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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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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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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선사 시대
2.1. 부니 문화
3. 군도의 정치 모델로서 '만다라'4. 초기 역사5. 순다 왕국과 갈루 왕국6. 스리위자야와 마타람–므당 시대
6.1. 다르마스라야 왕국
7. 마자파힛 제국8. 군소 왕국 시대
8.1. 수마트라섬8.2. 자바섬
8.2.1. 치르본 술탄국8.2.2. 드막 술탄국
8.2.2.1. 파장 왕국8.2.2.2. 칼리냐맛 왕국8.2.2.3. 수라바야 공국
8.2.3. 마타람 술탄국8.2.4. 반튼 술탄국
8.3. 블람방안 왕국과 소순다 열도
8.3.1. 개괄 및 동부 도서
8.3.1.1. 숨바와섬8.3.1.2. 숨바섬8.3.1.3. 라란투카 왕국8.3.1.4. 티모르섬
8.3.2. 발리: 고대와 중세8.3.3. 블람방안: 중세8.3.4. 겔겔과 블람방안8.3.5. 롬복: 소왕국 시대와 통일8.3.6. 발리: 소왕국 시대8.3.7. 블람방안: 네덜란드의 정복8.3.8. 발리/롬복: 네덜란드의 정복
8.4. 마두라섬8.5. 보르네오섬8.6. 술라웨시섬8.7. 말루쿠 제도
8.7.1. 트르나테와 티도레8.7.2. 할마헤라
8.8. 서뉴기니
9. 네덜란드령 동인도 시대10. 일본 제국의 점령11. 인도네시아 독립전쟁12. 합중공화국과 서뉴기니13. 단일 국가 시대14. 부록
14.1. 자바 문화권의 군주 명칭14.2. 군도의 귀족 명칭14.3. 기초 사료 목록14.4. 고전 시대 군도의 지명14.5. 자바 문화에서 역사의 개념
15. 참고 문헌16. 관련 문서1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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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도네시아 역사에 대해 다룬다.

2. 선사 시대

1891년 인도네시아에서 자바 원인이 발견됨으로써, 세계에 퍼졌던 호모 에렉투스 집단의 흔적이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났다. 이들은 초보적인 석기와 불을 사용하였다. 신체가 왜소하기로 유명한 호모 플로레시엔시스 소순다 열도 플로레스섬에 적어도 약 50,000년 전까지 존재했다가 소멸하였다. 일부 학자가 이들의 DNA 분석을 시도하였으나 현재까지는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데니소바인이 아시아 내부로 퍼져 가는 과정에서 남쪽으로 이동한 데니소바인 집단도 인도네시아 군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지역에 도착하였고, 이어 멜라네시아 지역으로도 퍼져 갔다. 데니소바인 연구는 2000년대 말부터 시작되었으므로 증거가 적어 정확한 관련 연대 추정은 아직 어렵지만, 분석된 데니소바인의 게놈으로 보면 멜라네시아인[1] DNA의 4–6%가 데니소바인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동북아시아계나 대륙부 동남아시아계 집단에 비해 현저히 수치가 높다.[2]

현생 인류 호모 사피엔스가 약 60,000년에서 45,000년 전에 인도네시아 군도로 진입한 듯하다. 적어도 기원전 8000년 이전에 남은 현생 인류의 화석은 모두 아프리카에서 이주하는 과정에서 유라시아 북쪽 지역에 오래 머무르지 않은 초기 이주민의 것이다. 과거에는 이들을 ' 오스트랄로이드'라고 통칭했다. 이들은 군도 전역으로 퍼져 최초의 현생 인류 선주민 집단을 형성하였다. 남술라웨시주 마로스(Maros)에는 이들이 남긴 대규모의 동굴 벽화가 있는데, 이 마로스 동굴 벽화군은 유명한 알타미라 동굴 벽화와 더불어 매우 규모가 큰 구석기 동굴 벽화이다. 2010~2020년대 이 마로스 지역에서 활발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세계 최고(最古)의 동굴 벽화 기록이 계속 갱신되고 있다. 마로스 동굴 벽화군 중 2021년 1월 레앙 테동응에(Leang Tedongnge) 동굴에서 발견된 돼지 그림은 45,500년 전의 것으로[3] 2022년 5월 기준 현생 인류가[4] 그린 가장 오래된 동굴 벽화이며, 2019년 12월에 역시 마로스 지역에서 발견된 레앙 불루시퐁 4번 동굴(Leang Bulu' Sipong 4)의 아노아 및 바비루사 사냥 벽화는 43,900년 전의 것이었다.[5]

초기 이주민 집단은 곳곳에서 다양한 구석기 공작(industry) 양식을 가진 석기를 사용하며 번성하였는데, 대표적인 공작으로는 앞서 언급한 마로스 지역의 토알라[6] 공작(Toalian industry)을 비롯하여 수마트라 북동부와 말레이 반도의 호아빈 공작(Hoabinhian industry)[7], 자바 중부 및 동부의 삼풍 공작(Sampung industry) 등이 있다.

초기 이주민 무리는 약 기원전 4300년 무렵까지 군도에서 지배적인 인류 집단이었지만, 기원전 4300~3000년 무렵에 오스트로아시아어족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이, 기원전 2500~2000년 무렵에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이 인도네시아 군도에 도착하였다. 이 두 집단은 중국 남부 지방에서 기원했는데, 후자는 주로 타이완섬에서 발달했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원시시대를 거치며 최종적으로는 가장 나중에 진입한 오스트로네시아어 사용 집단이 군도에서 우세해졌다. 유전학적 연구에 따르면 말레이 반도, 수마트라섬, 자바섬 인구 중 상당수의 유전자에는 고대에 존재했던 오스트로아시아계의 유전적 흔적이 남아 있다. 말레이 반도에는 현대에도 오스트로아시아계 아슬리 제어를 사용하는 오랑 아슬리 집단이 있다.

필리핀을 지나 남하한 오스트로네시아어 사용 집단(동부 이주민)이 인도네시아 군도에서 신석기 시대를 개시했을 수도 있고, 비슷한 시기에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남하한 오스트로아시아어 사용 집단(서부 이주민)이 시작했을 수도 있다. 두 집단은 모두 기원전 2000년 전후에 신석기 유적을 남겼다. 동부 이주민 유물은 술라웨시 서부의 카마시(Kamasi)와 미낭아시파코(Minanga Sipakko), 보르네오 동부의 리앙아부(Liang Abu) 등지에서, 서부 이주민 유물은 보르네오 북부의 구아시레(Gua Sireh), 수마트라 북부의 타켕온( 아체어: Takèngon) 등지에서 발굴되었다.

베트남 지역의 동선 문화(Đông Sơn culture, Kebudayaan Đông Sơn, 기원전 10세기~1세기)는 동남아시아 전역에 영향을 미쳤는데, 군도 서부 지역에도 동선 문화가 전파되어 군도가 청동기 시대로 진입하였다. 동선 문화는 군도 지역에 농사 기법과 거석 기념물 문화, 물소 희생제 등도 전파하여 수마트라섬, 자바섬, 술라웨시섬, 소순다 열도 등지에서 관련 선사 유적이 널리 발견되고 있다. 동선 문화에 영향을 받아 기원전 400년~기원후 100년 무렵에 서부 자바 해안 지역에서 자바의 대표적인 선사 문화인 부니 문화가 번성하였다. 철기 시대는 군도 지역에서 청동기 시대와 명확히 구별되지 않는데, 청동기와 함께 '청동기–철기 시대' 또는 단순히 금속기 시대를 이룬다고 보기도 한다.

인도의 고전 문학에서 신화적인 필체로 자바를 언급하므로 고대 인도인들이 자바섬의 존재를 알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서사시 라마야나》에는 라마의 부하 수그리와(Sugriva)가 시타를 찾기 위해 바다 건너 '야와드위파(Yavadvipa, 자바섬)'로 부하를 보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고대 타밀 서사시 《마니메할라이》(Manimekalai)에는 자바섬에 '나가부람'(Nagapuram)을 수도로 하는 왕국이 있다는 언급이 나온다.

반대로 인도네시아 군도에도 인도로부터 와서 기존에 자바를 지배하던 사악한 거인족의 왕을 죽이고 자바의 새 통치자가 된 크샤트리아 영웅 아지 사카(Aji Saka)의 설화가 전승되어 왔다. 아지 사카가 인도네시아 군도 또는 자바에 도착한 것은 기원후 78년( 샤카력[8] 원년)이라는 설부터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여러 전승은 상호 모순되거나 초자연적 요소가 과다하다. 아지 사카나 아지 사카 전설에서 등장하는 여러 인물에게 역사적 원형이 존재할 가능성은 있지만, 그 원형이 누구인지 현대에 확실히 입증할 방법은 없다.

2.1. 부니 문화

기원전 400년~기원후 100년 무렵 반튼, 브카시, 자카르타가 되는 서부 자바 해안 지역에서 토기를 사용하고 거석 기념물을 남긴 부니 문화(Kebudayaan Buni)가 번성하였다. 부니 문화는 대표적인 자바의 선사 문화이며, 인도네시아의 기원전 선사 문화 가운데 역사 시대와의 접점이 가장 널리 연구된 문화이기도 하다.

부니 문화는 자바의 오스트로네시아족이 자체적으로 동남아시아 타 지역과 교류하며 토기 및 금속기 문화를 발전시켰다가, 보다 나중에 인도의 영향을 받아 인도화되어 가는 과도기를 보여준다. 보다 동쪽으로 향한 다른 오스트로네시아어 사용자 폴리네시아인들은 유럽인의 도래 이전에는 금속을 사용하는 기술을 별로 발달시키지 않았던 것과 대조적이다. 인도네시아의 선사 청동기(금속기) 문화는 동쪽으로 적어도 술라웨시 섬 발리 섬까지 기원전 300년~기원후 300년 무렵 퍼져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부니 문화의 사람들이 바다 건너 여러 지역과 무역 등으로 교류한 증거는 광범위하게 발견되고 있으며, 부니 문화의 토기는 베트남의 사후인 문화(대륙 동남아의 오스트로네시아족 선사 문화로 참파 왕국의 전신)나 자바 중부 플라왕안(Plawangan) 지역 선사 문화의 것과 양식상 유사하다. 특히 동시대 인도의 물품이 기원후 1~2세기의 부니 문화 유물로 출토되기도 했다.

고고학자들은 넓은 의미에서 부니 문화의 지속을 기원후 4~5세기까지로 잡기도 하는데, 기원전의 부니 문화와 인도화가 꽤 진행된 기원후 4~5세기의 부니 문화는 상당히 큰 차이를 보이지만, 그 변화의 계열은 연속적이라 할 수 있다.

기원후 4~5세기 이 지역에는 바투자야(Batujaya) 등지에 거대한 힌두교 및 불교 사원군이 건설되었으며, 산스크리트어로 된 자바 최초의 비문들이 등장하는 타루마 왕국이 창건되었다. 타루마 왕국은 인도의 문자 문화와 정치 시스템이 어느 정도 인구가 밀집하고 비교적 발전된 사회를 갖춘 이 자바 서부 지역에 이식됨으로써 성립하였다고 할 수 있다.

3. 군도의 정치 모델로서 '만다라'

세계 15위권에 가까운 영토를 보유한 인도네시아 역사에는 많은 국가들이 존재하였다. 또, 그 안에서도 수많은 파벌이 존재하였다. 적도 부근에 있는 나라들이 흔히 그렇듯 단순히 지도로 보는 것과는 섬의 크기가 다르다.

이하에 등장하는 다양한 군도 정치 세력에 대한 글을 읽기 전에, 동남아시아 지역 전통 시대에 흔히 나타났던 인도화된 정치체(또한 자바 지역에서 어느 정도까지는 이슬람화 이후의 정치체 일부까지도)의 구조를 설명하는 ' 만다라[9] 모델'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는 영국의 사학자 올리버 월터스(Oliver William Wolters, 1915~2000)[10]가 저서 《동남아시아적 관점에서의 역사, 문화, 지역》(History, Culture and Region in Southeast Asian Perspectives, 1982)에서 처음으로 주창한 이래 많은 지지를 얻었다. 월터스 본인의 해설에 따르면, "선사 시대부터 존재하던 소규모 집락의 연결망이 발달함으로써 동남아시아 초기의 세력 지도가 생겨났으며, 이 세력 지도는 종종 중첩되는 만다라들의 다중심적 조각보(patchwork)"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비유를 풀어 쓰면,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소규모 집락들이 각기 어느 정도의 자주성을 갖추고 보다 상위 단계의 세력 중심(가령 지방의 영주)을 둘러싸며 느슨하게 결속되어 있었고, 이 상위 단계의 영주 세력권(중첩 가능) 역시 어느 정도의 자주성을 갖추며 보다 상위 단계의 대영주를 둘러싸고 느슨하게 결속되어 있었으며, 다시 대영주 세력권(중첩 가능)이 국왕을 중심으로 느슨하게 결속되어 있었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국왕 외에 영주나 대영주 단계에서도 세습으로 전대의 정치적 권위를 이어받는 경우가 아주 흔했고, 많은 경우 영주들은 통혼이나 분가로 맺어진 복잡한 인적 관계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쉽게 말해서 인도 문화가 가미된 동남아시아 특유의 봉건제이다.

군도에서는 이에 따라 정치적 권위가 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인 형태로 모이지 못하고 왕을 둘러싼 만다라의 여러 중심으로 분산되어 있었으며, 군도의 정치에서는 각 지방의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합의를 도출하는 정치적 기술이 중요해지게 되었다. 또한 스리위자야, 마타람, 마자파힛 등 겉으로 보기에 거대한 세력권을 가진 제국에서도, 중앙의 권력이 내전 등으로 조금만 약해지면 중앙의 방침이 지방 영주의 이해 관계와 상충할 경우 지방 영주가 쉽게 중앙에 반발하여 독립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 때문에 상위 영주는 만다라 외곽의 하위 영주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이 정치적 주도권을 실질적으로 가지고 있음을 지속적으로 증명해야 했다. 이것이 양식화된 연극적 의례의 형식으로 고착화된 체제가 클리퍼드 기어츠가 주장하여 유명해진 발리의 소위 '극장국가'(theatre state)이다.[11]

한편 만다라의 '중첩 가능성' 역시 상당히 실질적인 의미가 있었는데, 서로 다른 두 만다라가 중첩하는 지역에 속하는 하위 만다라의 영주가 상위 두 만다라의 대영주에게 동시에 공물을 바치며 복종하는 경우 역시 드물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하에서 특정 국가의 강역을 묘사한 지도나 '영토', '세력권' 등의 표현을 근대적인 국민국가의 영토 개념으로 이해할 경우 크나큰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지도의 강역은 그곳에 속한 반독립적 영주들이 해당 시점에 '중앙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4. 초기 역사

고고학과 신화의 시대를 지나 인도네시아가 역사 시대로 진입한 것은 서기 4세기이다. 인도네시아 군도 지역의 문자 기록은 토착 국가들이 서기 2~4세기경 인도에서 온 상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인도화되고, 인도의 종교, 문화를 받아들여 인도의 문자를 차용해 남긴 비문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비문들을 남긴 최초의 국가로는 서부 자바 지역의 타루마 왕국(Tarumanagara, 4세기~7세기 후반, 타루마나가라 왕국[12])과 동부 칼리만탄 지역의 쿠타이 왕국(Kutai Martadipura, 4~5세기경)이 있었다. 이들 지역의 고대 비문은 남인도의 팔라와 문자로 된 산스크리트어로 적혀 있었다. 타루마 왕국 성립 전에 서부 자바 지역에는 오늘날의 반튼 지역을 중심으로 한 살라카 왕국(Salakanagara, 130~362, 살라카나가라 왕국)이 있었다고 후대 자바 지역의 연대기에 전해지지만, 아직 이 시대의 기록이 발견된 적은 없으며, 남아 있는 기록에도 간략한 창건 과정과 왕들의 계보 정도밖에는 적혀 있지 않다.

수마트라섬에는 서기 3세기 중국 오나라의 기록 《남주이물지》(南州異物志) 등에 따르면 3세기에 가영(歌營[13], Koying[14])이라는 말레이 국가가 중부 잠비 지역에[15] 있었다고 하지만 기록이 적고 간단하며, 당대 사료가 수마트라에서 발견되는 식으로 확실히 입증되지는 않고 있다. 5세기 중반에는 중부 잠비 지역에 칸달리 왕국(Kandali, 간타리干陀利)이라는 국가가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도 역시 중국 측 기록만 남아 있으나, 이 국가는 유송에 454~464년 사이 사신을 보냈고, 519년에도 중국에 사신을 보냈으며 이에 대한 전후 관계가 비교적 명확한 복수의 관련 중국 사료가 존재하여[16] 실존 국가로 추정된다.

이 외에도 6~7세기 북부 수마트라에 나구르(Nagur)[17], 남부 수마트라에 툴랑바왕(Tulang Bawang)[18] 등의 국가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 실체는 불확실하다. 수마트라섬 전체에서 발견된 최초의 문헌기록은 682년경 팔렘방 부근에서 기록되어 1920년에 발굴된 크두칸부킷 비문이다. 이 석문은 팔라와 문자로 된 고대 말레이어로 쓰여 있었으며, 여기에는 스리위자야 왕국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있었다.

보르네오/칼리만탄 지역은 4~5세기의 쿠타이 왕국 이후 자바, 중국, 인도의 저술가가 해안 지역의 교역소를 묘사한 기록이 극소수[19] 있기는 하나, 한동안 역사 기록의 공백으로 남아 있었다가 14세기 자바 문헌 《 나가라크르타가마》(1365)에서 마자파힛의 속령으로 재등장하게 된다.[20]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사라왁강 삼각주 지역은 중국과 인도를 잇는 중계무역 경유지로서 약 6세기부터 1300년 전후까지 번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자파힛이 지방 통제력을 상실하면서 브루나이 술탄국(1368–1888) 등이 마자파힛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여 다시 독자적인 역사를 시작하게 된다. 술라웨시섬과 서뉴기니 일부 지역[21]도 역사에 《 나가라크르타가마》에 적힌 마자파힛의 속령으로 처음 등장했다.

4.1. 타루마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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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순다 왕국과 갈루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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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스리위자야와 마타람–므당 시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68px-Srivijaya_Empire.svg.png


인도네시아 군도 지역은 인도와의 교류로 일찍이 불교를 받아들여 다양한 불교 종파가 번성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의 많은 불교도들이 받아들이는 유력한 설에 따르면, 자바와 수마트라에 불교를 전한 것은 421~423년 사이 인도에서 온 근본설일체유부(根本說一切有部, Mūlasarvāstivāda) 계열의 상좌부 불교도 승려 구나와르만(Gunawarman)이었다고 한다. 구나와르만은 근본설일체유부의 문헌들을 자바와 수마트라로 가져왔으며, 불법을 널리 포교했다고 한다. 수마트라와 자바는 3세기와 4세기에도 인도 상인들이 활발히 왕래했던 지역으로 힌두교는 이미 확실히 전래되어 있었으므로, 그 이전 자바–수마트라 지역에 불교가 전혀 전래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구나와르만의 포교 이전에 불교 승려가 어느 정도 있었더라도 힌두교(브라만교)에 비해 불교의 영향력이 컸다고는 주장하기 어렵다. 중국의 법현(法顯, 337~422)은 스리랑카에 2년 동안 머무르다가 414년에 중국으로 돌아오는 항로에서 풍랑을 만나 동남아시아 지역의 '야파제'(耶婆提, 자바 섬)에 5개월 동안 잠시 머무른 후 광둥으로 가는 상선을 타고 중국으로 돌아왔는데, 야파제에서는 브라만교가 흥성한 반면, 불교는 "말할 것이 없다"(不足言)라고만 언급했다.[22]

671년 수마트라를 찾은 당나라의 구법승 의정(義淨)의 기록인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 691)에 따르면 당시 팔렘방 인근 지역의 사원에서는 1,000명에 이르는 승려들이 인도에서와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불법을 공부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대개 근본설일체유부에 속했고, 일부는 정량부(正量部, Saṃmitīya)를 따랐다고 한다. 한편 7세기부터 자바와 수마트라의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밀교가 번성했는데, 고대 자바어로 일부 밀교 문헌이 번역 및 작성된 바 있어 그 자취를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10세기의 《상향 카마하야니칸》(Sanghyang Kamahayanikan)이 있었다. 그러나 군도에서 결국 정치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은 대승불교였는데, 어째서 상좌부 불교나 밀교가 아닌 대승불교가 지배계급 사이에서 우세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정설은 2018년 현재까지도 없다.

말레이(믈라유)계 불교 국가였던 스리위자야 왕국(Sriwijaya, Srivijaya, 7세기~12세기 말)이 7세기에 건국되었다. 스리위자야의 초기 역사는 불분명하고, 상당 부분 외국 기록이나 비문 등에만 의존해야 하지만, 적어도 8세기 중반경부터는 스리위자야에서 대승불교(일부 지역에 한해 밀교)가 정치적, 사회적 주류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나라는 수마트라 팔렘방을 거점으로 자바섬, 말레이 반도 전역, 칼리만탄(보르네오)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 스리위자야는 특히 아랍–인도–동남아시아– 중국 신라를 잇는 무역로에 위치해 있어 중계무역으로 번창했는데, 불교보다 먼저 군도에 전래된 힌두교를 따르는 기존 세력이 구축한 해상 무역로를 잠식하면서 세력을 확장했다. 동시대 자바 섬 서부에는 순다 왕국(669~1579, 자바 섬 최서단)과 갈루 왕국(669~1482, 자바 섬 중서부)이 있었으며, 자바 섬 중부 및 동부에는 마타람-므당 왕국(732~1016), 카후리판 왕국(1019~1045), 크디리 왕국(1045~1221), 싱하사리 왕국(1222~1292) 등이 마자파힛 제국의 등장 이전까지 존재했다.

