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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3 11:54:35

도하의 기적

1. 개요2. 전개
2.1. 암울한 상황
2.1.1. 울트라 닛폰의 KEROA 현수막 파동
2.2. 최종 예선 마지막 경기
2.2.1. 전반전2.2.2. 후반전2.2.3. 경기 종료 10초 전에 벌어진 기적
2.2.3.1. 구국의 영웅, 움란 자파르
3. 최종 예선 결과4. 후폭풍5. 도하의 기적이 가져다 준 대한민국 축구계의 나비 효과6. 유사 사례7. 일본 축구의 무덤, 도하 이라크
7.1. 비극의 땅에서 축복의 땅으로 바뀌다
8. 관련 문서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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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folding 【언어별 표기】 <tablebgcolor=white><colbgcolor=#ccc> 한국어 도하의 기적(Doha의 奇蹟)
일본어 ドーハの[ruby(悲, ruby=ひ)][ruby(劇, ruby=げき)][J]
영어 Agony of Doha[J]
Miracle of Doha[K]
아랍어 عذاب الدوحة[J]
معجزة الدوحة[K]
}}} ||
대한민국 축구에서 도하의 기적, 혹은 일본 축구에서 도하의 비극은 1993년 10월 28일, 도하에서 열린 1994 FIFA 월드컵 미국의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최종전 종료 1분을 앞두고 마지막 본선 진출권의 주인이 일본에서 대한민국으로 뒤바뀐 극적인 사태를 일컫는 표현이다.

2. 전개

1994 FIFA 월드컵 미국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
카타르 클럽 경기장[6] (카타르, 도하)
주심: 이온 크러치우네스쿠 (루마니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3 : 0 파일:북한 국기.svg
대한민국 북한
49′ 고정운
53′ 황선홍
75′ 하석주
득점자 -
1994 FIFA 월드컵 미국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
알 아흘리 경기장[7] (카타르, 도하)
주심: 세르주 무헌터헬러 (스위스)
중계 방송: 파일:TV_Tokyo_1985.png | 시청률: 48.1%
파일:일본 국기.svg 2 : 2 파일:이라크 국기(1991-2004).svg
일본 이라크
5′ 미우라 카즈요시
80′ 나카야마 마사시
득점자 54′ 라디 셰냐이셸
90+1′ 움란 자파르

대한민국 축구계에서는 도하의 기적이라 부르며 감격스러워하지만 반대로 일본 축구계에서는 '도하의 비극'이라고 부르며 매우 비통해한다. 이 사건 이후 일본의 1992 AFC 아시안컵 일본 우승을 이끌며 명장으로 추앙받았던 네덜란드 출신의 한스 오프트 감독은 거의 다 잡은 당시 94 FIFA 월드컵 24개국 본선 진출 티켓을 눈 앞에서 놓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8]

이 도하의 기적으로 인해 대한민국은 일본을 간신히 제치고 아시아예선 풀리그[9] 준우승(2위)으로[10] 월드컵 본선 진출 티켓을 차지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일본을 몇 수 아래라면서 깔보고 무시했던 대한민국은 최종예선 도중 일본에게 0:1로 지면서 일본 축구계가 J리그 발족 등으로 실력이 크게 성장한 것을 몸소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11]

이때부터 한국에서는 일본에 대한 라이벌 의식이 점점 높아지기 시작했고 2002년 FIFA 월드컵 유치 경쟁과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최종 예선에서 같은 조로 편성되자 더욱 절정에 이르렀다. 그리고 후일 이는 도쿄 대첩으로 다시 한 번 승화됐다.

이때 본선 진출에 실패하면서 2002년 월드컵 개최를 목표로 장기 계획을 세웠던 일본은 지금까지 한 번도 월드컵 본선 진출도 못 한 나라가 돈으로 본선 진출권을 사려고 한다는 비판에 시달렸다. 이런 약점이 크게 작용하는 바람에 뒤늦게 유치에 뛰어든 대한민국과 벌인 유치 경쟁에서 힘을 크게 잃어 끝내 1996년에 양국 공동 개최 결정이라는 타협점으로 물러서야 했다.

참고로 도하의 기적이 없었다면 중국의 2002년 월드컵 본선 진출도 없었을 것이다. 애시당초 중국이 2002년에 본선 진출을 한 가장 큰 요인 중 하나가 바로 한국과 일본이 주최국 자격을 얻어서 예선에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비록 한국과 일본의 진출로 아시아에 배정된 티켓 수가 적어지긴 했지만 그걸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로 중국에 있어서 당시 한국 및 일본 축구 대표팀은 거대한 벽이었기 때문. 그리고 중국은 2002년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등의 강호를 모두 피한 꿀조에 편성되는 행운을 만나서 B조 1위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 A~B조 1위가 본선에 직행하고 A~B조 2위가 홈 앤드 어웨이로 플레이오프를 치러 이긴 팀이 유럽과의 대륙간 플레이오프를 거쳐야 했으니 만약 한국이나 일본 중 어느 한 나라가 있었더라면 중국의 월드컵 본선 진출은 매우 불투명했다.

명실상부 대한민국의 월드컵 10회 연속 본선 진출 과정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으로 꼽히는 순간이다.[12]

파일:external/obamah.up.n.seesaa.net/E38389E383BCE3838FE381AEE682B2E58A87.jpg
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11010709232260006300-001.jpg
위 사진은 1994 FIFA 월드컵 미국 아시아 최종 예선 마지막 경기 이라크전에서 2:1로 앞서다가 경기가 끝날 무렵 동점골을 내주고 비긴 후, 본선 진출에 실패한 것을 알고 허망하게 주저앉아 버린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위)[13], 그리고 일본과 이라크가 2:2로 비겼다는 소식을 들은 후 극적으로 드라마틱한 본선 진출 성공에 환호하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아래)의 희비가 교차하는 모습이다.

파일:external/file.flash24.dreamx.com/3416945437_j8huePOK_make_1277303056730.jpg
불과 경기 종료 10초 전에 극적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올라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과 거꾸로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의 운명이 뒤바뀌는 모습을 담은 중계방송 화면이다.

파일:external/4.bp.blogspot.com/doha1.jpg
파일:external/image.sportsseoul.com/l_2013102901001221400073571.jpg
경기가 끝난 후 이튿날 스포츠서울에 실린 기사.

2.1. 암울한 상황

1993년 10월 카타르에서 열린 1994 미국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에는 대한민국, 일본, 북한,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6개국이 참가한 상태였다. 대한민국은 첫 번째 경기에서 난적 이란을 만났지만, 하석주, 박정배, 고정운이 연속 골을 터뜨리며 3:0으로 손쉽게 승리를 따내며 쾌조의 스타트를 끊었다. 하지만 그 이후의 행보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두 번째 경기인 이라크전에서는 김판근 홍명보의 골로 2:1로 앞서나가다가 후반 종료 5분을 남기고 동점골을 내주며 2:2로 비겼고, 이어진 세 번째 경기 사우디아라비아전에서는 후반 15분 신홍기의 크로스를 사우디아라비아의 골키퍼가 알까기를 하면서 선취점을 얻어냈지만 종료 직전에 상대 수비수 아메드 마다니에게 통한의 동점 헤딩골을 내주면서 다시 한 번 뼈아픈 무승부를 기록했다.

