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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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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전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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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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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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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1992 ~1994
1994 FIFA 월드컵 미국 ( 스페인전 · 볼리비아전 · 독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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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대 감독
김호
<colbgcolor=#0047A0><colcolor=white> 감독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김호 / 제56대
코치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조광래 (수석 코치 / 1992)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허정무 (수석 코치 / 1993~1994)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유기흥 (코치 / 1993~1994)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박항서 (트레이너 / 1993~1994)[1]
주장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정용환 (1992~1993)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구상범 (1993)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최인영 (1994)
계약 기간 1992년 7월 8일 ~ 1994년 6월 30일[2]
(2년 / 723일)
계약 종료 (계약 기간 만료)
연봉 3600만 원[3] (감독)
전술 스타일 수비 축구
┗ 수비 중시
5-3-2 또는 4-4-2 포메이션
성적 A매치 37전 14승 15무 8패 (승률 37.84%)
1992 다이너스티컵 (준우승)
1994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준우승)
1994 FIFA 월드컵 미국 (20위 / 조별리그)[4]
1. 개요2. 선임 과정3. 내용4. 활동
4.1. 선임 과정4.2. 1992 다이너스티컵
4.2.1. vs 일본 (1차전) - 0:0 무4.2.2. vs 북한 (2차전) - 1:1 무4.2.3. vs 중국 (3차전) - 2:0 승4.2.4. 결승: vs 일본 - 2:2 aet (2 pk 4) 무
4.3. 1994 FIFA 월드컵 미국 아시아 2차 예선
4.3.1. vs 바레인 (1차전) - 0:0 무4.3.2. vs 레바논 (2차전) - 1:0 승4.3.3. vs 인도 (3차전) - 3:0 승4.3.4. vs 홍콩 (4차전) - 3:0 승4.3.5. vs 홍콩 (5차전) - 4:1 승4.3.6. vs 레바논 (6차전) - 2:0 승4.3.7. vs 인도 (7차전) - 7:0 승4.3.8. vs 바레인 (8차전) - 3:0 승
4.4. 1994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4.4.1. vs 이집트 (A조 1차전) - 1:2 패4.4.2. vs 아틀란테 FC (A조 2차전) - 4:0 승4.4.3. vs 중국 U-23 (A조 3차전) - 3:0 승4.4.4. vs 체코슬로바키아 리그 선발팀 (준결승전) - 1:0 승4.4.5. vs 이집트 (결승전) - 0:1 패
4.5. 1994 FIFA 월드컵 미국 아시아 최종 예선
4.5.1. vs 이란 (1차전) - 3:0 승4.5.2. vs 이라크 (2차전) - 2:2 무4.5.3. vs 사우디아라비아 (3차전) - 1:1 무4.5.4. vs 일본 (4차전) - 0:1 패4.5.5. vs 북한 (5차전) - 3:0 승
4.6. 1994 FIFA 월드컵 미국 본선
5. 퇴임 및 평가6. 여담7. 경기 결과8.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제56대 감독 김호의 대표팀에 대해 정리한 문서. 대한민국 A대표팀 사상 첫 전임제 감독으로서 1992년 7월 8일부터 1994년 6월 30일까지 유지된 체제다.

대한민국 월드컵 진출사에서 첫 무실점[5] 경기 달성 및 당시 기준 사상 최고 성적[6]을 거둔 팀으로 1990년대 조직된 대표팀 중 가장 좋은 경기력과 성적을 달성한 팀으로 기억되고 있다. 비록 월드컵 16강 진출 달성은 실패하면서 월드컵 대회 종료 이후 재계약이 불발되었지만 이 때 쌓은 명성을 기반으로 김호 전 감독은 1년 뒤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창단 감독으로 부임하며 프로 무대에 화려하게 복귀하게 된다.

2. 선임 과정

1992년 7월에 사상 처음으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전임 감독으로 정식 계약을 맺으며 연봉 3천만원 및 추가 승리수당 및 여러 보너스 관련 계약을 했다. 그 전까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들은 대회마다 돌아가면서 무보수로 일하던 명예직이었다. 이 때문에 교통비, 식사비나 보너스가 나오긴 했지만 연봉이나 계약서는 없었다. 그만큼 축구협회가 동네 구멍가게마냥 주먹구구식으로 굴러가고 있었다는 이야기.[7] 심지어 이 때문에 1992년 7월 김호 전 감독을 선임하기 전까지 약 7개월 동안이나 대표팀의 A매치는 한 경기도 없었다. 그야말로 국가대표팀은 방치되고 있었다.

