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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6 17:00:07

로마인 이야기/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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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설명
2.1. 개괄2.2. 역사관2.3. 편견
2.3.1. 반(反) 동로마 제국2.3.2. 반그리스인
2.3.2.1. 헬레니즘 세계에 대한 왜곡, 폄하
2.3.3. 반일신교2.3.4. 여성 군주에 대한 혹평2.3.5. 반페르시아
3. 전반적 문제점
3.1. 공화정기와 원수정기 로마군 미화 및 왜곡3.2. 노예제도3.3. 라틴어3.4. 리메스3.5. 후기 로마 제국 군제에 대한 전반적인 무지와 무관심3.6. 객관성 문제
4. 권별 문제점 정리
4.1. 1권4.2. 2권4.3. 3권4.4. 4~5권4.5. 6권4.6. 7권4.7. 8권4.8. 9권4.9. 10권4.10. 11권4.11. 12권4.12. 13권4.13. 14권4.14. 15권

1. 개요

시오노 나나미의 저서인 로마인 이야기에 대한 비판을 다루는 문서.

시오노 나나미의 주장에 논란이 많은 이유는 그녀가 전문 역사가가 아니어서도 아니고,[1] 당시까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몇몇 가설을 반박해서도 아니다. 역사적 주장에는 논리와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료가 요구되는데, 그녀의 주장에는 이런 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비판 문서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여러 비판과 논의가 있어야 역사학이라는 학문이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논란이 많은 건 서술된 내용에 오류와 왜곡이 많은 게 이유며, 본 문서에서는 특히 그녀의 대표적인 저서 로마인 이야기에서 다루는 주장에 대한 비판을 다룬다.

2. 설명

2.1. 개괄

우선 감안할 점은, 로마인 이야기가 15년에 걸쳐 매년 1권씩 출간된 작품인 만큼 출간 이후 나온 연구 결과는 거의 반영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이 단점은 학계에서도 다소 연구 진도가 늦은 편인 3세기 이후 로마 제국 역사를 다룬 12권 이후에 결정적으로 부각된다. 참고로, 늦는 편이라는 학계에서도 이미 3~11세기의 로마 - 동로마로 이어지는 소위 고대 - 중세사를 객관적으로 재평가하는 작업은 이미 1990년대에 끝난 상태며, 국내 학계에서도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정리되었다.

시오노 나나미가 이런 성과들을 수용하지 않는 이유는 그 내용이 그녀 특유의 반기독교, 유신론적 사관에 대한 극복으로 집중되어, 그리스도교 발호로 로마 제국이 망했다는 기존 주장과 배치되는 데에 있다. 아래 상세 항목에서도 열거되는 반일신교-친다신교, 반 동로마, 과도한 카이사르 옹호적 관점은 그 자체로 로마인 이야기 전체에 걸쳐 정상적인 역사 해석을 심히 방해한다.

하지만 작중 내내 외치는 정체 불명의 '로마다운 로마'란 말이 더욱 심각하다. 대체 2,000년 넘는 로마의 역사에서 어느 시대 로마가 '로마다운 로마'란 말인가?[2] 특히 로마는 시대에 맞는 정치 개혁과 군제 운용의 변화를 꾀한 융통성 있는 나라다. 이에 대해 로마인 이야기가 말하는 답은 작가 자신이 애호하는 특정 시대 로마만 로마라는 것인데, 이는 문학 작품이라면 적합할지 몰라도 역사서가 갖는 객관성으로는 전혀 맞지 않는 기준이며, 문학 작품 기준으로 볼 때도 로마에 살았을 로마인들이 그렇게 생각했을 가능성은 0에 가깝다. 심지어 14권에서는 율리아누스 황제의 일부 정책을 놓고 "율리아누스는 로마 문명을 알기나 하는지 의심스럽다." 비난하는데, 그 시대를 살았던 로마인, 그것도 황제에게 로마 문명을 알기나 하냐고 쏘아붙이다니 참으로 치기 어린 소리다.

이에 대해 로마인 이야기를 옹호하는 시각에 따르면 1. 작품 내에서 작가는 자신의 가설을 단정한 경우가 없고, 2. 다른 사람들의 역사관 역시 소개했으며 판단은 전적으로 독자에게 맡겼다고 말한다.

그러나 1. 완전히 틀린 사실을 적었거나, 2. 부정적인 부분만 부각하거나, 3. 다른 사람들의 역사관에서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를 거의 생략해서 결국 독자를 시오노 나나미 자신이 생각하는 결론에 이르게끔 유도한다. 이런 행태는 역사 교양서로서 치명적인 결함이 분명하고, 문학 작품으로 봐도 수준이 높다고 보기 어렵다. 교양서로서 올바른 방법은 학계에서 마찰이 있는 주장에 대해서는 양자의 근거를 동등하게 나열하는 것이다.

그나마 반일신교, 카이사르 애호에 대한 게 영향이 거의 없는 전기 로마사(1, 2권)는 상황이 상대적으로 낫다고 할 수 있으나, 이 문제가 부각되기 시작한 이후에는 갈수록 역사서라고 보기 어려워진다. 아무리 학술서로서, 객관적인 역사서로서 로마인 이야기를 저술한 게 아니더라도, 14권 이후로 가면 문학 작품을 평가하는 기준에서도 높이 봐주기 어려울 지경으로 질이 떨어져 간다. 이는 시오노 나나미의 건강이 하필 14권을 집필할 즈음에 급격히 나빠진 것에도 이유가 있으나, 설령 건강이 좋았더라도 그 앞권들에서 보인 경향을 볼 땐, 앞서 든 문제들이 나아졌을진 의문이다.

2.2. 역사관

로마인 이야기의 기저에 깔린 성향은 작은 정부 - 감세를 비롯한 보수, 복고주의며 정치적으로는 제국주의를 옹호한다.[3] 또한 철인 엘리트의 시혜주의에 대한 긍정 내지 환상을 보이는 것은 전형적인 일본 보수 지식인층의 정치관과 상통한다. 대표적으로 일본의 전통 종교와 모순되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적대적인 성향이나, 민주주의를 중우정치로 보는 철인 정치관이라거나. 철인정치를 주장하면서도 무솔리니식의 파시즘은 희화화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사실 히틀러와 협력하기 직전까지의 무솔리니는 시오노 나나미의 성향에 가장 부합한다.

아울러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고대-중세의 전이 단계를 단순히 로마적 정신의 쇠퇴로 인한 퇴화로 보고 있지만, 사실은 생산력이 증대되면서 노예 노동에 의존하는 고대 시스템으로는 더이상 국가 유지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문화적으로 중세가 퇴화했다고는 하지만, 이는 전적으로 야만족인 게르만족이 점령한 서유럽에 한정된 것이었으며 로마 제국의 법통을 계승한 동로마나 각지의 고대 문명을 자양분삼아 새로운 문명을 개척한 이슬람은 고대보다 훨씬 더 번영된 사회를 누리고 있었음을 감안하면 중세가 고대보다 퇴화했다고 보기 어렵다. 서유럽이 곧 세계는 아니다. 그리고 서유럽도 중세의 전성기인 12-13세기면 이미 후진적이라고 보기 어려운 문화적 정교함을 보인다. 유럽 곳곳에 있는 고딕 건축물들과 그 시대의 세공품들을 보라. 로마인 이야기는 이 점을 간과한다.

2.3. 편견

2.3.1. 반(反) 동로마 제국

로마가 사실상 세계의 수도라는 기능을 상실한 이후 동로마를 중점적으로 다루게 되는 후반권에서 로마인 이야기가 다루는 주요 주제는 거의 동로마 제국에 대한 비난이다. 주로 로마 전성기의 황제들 및 정치 상태와 비교하며 동로마의 통치자를 제대로 된 국가원수가 아니라고 단죄하는 식인데 이 비난의 이유가 별 근거가 없다. 대부분 동로마의 통치자가 그리스도교를 맹목적으로 믿으므로 고대의 여러 교양을 익히지 않은 무식한 중세의 군주라는 편견이 기저에 깔려 있으며, 또한 로마 제국 전성기의 풍부한 가용 인적, 물적 자원 상황과, 한계 수익성이 떨어진 후대의 체제를 아무런 가감없이 비교하는 것은 형평성에도 어긋난다.

또한 사실의 왜곡도 두드러진다. 예를 들면 동로마 최고의 통치자로 일컬어지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법학, 음악, 신학, 역사학 등 여러 학문에 두루 능통한 당대 최고의 교양인이자 동로마 제국의 전성기를 연 인물이었음에도 시오노는 15권에서 별 교양도 없는데[4] 불가사의한 업적을 거둔 군주로 폄하했다. 비록 말년에 오점이 있으며[5], 임페라토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직접 최고사령관으로 전장에 나선 적은 없었지만[6], 통치자로서의 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시종 취하는 왜곡된 해석에 합당할 만큼 못난 군주가 아니다. 애초에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를 그 자리에 임명하고, 외교적으로 전쟁의 명분을 만들며 적국에 내분을 일으키고, 20여 년 동안 지원을 퍼부은 사람이 누구였겠는가?[7]

로마인 이야기 완결 이후에 출판된 시오노의 저서《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에서는, 로마 이후에 지중해권에 유통된 금화들을 나열하면서 이슬람의 디나르 금화나 베네치아, 피렌체의 금화는 소개하면서도 이들보다 일찍 유통되어 근동권의 기축 통화 역할을 했던 동로마의 솔리두스 금화는 아예 언급조차 없다. 그나마 로마인 이야기 13권에서 콘스탄티누스의 솔리두스 도입을 언급하고[8], 그 이전에 출판된 저서《르네상스를 만든 사람들》에서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 기축 통화 도입 시도를 설명하면서 솔리두스와 디나르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그러나 시오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솔리두스 금화 도입에 대해 군인/공무원/관료/군납업자와 일반인 사이의 빈부 격차를 악화시켰다며 좋게 평가하지 않았고, 솔리두스(노미스마)금화가 11세기까지 동로마에서 기축통화로 계속 쓰인 것은 언급하지 않았다. 또한 《 십자군 이야기》에서는 “고대 로마 제국과는 달리 강력한 상비군의 전통이 없는 비잔틴 제국은 용병을 쓰는 데 익숙했다.”(1권 59쪽)는 글이 있다. 하지만 실제는 다르다.
알렉시우스 콤네누스 치하에서, 비잔틴군의 총수는 70,000 명에 달했으며, 그 가운데 20,000 명은 상비군이었다. (Under Alexius Comnenus the total strength of Byzantine army was about 70,000 men, with about 20,000 of that total in the standing army.) - Men at arms Armies of the Crusades 17page

동로마 제국은 용병을 쓰는 데 익숙했지만 한편으로는 테마 제도를 바탕으로 하여 오랫동안 거대한 상비군 조직을 갖추고 있었으며 이는 십자군 시대 당시에도 유지되고 있었다. 물론 테마 제도의 근간인 둔전병들이 완전한 상비군은 아니었고, 각 군관구의 중심부에 위치한 소수 부대와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변에 주둔한 타그마들만이 상비군이라고 할 수 있기에 고대 로마에 비해서는 상당히 축소되고 비중이 떨어진 건 사실이다. 이는 나라 규모에 비해[9] 너무나도 다종다양한 적들과 경계를 마주하고 있기에[10] 그 적들을 한꺼번에 다 상대할 병력과 병종을 구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국의 상비군 조직은 7세기 이후로 꾸준히 확충되었으며 적어도 10세기~11세기 중반까지, 즉 십자군 전쟁 직전까지만 해도 제국은 유럽과 이슬람 세계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상비군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역사학자인 워렌 트레드골드는 바실리우스 2세 제위 시점의 타그마를 약 42,000명으로 추산하였으며, 콘스탄티노스 9세는 튀르크인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6만 명에 달하는 기병을 제국 동부에 배치시키기도 했다.[11]. 이사키오스 1세의 쿠데타로 붕괴된 군대가 만지케르트 전투와 그 여파로 완전히 무너지기 했으나, 당시 시점에서조차 이슬람 아랍 제국을 제외하면, 근 오백 년 동안 그리고 유럽에 한정하면 가장 강력한 상비군 조직을 갖춘 국가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용병 중에도 거진 상비군화된 부류들이 있었다. 예컨대 바랑인 친위대는 용병이지만 가장 믿을만한 상비군이기도 했다.

