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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 이집트 문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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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왕조 (부바스티스 왕조) | 제23왕조 | 제24왕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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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중간기 Third Intermediate Period of Egyp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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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중간기 이집트의 세력구도 | |||||
기원전 1077년 ~ 기원전 664년 | |||||
위치 | 이집트 | ||||
수도 |
타니스 (
제21왕조) 부바스티스 ( 제22왕조) 헤라클레오폴리스 ( 제23왕조) 사이스 ( 제24왕조) 나파타 ( 제25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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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제정일치 | ||||
국가 원수 | 파라오 | ||||
주요 파라오 |
스멘데스 1세[1] 셰숑크 1세 오소르콘 2세[2] 피이[3] 타하르카[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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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 고대 이집트어 | ||||
종교 | 고대 이집트 종교 | ||||
주요 사건 |
기원전 1077년
이집트 제21왕조 시작 기원전 943년 이집트 제22왕조 시작 기원전 837년 이집트 제23왕조 시작 기원전 744년 이집트 제25왕조 시작 기원전 732년 이집트 제24왕조 시작 기원전 728년 이집트 제23왕조 멸망 기원전 720년 이집트 제24왕조 멸망 기원전 716년 이집트 제22왕조 멸망 기원전 664년 아시리아에 의해 제25왕조 멸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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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립 이전 | 이집트 신왕국 | ||||
종결 이후 | 이집트 말기 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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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1077년부터 기원전 664년까지 지속된 고대 이집트의 시대 구분. 제21왕조부터 제25왕조까지가 제3중간기에 해당한다.앞선 두 차례의 중간기 동안 상하이집트로 분열되었다가 재통일되는 것으로 종결된 것과 달리, 제3중간기는 제21왕조와 제22왕조 중기까지 통일왕조였다가 분열된 뒤 제25왕조가 재통일했으나 외세인 아시리아 제국의 침입으로 종결되었는 게 큰 차이점이다.
고대 이집트 최고의 전성기였던 이집트 신왕국은 대왕 람세스 2세 사후 국력이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람세스 2세가 너무 오랫동안 살면서 수많은 자식들을 남겼기에 훗날 왕위를 놓고 내전이 벌어지기 딱 좋은 상황을 조성해버렸고[5], 이는 메르넵타 사후에 세티 2세와 아멘메세스가 첫번째 내전을 벌이면서 현실화되었다.
세티 2세가 승리하긴 했지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고 그 뒤를 출신이 명확하지 않은 십타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세티 2세의 계비였던 투스레트가 섭정으로서 막후에서 권력을 행사했는데, 십타가 요절하면서 투스레트는 단독으로 파라오에 즉위한다. 하지만 여기에 반감을 품은 람세스 2세의 손자나 증손자 출신으로 추정되는 세트나크테가 군사력으로 반기를 들어 투스레트의 단독재위 2년차에 그녀를 축출하여 제19왕조가 멸망하고 제20왕조가 개창되었다.
