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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9 17:48:43

애종(금)


금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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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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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82647>금 제9대 황제
哀宗 | 애종
묘호 애종(哀宗) / 의종(義宗)
시호 경천덕운충문정무천성열효장황제
(敬天德運忠文靖武天聖烈孝莊皇帝)
순황제(順皇帝) / 민황제(閔皇帝)
연호 정대(正大, 1224년 ~ 1232년)
개흥(開興, 1232년)
천흥(天興, 1232년 ~ 1234년)
<colbgcolor=#b82647> 여진어 온얀(Won-{g}ian)
중국어 완안(完顔)
여진어 영갑속(寧甲速)
중국어 수서(守緒)
생몰 기간 1198년 9월 25일 ~ 1234년 2월 9일 (36세)
재위 기간 1224년 1월 15일 ~ 1234년 2월 9일 (10년)

1. 개요2. 생애
2.1. 즉위 이전의 삶2.2. 즉위 후
2.2.1. 몽골과의 대결
3. 평가4. 여담5. 대중매체에서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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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금나라(金)의 제9대 황제. 이름은 완안영갑속(完顔寧甲速)으로 중국식으로는 완안수서(完顔守緒)이다. 대금국지(大金國志)에는 묘호를 의종(義宗), 시호를 경천덕운충문정무천성렬효장황제(敬天德運忠文靖武天聖烈孝莊皇帝)로 기록하고 있다.

금의 멸망을 막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막지 못한 인물로 시대를 잘못 만난 비운의 황제이다.

2. 생애

2.1. 즉위 이전의 삶

금선종의 3남으로 본래는 제위와 거리가 멀었으나 황태자 황태손이 덩달아 요절해 버리자 셋째인 완안수서가 황태자로 책봉된 후 결국 제위에 올랐다. 둘째 황자인 완안수순이 제위를 계승하길 원했던 수순의 모친 방비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를 알아차린 선종의 황후 왕씨는 선종이 승하한 후 방비에게 선종이 볼일을 보고 있다고 거짓말을 한 후 대신들을 모아놓고 수서를 후계자로 공표했다. 미리 도착해 있던 완안수순은 그대로 연금당해 버렸다. 완안수순이 죽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선종의 황후인 인경황후 왕씨가 애종을 제지했기 때문이었다.

2.2. 즉위 후

애종은 즉위직후부터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군재를 등용하는 등의 개혁 정책을 시행했다.

2.2.1. 몽골과의 대결

1232년, 몽골이 금나라를 상대로 다시금 전면전을 개시했는데 이 때 몽골군은 남송과 협의해서 남송의 영토를 통과하는 방식으로 금나라의 수도인 카이펑(개봉)의 취약 지역인 남쪽 방면으로 진군하여[1] 북쪽에서 황하를 건넌 군대와 함께 카이펑을 포위했다. 금군은 진천뢰(震天雷)라는 대포를 앞세워 결사적으로 항전했지만, 끝내 못 버티고 1233년 5월 수도 카이펑을 함락당했다. 이 때 애종은 카이펑이 함락되기 전 탈출하여 하남성 남부의 채주(蔡州)[2]로 도주했다. 카이펑에 남은 관원들 사이에서는 내분이 일어나 서면 원수 최립(崔立)이 쿠데타를 일으켜 태후와 비빈, 황족들을 포로로 잡고 몽골에 항복해버렸다. 태후와 비빈들은 몽골로 압송되고 완안수순을 비롯한 남자 황족들은 모두 살해당했다. 애종의 피난길에서는 포찰관노가 난을 일으켜 관원 300명이 죽는 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 때 몽골과 금나라 모두 남송에 사자를 파견하여 지원을 요청하고 나섰다.

1232년 10월, 명령을 내려 민간에 비축한 양식을 수색하면서 한 사람당 세 말을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관부에서 가져가는데, 만일 방해하면 곤장을 때리는 일이 대단히 많았다.

