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적인 역사 편찬에 자료가 되는 기록으로,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독립성 보장을 위해 심지어
임금이라도 사초를 볼 수 없게 규정되어 있었다. 또한
이담명 승정원사초를 보았을 때 매우 방대한 자료가 작성되었다는 것을 유추할수 있다. 물론 사초까지 보관하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에 편찬작업을 통해
실록 기록물이 작성되고 나면 세초를 하고 사초에 쓰인 종이는 재활용해서 썼다. (
역사 관련 정보) 다만
이담명 승정원사초와
마애사초,
기사찬초,
당후일기를 비롯한 일부 사초는 사관 개인이 몰래 꿍쳐둬서 소장한 것이 현재까지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기 때문에 당대의 사초가 어떻게 작성되었는지 대략은 파악이 가능하다.
정태제 사초: 남아 있는 사초 중 흔치않은 가장사초(家藏史草)로 가장사초는 그 날 일어난 일을 자세히 기록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개인적인 감정을 수록하는 것은 가급적 자제하는 다른 사초들과는 달리 각 기사 마다 사관 개인의 감정과 사론을 여과 없이 수록하기 때문에 더욱 가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