다만 마타람–므당 계열의 세력은 중부에서 출발해 동부로 진출했던 것이며, 이들의 진출 이전 자바 동부의 역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극히 적다. 마타람 왕국의 발흥기인 8세기 무렵에도 자바 동부에 왕국이 존재했다는 것은 말랑(Malang) 지역에서 약 760년경에 제작된 비문으로 알 수 있는데, 이 비문에는 칸주루한 왕국(Kerajaan Kanjuruhan)의 3대에 이르는 왕계가 적혀 있다. 가장 먼저 나오는 왕은 데와싱하 왕(Dewa Singha, 7세기 혹은 8세기)이었으며[23], 이를 승계한 왕이 데와싱하 왕의 아들인 가자야나(Gajayana)였고, 가자야나 왕을 승계한 이는 가자야나의 무남독녀인 우테자나(Uttejana)였다고 한다.[24] 같은 비문에는 시바를 숭배하는 가자야나 왕이 힌두교 사원을 지었다는 내용도 적혀 있는데, 이 사원은 현재 말랑 지역의 바둣 사원(Candi Badut)으로 추정된다. 칸주루한 왕국은 9세기 중반경 동부로 세력을 확장한 마타람 왕국에 복속하여 봉신국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타람 왕국 내부의 왕가인 사일렌드라 왕조는 강력한 대승불교 세력을 등에 업고, 한때 8세기 중반에서 9세기 중반의 약 100년 동안 마타람 왕국의 왕가로 존재했으며, 8세기 후반부터 9세기 초반의 최전성기에는 사일렌드라 왕조 마타람 왕국의 다라닌드라 왕(Dharanindra, 마타람 국왕 재위 775~800)의 치세때부터 사마라퉁가 왕(Samaratungga, 마타람 국왕 재위 812~833)의 치세때까지 3대 약 50년 동안 스리위자야의 왕위도 겸하여 마타람–스리위자야가 연합왕국을 이루고, 나중에 군도 전체를 통제하게 되는 마자파힛 제국 이전 가장 강력했던 해상 대제국을 형성했다. 마타람–스리위자야 연합왕국은 사마라퉁가의 승하 후, 마타람의 후대 왕이 산자야 왕가 힌두교도로 교체되어 해소되었으나 사일렌드라 왕가는 이후 스리위자야에서 적어도 11세기 초반까지 왕가로 남게 되었다. 한편 사일렌드라 왕조의 방계인 와르마데와 왕조 발리섬을 10세기 초부터 약 200년 동안 통치했으며, 이 왕가에 속하는 우다야나 와르마데와(Udayana Warmadewa)는 카후리판 왕국의 유일한 왕이자 인도네시아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왕들 중 한 명인 아이를랑가 왕(Airlangga, 990~1049, 카후리판 국왕 재위 1019~1045)의 부왕이었다.[25]

사일렌드라 왕조 스리위자야 왕국 및 사일렌드라 왕조 마타람 왕국은 도서부 동남아시아와 말레이 반도의 테두리를 넘어 오늘날의 캄보디아에 해당하는 진랍 지역이나 오늘날의 베트남 중·남부 지역에 해당하는 참파 지역까지 정치적 영향력을 투사했다. 8세기 후반경 북부의 육진랍과 남부의 수진랍으로 나뉜 진랍 세력[26] 가운데 수진랍은 자바 세력(사일렌드라 왕조 마타람)에 종속되었다. 그러나 9세기 초, 자바[27]에서 온 시바파 힌두교도인 자야와르만 2세(자야바르만 2세, 재위 802~835)[28]가 기존의 진랍 지방 군벌들의 세력을 체계적으로 통합하여 거대한 크메르 제국을 세웠는데, 그 과정에서 802년 스스로가 신왕[29]이자 전륜성왕(Chakravartin Samrat)으로서 자바에 종속되지 않는 완전한 독립 세력의 군주임을 선포했다. 이때부터 크메르 지역은 자바와 수마트라로부터 확실한 정치적 독립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일부 사료에 따르면 자야와르만 2세는 당대 사일렌드라의 크메르 지역 침공에 맞서 승리했다고도 한다.

사일렌드라 왕조 스리위자야는 벵골 팔라 왕조와도 어느 정도 교류가 있었으며, 팔라의 교육기관이었던 날란다 대학으로 유학할 학생들에게 숙박과 편의시설을 제공했다. 스리위자야 왕국의 중심지인 수마트라에서는 이와 같은 인도 지역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불교 학술이 고도로 발달했다. 11세기에 스리위자야의 고승 다르마키르티슈리(Dharmakīrtiśrī)[30]의 명성은 인도까지 널리 퍼져 인도에서 다르마키르티슈리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스리위자야로 유학을 오기도 했다. 1013년부터 12년 동안 수마트라에 머물며 150명 이상의 학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던 벵골인 승려 아티샤(Atiśa, 982~1054)는 특히 다르마키르티슈리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아티샤는 유학 후 벵골로 돌아갔다가 티베트에서 설법하며 많은 제자를 두었는데, 이 제자들 가운데 한 명이 티베트 카담파(Kadampa)의 시조가 되었다. 이 시기 티베트의 기록에서는 수마트라를 불교의 주요 중심지로 기술하고 있다.

스리위자야와 서부 및 동부 자바 세력은 정세 변화에 따라 협력하거나 경쟁했는데, 경쟁이 특히 심화된 10세기 후반부터 11세기 초반에는 스리위자야와 마타람–므당 간에 격렬한 전쟁이 벌어져, 마타람–므당이 스리위자야의 수도인 팔렘방을 공격한 후 약탈했다가, 그 보복으로 마타람–므당 내부의 반란군과 합세한 스리위자야군이 마타람–므당의 수도 와투갈루를 점령하고, 국왕을 포함한 왕족을 죽여 마타람–므당이 멸망하기도 했다(1016). 이에 따라 많은 인구를 바탕으로 활발하게 해외로 진출하던 자바 중동부 세력이 구심점을 상실하여 혼란에 빠졌고, 11세기 초 일시적으로 스리위자야가 ( 필리핀 지역을 제외하면)[31] 사실상 도서부 동남아시아 인구의 대부분이 밀집된 자바, 수마트라, 말레이 반도를 모두 통제하는 패권을 획득하게 된다.

그러나 1025년, 촐라 제국라젠드라 촐라(재위 1014~1044)가 함대를 이끌고 스리위자야의 수도 팔렘방을 기습, 점령하여 제대로 방비되지 않았던 스리위자야의 궁성과 사원을 점거하고 막대한 재물을 약탈했을 뿐더러, 설상가상으로 사일렌드라 왕조 스리위자야의 국왕 상라마 위자야퉁가와르만(Sangrama Vijayatunggavarman)을 생포하기에 이르렀다.[32][33] 이 난데없는 공격으로 스리위자야는 적대 관계에 있었던 동부 자바의 신흥 세력인 카후리판과 황급히 화친해야 했으며, 촐라군에 함락된 팔렘방에서 피신한 위자야퉁가와르만의 딸[34] 다르마프라사도퉁가데위(Dharmaprasadottungadewi)는 자바로 떠나 카후리판의 국왕 아이를랑가의 왕비가 되었다. 톡톡히 재미를 본 촐라는 수마트라 북동부의 파나이[35], 말레이 반도 서부의 크다 등지에서 스리위자야의 항구들을 점령, 약탈했고, 스리위자야는 속수무책으로 당하여 정치, 경제적으로 크게 약화되었다.

초기의 촐라 침공은 국가적 차원의 약탈 원정으로서 항구적인 점령을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타밀계 상인들이 촐라의 군사적 영향력을 등에 업고 수마트라와 말레이 반도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11세기 중반에는 많은 촐라인들이 스리위자야에서 고위직을 맡게 되었다. 그 가운데 중국에 도달한 스리위자야 사신도 있었다. 타밀계 상인들의 영향력은 당대의 여러 비문 기록으로도 직접 입증되는데, 가령 1088년 수마트라 북서부의 로부투아(Lobu Tua) 지역에서 타밀어로 기록된 <로부투아 비문>(Prasasti Lobu Tua)에는 유명한 타밀 상인 길드인 아야월루(Ayyavolu)의 500인 길드[36]가 이곳의 경제를 지배하면서 지역의 하수인들에게 징세권을 위임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11세기 후반 스리위자야의 변방인 크다에서 발생한 크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스리위자야에서 촐라에 도움을 요청했는데, 이에 응한 위라라젠드라 촐라(Virarajendra Chola, 재위 1063~1070)가 1068년에 함대를 출병시켜 크다 반란을 진압하고 스리위자야의 크다 영주를 복권시켰으나, 궁극적으로 촐라 제국의 종주권을 크다 지역이 받아들이게 했다.

스리위자야가 촐라 제국의 원정으로 인해 각 지방에 대한 해상 제국으로서의 통제권을 상실하자, 사일렌드라 왕조의 권위 또한 극도로 실추되었다. 상라마 위자야퉁가와르만 이후 사일렌드라 왕조에서 스리 데와[37]라는 왕이 스리위자야의 왕으로 있었던 것은 알 수 있으나, 이후 약 150년 동안 스리위자야의 왕계에 대한 확실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다. 중국(송), 인도(촐라 등) 등지와의 외교 문서에서 '스리위자야'라는 명칭은 계속해서 사용되나, 촐라를 스리위자야의 봉신국으로[38] 송나라 기록에서 혼동하기도 했다. 다만 촐라가 스리위자야의 핵심부인 수마트라의 팔렘방 및 잠비 지역을 완전히 직접 지배한 적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39]

스리위자야의 왕은 (아마도 팔렘방에) 계속해서 존재했고, 적어도 당분간은 사일렌드라 왕가가 계속해서 계승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11세기 후반이 되면 수마트라 핵심 지역에 대한 완전한 통제력조차 가지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1079년에서 1088년 사이 송나라에 도착한 수마트라 사신의 기록을 보면 팔렘방(寶林邦)과 잠비(詹卑)가 따로 사신을 보내기도 했다. 1064년 솔록(Solok)에서 기록된 비문을 보면 당대 잠비의 군주로 다르마위라(Dharmavira)라는 인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단편적인 비문 기록 외에 다르마위라가 스리위자야의 적법한 군주인지, 아니면 단지 팔렘방과 대립하는 잠비 지방의 군주인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이 <솔록 비문>에 따르면 당대 잠비의 부상에 있어서 잠비와 자바계 세력의 연계가 일정한 역할을 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중국에 도착하여 '스리위자야'의 이름으로 기록된 사신만 고려했을 때(팔렘방과 잠비 중 어느 쪽이 보냈는지는 확정적이지 않은 경우가 있다), 1077년[40], 1078~1085년(사신 다수), 1082~1083년(사신 3명), 1094~1097년(사신 1명), 1156년(사신 1명) 등의 중국 측 사신 도착 기록이 있기는 하나[41], 이상의 사신 기록에서 당대 스리위자야 군주의 이름은 보고되지 않는다.[42] 1178년에 잠비에서 다르마스라야의 마하라자였던 트라일로카라자(Trailokaraja)가 보낸 사신이 도착한 이후에는 남송의 황제가 스리위자야에서 사신을 직접 수도 임안으로 보내는 것을 금지했다.

6.1. 다르마스라야 왕국

11세기 중반부터 12세기 후반까지 수마트라 교역의 중심지는 서서히 팔렘방에서 잠비로 이동하였으며, 12세기 후반에 다르마스라야와 잠비 등지를 핵심 영지로 하는 말레이(믈라유)계의 마울리 왕가(Mauli)가 수마트라 중심부를 석권하여 수마트라 동부 무역을 통제하게 된다.[43] 마울리 왕가의 영지는 따로 다르마스라야 왕국(Kerajaan Dharmasraya, 1178?–1347) 또는 믈라유 왕국(Kerajaan Melayu)[44]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3세기 초 남송의 지리서 《제번지》(諸蕃志, 1225)에 따르면 '스리위자야'(잠비 만다라, 즉 다르마스라야 왕국)는 당대에 북으로는 파항, 트렝가누, 랑카수카, 클란탄 등 말레이 반도 전역과 오늘날의 나콘시탐마랏에 해당하는 탐브랄링가 왕국까지 속령으로 두어 지배[45]하였고, 전통적인 세력권인 수마트라(팔렘방, 잠비, 라무리[오늘날의 아체]) 지역에 더불어 남으로는 자바 서부의 순다 지역까지 속령으로 지배하였다고 한다. 이 기록을 받아들인다면, 마울리 왕조는 사일렌드라 시대 한때 북부 변경의 최북단에 해당했다가 독립해서 떨어져나갔던 탐브랄링가까지 재복속시켜 전성기 스리위자야의 영역을 거의 회복했던 것이다. 그러나 군도 정치의 상수가 된 동부 자바 세력과의 대립은 이어졌으며, 마울리 왕조 다르마스라야 왕국은 싱하사리 왕국이 대대적으로 수마트라를 침공한 말라유 원정(Ekspedisi Pamalayu, 1275–1286)으로 회복불가능할 정도로 약화되었다. 최종적으로 1347년, 다르마스라야 왕국은 마자파힛 제국의 가자 마다가 지휘하는 해상 원정으로 멸망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다르마스라야 왕국의 파생 세력이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니었다. 마울리 왕조의 왕족 여성[46]과 마자파힛 귀족 남성의 아들로 마자파힛의 수도 마자파힛(오늘날의 트로울란)에서 태어난 아디탸와르만(Adityawarman, 1294–1310 사이 출생, 파가루융 국왕 재위 1347–1375)[47]은 마자파힛이 수마트라 지역을 점령한 후 마자파힛의 관리로 파견되어 마자파힛의 깃발 아래 수마트라를 안정화하였다. 그러나 아디탸와르만은 결국 다르마스라야 왕국의 잔당도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여, 수마트라 중부와 서부에 파가루융 왕국(Kerajaan Pagaruyung, 1347–1833, 말라야푸라 왕국Kerajaan Malayapura이라고도 함)을 세우고 파가루융(Pagaruyung)을 수도로 하여 마자파힛의 권위를 인정하지만 완전히 종속되지는 않는 독자 세력을 구축했다. 파가루융은 14세기가 다 지나기 전에 이미 마자파힛의 통제를 거의 받지 않는 독립 세력이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중국 측 기록에는 1371–1377년간 파가루융에서 6차례에 걸쳐 사절이 도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확실한 문헌 기록은 없지만 미낭카바우의 전승과 사후 기록에 따르면 15세기 초(약 1409년경), 마자파힛이 파가루융을 안정화하기 위해 원정군을 보냈다고 하며, 미낭카바우 측 전승에 따르면 파가루융군이 마자파힛군을 물리쳤다고 한다. 파가루융 왕국은 마자파힛이 멸망한 후에도 이슬람을 받아들이며 수마트라 서부(오늘날의 서수마트라주 지역)의 미낭카바우 고원 지역에서 파드리 전쟁(Perang Padri, 1803–1837) 와중에 소멸하는 19세기 초까지 존속하였다.

수마트라 동부는 마자파힛의 종주권을 인정하긴 하였지만 기존 지배체제가 많은 부분 그대로 지속되고 있었는데, 1376년 수마트라 동부에서 잠비의 새 영주로 취임한 마울리 왕가의 우니(Wuni)는 마자파힛 영향권에서 독립하려는 행보를 보여 명나라 홍무제에게 사신을 보내 자신을 새로운 스리위자야의 마하라자로 인정해주기를 요청했다. 홍무제는 수락했는데, 이 정보가 곧 마자파힛 황제 하얌 우룩의 귀에 들어갔다. 하얌 우룩은 대노하여 곧 중국 사절들을 죽이고 이들의 선단을 파괴하였는데, 홍무제는 뜻밖에 이후 고립주의적인 태도를 보여 마자파힛에 별다른 보복을 하지 않았다. 이에 안심한 하얌 우룩은 1377년 해군을 잠비와 팔렘방으로 보내 도시를 약탈하고 마자파힛의 지배권을 재확인하였으며 우니를 축출하였다.[48] 하얌 우룩이 사망한 1389년 시점에 팔렘방에서 재차 반마자파힛 반란이 발발하였으나 마자파힛군은 다시 한 번 이를 진압하고 도시를 약탈하였다.

한편 다르마스라야 왕국 멸망 이전, 말레이 반도로 이주한 다르마스라야의 귀족 닐라 우타마(Sang Nila Utama, 싱아푸라 국왕 재위 1299–1347)[49]는 현재의 싱가포르 지역에 싱아푸라 왕국(Kerajaan Singapura, 1299–1398)을 세운다. 싱아푸라 왕국은 마자파힛의 원정으로 1398년에 멸망하였으나, 싱아푸라의 마지막 왕 파라메스와라(Parameswara, 1344–1414)[50]는 잔당을 이끌고 말레이 반도 안쪽으로 북상, 믈라카 술탄국(1400–1511)을 건국했다.

7. 마자파힛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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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군소 왕국 시대

마자파힛 제국이 약화하고 붕괴되면서 제국의 지배 영역에는 다수의 지방 세력이 군소 왕국을 세웠다.

8.1. 수마트라섬

수마트라 북부에는 일찍이 파사이 술탄국(Kesultanan Pasai, 사무드라 다루살람Samudera Darussalam이라고도 함, 1267–1521)[51] 라무리 왕국(Kerajaan Lamuri, 15세기 초–1503)[52]이 존재하며 지속적인 전쟁 상태에 있다가, 나중에 라무리 왕국의 영토에서 이를 흡수한 아체 술탄국(1514–1903)이 세워져 파사이 술탄국까지 흡수하고 수마트라 북부와 말레이 반도 일부를 통제하는 대세력으로 발전하였다. 수마트라 서부에는 파가루융 왕국(Kerajaan Pagaruyung, 파가루융 술탄국Kesultanan Pagaruyung, 1347–1833)[53] 인드라푸라 왕국(Kerajaan Inderapura, 인드라푸라 술탄국Kesultanan Inderapura, 1347–1792)[54] 등이 있었다.

수마트라 북동부에는 아루 왕국(1225–1613)과 들리 술탄국(1632–1946)이 주요 세력으로 존재하였다. 인접 지역에는 랑캇 술탄국(Kesultanan Langkat, 1568–1946), 아사한 술탄국(Kesultanan Asahan, 1630–1946), 스르당 술탄국(Kesultanan Serdang, 1723–1946) 등도 존재하였다. 이들은 지역의 주요 세력인 아체, 조호르, 네덜란드 세력의 힘겨루기에 따라 종주국을 바꿔 가며 존속하다 최종적으로는 네덜란드의 보호국이 된다.

수마트라 동부 팔렘방 지역은 마자파힛 멸망 이후에도 드막 술탄국에 속했다가 드막이 붕괴된 후 독립하였고, 17세기에 군주가 술탄위를 칭하여 팔렘방 술탄국(Kesultanan Palembang, 1675–1823)이 되었다가 네덜란드의 침공으로 19세기 초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합병되었다. 인접한 잠비 지역에서는 마자파힛 이후 독립한 지방 정권이 17세기 초에 후추 무역으로 번성하였고, 17세기 후반에는 지역의 유력한 조호르 술탄국, 팔렘방 술탄국의 경쟁 상대가 되기도 하였으나 17세기 후반의 조호르–잠비 전쟁이 1679년 최종적인 잠비의 패전으로 종결된 후에는 잠비가 이전의 위세를 회복하지 못했다. 잠비의 영주도 1687년 술탄위를 칭하여 잠비 술탄국(Kesultanan Jambi)이 성립되었다. 잠비 술탄국은 19세기에 점차로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종속되었으며, 1904년 잠비 술탄국은 네덜란드에 점령되어 해산되었다. 이외에 수마트라 동부에는 18세기에 상당한 세력을 떨친 시악 술탄국(Kesultanan Siak Sri Inderapura, 1723–1945)도 있었다.

수마트라와 자바 지역은 15–17세기를 거치며 대체로 이슬람계 정권이 지배하게 되었다.[55] 수마트라 북서부 바탁 지역에서는 시싱아망아라자 12세(Sisingamangaraja XII, 재위 1867–1907) 등 일부 군주들이 19세기와 20세기 초까지 힌두 신앙을 유지하였으나, 오늘날 바탁인들은 합쳐서 0.1% 정도의 극소수를 제외하면 힌두교나 불교를 따르지 않고, 2015년 센서스 기준으로 개신교(54%), 이슬람교(40%) 또는 가톨릭(6%) 신앙을 가지고 있다. 특히 바탁 지역의 개신교도는 19세기에 루트비히 노멘젠(Ludwig Ingwer Nommensen) 등 독일인 선교사들이 열정적으로 루터교를 전파한 데 힘입어 주로 루터교도이다.

8.1.1. 파사이 술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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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의 아체 술탄국은 파사이 술탄국의 후계 국가이다.
8.1.1.1. 아체 술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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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2. 들리 술탄국

수마트라 북동부( 북수마트라주 지역)에는 바탁인의 일파인 카로인(Karo)의 아루 왕국(Kerajaan Aru, 1225–1613)이 있었는데, 이 지역의 카로인은 힌두교와 불교를 조금씩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이와 동시에 오랫동안 인도화에 저항하며 토착 정령 신앙(프므나Pemena)을 간직하고 있었다. 아루 왕국은 14세기 중반 마자파힛의 해상 원정으로 마자파힛에 복속하였다가 마자파힛이 약화되며 다시 독립하였다. 일찍이 13세기부터 이슬람화도 시작되어, 정화 함대가 원정하였을 때는 이미 아루의 왕과 신민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고 《영애승람》(瀛涯勝覽, 1416)에 기록되어 있다. 《동방지》에도 아루는 식량과 장뇌, 안식향(benzoin), 금 등 물산이 풍부한 왕국으로 기록되어 있다.