먼저 몽골은 1232년 12월, 양양에 주둔한 남송의 경호제치사(京湖制置使) 사숭지(史嵩之)[3]에게 사신을 보내 금나라를 공격할 때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다. 금나라의 채주를 남송과 연합하여 공격하자는 것, 또 남송에게 군량을 달라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사숭지는 이 제의를 수도 임안에 즉시 보고하였는데, 남송 조정에서는 그 수락 여부를 둘러싸고 쟁론을 벌였다. 일부 신하들은 과거 북송 때 금나라와 연합하여 요나라를 멸망시켰다가 뒤이어 금나라의 공격을 받아 화북을 빼앗겼던 전철을 밟으려는가 하는 반론도 제기했다. 하지만 이런 의견은 금나라를 멸망시켜 옛 원수를 갚자는 압도적 다수의 주장에 묻혀버렸다. 끝내 남송은 1233년 6월, 몽골에 사자를 보내 그 제의의 수락을 통보하였다.

금나라의 사자는 이미 남송이 몽골의 제의를 수락한 뒤인 1233년 8월에야 뒤늦게 찾아왔다. 남송과 몽골이 맹약을 체결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금나라의 사자는 남송에 호소하였다.
"몽골은 40개의 나라를 멸망시키고[4] 마침내 서하에 이르렀습니다. 서하를 멸망시키고 나서는 우리에게 왔습니다. 우리가 망한다면 그 다음은 반드시 남송일 것입니다.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린 것, 이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남송이 우리와 동맹하는 것은 우리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남송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금나라의 사자가 아무리 간곡히 하소연해도 남송은 이미 방침을 정한 뒤였다. 애초에 선대인 선종도 수도를 카이펑으로 옮길 만큼 몰렸음에도 기회만 있으면 남송을 공격해서 흡수할 생각이 컸으니 당연한 결과였다.[5] 게다가 순망치한을 주장한 위의 금 사신의 말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어차피 모두 몽골에게 망할 것이라면 원수 금을 치고 망하는 것이 금과 연합해서 몽골에 대항하다 한꺼번에 망하는 것보다 더 나았으며, 현실적인 측면에서도 몽골에 협조하면 몽골에 대응할 시간을 버는 것도 되기 때문에[6] 남송이 금의 손을 잡아줄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래서 남송은 금나라의 연대 제의를 일축하고 몽골과 체결한 맹약에 따라 이 해 10월 명장 맹공(孟珙)을 파견하여 타차르가 이끄는 몽골의 금나라 공격을 지원했다. 맹공은 군대 3만 명을 이끌고 채주에 당도했다.

원래 애종은 채주를 거쳐 으로 달아나려고 했는데 애종을 구하기 위해 채주로 오던 군대가 남송군에 전멸당하는 바람에[7] 꼼짝없이 채주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이처럼 몽골-남송 연합군이 채주를 몇 달 간 포위하자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포위된 상황에서 금의 멸망을 직감한 애종의 탄식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
"짐은 금자광록대부가 된지 10년이었고, 태자가 된지 10년이었고, 황제가 된지 10년이었는데, 스스로 큰 과오와 악행을 저지른 적이 없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조종(祖宗)으로부터 100여년간 이어온 국통이 짐에 이르러 끊어져 옛날의 황음무도한 군주와 똑같이 망국의 군주가 되었으니 이것이 홀로 마음에 서글플 뿐이다. 예로부터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는데, 망국의 군주는 남에게 갇히고 혹은 구속되어 승리한 나라의 궁정으로 끌려가 모욕을 당하기도 하였고 빈 골짜기에 유폐되기도 하였다. 짐은 결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니 경들은 보라. 짐의 뜻은 결정되었다."

애종은 절망한 나머지 마지막 수단으로 궁중 대장 완안승린에게
"짐은 몸이 둔해[8] 말을 타고 잘 달리지 못하네. 그대는 몸이 날래고 전략을 잘 아니 도망쳐 국운이 끊기지만 않게 하면 되네. 이것이 짐의 소원일세. "

라고 명한 뒤 그에게 탈출을 지시했다.