그러나 제20왕조는 지중해 세계를 휩쓸던 바다 민족의 침입을 막아야 했고, 미케네나 히타이트와 달리 멸망은 피했지만 주변 국가들의 멸망과 무역로 단절, 이상 기후로 인한 생산량 감소로 국력이 갈수록 쇠락했고, 리비아인과 누비아인들의 침입은 점점 강해졌다. 이에 따라 파라오의 권위와 권력은 갈수록 떨어졌고 반대급부로 테베의 아문 대신관의 권력은 강화되어 갔다. 람세스 4세 시기에 테베의 아문 대신관으로 임명된 람세스낙트는 왕의 집사장을 지냈던 아버지의 부와 재정감사권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나갔다. 람세스낙트의 아들은 중부 이집트에서 막대한 토지를 관리했으며 국가 재정과 아문 신전의 재정을 모두 장악했고, 왕들의 무덤을 건설하는 인부들에게 물품을 나누어 주는 일, 노동자들의 통제 같은 일에도 람세스낙트가 관여했는데 이는 아문 신전의 재정이 투입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람세스낙트는 결혼으로 관계를 맺은 유력 귀족 가문들에게 아문 신전의 성직을 내려 권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그 결과 람세스낙트가 사망한 람세스 9세 때는 중부와 상이집트는 사실상 독자 정권이 수립되었고, 제20왕조 마지막 파라오인 람세스 11세 생전에 이미 나일강 삼각주 유역의 하이집트마저도 당대 아문 대신관의 아들로 추정되는 제21왕조의 개창자이자 초대 파라오로 등극하는 스멘데스의 손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람세스 11세가 사망하자 그의 장례를 집전한 스멘데스 1세가 왕위에 오르며 제21왕조를 개창했고, 이때부터를 이집트의 제3중간기라고 부른다. 제21왕조 시대의 이집트는 남긴 기록이나 건축물 등이 적어서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다만 아직은 통일왕조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는 제21왕조의 파라오들이 거의 다 테베의 아문 대신관과 혈연 관계로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개창차인 스멘데스부터 아문 대신관의 아들로 추정되고. 리비아인 출신인 대 오소르콘이나 출신이 명확하지 않은 시아문을 제외한 나머지 파라오들이 아문 대신관의 아들이거나 그 아들의 자식이었다. 마지막 파라오인 프수센네스 2세는 현직 아문 대신관의 신분으로 파라오에 즉위한 뒤 성직을 사임하지 않고 사망할 때까지 유지하여 전 이집트를 다시 파라오의 손으로 돌렸으나 남성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여 제21왕조가 종결되고 그의 사위이자 수석 고문관, 군 총사령관을 맡고 있던 리비아인 셰숑크 1세가 제22왕조를 개창하고 초대 파라오에 즉위했다.
제21왕조의 뒤를 이은 리비아 출신의 제22왕조는 제21왕조를 교훈삼아 상하 이집트의 분열을 예방하려고 했고 중반까지는 통일 이집트를 유지했으나 결국 기원전 837년 오소르콘 2세 사후 하이집트와 상이집트로 분열되고야 말았다. 제22왕조는 북부 하이집트, 제22왕조에서 갈라져나온 제23왕조는 남부 상이집트를 각각 분할해 통치한 것이다. 그러나 제22왕조나 제23왕조 둘다 말기에 들자 너나할것 없이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렸고 이집트 내부는 리비아-이집트계 지배자들이 다스리는 도시국가들로 쪼개져 버렸다.
이같은 혼란을 수습한 것은 쿠시 왕국의 누비아인들이 세운 흑인 왕조, 즉 제25왕조였다. 제25왕조의 시조인 쿠시 왕 카슈타는 상이집트 지역에 세력을 투사하여 친딸을 테베의 아문 신의 아내 후계자로 입양하도록 하여 쿠시 왕국의 상이집트 영향력을 강화시켰다. 그 아들인 피이(피앙키) 재위 시기에는 상이집트를 완전히 흡수했고, 이집트를 완전히 통일시키겠다는 야심을 품은 피이를 하이집트의 여러 도시 지배자들이 동맹을 맺고 견제하자 육군과 해군을 대규모로 파견하여 이들을 무릎 꿇리고 지방 지배자의 지위를 인정하는 대신 충성 서약을 받았다. 피이의 아들인 셰비쿠는 나일강 삼각주에서 활개치던 제24왕조를 멸망시켜 전 이집트의 통일을 완수했다.
이렇게 한시적으로 이집트를 재통일하는 데 성공한 제25왕조는 잠깐 동안의 전성기를 일구며 옛 신왕국 시절을 연상시킬 정도의 영광을 누렸다. 전란 도중 파괴된 카르나크 신전을 재구성했고, 나일 강을 따라 수많은 신전과 건물들을 건설하며 여러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제25왕조의 중흥은 오래가지 못했다. 중동에서 등장한 신흥 강자 신 아시리아 제국이 동북쪽에서 밀고 내려와, 제25왕조는 남쪽으로 쫒겨났다.[6] 당시 파라오 타하르카는 테베로 도망쳤다가 전열을 정비해 일시적으로 멤피스를 회복했으나, 아슈르바니팔이 이끄는 아시리아 군대에게 패퇴하여 하이집트를 상실했다. 그의 후계자인 타누타멘이 벌인 수복전쟁에서 상당부분의 영토를 회복하고 아시리아가 꼭두각시로 앉힌 파라오 네카우 1세를 처형했으나, 끝내 아시리아에게 밀려나면서 제25왕조는 이집트를 완전히 상실했다. 아슈르바니팔은 이집트를 직접적으로 다스릴 생각은 없었기에 사이스를 중심으로 한 봉신 국가인 제26왕조를 세웠다. 이를 외세 간섭기인 이집트 말기 왕조의 시작이라고 본다.