북서부의 아체가 세력을 확장함에 따라 아루는 1539년에 수도인 무역항 른탕(Kota Rentang)을 아체에 빼앗기고 내륙으로 세력 중심을 옮겼으며, 근근이 존속하다 1613년 아체 정복군주 이스칸다르 무다의 원정으로 멸망하였다. 이스칸다르 무다는 1632년 고차 팔라완(Gocah Pahlawan)에게 아루 지역을 주어 다스리게 하여, 아루의 고토에서 아체의 봉신국으로 들리 술탄국(Kesultanan Deli[56], 1632–1946)이 창건되었다. 그러나 아체가 이스칸다르 무다 사후 약화되자 들리는 1669년 아체에서 독립하여 말라카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세력과 친선 관계를 구축하였다.

들리 지역은 18세기 초 계승 문제로 내전을 치르는 등 내부 정치가 순탄치만은 않았으나 장뇌, 안식향, 백단향 등의 원산지로서 동남아시아 무역 체제에서 오랫동안 구축된 입지를 이용하여 꾸준히 경제적 부를 누렸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별로 강하지는 못하여 조호르 술탄국이 세력을 확장하자 이에 줄곧 복속한 상태로 있다가 1854년 아체의 원정으로 다시 아체의 종주권을 받아들이게 된다. 1862년부터는 들리가 네덜란드의 보호국이 되었다. 네덜란드인은 들리 지역에서 토착 귀족들과 협력하며 담배 플랜테이션을 차렸다.

1942년, 일본군이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점령하였을 때 이 지역 귀족의 특권을 빼앗고 네덜란드인을 쫓아냈다. 귀족들은 빼앗긴 특권을 되찾기 위해 구 네덜란드 세력과 협력하며 독립파와는 자연히 소원해지게 되었다. 네덜란드의 앞잡이로 평판이 나쁜 토착 귀족들에 대한 반감이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차츰 확산되어 가다가, 마침내 1946년 들리를 비롯한 수마트라 북동부에서 대대적인 반귀족, 반왕정 사회 운동 '동수마트라 사회 혁명'(Revolusi Sosial Sumatera Timur)[57]이 발발하였고, 이 과정에서 많은 귀족이 살해당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이런 가운데 들리 술탄국은 1946년 인도네시아 공화국에 가입함으로써 실질적인 정치적 권리를 포기하였다. 그러나 들리 술탄직 자체는 2019년 현재까지도 남아 있으며, 현재 들리 술탄은 2005년 7월 22일에 즉위한 술탄 마뭇 라만지지(Sultan Mahmud Lamanjiji)이다.

8.1.3. 시악 술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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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4. 리아우링가 술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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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잠비 술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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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6. 팔렘방

수마트라 동부의 팔렘방 지역은 1347년 마자파힛의 원정으로 마자파힛에 복속되었으나, 14세기 말 여러 차례의 반마자파힛 반란이 발생하며 마자파힛의 통제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1397년 무렵 마자파힛에 의해 팔렘방의 영주 가문이 단절되자, 팔렘방에 거주하던 광둥 난하이(南海) 출신 화인 양도명(梁道明)이 다른 화인 수천 명의 지지를 얻고 팔렘방의 왕으로 추대되어 독자적인 반마자파힛 세력을 구축하였다. 1405년, 세력이 공고해진 양도명은 팔렘방의 지배자로 인정받기 위해 그를 따르는 신하들과 명나라 영락제 조정으로 입조하러 갔다. 양도명은 자리를 비우며 자신을 따르는 광둥 출신 중국계 무슬림 시진경(施進卿)에게 세력의 통솔을 위임하였고, 양도명은 입조하여 답례를 받고 팔렘방 왕으로 명나라의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양도명은 팔렘방으로 귀환하지 않고, 광둥 지역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양도명이 귀환하지 않자, 양도명이 남겨둔 시진경은 자연히 팔렘방에서 양도명을 따르던 화인들을 통솔하게 되었다. 그런데 1405–1407년, 1400년 무렵부터 지역에서 활동하던 화인 해적 진조의(陳祖義)가 팔렘방을 공격하였다. 진조의는 선단 10여 척에 수하 해적 5천 명을 거느리는 대세력의 우두머리였고, 팔렘방뿐 아니라 말라카 해협의 여러 도시를 공격, 약탈하던 차였다. 시진경은 자력으로 도시를 방어하기 어렵다고 판단, 지역을 드나들던 정화의 선단에 구원을 요청했다. 1407년 정화 함대가 진조의 함대를 물리치고 진조의를 난징으로 압송해 처형함으로써 팔렘방은 해방되었다.

시진경은 1407년 사위를 베이징으로 보내 조공했고, 영락제는 시진경을 그대로 명의 선위사(宣慰使)로 임명하여 시진경이 공식적인 팔렘방 영주가 됨으로써 팔렘방은 잠시 명의 간접 지배 아래 놓였다. 시진경 사후 영주 승계권 문제에 개입하는 등 정화 함대는 팔렘방의 지배권을 유지하려 노력했으나[58], 정화 함대가 물러간 후 팔렘방은 자연스럽게 마자파힛의 산하로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팔렘방은 마자파힛이 붕괴되어 가자 드막 술탄국에 속하였다가, 드막이 붕괴된 후 파장 왕국이 성립하자, 구 드막의 귀족 그딩 수로(Geding Suro)가 추종 세력을 거느리고 팔렘방으로 도피하여 파장의 종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독립 정권을 세웠다. 수마트라의 요충지로서 팔렘방의 경제적 영향력은 여전히 유효하여 팔렘방은 17세기에도 상당히 번성하였는데,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이를 포착하여 팔렘방에 진출하고 1619년에 상관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1642년 공식적으로 동인도 회사가 팔렘방의 후추 교역 독점권을 획득한 후 점차 지역의 경제를 지배하려는 동인도 회사와 토착 세력 간 긴장이 팽팽해져 갔고, 마침내 1657년 팔렘방에서 네덜란드 선박이 공격받자 동인도 회사는 징벌 원정을 개시하여 1659년 팔렘방을 점령하고 약탈, 방화를 저질렀다. 이 와중에 16세기에 그딩 수로가 지은 팔렘방의 쿠토 가왕 궁(Keraton Kuto Gawang)도 파괴되었다.

팔렘방의 수수후난 압두라만(Sri Susuhunan Abdurrahman, 재위 1659–1706)은 파괴된 쿠토 가왕 궁을 버리고 새 궁전 브링인 장굿 궁(Keraton Beringin Janggut)을 지었다. 수수후난 압두라만이 1675년부터 공식적으로 기존의 군주 명칭 '수수후난'을 버리고 술탄위를 칭함으로써 팔렘방 술탄국(Kesultanan Palembang, 1675–1823)이 창건되었다. 팔렘방 술탄국은 기본적으로 드막의 파생 세력으로 출발하였으므로 귀족들이 자바어를 궁정어로 사용했고 자바 문화가 고급 문화로 향유되었으나, 동시에 무역 국가로서 말레이어와 말레이 문화에도 개방적이어서 독특한 혼성 문화를 창달하였다.

18세기 초에는 수마트라섬과 말레이 반도에서 부기스인의 세력이 강성해져 조호르 술탄국, 아체 술탄국 등에서 집권에 성공하였고, 팔렘방 술탄국에도 점차 위협이 되었다. 이 시기에 팔렘방 술탄 마뭇 바다루딘 1세(Mahmud Badaruddin I, 재위 1724–1757)는 17세기 말부터 팔렘방 술탄국이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나 당시 부기스인의 세력권에 있던 주석의 주요 산지 방카블리퉁 제도를 점령하고 채광 노동자로 화인들을 고용하였으며, 1731년 방카섬에서 발생한 부기스인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술탄은 수마트라 남부 람풍(툴랑바왕) 지역의 토착 영주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이 지역으로도 세력을 확장하려고 시도하여 기존에 지역을 지배하던 반튼 술탄국과 신경전을 벌였다. 팔렘방과 반튼 간의 대립은 1738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중재로 반튼의 람풍 영유권이 그대로 인정되는 방식으로 종결되었다. 18세기 말, 무하맛 바하우딘(Muhammad Bahauddin, 재위 1776–1803)의 치세에 오늘날에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쿠토 브삭 궁(Keraton Kuto Besak)이 신축되었다.

팔렘방 술탄국이 방카블리퉁 제도를 차지한 후, 18세기에는 팔렘방의 주요 교역품으로 주석이 대두되어 점차 기존의 후추를 대체해 갔다. 이에 따라 주석의 경제적 가치에 눈독을 들이던 네덜란드와 영국 세력이 팔렘방의 이권에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19세기 초 마뭇 바다루딘 2세(Mahmud Badaruddin II, 재위 1804–1812, 1813, 1818–1821)의 치세에 이는 본격화되었고, 1819년 네덜란드가 팔렘방의 복속을 목적으로 침공하였으나 팔렘방군에 일단 격퇴되었다. 네덜란드는 이에 굴하지 않고 1821년 다시 팔렘방을 침공하여 1821년 6월 25일 점령했다. 네덜란드에 반항하였던 마뭇 바다루딘 2세는 폐위되고 바타비아로 압송되었다가 트르나테섬으로 유배되었다. 팔렘방 술탄위는 아맛 나자무딘 3세(Ahmad Najamuddin III, 재위 1821–1823)가 잠시 계승하였으나 결국 1823년 술탄국이 해체되었고, 팔렘방은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편입되었다. 술탄가는 유지되었으므로 오늘날까지도 명목상 팔렘방 술탄직은 이어져 내려온다.

8.2. 자바섬

자바 서부와 수마트라 남부의 람풍 지역은 반튼 술탄국(1527–1813)의 세력권이 되었다. 반튼 술탄국은 수마트라 남서부의 븡쿨루 지방으로도 세력을 확장하여, 난립하던 지역 군소 왕국들을 복속시켰다. 자바 서부에는 치르본 술탄국(1445–1926)도 있었고, 자바 중부에는 마자파힛을 멸망시킨 드막 술탄국(1475–1554)이 있었다. 나중에 자바 중부에서 드막을 계승한 마타람 술탄국(1587–1755)이 등장하였는데, 이후 자바를 거의 통일하고 문화적으로도 황금기를 누렸다.

그 밖에도 순다 왕국의 멸망 후 치르본 술탄국 산하에 있었던 수므당 지역의 영주가 16세기 말 잠시 독립하였던 수므당라랑 왕국(Kerajaan Sumedang Larang, 1527–1620), 드막의 약화와 멸망 과정에서 자바 북부 즈파라(Jepara) 지역의 지방 영주가 독립하였던 칼리냐맛 왕국(Kerajaan Kalinyamat, 1527–1599)과 동부의 항구도시 수라바야를 중심으로 지방 영주가 독립한 수라바야 공국(Kadipaten Surabaya, 1546?–1625) 등이 단명한 왕조로 존재하였으나, 모두 마타람 술탄국에 흡수되어 멸망하게 된다.

수마트라와 자바 지역은 15–17세기를 거치며 대체로 이슬람계 정권이 지배하게 되었고, 자바 최동단의 블람방안 반도에서 힌두계 블람방안 왕국(Kerajaan Blambangan, 15세기 말–1770) 정도가 자바에서 마지막까지 세력을 유지한 힌두–불교 세력으로 남았다. 자바 최동단의 틍그르(Tengger) 지역에는 오늘날까지도 힌두 신앙이 존속하고 있다.

8.2.1. 치르본 술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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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2. 드막 술탄국

파일:인도네시아 모스크 2.jpg
드막 대사원(1479). 드막 술탄국의 왕실 사원으로, 인도네시아에서 현존하는 모스크 가운데 암펠 사원(1421) 다음 두 번째로 가장 오래되었다.

드막 지역에 독립 정권을 세운 것은 마자파힛 황제 브라위자야 5세와 중국계 후궁의 아들로서 태어난 마자파힛의 황자 라덴 파타(Raden Patah, 재위 1475–1518)였다.[59] 라덴 파타는 복잡한 마자파힛 중앙정계의 변동에 따라 아버지 브라위자야 5세의 세력이 정계에서 밀려나고 뒤이어 대재상 우다라가 중앙의 실권자가 되자 마자파힛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고 마자파힛 중앙정부와 적대하였다. 이 마자파힛과 드막의 대립은 마자파힛이 멸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3대 군주이자 라덴 파타의 아들(또는 동생)인 트릉가나(Trenggana, 재위 1521–1546)는 치르본 수난 구눙자티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으며, 이어서 스스로 술탄위에 올랐다. 트릉가나는 이슬람교도 군주로서 중부 자바에서 힌두교도 세력과 맞서 싸우는 데 주력하며 드막 술탄국의 영토를 동서로 확장하였다. 순다 왕국이 포르투갈과 동맹을 맺자(1522), 술탄 트릉가나는 1527년 순다의 반튼 지역과 순다클라파(Sunda Kelapa, 후대의 자야카르타) 항구를 침공하여 점령하고 점령지에 봉신국 반튼 술탄국을 세우고 수난 구눙자티의 아들 하사누딘(Hasanuddin)에게 통치를 맡겼다. 트릉가나는 동부 자바로도 원정을 나가 1527년까지 마자파힛 제국의 잔존 세력을 일소하고 마자파힛을 멸망시켰다. 트릉가나 시대에 드막 술탄국은 마자파힛 제국의 해양 세력권을 일부 계승하여, 수마트라의 팔렘방 방카블리퉁 제도, 그리고 보르네오 남서부 해안의 수카다나 지역과 남부 해안의 반자르 지역도 세력권에 두었다. 이들 해외 속령은 드막 붕괴 이후 뿔뿔이 흩어져 따로 독립하게 된다.

강한 카리스마를 갖춘 술탄 트릉가나가 1546년 자바 동부의 블람방안 왕국 정벌 도중 부하에 의해 암살당하자 구심점을 잃은 드막 술탄국에서 왕자들 간의 계승권 분쟁이 내전으로 발전하였다. 승리한 뭄킨(Mumkin) 왕자가 수난 프라와타(Sunan Prawata)로 즉위(재위 1546–1549)하나 곧 암살된다. 수난 프라와타를 암살하고 그를 계승한 지팡파놀란(Jipang Panolan) 공 아랴 프낭상(Arya Penangsang, 재위 1549–1554)의 치세에도 극심한 궁중 암투가 발생하였고, 보욜랄리(Boyolali)의 영주 하디위자야(Hadiwijaya)가 중앙정권과 반목하여 양자 수타위자야(Sutawijaya)를 보내 1554년 반란군과의 전투를 지휘하던 아랴 프낭상을 혼란한 와중에 암살했다. 오랜 내분으로 약화된 드막 술탄국은 지방 영주들이 더 이상 중앙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아랴 프낭상이 죽은 이후 공중분해되고 만다.

드막 술탄국이 소멸한 이후 중·동부 자바에서는 16세기 말까지 여러 지방 군소 세력이 난립하여 극심한 혼란이 발생했다. 세력 가운데 상당수는 도시를 중심으로 도시 영주 세력권이 독립성을 띤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중부를 통합한 마타람 술탄국 이전에 중부에 등장한 어느 정도 규모 있는 세력은 파장 왕국(Kerajaan Pajang)과 칼리냐맛 왕국(Kerajaan Kalinyamat) 정도가 있었다. 동부 자바에는 수라바야 공국(Kadipaten Surabaya)이 여러 도시 국가 가운데 가장 번성하였으나, 조금 일찍 통합된 중부와 달리 17세기 초까지 여러 군소 도시 세력이 난립하는 형세는 그대로였다가, 마타람 술탄국의 동부 원정으로 17세기 전반 블람방안 지역을 제외한 동부 자바 역시 마타람에 통합되었다.
8.2.2.1. 파장 왕국
아랴 프낭상을 암살한 하디위자야는 드막 술탄가의 보물들을 파장(Pajang, 오늘날의 수라카르타와 카르타수라 경계 지역)으로 옮겨 자신을 따르는 세력을 그러모아 파장 왕국(1568–1587)을 차렸다. 아랴 프낭상 사후 1556년부터 원래 마타람(Mataram, 오늘날의 욕야카르타 인근) 지역은 자바의 연대기 일부에 따르면 마자파힛 라자사 황가의 후손이라고 하는 키 아긍 파마나한(Ki Ageng Pamanahan, 수타위자야의 친아버지)이 통치하며 하디위자야의 세력권 안에 있었다. 1575년 키 아긍 파마나한이 사망한 후 영주 자리를 물려받은 수타위자야는 당분간 하디위자야 산하에서 조용히 마타람 지역의 내실을 다졌으나, 끝까지 파장 산하에 남을 생각은 없었다. 수타위자야는 의도적으로 크두(Kedu, 오늘날의 트망궁Temanggung군 인근 지역)와 바글렌(Bagelen, 오늘날의 푸르워르조Purworejo군 지역) 지역에서 파장으로 가는 조세의 징세를 방해하는 등 점차 불손한 움직임을 보였으며, 이것이 누적되다가 결국 1582년 하디위자야가 마타람을 공격하여 파장–마타람 전쟁이 발발하였다. 그러나 파장의 대군이 무리하게 진격하다 마타람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므라피산이 분화하자 하디위자야는 원정군을 물렸고, 귀로에서 부상을 입어 1582년이 다 가기 전에 사망하였다. 하디위자야는 뒤를 이을 자식들에게 수타위자야와 더 이상 적대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디위자야 사후 파장에서 짧은 계승 분쟁이 발생하였다. 이는 전쟁으로 발전하지는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하디위자야를 계승하여 파장의 왕이 된 것은 하디위자야의 세자 브나와 공(Pangeran Benawa)이 아닌, 드막의 암살된 군주 수난 프라와타의 아들 아랴 팡이리(Arya Pangiri, 파장 군주로서의 명칭은 응아완티푸라Ngawantipura, 재위 1583–1586)[60]였다. 밀려난 세자 브나와 공은 아랴 프낭상의 기존 세력권이었던 지팡(Jipang, 오늘날의 자바 중동부 블로라Blora군 지역)의 군수가 되었다. 응아완티푸라는 하디위자야의 유언을 무시하고 마타람과의 전쟁 준비에 집착하여, 파장의 내정도 제쳐 두고 발리와 남술라웨시(부기스, 마카사르)의 용병까지 끌어들여 마타람을 확실하게 굴복시킬 군대를 육성하는 데만 신경을 썼다. 이에 1586년 마타람의 수타위자야가 지팡의 브나와 공과 동맹을 맺고 파장을 선제 공격하였다. 세력의 열세도 열세였지만 파장 백성들로부터 신망도 잃은 응아완티푸라는 얼마 못 가 패배하여 수타위자야에게 붙잡혔고, 수타위자야에 의해 파장 왕위에서 퇴위하여 드막 지역으로 갔다.

수타위자야의 동맹 브나와 공은 마침내 프라부위자야(Prabuwijaya, 재위 1586–1587)로서 새로운 파장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프라부위자야의 치세는 강력한 수타위자야의 간섭으로 오래 가지 못했으며, 1587년 프라부위자야는 파장 국왕 자리를 잃는다. 여기서 고전 연대기들 간 약간의 기록 불일치가 있는데, 어떤 연대기는 단순히 프라부위자야가 1587년에 죽었다고 기록한 반면, 어떤 연대기는 프라부위자야가 스스로 퇴위하고 산속으로 들어가 수도승이 되었다고 한다. 상세가 어쨌든 1587년 파장 지역은 프라부위자야의 퇴위 직후 자연스럽게 수타위자야의 마타람에 흡수되어 마타람 산하 파장 군수가 통치하는 지역이 되었다. 마타람과 파장을 통합한 수타위자야는 마침내 파늠바한 세나파티(Panembahan Sénapati, 재위 1587–1601)로서 정식 군주(파늠바한)로 즉위하여 새로이 마타람 술탄국(1587–1755)을 세웠다.
8.2.2.2. 칼리냐맛 왕국
드막 술탄 트릉가나가 1527년 자바 북부 칼리냐맛(Kalinyamat)과 즈파라(Jepara) 지역을 포괄하는 칼리냐맛 공작령을 설치하고 딸 큰차나(Ratna Kencana)를 칼리냐맛 공작으로 임명하였다. 큰차나의 통치는 1536년까지 이어졌고, 이후 큰차나는 남편 하들리린(Hadlirin)[61]에게 칼리냐맛 공작위를 양위하였다. 트릉가나 사후 드막의 내분 과정에서 수난 프라와타가 1549년 아랴 프낭상에게 암살되었는데, 큰차나는 암살된 수난 프라와타의 여동생이었으므로 하들리린과 큰차나는 아랴 프낭상에게 반발했지만, 같은 해 아랴 프낭상은 하들리린까지 암살해 버렸다. 이에 큰차나는 남편의 공작위를 돌려받고, 드막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다.

30년을 이어진 큰차나의 재위(1549–1579) 동안 큰차나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자바 북부의 무역항 즈파라의 경제를 부흥시키고, 이로부터 막대한 부를 취해 강력한 해군을 육성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큰차나는 드막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하디위자야가 아랴 프낭상을 암살하도록 부추기고, 대규모 함대를 편성하여 군도 내 포르투갈 세력의 거점 말라카를 두 차례 공격하는 등 활발한 대외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큰차나 사후 칼리냐맛의 세력은 쇠퇴하였으며, 큰차나의 뒤를 이은 양자 아랴 즈파라(Arya Jepara)의 치세에 칼리냐맛 왕국은 파늠바한 세나파티의 마타람 술탄국에 합병되어 1599년 소멸하였다.
8.2.2.3. 수라바야 공국
수라바야는 자바에 이슬람이 처음으로 널리 퍼진 곳 중 하나로, 적어도 15세기부터 이슬람이 퍼졌으며 인근 그레식(Gresik) 지역은 자바 최초의 이슬람 성인 말릭 이브라힘(Malik Ibrahim, ?~1419, 이란 카샨 출신으로 추정. '수난 그레식'으로도 불린다)이 14세기 후반에 도착해 이슬람을 널리 포교한 곳이었다. 수라바야에서 활동한 이슬람 성인 수난 암펠(Sunan Ampel, 1401~1481)도 자바의 초기 이슬람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수라바야 공국의 공가는 수난 암펠의 후손을 자처했다. 토메 피르스도 《동방지》에서 1513년 시점에 수라바야 지역의 영주는 인근 블람방안과 달리 이미 이슬람을 받아들였다고 적었다.