즉 동로마 제국에는 국민군이 부재했던 것도 아니며 상비군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1081년 시점에 연이은 내전과 디라히온 전투의 패배로 용병의 비율이 높아져 있었을 수는 있으나, 강력한 상비군 전통이 없다고 한 시오노 나나미의 서술은 동로마 역사와 문화에 대한 비논리적인 혐오에 따른 무지와 동로마는 무조건 로마 제국과는 다르다고 여기는 편견의 산물이다.[12]

2.3.2. 반그리스인

하지만 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티움을 도읍으로 정했기 때문에 상당히 난처하고 개탄스러운 문제를 떠안게 되었다. 그것은 지칠 줄 모르고 논쟁을 좋아하는 그리스인이라는 인종을 제국의 중추에 앉히는 체제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로마인이 '말보다 실행'이라면 그리스인은 '실행보다 말'이었다. - 로마인 이야기 13권 268~269페이지에서.

로마인 이야기 전반에 걸쳐 작가는 " 그리스인은 창의적이고 진취적 성향이 있다"고 묘사하기도 하지만 동로마 제국에 대한 비판이 강해지는 것과 궤를 같이하여 제국의 중핵을 담당하기 시작한 그리스인에 대한 비난은 거의 인종차별 직전의 영역에 도달하게 된다. 한두 문장 정도로만 국민성의 문제를 언급하는 게 아니라, 거의 모든 사회 문제의 만악의 근원이 그리스인의 국민성 때문이라 주장하는 수준이라서 이 책을 그리스어로 번역해서 내놓는다면 당장 그리스에서 일본에 항의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다.

이는 그리스인에 대한 작가의 편견으로밖에 볼 수 없는데, 후기 로마를 다룬 13권~15권에서 서로마 지역이 쇠퇴하고 멸망했어도 '오늘날의 이탈리아인이 로마인의 후손이라니 믿기지 않는다'라는 식으로 쉴드를 치기 때문이다. 시오노의 논리를 따르면, '오늘날의 그리스인이 고대 아테네인들의 후손이라니 믿기지 않는다'라는 식의 반론이 가능하다.
더구나 동로마인들에게서 로마라는 보편제국이 아닌 그리스인으로서의[13] 일종의 민족의식 비슷한 게 다시 분출한 것은, 도저히 동로마인들 스스로도 로마라는 이름을 감당하기엔 자신들의 처지가 너무 부끄럽다고 할 정도로 쇠퇴한 12~13세기 이후였다.
2.3.2.1. 헬레니즘 세계에 대한 왜곡, 폄하
그리스인이 오리엔트인을 지배한 이집트와 시리아에서는 백성들이 지배받는 데 워낙 익숙해서 문제가 적었지만, 지배받는 데 익숙지 않은 그리스인을 지배하게 된 마케도니아 왕국에서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 늘 긴장 관계가 존재했다. 그리스인이야말로 100이 모이면 100가지 의견이 나온다는 민족이 아니던가 - 로마인 이야기 2권 354페이지에서.
그리스인들에게는 거의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타민족인 로마인이 위기에 처해 있는 그리스의 독립과 자유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비용으로 자신의 피까지 흘려가며 싸우고, 게다가 이긴 뒤에 군대를 철수시킨다는 사실을 도무지 밑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 로마인 이야기 2권 359페이지에서.

반그리스인 관점의 연장선으로 못지 않게 문제로 지적받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반그리스인 정서 안에 헬레니즘 세계와 레반트 및 아나톨리아 일대 그리스인, 원주민들에 대한 왜곡을 심어 놓고 로마가 마치 좋은 의도만으로 지중해 동부에서 전쟁을 치렀다고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그러면서 로마의 행동이 온건적 제국주의 관점에서 상당히 세련되고, 민심을 얻었음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2권 후반부터 언급되는 로마의 지중해 동부 장악 과정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서술 내용을 살펴보면 로마가 강대국이 된 이후, 어쩔 수 없이 강대국이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의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 로마사 연구가 최근 20~30년 사이 급격히 변화하는 흐름 속에서, 설령 정통 사관에 입각한 서양 로마사 권위자들도 이 지겅으로까지 포장하지는 않는다. 작가의 주장처럼 그리스인들이 외세를 끌어들였고 로마는 그리스 문화에 열중한 풍조가 나타났다고 해도, 로마사 연구를 하는 서양 학자들이 말하듯 로마는 책에서 말하는 주장처럼 온건하고 세련된 제국주의 관점에서 악당을 혼내주는 정복자, 사심 없이 그저 그리스문화를 동경하면서 지중해 평화를 위해 나선 강대국이 아니었다.

로마사 기본서 중 하나를 만든 하이켈하임의 경우, 로마가 헬레니즘 세계에서 전쟁을 벌이며 지중해 동부에 힘을 과시한 것에 대해, "이 국가들은 궁극적으로 크든 작든 모든 나라들이 로마의 지배에 종속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고 서두부터 말하면서, 로마가 작가의 주장처럼 정의의 사도가 되면서 그리스인들을 돕고 지배자인 마케도니아 안티고노스 왕조를 혼내줬다고 언급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는 디아도코이 전쟁 등의 세력 균형 과정과 로마의 개입 등이 연관되어 있던 부분이 있다고 해도, 로마가 경제적 동기와 팽창에 대한 야심, 스키피오 가문 등 당시 원로원 안의 명망가들로 대표되는 군공에 대한 야망 등도 컸다고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이는 다른 서양학자들의 의견도 비슷한데, 그들 역시 로마의 헬레니즘 세계 장악 과정이 현대 제국주의 관점과 결이 다르다고 말할 수도 없지만, 경제적 동기와 원로원 내 야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작가의 경우에는, 이런 부분보다는 마케도니아의 경우, 그리스인들의 자주 독립 정신이나 외세 의존 등을 언급하면서 헬레니즘 세계 내 오리엔트인들의 피지배 의식 등도 언급하고 있다.

2.3.3. 반일신교

또한 로마인 이야기 전반에 걸쳐 작가는 그리스도교, 유대교, 그 외 일신교로 간주되는 종교에 대한 근거없는 비난을 아끼지 않는다. 그리스도교가 주류를 이루는 로마 제국 말기를 다루는 후반부에는 한 페이지에 최소 한 번 이상은 그리스도교 비판이 들어갈 정도.[14]

심지어 페르시아 제국 그리스 침공한 것까지 일신교인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페르시아 제국의 다신교인 그리스에 대한 공격이라는 언급을 하기도 한다.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공격한 것은 종교에도 원인이 있다는 주장인데, 이 전쟁이 종교가 원인이었다는 당대 사료는 전혀 없으며 당사자인 그리스인들조차 종교가 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이 전쟁은 페르시아인들의 그리스에 대한 팽창 목적의 침략 전쟁일 뿐이다.

이처럼 사료적 근거를 찾을 수 없을 뿐더러, 추론이라고 가정해도,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가 제국 내의 다른 민족과 종교에 대해서 대단히 관용적인 태도를 유지했던 점을 보면 이런 추론은 합리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 종교 꼴통인 유대인들조차도 아케메네스 왕조의 관용 정책을 시작한 키루스 2세를 다른 나라의 왕에게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극찬하여 칭송했을 정도이다. 또한 조로아스터교 자체가 아후라 마즈다에게 따르는 일종의 '부속신'을 인정하여 그리스도교, 이슬람과 같이 유일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신격을 배제하는 철저한 일신교와는 차별성이 있었으므로 동일시하는 것 자체가 오류이다.

이러한 반일신교적 역사관은 비단 시오노뿐 아니라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에서 이미 비롯되었다. 그는 로마 제국의 쇠망의 주요 원인으로 그리스도교의 흥기를 꼽았으며 데이비드 흄도 <일신교와 다신교에 관하여>라는 에세이에서 비슷한 점을 주목한다. 이로 미루어 시오노 나나미의 일신교에 대한 비판적 견해는 18세기 계몽주의 전반의 역사관이 투영된 것일 수도 있다는 분석도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통일된 교리가 없던 다신교가 교리의 체계화와 철학적 복잡화를 통해 고등종교로 진화하는 일은 자주 있던 일이다. 사실 모든 고대 종교는 다신교적이지만, 실제 신앙 생활에서 한 신관이 말 그대로 여러 신을 모시는 사례는 별로 없고, 이런 경우라도 중심이 되는 특정한 주신은 존재하는 것이 보통이다. 교리와 철학의 심화 과정에서 이러한 '주신'이 강조되면서 다른 세력이 약한 신들은 삭제되거나 권속으로 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중세로 접어들면서 이런 고등종교가 국가이념으로 도입되는 일은 보편적 현상이다.

이 고등종교가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같은 일신교가 될 수도 있고 힌두교와 같은 다신교, 또는 구분하기 곤란한 유교 불교도 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역사 발전 과정에서 시오노 나나미가 그 미덕을 설파하는 로마 신화나 일본식 신토는 그 한계가 명확하다는 점이다. 시오노 나나미가 이상적으로 보는 일본식 신토조차 고대국가 형성에서 왜국이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사그라들었고,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신토 세력은 그저 불교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기번이나 시오노 나나미의 주장은 결과와 원인을 혼동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반일신교 감정으로 인한 해독은 후기 로마사 해석에 가면 더욱 분명해진다. 이건 로마사를 비 그리스도교적 사관에서 제대로 해석한 게 아니라, 그냥 틀린 소리 한 것이다. 예를 들어 로마 후기에 유행했던 미트라교에 대한 서술도 엉터리이고[15], 또한 그리스도교에 대한 증오가 너무 지나친 나머지 그리스도교 관련 내용을 모조리 삭제하기도 하며[16] 로마 후기의 여러 교리 논쟁을 다 부질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17] 그런데 이러한 교리 논쟁들은 단순한 교리 문제가 아니라 교리를 지지하는 종족이나 지방들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이렇게 가볍게 서술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시오노 나나미가 중요하지 않다고 봐서 생략했다기보다는 아예 무지했기 때문에 생략했다고 보는 게 맞다.

아울러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 유대교가 포교를 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라고 했지만, 이는 그녀가 유대교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를 보여줄 뿐이다. 유대교도 나름대로 포교에 열심이었고,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모압족과 암몬족 같은 부족들이 신약성경 시대로 가면 사라지는 것도 유대인들이 그들을 정복한 다음 유대교로 개종할 것을 강요하여 유대인에 흡수되어 사라졌기 때문이다. 또한 튀르크족이 세운 하자르 칸국 같은 경우는 9세기 중엽에 아예 유대교로 개종하여 국교로 삼기까지 했다.

2.3.4. 여성 군주에 대한 혹평

시오노 나나미는 여성 작가임에도 여성 군주를 혹평하는 경향이 있다. 이집트의 독립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 로마 장군들을 미모로 홀린 클레오파트라는 전통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지만, 시오노는 정반대로 혹평. 12권에서는 제노비아도 비판한다. 사실 클레오파트라와 제노비아만 대표적으로 거론되지만 시오노 나나미는 여자가 권력을 잡고 정치적인 행위를 하려고만 들면 대대적으로 포화를 쏴댄다. 예를 들면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라든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어머니 율리아 마미아라든지. 물론 그녀들의 잘못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긴 하지만 말이다. 반면 여성이 정치에 나서도 속된 말로 나대지 않거나 혹은 내조에만 전념하면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은근히 있다.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인 코르넬리아 아프리카나 라든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할머니 율리아 마이사를 묘사할 때 조금 그런 느낌이 있다.

