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름을 딴 게르만어권의 인명 및 다른 '아브라함'에 대한 내용은 아브라함(동음이의어) 문서 참고하십시오.
아브라함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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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אברהם | Abraha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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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카타콤의 벽화에서 아들 이츠하크( 이사악)를(을) 산 제물로 바치려 하는 아브라함의 모습. 야훼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그의 아들인 이츠하크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했으며, 이를 아브라함이 이행하려 하는 장면이다. 그 후 야훼는 이츠하크 대신에 근처의 지나가는 숫양을 잡아서 제사를 하라고 명령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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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는 야훼의 명에 따라 아들 이스마엘( 이스마일)[1]을 제물로 바치려 하는 아브라함. 밑에는 우르파에서 님루드의 왕에 의해 화형에 처해진 아브라함. 그러나 불이 물로, 땔감이 물고기로 변하며 살아난다. | }}}}}}}}} | ||||
<colbgcolor=#000000><colcolor=#000> 이름 |
아브람 Abram / אברהם [2] 아브라함 Abraham / אברהם[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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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갈대아 우르 (우르, 우르케쉬, 또는 우르파) | ||||
생몰년도 | BC 2166?~BC 1991?[4]/BC 1911?-BC 1736?[5]/BC 1800?~BC 1700?[6][7] | ||||
부모 | 아버지 : 데라 | ||||
배우자 | 사라, 하갈, 그두라 | ||||
형제자매 | 하란, 나홀 | ||||
자녀 | 이츠하크, 이스마엘, 6형제[8] | ||||
종교 | 야훼 신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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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0f0f0> 언어별 명칭 | ||||
히브리어 |
אברהם (Avrahám) |
אברם (Avrá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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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그리스어 |
Ἀβραάμ (Abrāā́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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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어 |
إبراهيم (ʾibrāhī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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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 Abraham | Abram | ||||
한국어 | 아브라함 | 아브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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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내가 너와 계약을 맺는다. 너는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리라.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삼으리니, 네 이름은 이제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라 불리리라. 나는 너에게서 많은 자손이 태어나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왕손도 너에게서 나오게 하리라. 나는 너와 네 후손의 하느님이 되어주기로, 너와 대대로 네 뒤를 이을 후손들과 나 사이에 나의 계약을 세워 이를 영원한 계약으로 삼으리라. 네가 몸붙여 살고 있는
가나안 온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준다.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어주리라.
창세기 17장 4-8절 ( 공동번역성서)
창세기 17장 4-8절 ( 공동번역성서)
<rowcolor=#000> 창세기 15장 1절[9] | |
אַחַ֣ר׀ הַדְּבָרִ֣ים הָאֵ֗לֶּה הָיָ֤ה דְבַר־יְהוָה֙ אֶל־אַבְרָ֔ם בַּֽמַּחֲזֶ֖ה לֵאמֹ֑ר אַל־תִּירָ֣א אַבְרָ֗ם אָנֹכִי֙ מָגֵ֣ן לָ֔ךְ שְׂכָרְךָ֖ הַרְבֵּ֥ה מְאֹֽד׃ | |
이런 일들이 있은 뒤, 주님의 말씀이 환시 중에 아브람에게 내렸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너는 매우 큰 상을 받을 것이다.” |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
가톨릭 새번역 | 개신교 개역개정 |
2. 인물의 신화성
20세기 초중반에 William F. Albright 및 G. Ernest Wright 와 같은 주요 고고학자와 Albrecht Alt 및 John Bright 와 같은 성서 학자들은 "족장 시대"로 여기던 기원전 20세기(BC 2000-1900년)에 활동하던 실제 개인이거나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그럴듯한 합성물이라고 믿었다.[10] 그러나 1970년대가 되자 이스라엘의 역사와 성경 본문에 관한 새로운 주장이 이러한 견해에 도전했다. 이러한 주장은 Thomas L. Thompson의 The Historicity of the Patriarchal Narratives (1974)[11], 및 John Van Seters의 Abraham in History and Tradition (1975)[12]에서 찾을 수 있다. 문학 학자인 Thompson은 고고학과 고대 문서에 근거하여 주장했다. 그의 논문은 족장들이 기원전 20세기에 살았다는 설득력 있는 증거의 부족에 중점을 두었고 특정 성경 본문이 기원전 10세기 이후의 시대의 조건과 관심사를 어떻게 반영했는지 언급했다. Van Seters는 족장 이야기를 조사하고 그들의 이름, 사회적 환경 및 메시지가 철기 시대의 창조물임을 강력하게 암시한다고 주장했다.[13] Van Seter와 Thompson의 책은 성서 연구와 고고학의 패러다임 전환이었으며, 점차 학자들로 하여금 족장 내러티브(이야기)를 더 이상 역사적으로 여기지 않게 만들었다. 일부 보수 학자들은 그 후 몇 년 동안 족장 이야기를 옹호하려고 시도했지만 학자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Dever 2001, p. 98: "There are a few sporadic attempts by conservative scholars to "save" the patriarchal narratives as history, such as Kenneth Kitchen [...] [14][15]The Bible Unearthed (2001)은 고대 근동 지역의 사회와 문화에 대한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드러난 족장(Patriarch) 내러티브의 여러 시대 착오적인 점들을 지적하며, 족장 내러티브가 실제로 기원전 9-7세기에 설정되었음을 암시한다고 본다. 아람인이 자주 언급되지만 고대 문헌에는 기원전 1100년경까지 언급되지 않았으며 기원전 9세기 이후에야 이스라엘의 북쪽 국경을 지배하기 시작했다.