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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아비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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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 1909년 4월 11일
면적 176km2(텔아비브 관구)
인구 약 148만 명(텔아비브 관구)
시장 론 훌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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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예루살렘과의 연계3. 역사
3.1. 상고대3.2. 고대3.3. 중세3.4. 오스만 제국
3.4.1. 자히르 알 우마르 산하3.4.2. 나폴레옹의 일시 점령 (1799년)3.4.3. 아크레 정권의 남부 거점3.4.4. 메흐메드 알리 산하3.4.5. 근대화 시기
3.4.5.1. 야파 오렌지3.4.5.2. 국제 & 산업 도시3.4.5.3. 1차 세계 대전
3.4.6. 영국령 팔레스타인
3.5. 텔아비브 건설과 확장3.6. 현대
4. 관광
4.1. 야파 구시가지
5. 사진6. 여담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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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야파 2.jpg
옛 야파 항구와 시가지

지중해 바닷가에 위치한 이스라엘 최대도시.[1] 십자군 전쟁기 Jaffa 로 유명한 옛 항구 야파 (يافا) 인근에 20세기 들어 세워진 도시로, 1948년부터 1977년까지 이스라엘의 임시수도였다. 또한 1968 텔아비브 장애인 올림픽이 개최된 도시이다.

2. 예루살렘과의 연계

텔아비브의 전신인 야파는 전통적으로 예루살렘으로 가는 관문이자 그 외항이었고, 근대 시기 유대인들의 정착지였다. 따라서 이스라엘 건국이 선포된 곳이기도 했다. 그러다 1967년 6일 전쟁에서 승리하여 예루살렘 전역을 점령한 이스라엘 정부는 예루살렘을 재건하는 도시계획에 착수하여 1968년부터 1992년까지 국회의사당 정부종합청사 대법원 공안부 경찰청[2] 문화복지부처들, 이스라엘방송공단 이스라엘은행을 차례로 이전했으니, 1977년에 이르러 텔아비브와 예루살렘은 중국 상하이 베이징 또는 브라질 상파울루 브라질리아, 나이지리아 라고스 아부자, 이탈리아 밀라노 로마, 인도 뭄바이 뉴델리, 파키스탄 카라치 이슬라마바드처럼 경제중심과 정치중심으로 상호간의 역할을 분담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내외의 정세가 불안하기 때문에 가까운 미래의 총력전에 대비하여 방위기관(국방부와 참모본부, 육해공군청과 국군사령부들), 정보기관 본부(모사드, 신 베트, 아만), 경제산업부처들, 국유기업들과 증권거래소, 대사관과 공사관과 영사관을 비롯한 각종 정부기관들은 여전히 텔 아비브 관구에 있다.

이외 주요 수교국들의 외교공관 역시 텔아비브에 위치한 경우가 많은데, 이는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이 점령한 구 요르단령 동예루살렘은 국제적으로 여전히 이스라엘 영토로 인정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3] 국제 사회의 주권국가들 가운데 친미, 친이스라엘 성향의 약 50여 개국을 제외한 나머지 대다수는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이런 국가들 중 이스라엘의 수교국은 예루살렘 관구에 상주하는 대사급 외교공관들의 철수를 요구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478호에 근거하여 예루살렘이 아닌 텔아비브에 주 이스라엘 대사관을 두고 있다. 여기에는 대한민국 역시 포함되어 현재 주 이스라엘 대한민국 대사관도 텔아비브에 위치하고 있다.[4]
파일:israel_telaviv_district.jpg
텔아비브 관구의 도시철도 기능을 대행하고 있는 이스라엘철도공사(רכבת ישראל בע"מ)의 광역철도를 타거나 시외버스를 타고 벤 구리온 국제공항 예루살렘에 갈 수가 있으며, 텔아비브 경전철 시내버스 통근 관광에 매우 큰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예루살렘에 비해 인지도가 낮지만, 벤 구리온 국제공항을 통해서 이스라엘에 입국한 관광객들과 사업가들과 종교인들이 1순위로 들르는 곳이다. 게다가 예루살렘 물류 네트워크에 불리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법인들의 본사와 외국 법인들의 지사들은 대부분 텔아비브에 자리잡고 있다. 이스라엘 중앙통계국의 2022년도 이스라엘 통계초록(Statistical Abstract of Israel 2022)에 따르면, 텔아비브 관구의 인구는 약 148만 명이다. 더 넓은 범위로는 4백만.

3. 역사

파일:ISR-2013-Aerial-Jaffa-Port_of_Jaffa.jpg
야파 항구 일대의 전경

원래는 이 근처에 있는 야파(Jaffa / يافا)[5]라는 고대 이래의 항구도시가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대홍수 후, 노아 (누흐)의 아들들 중 하나인 야페트 (Japheth)가 세운 도시라 한다. 한편 헬레니즘기에는 그리스 신화를 차용, 안드로메다의 모친인 카시오페이아 혹은 이오페이아에서 지명이 유래했다는 설명도 있었다. 로마 시기에는 바람의 신 아엘로스의 딸 이오파와 연관 짓기도 했다.

지금도 어항으로 남아있는 야파의 항구는 기원전 3천년 경부터 활용된, 세계 최고의 항구 중 하나로 구약성경에서 야포 (욥바)로 언급될 정도로 역사가 유구하다. 고대 이집트의 아마르나 서신에서는 야푸로 기록되는 등 야파는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단일 지명을 유지한 도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쿠르카르라 불리는 40m 높이의 퇴적-사암 언덕 (텔) 위에 형성된 도시는 군사적 요충지였고, 최소 기원전 1800년 경부터 도시가 형성되었다.

3.1. 상고대

기원전 15세기경 야파는 이집트 신왕국령이었고, 잠깐 독립했으나 투트모세 3세의 장군 제후티 (투티)가 재점령했다. 이때의 이야기가 파피루스 고문서에 전해지는데, 제후티가 후퇴를 가장하며 조공으로 위장한 포대를 가축에 실어 성으로 보냈고 그 속에 숨어있던 이집트 군이 도시를 장악했다는 서사이다. 이는 호메로스에 나오는 트로이목마 이야기를 2세기 이상 앞선 서사적 원형으로 여겨져 주목을 받았다.

바다민족 침공 후 기원전 1200년 무렵 야파는 팔레스타인 (필라스틴)의 어원인 블레셋 (필라스티아)의 최북단 도시가 되었다.[출처] 구약성서 여호수아서에도 야파는 12지파 중 단 지파와 접경한 블레셋 도시로 나오며, 이스라엘 왕국은 결코 야파를 수중에 넣지 못했다. 다만 워낙 예루살렘과 가까운 항구였기에 열왕기하 밎 에스라서에 의하면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에 쓰인 레바논 백향목이 야파 항을 통해 유대 로 들어왔다고 한다. 요나서에 의하면 요나가 타르쉬로 출항한 곳이라 하는 등 야파는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었다.

3.2. 고대

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 제국의 센나케립이 아슈켈론의 필라스티아 왕으로부터 야파를 점령했다. 그후 야파는 신바빌로니아 (칼데아), 아케메네스 제국 (페르시아) 등을 거치며 티레에 기반한 페니키아 인들의 지배를 받았다. 페니키아 도시들에 밀려 야파는 알렉산드로스 3세의 원정기에 언급도 되지 않는 등 중요성이 하락했다. 기원전 315년, 안티고노스 1세가 야파를 점령했고 3년 후에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함락해 파괴하였다. 다만 곧 재건된 야파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하에서 기원전 3세기에 화폐 주조소가 설치되고 인장이 찍힌 암포라 (술독) 손잡이가 다수 생산되는 등 중요한 도시로 거듭났다. 기원전 198년, 안티오코스 3세의 판니온 전투 후 야파는 셀레우코스 왕조령이 되었다.

마카베오 전쟁기인 기원전 163-62년, 아퍄 주민들은 인근 유대인들을 선상으로 초대한 후 그 선박을 침몰시켜 수백명을 익사시켰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유다 마카베오는 야파를 공격, 항구와 선박들에 방화하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다만 야파를 직접 지배하지는 않았고, 기원전 147-46년 그의 동생 요나단 압푸스 역시 야파의 데메트리오스 2세 휘하 셀레우코스 수비대를 축출했지만 도시를 병합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기원전 143년, 시몬 타시가 야파에 수비대를 두고 셀레우코스측 지휘관 트리폰과 내통할 것을 우려해 비유대 주민들을 축출했다. 이로써 야파는 하스몬 왕조령이 되었고, 뒤이어 안티오코스 7세가 남하하여 야파 양도를 요구하자 시몬 타시는 소액의 연공을 바치는 것으로 무마했다. 야파 점령은 마카베오서에서 전략적 승리로 묘사되어 있다.

하스몬 왕조기 야파는 요새화되었고, 가자와 함께 유대 지방의 주요 항구로써 중시되었다. 이는 기원전 1세기의 성벽, 무덤 유적 밒 동전 유물들로 확인된다. 기원전 82년, 셀레우코스 군주 안티오코스 12세가 남하하자 하스몬 군주 알렉산드로스 야나이가 야파 인근에서 카파사바까지 28km에 달하는 야나이 장벽을 축조했지만 결국 돌파되었다.[7] 이후 요세푸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 스트라본 등은 기원전 60년대 들어 아리스토불로스 2세의 후원으로 야파가 해적 소굴이 되었다고 기록했다. 뒤이어 기원전 63년,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일대를 정복했고 기원전 47년 하스몬 왕조의 실권이 부활했지만 기원전 39년에 로마- 헤로데 연합군이 하스몬-파르티아 동맹으로부터 야파를 점령했다. 이후 야파는 헤롯 왕국령이 되었고, 헤롯이 북쪽에 새 항구인 카이사레아를 건설하며 야파는 점차 그에 가려져 쇠퇴했다. 다만 요세푸스에 의하면 도시 지위를 얻었다 한다.

헤롯의 사후, 일대는 장남 헤로데 아르켈라오스의 영토가 되었으나 서기 6년 그가 폐위되며 로마 제국령 유대 속주가 되었다. 서기 1세기, 스트라보는 야파가 예루살렘이 보이는 그 외항이라 묘사했다. 당시 주민 대부분은 유대인이었고, 시가지는 서서히 확장되었다. 야파 항에서는 로마 시대의 고급 적색 토기, 빵/치즈 도장, 동전 등이 발굴되었다. 1차 유대 반란 시기 세스티우스 갈루스 휘하의 로마군은 야파에 상륙해 도시를 파괴하고, 닥치는 대로 살육하여 (요세푸스 추산) 8천 4백의 주민을 학살했다. 그후 인근 유대인들이 정착, 재차 이집트와 시리아간 교역항으로 복구되었다. 하지만 얼마 후, 베스파시아누스 휘하 로마군이 접근하자 이들은 해상으로 도주했으나 폭풍을 만나 4천여명이 사망하였고 해안에 밀려온 이들도 로마군에게 학살되었다. 야파는 재차 파괴되었고, 해적 기지화를 막기 위해 수비대가 배치되었다.

