 받고 파직당한다.[6] 이 때가 184년 6월의 일로 삼국지연의에서는 장비가 수레에 실려가는 노식을 보고 분노해 병사들을 모조리 죽이고 그를 구해내려 했지만 유비의 만류로 그만두는 장면이 나온다.
파직된 노식의 후임이 바로 동탁이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의 안하무인의 성품 때문에 많은 병사들이 노식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이 무렵 중원과 형초 일대에 운집해 있던 황건적의 별동부대들도 황보숭과 주준에게 패하면서 진압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드는 형국이었지만, 동탁이 황건적의 역공에 패하면서 이에 숨통이 트인 황건적 때문에 분위기가 숭숭해졌다. 그러자 조정은 재차 동탁을 경질하고 중원 지역의 진압을 완료한 황보숭을 다시 후임으로 부임시켰다. 집권후 황보숭은 기주의 황건군을 철저히 분쇄시켰고 진압이 완료된 후, 자기 공을 모두 노식에게 돌렸기에 노식은 사면되어 상서로 복직되었다.
영제가 죽고 하진이 정권을 잡아 십상시와 대립할 때 원소의 계책에 따라 동탁 등을 불러들여 태후를 압박하려 하자, 동탁의 됨됨이가 포악하다며 이를 반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십상시의 역공에 하진이 살해되고 연이은 원소의 반격으로 궁궐이 혼란에 빠지자, 장양은 소제와 하태후 그리고 진류왕 등을 이끌고 탈출을 시도했다. 이때 노식도 싸울준비를 갖춘채 원소측에 합류해 있었는데, 십상시의 일원인 단규가 하태후를 데리고 나가는 것을 목격하고 창을 쥔 채 단규를 노려보며 소리치자, 그 기세에 눌린 단규가 태후를 놔두고 달아났다고 한다.
하지만 태후와 별도로 소제와 진류왕은 십상시에게 이끌려 궁궐을 탈출했고, 이들의 신변을 동탁이 확보하면서 동탁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정권을 잡은 동탁이 소제를 폐하고 진류왕을 옹립하려 하자 감히 나서서 반대하는 자가 없었지만, 노식이 면전에서 크게 반발하며 동탁을 비난했기에 동탁이 그를 죽이려 했으나, 채옹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다만 노식 역시 화를 피하기 위해 병을 핑계로 벼슬을 버리고 낙양에서 도망쳤으며, 이에 동탁이 추격병을 보냈지만 사로잡지 못한다.
이러한 일들 이후 그는 무슨 이유인지 고향인 탁군이 아니라 더 북쪽인 상곡군 일대에서 은거하고 있었는데, 이후 기주목이 된 원소가 그를 군사로 초빙하자 이에 응했으나 192년에 병으로 사망했다. 원소가 기주목을 양도받은 때가 191년 하순의 일이기 때문에 실제로 원소 밑에 있던 기간은 몇개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들에게 유언으로 장례는 산에서 검소하게 치르고, 관을 짜지 말고 베로 시신을 감싸기만 하라고 일렀다.
207년, 조조가 원상을 쫓아 오환을 토벌하러 진군하던 중에 노식의 묘 앞을 지나가자 묘를 깨끗이 청소하고 예를 갖추었을 정도로, 당대 사람들에게 깊은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아들만 넷을 두었었는데, 장남과 차남, 삼남은 이름이 분명하지 않으며, 그 중 둘은 원소와 공손찬 간의 전쟁 때 휘말려 죽었다고만 알려져 있고, 나머지 하나는 불명. 사남인 노육은 노식이 죽을 때 불과 10살이었던 늦둥이로 이후 위 조정에 출사해 조방의 대에 이르기까지 벼슬을 했고, 위명제 조예의 명을 받아 구품중정제의 인재 선발 방식을 정비하기도 했다. 이후 노식의 자손은 이후 남북조시대와 수당시대까지 이어지는 명족인 범양 노씨가 된다. 범양 노씨는 시조를 춘추시대 제나라 공족인 고혜(高傒)로 잡지만, 실제로 혈통이 검증되어 올라가는 건 노식까지고 그 전의 세계는 불명이다.
3. 학자로서의 면모
학자로서의 노식은 동문인 정현과 함께 후한 말을 대표하는 대학자로, 마융을 사사했다. 마융의 수업방식은 대단히 독특했는데, 수업 중에 미녀들을 시켜 주변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오로지 노식만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아 스승에게서 높이 평가받았다고 한다. 단, 연의에서는 노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동문인 정현의 이야기로 바뀌었다.유비와 공손찬의 스승으로도 유명하기에, 황건적을 무찌르는 유비의 이야기에서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다.
또한 그의 저서인 《상서장구(尙書章句)》나 《삼례해고(三禮解詁)》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유학자로서 《예기》를 비롯한 유교 경전에 주석을 많이 달았기에, 유학사에서도 나름의 비중이 있는 인물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동양 고전을 읽다보면 노식이란 이름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스승인 마융이나 동문인 정현에 비해서는 언급이 별로 없다. 그럴 만도 한 게 순수 학자에 가까운 게 마융, 정현이고 노식은 관료에 더 가까운 인물이다.
4. 미디어 믹스
자세한 내용은 노식/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
[1]
늦어도 172년 이전에 박사에 임용되었다.
[2]
그 당시 1척은 23.7cm, 1촌은 2.37cm(1척의 1/10) 환산하면 194.34cm다.
[3]
이 키와 비슷한 사람은 의외로 8척 3촌으로 기록된
정욱. 다만 이 시대에는 사람을 세워놓고 자로 정확히 재는 시스템이 아니었다. 그냥 대충 '제법 크다 > 7척 5촌은 하겠네?' '엄청 크다 > 8척쯤 되겠구만?' 이런 식이었다. 따라서 실제 정확한 신장은 알 수가 없고, 그 당시에는 평균을 우습게 넘기는 어마어마한 거구였을 거라는 것 정도만 추정할 수 있다. 이 둘은 정사에 신장이 언급된 사람들 중 1, 2순위니, 간단히 말해 당대 사람들 중 톱을 다툴 정도의 장신이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다른 장신들은 8척이라 기록된 조운, 제갈량 등이 있다.
[4]
168년 ~ 172년
[5]
이때 유비와
공손찬을 가르쳤다. 참고로 유비는 15살때에 들어서 노식의 문하에 들어갔다.
[6]
사실 황건적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는 것을 기다리다가 일망타진하려 했으나, 최후의 공격을 미적거리던 것을 본 좌풍이 그를 놓치지 않고 모함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