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대 교육총감 아키야마 요시후루 秋山好古 | Akiyama Yoshifur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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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0313f><colcolor=#fff> 출생 | 1859년 2월 9일 | ||
이요국 마츠야마성 조카마치 (현 에히메현 마츠야마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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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0년 11월 4일 (향년 71세) | ||
도쿄부 도쿄시 우시고메구 육군군의학교 (현 도쿄도 신주쿠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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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기간 | 제10대 교육총감 | ||
1920년 12월 28일 ~ 1923년 3월 17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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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0313f><colcolor=#fff> 본명 | 요시후루(好古) | |
통칭 | 신자부로(信三郎) | ||
형제 | 아키야마 사네유키 외 3남 | ||
배우자 | 다미 | ||
학력 |
오사카사범학교 (졸업) 육군대학교 (1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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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경력 | |||
임관 | 일본육군사관학교 (구3기) | ||
복무 | 일본제국 육군 | ||
1879년 ~ 1923년 | |||
최종 계급 | 대장 | ||
주요 보직 |
육군기병실시학교장 육군수의학교장 청국주둔군사령관 기병제1여단장 제13사단장 근위사단장 조선주차군사령관 교육총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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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참전 |
청일전쟁 의화단 운동 러일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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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육군의 장군으로, 최종 계급은 육군 대장. 종2위, 훈일등 공2급 수훈자이다.일본에서 '제병협동체계'를 구축한 인물이다. 사실상 무시되고 있던 일본 육군 기병대에 기병포와 기관총을 도입한[1] 선진적인 지휘관이다. 러일전쟁중 봉천 전투에서 러시아군의 육군 기병을 빈약한 일본군 기병대로 맞서 이겨낸 장군으로 유명하다. 그후 일본 육군 대장, 최고 3요직 중 하나인 교육총감과 군사참의관 겸직을 끝으로 전역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사립 중학교 교장이 되어 군인에서 교욱자로서 경력을 마친다.
전후 일본의 육군기병학교를 방문한 한 프랑스군의 육군 장교는 "아키야마 요시후루의 일생이란 만주벌판에서 세계 최강의 기병대인 코사크 기병대를 상대로 맞서싸워 승리한 데 그 의미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고 말했을 정도다. 일명 일본 기병의 아버지. 1916년부터 1917년까지 조선 주둔군 사령관 이기도 했다.
친동생으로 아키야마 사네유키(秋山 真之) 제독[2]이 있기에 군인가문 가족이 되었다. 동생인 사네유키도 같은 러일전쟁에서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이끄는 연합함대의 작전 담당 선임 참모[3]로 출전, 쓰시마 해전에서 이른바 7단 전법을 채용하여 함대 전체 전략을 세우고 도고에게 정자전법(丁字戦法)을 제안하여 러시아 제국의 발트 함대를 격멸하는 공로를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2. 생애
시코쿠의 이요 마츠야마에서 출생, 원래는 3남이었으나 형들이 병들어 아키야마 가문의 호주를 승계했다.대대로 마츠야마에 살았던 하급무사 출신 가정에서 태어나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공중 목욕탕의 청소부로 살았을 정도. 이후 16세 되던 해 오사카로 상경, 당초 교사를 지망하여 사범학교에 진학하여 소학교에서 근무하였으나, 1년이 채 안되어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교, 2년 후에 육군 기병 소위로 도쿄 진대에 배속되었다. 당시 일본 육사는 보병과 기병, 포병, 공병의 네 개 병과 중 1개를 택할 수 있었는데, 보병과 기병은 2년, 포병과 공병은 3년의 교육 기간을 마쳐야 했으므로, 가정 사정이 좋지 않아 빨리 임관해 급여를 받을 수 있는 기병을 택했다고 한다.
1883년에 새로 창설된 육군대학에 단 10명밖에 뽑지않은 1기생으로 입학, 2년 뒤에 졸업하고 참모본부에 배속되었다. 1887년에는 이요 마츠야마의 옛 번주 가문의 당주인 히사미쓰 공을 수행하여 프랑스로 유학, 4년간 유학하며 근대적인 기병전술을 습득했다.