2. 역사
2.1. 제21왕조(타니스 왕조)
아메네모페의 황금 마스크 | 프수센네스 1세의 황금 마스크[7] |
스멘데스 1세는 람세스 11세 생전에 이미 하이집트를 장악한 상태였고, 이를 통해 람세스 11세 사후 파라오에 등극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41년간의 재위를 끝마친 뒤 그의 친아들로 추정되는 아메넴니수가 잠깐 동안 재위했다가 테베의 아문 대신관 피네젬 1세의 아들인 프수센네스 1세에게 왕위가 넘어갔다. 프수센네스 1세는 46년을 통치했으나 특기할 만한 업적은 타니스를 완전히 요새화하여 본격적인 수도로 만들고, 테베의 카르나크 신전을 모방하여 타니스에 따로 아문 대신전을 짓고 그 대신관을 맡았다는 것 정도다. [8] 그가 사망하자 아들인 아메네모페가 뒤를 이었는데 역시나 알려진 게 그다지 많지 않다.
아네메모페의 가족관계에 관해선 알려져 있는 게 없고, 후계자인 대 오소르콘이 리비아 동부의 유목민족인 메시웨시(마) 부족 출신이었기에 후계자를 남기지 못한 것으로 추정한다. 대 오소르콘 사후 즉위한 시아문은 대 오소르콘의 친딸과 결혼하여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했던 것으로 보이며 21왕조의 파라오치고는 대형 건축 프로젝트를 여럿 진행시켰으며 테베의 아문 대신관인 피네젬 2세에게 왕가의 계곡에 묻힌 신왕국 파라오들의 무덤을 점검하고 도굴당한 무덤에서 미라를 꺼내 재매장하도록 명렁을 내렸다. 피네젬 2세는 시아문의 재위 1년차부터 10년차까지 왕가의 계곡을 돌며 신왕국 파라오들의 미라를 수습해서 재염습한 후 자신이 사망후 매장될 가족묘에 재매장했다. 피네젬 2세는 이 작업을 완수한 뒤 사망했고 아문 대신관 자리는 그의 아들인 프수센네스 3세가 이어받았는데, 바로 제21왕조의 마지막 파라오가 되는 프수센네스 2세다. [9] 그는 아문 대신관 직을 사임하지 않고 파라오와 겸임하여 이집트 전체를 통치했으며 남성 후계자를 남기지 못해, 그의 장례를 집전한 사위인 셰숑크 1세가 파라오를 승계하여 제22왕조를 개창한다.
2.2. 리비아의 통치(제22, 23, 24왕조)
제21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프수센네스 2세가 죽자 리비아 동부의 메시웨시족[10]의 부족장 출신인 셰숑크 1세가 왕위에 올라 제22왕조(혹은 부바스티스 왕조)를 건설했다. 셰숑크 1세는 프수센네스 2세 시절 이집트 군대의 군사령관이자 수석 고문이라는 높은 관직에 앉아 있었던 인물로, 그의 조상들은 신왕국 시절 이집트에 정착했던 고대 리비아인들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셰숑크 1세의 증조부였던 파이후티는 리비아(즉, '마')의 대족장으로써 이집트군의 대장이었고, (셰숑크 1세의) 삼촌이 대 오소르콘이었으며, 동시에 (셰숑크 1세는) 프수센네스 2세 딸과 결혼한 사위였기에 셰숑크 1세는 선대부터 이집트에서 기반을 갖고 있어 완전히 이집트화되고 굉장히 권력이 강했던 리비아 사람이었다.프수센네스 2세가 사망하자 가장 유력했던 셰숑크 1세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집트 파라오의 혈통에, 신왕국의 메르넵타와 람세스 3세가 그토록 모질게 물리쳤던 야만족 리비아인의 피가 흐르게 된 셈이다. 셰숑크 1세는 남북으로 분열되어 있었던 이집트를 통합하기 위하여 애썼으며, 프수센네스 2세가 가지고 있었던 '아문의 대신관' 직을 그대로 물려받는 등 테베의 신관들을 복속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셰숑크 1세는 대외적으로는 상당히 공격적인 전술을 펼쳐 이스라엘과 가나안 일대를 활발히 공격해서 다윗과 솔로몬의 재물들을 몽땅 털어갔다고 전해진다.[11] 또한 혈연과의 결혼을 통해 왕좌를 물려받았던 리비아인의 후예답게 아문 신관의 딸들과 여러 차례 혼례식을 올렸고, 아문 신관을 세습직에서 임명직으로 바꾸고 자신의 아들을 임명하여 신관들의 권력을 약화시키려고 애썼다.
