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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8 17:44:42

빌리 코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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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
Gish
1991
Siamese Dream
1993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
1995
Adore
1998
Machina/The Machines of God
2000
Machina II/The Friends & Enemies of Modern Music
2000
Zeitgeist
2007
Oceania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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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코건
Billy Corgan
파일:attachment/uploadfile/BillyCorgan.jpg
<colbgcolor=#000><colcolor=#fff> 본명 윌리엄 패트릭 코건
William Patrick Corgan
출생 1967년 3월 17일 ([age(1967-03-17)]세)
미국 일리노이 주 시카고
국적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직업 음악가, 싱어송라이터
소속 스매싱 펌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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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0> 부모님 윌리엄 코건 시니어
마샤 루이스 마에 코건 루츠
형제자매 리키 코건
배우자 크리스 파비안 (1993 - 1997)
클로에 멘델[1] (2023 - 현재)
자녀 장남 아우구스투스 주피터 코건 (2015 - )
장녀 필로메나 클레멘타인 코건 (2018 - )
신체 6'3" (191 cm)
활동 기간 1985년 - 현재
사용 악기 보컬, 기타, 피아노, 베이스
장르 얼터너티브 록, 얼터너티브 메탈, 그런지
레이블 캐롤라인 레코드, 버진 레코드, 리프리즈 레코드, 수메리안 레코드, BMG
}}}}}}}}} ||

1. 개요2. 상세3. 장비4. 일대기
4.1. 유년 시절4.2. 스매싱 펌킨스4.3. 연애사4.4. 프로레슬링 업계 진출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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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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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illy corgon young.png|width=100%]]
파일:Billy Corgan The Guardian 2023.webp
▲ 젊었을 적 ▲ 2023년 사진

William Patrick "Billy" Corgan Jr.

1967년 3월 17일 일리노이 시카고 출생. 스매싱 펌킨스의 리더로 유명하다. 천재적인 작곡, 작사,[2] 기타 연주 실력, 이미지 메이킹 등등 음악과 관련해서 못하는게 없는 음악계의 팀 버튼.


빌리 코건의 어린 시절을 모티브로 한 자전적인 곡 <Disarm>의 비디오 클립. 곡 자체도 스매싱 펌킨스 고전 중의 고전이며 팽팽했던 오리지널 멤버들의 모습과 함께 올드팬들에게 좋았던 시절에 대한 무한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2. 상세

특유의 싸이키델릭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해내는 각종 효과음과 간결하고 인상적인 리프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유명한 수준급 기타리스트이다. 8살 때 듣게 된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 앨범이 자신의 인생을 바꿔놓았다고 인터뷰에서 말한 바 있다. 블랙 사바스의 헤비함, 더 큐어(The Cure)와 바우하우스(Bauhaus)의 분위기 메이킹,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의 기타 표현 능력이 그의 음악의 기반이 되었다고. 스매싱 펌킨스 시절부터 들을 수 있는 두껍고 기름진 퍼즈 사운드는 블랙 사바스의 헤비한 기타톤을 지향한 것이라고 한다. 보컬 스타일은 칩 트릭(Cheap Trick)에 영향받았다고 한다.[3] 이외에 키스, 러시, 디페시 모드, 메가데스, 건즈 앤 로지스, 제인스 어딕션,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 라디오헤드 같은 밴드들을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존경하는 기타리스트로는 에디 밴 헤일런(Eddie Van Halen)과 리치 블랙모어(Richie Blackmore)를 뽑았다.

기타 솔로에 많이 비중을 두는 편은 아니며, 'Zero' 같은 곡에서처럼 가끔 기타 솔로를 아예 싸이키델릭 효과음으로만 채워넣는 경우도 있다. 본인 말로는 '나는 손이 빠르지 않아서 잉베이처럼 칠 수는 없거든' 이라고...


다만 어디까지나 그다지 비중을 두지 않을뿐 그의 속주 실력은 수준급으로 밴드의 출세작 중 하나인 Siamese Dream 앨범의 경우도 얼핏 들으면 기타가 별로 부각되지 않는 사이키델릭 성향의 얼터 음반 같지만 잘 들어보면 많은 곡에서 그의 속주 기타가 난무한다. 이 앨범이 NTR의 충격 및 멤버들과의 불화 때문에 혼자 다 해먹은 걸로 유명한 앨범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손 느리다는 건 그냥 커트 코베인이나 제임스 이하 까는 얘기인 듯. 롤링 스톤 선정 저평가된 25명의 기타리스트에 22위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보컬리스트로는 비음이 돋보이는 아주 개성적인 음색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인 견지에서 소위 노래를 잘한다고 하는 유형은 아니며, 음역이 넓거나 성량이 좋은 편도 아니고 호흡이 짧고 음이탈도 많아서 라이브에 강한 보컬은 아니다. [4] 데뷔 초기인 2집 Siamese Dream 정도까지 이런 문제가 심했으며, 나이가 들면서 어느정도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

스매싱 펌킨스 3집인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 앨범까지만 해도 하드록 내지 헤비메탈에 기반하여 특유의 멜랑꼴리와 싸이키델릭 감각을 가미한 음악을 하였으나 4집 <Adore> 이후부터는 줄곧 일렉트로닉적인 요소가 강한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다. 2005년 발표한 빌리 코건의 솔로 앨범 'The Future Embrace'는 이러한 일렉트로닉/슈게이징적 경향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앨범으로 평가는 나쁘지 않았으나 대중적인 호응은 얻지 못했다. 69000장 팔렸다. 이후 빌리 코건이 추구하는 음악이 다시 헤비메탈로 돌아왔다가 2020년 근래에는 다시 일렉 성향이 강한 새 앨범을 발표하였다.

