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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미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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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마실리 부족과 마사에실리 부족의 경쟁2.2. 누미디아의 번영과 유구르타 전쟁2.3. 분열과 멸망
3. 역대 군주4. 기타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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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국가의 틀을 갖춘 기원전 202년부터 기원전 46년까지 현재의 알제리 주요부와 튀니지 서부에 존속했던 베르베르인의 왕국이다. 수도는 키르타(현재의 콩스탕틴)였다.

2. 역사

2.1. 마실리 부족과 마사에실리 부족의 경쟁

누미디아라는 이름은 기원전 3세기경의 역사학자들의 기록에서부터 등장하는데, 카르타고 서부 지역에 위치한 국가로 기록되었다. 누미디아는 크게 두 부족 파벌로 구성된 국가로, 동부 지역의 마실리 부족과 서부 지역의 마사에실리 부족이 각 파벌의 중심 세력이었다. 고대 기록에 따르면, 마실리 부족은 기원전 274년에 등극한 젤라센 왕이 누미디아 동부에 거주하는 부족들을 통합하면서 결성되었다고 한다. 마사에실리 부족에 대해서는 기록이 부실해 언제 결성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동부 누미디아의 부족연합의 성장에 자극받은 서부 누미디아 부족들이 자체적으로 연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젤라센의 아들 가이아[1]는 히포 레기우스 시를 점령하고 수도로 삼았다. 뒤이어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카르타고 국경 마을인 크로메리(Kromeri)에서 서쪽으로 스킥다까지 이어지는 영역을 확보했다. 그러다 제1차 포에니 전쟁 시기에 카르타고와 평화 협약을 맺고 장남이자 후계자인 마시니사를 카르타고에 인질로 보냈으며, 로마에 대항하는 카르타고를 위해 누미디아 기병을 지원했다. 이렇게 카르타고와 화해한 그는 서쪽의 라이벌인 마사에실리 족의 왕 시팍스[2]에 맞서 전력을 기울였다. 카르타고의 지원에 힘입어 시팍스를 상대로 연이어 승리해 스킥다에서 오늘날의 물루야까지 확장했다.

가이아는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에도 카르타고를 지원했으며, 마시니사 왕자가 히스파니아에서 로마군과 맞서 싸우는 카르타고군에 종군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러던 기원전 213년, 이베리아 반도에서 우세한 형국을 점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 형제는 시팍스와 동맹을 맺어 카르타고를 견제하기로 했다. 그들은 백인대장 퀸투스 스테테리우스를 그에게 보내 누미디아 보병대를 로마 보병에 맞춰 훈련시키도록 했다. 시팍스는 로마식 훈련을 받아 강해진 군대를 이끌고 마실리 부족을 공격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에 그가 구원을 요청하자, 카르타고 원로원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스키피오 형제를 상대로 고전하던 하스드루발 바르카에게 시팍스를 물리치라고 명령했다. 하스드루발은 일부 병력을 이끌고 아프리카로 건너간 뒤, 마시니사의 협조하에 시팍스를 상대로 승리했고, 마시니사가 이끄는 3천 명의 누미디아 기병과 함께 이베리아 반도로 귀환했다.

기원전 207년 가이아가 사망한 뒤, 동생 오잘케스가 왕위에 올랐지만 1년만에 고령으로 사망했다. 이후 오잘케스의 아들 카푸사가 왕위에 올랐지만, 가이아의 아들 마시니사가 불복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카르타고군에 종군하면서 수많은 활약을 했던 마시니사를 존경했던 병사들은 마시니사를 대거 추종했고, 결국 카푸사는 야전에서 패배해 전사했다. 카푸사의 추종자들은 그의 동생 라쿠마제스를 새 군주로 세웠지만, 그 역시 얼마 안가 마시니사에게 축출되어 시팍스에게 망명했다. 이리하여 마시니사가 마실리 부족의 왕이 되었지만, 내전의 여파로 인해 세력이 위축되었고 단합력도 현저히 떨어졌다.