셰숑크 1세의 21년에 걸친 재위 이후 오소르콘 1세가 그를 계승했다. 제22왕조의 제2대 파라오였던 오소르콘 1세는 신왕국의 멸망 이래 분열되었던 이집트를 안정시키고 꽤나 평화로운 시대를 이끌었던 명군이었다. 약 35년의 재위 기간 동안 오소르콘 1세는 여러 차례 신전들을 재건축하거나 세드 축제를 여는 등 굉장히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오소르콘 1세의 시대에 특기할 만한 재앙이나 자연재해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으며, 때문에 일부 고고학자들은 그나마 오소르콘 1세를 제22왕조의 전성기로 보기도 한다. 오소르콘 1세 이후 즉위한 셰숑크 2세의 출신은 굉장히 불분명하다. 오소르콘 1세의 아들이라는 말도 있고, 아니면 시조 셰숑크 1세의 아들이라는 말도 있으며, 아예 독립적인 가문의 혈통이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는 등 수많은 학설들이 난무한다. 어찌되었든 셰숑크 2세는 기원전 887년에 즉위하여 2년도 채 통치하지 못하고 사망했다.[12] 셰숑크 2세가 2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오소르콘 1세의 아들 타켈로트 1세[13], 그리고 그의 아들 오소르콘 2세가 연달아 즉위했다.
오소르콘 2세가 왕이 된 직후 그의 사촌이자 테베와 서부 오아시스들을 다스리던 하르시에세 A[14]가 이에 불복하여 반란을 일으키면서 오소르콘 2세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그러나 하르시에세 A는 다행히도 기원전 860년에 죽어버렸고, 그를 대체할 만한 반란군 지도자가 등장하지 않으면서 오소르콘 2세는 국난을 겨우 극복할 수 있었다. 오소르콘 2세는 다시는 테베를 기점으로 한 반란이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는 신념으로 자신의 아들 님로트 C를 아문의 대사제로 임명해 테베로 보냈고, 이로 인해 오소르콘 2세는 안정적으로 남부 상이집트 일대까지 손길을 뻗치며 장악할 수 있었다. 즉위 직후 최대의 위기를 모면한 오소르콘 2세는 다행히도 재위 내내 이집트를 나름 잘 이끌어나갔고, 제22왕조는 오소르콘 2세 시대에도 평화를 지켰다.
이 시대에도 점점 거대한 위협이 성장하고 있었으니, 바로 히타이트 이후 서아시아에 등장한 패자 아시리아였다. 아시리아는 점점 세력이 팽창하면서 이집트의 전통적인 영향권이던 이스라엘과 시리아 지방까지 조금씩 밀고 들어왔다. 이집트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공격적인 방향으로 아시리아에 맞설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최전성기인 신왕국 시절이었다면 모를까 이미 쇠퇴기에 들어간 이집트가 한창 때이던 아시리아를 이기기란 무리였고, 결국 이집트는 조금씩 조금씩 밀려났다.
오소르콘 2세가 기원전 837년에 사망하면서 마침내 이집트가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로 분열되었다. 오소르콘 2세의 후임자 셰숑크 3세의 재위 8년 만에 테베를 중심으로 한 상이집트 일대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셰숑크 3세에게 반기를 든 것이었다. 원래 셰숑크 3세는 오소르콘 2세의 손자였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그의 사촌이자 아문의 대신관이었던 타켈로트 2세가 셰숑크 3세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스스로 파라오에 올랐다. 학계에서는 이전에 오소르콘 2세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하르시에세 A를 제23왕조의 첫 파라오로, 타켈로트 2세를 제23왕조의 제2대 파라오로 본다. 즉 제22왕조와 제23왕조는 한 왕실 내에서 벌어진 내전 때문에 생겨나 이름만 다른 사실상 같은 왕조였던 것이다.
