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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17년 1월 28일 | ||
오스만 제국
에디르네 에디르네 궁전 (現 튀르키예 마르마라주 에디르네도 에디르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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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774년 1월 21일 (향년 56세) | ||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톱카프 궁전 (現 튀르키예 마르마라주 이스탄불도 이스탄불 광역시 파티흐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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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이스탄불 랄렐리 모스크 무스타파 3세 영묘 | ||
재위기간 | 오스만 파디샤[2] | ||
1757년 10월 30일 ~ 1774년 1월 21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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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70125><colcolor=#fff> 아버지 | 아흐메트 3세 | |
어머니 | 에미네 미흐리샤 카든에펜디 (출신: 프랑스인( ?)[3]) | ||
형제자매 | 압뒬하미트 1세, 셰자데 쉴레이만, 셰자데 메흐메트, 셰자데 바예지트, 셰자데 이브라힘, 셰자데 누만, 셰자데 셀림, 셰자데 알리, 셰자데 이사, 셰자데 무라트, 셰자데 세이페딘, 셰자데 압뒬메지트, 셰자데 압뒬멜렉, 파트마 술탄, 윔뮈귈쉼 술탄, 에미네 술탄, 라비아 술탄, 하비베 술탄, 제이넵 술탄, 쥐베이데 술탄, 에스마 술탄, 하티제 술탄, 루키예 술탄, 살리하 술탄, 아티케 술탄, 레이한 술탄, 에시메 술탄, 페르다네 술탄, 나지페 술탄, 나일레 술탄, 아이셰 술탄, 에메툴라 술탄, 윔뮈셀레메 술탄, 에미네 술탄, 루키예 술탄, 제이넵 술탄, 사비하 술탄 | ||
배우자 | 미흐리샤흐 술탄 (출신: 조지아[4]) | ||
미흐리샤흐 카든 (출신: 불명) | |||
아딜샤흐 카든 (출신: 불명) | |||
아이뉠하야트 카든 (출신: 불명) | |||
리파트 카든 (출신: 불명) | |||
파트마 페히메 하늠 (출신: 불명) | |||
자녀 | 셀림 3세, 셰자데 메흐메트, 하티제 술탄, 샤 술탄, 파트마술탄, 베이한 술탄, 파트마 술탄, 히베툴라 술탄 | ||
종교 | 이슬람 (수니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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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만 제국의 26대 술탄이자 20대 파디샤.치세 전반에는 평화 정책과 재정 절감으로 제국의 안정을 가져왔다. 하지만 유능한 대재상인 코자 라그프 파샤가 사망한 후 고집을 부려 러시아 제국과의 전쟁에 나섰다가 체슈메 해전 등 패전을 거듭하였다.
또한 그리스, 레바논, 팔레스타인, 이집트 등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이들이 완전히 진압되거나 전쟁이 매듭지어지기 전인 1774년 초엽 사망하였다. 18세기 오스만 제국의 중흥은 그의 치세에서 종식되었다.
2. 생애
2.1. 어린시절
1717년에 아흐메트 3세의 차남으로, 18세기의 여느 황제들처럼 에디르네에서 태어났다. 다만 1730년의 쿠데타로 부황이 폐위된 후 이복형 쉴레이만과 함께 톱카프 궁전에 유폐되었다.다만 1754년 자녀가 없는 사촌 오스만 3세가 즉위하고, 1756년 형 메흐메트가 사망한 후 무스타파는 1순위 계승 후보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오스만 3세가 사망하자 즉위하였다.
2.2. 재위
즉위 직후부터 무스타파 3세는 민심을 얻기 위해 법치와 부패 척결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엄격한 재정 관리를 통해 느슨해진 통치 체계를 정비하였다. 그외에 통화 체계의 재정립, 수도교 보수, 곡물 창고 건설 등에 착수하였고 종종 행차하여 법이 제대로 시행되는지 여부를 살폈다. 대외관계에 있어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2세를 존경하던 무스타파는 7년 전쟁이 한창이던 1761년 그와 평화 조약을 맺었고, 1763년에는 처음으로 외교 사절을 교환하였다. 이후 프로이센군 장교들이 파견되어 오스만 제국군의 근대화를 도왔다.이렇듯 무스타파 3세 치세 초반은 제한적인 개혁과 평화로 인해 재정 흑자를 이룩하는 등 호시절이었다. 다만 이러한 성과는 오스만 3세때부터 대재상을 역임하였고, 무스타파의 매부이자 친구였던 코자 라그프 파샤의 역할이 컸다. 1763년, 7년 전쟁 동안 중립을 지켜낸 코자 라그프 파샤가 사망하자 문학에 조예가 있던 무스타파는 조의문을 지어 애도를 표하였다.