그리고 이어진 네 번째 경기 상대는 숙적 일본이었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역대 전적상은 물론 최근 상대 전적에서도 대한민국이 일본을 압도하고 있었고, 객관적인 전력도 한국이 좀 더 우위에 있었던 데다가 지금까지 한국은 월드컵 예선에서 일본에 단 한 번도 패배했 적이 없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일본 축구를 한 수 아래로 얕잡아보고 있었던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미우라 카즈요시, 나카야마 마사시로 이루어진 가공할 만한 공격력이 있었고 브라질 출신 선수였던 라모스 루이까지 일본으로 귀화시키면서 한국을 상대할 수 있는 최강의 전력을 조성하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황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운명의 한일전에서 양 팀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면서 경기를 진행했다. 하지만, 주전 공격수 황선홍이 경고 누적으로 결장한 한국에 비해 미우라 카즈요시와 나카야마 마사시가 포진한 일본의 공격력은 한국을 앞서기 시작했다. 일본은 전반전에만 두 번이나 골대를 맞추면서 한국을 몰아붙인 반면에 한국은 오히려 전반 34분 노정윤이 일본 골키퍼와 충돌하면서 부상을 당했고, 플레이메이커로서 한국의 공격을 책임지던 노정윤의 부재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러왔다. 더군다나 이 당시의 노정윤은 J리그 산프레체 히로시마 소속으로 뛰고 있었을 때였고, 시기상 J리그가 출범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일본 프로축구에 해박한 선수가 많이 없었을 때였으니 전략적으로도 커다란 손실이었다.

결국 후반 14분 나카야마에게서 패스를 받은 미우라 카즈요시 최인영 골키퍼와 골문 사이로 때린 슈팅이 골로 이어지는 바람에 한국은 경기의 주도권과 흐름을 내주었고 이를 만회하지 못하는 바람에 결국 0:1로 패배한다. 이로 인해 한국은 자력으로 월드컵 본선에 나갈 기회가 날아가면서 월드컵 본선 진출이 매우 불투명해졌다. 참고로, 이 경기의 1994년 미국 월드컵 최종예선 조별리그 한일전은 일본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FIFA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무려 40년 만에 처음으로 승리한 경기였다.

그렇게 모든 팀이 4경기를 마치고 최종전을 앞두게 되었고, 두 장(우승&준우승)의 본선 진출권이 걸려있는 상황에서 아래의 표와 같이 순위가 형성되었다.
승점 비고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5 2 1 1 5 2 +3
파일:사우디아라비아 국기.svg 사우디아라비아 5 1 3 0 4 3 +1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대한민국 4 1 2 1 6 4 +2
파일:이라크 국기(1991-2004).svg 이라크 4 1 2 1 7 7 0
파일:이란 국기.svg 이란 4 2 0 2 5 7 -2
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2 1 0 3 5 9 -4 탈락 확정
당시는 승리 시 획득하는 승점이 2점이었다.[14] 그러므로 탈락이 확정된 북한을 제외하고 상위 5개 팀 모두 마지막 경기에서 승점 6점 이상을 획득할 수 있었기에 어느 팀이든 본선 진출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상황이었고, 최종예선 마지막 경기의 대진은 대한민국 vs 북한, 일본 vs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vs 이란이었다. 일본전 패배로 가시밭길에 몰리면서 자력으로 본선에 진출할 기회가 날아간 한국은 10월 28일에 동시에 열리는 최종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두 개의 조건을 모두 만족해야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

2.1.1. 울트라 닛폰의 KEROA 현수막 파동

한일전이 있던 10월 25일 일본 응원단 울트라 닛폰 중 한 무리가 "JAPAN 1 - KEROA 0"라고 적힌 현수막을 걸어서 혐한 논란이 일어난 적이 있다. 당시 기사 단순히 KOREA의 오기처럼 보이지만, KEROA에서 A를 떼면 하인을 뜻하는 下郞(Gerou)와 발음이 유사해보이기 때문에 의도적인 애너그램이라고 해석한 한국인들이 격분한 것이다. 이에 일본 측은 발음의 연관성이 떨어진다고 반론했다.

이후 야구 한일전에서는 한국 응원단측에서 ' NIMIPPON'이라는 응원문구를 거는 식으로 응수하기도 했다고 한다.

한때의 해프닝이라 지금은 거의 잊혀진 일이지만, 지금까지도 혐한 중에서는 이런 것들까지 발굴하여 한국인 비하 명칭으로 써먹는 경우가 있다.

2.2. 최종 예선 마지막 경기

2.2.1. 전반전

경기 시간 상황 점수
파일:사우디아라비아 국기.svg 파일:이란 국기.svg 파일:일본 국기.svg 파일:이라크 국기(1991-2004).svg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파일:북한 국기.svg
킥오프 세 경기장의 경기가 동시에 시작되었다. 0 : 0 0 : 0 0 : 0
전반 5분 일본의 나카야마가 때린 슈팅이 크로스바를 맞고 나오자 미우라가 헤딩으로 밀어넣으며 선취골을 넣었다. 1 : 0
전반 21분 사우디아라비아의 사미 알 자베르가 골키퍼와 맞붙은 기회에서 침착한 칩슛으로 선제골을 넣었다. 1 : 0
전반 27분 사우디아라비아의 메할렐이 강력한 왼발 슈팅으로 추가 골을 얻었다. 2 : 0
전반 43분 이란의 포노우니자데가 강력한 왼발 프리킥으로 만회골을 성공시켰다. 2 : 1
전반 종료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주적 북한에게 다득점 승리를 해도 월드컵 진출이 불투명한 마당에 전반전에 한 골도 뽑아내지 못하였고 한 마디로 최악의 시나리오로 흘러가고 있었다. 심지어 이 시점 조 1위인 사우디와 일본이 모두 이기고 있어 그대로 탈락할 가능성마저 생겼다. 물론 공은 둥글고, 축구는 90분의 게임이기에 속단하기에는 일렀다.

2.2.2. 후반전

경기 시간 상황 점수
파일:사우디아라비아 국기.svg 파일:이란 국기.svg 파일:일본 국기.svg 파일:이라크 국기(1991-2004).svg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파일:북한 국기.svg
후반 킥오프 경기가 동시에 시작되었다. 2 : 1 1 : 0 0 : 0
후반 2분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모우사가 알 자베르가 놓친 볼을 밀어넣으며 추가골을 넣었다.
이로서 사우디아라비아는 본선 진출을 거의 확정지었다.
3 : 1
후반 4분 대한민국의 고정운 김현석의 크로스를 받아서 헤딩골을 만들어내며 일본을 바짝 추격했다. 1 : 0
후반 7분 이란의 포노우니자데가 빨랫줄 같은 중거리 슛으로 만회골을 넣으며 사우디아라비아를 압박했다. 3 : 2
후반 8분 대한민국의 황선홍이 김현석의 크로스를 받아 논스톱 슈팅으로 추가골을 넣었다. 2 : 0
후반 9분 이라크의 라흐디가 문전 혼전상황에서 왼발 슛으로 동점골을 넣었다. 1 : 1
후반 29분 사우디아라비아의 팔라타가 코너킥 상황에서 헤딩으로 본선 진출을 확정짓는 네 번째 골을 성공시켰다. 4 : 2
후반 30분 대한민국의 하석주가 오른발 밀어넣기로 세 번째 골을 넣었다. 3 : 0
후반 35분 라모스의 패스를 받은 나카야마가 그대로 골을 넣으면서 일본이 다시 앞서나갔다. 2 : 1
후반 45분 이란의 자바드 마나피가 알리 다에이의 패스를 받아 만회골을 넣었다.
이 골을 끝으로 이란 vs 사우디아라비아 경기가 끝났고 대한민국 vs 북한 경기도 종료되었다.
4 : 3