한편, 히스파니아 평정을 완수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아프리카 원정을 계획했다. 그는 절친한 친구이자 부관인 가이우스 라일리우스를 마사에실리 부족의 왕 시팍스에게 보내 로마와 동맹을 맺자고 제안해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냈다. 한편 마시니사에게도 연락을 취해 자신이 상륙했을 때 그가 원군을 이끌고 합류하도록 했다. 그러나 카르타고 원로원이 마시니사와 약혼했던 소포니스바를 시팍스와 강제 결혼시킨 뒤, 시팍스는 마음을 바꿔 카르타고와 연합해 마실리 부족을 협공했다. 결국 마시니사는 영토를 모두 잃고 몇몇 부하만 대동한 채 사막에 숨어지냈다. 그러다 기원전 204년 아프리카에 상륙한 스키피오의 로마군과 합세했다.

그 후 시팍스의 마사에실리 부족과 하스드루발 기스코의 카르타고 연합군은 스키피오의 로마군을 상대로 우티카 전투 바그라다스 전투에서 맞붙었으나 전부 참패했고, 마시니사는 로마군의 지원에 힘입어 누미디아의 수도 키르타를 점령하고 시팍스를 생포했다. 그는 곧 약혼녀였던 소포니스바와 재회했고, 곧바로 결혼했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사로잡힌 시팍스로부터 자신이 로마를 배신한 것은 소포니스바가 자신을 유혹했기 때문이며, 그녀는 마시니사더러 카르타고와 손잡으라고 설득할 것이라는 경고를 접한 후 그녀에게 경계심을 품었다. 스키피오는 마시니사에게 소포니스바가 시팍스의 배신에 연루되었으니 로마로 끌고 가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며 그녀를 넘길 것을 요구했다. 마시니사는 자비를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국 자신이 그녀를 처리할 테니 말미를 달라고 요청해 승인을 받아냈다. 그 후 마시니사는 충직한 하인에게 독약과 전말을 설명하는 편지를 건넨 후 소포니스바에게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소포니스바는 하인으로부터 이를 전달받은 직후 독약을 마셨다.

소포니스바가 자살한 뒤, 스키피오는 마시니사를 누미디아의 유일한 왕으로 선포했고 로마 원로원도 이를 추인했다. 그 후 마시니사는 로마의 충실한 동맹자로서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겠다고 맹세했고, 기원전 202년 자마 전투에서 6천 명의 기병대와 4천 명의 보병대를 이끌고 스키피오와 합세해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바르카를 격파했다. 카르타고는 한니발이 패하자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고 로마와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그리하여 마시니사는 통합 누미디아 왕국의 초대 군주가 되었다.

2.2. 누미디아의 번영과 유구르타 전쟁

파일:로마 누미디아.png
마시니사 시기의 누미디아

마시니사는 누미디아를 통합한 뒤 카르타고의 앞선 농업 기술을 수용하고 상업을 권장했으며, 자신의 이미지를 반영한 동전을 주조했다. 그 결과 유목 민족의 국가였던 누미디아는 번영을 구가했다. 또한 그는 누미디아가 로마의 충실한 동맹국임을 과시하며 이를 이용해 영토를 늘렸다. 특히 그는 로마와 맺은 평화 협정에 따라 로마의 동의 없이는 전쟁을 벌일 수 없는 카르타고의 사정을 이용해 카르타고의 영역을 수시로 침략했다. 카르타고는 이에 보복할 수 없어서 로마에 호소했지만, 로마는 카르타고에 반감을 가진 반면 자신들의 충실한 동맹자인 마시니사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들의 요청을 매번 무시했다.

