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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8 18:37:23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

1. 개요2. 오류
2.1. 상권2.2. 하권
2.2.1. 4장. 대국 병립의 시대2.2.2. 5장. 파워게임의 세기 2.2.3. 6장. 반격의 시대2.2.4. 7장.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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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인 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서적.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5세기부터 지중해 세계에 황혼이 내린 16세기 후반까지를 주로 다루고 있으며, 이슬람 세력의 팽창과 프랑크 왕국에 의한 732년의 이슬람 팽창 중단. 이후 19세기까지 약 1000년 동안 계속된 이슬람 세계의 기독교 세계에 대한 해적행위 및 각종 군사행동과 이에 대항한 기독교 유럽의 움직임을 주로 다루고 있다. 대체로 이슬람측이 강세고 기독교측이 약세인 상황이 이어진다.

제목에 비해 다루지 않은 내용이 많은데, 특히 동로마 제국과 관련된 서술이 그렇다. 물론 상권의 '머리말' 앞에 '해적' 이라는 제목의 글을 실어 지중해의 해적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다루겠다고 안내를 했지만 그래도 제목만 봐서는 해적 이야기라는 느낌을 받을 수가 없으며[1], '로마 멸망' 이야 서로마가 망한 476년으로 보는 견해가 있긴하니 그렇다 쳐도 남은 반쪽인 동로마를 다룰 때는 전후 사정을 확실히 얘기해 주지 않고 안 좋은 부분만 집중적으로 부각시킨다.

2. 오류

양이 많아서 각 장별로 나누기로 하며, 여러 장에 걸쳐 나오는 오류는 그것이 처음 나온 장에서 한꺼번에 서술한다.

2.1. 상권

하권만 구입하시려는 그나마 현명한 분들을 위해 상권의 내용을 '전부다' 말씀드리면서 리뷰를 마치고자 한다.

'서로 자기네 종교가 유일하다고 믿는 이성이 마비된 기독교도들과 이슬람교도들이 북아프리카를 이슬람교도들이 점령하면서 지중해에서 맞부딪친다. 이슬람교도들은 해적들로서 기독교도들을 납치해서 '목욕탕'이라고 불리는 집단수용소에 처넣는다. 기독교도들은 많은경우 실패로 끝난 무력시위와 함께 돈을 주고 포로들을 사오는 방법으로도 대응한다. 자세한 내용은 시오노 나나미의 책 <콘스탄티노플 함락>,<바다의 도시 이야기 상>,<로도스섬 공방전>,<레판토해전>,<바다의 도시 이야기 하> 등등을 다 읽어보기 바란다[2]
예스24 리뷰

이슬람은 기독교도를 '신앙심이 없는 개' 라고 멸시하기만 하는 악당이고 기독교도는 이슬람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피해자처럼 여겨진다. 실제로 십자군 전쟁 이전까지 기독교 세력은 이슬람에 철저하게 밀리는 입장이었지만, '칼 또는 코란' 이라는. 많은 학자들의 비판을 받고 있는 문구를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적어둔 것은 비판받을 만 하다. 단 이슬람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을 서술했다며 종교재판 시기에 살기 위해 이슬람으로 개종한 사람이 다시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을 거부한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이건 이슬람 세계가 아니라 스페인. 다시 말해 기독교 쪽의 문제다.

2.2. 하권

2.2.1. 4장. 대국 병립의 시대

12~13쪽에서 셀주크 제국의 수도는 코니아였지만 오스만 제국은 부르사로 천도했다며 이슬람 세계의 중심이 점차 유럽으로 옮겨졌다고 서술했는데, 부르사를 수도로 정했을 당시 오스만은 대제국이 아니라 손바닥만한 영토밖에 갖지 못한 작은 나라였기 때문에 이슬람 세계의 중심이라는 말은 맞지 않는다. 굳이 중심을 찾아야 한다면 오히려 칼리프를 옹립하고 있던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로 보는 게 적절하다.

13쪽에서 비잔틴 제국의 수도의 '올바른 명칭' 이 그리스어인 콘스탄티노폴리스라고 소개했는데, 진짜 '올바른 명칭' 은 콘스탄티 어쩌고가 아니고 노바 로마(Nova Roma)다.

14쪽에서 콘스탄티노플을 투르크어로 발음한 것이 이스탄불이라고 소개했는데, 이 둘은 어원이 전혀 다르다. 이에 대해서는 항목을 참고하고, 오스만 시대에는 콘스탄티노플을 진짜로 투르크어로 발음한 '코스탄티니예(Kostantiniye)' 라는 이름이 많이 쓰였다.

15쪽에서는 티무르에 대해 소개하며 오스만이 그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계속 서진했고 수도도 유럽으로 옮겼다고 서술했는데, 정작 당시의 술탄 바예지드 1세는 티무르를 두려워하기는커녕 만만한 놈 내지 듣보잡으로 여겼다. 게다가 오스만이 이전까지 티무르에게 호되게 당한 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무섭다는 이유만으로 수도를 옮긴다는 것도 어색하다. 더불어 '소아시아가 몽골화하면 오스만투르크의 존속 자체가 위험해진다' 라는 구절이 있는데, 티무르 자신도 무슬림이었기 때문에 티무르 제국이 소아시아 전체를 정복한다 쳐도 '몽골화' 가 될 일은 없었다. 따지고 보면 티무르 제국을 몽골 제국이라고 부르는 것부터가 이상한 일.

16쪽에서는 로마인 이야기에서도 여러 번 반복해서 서술했던, 오리엔트에서 패권이란 강력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멸하지 않는 조건으로 연공과 병력 제공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15세기 초 당시 오스만의 신하국 가운데에는 세르비아 비잔틴 제국도 있었는데, 얘네들이 언제부터 '오리엔트' 였던가.
또 오스만이 앙카라 전투에서 대패하자 '트라키아도 마케도니아도 불가리아도 연공 따위는 모른 체하기로 하고' 라는 구절이 있는데, 당시에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라는 나라는 없었으며 불가리아는 이미 1396년에 완전 정복되어 오스만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18쪽에서는 오스만 제국이 수도와 그 주변만 영유하고 있는 비잔틴 제국을 굳이 멸망시켜야 할 이유는 없었다고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이유가 충분히 많았다. 일단 오스만령 아시아와 오스만령 유럽 사이에 비잔틴이 끼어 있었기 때문에 수도를 에디르네와 부르사 두 군데에 두어야 했고[3], 1366~1367년의 사부아 십자군이나 1443~1444년의 바르나 십자군처럼 콘스탄티노플을 오스만에 대한 전진 기지로 삼으려 했거나 아예 삼아버렸던 사례도 있다. 즉 오스만으로서는 두 군데의 수도를 하나로 합하여 지방 통치를 보다 편하게 하는 동시에, 기독교 군대가 콘스탄티노플에 느닷없이 드롭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할 필요가 충분히 있었다. 또한 메메드 2세 자신으로서는 투르크계 귀족들에게 밀려 왕권이 약하던 이전까지와는 달리 전제군주로 군림하기 위한 위업을 세울 필요가 있었으며, 쇠퇴해가는 비잔틴 제국을 아예 지워버리고 자신이 '로마 황제' 로서 새로운 로마 제국을 다시 일으키겠다는 야심도 있었다.

