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ruby(外様大名, ruby=とざまだいみょう)] / Tozama Daimyō도자마 다이묘는 무로마치 시대부터 도자마추라고 불리며 존재했다. 다만 후대에 알려진 것은 에도 시대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국 각 지역의 다이묘들에게 충성도에 따른 차별대우를 한 사례가 가장 일반적으로 불린다. 통용 표기에 따른 토자마 다이묘라고도 표기한다.
2. 특징
에도 시대의 다이묘는 신판 다이묘(親藩大名, 친번대명), 후다이 다이묘(譜代大名, 보대대명), 도자마 다이묘 셋으로 나뉘는데, 이 기준은 에도 막부의 수립 과정에서 얼마나 공을 세웠는가에 따라 나뉘었다.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 전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세력에 들어온 이들이 도자마가 되었다.[1] 반면 신판 다이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혈족들이 임명되었고, 후다이 다이묘의 경우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부터 이에야스를 주군으로 받들던 세력들이 임명되었다.세키가하라 전투 이전에 도쿠가와 가문 외에 약 200개의 가문이 존재했는데 전투 이후 2년 동안 88가문이 개역당하여 가문이 끊겼다. 에도 막부 초기에도 많은 도자마 다이묘 가문이 개역당하고 수많은 로닌이 생겨났으며 에도 시대 막부 말기에는 80%에 가까운 지방 세력의 가문이 사라졌다.
도자마 다이묘는 주로 에도에서 먼 규슈 등 변방 지역을 본거지로 하는 경우가 많았고 본래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에 충성한 전례가 있고 도쿠가와 가문에 대한 충성심이 대체로 약했기 때문에 에도 막부에게 견제와 푸대접을 받아서 에도 막부에게 불만이 많았다. 에도 막부를 무너뜨린 대정봉환과 메이지 유신의 주축 세력이 이 도자마 다이묘의 영지인 사쓰마( 시마즈 가), 조슈( 모리 가), 도사[2] 출신인 것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이는 원래 잠재적인 위험분자들을 수도에서 멀리 떼어놓아 수도의 안전을 보장하려는 의도였지만, 한편으로는 이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가 약해지고 이들이 대외무역 및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쉽게 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다만, 도자마 다이묘에 대한 대우가 꼭 같지만은 않았다. 예컨대 시마즈 가문의 사쓰마 번은 시간이 지나 쇼군 가와도 통혼할 정도로 긴밀한 사이가 되어서 막말시기에도 조슈 번과는 달리 공무합체 측에 서서 막부를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기도 했다. 도자마 다이묘일지라도 일단 다이묘에 속한 이상, 1만 석 이상의 조세를 수취하는 부유한 기득권이었기 때문에 막부 말기의 혼란 속에서도 급격한 변화를 바라지 않았다. 처음에는 존황양이, 나중에는 토막을 주창한 유신지사들은 대부분 구라마이라고 불렸던 중/하층 사무라이였다.[3] 거기다가 산킨고타이로 인해 다이묘들은 어릴때부터 에도와 본가를 오가면서 생활해왔기 때문에 각 번의 중하층 사무라이들보다는 에도 막부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을 것이다.