당시 정치에 적극 참여한 여성들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주장은 사실이고, 또한 여성이 정치 및 사회에 본격 참여하기 시작한 것 자체가 인류 전체 역사에서 그리 시간이 길지 않다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고 해도, 시오노 나나미의 관점은 이런 것을 넘어서서 여자의 속성 자체가 정치하기엔 적합하지 않다는 식으로 은근히 몰아간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게다가 클레오파트라와 제노비아가 혹평받은 건 단순히 여성으로서 정치를 했다기보다는 감히 여자 주제에 대제국 로마에게 맞서려 하다니라는 식의 비논리적 감성이 은근히 깔려있다.[18]

2.3.5. 반페르시아

오리엔트 군주와 주민들은 반드시 강자에게 달라붙는다.
로마인이 생각하는 군주는 통치하는 사람이지만, 페르시아인이 생각하는 군주는 전쟁이나 사냥이나 잔치를 하는 사람이다.
샤푸르 1세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역사에서 역대 어느 왕보다 영웅시되는 군주로서, 오리엔트에서도 계몽 군주가 나오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인물이다. 학문과 예술을 깊이 이해하고, 기술의 중요성도 알고 있었다.[19]

시오노 나나미

페르시아가 처음 등장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와 페르시아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하면 거의 항상 위와 같이 '서방'과 '동방', 또는 ' 옥시덴트'와 '오리엔트'를 비교하며 페르시아를 깎아내리기에 여념이 없다.[20] 대체로 '서방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반면 힘의 논리가 모든 것을 결정짓는 동방은 전제군주의 지배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멍청한 놈들' 이라는 식인데, 가만히 읽다 보면 '페르시아는 로마에게 정복당하는 것이 마땅했으나, 현실적인 로마인들이 참고 넘어가 준 것' 이라는 생각까지 들게 된다. 이 점은 사실 시오노의 견해라기보다는 근대의 서방 역사관을 그대로 옮겨온 것 같기도 한데, 동양인인 시오노가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매우 괴이쩍은 일이다.일본인은 탈아입구해서 서양인이다.

물론 '서방'이 민주주의를 실시한 것은 사실이고 '동방'이 전제군주정을 실시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문화적 차이로 접근할 일이지 단순히 힘의 논리로 보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다. 물론 '그냥 다를 뿐이다' 라는 식의 말도 쓰지만, 대충 읽어보기만 해도 '그냥 다를 뿐' 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여담으로 근동 군주국의 군주들이 벌인 "사냥이나 잔치"는 결국 로마의 " 빵과 서커스"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인기 정책이다. 이때의 사냥은 단순한 군주의 유흥거리라기보다는 정기 군사 훈련으로서의 면모도 갖추고 있었으며, 잔치 또한 사치라기보다는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는 귀족들에 대한 유화책으로 보아야 한다.

3. 전반적 문제점

3.1. 공화정기와 원수정기 로마군 미화 및 왜곡

공화정기 로마군과 원수정기 로마군을 기술하는데 있어서 고의적으로 로마군의 패배, 좋지 못했던 대우 등을 기술하지 않거나 왜곡함으로써 마치 로마군이 근대 군대 시스템을 고대에 도입한 듯한 부대로 묘사하여 로마의 적들을 깎아내렸다. 대표적인 예가 2차 포에니 전쟁 이후부터 카이사르 등장 이전까지를 다룬 3권과 티베리우스 제임 이후 발발한 게르마니아와 판노니아 군단의 반란이다.

유구르타 전쟁과 킴브리 전쟁 시기 로마는 매우 고전했다. 특히 킴브리 전쟁 때는 이동중인 게르만족에게 정착할 곳을 주겠다고 속인 후 선빵을 쳤다가 노레이아 전투에서 1만명이 전사하는 패배를 당하는 등 계속해서 패전을 거듭했다. 위기감을 느낀 로마는 집정관 그나이우스 말리우스 막시무스와 전직 집정관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휘하에 무려 12개 군단을 편성하여 오늘날 오랑주인 아라우시오에서 대치하였다. 게르만족은 로마의 군세에 강화를 요청했다. 헌데 전직 집정관 카이피오는 자신이 신참인 집정관 그나이우스 막시무스의 지휘하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다 못해 막시무스가 협상에 성공하면 군사적 영광이 뺴앗길 것을 우려하여 선빵을 치는 미친 짓을 벌였다. 하지만 게르만족은 수적 우위로 기습해온 카이피오의 4만명의 로마군을 전멸시켜버렸다. 이에 기세가 오르는 동시에 로마의 선빵으로 공격의 명분을 가지게 된 게르만족은 즉시 막시무스를 공격하였고 막시무스의 군단들 역시 참패를 면치 못했다. 이때 무려 108년도 전직 집정관이 포로로 잡혀 처형당하는 굴욕을 당했다. 다행히 이 킴브리족의 목적은 정착지를 찾는 것이기 때문에 로마로 남하하지 않고 갈리아와 이베리아 방면으로 남하하면서 로마는 숨을 돌릴 수 있었고 유구르타 전쟁이 106년 마무리되면서 마리우스가 군제 개혁을 도입하고 103년 정착 실패로 전투력 손실을 겪은 킴브리족을 상대로 승리하면서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이 장대한 로마의 대삽질과 처참한 패배를 시오노 나나미는 기술하지 않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역사를 은밀히 왜곡하였다. 또한 유구르타 전쟁에서도 로마군은 개전 이후 초반 3년동안 유구르타에게 휘둘려 다니다가 109년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와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등장으로 승기를 잡았다. 109년 이전까지 3년간 로마군의 고전과 로마 귀족들의 부패는 상당히 심각하였는데 시오노 나나미는 그 전말을 모조리 서술하지 않거나 축소하였다.

또한 로마 시민 군단병과 동맹시 시민병들간의 차별 대우도 누락하였다. 폴리비우스의 히스토리아에 따르면 동맹시 군대에게는 식량만 주었고 봉급을 주지 않는 등 로마의 정복 전쟁에 동원되고 있던 동맹시 입장으로써는 자신들이 로마의 전쟁에 끌려다니면서 대우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으니 불만이 가득할 수밖에 없었다. 마리우스의 개혁 이후 로마군에 국가가 무기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처럼 서술하였지만 폴리비우스의 히스토리아에서 확인되듯이 명백히 봉급에서 공제를 하는 식으로 제공되었으니 전혀 공짜가 아니었다. 무기를 제공해주는 제조장에서도 상당히 부패 문제가 심각하였는데 카이사르의 장인 되시는 칼푸르니우스 피소를 키케로가 탄핵하며 당신이 제조장에 대해 잘 아는 건 당신 아버지가 동맹시 전쟁 때 제조장을 감독하며 많이 뜯어 먹어서다!라고 꼬집을 정도로 국가 무기 공급체계 역시 부패가 심각하였다.

원수정기 로마군에 대한 미화도 상당한데 원수정 시대에도 로마는 군단병들에게 갑옷, 무기, 침구 등을 봉급에서 공제하는 형태를 유지하였다. 심지어 시오노 나나미가 그토록 인용하던 소 플리니우스와 타키투스 모두 공통적으로 군단병들에게 해당 항목을 공제했다고 기술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이는 싸그리 무시하고 정부에서 군단병들에게 공짜로 제공해주었다며 원수정 시기 로마 군단을 봉급도 받으며 미래를 도모하고 퇴직금까지 받으며 보조병들에게는 시민이 되는 기회를 주는 로마의 이상형 집체적 결과인 것처럼 서술해두었다. 이에 맞추어 티베리우스 시기 판노니아 군단의 반란을 주도한 페르켄니우스의 주장을 근거없는 선동으로 치부하는 어처구니 없는 기술을 하였다. 하지만 실상은 시오노 나나미의 상상과 정반대였다. 원수정기 로마군은 공화정기와 똑같이 무기, 갑옷, 침구 등을 봉급에서 공제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배은숙 박사의 '로마군의 철제 무구 수급체계 변화'에는 이러한 로마군의 실상이 잘 들어나 있다. 해당 논문에서 인용한 소 플리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한 군단병의 무기 공제 비용이 무려 103 데나리우스인데 당시 군단병 연봉이 300 데나리우스였다. 또한 제국의 제정이 풍성하였던 안토니누스 치세에 갈리아 기병이 남긴 한 기록을 보면 돈이 부족하여 무기를 사기 위해 50 데나리우스를 동료들에게 빌렸다고 되어있다. 심지어 소 플리니우스가 활동했던 오현제 치세 당시 군단병 봉급은 도미티아누스가 300 데나리우스로 올려준 것이었으니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225 데나리우스는 무기를 비롯한 각종 비용을 연봉에서 공제받아야 했던 야전 군단병들의 입장에서는 거의 남는 게 없을 밖에 없었다. 괜히 페르켄니우스가 근위대와 비교한 게 아니다. 근위대는 로마에서 주둔하며 토가를 입고 황제가 출전하거나 황제가 근위대를 딸려보내는 전쟁이 아닌 이상 무기를 잡을 일이 없었으니 똑같이 공제를 받는다 하더라도 더 많이 저축할 수 있었고 근위대의 봉급은 야전 군단병들보다 훨씬 높았다. 이러니 야전에서 교전을 자주 치르는 군단병들은 당연히 공정과 대우의 문제에서 근위대와 비교하여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페르켄니우스의 주장에 동조한 것이다. 특히 아우구스투스 치세 말기와 티베리우스 즉위 직후 군단병들은 대 드루수스와 티베리우스부터 게르마니쿠스까지 이어진 기나긴 게르마니아 원정을 치르고 있었는데 군단병들은 전리품이라곤 노예밖에 없던 게르마니아에서 로마식 가도를 놓으랴 숲을 베어내라 진지 공사하랴 좀만 쉴라하면 습격해오는 게르만족을 상대하랴 온갖 고생이란 고생은 다하고 있었다.[21] 전투는 치룰때마다 무구는 훼손돼서 다시 사야되지, 원정 때마다 식량도 따로 사고 침구와 신발도 새로 장만하고 나면 고작 225 데나리우스를 받던 군단병들은 정말이지 남아나는 게 없었을 것이다.

필룸의 모양이 점점 단순화되고 뾰족해지며, 크기가 작아지기 시작했던 점, 로리카 세그먼타타가 점차 제작 빈도가 떨어졌던 것도 이런 현상과 관련이 있다.[22] 또한 3세기 위기를 기점으로 게르만족은 훈족의 공격으로 죽기살기로 남하하였으며 사회 체제, 경제력, 전술 모두 발전하여 카이사르가 때려잡고 다니던 시절의 그 게르만족이 아니었다. 갑주와 무기 모두 발전한 건 물론 지휘 체계와 전법도 발전한데다 그럼에도 여전히 로마군보다 딸리는 대규모 전술 운용 능력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회전을 회피하는 게릴라전 및 후방 침투로 대응하고 있었다. 게다가 또 설령 회전에서 어쩔 수 없이 붙더라도 그전같이 일방적인 교환비로 학살당하는 일은 없었다. 즉 로마군이 정신력이 없어져서 게르만족보다 약해진 게 아니었던 것이다. 이는 후술할 리메스와 후기 로마군에 대한 시오노 나나미의 이해 부족으로 연결되게 된다. 그런데도 시오노 나나미는 그걸 모르는 나머지 엉뚱한 곳에 책임을 전가하며 혼자 개탄하는 어이없는 태도로 서술을 하고 있다.

3.2. 노예제도

노예제도를 터무니없이 미화하였다. 마치 노예제가 현대의 고용-피고용이나 입양-피입양 관계처럼 묘사되었다. 로마 시대의 노예들은 근세기의 아프리카 흑인노예와 달리 가족과 같은 취급을 받았으며 주인이 죽을 땐 해방시켜주는 게 다반사라고 설명하였다.