20쪽에서는 무라드 2세 시대의 재상인 찬다를르 할릴 파샤(Çandarlı Halil Pasha)[4]가 콘스탄티노플을 그대로 둔 채 오스만이 동지중해 일대의 패권을 장악한다는 이른바 '팍스 투르카' 에 심취한 인물이었다고 소개되어 있는데, 일단 팍스 투르카 같은 것은 없었으며 할릴이 여기에 '심취' 된 인물도 아니었다[5]. 당시 오스만 제국의 정계(政界)는 창건자 오스만 1세를 도와 나라를 일으키고 확장했던 투르크계 개국공신 세력과 더불어 무라드 2세 시대부터 성장하기 시작한 데브시르메(Devshirme)[6] 출신 관료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할릴 파샤는 개국공신 세력의 대표자 같은 인물이었고, 오스만 정계를 현상유지시키기 위해 군사적으로도 현상 유지를 원했던 것 뿐이다. 실제로도 데브시르메 세력의 보좌를 받으며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메메드 2세는 그 후 사흘 만에 할릴 파샤를 처형함으로써 투르크계 개국공신들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던 시대가 끝났음을 선포했다.

27쪽에서는 메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이름을 이스탄불로 바꾸었다고 서술되어 있지만, 그런 적이 없다. 중,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서도 간혹 이렇게 소개되는 걸 보면 흔한 오류.

28~29쪽과 43~44쪽, 293쪽에서는 오스만 제국에는 로마 제국과 달리 상비군이 없었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오스만과 관련된 오류는 수없이 많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가히 최악의 오류라고 부를 만한 것 No. 1.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을 예로 들며, 이 때 동원된 16만 군사 가운데 정규군 비슷한 것은 3분의 1도 채 안 되며 나머지는 오스만의 요구에 따라 신하국들이 파견한 군사와 전리품을 기대하고 모여든 오합지졸들이 대부분이었으므로 메메드 2세가 믿을 만한 군사들이라곤 예니체리밖에 없었다고 소개되어 있다[7] 하지만 오스만에는 시파히라는 상비군이 멀쩡하게 있었다. 시오노가 좋아하는 로마 제국으로 비유하면, 군단병은 어디론가 팔아먹고 '두 차례에 걸쳐 다키아를 원정하고 파르티아까지 밀어붙인 트라야누스 황제가 정말로 믿을 수 있었던 군대는 1만 명 가량의 프라이토리아니뿐이었고 그 나머지는 대부분 전리품을 기대하고 모여든 야만족 용병들이었다' 라고 쓰는 거나 마찬가지다. 무슨 서로마 제국 말기도 아니고[8]...

30쪽에서 메메드 2세가 세르비아를 정복한 해는 1455년, 보스니아가 멸망한 해는 1456년이라고 되어 있는데, 각각 1456년, 1459년으로 고쳐야 한다.

43, 175, 201, 359, 367쪽에서는 오스만의 국기를 '붉은 바탕에 하얀 반달이 새겨진' 것으로 묘사했는데, 시오노가 묘사한 것과 같은 국기는 이 책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도 않은 1843년에야 제정되었다. 그 이전의 국기는 이렇게들 생겼다.

48쪽에서는 오스만이 남이탈리아의 오트란토를 정복하기는 했지만 영유하기는 포기하고 버렸다고 했는데, 오트란토가 함락된 이듬해인 1481년에 메메드 2세가 죽었다. 그리고 오스만에서는 황제가 죽거나 노령이 되면 황자들끼리 황위를 둘러싸고 싸움을 벌이는 법이 있었기에 일시적으로 무정부 상태가 되었는데, 오트란토를 버린 것처럼 보인 것은 이런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책에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86쪽과 104쪽에서는 책에서 '쿠르토골리' 라는 이름으로 언급된 쿠르토올루 무슬리히딘 레이스(Kurtoğlu Muslihiddin Reis)의 행적에 대해 잘못 소개되어 있다. 1517년에 오스만 함대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고 서술한 것이 그것인데, 책에서는 당시까지 오스만 함대는 기독교 국가들과 제대로 해전을 벌일 힘이 아직 없었기 때문에 해군 총사령관이라고는 해도 그 활동 지역은 동지중해 연안이었으며 그렇기에 기독교 국가들의 기록에서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이미 바예지드 2세 베네치아 공화국을 쳐부수고 모도네와 코로네 섬을 정복한 사실이 있기 때문에 당시 오스만 함대가 대규모 해전을 벌일 힘이 없었다는 부분은 잘못된 것. 그런데 기독교 국가들의 기록에서 잘 안 보이게 된 것은, 쿠르토올루가 실제로 임명된 관직이 해군 총사령관직이 아니고 맘루크 왕조를 정복한 다음에 신설된 홍해 함대의 사령관직이었기 때문이다[9][10].

2.2.2. 5장. 파워게임의 세기

109, 166, 167쪽에서는 프랑스의 세종대왕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수아 1세를 부당할 정도로 과소평가하는데, '전쟁에서도 외교에서도 당대 최고의 인물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군주' 라 하며 말년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편히 쉴 곳을 제공한 것 정도를 유일한 업적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프랑수아는 미술은 기본이고 문학, 건축, 언어, 교육 등 많은 분야에서 엄청난 업적을 남긴 문화군주로, 아직 중세 티가 나던 나라를 한 세대만에 르네상스로 끌어올린 왕이다. 즉 전쟁에서도 외교에서도 당대 최고의 인물은 아니었다가 아니라 '전쟁과 외교만은 콩라인이었던 명군' 이라고 하는 게 실제에 훨씬 가깝다. 한편 166~167쪽에서는 베네치아 화파를 찬양하다시피 하며 프랑수아가 베네치아 화가에게 초상화를 의뢰하지 않았다며 비난했는데, 프랑스 국내 화가나 다 빈치 외에 프랑수아의 초청을 받아 와 있는 이탈리아 화가도 훌륭한 초상화를 그려낼 수 있는데 굳이 베네치아한테 팔을 벌릴 필요가 없었을 뿐이다.

113쪽에서는 쉴레이만 1세가 즉위하자마자 로도스 섬 공략에 나섰다며, 적에 맞서 승리를 거두고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국민들의 사기를 북돋우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추측했는데[11], 실제로는 그런 이유가 아니라 셀림 1세가 원정 준비를 상당히 진행해둔 채 서거한 상태를 이어받은 것이다. 즉 선제의 유지를 실현한 것. 그리고 쉴레이만의 첫 번째 원정은 1522년 로도스가 아니라 1521년 베오그라드 원정이다.