그후 야파는 플라비우스 왕조를 가리는 플라비아 로페 (Flavia Ioppe)로 개칭되어 중소 도시로 근근이 이어졌다. 2차 유대 반란 당시 시가지가 전소되는 등 파괴가 있었음에도 예루살렘과 달리 야파의 유대인 공동체는 이어졌고, 초기 기독교 기록에 야파는 중소 도시로 묘사되었다. 신약성서 사도행전에서 야파 (욥바)는 베드로가 과부 도르카스를 소생시키고, 그에게 동물이 담긴 그릇과 함께 성령의 말씀이 내려왔다는 장소로 등장한다. 예루살렘 탈무드에서도 4-5세기 야파는 아카바르 카니나, 핀차스 벤 야이르 등의 랍비가 활동하는 등 유대 학문의 거점으로 묘사되었다. 기타 탈무드 본들에도 레브 앗다 데민, 라브 나츠만, 타춤 등의 학자들이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학자들의 이름들은 근래 들어 야파 벼룩시장 쪽의 도로명에 적용되었다. 한편, 야파는 5세기 초에야 주교구가 설치되는 등 팔레스타인 지역 치고 기독교화가 늦었다. 동로마 제국기 야파는 안정을 유지했다.

3.3. 중세

636년, 이슬람 제국군이 야파를 점령했다. 우마이야 왕조 이래로 야파는 팔레스타인의 새 총독부인 라믈라의 외항이 되었고, 쇠락한 카이사레아 대신 팔레스타인 지역의 중심 항구로 성장했다. 압바스 왕조, 툴룬 왕조, 익시드 왕조를 거쳐 10세기 말엽 야파는 파티마 왕조령이 되었다. 10세기 후반의 지리가 알 무캇다시는 야파가 작은 도시이지만 항구 문까지 모든 성문이 철문인 강력한 성벽으로 둘러져 있고, 바닷가의 모스크가 멋지며 항구가 훌륭하다고 기록하였다.

3.3.1. 십자군 전쟁

1099년 6월, 1차 십자군이 야파를 점령했다. 정확히는 십자군 본대가 북쪽의 아르수프에서 내륙으로 향하여 예루살렘 공방전을 치르고 있을 때에, 6척의 제노바 함대가 야파에 입항한 것이다. 비록 인근 파티마 함대에게 한척 외에 나포되었으나, 레몽 드 필레의 십자군이 라믈라 부근에 매목하던 파티마 군을 격파한 후 파티마 측은 야파의 성벽을 허물고 철수했다. 1100년 1월, 예루살렘 왕국 고드프루아가 야파에 당도하여 성벽을 재건했다. 뒤이어 아르수프를 점령한 그는 베네치아 함대를 맞이하려 야파로 돌아왔다가 와병, 회복 후 재차 북상해 아크레를 포위했으나 도중 사망했다.
3.3.1.1. VS 파티마 왕조
1101년 4월, 신임 교황 특사 마르코 모리스가 제노바 함대와 야파에 당도했고 이듬달 보두앵 1세는 야파에 머물다가 카이사레아를 점령했다. 한편, 아스칼론에 집결한 파티마 군대는 9월에 야파를 공격했으나 보두앵이 보낸 원군에 격퇴되었다. 뒤이어 벌어진 1차 라믈라 전투에서 갈릴리공 위그가 야파로 도주하기도 했으나 결국 십자군이 승리, 다음날 보두앵은 야파에 개선했다. 다만 1102년 5월의 2차 라믈라 전투 때에는 보두앵이 대패하여 밤을 틈타 잉글랜드인 고드릭의 배에 올라 야파로 도주했고, 라믈라를 점령한 파티마 군이 수륙 양면으로 도시를 포위했다. 성내에는 백명 미만의 기사들만 있었으나, 야파의 성직자가 예루살렘에 소식을 전한 후 3일만에 90여 기사들이 참십자가와 함께 포위를 뚫고 합류하여 상황이 나아졌다. 다시 3일 후에는 잉글랜드, 프랑스, 독일의 무장 순례단이 해상 봉쇄를 뚫고 야파에 당도했다. 그 다음날, 보두앵은 전 병력과 함께 반격했고 파티마 군이 아슈켈론으로 철수하자 그 진영을 약탈했다.

1106년에는 갈릴리를 공격한 다마스쿠스 군대와 함께 파티마 군이 야파를 습격, 십자군을 격파하고 무장 순례단을 학살했다. 다만 도시를 점령하지는 못했다. 십자군에게 자페 (Jafeh)로 불린 야파는 예루살렘과 직결되는 위치 덕에 이탈리아 해양 도시들로부터의 인적, 물적 보급항이 되었다. 동시에 예루살렘 왕국 남부의 주요 거점으로써 파티마령 아스칼론을 견제하는 군사적 요충지였고, 1110년 보두앵 1세는 야파 백작령을 두어 중시하였다. 야파 백국은 명목상 에데사 백국, 트리폴리 백국과 동급이었고 갈릴리 공국과 함께 왕국 내 양대 제후령이었다. 첫 야파 백작은 보두앵 2세의 사촌이자 루이 6세에게 영지를 압수당한 후 순례차 체류 중이던 위그 1세 (드 퓌세)였다. 1113년 8월, 산나브라에서 승리한 모술 총독 마우두드가 야파와 예루살렘 일대를 약탈한 후 회군했다. 다만 2차 공격을 준미하던 그는 다마스쿠스에서 암살되었다. 1115년, 파티마 군이 재차 야파 점령을 시도했으나 역시 격퇴되었다. 1118년, 위그 1세가 사망한 후 섭정기를 거쳐 아들 위그 2세가 백작에 올랐다. (1122년)

1123년 4월,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2세 아르투크 왕조에게 사로잡히자 이듬달 와지르 알 바타이히가 이끄는 파티마 군대가 수륙 양면으로 야파 점령을 시도했다. 하지만 예루살렘 섭정 외스타슈가 참십자가를 대동, 이브네 전투에서 파티마 군대를 격파하고 적진을 약탈했다. 그해 6월, 외스타슈가 사망하자 야파 백작 위그 2세가 그 과부인 엠마와 결혼하고 의붓아들들을 대신해 카이사레아 및 시돈의 섭정이 되며 예루살렘 왕국의 권신이 되었다. 1131년, 보두앵 2세가 사망하고 사위 풀크가 계승하자 위그 2세는 반발했다. 마침 그는 풀크의 부인인 여왕 멜리장드와의 염문설까지 있었다. 1132-34년, 의붓아들들의 모함에 반역자로 몰린 위그는 아슈켈론의 파티마 군대와 연대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벨린 영주 바리장의 이탈로 진압되었다. 이후 야파는 왕령지로 귀속되었고, 1151년에야 보두앵 3세가 동생 아모리를 봉하며 백작령아로 부활했다. 1152년, 멜리장드와 보두앵 3세 간의 모자 갈등 시에 아모리는 전자 편을 들다 결국 후자에 복속했다. 이듬해 보두앵은 긴 공방전 끝에 아스칼론을 점령했고, 아모리에게 주어 야파-아스칼론 백작령이 설립되었다.
3.3.1.2. VS 아이유브 왕조
1123년 이후 야파는 이집트측 침공에서 벗어났고, 1153년 아슈켈론 점령으로 완전히 안정을 찾았다. 한편, 예루살렘 왕국의 중심 항구 지위는 점차 북쪽의 아크레로 옮겨지게 되었다. 1157년, 백작 아모리는 8촌 아그네스와 결혼해 두 자녀를 두었다. 다만 1163년, 아모리가 왕위에 오르며 이혼당한 아그네스는 백작부인 명목으로 야파-아스칼론 세금의 일부를 연금으로 받았다. 한편 아모리의 즉위 후 재차 왕령지가 되었던 야파-아스칼론 백국은 1176년, 그의 딸 시빌라가 굴리에모 델 몬페라토[8]와 결혼할 때에 지참금으로 주어지며 부활했다. 1180년, 시빌라가 기 드 뤼지냥과 재혼하며 후자가 야파-아스칼론 백작이 되었다. 1184년, 보두앵 4세는 시빌라와 굴리에모 사이의 아들 보두앵 5세를 후계자로 봉했다. 이에 기가 반발하자 보두앵 4세는 귀족회의 통해 그의 영지 중 야파를 압수했다. 다만 기는 아슈켈론에서 버티며 무슬림들을 공격하는 등 횡포를 부렸고, 1186년 그가 왕위에 오르며 야파-아스칼론은 다시 왕령지가 되었다.

1187년, 하틴 전투 이후 살라흐 앗 딘 유수프 (살라딘)의 동생 알 아딜이 야파를 공격하여 격전 끝에 점령했다. 저항의 대가로 주민들은 노예가 되었고, 도시는 아이유브 왕조령이 되었다. 한편, 실권을 잃어가던 기는 1191년 7월에 아크레를 수복하자 형 지오프리를 명목상의 야파-아스칼론 백작에 봉했다. 그무렵, 3차 십자군의 당도에 살라딘은 적에게 이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야파 등지[9]의 성벽을 허물었다. 1191년 9월, 아르수프 전투에서 승리한 리처드 1세는 3일 후 야파를 무혈 점령했다. 다만 도시는 폐허 상태였기에 성밖 올리브 숲에서 숙영했고, 라믈라의 살라딘과 두 차례 휴전 협상을 했으나 결렬되었다. 그후 리처드는 아크레로 향했다가, 함대와 함께 돌아와 예루살렘 수복의 거점으로써 야파를 재건했다. 리처드는 한동안 야파 및 라믈라에 머물며 살라딘과 휴전을 논의했고, 근처 성채들을 복구했다.