3. 내용

1992년 8월 다이너스티컵에서 데뷔전을 가진 뒤 1993년 5월~6월 열린 월드컵 1차 예선에서 7승 1무라는 좋은 성적으로 가뿐하게 최종 예선에 진출하는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최종 예선에선 고전했고, 도하의 기적 끝에 힘겹게 아시아 예선 준우승하여 1994 FIFA 월드컵 미국 24강 본선에 진출했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공간을 활용한 유연한 수비를 선수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잠시 포백을 가동하는 등 전술 변화와 자신의 색채를 입히기 위해 노력했다는 평가였다. 물론 이게 쉽게 되진 않아서 정작 월드컵 본선에선 기존의 백스리 수비라인을 가동했다. 1994년 초 월드컵 본선을 대비한 전지훈련에서 당시 강팀이었던 루마니아, 콜롬비아와 꽤나 대등한 경기력을 선보였고, 미국, 카메룬, 에콰도르, 온두라스 등과 차례로 평가전을 가지면서 4년 전과는 다르게 충실히 월드컵 준비를 해나갔다.
파일:Screenshot_20220809-014319_Gallery.jpg
김호호

1994 FIFA 월드컵 미국 댈러스-포트워스, 휴스턴에서 무더위와 용병술로 당시 피파 랭킹 5위 스페인과 2:2 무승부 승점 1점 획득[8], 남미예선 3위 볼리비아에 첫 클린시트 무승부 승점 1점 획득과 조 4위로 밀어냈고, FIFA 랭킹 1위이자 디펜딩 챔피언 독일과 3:2로 접전 끝에 패하는 등 명승부를 보여주며 2무 1패 총 승점 2점으로 94월드컵 20위[9]를 기록하며, 대한민국 월드컵 역사상 처음으로 한 대회 최다 승점을 기록했다.

4. 활동

4.1. 선임 과정

당시 8개국(8강) 본선 1992 AFC 아시안컵 일본 대회 진출 실패의 충격 이후[10], 대표팀을 전임으로 지휘할 감독에 대한 필요성이 급부상했다. 1992년 8월 선임을 목표로 대한축구협회는 후보를 추리기 시작했고, 박종환 전 일화 천마 감독, 차범근 전 현대 호랑이 감독 등 현역 프로 감독과 더불어 김호, 김정남 등 야인 신분이었던 축구인들도 물망에 올랐다.

1992년 7월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회가 소집되어 감독직 선임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당시 최종 후보에 오른 인물은 박종환, 고재욱, 이차만, 김호, 김정남으로 이 중 고재욱 전 LG 감독과 김호 전 현대 감독이 최종 투표 후보에 올라갔다. 하지만 투표에서 동률이 나오는 등 기술위원간 팽팽한 의견 대립이 이뤄졌고, 결국 당시 허승표 전 기술위원장의 직권이 행사되어 김호 감독이 A대표팀의 첫 전임제 감독으로 선택되었다.

1992년 7월 8일, 대한축구협회와 김호 전 감독 간의 계약서 체결식이 이뤄졌다. 계약기간은 2년이었으며 계약금 2000만원, 연봉 3600만원에 월드컵 성적에 따른 포상금이 인센티브로 주어졌다.

김호 전 감독은 취임 인터뷰에서 대한민국 축구가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선 유럽팀에 대한 공포감에서 벗어나 자신감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며 멘탈과 경기운영에 대한 향상을 목표로 삼고 대표팀을 운영하겠다는 포부를 보였다. 코칭스태프로는 조광래 전 코치가 동행하게 되었다.

4.2. 1992 다이너스티컵

1992년 8월 1일, 한일 정기전을 치른 이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다이너스티컵을 소화하게 되었다. 김호 전 감독의 대표팀 첫 공식 대회 일정으로 1993년 3월부터 치러질 1994 FIFA 월드컵 미국 아시아 지역예선의 밑그림을 그리는 첫 실전평가였다. 게다가 예정되어있던 한일정기전이 무산되면서 다이너스티컵이 김호 전 감독의 국가대표 감독 데뷔전이 되어 이 대회에 대한 중요도는 생각보다 더 올라가버린 상황이었다.