몽골군 대장 타차르가 서성을 함락시키고 남송군 대장 맹공이 남문을 함락시키자, 애종은 결국 스스로 유란헌(幽蘭軒)에서 목을 매달아 자결했다. 그의 시신은 신하들이 장례를 한 다음 묻으려고 했으나, 맹공과 타차르가 들이닥쳐 시신을 뺏어갔다. 거기다 완안승린은 도망치다 몽골군에 붙잡혀 재위 하루만 참수당하고 장대에 효수를 당했으며, 채주마저 연합군에 떨어져 금나라는 건국 120년 만에 멸망했다. 애종의 시신은 몽골군이 불태우고 분쇄했으며 두개골은 잘라 개선식 때 맹공을 거쳐 남송으로 보냈다. 이종은 이 두개골을 태묘에 바쳐 송휘종, 송흠종에게 원수를 갚았다고 알리는데 썼다. 이는 금나라가 북송을 멸망시켰기 때문이다. 금사 충의전과 오륜행실도에 따르면 # 완안강산(完顏絳山)이 몽골군이 들어오는 와중에도 끝까지 애종의 유해를 수습하려고 했고 그의 충성심을 기특하게 여긴 몽골군의 허락을 받아 애종의 유해를 매장했다고 한다.

3. 평가

애종의 시대에는 이미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황원의 공덕이 날로 흥성하여 하늘과 사람이 모두 마음을 두었으니 해가 뜨면 횃불이 꺼지는 것은 이치의 형세가 반드시 그러하다. 구구하게 생취하고 도망 중에 생존을 도모하다가 힘이 다하여 쓰러져 죽었으니 애통하다. 비록 그러하나 예기 중에 "나라의 군주가 사직을 위해서 죽었다."라는 말이 있는데 애종은 여기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
금사

묘호와는 달리, 마지막까지 나라의 멸망을 막기 위해 노력했던 개념 있는 황제였다. 애종은 사사로이 남송을 공격하는 것을 막고 몽골과의 항전을 위해 적국이었던 남송에 화의 사신을 파견하는 한편 인재 등용에 힘을 썼으며, 즉위 초에는 황실의 사냥터를 없애고 농민들에게 그 땅을 나눠 주는 등 몽골에 밀리는 상황에도 백성들의 구휼을 우선했다.[9] 완안진화상 등의 활약으로 일부 전선에서는 몽골군에 반격하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이렇게 나름대로 금의 멸망을 막기 위해 애썼으나 결국 실패했다. 민생을 보살피는 것도 재위 초반부 이야기고 완안진화상 사후에는 몽골군에게 연이어 대패했으며 말엽에 개봉이 포위됐을 때는 엄청난 수의 피난민들이 개봉성 안으로 몰려오는 바람에 구휼이고 뭐고 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성 내에서 수십만명이 아사하거나 질병으로 병사했다.

송사전 금 열전에 따르면 어느날 한 노인이 금의 궁성 지붕에 올라가 금의 멸망을 예언하자 신하들은 노인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애종은 "지금은 백성들에게 바른 말을 구하고 있으니, 일개 노인의 비방에 가까운 헛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만한 구석이 있다"고 말하며 신하들의 주장을 일축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수도는 함락당하고 황족들은 정강의 변 때보다 더 비참하게 몽골군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몽골로 끌려가고 본인은 쫓기는 신세가 되었을 뿐이다. 채주성에서 몽골군에게 포위된 애종이 모든 것을 체념하고 목을 매어 자살하기 직전 완안승린에게 남긴 유언은 자신이 다른 망국 군주들처럼 황음무도한 폭군은 아니었기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였으나, 자신의 대에 나라가 망하여 조상들을 볼 면목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름대로 사직을 살려보려 노력을 했지만, 결국 망국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좌절감과 조상들에 대한 죄책감이 잘 드러나는 유언이다.

바로 앞대의 무능한 황제들과 달리[10] 본인이 문제 의식을 가지고 나라를 살려보겠다고 나름 몸부림치다가 결국 절망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점에서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와 비교되기도 한다.[11] 그러나 애종은 이민족 출신에다가 인지도가 낮아서 그냥 묻히는 편이다.[12] 사실 애종이 자살한 실질적 이유는 몸이 지쳐 도망칠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며[13] 젊고 민첩한 완안승린에게 선양하고 도망치게 해서 금나라를 멸망시키지 않으려고 시간 벌이를 한 것이다.