월드컵 진출 실패 위기에 몰린 정신력의 발로인지, 이미 떨어진 북한의 뜨거운 동포애(?)였는지 후반전에 북한의 수비진은 순식간에 무너지며 한국에 내리 세 골을 연달아 헌납했다. 게다가 이라크가 동점골을 넣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황이었다.

경기 전에 북한 대표팀 감독은 "기왕이면 같은 동포가 진출하는 게 좋지 않겠냐?"라는 내용의 인터뷰를 했다. 다만 선수들은 그 반대였던 모양인데, 당시 대표팀 선수였던 신홍기가 이후 MBC의 "히스토리 후"를 통해 회고한 후일담에서 "어차피 북한은 탈락이 확정되었으니, 제발 같은 동포니까 좀 봐 달라."라고 부탁을 했더니 한 북한 선수는 "우리도 당신들에게 패배하면 인민재판으로 넘어갈지 모른다."라고 말하며 거절했다고 한다.[15]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이 추가골을 넣어서 2:1로 다시 앞서갔다. 다른 경기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란을 난타전 끝에 4:3으로 잡았으며, 대한민국 vs 북한 경기도 3:0으로 종료되었다. 모든 경기가 이대로 종료되었다면
승점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3 1 1 7 3 +4 7
파일:사우디아라비아 국기.svg 사우디아라비아 2 3 0 8 6 +2 7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대한민국 2 2 1 9 4 +5 6
파일:이라크 국기(1991-2004).svg 이라크 1 2 2 8 9 -1 4
파일:이란 국기.svg 이란 2 0 3 8 11 -3 4
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1 0 4 5 12 -7 2

이런 상황이었다. 때문에 한국 선수들은 북한을 상대로 3-0 완승을 거두고도 고개를 떨궜고, 일부 선수들은 "결국 최종예선에서 탈락했다." 란 생각에 머리를 감싸고 눈물을 쏟기 시작했으며, 반면 일본은 이미 월드컵 진출을 확정 지은 것같은 분위기었으며, 몇몇 일본 국민들은 축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2.2.3. 경기 종료 10초 전에 벌어진 기적

최종 점수
파일:사우디아라비아 국기.svg 파일:이란 국기.svg 파일:일본 국기.svg 파일:이라크 국기(1991-2004).svg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파일:북한 국기.svg
4 : 3 2 : 2 3 : 0

그런데 대한민국 vs 북한 경기가 종료되기 10초 전이었을 때 일본 vs 이라크 경기는 주심의 추가시간 적용으로 인해 경기 종료 1분 전이었다. 이때 2:1로 일본이 앞서있던 상황에서 이라크의 움란 자파르[16]가 후반 추가시간에 선언된 코너킥 상황에서 우측에서 올라온 크로스에 머리를 틀면서 시도한 헤딩슛이 극적으로 골대 안으로 들어가면서 2:2로 동점이 되고 말았다. 결국, 헤딩골이 들어가는 동시에 사우디아라비아가 이긴 걸 알고 있었던[17] 일본 선수들은 허탈감에 그 자리에서 완전히 주저앉았다.[18]

특히 역전골을 넣었던 나카야마 마사시는 이라크의 동점골을 목격하고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아 머리를 감싸쥐고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이 때 나카야마 마사시가 벤치에서 미우라 카즈요시가 이라크 선수의 역동작에 걸리면서 크로스를 허용한 뒤 극적으로 동점골을 내줬을 때 "カズさん! カズさん! ああ!! もう!!" (카즈씨! 카즈씨! 아!! 진짜!!!)[19] 라면서 왜 크로스를 허용해서 골을 내줬냐고 원망하는 목소리를 냈었다고 한다.[20] 그 뒤 30초쯤 지난 후에 주심이 경기 종료 휘슬을 불면서 일본 vs 이라크 경기는 그대로 2:2 무승부로 끝났다.

이로써 대한민국과 일본은 2승 2무 1패, 승점은 6점으로 동률이 되었지만 골득실에서 대한민국이 일본보다 두 골을 더 앞서면서 한국은 3회 연속 FIFA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반면에 일본은 마지막 20초를 못 버텨냈고 동점골을 내주면서 극적으로 비기는 바람에 첫 월드컵 본선진출의 꿈은 저 멀리 대한민국으로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경기 종료까지 불과 1분도 안 남은 시점에서 터진 동점골이 대한민국과 일본의 운명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그리고, 이 소식은 워키토키를 통해 대한민국 vs 북한 경기가 종료된 후 한국 선수들이 벤치로 걸어들어오던 도중에 전달되었다. 그래서 경기를 3:0으로 승리를 했어도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미리 눈물을 흘리면서 힘없이 벤치로 걸어들어오던 한국 선수들이 제일 앞에 있던 고정운을 필두로 갑자기 만세를 부르면서 벤치로 뛰어가는 명장면이 연출되었고, 슬픔의 눈물은 기쁨의 눈물로 바뀌었다. 또한, 선수들은 물론이고 코칭 스태프들까지 서로 부둥켜안고 감격스러운 눈물을 쏟아냈으며 이를 지켜보던 한국 축구 팬들도 모두 감격했다.

경기를 중계하던 캐스터는 침울한 목소리로 중계를 하다가 갑자기 들어온 이 소식에 흥분한 나머지 "아! 국민 여러분 기뻐해 주십시오! 이라크가 동점골을 넣었습니다! 일본은 탈라아아아아아악! 한국이 진출합니다!" 라는 샤우팅을 보이기도 했다. 축구 컨텐츠 유튜브인 이스타TV에서 이주헌 해설이 역대 한일전을 다루는 컨텐츠에서 푼 시청 후기 내용에 따르면 KBS와 MBC 중계에서는 "대한민국이 진출합니다!!!" 라고 했고 SBS 중계에서는 "일본 탈라아아아아악!!!" 이라는 명언(?)을 남겼다고 한다.

물론, 반대로 이렇게 충격적인 예선탈락을 받아들이게 된 일본 열도는 완전히 전국이 초상집으로 바뀌었다. 움란 자파르의 헤딩골이 들어가는 순간 일본의 모든 선수단은 그라운드에 주저앉아서 눈물샘이 마를 때까지 눈물을 흘렸으며, 일본 응원단들도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다들 거리에 주저앉아서 통곡했다.

