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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0 00:05:23

박연차 게이트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경과3. 유죄가 확정된 인물들4.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5. 재수사?6. 기타7. 둘러보기

1. 개요

2006년 농협 세종증권[1]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정관계 로비가 있었다는 의혹과 이와 연결된 주가조작 사건과 관련해 검찰이 수사를 벌이던 도중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정치인 뇌물수수 혐의가 밝혀지면서 일어난 정치 게이트. 간단하게 '박연차 게이트' 또는 '박연차 정관계 로비 사건'으로 불린다.

당시 세종캐피탈 홍기옥 대표는 자회사인 세종증권을 농협에게 인수되게 하기 위해 정화삼 형제를 통해 노무현의 형인 노건평, 태광실업 회장 박연차 등을 거쳐 정대근 농협 중앙회 회장에게 2004년부터 2006년에 걸쳐 로비자금을 전달하고 세종증권을 매각했다. 또 박연차는 이때 발생한 세종증권의 차익으로 농협의 자회사 휴켐스를 헐값에 매입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정관계 인사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로비자금을 살포했는데 2008년 국세청의 태광실업 세무조사를 시작으로 모든 의혹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

검찰이 계속해서 수사한 결과 박연차는 사람 가릴 것 없이 금품을 정계 인사에게 살포했고 이에 친노 인사들이 대거 적발돼 구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정상문이 박연차에게 돈을 받아 노무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에게 500만불(한화 약 57억원)을 전달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재임 중에 부인 권양숙이 500만불(한화 약 57억원)을 받은 것을 남편 노무현이 알았는지 박연차는 노무현과 말을 맞추고 500만불을 전달했다고 자백하였는데 실제로 노무현이 박연차와 말을 맞추고 사실을 숨기려 했는지에 대한 뇌물 수수 수사를 검찰이 진행했고 국세청 검찰의 본격적인 수사 끝에 노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공소권 없음을 이유로 그에 대한 수사는 종결되었다.[2]

노무현 사후 여론이 급격히 반전되어 '고인과 관련된 수사를 하는 것이 도의적으로 옳은 것이냐'는 여론이 들끓자 검찰은 여론을 수렴해 수사를 급히 마무리하여 박연차로부터 금품을 받은 혐의를 받던 수많은 정관계 인사들은 건드리지도 못하고 참여정부의 핵심 비리 인사 30여 명이 대거 구속기소되는 것을 끝으로 수사는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다.

2. 경과

박연차 게이트의 수사가 시작된 시발점은 박연차가 특경법[3]을 위반한 사실을 검찰이 인지하면서부터였다. 박연차가 시가에 비해 매우 저가에 사업양수를 했다는 증거[4]가 드러나면서 박연차를 구속하고 저가양수를 할 수 있었던 이유를 조사하다가 노무현 일가를 포함한 다수의 유력 정치인들에게 로비를 했다는 진술을 확보하면서 노무현 역시 수사 대상에 포함된 것이다.
파일:노무현 검찰 출두.jpg
2009년 4월 30일 검찰에 출두한 노무현 전 대통령[5]
의혹이 친노 세력을 주축으로 정치권에까지 번지면서 사건의 스케일이 커지게 되었다. 수사 과정에서 검찰은 노무현의 주변인들을 소환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친형 노건평을 비롯해 서갑원, 이광재, 강금원, 권양숙 등이 줄줄이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고 마침내 2009년 4월 30일 노무현 본인이 검찰에 출두해 조사를 받음으로써 헌정 사상 세 번째로 검찰 수사를 받은 전직 대통령[6]이 되었다.

노무현 및 변호인 측은 노무현 본인의 결백함을 주장한 반면 검찰은 박연차의 몇 차례에 걸친 진술 및 여러 증거들을 바탕으로 노무현 역시 금품을 요구한 사건에 연관성이 있다고 보고 포괄적 뇌물수수 혐의를 적용하려고 준비했다. 노 전 대통령 측은 검찰 측이 노무현의 피의사실에 적용하는 법리 근거가 빈약하다고 비판했다.

노무현에 대한 수사와 관련해 노무현의 변호인이었던 문재인은 "조사가 진행될수록 검찰에서 혐의를 입증할 만한 아무런 물증이 없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단서는 단지 박연차 회장 본인의 진술뿐이었다."며 증거가 박연차의 진술밖에 없었다는 점을 강조했는데 이에 대해 수사를 담당한 이인규 당시 대검 중앙수사부장은 정면 반박했다. 관련 기사 검찰은 수사를 통해 노무현 부부가 박연차에게 100만 달러를 직접 요구했다[7]는 일관된 진술과 함께 박연차가 청와대에 출입했다는 기록과 달러 환전 기록[8]까지 모두 확보한 상태라고 주장했다.