1192-93년의 겨울과 1193년 6월, 리처드는 두 차례 예루살렘 근교까지 진격했으나 살라딘이 직접 수비에 나서자 결국 7월에 야파로 회군했다. 얼마후 리처드가 베이루트를 노리며 아크레로 떠나자 살라딘은 야파를 포위했고, 3일만에 점령했다. 시타델의 수비대 역시 항복했다. 살라딘은 튀르크 기병대의 약탈과 학살을 막기 위해 시타델의 수비대 주둔을 허용했다. 하지만 다음날, 리처드는 기병대 및 50척의 함대와 돌아왔고 (비록 실패했지만) 공격을 가하자, 수비대가 항복을 철회했다. 8월 1일, 시내의 사제가 헤엄쳐 와서 시타델에 수비대가 남아있음을 알리자 리처드는 함대와 함께 야파 항에 접근했다. 이에 수비대가 시내로 나서 반격했으나, 패배하고 재차 항복 의사를 밝혔다. 그때 리처드가 2,500여 병력[10]으로 돌격해오자 지쳐있던 아이유브 군대는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성밖으로 밀려났다. 군대의 사기가 저하되자 살라딘은 그대로 철수했다.

야파 수복 후 리처드는 살라딘에게 야파와 아스칼론을 그의 제후로써 십자군이 통치한다는 제안과 함께 아크레의 앙리 1세에게 원군을 청했다. 4일 후, 살라딘은 원군이 오기 전에 야파의 십자군 진영을 기습했다. 리처드는 2,000여 병력[11]과 급조한 말뚝 방어선 뒤애 창병과 쇠뇌병을 배치해 아이유브 기병대를 격퇴하였다. 한편 살라딘은 별동대와 크게 우회해 야파 수비를 맡은 제노바 인들을 압도하고 도시에 입성했는데, 리처드가 쉴틈도 없이 돌아와 격퇴해내었다. 뒤이어 벌어진 양측 기병대 간의 일전도 리처드가 궁수들로 기선을 제압한 후 직접 돌격하자 십자군의 승리로 귀결되었고, 살라딘은 밤중에 예루살렘으로 철수했다. 야파 전투에서의 대활약 후 리처드는 와병하였고, 1192년 9월 현상 유지의 5년 휴전을 명시한 야파 (라믈라) 협정을 맺은 후 성지를 떠났다.[12] 이로써 야파는 복원된 십자군 영토의 최남단 도시가 되었고, 1193년 명목상의 백작 지오프리 역시 유럽으로 돌아가며 기의 또다른 형 애므리 드 뤼지냥이 계승했다.

1197년 9월, 독일 십자군 선발대의 갈릴리 진격을 격퇴한 알 아딜은 야파를 기습해 점령했다. 이에 앙리 1세가 야파로 남하하려 군대를 모았으나 급사하였고, 막 키프로스 국왕이 오른 애므리가 독일 십자군 본대와 함께 아크레로 당도하여 새 예루살렘 국왕이 되었다. 독일 십자군은 예정되었던 야파 공격 대신 레바논 방면을 공격하다가 돌아갔다. 1204년 9월, 알 아딜은 4차 십자군을 피하기 위해 6년 간의 휴전을 체결하며 야파 및 라믈라와 나사렛 등을 할양하였다. 1228년, 6차 십자군을 이끌고 온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시칠리아 왕국 국왕 프리드리히 2세는 야파를 재차 요새화하였다. 이때 성벽에 라틴어 및 아랍어로 '주 예수 메시아 부활 후 1229년,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란 명문이 새겨졌다. 뒤이어 술탄 알 카밀과 협상에 나선 그는 1229년 2월, 예루살렘 대여 및 10년의 휴전을 명시한 2차 야파 조약을 맺었다.[13] 이듬달 예루살렘을 참배한 프리드리히는 야파를 거쳐 아크레를 통해 본국으로 돌아갔다.

1235년, 장 드 브리엔은 조카 고티에 드 브리엔을 야파-아스칼론 백작에 봉하였다. 그는 애므리의 손녀이자 레텔-앙주 왕가 및 이벨린 가문의 혈통도 이어받은 마리와 결혼하여 정통성을 확보했다. 고티에는 무슬림들을 적대하지 않았고, 1237년 템플기사단이 아틀리트의 무슬림 목동들 습격을 말리기도 했다. 1239년 9월, 귀족 십자군은 야파를 거쳐 남하했지만 베이트 하눈 전투에서 아이유브 군에게 대패하였다. 전투 도중 고티에는 사구에 숨어있던 적의 궁수들에게 위치가 노출되자 철수를 주장했으나, 수용되지 않자 도주하였다. 1242년에는 케라크의 영주 앗 나시르 다우드[14]가 이집트 술탄 앗 살리흐 아이유브에게 부탁해 얻어낸 샴스 앗 딘 시라순쿠르 휘하 2천 기병대와 야파를 포위했다. 다만 포위가 장기화되자 술탄은 후퇴를 명했고, 앗 나시르 역시 회군했다.[15] 다만 이후로도 앗 나시르는 해안과 예루살렘 간의 교통을 차단, 순례단에게 통과세를 걷거나 공격했다.

1244년 8월, 이집트-호라즘 군대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자 도시의 라틴인들은 야파로 철수했다. 다만 도중 도적떼의 습격으로 실제 야파에 당도한 인원은 3백여 뿐이었다. 그해 10월에는 고티에가 시리아-십자군 연합군과 함께 포르비에 (히르비야) 전투에서 이집트-호라즘 군에 맞섰으나 패하여 포로가 되었다. 1246년, 고티에가 카이로에서 옥사하자 실권자인 키프로스 국왕 앙리 1세는 발리앙 디블랭의 손자인 장 드 이벨린 (장 디벨링)을 새 야파-아스칼론 백작으로 봉했다. 장은 1249년 루이 9세의 7차 십자군에 종군, 다미에타 함락을 도왔다. 실패한 이집트 원정 후, 1252년 5월 루이는 야파에서 아사신 및 이집트의 맘루크 정권과 동맹을 맺었다.[16] 다만 기대했던 맘루크-아이유브 전쟁이 벌어지지 않자 동맹은 흐지부지되었고, 루이는 야파에 1년여간 머물며 도시를 요새화하였다. 그러던 1253년 5월의 성 요한 축일에 다마스쿠스로 회군하던 아이유브 군주 앗 나시르 유수프는 철수 도중 야파 성밖의 루이 진영을 도발해 십자군 궁병과 전초전을 벌였다. 다만 승부가 나지 않자, 그대로 북상해 시돈을 기습 점령하고 떠났다. 이에 이듬달, 루이는 시돈으로 향하여 그곳 역시 요새화한 후 이듬해 성지를 떠났다.[17]
3.3.1.3. 바이바르스의 점령 (1268년)
루이의 요새화 덕에 아크레, 시돈, 야파, 카이사레아 등은 견고한 수비력울 자랑하며 안정을 누렸다. 1254년, 야파-아스칼론 백작 장은 정식 국왕이 부재한 예루살렘 왕국의 실권자인 바일리가 되었다. 그는 1256년, 갈릴리 약탈전을 이끌고 맘루크측 반격을 격퇴하는 등 능력을 보였다. 같은해 벌어진 베네치아-제노바 전쟁에서는 아르수프 영주인 사촌 장과 함께 베네치아 & 피사 편에 서서 제노바 및 티레 영주 필리프 드 몽포르에 맞섰다. 1258년 아크레 시가전에서 장은 제노바 측 석궁병에 사살될뻔한 위기를 넘겼다. 한편 맘루크 술탄 바이바르스는 1260년 아인잘루트 전투의 승리 후에도 한동안 대몽 항쟁에 치중하다 1263년 초엽 들어 십자군에 대한 공세에 나섰다. 그러자 장은 무슬림 포로 석방을 대가로 휴전을 제안하했는데, 기사단의 불이행으로 결렬되고 말았다. 1264년 여름, 임시 휴전이 끝나기도 전에 십자군이 야파에 집결했다는 첩보가 들리자 바이바르스는 카이사레아와 아틀리트의 습격을 지시해 맞섰다.

1265년 봄, 바이바르스는 카이사레아와 하이파를 기습 점령하고 아르수프를 포위했다. 수비대가 안전 철수를 대가로 항복하자, 바이바르스는 약속을 어기고 이들을 동원해 성벽을 허문 후 카이로로 압송했다. 다만 부상자들은 야파로 돌려보내 주었다. 바이바르스의 활약으로 이제 아크레 이남의 십자군 거점은 야파가 유일했다. 그나마 장이 바이바르스와 좋은 관계를 유지한 것이 다행이었다. 1266년 7월, 바이바르스는 야파와 아크레를 포함한 십자군 해안 도시들의 휴전 제의를 모두 거절했다. 뒤이어 사페드 등을 점령한 그는 장이 어부로 위장한 습격대로 시나이 반도의 카트야 일대를 약탈하자 분노했다. 그해 말엽, 장의 사후 백작위를 계승한 아들 자크는 카스티용 휘하 사절단을 보냈으나 휴전을 연장하지 못했다. 1267년, 야파 주민들이 협정을 어기고 바이바르스가 공격한 아크레에 식량을 제공했으며 무슬림 여성이 시중 드는 술집 열었다는 소문도 그를 자극했다.

십자군의 내분이 계속되던 1268년 2월, 바이바르스는 몽골과 싸우기 위해 알레포로 북상한다는 선포와 함께 카이로에서 출정했다. 이때 진짜로 몽골군이 알레포를 습격했기에 십자군 측은 대비하지 않았고, 3월 초엽 맘루크 군이 성 앞에 나타나자 자크는 카스티용 등을 사절로 보냈다. 하지만 그들은 구금되어 혐의 조사 후 석방되었고, 자크가 뒤늦게 항복 협상에 나섰으나 바이바르스는 총공격에 나섰다.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도시는 주요 십자군 거점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하루만에 함락되었고, 바이바르스는 장과의 옛 정을 고려했는지 수비대를 아크레로 보내주는 관용을 베풀었다. 이후 성벽이 허물어졌고, 모스크가 세워졌다. 또한 바이바르스는 라믈라의 백색 모스크를 중수하며 야파 수복을 기념하는 명문을 남겼다. 예루살렘 왕국의 남부를 평정한 바이바르스는 뒤이어 안티오크까지 함락하며 십자군을 남북으로 압박했다. 한편, 같은해 야파에 공을 들였던 프리드리히 2세의 손자이자 명목상의 예루살렘 국왕 콘라딘가 루이 9세의 동생 처형되며 호엔슈타우펜 왕가 역시 종언을 맞았다.[18]

3.3.2. 맘루크 왕조

야파 함락 후에도 야파-아스칼론 백작위는 명목상으로 무려 16세기 말까지 이어지지만, 사실상으로는 1268년에 소멸하였다. 그나마 1276년 백작 자크 드 이벨린이 사망한 후 계승한 동생 기 드 이벨린이 1299년 제노바 함대로 일시적으로 비블로스를 점령하고, 1301년 2월에 쿠틀루그샤 휘하 일 칸국군이 알레포 일대를 약탈할 때에 참가한 것이 성지에서의 마지막 존재감이었다. 이때 회군하며 군대를 남겨둔 루아드 섬 역시 1302년에 섬멸된다. 장 드 이벨린의 직계 가문 역시 1367년에 끊긴다. 한편, 바이바르스는 1272년 십자군과 휴전을 맺은 이후로 일 칸국의 침공 대비에 치중했다. 1272년 8월, 몽골군의 남하 소식에 그는 이집트의 모든 기병들에 동원령을 내리고 야파에서 집결시켰다. 다만 생각보다 침공 규모가 크지 않자 카이로로 회군하며 베두인 부대만을 보냈고, 바이바르스가 친정한 것으로 착각한 몽골군은 철수했다. 1291년 아크레 함락 후 야파는 완전히 평화를 찾았다.

