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보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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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비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 봉화 북지리 석조반가상 | 양산 미타암 석조아미타여래입상 |
1. 개요
奉化 北枝里 石造半跏像.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북지리에서 출토된 7세기 경 신라시대의 불상. 현재 경북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대한민국 보물 제997호로 지정되어 있다.2. 내용
삼국시대 말기 또는 통일신라 초기에 만들어진 한국의 반가사유상으로, 원래는 아담한 목조 법당에 멀쩡히 봉안되어 있었는데, 조선 후기에 이르러 어떠한 사람의 손에 의하여 파괴된 사실이 발굴 조사에서 밝혀졌다. 그로 인해 현재 불상의 상반신이 깨져 없어졌고 다리 부분도 일부 파손되어 있다. 파괴되기 전 원본의 경우 그 크기가 약 4m에 가까울 것으로 보이며, 현존하는 반가사유상 중에서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작품으로 등록되었다. 단순히 구리나 쇠로 금형을 뜬 것이 아니라 석조를 일일이 손으로 깎아 만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부분의 예술성이 대단하여 당시 신라의 석조 기술이 세계적으로도 매우 높은 수준이었음을 보여준다.
이 반가상은 양식면에서 국보로 지정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거의 흡사하므로, 차후 상반신 복원에 중요한 단서가 된다. 정교한 조각기법으로 제작된 보기 드문 수작(秀作)으로, 하체에 표현된 법의(法衣)는 매우 얇아서 두 다리의 윤곽선이 그대로 드러나며, 오른쪽 다리 밑에서 3단으로 형성된 옷주름이 유려하게 흐르며, 그 선들이 선명하게 도드라져 있어 생동감을 준다.
이와 거의 비슷한 형태를 한 경주 송화산 석조반가사유상이 경주시 서쪽의 송화산 기슭에 위치한 김유신의 재실(齋室) 금산재(金山齋)에서 발견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또한 이 불상이 있던 곳 바로 옆에서 발견된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이 현재 대한민국 국보 제201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으로부터 1,300여년 전에 신라에서 만들어진 거대 반가사유상으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유물이다.
3. 외부 링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봉화 북지리 석조반가상
- 두산백과 : 봉화 북지리 석조반가상
- 답사여행의 길잡이 10 - 경북북부 : 북지리 출토 석조반가상
- 한국어 위키백과 : 봉화 북지리 석조반가상
4. 보물 제997호
북지리의 마애불좌상 옆에 있던 것을 1966년 경북대학교로 옮겨다 놓은 것이다. 높이 1.6m 가량에 상반신은 깨져 없어지고, 하반신과 다른 돌로 만든 둥근 연꽃무늬 발받침대만이 남아 있지만, 우수한 조각기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상반신은 옷을 벗은 듯 하고 하체에 표현된 옷은 매우 얇다. 왼쪽 무릎 위에 올려 놓은 오른쪽 다리는 매우 크고 무릎을 높이 솟게 하여 강조하고 있다. 올려 놓은 다리 밑에는 3단으로 옷주름이 부드럽게 흐르는데 그 선이 분명하다. 이들 옆에는 커다란 사각형의 고리와 화려한 구슬 장식이 있다. 불상의 뒷면은 옷주름만 단순하게 표현하고 있어 앞면을 위주로 조각했음을 알 수 있다. 발받침대는 약 70cm의 원반형으로 아래로 향한 연꽃이 7잎 새겨져 있다.
이 반가상은 양식면에서 국보 제83호 금동보살반가상과 비교될 수 있으며, 왼손의 위치, 오른쪽 무릎의 팽창, 사실적인 옷주름, 화려한 구슬 장식 등에서 뛰어난 조각기법을 나타낸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당당하며 볼륨이 강조된 독특하고도 사실적인 표현수법을 보여주는 7세기 중엽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상반신은 옷을 벗은 듯 하고 하체에 표현된 옷은 매우 얇다. 왼쪽 무릎 위에 올려 놓은 오른쪽 다리는 매우 크고 무릎을 높이 솟게 하여 강조하고 있다. 올려 놓은 다리 밑에는 3단으로 옷주름이 부드럽게 흐르는데 그 선이 분명하다. 이들 옆에는 커다란 사각형의 고리와 화려한 구슬 장식이 있다. 불상의 뒷면은 옷주름만 단순하게 표현하고 있어 앞면을 위주로 조각했음을 알 수 있다. 발받침대는 약 70cm의 원반형으로 아래로 향한 연꽃이 7잎 새겨져 있다.
이 반가상은 양식면에서 국보 제83호 금동보살반가상과 비교될 수 있으며, 왼손의 위치, 오른쪽 무릎의 팽창, 사실적인 옷주름, 화려한 구슬 장식 등에서 뛰어난 조각기법을 나타낸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당당하며 볼륨이 강조된 독특하고도 사실적인 표현수법을 보여주는 7세기 중엽의 작품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