한편 문재인 변호사는 "그의 딸들도 외환거래법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었고, 태광실업 역시도 정부의 압력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거라고, 노무현 대통령이 말했다"고 회고했다.[9]

당시 수사 총책임을 맡았던 이인규[10] 전 대검 중수부장은 이 수사와 관련해 국정원과 심한 갈등을 겪었다고 말했고 심지어 멱살잡이까지 했다고 한다. 또 그는 노무현이 권양숙이 피아제 시계 두 개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진술을 하지 않았고 그저 바깥에 버렸다고만 진술했다고 말하였다.[11] 이런 정보들은 국가정보원에서 고의적으로 흘린 것이라고 말했다. 시종일관 여론전에 골몰하던 국정원에 대해 검찰 내부에서 반발이 심하게 일어났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당시 '시계 주우러 논두렁 가자'는 유행어까지 나왔다.[12]

이는 큰 논란이 되었고 당시 국정원 직원들이 논두렁 시계 언론 플레이를 부탁한 당사자로 밝혀졌다. 이 사건은 오랫동안 묻혔다가 2017년 10월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가 SBS의 ‘논두렁 보도’ 직전 하금열 당시 사장과 국정원 직원 4명이 접촉해 노무현 수사 보도를 적극적으로 요청했다고 발표하면서 알려졌다. #, #

결국 2009년 5월 23일 아침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후 '공소권 없음'을 이유로 그에 관한 수사가 종결되었다. 노무현이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노무현 본인도 권양숙과 함께 직접 박연차에게 금품을 요구했는지(=검찰 측 주장), 아니면 노무현 본인은 금품 요구 및 배임수재와 연관이 없는지(=노무현 측 주장) 둘 중 어느 쪽이 사실인지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전혀 알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했듯이 당사자가 수사 중 사망함에 따라 공소권 없음으로 수사가 종결되면서 법원에서 사실관계와 유무죄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제19대 대통령 선거 후보 토론회에서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는 대검 중수부 수사기록을 근거로 노무현이 직접 뇌물을 받았다고 주장했고 당시 검찰조사에 변호인 자격으로 전해철 변호사와 함께 입회했던 문재인 당시 후보는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결론만 말하자면 지금도 정확히 "노무현이 직접 뇌물을 요구해서 받았다, 안 받았다"고 단정지어서 말할 수는 없다. 여기서 공소권 없음이란 당사자의 사망으로 '소송 제기 요건이 결여됨'을 의미하는데 기소 자체가 불가능해져 법원의 재판과 판결도 이뤄지지 않았으므로 무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된다. 판결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노무현은 '법적으로는' 무죄가 되었고 앞으로도 그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표현처럼 말 그대로 진실은 저 너머에가 되어 버린 셈.

실제로 검찰 측에서 수사결과로 발표한 부분인 부인 권양숙이 금품을 요구했다고 주장되는 부분에 대해서 권양숙은 어떤 판결도 받지 않았으며 연철호와 함께 박연차로부터 500만 달러를 수수해 사적으로 사용하였다고 검찰이 주장, 발표한 노건호 역시 아무런 판결을 받지 않았다. 포괄적 뇌물죄, 뇌물죄의 적용은 오직 최고위직 관료 그 당사자에게만 해당되기 때문에 노무현밖에 해당 사항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노무현 일가족 중 처벌을 받은 사람은 노정연 외국환거래법위반 사건으로 딸 노정연 한 사람뿐이며 그것도 40만 달러 +13억 원[13] 불법 환치기에 대해 외국환거래법 위반으로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은 것이다. 노무현의 딸 노정연에게 미국 주택 구입 자금으로 박연차로부터 전달된 40만 달러와 권양숙으로 부터 전달된 13억 원과 연관된 혐의이다. 외환거래법은 2015년에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논란에서 혐의 선수들이 조사를 받은 근거 법률이다. 하나 아이러니한 게 이때 노정연의 위법 혐의를 조사한 대검찰청 중수부 검사가 바로 윤석열이었다. 그는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이후 서울중앙지검 검사장에 임명되어 각종 ' 적폐' 수사를 지휘하다가 2019년 검찰총장이 되어 조국 전 장관 수사 건으로 다시 정권과 충돌을 겪은 끝에 검찰총장에서 물러나 정치에 뛰어들었고 박빙의 투표 끝에 제20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극적인 길을 걸었다

노무현 일가족을 제외하면 형인 노건평 역시 박연차로부터 수십억 원을 챙긴 알선수재 혐의가 확정 판결이 나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지만 짧은 기간 복역하고 2010년에 광복절 특별 사면으로 석방됐다.