타켈로트 2세는 이집트 중부와 남부를 다스렸고, 이로 인해 셰숑크 3세가 이끌던 제22왕조는 오직 나일 강 하류의 이집트 북부 일대만을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나 타켈로트 2세가 장악한 남부 상이집트에서도 전쟁은 끝날 줄을 몰랐으니, 타켈로트 2세가 파라오로 즉위한 지 11년째 되는 해에 테베에서 페디바스테트가 반란을 일으켜 테베를 함락하고 파라오를 선언했던 것이다. 격노한 타켈로트 2세는 아들 오소르콘 3세를 보내어 테베를 재정복했으나, 4년 후 또다시 반란이 일어나 타켈로트 2세의 군대를 쫒아내면서 상이집트 내에서 또 내란이 일어났다. 이후 타켈로트 2세와 후계자 오소르콘 3세, 그리고 페디바스테트와 후계자 셰숑크 6세가 서로 테베를 두고 쟁탈전을 벌였으나, 27년 만에 결국 오소르콘 3세가 승리하면서 상이집트 유역을 다시 하나로 합쳤다.
이 시대의 이집트를 보면 북부 하이집트에서는 제22왕조의 셰숑크 4세가[15], 남부 상이집트 일대는 제23왕조의 오소르콘 3세가 나누어 통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이집트만을 겨우 부여잡고 있었던 제22왕조는 날로 쇠락했다. 셰숑크 4세, 파미, 셰숑크 5세가 연달아 파라오로 즉위했으나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특히 무려 37년 동안의 오랜 세월 재위한 셰숑크 5세의 통치 기간 동안 수많은 부족들과 도시들이 독립을 선포하고, 제22왕조에서 분리되어 나가면서 제22왕조의 영향력은 더더욱 줄어들었다. 심지어 하이집트의 최대 도시들 중 하나이자 옛 수도라는 엄청난 상징성이 있던 멤피스마저 나일 강 삼각주 서부 지역을 차지한 리비아 추장들의 꼬임을 받아 떨어져 나갔다.
결국 영토 대부분을 잃어버린 제22왕조는 수도 타니스와 인근의 부바스티스 인근만을 겨우 다스리는 조그만 세력으로 전락했다. 셰숑크 5세가 기원전 730년에 사망하자 제22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오소르콘 4세가 즉위했다. 오소르콘 4세는 학자들에 따라서는 제22왕조의 일원으로 분류되지 않기도 하는데, 그의 치세에 사이스를 기반으로 삼고 멤피스에서 권위를 인정받은 테프나크트, 레온토폴리스의 이우푸트 2세 같은 다른 지방 지배자들과 하이집트 지역을 나누어 지배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정통성을 지니고 있었던 제22왕조가 하이집트의 통치권마저 잃어버리며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던 와중, 제22왕조에서 갈라져 나온 분계 왕조였던 제23왕조 역시 상황은 비슷했다. 페디바스테트를 꺾고 남부 상이집트를 통일한 오소르콘 3세가 기원전 769년에 사망하자 타켈로트 3세, 루다멘이 연달아 왕위를 물려받았다. 타켈로트 3세의 재위 기간이 15년으로 길었기 때문인지 그가 사망한 시점에서 아들들이 이미 세상을 떴기에 그의 동생인 루다멘이 후임자가 되었으나 2~3년이라는 짧은 기간밖에 재위하지 못했고 루다멘이 죽으면서 제23왕조는 소멸하여 여러 도시국가들로 쪼개졌다.