1992년 7월 프로 축구 전반기가 종료된 이후 김호호 1기가 소집되었다. 대회 전 평가전 없이 바로 베이징으로 출국해 대회를 소화하는 일정이었다. 때문에 당시 국내 축구계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꽤나 있었다. 대진 상대들이 모두 우리와 라이벌 관계에 있는 팀들이다보니 혹여 안 좋은 결과나 경기력을 보일 경우 비난의 여론이 쉽게 올라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4.2.1. vs 일본 (1차전) - 0:0 무

4.2.2. vs 북한 (2차전) - 1:1 무

4.2.3. vs 중국 (3차전) - 2:0 승

4.2.4. 결승: vs 일본 - 2:2 aet (2 pk 4) 무

4.3. 1994 FIFA 월드컵 미국 아시아 2차 예선

다이너스티컵에서의 충격의 한일전 결승전 패배 이후 김호 감독은 본격적으로 월드컵 예선 체제로 팀을 꾸리기 시작한다. 유기흥 코치와 박항서 트레이너를 새로 채용했고, 강원도-독일-두바이를 오가는 장기간의 전지훈련을 A대표팀과 함께 소화했다. 강원도 삼척에서 1차 체력훈련과 전술훈련 등을 소화한 뒤 2차 독일 전지훈련에서 독일 현지 프로팀들과의 실전을 통해 실전감각을 끌어올렸다. 또한 당시 독일에서 뛰고 있던 국가대표팀의 두 스타 김주성 황선홍을 현지에서 소집해 몸상태를 점검했다. 약 1달 반동안의 강행군 이후 2월 14일에서야 대표팀은 전지훈련을 마치고 귀국했다.

또한 같은 기간 김성남 코치를 주축으로 전국실업축구연맹전과 대학축구에서 뛰는 선수들을 선발한 B대표팀으로 므르데카컵 출전을 하며 옥석 가리기에 돌입했다.[11]

1993년 3월 평가전은 캐나다와의 현지 원정 평가전 2연전이었다. 당시 캐나다는 4개국이 겨루는 월드컵 북중미 최종예선까지 진출해있던 무시못할 팀으로 대표팀은 캐나다와의 2연전에서 1승 1패를 거두고 귀국했다.

1993년 4월, 이라크와의 국내 2연전 평가전을 월드컵 예선 돌입 전 마지막 평가전으로 잡았다. 하지만 대표팀 초반 주전 공격수로 기회를 받던 김현석이 부상을 당하며 아웃되는 악재가 발생했다. 대대적인 전술 수정이 불가피했고, 결국 서정원, 정재권 등 돌파형 공격수가 공격을 이끄는 형태의 전술을 이라크 2연전에서 시험했다. 1차전 1-1, 2차전 2-2로 공격은 나름 합격점을 받았지만 수비에서 문제를 드러냈다. 이후 대표팀은 5월 레바논으로 출국하며 월드컵 예선 여정을 시작했다.

4.3.1. vs 바레인 (1차전) - 0:0 무

4.3.2. vs 레바논 (2차전) - 1:0 승

4.3.3. vs 인도 (3차전) - 3:0 승

4.3.4. vs 홍콩 (4차전) - 3:0 승

4.3.5. vs 홍콩 (5차전) - 4:1 승

4.3.6. vs 레바논 (6차전) - 2:0 승

4.3.7. vs 인도 (7차전) - 7:0 승

4.3.8. vs 바레인 (8차전) - 3:0 승

4.4. 1994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우려와 달리 아시아 2차예선을 7승 1무라는 좋은 성적으로 여유롭게 뚫으면서 김호호는 탄력을 받는다. 아시아예선을 거치며 서정원 하석주가 두각을 나타냈고, 우려가 지속되었던 수비도 8경기 1실점으로 훌륭한 모습을 보였다. 때문에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우승을 기대하는 여론이 다수였다.