하지만 로마 시대때엔 도시 노예, 교외 노예 둘로 나뉘었으며 시오노 나나미가 설명한 이런 좋은 대우를 받은 노예는 도시 노예 및 가족 노예에만 해당되었을 뿐이다. 이 도시 노예들은 특별한 기술을 가진 엘리트 노예들이나 혹은 로마인 가족과 같이 생활하면서 정든 노예들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인간적인 대우를 받을 수 있었고 이들의 상당수가 정치적 문제 등으로 숙청되는 주인과 운명을 함께한 것은 바로 이런 점에서 기인한 것이다. 근데 따지고보면 19세기 미국 흑인노예도 집안에서 주인과 생활하는 노예는 그럭저럭 대우를 받는 경우가 제법 있었다. 이런 경우 주인이 죽으면서 해방시켜주는 경우도 많았다. 고대 로마만이 특별한 게 아니라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이런 노예보다는 교외 노예가 훨씬 많았고 이들의 운명은 그냥 19세기 미국 흑인노예나 남아시아, 아프리카 등에 넘쳐나는 현대판 노예, 또는 섬노예와 비교하는 게 오히려 더 정확하다. 특히 광산에서 일하는 노예들의 운명은 상상 이상으로 열악했다. 게다가 소녀 노예들은 주인의 성욕의 해소 대상이 되기도 했다.[23] 심지어 로마 귀족들 중에서는 여자 노예들과의 성관계에서 얻은 자신의 아이들도 노예로 삼아서 노예를 사기 위해 일부러 시장에 갈 수고로움이 없어져서 다행이라는 말을 하는 자가 나올 만큼, 노예들의 인권 상태가 형편없었다.[24] 물론 그럼에도 로마인들 또한 사람인지라 자기 자식으로 태어난 노예에 대해서는 태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게 보다 보편적인 사례긴 했다. 노예에게서 태어난 자녀에게 어떻게든 해방노예 신분이라도 주고 싶어 발버둥친 로마인 아버지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중에는 걸핏하면 게기고 말도 안듣는 정실 자녀보다 훨씬 순종적인 노예 출신 자녀를 심하게 편애하는 사례도 적지 않아 가정 내의 새로운 분란을 일으키는 경우도 적지 않았으니 썩 좋은 경우는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엘리트 노예들 역시 그리스 귀족들이 해적에게 잡히거나 전쟁을 지휘하다가 져서 포로로 잡혀 팔리는 등 그야말로 재수 제대로 옴 붙은 경우가 꽤 많았는데 주인이 죽을 때 해방시켜준다는 것만 가지고 미화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 해방시킨 사례란 것들도 상당수는 주인의 자녀 출신인 노예들이었다.

또한 노예가 해방되었다고 해서 안심할 수만도 없는 게, 로마에서는 해방노예가 옛 주인의 은혜를 갚기 위해 옛 주인의 클리엔테스가 되어 그를 계속 지지하는 것을 사회적인 관행으로 여겼고 만일 이를 어기면 배은망덕한 자라고 욕을 먹었다. 그리고 해방 노예가 옛 주인한테 대놓고 반항하는 식으로 잘못을 저지르면, 옛 주인은 해방 노예의 해방을 취소하고 다시 노예로 되돌릴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경우도 있었다. 여기서 완벽하게 벗어나려면 로마 시민이 되어야 했는데,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속주민이 부족단위로 입대하는 보조부대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닌 가진 것 없는 해방노예가 시민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좋았다.

아울러 제정 초기까지는 로마의 가정에서 주인한테 노예가 반란을 일으켜 죽이면, 그 집안의 다른 노예들이 설령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해도 모두 죽임을 당할 만큼 가혹한 처벌도 있었는데, 그나마 이것까지는 너무 가혹하다 싶었는지 실제로는 법정에서 가담자만 처형하도록 판결하는 게 보통이었고, 오현제 시기에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3.3. 라틴어

라틴어를 독학으로 공부했다고 하는데 고대음과 중세음을 혼동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고대음인 "카이사르"와 중세 라틴어음인 "체자레"의 음가 차이를 단순히 학설의 차이라고 설명했는데, 이건 그녀가 라틴어 발음변천사나 고전 라틴어나 속라틴어의 차이를 잘 모른다는 이야기.

3.4. 리메스

12, 13, 14권에서 계속 반복되는 문제점. 4세기 이후 로마 제국이 선방어 전략을 포기하고 종심 방어 전략을 채택한 것은, 로마 제국 자체의 내적 역량이 약화된 탓도 있으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국경 지대 자체에서 가해지는 압력이 이전과는 달리 갈수록 가중되었기 때문이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것이 파밀리아라는 개념의 쇠퇴라고 설명하지만 근거없는 해석이다.

애초에 시오노 나나미가 주장한 '리메스', '안전한 국경'이라는 개념 자체가 역사적으로는 '얼마 안 되는 최전성기 동안' 로마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만 가능했던 이상적인 조건일 뿐이며, 이것을 전반적인 '로마의 대전략'이나 '제국 성립 기본 조건'으로 보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틀린 얘기다.

적이 국경에 들어온 다음에야 요격하는 체제가 문제라고 거듭 주장하지만, 그렇다면 3세기 때처럼 일단 방어선이 뚫리고 나면 적에게 강요하는 희생은 거의 없는 채 발칸 반도에서 뚫린 타격이 아테네까지 그대로 가는 상황은 정상적인가? 심지어 오현제 말기에조차 게르만족의 대규모 공세에 방어선이 뚫린 일이 있었을 정도다.

선방어를 하기 위해 로마군은 예방전쟁을 해서 국경을 지켰다는 근거를 들기도 하나 예방전쟁 역시 국가적으로 엄청난 물자가 투입되므로 단지 국경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이런 전쟁비용을 지출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오현제 시기에 로마의 국력이 절정에 달했던 상황과 야만족이 전반적으로 분열되었다는 상황이 겹친 한정된 조건에서 가능했던 것일 뿐이다.

무엇보다 군사학적으로 선방어는 존재하는 모든 방어전략 중 가장 많은 고정지출과 인력지출, 최악의 효율과 가장 낮은 효용성을 보이는 방어전략이다. 종심방어가 아닌 선방어를 강요받는 상황이 아니라면[25] 지휘관에게 선형 방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반론에서 적군을 섬멸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은 포위섬멸이며, 방어자가 공격자에게 포위섬멸을 강행하기 위해서는 전선 일부를 개방하여 파고들도록 유도한 후 후방을 촌단하여 싸먹는 전술이 가장 효과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공격자가 파고들었을 때 전략적으로 중요한 종심지를 점령하지 못하도록 종심에 방어전력을 빽빽히 박아두고 적들의 기동력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 한꺼번에 공격하여 섬멸하는 것이 중요하다.

역사적으로 방어측이 엄청난 승리를 거둔 전투를 둘러봐도 마찬가지다. 2차 빈 공방전의 경우 빈의 요새가 앞에서 버티고 그 후방으로 날개 후사르가 파고들어 오스만군을 포위섬멸했지, 오스트리아의 국경에서 저지한 것이 아니었다. 통일 제국 하나를 청천강에 장사 지내 버린 살수대첩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수나라군의 별동대가 압록강을 건너 평양까지 파고들었다가 퇴각하며 도강하는 것을 포위섬멸한 결과물이다. 결과적으로는 패했지만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을 가장 크게 경악시켰던 이오지마 전투 오키나와 전투에서의 일본군의 전과 역시 상륙하는 미군을 해안선에서 저지한 것이 아니라 섬 내부에 토굴을 파고 지하에서 항전한 결과다.

반면 선방어를 고집한 집단은 모두 패망했다.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비잔티움은 어마어마한 테오도시우스 성벽으로 선방어를 시도했으나 결과적으로 오스만은 비잔티움을 패망시켰다. 고구려가 살수대첩 당시 평양까지 뚫렸던 것을 두려워하여 구축하였던 요동의 천리장성은 당태종의 공격에 요동성, 백암성, 박작성 등이 우후죽순 무너졌고, 전방 종심이 부재했던 결과 주필산 전투로 고구려의 15만 대군이 패퇴했다. 결국 당태종을 막은 것은 안시성 신성이라는 2차 종심이었다. 연합군의 상륙작전을 막겠다고 유럽 해안선 전체에 대서양 방벽을 구축한 나치 독일의 방어선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단 한 번에 돌파당하고 이후 나치 독일은 패망하는 데 2년도 안 걸렸다.

상당히 잘나가던 공화정 시절조차 로마는 선방어로 저지한 적은 가뭄에 콩나듯 하였고, 적군이 방어선을 뚫고 분탕질을 친 뒤에야 비로소 수도에서 군단을 징집한 다음 집정관이 출정하여 제압한 케이스가 대부분이었다.

아우구스투스와 오현제때 선방어가 성공한 것으로 보인 이유는 선방어의 위력이라기보단 게르만족의 정세와 아우구스투스때 벌인 대규모의 게르만 원정 때문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게르만 원정은 워낙 유명하고, 네로의 전임인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는 코르불로의 지휘 하에 대규모로 게르만 원정을 단행한 일이 있었다. 또 오현제 시대로 넘어간 이후에는 먼 게르만족과 가까운 게르만족의 전쟁으로 이들이 로마를 넘볼 상황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 오현제 시대에도 주기적인 정벌은 멈추지 않았다.)

여기에 카라칼라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말기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방어선을 다시 보강하고 게르만족이 본격적으로 세력을 갖추기 전 연이어 격파하여[26] 선방어 체제가 3세기 중반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것. 그러나 그 이후에는 게르만족의 거대한 물결을 갖추는 것을 막지 못해 선방어 붕괴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즉, 시오노 나나미 말대로 로마가 선방어 전략을 포기한 것은 아니고 선방어로는 도무지 국경을 지킬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반도 같이 진격로가 극히 한정된 준 산악지대 같은 곳이 아니면 현대전에서조차 선방어로 적을 막지 못하는데 고작 10여만(대략 20개 군단. 나머지는 동방과 후방)을 지금의 유럽 서쪽부터 동쪽 끝까지 길게 늘어뜨려 어떻게 선에서 적을 격퇴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병력을 무제한적으로 늘릴 수도 없으니 결국 로마는 선방어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로마 제국 바깥의 야만족들은 지속적으로 사회 조직도와 편제가 발달하여, 장교단과 부사관단이라 할 수 있는 집단의 숙련도 또한 상승하고 있었다. 이는 전술과 전략 숙련도가 우수해진다는 얘기와 일맥상통하며, 때문에 대규모 야전에서도 더 이상 로마군에게 일방적으로 당하지만은 않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물량과 체계적인 군사학이란 분야에서는 로마보다 쳐질 수밖에는 없었으나 이들은 카이사르 시절 그 야만족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상대해야 했던 야만족들은 바로 이런 군사 조직들이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러한 연구 성과를 모르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이후로는 카이사르 같은 천재적 무장들이 나타나지 않아, 혹은 원수정 로마의 전술을 버려서 로마가 고전했다는 이상한 결론 밖에는 내지 못하는데, 다른 사항이야 특유의 반기독교 유심론적 사관과 배치되어 납득이 안 되었다곤 치더라도 이런 부분을 고려하지 못했다는 건 자료 조사의 불성실을 나타낸다.[27]

3.5. 후기 로마 제국 군제에 대한 전반적인 무지와 무관심

가장 서두의 소위 "로마다운 로마"의 문제점이 가장 극심하게 두드러지는 대목이다. 리메스 항목에서 언급하는 문제기도 하지만, 시오노 나나미는 모든 이상적인 기준을 공화정 후기 ~ 원수정 전기로 맞추면서 이것과 달라지면 무조건 퇴보의 전조라고 하는 괴이한 잣대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로마군 레기오들이 전부 허접한 국경수비대로 전환되어 유명무실화되었고, 이것이 로마의 쇠락 원인이라고 하는데 이는 아주 잘못된 인식이다. 실제로는 종전 레기오들의 정예 병력들 같은 경우 코미타텐세스 편제로 분류되어 국경선에서 물러났고, 나머지 다른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병력 자원들이 리미타네이가 되어 국경 수비를 맡았으며 전쟁이 벌어지면 리미타네이가 일선에서 방어에 종사하는 동안 코미타텐세스가 요격에 나서 외적의 침입을 격퇴하는 형태였다.