2009년 6월 12일 검찰은 '박연차 게이트'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일부 관련자를 기소하는 것을 끝으로 수사를 마무리했다. 관련 기사 수사발표문 전문

박연차는 이 사건으로 징역 2년 6개월과 벌금 291억 원을 선고받았다. 서울중앙지방법원 2009. 9. 16. 선고 2008고합1383,1438(병합),1440(병합),1445(병합),1447(병합),2009고합455(병합),689(병합) 판결, 서울고등법원 2010. 1. 8. 선고 2009노2487 판결, 대법원 2011. 1. 27. 선고 2010도1191 판결, 서울고등법원 2011. 6. 24. 선고 2011노338 판결, 대법원 2011. 10. 13. 선고 2011도8478 판결, 서울고등법원 2011.12.22. 2011노2920

3. 유죄가 확정된 인물들

박연차 게이트 관련으로는 기소된 21명 중 19명이 법원에서 최종 유죄를 선고받았다. #

이상철 전 서울시 정무부시장은 2만 달러를 수수한 혐의로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무죄로 뒤집혀 3심에서 확정되었다. 김정권 한나라당 의원도 2천만원을 수수한 혐의을 받았으나 1심부터 쭉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외 인사들은 이렇다.

4.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노무현이 수사 중 자살하면서 박연차 게이트는 노 전 대통령의 자살을 빼놓고는 말하기 힘든 사건이 되어 버렸다. 전직 대통령의 자살이라는 비극적인 일에 자살 당시 여론은 요동쳤다.

당시 코리아 리서치 여론조사에 따르면 노무현이 스스로 죽음을 택한 건 본인의 책임이 크다 36.6%, 외부의 책임이 더 크다 60.8%였다. 누구의 책임이 가장 크냐고 묻자 이명박 전 대통령을 지목한 답이 39%, 검찰 27%, 언론 21%였다.(중복 선택 시 검찰 64%, 이명박 전 대통령 55%, 언론 45%)

노무현에 대한 검찰수사는 정치보복의 성격이 강하다는 의견이 62.5%로, 정당한 수사로 본다는 의견 32.2%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다. 검찰 수사 자체도 공정하지 않게 이뤄졌다는 의견도 58.3%에 달했고 공정하지 않다고 보는 이유로는 가족과 측근에 대한 과도한 수사 확대, 확인되지 않은 혐의로 망신주기를 가장 많이 꼽았다. 관련 기사

노무현 망신주기를 통해 그와 함께한 민주당계 정당 세력에 오명을 뒤집어 씌울 목적의 전형적인 정치적인 표적수사였다는 의혹의 시작은 박연차 게이트의 출발점인 박연차 태광실업 세무조사에서부터였다.

안원구 전 서울국세청 세원국장은 2009년부터 국세청장 한상률이 노무현을 잡기 위해 태광실업에 대한 세무조사가 필요하며 태광실업의 탈세를 밝히려면 태광의 공장이 있는 베트남 세무당국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등 세무조사에 적극 개입했다고 주장했다.

2011년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의 국세청 국정감사에서 안민석 민주통합당 의원이 공개한 2010년 3월 한 전 청장과 안원구 국장의 검찰 대질심문 영상에서는 전 청장이 태광실업의 베트남 현지법인에 대한 계좌추적조사를 위해 베트남 국세청장과 친분이 있는 안 전 국장을 세무조사에 투입하려 했다는 진술을 하는 장면이 드러나 안 전국장의 주장이 사실임이 드러났다. 관련 기사. 게다가 그는 세무조사 결과를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직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관련 기사

이를 종합하여 볼 때 세무조사 자체의 법리적 정당성을 따지기를 떠나서 국세청장 한상률이 이 건을 정치적인 사안으로 이용했으며 대통령에게 직보를 하여 교감을 이루지 않았는가 하는 충분한 의혹의 근거들을 보여준다. 게다가 검찰은 대질심문에서 사실을 파악하고도 이를 묵인하였다는 지탄을 받았다.

또 당시 국세청은 태광실업을 세무조사하기 전 노무현의 단골 삼계탕집인 토속촌,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은 우리들병원, 자주 다니던 제피로스 골프장에 대한 세무조사를 했다고 한다. 이는 어떻게 봐도 국세청의 노무현에 대한 표적수사로밖에 볼 수 없다.