앨범 만들때는 보통 드럼과 스트링을 제외한 모든 부분을 직접 연주 한다고 한다. 인터뷰에서 자신의 작업 과정을 '내가 연주할거니까 니들은 짜져있어' 같은 분위기라고 표현하며 작업하는 도중에 멤버들과 이견이 생기면 보통 주먹다짐으로 해결하는데 본인이 다 이긴다고 자랑했다. 스매싱 펌킨스의 1집 앨범 Gish도 이런 식으로 작업했다고 한다.

빌리 코건은 한동안 자신의 독재적 성향에 못이겨 탈퇴한 멤버를 인터뷰에서 원망하거나 자신의 밴드 멤버들을 언플하는 경향이 좀 있었다. 일례로 최근 2기 멤버 중에 베이스 니콜 피오렌티노가 2집 Siamnese Dream의 커버 모델이라고 거짓말했다가 걸린 적이 있었다. 링크 결국 이후 밴드 관계자가 앨범의 두 소녀들은 니콜 피오렌티도가 아닌 리산드라 알과 알리 랭어라고 언급했다. 링크

오리지널 스매싱 펌킨스 해체 전까지는 비록 성격이 고약한 독재자라고 욕을 먹어도 본업인 음악에 있어서는 천재 소리를 들었는데 2000년대부터는 밴드 즈완 결성, 솔로 앨범, 시집 발표, 스매싱 펌킨스 2기 결성 등 뭔가 활동은 열심히 했지만 이상하게도 모두 평가가 좋지 못했다.

가끔씩 스매싱 펌킨스의 전성기 시절을 대머리 마왕 빌리 코건의 원맨 밴드로 기억하는 경우도 있는데, 오히려 잘 살펴보면 밴드의 최전성기 시절은 (비록 빌리 코건이 주도적이었다지만) 4명의 오리지널 멤버들이 일정한 역할을 배분받은 1995년까지였다. 사실 대중들에게 유명한 빌리 코건의 빡빡이 마왕 이미지는 3집이 발매된 이후인 1996년 그가 머리를 밀고 방송에 나오면서 시작되었고 그의 언론플레이로 완성된 것이지 실상은 머리를 밀기 전처럼 좋은 음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사실 스매싱 펌킨스는 빌리 코건 혼자 북치고 장구치던 밴드였기 때문에 딱히 오리지널 시절 수준의 멤버를 못 모아서라기보다는 그냥 전성기 시절만큼 임팩트 있는 곡을 만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실제로 2018년부터 현재까지 다아시 레츠키를 제외한 원년 멤버들이 다시 뭉쳐서 스매싱 펌킨스 활동을 하고 있는데 재결합 이후 낸 3장의 앨범들 모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2024년 전성기 시절처럼 디스토션 가득한 락 사운드로 회귀한 신작 <Aghori Mhori Mei>을 발표해서 오랜만에 호평을 받았다. 이로 미루어 봤을 때 작곡 실력이 떨어졌다기 보다는 그냥 대중들이 스매싱 펌킨스에게 원하는 음악과 빌리 코건 본인이 하고 싶은 음악 사이에 간극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Oceania 앨범을 발표하고 가진 인터뷰에서 빌리 코건은 "나는 상업적인 성과를 거두기 위해 내 과거의 음악들을 답습하는 짓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3. 장비

빌리 코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타는 57년형 리이슈 Fender Stratocaster이며, Gish Siamese Dream 시절 많이 사용했다.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 시절에는 74년형 리이슈 스트랫, Gibson ES-335, Les Paul도 사용했으며, Schecter C-1을 사용한 적도 있다. 빌리 코건의 스트랫은 픽업과 내부 배선을 개조하고 독특한 페인팅을 해서 정통적인 스트랫과는 많이 다르다.

2008년부터 2012년까지 펜더 아티스트 시리즈로 빌리 코건의 시그니처 스트랫이 생산된 적이 있다. 싱글형 험버킹 픽업인 디마지오 BC-2 픽업셋이 달려있다. 그러나 펜더가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계약을 중단하고 이후 Reverend 기타의 엔도서만 하고 있으며, 2016년 새로운 시그니처 기타인 Reverend BC-1이 출시되었다. 이쪽은 싱글코일처럼 생긴 험버킹이 아니라 대놓고 험버킹 픽업이 달려있다. 라이브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빌리 코건을 상징하는 톤은 Siamese Dream의 두껍고 크리미한 퍼즈톤인데, 이는 일렉트로 하모닉스의 퍼즈 페달 Big Muff의 70년대 후반 모델을 사용한 것이다. 같이 투어를 했던 얼터너티브 밴드 캐서린(Catherine)[5] 이 사용하는 것을 보고 제임스 이하와 같이 구입했다고 하는데 오늘날에는 Big Muff하면 생각나는 대표적인 뮤지션 중 하나로 빌리 코건을 꼽게 되었다. 'Siamese Dream' 톤을 재현하기 위해 일렉트로 하모닉스 사에서는 2017년 Op-Amp Big Muff Pi라는 복각 버전을 출시했으며[6] JHS Pedals에서 이 페달에 더 세세한 톤 컨트롤을 할 수 있게 만든 'Pumpkin Patch' 모디파이 버전을 내놓기도 했다.

2018년 근황에 따르면 페달 이펙터를 버리고 Line 6의 멀티 이펙터인 HX Effects[7]를 사용하는 중이다. 15개나 되는 페달을 투어에 갖고 다니기도 귀찮고 노래와 기타를 동시에 해야 하는 입장에서 일일이 페달 밟느라 탭댄스 하는게 힘들어서 그렇다고.