[16] 창세기 속 족장 내러티브에서 낙타를 기반으로 한 무역상들이 고무, 향유, 몰약을 나르는 것을 언급하지만, 그러한 활동은 기원전 8~7세기에야 일반화되었기 때문에 BC 10세기 이전에는 있을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17] 팀나 계곡의 최근 발굴에서는 이스라엘 또는 심지어 아라비아 반도 외부에서 발견된 가축화된 낙타의 가장 초기 뼈일 수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는 기원전 93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원전 10세기의 것이다. 이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에서, 요셉의 이야기가 이 시기 이후에 작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사용된다.[18] 고고학자 윌리엄 G. 데버(William G. Dever) 는 2001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한 세기에 걸친 철저한 조사 끝에 존경할 만한 모든 고고학자들은 아브라함, 이삭 또는 야곱을 '역사적 인물'로 만들 어떤 맥락도 복구할 희망을 포기했다."[19] 또한, 아브람과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은 셈족의 이름이고 성경 학자들이 성경의 족장들이 살았던 시대라고 믿는 시대인 중기 청동기 시대(MBA; 기원전 2000-1500년)의 바빌로니아 점토판에서 확인되기도 하지만[20], 이는 이후 시대에도 사용된 일반적인 셈족 이름이기 때문에 아브라함 이야기의 역사성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다른 족장들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상당한 구전 역사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21]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는 에제키엘서 33:24와 이사야서 63:16에 언급된다.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이 매우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창세기가 전하는 전승은 원래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창세기 17:5에서는 아브라함의 어원을 "무리의 아버지"라 전하는데, 이는 민중 어원으로 본래 "아버지는 높임을 받으셨다"라는 뜻을 가지는 것으로 여겨진다.[22] 이 전승은 구전으로 전승되던 중 토라의 일부가 되었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이 시기를 대략 기원전 520-320년의 페르시아 시대로 추정한다[20]. 기록화의 메커니즘은 알려지지 않았지만[23], 현재는 두 가지 가설들이 존재한다.[24] 첫 번째는 포로기/유수기 이후 공동체가 토라를 페르시아 제국 체제 내에서 기능할 법적 근거로 고안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모세오경이 포로기 이후 유대인 공동체에 속할 사람을 결정하기 위한 기준을 제공하고 다양한 그룹, 특히 사제직과 평신도 "장로"의 권력 구조와 상대적 지위를 확립하기 위해 작성되었다는 것이다.[25]
토라의 완성과 포로 이후 유대교의 중심으로의 격상은 오래된 텍스트를 결합하는 것만큼이나 새로운 텍스트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마지막 오경은 기존 전통에 기반을 두었다.[26] 에제키엘서 33:24에서 포로 기간(즉, 기원전 6세기 전반)에 기록된 바빌론의 포로인 에제키엘은 유다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아브라함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근거로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방식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예언자는 그들에게 토라를 관찰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주장할 권리가 없다고 말한다.[27] 이사야서 63:16에서도 유사하게 유다 사람들과 바빌로니아에서 유수기를 보낸 유대인들("골라 gôlâ") 사이의 긴장을 증언하고 있으며, 야훼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이며 이스라엘의 역사는 아브라함이 아닌 출애굽기에서 시작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증거(예: 에스라-네헤미야)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결론은 아브라함의 모습이 추방 당시와 그 이후에 유다의 위대한 지주들 사이에서 두드러졌을 것이며, 귀환한 망명자들의 주장과 반대되는 그들의 땅에 대한 그들의 주장을 지지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것이다.[28]
아브라함에 대한 구약의 가장 오래된 기록 중 하나인 에제키엘 33:23-29은 아브라함이 땅을 기업으로 얻었다고 전한다. 이는 아브라함을 언급하는 또 다른 기록인 이사야 51:1-3의 말씀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 여겨지며, 에제키엘 33:23-29와 이사야 51:1-3 모두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나 갈대아 우르 출신이라는 언급이 아예 없는데, 이는 가장 초기의 아브라함 전승이 메소포타미아 출신의 족장 전승 보다는 가나안 땅 출신의 토착적인(Autochthonous) 족장에 대한 전승이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 이스라엘 핀켈슈타인(Israel Finkelstein)의 제안이다.[29] 기원전 10세기 이집트의 파라오 셰숑크 1세의 부바스티스 입구의 전승 기록에서 네게브 지역의 지명 중 "아브라함의 요새"라는 지명을 언급하기에 아브라함 전승이 최소한 기원전 10세기부터 존재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30] 동양학자 마리오 리베라니(Mario Liverani)는 아브라함의 이름의 라함과 벳스안/벧산(Beth Shean)에서 발견된 세티 1세(기원전 1290-1279년)의 비석(c. 1289 BC)에서 언급되는 유목민족 부족인 라함(Raham) 사이의 연관성을 제안했다.[31] 이 부족은 아마도 갈릴리의 벳스안 주변이나 가까운 지역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비석은 그 지역에서 일어난 싸움을 나타냅니다). 당시 반유목민이자 목가적인 셈족 부족은 자신들의 이름 앞에 바누("~의 아들들")이라는 용어를 붙였기 때문에 라함족이 스스로를 바누 라함(Banu Raham)이라고 불렀다는 가설이 있다. 더욱이, 많은 사람들은 부족 구성원들 사이의 혈연 관계를 부족 내 유대의 결과라기보다는 시조 조상(즉, 부족에 이름을 준 사람)의 공통 혈통으로 해석했다. 이 시조 신화적 조상의 이름은 부칭(접두사) Abū("아버지")와 부족의 이름으로 구성되었다. 라함의 경우에는 아부 라함(Abu Raham)이었으며 나중에 아브라함(Ab-raham, Abraham)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르에서 하란까지의 아브라함의 여행은 유대인들이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귀환한 이야기를 회고적으로 반영한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3. 가족과 친척
부친인 데라는 갈데아 우르 출신이었고, 그와 함께 하란으로 이주했다.양자인 다마스쿠스 출신 하인 엘리에제르 외에 몸종 하갈(하자르)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이스마엘(이스마일), 사라와의 사이에서 차남 이츠하크(이삭)를(을) 낳았고, 사라와 먼저 사별한 후 말년에 맞아들인 후처 그두라에게서도 6명의 아들(시므란·욕산·므단·미디안·이스박·수아)를 얻었다. 조카로는 친형제 하란(הרן)의 자녀였던 밀가(מילכה), 롯(לוֹט), 이스가(יסכה)가 있다. 여기서 밀가는 하란의 장녀로, 둘째 삼촌인 나홀(נחור)과 혼인하여 브두엘(בתואל)을 낳았다. 브두엘은 이츠하크의 부인인 리브가(רבקה)와 야곱의 장인인 라반(לבן)의 아버지이다. 하지만 창세기에서 나오는 내용을 보면 여러 이들은 기독교인들도 잘 모른다. 아브라함이 죽기 전 이들에게 재산을 쥐어주고 외지로 떠나게 했다는 내용밖에 없다. 자신의 사후 집안에서 분쟁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다.