처음 1기 검찰 수사진은 대통령의 퇴임 이후 박연차와의 거래(15억 차용증)는 사적 거래라 수사할 내용이 없다고 보고 종결지었다. 그러나 이후 박연차의 노무현 일가에 대한 증뢰 혐의가 포착되어 이인규, 홍만표, 우병우 등이 참여한 2기 검찰 수사진이 다시 꾸려져 포괄적 뇌물죄를 적용해 대통령의 측근과 가족을 수사했다.

포괄적 뇌물죄는 직접 돈을 받았거나 측근이나 가족이 돈을 받았다면 그 사실을 재임 중 알았다는 점을 입증해야 하며 당사자가 이를 재임 이후에 알았다면 처벌할 수 없으므로 검찰은 포괄적 뇌물죄를 쉽사리 적용하지 못했다. 박연차 회장의 진술 외에는 똑 떨어지는 물증이 없었던 것. 관련 기사

물론 검찰은 박연차와 태광실업 사장 정승영의 청와대 출입 기록, 달러 환전 기록 등을 확보했다. 박연차는 100만 달러를 전달한 뒤 노무현에게서 전화가 왔고 박연차 자신은 그 전화를 '고맙다는 취지로 받아들였다'고 진술했지만 해당 통화 기록은 보존기간(1년) 경과로 인해 이미 폐기돼 확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거기에 노건호와 연철호가 받은 500만 달러의 수수 경위에 대한 박연차와 노무현의 진술이 엇갈려 사실관계 확인을 위해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했다. #

이때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었던 검찰이 언론에 피의 사실을 흘리며 언론플레이를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것은 헌법 27조 5항 무죄추정의 원칙과 형법 126조 피의사실공표죄의 정신을 위배한 것이 된다.

이후 언론에서 이인규 당시 중수부장은 언론플레이는 국정원(당시 원장은 원세훈)이 주도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관련 기사

검찰수사의 공정성을 강변하려는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른바 '논두렁 시계 논란', 참고인 조사 시 언론의 '헬기 생중계' 등으로 대표되는 국정원발 언론플레이는 검찰의 피의사실 공표와 함께 망신주기에 상승효과를 주어 노무현에게 상당한 심리적 압박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박연차 게이트가 수많은 정관계 인사들에 무차별적 금품 살포 혐의에서 시작되었으나 오로지 표적이 노무현과 그 측근들을 집중적으로 향한 정황도 문제가 되었다.

야권 인사들에 대한 수사 때 사건 관련자에게 면책을 대가로 허위진술을 유도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관련 기사

한편 당시 여권 실세의 세무조사 무마 의혹은 제대로 건드리지도 못했다. 이명박의 측근인 추부길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은 작년 9월께 박연차로부터 국세청의 세무조사를 중단시켜 달라는 청탁과 함께 현금 1억∼2억 원을 건네받은 혐의를 받았으나 ‘실패한 로비’라며 수사가 종결되어 논란이 되었다. 관련 기사

같은 시기 박연차를 수사하면서 엮인 이명박의 최측근 천신일 세중회장에 대한 수사는 결국 구속영장이 기각되어 부실수사가 아니냐는 비난을 샀다. 관련 기사

박연차의 여러 금품 증여에 관하여 모두 동일 원칙에 의해 수사 대상이 되었다면 표적수사라고 불릴 수 없었을 것이다.

위의 이유들로 노무현의 입장을 옹호하고 그의 결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당시 박연차 게이트 수사를 표적수사로 받아들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자신을 방어하던 노무현 본인이 망신주기용 표적수사라고 받아들이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쉽지 않다.

그가 수사에 앞서 지지자들에게 ‘자신을 버리라’고 한 것은 혹여 유죄가 될 경우 민주당계 정당 세력이 자신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붕괴될 것에 대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방증한다.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 측근은 물론 다른 이들의 삶과 행적까지 한꺼번에 싸잡아서 부정당할 거라는 심리적 압박을 느꼈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5. 재수사?

2017년 2월 박사모에서 640만 달러 수수 건으로 노무현 일가를 고발했으나 7개월쯤 뒤 각하됐고 그해 10월에는 자유한국당에서 고발장을 냈는데 이때는 서울중앙지검 형사6부에 사건이 배당되어 재수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수사 초기 단계인 고발인 소환조사가 사건이 배당된 지 무려 15개월 후인 2019년 1월이 돼서야 이루어질 정도로 진전은 거의 없었다. 2019년 1월 3일 되어서야 서울중앙지검에서 자유한국당 주광덕 의원을 소환해 고발인 조사를 진행했지만 이후 피고발인 조사는 또 다시 무기한 연기됐다. 나중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서울중앙지검 수사팀에서 아예 대검찰청 캐비넷의 수사 문건조차 이관받지 않았다고 한다. 수사 관계자는 아예 사건에 대한 언급을 일절 거부했다. #

