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백가 | ||||||||||
농가 | 도가 | 묵가 | 법가 | 명가 | 병가 | 유가 | 음양가 | 잡가 | 종횡가 | 소설가 |
1. 개요
제자백가( 諸 子 百 家)춘추전국시대, 특히 시기적으로는 기원전 5세기 이후에 중국에서 생겨난 다수의 사상가들을 일컫는다. 그 유명한 공자와 맹자, 노자 등등도 제자백가라는 대집합 아래 분류된다. 여러 선생(~자)들이 백여 명이나 된다는 뜻으로, 실제 전적에 남아있는 제자백가의 사상가 수는 무려 200명에 육박한다. 하지만 사실 원래 이 쪽 단어에선 '백'이나 '천', '만' 등의 숫자를 그냥 막연하게 많다는 뜻으로 쓰는 경향이 많다.
하필이면 왜 이 시기에 이러한 사람들이 많이 배출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대체로 주나라의 종법제적 규범이 완전히 무너지고, 기존의 지배층들이 대거 몰락하면서, 그 몰락한 지배층들의 일파가 자신이 익힌 지식을 활용하여 교육과 후학 양성에 힘쓴 결과로 풀이된다. 쉽게 말해 이토록 혼란스러운 시대를 도대체 어떻게 끝낼 것인가에 대한 수많은 사상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 중에서 유력한 능력을 보였던 사람들이 제자백가인 것이다.[1]
사실 동주 당시에는 유가와 묵가의 명칭밖에 없었으나,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 그리고 《칠략》을 지은 유향과 같은 전한시대의 사람들에 의해 오늘날 보는 "~가"의 명칭이 생기고 분류되었다. 아래의 표에 나온 분류 역시 후세인들의 편의를 위해서 생긴 분류이기 때문에, 유가 정도를 제외하면 아래에서 "~가"로 묶인 사람들의 사상이 전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본래 구류(九流)라 하여 '소설가'를 제외했으나, 훗날 소설가의 중요성이 인식되어 '십가(十家)'라고도 부른다. 흔히 '삼교구류(三敎九流)'라 하여 유, 불, 도 삼교를 포함한 중국 철학의 대표로 꼽힌다.
물론 유가와 도가를 포함한 다른 제자백가의 사상들도 약 2500년이 지난 현대 동아시아인들에 의해서 엄연히 사용되고 있다.
통일신라 시대 독서삼품과는 유학 경전의 이해 수준을 시험하여 관리로 채용하기 위한 제도였으며 비록 골품제로 인해 실패하였으나, 5경 3사 및 제자백가에 능통한 자는 순서를 뛰어넘어 특품으로 등용한다는 내용이 있을 정도였다.
이들을 흔히 골방 학자들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이들은 시대상 준군사조직이었다. 선비를 뜻하는 글자도 원래는 도끼를 든 전사를 뜻 했다. 때문에 선비들의 집단이란 결국 지역 군벌을 뜻 했고, 이러다보니 마치 용병처럼 활동하기도 했다.
2. 상세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4E4FF 0%, #F8F8FF 20%, #F8F8FF 80%, #E4E4FF); color: #000; min-height: 34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8F8FF> 유가 | 공자 | 자하 | 맹자 | 순자 |
묵가 | 묵자 | |
도가 | 노자 | 장자 | 양주 | 열자 | |
법가 | 이회 | 오기 | 신불해 | 상앙 | 한비자 | 이사 | |
명가 | 혜시 | 공손룡 | 등석 | |
농가 | 허행 | |
병가 | 사마양저 | 손무 | 손빈 | 울료 | |
불명 | 고자 | 후자 |
3. 관련 서적
- 유가
- 법가
- 병가
[1]
당장 유교가 나온 이유도 과거 주공 단이 은나라의 괴력난신에 물든 사이한 풍습을 교화한 것을 본받자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다. 공자가 주공 단을 존경하고 중요시 여겼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2]
오늘날 편의상 도가로 분류하지만, 실제로는 도가 측에
위아론이라고 비판받은 인물이다.
장자의 기록에도 등장하여
공자처럼 허구로 장자와 대화하다가 (말발에) 쳐발리고 까이던 인물로 묘사될 정도라 도가에서는 무시당하는 입장이다.
[3]
본명은 전양저(田穰苴)로 사마는 그가 한 벼슬 이름이었다.
[4]
증자, 자사 계열 유가
[5]
자하 계열 유가
[6]
주나라의 사관으로 이름은 정확히 알 수 없고, 대대례의 보부편에서 그의 기록을 인용하였다는 것만 짧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