4. 여담

특이하게도 1224년 황후를 들였다는 것 외에는 처첩과 자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죽을 때 36세였으니 충분히 있었을 만한데도 아무런 기록이 없으며, 마지막 순간에 완안승린에게 자식을 부탁한다는 말이 없었던 것, 그리고 애종의 자녀를 포로로 잡았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정말로 자식이 하나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개 망국 군주는 횡음무도하다는 레파토리가 달라붙게 마련인데, 애종은 그들과는 상당히 달랐다. 그렇기에 애종은 역시 자식도 없고 망국의 군주였지만 횡음무도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분투한 콘스탄티노스 11세와 비교되기도 한다. 다만 추존황제 강종 완안오아속의 후손으로 알려진 완안승린이 애종의 아들이었다는 설이 있다.[14]

금이 멸망하고 남송의 신하가 금의 포로에게 자신들이 원수를 갚았다고 했지만 금의 포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황제와 당신들의 두 황제[15]를 비교하면 어떻소?

5. 대중매체에서

파일:attachment/김통정/김통정.png
징기스칸 4 일러스트[16]

징기스칸 4 PK에 나오는데 본인 능력치도 나쁘고, 북쪽에는 당시 세계최강국 몽골제국이 있고 남쪽에는 남송이 있어 정세가 매우 암울하다. 다만, 부하 중에 강력한 무장인 완안진화상이 있다.

고우영 화백의 십팔사략에서는 상당히 무능하게 나왔는데, 그냥 대충 몽골을 혼내라고 얕잡아보지만 그 대충 혼내라 한 몽골에게 거하게 발리고 땅 뺏으려고 공격한 남송에게마저 피터지게 털리자 무책임하게 “ 에라이! 골치아픈 세상, 떠나면 그만이지!”하고 술에 독을 타 마시고 자결해버린다(...). 물론 십팔사략 자체가 전체적인 역사를 매우 간소화시킨 편이라 그런 감이 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피해자가 된 인물.