후임 대재상인 무흐신자데 메흐메트 파샤 역시 평화 노선을 지속하였으나 무스타파는 동유럽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해 가던 러시아 제국에 대한 전의를 다졌고, 이에 1768년 메흐메트 파샤가 사임하였다.
2.3. 러시아와의 전쟁
나는 저 불신자들을 쳐부술 방편을 찾을 것이다.
ㅡ 무스타파 3세, 러시아에 대해 되뇌이며그리고 방법은 없었다고 한다
ㅡ 무스타파 3세, 러시아에 대해 되뇌이며
7년 전쟁 후의 유럽. 아조프를 내어주긴 했지만 여전히 흑해는 오스만의 내해였고 제국은 여전히 유럽의 주요 강대국 중 하나였다.
18세기 러시아는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보호국화하였고, 1760년대 들어 영토를 확장할 야욕을 드러내었다. 1768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러시아 대사 레프닌의 강권으로 러시아 제국군의 바르샤바 주둔 및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체계와 가톨릭 수위권을 위협하는 영구 조약이 체결되자 폴란드 귀족들은 바르 연맹을 체결해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오스만 국경과 가까운 바르를 중심으로 저항하였는데 압도적인 병력 차이로 패배하였고, 6월 20일 바르가 함락되자 반란의 잔존 세력들은 오스만 영토로 도피하였다. 카자크 중심의 러시아군이 이들을 추격하던 도중 국경을 방위하던 예니체리 병력과 충돌하였다. 한편 카자크 부대가 발타에서 학살을 자행한 보고를 접한 무스타파는 분노하였고, 폴란드와 프랑스 대사의 설득에 따라 10월 6일 러시아 대사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일행을 감금하고 러시아에 선전포고하였다. 이로써 29년만에 러시아와의 전쟁이 재개되었다.
개전 직후 무장한 모습의 초상화를 그리게 한 예카테리나 2세와 무스타파 3세 |
7년 전쟁과 폴란드의 봉기 등을 거치며 국력을 소모한 러시아와 20여년간 평화를 누린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은 (무스타파의 예상대로) 후자의 우세로 시작되었다. 오스만 제국 해군은 신설된 러시아 제국 해군의 흑해함대를 압도하였고, 러시아 측의 보급난을 초래하였다. 다만 오스만의 대재상 메흐메트 에민 파샤는 군사적으로 무능하였고, 제국 역시 장기전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으며 전선에 중추적인 크림 칸국은 러시아의 지속적인 습격에 쇠약해져 있었다. 1769년 1월, 크림 칸 크름 기라이는 국경을 넘어 우크라이나 중부의 노보 세르비아를 습격하고 다수의 포로와 귀환하였다. 이에 예카테리나 2세는 전 병력을 우크라이나에 집중시킨 후 9월 17일 몰다비아 공국을 침공하였다.
오스만 제국이 도나우 강 이북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 1770년의 카훌 전투
호틴 성채의 예니체리 부대는 필사적으로 맞섰으나 다른 수비대가 도주하는 바람에 함락되었고, 10월 7일 몰다비아 공국의 수도 이아시가 함락되었다. 러시아 구대는 지체하지 않고 왈라키아 공국으로 진격, 11월 7일 수도 부쿠레슈티를 점령하는 등 단 두달만에 도나우 강 이북을 석권하였다. 비슷한 시기 러시아군은 조지아에 나타났고, 현지인들의 지원과 함께 오스만 제국군을 격파하였다. 1770년 여름, 반격에 나선 메흐메트 에민 파샤는 몰다비아 수복을 시도했으나 8월 1일 카훌에서 대패하였고 도주 중 병력 1/3이 도나우 강에서 익사하는 수모를 겪었다.