기원전 154년경, 마시니사는 카르타고가 확보하고 있는 영토의 1/6에 해당하는 5천 평방 마일에 달하는 영역을 탈취했다. 카르타고는 다시 로마에 누미디아의 만행을 설명하며 도와달라고 호소했지만, 로마는 또다시 무시했다. 이에 견디다 못한 카르타고는 마침내 로마와 맺은 조항을 무시하고 군사 행동을 하기로 결정하고 기원전 149년 대규모 용병대를 모집해 누미디아를 공격했다. 그러나 누미디아군은 카르타고군의 공세를 격파했다. 이 소식을 들은 로마 원로원은 즉시 무단으로 전쟁을 벌인 카르타고에게 선전포고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마시니사는 로마가 카르타고와 전쟁을 벌인 것에 격분했다고 한다. 이는 카르타고의 영역을 장기적으로 갉아먹어 종국에는 북아프리카의 패권을 확립하려던 자신의 야망이 로마의 개입으로 인해 좌절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제3차 포에니 전쟁 때 단 한 명의 병사도 파견하지 않으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다가 기원전 148년에 사망했다. 그가 사망할 즈음에 누미디아는 마우레타니아와 카르타고 사이를 가로지르는 광대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카르타고는 누미디아아에 사실상 포위되었다. 이 때가 누미디아 왕국의 최전성기였다.

마시니사는 사망하기 전에 세 아들 미킵사, 굴루사, 마스타나발에게 영토를 삼분한다는 유언을 남겼고,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를 유언 집행인으로 지정했다. 왕권 역시 세 왕자에게 분배되었다. 미킵사는 수도 키르타의 통치를 맡았고, 굴루사는 군대의 지휘권을 맡았으며, 마스타나발은 법률 집행과 봉신 부족 지도자들과의 관계를 조율하는 일을 맡았다. 하지만 굴루사와 마스타나발은 기원전 140년이 지나기 전에 잇따라 사망했고, 이후로는 미킵사가 단독 군주로서 누미디아를 통치했다. 기원전 146년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카르타고를 파괴한 후, 루시타니아 전쟁을 치르고 있던 로마 장군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밀리우스 세르빌리아누스가 전투 코끼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를 받아들여 기원전 142년까지 코끼리 10마리와 300명의 누미디아 기병을 보냈다. 스트라본에 따르면, 그는 아프리카 경작지의 양을 늘리도록 노력했으며, 수도 키르타를 대대적으로 확장해 10,000명의 기병과 2배의 보병을 자체적으로 조달할 수 있도록 거대한 규모로 육성했다고 한다. 이 도시에는 이탈리아와 그리스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많이 거주했다.

이렇듯 누미디아의 전성기를 이끌어가던 미킵사였지만, 마스타나발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유구르타가 타고난 총명함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자 위협을 느꼈다. 그는 이 조카가 장차 자신의 두 아들 아드헤르발, 히엠프살 1세의 앞날에 위협이 되리라 여기고 경계했다. 그러던 중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누만티아 전쟁을 치르는 데 필요한 병력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자, 조카를 전쟁터로 보내 죽게 만들 작정으로 파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조치는 역효과를 야기했다. 유구르타는 아이밀리아누스 휘하에서 임무를 무척 착실하게 수행했으며, 위험을 무릅쓰고 적진에 뛰어들어 많은 공적을 쌓았고, 로마 군인들과도 적극적으로 교류했다. 아이밀리아누스는 그런 그를 무척 총애했고, 누만티아 전쟁이 끝난 뒤 그를 집으로 보내면서 미킵사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이 훌륭한 젊은이를 친척으로 둔 당신과 그의 할아버지 마시니사는 진실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미킵사는 당대 로마 최고의 군인이자 지중해 세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아이밀리아누스의 호의를 산 그를 더이상 배제할 수 없었다. 결국 기원전 121년, 왕은 계획을 변경해 그를 양자로 삼고 자녀들과 공동 상속인으로 삼았다. 기원전 118년 미킵사는 숨을 거두면서 두 아들과 유구르타에게 왕국을 분할했다. 그러나 미킵사의 두 아들과 그는 곧 불화를 일으켰다. 그가 첫 모임에서 지난 5년간 미킵사의 건강이 좋지 않고 정신이 몽롱할 때가 많았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칙령이 많았으니, 이를 무효화하자고 제안하자, 히엠프살 1세가 즉시 동의하며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
"너 같은 놈이 우리 아버지의 아들이 된 것 역시 무효화해야 한다!"