앰프는 초창기에는 마샬을 단독으로 썼으나, 최근에는 마샬, 디젤, 뱀프, 셀머 등 자신이 소장한 앰프 8종류를 복제한 프리앰프 모듈러 시스템을 랙에 넣고 다니면서 곡에 따라 선택해서 쓰고 있다. 메인 드라이브는 페달을 쓰지 않고 앰프 게인만 사용하고 있으며, 파워 앰프는 메사 부기를 사용한다.

4. 일대기

4.1. 유년 시절

코건의 독선적이면서 괴팍한 성격과 음악적 재능은 개인적인 인생의 굴곡과 연관성이 깊다. 그의 아버지 빌리 코건 시니어[8]는 블루스 기타 연주자였고 1970년 부인 마사와 이혼 후 비행기 승무원과 재혼한다. 계모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빌리를 괴롭혔고 그의 배다른 동생은 뇌성마비, 투렛 증후군 환자였다. [9] 하지만 아버지는 집에서 티비만 보면서 백수건달로 놀았고 7살의 빌리 코건은 장애가 있는 동생을 돌보면서 계모의 학대를 견뎌야 했다. 왠지 콩가루 집안에서 내내 갈굼을 받다가 괴팍한 완벽주의자가 된 소년 가장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가. Siamese Dream에 수록된 'Disarm'은 그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에 관한 자전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동 앨범의 'Spaceboy'는 그의 동생 Jessy에 대한 곡이다. 동생 Jesse Corgan과 드럼 잼을 함께 하는 영상

안하무인이였던 아버지와 자신을 눈꼴시립게 여기는 계모와는 달리 중증 환자인 배다른 동생, 친어머니는 애정을 가지고 사랑했다. 그러나 한참 후에는 아버지와 함께 기타 연주도 하는 영상도 공개 되었다.[10] 코건의 친어머니 마사는 1996년 사망했다. <Adore>에 수록된 'For Martha'는 그의 어머니에 대한 추모곡이며, 이후 그는 자신의 레이블 이름을 'Martha's Music'으로 개명한다.

중학교때는 농구선수였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육상을 했다고 한다. 참고로 얼굴만 봤을 땐 모르지만 키가 191cm인 꺽다리이다. 신체적으로 운동에 능하고 왼쪽 손과 팔에는 홍반이 있다. 첫번째 솔로 앨범 Future Embrace에서 잘 볼 수 있다.

공부를 잘해서 고등학교 졸업 후 미시간 주립대학교 등의 대학에서 장학생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프로 뮤지션이 되고 싶었던 그는 대학 진학을 포기한다. 이후 시카고 인디씬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플로리다로 가서 'The Marked'라는 메탈 밴드를 조직하지만, 밴드는 지지부진하게 해산되고 다시 시카고로 돌아온다.

4.2. 스매싱 펌킨스

시카고로 돌아온 빌리 코건은 레코드 가게에서 일하면서 새 밴드 조직을 모색하던 차 제임스 이하를 만나게 되어 같이 데모 테이프를 만든다. 이 데모에서 빌리 코건이 2곡, 제임스 이하가 1곡을 썼는데 이 때 빌리가 제임스가 쓴 곡을 엄청나게 까서 삐진 제임스 이하는 한동안 그와 말도 하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1988년의 어느날 빌리 코건과 제임스 이하는 공연을 보러 갔다가 평소처럼 공연을 마친 밴드를 신나게 까고 있던 차, 그 말을 듣고 빡친 밴드원 중 한명과 말싸움을 하게 되는데 그 여자가 다아시 레츠키였다. 두 사람은 이렇게 우연히 인연이 닿은 다아시를 베이스로 영입, 락밴드 스매싱 펌킨스를 결성하였다. 참고로 스매싱 펌킨스라는 밴드 이름은 빌리 코건이 제안한 이름이었는데 제임스 이하와 다아시 레츠키는 이 이름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빌리 코건의 주장을 반대했지만 빌리가 "밴드의 메인 송라이터는 나니까 내 의견에 따라라" 하고 밀어붙여서 밴드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스매싱 펌킨스는 시카고의 나이트 클럽 ‘아발론’에서 성공적으로 데뷔 라이브를 마쳤고 데뷔 공연 직후, 시카고에 위치한 클럽 메트로 사장이 드러머를 고용하면 밴드가 클럽에서 공연을 할 수 있게 허락하겠다는 말에 이들은 재즈 드러머 출신의 지미 체임벌린을 맞아들여 밴드의 라인업을 완성했다. 완전체 멤버들의 첫 공연은 1988년 10월 5일, 클럽 메트로에서의 공연이었다.