2.3.1. 오를로프 반란과 체슈메 해전
그리스 민족주의와 오를로프 반란, 러시아 해군의 이동과 오스만 반격
러시아 군이 압도한 육상 전투와 달리 흑해는 여전히 오스만 해군이 주도권을 지녔다. 따라서 1770년 오스만 해군을 흑해에서 끌어내기 위해 러시아 해군의 최정예인 발트함대가 알렉세이 그리고르예비치 오를로프 제독의 지휘 하에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 사상 처음으로 지중해에 진입하였다. 그해 봄 러시아 함대의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단 당도와 함께 그리스에선 반오스만 봉기가 일어났고, 제독의 이름을 따라 오를로프 반란이라 불린다. 반군은 미스트라, 나바리노를 점령하였고 크레타와 스미르나에서도 봉기가 일어나 현지 무슬림들을 학살하였다. 다만 러시아 해군은 6월 초엽 떠났고, 홀로 남겨진 반군은 오스만 대군에 의해 손쉽게 진압되었다. 그 후에도 알바니아 용병대는 몇년간 그리스 남부에 주둔하며 무슬림 학살에 대한 보복으로 정교도들을 약탈하고 살해 혹은 노예화하였다.[5] 비록 자유를 쟁취하는 데에는 실패했으나 오를로프 반란은 오스만 제국의 전쟁 집중력을 현저히 약화시켰다.
18세기 초반만 해도 베네치아 공화국과 호각을 다투던 오스만 해군의 몰락을 상징하는 체슈메 해전
한편 그리스를 떠난 12척의 러시아 함대는 6월 24일 히오스 섬 부근에서 벌어진 체슈메 해전에서 화공을 통해 22척의 오스만 함대를 대파하였다. 1천 미만의 사상자를 낸 러시아 측에 비해 오스만 측의 사상자는 1만을 상회하였고 오스만군의 사기는 저하되었다. 그후 러시아 해군은 베이루트 등 레반트 해안의 도시들을 폭격 혹은 습격하며 현지 군벌들의 반란을 지원하였다. ( 베이루트 문서 참고). 비록 이집트를 장악한 알리 베이의 반란은 1773년, 팔레스타인의 자히르 알 우마르의 반란은 1775년에 진압되었지만 레반트 해안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침공과 메흐메트 알리의 시대까지 오스만 제국에 명목상으로만 복속한 상태로, 현지 맘루크들의 수중에 남아있었다. 한편 캅카스 전선에서는 1771년 바투미 북쪽 포티에 대한 러시아-조지아 연합군의 포위는 실패하였고, 이듬해 봄 러시아군은 캅카스에서 철수하였다.
2.3.2. 협상과 죽음
러시아 함대의 레반트 개입. 1773년 말 ~ 1774년 초까지 러시아 소속 알바니아 용병대가 베이루트에 주둔, 예카테리나 2세의 초상화를 걸어두었다.
전쟁이 지속됨에 따라 지중해에서 러시아 영향력의 확대를 우려한 영국은 러시아 해군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였고, 다르다넬스 해협에 대한 오스만 측의 요새화와 다른 유럽 국가들의 견제로 러시아군은 코스탄티니예를 노리지 못하였다.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는 즉각 중재에 나섰고, 1771년 7월 6일의 협정으로 오스만 조정은 오스트리아에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국경 지대에 대한 이권을 넘겨주었다. 한편 전쟁의 확대를 우려한 예카테리나 2세 역시 1772년 프리드리히 2세가 제안한 폴란드 분할에 합의하며 열강들을 자극하지 않으려 하였다. 같은해 5월 30일 오스만-러시아 휴전이 성사되었고, 8월 8일부터 협상이 시작되었다. 비록 크림 반도를 놓고 협상이 틀어졌으나 휴전 자체는 1773년 3월 20일까지 연장되었다. 오스만 측은 레반트의 반란과 페르시아의 습격, 러시아 측은 아돌프 프레드리크 왕이 죽고 맏아들 구스타브 3세가 즉위하면서 정권이 바뀐 스웨덴의 침공을 대비하느라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휴전기 동안 무스타파는 군제 개혁에 착수, 프랑스 장교 프랑수아 바롱 드 토트를 초청해 포병대를 훈련시켰다. 1773년에는 체슈메 해전의 패배로 여실히 드러난 해군의 후진성을 보완하기 위해서 해군 공학 학교를 세웠다. 다만 러시아 해군이 휴전을 어기고 베이루트를 점령하는 등 악재가 지속되는 전황 속에서 협상이 지지부진 이어지던 1774년 1월, 무스타파 3세는 톱카프 궁전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사후 그는 자신이 세운 랄렐리 모스크(Lâleli Camii)에 안장되었고, 동생 압뒬하미트 1세가 제위를 계승하였다.
3. 건축
1760-63년 오스만 바로크 양식으로 건설된 건설된 랄렐리 모스크
1769년 에미뉘뇌 구역에 세워진 제이넵 술탄 (무스타파의 누이) 모스크. 비잔틴 성당 양식의 벽돌 외벽이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