여기에 첨부된 동영상에서도 나오지만, 이라크의 동점골이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본국에서 TV로 경기를 시청하는 중이던 일본 팬들은 그냥 찬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그 당시 일본의 방송국에서는 일본 대표팀 선수들의 가족들과 실시간으로 같이 응원하는 생방송 촬영을 하기도 했었는데, 1분을 남기고 충격적인 예선 탈락의 결과를 국민들과 다같이 바라보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더더욱 잔인한 상황이었던 셈이다.

일본 열도를 깊은 비탄과 충격에 빠뜨린 이 사건을 통틀어서 일본 언론들은 '도하의 비극' 이라고 불렀고[21] 반대로 대한민국은 도하의 기적이라고 부르면서 극적인 본선 진출에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다만, 일각에서는 "우리 대한민국이 자력으로 본선진출을 이뤄내지 못하고 오히려 본선진출을 당한 건데 도대체 뭐가 그리 기뻐할 일이냐?" 라면서 질책하는 의견도 있었는데, 승부처에서 일본에 졌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여론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패배가 월드컵 지역예선 40년만에 한일전에서 기록한 첫 패배였으니 비난이 없었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했다. 지역예선 조별리그만 하더라도 한국은 일본전은 가뿐히 이기고 들어간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나마 본선진출을 했기에 망정이지, 만약에 이라크가 동점골을 기록하지 못하고 그대로 일본이 승리해 본선진출을 했었더라면 한국 축구는 가루가 될 때까지 까였을 분위기였다. 게다가 조별리그 내용도 좋지 않았는데 이란에 3:0으로 승리하면서 시작은 좋았으나 다음 경기였던 이라크전과 사우디아라비아전에서 각각 2:2, 1:1 무승부를 당하고 만것이다. 더욱이 이 두 경기는 이길 수 있었던 경기를 다 무승부로 끝낸 것이어서 말들이 많았고 그 와중에 일본에 사상 첫 패배를 당한 것이라 엄청난 쇼크였었다. 그리고 만일 일본이 승리하여 본선진출을 이뤘다면 한국으로서는 일본전의 패배가 그 원인이 되는셈이므로 비난의 강도가 무척이나 강했을 태세였다.

그리고 도하의 기적 이후의 시기를 기점으로 일본은 더 이상 한국이 만만하게 볼 수 있는 승점자판기 및 호구라는 타이틀을 벗어던졌다. 이제는 경기력도 대등해졌을뿐 아니라 역으로 한국을 곤경에 처하게끔 만드는 상황도 잦아졌다. 따라서 이 당시 한국이 가까스로라도 본선진출을 이룬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2.2.3.1. 구국의 영웅, 움란 자파르
이 당시 극적인 헤딩 골을 넣었던 이라크의 선수는 스트라이커였던 움란 자파르 선수였다.[22]

이튿날, 주한 이라크 대사관에는 축구팬들에게서 온 감사 전화 및 팩스가 폭주했다. 이 당시는 걸프전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국제사회에서 이라크의 이미지가 매우 형편없던 시절이라 당시 주한 이라크 대사관에서는 "이라크 정부가 몇 년을 노력해도 되지 못했던 것을 단 한 순간에 해냈다."고 극찬했다.

움란 자파르 선수는 훗날 대한민국으로 초대되어 영웅으로[23] 환대를 받았으며, 대한축구협회에서는 감사의 표시로 이라크 축구 선수들에게 유니폼, 축구공, 축구화 등 여러 가지 장비들을 지원했다. 또한 그는 " K리그에 진출하고 싶다."는 의사를 나타내기도 했으나, 성사되지는 못했다. 그래도 이후 이라크 선수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결국 96년 안양 LG 치타스 아바스 오베이드 자심 사디크 사둔 압둘리다를 영입하였다. 이 중 자심은 안양 LG 치타스 포항 스틸러스를 거치며 2001년까지 5년 간 준수한 활약을 했고, 이라크 선수가 K리그에서도 나름 경쟁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당시 인터뷰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국내 팬들은 물론, 현장에서 직접 뛴 나 자신도 이 대회는 일본과 사우디아라비아 등 부국들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고 느꼈다. 심지어, 뇌물 공여나 심판 매수를 했다는 의구심이 들었다. 이라크는 이 같은 경기 외적인 요인 때문에 희생양이 됐다고 생각한다. 이라크의 명예를 전 세계에 알릴 수 있다면 승패에 관계없이 최선을 다한다는 각오로 경기에 임했으며, 우리가 본선 진출의 가능성이 희박해진 후에도 마지막까지 열심히 뛴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라크 선수들은 움란 자파르의 동점골 이후에도 별로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골대 안으로 들어가서 그물에 걸린 공을 주워 들며 덤덤하게 센터서클 쪽으로 가져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 시점에서 이라크가 본선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최소 석 점 차 이상으로 일본을 이겼어야만 했다.[24] 이라크 처지에서는 동점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무승부나 패하는 것이나 딱히 큰 의미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1993년 당시 이라크 축구 국가대표팀의 코치로 있었던 야흐야 만헬 감독은 2006년부터 이라크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었는데, 대한민국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도하의 기적을 추억하면서, "그때는 대한민국보다 북한이 너무 약했다."고 평가했고[25], "1993년 당시, 일본 선수들이 비긴 후 그라운드에 쓰러져서 펑펑 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경기가 끝난 후, 대한민국 팀이 머물던 호텔로 가서 "자신이 이라크 국가대표 코치다."라고 했더니 대한민국 선수들이 서로 껴안으며 고맙다고 환호해 주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링크

한편, 이라크의 첫 번째 골을 넣었던 선수는 바로 2015년 AFC 아시안컵에서 이라크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역임했던 라흐디 세나이실이다. 당시 대회 4강전인 대한민국과 이라크의 경기 하루 전날 기자회견에 참여한 라흐디 세나이실 감독은 기자에게 " 도하의 비극을 기억하느냐?"라는 질문을 받자, "물론 똑똑히 기억한다. 내게도 인상 깊은 경기였다."라며 "그 때 일본에 미우라, 라모스, 곱슬머리 선수(기타자와) 등이 있었던 게 생각난다. 나카야마의 골은 굉장히 강력했다."라고 대답했다. #

3. 최종 예선 결과

승점 결과
파일:사우디아라비아 국기.svg 사우디아라비아 7 2 3 0 8 6 +2 24강 본선 진출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대한민국 6 2 2 1 9 4 +5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6 2 2 1 7 4 +3 탈락
파일:이라크 국기(1991-2004).svg 이라크 5 1 3 1 9 9 0
파일:이란 국기.svg 이란 4 2 0 3 8 11 -3
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2 1 0 4 5 12 -7
SRR 파일:북한 국기.svg 파일:사우디아라비아 국기.svg 파일:이라크 국기(1991-2004).svg 파일:이란 국기.svg 파일:일본 국기.svg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파일:북한 국기.svg −−− 1-2 3-2 1-2 0-3 0-3
파일:사우디아라비아 국기.svg 2-1 −−− 1-1 4-3 0-0 1-1
파일:이라크 국기(1991-2004).svg 2-3 1-1 −−− 2-1 2-2 2-2
파일:이란 국기.svg 2-1 3-4 1-2 −−− 2-1 0-3
파일:일본 국기.svg 3-0 0-0 2-2 1-2 −−− 1-0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3-0 1-1 2-2 3-0 0-1 −−−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1994 FIFA 월드컵 미국 본선에 진출하는 아시아 국가는 우승 진출 사우디아라비아와 준우승 진출 대한민국으로 정해졌다.