성격은 아내를 두 번이나 팔았던 일화에서 볼 수 있듯이 겁이 많고 소심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목숨을 담보로 한 위험한 일은 저지르지 않는 신중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창세기에서 나오는 내용을 보면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며 생애 후반으로 갈수록 야훼에 대한 신앙이 깊고 견고한 사람으로 성장한다.
4. 생애
테라는 아들 아브람과, 아들 하란에게서 난 손자 롯과, 아들 아브람의 아내인 며느리 사라이를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칼데아의 우르를 떠났다. 그러나 그들은 하란에 이르러 그곳에 자리 잡고 살았다.
창세기 11, 31
아브람은
노아와 그 아들
셈의 후손인
데라의 아들로,
칼데아의 우르 지방에 살고 있었다. 이후 [야훼의 명령을 받아 온 일족을 이끌고 고향을 떠나
가나안으로 향했다. 아버지 데라(תרח, 테라흐)와 다른 친족들은 중간 지점인 하란에 남고, 아브라함과 롯의 가족만 가나안에 들어왔다가 기근이 들자
이집트로 떠났는데 아내
사라이와 남매로 위장했다. 창세기 11, 31
이집트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그는 자기 아내 사라이에게 말하였다. “여보, 나는 당신이 아름다운 여인임을 잘 알고 있소 이집트인들이 당신을 보면, ‘이 여자는 저자의 아내다.’ 하면서, 나는 죽이고 당신은 살려 둘 것이오. 그러니 당신은 내 누이라고 하시오. 그래서 당신 덕분에 내가 잘되고, 또 당신 덕택에 내 목숨을 지킬 수 있게 해 주시오.”
창세기 12, 11-13
왜냐하면 아브람은 사라를 빼앗기면서 자기 목숨을 잃을까 봐 이런 비겁한 짓을 한 것이었고 아내를
파라오에게 맥없이 빼앗기고 만다. 이에 야훼가 파라오의 집에 저주를 내리자 파라오는 아브라함을 불러 왜 거짓말을 하느냐면서 질책을 한다.
사실 이복 누이가 맞긴 한 것이, 아브람과 사라이는 아버지는 같지만 어머니가 다른 이복남매였기 때문. 그 후 나중에 그랄왕인 아비멜렉 앞에서도 똑같은 일을 저지르는데, [32] 이때 사라이가 자신의 이복동생이라는 것을 밝힌다. (창세 20, 12 참조)창세기 12, 11-13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와 네게브 지역에 거주했는데 롯과 땅 문제로 분쟁이 일자 아브람이 롯에게 분가를 요청하여 롯은 소돔으로 떠나고 아브라함은 헤브론으로 이주했다.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벨라 다섯 나라의 왕들이 엘람 왕 그돌라오멜[33]을 섬기다가 배반해서 그돌라오멜이 시날 왕[34], 엘라살 왕[35], 고임 왕[36]과 함께 다섯 왕을 싯딤 골짜기에서 무찌르고 소돔과 고모라를 약탈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롯도 이에 휘말려 포로가 되었다.[37] 아브라함은 동맹인 아모리인 마므레, 에스골, 아넬 형제와 손잡고 엘람 연합군의 뒤를 추격해 롯과 그 가족과 재산을 구출해냈다.[38] 이때 돌아오는 길에서 살렘 왕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고, 멜기세덱에게 노획물의 10분의 1을 주었는데, 이것이 십일조의 시초로 여겨진다.
그러고는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창세기 15, 5
이러한 일이 있은 후, 야훼는 아브람을 불러 계약을 맺는다. 자식이 없던 아브람은 야훼가 자식을 주지 않았으므로 자신의 종인
다마스쿠스 사람 엘리에제르가 집안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야훼는 아브람으로 부터 나온 자식이 상속자가 될 것이며 하늘의 별 만큼 많은 후손을 갖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또한 가나안 땅을 주겠다는 계약에 따라 제사[39]를 요구하는데, 여기에서 아브람은 앞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겪을 일(이집트 종살이와 출애굽 사건)을 듣게 된다.창세기 15, 5
한편 늙어서까지 자식을 보지 못한 사라이는 아브람에게 하갈을 통해 자식을 보도록 하는데 여기서 태어난 자가 이스마엘이였다.
