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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07-23 21:12:26

대서양 방벽

1. 개요2. 구조3. 배경4. 역할5. 완전히 건설되었더라면?6. 기타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군 프랑스에 상륙하는걸 저지하기 위해 나치 독일이 만든 방어선이다.

전체 구간은 명목상으로는 프랑스의 비스케이 만에서 네덜란드 독일의 국경까지, 실제적으로는 노르망디에서 시작하여 파 드 칼레까지 이어지는 총 연장이 3,860km에 이르는 방어선이다.

2. 구조

방어선의 특성은 가장 강력하게 방어된 파 드 칼레 지역은 마지노 선에 버금가는 콘크리트 요새선이지만, 노르망디를 비롯한 나머지 지역은 교통 요충지나 상륙하기 딱 좋은 곳에 원형 진지를 만들고 해안포 등의 직사화기나 토치카들을 배치하며, 해안의 원형 진지를 지원해줄 포병 진지를 배치한 후, 그 간격을 각종 장애물로 메꾼 방어선이다. 따라서 방벽이라는 이미지를 가진 곳은 파 드 칼레의 일부지역에 한한다.

이때 완성된 벙커와 방어진지들은 진정 크고 아름답다. 실제로 그 당시 유적을 가보면 그때 철근 공구리 쳐놓은 방벽들이 금하나 없이 멀쩡한데다가 입이 딱벌어질 정도의 규모를 자랑한다. 대표적으로 프랑스 해안에 있는 해군 유보트 기지의 경우는 원래 계획의 축소 버전인데도 그 유명한 영국 공군의 톨보이 폭탄을 방어해냈다. 1차 격벽은 뚫었지만 2차 격벽은 생채기만 조금 나고 끝났다.

3. 배경

대서양 방벽을 만들게 된 이유는 영국 본토 항공전의 총체적 실패로 더 이상 영국을 점령할 수 없으며, 크릭스마리네의 사정으로 인해 해상에서 연합국 해군 전력을 차단해 상륙을 사전 저지하는 것도 너무나 힘들어졌고, 동부 전선이나 아프리카 전선등에서 독일군이 밀리기 시작하면서 프랑스에 주둔한 부대를 빼서 증원군으로 배치하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에 연합국이 프랑스에 상륙할 때 마땅히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막상 건설을 시작하고 보니 아돌프 히틀러를 비롯한 비전문가의 간섭이 많아지고, 군수장관 알베르트 슈페어가 기를 썼음에도 독일 내의 자원수급에 문제가 생기다보니 다량의 콘크리트, 철강이 필요한 요새의 특성상 건설이 지지부진할 수 밖에 없었으며, 결정적으로 이런 방어선을 당장 전선에 필요한 물자를 대량으로 소모하면서 만들 필요까지는 없다는 독일군의 상당수 고위층의 의견 및 프랑스를 휴식을 하고 관광이나 하는 곳으로 여긴 현지부대의 게으름으로 인해 호들갑을 떤 것에 비하면 공사의 진척도는 바닥을 달렸다.

그러나 북아프리카 전선이 독일의 패배로 끝나면서 갈 곳을 잃어버린 육군 원수 에르빈 롬멜 장군이 프랑스에 새로 만들어진 B 집단군의 사령관이 되면서 분위기가 좀 바뀌게 된다. 원래 롬멜 장군은 대서양 방벽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나, 연합군이 상륙해서 교두보를 만들면 더 이상 이걸 밀어낼 수 없다는 결론을 도출한 후 열성적인 태도로 바뀌었다고 한다. '상륙 24시간 내에 적군을 바다로 밀어내지 못하면 서유럽은 끝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4. 역할

막상 필요한 건설물자와 장비는 히틀러가 중시했던 파 드 칼레와 영국 프랑스 사이에 있는 채널 제도에 집중되었으므로 위의 두 곳은 중장갑을 갖춘 해안포 진지[1][2]를 장비하는 등 대서양 방벽 중에서도 가장 완벽한 방어진지가 되었지만 실제로 연합군이 상륙할 노르망디는 물자도 제대로 못 받아서 제대로 된 요새시설을 만들지 못했다. 해군과 육군이 섹터를 나눠 운용한 해안포 진지[3]들 중 육군 해안포 부대 운용과 진지 공사 및 경계근무에 동원된 육군 병력 상당수가 2~3선급 고령층 예비역 및 외인부대원들이라 사기와 노동의 질이 떨어졌던 점도 이에 한몫했다. 설상가상으로 롬멜 장군이 프랑스로 온 지 몇 개월도 지나지 않아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시간까지 촉박했으므로 롬멜 장군도 몇 가지 간이 방어시설에 추가를 한 것 외에는 크게 방어선을 강화시키지는 못했다.