하지만 시오노 나나미는 파밀리아 개념을 포기했다는 말에서만 언급하고 넘어갈 전자의 존재는 싹 무시하고, 후자만 레기오의 후예인 양 서술하면서 후기 로마 제국의 군사적 역량이 엄청나게 퇴보한 것처럼 쓰지만 이는 아주 큰 오류다. 이게 뭐가 그리 심각하게 틀렸다는 건지 한국의 독자는 영 감이 안 올 수도 있겠으나, 예컨대 현대 한국군의 실태를 취재한다는 어떤 외국 기자가 예비군 훈련때 소집된 예비군들의 여러 꼴사나운 모습만 집중적으로 부각한 다음 그것만이 현대 한국군의 모습인양 침소봉대한다면 각처에서 어떤 반응이 나오게 될까? 이는 후기 로마군에 대한 모독이라고 해도 좋을정도로 심각한 오류다. 전면전 자체가 아니라 애초에 진로 방해나 경보 그리고 지역 방어 예비대 마련을 목적으로 설치된 부대들을 놓고, 이전 시기의 전면전 대비 부대들과 비교해서 전투력과 장비가 떨어졌다고 퇴보했다고 한다면? 이건 그냥 왜곡, 무지, 오류인 것이다.

후기 로마군의 발전 사항이 궁금하면 로마군,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부분 참조. 또한 후기 로마군이 게르만족의 전술도 벤치마킹해서 발전한 것을 놓고 언제는 '로마인만큼 케이스 바이 케이스의 달인은 없었다' 라는 식으로 서술하더니 이점은 "야만화"라는 이상한 소리를 하는데, 이는 시오노 나나미만 하는 소리는 아니지만 후기 로마사 전공자들은 하지도 않는 얘기고, 또한 시오노 나나미가 이런 이상한 소리를 한 탓에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는 더욱 널리 퍼진 편견이 되고 말았다.

로마 제국은 저 공화정 초기 때부터 그리스, 갈리아, 삼니움 등의 무장을 참조해 독자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당장 로마군의 기본군장인 투구와 사슬갑옷( 로리카 하마타)은 갈리아, 글라디우스는 히스파니아, 필룸은 삼니움의 무기를 대폭 참고하여 만든 것이고, 당연히 원수정 때도 사르마티아나 파르티아의 전술과 편제를 참조해서 군제와 전술에 반영했는데, 왜 꼭 후기 로마군만 그 굴레를 뒤집어 써야 할까? 게다가 후기 로마군의 무장과 편제는 게르만족 것만이 아닌, 사산조 페르시아의 그것도 대단한 영향을 미쳤는데 시오노 나나미는 이것도 간과한다. 사각 큰 방패와 필룸, 로리카 세그먼타타, 글라디우스 이런 것들은 리인액트할 때는 인기 있고 확실히 간지나긴 해도, 로마성이란 정체성과 필요충분조건 관계는 아니다.[28]

3.6. 객관성 문제

세기말이 낳은 최고의 동인지라는 평도 있다. 작가 본인이 좋아하는 인물의 이야기가 나오면 객관성을 던져버리고 완전히 ' 빠순이' 모드로 돌변하는 모습 때문. 특히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이성을 잃는 모습을 보면 아무리 봐도 동인지다.[29][30]

특히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키케로에 대해서 카이사르의 적이었다는 이유로 저평가한다. 키케로를 입만 산 찌질이, 개혁자 카이사르 각하에게 대항하는 책상물림 따위로 표현하는 건 이미 18세기 영국에서도 퍼진 풍조이기도 하니 시오노 나나미만의 탓은 아니라지만, 이는 다시 말해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사 인식 수준이 아직도 18세기 레벨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다. 동로마를 정도 이상으로 비판하는 성향도 역시 18세기적 인식에 가깝다. 진중권이 이문열에게 한 평가를 패러디하자면, 그녀는 훌륭한 18세기 역사작가다.

아울러 스파르타쿠스에 대한 내용도 너무 짧다. 스파르타쿠스에 비하면 무명이나 다름이 없는 동시대의 다른 인물들에 대해서는 시시콜콜하게 써놓으면서도, 스파르타쿠스에 대해서는 대충 언급하고 넘어간다. 정작 당대 로마인들은 스파르타쿠스를 반란 노예라고 부르면서도 굉장히 높게 평가했고 이후 로마사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을 고려하지 않은 것.

또한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한국과 일본에서만 저평가받게 되는 데도 큰 원인을 제공했다. 크라수스가 부를 축적한 방식이 권력을 이용한 것이라, 이런 면만 부각하면 졸부라고 폄훼하기 쉽지만 이에 못지않게 당시 로마 귀족들의 사회에 대한 헌신과 예의를 그대로 따라 공공사업에 막대한 돈을 기부했기도 하다. 대개 시오노 나나미는 그녀가 칭송하는 인물들에 대해서는 이 공공사업 기부를 통해 보다 추켜세우고는 하면서도 이에 못지않은 기부를 한 크라수스를 인기없는 졸부처럼 표현했다. 그는 결코 졸부에 비견할만한 인물이 아니며 자금력과 기부 활동을 통해 로마 정계에서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거물급 인사였다는 것이 현대의 연구 결과이다. 특히 시오노 나나미는 크라수스가 막대한 채권 때문에 역으로 카이사르에게 끌려다녔다는 식으로 묘사했으나, 크라수스와 카이사르는 공생관계였다. 당시 로마의 부호들은 정치인들을 금전적으로 후원하면서 그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이를 카이사르가 일방적으로 주도권을 쥔 것처럼 묘사한 것도 크라수스가 저평가 받는 큰 원인이 되었다. 실상 크라수스-카이사르의 관계는 카이사르-쿠리오의 관계와 다를 바 없다. 다만 파르티아 원정 과정 이후 결과에서 볼 수 있듯이 군사적으로 굉장히 무능했기에 로마사에 오점을 남겼고 이에 대해서는 시오노 나나미가 비판한 바가 거의 사실과 일치한다.

또 6권에서의 옥타비아누스도 은근히 저평가 받는다. 분명히 옥타비아누스의 업적이 맞는데도 불구하고 카이사르가 시킨 대로 했다거나, 그의 정치적 능력이 카이사르보다 뛰어나다는 학계의 의견은 어찌되었든 간에 카이사르가 더 뛰어나다는 말을 하거나 카이사르나 개혁, 혁신적이고 옥타비아누스가 보수적이라고 말하는 등이다. 6권 초반에 계속해서 카이사르와 비교하면서 카이사르는 천재였지만 옥타비아누스는 평범한 인물이었다고 강조하는데, 평가하기 나름이겠지만 오히려 옥타비아누스를 한 수 위로 보는 견해도 많다.[31]

로마 제국의 피지배민족 통치에 대해 지나치게 띄워주는 것도 문제. 물론 로마 제국의 개방적인 통치방식은 높게 평가할 만 하지만, '피지배 민족을 자신들과 동화시킨 제국은 후대에는 없다' 라거나 '로마인만큼 '케이스 바이 케이스'의 달인은 없었다' 라는 식으로 로마만 최고라는 식으로 서술하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는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이는 식민 제국 시대 이전의 전근대 제국들은 으레 시행하던 정책으로, 아케메네스 제국의 경우 키루스 2세 시대 이전까지 페르시아인을 지배하던 메디아인을 지배 계층으로 포섭했으며 사파비 제국 또한 피지배 민족인 코카서스인들을 대거 등용하여 정치의 핵심 세력으로 만들어 이전까지 제국의 지배 계층이었던 키질바시들을 약화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32]

한나라, 당나라, 고구려, 몽골 제국 등 다양한 문화권에 걸쳐서 영향력을 행사한 국가들은 얼마든지 있었으며, 이들은 로마 제국의 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거나 경우에 따라 더 진보된 모습도 얼마든지 보여 주었다.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에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에 비견될 만한 사상적 진보를 이루었고, 로마 제국보다 200년 이상 일찍 황제를 등장시켰다. 현대에는 중국을 만다린, 즉 한족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국가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것은 진나라, 한나라를 거치면서 사천, 강남, 황하 등으로 나뉘어 있던 언어도 혈통도 다른 문명들이 통합된 결과이다. 즉, 로마 제국은 끝끝내 나나미가 그토록 열렬히 칭송했던 피지배 민족의 동화에 실패하여 아직까지도 유럽은 라틴, 게르만, 고트, 슬라브, 앵글로색슨 등으로 민족이 갈라져 있는데, 중국은 그 동화에 성공했고 그 결과 수적으로 결코 적지 않았던 사천과 강남 지역 민족은 완벽하게 황하문명화되어 한족으로 통합당했다. 10세기 이전까지 중국과 대등한 힘을 겨룬 최초의 국가였던, 그 강대한 북방 유목민족을 속민으로 거느린 고구려 역시 중국을 문화의 종주로 받아들이고 율령제를 도입했으며, 신라와 발해, 일본 역시 당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였고, 고려, 조선, 베트남 응우옌 왕조 등에 이르면 사실상 중국의 예법을 스테레오타입으로 받아들이고 중화의 예법과 정치체제에 동화되었다.[33] 단순히 문화의 통합만 놓고 본다면, 중국은 결과적으로 다시 통합되지 못하고 쪼개진 로마에 비할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오스만 제국의 경우를 보면, 이 나라 자체는 투르크인이 세운 것이고 그래서 예전에는 "오스만 투르크"라는 잘못된 명칭으로 부르기도 했다만 이들 스스로가 투르크라는 정체성을 내세우지는 않았다. 일신교 국가다 보니 일단 이슬람을 받아들여야 지배층으로 받아 주었다는 게 시오노가 찬양하는 시절의 로마 제국과의 차이이기는 하나, 일단 개종을 하면 그 다음부터는 로마와 마찬가지로 각자의 재능에 달려 있었다. 애초에 쉴레이만 1세에 의해 완성된 오스만 고전 법률에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으며,[34] 이런 까닭에 제국이 전성기를 누리던 15~17세기의 재상 목록을 뽑아 보면 투르크인은 가끔 가다 한 명 정도 보일 뿐이고 그리스인이나 세르비아인, 불가리아인 등등 동남부 유럽 출신들이 고위직을 꿰차고 있었다.[35] 세금 제도 같은 경우 시오노의 표현대로 '케이스 바이 케이스' 로 임했는데, 새로 정복한 지방이 이전까지 시행하던 조세 제도를 약간만 손질하고 거의 그대로 둔 것이다. 덕분에 오스만의 세금 제도를 보면 세목만 수십 가지[36]에 무슬림이 아니라서 걷는 세금, 각종 면제 혜택[37]까지 눈돌아가게 복잡하다. 요컨대 로마 제국의 통치 방식이 훌륭했던 것은 맞지만, 시오노의 말마따나 '로마만 이렇게 했다' 내지 '로마가 최고였다' 라는 식의 서술은 심각하게 재고해 볼 여지가 있다.