114쪽을 시작으로 '시남' 이라는 인명 표기가 계속 보이는데, 시난(Sinan)이라는 이름은 있어도 Sinam은 없다. 덧붙여 이 책 전체에 걸쳐서 오스만 측 인물들의 인명 표기에 통일성이 없다. 어떤 사람은 기독교 세계에서 불렀던 대로. 또 어떤 사람은 오스만 측에서 불렀던 대로 쓰는데, 쿠르토올루를 쿠르토골리라고 쓰는 것이 전자의 대표적인 예, 피알리라고 쓰지 않고 투르크어식으로 피얄레라고 쓴다거나 오치알리가 아니라 우르지 알리라고 쓰는 것이 후자의 예시다.

117, 192쪽에서는 당시의 군주들인 쉴레이만 1세, 프랑수아 1세, 카를 5세 등을 '전제군주' 라고 소개했는데, 물론 중세 봉건제 시대에 비해서는 왕권이 강화된 게 맞지만 아직 전제라는 말을 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루이 14세가 전제왕권으로 유명한 거야 중,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까지 실려 있고, 카를 5세가 스페인 왕으로 즉위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이 반란 귀족들을 때려잡는 것이었다.

126, 141~144, 155쪽에는 하이르 앗 딘 바르바로사의 초창기 생애[12]에 대해 소개되어 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이거 모조리 틀린 이야기다. 책에서는 아주 짤막하게 소개된 하이르 앗 딘의 형 바바 우르지 역시 바르바로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던 탓에[13], 둘을 혼동했기 때문. 워낙 중요한 인물이지만 가히 최악의 오류라고 부를 만한 것 No. 2.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잘못된 부분이 많기에 하나하나 지적하면...
146쪽에서는 오스만 제국이 내정을 충실히 다지지도 않으면서 영토 확장에만 목을 맸다는 식으로 소개하면서 로마 제국만은 예외였다고 썼는데, 이건 오스만의 사정을 잘 모르고 한 소리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지방행정단위와 군대 편제가 일치되어 있었으며 지방관의 인사고과를 평가하여 승진과 강등을 결정할 때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던 것이 바로 군공이었기에 어느 시대에나 호전파가 있을 수밖에 없었으며[15], 창건자 오스만 1세가 이슬람 입장에서 이교도인 비잔틴 제국에 맞서 성전을 선포한 것을 계기로 이교도에 맞서 이슬람의 세력을 넓힌다는 사상이 국시 비슷한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즉 이렇듯 종교적, 제도적으로 영토를 지속적으로 확장할 수밖에 없었던 오스만 제국의 사정은 무시한 채 로마 제국과 단순 비교하는 건 문제가 있다. 게다가 내정을 다지지 않았다는 비방도 '입법자(立法者)' 라는 찬양을 받은 쉴레이만으로서는 다소 억울한 소리.

146~147쪽을 시작으로 173, 184~185쪽에서는 카를 5세를 ‘말 위에서 치세의 절반을 보내고 싶어하는’ 호전적인 군주로 묘사했는데, 실제로 카를은 이탈리아 반도에 대한 지배를 굳힌 뒤에는 불필요한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16]. 오히려 신성로마제국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루터의 종교개혁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전쟁을 하지 않는 것이 훨씬 이득인 상황이었으며, 책에서 묘사되는 것과 같이 프랑스와 자주 전쟁을 벌이기는 했지만 그 가운데 카를이 선전포고를 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다. 요컨대 몇몇 중요한 원정을 직접 지휘한 것은 맞지만, 말 위에서 치세의 절반이라는 이야기는 정말로 그랬다는 게 아니라 '치세의 절반동안 전쟁만 했다' 라는 비유적인 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147쪽에서는 쉴레이만 1세와 카를 5세가 처음으로 맞붙은 것이 1532년이며 빈 공방전이 그것이라고 소개했는데, 일단 1차 빈 공방전은 이로부터 3년 전인 1529년에 벌어졌으며 1532년에는 빈을 다시 공략하려다가 도중에 위치한 쾨세그[17]라는 도시의 성벽을 넘지 못하고 회군한 일만 있었다.

148쪽을 시작으로 153, 216~217, 222쪽에서는 당시 헝가리 국왕을 카를 5세의 동생인 페르디난트라고 소개했는데, 크로아티아와 보헤미아 등지에서 왕으로 추대가 된 것은 맞지만 정작 헝가리의 귀족들은 동부 에르데이의 귀족들을 중심으로 서포여이 야노시를 야노시 1세로 추대했다.[18] 그리고 1533년에 오스만 제국 합스부르크 가문이 체결한 조약으로 야노시 1세가 유일한 왕으로 인정되었으며, 헝가리 왕국의 성 이슈트반 왕관이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넘어간 것은 1570년이다.
또 153쪽에서는 헝가리 왕이 용감히 싸워서 오스만군이 빈을 정복하지 못했다고 서술했는데, 정작 제1차 빈 공방전 당시 페르디난트 1세는 빈을 지키는 대신 보헤미아 왕국으로 피난길에 올랐었다.

155쪽과 180~181쪽에는 오스만 제국 내에서 그리스인은 2급으로 여겨졌다거나 베르베르인과 아랍인이 하층민이었다는 식의 서술이 보이는데, 종교가 아니라 민족으로 차별하는 건 근대 민족주의가 발흥한 이후의 일이다. 16세기 중엽 당시에는 무슬림이냐 아니냐가 상층민이냐 하층민이냐를 구분하는 기준이었고, 그리스계라도 무슬림이라면 상층민이었다[19].

196쪽과 197쪽에서는 1525년에 파비아 전투가 벌어진 지 11년만인 1536년에 밀라노의 영유를 둘러싸고 프랑수아 1세 카를 5세가 다시 전쟁을 벌이게 된 것으로 소개했는데, 전투는 없었지만 1526년부터 1530년까지 '코냑 동맹전쟁' 이라 해서 전쟁상태였던 적이 있다. 이 전쟁으로 카를은 밀라노의 공작으로 프란체스코 스포르차 2세를 옹립했고, 그가 후계 없이 죽자 아들인 펠리페를 공작으로 앉혀 밀라노를 간접지배에서 직접지배로 바꾸려 했던 것.

197쪽에서는 1536년 가을에 프랑수아 1세가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는 것을 처음 구상해내고 1537년에 실현한 것으로 묘사했는데, 사실 발단은 1536년 가을이 아니라 1525년의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수아가 생포된 직후의 일이다. 설마 전투에서 패배해도 왕이 포로가 될 줄은 미처 몰랐던 프랑스 궁정은 급히 대책 마련에 착수했는데, 그 대책이라는 것이 오스만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책에서는 프랑스만 오스만에 사절을 보내고 오스만은 프랑스에 사절을 보내지 않았다고 소개했지만, 1533년과 1534년에 하이르 앗 딘의 함대가 오스만 사절을 태우고 마르세유에 입항한 일이 있다. 물론 오스만보다는 프랑스가 사절을 훨씬 많이 파견했고 나중에는 콘스탄티노플 주재 대사까지 임명하긴 하지만...