16세기 초 시점에 수라바야는 아직 마자파힛 산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62], 곧 드막 술탄국 산하로 편입되었다. 수라바야 지역의 영주는 트릉가나 사후 드막의 내분이 발생한 1546년을 전후로 하여 독립성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랴 프낭상 사후 드막의 봉신들이 각자 독립할 무렵 수라바야 영주 판지 위랴크라마(Panji Wiryakrama)는 여러 동부 군소 세력들의 연합을 이루어 자바 중부 세력과 극동부 블람방안의 동부 진입을 억제하였다. 16세기 말이 되면 수라바야 공국은 자바 중부의 파장과 마타람의 자바 동부 진출을 억제하는 동부 지방 세력 가운데 가장 유력한 세력으로 떠올랐다. 네덜란드 역사학자 헤르마뉘스 더흐라프(Hermanus Johannes de Graaf)에 따르면, 당시 수라바야 공국은 자바 동부에서 일찍 이슬람을 받아들이고 초기 이슬람 문화를 간직한 데 자부심이 강했고, 드막의 다른 후계 국가인 파장과 마타람을 힘만 믿고 날뛰는 무례한 신참자 정도로 취급했다고 한다.

17세기 초, 수라바야는 자바 동부에서 파수루안(Pasuruan)의 영주와 연합하여 자바 동부 전역으로 영향력을 확장하였고, 중부의 마타람에 강력한 라이벌이 되었다. 수라바야는 자바 동부에서는 다른 도시 국가 수준의 정치체들보다 훨씬 강하고 부유했는데, 그레식과 스다유(Sedayu) 등의 도시들을 산하에 거느리고 있었다. 수라바야 공국의 항구 그레식에는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내항하여 상관을 설치하였고, 수라바야는 네덜란드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1620년, 네덜란드인 관찰자는 수라바야가 부유한 국가로 대군 3만 명을 운용한다고 기록했다. 수라바야는 마타람보다 먼저 보르네오 남부로까지 영향력을 뻗쳐 수카다나(Sukadana)와 반자르마신 지역까지 영향권에 편입하기도 했다.

마타람이 자바 중부의 세력을 통합하고 동부로 진출하려 시도함에 따라 수라바야와의 분쟁이 발생하였다. 초기 분쟁은 두 국가 간의 전쟁이 아닌 완충 지대에서의 대리전 양상을 띠었다. 1590년, 마타람의 파늠바한 세나파티가 수라바야의 조력을 받던 마디운(Madiun)을 침공해 점령했다. 유사한 시점에 크디리(Kediri)에서 계승 분쟁이 일어났는데, 마타람이 지지하는 파벌과 수라바야가 지지하는 파벌이 내전을 벌였고 1591년에는 수라바야 파벌이 승리하게 되었다. 1598년과 1599년에는 마타람이 수라바야의 동맹이었던 투반(Tuban)을 공격하였지만 두 번 다 패배하고 물러났다. 1613년, 새로 즉위한 야심만만한 마타람의 군주 술탄 아궁은 동부의 라이벌 수라바야를 완전히 굴복시키기 위해 수라바야에 대한 원정을 준비하였다. 1614년, 술탄 아궁이 위라사바(Wirasaba) 등 수라바야의 동맹 세력을 대대적으로 침공하여 본격적인 마타람–수라바야 전쟁을 시작하였다.

마타람과의 본격적인 대립 국면에서 수라바야는 파수루안, 투반, 크디리, 말랑(Malang), 위라사바, 라슴(Lasem)과 마두라 공국들과도 연합하여 사실상 블람방안을 제외한 자바 동부 전체가 연합하여 마타람에 대항하는 형세를 만들어냈다. 수라바야와 동맹 세력의 연합군은 마타람의 초기 공세에 반격하고, 나아가 마타람 본토를 공격하였지만, 수라바야 연합군의 공세는 파장(수라카르타) 근처의 시왈란(Siwalan)에서 1616년 1월에 마타람군에 패배함으로써 좌절되었다. 전쟁은 계속되었고, 마타람은 수라바야 본토를 직접 공격하기보다는 수라바야의 여러 동맹을 하나하나 무너뜨려 감으로써 수라바야와 연합 세력을 약화시켜 갔다. 1619년, 마타람은 수라바야의 주요 동맹이었던 투반을 침공해 점령하였다. 전쟁 와중인 1615년, 그레식의 네덜란드 상관은 철수하였다.

마침내 1620년부터 마타람은 수라바야 본토의 중심부 수라바야(도시)에 대한 직접 공격에 들어갔다. 그러나 수라바야는 완강하게 버텼고, 마타람은 바로 수라바야(도시)를 함락시키는 데는 실패했지만 여러 번 수라바야(도시)를 포위 공격하며 동시에 수라바야 지역에서 경작지를 약탈하거나 파괴하여 수라바야의 자원을 소모시키는 방식으로 장기전에 들어갔다. 1625년, 마타람은 거의 모든 동맹과 부속 영토를 상실하고 고립된 수라바야(도시)에 대한 최종 포위에 들어갔다. 술탄 아궁의 군대는 수라바야(도시)의 주 식수원인 브란타스강(Sungai Brantas)의 흐름을 막고, 동물의 사체를 이용해 나머지 식수원을 오염시켰다. 수라바야(도시)는 얼마 못 가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게 되었고, 버티다 못한 수라바야 공작 자얄릉카라(Jayalengkara)가 술탄 아궁에게 항복함으로써 독립국으로서의 수라바야 공국은 멸망하였다.

8.2.3. 마타람 술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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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4. 반튼 술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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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블람방안 왕국과 소순다 열도

8.3.1. 개괄 및 동부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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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바 극동부 및 소순다 열도

자바 극동부와 소순다 열도는 플로레스섬 서부, 발리섬 동남부, 블람방안 남부 등 일부 예외적인 우림 지역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강수량이 적은 건조한 사바나 기후대로(단 숨바와 서부, 숨바 서부, 발리 등은 사바나 기후에 가까운 몬순 기후가 나타난다), 다른 인도네시아 주요 도서 대부분 지역과 매우 다른 기후를 띠며 전역에서 낙엽수가 발달하는 열대 건조림(tropical dry forest)이 형성되는 곳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심지어 스텝 기후까지도 나타나며, 비가 거의 오지 않는 건기가 지역에 따라 연중 짧게는 5개월, 길게는 7개월까지도 지속된다. 이와 같은 건조 기후와 상대적으로 좁은 면적, 평야가 적은 험한 지형, 다른 인구 밀집 지역과의 먼 거리 등으로 인해 소순다 열도에서는 발리섬, 롬복섬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농경의 정착과 인구 집중이 늦었다.

소순다 열도에서는 마자파힛 등 자바계 세력이 강성했을 때 주요 도서 일부가 자바계 세력에 복속되었으며, 남술라웨시의 마카사르인 부기스인도 이 지역에 활발히 식민지를 건설하고 교역 활동을 벌였다. 이 가운데 발리섬, 롬복섬, 숨바섬 및 일부 소규모 도서에서는 19세기 중반까지 유럽인의 정복이 본격화되지 않았다.
8.3.1.1. 숨바와섬
숨바와섬에는 18세기부터 네덜란드인이 들어가 식민지와 플랜테이션을 건설하였다. 이슬람을 받아들인 숨바와섬 동부의 비마인(Bima) 거주지에는 비마 술탄국(Kesultanan Bima, 1620–1958)이라는 토착 왕조 및 마카사르인과 부기스인의 식민지가 있었다. 반면 서부에는 숨바와인(Sumbawa)이 거주하였으며, 이들은 17세기 말부터 느리게 이슬람화되기 시작하였으나 현재는 거의 이슬람을 받아들이고 있다. 마자파힛 전성기인 14세기부터 한동안 마자파힛의 속령이었으며, 서부는 한때 발리의 후발 세력 겔겔 왕국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8.3.1.2. 숨바섬
숨바섬은 1866년부터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속하였으나 20세기 초가 되어야 네덜란드의 통제력이 생긴 지역이다. 숨바섬에는 다른 주요 도서와 달리 외래 종교가 늦게 들어왔고 역사 기록도 아주 늦게 시작되었으며, 2018년 현재도 아직 20–30%의 주민은 토착 종교인 마라푸교(Marapu)를 믿고 있다. 마라푸교도를 제외한 인구의 다수는 네덜란드 칼뱅교도이며 약간의 가톨릭교도가 있다.
8.3.1.3. 라란투카 왕국
티모르섬 동부와 플로레스섬 및 그 사이의 소규모 도서에서는 16세기 포르투갈인이 도래한 이래로 도미니코회의 영향력 하에 포르투갈 지배력이 확립되었는데, 특히 포르투갈은 플로레스섬, 솔로르섬(Solor), 아도나라섬(Adonara), 름바타섬(Lembata)의 4개 도서를 지배하는 라란투카 왕국(Kerajaan Larantuka, 1515–1904)의 왕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켜(1650)[63] 포르투갈 산하의 보호국으로 삼았다. 1859년에 티모르섬 동부를 제외한 라란투카 왕국과 알로르섬(Alor) 등 포르투갈 산하 도서 지역을 부채로 허덕이던 포르투갈이 20만 플로린에 네덜란드에 매각하였고, 라란투카 왕국의 종주국은 네덜란드로 바뀌었다. 종교 문제에서는 관용적이었던 네덜란드는 라란투카 지역의 가톨릭교도를 개신교도로 개종시키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도미니코회 대신 예수회의 활동을 후원하였다. 라란투카 왕국은 1904년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합병되어 소멸하였다.
8.3.1.4. 티모르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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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2. 발리: 고대와 중세

고고학 발굴에 따르면 발리섬에서는 일찍이 8세기에 불교 유물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10세기부터 사일렌드라의 방계인 대승불교계 와르마데와 왕조(Wangsa Warmadewa, 914–1181)가 발리를 통치하며 여러 비문을 남겼다. 자바 동부의 마타람 왕국, 카후리판 왕국, 싱하사리 왕국도 발리의 정치에 간섭하였다. 자바와 발리 왕족 간 통혼이나, 자바 군주의 친척이 발리의 왕위에 오르는 경우도 많았다. 이 시기의 비문 가운데 와르마데와 왕조의 초대 왕으로 간주되는 스리 크사리(Sri Kesari Warmadewa)가 914년에 세운 블란종 비문(Prasasti Belanjong)이 특히 역사적 중요성이 높다. 이 비문은 발굴 당시 많이 훼손되기는 했지만, 10세기 당대 발리의 지명들과 군주의 군사 원정, 그리고 10세기 초 당대 발리 왕의 왕궁에 대해 언급한다. 이 비문에서는 또한 발리섬을 뜻하는 고풍스러운 명칭 '발리 드위파'(Bali Dwipa, 비문의 표기는 왈리 드위파[Vāli-dvīpa])가 오늘날 확인 가능한 발리계 문헌 가운데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와르마데와 시대 발리의 수도는 오늘날 기아냐르(Gianyar) 인근의 브둘루(Bedulu, 또는 브다훌루Bedahulu)였으며, 고고학 조사에 따라 이 지역에서는 부조와 목욕장 등의 보존 상태가 좋은 11세기 석굴 사원 고아 가자(Goa Gajah) 등의 유적과 다양한 유물이 발굴되었다. 역시 11세기 무렵에 건축된 사무안 티가 사원(Pura Samuan Tiga)도 지역에서 성스러운 사원으로 오늘날까지도 기능하고 있다. 13세기 이전 발리의 고대사는 다양한 발리와 자바의 연대기와 비문으로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문헌의 신뢰성을 보장하기 힘든 경우도 많다.

14세기 자바 문헌 《 나가라크르타가마》(1365)에 따르면, 싱하사리의 크르타나가라 왕은 1284년 발리로 원정군을 보내 발리 여왕의 군대를 무찌르고 여왕을 붙잡아 자신 앞으로 데려왔다고 한다. 그러나 싱하사리가 1290년대 내부 반란으로 혼란해지자, 발리는 잠시 자바의 간섭에서 자유로워졌다. 1343년, 발리는 강력한 팽창주의적 신흥 세력 마자파힛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뒤이어 마자파힛의 대재상 가자 마다는 발리를 복속시키기 위해 삼프랑안(Samprangan)을 지방 수도로 삼고 크파키산(Sri Aji Kresna Kepakisan)을 지방 영주로 파견하였다(1352). 크파키산은 발리를 안정화하고 섬 전역에 마자파힛의 권위를 확립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발리의 역사는 마자파힛 치하에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나가라크르타가마》에도 발리의 정복 연도인 1343년을 비롯해 발리에 대한 언급이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 크파키산에 관한 기록의 출처는 기본적으로 발리 측 기록인 《바밧 달름》(Babad Dalem)이다. 이 외에도 수많은 전승과 후대의 기록이 있으며 발리의 왕가는 마자파힛 정복 이후 크파키산을 선조로 인정하고 권위의 근원을 그에게서 찾았지만, 사실 크파키산에 대한 기록은 상당 부분이 신화적이거나 인위적이다. 가령 《바밧 달름》에 따르면 크파키산의 어머니는 압사라스였다고 하며, 크파키산의 두 형은 각각 자바 동부 블람방안과 파수루안(Pasuruan)의 영주였다고 한다. 1471년 기록되어 발리에서 발굴된 비문에 크파키산과 동일시되는 '마자파힛에서 온 왕 파키산(Pakisan)'에 대한 언급이 있으나, 이 비문의 연도에 대해서는 후대의 조작이라는 설이 있다. 17세기 초에 포르투갈인 마누엘 고디뉴 드이레디아(Manuel Godinho de Erédia)가 남긴 기록에서는 당시 크파키산의 후계자로서 권위를 주장하던 겔겔의 왕가는 자바 동부 블람방안 왕국 왕가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마자파힛 제국 말기 내전과 이슬람계 세력의 공격으로 제국이 약화되던 1478년에는 내전에서 패퇴한 마자파힛 고위 귀족들이 대규모로 발리로 피신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자바의 이슬람화가 완성되기 전까지 자바의 힌두교도, 불교도 귀족들은 계속해서 발리로 도피했다. 이와 같은 자바에서의 대규모 이민은 오늘날까지도 발리인의 정체성에 큰 영향을 남겼다. 마자파힛 말기 이민자들이 도착한 남부 지방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주민들이 스스로를 마자파힛의 후예(Wong Majapahit)로 여긴다. 발리는 마자파힛 귀족들이 가져온 힌두–불교 기반 자바 문화에 큰 영향을 받았고 발리어 자바어를 모델로 크게 발전하였다.

8.3.3. 블람방안: 중세

최동단 블람방안 반도를 포함한 자바 극동 지역은 13세기에도 벽지로 여겨졌다. 마자파힛 제국 건국 시에 초대 황제 라덴 위자야는 자신을 도와준 마두라의 영주 아랴 위라라자(Arya Wiraraja)에게 1295년 이 지역을 포상 차원에서 영지로 주었으며, 아랴 위라라자는 이 지역에서 루마장(Lumajang)을 지방 수도로 하였다. 이후 자바 극동부는 14세기 마자파힛 전성기에는 마자파힛의 한 지방으로 존속했지만, 중앙에 표면상으로 복종하며 실질적인 자치를 누렸다.

15세기 마자파힛이 여러 차례 내란을 겪을 때 이 지역을 통치하는 영주는 점차 중앙정부의 통제를 거부하고 독립성을 주장했다. 마자파힛 약화의 시발점으로 평가받는 레그렉 전쟁이 바로 자바 극동부의 주권을 놓고 벌어진 내전이었다. 15세기 말 마자파힛이 장기화된 내전으로 붕괴되는 시점에 극동부 블람방안 반도는 완전히 독립하여 블람방안 왕국이 되었고 파나루칸(Panarukan) 항구와 그 주변 지역이 왕국의 중심부로서 수도 기능을 하였다. 16세기 말이 되면 블람방안 왕국은 자바에서 힌두–불교 세력의 마지막 보루이자, 이슬람 자바와 힌두 발리 간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게 되었다. 16세기 말 포르투갈령 말라카에서 온 선교사가 파나루칸 항구를 방문하였을 때, 파나루칸의 블람방안 세력이 이슬람교도 세력인 수라바야 공국과 그와 연합한 파수루안(Pasuruan) 지역 무슬림 지배자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블람방안 왕국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중반에 이르는 기간 동안 자바 내륙과 발리 세력 간에서 줄타기하며 존속하였다.

8.3.4. 겔겔과 블람방안

16세기에 발리에서는 겔겔(Gelgel) 지역을 중심으로 토착 힌두 왕조가 번성하여 17세기에 롬복섬 서부와 숨바와섬 서부[64]를 지배하에 두고 자바 동부까지 진출하였는데, 겔겔은 블람방안 왕국까지 명목상 봉신국으로 삼았다.

자바 내에 힌두 세력이 잔존하는 상황은 떠오르는 강력한 이슬람 세력 마타람 술탄국의 주목을 끌게 되어 1639년 마타람의 술탄 아궁은 블람방안을 공격하고 속국으로 삼았으며, 블람방안의 수도 파나루칸까지 점령하였다. 그러나 마타람 군대가 물러가고 나자 얼마 안 되어 블람방안은 도로 독립하고 보다 남쪽으로 세력 중심지를 옮겼다. 새로운 블람방안의 수도는 자바 동남부 해안에 위치한 바뉴왕이(Banyuwangi)가 되었으며, 블람방안 지역은 발리와 다시 결속하였다. 마타람은 술탄 아궁 사후 내부 문제를 해결하기에도 바빴고, 블람방안과 겔겔에 대한 원정은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

8.3.5. 롬복: 소왕국 시대와 통일

17세기 이전의 롬복섬에 대한 사료는 《바밧 롬복》(Babad Lombok) 등 몇 권이 있지만, 모두 다소간 신화적으로 채색되어 17세기 이전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의 명확한 윤곽은 그리기 어렵다. 다만 《바밧 롬복》에는 1257년 사말라스(Samalas) 화산 분화에 관한 상세한 서술이 있으며, 이로 인해 화산 근처에 있던 마을들과 근처 왕국의 수도였던 파마탄(Pamatan)까지 파괴되었다고 한다. 《바밧 롬복》에 따르면 롬복 최초의 왕국은 라엑 왕국(Kerajaan Laeq)이라고 하며, 다른 사료인 《바밧 수웅》(Babad Suwung)에 따르면 롬복 최초의 왕국은 브타라 인드라(Betara Indera) 왕이 세운 수웅 왕국(Kerajaan Suwung)이라고 하지만, 연도나 영토 등에 대한 기록은 어느 쪽도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17세기 이전에도 사삭인의 독립 소왕국들이 각축을 벌였음은 분명하다.

17세기 초 이 상황을 관찰하던 발리의 겔겔 왕국이 롬복섬 서부를 원정으로 점령했다. 이 당시 롬복섬의 사삭계 왕국 가운데 가장 유력한 것은 슬라파랑 왕국(Kerajaan Selaparang)이었다. 한편 롬복섬 동부에는 숨바와섬의 식민지에서 출정한 이슬람계 마카사르인 세력이 식민지를 구축하였고, 기존의 사삭인과 공존하며 이슬람을 전파하였다. 네덜란드인이 처음으로 롬복을 방문한 것은 1674년으로, 이 방문에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함대는 사삭의 여성 유력자와 우호 협정을 맺고 돌아온다. 17세기 후반, 서부에서 출발한 발리계 카랑아슴(Karangasem) 세력이 슬라파랑의 배반자 아랴 반자르 그타스(Arya Banjar Getas)와 연합해 슬라파랑을 굴복시키고 롬복 전토를 점령하기에 이르렀으나[65], 이들은 4개의 소왕국으로 분열하고 각자의 세력권을 구축했다. 1838년, 서부 해안 도시 마타람(Mataram, 자바 중부의 마타람과 혼동하지 말 것)을 거점으로 하는 발리계 마타람 왕국이 마침내 롬복섬 전체의 패권을 장악했다. 마타람은 발리계 왕국이었지만, 발리 본토의 카랑아슴에 적대적이었다.

8.3.6. 발리: 소왕국 시대

겔겔 왕국은 1651년 지방 세력들이 독립해나가기 시작하여 결국 발리 내에서 클룽쿵 왕국(Klungkung)을 비롯한 9개의 소왕국들(클룽쿵, 불렐렝Buleleng, 카랑아슴Karangasem, 믕위Mengwi, 바둥Badung, 타바난Tabanan, 기아냐르Gianyar, 방리Bangli, 즘브라나Jembrana)로 쪼개졌다. 각 소왕국은 독자적인 궁전을 짓고 각축을 벌였으나, 형식상 발리의 수도는 크파키산의 후계자가 거주하는 클룽쿵이었고[66] 다른 독립 세력들도 클룽쿵의 영적 우위는 계속해서 인정하였다. 겔겔 분열 이후 발리 소왕국들은 대체로 섬 바깥에 큰 관심이 없었고 섬 내부에서만 서로 경쟁하였다. 그러나 북부 해안지대의 불렐렝 왕국은 예외적으로 자바 및 기타 군도 지역과 활발한 교류를 지속하였는데, 1697–1711년 동안 블람방안을 지배하기도 하고, 1718년 수라바야와 연합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대항하기도 했다.

1711년 이후에도 발리에서는 블람방안의 재복속을 위해 최소한 세 차례(1714, 1726, 1729) 원정군을 자바로 보냈다. 블람방안 지역은 18세기 중반까지도 간헐적으로 발리 세력(불렐렝 외에 믕위 등도 자바로 진출하였다)의 지배를 받았다.