4. 권별 문제점 정리

4.1. 1권

4.2. 2권

4.3. 3권

4.4. 4~5권

4.5. 6권

4.6. 7권

현재 연구에 따르면 당시 로마군은 식량, 장비(무기, 텐트, 의복, 신발, 건초 등)을 봉급으로 구매했음이 밝혀져 있고, 페르켄니우스의 발언은 주요 사료로 취급받고 있다. 물론 이 발언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자료에서 교차 검증이 충분히 된다. 심지어 시오노 나나미가 제국의 필요성을 인정했다며 자주 인용하는 타키투스조차 군단병들에게 식량, 무기, 군복, 침구 등을 봉급에서 공제하였다라고 기록하였는데 이는 싹 뺴놓는 역사 왜곡을 저질렀다.유물로도 군단병들이 봉급에서 공제받았고 공제 후 남아나는 것이 없던 것을 증명하는 것이 차고 넘친다. 2021년에도 기원후 1세기 마사다 요새 공략전에 참가했던 로마 기병의 월급 명세서가 발견되었는데, 월급에서 식량, 말 사료값, 군장 값 등이 공제되어 실수령액이 사실상 0이었다고 한다. # 그래서 로마군 유적지나 관련 유물들 중에는 로마군 병사들이 고향의 가족들한테 "생활비가 모자라니 돈을 보내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의 편지들을 보냈던 사실들이 흔하게 발견된다. 참고로 이 시기 로마군의 봉급은 225 데나리우스로 티베리우스 이후 시대였던 트라야누스 시기 관료였던 소 플리미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한 군단병의 1년 공제비는 103 데나리우스로 트라야누스 시기의 300 데나리우스 기준으로는 봉급의 30%, 티베리우스 시기를 기준으로는 50%에 달하는 값이다! 특히 앞서 아우구스투스의 게르마니아 원정을 치르던 병사들의 입장에서는 전리품이라고는 노예가 고작인 게르만족과의 전쟁을 계속 치르면서 무기와 침구, 갑옷을 소모하였을 테니 소모된 것을 새로 지급받고 공제받으면 정말로 남아나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56]
당장 페르켄니우스의 말이 거짓이라면 게르마니아 방면에서 일어난 군단 반란 당시 장병들이 게르마니쿠스 앞에서 항의한 말은 왜 똑같았으며[57] 반란에 대한 처벌이 혹독하기로 유명했던 로마군에서 유혈사태까지 벌어졌는데도 게르마니쿠스가 주동자급 몇몇만 처형하는 관대한 처분을 하고 병사들의 요구를 일정부분이나마 황제에게 건의하였겠는가? 티베리우스 황제는 또 왜 군 복지 향상과 군복무 20년을 채운 자들의 퇴직금 및 체불임금 지급. 즉각 전역을 수용한다는 결정을 했겠는가?
해당 연구는 제껴놓고서라도, 그냥 상식적으로 한 번 생각해보자. 페르켄니우스는 로마군의 병사이고 그 연설을 듣는 동료들도 같은 로마군 병사이며, 로마군 병사의 생활에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이 로마군 병사인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같은 로마군끼리 연설하면서 말도 안되는 거짓부렁을 늘어놓으면 "저새끼 헛소리하네."라고 생각하지 도대체 누가 "그 말이 옳소!"라고 동조하겠는가? 이런 선동적 연설을 비판없이 받아들이는 것도 문제지만 아무 근거도 없는 그냥 자기 망상으로만 부정할 수도 없다.
도대체 시오노 나나미가 왜 이런 반론을 하게 된 것있다는 알 수 없으나, 선해하자면 시오노 나나미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무기와 군복같은 군수품을 병사 스스로 주문해오는 시대에 살아본 적이 없으므로 로마군도 그랬겠거니 하고 '착각'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58] 사실 이는 영지물만 봐도 있듯 현대 작가들이 흔히 하는 실수이긴 하다. 전근대의 행정능력으로는 이런이런 장비를 맞춰오라고 표준화를 지시하는 것도 벅찬 일이고, 그걸 영주나 국왕이 알아서 보급까지 해주는 건 정말 특별한 경우에나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중세의 갑옷 유물이 제각기 다른 모양인 이유가 이것인데, 현대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인지라... 대표적으로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로마군단병은 로리카 세그멘타타로 통일한 갑옷을 입은 모습이지만 유물 연구 결과 로리카 하마타만 입은 군단병을 묘사한 트라야누스 기념비가 나온다거나 로리카 세그멘타타가 보조병 주둔지에서 출토되는 등 당시 로마군의 갑주도 일반적인 이미지처럼 통일되었다기 보다는 혼합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학계는 보고 있다.
더욱이 코르불로의 외삼촌은 티베리우스 시대 후기에 티베리우스, 칼리굴라가 음탕하게 산다는 풍자시를 지어 자살해, 일찌감치 티베리우스 쪽과는 끈이 떨어진 인사였다. 따라서 시오노 나나미의 주장처럼 코르불로가 티베리우스에게 발탁되다시피한 문하생이라는 설명은 가계, 성장배경부터 맞지 않는다. 실제 기록을 보면 코르불로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티베리우스가 죽고, 칼리굴라가 권력 강화에 매진할 무렵부터였다. 그는 이부 여동생 밀로니아 카이소니아가 칼리굴라의 부인이 되면서 요직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고, 마크로 제거 이후 칼리굴라가 삼촌 클라우디우스와 그 친구 갈바, 신참자들인 베스파시아누스 형제 등을 기용할 때 보결집정관을 시작으로 승승장구한 대표적인 칼리굴라 쪽 인사였다. 아울러 그는 칼리굴라 가족이 몰살당하면서 그 기회를 잃는 듯 했지만,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존속하고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즉위하면서 칼리굴라 암살 정국이 수습된 이후 보다 전면에 나선 인사였다.

4.7. 8권

4.8. 9권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본가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직속 휘하 백인대장을 시작으로 했고, 이미 아우구스투스가 옥타비아누스로 불리던 때부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수립전의 공화정 말 내전부터 로마 중앙 정계에 신참자로 등장한 이탈리아계 히스파니아 이주가문이었다. 당장 하드리아누스의 아버지 아페르는 고향이 로마였고, 조부 대부터 원로원 의석을 세습 중인 원로원 귀족으로 법무관까지 수월하게 올라간 귀족이었다.

4.9. 10권

4.10. 11권

그리고 쉽게 묻힌 건 애초에 콤모두스의 무능과 폭정으로 국가가 망하는 꼴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원로원과 군부 등 로마 지도층이 이미 콤모두스를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타이밍만 노리고 있던 판에 굳이 먼저 일을 저질러준 자들을 처형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오노 나나미는 무엇 때문인지 이것을 언급하지 않았으며 동기는 전혀 모른다. "그들이 콤모두스를 죽이면 손해인데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다"라고 서술한다.

4.11. 12권

사회 유동성은 오히려 증가했다. 극소수의 원로원 계층과 소수의 기사계급 계층이 관직을 독점하던 게 원수정이지만 3세기부터 모두가 로마인이 되고 잇따른 이민족의 침입으로 실력제일주의가 나타난다. 3세기 황제들과 4세기 로마 장군들의 출신을 보면 얼마나 계층 이동이 활발했는지 알 수 있다.

4.12. 13권

군제, 가계도, 사두 정치의 영역 부분 및 사실 관계 등등에 있어 오류가 꽤 많다. 처음 1차 사두 정치의 경우 히스파니아 부분은 콘스탄티우스의 관할이 아니라 막시미아누스에게 속해 있었는데, 히스파니아 부분까지 콘스탄티우스가 부제로 다스린 것처럼 되어 있다. 히스파니아는 2차 사두 정치에서 콘스탄티우스가 정제로 승격하면서 받은 영역이지, 1차 때부터 담당했던 영역은 아니었다. 또한 2차 사두 정치가 전개되면서 갈레리우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다스리던 아나톨리아를 받았는데 그 부분도 반영되어 있지 않다.

또한 시오노 나나미가 찬밥 신세를 받았고 끝내 해체되었다고 자주 이상한 한탄을 하는 프라이토리아니, 즉 근위대의 경우, 실제로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극소수의 기간병만 남기고 나머지 정예 병력은 죄다 빼낸 다음 자신과 막시미아누스에게 분배해서 제5요비우스 군단과 제6헤르쿨리우스 군단을 창설했었고, 나중에 콘스탄티우스와 갈레리우스가 부제가 되었을 때 각기 막시미아누스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다시 그 병력들 중 얼마를 그들에게 나눠줬었다.

막센티우스의 근위대는 계속 잔류했던 기간병을 모체로 재창설된 건 사실이지만, 실제로는 갈레리우스 휘하에서 탈영한 병력들에 더해 이탈리아와 아프리카에서 새로 병력을 징집해 거의 새로 만들다시피했던 근위대였다. 그런데 시오노 나나미는 프라이토리아니가 내내 찬밥 신세로만 로마에 머물렀다고만 묘사하며 이런 중요한 사실 관계는 생략한다. 콘스탄티누스가 근위대 자체를 해체한 건 맞지만, 근위대에서 기원하는 여러 정예 부대들은 여전히 황제 코미타투스들로 기능하고 있었고, 또 밀비우스 다리에서 다 죽지도 않았다.

일부는 콘스탄티누스가 그들의 분투에 매우 감동해 살려줬고, 리미타네이로 배치되어 여전히 명성을 날리게 된다. 시오노 나나미가 제대로 자료 조사를 하지 않았다든지, 아니면 알면서도 콘스탄티누스의 냉정하고 비정한, 로마적 전통을 끝낸 기독교인 황제적 이미지를 덮어씌우기 위해 생략했든지, 가능성은 둘 중 하나다.

한편 갈레리우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딸인 발레리아와 혼인한 게 맞지만, 총각으로서가 아니라 홀아비였다. 갈레리우스에게는 그 전에 아내가 있었으나 딸 하나만 낳고 사별한 상태였다. 발레리아는 자식을 낳지 못하는 몸이라 의붓딸을 자기 자식처럼 키웠고, 또한 갈레리우스가 나중에 낳은 사생아를 자기 자식으로 입양해 키웠다. 그런데 로마인 이야기에는 이 딸이 발레리아의 친딸인 것처럼 묘사되어 있으며, 갈레리우스의 아들에 대해선 아무 말이 없다. 각 중요 인물에 대해선 전기의 형식을 동원해 조명하는데, 상당히 중요한 인물인 갈레리우스에 대해선 대단히 비중이 박하고 사실 관계가 틀린 것이다.

또한 콘스탄티누스에 대해 냉철하고 비정한, 로마를 로마답지 않게 만든 황제란 선입견이 있어서인지 이상한 누명도 씌운다. 막센티우스가 앞서 언급한 갈레리우스의 딸 사이에서 아들 둘을 낳은 건 사실이지만, 큰 아들 발레리우스 로물루스는 콘스탄티누스가 침공해오기 훨씬 전에 어려서 죽었고 작은 아들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기록이 전혀 없다. 그런데 시오노 나나미는 콘스탄티누스가 원로원에 명령을 내려 막센티우스의 어린 두 아들을 죽이라고 했다고 말한다. 이는 사실 관계와 틀린 오류다.

또한, 콘스탄티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밑에서 뿐만 아니라 갈레리우스 밑에서도 황제 친위대인 코미타투스의 고급 장교로서 상당한 활약을 했었고, 위험을 무릅쓰면서 늘 선두에 나서는 특유의 행동은 이미 그때부터 시작되고 있었는데, 이는 로마사 연구자들이 콘스탄티누스 또한 고전적인 로마적 비르투스를 체현하려고 노력했던 인물이라 평하는 부분이며 기번조차도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분명히 언급하는 내용이다. 물론 시오노 나나미는 이런 일화들을 생략한다.

4.13. 14권

콘스탄티우스 2세를 왜곡까지 하면서 질투에 눈먼 찌질이로 묘사하였고, 암브로시우스 주교와 테오도시우스 1세에 대한 내용 또한 오류와 왜곡이 심각하다. 암브로시우스 참조.

또한 기독교가 우세해진 3~4세기 로마에 호네스티오레스/후밀리오레스 계급 구분이 생겼다는 건 틀린 소리다. 이 사회적, 법적 구분은 이미 기원후 1세기에 단초를 보이고, 법제적으로 완전히 확립되는 건 기원후 2세기인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때다. 더군다나 아주 틀린 소리는 아니다만 호네스티레오스를 "상층 시민", 후밀리오레스를 "하층 시민" 으로 두루뭉술하게 표현해 놓았는데, 기사 계급이나 원로원 계급이 호네스티레오스였고 노예가 아닌 나머지는 후밀리오레스가 된 것이었으므로 상층 시민, 하층 시민 할 것이 아니라 그냥 귀족과 평민으로 비유하는 게 이해가 더 쉽다.

4.14. 15권

아이티우스가 아닌 스틸리코를 최후의 로마인으로 설정하였다. 물론 최후의 로마인이 누구냐는 역사가의 의견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아이티우스를 필요 이상으로 까내리기 위해 스틸리코를 이용하다시피한 게 문제. 스틸리코는 이이제이에 능하지만 아이티우스는 손에 든 독을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옮겼을 뿐이라고 쓴 서술은 압권이다. 물론 아이티우스도 5세기 로마의 방어에 있어서 비판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가 있었기에 서로마 제국이 영토가 누더기가 되고 멸망하는 게 30년 이상 늦춰질 수 있었다.