프랑스 유학 시절 |
1916년에는 조선주차군 사령관, 같은 해 육군대장으로 승진하고 1920년에 일본 육군 3대 요직 중 하나인 교육총감으로 영전, 원수직을 눈앞에 두었으나 1923년에 돌연 퇴역하고 이듬해 현재의 마츠야마 북고교에 해당되는 사립 북여 중학교에 교장으로 부임, 1930년까지 근무하다가 같은 해 11월 4일, 임종직전 “봉천으로...!”라는 말을 남긴 채 당뇨로 인한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향년 71세. 가족들에게는 따로 남길 말이 없다고 했다고 한다. #
고향 에히메현 마츠야마시에 있는 도고온천 뒤쪽의 시립 사기타니(鷺谷) 묘지에 묻혔다. 윤봉길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폭사한 시라카와 요시노리 육군 대장도 여기에 묻혔다.
3. 일화
-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코가 매우 커서 서양인으로 오인되는 경우도 있었고, 어린 시절에는 유난히 코가 두드러져 보여 코쟁이 신자부로로 불리기도 하였다.
- 여자 관계 및 사생활은 깨끗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요시후루의 동생 사네유키 제독과 예비교 동급생이었던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의 문하생인 작가 우치다 햣켄(内田百間)은 지독히도 고집스러워 보이는 얼굴이라고 썼다.
- 지독한 애주가로 전쟁에 나가서도 자신과 당번병의 수통에 술을 담아가지고 다니며 나발을 불었다고 한다. 주위에서 모두 말렸지만 오히려 술을 마시면서 말을 타고 달리는 등 묘기를 선보였다.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기거나 잘못된 판단을 내려 큰일을 그르친 적은 없다고 하지만, 결국 지나친 음주 때문에 당뇨에 걸렸다.
- 극도로 목욕을 싫어해 러일전쟁 중에 목욕은 두 번만 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독한 냄새를 풍겼는데, 동료나 부하들이 목욕을 권하자 "목욕을 하기 위해서 먼 전쟁터로 온 것이 아니다.", "군인 된 자는 어느 때나 적을 처리할 수 있는 것처럼 해야한다"라며 거절했다. 위에 언급한 대로 어렸을 때 집안이 가난해서 목욕탕에서 일을 하며 고생한 게 트라우마가 되어 목욕에 거부감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동생 아키야마 사네유키 제독도 형 닮아서 그런지 잘 안 씻는 편이어서 젊을 적에 상관들에게 한 소리 듣곤 했는데, 아무래도 신사적인 이미지를 강조하고 좁은 함내에서 불결하게 살면 전염병 등이 크게 번지기에 자주 씻게 하는 해군의 문화 덕에 형보단 나았다.
- 무뚝뚝해보이는 인물로 감정표현에도 서툴렀지만, 동생 아키야마 사네유키가 태어났을 때, 부모님이 집이 어려우니 절에다 갖다주자고 하자 "내가 나중에 커서 돈을 두부만큼 벌어줄 테니까 집에서 키우자."고 만류했다고 한다.
- 검소하여 반찬은 단무지만 먹었고, 밥과 약간의 정종, 단무지가 매 끼니의 전부였다고 한다. 승전하면 받은 급료는 부하들에게 나눠주었다. 식기는 하나만, 심지어 나막신도 아껴 맨발로 다닌 적도 있다.
- 승전하여 받은 금료를 몽땅 부하들에게 나눠줬다는 일화에서 알수 있듯이 물욕이 매우 적었지만 명예욕도 없었다. 원수에 서임될 수 있었음에도 본인이 고사하고 퇴역하여 고향 마츠야마의 중학교 교장을 지냈다.
- 일본군의 병폐였던 정신주의의 드문 실례로, 프랑스 유학 시절 장티푸스에 걸렸는데 의사에게 한번 가보지도 않고 스스로 견뎌냈다고 한다. 하지만 이때 병으로 인해 탈모 현상이 생겨 대머리가 되었다.
- 사관학교 시절 성적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이론은 엉망인데 실전에 강한' 타입. 마츠야마 시의 언덕 위의 구름 박물관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사관학교 2학년 시절 성적표가 공개되었는데, 술과(術科: 병기와 부대지휘 운용) 성적은 1, 2등을 다투는데도 평균성적은 겨우 96명 중 51등이었다. 그러니까 좌학(座学: 군사학 강의) 성적은 꼴찌에서 1, 2등을 다투었단 소리. #
- 육군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기병의 특징을 설명할 때 맨주먹으로 유리창을 박살. 깜짝 놀란 학생들한테 피투성이가 된 주먹을 보여 주면서(...) "기병은 이것이다."[4]라고 밝혔다.