“나를 보아라. 너와 맺는 내 계약은 이것이다. 너는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너는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너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창세기 17, 4-5
아브람이 99세가 되던 해, 야훼로부터 새로운 계약과 함께 야훼는 아브암에게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새로 지어줬다.[40] 또한 야훼는 아브라함이 사라로부터 아들을 얻게 될 것이며, 그 이름을
이츠하크 이라 지으라고 말한 후 집안의 온 남자가 포피를 자르는
할례를 강요했다. 창세기 17, 4-5
그러던 어느 한창 더운 날에, 야훼는 세 사람[41]의 모습으로 아브라함 앞에 등장한다. 아브라함은 그들이 야훼로 부터 온 존재들임을 알고, 식사를 제공한 뒤 소돔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배웅한다. 여기서 야훼가 소돔과 고모라를 파괴하려는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말해주는데, 아브라함은 진정 의인을 죄인들과 함께 쓸어버리겠냐며 야훼를 말렸으나[42] 야훼는 유일하게 의로웠던 롯과 그의 가족을 탈출시키고 두 도시를 파괴했다. 이 때 천사가 탈출하면서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했는데, 탈출하는 과정에서 롯의 처가 두고온 자신들의 재산이 아까워서인지 멸망하는 소돔과 고모라를 뒤돌아보아 소금기둥이 되었다.
아브라함이 손을 뻗쳐 칼을 잡고 자기 아들을 죽이려 하였다. 그때,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불렀다.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나를 위하여 아끼지 않았으니,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
창세기 22, 10-12
이후 야훼의 예고대로
사라 소생의 아들
이츠하크(이삭)가(이) 태어난다. 아브라함은 이츠하크을 매우 아꼈는데, 야훼는 그가 자신을 향한 추종능력이 어떤지 시험하기 위해 이츠하크를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했다. 아브라함은 그 말씀대로 하기 위해 모리야 땅으로 가 이츠하크 제단에 눕히고 칼을 들었다. 이에 야훼가 그의 상당한 믿음을 아시어 천사를 보내 그를 제지한 뒤, 대신할 제물인 흠 없는 숫양을 주어 대신 제물로 바치게 하였다.[43][44] 또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고 많은 자손과, 그 자손들의 축복, 그리고 그 자손들의 나라에게도 축복을 해준다. 창세기 22, 10-12
사라가 127세의 나이로 죽자, 히타이트 사람들에게 자신은 외부인이자 나그네일 뿐이라 아내를 묻어 주기 위한 땅을 팔라고 부탁한다. 그러자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위대한 지도자이며,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는 것은 아무도 막지 않는다며 좋은 땅을 아무 곳이나 골라 써도 된다고 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소할의 아들 에브론에게 부탁하여 막벨라 동굴을 팔게 해 달라고 한다. 마침 히타이트 사람들과 함께 있던 에브론은 아브라함에게 동굴이 있는 땅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줄 테니 장사를 지내라고 크게 소리친다. 이에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절을 하고는 땅값을 받아야 아내를 묻을 수 있다며, 에브론이 마다하는데도 굳이 땅값을 치르려 하고, 에브론은 은 사백 세겔을 받고 마므레 동쪽의 막벨라에 있는 밭을 팔아 주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곳의 동굴에 아내를 묻었다. 이 동굴은 그 후 아브라함 집안의 가족묘가 된다.[45]
아브라함은 종손녀 리브가를 아들 이츠하크의 아내로 맞이하게 한 다음[46], 새 아내 그두라를 맞아들였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재산을 모두 이츠하크에게 주었고, 죽기 전에 다른 아내의 아들들에게도 선물을 주었다. 그리고 그들을 동쪽으로 보내어 이츠하크 멀리 떨어져 살게 했다. 아브라함은 175세의 나이로 평안히 살다 죽었고, 이츠하크와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을 사라가 묻힌 막벨라 동굴에 묻어 주었다.
5. 영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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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무릎에 유대인, 그리스도인, 무슬림이 함께 앉아 있는 모습 12세기 프랑스 Souvigny 성경 사본의 세밀화 |
6. 기타
아브라함이 계속 고향에 남아있었다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이 아니라 이라크(우르), 시리아 (우르케쉬) 또는 튀르키예(우르파)에 세워졌을 것이다. 그래서 현대의 유대인들은 석유가 펑펑 나는 풍요로운 이라크 땅을 냅두고 왜 사막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면서 팔레스타인으로 옮겨가게 했냐고 불평한다.[49][50] 헌데 이스라엘 땅에서 석유와 천연가스가 발견된 상태.아브라함은 이사야 41장 8절[51]에서 야훼의 친구라고 평가받고 있다. 아브라함이 죽어서 구원 받았다는 성경의 증언을 볼 때, 성경은 야훼와 인간 사이에 죄가 없어질 경우 수직적 관계에서 오는 권위에 의한 압박이 사라져 야훼와 인간은 친구 같이 격식 없는 친밀한 관계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신약에서도 마찬가지로 요한복음에서 야훼의 뜻에 순종하여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삼위일체 야훼인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라고 말하고 있다.[52] 즉, 야훼는 질서와 조화 안에서 인간에게 자유를 주고 싶지만, 무제한의 자유가 주어진다면 죄로 기우는 인간의 본성에 의해 죄에 빠질 수 밖에 없으므로 야훼 자신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2020년 이스라엘 -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국교정상화 협정은 아브라함 협정으로 불리고 있다.
UAE의 수도 아부다비에는 가톨릭 성당, 유대교 시나고그, 이슬람교 모스크가 모인 아브라함 가족의 집이 있다. 각자 전통에 따라 성당은 동쪽으로, 시나고그는 예루살렘 방향으로, 모스크는 메카 방향으로 지어진 것이 특징. 2019년에 발표된 세계 평화와 더불어 사는 삶을 위한 인간의 형제애 (아부다비 공동선언문)에 따른 결과물이라고 한다.
아브라함의 이름은 서구권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아브라함과 아브람 둘 다 사용되고 있다. 아브라함을 사용한 유명한 인물은 단연 에이브러햄 링컨이고 아브람을 사용한 인물로는 크레이튼 에이브럼스 및 주한미군 사령관을 역임한 크레이튼의 아들인 로버트 에이브럼스 등이 있다. 중동권에서도 종종 쓰이는 이름이며 에브라힘 라이시가 대표적인 예이다.