하마 영주 겸 역사가 아불 피다 이스마일은 1321년에 야파를 필라스틴 (팔레스타인)의 작지만 쾌적한 도시로, 좋은 항구라고 묘사했다. 또한 잘 요새화되었고 시장이 정기적으로 열리며, 많은 상인들이 왕래한다고 덧붙였다. 넓은 항구에 대해서는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선박이 왕래하고, 세계 각지로 항해하며 라믈라와 8km 정도 거리라고 기록했다. 하지만 14세기 중반 이래로 야파는 키프로스 왕국 구호기사단의 해적질에 대응하기 위해 맘루크 측이 주민들을 내륙으로 소개시키며 점차 버려졌다. 전략적으로도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기에 성벽 역시 방치되었다. 1432년, 베르트랑돈 델라 브로키에레는 순례객들에 있어 성지에서의 사면이 시작되는 야파가 순례객들이 햇빛을 피하는 몇몇 천막만이 남은 폐허라고 기록했다. 또한 돌풍 때문에 오래 머물면 위험하며, 순례객이 도착하면 술탄의 통역관 및 관리들이 와서 인원 파악 및 관세를 걷고 가이드를 해준다고 덧븥였다.

3.4. 오스만 제국

1516년, 셀림 1세에 의해 야파 일대는 오스만 제국령이 되었다. 1596년 기준 야파는 가자 리와 (군) 산하 라믈라 나히야 (읍)에 속해 있었고, 15가구의 무슬림 주민이 있었다. 그들은 수입의 1/3을 세금으로 바쳤고, 이는 연간 7,520 악체에 해당했다. 다만 유럽 여행가들은 지속적으로 야파가 폐허 상태라 묘사했고, 17세기 들어서야 기독교 순례객들을 위한 교회 및 여관 등이 세워지는 등 도시화가 재개되었다. 대표적으로 1654년, 성 베드로 성당이 세워졌다. 다만 18세기 들어서는 해적의 출몰로 주민들이 해안 초소의 경고 때마다 종종 라믈라나 룻드로 피신해야 했다. 항구 시설 역시 좋지 않아 큰 선박에서 화물을 내리려면 조각배들이 와서 분산 운송해야 했다. 야파의 열악한 상황은 18세기 후반, 팔레스타인의 호족 자히르 알 우마르가 질서를 회복하며 개선되었다.

3.4.1. 자히르 알 우마르 산하

17세기 들어 현지 아랍계 투칸 가문이 수조권을 가지고 있던 야파는 18세기 말엽에 잠깐 아랍계 팔레스타인 호족 자히르 알 우마르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된다. 1727년 티베리아스 점령을 시작으로 1735년 나사렛, 1746년 아크레, 1757년 하이파를 장악하며 자히르 알 우마르는 점차 팔레스타인 전 지역에 대한 패권을 확립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시돈 및 다마스쿠스 총독들과 충돌했고, 1771년 다마스쿠스의 우스만 파샤와 전면전이 임박하자 자히르는 이집트에서 자립한 맘루크 알리 베이 알 카비르와 동맹하였다. 같은해 초엽 알리 베이는 부관 이스마일 베이 휘하 2만의 이집트 군을 야파로 파견했고, 자히르 역시 야파로 남하해 합류하였다.

이집트-팔레스타인 연합군은 다마스쿠스로 진격했으나, 이스마일 베이가 순례 기간에 총독을 공격하는 것이 종교적 금기라며 야파로 철수해버렸다. 당황한 자히르는 하우란 및 골란 고원에서 세금을 거둔 후 돌아갔고, 알리 베이에 항의하여 무함마드 베이 (아부 다하브) 휘하의 3만 5천 병력이 야파에 추가 파병되었다. 1771년 6월, 아부 다하브는 (시타델을 제외한) 다마스쿠스를 점령했으나 술탄의 권력에 직접 대항한다는 공포감에 결국 철수했고, 시돈에 진출했던 자히르 역시 회군했다. 홈스로 도주했던 우스만 파샤는 다마스쿠스로 돌아와 자히르가 포위했던 자라르 가문의 사누르를 구원하고 가자와 라믈라를 수복했다. 홀로 조정에 맞서기로 결심한 자히르는 팔레스타인 군대만으로 그해 8월 야파를 점령하고 물타짐 (지방관) 아흐마드 베이 투칸을 축출했다.

자히르는 야파를 요새화한 후 2천의 수비대를 두었고, 뒤이어 우스만 파샤가 야파를 포위했지만 점령에 실패하여 다마스쿠스로 철수했다. 이후 자히르는 8월 말까지 자파에 머물며 기존에 자신과 대립하던 자라르 가문과 나블루스의 투칸 가문[19]에 대한 동맹을 맺었고, 우스만 파샤가 시돈 총독 및 레바논 아미르국 등과 연합하자 아크레로 북상했다. 뒤이은 훌라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자히르는 시돈, 툴카름을 점령하며 레반트 남부에 대한 지배권을 확대했다. 다만 1772년 초엽, 동맹인 이집트의 알리 베이가 결국 조정 측으로 전향한 아부 다하브에게 축출되어 아크레로 망명해왔고 그 무렵 자히르의 나블루스 포위를 견뎌낸 무함마드 파샤 투칸이 가문의 영지인 야파를 수복하였다. 한편, 알리 베이가 동맹을 모색한 러시아 제국의 알렉세이 그리고리예비치 오를로프 함대가 베이루트를 거쳐 남하했다.

그 과정에서 레바논 아미르국의 유수프 시하브가 전향하여 자히르와 동맹, 각각 베이루트와 야파 수복에 협조하기로 했다. 1772년 여름, 자히르는 아말 산지의 메타왈리 쉬아 부족 병력 및 알리 베이와 함께 야파를 포위했다. 그러던 9월, 러시아 수송선이 당도하여 신식 화기를 포위 측에 제공했다.[20] 다만 포위가 장기화되자 자히르는 오를로프 제독에 대한 지원 요청과 함께 수송선을 돌려보냈다. 11월, 파타이오티 알렉시아노 휘하의 러시아 함대가 다미에타를 거쳐 야파 근해에 나타나 도시를 포격하였다. 따라서 1773년 봄, 자히르는 9개월간의 포위 끝에 폐허로 변한 야파를 재점령할 수 있었다. 자히르는 조카 겸 사위인 카림 알 아이유비를 야파 및 가자의 태수로 봉했다. 그 무렵, 알리 베이가 이집트 수복에 실패하고 사망하자 러시아 함대는 정식으로 자히르와 동맹했다. 같은해 가을, 러시아-자히르-유수프 연합군은 베이루트를 레바논 아미르국 령으로 회복시켰다.

1774년 2월, 러시아 제국에 대해 수세에 몰려 있던 오스만 조정은 자히르를 시돈 총독에 봉했다. 다마스쿠스 총독은 자히르를 '시돈-나블루스-가자-라믈라-야파- 아즐룬의 총독'으로 봉하도록 상주하기도 하는 등 그와 우호를 맺었다. 공식적으로 레반트 해안의 지배권을 얻은 자히르의 아크레 정권은 같은해,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으로 오스만 조정이 러시아와 휴전한 후 아랍 지역에 개입할 여력이 생기며 위기에 처했다. 그해 말엽, 80을 바라보던 고령의 자히르는 아들들의 연이은 반란에 시달렸다. 그러던 1775년, 조정은 자히르에 대해 토벌을 선포했다. 그해 5월, 명을 받은 이집트의 아부 다하브는 가자를 지나 북상해 야파를 점령했다. 이때 남성 주민들이 학살되었고, 공포에 사로잡힌 아크레 주민들이 항복했다. 마침 아부 다하브가 아크레에서 사망하고 이집트 군이 철수, 자히르가 수도를 회복했으나 뒤이어 하산 파샤 휘하의 오스만 해군이 아크레를 공격해 점령하며 근세 팔레스타인의 첫 아랍 자치 정권은 붕괴하였다.

3.4.2. 나폴레옹의 일시 점령 (1799년)

파일:Antoine-Jean_Gros_-_Bonaparte_visitant_les_pestiférés_de_Jaffa.jpg
(야파를 와보지 않은) 화가가 그린 '야파의 환자들을 방문하는 나폴레옹' 선전화

자히르 이후, 그의 야파 & 예루살렘의 미리 (핫즈 카라반 세금) 징수권을 제안에도 조정에 귀순한 제자르 파샤가 아크레 정권을 인수했다. 1798년, 영국을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나폴레옹과 4만 프랑스 군은 이집트를 침공하여 아부 다하브의 후계자인 무라드 베이와 이브라힘 베이를 격파했다. 이집트 장악 후 나폴레옹은 1799년 2월, 제2의 알렉산드로스를 꿈꾸며 팔레스타인으로 진격했다. 1만 3천의 병력과 대포 80문을 지닌 프랑스 군은 3일만에 엘아리쉬를 함락했다. 뒤이어 가자를 접수한 그는 3월 3일, 야파를 포위했다. 제자르 파샤가 미리 대비를 해둔 야파에는 1천 2백의 포병을 포함한 5천여 수비대가 배치되어 있었고, 그들은 대부분 압둘라 베이 휘하의 알바니아 용병이었다. 3월 7일 들어 성벽에 틈이 생기자 나폴레옹은 터키인 사절을 보내 항복을 종용하였는데, 수비대장 압둘라 베이는 사절단에 궁형을 가하여 처형하고 수급을 성벽 위에 전사하며 결사 저항에 나섰다.