- 동향 후배이자 함께 러일전쟁에 참전했던 시라카와 요시노리[5]와 무척 친한 사이였는데, 나중에 시라카와가 육군 대장으로 진급한 뒤에도 예전처럼 "시라카와, 열심히 공부하고 있겠지?"라고 놀리며 장난치곤 했다고 한다.
- 죽기 전 말년에 러일전쟁에 대해 언급하긴 했다. "키운 장교의 절반이 뤼순 전투에서 죽어버렸다. 지금 살아있다면, 좋은 장교들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증유의 승리란 것은 국난 중에 순직한 전사자들의 덕분이다. 전사자의 유족에 대해서 딱하게 생각하고 있고, 그래서 러일 전쟁 이후 가족과 떨어져 홀로 살고 있다."(전기에도 수록된 내용) 실제로 부하를 아껴 돌격 명령을 되도록 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
헤이그 특사(밀사)가 파견 된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였고, 헤이그 특사들의 행동을 보고 그들의 행동을 상부에 보고해 저지시켰다는 '설'이 있지만 그것을 주장하는 기사가 있을뿐 근거가 어디에도 없다.
# 그런데 정작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서는 "연설 요령 알면 됐지." 하면서 계속 졸았다고(...).
첩보하느라 바빠서[6] 훗날 조선군 사령관으로 고종과 순종을 만나 선물을 받기도 한다. # - 말년에 당뇨로 왼쪽 다리가 괴사되자 "그래 잘라라! 다리 하나 없어도 일은 할 수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물러나는 해에도 "나는 이미 일이 끝난 노인이니, 제군은 내가 죽어도 슬퍼하지 말라. 제군은 내 시체를 넘어 전진하라, 이것이 그대들의 유일한 의무"라고 말하기도 했다.
4. 교육자로서의 삶
전쟁 영웅임에도 불구하고 군인이라는 직업에 회의를 느꼈고, 군인이 정치에 손대는 것에도 반대했다고 한다. 중학교 교장 시절에도 "학생은 군인이 아니다"라며, 그 무렵 상례처럼 된 군사교련을 탐탁지 않아 했고, 학생들의 전인교육을 중시했다고 한다. 교장 취임 때 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 "러일전쟁의 일을 얘기해 달라.", "일본제국육군 대장의 군복을 보여 달라."라고 부탁받아도 일체 사절하고 무훈을 과시하는 일은 없었다.학교에 부임하자마자 강당을 세우고, 당뇨에 거동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직접 걸어다니며 학생이나 시민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는 등 먼저 본을 보이는 교장이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유리창 파손이나 등록금 체납 등이 크게 개선되었다.
교장 시절 학생들의 견문을 넓히려는 목적으로 조선으로 수학여행 보낸 적이 있다. 평양까지 다녀오게 했다고. 말년의 대공황 때 국제협력을 강조하고, 홋카이도를 예로 들며 덴마크의 농업을 본받아야 한다거나, 제플린 비행선과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거론하는 등 상당히 국제지향적인 것을 가르치려고 노력했다고 평가받는다. # NHK 다큐멘터리를 인용한 해당 링크에서 그의 말이라고 언급되는 것이 유명한 칸트의 '북극성과 도덕률'인 것을 보아, 확실히 교양지식이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군복 시절 사진을 판매하려는 학교 관계자에게 '난 중학교 교장이다. 위계나 훈장 같은 이야긴 필요 없다. 그런것 팔지 말라.'고 호통쳤다 한다. # 해당 일본 블로거의 링크에는 그의 전기 등에서 발췌한 교장시절과 말년에 대한 훈훈한 이야기가 많다.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 사람들이 도쿄를 불태우려고 했던 것은 생각할 수 없다."[7]라고 말하거나, 조선으로의 수학여행 자체가 이례적이며 학생들이 감상이 호의적인 것으로 보아 조선에 동정적이었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 일본 기사 이건 학생 훈시 내용인데, "유언비어가 퍼지는 것은 정신 단련이 부족하다는 표현이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고.
한국 인터넷에서 일부 떠도는 정보 #에 의하면 제국주의에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하거나, 한중일이 서로 도와 서양 세력을 막아야한다는 일제의 명분을 신봉했다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서로 상충되는 내용이 많아 결과적으로 근거는 부족하다.
대표적으로 오늘의유머 등에 알려진 떡밥의 원 소스는 일본 유학중인 블로거 차수정 #의 글인데, 현재로서는 신뢰하기 어렵다. 아래의 내용을 보아 NHK 등에 방영된 그의 교장시절의 언급이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당시 일본군 내에서 상당히 깨어있는 인물이었음은 분명하다.