4. 후폭풍

1992년, 일본은 프로축구리그인 J리그를 야심차게 창설했고 자국에서 개최한 1992년 AFC 아시안컵까지 우승을 거머쥐는데 성공하면서 전국적으로 사기가 최고조로 크게 오른 상황이었다.

이와 반대로 한국에서는 충격적으로 당시 8개국(8강) 본선 1992 AFC 아시안컵 일본에 진출 실패하고 말았다. 그 원인은 신문선이 대학교 선수들을 위주로 선수를 선발하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대처를 했기 때문이었는데, 예선에서 국가대표팀이 아니라 대학 선발팀을 내보냈다가 8강 본선 조별리그에도 못 가보고 태국을 상대로 참패를 하면서 쓴 맛을 보았다.[26] 결국, 탈락의 후폭풍으로 당시 김우중 대한축구협회장은 "앞으로 내가 신문선 패거리와 상종을 하면 사람이 아니라 개다." 라는 명언을 남기면서 사임을 하게 되었고 이후 범 현대가의 장기집권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아시안컵에서 첫 우승을 해낸 기세를 몰아 1994 FIFA 월드컵 미국의 첫 본선진출을 노리면서 " 역대 스쿼드들 중에서 가장 강한 팀이다." 일본 1군 기적의 세대 라면서 자화자찬하는 평가를 했는데, 만나면 항상 털리기만 했었던[27] 대한민국을 상대로 1-0 승리까지 했으니 일본의 자신감은 후지산을 뚫을 정도로 크게 올라온 상태였다. 하지만 추가시간의 충격적인 헤딩 동점골로 인해 일본 축구 역사상 처음으로 FIFA 월드컵 본선 무대로 진출할 기회는 대한해협 건너로 날아가버렸다.

그동안 일본은 아시아에 월드컵 24강 본선 진출권 2장이 주어졌던 시대인 월드컵까지는 월드컵 본선 진출이 전무했고, 1998 FIFA 월드컵에서 32강 본선으로 확대되어 아시아에 월드컵 본선 진출권이 거의 두 배인 3.5장으로 늘어나서 월드컵 본선에 첫 진출할 수 있었다. 실제로, 1954년, 1962년, 1970년, 1978년, 1986년 월드컵 지역예선에서는 언제나 한국이 일본의 눈 앞에서 군림하며 발목을 잡고 가로막으면서 예선탈락을 시키기도 했다. 특히, 1986년 월드컵 지역예선에서는 한국과 일본이 본선진출 티켓 1장을 두고 홈 앤드 어웨이에서 모두 승리하기도 했다.

그리고 일본의 기업들은 자국의 월드컵 진출을 거의 확실시하여 일본 축구 대표팀 관련 상품을 대량생산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대부분 폐기 처분되었다.



영상의 남성 진행자는 위닝 일레븐의 해설자로 유명한 존 카비라의 형제 지에이 카비라.

당시 해설을 맡았던 오카다 다케시 감독은, "이제야 일본 대표팀이 아시아 축구로서 어느 정도 수준이 올라가서 비슷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본선 진출에 실패해서 너무나도 슬프다."라는 말을 했고, 해설 도중 눈물을 흘리면서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사실, 오카다 감독이 이렇게 이야기를 한 뒷배경이 있는데, 불과 2년 전 자국에서 열린 아시안컵 우승 이전에 일본 축구는 그야말로 아시아권에서도 동네북 수준이었다. 중국에게도 심심하면 발리기 일쑤였고, 오죽하면 이때까지 한국에선 한일전보다 남북전, 중동전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게다가 J리그도 만들어진게 겨우 2년 밖에 되지 않았던 때였고 본격적인 축구에 대한 투자가 시작되기도 전이었기 때문에, 2년 전 아시안컵에서 우승을 달성하고도 일본 국내에서는 자신들의 실력에 의문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 일본은 왜 본선 진출에 실패했는가?"를 진지하게 토론하는 프로그램도 방송되는 등, 일본 열도는 전국적으로 큰 허탈감에 빠졌다. 자신들이 이긴 대한민국에 본선진출 티켓을 빼앗겼으니 허탈할 지경이었다.

반면 대한민국"국민 여러분, 기뻐해 주십시오! 대한민국이 일본을 극적으로 제치고 월드컵 3회 연속 본선 진출을 해냈습니다!"라며 낭보를 전했다. 그렇게 대한민국은 감동적인 월드컵 본선 3연속 진출을 확정지었고, 일본은 최초의 월드컵 본선 진출의 기회를 불과 30초를 못 버텨서 날려먹었다. 이렇게 기적적인 상황으로 인하여 대한민국 선수들은 당연히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가 되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반대로 일본 선수들은 동점골과 함께 종료 휘슬이 울리자마자 멘탈붕괴 상태에 빠져서 그대로 그라운드에 주저 앉았고, 일본의 축구 팬들은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만나기만 하면 맨날 털리기만 했었던 대한민국전에서 1:0으로 이겼으니 사상 첫 본선 진출의 9부 능선을 넘었다고 기뻐하면서 설레발을 쳤지만 귀화선수였던 루이 라모스는 한국전 승리 이후에 같은 동료들이 본선 진출이라도 한 것처럼 너무 좋아하는 모습을 이해할 수가 없었고 강한 불안감을 느꼈다고 인터뷰를 하였다. #



2023년 현재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재직 중인 모리야스 하지메 감독은 당시의 경기에 미드필더로 출전했었다. 4분 35초부터 인터뷰를 하는 모습이 나온다. #

도하의 기적 사건을 다루는 인터뷰에서 그는 "월드컵 진출에 나의 꿈을 걸었다. 바로 앞에서 월드컵 진출을 봤지만, 손에 쥐려 할 때, 갑자기 눈 앞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 때보다 슬픈 기억은 없다. 당시 나는 호텔에 들어온 뒤에도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라는 기억을 전했다. # 그리고 28년 후 자신이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이 되어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에서 조 1위로 16강에 진출하는 도하의 기적을 일궈낸다.

그리고 나카야마 마사시"경기가 끝나는 순간을 기다리며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었다. 꿈이 끝났을 때 처참했다. 사람들이 우는 게 보였다."라고 이야기를 했었다. 참고로 그 당시 일본 대표팀과 한국 대표팀의 숙소가 같은 호텔이었다. 일본 대표팀은 쓸쓸히 객실에서 한국 대표팀의 환호 소리를 들으면서 패배감에 눈물을 흘리며 고배를 마셔야 했고 잔인한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던 셈이다.[28]

한일전에서 대한민국을 무너뜨린 일본의 전설적인 스트라이커 미우라 카즈요시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축구의 신이 있다면 따지고 싶었다. 그런 캡틴 츠바사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 날의 일이 미국 월드컵 기간 내내 나를 눈물짓게 만들었다."라고 자평했다. 한편 대한민국의 전 국가대표 선수이자 2017년 현재 아주대학교 축구부 감독인 하석주 J리그에서 뛰던 1999년 12월 31일, 일본의 BS 방송국의 축구 관련 특집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앞으로 축구를 하면서 이런 일은 또 없을 거야."라고 자평했다.