근데 희한한 것은 그 히틀러가 주요 상륙지는 노르망디가 될것이라고 예측한 것이다. 장군들과 제독들이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장담하자 히틀러는 파 드 칼레로 맘을 바꾼다. 게다가 파 드 칼레는 연합군이 노르망디 주변에 구성된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할 때 후방에서 습격을 받아서 점령당했고, 채널 제도는 종전 때까지 무시당한 것을 본다면 엄청난 양의 물자와 장비가 엉뚱한 곳에 사용되었다고 봐도 된다. 물론, 그 방어 시설 때문에 상륙하기 최적의 장소인 파 드 칼레를 연합군이 포기했고, 여건이 보다 좋지 않은 노르망디를 택하게 만들어 상륙 단계에서 각종 애로사항을 유발했으므로 바보짓이라 할 수는 없다.

사실 "파 드 칼레와 채널 제도에 방어력을 집중했는데 정작 연합군이 상륙한 것은 노르망디였으므로 삽질이었다" 식의 해석은 지나치게 결과론적인 것이다. 문제는 연합군이 서유럽 탈환을 위해 유럽 본토에 상륙을 시도할 경우 나치 독일이 방어해야 할 대서양 전선의 길이가 수천킬로미터에 달했다는 것이고, 당연히 이 기나긴 전선 전체를 요새화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가장 위험한(=연합군의 입장에서는 가장 상륙여건이 좋은) 지점인 파드칼레를 요새화함으로써 보다 상륙여건이 나쁜(=독일 입장에서는 덜 위험한) 지점을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데 성공했다면 이는 나름대로 성공한 투자라 볼 수 있다.

단, 연합군측이 자기들만큼이나 멍청하게 파 드 칼레가 요새화된 상황에서도 우직하게 들이밀 것이라고 착각했는지 다른 지역에 방어망을 구축하기 위한 투자에 비해 파 드 칼레 지역에 지나치게 몰빵했다는 점, 2차대전 중 유일하게 점령당한 영국 영토라는 상징성 이외에는 별 의미가 없는 채널 제도에 집착한 점(굳이 변명하자면 유럽 본토에 가까운 채널 제도를 연합군이 탈환하여 거점으로 삼는 것을 우려했다고 할 수 있겠으나, 어차피 대륙 본토에 직접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성공시킬 수 있는 상황에서 의미있는 우려는 아니었다.)등은 확실히 구제불능의 삽질이 맞다.

오마하 해변 같은 경우 대전차 장애물이나 상륙정 접안 저지용 부비트랩 바리케이트 등 상대적으로 구색만 갖춘 수준으로도 어느 정도 상륙부대에 피해를 강요할 수 있었다.

일각에서 방벽 때문에 상륙 이후 연합군을 한달여간 저지할 수 있었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틀린 것이다. 노르망디 지역에 교두보가 확보된 이후에는 바다를 향해 구축된 진지의 전투력은 전혀 무의미해지고, 실제 전사적으로도 프랑스 전역에서 연합군의 진공을 저지한 것은 내륙으로부터의 증원부대지 해안방어병력이 아니었다.

5. 완전히 건설되었더라면?

만약 노르망디 지역에까지 본격적으로 방벽 건설이 되었으면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가능성은 낮다. 설령 방벽이 완성되고, 또 연합군이 그 방벽에 상륙을 감행했다 하더라도 공수작전 이후 새벽에 기습상륙을 펼친 마당에 요새화된 해안진지의 유효성은 상당히 반감될 수 밖에 없다. 물론 정작 상륙작전을 실시한 당시 상황을 보면 완벽하게 요새화시켰다면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을수도 있고 최소 어느 한 해변은 상륙실패가 발생했을 것이다.