이 시기에 하이집트 지방에서는 리비아 출신 군벌 테프나크트가 등장, 나일 강 삼각주 서부 사이스를 중심으로 단명한 제24왕조를 열고 영역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2.3. 누비아의 통치(제25왕조)
제25왕조 파라오의 행렬[16] |
기원전 714년 피이가 죽자 셰비쿠가 제25왕조의 제2대 파라오로 즉위했다. 셰비쿠는 그 아버지와 같이 아문 신앙을 받아들이며 본격적인 이집트화가 이루어졌던 인물이었다. 셰비쿠는 제24왕조를 멸망시키고 분열되어 있던 이집트를 통합했다. 또한 신왕국 시절 개건한 카르나크 신전을 방문하여 신관들의 예우를 받으면서 지역 민심을 안정시켰고, 덕분에 제25왕조는 예상 외로 별 탈 없이 이집트를 흡수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신하가 광대한 이집트를 한꺼번에 다스릴 수 없으니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로 나누어 따로 통치하는 것이 어떠냐고 간언하자
2.4. 신 아시리아 제국의 침공
그러나 이토록 강대한 왕국을 이끌었던 타하르카는 결국 신 아시리아 제국 때문에 패망하게 되었다. 비옥한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정복한 아시리아가 이집트에 눈독을 들이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는데, 이로 인해 아시리아가 이집트와 대대적으로 충돌하게 된 것이다. 타하르카는 아시리아와 이집트 사이에 있었던 유다 왕국의 왕 히즈키야를 도와 아시리아의 산헤립 왕을 견제하고자 했으나, 유다 왕국은 아시리아에 봉신 약속을 한다.[18] 산헤립의 뒤를 이은 에사르하돈 왕은 유다 왕국을 쳐부순 후 곧바로 이집트를 노렸다. 타하르카는 에사르하돈 왕과의 전투에서 대패해 남쪽으로 밀려났고, 아시리아는 하이집트 일대를 정복했다.
타하르카는 남쪽의 테베로 잠시 피난을 갔다가 쿠시 지방에 있었던 증원군을 모아 결국 아시리아 군대를 밀어냈으나, 에사르하돈이 군대를 수습하고 대공세를 펼치며 다시 쫒겨났다. 에사르하돈 왕은 북부의 멤피스를 포함해 대부분의 강역을 정복했고, 심지어는 타하르카의 가족들과 궁정 신하들 대부분을 포로로 잡아 수도 니네베로 끌고 갔다. 에사르하돈은 이집트의 도시들에게 조공을 바칠 것을 강요했고, 힘이 없었던 이집트는 이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당연히 이를 갈던 타하르카는 전열을 정비해 기원전 669년에 멤피스를 탈환했다. 에사르하돈은 바로 이집트에 재원정을 떠났으나 원정 도중 세상을 떠났고, 그 뒤를 이어 아시리아 전성기의 정복군주였던 아슈르바니팔 왕이 즉위했다. 아슈르바니팔은 결국 타하르카를 꺾고 이번에는 남부의 테베까지 함락시키면서 마침내 이집트 전체를 정복했다. 그러나 당시 아슈르바니팔이 원하던 것은 이집트를 직접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부유한 이집트의 도시들로부터 두고두고 공물을 뜯어내는 것이었기에 합병 대신 꼭두각시 파라오들을 앉혀놓고 돌아갔다. 아슈르바니팔은 사이스를 수도로 네코 1세를 새로운 파라오로 앉혀놓았는데, 이를 제26왕조라고 부른다.[19] 그러나 사이스의 귀족들 일부는 이집트와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정복자 아시리아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직 살아있었던 파라오 타하르카에 대한 충성심이 남아있었기에 아시리아에 대한 반란을 기획했고, 이를 눈치챈 아슈르바니팔은 바로 반란을 진압했다.[20][21]
아시리아를 피해 남쪽으로 도망간 타하르카는 기원전 664년 테베에서 사망했다. 타하르카가 죽자 그가 지명한 후계자인 타누타멘이 제25왕조의 마지막 파라오로 즉위했다. 타누타멘은 당연하게도 타하르카 시대의 위대했던 제25왕조를 회복하고 싶어했다. 그는 군대를 모아 북부로 진격, 아시리아 군대를 몰아내고 이집트의 독립을 꾀했다. 타누타멘은 멤피스를 포함한 이집트의 상당 부분을 회복했고 그 과정에서 아시리아의 대리인이었던 네코 1세를 죽이는 데 성공했다. 이집트에서 일어난 반란에 놀란 아슈르바니팔은 바로 이집트로 돌아와 네코 1세의 후계자였던 프삼티크 1세와 함께 연합군을 꾸려 타누테멘의 군대를 공격했다. 멤피스 북쪽에서 대전투가 일어났고, 이 전투에서 결국 타누테멘의 군대가 패배하면서 이집트는 아시리아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데 실패했다. 타누타멘은 남쪽으로 도망쳐 테베를 거쳐 결국 쿠시 지방까지 후퇴했다. 타누타멘의 뒤를 쫒은 아시리아 군대는 40여 일 만에 대도시 테베에 당도했다. 상이집트 일대를 한 번 응징해야겠다 싶었던 아슈르바니팔은 상이집트의 중심지 테베에 대해 무자비한 약탈을 자행했다. 이집트 측에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아시리아 측에 테베의 대약탈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 약탈로 인해 엄청난 양의 금은보화가 유출되었고 수많은 이집트인들이 노예로 끌려갔다. 신전들은 불타 내려앉았고 왕궁은 무너졌다.[22] 결국 테베 대약탈로 인해 쿠시 왕국이 최종적으로 이집트에서 쫓겨내려가면서 누비아 제25왕조의 시대는 완전히 종결되었고, 아시리아에 대항하는 세력은 완전히 끝장났으며, 이후 아시리아의 신하인 제26왕조가 아시리아 대신 전 이집트를 통치하며 외세의 간섭기이자 고대 이집트 최후의 시대인 이집트 말기 왕조가 시작된다.