200쪽에서는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에 처음 도달한 이래 포르투갈이 인도와의 무역을 독점하고 있었으며, 포르투갈이 스페인의 동맹이었기 때문에 오스만이 포르투갈 선박을 습격한 것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오스만과 포르투갈이 인도양 무역을 두고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208쪽에서는 예니체리 징집이 '강제' 였다고 서술했는데, 연구자마다 의견이 갈리기는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시각도 많다. 실제로 반발이 아주 없었다고 하면 그것도 거짓말이지만 징집 담당관에게 뇌물을 주거나 아들이 하나밖에 없는 집에서 양자를 들이는 경우도 있었다[20]. 또 209쪽에서는 징집되어 관료 교육을 받은 인물들 가운데 ‘장관까지 출세한 사람도 드물지 않았다’ 고 되어 있는데, 장관은 물론이고 재상에까지 오를 수도 있었으며 드물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쉴레이만 1세 시대에는 거의 대다수였다.

214, 215쪽에서는 쉴레이만이 빈을 계속 공격하고 있었다고 서술했지만, 2차 빈 공방전이 몇 년의 일인가 보도록 하자. 빈까지 진격한다는 것은 보급이 어려워서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1차 빈 공방전 이후 쉴레이만 치세에 동부 유럽에서 크고 작은 전투는 헝가리에서 벌어졌다. 쉴레이만이 서거한 곳도 오늘날 헝가리 남서부에 위치한 마을인 시겟바르.

226쪽에서 1538년의 니스 조약에 대해 서술하며 조약 체결장에 프랑수아 1세 카를 5세도 직접 오지 않았다고 썼는데, 실제로는 두 사람 모두 왔다. 다만 같은 방에 들기를 거부했을 뿐이며, 그에 따라 양국의 화해를 주선하기 위해 힘썼던 교황 바오로 3세가 시계추처럼(...) 서로의 방을 왔다갔다하며 말을 전달해야 했다.

255~259쪽에 걸쳐 안드레아 도리아가 오스만의 이름난 해적인 투르구트 레이스(Turgut Reis)를 3500두카토라는 싼 몸값만 받는 조건으로 풀어준 이유가 무엇일지에 대해 나름대로 썰을 풀었추측을 했는데, 당연하지만 그건 엉터리다. 책에서도 280~288쪽에 걸쳐 서술되었지만 1543년에 하이르 앗 딘과 휘하 함대는 프랑스에 초대받았다가 돌아가는데, 이 때 투르구트가 감금되어 있는 제노바 항구에 들러 '몸값을 달라면 줄 테니까 투르구트를 내 놓을래, 아님 제노바가 쑥대밭이 된 다음에 내 놓을래.' 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했던 것. 상대가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밀고 있는데, 어느 정신나간 사람이 제 값을 다 쳐서 몸값을 요구한단 말인가[21].

269쪽에서 1541년의 알제 공방전 당시 알제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고 썼는데, 1518년 이래 1545년까지 알제는 줄곧 하이르 앗 딘의 본거지였다.

286쪽에 프랑스의 초청을 받은 하이르 앗 딘이 머물렀던 프랑스의 항구가 마르세유라고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마르세유가 아니라 툴롱이다. 다만 위에서 썼듯이 오스만의 사절이 두 번에 걸쳐 마르세유에 입항한 일이 있기에 헷갈렸던 듯.

292쪽에서는 하이르 앗 딘이 쉴레이만으로부터 받은 관직명이 이후 대대로 이어진다고 소개하고, 해군 제독을 뜻하는 영어 단어 'admiral' 이 아랍어로 사령관을 뜻하는 'amir' 와 해군을 뜻하는 'al-bahr' 를 합성한 것이라고 썼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이 점에서도 바르바로사는 해군사에 남을 자격이 있었다' 라고 쓴 것. 이것은 하이르 앗 딘의 관직명이 'amir al-bahr' 비슷한 것이었다고 이해하고 썼다고밖에 볼 수가 없는데, 사실이 어땠는가 하면 천만의 말씀이다. 그가 받은 관직은 투르크어로 '바다의 베이(Bey)' 라는 의미의 '데르야 베이(Derya Bey)' 이며, 1567년부터는 격이 더 높아져 '카푸단 파샤(Kapudan Pasha)' 로 바뀌게 된다.

293쪽에서는 투르구트 레이스(Turgut Reis)의 초창기 생애에 대해 오류를 냈는데, 일단 '순수한 투르크인' 이 아니고 그리스계다. 또한 투르크인으로서 오스만 제국의 군인이 될 수 있는 길은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편성되는 군대밖에 없었다고 썼지만 시파히라는 군대가 멀쩡히 있었다. 책에서는 투르구트의 초창기 생애가 다소 불우했던 것처럼 묘사했지만 실제로는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고위 관료의 보살핌을 받으며 부족함 없는 생활을 했고, 해적업에 뛰어든 것은 그 관료가 죽었기 때문이다.

295쪽에서 앙리 2세에 대해 소개하며 '그가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것은 카를로스에 대한 증오뿐이었다' 라고 썼지만 역시 사실과 다르다. 앙리 2세는 숙적에 대한 증오로 눈이 멀었던 인물이 아니라 오스만과의 우호 관계, 합스부르크 황가와의 전쟁, 개신교 박해 등 아버지의 정책을 상당 부분 계승하려고 노력했던 왕이다. 단지 마상시합에 친히 출전하겠다고 객기를 부리다가 사고사로 요절했을 뿐이다.

296쪽에서는 투르구트 레이스가 마디아 항을 본거지로 고른 이유에 대해 그가 순혈 투르크인이라는 전제를 깔고 북아프리카가 처음 이슬람화했을 때 성도(聖都)로 건설된 도시이자 동쪽의 바그다드와 맞먹는 도시 카이루안의 외항이 바로 마디아였으니 기독교 세계에 맞서는 책무를 스스로에게 부여한 것이 아닐까 추측했었는데, 오스만 시대에는 바그다드도 카이루안도 성도로는 간주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칼리프가 있는 도시야말로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스만의 황제가 곧 칼리프이니 콘스탄티노플이 중심이었기 때문. 실제로 오스만 시대에 바그다드는 종교적으로보다는 전략적으로 중시되었고, 카이루안은 딱히 특별한 도시가 아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투르구트는 마디아를 유일한 본거지가 아니라 여러 기지 가운데 하나로 활용했고, 그 용도는 성 요한 기사단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시오노도 302쪽에서 몰타와 마디아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 에 있다고 언급했다.