아래의 동영상을 통해서 이라크의 막판 동점 골이 터지는 순간부터 일본 열도가 어떻게 멘붕에 빠졌는지를 2002년 5월 19일 방송된 MBC 스페셜 <한일 축구 애증의 드라마 80년>의 한 장면에서 볼 수 있다.[29]



5분 29초부터 현지팬들의 반응이 나오는데, 여기서터 "그런데, 경기 종료 10초 전!" 이라는 해설이 나온다. 그리고, 5분 48초부터 일본의 현지 반응이 나오는데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이 분위기가 매우 조용해졌다.




'도하의 비극' 이후 일본 TV 도쿄의 반응이다. 동영상 기준 3분 47초에 동점골 장면이 나온다. 5분 25초 이후 경기에서 비긴 후 일본 선수들의 리액션을 보면 갑작스레 일어난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대로 그라운드 위에 그냥 앉아 버렸다.(8분 57초부터) 일본 축구의 레전드 하시라타니 코이치와 진행자들 역시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면서 눈물을 참고 있는 모습이 역력하다. 게다가, 이 잔인한 경기의 MOM으로 선정된 나카야마 마사시는 전혀 기뻐하지 못하고 얼굴을 아예 못 드는지라 MOM으로 잘했다고 칭찬을 듣는 것이 벌칙게임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오카다 다케시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은 해설을 하는 도중에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 옆에 있는 다시마 고조에게 말을 넘기고 너무 슬픈 나머지 결국 눈물까지 보였다. 고화질 영상 옆에서 같이 진행하는 아나운서(토모다 미유키)도 목이 메여서 초반부터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다가 겨우 "정말 유감입니다." 라는 말을 겨우 꺼냈다. 역시나 두 축구인도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억지로 진행하는 분위기였다.

그래도 훗날 오카다 다케시 감독은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끌었고,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16강 진출에 성공(9위)했다. 그 성과로 도하의 비극의 안타까운 감정을 어느 정도 털어버렸다.

5. 도하의 기적이 가져다 준 대한민국 축구계의 나비 효과

한편, 축구 언론 포포투와 스포츠서울에서는 "도하의 기적이 대한민국 축구의 퇴보를 20년 이상 늦췄고, 일본 축구의 발전을 20년 이상 늦췄다." 라는 기사가 실렸다. # 대한민국 축구계의 역사에 다시는 없을 기적의 성과였던 '도하의 기적'이 갖는 의미는 그저 FIFA 월드컵 연속 본선진출 기록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경기 종료 10초 전에 극적으로 일본에서 대한민국으로 본선진출 티켓이 뒤바뀌는 기적을 일으킨 뒤, 겨우겨우 본선 무대로 진출한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은 비록 1승과 16강이라는 염원을 달성하지 못했지만, 월드컵 20위[30] 2무 1패 승점 2점이라는 당시 역대 최고의 성적을 내면서 전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31] 물론, 그 대회에서 같은 조에 속했던 스페인, 독일이 모두 8강을 기록했으며, 특히 독일은 당시 피파랭킹 1위였던데다 디펜딩 챔피언을 상대로 3-2로 석패하면서 선전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충격이었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은 조별리그에서 강호 스페인에 극적으로 2골을 따라붙어서 무승부 승점 1점을 획득하고 특히 피파랭킹 1위, 디펜딩 챔피언 독일이 후반에 우주방어를 하는 굴욕을 감수할 정도로 맹렬한 선전을 펼쳐서 전반에는 0-3으로 맥없이 끌려갔지만, 후반 시작 후 10여 분 만에 2골을 따라붙고 3-2로 아깝게 석패하면서 독일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32]

당시 독일의 주전 미드필더였던 슈테판 에펜베르크는 후반전의 졸전과 그에 따른 관중들의 야유에 본인의 더러운 성깔을 드러내면서 법규를 시전했다가 즉각 교체와 강제 귀국 조치를 받았고, 이 경기가 졸지에 국가대표팀 은퇴 경기가 되었다. 그리고 경기에 출전했던 위르겐 클린스만[33]"5분만 더 있었으면 독일이 역전패를 당할 수도 있었다" 라면서 한숨을 돌렸다.[34]

그 뒤 대한민국은 1994년의 좋은 성과를 보여준 활약을 무기삼아 일본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져 있었던 2002년 한일 월드컵 유치 경쟁에서 일본보다 더욱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고 결국 1996년에 대한민국과 일본의 공동 개최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그렇게 열린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은 4강 진출의 신화를 이루어냈다. 그 뒤로 대한민국의 축구가 얼마나 발전했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실제로 대한민국은 2002년 월드컵 무대에서 스페인에 승부차기로 승리, 대신 독일에게 1골차로 패배하긴 했지만, 2018년에는 독일에 각각 승리를 거두어 이 대회의 복수전에 완벽히 승리했다.[35]

이후 2022 카타르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함으로써 10회 연속 FIFA 월드컵 본선 진출과 16강 진출에 성공하면서 아시아 축구 역사상 유례없는 대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도하 근교의 아라얀에서 아랴얀의 기적을 만들었다.

결국 그 마지막 10초를 남겨놓고 터진 골 하나가 수십 년에 걸쳐서 양국의 축구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셈이다.

6. 유사 사례

그 밖에 도하의 기적과 비슷한 상황은 아래와 같이 재현되었다.