[1]
원전인 유대교 타나크에서는 이스마엘이 아닌 이복형제인 이츠하크가 제물로 바쳐진다. 사실 쿠란에서 해당 구절인 앗 사파트 (37장) 100-111절 에서는 "아들" 이라고만 되어 있을 뿐이지만, 무슬림계에서는 이슬람 전승에 따라 이스마엘로 보고 있다.
[2]
원래 가지고 있던 이름
[3]
야훼로부터 계약을 맺으며 새로 받은 이름
[4]
마소라 본문(AD 9세기)의 족보를 바탕으로 한 연대
[5]
70인역(LXX) 본문(기원전 3세기)과 사마리아 오경(기원전 3세기)의 족보를 바탕으로 한 연대
[6]
유대인들의 달력에서 출애굽은 기원전 1310년의 사건이며, 아브라함은 이로부터 430년 전인 기원전 1740년에 야훼과 계약을 맺었다고 하기에 아브라함을 기원전 18세기의 인물로 보는 것은 유대인들의 연대기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유대인들의 달력에서는 남유다의 멸망을 실제 멸망 시기보다 1세기 정도 이후로 보며, 유대인들 역시 이를 인정하지만, 이 이전의 시대의 연대들에 대해서는 실제 역사적으로 검증된 것이 없기에 유대인들의 연대기가 옳을 수도 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으며, 현대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기원전 18세기의 인물로 보고 있다.
[7]
창세기에서 등장하는 여러 문화적 특징들은 기원전 19-18세기 이후의 근동에서 확인되며, 고고학적 근거들은 창세기 속 아브라함의 이야기의 배경이 기원전 18세기임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의견도 존재한다.
[8]
그 외에 아이들이 생기기 전에 자신의 상속자이자 양자 격으로 둔 엘리에제르가 있다.
[9]
이 구절에서 아브라함이 받을 상이 큰 것인지 야훼가 아브라함의 지극히 큰 상급인지에 대해 번역이 갈리는데, 가톨릭 새번역, 개신교 새번역, 공동번역과 많은 현대 영어 번역(NRSV, RSV, NJB, NABRE, ESV, NLT)에서는 전자로 번역한다. 반면 개신교 번역본들 중에서 점유율이 가장 큰 개역성경, KJV, NIV에서는 후자로 번역한다. 이와 같이 번역이 갈리는 이유는 크다는 뜻을 가진 동사 'הַרְבֵּ֥ה'의 해석 방향이 다르기 때문인데, 전자의 해석은 야훼가 아브라함의 방패라는 말 다음에 오는 말을 별개의 문장으로 보고, 후자의 해석은 야훼 그 자체가 아브라함의 방패이고 상급인데 'הַרְבֵּ֥ה'를 그 상급에 대하여 부연설명하는 동사로 본다. 즉, 전자의 해석은 15장 2절에서 아브라함이 무엇을 줄 것이냐고 묻는 것의 문맥에 초점을 맞춘 번역이고, 후자의 해석은 야훼가 아브라함의 방패라는 것에 초점을 맞춰 상급 역시 방패와 병행하는 명사로 보는 번역이다. 아브라함의 반응을 볼 때 아브라함은 전자의 뜻으로 알아들었을 확률이 크지만, 어쩌면 시대적 한계로 현세 지향적 신앙을 가지고 있던 아브라함의 이해 수준에 맞춘 말인 동시에 지극히 큰 상급은 현세의 복이 아닌 야훼 그 자체라는 야훼의 본심을 표현한 중의적 표현일 수도 있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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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 large, however, the minimalist view of Thompson's pioneering work, The Historicity of the Patriarchal Narratives, prevai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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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The Bible Unearthed, p. 39.
[17]
The Bible Unearthed, p.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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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The stele reads: «The Apiru of Mount Yarumta, together with the Tayaru, attack the Raham tribe». J. B. Pritchard (ed.), Ancient Near Eastern Texts Relating to the Old Testament , p. 255. Princeton, 1955.