다만 그날 저녁 수비대의 반격은 격퇴되었고, 성탑이 붕괴되자 압둘라 베이는 목숨 보장 약속을 받고 항복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가혹히 살해된 사절단의 복수로 이틀 밤낮의 약탈을 명하였고, 야파의 주민들은 학살 및 강간을 당하였다. 사로잡힌 압둘라 베이를 포함한 3천여 포로들은 식량이나 거처를 제공받지 못한 채로 인근 해안 사구에서 행군당하다가 총검으로 살해되었다. 이후 나폴레옹은 수백여 주민들의 피신을 허용하여 그들이 다른 도시들에 저항의 대가를 알리도록 하였는데, 역으로 프랑스 군의 약속 파기와 잔혹한 행태를 접한 아크레 주민들은 결사 항전을 결의하게 된다. 한편 야파와 라믈라의 프랑스 군은 안좋은 위생 상태로 인한 역병으로 병력 손실을 겪었는데, 현지인 역시 많은 피해를 입었다. 나폴레옹은 이를 방관하다가 후일 죄책감이 들었는지 야파의 병동을 방문하는 자신의 그림을 의뢰하였다.

야파를 떠나기 전 나폴레옹은 도시에 통치 위원회인 디완 및 야전병원을 세웠다. 뒤이어 나폴레옹은 무려 2달간 아크레를 포위했지만, 군민의 결사 저항으로 밤을 틈타 철수했다. 도중에 그는 카르멜 산의 병원을 야파 병원에 합친 후 부상자들을 다미에타로의 해로, 가자 방면의 육로로 나누어 수송하였다. 나폴레옹에게는 천만다행으로 제자르 파샤는 부상자들을 후위에 배치한 채 행군하는 프랑스 군을 추격하는 대신 야파 등지를 수복, 재건하는 데에 치중했다. 오스만 제국의 동맹으로써 아크레 수성에 일조한 시드니 스미스 휘하의 영국 수병들은 야파 성벽의 재건을 도왔다. 그러던 6월, 나폴레옹은 이집트로 돌아와 자신의 사망설을 불식시킨 후 2달만에 프랑스로 떠났다. 이집트의 잔여 프랑스 군도 1801년에 항복 및 퇴거하며 야파에 대한 위협은 사라졌다.

3.4.3. 아크레 정권의 남부 거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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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0년 전후에 세워진 야파 성벽과 구도심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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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2년에 세워진 마흐무디야 모스크

나폴레옹을 격퇴한 제자르 파샤는 자히르처럼 야파를 포함한 팔레스타인 해안을 조정의 간섭 없이 다스렸다. 그는 팔레스타인에 확고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고, 자히르가 시작한 상품작물 (목화 및 곡물)에 대한 독점을 지속 및 강화했다. 그 일환으로 그는 1780년대에 아크레와 야파의 프랑스 목화 상인들을 축출하였다. 한편 1801년, 이집트를 수복한 후 수도로 귀환하던 유수프 파샤는 헤브론 출신의 동맹인 무함마드 아부 마라크를 가자와 예루살렘 태수로 봉하며 야파의 통치를 맡겼다. 이렇게 현지 출신에게 남부 팔레스타인의 통치권을 줌으로써 조정은 제자르 파샤의 권력을 제한하고자 했던 것이다. 30여년간 조정에 협력하던 제자르 파샤는 (공식 직함인 시돈 총독의 관할 구역 밖임에도) 자신의 영토로 여기던 지역의 통치권을 침해당하자 마침내 반발, 아부 마라크의 축출을 위해 야파를 포위하였다. 이에 조정은 그를 반도로 규탄하는 칙령을 내렸으나 그럼에도 제자르 파샤는 야파 포위를 지속하였다.

마침내 1803년 초엽, 아부 마라크는 항복하고 야파를 떠났다. 그후 제자르 파샤는 조정 대신들에게 막대한 규모의 뇌물을 바쳐 자신에 대한 칙령을 철회시키고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30여년의 경력동안 제자르 파샤가 유일하게 조정에 정면으로 반발한 경우가 바로 야파 지배권 문제였을 정도로 18-19세기 아크레 정권 하에서 야파는 크게 중시되었던 것이다. 다만 1804년 제자르 파샤가 사망한 후, 아크레의 정권 교체기를 틈타 아부 마라크는 재차 야파를 차지했다. 1806년, 내분을 정리한 후 집권한 술레이만 파샤는 와하비 세력에 맞서라는 명령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아부 마라크에 대해 조정이 자신에게 해임을 일임시키자 맘루크 출신의 무함마드 아부 나부트 하의 토벌군을 파견했다. 그해 말엽, 아부 나부트는 약 반년 간의 포위 끝에 아부 마라크를 축출하고 야파를 점령하였다. 이에 조정은 술레이만에게 가자, 야파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산작까지 하사하며 사실상 팔레스타인 남부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맡겼다.

비록 18세기 말 ~ 19세기 초에 여러 차례의 공성전과 학살을 겪었지만 야파는 경제적으로 번영하며 전성기를 맞았고, 인구도 크게 늘어났다. 특히 1800년을 전후로 야파의 중요성이 가자를 추월하여 가자 산작의 중심이 되었다. 1806년, 목화에 기반한 수출 경제가 좋지 않은 상황에 집권한 술레이만은 제자르 파샤와 같은 중앙 집권적 지배 대신 지방 분권화에 나서 아부 나부트를 가자 산작의 베이로 봉하였다. 야파에 집권한 그의 본명은 무함마드 아가였지만, 몽둥이를 쥐고 야파 시내를 누비며 자신의 명을 어기는 이들을 두들겨 팼기에 '몽둥이 아빠'란 아부 나부트라 불리게 되었다. 현지 전승에 따르면 성밖 과수원들을 홀로 시찰하고 돌아오던 아부 나부트가 성문을 열 것을 지시했으나, 수문장은 진짜 아부 나부트가 아니라 생각해 거부했다. 수차례 요구한 끝에 성으로 들어간 아부 나부트는 다음날, 주민들을 모아 수문장을 저주하며 이 일을 자신이 세운 우물에 새기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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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파의 사빌 술레이만. 여행자들을 위한 음수대로, 아부 나부트가 상관의 명의로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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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파 외곽의 사빌 아부 나부트. 1815년에 세워졌고, 후일 아부 나부트 영묘도 더해졌으나

술레이만 파샤 시기 팔레스타인 지역은 유례 없는 평화를 누렸고, 가자 ~ 베이루트 해안에 배치된 그의 병력은 대략 1500명 정도였다. 아크레에는 겨우 2백여만이 배치된 것에 반면, 야파에는 5백명이 주둔하는 등 야파의 군사적 중요성 및 아부 나부트의 영향력은 두드러졌다. 아부 나부트의 엄격하면서도 공정한 통치 하에 야파는 가자 산작에서 분리, 자립하여 독자적인 야파 산작의 치소가 되었다. 또한 아부 나부트는 야파에서 여러 건설 사업을 벌였다. 우선 1799년 프랑스의 침공 당시 근대 화기에 적합하지 않았던 성벽을 터키, 영국인 기술자들의 도움으로 훨씬 두텁게 재건하였다. 동시에 예루살렘 방면의 동쪽 성문에는 3개의 돔을 얹어 장식했고, 성벽 곳곳에 견고한 성탑을 더했으며 성밖에는 깊은 해자가 둘러졌다. 다만 비슷한 형식의 아크레 성벽과 달리 야파의 성벽은 1880년대에 철거되어 두 성문 등 극히 일부만 남아있다. 1812년에는 술탄 마흐무트 1세의 이름을 따 현재까지 야파의 최대 모스크인 마흐무디야 모스크를 세웠다. 그외에 2개의 사빌 (음수대)과 면화 및 양모 시장을 세웠다.

​한편, 술레이만 파샤의 유대인 재상 하임 파르히는 1814년 들어 아크레 정권의 2인자가 되었다. 그는 술레이만 파샤의 유력한 후계자로 여겨지던 아부 나부트의 능력을 경계하여 더 다루기 쉬운 10대의 맘루크 자제 압둘라 파샤를 후계자로 지지했고, 지속적인 설득 끝에 아부 나부트의 해임 명령을 받아내었다. 아부 나부트는 반발했지만, 내부 정변으로 인해 12년간 집권한 야파에서 축출되었다.[21] (1818년 여름) 이듬해에 하임 파르히의 계획대로 젊은 압둘라 파샤가 계승했다. 유대인 재상의 영향에 의한 것인지 1820년, 이스탄불 출신의 이사야 아지만이 야파에 예루살렘과 헤브론 등지를 방문하는[22] 유대 순례자들을 위한 시나고그 (유대 회당)와 여관을 세웠다. 해당 구역으로 '유대인의 집'이란 뜻인 다르 엘 예후드로 불렸다. 하지만 압둘라 파샤는 권신 하임 파르히를 제거했고, 이에 파르히 가문이 다마스쿠스 총독 다르위시 파샤를 설득해 1822년 아크레를 포위했다.

이때 조정 역시 압둘라 파샤에 해임을 통보하는 등 그는 위기에 몰렸지만, 결국 수성에 성공했고 이집트 총독 메흐메드 알리 파샤의 도움으로 재임명되었다. 다만 압둘라 파샤는 막대한 벌금을 물어야 했고, 영토 중 상당 부분을 압류당했다. 그중 야파와 가자 산작이 1824년에 반환되어 재차 아크레 정권의 지배에 놓였다. 이후 서서히 기존 영토를 회복한 압둘라 파샤는 1830년에는 현재의 서안지구 일대의 통치권까지 얻는 등, 팔레스타인 전역을 아크레 정권 하에 통합하였다. 하지만 1831년 말엽, 메흐메드 알리 파샤의 아들 이브라힘 파샤가 이끄는 이집트 군이 북상하자 야파는 저항 없이 항복하였다. 뒤이어 레바논 아미르국의 바시르 시하브가 전향했고, 아크레에서 버티던 압둘라 파샤가 이듬해 항복하며 한세기 가까이 이어지던 아크레 정권은 멸망하였다. 그리고 야파와 팔레스타인은 아랍권 최초로 근대화에 나선 이집트의 지배 하에서 30여년 만에 재차 혼란을 겪게 되었다.