309~310쪽에서 오스만 함대가 코르시카를 침공하여 이슬람화하려 했다고 서술했는데, 당시 오스만이 코르시카를 공격한 이유는 프랑스의 요청 때문이었다. 즉 코르시카가 점령된다 해도 프랑스화가 될 판이었지 이슬람화될 일이 없었다.
또 설령 오스만 제국이 영유하려고 코르시카를 공격했다 하더라도, 이슬람화된다는 단정적인 표현을 쓰는 건 부적절하다. 물론 황제를 비롯한 지배층이 이슬람을 믿으니 교회가 모스크로 개조된다거나 무슬림 총독이 부임해 오는 등 영향을 받긴 했겠지만, 제국 정부에서 전 신민을 무슬림으로 만들겠다는 식의 정책을 시행한 적은 거의 없었다[22]. 실제로도 오스만의 지배를 받았던 동남부 유럽 국가 중에서도 터키나 알바니아, 북마케도니아 등을 제외하면 오늘날 무슬림 인구는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1560년의 상황을 다룬 320, 321쪽, 368쪽, 378~379쪽에서 피얄레 파샤(Piyale Pasha)를 소개하며 오스만의 고위 관료로 서지중해의 정세에 어두울 뿐만 아니라 해전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는 엘리트 참모였다고 쓴 다음 울루치 알리(Uluç Ali)가 투르구트의 후계자였다고 서술했는데, 최악의 오류라고 부를 만한 것 No. 3. 피얄레 파샤가 해적이 아니라 관료 출신인 건 맞지만 7년 전인 1553년 이래로 해군 총사령관을 지내고 있던 사람이 바로 그였고, 1554년부터 투르구트 레이스와 함께 기독교 국가들을 공격하며 나름대로 해전에 대해 배워가고 있었다. 즉 '피얄레 파샤는 딱히 잘 하는 게 없는 인물이었으며 투르구트의 뒤는 울루지 알리가 이었다' 가 아니라, '투르구트의 뒤는 피얄레 파샤가, 피얄레 파샤의 뒤는 울루지 알리가 이었다' 라고 봐야 한다[23][24].

2.2.3. 6장. 반격의 시대

341쪽부터 343쪽, 354쪽에서 몰타 공방전 당시 오스만이 동원한 군대의 규모를 소개했는데,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자 최악의 오류 No. 4. 일단 오스만의 상비군에 예니체리만 있었던 게 아니라는 점은 상술했으므로 넘어가고, 시파히를 발칸 지방 및 동유럽 출신이라고 소개하며 '아직도 그리스정교를 믿는 기독교도였을 가능성이 높다' 라고 써놓았는데 시오노가 그래도 높이 쳐 주는 메메드 2세가 듣는다면 어이가 안드로메다로 날아갈 소리. 제국 내에 봉토를 가진 투르크인 가운데에서만 시파히를 선발하게끔 명한 것이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즉 아직도 그리스정교를 믿는 기독교도였던 게 아니고, 무슬림이었다.[25]
다음으로 야얄라르(Iayalar)라는, '오스만 제국 동방 출신' 병사들이 있었다고 서술했는데, lar는 투르크어로 복수(複數)를 가리키는 접미사이므로 넘어가면 야야(Iaya)가 남는다. 그런데 Iaya라는 게 Yaya의 다른 표기라면, 이건 그야말로 오스만 성립 극초기에 시험적으로 운영되었던 보병대의 명칭이다. 아직 나라라기보다 유목전사집단에 불과했기에 상비 보병대가 문자 그대로 없었던 시절 실험적으로 만들었던 부대이며, 그 후 제대로 된 상비 보병대인 예니체리가 등장하면서 점차 도태, 언제 폐지됐는지조차도 알 수 없게 사라져버린다.[26] 아마도 전쟁이 터졌을 때마다 모집하는 아자브(Azap)와 헷갈린 모양인데, 아자브라면 규정상 무슬림 중에서만 선발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전리품을 노리는 기독교도들도 자원했으므로 이들이 무슬림이었다는 설명은 반은 맞는다[27].

345쪽에서는 몰타 공방전이 1565년에 벌어진 이유가 '쉴레이만의 아들이 페르시아 땅에서 반기를 드는 바람에' 늦어진 것이라고 서술했는데, '쉴레이만의 아들' 인 바예지드(Şehzade Bayezid)가 반란을 일으킨 도시는 아마시아라는 곳인데 여기까지 '페르시아 땅' 이라면 페르시아가 도대체 얼마나 넓은 건지 모를 일이다. 다만 반란에 실패한 바예지드는 사파비 제국으로 피신했고, 당시 사파비 황제였던 타흐마스프 1세는 쉴레이만으로부터 금을 받는 조건으로 오스만이 파견한 처형 집행인의 바예지드의 목을 치는 것을 허락했다.

379쪽에서는 피얄레 파샤와 울루지 알리를 비교하며 서로 나이가 비슷한 두 사람의 승진 속도에 차이가 많은 것은 '투르크에서 인재 등용 체제가 경직화되기 시작한 조짐' 이라 서술했다. 하지만 나중에야 물론 이렇게 되지만, 쉴레이만 시대인 1565년은 이런 조짐이 나타난다고 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승진 속도가 차이나는 것은 울루지 알리는 해적이었던 반면 피얄레 파샤는 데브시르메(Devshirme) 제도로 징집되어 궁정 관료가 되었다는 배경 차이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383쪽에서는 로마 제국이 각 민족의 특기를 살려서 그 민족이 잘 하는 분야는 그 민족에게 맡겼다고 서술하며 오스만 제국은 그렇지 않았다고 썼는데, 오스만은 일신교 제국이다 보니 이슬람으로 개종해야 지배층으로 받아주었다는 점은 물론 다르지만 로마 제국만 이런 정책을 추진했다고 보는 근거가 무엇인지 의문. 오스만 제국 내에서도 상업은 투르크인이 아니라 그리스인과 유대인이 도맡았으며, 일단 데브시르메(Devshirme) 제도로 징집되어 예니체리나 궁정 관료가 되면 그 다음은 각자의 재능에 달려 있었다. 즉 종교적인 차이를 빼고 본다면 피지배민족도 지배층으로 만든다는 점은 로마와 오스만의 공통점이다[28].

384~386, 419쪽에서는 셀림 2세의 황자 시절을 서술하며 형의 그림자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다가 그 형이 실각함으로써 비로소 황위 계승자가 되었다고 서술했는데, 빛을 보지 못했던 건 오히려 형인 무스타파(Şehzade Mustafa) 쪽이다. 휘렘 술탄을 총애한 나머지 정식으로 황후로 책봉하기까지 했던 쉴레이만 1세는 다른 후궁인 마히데브란 술탄(Mahidevran Sultan)의 소생인 무스타파를 멀리 떨어진 도시의 총독으로 임명해둔 채 관심을 끊어버렸고, 휘렘의 소생인 메메드나 셀림, 바예지드 등은 무스타파보다 훨씬 가까운 곳의 총독으로 임명하고 전쟁터에도 데리고 다니는 등 교육에 힘썼기 때문. 셀림이 '쾌락에 탐닉' 했던 것도 '황제도 못 될 거 놀고 먹자' 가 아니라, '어차피 황제 자리는 내 거 아님?' 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새 황제는 형제들을 모조리 제거해버리는 살벌한 황위 계승법을 생각하면 황제 자리가 사실상 보장됐거나 인생을 완전히 포기한 게 아니고서야 놀고 싶어도 놀 수가 없는 일이었으며, 이것이 바로 "살벌한 황위 계승법" 의 본 목적이었다.