1990년 서브 팝 레코드을 통해 발표한 데뷔 싱글인 <I AM ONE>과 후속 싱글 <Tristessa>가 좋은 평가를 받으며 순식간에 품절되자 이에 자신감을 얻은 스매싱 펌킨스는 메이저 진출을 시도하고 버진레코드와 계약에 성공한다. 그리고 마침내 1991년 5월 28일 Caroline 레이블에서 대망의 1집 Gish를 발매하게 된다. 프로듀서 Butch Vig(부치 빅)의 Smart Studios에서 녹음된 이 앨범은 몽롱한 디스토션이 걸린, 단순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기타 리프가 돋보이는 밴드 극초기의 곡들인 'Siva'와 'Bury Me', 프로그레시브 록을 연상시키는 역동적인 구조와 시적인 가사가 돋보이는 'Rhinoceros', 'Snail' 등 하드록 사운드와 어쿠스틱 사운드를 적절히 배합시킨 싸이키델릭 사운드를 선보이며 주목받았다. 그러나 앨범 녹음 기간 동안 빌리 코건은 자신이 원하는 음악적 지향점에 완벽하게 도달하기 위해 밴드 멤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종종 자신이 직접 기타 및 베이스 트랙을 재녹음하였고 이는 빌리 코건과 기타리스트 제임스 이하, 베이시스트 다아시 레츠키 사이에 불화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1집 <Gish>가 발매된 직후 이들은 1991년 6월 15일부터 15개월이라는 긴 스케줄로 된 <Gish> 월드 투어에 나섰고 1991년 9월에는 영국 Camden Underworld를 통해 유럽에 데뷔한다. 비슷한 시기, 펑크적인 얼터사운드를 선보여 록씬을 평정한 너바나가 월드 투어를 시작해서 사기를 꺽기도 했지만 밴드는 수준급의 라이브를 통하여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밴드의 내부 사정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스매싱 펌킨스의 월드 투어 도중 빌리 코건은 약혼녀인 코트니 러브 혼전임신으로 1992년 2월 24일 커트 코베인과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우울증에 걸렸고 드러머인 지미 체임벌린은 헤로인을 하기 시작했으며, 연인 사이였던 제임스 이하와 다아시 레츠키는 파경을 맞이하였기 때문아다.

1992년 9월 12일 공연을 마지막으로 15개월 동안 이어진 기나긴 투어가 끝나고 코트니 러브와의 결혼마저 결렬되자 빌리 코건은 우울증에 걸린채로 밴드 활동을 중단하고 고향 시카고에서 은둔 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게 폭식증과 자살 충동에 시달리던 빌리 코건은 결국, 어느 날 자살 시도를 하였으나 다행히 미수에 그친다. 빌리 코건의 전 여자친구이자 소꿉친구인 크리스 파비언은 빌리 코건이 자살 시도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빌리에게 찾아가서 그의 우울한 마음을 위로해 주면서 정신과에서 심리 상담을 받아보라고 설득했다. 이후 자신을 보살펴 준 퍼비언의 상냥한 마음씨에 감동한 빌리 코건은 그녀에게 공식적으로 프로포즈했고 그녀가 승낙하여 두 사람은 정식으로 약혼을 하게되었다.

이후 빌리는 '후세 사람들이 자신과 밴드가 존재했다는 것을 기억할만한 명반 하나는 남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다시 기타를 잡고 작곡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당시 레코드 임원들은 스매싱 펌킨스 1집의 판매량에 못마땅해하며 계약을 파기하려고 했고 결국 빌리 코건은 임원들 앞에서 혼자 어쿠스틱 기타를 들고 자신이 작곡한 곡을 연주해 평가를 받는 상황을 겪게 된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렇게 굴욕적인 행동까지 해야 한다면 차라리 다른 직업을 가져보자고 생각한 그는 일부러 연주를 대충 했는데 임원들은 그것을 듣고 당시 유행하던 그런지의 과격함이 묻어나오는 것 같다며 앨범 제작을 허락했다는 것이다.[11]

2집 앨범의 제작이 성사되자 빌리 코건은 밴드 멤버들에게 연락을 하고 1992년 11월 부터 본격적인 리허설을 시작했으나 드러머인 지미 체임벌린은 헤로인에 중독되어 헤롱거리고 있었고 연인 사이였다가 Gish 투어 막바지에 헤어졌던 제임스와 다아시는 같이 한 장소에 있는 것도 거부할 정도로 사이가 악화된 상태였다.[12] 그러자 빌리 코건은 애틀란타에 있는 Triclops Sound Studios에서 프로듀서 부치 빅의 도움을 받으며 지미 체임벌린에 의해 미리 녹음된 드럼 파트를 제외한 모든 악기를 혼자서 다 연주하는 엄친아적인 행동을 하여 앨범을 완성시킨다. 프로듀싱을 맡은 부치 빅은 2집 앨범을 녹음했을 당시 빌리 코건과의 작업을 "우리들은 앨범 완성도의 기준을 정말 높게 잡았다. 모든 작업이 아날로그 테이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렸고 우리들은 4달 내내 일주일에 6일을 12시간 동안 녹음실에서 씨름하면서 엘범 작업에 열중했다. 마지막 두 달 동안은 일정이 밀려서 일주일에 7일, 하루에 14~15시간씩 녹음을 진행했다."라고 회고했다.

1993년 3월, 앨범 녹음이 완료되자 빌리 코건은 이번 앨범은 분명히 성공할 것이라며 제임스 이하와 다아시 레츠키에게 밴드에 재가입하라고 설득하였고 2집의 최종 완성본을 듣고 앨범의 성공을 직감한 두 사람은 빌리 코건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다시 밴드에 가입했다. 이후 밴드는 본격적으로 투어 리허설에 돌입하게 된다. 한편, 1993년 6월. 빌리 코건은 마침내 연인이던 크리스 퍼비언과 자신의 집에서 약소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여러 사진들 위에 가사가 적혀있는 2집의 부클릿 디자인도 크리스 퍼비언의 작품이라고 한다. 그녀는 직업이 미술관 큐레이터일 정도로 미술에 조예가 깊은 여자였다.

1993년 7월 27일 발매된 2집 앨범 Siamese Dream은 빌리 코건의 예상대로 400만장의 판매고를 올리고 1993년 빌보드 차트 4위까지 오르며 성공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한 퍼즈 톤의 기타 멜로디가 돋보이는 'Today', 자신의 불행한 유년 시절을 담은 'Disarm', 6분이 넘는 대곡들이자 앨범의 백미로 꼽히는 'Mayonaise', 'Soma', 'Hummer', 숨겨진 좋은 곡 'Geek USA', ' Rocket', 병으로 고생하는 동생 Jesse를 위해 만든 'Spaceboy' 등 앨범 수록곡들 대다수가 명작으로 꼽힌다.