3.4.4. 메흐메드 알리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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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파의 이집트 진영 (1838년 작)

1832년에 시작된 이집트의 팔레스타인 지배는 곧 반발에 직면했다. 1833년, 이브라힘 파샤는 기존에 야파 ~ 예루살렘 도로의 안전을 보장하며 통행세를 받았던 아부 고쉬 가문[23]의 특권 박탈을 넘어 수뇌부를 강제 노역형에 처했다. 이러한 부족들의 자치권 박탈 및 강제 징병은 1834년 봄의 팔레스타인 농민반란으로 이어졌다. 6월, 농민군이 (시타델 제외) 예루살렘까지 점령하자 야파에서 주력군과 대기하던 이브라힘 파샤가 출정하였다. 이어진 전투 후 메흐메드 알리가 증원군과 함께 야파로 향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양측 간의 휴전이 맺어졌다. 다만 6월 중순 들어 해안 도시들에서도 봉기가 벌어졌고, 야파의 경우 도시 자체는 이집트 군의 통제 하에 있었지만 인근 부족 중 상당수가 반란에 가담했다.

따라서 이브라힘 파샤는 인근 부족 유력자들 중 상당수를 반란 조력 혐의로 처형했고, 야파의 징세관 마수드 알 마디와 그의 아들이자 사파드의 징세관인 이사 알 마디 역시 반란에 가담한 죄명으로 참수되었다. 이로써 팔레스타인 북부 해안에서 가장 강성하던 알 마디 가문은 붕괴되었다. 야파 시내의 유지들 중 반란에 협조했던 이들은 같은 운명을 피해 배에 올라 키프로스로 도피하였다. 이러한 체포와 처형 소식을 접한 카심은 휴전을 번복, 3만 대군을 모아 반란을 재개했다. 6월 말엽, 카심은 야파 인근의 이브라힘 파샤 진영을 공격했다. 며칠 후, 1만 5천 이집트 군대와 야파에 상륙한 메흐메드 알리는 라믈라에서 이브라힘 파샤와 합류했다. 그는 라믈라, 룻드 징세관 및 반란에 가담한 야파 인근 촌장들의 처형을 지시한 후 2천의 민간인 피해를 감수하며 아크레를 재점령하고는 이집트로 돌아갔다.

1834년 8월까지 내륙의 반란 역시 이브라힘 파샤에 의해 진압되었고, 아부 나부트가 재건했던 야파는 이집트의 병참 기지로써 더욱 발전했다. 하지만 1837년 야파는 지진으로 재차 파괴되었고, 이때 무려 6천 ~ 7천에 달하는 주민이 사망하였다. 도시의 재건에 있어 이브라힘 파샤는 예루살렘 방문차 왕래하던 유대인들의 정착을 후원했다. 그 결과 1838년, 세파르딤 유대인들의 탈무드 토라 학교가 세워졌고 1839년에는 유럽의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이 정착했다. 당시 야파에는 150여명의 유대인 주민이 있었다. 약 9년간 이어지던 이집트의 지배는 1840년, 영국의 도움을 받은 오스만 군이 이브라힘 파샤를 가자에서 격파하며 종식되었다.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이집트 지배기에 야파는 다종교가 공존하는 국제 도시로써 서방에 알려졌다.

3.4.5. 근대화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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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경 야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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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시기 건설된 사라이(관아)[24]

약 2세기 만에 오스만 제국의 직접 지배가 회복된 19세기 중반, 랍비 예후다 하레비는 무려 50년 가까이 야파 유대 공동체의 지도자를 역임했다. 한편, 예루살렘에 영사관을 설치한 이후 팔레스타인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시작되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에는 유대 민족의 팔레스타인 귀환이 예수의 재림 및 구원과 종말이 이루어지는 데의 전제 조건이라고 믿는 기독교 시오니즘세가 강했다. 해당 파벌에 속하는 선교사 클로린다 S. 미노르는 하레비를 설득해 과수원을 임대 받았고,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정착을 증진하기 위해 신식 농법을 전수하였다.[25] 1853년에는 독일, 미국인 기독교 시오니스트들이 야파 동북쪽에 마운트 호프 식민지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인근 아랍인들은 불편함을 표했다. 그러던 1858년 1월, 5명이 농장주 집을 습격해 남자 1명을 죽이고 여자 2명을 강간했다. (야파에서의 분노)

이에 미국, 독일 영사관들의 압력을 받은 오스만 당국은 범인들을 체포하여 그중 4명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같은해 6월, 정착민들이 떠나며 마운트 호프 식민지는 해체되었다. 이를 보고 독일의 재림파 기독교 종단 템플러[26] 단체가 팔레스타인 이주를 연기했다. 그와 관계 없이 성지 순례차 야파를 찾는 서구인들의 수는 해마다 증가했고, 1865년 오스만 당국은 항구 개선을 위해 프랑스 기술자의 도움으로 야파 등대를 세웠다. 1867년, 야파를 방문한 미국인 선교사 엘렌 클레어 밀러는 5천여 주민 중 1천의 기독교도 및 8백의 유대인 외에는 무슬림이라 기록했다. 한편 1866년 9월, 미국 메인주 출신의 기독교 부흥주의 교파가 야파 외곽에 정착, 미국인 구역인 아담스 시티를 세웠다. 다만 그들은 기후, 풍토병, 오스만 당국의 견제에 1년여 만에 귀국했고 독일인 선교사가 부지를 매입했다. 1869년, 독일 뷔르템베르크 출신의 템플러들이 그곳에 정착했다.
3.4.5.1. 야파 오렌지
전통적으로 야파의 특산 과일이던 샤무티 혹은 야파 오렌지[27]는 주로 아랍인들이 전통 농법으로 재배했다.[28] 그러다 1850년대 크림 전쟁 후 미국인 이주자들이 화학 비료와 기계를 이용한 근대 농법을 도입했고, 증기선의 보편화로 기존에 몇 주나 걸리던 운송일이 몇 일로 단축되며 야파 오렌지는 튀르키예나 이집트를 넘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영국까지 수출되기 시작했다. 1845년에 20만개이던 수출량은 1870년 3800만개로 급증했다. 이로써 팔레스타인의 주요 수출품은 유럽인들이 식민지에서 대거 재배하며 상품성이 떨어진 목화에서 오렌지로 대체되었다.

19세기 말엽 기준 야파는 매년 천만개 이상의 오렌지를 수출했고, 1880년대부터 부동산 가격이 치솟았다. 3-12m 깊이의 우물을 중심으로 한 관개 농지인 비아라는 약 10만 쿠로쉬 (피아스터)에 거래되었는데, 매년 5천 쿠로쉬의 비용으로 1만 5천 쿠로쉬를 생산하여 수익성이 좋았다. 도시 주변에는 3백 ~ 4백여 오렌지 과수원이 있었고, 각각 최대 1천 그루의 오렌지 나무가 있었다. 야파에서는 오렌지 외에도 레몬, 시트론 (구연), 귤 등이 재배되었고 석류 역시 품질이 좋기로 유명했다. 오렌지 수출로 야파의 경제가 발달하자 유럽인들의 유입 및 야파 개발이 가속화되었다.[29]
3.4.5.2. 국제 & 산업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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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배에서 승객과 화물을 나르는 작은 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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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에 템플러 공동체가 세운 베이트 엠마누엘

오렌지 생산 외에 19세기 야파의 주요 산업은 비누 생산이었다. 그러다 1880년대 들어 근대 기술의 도입과 함께 제철업이 성행했고, 1910년에는 독일 템플러 공동체가 기계 공장을 세워 백명 이상을 고용했다. 또한 비누, 오렌지 상자, 배럴, 코르크, 밀가루 면, 얼음, 탄산수, 올리브유, 가죽, 알칼리, 와인, 화장품, 잉크 등을 생산하는 공장도 있었고 오스만 시기 팔레스타인에서 발간된 대부분의 신문과 서적들이 야파에서 발간되었다. 이렇듯 야파는 근대 팔레스타인의 중심 도시였다. 1871년에는 시위회가 설립되었고, 1884년 아슈케나지 탈무드 토라 학교가 세워졌다. 견고하던 아파의 성벽은 1878-88년에 걸쳐 시가지가 확장되며 철거되었다.

이후 구도심 동쪽으로 오스만 행정 치소인 사라이 (사라야) 등 관공서들이 이동했고, 구도심은 문화적 중심지로 남았다. 5천명 수준이던 인구는 1887년 1만 4천, 1897년 3만 3천을 돌파했고 1891년에는 히자즈 철도의 지선인 야파 ~ 라믈라간 철도가 완공되었다. 같은해 샤아르 지욘 병원이 개업했고, 1892년 야파 ~ 라믈라간 철도 전체가 개통하여 순례를 수월히 해주었다. 19세기 후반 들어 야파에는 그리스 정교회 등 기독교도 인구가 크게 늘었고, 경제적 및 학문적으로 주류가 되었다. 시오니즘 운동의 본격화와 함께 유대 인구도 늘었고, 1904년 라트비아 출신의 랍비 아브라함 이삭 쿠크가 이주해와 야파의 최고 랍비가 되었다.

1902년, 야파에 콜레라가 돌아 다수의 사망자가 났다. 같은해 야파의 독일인 구역은 1871년의 사로나에 이어 새 농지를 매입, 독일 황제의 이름을 따서 빌헬마 (Wilhelma)로 명명하는 등 확장되었다. 1908년 3월, 야파에서 팔레스타인인과 시오니스트 간의 충돌이 벌어졌다. (1차 야파 사태) 이듬해 후자에 속하는 유대인들은 북쪽으로 이주해 텔아비브를 세우게 된다. 1911년, 아랍 민족주의의 확산과 함께 야파에서는 필라스틴 신문이 창간되었다. 그 무렵 인구는 약 5만이었다. 1차 세계대전 기간인 1916년에는 당시 야파 태수이던 하산 베이가 하산 베크 모스크를 세웠다.
3.4.5.3. 1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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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의 마지막 오스만 건축인 하산 베이 모스크 (19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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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11월, 야파 사라야 앞의 뉴질랜드 군

한세기 이상 이어지던 야파의 번영기는 세계 대전과 함께 중단되었다. 대전 발발 후 오스만 조정은 외국인에 대한 카피툴레이션 특권을 폐지하고, 비시민권자들에게 1915년 5월까지 군역 의무가 부가된 시민권 취득 혹은 추방의 선택지를 주었다. 또한 협상국측 거류민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1914년 12월, 6천에 달하는 러시아계 유대인들이 축출되었고 그들은 알렉산드리아로 이주했다. 1915년부터는 레바논 기근의 영향으로 팔레스타인에서도 식량 부족 및 밀값 폭등으로 전 계층이 고초를 겪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르메니아인, 아시리아인 등 비무슬림에 대한 학살이 벌어지자 야파-텔아비브의 유대인 및 기독교도들이 닐리라는 스파이 조직을 만들어 영국과 내통했다. 이러한 '배신'은 영국군이 시나이 반도에서 북상하던 1917년 초, 오스만 당국에게 발각되었고, 큰 분노와 경계심을 초래했다. 당초의 유대인 학살 계획은 독일과 바티칸 측의 만류로 강제 이주로 하향 조정되었다.