또한 조슈 번의 경우도 본래 번주 모리 가문이 강경 반 막부파까진 아니었고 번내 근왕파 무사들, 예컨대 타카스기 신사쿠 등이 주도한 번내 쿠데타를 통해서 조슈 번이 토막파 주도세력이 된 것이었다.[4] 그리고 같은 도자마라도 센고쿠 시대 당시 친 도쿠가와 성향을 지닌 다이묘들[5]은 보다 나은 대우를 받았다. 특히 다테 마사무네같은 이는 막부 중신으로도 있기도 했다. 그 외에 마에다 토시이에의 마에다 가문도 거의 도쿠가와 신판 가문급 대우를 받았다.[6] 이는 도자마 다이묘라 할지라도 강성한 번들이 많기도 했거니와 도자마 다이묘 중에서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동군에 서는 등 이에야스와 친한 이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자마 다이묘들이 에도 막부에서 무작정 괄시당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도쿠가와 가문의 가신 가문들인 후다이 다이묘들이라든지 세력이 작은 도자마 다이묘들이 수틀리는 대로 걸핏하면 가이에키(영지몰수)였던 것과 달리 기본적으로 에도 막부 극초반의 과도기를 제외하면 애당초 막부가 20만석 이상의 도자마 다이묘를 가이에키한 사례 자체가 없다.[7] 굳이 찾아봐야 도자마 다이묘였던 사타케 가문이 지배하던, 그것도 영지 전체가 아닌 일본 제일의 구리광산이던 인나이 광산을 제한적으로 가이에키했다가 곧 철회한 사례 하나가 유일하다. 비록 막부가 우위이긴 하지만 애당초 유력 도자마 다이묘들은 각 가문들마다 깃발 하나만 꽂아도 당장 수천단위의 병력을 뽑아낼 수 있기에, 이들이 단합하여 반란을 일으키면 막부로서는 부담스럽기 짝이없는 세력들이었다. 이때문에 20만석 이상의 도자마 다이묘에 대해서 막부에서도 직속가신으로 대하지 않아 별도로 대우한 것이지 실제로는 극진한 특별대우를 했다.
[1]
굳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적대하던 다이묘들이 아니라 해도 동맹세력으로 있던 이들 역시 해당된다.
다테 가문,
구로다 가문,
호소카와 가문,
가토 가문,
야마우치 가문 등.
[2]
도사 번은 원래
조소카베 가가 다스리던 곳이었지만,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조소카베 가는 개역당하고
야마우치 가문이 새로운 번주가 되었다. 조소카베의 가신들은 하급무사로 전락하고, 야마우치의 가신은 상급무사로 오랫동안 두 계급 사이에 차별이 심했다. 메이지 유신을 이끈 주역들은 하급무사 출신이었다.
[3]
그렇다보니 신정부 수립 이후 정권을 잡은 유신지사들중 자신들이 모시던 주군들보다 더 거대한 권세를 누린 자들이 많았다.
[4]
당시 조슈 번주 모리 모토노리는 본인이 번내 정치를 주도하기보단 번사들 사이에서 다수파인 의견을 지지하거나 정 결론이 나지 않을 때만 나서서 결단을 내리는 성향이었다.
[5]
야마우치 가문,
구로다 가문,
호소카와 가문,
다테 가문 등.
[6]
도쿠가와
고산케(오와리-기슈-미토), 직접방계 마쓰다이라(에치젠-아이즈-오치), 도쿠가와 고산쿄(다야스-히토쓰바시-시미즈), 간접방계 마쓰다이라(히사마쓰-오쿠다이라) 다음가는 세력이 마에다-다테-시마즈 등의 순이었다. 물론 이런 순위는 막부 내부 권력계도, 혹은 대외적인 것으로, 당대의 정치적 상황이나 다양한 요인들에 의해 유동적이었다. 또한 막부 내정 등이 아닌 실질적인 번 자체 권력으로만 판단한다면 마에다와 시마즈는 상기 고산쿄보다는 훨씬 강한 권력을 지닌다. 뿐만 아니라 저렇게 분봉받은 것은 형식적인 것으로, 막부 말기의 고쿠다카는 초기와 비교하면 변동이 많았다.
[7]
물론 가이에키를 자제해야 했던 이유가 있었다. 가이에키를 하면 그 밑에 있던 무사들도 모두 해고되어 실업자가 된다. 이렇게 실업자가 된 무사들을 로닌이라고 부르는데 막부 초기, 각 번을 꺾기 위해 가이에키를 많이 하는 바람에, 거기다 세키가하라 이후 고쿠다카가 줄어든 다이묘들은 휘하 가신을 상당수 해고했던 바람에 처음부터 로닌이 많았고 이 로닌들은 일자리가 없다 보니 각종 사고, 심하면 반란까지 일으키며 그렇다고 이들을 어디 써먹을 방법도 없어 이래저래 골치아픈 존재인지라 이들을 더 늘리지 않기 위해선 가이에키를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