8.3.7. 블람방안: 네덜란드의 정복

블람방안 왕국은 겔겔 왕국이 분열된 후에도 존속하며 타왕 알룬 2세(Tawang Alun II, 재위 1665–1691)의 전성기에 역으로 발리 내에 영향력을 미치기도 하였지만, 18세기에 계승분쟁과 외세의 간섭으로 약화되어 갔다. 1743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당시 마타람 군주였던 파쿠부워노 2세는 파수루안(Pasuruan) 동쪽의 마타람 속령을 해방하는 협정을 체결했고, 이로 인해 동인도 회사는 블람방안 지역에 자유로이 영향력을 행사할 권리를 획득했으나 블람방안 지역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바로 지배하지는 못했다.

18세기 중반, 블람방안 왕국은 발리의 소왕국 가운데 믕위 왕국의 영향을 크게 받아 믕위의 간섭으로 발리인 쿠타 브다(Gusti Kuta Beda)와 크툿 카바카바(Gusti Ketut Kabakaba)가 블람방안을 통치하였으며, 울루팡팡(Ulupangpang) 지역에는 믕위 왕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영국 세력이 상관을 설치하고 활발히 교역 활동을 전개하여 인근의 네덜란드 세력을 불안하게 하였다. 1766년 8월부터 네덜란드는 자바와 발리 사이 발리 해협을 순찰하며 영국 상선을 나포하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네덜란드는 블람방안 지역 자체를 직접 통제하기 위해 준비하여 1767년 2월 20일 약 3,300명 규모의 원정군(유럽인 335명, 자바 및 마두라계 병력 약 3천 명)을 모아 블람방안으로 파견하였고, 동년 3월까지 네덜란드 원정군은 파나루칸(Panarukan), 바뉴알릿(Banyualit) 등 주요 지역을 점령했다. 지역 지도자 웡 아궁 윌리스(Wong Agung Wilis)는 1년을 더 항쟁하였으나 마침내 1768년 5월 18일 결정적으로 패배하여 세력이 와해되었고, 동인도 회사의 블람방안 정복은 일단 완성되었다.

블람방안 정복 이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블람방안 지역에서 군수(bupati)를 직접 임명하고, 발리와 블람방안 간의 관계를 끊기 위해 군수에게 이슬람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그러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블람방안 지역의 실정을 잘 알지 못하고 경솔하게 억압적인 정책을 실시하다가 지역의 반발을 샀고, 1771년 8월 5일 웡 아궁 윌리스의 항쟁에 참가했던 블람방안의 귀족 자가파티 공(Pangeran Jagapati, 본명 름펙Mas Rempeg)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자가파티 세력과 동인도 회사 사이에 바유 전쟁(Perang Bayu, 1771–1772)이 발발하였다. 자가파티 공은 1771년 12월 18일의 전투에서 네덜란드 편에 선 마두라의 수므늡군과 싸우다 부상을 입고 다음 날 사망하였으나, 전쟁은 계속되었고 동인도 회사는 몇 차례 패배를 겪는 등 고전하였으며 1772년 8월에는 전황이 불리해져 군대를 잠시 철수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동인도 회사는 곧이어 더 큰 규모의 원정군을 보냈고, 1772년 말까지 바유 전쟁은 네덜란드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이후에도 18세기 후반까지 블람방안 지역에서 몇 차례의 반란이 더 일어났으나 모두 네덜란드군이 진압하였고, 블람방안은 네덜란드 치하에서 안정화되어 갔다. 18세기 후반에 블람방안이 마침내 동인도 회사 산하로 들어간 사건은 발리에서도 큰 동요를 일으켰는데, 이는 발리 정권의 기원인 마자파힛의 고토 자바가 마침내 완전히 이교도들에게 정복당했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8.3.8. 발리/롬복: 네덜란드의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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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렐렝 라자의 자결( 푸푸탄), 1849년의 《프티 주르날》(Le Petit Journal) 삽화


네덜란드는 자바와 수마트라 경략에 집중하느라 발리에 기울일 여력이 없었다가, 자바와 수마트라의 지배체제가 거의 완성된 19세기 중반부터는 본격적으로 발리 왕국들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7차례의 원정(1846–1908)을 거쳐 발리 왕국들은 네덜란드의 보호국이 되어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속하게 되었다. 최초로 네덜란드의 표적이 된 것은 역설적으로 타 군도 지역의 유력 항구에 견줄 만한 유일한 발리의 무역항인 싱아라자(Singaraja)를 소유하고 화인, 자바인, 부기스인 등과 적극적 상업 교류를 지속했던[67], 발리에서 가장 개방적인 왕국 불렐렝이었다. 1846년, 발리의 해안으로 밀려간 난파선이 약탈된 사건으로 네덜란드가 포함을 앞세워 북부 해안의 불렐렝을 침공하고 교역항 싱아라자를 점령, 왕궁을 파괴한 후 불렐렝에 불리한 협정을 맺고 돌아갔다. 그러나 이를 치욕으로 여긴 불렐렝의 실권자인 재상 즐란틱(I Gusti Ketut Jelantik)은 협정 이행을 거부하고 불렐렝인들을 규합하여 항전 태세를 취했다. 이에 네덜란드는 1848년 다시 한 번 불렐렝을 침공하였지만 불렐렝군에 패퇴하고 돌아간다.

그러자 네덜란드는 아예 불렐렝을 지배하에 두고자 1849년 본격적인 원정을 개시하였다. 격렬한 전투 끝에 불렐렝은 패퇴하였고, 싱아라자는 점령되어 네덜란드령이 되었으며, 이 과정에 자가라가(Jagaraga)에서 수많은 불렐렝인(즐란틱의 부인도 포함)은 진격하는 네덜란드군 앞에서 숭고한 자살 의식으로 품위를 유지하며 죽었는데 이것이 네덜란드에 대한 최초의 푸푸탄(Puputan)이었다. 즐란틱과 불렐렝의 왕은 불렐렝의 동맹 카랑아슴 왕국으로 도피하여 반네덜란드 세력을 규합하고자 하였다. 네덜란드는 이에 대항해 카랑아슴의 숙적인 롬복섬의 마타람 왕국을 동맹으로 끌어들여, 카랑아슴을 겨냥해 발리 남해안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네덜란드 선박을 타고 발리로 이동한 롬복군은 카랑아슴–불렐렝 세력을 기습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즐란틱과 불렐렝 왕, 카랑아슴의 왕은 이 과정에 사망하였고, 일부는 마찬가지로 의식적인 집단 자살(푸푸탄)로 목숨을 끊었다.

연속된 승리에 고무되어 네덜란드는 내친김에 발리 전체를 복속시킬 요량으로 발리의 명목상 수도인 클룽쿵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클룽쿵의 카냐 여왕(Dewa Agung Istri Kanya)은 쿠삼바(Kusamba)에서 야습으로 네덜란드군 지휘관 안드레아스 빅토르 미힐스(Andreas Victor Michiels)[68]를 사살하는 승리를 거두었고, 네덜란드군 잔당은 클룽쿵과 클룽쿵에 호응하는 바둥, 기아냐르, 타바난 세력의 3만 3천에 달하는 연합군에 쫓겨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점에 바둥의 왕과 남부 쿠타(Kuta) 지역에서 토착 세력에 고용되어 교역을 담당하던 덴마크인 마스 랑에(Mads Johansen Lange)가 네덜란드와 클룽쿵 간에 중재자로 개입하여, 1849년 7월에 불렐렝과 즘브라나 지역을 네덜란드가 지배하고 롬복 세력이 카랑아슴을 지배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 조약이 체결되었다. 네덜란드는 싱아라자에 발리 최초의 영구적인 네덜란드 정청을 설치하였으며, 1855년부터 네덜란드 지방 총독은 불렐렝과 즘브라나의 토착세력 위에 공식적으로 군림했다.

1891년, 롬복섬 동부의 무슬림 사삭인이 마타람을 거점으로 하는 발리계 구 지배층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사삭인은 19세기 중반의 발리 침공 시기와 그 이후에 마타람의 물자, 인력 징발에 반발하여 간헐적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모두 진압당했던 적이 있었다. 이번 반란에서도 근대 무기를 갖춘 마타람의 진압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나 싶었지만, 전쟁은 1894년까지 이어졌고, 사삭 반란군은 불리함을 타개하고자 1894년 2월 20일 네덜란드에 지원을 요청했다. 롬복에서의 세력 확장을 노리던 네덜란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고, 1894년 7월부터 11월까지의 롬복 원정을 통해 마타람 세력을 제압, 롬복 및 그 속령인 카랑아슴을 지배하게 되었다. 전쟁 말기인 11월에는 롬복의 마타람 측에서도 푸푸탄을 거행하였다. 롬복의 압도적인 패배를 목격한 발리의 방리와 기아냐르도 곧 네덜란드의 종주권을 인정함으로써, 9개 소왕국 중 네덜란드에 반항하는 세력은 이제 3개(클룽쿵, 바둥, 타바난)뿐이었다. 9왕국 중 믕위 왕국은 부기스 용병 소총대를 앞세운 1891년 바둥–타바난 연합군의 원정으로 이미 멸망한 상태였다.

1904년 초, 네덜란드는 타바난 왕국에 사티 관습의 철폐를 요청하였으나 타바난의 왕은 이를 거절하였다. 1904년 5월 27일, 화인 스쿠너선 스리쿠말라(Sri Kumala)호가 난파하여 바둥의 수도 덴파사르 동쪽 인근의 사누르(Sanur) 해안에 도달하였는데 바둥인들이 이 배를 약탈하였다. 네덜란드는 배상을 요구하였으나 바둥의 왕은 난파선의 소유권 양도에 관한 발리의 관습 타완 카랑(tawan karang)에 의거해 이를 거부하였고, 네덜란드와 불편한 관계였던 클룽쿵과 타바난 역시 바둥을 지지하였다. 19세기 중반에 네덜란드가 처음 침공했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결국 네덜란드는 이 약탈 사건을 구실로 1906년 6월, 남부 해안 봉쇄를 시작하고 네덜란드에 반항하는 세 왕국에 최후통첩을 보냈으며, 1906년 9월 14일 네덜란드 원정대가 사누르 해안에 상륙했다. 바둥군은 저항하였으나 중과부적이었고, 네덜란드군은 수월하게 내륙으로 진격하였다.

네덜란드군은 마침내 바둥의 수도 덴파사르에 당도하였다. 덴파사르의 바둥 궁전으로 들어간 네덜란드군은 바둥의 라자가 흰 옷을 입고 가마꾼 4명이 이는 가마에 올라 앉아, 마찬가지로 흰 옷을 착용한 신하들과 함께 조용한 장례 의식을 거행하며 행진하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네덜란드군이 라자의 행렬에서 100보쯤 되는 위치에 이르자, 라자는 가마에서 내려왔다. 라자를 수행하던 브라만 사제가 검을 라자의 가슴에 찔러 넣었으며, 뒤이어 동시에 수많은 신하들이 집단으로 자살하기 시작하였다. 당황한 네덜란드군은 발포하였으며, 라자의 행렬은 전멸하고 네덜란드군이 궁성을 약탈, 파괴하였다. 이것이 많은 기록이 남아 있는 바둥의 푸푸탄이었으며, 이로써 바둥은 멸망하였다. 타바난 역시 네덜란드군에 항복하였고, 타바난의 지배계급은 바둥만큼 극적이지는 않았으나 수용소에서 푸푸탄을 거행하였다. 네덜란드는 클룽쿵으로도 진격하려 했지만, 클룽쿵의 라자는 자신의 요새를 파괴하고 자발적으로 항전을 종료하였다.

1908년, 발리에서 아편 생산을 독점하려는 네덜란드의 시도에 반발해 카랑아슴의 라자가 반란을 일으켰고, 클룽쿵과 방리의 라자도 합세하였다. 반란군은 자바인 아편 거래 중개인을 참살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였다. 네덜란드는 신속하게 진압군을 보냈고, 반란군을 분쇄하고 발리의 수도 클룽쿵을 포격하였다. 1908년 4월 18일, 클룽쿵의 라자, 데와 아궁 잠베 2세(Dewa Agung Jambe II, 재위 1903–1908)는 수행원 2백 명 및 부인 6명과 함께 흰 옷을 입고 전설적인 단검을 들고 절망적으로 네덜란드군을 향해 돌격했다. 라자는 예언에 따라 이렇게 기습적으로 돌격하여 네덜란드군에 혼란을 안기면 네덜란드군이 물러갈 것이라고 믿었으나, 네덜란드군이 발포하자 라자는 총에 맞아 쓰러졌다. 마지막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고, 곧이어 여섯 왕비와 신하들은 들고 온 단검으로 푸푸탄을 수행하였다. 네덜란드군은 마찬가지로 약탈 후 클룽쿵 궁성을 불태웠다. 클룽쿵의 저항 세력이 이렇게 소멸하자, 1908년 10월 방리와 카랑아슴은 항복하고 순순히 네덜란드의 보호국이 되었다.

이로써 네덜란드의 발리 원정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1906년과 1908년 발리 원정 전후에는 네덜란드의 비도덕적인 침략 행위와 무자비한 약탈 및 파괴가 신문 등의 대중매체로 서구 세계에 널리 알려져 네덜란드 식민 정책이 크나큰 비판에 직면했다. 이는 네덜란드가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윤리정책(Ethische Politiek, 1901–1942)을 강화하는 데 직접적인 계기로 한 몫 하였다. 네덜란드 식민 당국은 윤리정책 하에서 발리 전통의 보호자를 자처하였고, 발리를 전통 문화의 박물관이자 흥미로운 관광 명소로 선전하였다.

8.4. 마두라섬

전통 시대에 마두라섬 서부의 방칼란 공국(Kadipaten Bangkalan, 1531–1885, 방칼란 지역과 경우에 따라 삼팡 지역)과 마두라섬 동부의 수므늡 공국(Kadipaten Sumenep, 1269–1883, 수므늡 지역과 경우에 따라 파므카산 지역)은 자바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완전히 자바에 종속되지는 않는 자치 세력이었다. 2019년 현재 물증으로 확인할 수 있는 마두라 최초의 문헌 기록은 삼팡군 달프낭(Dalpenang)에서 기원후 835년에 기록된 비문이다. 비문에서 당시 해당 지역에 불교 공동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비문이 소수 발견되기는 하나, 마두라 지역에서 처음으로 자바에 비견될 정도로 조직화된 정치 세력이 역사에 기록되는 것은 4세기 뒤인 13세기부터이다.

8.4.1. 수므늡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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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2. 방칼란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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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보르네오섬

보르네오섬의 해안 지대에서는 타 군도 지역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일찍부터 문명이 발달하였고, 이하에 소개하는 남칼리만탄주(보르네오 동남부) 지역의 반자르 술탄국(1526–1862)처럼 근세에 교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아 올리고 자바, 수마트라, 발리처럼 전통 예술 및 기록 문화를 고도로 발달시킨 국가도 있었다. 반자르 술탄국이 세력을 확장함에 따라 보르네오 남부에서 동부에 이르는 해안 전역이 한때 반자르의 영향권에 들기도 하였다. 한편 군도 무역로의 중심부에 위치한 서칼리만탄 해안 지역에서도 여러 군소 무역 국가가 발달하였는데, 지리상 자바섬 및 보르네오 남부 세력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관계로 네덜란드 정복 이전까지 반자르처럼 구심력 있는 대세력이 생겨나지는 못하였다. 동칼리만탄 해안 지역에서는 쿠타이마르타디푸라(Kutai Martadipura)라는 고대 국가가 인도네시아 군도 전체에서도 이른 기원후 4세기에 생겨나 비문 기록을 남겼지만, 군도 교역로의 외곽에 위치하여 이 지역은 여러 후발 국가들에 비해 부의 집중과 인구 성장이 늦었다. 보르네오 동부는 전통적으로 조선 기술이 발달한 술라웨시 남부의 부기스인 마카사르인 세력이 반자르 세력과 충돌하는 곳이기도 했다.

근세에 해안 지대에는 여러 무역 국가가 존재하였던 반면, 보르네오 내륙 지역에는 다약인(Dayak)으로 통칭되는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언어를 사용하고 고유의 문화와 종교를 가진 종족들이 수렵·채집 및 화전 농업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다약'으로 묶이는 많은 종족들은 사실 세부로 들어가면 공통점이 크지 않으며, '바다 다약인'(Sea Dayak)으로도 불리는 이반(Iban)계 종족(주로 인도네시아 동칼리만탄주와 말레이시아 사라왁주에 거주), '육지 다약인'(Land Dayak)으로도 불리는 비다유(Bidayuh)계 종족(주로 인도네시아 서칼리만탄주와 말레이시아 사라왁주에 거주), 응아주(Ngaju)인(보르네오 중부와 남부에 주로 거주하며 중부칼리만탄주 인구의 약 2할), 카다잔두순(Kadazan-Dusun)인(주로 말레이시아 사바주에 거주), 아포카얀(Apo Kayan)인(주로 말레이시아 사라왁주에 거주) 등으로 나뉜다. 중부 보르네오 다약인의 전통 신앙은 ' 카하링안'(Kaharingan)으로 통칭되는 애니미즘 계열인 경우가 많으나, 카하링안이 상기한 모든 다약인의 전통 신앙인 것은 아니다.

보르네오 내륙의 광대한 밀림과 고원 지대 전역을 해안 지대의 전통 국가가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여러 다약계 종족은 해안 지대의 전통 국가와 경제적, 문화적으로 교류하였고 일부는 해안 지대의 문화에 동화되어 힌두–불교 혹은 이슬람 문화를 받아들였으며, 힌두–불교 혹은 이슬람의 외래 요소가 다약인의 전통 신앙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이들 가운데 이하의 불룽안 술탄국이나 슬림바우 왕국처럼 큰 규모의 국가를 형성한 집단도 있었다. 그러나 다약인의 역사 가운데 역사 기록으로 재구성이 가능한 것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며, 많은 부분은 오늘날까지도 구술사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인도네시아 중부칼리만탄(보르네오 중남부) 지역은 오늘날까지도 인구의 약 절반이 상기한 다약인으로 구성된 지역인데, 전통 시대에는 반자르 술탄국이 중부칼리만탄주의 해안을 포함한 여러 지역을 지배하기도 하였다. 중부칼리만탄주 해안 지대에는 반자르 술탄국의 술탄 무스타인 빌라(Sultan Mustain Billah, 재위 1595–1642)가 아들을 군주로 하여 세운 코타와링인 왕국(Kerajaan Kotawaringin, 1615–1948)이 존재하였다.

보르네오 북부에서는 브루나이 술탄국이 한때 넓은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번성하였던 적이 있으나, 보르네오 북부의 역사는 인도네시아사와 일부 겹치기는 하지만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필리핀의 역사에서 다루는 것이 보다 적합하므로 이 문서에서는 상세히 다루지 않는다.

8.5.1. 반자르 술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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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2. 쿠타이 왕국

보르네오섬 동부, 현대의 동칼리만탄주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기원후 4세기 중반부터 쿠타이마르타디푸라(Kutai Martadipura, 350–1605) 왕국이 존재하였다. 5세기 당대에 이 지역에서 팔라와 문자로 기록된 비문이 발굴되어 당시 이 왕국이 존재하였던 것은 확증되었으며, 이 비문에는 쿠둥가(Kuḍungga, 재위 350–375?), 아슈와와르만(Aśwawarman, 재위 375?–400?), 물라와르만(Mulawarman, 재위 400?–446) 3대의 군주 명칭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고대 힌두 왕국에 대한 자체 기록은 그 후 약 천 년간 발견되지 않으며, 이 공백기에 기록되어 현존하는 쿠타이마르타디푸라에 대한 기록은 모두 외부 관찰자(중국인, 자바인, 아랍인)의 것이고[69] 그나마도 상세한 것은 없다. 정확히 이 왕국이 천 년간 어떠한 형태로 존속되었는지, 왕가가 유지되었는지 단절을 겪었는지, 중간에 멸망하고 재수립되었던 적이 있는지 등은 모두 문헌으로 입증이 불가능하다. 16세기의 기록에 따르면 쿠타이마르타디푸라 왕국은 오늘날 필리핀 지역의 힌두–불교계 세부 왕국(13세기–1565) 및 부투안 왕국(1001–1756)과 활발히 무역하였다. 이때 세부, 부투안, 쿠타이마르타디푸라는 힌두교–불교 국가로서 대체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인접한 이슬람계 술루 술탄국 마긴다나오 술탄국에 대항하는 공동 전선을 형성하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16세기 이전에는 상세한 문헌이 남아 있지 않아 세 국가 간의 관계를 확정하기는 어렵다.

이후 1300년 전후에 쿠타이카르타느가라(Kutai Kartanegara) 왕국이 세워졌다. 쿠타이카르타느가라 왕국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아지 팡에란 시눔 판지 믄다파(Aji Pangeran Sinum Panji Mendapa, 재위 1605–1635)의 통솔 하에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쿠타이마르타디푸라 왕국을 정복하고 지역을 통합하였다(이하 쿠타이카르타느가라는 '쿠타이'로 줄임). 17세기 말에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고와 술탄국의 알력으로 피신한 부기스인들이 보르네오 동부로 망명하였는데, 쿠타이의 왕이 이들에게 쿠타이의 캄풍믈란타이(Kampung Melantai) 지역에 거주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 부기스인 거주지가 발전하여 오늘날 동칼리만탄주의 주도인 사마린다(Samarinda)가 되었다. 이때 이미 이슬람화된 부기스인들이 보르네오 동부에 본격적으로 이슬람을 전파하였으며, 18세기 초에는 쿠타이의 왕가가 공식적으로 이슬람을 받아들여 쿠타이는 술탄국이 되었다.[70] 최초로 이슬람(아랍)식 이름을 취하여 술탄위를 칭한 쿠타이의 군주는 아지 무하맛 이드리스(Aji Muhammad Idris, 재위 1735–1778)로 기록되어 있다. 18세기 후반에는 쿠타이 술탄국에서 술탄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전이 발생하였다. 여기서 승리를 거두고 1780년에 술탄이 된 아지 무하맛 무슬리후딘(Aji Muhammad Muslihuddin, 재위 1780–1816)은 1782년, 쇄신을 위해 트피안판단(Tepian Pandan) 지역을 새 수도로 정했는데 이곳이 바로 현재 쿠타이카르타느가라군의 군청 소재지인 틍가롱(Tenggarong)이다. 19세기 전반에는 새로이 지배 영역을 확장하기 시작한 네덜란드 세력이 이 지역에 간섭하여 네덜란드와 쿠타이 사이에 전쟁이 발생하였고, 1844년에 쿠타이가 최종적으로 패배하고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복속되었다.