한편, 추방 대상에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아랍 반란으로 역시 배신한 아랍인도 포함되었다. 1917년 3월, 약 3~4만에 달하는 가자 주민들에게 48시간 내의 이주 혹은 징집 명령이 내려졌다. 이때의 이주와 기근으로 가자는 1940년대까지 기존 인구를 회복하지 못했다. 그리고 3월 말엽, 청년 튀르크당 3두정 중 하나인 제말 파샤는 야파에도 소개령을 내렸다. 농부, 독일 구역의 노동자, 교사 등을 제외한 1만 이상의 주민들은 예루살렘과 하이파 외의 지역으로 떠나야 했다. 그들은 재산을 가져갈 수 없었고, 주민들은 기근과 폭력에 시달렸다. 그나마 무슬림 주민들은 재산을 포기하는 대가로 얼마 후 돌아올 수 있었으나, 아예 이민을 가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1917년 11월, 영국군이 가자와 베르셰바 전선을 돌파하고 뉴질랜드 군이 야파를 접수했을 때에는 4만 주민 중 8천여만 남아있었고 텔아비브는 거의 빈 도시였다.

이때 오스만 군은 야파를 떠나 아우자 (야르콘) 강 북안에 주둔하며 지연전에 나섰다. 영국군은 11월 말부터 도하를 시도했고, 한달의 교전 끝에 12월 말엽 비오는 날 밤에 기습하여 성공했다. 오스만 군은 비 덕에 추격을 면하며 철수했고, 영국군은 그해 내로 예루살렘 역시 점령했다. 야파 전투 후 추방되었던 유대 주민들의 복귀가 허가되었다. 다만 1917-18년의 겨울은 혹독했고, 내륙 주민들의 도움에도 영양실조로 인해 약 1500명의 이주민이 사망했다.[30] 갈릴리 유대인들의 도움으로 내륙 각지에 피난했던 유대 주민들은 1918년 여름에야 귀환할 수 있었다. 비록 이때 여러 유대인들이 이집트, 유럽, 미국 등지로 떠났으나 1930년대 들어 더 많은 시오니즘 이주 행렬 (알리야)이 당도했다. 그러면서 아랍 주민과의 충돌이 더 잦아졌다. 한편, 영국의 야파 점령 직후 인근 정착지들의 독일인들은 이집트의 시디 비슈르 및 헬완 등응 거쳐 독일로 보내졌고, 1920년 베르사유 조약 후에야 귀환이 허용되었다. 그리고 1925년 로잔 조약 후에야 재산이 반환되며 야파의 독일인 구역은 재건될 수 있었다.

3.4.6. 영국령 팔레스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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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시가지로 정비된 야파 중심부 (좌) / 구도심의 해안가에서 그물을 말리는 아랍 어부들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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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심의 해안 도로

1922년 기준 야파의 인구는 약 4만 8천명이었다. 종교적으로 무슬림과 유대인이 각 2만이었고, 기독교도는 약 7천명이었다. 본래 야파의 외곽에 불과하던 텔아비브는 1921년 노동절에 유대 공산당 간의 다툼에서 아랍인의 유대인 습격으로 이어진 야파 사태 (메오라옷 타르파)로 47명의 유대인이 사망한 후, 유대인들의 이주로 점차 야파에 비견되는 도시로 성장했다. 1922년 1만 5천이던 텔아비브 인구는 1927년 3만 8천명으로 늘었다. 다만 1921년 이후로는 아랍인과 유대인 간의 공존이 이어졌고, 텔아비브는 경제적으로 야파에 의존했다. 유대인 사업가들은 야파 행정 기관에 세금을 납부했고, 유대인이 소유한 팔레스타인 최초의 전기 회사도 야파 전력 회사로 명명되었다. 1923년에는 두 도시 모두 전선 인프라가 구축되었다. 한편 아랍 기독교도인 이사 가문이 소유한 팔라스틴 신문을 중심으로 아랍 민족주의가 확산되었고, 이는 시오니스트 유대인들이 더 이주해오며 고조되었다.

그해 4월, 유대인이 아랍인을 죽인다는 소문에 현지 아랍 주민들이 봉기해 3일간 9명의 유대안을 죽였다. 이때 아랍인도 2명이 죽었고, 야파 항구를 시작으로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전면적인 파업이 일어났다. 그러자 영국군이 몰타, 이집트 주둔군 등의 증원 병력과 함께 진압과 체포에 나섰다. 이때 야파의 시위대가 구도심의 골목과 하수도 등으로 숨어들자, 5월 들어 영국 당국은 구도심 주변에 바리케이드를 세우고 마름쇠를 뿌렸다. 6월에는 공군을 통해 구도심 일대에 하루 내로 퇴거를 명하는 아랍어 전단을 뿌렸다. 뒤이어 공병들이 폭발물로 240채에 달하는 아랍인 주택들을 폭파하여 약 6천여명이 난민이 되었고, 1천 5백의 영국군 및 군함이 진입하여 도시를 완전 장악했다. 이후 야파와 텔아비브는 행정적으로 분리되어 별개의 도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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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에 세워진 알함브라 극장과 아랍 깃발. 당시 팔레스타인 최대의, 최고급 극장이었고 움 쿨숨도 공연했다. 다만 70년대에 버려진 후 현재는 사이언톨로지 포교당이다.

갈등의 심화에 대해 1937년 필 위원회는 야파 ~ 라믈라 & 룻드 ~ 베들레헴 ~ 예루살렘 일대를 영국령으로 두고, 나머지를 아랍/유대 국가로 분리한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으나 곧 2차 대전이 터지며 실현되지 않았다. 한편 2차 대전기 영국은 독일 구역의 독일인들을 다른 추축국 시민들과 함께 수용소화된 빌헬마에 집합시켰고, 1941년 호주 등을 거쳐 본국으로 송환했다. 전후 1945년 기준 야파에는 무슬림 5만, 유대인 2만 8천, 기독교도 1만 5천이 거주했다. 같은해 12월, 야파에는 영국군 종군 경험자들을 바탕으로 한 준군사 청년 조직인 앗 나자다가 창설되었다.[31]1947년 유엔은 야파를 아랍 국가의 월경지로 지정했지만, 유대 국가에 둘러쌓인 매우 좁은 영토라 현지인들은 반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아랍 & 유대인 농부들의 오렌지 수출은 전자가 더 많은 상태에서 야파 항을 통해 공동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오렌지 농장은 300 km2에 달했고, 10만여명을 고용했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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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민병대의 포격으로 파괴된 야파 구도심

불안 속 평화가 유지되던 야파는 1948년 1월, 유대 민병대 측이 행정 관청인 사라야에 차량 폭탄 테러를 가해 행인 및 자산 단체원 26명이 사망하며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뒤이어 무슬림 형제단 연관 아랍 민병대 4백여명이 야파에 배치되었다. 전운이 일자 약 2만의 아랍 주민이 도시를 떠나 내륙으로 피난했다. 2월 들어 야파 시장 유수프 하이칼이 다비드 벤구리온과 휴전을 물색했으나 아랍 민병대가 중단시켰고, 산발적인 교전이 벌어졌다. 그러던 4월, 유대 민병대인 이르군이 3일 간의 박격포 포격과 함께 공세에 나섰다. 이에 하이파처럼 대규모 난민 행렬이 벌어질 것을 우려한 영국 당국은 무력으로 교전을 중단시켰다. 그 과정에서 이르군 텔아비브-야파 지부 사령관 엘랴후 탐레르가 전사했고, 다른 유대 민병대인 하가나는 야파와 내륙 간의 교통을 끊어 고립시켰다. 4월 말엽, 야파에는 2만 전후의 주민만이 남아있었는데 5월 초에 다시 1만 5천여가 피난길에 올랐다. 따라서 5월 14일, 도시가 하가나에 항복하고 영국군이 철수했을 때에는 3800여 아랍 인구만이 남아있었다.

3.5. 텔아비브 건설과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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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야파와 텔아비브, 그 동쪽의 과수원들

아랍인 도시인 야파를 대신하기 위해 유대인들이 1906년부터 시작한 가정(Ahuzat Bayit) 운동이 기반이 되어, 1909년에 유대인 66가구가 조개 껍데기를 가지고 야파 북쪽의 사구에 자그마한 마을을 건설한 것이 텔아비브의 시작이다. 1910년까지 도로망과 상하수도, 유대인 학교, 집 66가구 등을 지으며 '텔아비브'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 각지에서 유대인 인구가 몰려들면서,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텔아비브와 야파 일대의 유대인들에게 오스만 정부의 추방령이 내려지기도 했으나, 오스만 제국의 패망- 멸망으로 곧 철회되었고 팔레스타인 지역이 영국 지배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인구가 급증하면서 아랍인과 갈등이 고조되었으며, 1921년 1차 야파 사태가 일어나자 유대 인구의 상당수가 텔아비브로 모여들면서, 2천여 명(1920)의 마을이 단 5년 만에 3만 4천 명(1925)의 도시로 바뀌었다.

본래 근처 도시인 야파의 항구를 통해 경제 활동을 하던 텔아비브는 1936년 2차 야파 사태 후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의 사이가 극악에 치닫으면서 유대인들은 자체적인 항구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1948년 봄에 이스라엘 임시정부가 텔아비브 시내에서 정식으로 출범했다. 1948년 5월, 야파 (야포)를 점령한 이스라엘은 기존 6만 아랍인 중 남아있던 4천여에 대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텔아비브 시의 관할에 두었다. 한편 나치 동조자가 적지 않았던 빌헬마 등의 독일인들은 전부 호주나 독일로 추방되었고, 그 재산은 이스라엘 정부가 매입했다. 1949년 6월, 계엄이 철회된 후에도 나크바로 피난 간 주민들의 복귀가 불허되어 인구상 소수가 된 야파는 1950년에 시의회가 폐지되며 텔아비브의 구역으로 병합되었다. 이후 야포의 역사성을 살리기 위해 텔아비브-야포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65년에는 남쪽에 아슈도드 항구가 세워지며 야파 항구는 어항 수준으로 전락했고, 한세기 역사의 야파 등대 역시 그 이듬해 운영이 중단되었다.