이에 반감을 품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두 공동왕을 제거할 심산이었는지, 그는 즉위 1년만에 정치 공작을 벌이기 시작했다. 기원전 117년, 그는 히엠프살을 자신의 지지자가 소유한 피르미스의 별궁으로 오도록 유인한 뒤 암살해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아드헤르발은 원로원에 이 사실을 알리고 유구르타와 전쟁을 벌였으나 크게 패하고 로마로 망명했다. 그는 원로원 회의에 출석해 유구르타가 자신들과 똑같이 왕권을 가졌는데도 불법적으로 히엠프살을 죽이고 자신을 쫓아냈다고 비난하며, 정의를 위해 유구르타를 처벌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유구르타는 누만티아 전쟁 시절 많은 로마인과 인맥을 맺어놨고, 막대한 뇌물을 의원들에게 뿌리기도 했기에, 원로원의 분위기는 유구르타 쪽으로 기울었다. 원로원이 보낸 사절단 역시 유구르타에게 매수되어 사건 보고서를 유구르타 쪽으로 유리한 방향으로 작성했다. 결국 로마 정부는 유구르타를 징벌하는 대신 왕국을 둘로 나뉘기로 했다. 더 부유하고 인구가 더 많은 누미디아 서부는 그의 손에 들어갔고, 수도 키르타가 있는 동부 일대는 아드헤르발의 것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기원전 113년 아드헤르발을 재차 공격했다. 아드헤르발은 전초전에서 패배한 뒤 키르타 시로 피신했다. 그가 키르타를 포위하자, 아드헤르발은 로마에 사절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로마에서 파견된 사절단이 중재하려 했지만, 그는 사절들이 아드헤르발과 접촉하는 걸 막았고, 그로부터 막대한 뇌물을 받아챙긴 사절단은 그냥 돌아갔다. 결국 1년간의 공성전 끝에, 로마인과 이탈리아인 상인들이 아드헤르발에게 목숨을 부지하는 대가로 항복을 제안하라고 요구했다. 아드헤르발은 어쩔 수 없이 이를 받아들여 그에게 협상을 제안했고, 그는 기꺼이 수락하겠다고 전했다. 그러나 정작 성문을 열고 나오는 아드헤르발을 체포한 뒤 잔혹하게 죽여버렸고, 키르타에 살던 로마인과 이탈리아인 상인들마저 학살했다.

키르타 학살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로마 민중은 매우 분노했다. 호민관 가이우스 멤미우스는 유구르타에게 뇌물을 받아 사태를 무마하려는 귀족들의 실상을 폭로해 이러한 여론을 더욱 키웠다. 원로원은 민중의 분노에 두려움을 느끼고 누미디아에 선전포고한 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베스티아를 사령관으로 선출했다. 이 소식을 들은 그는 재빨리 아들 옥시타스와 몇몇 사절을 로마로 보내 막대한 뇌물을 또다시 건네려 했다. 베스티아는 이 사절들을 영접하려 했지만, 원로원은 유구르타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기 전에는 어떤 사절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자국으로 돌려보냈다.

베스티아가 누미디아에 상륙하여 여러 마을과 요새를 공략하자, 그는 베스티아에게 찾아가서 30마리가 넘는 코끼리와 상당한 양의 금화를 건넸다. 이에 베스티아는 그와 평화를 이뤘다고 주장하며 로마로 귀환했다. 그러자 멤미우스는 베스티아가 유구르타에게 매수되었다고 주장하며, 법무관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를 특사로 보냈다. 그는 롱기누스 앞에서 죄책감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연기했다. 이에 롱기누스는 직접 로마로 와서 재판을 받으라고 요구했고, 그는 이를 따라 심복인 보밀카르와 함께 로마로 향했다. 재판 분위기는 유구르타에게 지극히 적대적이어서, 그가 유죄 판결을 받을 확률이 높아 보였다. 그러나 그가 발언하려는 순간, 호민관 가이우스 베비우스가 거부권을 행사했다. 시민들은 그가 유구르타에게 매수되었다는 걸 눈치채고 격렬한 야유를 퍼부었지만, 재판은 그대로 무산되었다.