1994년 9월 8일 공연을 마지막으로 13개월에 걸친 2집 투어가 마무리 된 후 빌리 코건은 '다음 앨범을 마지막으로 밴드가 해체될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에 완벽한 앨범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진채로 3번째 앨범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의 작업을 시작했다. 빌리 코건은 사실상 자신의 솔로 앨범이었던 전작과 달리, 밴드 구성원들이 다함께 협력하는 온전한 밴드 앨범을 만들고 싶어했고 전작에서 담지 못했던 밴드의 라이브 사운드를 앨범에 담고 싶어했다.

이에 빌리는 그전까지 스매싱 펌킨스 앨범의 프로듀싱을 맡은 부치 빅 대신에 나인 인치 네일스와의 작업으로 유명한 플러드와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의 명반 loveless 앨범의 앤지니어를 맡은 알란 모울더(Alan Moulder) 라는 2명의 프로듀서를 고용하였다. 플러드는 빌리의 의견을 듣고 앨범 제작을 시작하면서 밴드가 리허설 룸 Pumpkinland에서 리허설을 마치자마자 레코딩 스튜디오에 와서 녹음을 시작하자는 방침을 세웠고 앨범 녹음시에도 밴드 멤버들의 합주를 적극적으로 권장하였다.[13]

플러드는 음악적인 요소 뿐만 아니라 밴드의 작업 환경에도 개입했다. 플러드가 비효율적인 스튜디오 환경을 바꾼 덕분에 멤버들은 의미 없는 대기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고 멤버들이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게 되어 빌리 코건의 솔로 앨범이나 다름 없던 전작과 달리 제임스 이하와 다아시 레츠키도 레코딩에 전적으로 참여하였다.

3집 앨범의 녹음은 1995년 3월부터 8월까지 진행되었다. 3집을 제작하면서 빌리는 전작의 성공 요소 중 하나였던 두꺼운 기타 사운드를 한층 발전시키면서도 이에 종속되지 않는 다양한 사운드를 만들고자 했으며 이러한 기타 트랙의 연주는 1집 때처럼 빌리와 제임스가 반반 나누어서 담당했다. 또한 각 CD의 마지막 두 곡은 제임스 이하가 작곡했고 두곡 중 Farewell and Goodnight은 밴드 멤버 전체가 파트를 나눠 불렀다. 믹싱 과정에서는 처음으로 ProTools를 사용해서 디지털 레코딩을 시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빌리 코건의 워커홀릭 기질로 인해 밴드 멤버들은 하루에 15시간 레코딩이라는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고 결국 앨범 작업 중 멤버들간의 불화가 다시 심화되었다(...) 인터뷰에서 빌리 코건은 "나는 락밴드에 종사하는 음악인으로서 내 인생에는 오로지 음악만이 전부인데 나머지 멤버들은 음악 외에 사적인 것들에 시간을 많이 할애한다. 나는 그런 멤버들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다른 멤버들을 애둘러 비판했다. 다아시 레츠키는 훗날 인터뷰에서 "나는 커피, 담배, 도넛으로 20시간을 버티며 앨범 작업을 해야했고 그 결과 콩팥에 이상이 생길 정도로 건강이 망가졌다"라며 빌리 코건을 비난했다. 앨범 제작 과정이 담겨있는 666테이프 영상

어쨌든 이러한 힘겨운 여정을 끝내고 1995년 10월 24일,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가 더블 앨범의 구성으로 발매되었다. 3집 발매 당시 음반사 관계자들은 앨범을 더블 앨범으로 발매하는 것은 앨범이 망하는 지름길이라고 극구 말렸지만 빌리는 고집을 피우며 그 많고 심오한 음악들을 한 앨범에 때려 넣었고 관현악의 선율로 가득찬 'Tonight,Tonight'에서부터 미니멀한 사운드의 1979, 강렬한 하드록 'Bullet with Butterfly Wings'에 이르기까지 28트랙 모두 하나도 놓칠수 없는 놀라운 곡들로 가득차 있는 이 앨범은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호평을 받았다. 3집 앨범은 미국 내에서만 900만장 이상이 팔리며[14] 그들의 가장 성공한 앨범이 되었다.

하지만 3집 투어 도중 헤로인 과용으로 키보디스트 조나단 멜보인이 죽고, 곁에 있던 드러머 지미 체임벌린이 마약소지혐의로 체포되면서 밴드는 활동을 반강제로 중단해야만 했다. 그리고 투어가 1달간 중단되자 밴드 멤버들은 서로 연락도 하지 않았을만큼 따로 놀기 시작했다. 3집 앨범에서 자신의 곡이 대거 빠진 것에 대한 서운함을 갖고 있었던 제임스 이하는 자신의 솔로 1집 앨범을 준비하기 시작했으며 다아시 레츠키는 3집의 지나친 투어 일정 때문에 임신 중인데도 몸을 돌보지 못하여 자신의 아이가 유산되자 우울증에 걸려 은둔해버렸다. 빌리 코건 역시 친어머니 마사의 죽음으로 인해 우울증이 재발한 상태였다.

1달간 중지되었던 투어는 드럼에 맷 워커(ex-Filter), 키보드에 데니스 플레밍(the Frogs)을 보강하여 1996년 8월 27일 라스베가스에서 다시 시작되었고 투어가 종료된 직후인 1997년, 배트맨과 로빈의 사운드트랙에 참여하여 The End is The Beginning is The End라는 또다른 걸출한 곡을 내놓으며 밴드 활동을 이어갔다.

