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遼史) | |||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f6e8e1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본기(本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81818,#e5e5e5 |
1·2권 「태조기(太祖紀)」 | 3·4권 「태종기(太宗紀)」 | 5권 「세종기(世宗紀)」 |
야율아보기 | 야율요골 | 야율올욕 | |
6·7권 「목종기(穆宗紀)」 | 8·9권 「경종기(景宗紀)」 | 10·11·12·13·14·15·16·17권 「성종기(成宗紀)」 | |
야율술률 | 야율명의 | 야율문수노 | |
18·19·20권 「흥종기(興宗紀)」 | 21·22·23·24·25·26권 「도종기(道宗紀)」 | 27·28·29·30권 「천조제기(天祚帝紀)」 | |
야율지골 | 야율사랄 | 야율아과 · 야율순 · 야율아리 · 야율대석 | |
※ 31권 ~ 62권은 志에 해당. 63권 ~ 70권은 表에 해당.
요사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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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tablewidth=100%><tablebgcolor=#a0522d> 71권 「후비전(后妃傳)」 ||
소탁진 · 소아리신 · 소월리타 · 소암모근 · 술률평 · 소온 · 소철갈지 · 견비 · 소황후 · 소작 · 소보살가 · 소누근 · 소달리 · 소삼천 · 소관음
소탄사 · 소탈리라 · 소사고 · 소비비 · 소귀가72권 「종실전(宗室傳)」 73권 「야율갈로등전(耶律曷魯等傳)」 야율배 · 야율이호 · 야율준 · 야율오로알 야율갈로 · 소적로 소아고지 · 야율사열적 야율로고 야율파덕 · 야율욕온 · 야율해리(海里) 74권 「야율적랄등전(耶律敵剌等傳)」 75권 「야율적렬등전(耶律覿烈等傳)」 야율적랄 · 소흔독 · 강묵기 · 한연휘 · 한지고 야율적렬 야율우지 · 야율탁진 야율고 야율돌려불 · 왕욱 · 야율도로군 76권 「야율해리등전(耶律解里等傳)」 야율해리(解里) · 야율발리득 · 야율삭고 · 야율노불고 · 조연수 · 고모한 · 조사온 · 야율구리사 · 장려 77권 「야율옥질등전(耶律屋質等傳)」 78권 「야율이랍갈등전(耶律夷臘葛等傳)」 야율옥질 · 야율후 · 야율안단 · 야율와 · 야율퇴욱 · 야율달열 야율이랍갈 · 소해리 · 소호사 · 소사온 · 소계선 79권 「실방등전(室昉等傳)」 80권 「장검등전(張儉等傳)」 실방 · 야율현적 · 여리 · 곽습 · 야율아몰리 장검 · 형포박 · 마득신 · 소박 · 야율팔가 81권 「야율실로등전(耶律室魯等傳)」 82권 「야율융운등전(耶律隆運等傳)」 야율실로 · 왕계충 · 소효충 · 진소곤 · 소합탁 야율융운 · 야율발고철 · 소양아 · 무백 · 소상가 · 야율호고 83권 「야율휴가등전(耶律休哥等傳)」 84권 「야율사등전(耶律沙等傳)」 야율휴가 · 야율사진 · 야율해저 · 야율학고 야율사 · 야율말지 · 소간 · 야율선보 · 야율해리 85권 「소달름등전(蕭撻凜等傳)」 소달름 · 소관음노 · 야율제자 · 야율해리(諧理) · 