한편, 마시니사의 차남 굴루사의 아들인 마시바는 유구르타를 폐위시키고 자신이 누미디아의 왕이 되어야 한다며 원로원을 설득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보밀카르에게 암살자를 보내 마시바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마시바는 암살자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암살자는 법무관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에게 체포되었다. 알비누스는 그와 보밀카르를 마시바 암살 사주 혐의로 기소했지만, 재판을 맡은 50명의 배심원들은 그에게 매수되어 무죄를 선고했다. 이에 원로원은 그에게 당장 이탈리아를 떠나라고 요구했다. 그는 로마를 떠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참으로 돈에 좌지우지되는 도시로다! 이제 돈으로 사들이는 자가 나타나면 로마는 곧 망할 것이다!"

기원전 110년,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휘하의 로마군이 유구르타를 토벌하려 시도했으나, 유구르타가 싸움에 응하지 않으면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다 집정관 선거가 다가오자, 그는 선거를 주관하기 위해 로마로 향하면서 군대를 동생 아울루스에게 맡겼다. 아울루스는 유구르타에게 뇌물을 받은 적이 있었기에 나중에 이 사실이 고발될까 걱정하다가 공적을 세워 만회해야겠다고 판단하고 유구르타가 보물을 보관해뒀던 수흘 마을을 공격했다. 그러나 유구르타의 첩자들이 사전에 이러한 적의 움직임을 간파했고, 그는 군단병들을 매수해 숲으로 유인했다. 그 후 누미디아군이 로마군을 포위했을 때, 리구리아와 트라키아 출신의 기병대가 적에게 매수되어 탈주했다. 누미디아군의 뒤이은 공세로 막심한 피해가 속출하자, 이제 싸워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아울루스는 항복했다. 유구르타는 패배한 지휘관과 병사들이 멍에 아래로 지나가게 한 뒤 2주 안에 누미디아에서 떠나라고 명령했다.

로마군이 그런 굴욕을 당하고 쫓겨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인들은 극심한 분노에 휩싸였다. 유구르타에게 뇌물을 받은 자들을 색출하기 위한 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를 통해 수많은 로마 귀족들이 유죄 판결을 받고 추방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기원전 109년 집정관에 선출된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는 아프리카에 부임한 뒤 연이은 패배와 유구르타의 뇌물 공세로 기강이 해이해질 대로 해이해진 군단병들을 혹독하게 훈련시키고 군율을 엄격하게 집행함으로써 다잡아놓은 후 공세를 개시했다. 메텔루스가 뇌물 따위는 거들떠 보지도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그는 이번만큼은 이기기 어렵다고 여기고 사절을 보내 협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메텔루스는 여기에 넘어가지 않았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메텔루스는 유구르타의 사절이 한 사람 씩 올 때마다 많은 요구를 했고, 이를 통해 인질, 무기, 코끼리, 포로, 탈영병들이 보내졌지만 모조리 제거되었다고 한다.

메텔루스는 바가 시를 공략한 뒤 유구르타가 파견한 사절을 회유하여 주군을 배신하게 했다. 이에 그는 기원전 108년 적군의 예상 진격로인 무툴 강 근처에 매복했지만, 사전에 간파한 메텔루스에 의해 완패했다. 이후 그는 소규모 병력만 꾸려서 유격전을 전개해 로마군을 괴롭혔다. 메텔루스는 이에 대응하여 누미디아를 초토화시켰지만, 이리저리 피하는 유구르타를 잡지 못했다. 그해 겨울 로마군이 안전한 후방으로 후퇴하자, 그는 바가 시민들을 회유해 로마를 배반하게 했다. 당시 바가에 주둔하던 로마군 사령관 티투스 투르필리우스 실라누스는 바가 시민들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시민들은 투르필리우스만은 석방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죽였다. 이에 부관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비롯한 여러 장수들이 투르필리우스가 내통한 게 분명하다며 처형을 촉구했고, 메텔루스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친구였던 투르필리우스를 처형했다. 나중에 투르필리우스가 결백했다는 게 밝혀지자, 그는 이때부터 마리우스를 적대했다.