7. 일본 축구의 무덤, 도하 이라크

7.1. 비극의 땅에서 축복의 땅으로 바뀌다


위키백과에서는 '도하의 기적'이라고 하면 한국 입장에 편중된다는 지적을 받고, '도하의 비극'이라고 하면 일본 입장에 편중된다는 지적을 받기 때문에 일부 언어판에서는 경기 자체를 가리키는 명칭인 '1993년 월드컵 일본 대 이라크'를 표제어로 채택한다.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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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s 대한민국 1:2 (연장) 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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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s 대한민국 1:2 패
AFC 아시안컵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2011)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vs 대한민국 2:2 무
(PSO 3:0 승)
파일:카타르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2019)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vs 카타르 1:3 패
파일:이라크 국기.svg (2024)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vs 이라크 1:2 패
파일:이란 국기.svg (2024)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vs 이란 1:2 패
FIFA 월드컵
파일:폴란드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2018)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vs 폴란드 0:1 패
파일:벨기에 국기.svg (2018)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vs 벨기에 2:3 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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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s 독일 2:1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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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s 스페인 2:1 승
기타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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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s 대한민국 1:2 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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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s 이란 3:2 승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2011)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vs 대한민국 3:0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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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도하의 비극 [J] [K] 도하의 기적 [J] [K] [6] 현재는 수헤임 빈 하마드 스타디움 [7] 현재는 하마드 빈 칼리파 스타디움 [8] 그리고 며칠 후 한스 오프트는 사우디아라비아 축구협회로부터 국가대표팀 감독직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했고 계속 J리그에 남아 주빌로 이와타, 교토 퍼플상가, 우라와 레드 다이아몬즈의 감독직을 맡았다. [9] 1990월드컵과 1994월드컵 아시아 예선은 전 지역 풀리그로 우승팀과 준우승팀만 24강 본선에 진출로 진행되었고 1990월드컵 아시아예선에서는 대한민국이 우승 진출, UAE가 준우승 진출로 24강 본선에 진출하였다. [10] 사우디가 아시아 예선 풀리그 우승(1위)으로 본선에 진출했다. [11] 그리고 이후 일본 축구는 급성장을 계속,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 스페인과 독일을 제치고 조 1위로 조별리그를 통과했고, 2024년 현재 진행되고 있는 카타르 아시안컵에서 한 경기만 더 승리하면 독일을 제치고 피파 랭킹 16위에 오르기 직전에 있었으나... 충격적이게도 이라크에 다시 한번 패배하며 랭킹은 18위로 내려갔다. [12] 이라크가 경기 종료 직전, 움란 자파르의 동점골로 기사회생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장면으로 남겨질 뻔했다. 아울러 대한민국 축구사에서 흑역사로 남을 장면으로 기록됐을 것이다. [13] 아래 동영상에도 나오지만 움란 자파르의 헤딩슛이 들어가 동점이 된 직후, 일본 선수들 몇명은 그대로 드러누워 버렸다. 나머지 선수들도 넋이 나간 듯 서버리고 움직이질 못했으며 일부 선수들은 그라운드에 주저앉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골대만 바라봤다. 아직 주심이 휘슬을 불기 전이라 경기에 임했어야 함에도 1분도 안 되는 시간 사이에 골을 넣지 않는 이상 본선 진출 실패가 확정된 상황이었기에 제대로 경기를 진행할 수 없었다. [14] 1994년 월드컵 본선부터 승점이 3점으로 올랐다. [15] 다만 단순한 일화로만 보기는 그런 것이, 당시 신홍기는 북한 선수단에게 승부조작을 제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히려 그 북한 선수가 대처를 잘한 셈이다. 후지모토 겐지의 자서전 회고록에 따르면 실제로 당시 북한 선수들은 귀국 이후 감자농장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16] 당시 국내에서는 그의 이름을 이용한 아재개그까지 유행했다. '일본을 자빠트린 움란 자파르' 이런 식이다. [17]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이 비기거나 이란이 근소한 점수 차이로 승리했다면 사우디아라비아가 탈락하고 한국과 일본이 나란히 본선무대로 진출할 수 있었다. [18] 여기에 숨겨진 사연이 좀 있다. 당시 일본대표팀 주장이었던 하시라타니 테츠지의 회고에 따르면 나카야마의 역전골 이후, 벤치를 향해 기타자와를 투입하라고 재촉했다고 한다. 당시 체력이 바닥이 나던 상황이라 지친 자신들을 대신해 활동량이 넘치던 당시 중앙 밀드필더였던 기타자와 츠요시가 들어와서 이라크의 반격을 차단해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여타 다른 선수들 역시 ‘이 정도로도 충분하니 잠그는 걸로 가자’라는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투입된 선수는 다케다 노부히로였다고 한다. 다케다는 당시 미우라의 소속팀 베르디 가와사키에서 측면 공격수로 뛰던 선수였는데 오프트 감독은 잠그기가 아닌 쐐기골로 아예 승부를 마무리 짓겠다는 의도였다는 것. 하시라타니 역시 자신이 감독이 되고 난 후에야 그 의도를 알겠더라고. [19] 당시 미우라의 유니폼의 맨마킹은 성인 미우라가 아니라 카즈요시에서 따온 KAZU였다. [20] 여기에 대해 주장이었던 하시라타니는 짧게 날아오는 크로스를 봤고 이게 박스 안에 있던 움란 자파르를 향해 날아오는 것을 보고 근방에 있던 미우라에게 나가서 막으라고 하려는 찰나에 골이 터졌다는 것이다. 사실 미우라는 수비수도 아니었고, 당시 주전 사이드백이 부재한 상태였기 때문에 미우라에겐 억울한 부분도 있긴 하다. [21] 당시까지 일본 축구계에서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루어내는 것은 오랜 숙원이었다. 그런데 막판의 그 찰나를 못 버티고 탈락했기에 가히 '비극'이라는 단어가 적절하다. [22] 한국에선 당시 자료 접근 경로가 부족한 탓인지는 몰라도 수비수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 고로 언론에서도 수비수로 표기하는 경우가 잦지만 그의 포지션은 공격수가 맞다. 