그러나 조별 리그부터 이집트 대표팀에게 1-2로 지면서 대회를 시작했고, 멕시코 프로팀 아틀란테 FC, 중국 올림픽대표팀을 연파하며 4강에 진출했으나 불안함은 여전했다. 4강전에서 국가대표급 팀이었던 체코슬로바키아 1부리그 선발팀을 1-0으로 제치고 결승전에 간 대표팀은 다시만난 이집트 대표팀과의 결승전에서 또다시 0-1로 지면서 씁쓸하게 대회를 마무리했다. 결국 A매치급 팀과의 2경기는 모두 패한 셈.

4.4.1. vs 이집트 (A조 1차전) - 1:2 패

4.4.2. vs 아틀란테 FC (A조 2차전) - 4:0 승

4.4.3. vs 중국 U-23 (A조 3차전) - 3:0 승

4.4.4. vs 체코슬로바키아 리그 선발팀 (준결승전) - 1:0 승

4.4.5. vs 이집트 (결승전) - 0:1 패

4.5. 1994 FIFA 월드컵 미국 아시아 최종 예선

대통령배 준우승 이후 대표팀은 8월 말 CA 벨레스 사르스필드, 9월 중순 포곤 슈체친, 9월 말 호주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연이은 2연전 평가전을 소화하며 담금질을 계속했다. 벨레스 사르스필드와의 2연전은 0-0, 1-1, 포곤 슈체친과는 1-1, 1-0, 호주와의 A매치 2연전은 1-1, 1-0으로 2승 4무의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뒀다.

이후 10월, 3회 연속 본선진출의 결전의 장인 카타르 도하로 이동했다. 당시 최종예선은 지금의 방식과 달리 6개국만이 경쟁했고, 지금의 홈 앤드 어웨이 풀리그 방식이 아닌 중립지에 모여 3주동안 단기 싱글 풀리그를 치러 순위를 결정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때문에 이변의 여지가 많았고, 경기 하나를 그르치면 매우 큰 타격이 발생하는 고강도의 경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 대표팀 또한 해외파인 김주성, 황선홍을 모두 소집해 최정예로 예선을 준비했다.

4.5.1. vs 이란 (1차전) - 3:0 승

4.5.2. vs 이라크 (2차전) - 2:2 무

4.5.3. vs 사우디아라비아 (3차전) - 1:1 무

4.5.4. vs 일본 (4차전) - 0:1 패

4.5.5. vs 북한 (5차전) - 3:0 승

4.6. 1994 FIFA 월드컵 미국 본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김호호/1994 FIFA 월드컵 미국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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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도하의 기적을 통해 극적으로 아시아 예선을 준우승으로 통과해 월드컵 24강 본선 티켓을 손에 넣은 대표팀은, 1994년 초 또 한 번의 대형 전지훈련을 기획했다. 1993년 12월 실행된 월드컵 조 추첨식에서 피파 랭킹 1위, 디펜딩 챔피언이자 통일을 통해 전력을 더 강화한 독일, 4년 전 패배를 안겨준 피파랭킹 5위 스페인, 남미예선에서 브라질을 2:0, 우루과이를 3:1로 이기며 아르헨티나를 제치고 남미예선 3위로 통과하며, 깜짝 돌풍을 일으키고 본선 월드컵에 오래간만에 진출한 볼리비아와 한 조에 속해 16강 진출이 그야말로 가시밭길이 된 상황이었다. 때문에 대표팀의 전력 강화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대표팀은 1월 제주 국내 전지훈련으로 체력을 끌어올린 뒤 2월 초 대회 개최지인 미국으로 넘어가 현지 A매치 평가전을 통해 전력을 끌어올릴 계획이었다. 또한 1994년 2월 소련 축구 국가대표팀의 스타 플레이어 출신이자 감독이었던 아나톨리 비쇼베츠를 기술 고문으로 영입해 행정에도 힘을 실었다.[12]

2월 미국 출국 전 가진 국내 평가전에서 대표팀은 당시 유럽 강호로 꼽히던 루마니아와 예상보다 더 잘 싸우며 1-2 석패를 당한다. 이후 미국 현지로 출국해 월드컵 본선 출전팀인 콜롬비아와 깜짝 2-2 무승부를 거두며 기대감을 높였고, 3월 초 개최국인 미국과의 2연전에서 0-1, 1-1이라는 다소 아쉬운 결과를 가지고 전지훈련을 마무리했다.