한편, 유구르타의 심복이었던 보밀카르는 누미디아가 초토화된 상황을 지켜보다가 주군의 수급을 베어 로마군에 바침으로써 안전을 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메텔루스와 내통하고 신하들을 꼬드겨 쿠데타를 모의했다. 그러나 이 사실은 곧 들통났고, 유구르타는 보밀카르를 포함한 여러 신하를 처형했다. 이후 메텔루스는 유구르타가 숨은 탈라 시를 포위하여 40일간 공성전을 벌인 끝에 함락시켰지만, 이번에도 유구르타를 놓쳤다. 그는 이웃 나라인 마우레타니아 왕국으로 망명한 뒤, 보쿠스 1세에게 전 영토의 3분의 1을 줄 테니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로마는 신의가 없으며 이웃 나라를 파멸시키기 위해 안달하는 나라이니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하들 역시 그로부터 뇌물을 받아먹고 왕에게 로마와 항전할 것을 건의했다. 이에 보쿠스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군이 장악한 누미디아로 쳐들어갔다.

메텔루스는 이에 맞서려 했다가 마리우스가 집정관에 선출되어 지휘권을 이양받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분노해 인수인계도 하지 않고 로마로 돌아가버렸다. 이후 새 지휘관이 된 마리우스는 누미디아-마우레타니아 연합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인 끝에 완승을 거두었다. 보쿠스가 화의를 요청하자, 마리우스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를 사절로 보내 유구르타를 넘겨야만 합의를 이룰 수 있다고 밝혔다. 보쿠스는 며칠간 고심한 끝에 기원전 105년 유구르타에게 "로마와 어떻게 맞서 싸울 지 논의하고 싶으니 궁전에 와달라"고 요청했다. 유구르타가 이에 응해 궁전에 이르자, 마우레타니아 병사들이 달려들어 그와 측근들을 모조리 포박하여 로마군에 넘겼다. 로마 측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보쿠스에게 누미디아 서쪽 영토를 넘겨줬고, 유구르타의 동생 가우다가 나머지 영토를 다스리게 했다. 유구르타는 로마로 끌려간 뒤 개선식에서 '전리품' 취급을 받은 후 툴리아눔(Tullianum)의 지하감옥으로 보내졌다가 곧 사망했다.

2.3. 분열과 멸망

기원전 88년 가우다 왕이 사망한 뒤, 두 아들 히엠프살 2세 마스테아바르가 각각 누미디아 동부와 서부를 상속받았다. 기원전 82년, 로마의 반란군 지휘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숙청을 피해 아프리카로 도피했다. 그는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모은 뒤, 히아르바스와 손을 잡고 가우다의 아들들을 권좌에서 몰아냈다. 기원전 81년 술라가 파견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도미티우스의 반란군을 제압하고 누미디아의 정치 체계를 원상복귀했다. 히엠프살 2세는 그 덕분에 누미디아 동부의 왕으로 복귀했고, 마스테아바르의 아들 마시니사 2세도 누미디아 서부의 왕으로 선임되었다.

기원전 60년 무렵 히엠프살 2세의 뒤를 이어 누미디아 동부의 왕위에 오른 유바 1세는 과거 누미디아인 마시니사를 부패 혐의로 고발했다가 마시니사의 변호를 맡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자신의 수염을 잡아당기며 모욕하자 깊은 원한을 품었다. 여기에 옵티마테스파였다가 카이사르파로 전향한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가 기원전 50년 호민관을 맡으면서 누미디아를 로마에 편입시키자고 주장하자, 그는 이에 위협을 느끼고 쿠리오 역시 적대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하자, 그는 기꺼이 폼페이우스의 편에 섰다. 기원전 49년 8월, 카이사르는 쿠리오를 아프리카로 보내 옵티마테스파를 축출하게 했다. 쿠리오는 우티카 전투에서 아프리카 총독 푸블리우스 아티우스 바루스를 격파했다. 이후 쿠리오가 우티카를 포위하여 굶겨죽이려 하자, 우티카 시민들은 항복하려 했다. 이에 바루스는 유바 왕이 대군을 이끌고 올 테니 조금만 더 버텨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던 중 유바 왕이 정말로 대군을 이끌고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쿠리오는 포위를 풀고 카스트라 코르넬리아로 이동한 뒤 시칠리아에 주둔한 2개 군단에게 합류를 명령했다.