참고로 이 자파르 선수가 앞서 2라운드로 열린 대한민국 전에서 경기 막판 동점 골을 넣었던 선수라고 잘못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대한민국을 상대로 골을 넣은 선수는 하비브 자파르 선수였다. [23] 실제 당시 언론이 썼던 표현이다. [24] 한국이 이긴다는 전제 하에 (2+"한국vs북한 골득실차") 이상. 만약 열뻗치게 북한이 한국을 잡았다면? 점수 상관 없이 이기면 이라크가 진출했다. [25] 하지만 이라크의 유일한 패배이자 북한의 유일한 승리가 이라크-북한 경기였다. 한국과 무승부를 거두고 북한에 패배했음에도 북한이 더 약하다고 평가하는 것이 어찌 보면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만일 북한을 이기고 2승 3무를 달성했다면 사우디와 함께 이라크가 월드컵에 갔을 것이다. [26] 이 사건을 계기로 대표팀은 더 이상 B팀을 구성해 차출하지 않으며, AFC에서도 무조건 A팀만 참가하도록 정했다. [27] 농담이 아니라, 한국이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일본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 무려 5번이었다. [28] 월드컵 최종 예선의 앙금이 가시기도 전에,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8강전에서 대한민국 일본이 다시 리턴매치를 하게 된다. 한일전에 선발 출장한 미우라는 보란 듯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선제골을 성공했다. 그리고 일본의 두번째 골은 조호르바루의 환희의 당시 대이란전에서 패색이 짙던 후반 극장골로 연장전 역전극을 이뤄내는데 발판을 마련한 조 쇼지였다. 하지만 난타전 끝에 유상철 황선홍이 합작한 대한민국에 3-2로 패배하면서 짐을 쌌다. [29] 노정윤이 부상당하는 장면(46초)과 박항서 베트남 감독의 모습도 보인다.(2분 6초). [30] 1986년 월드컵도 대한민국 20위였다. [31] 사실 볼리비아와의 대결에서 한 골만이라도 넣고 이겼다면 16강 진출이 가능했다. 조 3등도 성적에 따라서 2라운드 진출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볼리비아도 월드컵 남미 예선에서 홈 고지대로 브라질을 2:0으로, 우루과이를 3:1로 격파하며, 아르헨티나를 제치고 남미예선 3위 통과로 브라질 예선 역사상 첫 패배를 기록하였고 월드컵 본선 1차전 독일전에서 패배했지만 0:1로 선전, 2차전 대한민국과의 경기에서 0:0 월드컵 첫 승점과 클린시트를 기록하고, 3차전 스페인전에서 패배했지만, 1:3으로 스페인을 상대로 월드컵 첫 골을 기록 할 정도로 볼리비아도 당시 전성기였고, 대한민국을 1승 상대로 여겼다. [32] 그러나 4년 후의 대회에서 대한민국은 최악의 성적을 받아들었고, 8년 후의 대회에서는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감독이자 명장의 지휘 아래 아시아 최초 4강이라는 금자탑을 세웠다. 이후 유망주 육성 역시 활기를 띠게 된다. [33] 훗날 조 본프레레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에게 1:3으로 졌던 그 경기의 감독이 되었고 2023년에는 파울루 벤투의 뒤를 이어서 대한민국의 감독으로 부임한다. [34] 그로부터 24년 뒤, 가 우려했던 대로 독일은 결국 마지막 경기인 대한민국전에서 후반 추가시간에 2골을 잇달아 먹고 0:2로 져서 독일 축구 역사상 최초로 월드컵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끔찍한 결과를 받았다. [35] 월드컵 매치가 아닌 A매치 전체로 따지면 2002년 이후 대한민국은 독일에게 진 적이 없다. 2002년 월드컵 준결승(패)-2004년 평가전(승)-2018년 월드컵 조별리그(승). [36] 결국 원정 다득점으로 터키에 본선 진출권을 내줬다. [37] 당시 코트디부아르는 북부지역 군벌과 남부 정부군이 3년째 내전을 벌이고 있던 상황이였는데, 드록바가 인터뷰 중 동료들과 무릎을 꿇고 "제발 일주일만 무기를 내려놓고 전쟁을 멈추자"고 호소했고, 정말로 일주일 동안 내전이 멈췄고, 이 휴전은 결국 종전을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드록바에게 붙혀진 별명이 '전쟁을 멈춘 사나이'이다 [38] 워메처럼 대부분의 수비수는 페널티킥을 잘 못 찬다. 센터백 페르난도 이에로, 로날드 쿠만, 풀백 안드레아스 브레메처럼 페널티킥을 잘 차는 수비수도 있기는 하지만 공격력이 뛰어난 소수에 불과하다. [39] 이경기를 승리했다면 잉글랜드는 본선직행이었다. [40] 앞선 잉글랜드홈에서 펼쳐진 러시아와의 대결에서 3:0완승을 거둔적이 있기에 승자승에 앞선다. [41] 비록 4강에서는 독일에게 3:2로 석패하며 결승진출에는 실패했지만 튀르키예는 총 490분의 경기시간 동안 앞서있던 시간은 겨우 13분이었다. 그야말로 근성의 튀르키예를 엿볼수 있었던 대회였다. 튀르키예는 4강에 오기까지 주전선수들의 줄부상, 골키퍼의 퇴장, 경고누적 출전금지등 온갖 악재를 갖고 있었지만 기어코 4강에 오른것이다. [42] 플레이오프 상대가 3번 연속 남미예선 5위로 올라온 우루과이였는데 이 팀은 코스타리카를 플레이오프에서 꺾고 본선에 가서 준결승까지 진출했을 정도로 강했다. 그러나 4년 뒤, 조별리그에서는 코스타리카에게 3-1로 대패한다. [43] 이것보다 경기 수가 더 많이 나올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하다. 아시아 1차 지역 예선 참가 팀이 최종 예선까지 진출, 조 3위로 아시아 플레이오프를 거쳐 대륙 간 플레이오프를 뚫고 본선에 진출한 뒤 준결승까지 올라가면 되는데, 그러면 1차 예선 2경기 + 2차 예선 2경기 + 3차 예선 6경기 + 최종 예선 8경기 + 아시아 지역 플레이오프 2경기 + 대륙 간 플레이오프 2경기 + 조별 리그 3경기 + 16강 1경기 + 8강 1경기 + 준결승 1경기 + 결승 또는 3, 4위전 1경기 = 총합 31경기가 된다. 그러나 아시아 지역 1차 예선을 치를 정도면 엄청난 약체일 뿐만 아니라 운 좋게 3차 예선까지 갔다 해도 3차 예선에서 대한민국이나 일본 같은 아시아의 강팀들에게 갈아 마셔질 확률이 거의 99.9%인지라 사실상 불가능이라 봐도 무방하다. 참고로 그 레바논도 2014년 월드컵에서는 2차 예선부터 시작했다. 그러면 1차 예선에 참가하는 팀들은 어떤 약체인지 안 봐도 비디오일 것이다. 게다가 한국이나 일본을 뚫고 본선에 진출했다고 쳐도 본선에서는 아시아 지역 1차 예선을 치를 정도의 팀을 50-0 급으로 이겨버릴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 같은 팀들이 기다리고 있다. [44] 여기엔 사연이 있는데 당시 프랑스는 1993년 4월 28일, 스웨덴과의 지역예선 6차전 경기 이후 무려 4개월간 경기가 없었는데다 그 기간동안 스웨덴이 2승, 불가리아가 1승 1패를 기록했던 것이다. 그래서 심리적으로 불안감을 느끼던 와중에 1993년 8월 22일 속개된 대 스웨덴전에서 그만 1:1 무승부를 기록했던것. [45] 심지어 발롱도르 수상자였다. [46] 2015 아시안컵 때 오만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은 그 사람이다. [47] 2006년 독일 월드컵 우승 감독 [48] 나미비아가 모잠비크에게 홈, 원정 모두 이겼다. [49] 여담으로 이는 연장전 제외 대한민국의 A매치 역사상 가장 늦은 시간에 나온 골이다. 종전 기록은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 조별리그 독일전 당시 손흥민의 골. 연장전을 포함할 경우에는 2011 AFC 아시안컵 카타르 4강 일본전에서 120분에 나온 황재원의 골이다. [50] 또 하나 재미있는 점은 도하의 기적으로 한국이 월드컵에 진출한 후 월드컵에서 독일, 스페인과 한 조가 됐었는데, 이번에는 카타르에서 열리는 월드컵에서 일본이 이 두 팀을 만나게 됐다. [51] 마라카낭의 비극 미네이랑의 비극도 문서로 쓰여있다. [52] 만화 내용에서 한국팀은 실로 괴물들이 모인 집단이다. 하프라인에서 중거리 슛을 날려 골을 넣는 홍성보에다, 한국 골대에서 일본 골대까지 드리블하여 골을 넣는 최윤화까지. [53] 위의 애니메이션 부분은 자막이 잘못된 것이며, 방영 시점이던 1999년의 내용에 맞게 도하의 기적 관련이 아니라 월드컵에서 1승도 하지 못한 것을 분해 한 내용으로 바뀌었다. 정신연령은 고등학교 2학년인 코난이 이때만큼은 아가사 박사의 탁자 위에서 진짜 초등학교 1학년처럼 드러누워 땡깡을 부렸다. [54] 참고로 이 에피소드는 한국에서도 현지화되어서 방영되었는데, 도하의 기적과 관련된 내용은 당시 한국 실정에 맞게 2002 한일 월드컵과 관련된 내용으로 바뀌었다. 한국에는 이 에피소드가 2004년에 방영되었기 때문에 독일전에서 석패했던 이야기가 나왔다. [55] 정확히는 UEFA 유로 1996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