386~387쪽에서는 셀림 2세가 키프로스 공격을 명령한 이유가 포도주 때문이었다고 서술하며 어리석은 생각이었다고 비난했는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여러 가지 야사들이 있으며 동지중해의 한복판에 있는데다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도 있는 키프로스 섬의 중요성이 컸다는 해석도 있다.

389쪽에서는 1570년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헝가리를 둘러싸고 오스만과 전쟁 중이었기에 베네치아를 도울 수 없었다고 썼는데, 1568년의 에디르네 조약으로 전쟁이 끝난 상태였다. 오히려 신성로마제국은 지중해에 그다지 이해관계가 없었으므로 베네치아를 돕지 않았다고 보는 게 더 적절하며, 책에서도 스페인 이야기는 많이 나와도 신성로마제국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29].

398쪽에서는 1570년 당시 스페인은 군사, 경제적인 초강대국이었지만 스페인인 외에 다른 민족을 활용하는 재능이 부족했기에 '팍스 히스파니카' 시대를 열지 못했다고 서술했는데, 군사로는 몰라도 경제적으로는 초강대국이 아니라 파산 상태였다. 카를 5세 시대부터 프랑스의 선전포고에 맞서 싸우느라 국고가 텅 빈 상황이었으며[30], 그에 따라 펠리페 2세는 1557, 1560, 1569, 1575, 1596년 다섯 번에 걸쳐 파산 선언을 해야 했다. 덤으로 이런 상황에서 스페인령도 아닌 베네치아령 키프로스가 공격받는다 하여 함대를 보내는 것은 적지 않게 무리를 하는 일이었는데, 시오노는 이런 사정은 살피지 않고 스페인의 미적지근한 태도를 강하게 비난했다.

403쪽에서는 레판토 해전을 서술하는 데 지나치게 흥분한 나머지 '바다의 전문가' 들인 베네치아 함대와 바르바리 해적들이 '처음으로 정정당당하게 정면으로 격돌한 해전' 이었다고 썼는데, 프레베자 해전처럼 나무위키에 올라와 있는 싸움이 있었던 건 물론이고 바예지드 2세 시대인 1499년부터 1503년까지 오스만과 베네치아가 벌인 전쟁 중에 일어난 존치오 해전(1499년)에서 베네치아 함대가 오스만 함대에게 패한 적이 있다. 더군다나 이 해전 당시 베네치아 함대는 갤리선 47척, 소형 갤리선(갤리엇) 17척이었던 반면 오스만 갤리선은 67척, 소형 갤리선은 20척이었으므로 오스만이 베네치아에 비해 수적으로 심히 유리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사정을 따지지 않더라도, 베네치아 상선단이 해적의 습격을 받은 것은 정정당당한 해전이 아니란 말인가?

404쪽과 405쪽에서 라라 무스타파 파샤가 파마구스타를 정복하여 키프로스 섬을 완전 정복한 다음 항복한 파마구스타의 주민과 수비군을 학살한 대목을 소개했는데, 문제는 딱 그것만 소개했다는 것. 공방전 당시 무스타파 파샤의 장남이 전사했고 무스타파는 그 원한으로 인해 학살을 벌였던 것인데, 이런 사정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살육만 소개한 것은 공정하지 않다[31].

413쪽에서는 베네치아가 원수정 시대의 로마제국처럼 문관과 무관을 구분하지 않고 재능이 있는 인재를 폭넓게 활용했다고 찬양했는데, 지방행정조직이 곧 군사조직이었던 오스만 제국에서는 예니체리 출신이 국경 지방의 총독으로 나가고 궁정 관료 출신이 지방 총독으로 부임하여 그 지방에 배치된 군사들을 지휘하는 일이 많았다. 또 이런 식으로 따지자면 유럽 중세의 봉건제 사회에서도 각 제후들은 각자의 영지를 통치하는 한편 군대도 지휘했으므로 문관과 무관을 겸했다고 봐야 하니, 시대와 지역을 가리지 않고 문관/무관으로 나누어보고자 하는 태도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2.2.4. 7장.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419쪽에서 쉴레이만 1세의 장남이 바예지드라고 썼는데, 바예지드는 셀림 2세의 동생이고 장남 이름은 무스타파. 그리고 셀림은 차남이라고 쓰여 있지만 셀림 위에 메메드라는 형이 한 명 더 있으며, 어려서 죽은 경우까지 포함하면 압둘라가 쉴레이만의 셋째, 휘렘 술탄의 둘째아들이다. 셀림은 그 다음이고, 바예지드는 셀림의 맏형이 아니라 바로 손아래 동생이다.

422~423쪽에서는 쉴레이만 1세 치세 말부터 무라드 3세 치세 초까지 재상을 지낸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Sokollu Mehmed Pasha)를 소개했는데, 책에는 투르크인이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세르비아계. 당장 소콜루라는 별명의 기원이 된 마을인 소콜로비치(Sokolovići) 자체가 오늘날 보스니아에 있다. 또한 베네치아 출신의 모후 누르바누 술탄의 부추김을 받은 황제 무라드의 명령으로 살해당한 것으로 묘사했지만 실제로는 사료에 따라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하며, 개중에는 예니체리 병사에게 암살당했다거나 하사신에게 살해됐다는 것도 있다.

424, 428, 440쪽에는 무라드 3세의 어머니인 누르바누 술탄이 베네치아 출신이며 울루츠 알리 레이스와 치알라자데 유수프 시난 파샤(Cığalazade Yusuf Sinan Pasha)[32]도 이탈리아 출신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레판토 해전 이후 오스만 함대가 기독교 세계를 덜 위협하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가 여기에 있다고 서술했는데, 이런 영향은 실제로는 미미했을 것이다. 오스만 제국은 튀르크인만의 나라가 아니라 다민족 제국이었다는 점에서 그렇고, 역대 오스만 황제들 가운데 어머니가 유럽인인 경우가 수두룩하지만 오스만이 그런 점을 신경쓰며 전쟁을 벌인 적은 거의 없다[33]. 레판토 해전 이전에 대유럽 정복 전쟁이 활발했던 쉴레이만 대제 시절 오스만에서 활동한 알비제 그리티는 아예 베네치아 공화국 지도자인 도제의 서자였다. 그리고 누르바누 술탄은 베네치아 공화국 출신이라는 설도 있지만 스페인계 유대인이었다는 설도 있는 만큼 유대인설이 맞다면 유럽 기독교도와는 전혀 상관없을 수도 있다.