그러던 중 한 누미디아인으로부터 "유바 왕이 이웃 국가 마우레타니아의 침략에 대처하고자 본군을 이끌고 돌아갔고, 사부라가 이끄는 몇 안 되는 군대 만이 우티카로 이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쿠리오는 이들을 물리치기로 마음먹고 재차 공세를 개시했다. 그러나 사실 이 누미디아인은 유바가 쿠리오를 유인하기 위해 보낸 밀정이었다. 쿠리오는 바그라다스 평원에서 목격한 사부라의 누미디아 분견대가 전부라고 확신하고 그들을 곧바로 공격했다가, 유바의 추가 병력이 당도하는 바람에 포위섬멸당했다.( 바그라다스 전투) 이리하여 쿠리오를 끝장낸 뒤, 그는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카이사르군을 붙잡은 뒤 몇몇 원로원 의원을 제외한 나머지 적병들을 처형했다. 이후 발칸 반도에 있던 폼페이우스에게 사절을 보내 승리 소식을 알렸다. 이에 카이사르와 로마의 원로원은 그를 로마의 적으로 선포했다.

기원전 47년 카이사르가 아프리카에 상륙하자, 그는 옵티마테스파 총사령관으로 선임된 메텔루스 스키피오에게 독자적인 지휘권을 인정해주고 아프리카에 있는 로마 영토의 일부를 자신에게 넘겨주면 그를 돕겠다고 밝혔다. 메텔루스의 동의를 받은 그는 군대를 총동원해 스키피오가 있는 우티카로 이동했지만, 마우레타니아 왕국 군주 보쿠스 2세의 용병대장 푸블리우스 시티우스가 왕의 명령을 받들어 누미디아로 쳐들어가 수도 키르타를 함락시키고 마시니사 2세를 축출했으면 사로잡은 시민들을 전부 학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30마리의 코끼리만 스키피오에게 보낸 후 대부분의 병력을 이끌고 본국으로 귀환했다. 당시 스키피오에게 전력상 절대적으로 열세햇던 카이사르는 그가 돌아간 틈을 타 추가 병력을 규합해 전쟁을 준비할 수 있었다.

이후 사부라에게 누미디아 수비를 맡긴 유바 1세는 3개 군단과 누미디아 기병대를 이끌고 스키피오와 합세했다. 카이사르 역시 제9 군단과 제10 군단을 맞이했다. 하지만 여전히 전력에서 열세였던 카이사르는 우티카 공략을 포기하고 본영으로 돌아갔으며, 스키피오는 그를 추격했다. 이후 제타 마을 주변에서 양군은 대치했으나, 스키피오는 카이사르와 회전을 벌이는 걸 기피했다. 카이사르는 추가 병력을 규합하는 동시에 스키피오에게 회전을 제의했으나 그가 끝까지 거절하자 강제로 싸우게 만들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카이사르는 원로원파를 지지하는 대표적인 도시인 탑수스를 포위했고, 스키피오는 탑수스를 상실하면 북아프리카의 원로원파에 대한 지지도가 추락할 것임을 깨닫고 어쩔 수 없이 카이사르와 회전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이리하여 그와 스키피오 연합군은 탑수스 전투에서 카이사르와 맞붙었다. 이 전투는 카이사르의 완승으로 끝났고, 그는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와 함께 누미디아의 도시 자마에서 피난처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현지인들이 받아주지 않자, 누미디아 왕실 영지 중 한 곳으로 피신했다. 두 사람은 카이사르의 자비를 의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서로 결투를 벌이는 방식으로 자살했다. 그 후 카이사르는 자신을 도와준 시티우스에게 키르타 일대를 영지로 삼게 하고, 나머지 누미디아 영역을 아프리카 베르타 속주로 삼고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를 초대 총독으로 세웠다.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로마가 혼란에 빠져 다른 곳에 신경 쓸 틈이 없게 되자, 히스파니아에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함께 유격전을 벌이고 있던 마시니사 2세의 아들 아라비오가 기회를 포착했다. 그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지원을 받아 아프리카로 이동한 뒤 키르타로 진격해 푸블리우스 시티우스를 처단하고 누미디아 왕위에 올랐다. 기원전 42년, 제2차 삼두정치는 아프리카 베투스 총독 퀸투스 코르니피키우스를 숙청 대상으로 지정하고 아프리카 노바 총독 티투스 섹스티우스에게 그를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코르니피키우스와 섹스티우스 모두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처음에는 폼페이우스파와의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코르니피키우스 편을 들려 했지만, 아프리카의 정세가 삼두정치파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걸 보고 섹스티우스 편으로 전환했다. 결국 코르니피키우스는 우티카 전투에서 전사했고, 섹스티우스는 아프리카의 두 지역을 장악했다.