이후 4월 숨 고르기를 한 후 5월 아프리카의 복병이자 지난 대회 8강 7위에 오른 카메룬과 국내 2연전 평가전을 가졌다. 전력적으로 열세라는 평가를 뒤집고 1차전 2-2, 2차전 2-1로 한 단계 성장한 경기력을 보여 주었다. 이후 브라질 SC 인테르나시오나우와 1무 1패, 독일 바이어 04 레버쿠젠에게 2연승으로 국내 일정을 마무리한 대표팀은 결전지 미국으로 건너가 에콰도르, 온두라스와 최종 평가전으로 월드컵 준비를 마치고 본선에 돌입했다.

4.6.1. vs 스페인 (24강 본선 C조 1차전) - 2:2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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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2. vs 볼리비아 (24강 본선 C조 2차전) - 0:0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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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3. vs 독일 (24강 본선 C조 3차전) - 2:3 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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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퇴임 및 평가

국내 감독으로는 허정무, 신태용 전 감독 이전에 월드컵 본선에서 가장 선전했고, 2002년 거스 히딩크 전 감독 이전에는 제일 잘한 감독으로 축구 팬들이 떠올리는 인물이며, 이 대회를 통해 김호는 본격적으로 명장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다만 이 무렵에는 스페인과 독일전은 잘 했는데 순간 한국사람들의 눈이 너무 높아져서 1승을 충분히 거둘거라고 생각했던 상대인 남미 예선 3위 볼리비아에 0:0무승부 승점 1점를 기록하면서 1승에 실패한 점으로 까였다.[13] 결국 월드컵이 끝나고 대회 20위로 16강에 오르지 못해 죄송하다며 국대 감독에서 사퇴했다.

하지만 이 당시 대표팀의 상황이나 여건, 죽음의 조[14]에 소속되어 있었다는 점 등을 감안했을 때 이 정도의 성적도 엄청 잘했다는 게 축구 팬들의 평.

이후 김호 감독은 1996년 신생팀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초대 사령탑에 올랐고 당시 신예 골키퍼였던 이운재, 스트라이커 박건하, 캐논 슈터 이기형 등이 합류했다. 윤성효가 선수단 최고참 역할을 했다.

6. 여담

7. 경기 결과

경기 수 득점 실점 승률[15]
37 14 15 8 61 33 37.84%

[정식 A매치 이외의 클럽팀, 선발팀과의 경기까지 합칠 시 전적]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black><tablebgcolor=#E6002D><tablecolor=white><width=15%> 경기수 ||<width=14%> ||<width=14%> ||<width=14%> ||<width=14%> 득점 ||<width=14%> 실점 ||<width=15%> 승률 ||
48 20 19 9 79 39 41.67%