8.5.3. 브라우 술탄국

동칼리만탄주의 최북단 브라우군(Kabupaten Berau) 지역에는 브라우 술탄국(Kesultanan Berau, 14세기 말–1810)이라는 토착 정치체가 있었다. 최초로 이 지역에 왕국을 세운 것은 아지 수랴나타 크수마(Aji Suryanata Kesuma, 재위 1400?–1432?)라고 하며, 힌두–불교식 정치체제였을 것으로 보이지만 워낙 벽지였던 관계로 초기 왕계에 대한 더 이상의 자세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반자르 술탄국의 역사 기록 《히카얏 반자르》(Hikayat Banjar)에 따르면 반자르의 술탄 수리안샤(Sultan Suriansyah, 1520–1540/1546/1550) 시대에 브라우는 반자르에 공물을 바치며 수리안샤의 원정에 군대를 보내 조력한 봉신국 중 하나였다고 하며, 17세기 중반에는 브라우가 지역의 정세가 변화함에 따라 고와 술탄국으로 종주국을 변경하여 반자르에는 더 이상 공물을 보내지 않았다. 18세기 중반, 브라우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협조를 얻은 반자르 술탄국에 재정복되었으나, 반자르 술탄국은 결국 18세기 말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종속적인 위치로 떨어지게 되었다. 19세기 초에는 브라우 지역이 완전히 동인도 식민지에 흡수되었다.

8.5.4. 폰티아낙 술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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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5. 난방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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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6. 슬림바우 왕국

내륙의 다약인 가운데 일부는 초보적 형태의 국가를 이루었으며, 특히 19세기에 카푸아스강을 끼고 오늘날 서칼리만탄 내륙 카푸아스훌루(Kapuas Hulu)군의 3만km2에 달하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던 슬림바우 왕국(Kerajaan Selimbau)은 다약 국가 가운데 비교적 정교한 국가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슬림바우 왕국의 정확한 성립 시기는 확증할 수 없다. 지역의 전승에 따르면 왕가의 계보가 7세기까지 거슬러올라간다고 하지만 이를 완전히 믿기는 어렵다. 슬림바우가 네덜란드와 접촉한 시점에 오래된 힌두 전통을 일부 보존하고 있었는데[71], 당시 해안의 많은 지역이 이슬람화되었거나 되어가던 시점이었으므로 적어도 몇백 년 역사를 갖추고 있었지 않을까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슬림바우는 내륙으로 조금씩 진출하기 시작한 네덜란드인들과 1823년 처음으로 협정을 맺고 카푸아스훌루 지역의 지배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19세기 내내 서서히 슬림바우의 내정에 간섭하였고, 1925년 마침내 공식적으로 슬림바우를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합병하였다.

8.5.7. 불룽안 술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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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술라웨시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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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말루쿠 제도

말루쿠 제도는 대규모 농경을 통한 식량 생산에 적합한 곳이 적었지만, 트르나테, 티도레, 할마헤라 등에서 정향, 반다 제도에서 육두구가 생산되었으므로 전통적으로 향료 무역의 핵심 상품을 수출하는 지역이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부유한 해상 무역 국가들이 발달하였다. 고대 향신료 무역은 오스트로네시아계 종족들의 해양 무역로를 따라 이루어졌다. 정향은 기원전부터 인도와 중국의 기록에 등장했고, 기원후 1세기에는 로마 제국에도 도달하였다. 육두구는 적어도 기원후 6세기부터 인도를 거쳐 동로마 제국까지 수출되었다. 그러나 이들 희귀 향신료들, 특히 육두구의 원산지는 지역 밖으로 오랫동안 뚜렷이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 13세기에 인도양 무역에서 유력했던 아랍계 상인들이 마침내 육두구의 원산지를 인도네시아 지역 중에 어느 정도 특정했다. 이런 귀중한 정보는 아랍 및 인도 중개상을 거쳐 향료를 수입한 유럽인들에게는 훨씬 나중에 공개되었다.

말루쿠 지역에서 토착 연대기에 의해 역사 기록에 남은 국가는 13~14세기부터 등장한다. 1365년 자바 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마자파힛 제국의 전성기에 작성된 문헌 《 나가라크르타가마》에는 반다 제도가 완단(Wandan)이라는 명칭으로 마자파힛의 속령 중 하나로 등장하며, 다른 일부 말루쿠 지역도 마자파힛의 속령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자바 세력의 정치적 지배는 있었더라도 명목상에 불과하였으며 그마저도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14~15세기를 거치며 지역에는 트르나테섬을 중심으로 하는 트르나테 술탄국, 티도레섬을 중심으로 하는 티도레 술탄국, 할마헤라섬 서부를 중심으로 하는 자일롤로 술탄국, 바찬 제도를 중심으로 하는 바찬 술탄국이 각자의 세력을 갖추고 지역을 나누어 지배하였다. 이 가운데 트르나테, 티도레, 자일롤로는 정향의 주요 산지를 핵심 거점으로 하였고, 바찬 술탄국은 핵심 향료 산지는 아니었지만 인근 지역의 무역 중계에 주력하였다.

대항해시대가 열리자 향신료의 원산지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16세기 초 지역으로 빠르게 진출한 포르투갈 세력, 포르투갈과 경쟁하던 스페인, 이 둘을 뒤쫓은 후발 해양 세력 네덜란드, 영국에 의해 말루쿠 지역은 인도네시아 지역들 가운데 식민 제국의 직접 영향력 행사를 가장 빠른 시기에 겪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은 16세기에 암본을 트르나테 술탄국에서 얻어 차지하고 말루쿠 지역의 거점으로 삼았다가 17세기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축출당했다. 포르투갈은 16세기부터 반다 제도를 지배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토착민들의 통제에 실패했고, 반다 제도는 17세기에 진입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다른 후발 세력 영국 동인도 회사를 물리치고 지배하게 된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반다 지역에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점령은 매우 잔혹했다. 얀 피터르스존 쿤 총독은 토착민을 학살하고 노예화하여 지역의 토착민 인구는 전멸에 가깝게 줄어들었으며, 이후 반다 제도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의해 68개의 구획으로 나뉘어 조직적으로 육두구 생산 기지로 개발되었다.

이처럼 직접 식민지화된 지역을 제외하고도, 16세기 이래 지역에 존재한 네 토착 무역 국가의 역사는 끊임없는 유럽 세력과의 갈등과 협력의 역사이기도 하다. 16세기에 가장 유력했던 지역 국가는 트르나테 술탄국과 티도레 술탄국이었고, 16세기 후반 전성기의 트르나테는 포르투갈과 전쟁을 벌여 이를 물리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17세기 후반 트르나테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영향권하에 놓였고, 티도레 역시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긴 전쟁을 거쳐 네덜란드에 복속되었다.

8.7.1. 트르나테와 티도레

파일:Peta-wilayah-uli-lima-dan-uli-siwa.jpg
16세기의 트르나테 술탄국(Uli Lima)과 티도레 술탄국(Uli Siwa)


말루쿠 제도 트르나테를 거점으로 서파푸아계의 트르나테어를 사용하는 트르나테인들이 가피 왕국(Kingdom of Gapi)을 건설한 것은 1257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첫 군주는 바브 마슈르 말라모(Baab Mashur Malamo)였다. 트르나테 및 인접한 티도레 지역은 세계적인 정향 생산지로서, 이 지역을 지배하고 무역으로 이득을 취한다면 엄청난 부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지역에 이슬람교는 15세기 후반에 자바섬에서 전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피의 17대 군주 마르훔(Marhum, 가피 바구나Baguna 2세) 시대에 왕가가 이슬람으로 개종하였고, 마르훔의 아들이자 18대 군주인 자이날 아비딘(Zainal Abidin, 재위 1486–1500)은 샤리아 법률 체계를 갖추고 본격적인 술탄국(트르나테 술탄국)으로의 전환을 선포하였다. 자이날 아비딘의 치세부터 가피의 군주를 칭하는 '콜라노'(Kolano, 왕)라는 칭호는 ' 술탄'으로 바뀌었다. 인접 지역인 티도레에도 15세기에 티도레 술탄국(1450–1904)이 등장하였다.

포르투갈 탐험가 프란시스쿠 세항(Francisco Serrão)이 16세기 초에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스람섬(Seram) 근해에서 난파하여 트르나테 술탄국의 영역에 도달하였는데, 지역 주민들에게 구조되었다. 트르나테의 술탄 바야눌라(Bayanullah, 재위 1500–1522)는 포르투갈 세력이 강하다는 소식을 듣고 세항 일행을 트르나테로 데려와 환대하였으며, 트르나테섬 한켠에 포르투갈이 카스텔라 요새(Benteng Kastela, 포르투갈어로는 상주앙바티스타São João Batista, 1522년 착공, 1523년 완공)를 짓도록 허락하였다. 세항은 트르나테에서 1522년에 사망하였다. 이후 포르투갈 세력이 트르나테의 내정에 개입하며 트르나테를 가톨릭화하고자 노력하는데, 탐욕스럽고 포악한 행동으로 트르나테 지역에서 포르투갈인의 평판은 좋지 않았다. 1535년 내부 알력으로 퇴위한 술탄 타바리지(Tabariji, 재위 1533–1534)를 포르투갈인들이 고아로 데려가 기독교로 개종시켰으며, 기독교인이 된 타바리지는 동마누엘(Dom Manuel)로 개명하였다. 나중에 축출이 부당하였음이 인정되어 동마누엘은 포르투갈의 도움으로 트르나테로 돌아가고자 하였지만, 귀향길에 포르투갈령 말라카에서 사망하였다(1545). 그러나 동마누엘의 트르나테 술탄국 내 영지인 암본섬(Ambon)은 그의 의지로 포르투갈인 대부 조르당 드프레이타스(Jordão de Freitas)에게 넘겨졌다.

시간이 지나며 포르투갈의 간섭이 더욱 심해져 술탄 카이룬 자밀(Khairun Jamil, 재위 1535–1570)이 포르투갈에 의해 암살된 사건을 계기로 포르투갈인들은 트르나테섬에서 5년간의 전쟁을 거쳐 축출되었다(1575). 쫓겨난 포르투갈인들은 암본섬을 말루쿠 제도에서 포르투갈의 새로운 거점으로 삼았다. 카이룬을 계승한 새 술탄 바불라(Babullah Datu Shah, 재위 1570–1583)의 치세에 트르나테 술탄국은 군사적, 경제적 전성기를 맞아 술라웨시섬 동부, 암본섬, 스람섬, 티모르섬뿐만 아니라 민다나오섬 남부, 서부 뉴기니 일부 지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바불라와 그의 아들 사이드 바라카트 샤(Said Barakat Shah, 재위 1583–1606)[72]의 시대에 트르나테에는 이슬람 강경파가 득세하고 반포르투갈 감정이 만연하였으며, 상대적으로 말루쿠 지역에서 포르투갈인의 세력은 위축되었다.

1605년이 되자 지역에서 포르투갈의 이권을 빼앗아올 기회만 노리던 네덜란드가 암본과 티도레에서 포르투갈 요새들을 점령하고 트르나테섬에 무역 거점을 세운다. 그런데 갑자기 1606년 스페인이 트르나테에 개입하여 트르나테섬의 카스텔라 요새를 점령, 1606년 술탄 사이드를 축출하고 그를 마닐라로 데려가는 사건이 벌어진다. 1607년 네덜란드가 트르나테를 도와 말라요(Malayo)에 요새를 짓고 군사적으로 트르나테를 원조하기 시작하여, 트르나테–네덜란드 연합과 티도레–스페인 연합 간에 오랜 반목이 시작된다. 네덜란드는 처음에 포르투갈과 달리 트르나테 내정에 심각하게 개입하지 않아 술탄의 환영을 받았다. 술탄 함자(Hamzah, 재위 1627–1648)의 치세에 트르나테 술탄국은 네덜란드의 도움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변경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였다.

그러나 만다르 샤(Mandar Shah, 재위 1648–1650, 1655–1675)의 치세에 트르나테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도움을 준 대가로 트르나테는 일부 영토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양도하게 된다. 네덜란드의 세력은 더욱 강성해져 1663년에는 스페인이 말루쿠 제도에 개입하는 것을 완전히 포기하고 떠났다. 공동의 적이 사라지자 차츰 트르나테–네덜란드의 친선 관계에도 금이 가기 시작하여, 술탄 시보리(Sibori, 재위 1675–1689) 시대에는 술탄이 네덜란드 세력을 말루쿠 제도에서 축출하고자 전쟁을 선포하였지만 패배하고 많은 영토를 동인도 회사에 빼앗긴다. 1683년의 조약으로 전쟁은 종결되었지만, 트르나테는 네덜란드의 속국이 되었다. 과거 스페인의 동맹이던 티도레 술탄국은 스페인이 떠난 이후 홀로 트르나테–네덜란드에 맞서며 18세기 후반까지도 네덜란드의 영향력에 어느 정도 저항하는 독립국으로 남았지만, 18세기 말 티도레의 왕자 누쿠(Nuku)가 할마헤라, 서뉴기니 등 인접 지역을 끌어들여 대규모로 네덜란드의 지역 장악에 반발한 누쿠 반란(1780~1810)의 결과 결국 네덜란드의 영향권하에서 보호국화된다. 티도레 술탄국은 1904년 네덜란드에 의해 해산된다.

트르나테 술탄 무함마드 우스만(Haji Muhammad Usman, 재위 1902–1915)[73]은 종속적 위치를 벗어나고자 네덜란드에 대항하는 반란을 선동하였으나 실패하고 퇴위되어 반둥으로 유배되었다. 인도네시아 독립 이후에도 트르나테 술탄직 자체는 상징적인 자리로서 유지되고 있다. 1796년에 지어진 트르나테의 술탄궁(kraton)은 오늘날까지 역사 박물관이자 현직 술탄의 거처로 사용되고 있다. 전임 술탄 무자파르 샤 2세(Haji Muzaffar Shah II, 1935–2015, 재위 1975–2015, 술탄위 재직 1986–2015)는 트르나테 술탄이면서도 한때 인도네시아 국회의원( 골카르), 북말루쿠 의회 의원 등으로 인도네시아 정계에서 실질적인 자리에 있었다. 무자파르 샤 2세가 2015년 사망한 후 술탄의 부인 가문 남자들이 트르나테 공(Prince of Ternate, 2012년 임명)으로서 트르나테섬의 명목상 주인이 되었다.

8.7.2. 할마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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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서뉴기니

서뉴기니 내륙 지역의 토착 종족들 일부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네덜란드 세력의 진출 이전에 자체적으로 부족 국가를 이루었으나, 본격적인 행정 및 사법 제도를 구비한 국가 단계로 발전한 경우가 있는지는 논쟁의 대상이다. 19세기 이전 명목상 이 지역은 티도레 술탄국의 영역이었지만, 티도레의 실질적인 통치권은 서부의 항구들에 국한되어 있었다. 서파푸아주(서뉴기니 서부) 카이마나(Kaimana)군에는 19세기 말에 우미스 4세(Umis IV Nduvin, 재위 ?–1898)가 통치하는 카이마나 왕국 또는 스란 왕국(Kerajaan Sran)이 있었으며, 이 왕가의 계보는 3대 위의 우미스 1세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간혹 이 왕국의 창건 연도를 몇 세기 이르게 주장하는 자료도 있지만 신뢰하기는 어렵다. 우미스 4세를 이어 우미스 5세(Umis V Naro’E, 재위 1898–1923)를 비롯하여 이 가문에서 명목상의 카이마나 왕이 계속하여 배출되어, 최근에는 우미스 8세(Umis VIII Abdul Hakim Achmad Aituarauw, 재위 1980–)가 명목상의 카이마나 왕이다. 카이마나 등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네덜란드 세력이 조우한 소규모 왕국들 이전의 서뉴기니 역사는 드문 자바 지역과 티도레 술탄국의 기록을 제외하면 거의 구술사로만 파악이 가능한 실정인데, 서뉴기니 지역의 유력 종족인 비악(Biak)인의 구술사에 따르면 티도레 지배기에 비악 지도자 계층과 티도레 술탄가의 통혼도 있었다고 한다.

9. 네덜란드령 동인도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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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인도네시아 군도에는 16세기에 포르투갈 세력이 진출해 암본섬 등에 일정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지만, 17세기 초 새로운 유럽 세력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군도로 진입하였다. 네덜란드가 1619년 자야카르타를 손에 넣고 네덜란드령 바타비아로 개칭함에 따라 300여 년에 걸친 네덜란드령 동인도 시대가 시작되었다. 초기에 네덜란드 세력은 무역항 일부만을 장악하고 토착 세력들과 협력하거나 대립하며 상업 활동을 벌였다. 그러면서 네덜란드는 기존의 포르투갈 영역을 적극적으로 잠식하여 17세기 중반에는 도미니코회의 영향권 하에 플로레스섬, 티모르섬 동부 지역 및 그 사이의 소규모 도서 지역만이 포르투갈 영토로 남게 되었다.

네덜란드 세력은 기타 군도 지역에서는 상업적 이윤만이 주 관심사였으나, 인구가 많고 인구부양력이 큰 자바섬과 역시 인구가 많고 전략적, 경제적 가치가 큰 수마트라섬 지역은 정복과 장기적인 영유를 목적으로 하였으며, 17세기 중후반부터 적극적인 팽창 정책이 조금씩 빛을 보기 시작해 18세기 중반에는 자바섬에서 가장 강력한 마타람 술탄국 자바 전쟁 및 제3차 자바 왕위 계승 전쟁을 거쳐 분할하고 종속시키는 데 거의 성공하였다. 분할된 자바 번왕국 중 욕야카르타 술탄국은 반독립 상태를 조금 더 유지했지만, 19세기 초 단덜스 총독과 래플스 부총독 시대를 거쳐 결국 종속되었다.

자바에서는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 네덜란드의 지배에 항거하는 다양한 토착 귀족들의 반란이 벌어졌지만, 가장 길고 위협적이었던 디파나가라 전쟁을 끝으로 자바는 정치적으로 안정화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네덜란드 식민 정부는 19세기 중반부터 비자바 지역에서 팽창 정책을 펼쳐 20세기 초까지 오늘날 인도네시아와 같은 영토를 갖춘 거대한 식민지를 완성했다. 20세기, 효율적인 지배 체제가 구축되고 석유, 주석, 고무, 설탕 등을 생산하는 자원 또는 노동력에 기반한 다양한 수익 사업이 벌어지던 동인도는 "네덜란드의 가장 가치 있는 보석(Nederland's kostbaarst sieraad)"이었다.

이 과정에서 네덜란드는 토착 세력은 무력을 앞세워 굴복시키고, 동인도 인접 지역에 네덜란드와 겹치는 영향권을 가지고 있었던 다른 유럽 세력(영국, 포르투갈)과는 외교적 협상으로 세력권 경계를 정했다. 전자의 대표적인 예로는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7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발리 원정,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이루어진 아체 전쟁, 20세기 초의 남술라웨시 원정이 있다. 후자의 예로는 19세기 전반과 중반에 걸쳐 영국과 협상해 동남아시아 세력권 경계를 결정하고, 19세기 중반에 티모르섬 동부를 제외한 플로레스 등 소순다 열도 지역을 포르투갈로부터 매입한 것을 들 수 있다.

10. 일본 제국의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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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JapanAdvanceIndonesia1942.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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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나치 독일에 의해 빠르게 본국인 네덜란드가 점령당하자, 인도네시아는 일종의 권력 공백 상태가 발생하게 된다. 일본 제국은 이 때 석유 공급을 위해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침공하였고, 네덜란드를 몰아내고 인도네시아를 점령했다.

일본은 인니를 포함한 동남아 점령지에서 제국주의적 통치를 펼쳤다. 그러나 일본의 인니 통치는 아이러니하게도 인도네시아 독립에 기여한 면이 있었다. 예를 들면 일본은 행정, 군사, 제도적으로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 식민통치 체제를 배격했고, 언어 또한 네덜란드어의 사용을 금지하고 일본어의 사용을 권장하였다. 일본어를 권장하되 이게 싫으면 인도네시아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해주었다. 일본이 '반강제적' 의용군으로 써먹으려고 인도네시아 국민들에게 군사 훈련을 실시하고, 작게는 아리사카 소총부터 하고 경전차, 크게는 G4M 폭격기까지 일제 무기를 많이 남겨놓고 갔는데, 나중에 독립전쟁 때 보탬이 되었다.

일본의 지배도 얼마 가지 못했는데, 태평양 전쟁 제국의 본토에 핵폭탄 두방을 내리꽂는 결말로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11.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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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패색이 짙어지자 적국인 네덜란드에게 다시 빼앗기느니 차라리 독립을 시켜주겠다고 했으며, 이로 인해 인도네시아는 일제가 항복한 직후인 1945년 8월 17일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 수카르노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인도네시아 중앙 국가위원회(KNIP)'는 일제 항복으로 발생한 행정 공백을 빠르게 메꾸려 했으나 인도네시아에는 연합군이 진군하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 동쪽에는 호주군이, 자바 섬을 비롯한 중앙 인도네시아에는 영국군이 상륙했으며 네덜란드군 역시 인니를 다시 지배하기 위해 들어왔다.

인도네시아에 상륙한 네덜란드군을 포함한 연합군은 식민지배를 거부하는 독립진영의 군대에 맞닥뜨렸다. 연합국인 영국과 호주 등은 본래 독립 열기가 인니 토착 엘리트들만의 것이라 생각해 독립군을 공격한 적도 있으나 곧 민중의 독립 열기를 확인하고는 빠르게 군을 철수하고 발을 뺐고 전쟁은 네덜란드군과 인니 독립군의 양자구도로 흘러갔다.