야율노과 · 소류 · 고훈 · 해화삭노 · 소탑열갈 · 야율살합 86권 「야율합주등전(耶律合住等傳)」 야율합주 · 유경 · 유육부 · 야율요리 · 우온서 · 두방 · 소화상 · 야율합리지 · 야율파적 87권 「소효목등전(蕭孝穆等傳)」 소효목 · 소포노 · 야율포고 · 하행미 88권 「소적렬등전(蕭敵烈等傳)」 소적렬(蕭敵烈) · 야율분노 · 소배압 소항덕 · 야율자충 · 야율요질 · 야율홍고 · 고정 · 야율적록(的琭) · 대강예 89권 「야율서성등전(耶律庶成等傳)」 90권 「소아랄등전(蕭阿剌等傳)」 야율서성 · 양석 · 야율한류 · 양길 · 야율화상 소아랄 · 야율의선 · 소도외 · 소탑랄갈 · 야율적록(敵祿) 91권 「야율한팔등전(耶律韓八等傳)」 92권 「소탈랄등전(蕭奪剌等傳)」 야율한팔 · 야율당고 · 소출철 · 야율결 · 야율복리독 소탈랄 · 소보달 · 야율후신 · 야율고욱 · 야율독매 · 소한가 · 소오야 93권 「소혜등전(蕭惠等傳)」 소혜 · 소우로 · 소도옥 · 야율탁진 94권 「야율화가등전(耶律化哥等傳)」 야율화가 · 야율알랍 · 야율속살 · 소아노대 · 야율나야 · 야율하로소고 · 야율세량 95권 「야율홍고등전(耶律弘古等傳)」 야율홍고 · 야율마륙 · 소적렬(蕭滴冽) · 야율적록 · 야율진가노 · 야율특마 · 야율선동 · 소소삽 · 야율대비노 96권 「야율인선등전(耶律仁先等傳)」 야율인선 · 야율량 · 소한가노 · 소덕 · 소유신 · 소악음노 · 야율적렬 · 요경행 · 야율아사 97권 「야율알특랄등전(耶律斡特剌等傳)」 야율알특랄 · 해리 · 두경용 · 야율인길 · 양적 · 조휘 · 왕관 · 야율희손 98권 「소올납등전(蕭兀納等傳)」 소올납 · 야율엄 · 요신 · 야율호려 99권 「소암수등전(蕭巖壽等傳)」 100권 「야율당고전(耶律棠古等傳)」 소암수 · 야율살랄 · 소속살 · 야율달불야 · 소달불야 · 소홀고 · 야율석류 야율당고 · 소득리저 · 소수알 · 야율장노 · 야율출자 101권 「야율적랄등전(耶律敵剌等傳)」 102권 「소봉선등전(蕭奉先等傳)」 야율적랄 · 야율아식보 · 소을설 · 소호독 소봉선 · 이처온 · 장림 · 야율여도 103·104권 「문학전(文學傳)」 105권 「능리전(能吏傳)」 소한가노 · 이한 · 왕정 · 야율소 · 요휘 · 야율맹간 · 야율곡욕 대공정 · 소문 · 마인망 · 야율탁로알 · 양준욱 · 왕당 106권 「탁행전(卓行傳)」 107권 「열녀전(列女傳)」 소차랄 · 야율관노 · 소포리불 야율상가 · 소의신 · 소와리본 · 소뇌란 108권 「방기전(方技傳)」 109권 「영관·환관전(伶官宦官傳)」 직로고 · 왕백 · 위린 · 야율적로 · 야율을불가 나의경 · 왕계은 · 조안은 110·111권 「간신전(奸臣傳)」 야율을신 · 장효걸 · 야율연가 · 소십삼 · 소여리야 · 야율합로 · 소득리특 · 소와도알 · 소달로고 · 야율탑불야 · 소도고사 112·113·114권 「역신전(逆臣傳)」 야율할저 · 야율찰할 · 야율누국 · 야율중원 · 야율활가 · 소한 · 야율첩랍 · 야율랑 · 야율유가 · 야율해사 · 야율적랍 · 소혁 · 소호도 · 소첩리득 · 고첩 · 야율살랄죽 · 회리보 · 소특열 115권 「이국외기(二國外記)」 고려 · 서하
1. 개요
韓延徽(882 ~ 959)
요나라의 인물. 자는 장명(藏明)이며 유주(幽州) 안차(安次) 사람이다. 아버지 한몽은(韓夢殷)은 삼주(三州)[1]의 자사(刺史)를 역임했다고 한다.