[32]
나중에 이츠하크도 아비멜렉과 거의 같은 에피소드가 나온다. 같은 전승이 조금씩 다른 버전으로 전승되다가 창세기에 함께 실렸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33]
엘람어와 아카드어로 기록된 문헌들이 발견됨에 따라, 그돌라오멜을 두고 원래 '구두르라가말'이 그 이름이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라가말은 엘람족의 여신으로, 아슈르바니팔이 그 존재를 언급한다. 그돌라오멜은 '부하'를 의미하는 '구두르'와 '라가말'이 합쳐진 꼴로 '라가말의 부하'라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본다. 대영박물관에 소장중인 기원전 7-6세기의 기록인
그돌라오멜 토판(Spartoli Tablets Collection)에서 구두르나훈테 2세(Kutir-Nahhunte II)를 구두르라가말로 기록하고 있다. 수칼마흐 왕조의 구두르나훈테 1세 (Kutir-Nahhunte I) 역시 구두르라가말로 불렸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 때문에 아브라함을 기원전 18세기의 인물로 보는 이들은 사실상 엘람이 성서 속 묘사대로 메소포타미아의 절대 권력 중 하나로서 군림했던 것은 구두르나훈테 1세와 그의 삼촌 시웨팔라르후파크(Siwe-Palar-Khuppak, 기원전 1778-1745년)가 통치하던 기원전 18세기가 유일하다는 것을 고려하여 시웨팔라르후파크를 그돌라오멜과 동일시한다. 시웨팔라르후파크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가장 강한 왕이었으며, 마리의 짐리-림(Zimri-Lim, 기원전 1775-1761년), 바빌론의 함무라비를 포함한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왕들이 그를 섬겼고, 마리의 짐리-림과 바빌론의 함무라비는 그의 명령에 복종하고 그와 함께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국가인 에쉬눈나(Eshnunna)를 정벌하였다. 그의 치세 동안에만, 엘람이 메소포타미아의 정치에 광범위하게 간섭하며 전령과 사신들을 시리아의 에마르(Emar)와 카트나(Qatna)까지 먼 서쪽으로 보낼 수 있었다. 또한, 정기적으로 가나안의 하솔(Hazor)까지 사절단을 보내고 가나안 지역과 지속적으로 교류했던 마리 왕국이 시웨팔라르후파크의 치세 동안 엘람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는 것은 마리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가나안도 마리와 마찬가지로 엘람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고 한다실제로, 당시인 엘람의 시웨팔라르후파크의 치세 동안 엘람의 사신은 에마르(Emar)에 이르러서, 그의 세 명의 종들을 카트나의 왕 아무트-피엘 2세(기원전 1772-1762년)에게로 보냈었고, 카트나의 왕 역시 엘람으로 두 명의 전령들을 보냈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엘람은 에쉬눈나를 정복한 뒤 더 서쪽으로 진출하려 하다가 함무라비와 마리의 연합군에 의해 저지당했고, 이후 메소포타미아의 주도적인 세력에서 완전히 밀려나버리게 되었다. 사실상 공식적으로는 마리를 넘어서까지는 진출하지 못했다는 것이며, 가나안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주장은 추정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학계에서는 엘람은 역사상 단 한 번도 가나안을 지배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돌라오멜 토판(Spartoli Tablets Collection) 속 그돌라오멜은 바빌론을 약탈하고 바빌론을 일시적으로 통치했었던 엘람 왕 기원전 12세기의 슈트룩-나훈테(Shutruk-Nakhunte; 구두르나훈테 2세의 부친이자 전임왕)에 대한 기억으로 여겨지며[53], 고임 왕 디달과 동일시되던 투둘라(Tudḫula 또는 mTu-ud-hul-a)는 히타이트 왕 투드할리야가 아니라 신-아시리아 제국의 왕 센나케립(기원전 705~681년)을, 아리옥과 동일시되던 에리아쿠는 림신 1세가 아니라 중-아시리아 제국의 왕 투쿨티-닌우르타 1세(Tukulti-Ninurta I, 기원전 1243-12~1207년)을 , 암라펠은 함무라비가 아니라 바빌론의 갈데아인 왕 므로닥-발라단(마르둑-아팔-이디나 2세 Marduk-apla-iddina II, 기원전 722~710년)을 가리켰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들 모두는 바빌론을 한 번씩은 다스렸거나 정복하였거나 압제하였거나 성소를 약탈하고 신전의 신상들이나 보화들을 훔쳤었고, 또, 모두 비극을 맞이하였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Michael Astour는 이를 근거로 하여 창세기 14장이 기원전 6세기의 바빌로니아 유수기 동안 유대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반-바빌로니아 선전(프로파간다)의 산물이라 제안하였다 [54]. 그런데, 이에 반대하는 학자들도 있다. 토판 속 그돌라오멜을 기원전 7세기의 엘람의 왕권 찬탈자 구두르나훈테(Kutir-Nakhkhunte)로 보는 이들도 있으니 말이다. 아시리아 제국의 센나케립이 통치하던 시절에 엘람의 왕 슈트룩-나훈테 2세(Shutruk-Nakhkhunte II)는 그의 형제 칼루슈(Khallushu)에게 암살당하였으며, 칼루슈는 아시리아의 바빌론의 왕 아슈르-나딘-슈미(Ashur-nadin-shumi; 기원전 700-694년)와 도시 바빌론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고, 이때 센나케립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엘람으로 군사 원정을 갔는데, 이 때 칼루슈는 구두르나훈테에게 암살당하였고, 그렇게 구두르나훈테는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확실히 그돌라오멜 토판 속 그돌라오멜을 그돌라오멜(구두르나훈테)도 아닌 슈트룩-나훈테로 식별하기에는 무리가 있기에 이러한 해석이 더 합리적으로 여겨진다 [55].