5. 조선과의 관계
사실 한국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이 인물이 알려지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이 인물이 진격의 거인에 등장하는 도트 픽시스라는 캐릭터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라는 점인데, 당시 이를 두고 굉장히 논란이 많았다. 해당 인물이 일본 제국주의 시절에 활약한 장군이기에 우리나라에 해를 가한 전범이 아니냐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8] 진격의 거인이 우익 논란이 처음 제기된 이유도 이 인물 때문이다.하지만 아키야마 요시후루는 우리가 흔히 아는 일본 전범 장군의 모습이 아니다. 앞에 설명되어 있는 내용들과 함께 부연 설명하자면, 아키야마 요시후루는 그 당시엔 굉장히 조선에 우호적이고 인물상이 괜찮은 장군이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키야마 요시후루는 직접 능동적으로 조선에 어떠한 해를 끼친 인물이 아니나 그가 활약한 러일전쟁이 일제강점기의 단초인 것은 맞다.
일단 아키야마 요시후루가 직접 조선인을 괴롭히고 박해하였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 아키야마는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 주차군 사령관으로 1년간 근무한 적이 있었다. 당시 총독부의 조선 통치 방식은 '무단 통치'였는데, 당시 조선의 모든 병권은 온전히 총독에게 있었다. 그나마 이 기간동안 조선에서의 수탈을 담당한 것도 헌병대였다. 헌병대의 사령은 '한국 주재 헌병 사령관'이라는 독자적인 위치로 아키야마가 맡았던 조선 주차군 사령관과는 엄밀히 구분되는 위치다.[9]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무단통치기 당시 조선주차헌병대는 조선주차군의 전투서열 내에 포함되어 있다. 헌병대와 헌병대사령관은 군사경찰 업무에 있어서는 조선주차군 사령관의 지휘통제를 받았고 일반 치안 업무에서는 군사령관이 아닌 조선총독부, 즉 행정부의 지휘를 받았다. 헌병대의 지휘체계가 이분화되어 있기 때문에 헌병대가 무단통치기에 일으킨 만행은 당시 조선주차군 사령관인 아키야마에게 책임을 돌리기 어렵다.[10] 즉, 아키야마가 재임할 당시 조선 주차군은 말 그대로 조선에서 주둔해있었단 부대일 뿐이지 아키야마가 능동적으로 조선 주차군 내에서 조선인 수탈과 약탈을 명령했다던가, 그런 일들을 실행했다던가 하는 문서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11]
- 또한 그가 만국평화회의에서 일본측 육군전문가로 참석했었고, 조선의 헤이그 특사의 활동을 본국에 통보하였다는 '설'이 있다. 군인의 신분으로 명령을 수행한 것이었다. 한국 특사가 회의장에 진입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일본의 전권 특사 스즈키 게이로쿠의 소행이었고, 오히려 아키야마 본인은 회의장에서 졸았다는 내용이 알려진다. 말 그대로 통보만 했을 뿐이라며 "그가 실제로 조선인들을 벌레취급하고, 조선의 식민화를 당연하게 여겼다면 애초부터 그냥 보고에 지나는 게 아니라 그 세 사람을 헤이그에서 박해하거나, 내쫓아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두둔하기도 하는데, 판단은 각자 알아서.
- 또한 그는 앞서 서술했듯이 관동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을 어리석은 짓이라며 비판하기도 하였고, 당시에는 일본인들이 벌레 취급하던 조선으로 수학여행을 추진하기까지 하였다. 당시 수학여행을 참가한 학생의 일기에서 조선이 예의 바르다며 우호적으로 평가한 것으로 보아, 그가 결코 나쁜 마음으로 조선 수학여행을 추진한 것은 아님이 확실하다.