2. 생애
한연휘는 젊을 적 재능이 뛰어났는데 노룡절도사(盧龍節度使) 유인공(劉仁恭)이 그를 기이하게 여겨 유도부문학(幽都府文學), 평주녹사참군(平州錄事參軍)으로 삼고 풍도(馮道)와 함께 지후원(祗候院)으로 삼았으며 유주관찰탁지사(幽州觀察度支使)를 수여하였다. 후에 연왕(燕王) 유수광(劉守光)의 사신으로 요나라로 갔는데 그가 절하지 않자 태조(太祖)가 분노하여 억류하였다. 그러나 순흠황후(淳欽皇后)가 간하여 태조가 그를 불러들여 자신의 군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당항(党項)과 실위(室韋)를 쳐 복종시켰는데 한연휘의 전략이 대부분이였다.한연휘는 고향을 그리워하다가 마침내 요나라에서 도망쳐 후당(後唐)으로 향했는데 장수 왕함(王緘)과 사이가 틀어져 다시 요나라로 향했다. 그의 친구 왕덕명(王德明)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였지만 한연휘는 태조가 자신을 보면 기뻐할 것이라고 장담하며 돌아갔다. 한연휘가 돌아오자 태조가 크게 기뻐하며 갑렬(匣列)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갑렬은 요나라 말로 '다시 돌아오다' 라는 뜻이다. 곧 정사령(政事令) 숭문관대학사(崇文館大學士)로 임명하여 나라 안과 밖의 모든 일에 대한 결정에 참여하도록 했다.
천찬(天贊) 4년, 발해(渤海)를 정벌할 때 종군하여 대인선(大諲譔)의 항복을 받아냈다. 얼마 안 가 다시 배반하자 여러 장수들과 함께 성을 깨트려 그 공으로 좌복야(左僕射)의 벼슬을 받았다. 또 강묵기(康默記)와 함께 장령부(長嶺府)를 쳐서 공략하였다. 군대가 돌아갈때 태조가 붕어하니 좌우에서 슬퍼하였다. 태종(太宗)조에 노국공(魯國公)에 봉하고 정사령(政事令)으로써 그대로 따르게 하였다. 후진(後晉)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남경삼사사(南京三司使)가 되었고 세종(世宗)조에는 남부재상(南府宰相)으로 옮겨갔다.
천록(天祿) 5년 6월, 하동(河東)에서 사신이 와 책례(冊禮)를 청하자 세종이 한연휘에게 정하도록 하였는데 태종 때에 후진(後晉)의 황제 석경당(石敬瑭)을 책례한 일을 따르도록 아뢰니 그대로 따랐다.
응력(應曆) 연간에 나이가 많아 관직에서 물러났다.
응력 9년, 78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목종(穆宗)이 듣고 놀라 슬퍼하였다. 그에게 상서령(尚書令)을 추증하고 유주(幽州) 노(魯) 외곽에 장사지내게 하였으며 대대로 숭문령공(崇文令公)을 잇게 하였다.
3. 여담
좌명공신(佐命功臣) 중 한 명이였다.아들 한덕추(韓德樞)는 15세에 태종이 요나라의 보배라고 부를 정도로 뛰어났다. 그는 성년이 되기 전에 좌우림대장군(左羽林大將軍)을 제수 받고 특진(特進) 태위(太尉)로 옮겨갔다가 흉년이 들자 요흥군절도사(遼興軍節度使)가 되어 백성들의 민심을 다독였다. 이후 남원선휘사(南院宣徽使), 천평군절도사(天平軍節度使), 평난영삼주관내관찰처치등사(平灤営三州管内観察処置等使),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행 시중(侍中)을 역임했으며 조국공(趙國公)에 봉해지고 보령(保寧) 원년에 죽었다.
손자 한소훈(韓紹勛)은 벼슬이 동경호부사(東京戶部使)에 이르렀는데 대연림(大延琳)이 반란을 일으키자 붙잡혔으나 굴복하지 않고 죽임을 당했다.
손자 한소방(韓紹芳)은 중희(重熙) 연간에 참지정사(參知政事) 겸 시중(侍中)에 이르렀다. 서하(西夏)의 이원호(李元昊)를 정벌하고자 하였는데 간언을 듣지 아니하고 광덕군절도사(廣德軍節度使)가 되어 나아가다가 대패하고 구토와 피를 토하고 죽었다.
증손 한자양(韓資讓)은 수륭(壽隆) 초에 중서시랑(中書侍郎) 평장사(平章事)였고 이후 숭의군절도사(崇義軍節度使)가 되었다.
[1]
계주, 유주, 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