[34]
시날의 왕 암라펠/아므라벨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로 추정되어왔다. 아므라벨이라는 이름은 "아므라비-엘", 곧 "아무라피(Ammurāpi; 함무라비의 원발음)-일루(엘; '주님/신'이라는 뜻)"라는 이름으로, "함무라비는 (나의) 주님이다"를 뜻하는 이름이기에 함무라비가 아니라 그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메소포타미아 남부(시날)의 왕국 중 하나의 왕이었거나 함무라비의 후계자들(예: 삼수일루나) 중 하나를 가리켰을 수도 있다. 또한 함무라비와 동시대에 활동한 에쉬눈나의 이발피엘 2세(기원전 1779년 ~ 1765년)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었다.[56] 그러나 얌하드와 우가리트에 함무라비라는 다른 왕이 있었기 때문에 절대적인 주장은 아니다.[57][58] 그리고 이발피엘 2세는 구두르나훈테 1세의 삼촌인 엘람 왕 시웨팔라르후파크에게 살해당했기에 구두르나훈테 1세가 왕이 되기도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난 인물이다. 다른 학자들은 암라벨을 후대의 크테시아스(Ctesias)의 바빌로니아 왕 목록에 있는 이름 중 하나이자 히에로니무스의 《연대기Chronicon》에서 아시리아의 26명의 왕들 중 5번째 왕으로 기록된 아랄리우스와 동일시했다. 학자들 중에는 암라펠이 셈어 이름이지만, 수메르의 왕이자
우르 제3왕조의 왕이었던 아마르-신의 이름에도 사용된 "아마르 Amar"라는 요소와 "아-프-엘 a-p-l"이라는 요소로, 총 두 개의 요소로 이루어진 이름이라 제시하는 이들도 있으며,[59]. 주류 학계의 의견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비평적인 학자인 존 반 세터스는 《Abraham in History and Tradition》에서 암라펠의 역사성을 거부하고 부정했다.[60] 참고로, 그돌라오멜 토판(Spartoli Tablets Collection) 속 그돌라오멜은 바빌론을 약탈하고 바빌론을 일시적으로 통치했었던 엘람 왕 기원전 12세기의 슈트룩-나훈테(Shutruk-Nakhunte; 구두르나훈테 2세의 부친이자 전임왕)에 대한 기억으로 여겨지며[61], 고임 왕 디달과 동일시되던 투둘라(Tudḫula 또는 mTu-ud-hul-a)는 히타이트 왕 투드할리야가 아니라 신-아시리아 제국의 왕 센나케립(기원전 705~681년)을, 아리옥과 동일시되던 에리아쿠는 림신 1세가 아니라 중-아시리아 제국의 왕 투쿨티-닌우르타 1세(Tukulti-Ninurta I, 기원전 1243-12~1207년)을, 암라펠은 함무라비가 아니라 바빌론의 갈데아인 왕 므로닥-발라단(마르둑-아팔-이디나 2세 Marduk-apla-iddina II, 기원전 722~710년)을 가리켰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들 모두는 바빌론을 한 번씩은 다스렸거나 정복하였거나 압제하였거나 성소를 약탈하고 신전의 신상들이나 보화들을 훔쳤었고, 또, 모두 비극을 맞이하였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35]
엘라살의 왕 아리옥은 수메르의 도시 라르사의 왕으로 추정되어왔는데, 엘라살은 라르사가 전승되는 과정에서 오기된 것으로 본다. 아브라함을 기원전 18세기의 인물로 보는 이들은 아리옥은 라르사의 왕 중 함무라비와 동시대 인물인 림-신 1세가 아리옥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는 림-신(또는 그의 형제 와라드-신)의 별칭이 아리옥과 유사한 발음의 이름인 에리-아구/아쿠이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아리옥은 마리 문서에서 함무라비와 동시대 인물인 짐리-림의 부하로 언급되는 아리욱(Arriwuk)으로, 엘라살은 같은 시기의 마리 문서에서 일란-수라(Ilan-Sura)로 언급되는 마리 북쪽에 위치한 도시로 추정하기도 한다. 사해 문서의 라멕 계시록/창세기 외경(Genesis Apocryphon, col. 21)에서는 아리옥을 카파토키아(Kappatuk; Cappadocia)의 왕으로 기록한다. 그돌라오멜 토판(Spartoli Tablets Collection) 속 그돌라오멜은 바빌론을 약탈하고 바빌론을 일시적으로 통치했었던 엘람 왕 기원전 12세기의 슈트룩-나훈테(Shutruk-Nakhunte; 구두르나훈테 2세의 부친이자 전임왕)에 대한 기억으로 여겨지며[62], 고임 왕 디달과 동일시되던 투둘라(Tudḫula 또는 mTu-ud-hul-a)는 히타이트 왕 투드할리야가 아니라 신-아시리아 제국의 왕 센나케립(기원전 705~681년)을, 아리옥과 동일시되던 에리아쿠는 림신 1세가 아니라 중-아시리아 제국의 왕 투쿨티-닌우르타 1세(Tukulti-Ninurta I, 기원전 1243-12~1207년)을[63], 암라펠은 함무라비가 아니라 바빌론의 갈데아인 왕 므로닥-발라단(마르둑-아팔-이디나 2세 Marduk-apla-iddina II, 기원전 722~710년)을 가리켰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들 모두는 바빌론을 한 번씩은 다스렸거나 정복하였거나 압제하였거나 성소를 약탈하고 신전의 신상들이나 보화들을 훔쳤었고, 또, 모두 비극을 맞이하였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현대의 학계에서는 아리옥은 역사적인 인물이 아니라 문학적인 인물인 것으로 여겨지는데, 엘라살의 경우, 라르사나 갑바도기아가 아니라 엘리사(알라시야)라는 지명과 연결된다. 엘라살은 창세기 10:4의 엘리사와는 지명과 관련이 있으며, 이 때문에 오늘날의 키프로스 섬의 고대 국가인 알라시야(Alashiya)를 가리켰을 것으로 추정된다 [64]. 엘람의 왕이나 시날의 왕이 지중해 민족과 연합을 한 것은 신아시리아 제국이나 신바빌로니아 제국이 아니라 페르시아 제국부터 가능해진 일이기에 싯딤 전투 이야기가 페르시아 제국 시절에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아리옥, 디달, 그돌라오멜, 암라펠과 같은 이름들은 유수기 시절과 제2성전 시대에 사마리아 땅에 살던 사람들과 유대인 디아스포라 사이에 섞인 외국인들의 이름을 이용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에스라 4장은 바벨론 사람과 엘람 사람이 사마리아에 있었다고 기록한다 [65].