비잔티움에 대한 내용 대부분 : 동로마 측에 대해서는 시오노 자신의 편견을 강화하는 주제만 다루며[65], 그나마도 아예 사실과 틀린 부분이 많다.

타기나에 전투에서 동로마군이 벨리사리우스 못지 않은 명장인 나르세스의 정교한 전술을 통해 동고트군을 분쇄했고, 당시 동로마군의 주력은 용병이 다수 있었어도 어디까지나 로마인 부대들이었고 이들이 과반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르세스가 전투 전에 용병들에게 많은 재물을 보여준 것만 부각하고, 동로마군 주력은 어디까지나 용병이었다는, 사실 관계와 다른 편견을 자꾸 부각시키려 한다. 물론 이후에 나르세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이 프랑크군 또한 크게 격파한 건 당연히 생략한다. 애초에 동고트 제국이 망한 뒤에도 이탈리아에는 게르만족의 침략이 계속 이어졌고 568년 롬다르드족의 침략이 이뤄지고 나서야 이탈리아 반도의 절반이 동로마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게 된다. 시오노 나나미는 롬바르드족의 침략에 저항할 힘어 없었다고 서술했지만 실제로는 서로마 통치체제의 핵심권역만을 겨우 장악한 상태에서 애매하게 지배하던 곳들을 빼앗긴 것이며, 라벤나를 비롯해 북부에서도 확고하게 장악한 지역과 로마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반도의 절반은 여전히 건재했다.

동로마 제국이 재정 낭비만 한 것으로 다루지만, 실제로 유스티니아누스는 제국의 새로운 수익을 창출하고 재정을 절약하기 위해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실제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관리였던 카파도키아의 요한네스가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세금을 거둔 것과 마우리키우스가 전쟁으로 엄청난 비용이 빠져나가는 와중에 국고 소모를 줄이기 위해 긴축정책을 실시한 것만 봐도 알수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사후 동로마 제국의 재정이 어려웠던 건, 동로마의 무능함 때문이 아닌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으로 인한 인구감소와 세입 감소, 유스티니아누스가 벌여놓은 원정들로 인한 비용,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을 포함한 대규모 토목건축, 사산조 페르시아, 아바르족, 롬바르드족 등 이민족과의 지속적인 전쟁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게다가 티베리우스 2세의 긴축 정책만으로도 재국의 재정은 금세 회복될 수 있었다. 시오노가 묘사하는 것 마냥 동로마 제국 체제의 근본적 한계가 이유는 아니었다.

또한, 유스티니아누스의 로마법 대전이 이후의 제국에서 활용되지 못했다는 아예 사실과 다른 소리도 대놓고 뻔뻔히 한다. 자기가 싫어서 편향된 사료에 편향된 해석을 들이대는 것도 문제가 되는 판에 이렇게 아예 틀린 정보를 집어넣는 건 역사학자는 고사하고 작가로서도 실격이다.

동로마 제국에는 라틴어를 이해할 줄 아는 식자층이 많았으며 법관들은 라틴어를 반드시 배워야 했고, 이슬람 제국의 맹진 시기에는 라틴어 가능자가 대폭 줄어들지만 이것은 국가에서 교육에 들일 예산이 없어서 벌어진 일이지 있지도 않은 로마 혼이 열등한 그리스인들 때문에 갑자기 죽어서가 아니다.

로마법 대전은 이 시기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리스어 번역본과 다이제스트판이 나오면서 활용되었다. 애초에 로마법 대전이 르네상스 때 재조명을 받은 건 동로마 제국이 로마법 대전을 보존한 게 이유인데, 그렇다면 동로마 제국은 아예 쓰지도 않는 법전을 국가 예산까지 들여 생돈 써 가며 보존하는 나라였다는 말인가? 당연히 말이 안 된다.

또한 로마 제국은 라틴어를 쓰며 로마가 수도인 제국이었고 동로마 제국은 그리스어를 쓰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수도인 제국이라 다르다는 편견도 피력한다. 물론 이런 얘기는 시오노 나나미만 하는 소린 아니지만 후기 로마사를 전공하는 학자들은 아예 하지 않는 얘기며, 전기 로마사 전문가라도 제대로 후기 로마사를 보는 사람은 하지 않는다.

로마 제국은 공화정 때부터도 그리스어를 상용했고 제정 시절에도 원래 제국 동부는 그리스어가 공용어였으며, 특히 로마 상류층이 향유한 문학들은 그리스어로 제작되었다. 애초에 공화정 말기~제정 초기의 대표적인 서적인 <신약 성경>만 하더라도 다른 민족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공용어인 그리스어로 쓰였으며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역시 <명상록>을 그리스어로 썼을 정도이다. 즉 로마 제국이 그리스어를 쓰는 것은 절대로 이상한 현상이 아니다.[66]

더군다나 소위 말하는 동로마 제국의 시절에도 라틴어는 아주 오랫동안 여러분야에서 사용되었으며 특히 군사용어는 헤라클리우스 황제 시대때까지 라틴어였다. 또한 수도의 경우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어디까지나 애칭일 뿐이었으며, 정식 명칭은 '새로운 로마'(노바 로마)였다. 즉 동로마 제국은 명백하게 '로마시(市)를 수도로 하며, 로마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로마 제국 자체'이다. 물론 여전히 문학적 수사로 볼 때는 유효한 얘기지만, 시오노 나나미는 이걸 우월하고 열등한 것을 가르는 기준으로 사용하고 있으니 큰 문제다.