한편, 지미 체임벌린이 재활치료를 받고 밴드에 복귀할 때 까지 드러머를 공석으로 남겨놓고 싶다는 빌리 코건의 주장에 의해 밴드는 투어가 종료된지 18개월 후인 1998년 6월 2일, 지미 체임벌린이 빠진 3인조의 라인업으로 새 앨범 <Adore>를 발매했다.[15]

물론 드러머가 빠진 언밸런스한 라인업에다가 앨범 발표 전 참여한 사운드트랙의 일렉트로닉 성향이 강하게 느껴지는 곡들에서 어느정도 예견되긴 했지만 1998년 발표된 <Adore>는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앨범에는 디스토션으로 무장한 기타 리프는 간데없이 어쿠스틱한 피아노 반주에 시니컬하고 읖조리는듯한 빌리의 목소리가 담겨있었고 전반적으로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장악하고 있었다. 덕분에 기존 사운드를 바란 팬들의 외면속에 차트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16] 미국의 음악 평론가들은 Adore의 음악들이 미국인들 수준에 너무 높아 저평가된 앨범이라며 안타까워 하였다. 실제로 SP 팬들 중에 Adore 앨범을 가장 좋아한다는 팬들도 은근히 많다.

이후 지미 체임벌린이 밴드에 다시 복귀했고 스매싱 펌킨스는 5집 앨범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밴드의 베이시스트 다아시 레츠키 1999년 10월, 5집 앨범의 녹음을 완료하고 이유를 밝히지 않고 팀을 떠나 활동을 완전히 접었고[17] 밴드는 의 베이시스트 멜리사 아우프 데어 마우어를 영입하여[18] 2000년 2월, 그들의 통상 5번째 앨범 <Machina: the machines of god>을 발표하였다. 앨범은 전작 <Adore>의 연장선상인 변형된 테크노 사운드와 밴드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던 두터운 퍼즈톤의 사이키한 분위기를 뒤섞은 스타일의 음악이었고, 중세풍의 컨셉으로 엮인 가사, 독일의 표현주의에 입각한 뮤직비디오로 중무장하였지만 팬들의 관심을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는지 150만장이라는 저조한 판매량을 보인다.

한편, 그동안 빌리 코건의 독단적인 밴드 운영에 불만이 많았던데다가 1998년 솔로 1집을 낸 이후부터 개인 활동을 시작한 제임스 이하는 5집 활동을 마치고 밴드에서 탈퇴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고 결국, 밴드는 2000년 월드 투어를 끝으로 해체를 선언, 그 해 12월, 밴드로서 처음 공연했던 고향 시카고의 '메트로' 클럽에서 마지막 공연을 갖는다.

해체 직전 스매싱 펌킨스는 마지막 앨범 세션 당시 녹음했지만 앨범에는 미수록된 곡들을 모아 Machina II/The Friends & Enemies of Modern Music 이라는 제목의 앨범을 만들어서 인터넷을 통해 공개한 적도 있다. 이는 라디오헤드보다 10년 앞선 것이다.

이후 몇 년간 빌리와 제임스는 각각 솔로 활동에 주력하였다. 하지만 제임스가 성실하게 소소한 결과물을 쌓아나갔다면 빌리는 자신의 컨셉에만 신경을 쓰며 부진하였다. 상대적인 만족도 차이인지 2005년 중순부터 빌리 코건은 솔로 앨범 프로모션이나 일간지 광고에서 재결성 의지를 계속 밝혀오다 2007년 재결성을 선언하고 드럼을 맡은 지미 체임벌린을 제외한 나머지 자리를 새로운 멤버들로 채운다. 이 재결성에 팬들은 환호하였지만 새로 내놓은 앨범 Zeitgeist는 트랜스포머에 수록곡 'Doomsday Clock' 한곡을 수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9] 사람들의 관심을 얻지 못한다. 관객들도 공연장에서 옛날 곡들은 신나게 따라불러도 신곡은 다들 관심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2009년 지미 체임벌린이 '스매싱 펌킨스는 내 음악 미래가 아닌게벼'라는 코멘트를 남기고 밴드를 떠났다. 이제 초기 멤버 중 남은 건 빌리 코건 밖에 없다.

2010년 8월 14일 10년만에 다시 한번 내한 공연을 하였다. 하지만...오리지널 멤버가 아닌 2기 멤버로 방한해 아쉬운 면이 없지않아 있다. 게다가 전엔 브라질과 한국 공연이 제일 인상깊었다고 했는데 재내한 때는 10년 만이라 인지도도 많이 떨어져 좌석이 2/3 밖에 못채워서 빌리 코건이 충격먹고 1979도 안불렀다.

2011년 9월 1일에 새 앨범 'Oceania'를 공개한다고 한다. 지난해부터 웹상에서 공개되고 있는 'Teargardens by Kaleidescope'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발매되는 앨범이며, 빌리 코건은 'Oceania'를 "앨범 속 앨범" 이라고 밝혔다. 즉, 총 44곡이 순차적으로 공개된 후에야 완성되는 'Teargardens by Kaleidescope' 라는 프로젝트의 한 부분으로써의 앨범이라는 말. 타로 카드를 모티브로 기획되었다는 이 프로젝트라는데, 새 앨범도 앨범이지만 정말 44곡을 하나로 묶어 거대한 컨셉트 앨범을 만들어낼지 궁금해진다. 더 궁금한 사람들은 밴드의 오피셜 사이트를 한번 체크해보자. 공개된 곡들의 무료 다운로드도 가능하다!