[36]
아브라함을 기원전 18세기의 인물로 보는 이들은 고임 왕 디달을 히타이트 신왕국의 초대왕 투드할리야 1세(기원전 17세기)나 히타이트 형성 이전의 투드할리야 왕의 오표기로 추정하며, 아브라함을 기원전 21세기의 인물로 보는 이들은 메소포타미아와 자그로스 산맥의 야만족인 구티(구티움; 구티족)의 왕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실제로, 구약 학자 월톤과 같이 고임이 구티움을 의미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66]. 사해 문서의 라멕 계시록/창세기 외경(Genesis Apocryphon, col. 21)에서는 고임을 메소포타미아 내에 있었던 국가로 기록한다. 그돌라오멜 토판(Spartoli Tablets Collection) 속 그돌라오멜은 바빌론을 약탈하고 바빌론을 일시적으로 통치했었던 엘람 왕 기원전 12세기의 슈트룩-나훈테(Shutruk-Nakhunte; 구두르나훈테 2세의 부친이자 전임왕)에 대한 기억으로 여겨지며, 고임 왕 디달과 동일시되던 투둘라(Tudḫula 또는 mTu-ud-hul-a)는 히타이트 왕 투드할리야가 아니라 신-아시리아 제국의 왕 센나케립(기원전 705~681년)을, 아리옥과 동일시되던 에리아쿠는 림신 1세가 아니라 중-아시리아 제국의 왕 투쿨티-닌우르타 1세(Tukulti-Ninurta I, 기원전 1243-12~1207년)을, 암라펠은 함무라비가 아니라 바빌론의 갈데아인 왕 므로닥-발라단(마르둑-아팔-이디나 2세 Marduk-apla-iddina II, 기원전 722~710년)을 가리켰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들 모두는 바빌론을 한 번씩은 다스렸거나 정복하였거나 압제하였거나 성소를 약탈하고 신전의 신상들이나 보화들을 훔쳤었고, 또, 모두 비극을 맞이하였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엘리사가 언급되는 창세기 10:4에 이어서 창세기 10:5에서는 바로 고임(한국어 번역본의 "바닷가 백성들")이 등장하는 것 등 다른 성서의 기록들과 고고학적 사실들을 근거로 하여 현대의 학자들은 고임을 히타이트나 구티움과는 무관한 곳으로 보는데, 일반적으로는 고임 역시도 엘라살과 마찬가지로 지중해 섬의 해상 민족 세력으로 추정한다 [67]. 엘람의 왕이나 시날의 왕이 지중해 민족과 연합을 한 것은 신아시리아 제국이나 신바빌로니아 제국이 아니라 페르시아 제국부터 가능해진 일이기에 싯딤 전투 이야기가 페르시아 제국 시절에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아리옥, 디달, 그돌라오멜, 암라펠과 같은 이름들은 유수기 시절과 제2성전 시대에 사마리아 땅에 살던 사람들과 유대인 디아스포라 사이에 섞인 외국인들의 이름을 이용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에스라 4장은 바벨론 사람과 엘람 사람이 사마리아에 있었다고 기록한다 [68].
[37]
나라 수만 세면 5:4지만, 엘람과 바빌로니아는 고대 근동의 손꼽히는 강국인 반면 저 다섯 왕은 사해 근처의 성읍국가들에 불과했다.
[38]
수메르의 기록에 이것과 매우 흡사한 전투가 기록되어 있으며 거기서 활약한 사람으로 데라의 아들까지 언급하고 있으므로 전투가 있었던 것은 사실로 인정받고 있다.
[39]
삼년 된 암송아지와 암염소, 숫양 한마리, 그리고 산비둘기 한마리와 어린 집비둘기 한 마리
[40]
그의 아내
사라이 또한
사라 라는 이름을 받았다.
[41]
세 사람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지만, 흔히 야훼와 같이 수행원으로 대동한 두 천사로 보기도 한다.
[42]
처음에는 야훼를 상대로 흥정을 했다. 의인 50명만 있어도 멸하지 않겠다고 하자. 아브라함은 50명에서 45명으로, 45명에서 40명으로, 40명에서 30명으로, 30명에서 20명으로, 20명에서 10명으로... 하는 식으로 필요한 의인의 수를 깎았지만
롯의 가족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타락한지 오래라 결국 구하지 못했다.
[43]
야훼 이레(주님께서 준비하신다.)가 여기에서 파생된 말이다.
[44]
또한 전승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형이 여기서 집행되었다고 한다.
[45]
그 후 이 동굴에는 사라에 이어, 아브라함, 이츠하크과 그의 아내 레베카, 야곱의 첫 부인 레아와 야곱이 순서대로 묻혔다. 야곱이 사랑하던 둘째 부인인 라헬의 무덤은 베들레헴 외곽에 있다.
[46]
아브라함이 사망할 당시의 나이는 175살. 이츠하크가 60살에 에사우와 야곱 형제를 낳았으니 이 들의 소년기 때까지는 함께한 셈이다.
[47]
일단 창세기의 성조 이야기부터가 시리아-팔레스티나의 여러 민족을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한 대가족으로 연결하는 모습을 보인다.
[48]
아랍인들은 이스마엘의 후손으로 여겨진다.
[49]
튀르키예는 평야 혹은 교통이 발달한 지역이다. 즉, 외부의 침입을 받기 쉬운 지역이라는 뜻이다. 당장 봐도 튀르키예는
동로마 제국에서만
콘스탄티노폴리스가 13번이나 공격당했던 곳이다. 그렇기에 만약 현대 시리아 혹 터키 지역에 유대 국가가 세워졌다면, 비교적 구석탱이인 팔레스타인에서와 달리 배타적인 유대인의 민족적, 종교적 정체성 자체를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50]
저 설명이 무색한 게 팔레스타인 역시 이집트와 근동을 잇는 요충지이기 때문에 아시리아나 바빌로니아와 같은 오리엔트의 강대국들과 이집트 사이의 각축장이 되었다. 따라서 이 지역은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기에 결코 유리한 지형은 아니며 실제로도 팔레스타인에 존재했던 에돔이나 암몬 같은 여러 민족들이 정체성을 잃고 아예 소멸했던 바 있다.
팔레스타인 일대에서 여러 나라들로 흩어진 후에도 유대인들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오래 유지한 걸 보면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단순한 지리적 접근만으로 해석하기는 힘들다.
[51]
너, 이스라엘, 나의 종, 너, 내가 뽑은 자, 야곱아, 나의 친구 아브라함의 후예야,
[52]
요한 15,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