434쪽에는 치알라자데 유수프 시난 파샤가 이탈리아 출신이라고 소개하며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시남은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한 투르크 궁정에서는 역시 이채로운 존재였' 다고 썼는데, 백번 양보하여 오스만은 다민족 국가가 아니라 터키인의 국가였다고 친다 하더라도 터키인 중에 백인이 없다는 건 흔한 오해 가운데 하나다. 이에 대해서는 항목을 참고하면 좋고, 하렘의 환관들 중에는 백인은 물론 흑인까지 있었다. 덤으로 이탈리아인이 꼭 금발에 푸른 눈인 것도 아니다.

435쪽에서는 바그다드에서 오스만의 지배에 맞서 간헐적인 반란이 일어났는데, 그 원인은 오스만의 융성으로 이슬람 세계의 수도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지기는 했지만 이슬람의 수도는 바그다드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무슬림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썼다. 그런데 바그다드가 이슬람의 수도였던 가장 큰 이유는 그곳이 칼리프가 사는 도시였기 때문인데. 16세기 후반에 칼리프가 어디 살고 계셨더라? 당시에 반란이 간혹 일어났던 것까지는 사실이지만 그건 오스만이 알레비파를 박해했기 때문이었고, 바그다드와 이렇다 할 접점은 거의 없었다. 또 당시 이곳은 종교적인 것보다도 티그리스 강을 내려가면 페르시아 만으로 연결된다는 전략적인 측면에서 더욱 부각되고 있었다.

445쪽에서는 레판토 해전을 끝으로 해적은 기독교 세계에 이전만큼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고 서술하며 곧바로 오스만이 해적을 금지하는 1740년으로 2백년 가량 건너뛰는데, 답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이 레판토 이후 적극적인 해양 패권 확보에 나서기를 포기한 것은 사실이지만 해적들에 대한 후원은 18세기 이전까지는 대놓고, 19세기까지는 비공식적으로 계속했고, 그 때문에 유럽은 18세기 말까지 지중해의 이슬람 해적과 대서양의 유럽 해적들 때문에 몸살을 앓아야 했다.[34]

3. 기타

로마 제국 멸망 이후를 다루었는데 굳이 로마 가도를 꼬박꼬박 지도에 넣어주는 점도 이상하다. 심지어 서로마 멸망(476년) 후 1000년도 넘게 지난 레판토 해전(1571년) 때의 지도에도 로마 가도가 그려져 있다. 출판사가 그냥 아무 생각없이 넣은 건지, 작가의 의도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에 관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알고 싶으면, 내가 전에 쓴 책을 읽으세요 라는 부분이 많은데, 이미 한 번 썼던 내용을 또 쓰고 싶지 않은 걸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마치 광고하는 것 같아 이야기의 맥이 끊기고 짜증난다. 본서는 교양서적 내지 소설이니까 사정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전문서적이라면 아예 "더 자세한 이야기를 알고 싶으면~" 이라는 식의 언급 자체를 하지 않고 과감하게 빼 버리거나 도저히 뺄 수가 없다면 간략히 쓰고 인용을 하거나 해야 한다.