전쟁은 전술적으로 네덜란드가 우위를 보였지만 제국주의 배격을 추구하던 국제정세는 네덜란드의 식민지 재점령에 호의적이지 않았고, 미국은 마셜 플랜을 통해 네덜란드의 물주가 된 것을 이용해 네덜란드에 대해 '독립진영과 협상 안 하면 마셜 플랜을 중단하겠다'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 결국 네덜란드는 전술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인니의 독립을 인정해야만 했다.

12. 합중공화국과 서뉴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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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Republik_Indonesia_Serikat_BI.png

1949년 말 마침내 네덜란드에서 독립하여 인도네시아 합중공화국이 수립되었지만, 사실 구 독립파 지배지역인 욕야카르타를 비롯한 중부 자바와 서부 자바 및 아체 람풍 지역을 비롯한 수마트라 대부분 지역 정도만이 독립파 중심의 정부에 온전히 충성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 합중공화국은 이러한 구 독립파 지역을 아우르는 '인도네시아 공화국'(Republik Indonesia) 외에도, 파순단 자치국( 반둥을 중심으로 자카르타 포함[74]), 동자바 자치국, 남수마트라 자치국, 동수마트라 자치국, 마두라 자치국 등 자바–수마트라–마두라 지역에만 5개의 연방 구성 자치국(Negara Bagian)을 포함하였다. 또한 보르네오 동부–마두라–자바 동부를 잇는 선 동쪽의 동부 군도 전체가 동인도네시아 자치국으로 묶여 있었고, 서부 지역의 소규모 제도와 보르네오 지역, 중자바(Jawa Tengah)에는 각기 자치령(Negara Otonom)이 세워졌다.

인도네시아 합중공화국은 원래 이러한 자치지역들의 연방으로서 성립하였던 것이며, 인도네시아 공화국을 제외한 지역에는 여전히 네덜란드의 영향력이 유지되고 있었고, 네덜란드는 공식적으로 독립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1950년 3월 11일 파순단 자치국이 인도네시아 공화국에 합류한 것을 기점으로, 1950년 8월 17일까지 모든 연방 구성체가 인도네시아 공화국에 합류하여 인도네시아 연방은 소멸하고 단일 인도네시아 공화국이 출범하게 되었다.[75] 이 과정에서 1950년 1월 내란 사건 APRA 쿠데타가 있었다.

인도네시아 합중국은 소멸하였지만,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 수립된 네덜란드(네덜란드 본국 및 네덜란드령 뉴기니/니우하위네아, 네덜란드령 기아나, 네덜란드령 안틸레스/안틸런Nederlandse Antillen 포함)와 인도네시아 간의 연합(Nederlands–Indonesische Unie, Uni Indonesia–Belanda)은 여전히 국방, 외교, 경제, 문화 방면의 협력체로서 규정되어 있었으며 명목상으로는 1956년까지 존속하였다. 그러나 수카르노가 점차 의회민주주의에 비판적인 의견을 드러내며 인도네시아가 교도민주주의 시기(1957–1966)로 이행하는 와중에, 인도네시아가 탈퇴함으로써 네덜란드–인도네시아 연합은 1956년 소멸하였다.

네덜란드령 뉴기니[76]의 역사는 한동안 신생 인도네시아와는 별개로 진행되었다. 인도네시아는 서뉴기니 지역도 인도네시아로 귀속되는 것을 원하였고, 서뉴기니 지역에도 반네덜란드 독립투쟁은 있었지만 문화적, 언어적으로 이질적인 인도네시아에 통합되는 것도 당장 서뉴기니 주민들에게 만족스러운 해결책은 아니었다. 따라서 네덜란드는 서뉴기니 지역에서 토착민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독립을 지원하며 한동안 지배체제를 유지하게 된다. 그러나 인도네시아는 여전히 서뉴기니에 대해 영유권 주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서뉴기니 문제로 네덜란드와의 대립이 심해지자 인도네시아는 소련의 도움을 받아 군비를 증강하며 1960년 네덜란드를 유엔에 제소하고 네덜란드와 단교하게 된다. 이런 상황을 견디다 못한 네덜란드가 1961년 네덜란드령 뉴기니의 독립을 인정하고 독립국 서뉴기니를 출범시키려고 하자[77], 인도네시아는 이에 반발하여 1962년 서뉴기니를 무력으로 침공했다. 결국 미국의 중재로 서뉴기니는 1962년부터 잠시 유엔의 관리 하에 놓였다가 1963년부터 인도네시아가 관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서뉴기니의 인도네시아 합병을 의미하지는 않았는데, 인도네시아는 1969년 주민투표를 조작해 서뉴기니를 인도네시아의 일개 주(이리안자야)로 편입해버리는 폭거를 저지른다. 그 뒤로도 인도네시아 정부는 뉴기니인에 대한 만성적인 차별을 유지하고 뉴기니 독립파에 대한 학살을 벌였으며, 자바섬과 마두라섬 등에서 서뉴기니로 활발한 식민 정책을 벌였다.[78] 서뉴기니에 대한 제도적 차별과 탄압은 수하르토와 그의 신질서 체제가 붕괴하며 거의 사라졌지만[79], 서뉴기니는 여전히 인도네시아 중앙정부에 대한 반감과 독립운동이 끊이지 않는 지역이며 파푸아 독립반군은 현재도 활동하고 있다. '이리안자야'(Irian Jaya)는 서뉴기니 서북부 비악섬(Biak)의 비악어로 '뜨거운 땅(의 사람)'을 뜻하는 '이리안'과 산스크리트어로 '승리'를 뜻하는 '자야'가 결합된 명칭이다. 그러나 '이리안'이라는 명칭이 최근에야 쓰이기 시작했고[80], 점령군이 강제하듯 명칭을 정해버렸다는 점이 문제가 되어 현지에서 큰 반발을 불러왔다. 이리안자야 주는 결국 2002년에 중립적인 명칭인 '파푸아주'로 개칭되었으며, 2003년에는 파푸아주에서 서파푸아(파푸아바랏)주가 분리되었다.

13. 단일 국가 시대

13.1. 수카르노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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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후에도 인도네시아어라는 단일어와 단일정부라는 강점이 있었으나, 오랜 식민통치에 반네덜란드 독립전쟁으로 인해 경제가 악화될 대로 악화됐으며 정치 파벌조차 서구민주주의파, 현실민주주의파, 공산주의자, 이슬람주의자로 나뉘어 대판 싸워댔다. 그러는 사이 군부의 지원을 받는 수카르노 대통령은 점차 독재자가 됐고, 서구식 민주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지도자의 정책을 의회와 사법부가 뒷받침하는 '교도민주주의'라는 토착 정치이념을 제창했다. 그동안 정치 노선은 중립이었으나 통치 말기에는 점점 좌파로 기울어 도미노 이론을 맹신한 미국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1960년대 들어 군부도 좌익 우익으로 쪼개져 갈등이 심화되었다. 결국 1965년 일부 좌익 소장파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우익 장교 7명을 무참히 사살했으나,[81] 권력서열 넘버2 수하르토가 24시간 만에 쿠데타를 진압했다. 이 사건으로 좌익 파벌이 일거에 붕괴하였고 수하르토 및 우익 파벌이 급속도로 권력을 차지하였으며, 수카르노는 권좌를 지키려 노력했지만 공산당을 감싸줬다는 누명을 쓰며 빠르게 실권을 상실해 갔다. 수카르노는 이듬해 수하르토에게 질서 회복을 위한 전권을 위임해야 했고, 유명무실한 대통령직에 있다가 1967년 공식적으로 하야했다. 수하르토는 군정을 거쳐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고, 이어 공산당에 대한 탄압 및 살육을 개시했다.

13.2. 수하르토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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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하르토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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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하르토는 반공정책을 기본으로 하여 인도네시아의 토착 정치 이념 ' 판차실라'를 국가 이념으로 내세우며, 강력한 경제개발 정책을 지휘하고 지방의 독립운동을 억눌렀다. 수하르토 치하에서 인도네시아는 어느 정도 성장을 이루며 1983년 들어 쌀 수입국을 수출국으로 위상을 바꾸는 등 성과를 이루었으며, 수카르노의 독재 시절보다 나라 살림은 나아졌다.

이때 수하르토는 1969년까지 동남아시아 공산화를 두려워한 서구 국가들의 묵인 하에[82] 100만명이 넘는 정적들을 학살했는데, 사망자 대다수가 자바 및 발리 출신이었다. 희생자 유가족 등은 1999년 'YPKP65'를 결성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운동에 나섰지만, 민주화 이후에도 학살 책임자들은 여전히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여전히 쉬쉬하고 있고, 후임 정부들은 공식적으로 사과하지 않고 군부도 이들의 진상규명/명예회복 운동을 철저히 방해하고 있다. 이는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의 다큐멘터리 액트 오브 킬링에서 상세히 다뤄졌다.

심지어 수하르토는 언론을 장악하고 이에 반대하는 재야언론이나 재야학자들의 연구를 통제하고, 어린 학생들에게도 '판차실라' 논리를 암기토록 하여 국민들의 머릿속을 철저히 세뇌시켰다. 의회는 친정부세력으로 채워진 데다 정치인들 간에 이간질을 유발시키고 무력사용까지 서슴지 않았고, 정부 요직 등에 친인척들을 기용시켰다.

그러나 수하르토의 장기 통치와 독재, 부정부패, 족벌주의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고, 결국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로 인도네시아 경제가 마비되고 IMF구제금융을 받는 신세가 되자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저항운동이 일어났고 수하르토는 결국 1998년 퇴진했다.[83]

13.3. 개혁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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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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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12일,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이후 인도네시아는 하비비 대통령의 혼란스러운 과도기를 거쳐 1999년에 자유선거가 실시되어, 압두라만 와힛이 첫 민선 대통령이 되었다. 엄밀히 말해 와힛 자체는 간선으로 뽑혔지만, 그 선거인단이라 할 수 있는 국회의원들이 민선으로 뽑혔고, 간선제 대선도 경쟁 선거였다. ( 인도네시아/정치 문서 참조)

그러나 압두라만 와힛은 2001년 7월 23일 탄핵으로 파면되었으며, 부통령이자 수카르노의 딸인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가 대통령이 되어 와힛의 잔여 임기를 채웠다. 2004년에는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가 당선되었고 이후 재선에 성공했다. 오랜 독재 기간 동안 능력 있는 지도자를 키우지 못해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고 있다는 평도 있으며, 민주화 후 갑작스럽게 불거진 종교, 인종, 지역, 종족 문제 탓에 2002, 2005년 발리 테러 등 대참사가 터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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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22일 당선 발표, 조코 위도도

2014년 7월 9일 투표가 종료된 대선에선 유도요노의 인도네시아 민주당이 일정 지지율을 채우지 못해 참여자격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투쟁민주당 조코 위도도(일명 조코위)가 당선되어 사상 첫 직선제를 통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2019년 4월 29일 조코 위도도 대통령이 수도 자바섬 밖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밤방 장관은 “수도 이전은 중대한 사안이다. 이전까지 10년 정도는 걸릴 것”이라며 장기적 계획 수립에 착수했음을 강조했다. #

2019년 8월 26일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열고 "새 수도를 보르네오섬의 동(東) 칼리만탄의 북프나잠 파세르군(Penajam Paser Utara)과 쿠타이 카르타느가라(Kutai Kartanegara)군 일부에 건설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기사1 기사2

2020년 10월 5일에 인도네시아 의회가 노동법을 개정한 법안을 통과시키자 반발시위가 발생했다. #

2021년 12월 4일 자바섬에 있는 스메루 화산이 분출을 시작해 1만 2천 미터 상공까지 솟아오른 화산재가 산사태처럼 인근 지역 마을 11곳을 덮쳐 인근 대도시로 가는 주요 도로와 다리가 파괴됐으며 12월 6일 기준 사망자 15명, 실종자 27명, 부상자 100여명(화상 60여명)이다. 추가 분화 가능성에 대비해 분화구 반경 5㎞ 지역은 봉쇄됐으며 1,700여명의 주민들이 대피했다. 비 때문에 화산재가 진흙으로 바꿔 수색 작업이 쉽지 않으며 화산 폭발이 추가로 발생하면서 더디게 진행되던 수색 작업마저 한때 중단될 정도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스메루 화산은 2020년 12월과 2021년 1월 등 최근에도 여러차례 분화했다. #1 #2 #3 #4 #5 영상

14. 부록

14.1. 자바 문화권의 군주 명칭

고전 시대 인도네시아 군도를 다룬 글을 읽을 때는 자바나 자바 문화권[84]의 군주 명칭에 대한 지식을 간략하게라도 알고 있으면 도움이 될 때가 많다. 이슬람 이전 힌두교(주로 시바파)와 불교(주로 대승불교)가 널리 퍼졌을 때 자바 문화권에서 군주의 명칭으로는 인도에서 유래한 '라자'(raja, 왕)나 '마하라자'(maharaja, 대왕, 황제)가 쓰였으며, 이슬람 시대에는 주로 '술탄'(sultan)이 쓰였다. 그러나 실상은 조금 더 복잡한데, 자바는 독자적인 이천 년의 역사를 가진 지역이므로 자바와 자바 문화권에서만 쓰이는 군주 칭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데, 인도네시아어에서 '특정 (군주명)이 통치하는 지역'은 양분접사 ke..an을 붙여 'ke(군주명)an'으로 쓴다. 가령 '왕'(raja)이 통치하니까 '왕국'(kerajaan)이 되는 식.

일반적으로 자바, 마두라, 보르네오 지역에서 상술한 여러 칭호가 동시에 사용되는 경우 명목상의 위격 순위는 술탄 > 수수후난(수난) ≥ 파늠바한 > 팡에란 아디파티 > 망쿠부미 순이 된다. 생전에 퇴위한 술탄이 수수후난 또는 파늠바한의 칭호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예로 반자르 술탄국의 수수후난 나타 알람Susuhunan Nata Alam).

14.2. 군도의 귀족 명칭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귀족 명칭은 다음과 같다.

이 외에 귀족이나 존경받을 만한 자에게 붙이는 존칭 내지 호칭으로 '라덴'(Raden, 자바와 마두라 귀족의 존칭. 줄여서 'R.'), '구스티'(Gusti), '칸증'(Kanjeng) 등이 있다. 자바 외 지역에서는 '안디'(Andi, 부기스), '아룽'(Arung, 부기스), '다엥'(Daeng, 마카사르), '카라엥'(Karaeng, 마카사르) 등 저마다 특이한 전통 칭호가 있어 칭호를 통해 귀족의 출신을 구별할 수도 있다. 힌두–불교 시대에 쓰였던 '스리'(Sri)는 산스크리트어 어원의 존칭이며, 힌두–불교 시대에 쓰였거나 그때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호칭 중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그 밖에도 가끔 호칭에 '상'(Sang)이 들어간 것을 보게 되는데, 이는 현대에도 쓰이는 자바어와 인도네시아어의 존칭 관사로 '님' 정도에 대응한다. '상 프라부'(Sang Prabu)라고 하면 '전하', '폐하' 정도의 뜻(≒바긴다Baginda, 투안쿠Tuanku, 툰쿠Tunku)이다.

14.3. 기초 사료 목록

인도네시아 군도 전통 시대의 기초 사료를 정리한 항목. 19세기부터는 정리할 수 없을 정도로 사료가 많아지므로 18세기까지의 대표적인 사료만을 (원어식 명칭, 원어 명칭, 저술 시점, 작가[명확할 경우]) 형식으로 적는다. 《라마야나》처럼 문학성이 너무 강해 사료로서의 가치가 미미한 자료는 적지 않는 것이 좋지만, 해당 시기에 대체할 사료가 없을 경우에는 불가피하게 참고를 위해 사용되므로 목록에 적는다.[90]

14.4. 고전 시대 군도의 지명

이하는 약 15–16세기까지, 여러 문화권에서 인도네시아 군도와 말레이 반도를 지칭하는 명칭을 정리한 표이다.[91]
자바섬 수마트라섬 자바, 수마트라,
말레이 반도의 총칭
스리위자야 믈라유
고대 그리스
(라틴어식 표기)
Sabadibae / Iabadium / Zabai
중국어 사바闍婆
가릉訶陵
조와爪哇
금주金洲
간타리干陀利
실리불철室利佛哲
삼불제三佛齊
말라유末羅俞
삼불제三佛齊
산스크리트어
(고대)
Yavadeś
팔리어
(고대)
Javadeh
북인도계 언어
산스크리트어
यवद्वीप
Yavadvīpa
सुवर्णद्वीप
Suvarṇadvīpa
남인도계 언어
팔리어
Cavaka / Javaka
아랍어 Zabag / Jawa Zabag / Zabaj / Ranaj Zabag / Sribuza / Qamar
Malay
Jawa / Jawiyyin
로망스어 Java (Maior)
Jave la Grande
Java Minor
Jave Mineure
Javas
Javes
말레이어 Jaba
태국어 ชวา Chawa
크메르어 Jva / Melayu

14.5. 자바 문화에서 역사의 개념

19세기와 20세기 서구 학자들 사이에서는 인도네시아 전통 시대 사료의 가치에 대한 회의적 관점이 만연했다. 역사와 역사 서술에 대한 반성적 사유를 시도한 문화권(유럽 문화권, 한자 문화권, 이슬람 문화권 주류) 바깥에서 서술된 역사적 저작은 좋게 봐 줘야 사실과 신화적 허구가 혼재된 이야기, 극단적으로는 유치한 허튼소리(childish nonsense)에 불과하다는 관점으로, 19세기 영국의 존 크로퍼드(John Crawfurd) 이래 여러 유럽 학자의 관점에 은연 중에 내포된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의하면 전통 시대, 최소한 근세 자바(마타람 술탄국 시대 및 그 이후)에서는 독자적인 역사 및 역사 기록 관념, 즉 사건의 인과적 연쇄로서의 역사와, 과거를 이해하고 기록하며 역사적 사건의 인과를 평가하는 작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풍부한 증거가 발견되고 있다.[92] 이에 따라 전통 시대의 주요 역사 기록 형식인 바밧(babad) 등의 자바어 저작이 적어도 사료로서 비판적 독해의 대상이 될 가치가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현대(2010년대) 학자들 사이에 큰 이견이 없다. 인도적 전통에서 역사의 개념이 부재했거나 미성숙했다는 주장 역시 적어도 전통 시대 북인도 지역에 관한 한 현대 인도 학자들의 진지한 도전을 받고 있다.[93]