3. 관련글
[1]
제21왕조의 개창자. 제3중간기의 초대 파라오이다.
[2]
피이가 다시 이집트를 통일하기 이전까지 통일 이집트를 다스린 마지막 파라오.
[3]
제25왕조의 초대 파라오이자 분열되어 있었던 이집트를 통합한 군주.
[4]
제25왕조의 실질적인 마지막 파라오이자 신아시리아 제국에 맞서 싸웠던 군주. 타하르카 이후 이집트는 신아시리아 제국의 속국으로 전락했다.
[5]
람세스 2세의 뒤를 이은
메르넵타도 먼저 태어난 형들이 아버지보다 먼저 다 사망해버려서 계승한 것이다.
[6]
제25왕조는
유다 왕국의
히즈키야 왕을 도와 아시리아를 견제하려 했으나 처참하게 실패했다. 이 내용은 <
열왕기>에 수록되어 있다.
[7]
신왕국 시절에 만들어진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보다 훨씬 완성도나 정교함이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8]
프수센네스 1세는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들 중 유일하게 무덤이
도굴당하지 않은
파라오이다. 심지어 신왕국 제18왕조의 파라오
투탕카멘의 무덤조차 고대에 소규모로 몇 차례 털려나갔지만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은 단 한번도 도굴당한 적이 없었다. 다만 침수가 잘되는 지역에 지은 바람에 미라가 다 썩었고, 부장품도 투탕카멘의 것에 비하면 별볼일 없었던 데다가 하필이면 발견 시기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인 1939년이라 조용히 묻혔다.
[9]
2세, 3세 등의 표현은 역사학자들이 연구하면서 동명이인을 구별하기 위해 먼저 태어난 사람부터 1세, 2세 순으로 붙인 것이다.
[10]
경우에 따라서는 그냥 '마' 부족이라고도 한다.
[11]
셰숑크 1세가
이스라엘 왕국을 침입했기에 《
성경》에도 그 이름이 등장한다. 《한글 개역성경》판에는 시삭이라고 쓰여 있다.
[12]
셰숑크 2세의 원래 무덤은 침수되기 쉬운 곳에 지어져 고대에 이미 훼손당했다. 신관들은 대충 셰숑크 2세의 관을 들어 그나마 멀쩡하던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에 안치했고, 이후 1939년에 발견되었다. 셰숑크 2세의 관을 열 때
이집트 왕국의 왕이었던
파루크 1세가 직접 참관하기까지 했다.
[13]
즉위 후 7년 정도밖에 못 살았다. 그의 이름이 새겨진 건물들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기에 남긴 업적도 알려지지 않았다.
[14]
본명은 '헤즈케페레 세테페나문 하르시에세'지만 줄여서 그냥 '하르시에세 A'라고 부른다. 학자들은 하르시에세 A를 제23왕조의 개창자로 본다.
[15]
셰숑크 3세는 기원전 798년에 사망했고, 왕좌는 셰숑크 4세에게 이어졌다.
[16]
구성원들이 피부색이 검은 완전한
흑인임을 볼 수 있다. 때문에 제25왕조의 파라오들을 흑인 파라오라고 부르기도 한다.
[17]
고대 이집트 회화에서도 누비아인은 흑인에 가까운 검은 피부를 지닌 모습으로 묘사되나, 이집트인은 상대적으로 밝은 피부를 가진 모습으로 묘사된다.