6. 둘러보기

금사(金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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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운익 · 조병문 · 한옥 · 풍벽 · 이헌보 · 뇌연 · 정진 고리갑석륜 · 완안와가 · 살합련 · 강신 · 오림답호토 · 완안사열 · 흘석렬아오탑
112권 「완안합달등전(完顏合達等傳)」 113권 「완안새불등전(完顏賽不等傳)」 114권 「백화등전(白華等傳)」
완안합달 · 이랄포가 완안새불 · 완안백살 · 적잔합희 백화 · 사묘애실 · 석말세적
115권 「완안노신등전(完顏奴申等傳)」 116권 「도단올전등전(徒單兀典等傳)」 117권 「도단익도등전(徒單益都等傳)」
완안노신 · 최립 · 이기 · 섭대기 · 적잔위흔 도단올전 · 석잔여로환 · 포찰관노 · 완안승립 도단익도 · 점가형산 · 왕빈 · 국용안 · 시청
118권 「묘도윤등전(苗道潤等傳)」
묘도윤 · 왕복 · 이랄중가노 · 무선 · 장보 · 장진 · 정안민 · 곽문진 · 호천작 · 장개 · 연령
119권 「점갈노신등전(粘葛奴申等傳)」
점갈노신 · 유천기 · 완안대루실 · 완안중루실 · 완안소루실 · 오고론호 · 장천강 · 완안중덕
120권 「세척전(世戚傳)」
석가노 · 배만달 · 홀도 · 단도공 · 오고론포로호 · 당괄덕온 · 오고론점몰갈 · 포찰아호질 · 오림답휘 · 포찰정수 · 도단사충 · 도단역 · 오림답복
오고론원충 · 당괄공 · 오림답림 · 단도공필 · 단도명 · 단도사희
121·122·123·124권 「충의전(忠義傳)」
호사보 · 특호 · 복홀득 · 점할한노 · 조규 · 온체한포도 · 와리야 · 납란작적 · 위전 · 완안선양 · 협곡수중 · 석말원의 · 백덕매화상 · 오고손올둔 · 고수약 · 화속가안례 · 왕유한 · 이랄고여열 · 송의 · 오고론영조 · 오고론중온 · 구주 · 이연 · 이덕기 · 왕의 · 왕회 · 제응양 · 출갑법심 · 고석 · 오승가 · 오고론덕승 · 장순 · 마양 · 백덕와가 · 오둔추화상 · 종탄 · 패출로복수 · 오방걸 · 납합포랄도 · 여해열알출 · 시무선 · 온체한로아 · 양지승 · 가방헌 · 이랄아리합 · 완안육근 · 흘석렬학수 · 포찰누실 · 여해열자록 · 조익 · 후소숙 · 왕좌 · 황괵구주 · 오림답걸주 · 타만사열 · 이방고포로호 · 올안외가 · 올안외출호 · 점할정 · 도단항 · 완안진화상 · 양옥연 · 오고론흑한 · 타만호토문 · 희여작 · 애신 · 우현 · 장방헌 · 유전 · 마경상 · 상형 · 출갑탈로회 · 양달부 · 풍연등 · 오고손중단 · 오고손노신 · 포찰기 · 채팔아 · 온돈창손 · 완안강산 · 필자륜 · 곽하마
125·126권 「문예전(文藝傳)」
한방 · 채송년 · 오격 · 마정국 · 임순 · 조가 · 곽장천 · 소영기 · 호려 · 왕경 · 양백인 · 정자담 · 당회영 · 조풍 · 주앙 · 왕정균 · 유앙
이경 · 유종익 · 여중부 · 이순보 · 왕욱 · 송구가 · 방주 · 이헌능 · 왕약처 · 왕원절 · 손국강 · 마구주 · 이분 · 원덕명 , 子 호문,
127권 「효우·은일전(孝友隱逸傳)」
온체한알로보 · 진안 · 유유 · 맹흥 · 왕진 · 유정 · 저승량 · 왕거비 · 조질 · 두시승 · 학천정 · 설계원 · 고중진 · 장잠 · 왕여매 · 송가 · 신원 · 왕여가
128권 「순리전(循吏傳)」
노극충 · 우덕창 · 범승길 · 왕정 · 장혁 · 이첨 · 유민행 · 부신징 · 유환 · 고창복 · 손덕연 · 조감 · 포찰정류 · 여해열수우 · 석말원 · 장구
조중복 · 무도 · 흘석렬덕 · 장특립 · 왕호
129권 「혹리·영행전(酷吏佞幸傳)」
고염산 · 포찰합주 · 소이 · 장중가 · 이통 · 마흠 · 고회정 · 소유 · 서지국
130권 「열녀전(列女傳)」
사리질 · 강주주 · 완안아로진 · 풍묘진 · 포찰명수 · 섭순영 · 장봉노
131권 「환관·방기전(宦官方技傳)」
양충 · 송규 · 반수항 · 유완소 · 장종정 · 이경사 · 기천석 · 장원소 · 마귀중 · 무정 · 이무 · 호덕신
132권 「역신전(逆臣傳)」
병덕 · 당괄변 · 오대 · 대흥국 · 도단아리출호 · 복산사공 · 도단정 · 이노승 · 완안원의 · 흘석렬집중
133권 「반신전(叛臣傳)」
장각 · 야율여도 · 이랄와간
134·135권 「외국열전(外國列傳)」