- 아키야마가 러일전쟁에서 크게 활약하였고, 결과적으로 러일전쟁의 결과로 조선으로부터의 국권 침탈이 가속화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역사는 결과로만 따지면 안 된다. 러일전쟁은 애초에 러시아와 일본 두 제국주의 열강 간의 전쟁이다.[12] 사실 조선은 당시에 누가 이기든 존망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애초에 전쟁 원인이 조선 침탈이 목적이었다기보단, 두 거대 열강간의 자존심 싸움으로 보는 게 맞다. 제국주의 열강 두 나라가 싸워 한 나라가 이기는 데 일조하였다고 해서 그를 반인륜적인 제국주의적 장군으로 치부하는 것은 옳지 않고, 조선 멸망의 원흉으로 치부하는 것도 옳지 않다.[13]
아키야마는 당시 일본군 장성 중 오히려 정상적이고 양심적인 장군[16][17]이었다. 당시 일본에서의 '군인'은 직임 내내 여러모로 조선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을 수 밖에 없었는데, 그는 조선을 박탈하거나 학대했다는 사건은커녕, 오히려 조선을 우호적인 발언과 행동으로 두둔하였던 장군이다. 물론 아키야마가 일본 제국군 당시 장군이라는 직책에 근무지가 조선으로 발령나서 근무한 이력때문에 한국인한테 좋은 시선은 받을수 없으나 그가 조선에 있어 호의적인 입장을 보인 기록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 또한 충분히 재고할 만한 일이다. 이 인물을 존경한다고 해서 논란이 된 이시야마 하지메 작가도 그저 인물상 됨됨이를 존경한다고 했지, 전쟁 업적을 존경한다고 하지는 않았다.
즉, 아키야마는 조선에 능동적으로 해를 가한 인물이 아니며, 오히려 조선을 두둔한 경황까지 있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조선에서 복무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한국인으로서는 그를 굳이 나쁘게 생각할 이유는 없다.
조선에 우호적이었던 성향과 상관없이 아키야마는 인물상 자체가 뛰어나며 러일전쟁에서 세계최강의 기병대라고 소문난 '코사크 기병대'를 악조건 속에서 이들로부터 승리를 따낸 명장에 속하기 때문에 극우 혐한이 아닌 이상 그를 존경하는 사람이 일본 내에서 많다.
6. 대중매체에서
- 그를 다룬 소설로는 시바 료타로의 「 언덕 위의 구름」(사카노 우에노 쿠모)이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를 존경했다는 사실이 잘 드러난다. 현재 일본인들이 알고 있는 아키야마 요시후루에 관한 이미지는 대부분 이 소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드라마에서는 아베 히로시가 연기했다.
- 국내에도 출간된 모에! 전차학교에서 교관으로 나오는 캐릭터 아키야마 요시카는 아키야마 요시후루에서 모티브를 딴 것. 단, 모에화의 영향으로 생김새는 딴판이다(...).
- 애니메이션 GIRLS und PANZER의 등장인물 아키야마 유카리의 이름은 이 인물에서 따온 것이다.
- 2010년경 진격의 거인 작가 이사야마 하지메가 존경하는 인물이라며 블로그에 언급한데다가 작품 내에서 중요한 위치에 선 도트 픽시스의 모티브가 되어 뒤 2013년 뒤늦게 한일 양국 웹에서 논란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러일전쟁 참전자에 헤이그 밀사 관련 보고를 올렸다는 것 때문에 작가가 우익이라고 비판, 반면, 일본에서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을 비호하거나 아이들 수학여행을 조선으로 보냈다는 이유로 작가가 좌익이라고 비판. 아키야마 요시후루가 일본 내에선 원래 그럭저럭 잘 알려져 있었고 명장이란 이미지기에 크게 문제되진 않았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전에는 인지도가 없다가 무단통치시기 조선 주둔군 사령관이였던 일본 장군이라는 점부터 부각됐기 때문에, 이 부분은 한국에서 더 파급이 컸다. 그 전까지는 그냥 듣보잡. 포털 백과사전에도 항목이 없고 유일하게 위키피디아에만 있었는데, 그나마 그것도 일본 위키피디아를 번역한 것이다. 심지어 네이버 지식iN 등 좆문가들이 모이는 사이트에서는 태평양 전쟁과는 무관한 그를 A급 전범이라고 명시할 정도. 사실 '언덕 위의 구름'이나 아래에 언급된 일부 기사들 처럼 아주 언급이 안된 건 아니지만...그래서 그의 괴짜 속성 등과 결부되어 본격적으로 주목받은 2012~2013년을 전후해 (역설적으로) 잘못된 정보가 널리 유포되기도 하였다.
-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 명장으로 등장, 러일전쟁이 역사보다 1년늦게 시작하는 바람에 일본에게 불리해진 러일전쟁에서도 대활약한다. 봉천회전 당시 러시아군 후방을 집요하게 공격하여 기만을 펼치고 역사의 변화로 알렉세이 브루실로프가 참전하는 바람에 봉천 회전에서 일본군이 패주하자 일본군을 살리기 위한 최후의 도박으로 본인과 병사들에게 고량주와 보드카를 실컷 마신뒤 북쪽으로 광기의 돌격을 개시하여 러시아군의 후방을 휘젓고 알렉세이 쿠로팟킨을 속인 후 후퇴한다. 덕분에 일본군 전체가 전멸하는 위기를 피할수 있었다.