[1] 분명히 말하지만, 시오노 나나미는 역사가가 아니라 엄연히 소설가이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그녀를 가리켜 역사가라고 착각하는 인식이 많아서 문제가 된다. [2] 이게 왜 문제가 되는지 이해가 안 된다면, '한국다운 한국'이 대체 어느 시대였는지 생각해보자. 불교적인 고려시대인가? 유교적인 조선시대인가? 1960~1970년대 개발 독재 시기인가? 민주주의가 정착된 선진국의 2020년대 시기인가? 그것도 아니면 미래 2100년대 한국인가? 아니, 그 이전에 '한국답다.'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고정된 '한국답다.'라는 것은 없다. 국가는 환경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기 마련이다. 그렇지 못하면 현실과 괴리가 생겨 무너질 것이다. [3] 로마 제국의 이런 세금시스템은 고대적인 노예제 하에서만 제대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전문적으로 역사를 공부한 바 없는 시오노는 이를 간과하고 있다. 폭넓은 사론이나 사관을 접하지 않은 역덕후가 빠져들 수 있는 함정에 제대로 빠진 것이다. [4] 유스티니아누스의 숙부인 유스티누스 1세는 일리리아 농부 출신으로 근위대장을 거쳐 황제가 되었으나, 일자무식이어서 고등 교육을 받은 유스티니아누스가 일찍이 후계자가 되어 통치를 도왔다. 시오노는 아마 유스티니아누스 부부를 사탄에게 영혼을 판 폭군으로 묘사한 프로코피우스의 관점에 영향을 많이 받은 듯 하다. [5] 80대까지 너무 오래 재위해서 국정 추진력이 상당히 떨어졌다. [6] 그래서 '명장' 리스트에 휘하의 장군인 벨리사리우스, 나르세스는 (특히 벨리사리우스) 포함되지만, 유스티니아누스는 포함되지 않는다. 본인 스스로가 최고사령관이었던 후대의 헤라클리우스, 바실리오스 2세 등과 구분된다. [7] 아울러 국내 번역된 로마인 이야기의 15권에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뒤를 이은 황제가 유스티니아누스 2세로 표기되어 있는데 오타가 났다. 원문에는 유스티누스 2세로 올바르게 표기되어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1세로부터 150년쯤 뒤의 임금이다. [8] 로마인 이야기 13권 288~293페이지. [9] 고대 로마는 나라 규모가 훨씬 컸던 데다가, 로마 기준 서쪽~북쪽 방면의 게르만족 세력이 고대 로마 시절에는 제대로 된 나라를 세우지 못해 부족 단계에 머물러 있었지만 동로마 시절에는 구 서로마의 영역에 프랑크, 프랑스, 신성로마 등 강력한 국가를 세웠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당연하지만 부족 단계의 세력을 상대하는 것이 훨씬 쉽고, 정식 국가를 상대하려면 군사력뿐만 아니라 상당한 외교역량까지 요구된다. [10] 서방의 라틴~게르만계 카톨릭 세력, 북방의 튀르크-슬라브계 유목 세력( 아바르, 불가리아 제국, 키예프 루스, 페체네그, 쿠만 등), 동방과 남방의 중동 세력( 사산 페르시아 - 아랍계 이슬람 통일제국( 라쉬둔/ 우마이야/ 아바스) - 파티마 튀르크 등) [11] 물론 이 병력은 이사키오스 1세의 쿠데타에 휘말려 상당수가 전선을 이탈해버렸고, 일부만 다시 전선에 복귀한다 [12] 추가적으로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 하권에서는 예니체리 군단을 빼면 오스만에게 상비군이라곤 없었다고 까는데, 이 또한 맞지 않는 소리다. 티마를르 시파히라고 하는 상비군 조직이 엄연히 있었고, 그 밖에 카프쿨루 시파히나 예니체리 같은 조직도 있었다. 비잔틴도 그렇고 오스만도 그렇고 엄연히 상비군을 굴렸던 나라인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시오노의 눈에는 로마만 상비군을 갖춘 나라로 보이는 모양이다. 또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는 오스만 정규군이 갑옷도 입지 않았다고 했는데, 쇄자갑으로 중무장한 오스만 정규군 유물이 많이 남아있는데 여사님 눈에만 갑옷이 안보였던 듯(...). [13] 당시에야 근대적 민족 개념이 정립되지 않았다고 하지만 [14] 그에 비하면 이슬람교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언급이 없다. 다른 저서인 십자군 이야기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 등에서는 이슬람교 그리스도교보다 더 인간적이었다거나 유연했다는 평가를 곁들이기도. 뭐라고요?? [15] 미트라를 태양신이라고 쓰기도 했다. 사실 미트라가 광명의 신이긴 하지만, 미트라교와 거의 맞먹는 교세를 가졌던 '솔 인빅투스'라는 다른 태양신을 믿는 집단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쓰면 오류가 된다. [16] 예를 들어 필리푸스 아라부스는 최초의 그리스도인 황제라는 설이 있지만, 시오노 나나미의 경우 필리푸스의 행적은 완전히 생략해 버려서 그저 운좋게 로마황제가 된 아랍인이 되어버린데다가, 그리스도인 황제설 또한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17] 게다가 상당 부분을 생략했다. [18] 정작 제노비아를 굴복시킨 아우렐리아누스는 제노비아를 고평가했다. [19] '오리엔트에서도 계몽 군주가 나오는구나'라는 말을 역으로 생각해보면, '오리엔트 따위에서는 학문과 예술, 기술을 중시하는 계몽 군주가 나올 수 없는데 이런 인물이 있었어? 거참 희한하네.' 라는 소리다. [20] 역사적으로 사산 왕조는 로마 황제를 사로잡거나 죽일 만큼 강력한 군사력을 지녔다. [21] 바로 이점에서 카이사르와 티베리우스가 라인강 동안부터 엘베강 서안까지의 영토를 포기한 것이다. 물론 아우구스투스는 대 드루수스와 티베리우스로 하여금 이들을 정복하였고 실제로 그 일대의 속주화 작업만 남겨둔 상태였다. 하지만 바루스가 무려 3개의 군단과 함께 전멸하며 그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고 바루스 이전으로 돌아가려면 얼마나 많은 돈과 군단병들의 노력이 필요하며 까딱하면 바루스의 전례를 되풀이 할 수 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티베리우스는 시민들과 원로원 의원들 그리고 게르마니쿠스가 뭐라고 날뛰는 쿨하게 씹고 포기해버린다. [22] 단, 필룸 자체는 이미 제국 전성기인 2세기부터 이런 변화를 시작하고 있었다. [23] 아우구스투스가 제정했던 간통죄에서 예외적으로 노예와의 성관계는 합법이었다. 고대 이래로 여성 노예는 노동력뿐만 아니라 주인의 성적 만족을 위한 도구였다. [24] 출처: 로마, 약탈과 패배로 쓴 역사/ 매슈 닐 저/ 박진서 역/ 마티 [25] 일례로, 현대 한국의 휴전선에 대한 선형 방어는 휴전선이 뚫리는 바로 그 순간 북한군이 종심인 서울에 진입해버린다는 전략적 열세 때문에 강요받고 있는 상황이다. 만약 부산이나 광주가 한국의 수도였다면 어차피 뚫고 들어와 봐야 경기도에서 주저앉을 북한군 상대로 지금 같은 징병제는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프랑스는 저지대가 점령당하면 파리가 코앞이라는 약점 때문에 마지노선과 에미엘 요새를 건설해야 했고, 그것이 얼마나 무용한 전략이었는지도 스스로 6주 만에 패망하며 똑똑히 입증해 보였다. [26] 카라칼라는 군사적인 측면에서의 재능은 훌륭한 편이었다. 정치적 재능이 전무한 건 문제였지만. [27] 물론 이미 12권 집필 시기부터 여사의 건강 상태가 몹시 나빠졌다는 점을 감안해야 겠지만, 기독교를 까는 부분에서는 여전히 성실한 조사를 보인다는 점을 봤을 때는 매우 의문스럽다. [28] 그런 소린 현대 한국군이 창군 당시의 카빈 소총과 민무늬 군복을 안 쓴다고 한국군 아니라는 소리와 똑같다. [29] 오죽 심하면 저 정도 영웅 판타지를 숭상하는 사람이 어떻게 평범한 이탈리아인 의사와 결혼했을까 하는 비아냥까지 있다. [30] 카이사르를 과도하게 이상화했다는 평을 받는 콜린 맥컬로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도 이 정도로 미화하진 않았다. [31] 당장 로마에서 가장 큰 문제였던 퇴역병의 퇴직금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아우구스투스였다. [32] 사파비 제국의 이웃이었던 오스만의 데브시르메 제도를 본뜬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33] 6조, 의정부 등의 행정기구는 당나라의 3성 6부제에 그 근간을 두며, 본래 고구려와 백제 등의 고유한 인사법이었던 한쪽 무릎만 꿇고 앉는 "호궤"라는 절 방식 역시 고려시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중국식 절에 완전히 밀려났다. 보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유럽은 시대에 따라 프랑스어, 라틴어, 스페인어가 병용된 반면 동아시아에서 국가간에 통용되었던 문자는 한자 뿐이었다. [34] 다만 세금을 거두기 위한 토지대장에는 민족이 기록되었는데, 이건 혈통이 아니라 모국어가 기준이었다. [35] 쉴레이만 1세 시대의 명재상인 이브라힘 파샤만 해도 그리스계이고, 17세기 후반에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황제를 대신해 제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했던 쾨프륄뤼 가문도 알바니아 출신이다. [36] 물론 이 수십 가지를 모든 신민들에게서 다 거두어들인 것은 아니고, 각자 내야 하는 세금과 내지 않아도 되는 세금이 다 달랐다. [37] 대표적인 것이 데브시르메 징집자를 낸 가정. [38] 심지어 이 대목에서 '그러니까 대중종교가 될 수 있었다'라는 식으로 거의 조롱에 가까운 비평을 곁들인다. [39] 그리스 로마 신화 내에서는 신이 정한 규범을 어겨서 벌을 받은 예가 굉장히 많이 존재한다. 신전에서 부적절한 연애행위를 한 히포메네스와 아탈란테, 부지 중이었다고 하더라도 존속 살해와 근친상간을 저지른 오이디푸스, 신들에게 불경죄를 지은 아라크네와 아르테미스가 목욕 중인 여탕(...)을 무단 침입했던 악타이온 등... 규범을 어겨서 저주를 받고 인생이 망한 경우는 수도 없이 많다. [40] 당장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잊을만 하면 튀어나오는 것이 필멸자로서의 분수를 넘는 인간의 교만을 의미하는 휴브리스라는 개념인데. 이런 것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었다면 일신교의 보수적, 도덕적 특성을 자기 반일신교적 가치관을 써먹는 데 다신교의 우월성이랍시고 윤리도덕 관념과의 결부론을 주장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41] 심지어 이 여성의 아버지는 호민관이었으며, 아피우스가 일을 꾸미고 있었을 때는 전쟁터에 나가있는 상태였다! [42] 심지어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는 그 당시 12표법의 제정을 위해 소집된 두 차례의 10인 위원회, 데켐비리에 두 번 다 참여하고 있었다! [43] 시오노 나나미는 이 부분을 묘사하기 전에도, 로마 왕정의 마지막 왕인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의 몰락의 직접적인 계기인 루크레티아 강간 사건에 대해서도, '이미 수명을 다한 왕정의 숨통을 끊어놨을 뿐'인 사건으로 의미를 축소하고 있다. 강력한 왕권이 부당하게 행사되어 벌어진 비극이라는 사건의 본질적 측면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44] 라틴계 용병들로 이루어진 용병단이었는데, 자신들을 환대해준 메시나 남성 주민들을 모두 죽이고, 재산을 약탈하고, 여성 주민들은 모조리 노리개로 삼는 천인공노할 배신을 저질렀다. [45] 정말로 알렉산드로스나 한니발보다 한 수 위라면, 왜 술라가 이들보다 지명도가 더 낮은 걸까? [46] 심지어 아라우시오 전투라는 이름조차 3권 내내 전혀 등장하지 않아서, 3권만 읽고 있으면 도대체 로마군이 얼마나 어느 정도로 게르만족들한테 패배했는지를 전혀 알 수 없는 지경이다(...) [47] 출처: 어메이징 세계사/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50~51쪽 [48] 이런 점에서는 차라리 소설 마스터스 오브 로마 1권에서 묘사한 아라우시오 전투의 모습이 더 역사적 사실에 맞는다. 이 아라우시오 전투가 로마에 가한 충격은 매우 컸으며,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로마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은 로마 시민들은 모두 겁에 질려 로마 광장 한복판에 사람을 산 채로 파묻는 인신공양을 할 정도였다. 참고로 로마인들은 시오노 나나미가 일관되게 서술하듯 인신공양을 매우 경멸했다. 로마인들이 인신공양을 전투에서 패배하고 실시한 대표적인 전례가 한나빌이 칸나에 전투에서 로마에 궤멸적인 타격을 입혔을 때이다. 즉 아라우시오 전투는 로마인들에게 한니발급 공포를 느끼게 한 것이다. [49] 참고로 로마군은 선출직인 집정관이나 법무관이 지휘했으므로 정계 진출에는 군 경력이 거의 필수적이었다. [50] 가령 만일 게르만족이 카이사르를 패주시킨 뒤 불만을 품은 친로마파 갈리아족을 패배시켰으면 갈리아 전역은 게르만족이 제패하게 되었을 것이다. [51] 다만 어디까지나 게르만족과 비교해서 보면 쉽다는 거지 사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제패가 쉽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고 당시 로마인들 입장에서는 분명히 굉장한 군사적 업적인 건 사실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카이사르 숭배에 반발할 수는 있어도 그 때문에 멀쩡한 카이사르의 업적을 깎아내리는 수준. [52] 정확히는 크라수스가 물주가 되어 카이사르를 밀어주고 카이사르가 크라수스를 위한 정책을 펼치는 식의 관계다. [53] 또, 나중에 가면 아스테릭스의 후손이 로마를 위해 봉사하는 일도 있다. [54] 대부분 뜬소문이거나 카이사르와의 개인적인 원한에 의한 흠집내기에 가깝긴 했다. [55] 당시 일반적인 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공공연하게 권력의 정점인 집정관이 아니라 그 후에 속주 총독으로 부임해서 한 몫 제대로 챙기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말하고 다녔다. [56] 병사들의 가장 큰 불만은 필룸 구입비였다. 가격은 비싼데 1회용이다 보니 봉급에서 엄청나게 빠져나갔기 때문. 하지만 로마군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는 것이 대기병 무기가 필룸 말고 딱히 없었고, 또한 각 군단별 요격 임무 수행 과정에서 대개 적의 규모는 로마군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에 사상자를 최소화하면서 임무를 마치려면 적의 대열을 무너뜨리고 전투에 임해야 했는데, 필룸 말고 딱히 해결책이 없었다. [57] 노역을 빠지기 위해 백인대장에게 준 뇌물규모, 개인생활과 저축에 부담이 될 만큼 과도할 정도의 장비값(물론 로마군도 이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어서 중간전역해도 위로금. 명예전역하면 퇴직금을 주도록 되어 있긴 했다), 월급 체불, 분명 20년 복무를 약속해놓고 만기전역자를 묶어놓는 식으로 지키지 않는 점, 군기를 잡는다는 명분으로 이뤄진 가혹한 체벌 등 [58] 착각했을 수도 있으나, 로마를 열렬히 사랑하는 시오노 나나미가 자칫 로마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독자들한테 줄까봐 일부러 왜곡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서 묘사되는 로마는 그야말로 흠잡을 곳이 없는 완벽한 지상낙원의 모습이다(...). [59] 3년 혹은 15년 근무 후 퇴직한 경우도 나타나는 걸 보면 대부분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잔류했을 것이다. [60]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 작중 내내 중무장 기병들을 돈만 잔뜩 들이고 아무런 쓸모도 없는 병과라고 비하하고 있는데, 이러한 서술의 원인은 그녀가 주로 참조한 책인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이 쓴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로마 기병들은 사람과 말이 모두 갑옷으로 감싼 동방의 중기병들을 가리켜 행동의 자유를 제약한다고 경멸했다"라는 문장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오늘날에 와서 내용의 상당 부분이 사실과 달랐다고 지적을 받고 있는 등 문제가 많아서 그대로 믿기가 어렵다. 그리고 에드워드 기번의 서술과는 정반대로 로마 제국 후기로 가면 로마군에도 중무장 기병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운용했다. [61] 영화 이글에서 브리타니아 방어선의 상태가 영 막장인 걸로 나오는데, 최전선 전초기지인 탓도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이런 이유 때문이다. 게르마니아 방어선이나 도나우강 방어선, 파르티아와 직접 접한 동방 전선 등을 제외하고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덜한 지역은 결국 방치될 수밖에 없었다. [62] 이때는 오현제를 비롯하여 로마의 국력이 최전성기에 달했던 시절이었다. [63] 쉽게 설명하자면 로마의 관리들조차 글씨를 제대로 읽거나 쓸 줄을 몰랐다는 뜻이다! [64] 다만 이 점은 참작의 여지가 있다. 현대인들은 "자연재해가 빗발치는데 주술행위만 했다"라며 이상하게 여길 수 있겠지만, 당대 로마인 입장에서는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들은 미신을 신봉하는 경향이 강했고[67], 만사가 신의 뜻대로 이뤄진다고 확신했다. 제국 각지에서 지진이 일어나는 현상 역시 신의 징벌이라고 여겨 민심이 흉흉했을 테니, 그들을 달래는 차원에서 시빌라의 예언집을 참고하여 제사를 지내는 등의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실제로 당대 역사가들은 이 일화에 대해 어떠한 비판도 가하지 않았다. [65] 당장 책의 구성을 살펴보면 지면의 대부분이 서로마에 할애되어 있고 동로마 측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물론 첫 번째 장에서 스틸리코가 주인공 격으로 나오는 만큼 동로마 쪽에 대해서는 적게 다루어질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2장에서 스틸리코 시대의 동로마에 대해 다룬다거나 하지 않고 그대로 서로마의 멸망으로 넘어간다는 것. [66] 시오노 나나미는 이 점을 로마인 이야기 전반부에서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