[18]
열왕기 하권 18,17-19,37에 의하면 하느님의 도움으로 아시리아군의 진지에 전염병이 돌아 하루 만에 185,000명의 병사들이 사망해 물러갔다고 나와있다. 185,000명의 사망은 과장이겠으나 아시리아군이 철군한 것은 사실인데, 같은 사건에 대한 아시리아 측 기록(
산헤립 프리즘)에서도 예루살렘 '포위'만 언급할 뿐 (다른 성읍들과는 다르게) '점령' 이야기는 쏙 빠져있고 반면 조공을 받았다는 이야기만 실려있다. 때문에 역사학게에서는 히즈키야가 돈으로 아시리아군을 돌려보낸 '기적'이 2열왕 18,17-19,37에서 극적으로 표현된 것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정하기도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사실 직전 기록인 2열왕 18,13-16에서는 정말 솔직하게 히즈키야가 아시리아에 조공 바쳤다고 되어있다. 즉 하나의 사건에 대한 두 가지 시선의 기록이 2열왕 18,13-16과 2열왕 18,17-19,37로 기록된 것이다.
아시리아를 돈으로 돌려보냈다는 성경 기록(2열왕 18,13-16)에서는 금 30탈렌트(1.2톤)와 은 300탈렌트(12톤)를 바쳤다고 되어있고 아시리아측 기록엔 금 이야기 없이 은 800탈렌트(32톤)를 바쳤다고 되어있는데, 어느쪽이든 유다 왕국이 상당히 부유했음을 전제한다. 산헤립 입장에서도 무시하고 다른 도시들처럼 점령하기엔 너무나도 많은 돈이었을 것이다. [19] 네코 1세의 아들 프삼티크 1세는 에사르하돈 왕 시절 이미 니네베에서 교육을 받은 친아시리아파 인물이었다. [20] 사실 인종이나 외모를 따지면 흑인인 쿠시인 보다 같은 백인 계통에 속하는 아시리아인들이 이집트인에 가깝다. 하지만 아시리아는 문화적으로 이방인이지만, 쿠시는 이집트 바로 남쪽에서 오랫동안 교류한 사이인지라 같은 문화권에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러니 "외래인"인 아리시아 보다는 적어도 같은 말과 풍습을 가진 쿠시왕 타하르카에게 더 충성심이 생기는 거다. [21] 인종이나 민족 보다 문화로 동질감을 가지는 경우는 많다. 대표적으로 현대의 한국과 일본도 인종적 비슷한 중국 보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문화라는 동질감을 가진 미국에 더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다. [22] 이 내용은 아시리아의 기록에 굉장히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당대 고대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엄청난 충격과 공포의 대사건이었기에 《성경》의 < 이사야서>에도 나와있을 정도이다.
아시리아를 돈으로 돌려보냈다는 성경 기록(2열왕 18,13-16)에서는 금 30탈렌트(1.2톤)와 은 300탈렌트(12톤)를 바쳤다고 되어있고 아시리아측 기록엔 금 이야기 없이 은 800탈렌트(32톤)를 바쳤다고 되어있는데, 어느쪽이든 유다 왕국이 상당히 부유했음을 전제한다. 산헤립 입장에서도 무시하고 다른 도시들처럼 점령하기엔 너무나도 많은 돈이었을 것이다. [19] 네코 1세의 아들 프삼티크 1세는 에사르하돈 왕 시절 이미 니네베에서 교육을 받은 친아시리아파 인물이었다. [20] 사실 인종이나 외모를 따지면 흑인인 쿠시인 보다 같은 백인 계통에 속하는 아시리아인들이 이집트인에 가깝다. 하지만 아시리아는 문화적으로 이방인이지만, 쿠시는 이집트 바로 남쪽에서 오랫동안 교류한 사이인지라 같은 문화권에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러니 "외래인"인 아리시아 보다는 적어도 같은 말과 풍습을 가진 쿠시왕 타하르카에게 더 충성심이 생기는 거다. [21] 인종이나 민족 보다 문화로 동질감을 가지는 경우는 많다. 대표적으로 현대의 한국과 일본도 인종적 비슷한 중국 보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문화라는 동질감을 가진 미국에 더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다. [22] 이 내용은 아시리아의 기록에 굉장히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당대 고대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엄청난 충격과 공포의 대사건이었기에 《성경》의 < 이사야서>에도 나와있을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