[1] 가령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 에서 벌어진 사건 가운데에는 동로마 제국이 717~718년 사이 이슬람 군대에 맞서 치열하게 싸운 것도 포함되는데, 이 책에서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2] 리뷰어가 임의로 집어넣은 문구가 아니라 실제 해당 책에 "자세한 내용은 나의 다른 책 ...를 읽어보기 바란다'로 대충 넘어가는 내용 혹은 간접광고가 많다. 나나미 본인은 해당 책을 저술하는 동안 자신의 건강 상태가 좋지 못하다고 핑계를 대긴 했다만, 그렇다고 자신의 책의 내용의 출처나 각주로 딱히 학술적 가치가 없는 자신의 에세이집을 들고 여기에 간접광고를 다는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3] 시오노는 이를 부르사에서 에디르네로 천도했다고 서술했지만, 실제 오스만의 술탄들은 에디르네가 함락된 이후로도 오랫동안 부르사를 거처로 삼았다. 에디르네로 이사(?)를 한 것은 한참 뒤인 메메드 1세 시대다. [4] 책에는 '카릴 파샤' 라고 표기되어 있다. [5] 다만 ' 팍스 오토마나(Pax Ottomana)' 또는 '팍스 오토마니카(Pax Ottomanica)' 라는 말은 있다. 이것은 책에 소개된 것과 같은 개념이 아니고, 제국이 전성기를 누렸던 16세기와 17세기에 발칸 반도, 아나톨리아, 중동, 북아프리카, 코카서스 지역이 오스만의 지배를 받기 전에 비해 더한 사회적, 경제적 안정을 누렸다고 주장하며 쓰는 말이다. [6] 예니체리 및 관료 징집제도로, 예니체리 징집 제도로서는 무라드 1세, 관료 징집 제도로서는 무라드 2세 때 마련되었다. [7] 신하국들이 파견한 군사를 믿을 수 없다고 본 것도 틀렸다. 보내온 군사가 영 시원찮을 경우 전쟁이 끝난 뒤 오스만 측으로부터 문책을 받을 수 있었기에, 정말로 싸우기 싫을 경우라도 싸우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기 때문. 다름아닌 시오노 자신이 썼던 소설인 "콘스탄티노플 함락" 에도 이런 처지에 놓인 세르비아군의 사정이 묘사되어 있다. 또 콘스탄티노플 공성 때에는 성벽 아래로 굴을 파서 화약을 터뜨리는 임무를 맡은 부대를 세르비아인 광부들로 편성하기도 했는데, 이후 이런 일을 맡는 공병부대가 오스만 포병대의 산하 부대 중 하나로 정식 편성되기도 한다. [8] 여담이지만 오스만 제국도 예니체리 군단이 막장 테크를 밟기 시작하자 할 수 없이 용병들을 쓰기 시작하긴 했다. [9] 쿠르토올루가 해군 총사령관직에 오른 사실 자체는 맞다. 다만 시기가 1517년이 아니라 1522년 언저리라는 게 함정. [10] 사실 1517년 당시 오스만 함대가 해전을 벌일 힘이 없었다는 소개 자체가 모순인데, 메메드 2세 시대에 레스보스 섬이나 네그로폰테 섬을 공격한 사실은 책에도 나오기 때문. 섬을 공격하는데 과연 해전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11] 물론 성 요한 기사단이 오스만의 선박에 대해 해적질을 자행하고 있었다고 소개하긴 한다. [12] 구체적으로는 해군 총사령관에 임명되기 전까지. [13] 정확하게 말하면 형이 죽은 뒤 그의 별명이 동생에게 옮겨간 것이다. [14] 그리스 정교도로 태어났는데 가업이 해적이라는 건 성 요한 기사단 같은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기독교 측에는 해적이 없었다고 서술한 것과 모순된다. [15] 그래서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여 중앙 정부의 권위가 약화된 뒤에는 지방 총독들이 제멋대로 군사 행동에 나서서 문제가 되기도 한다. [16] 바르바리 해적들에 맞선 것은 방위를 위한 것이었지 북아프리카를 영유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으므로 논외. [17] 오늘날 헝가리령으로, 독일어 지명으로는 귄스. [18] 다만 페르디난트 1세도 스스로 헝가리 국왕임을 주장했고, 서부와 북부 헝가리인 귀족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19] '그리스계인 상층민 무슬림' 의 대표적인 예시가 황제 쉴레이만의 총애를 받다가 처형된 재상 파르갈르 이브라힘 파샤다. 심지어 이 인물은 시오노 자신이 직접 쓴 소설 "세 도시 이야기 - 주홍빛 베네치아" 에 등장하기까지 했다. [20] 외아들인 경우 징집 대상에서 제외되었기에, 친아들을 보내기 위해 양자를 들이는 것. [21] 실제로 투르구트의 신병을 넘겨받은 하이르 앗 딘은 제노바 영토를 약탈하기 시작하는데,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던 제노바 정부는 막대한 양의 금을 바치는 대가로 제노바 영토만은 손대지 말아줄 것을 부탁했다. 물론 안드레아는 당대 최고의 해군 지휘관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만, 이쪽은 수십 척인데 저쪽은 2백 척이라면 쪽도 못 쓰는 게 당연한 일. 물론 더한 상황에서 쳐발라버린 사람도 있지만, 이때 쳐발린 쪽과는 달리 오스만 제국은 대포에 대해서라면 당대의 선진국 가운데 하나였다. 프랑스의 초청을 받아 프랑스 함대와 연합작전을 펼치게 된 하이르 앗 딘이, 프랑스 해군의 빈약함에 어이가 없던 나머지 프랑스 해군 지휘관에게 '야, 넌 니 화약통을 화약이 아니라 포도주로 채워놓냐?' 라고 한 마디 했을 정도. 물론 당시의 프랑스가 해군 강국은 아니었지만, 오스만 제국과 지중해의 패권을 다투었던 스페인도 안드레아 도리아의 용병함대를 빼면 프랑스 함대보다 우월하다고 말하기는 힘든 형편이었다 [22] 종교를 이유로 반란이 일어난다거나 하지 않는 한, 인두세 때문에라도 무슬림이 아닌 쪽이 오히려 더 이득이기도 했다. [23] 역대 해군 총사령관직 역임자 가운데 부재상의 자리까지 오른 최초의 사례가 바로 피얄레 파샤다. 또한 레판토 해전 직후에 베네치아 대사를 접견한 자리에서 재상 소콜루 메메드 파샤가 ‘귀국은 우리의 수염을 깎았지만 우리는 귀국의 한 팔을 꺾었다’ 운운한 것은 유명한데, 애초에 전쟁에 반대하는 쪽이었던 메메드 파샤가 이렇게 호기있는 말을 하게 만들었던 것도 바로 정적(政敵)이었던 피얄레 파샤. 차마 황제를 비난할 수는 없었던 피얄레는 평소부터 밉상이었던 재상이 책임을 지라고 비난했는데, 메메드로서는 재상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함대를 빠르게 복구하는 한편 레판토에서 한 번 진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요컨대 해군 총사령관 역임자로서는 처음으로 부재상의 자리에 올랐을 뿐 아니라 재상을 견제할 정도로 힘이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시오노의 평가대로 그저 무능한 인물에 불과했더라면 재상을 비난하고도 무사할 수가 없다. [24] 이런 추측 말고 보다 객관적인 사실을 들라면 오늘날 이스탄불에 위치한 해군 박물관에는 피얄레 파샤의 흉상이 버젓이 전시되어 있으며, 그 아래 붙은 설명문에는 오스만 제국이 지중해에서의 제해권을 유지하는 데 공헌한 인물이라 되어 있다.또 터키의 군함으로 피얄레의 이름이 붙은 것도 몇 척 된다. [25] 더 따지자면 시파히는 크게 티마를르 시파히(Timarli Sipahi)와 카프쿨루 시파히(Kapikulu Sipahi)로 나뉘는데, 이 가운데 티마를르는 흔히 알려진. 군사 복무의 대가로 영지를 받는 병사들로서 유럽 지역의 루멜리 시파히와 아나톨리아 반도 출신인 아나돌루 시파히로 다시 나뉘었다. 한편 카프쿨루는 황제의 기병 근위대였는데, 투르크인 가운데 선발하는 것은 티마를르 시파히였고 카프쿨루 시파히는 규정상으로는 전장에서 큰 공을 세운 병사라면 누구든 될 수가 있었지만 예니체리 이상으로 최정예 병사들만 모아놓은 집단인 만큼 그 공을 세우려면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그런데 시파히라고 해서 다 같은 부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건 둘째치고 기독교도였다고 써놓았다는 것은... 조악하게나마 로마 제국으로 옮기면, 멀쩡히 시민권이 있는 군단병을 가리켜 속주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껄이는 거나 마찬가리다. [26] 야야가 기록에 나오는 마지막 시기가 14세기 후반으로, 몰타 공방전으로부터 자그마치 150년 전이다. [27] 아자브를 두고 그래도 시오노의 말이 반쯤은 맞는 게 아닌가... 할 수도 있겠는데, 전투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로마군의 보조병 그 이하였다. 좋게 말하면 보조병이라 할 수 있지만 사실을 그대로 말하자면 선봉대, 나쁘게 말하자면 총알받이에 불과했기 때문. [28] 실제로 오스만의 역대 재상 목록을 찾아보면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때로부터 적어도 18세기 초반까지는 피지배 민족들이 재상을 역임한 경우가 절대 다수다. [29] 그래서인지 카를 5세도 스페인어식인 '카를로스' 황제로 표기되었다. [30] 이건 프랑스도 마찬가지라 소금세가 신설되기도 했고 과중한 세금을 이기지 못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31] 물론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한이 작용했다고는 해도 결과적으로는 베네치아-교황령-스페인 연합 함대의 사기를 올리고 말았으므로, 복수를 하는 게 그다지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는 점은 변함없다. [32] 책에는 '시남 파샤' 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 [33] 예를 하나만 들자면 메흐메트 2세의 아버지 무라트 2세가 세르비아 공국에 보인 태도를 들 수 있다. 무라트는 세르비아를 공격했다가 배상금을 받아먹고 강화를 맺기를 반복했는데, 그 중에 한 번은 세르비아 공녀를 후궁으로 들이는 것을 조건으로 강화를 맺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무라트는 그 뒤에도 세르비아를 계속 공격하여 일시적으로 멸망시켰으며, 헝가리의 침공을 받은 뒤 강화 조건으로 세르비아의 재건을 인정했다. [34] 재미있는 점은 둘이 서로 붙는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다만 제대로 붙었다면 황제의 공공연한 후원을 받던 이슬람 해적의 완승으로 끝났을 공산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