15. 참고 문헌

16. 관련 문서

17. 둘러보기

동남아시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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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구에서 대표 집단으로 사용한 것은 파푸아뉴기니 부건빌섬 주민이다. [2] (Science News, acc. Dec 14, 2021) [3] "45,000-Year-Old Pig Painting in Indonesia May Be Oldest Known Animal Art," Smithsonian Magazine, 2021년 1월 13일. [4] 2022년 현재 기준 영장류가 그린 가장 오래된 그림은 약 73,000년 전 남아프리카 지역에서 바위에 그려진 그림이며, 네안데르탈인이 그린 동굴 벽화로는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역 아르달레스(Ardales) 동굴에서 2018년 발견된 것이 약 64,000년 전에 그려졌다. [5] "43,900-Year-Old Cave Painting Portrays Part-Human, Part-Animal Beings," Sci News, 2019년 12월 13일. [6] 어원인 '토알라'(To'ala)를 따른다. [7] 또는 호아빈 문화(Hòa Bình culture). 베트남 북부 호아빈성에서 처음 관련 유물이 출토되어 이런 이름이 붙었는데, 기원전 10000년~2000년 무렵에 발달한 공작이다. 2019년까지 출토된 가장 오래된 호아빈 공작 유물은 미얀마 쪽 국경에서 40 km 떨어진 중국 윈난 지역에서 발굴되었는데, 호아빈 공작 유물로선 중국에서 유일하게 발굴된 것이다. 호아빈 공작은 베트남을 비롯하여 라오스, 태국, 미얀마, 말레이 반도, 수마트라 북동부 지역까지 퍼져 나갔다. [8] 율리우스력과 78년의 차이가 있는 샤카력은 힌두교–불교 고전 시대에 인도네시아 군도 지역에서 흔히 공식 역법으로 쓰였다. 발굴된 고대 비문에 남은 날짜도 샤카력으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9] Mandala, 원래 산스크리트어 단어로서의 뜻은 '' [10] 학술적 주장의 권위를 판단하기 어려운 나무위키의 환경을 고려하여 첨언하자면, 20세기의 영어권 동남아시아 역사 연구에서 선도적인 위치에 있는 학자 중 하나였다. 다음은 베네딕트 앤더슨의 자서전 《경계 너머의 삶》에서 인용한 단락이다. "…코넬에서 동남아시아의 역사는 오랫동안 영국의 동양학자 올리버 월터스(Oliver Wolters)가 이끄는 고대(식민화 이전) 역사와 현대사로 양분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 고대사와 현대사가 아니라 본토사와 섬들의 현대사로 나누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같은 패턴이 미국 내 동남아시아 프로그램의 다른 영역에서도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베네딕트 앤더슨 2019, 85) [11] 단, 여기서 극장국가는 독자가 극장국가 개념을 안다고 가정하고 예를 들기 위해 제시한 것이다. 기어츠가 제시한 극장국가 개념 자체는 앞의 만다라 모델과 독립적인 정치인류학적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극장국가 느가라》는 1980년 저작) 둘이 바로 연관된다고 이해하면 오해이다. [12] 여기서 'nagara'라는 말 자체가 '나라'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으므로 엄밀히 말해 '타루마나가라 왕국'이라는 표현은 의미 중복이다. 그러나 관용적으로 '타루마나가라 왕국'이라는 표현도 한국어 및 영어 자료에서 종종 쓰이고 있으므로 기재한다. [13] 《남주이물지》를 인용한 후대 문헌 《태평어람》(太平御覽, 984)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南州異物志》曰:歌營國在句稚南,可一月行到,其南文灣中有洲名蒲類,上有居人,皆黑如漆,齒正白,眼赤,男女皆裸形。" 여기서 "句稚"도 동시대 지명으로, 일반적으로 말레이 반도 북동부에 있는, 당대 부남의 영향권에 있던 항구로 본다. [14] (Wolters 1967)에서 이를 지적한 이후 영어권 및 마인어권에서 'Koying'이라는 현대 중국음에 가까운 표기가 정착되었다. '歌營'은 한어병음을 따를 시 'Gēyíng'으로 표기되며, 웨이드-자일스 표기법에 따르면 'Ko¹-ying²'으로 표기되는데, 'Koying'은 후자에 기반한 듯하다. 그러나 중고음에 따르면 이는 'ko-ying'보다는 'ka-yweng' 정도일 것이며, 올리버 월터스 본인도 (Wolters 2008, "Studying Srivijaya")에서 3세기 당대 현지음이 'Kawang'이었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여기서는 가영국의 위치가 자바 서부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15] 일반적으로 가영국은 수마트라 동부에 있었을 것으로 보지만, 앞서 언급한 월터스처럼 가영국의 위치가 자바 서부였을 것으로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16] 《책부원귀》(册府元龜, 1013) 권968, 《통지》(通志, 1168) 권196, 《송회요집고》(宋會要輯稿) 권197, 《문헌통고》(文獻通考, 1317) 권338 등. [17] 투안쿠 라오(Tuanku Rao)의 설에 따르면 고대 바탁인의 왕국으로서 5세기~12세기에 존속했다고 하며, '나구르'라는 지명은 마르코 폴로의 13세기 기록이나 정화 함대의 15세기 기록을 비롯하여 15, 16세기 외국 관찰자의 기록에 여러 번 등장했다. 중국식 명칭은 나고아(那孤兒 / 那姑兒). [18] 7세기 당나라 승려 의정(義淨)의 기록에 등장한다. [19] 《태평환우기》(太平環宇記, 10세기 송나라 지리서)에서는 보르네오 지역을 '발니'(渤泥)라고 언급했다. 남송의 관료 조여괄(趙汝适)은 《제번지》(諸蕃志, 1225)에서 발니에 대해 비교적 상세한 기록을 남겼는데, 특히 당대 발니의 풍요로움을 설명한 부분이 인상적이며, "성 안에는 10,000여 명이 거주하며, 14개 주를 다스린다. 군선 100여 척을 부린다." 등 당시 발니 세력의 규모도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371년 중국인 관찰자는 "발니는 가난하며 마자파힛이 지역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라고 기록했다. [20] 《나가라크르타가마》 및 후대의 자바 역사서 《파라라톤》에서는 대략 오늘날의 보르네오 서부 크타팡(Ketapang) 지역에 '탄중푸라'(Tanjungpura)라는 왕국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나가라크르타가마》에 따르면 13세기 싱하사리 시대에는 자바에서 '바쿨라푸라'(Bakulapura)로 불렸으며 싱하사리의 종주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탄중푸라 왕의 계보는 15세기 중반부터 자바, 남보르네오, 남술라웨시 등의 기록으로 확인되는데, 탄중푸라 왕국이 13세기의 자바 지배기 전에도 존재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고, 간혹 10세기까지 구전 전승 등에 의존하여(가령 해당 지역의 구전 전승에 따르면 977~1025년 재위한 '시악 바훌룬'(Siak Bahulun)이라는 왕이 있었다고 함) 탄중푸라 왕의 계보를 올려잡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13세기 이전에 탄중푸라가 존재하였더라도, 그 국가 체제가 어느 정도의 틀을 갖추었고 사회나 경제가 어떠하였는지 등은 증거 부족으로 알 수 없다. [21] 정확히는 현재의 오닌 반도(Onin peninsula) [22] 또는 브라만교와 외도(外道, 아마도 원시적인 형태의 순다 위위탄 등 당시 자바 지역의 토착 신앙으로 추정된다.)가 흥성했다고 읽을 수도 있다. 법현이 《불국기》에서 서술한 바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如是九十許日。乃到一國。名耶婆提。其國外道婆羅門興盛。佛法不足言。停此國五月日。复隨他商人大舶上。亦二百許人。齎五十日糧。以四月十六日發。法顯於舶上安居。東北行趣廣州。" [23] 그 이전에 왕이 더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음 [24] 우테자나는 왕비가 되고 그 남편이 왕이 되었다. [25] 그러므로 관점에 따라 카후리판과 그 후계 왕국인 크디리에서 사일렌드라 왕가가 자바 동부의 지배자로 귀환한 것으로 볼 수 있기는 하다. [26] 단, 여기서 '육진랍'과 '수진랍'은 확실한 구심점을 지닌 두 개의 왕국이 아니라, 여러 군소 군벌들이 할거하는 당시의 진랍 영역을 지리상의 편의하에 둘로 나누어 기술한 것이다. [27] 이 자바가 오늘날의 자바 섬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약간 논란이 있다. [28] 자야와르만 2세가 자바인인지, 아니면 자바에 머물다가 돌아온 진랍 귀족인지는 불분명하다. [29] Devaraja, 이 개념은 당대의 자바에서 차용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30] 일부 문헌에서는 다르마락시타(Dharmarakṣita)라고도 전함. 중국식 명칭은 금주대사(金州大師)였다. [31] 필리핀 일부도 스리위자야의 영향권에 있었다. [32] 라젠드라 촐라의 원정 이유에 대한 합의된 정설은 2018년 현재까지도 없다. 단순히 촐라가 스리위자야의 부를 노리고 공격했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시바파 힌두교가 강성한 촐라 제국과 대승불교가 강성한 스리위자야 간 종교적 경쟁이 전쟁으로 발전했다는 설도 있다. 후자에 대해 부연하면, 우선 같은 시바파 힌두교국인 크메르 제국의 수르야와르만 1세(수리야바르만 1세, Suryavarman I)가 말레이 반도의 탐브랄링가 왕국(Kerajaan Tambralingga)을 견제하기 위하여 촐라에 도움을 요청해 촐라–크메르 동맹이 형성되었고, 이 동맹관계를 파악한 탐브랄링가 왕국이 같은 대승불교국이었던 스리위자야에 원조를 요청하여 스리위자야–탐브랄링가 동맹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촐라가 스리위자야를 적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33] 당시 촐라가 공격한 지역의 목록은 1030년에 타밀어로 기록된 < 탄자우르[94] 비문>(Tanjore inscription)에 적혀 있는데, 이에 따르면 라젠드라 촐라는 말레이 반도 및 수마트라 등 스리위자야의 핵심 지역뿐 아니라 참파 왕국에 속하는 판두랑가나 오늘날의 필리핀 지역의 일부로 추정되는 곳까지 공격했다고 한다. [34] 딸은 아니지만 왕과 가까운 촌수의 왕족이라는 설도 있음 [35] Pannai, 당시 혹은 가까운 후대에 수마트라 밀교가 번성하던 지역[95] [36] 영어 문헌에서 알려진 '아야월루의 500인 길드'(Five Hundred Lords of Ayyavolu)를 일단 따른다. 현재의 남인도 아이호에(Aihole) 지역을 배경으로 하며, 수마트라뿐 아니라 남인도 각지에서 9세기부터 많은 기록에 남아 있는 당대의 유력한 타밀 상인 길드이다. (Stein and Arnold 1998, 120) [37] Sri Deva, 실리첩화(室離疊華); 재위 1025~1028[96]~?[97] [38] 그 반대였을 가능성은 있는데, 이때 송나라 문서는 스리위자야의 왕을 당대의 촐라 황제였던 쿨로퉁가 촐라(Kulottunga Chola, 재위 1070~1122)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39] 당대의 인도계 기록에서는 스리위자야를 단순히 한 지방으로 취급하지는 않고 있는데, 예를 들면 1089년 스리위자야의 군주가 사절 2명을 촐라 황제였던 쿨로퉁가 촐라에게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40] 데와칼라(Devakala)라는 이름의 사신 1명 [41] (Munoz 2006) [42] 1156년에 팔렘방에서 온 사신은 '스리 마하라자'가 보냈다고 했으나, 이는 직위명이지 국왕의 이름이 아니다. [43] 마울리 왕가의 군주가 팔렘방 세력을 단순히 복속시키고 그대로 두었는지, 아니면 팔렘방 세력을 흡수해서 정당한 '스리위자야'의 왕이 되었는지는 기록 부족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적어도 '팔렘방을 수도로 하는 믈라유 만다라'라는 의미로서의 '스리위자야'는 늦어도 12세기 말 무렵까지 소멸하였다. 이에 상관없이 동시대의 아랍인과 중국인 관찰자는 잠비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믈라유 만다라를 여전히 스리위자야를 뜻하는 옛 이름―아랍인들은 '자바그'(Zabag), 중국인들은 '삼불제'(三佛齊, '스리위자야'의 음차)―으로 불렀다. 마울리 왕가의 군주도 대외적으로 중국 등 외국으로 보내는 외교 문서에서 '스리위자야'의 군주를 자칭할 때가 있었다. [44] 단 여기서 '믈라유 왕국'은 단지 마울리 왕조 다르마스라야 왕국에 한정되지 않는 보다 넓은 의미를 가진다. '믈라유'라는 단어는 이미 7세기 당나라 구법승 의정의 기록에 종족 내지 세력 명칭으로 등장하였으며, 이미 10세기 므당 왕국의 비문 기록(안죽라당 비문Prasasti Anjuk Ladang, 935 또는 937)에서는 수마트라에서 침공해온 적 세력을 '믈라유'로 지칭하고 있었다. [45] 최소한 12세기 말 다르마스라야 왕국의 탐브랄링가 지배는 거의 확실한데, 다르마스라야의 마하라자 트라일로카라자가 탐브랄링가 지역의 종주권을 갖고 있었다는 내용인 그라히 비문(Prasasti Grahi)이 고대 크메르어로 1183년에 기록되어 현재의 태국 남부 차이야(ไชยา) 지역에서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46] 마울리 왕조의 트리부와나라자 왕(Tribhuwanaraja)의 딸로 추정 [47] 개인적으로는 밀교를 신봉했다고 전해진다. [48] 아마 마자파힛군에 살해된 것 같다. 이후 관련 기록이 없다. [49] 미낭카바우 지역의 영주였거나 빈탄섬(Bintan)의 영주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공식적으로 현재 말레이시아 페락, 파항, 클란탄, 트렝가누에서 현임 술탄의 선조로 인정되고 있다. [50] 싱아푸라 국왕 재위 1389–1398, 믈라카 국왕 재위 1400–1414. 원래는 힌두교도지만 나중에 이슬람교로 개종했을 수 있다. 앞 문단에서 언급한 1389년 팔렘방 반란에서 수뇌부급 인물이었다는 설도 있다. [51] 5대 술탄 자이날 아비딘 1세(Zainal Abidin I, 재위 1349–1406)의 치세에 마자파힛의 침공을 받음 [52] 스리위자야의 항구 라무리(Lamuri)로 출발. 라무리는 11세기 초의 촐라 침공으로 일시적으로 촐라의 세력권이 되었다. 이후 13세기에 스리위자야를 계승하는 다르마스라야 왕국에 속하였다가, 14세기에는 마자파힛의 속령이 되었다. 14세기 말–15세기 초에 샴수딘(Malik Syamsuddin, ?–1419)이 독자 세력을 형성하였다. [53] 미낭카바우인의 왕국으로, 상술한 것처럼 마자파힛과 거리를 두던 구 다르마스라야 세력 일부가 파가루융(Pagaruyung) 지역에 세웠다. 16세기 초까지도 별로 이슬람화되지 않았던 것으로 토메 피르스의 《동방지》(Suma Oriental, 1512–1515)에 기록되어 있다. 16–17세기에 천천히 이슬람화되었으며, 17세기가 되어서야 왕가가 개종하고 술탄국이 되었다. 19세기 초, 투안쿠 이맘 본졸(Tuanku Imam Bonjol) 등의 이슬람 개혁파(파드리파)가 종래의 비이슬람적 관습에 반발한 개혁 운동을 일으켰는데, 이는 파드리 전쟁(1803–1837)으로 비화하였다. 관습을 중시하는 전통주의자들은 네덜란드 세력과 연합하여, 후반에는 전쟁이 반네덜란드 항쟁의 양상을 띠기도 했다. 파가루융 술탄가의 권위는 파드리 전쟁 과정에 추락하였으며, 결국 전쟁 과정에서 술탄국은 소멸하고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흡수되었다. [54] 미낭카바우인의 왕국으로 역시 상대적으로 이슬람화가 늦었다. 17세기에 아체 술탄국의 봉신국이 되었다가 곧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종속되었고, 18세기에 멸망하였다. [55] 물론 피지배자들이 이슬람을 바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며, 현재까지도 자바 지역, 특히 자바 중부와 동부의 이슬람교도는 아랍의 정통 이슬람과 구별되는 독자적 문화 및 관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56] 자위 문자로는 'دلي'으로, 이는 '델리'가 아닌 '들리'로 읽는다. [57] 여기서 '동수마트라'는 메단을 중심으로 하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행정 단위로 대략 현대의 북수마트라주에 해당한다. [58] 1421년 시진경이 사망하자 시진경의 아들 시제손(施濟孫)과 시진경의 맏딸 시대랑(施大娘)이 차기 영주 승계권을 둘러싸고 대립하였는데, 정화 함대는 시제손을 지지하여 결국 새로운 선위사로 시제손이 취임하게 되었다. 밀려난 시대랑은 1440년대에 자바 동부의 그레식으로 가서 상업 활동과 이슬람 포교를 수행하였으며, 마자파힛 산하 그레식의 샤반다르(شه‌بندر‎, Shahbandar, 항구 총괄 관리관)로 1458년부터 1478년 사망[98] 때까지 일하였다. 시대랑은 현지에서 냐이 그데 피나티(Nyai Gede Pinatih)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시대랑이 관리하는 상선은 발리, 믈라카, 크메르 지역까지 왕래하였다고 한다. 전승에 따르면, 9인의 왈리(Wali Sanga) 중 수난 기리(Sunan Giri)는 시대랑이 입양하여 기른 아이였다고 한다. (Reid 2017, 363-379) [59] 중국계 사료에서는 중국식 이름 근문(靳文)으로 불린다. [60] 수난 프라와타가 암살된 시점에는 아직 어렸고, 칼리냐맛 왕국의 큰차나 왕이 아랴 팡이리를 거둬 즈파라에서 길렀다. 성인이 된 아랴 팡이리는 하디위자야의 맏딸 라투 픔바윤(Ratu Pembayun)과 결혼하였다. [61] 자바 밖에서 온 외국인으로, 출신에 대해서는 아체인이라는 설과 중국인 상인이라는 설이 있다. 큰차나와의 결혼으로 드막 술탄가의 일원이 되었다. [62] 마자파힛의 군주와 귀족은 대부분 힌두교도나 불교도였지만, 소수나마 무슬림 주민이 14세기부터 수도 마자파힛에 있었고,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는 드막, 투반(Tuban), 수라바야 등지에 무슬림 영주도 등장하게 된다. [63] 이후 라란투카의 왕(raja)은 포르투갈식 이름을 사용하였다. [64] 서부의 숨바와인 지방 세력은 발리 간섭기가 끝난 후 롬복섬 동부 일부 지역까지 진출하기도 하였지만, 결국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흡수된다. [65] 역사 기록이 충분치 않아 시점에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대개 17세기 후반인 1672년 전후로 추정되며, 아무리 늦게 잡더라도 1740년대까지는 카랑아슴의 정복이 완료되었다고 본다. [66] 17세기 중반의 겔겔에 대항하는 반란 후 새로운 시작을 위해 겔겔 왕가가 수도를 클룽쿵으로 옮겼다. [67] 기타 소왕국도 화인, 자바인, 부기스인 상인과 남부 해안의 소규모 항구에서 교역했지만, 적어도 그 교역량이 19세기 중반까지 싱아라자만큼은 아니었다. [68] 막스 하벨라르》의 등장인물 판다머 장군(generaal Vandamme)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69] 가령 마자파힛 제국 시대 14세기 자바의 기록 《나가라크르타가마》에는 쿠타이 지역이 '쿠테'(Kute)로 언급된다. [70] 단, 개인적으로 이슬람을 받아들인 최초의 군주는 아지 라자 마코타 물리아 알람(Aji Raja Mahkota Mulia Alam, 재위 1525–1600)이다. [71] 슬림바우의 전승에 따르면 슬림바우 왕가는 처음에 힌두교도였다 17세기 후반에 이슬람화되었다고 한다. [72] 마인어 외래어표기법을 준용할 경우 '사잇 바라캇 샤' [73] 마인어 외래어표기법을 준용하면 '무하맛 우스만'이지만, 트르나테는 비오스트로네시아계 언어권이므로 일단 어원인 아랍어 식으로 옮긴다. [74] 자카르타의 지위는 다소 애매했다. 자카르타는 독립전쟁기부터 파순단 자치국에 속하기는 했지만, 합중공화국이 독립하며 수도로서 연방 특별 지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합중공화국 성립 후에도 자카르타 지사는 파순단 자치국에서 임명했다. 이런 상태가 장기화되면 문제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파순단이 합중공화국 성립 직후 인도네시아 공화국에 합류해, 귀속 문제가 불거질 여지는 곧 사라졌다. [75] 엄밀히 말하면 1950년부터 1963년 사이 말루쿠 제도 남부에서 인도네시아 흡수를 반대하는 세력이 네덜란드의 지원을 받아 남말루쿠 공화국(Republik Maluku Selatan, Republiek der Zuid-Molukken)이라는 미승인국을 수립하였던 적이 있으나, 1950년에 인도네시아군에 패배하고 스람섬(Seram)에서만 게릴라 투쟁이 이어지다 소멸하였다. 아직도 남말루쿠 망명 정부가 네덜란드에 남아 있기는 하다. [76] 네덜란드어로 뉴기니는 'Nieuw-Guinea', 즉 외래어표기법에 따르면 '니우하위네아'이지만, 한국어 언중들에게 이는 과도하게 생소한 표기이므로 일단 '뉴기니'라는 영어식 표기를 사용한다. 추후 논의를 거쳐 수정될 여지 있음. [77] 1959년 서뉴기니 총선, 1961년 4월 6일 선출된 서뉴기니 참사회(의회) 개회, 12월 1일 서뉴기니 참사회가 새 국기와 국가 채택 및 네덜란드가 이를 승인함. [78] 원래 이 정책은 자바섬과 마두라섬의 과잉인구를 인구밀도가 낮은 수마트라 등으로 이주시키는 네덜란드 식민정부의 정책(transmigratie)을 계승하여 그 목적지를 칼리만탄, 서뉴기니 등으로 확장한 것이다. [79] 놀랍게도 앞서 언급한 파푸아 식민정책은 조코 위도도 정부가 2015년 공식적으로 종결시킬 때까지 계속되었다! [80] 이는 1946년 남술라웨시의 말리노(Malino)에서 열린 서파푸아 문제 관련 회의에서 서파푸아 주민 대표로 참석한 프란스 카이시에포가 그의 모어인 비악어로 제안한 명칭이다. (양승윤 2017, 243) [81] 자카르타 판차실라 삭티 기념물에 있는 '7인 병사상'은 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조형물이다. [82] 2017년 미국 묵인 정황이 담긴 주 인도네시아 미국대사관 기밀문서가 공개되었다. [83] 1997년 태국의 고정환율제 포기가 방아쇠가 돼서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달러화 유출, 자본이탈이 일어나면서 각국의 외환보유고가 절망적인 수준까지 떨어졌다. 결국 7월에 태국, 10월에 인도네시아가 IMF 구제금융을 신청하면서 사실상 국가의 경제 주권을 포기했다. 이 불길이 한국까지 옮겨와서 미국, 일본에 지원 요청을 했으나 거부당한 대한민국 정부도 12월에 IMF 구제 금융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 흐름은 계속 이어져서 이듬해 1998년에는 외환이 바닥난 러시아가 모라토리엄 선언을 했다. 당시 동아시아 지역에서 외환보유고가 풍부하던 싱가포르와 대만, 일본을 제외한 모든 국가의 경제가 일시에 큰 타격을 받았는데, 이중에서 말레이시아는 마하티르 총리가 IMF 구제 금융을 거부하고 독자 노선으로 경제 회복에는 성공했으나, 이후 성장률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84] 자바섬, 마두라섬, 발리섬, 롬복섬, 수마트라 남부, 수마트라 동부, 보르네오 남부. 수마트라 동부와 보르네오 남부는 말레이 문화권과도 겹치는 지역이며, 자바 서부와 수마트라 남부는 순다 문화권과도 겹치는 지역이다. 특히 자바 문화권과 순다 문화권은 딱 잘라 구별하기 어렵다. [85] 독립국이던 다이을루후르 왕국이 마타람 술탄국의 원정으로 복속되어 마타람 내의 공작령이 됨 [86] 팡에란 디파티(pangeran dipati)라고도 함 [87] 프르디파티(perdipati), 프파티 달름(pepatih dalem), 투안 비차라(tuan bicara), 라자 비차라(raja bicara)라고도 함 [88] 아체 술탄국의 대재상은 '마하라자 망쿠부미'(maharaja mangkubumi)라고 불렸다. [89] 사실 세자의 후손인지 아닌지, 왕의 정실 소생의 후손인지 측실 소생의 후손인지, 성인인지 아닌지 등에 따라 매우 복잡한 명명 규칙이 있으나 귀족 명칭을 상세히 소개하는 것은 글의 취지를 벗어나므로 생략한다. 더 알고 싶으면 위키피디아 문서를 참고할 것. [90] (Soedjatmoko 2007) [91] (Munoz 2006, 114) [92] 가령 (Ricklefs 1998, 125-140) [93] 가령 (Thapar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