기원전 40년 페루시아 내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 옥타비아누스는 가이우스 풀피키우스 팡고를 아프리카 노바 총독으로 삼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지지자인 섹스티우스와 대결하게 했다. 이때 그는 어느 쪽을 돕지 않고 중립을 택했지만, 팡고는 그를 잠재적인 적으로 인식하여 그가 다스리는 왕국을 침공해 강제로 몰아냈다. 그는 아프리카 베투스에서 섹스티우스와 합류했고, 두 사람은 곧장 아프리카 노바로 쳐들어가 팡고를 격파했다. 팡고는 언덕으로 달아났다가 야생 버팔로 떼가 돌진해오는 걸 누미디아 기병의 야간 공격으로 착각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섹스티우스는 그가 처음부터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던 점을 들어 그의 충성심을 의심했고, 결국 사람을 보내 죽여버렸다. 이리하여 누미디아 전역이 로마 공화국에 편입되었다.

그 후 누미디아는 로마의 직할 통치를 받다가 기원전 30년 아우구스투스가 유바 1세의 아들 유바 2세를 누미디아 왕으로 선임했다. 그러다 기원전 25년에 유바 2세는 아우구스투스의 명으로 마우레타니아 왕으로 전봉되었고, 누미디아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유바 2세는 클레오파트라 7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딸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와 결혼하고 충실한 봉신으로서 활동했다. 유바 2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는 서기 23년 마우레타니아 왕위에 오른 뒤 선정을 베풀어 마우레타니아의 최전성기를 이끌었지만, 서기 40년 칼리굴라에 의해 암살되었고 마우레타니아 역시 2개로 쪼개진 채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기원전 25년 이후 로마의 속주로 존속하던 누미디아는 기원후 429년부터 반달족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아 로마의 세력권에서 이탈, 반달 왕국에 속하게 되었으며, 벨리사리우스의 원정으로 160년 정도 동로마 제국의 산하에 들어왔다가 그 후 150여 년이 지난 698년부터는 아랍인의 공세를 받아 이슬람권에 귀속되었다.

3.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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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타

누미디아는 기병의 산지로 유명했다. 이들은 현존하는 아라비아 말의 조상으로 보이는 말을 탔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비록 타국 기병의 말에 비해 크기는 작지만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말에 안장이나 등자, 심지어 갑옷도 없이 작은 방패와 투창, 그리고 짧은 검을 들고 활약한 것으로 유명하다.

로마: 토탈 워 토탈 워: 로마2에서 출현했다. 전자는 빈약한 재정과 갈라진 영토, 옆에 있는 이웃국가가 최강 부자 국가인 카르타고와 이집트, 그리고 이 동네 끝판왕인 로마 4형제가 있어서 최고난이도를 자랑하는 것으로 악명 높았다. 진짜 장난이 아니라 누미디아 기병만 믿고 가야 할 정도. 롬2에서는 시작부터 정규 팩션으로 나오지 않고 군소 팩션으로 있다가 사막 왕국 DLC가 나오면서 마사에실리라는 이름의 정규 팩션이 되었다. 그 외에도 미디블 토탈워2의 인기 모드인 Stainless Steel 모드에서도 용병으로 누미디아 기병을 고용할 수 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 2에서 초반 전투씬의 배경지가 누미디아다.


[1] '갈라'라고 불리기도 한다. [2] '사이팍스'라고 불리기도 한다. [3] 또는 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