<rowcolor=white> 일시 / 장소 상대국 ( FIFA 랭킹)[16] 결과 대회 득점[17] 비고
1992년
1992년 8월 22일
( 중국, 베이징, 중립)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0:0
1992 다이너스티컵 김호 감독 데뷔전
1992년 8월 24일
( 중국, 베이징, 중립)
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1:1
홍명보
1992년 8월 26일
( 중국, 베이징, 원정)
파일:중국 국기.svg
중국
2:0
박현용, 정재권 김호 감독 첫 승
1992년 8월 22일
( 중국, 베이징, 중립)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2:2 aet
2 pk 4
1992 다이너스티컵 결승전 정재권, 김정혁
1992년 10월 21일
( 안양, 홈)
파일:아랍에미리트 국기.svg
아랍에미리트
0:0
평가전 홈 데뷔전
1993년
1993년 3월 9일
( 캐나다, 코퀴틀람, 원정)
파일:캐나다 국기.svg
캐나다
2:0
평가전 김태영, 김현석
1993년 3월 11일
( 캐나다, 빅토리아, 원정)
파일:캐나다 국기.svg
캐나다
0:2
1993년 4월 25일
( 창원, 홈)
파일:이라크 국기.svg
이라크
1:1
평가전 구상범
1993년 4월 28일
( 울산, 홈)
파일:이라크 국기.svg
이라크
2:2
하석주, 서정원
1993년 5월 9일
( 레바논, 베이루트, 중립)
파일:바레인 국기.svg
바레인
0:0
1994 FIFA 미국 월드컵
아시아 1차예선
1993년 5월 11일
( 레바논, 베이루트, 원정)
파일:레바논 국기.svg
레바논
1:0
하석주
1993년 5월 13일
( 레바논, 베이루트, 중립)
파일:인도 국기.svg
인도
3:0
홍명보, 최문식
하석주
1993년 5월 15일
( 레바논, 베이루트, 중립)
파일:영국령 홍콩 기.svg
홍콩
3:0
하석주, 서정원
최문식
1993년 6월 5일
( 서울, 홈)
파일:영국령 홍콩 기.svg
홍콩
4:1
최문식, 정재권
하석주, 노정윤
1993년 6월 7일
( 서울, 홈)
파일:레바논 국기.svg
레바논
2:0
하석주, 황보관
1993년 6월 9일
( 서울, 홈)
파일:인도 국기.svg
인도
7:0
이기범(3), 김태영(2)
박정배, 하석주
1993년 6월 13일
( 서울, 홈)
파일:바레인 국기.svg
바레인
3:0
강철, 박남열
구상범
1993년 6월 19일
( 서울, 홈)
파일:이집트 국기.svg
이집트
1:2
1993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A조 조별 리그
서정원
1993년 6월 21일
( 순천, 홈)
파일:아틀란테 FC 로고.png
아틀란테 FC
4:0
황보관, 박정배
김정혁, 정재권
[B매치]
1993년 6월 23일
( 창원, 홈)
파일:중국 국기.svg
중국 U-23
3:0
김정혁, 최문식(PK)
서정원
[B매치]
1993년 6월 26일
( 부산, 홈)
파일:체코 국기.svg
체코슬로바키아 XI
1:0
1993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준결승전
정재권 [B매치]
1993년 6월 28일
( 서울, 홈)
파일:이집트 국기.svg
이집트
0:1
1993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결승전
1993년 8월 26일
( 서울, 홈)
파일:CA 벨레스 사르스필드 로고.svg
CA 벨레스 사르스필드
0:0
평가전 [B매치]
1993년 8월 29일
( 서울, 홈)
파일:CA 벨레스 사르스필드 로고.svg
CA 벨레스 사르스필드
1:1
김현석 [B매치]
1993년 9월 17일
( 서울, 홈)
파일:포곤 슈체친 로고.svg
포곤 슈체친
1:1
김현석 [B매치]
1993년 9월 19일
( 서울, 홈)
파일:포곤 슈체친 로고.svg
포곤 슈체친
1:0
김정혁 [B매치]
1993년 9월 24일
( 서울, 홈)
파일:호주 국기.svg
호주
1:1
서정원
1993년 9월 26일
( 서울, 홈)
파일:호주 국기.svg
호주
1:0
최문식
1993년 10월 16일
( 카타르, 도하, 중립)
파일:이란 국기.svg
이란
3:0
1994 FIFA 미국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박정배, 하석주
고정운
1993년 10월 19일
( 카타르, 도하, 중립)
파일:이라크 국기.svg
이라크
2:2
김판근, 홍명보(PK)
1993년 10월 22일
( 카타르, 도하, 중립)
파일:사우디아라비아 국기.svg
사우디아라비아
1:1
신홍기
1993년 10월 25일
( 카타르, 도하, 중립)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0:1
1993년 10월 28일
( 카타르, 도하, 중립)
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3:0
고정운, 황선홍
하석주
[25]
1994년
1994년 2월 16일
( 창원, 홈)
파일:루마니아 국기.svg
루마니아
1:2
평가전 신홍기
1994년 2월 26일