[1]
소설
언덕 위의 구름 등의 영향으로 아키야마 요시후루가 일본 육군에서 처음으로 기관총을 도입한 인물로 여겨지곤 하지만 실제 일본 육군은 러일전쟁 이전부터 기관총의 전술적 가치에 주목하여 프랑스의
호치키스 기관총을 면허생산하고 있었다.
[2]
전후에는 해군 군무국장 등 최요직 역임 후 질병에 의해 최종 계급
중장으로 퇴역
[3]
전쟁 당시 계급은 중좌
[4]
적에게 기동력을 살려 타격을 가하는 것이 기병의 궁극적인 역할이고, 그러기 위해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병종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5]
홍구 공원 천장절 당시 윤봉길의 물병 폭탄에 의해 죽은 바로 그 인물이다.
[6]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배려로 유학 시절 프랑스 고급군인에 동행할 일이 있었는데도 역시 술에 취해
기차에서 마구 졸았다가
날치기를 당했다 한다(...).
[7]
"조선인이 방화했다든가 우물에 독을 던졌다는 사실이 아니다. 냉정한 판단을 할 수 없었던 것은 참으로 유감이다."
#(그의 선견지명 등에 대해서도 거론한 기사)
[8]
하지메가 아키야마를 직접 존경한다는 포스트를 쓴 정황이 발견되면서 논란은 더욱 커졌다.
[9]
그 대표적인 헌병대의 사령관이 '이토 히로부미'로, 우리가 이토를 비판하는 이유중 하나.
[10]
헌병대 뿐 아니라 조선군 자체가 식민통치에 직접 관여한 시기가 있기는 한데 그건 3.1운동 무렵의 일이다.
[11]
물론 조선 주둔군 자체도 한반도에서 숱한 만행을 저질렀다. 대표적으로 남한대토벌작전(한국주차군 시절), 3.1운동 탄압,
간도참변 등이 있고,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본토결전을 준비하면서 잘 알려진대로 한반도에서 인력과 자원을 수탈한 주체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키야마는 부임기간이 별로 길지도 않은데다가 이런 만행에 구체적으로 관여한 바가 딱히 없기도 하다. 조선 주차군의 사령관이었다는 점에서는 마냥 좋게만 느껴지기 어려운 것은 어쩔 수 없지만.
[12]
조선에 선전포고를 한 나라는 아무도 없다.
[13]
당시 안중근 선생도 러일전쟁을 두고 '동양과 서양의 대결'이라며 일본을 응원하기도 하였다. 물론 러일전쟁 이후엔 일제의 속셈을 간파하고 돌아섰다. 이는 안중근기념관에서도 밝힌 내용이다.
[14]
이는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루머가 아키야마에게 덧씌워진 결과물.
[15]
이 주장 자체는
안중근도 했을 정도로 당시 동아시아 지식인들 사이에선 널리 퍼져 있긴 했다.
[16]
요시후루 세대의 일본군 장성들은 메이지유신 이후 영국과 같은 강대국에서 외부강사를 비싼돈 주고 고용해 이들로부터 서양식 교리를 배운자들이라서 2차세계대전 당시 병사들을
반자이 돌격과
대전차 총검술,
카미카제등을 일삼은 일본군 장성과 비교하는게 모욕일 정도로 정상적인 사고방식과 유능함을 소유한 인물 많았다. 실제로 요시후루의 동생 사네유키는 미국 파견무관 당시 미국의 전술훈련 워게임에 감명받아 이를 일본 해군에 도입할 정도였다. 그랬던 일본이 2차대전의 병맛 넘치는 교리가 된 이유는 일본이 강대국으로 인정받고 군국주의가 대두하며 변질된 교리를 독자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일그러졌기 때문이 크다. 러시아 내부사정도 있었으나 요시후루 세대의 유능한 장군들이 있었기에 압도적인 국력을 가진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17]
러일전쟁당시 일본 육군 장성들중 가장 무능한 축에 속하는
노기 마레스게조차 봉천회전에서 3배가 넘은 러시아군을 밀어내고 러시아군을 편익포위하는데 성공하는 전과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