2020년 1월 31일에 사건의 중요 인물 중 1명인 박연차가 사망하면서 사실상 재수사도 흐지부지되었다.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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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농협이 인수하면서 NH농협증권으로 사명을 변경했고 2015년에 우리투자증권과 합병하면서 NH투자증권으로 재출범했다. [2] 다만 노무현이 박연차의 증언에 대한 신빙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움직였단 점, 권양숙이 매 수사마다 증언을 추가하면서 법적 대응을 힘들게 만든 점을 보면 적어도 법적 분쟁 동안 상호간에 의견을 맞추진 못한 것으로 보인다. [3]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4] 휴켐스를 본인의 입찰가보다 322억을 깎아서 샀다. [5] 변호인이었던 문재인 전해철, 경호원이었던 주영훈, 비서관이었던 김경수의 모습이 보인다. [6] 노태우, 전두환, 노무현 [7] 수사 과정에서 쟁점이 된 부분이다. 노 전 대통령 측은 권양숙이 박연차에게 달러를 요구했다고 주장한 반면 검찰은 노무현 부부가 직접 같이 요구했다고 진술한 내용을 바탕으로 수사했다. [8] 1인당 1만 달러 이상을 환전할 시 금융정보분석원 시스템에 신상명세가 전송되는 구조였기 때문에 본인 회사의 부하직원 130명을 동원하여 원화를 달러로 환전 후 권양숙에게 전달했다는 주장이다. [9] 사실 외환거래법 위반은 딸 노정연이 했다. 40만 불+13억 원 환치기.... [10] 박연차 게이트 수사로 인해 노 전 대통령이 사망하자 이에 대한 책임으로 검찰에서 나와야 했다. 사건 이후 모 법무법인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2011년 한겨레의 보도에 의하면 사석에서 '평생 검사로 살고 싶었는데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됐다. 저승에 가면 노무현에게 빚을 갚으라고 따질 것이다.' 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2017년에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후 '자신이 입을 열면 다치는 사람이 많다', '시계 사건은 국정원이 시킨 거다.' 라는 말을 쏟아내다가 갑자기 로펌까지 그만두고 미국으로 튀었다.(...) 자세한 내용은 이인규 문서로. [11] 노무현에게 직접 들었다는 유시민의 증언에 따르면 검찰 조사 직전에 권양숙한테 이 시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화를 내면서 망치로 깨부쉈다고 한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71117500014 [12] 심지어 한겨레는 아예 봉하마을로 가서 논두렁을 헤집기도 했다. [13] 이 13억 원에 대해서 권양숙은 돈의 출처를 밝힐 수 없다고 하면서 함구했다. [14] 윤석열 정부의 첫 외교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5] 정말 수수했는지 그리고 노무현 본인이 수뢰했는지의 여부나 일가족이 뇌물을 수수할 때 노무현 본인이 알고 있었는가 모르고 있었는가(선의•악의의 판단)는 정확히 단정지어 말할 수 없다. 노무현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던 중에 노무현 본인이 자살하여 공소권없음 처분으로 조사가 끝났기 때문이다. 40만 달러는 딸 노정연의 미국 부동산 구입 자금으로, 100만 달러는 부인 권양숙에게, 500만 달러는 조카사위 연철호에게 간 것이 수사 결과다. 사실 조카사위가 총액 640만 달러 중 80퍼센트 정도를 차지한 것에 대해 의구심을 품을 수도 있는데 실질적으로 아들 노건호가 받아서 사용한 것이다. 투자 목적으로 페이퍼 컴퍼니 법인을 이용해 검은 돈에 대한 자금 출처 추적을 방해하고 세법상 부당행위로 조세를 회피하기 위해 성씨가 다른 친인척을 끌어들이는 것은 오래된 불법수단이라는 것이 검찰 측 주장이다. [16] 노무현의 경우 박연차에게서 받은 돈 중 일부(15억 원)는 차용증을 쓰고 대출받은 것으로 확인됐고 퇴임 후의 개인적인 돈거래라 사법처리 대상도 아니었지만 상환기간을 넘기고도 갚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1, #2 그리고 무엇보다 문제의 금액은 15억이 아닌 다른 데 있었다. [17] 이명박이 국회의원 당선 무효 직전 사퇴한 뒤 워싱턴으로 넘어가 생활할 당시 라인. [18] 애초에 포괄적 뇌물죄 자체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에서 수수한 비자금에 해당하는 반대급부를 일일이 입증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검찰에서 법전에도 없는 개념을 만들어 주장하였고 이것이 대법원에 의해 인정되어 판례로 남게 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