요새선은 공수부대의 침투로 무력화되기 쉽다는 2차대전 초기 서부전역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훈은 차치하더라도, 당장 연합군의 항공폭격과 함포사격은 막기 어렵다. 항공기야 영국 본토에서 연료 낭비하며 날아와야 해서 루프트바페가 대응할 시간이 있다곤 해도. 무엇보다 당시 전황상 이탈리아 전선이 붕괴되어 가고 있던 점을 생각하면 설사 프랑스에서의 제2전선 전개를 막는다 하더라도 남부유럽 방면의 압력으로 되돌아올 뿐이다. 어차피 앞은 소련 뒤와 중앙은 연합군이 오는 상황이라 독일은 엎어치든 메치든 결국 큰 그림에선 의미가 없는 셈이었다.

당시 독일의 입장에서 보면 연합군의 대서양 해안 상륙을 막아내봤자 패배는 막을 수 없고 오히려 상황이 더 안 좋아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대서양 상륙->연합군의 서유럽 진격을 막아낸 결과 소련군이 서유럽까지 진격했다면 이거야말로 독일 입장에선 최악의 상황이 된다. 당시 독일에게 제일 심하게 당했던 소련이 대독 문제에서 가장 엄격한 입장이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괜히 당시 동부전선의 독일군 지휘관들이 소련군의 진격을 막아내면서 독일인을 서부의 연합군 점령지로 피난시키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결국, 동부 전선에서 소련군의 진공을 막아낼 수 없다면 대서양 전선의 방어 성공은 전략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거나 오히려 나쁜 결과만 가져오게 되는 것.

6. 기타

연합군이 대서양 방벽을 공략하기 위한 수단으로 연구한 것이 퍼니전차 시리즈였다. 디에프 상륙작전의 실패 원인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기갑 장비의 활용이 적절치 않았고, 지형 역시 기존의 전차로는 제대로 된 운용이 어렵다는 결론을 얻은 영국군은 대서양 방벽의 각각의 공략 환경에 맞춘 기갑 장비를 연구했고, 이를 대표적인 기갑 전문가이자 군내 이단아였던 퍼시 호바트 소장에게 맡겼다. 이렇게 만들어진 퍼니전차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영국군의 대서양 방벽 공략을 더욱 편하게 했고 상대적으로 적은 희생으로 상륙에 성공했다. 물론 운도 따랐다. 반대로 이질적인 퍼니전차의 도입을 거부하고 셔먼 DD 전차만을 도입한 미군은 사전 포격의 불충분함 + 독일군의 강한 저항에 더해 셔먼 DD의 운용 미숙으로 대부분이 상륙 전 수장되면서 화력 부족으로 많은 희생을 치르며 오마하 해변을 공략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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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때 연합군은 여기에 쓰인 방벽 구조물중 철근빔으로 만들어진 대전차장애물을 활용하여 '헷지 차퍼' 혹은 '헷지 블로 커터'라는 전차 장비를 제작했다. 미 육군 제2 기갑 사단의 커티스 컬린(Curtis G. Culin) 하사가 제작했는데, 이는 노르망디 내륙에 길과 밭의 경계용도로 심어진 잡목림(전차도 돌파할수 없을 정도로 빽빽했다.)에 애를 먹어서이다. 대중매체에서 그려지는 모습으로 서든 스트라이크 4의 연합군 두번째 캠페인인 헤지로우 전투에서 셔먼 전차에 부착되어 등장한다.



[1] H급 전함에 들어갈려 했던 40,6cm SK C/34를 갔다박은, 비스마르크 추격전 당시 전사한 비스마르크 함의 함장 에른스트 린데만 해군 대령의 이름을 딴 크고 아름다운 요새화 해안포 진지인 린데만 포대 등. 더 충격적인것은, 린데만 포대 비슷한 위치에 지어진 포대들은, 그 위치에서 영국까지 사거리가 닿았다. 그중 린데만 포대는 영국을 향해 무려 2,200발 가량의 16인치 포탄을 쏟아부었다. [2] 린데만 포대같이 40,6cm SK C/34를 쓴 포대들은, 세상에서 가장 큰 해안포대 진지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3] 노르망디는 육군이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