( 미국, 몬테레이, 중립)
파일:콜롬비아 국기.svg
콜롬비아
2:2
김판근, 황선홍
1994년 3월 5일
( 미국, 몬테레이, 원정)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0:1
1994년 3월 12일
( 미국, 풀러턴, 원정)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1:1
마르셀로 발보아 (OG)
1994년 5월 1일
( 서울, 홈)
파일:카메룬 국기.svg
카메룬
2:2
김현석, 조진호
1994년 5월 4일
( 창원, 홈)
파일:카메룬 국기.svg
카메룬
2:1
조진호, 황선홍
1994년 5월 12일
( 서울, 홈)
파일:SC 인테르나시오나우 로고.svg
인테르나시오나우
2:2
최대식(PK), 황선홍 [B매치]
1994년 5월 14일
( 서울, 홈)
파일:SC 인테르나시오나우 로고.svg
인테르나시오나우
0:1
[B매치]
1994년 5월 18일
( 부산, 홈)
파일:바이어 04 레버쿠젠 로고.svg
바이어 레버쿠젠
3:1
김현석, 하석주
최문식
[B매치]
1994년 5월 22일
( 서울, 홈)
파일:바이어 04 레버쿠젠 로고.svg
바이어 레버쿠젠
2:0
조진호, 김판근 [B매치]
1994년 6월 5일
( 미국, 보스턴, 중립)
파일:에콰도르 국기.svg
에콰도르
1:2
홍명보
1994년 6월 11일
( 미국, 댈러스, 중립)
파일:온두라스 국기(1949-2022).svg
온두라스
3:0
고정운, 황선홍
김주성
1994년 6월 17일
( 미국, 댈러스, 중립)
파일:스페인 국기.svg
스페인
2:2
1994 FIFA 미국 월드컵
24강 본선 조별리그 C조
홍명보, 서정원
1994년 6월 23일
( 미국, 보스턴, 중립)
파일:볼리비아 국기.svg
볼리비아
0:0
1994년 6월 27일
( 미국, 댈러스, 중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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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2:3
황선홍, 홍명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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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항서 따르면 당시 막내 코치를 트레이너라고 붙히는 관행이 있었어도 실제로는 코치를 업무했다. [2] 계약 기간은 1994 FIFA 월드컵 미국까지 2년이었으며, 16강 진출에 실패한 직후 아나톨리 비쇼베츠를 후임 감독으로 선임하면서 김호가 자연스럽게 물러났다. [3] ''94월드컵축구 감독에 金浩(김호)씨' ( 1992년 7월 9일자 / 경향신문) 기사 참조. # 계약금은 2000만 원, 연봉은 3600만 원씩, 활동비는 매년 2400만 원씩으로 보도됐다. [4] 24개 진출팀 중 20위 기록. [5] 당시 남미예선 3위 볼리비아전에서 남미팀에 첫 승점 획득과 첫 클린시트 기록 [6] 승점 2점 2무 1패 조 3위 월드컵 20위 [7] 그리고 이런 조직을 체계적으로 정비한 게 정몽준이다. [8] 스페인이 월드컵 역사상 아시아 팀에게 승점을 허용한 최초의 경기. [9] 대한민국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도 최종 20위를 기록했다.(첫 승점 1점 1무 2패) [10] 무려 아시안컵 지역예선에 실업-대학 선발팀을 내보내 태국에게 패하면서 당시 8개국(8강) 본선 아시안컵 진출권을 어이없이 내줬다. 대한축구협회 역사에서 이 참사의 원흉이 바로 허승표다. AFC에서 명색이 아시아 최강을 다루는 대회에 이런식으로 나오면 한국은 월드컵 지역예선 참가 실격하겠다라고 엄포를 놓아 축협이 난리가 났다. [11] 므르데카컵에서 발굴한 선수가 바로 이운재다. 또한 이 당시 대학생이었던 노상래 최진철도 상비군으로 선발되었다. [12] 이후 비쇼베츠는 월드컵 이후 김호의 뒤를 이어 국가대표팀 감독에 취임한다. [13] 그러나 당시 볼리비아도 전성기 시절이었고 남미예선에서 홈고지대로 우승팀 브라질을 2:0, 우루과이를 3:1로 격파하며 아르헨티나를 제치고 남미 예선 3위로 1994 미국 월드컵 24강 본선 진출팀이었기 때문에 한국보다 강했으면 강했지 약팀이 아니었다. 그리고 볼리비아를 상대로 대한민국 월드컵 사상 첫 클린시트와 남미팀에 첫 승점을 획득했다. [14] 라고는 하지만 명백한 2강 2약 조라 정확하게는 죽음의 조는 아니다. 그저 한국 입장에서 지옥의 조일 뿐. [15] 축구 야구와 달리 무승부를 분모에 산입 계산해서, 승률상 무승부는 승리로 취급되지 않는다. 물론 상대팀의 승률도 하락시킨다. 자세한 내용은 승률 문서 참조 바람. [16] 경기 당시 기준. [17] 대한민국 대표팀 선수 기준. [B매치] [B매치] [B매치] [B매치] [B매치] [B매치] [B매치] [25] 도하의 기적 [B매치] [B매치] [B매치] [B매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