덧붙여 카림 압둘자바가 나오는 Oceania 앨범 광고 영상이 꽤 위트있다. 혈액암으로 투병중인 몸이라 그런지 꽤 수척해 보인다. 나이도 있고... # 진짜로 호박 파괴

2012년에 나온 Oceania는 예전의 스매싱 펌킨스와는 이질적이지만 그래도 망작 소리까지 듣던 전작보다는 상당히 후한 평가를 받으면서 2기가 제대로 자리잡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주는 데에는 성공하였다. 하지만 2014년 중반기에 들어 2기 멤버 중 2명이 탈퇴하면서 밴드의 미래가 불투명해져 버렸다. 2014년 12월에 발매된 앨범 Monuments to an Elegy는 빌리 코건과 제프 슈뢰더 둘이서 작업하여 완성되었고, 2015년 초 발매가 예정되어 있었던 Teargarden by Kaleidyscope Project 시리즈의 마지막 앨범 Day for Night는 발매가 무산되었다.

2015년 여름, 스매싱 펌킨스와 마릴린 맨슨의 합동 투어에서 지미 체임벌린이 등장하여 스매싱 펌킨스로의 복귀 사실을 알렸다. 이상하게도 다른 멤버는 다 내쫓는데, 빌리 코건은 지미 체임벌린을 마약 때문에 어쩔수 없이 한번 내쫓고 다시 영입한 뒤, 그 뒤로 즈완, 솔로 프로젝트, 제 2기 펌킨스...계속 데리고 다니고 있다.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 하는 사람도 있는데, 지미 체임벌린이 스매싱 펌킨스에 딱 맞는, 여러가지 다채로운 성격의 리듬을 모두 소화해낼수 있는 그리 흔치않은 드러머이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사실 헤비하고 투 베이스 졸라 밟아내는 드러머는 많을지 몰라도, 헤비한 속주 드러밍도 소화해 내면서 끊어치는 펑키한 그루브, 엘빈 존스를 연상케하는 재즈적인 필링, 사이키델릭 블루스에서의 몽환적이고 느릿느릿한 박자까지 다 소화해내는 드러머는 많지 않다. 특히 Tonight, Tonight 같은 심포닉 구성의 곡에서도 적절하게 빛을 발하는 그의 센스는 최고로 평가 받는다. 이런식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드러머를 꼭 데리고다니는 밴드 리더의 경우로, 코지 파웰을 애지중지한 리치 블랙모어라든지, 데이브 나바로를 버려도 스테판 퍼킨스는 꼭 데리고 다니는 제인스 어딕션의 패리 패럴 등이 있다.

2016년 빌리 코건이 원년 멤버+제프 슈뢰더로 스매싱 펌킨스 재결성을 고려하고 있다는 얘기가 들려오고 있다. 실제로 2016년에는 사이가 좋지 않다고 알려졌던 제임스 이하를 게스트로 불러 깜짝 공연을 하기도 했다.(어쿠스틱 기타로 사이어미즈 드림 앨범의 몇 곡을 연주) 이전에 비해 원년 멤버들 사이가 많이 좋아진건 사실이지만 아직 재결성 확정은 아니라고 한다.

2017년 10월 13일. 릭 루빈이 프로듀싱한 빌리 코건의 두번째 솔로 앨범 Ogilala가 발매되었다. 어쿠스틱 사운드로 채워진 앨범으로 제임스 이하가 Processional이라는 곡에서 기타와 멜로트론을 맡았다.

2018년 2월에 빌리 코건은 다아시 레츠키를 제외한 원년 멤버인 제임스 이하, 지미 체임벌린과의 재결합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제프 슈뢰더는 계속 밴드에 남아서 활동을 할 예정. 또한 향후 재결합 멤버로 두 장의 EP를 낼 것이라고 했으며 7월부터 9월까지 투어 공연을 할 예정이다. 이 재결성에 다아시 레츠키는 참가하지 않으며, 빌리 코건은 다아시가 거절했다고 언플을 시전했는데, 이에 다아시는 인터뷰를 갖고 빌리 코건을 극딜했다.

인터뷰애서 다아시는 "나는 스매싱 펌킨스 멤버들과 다시 대면하여 그간 있었던 앙금을 풀고 같이 리허설을 하기를 고대했으나 빌리 코건은 나에게 아무런 연락을 하지 않았고 일방적으로 나를 밴드의 재결성에서 배재시켰다. 스매싱 펌킨스 활동 당시 나는 밴드의 프로패셔널한 베이시스트로서 라이브에서 늘 완벽한 연주를 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지만 빌리 코건은 내 실력을 결코 인정해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인터뷰에서 '베이스 연주보다 립스틱을 고르는데 신경을 더 쓰는 여자'라고 폄하하였다. 나는 2집 투어 때 부터 매 투어가 끝난 뒤에 항상 밴드를 탈퇴하고 싶었지만 그럴때마다 남편이나 주위 사람들이 앨범 한 장만 더 참여한 후 그만 두라고 설득했기에 밴드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밴드 생활 내내 빌리 코건은 자신의 기분이 안 좋으면 다른 사람들도 기분이 안 좋은 시늉을 해야했을 정도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독재자로 군림했고 내기 스매싱 펌킨스 활동 시절에 빌리 코건과 그나마 잘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로부터 다른 사람에게 험힌 말을 하느니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낫다는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라는 발언들을 하며 빌리 코건을 비난했다. 아마 다른 멤버들은 몰라도 다아시는 참여할 일이 없을 듯.

2018년, Shiny and Oh So Bright, Vol. 1이 발매되었다.