서하 · 고려 , 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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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국지(大金國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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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이전 수부칸(速不罕)이 송나라 회동(淮東)의 길을 빌려 오면서 하남으로 달려갔고, 또한 병사를 모으는 것을 요청했으나 면주(沔州, 섬서성 약양현) 청야원(青野原)에서 통제(統制) 장선(張宣)에게 죽었다. 툴루이는 이를 듣고 '송나라가 스스로 식언(食言)하면서 호의를 버리고, 맹약을 배반했다. 오늘의 일은 옳고 그르게 돌려줄 것이니라!'고 말했다. 8월, 툴루이가 기병 3만을 나누어 대산관(大散關)으로 들어가 봉주(鳳州)를 공격해 깨뜨리고, 화양(華陽)으로 바로 나아가 양주(洋州)를 도륙하고, 무휴(武休)와 개생산(開生山), 절초애(截焦崖)를 공격하다 무휴의 동남쪽으로 나와 마침내 흥원(興元, 섬서성 한중시)을 포위했다. 군민(軍民)은 흩어져 도주했으며, 사와(沙窩)에서 죽은 자가 수십만 명이었다. 군사를 나누어 서쪽으로 가면서 서군(西軍)은 다른 길을 따라 면주에 들어가 대안군(大安軍)의 길과 개어별산(開魚鱉山)을 점령하고, 가옥을 철거해 뗏목으로 만들어 가릉강(嘉陵江)을 건너 관보(關堡)로 들어가 강옆을 나란히 달려서 가맹(葭萌)으로 갔다. 멍청한 무장 하나 때문에 송군의 인명만 낭비한 셈. [2] 삼국지에 나오는 여남이며 현대 행정구역은 허난성 주마뎬시. [3] 사미원의 조카. 일찍이 형호 지역의 방어를 중시해 양양 지역에 풍부한 물자를 비축하였다. 단평입락 이후 사직했으나, 이후 다시 등용되어 몽골과의 화친을 꾀한다. [4] 이 당시까지 몽골은 몽골 제국 세우기 이전의 몽골의 여러 씨족과 부족을 멸망시켰고 그 이후에는 주요 멸망 국가들은 서요, 호라즘 제국, 서하, 러시아 대공국들이 있다. [5] 일단 수도를 옮긴 이유 중 하나가 기회를 틈타 약체화된 남송을 먹어버리고 먹은 남송을 기반으로 몽골과 맞서려고 한 것. 그러나 전성기 시절에도 못 먹었던 남송을 금나라가 약해진 후에 먹으려고 했으니 당연히 실패했고 그렇다고 금선종이 망해가는 나라를 살릴 노력도 별로 안 한지라 이도저도 아니게 되었다. 비록 애종이 금나라 장수들에게 사사로이 남송을 공격하는 것을 중지시키는 칙조를 보내는 등 어느정도 현실적인 조치를 취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남송의 마음을 돌리기 어려웠다. [6] 실제로 남송이 금을 멸망시키고 몽골과 나눠가진 땅은 몽골과의 40년 항쟁에 큰 도움이 되었다. [7] 채주를 지키기 어렵게 되자 무선이 남송의 사천 지역을 탈취함으로써 그곳을 기반으로 힘을 키우려 했으나 남송 명장 맹공에게 전군이 복멸당하고, 무선은 나중에 금 멸망 뒤 몽골군에게 잡혀 죽고 만다. [8] 뚱뚱하다는 의미보다는 겸양에 가깝다. 애종은 어머니에게 꾸지람을 들었을 정도로 격구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또는 중년에 접어들면서 비대해졌다는 설도 있다. [9] 훗날 개봉으로 몽골군이 몰려오는 상황에서 신하들이 청야전술을 권했지만 애종은 백성들에게 피해를 줄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청야전술을 거부하고 군사를 보내 몽골군을 막게 했다. 그러나 그렇게 출전한 금군의 주력은 삼봉산 전투 등에서 거의 전멸당한다. [10] 위소왕은 칭기즈 칸에게 디스먹고 진짜로 졌을 만큼 무능했고 금선종 역시도 몽골에 맞서려고 천도했으면서 정작 제대로 한게 없는 무능하기로는 위소왕 못지 않은 인물이었다. [11] 구한말 황현이 지은 시에서 애종과 숭정제의 자살을 언급한 구절이 나온다. 幽蘭軒燬亦奇哉(유란헌이 불탄 일도 기이하지만) 萬歲亭摧宇宙哀(만세정이 꺾이니 온 세상이 슬퍼했네). 유란헌과 만세정은 각각 애종과 숭정제가 자살한 곳이다. [12] 물론 만주족 및 일부 역덕후 성향 한족들은 금애종의 안타까운 최후 때문에 금애종을 동정한다. 청나라 때는 지배민족인 만주족이 여진족의 후손이라서 국가 차원에서 금애종을 추모하였다. [13] 채주성에 갇힌 후 밤에 신료들을 이끌고 도주하려고 여러번 시도했는데, 몽골군에게 들켜서 모두 실패하고 그 후 말을 모두 도축해서 말고기를 군사들에게 나눠 주었다. [14] 이 설이 사실이라면 당시 군관으로 참전중이었던 완안승린은 36세로 사망한 애종의 나이로 미루어 볼 때 최대로 잡아도 20대 초반의 청년이었거나 10대 중후반의 소년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15] 송휘종 송흠종 [16] 참고로 저 얼굴도 가상 인물 전용얼굴이다.(...) 그리고 고려 김통정 얼굴과 중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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