3.6. 현대

양차 세계 대전, 중동전쟁 등을 통해 이스라엘 전역이 불안정한 와중에도 텔아비브만큼은 직접적인 공격을 잘 받지 않았고,[33] 덕분에 마천루를 연속으로 건설했으니[34], 이스라엘 국민들도 대부분이 경제 활동을 위해 모이는 등 번성하는 곳이 되었다. 1990년대는 야파 구도심을 관광지로 활용하기 위해 기존 이슬람 시기 유적들에 대한 복원 사업을 벌였다. 지금도 5만 2천의 야파 주민 중 37%인 2만여명이 이스라엘 아랍인이다.

2010년대 들어 텔아비브-야파는 종종 혼란을 겪고 있다. 2016년 1월에 이스라엘 아랍인의 총기 난사로 3명이 사망하고 7명이 다치는 사태가 터졌다. 6월에도 팔레스타인인의 총기 난사가 또 벌어져 4명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했으니, 텔아비브 시내도 분위기가 좋지 못한 형편이다. 특히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개전 이후 하마스가 걸핏하면 쏘아대는 까삼 로켓이 틈만 나면 떨어지다 보니 대피령도 자주 내리는 판국이다. 2020년대 들어서는 헤즈볼라 후티, 이란 역시 텔아비브 공격을 종종 언급한다.

2024년 5월 2일, 이란의 시아파 민병대인 이슬람 저항군이 미사일을 날리기도 했다. 7월 19일에는 후티 드론의 공격으로 1명이 죽고 4명이 부상을 입었다. 10월 1일, 하마스 이즈 앗딘 알카삼 여단 대원 2명이 야파에서 총기난사 해 9명이 사망하고 17명이 부상을 입었다.

4.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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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1981년

예루살렘 구시가지와 성벽
העיר העתיקה בירושלים וחומותיה
2001년

마사다
מצדה
2001년

고대 도시 아크레
העיר העתיקה בעכו
2003년

텔 아비브 화이트 시티
- 모더니즘 운동

"העיר הלבנה" של תל אביב, בזכות ריכוז של מאות מבנים בסגנון האדריכלות הבינלאומית במרכז העיר
2005년

성서 텔
: 메기도, 하솔, 베르셰바

תלים מקראיים - שהם דוגמה להתיישבות בארץ ישראל מתקופת הברונזה ומתקופת הברזל: תל באר שבע, תל חצור ותל מגידו
2005년

향교 교역로
- 네게브 지역의 사막 도시
דרך הבשמים - הערים הנבטיות: עבדת, ממשית, חלוצה ושבטה ומספר מצודות וחאנים בנגב
2008년

하이파와 갈릴리 서부 지역의 바하이교 성지
המקומות הבהאים הקדושים בחיפה ובגליל המערבי
2012년

카르멜 산 인류 진화의 유적지:
나할 메아롯 동굴 ・ 와디 엘 무그하라 동굴
אתרי ההתפתחות האנושית על הר הכרמל: מערות נחל מערות
2014년

유대 저지대의
마레샤와 벧구브린 동굴군
- 동굴 세계의 소우주
מערות בית גוברין ומרשה בגבעות יהודה
2015년

베이트 셰아림의 네크로폴리스
: "유대인의 부활"에 관한 기념비
הנקרופוליס בבית שערים: ציון דרך בהתחדשות יהודית
† : 유네스코에는 이스라엘의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지 않다. 요르단이 등재 신청을 했고, 유네스코는 별다른 국가 분류 없이 '예루살렘'이라고만 표기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0000>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유네스코 세계유산
UNESCO World Heritage
<colbgcolor=#000><colcolor=#FFF> 이름 한국어 텔-아비브 화이트시티 – 모더니즘 운동
히브리어 "העיר הלבנה" של תל אביב, בזכות ריכוז של מאות מבנים בסגנון האדריכלות הבינלאומית במרכז העיר
영어 White City of Tel-Aviv – the Modern Movement
프랑스어 Ville blanche de Tel-Aviv – le mouvement moderne
국가·위치
[[이스라엘|]][[틀:국기|]][[틀:국기|]] 텔아비브 관구
등재유형 문화유산
지정번호 1096
등재연도 2003년
등재기준 (ⅱ)[35], (ⅳ)[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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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야파 구시가지

파일:야파 1.webp
<rowcolor=#000> 야파 항구 전경

파일:Jaffa_old_city_2.jpg 파일:ISR-2015-Jaffa-Clock_tower.jpg
<rowcolor=#000>구도심의 골목 (좌)과 오스만 시기 시계탑 (1903년 건립, 우)

야파가 역사가 유구한 항구임에도 불구하고 볼 만한 역사 유적은 생각보다 별로 없다. 십자군 시대의 기독교 유적이나 이슬람 시대 건물들이 유대인 입장에선 절대 즐거운 기억이 아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방치하거나 밀어버리고 그 위에 새 건물을 지은 게 많아서 그렇다. 그나마 남아있는 유적은 항구의 석축과 마흐무디야 모스크, 오스만 시기의 하맘 (목욕탕) 및 시계탑 정도이다.

5.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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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여담

7. 둘러보기





[1] 동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일부로 포함시키면 예루살렘이 인구가 가장 많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텔아비브가 인구가 가장 많다. [2] 소방청은 중부 관구 리숀 레치욘 에 있고, 교도청은 중부 관구의 라믈라 시에 있다. [3] 정확하게는 UN 총회 결의안상으로는 예루살렘 전역을 어느 국가의 영토로도 인정하지 않으며, 서예루살렘을 실질적인 이스라엘의 영토로 인정하는 국가들 중에서도 대부분은 이스라엘의 동예루살렘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4] 정확히는 텔아비브의 위성도시인 헤르츨리야. 한국은 대표적 친미 및 친이스라엘 국가로 꼽히나 외교적, 경제적으로 UAE,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아랍 국가와도 밀접하고, 이런 이유로 분쟁을 피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의 편을 들지 않고 있다. 반대로 팔레스타인 UN 옵저버 회원국 승인 투표 당시에도 한국은 기권을 선택했다. [5] 가톨릭 성경에서는 야포로, 개신교 성경에서는 '욥바'라고 부른다. 구약성서 여호수아, 십자군 시대, 대항해시대 등에 나오는 야파가 이 도시이다. [출처] Anson F. Rainey (February 2001). "Herodotus' Description of the East Mediterranean Coast". Bulletin of the American Schools of Oriental Research (321).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on behalf of The American Schools of Oriental Research: 58–59. doi:10.2307/1357657. JSTOR 1357657. S2CID 163534665 [7] 안티오코스 12세는 이를 돌파, 나바테아로 남하했다가 전사한다 [8] 콘라드 1세의 형 [9] 카이사레아, 가자, 아스칼론 [10] 기사 80명, 궁수 400명, 이탈리아 보병 2,000명이다. [11] 기사 54명, 보병 2,000여명이다. [12] 한편 분쟁지이던 아스칼론은 그냥 파괴되었다 [13] 그외에 토론, 베들레헴, 나사렛 등 할양됨 [14] 1239년 일시적으로 예루살렘을 함락한 그 인물 [15] 이때 앗 나시르가 이집트의 카팁에게 보낸 항의 편지가 현존한다. [16] 아사신은 선물, 맘루크 측은 십자군 포로들을 제공함 [17] 떠나기 전 유수프와 2년 6개월 40일의 휴전을 맺었다. 같은해 이집트의 아이바크는 아이유브 왕가의 술탄을 완전 폐하고 재차 스스로 술탄에 올랐다. [18] 여러모로 1268년은 한 시대가 저무는 해였다. 이때부터 십자군 국가들의 종말은 확정되어 있었다. [19] 아흐마드 베이의 형인 무스타파 파샤가 1771년 나블루스 물타짐에 봉해지고 미리 (핫즈 세금) 수조권을 받는 등 우스만 파샤의 총애를 받자 불안해지 자라르 가문은 기존에 대립하던 자히르에게 제닌 일대의 길을 내주어 나블루스 공격하게 하였다 [20] 이후 자히르는 기존의 베네치아와 프랑스 대신 러시아 해군으로부터 화기 수입에 나섰다. [21] 아부 나부트는 파르히 가문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며 이스탄불로 향했고, 곧바로 테살로니키 총독에 봉해져 1827년까지 역임한 후 디야르바크르 총독도 지냈다. [22] 그외에 티베리아스, 사파드도 방문 [23] 예루살렘 인근 카르야트 알 이나브를 기반으로 한 베두인 부족 [24] 이스라엘 건국 후 파괴되어 현재는 그 터를 알리는 기둥 열주만이 남아 있다. [25] 하레비가 그녀의 시오니즘 사상에 설득되어 과수원을 빌려주었는지는 불분명하다 [26] 유대 성전을 재건해야 예수가 재림한다 믿는 극경건파 기독교 계파 [27] 19세기 초엽, 기존의 발라디 종을 개량한 것 [28] 한 시오니스트 분석가는 이러한 전통 농법이 '원시적으로' 보였지만, 결과적으로 비용이 덜 들었기에 결국 20세기 들어 서구인 및 유대인들도 그 방법을 따르게 되었다고 기록했다 [29] 지금도 야파 오렌지는 남유럽에서 재배되는 세가지 오렌지 종류 중 하나이다. [30] 또한 일부 이슈브 (토착 유대인) 공동체는 그들이 오스만측 첩자라 여겨 도움을 거절하기도 하여 사태를 악화시켰다. [31] 하지만 1936년에 영국이 팔레스타인 인들에 대해 대대적인 비무장화에 나서 소지한 무기는 매우 적었다 [32] 다만 2차 대전기가 지나며 점차 쇠퇴했고, 현대 이스라엘 정부는 유대인 주도의 개척 사업으로 포장하고 있다. [33] 100% 안전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예루살렘에 비해서 텔아비브는 그나마 안전했다. [34] 텔아비브의 마천루 중에서도 가장 높은 아즈리엘리 사로나 타워(2017년 완공)은 238.4m, 61층으로 63빌딩에 버금간다. [35]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할 것 [36]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37] 일반적으로 동아시아를 제외하면 태양 남중 고도 특성상 북반구에서 가장 덥거나 따뜻한 달은 7월이다. [38] 시설이 엉망진창인 대신에 가격이 저렴하고 밤거리도 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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