2020년 7월 건즈 앤 로지스의 북미 동부 투어 동안 오프닝밴드를 맡을 예정이다. 스매싱 펌킨스도 어지간히 한시대를 대표했던 슈퍼밴드지만 건즈앤로지스가 워낙 스타디움급 공룡밴드이기도 하고 인터뷰에서 빌리 코건은 액슬 로즈를 존경해왔다고 밝혔다.

2020년, 새 앨범 Cyr이 발매되었다. 디페시 모드스러운 일렉트로닉한 사운드로 채워진 앨범인데 평가는 그다지 좋지 못하다.

2022년, 새 앨범 Atum: A Rock Opera in Three Acts의 일부분이 공개되었다 2023년에 두 번째 파트가 공개되었으며, 2023년 4월에 완전한 버전이 발매되었다.

2023년 10월 24일, 2007년부터 16년간 밴드에 재직하던 기타리스트 제프 슈뢰더가 팀을 탈퇴했다. 이로써 현재 다아시 레츠키를 제외한 원년 멤버들[20]만 밴드에 남게 되었다.

2024년 8월 2일 오랜만에 전성기 시절처럼 디스토션 가득한 락 사운드로 회귀한 신작 <Aghori Mhori Mei>을 발표했으며 호평을 받고 있다.

4.3. 연애사

'The Marked' 해체 후, 빌리 코건이 고향 시키고로 돌아와서 '난 음악가가 되기 굴렀나봐' 하고 망연자실 하며 집에 짱 박혀 있을 때 그의 오랜 소꿉친구이자 시카고의 미술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던 크리스 퍼비언이 빌리를 적극적으로 격려했다고 한다. 이에 감동한 빌리 코건이 그녀에게 구애한 것을 계기로 그들은 사귀기 시작하나 얼마 후 결성된 스매싱 펌킨스가 인기를 끌기 시작하고 크리스 퍼비언 역시 학업에 집중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둘은 갈라진다.

파일:courtney-love-billy-corgan.jpg

빌리 코건과 코트니 러브 (1991년)

이후 밴드가 메이저로 올라온 뒤 빌리 코건은 코트니 러브를 만나게되고 스매싱 펌킨스의 월드 투어와 홀의 전미 투어가 끝나면 결혼식을 올리자는 약속을 할 정도로 그녀와 깊은 관계가 된다. 코트니 러브는 Gish 투어를 하고 있는 빌리 코건과 만나기 위해 홀로 영국행을 할 만큼 빌리와 사이가 좋았으나 동시에 빌리가 유럽으로 투어를 하기위해 출국하자마자 너바나의 리더 커트 코베인과 양다리를 걸치기 시작했다. 당시 코트니는 너바나가 Nevermind를 녹음 중이던 스튜디오 근처에서 살고 있었는데 커트의 잘생긴 외모를 보고 반한 코트니가 커트에게 먼저 접근했다고 한다. 커트 코베인은 처음에 코트니를 시니컬하게 대했으나[21] 얼마 후에 그녀에게 푹 빠졌다고 한다.[22] 코트니는 당시 남자친구였던 빌리와 달리 자신을 자상하게 챙겨주는 커트의 모습을 보고 반했다고 말했다. 특히, 빌리 코건은 마약을 하지 않았으나[23] 커트 코베인은 자신처럼 마약을 했기에 더더욱 친해졌다고. 이후 코트니 러브는 커트의 아이를 가지게 되자 빌리 코건과의 약혼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직후 1992년 2월 24일 커트 코베인과 결혼해버린다.

스매싱 펌킨스의 1집 Gish가 같은 프로듀서 부치 빅에 의해 프로듀싱되고 발매일도 얼마 차이 나지 않는 너바나의 Nevermind 앨범에 가려져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던 와중에 자신이 Gish 월드 투어를 돌고 있는 사이 코트니 러브가 커트 코베인과 혼전임신으로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멘붕한 빌리는 우울증과 신경쇠약에 걸린다.[24] 1992년 9월 12일 공연을 마지막으로 Gish 월드 투어가 끝난 후 빌리 코건은 고향 시카고로 내려가 은둔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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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코건과 크리스 퍼비언 (1993년)

시카고에서 은둔하던 빌리 코건이 자살 시도까지 했다는 사실을 접한 크리스 퍼비언은 충격을 받아 빌리 코건에게 찾아와 그를 위로해주면서 정신과에서 심리상담을 받아보라고 설득했고 크리스 퍼비언의 따뜻한 마음씨에 감동한 빌리는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크리스는 빌리의 고백을 승낙했고 두 사람은 다시 연인이 되었다. 그 결과 스매싱 펌킨스가 2집 활동을 시작하기 직전인 1993년 6월, 두 사람은 마침내 빌리 코건의 집에서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린다. 혼인신고를 한 다음날, 두 사람은 멕시코 코수멜 섬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훗날 빌리 코건이 밝힌 바에 따르면 2집 Siamese Dream에 수록된 곡들 대다수는 자신의 연애 경험에 대해 노래한 곡들이리고 한다. 여러 사진들 위에 가사가 적혀있는 2집의 부클릿 디자인은 당시 빌리 코건의 아내였던 크리스 퍼비언의 작품이라고. 그녀는 미술대학을 나왔으며 직업도 미술관 큐레이터일 정도로 미술에 조예가 깊은 여자였다.

한동안 빌리 코건은 크리스 퍼비언과의 결혼 생활에 대해서 일절 언급을 하지 않았으나 2005년, 자신의 블로그에 자신의 유년 시절 및 결혼 시절에 대해 묘사한 글들을 올려놓았다. 이 글들을 통해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이 어땠는지를 대중들이 알 수 있게 되었다. #

그러나 1993년 7월 27일에 발매된 스매싱 펌킨스의 2집 Siamese Dream이 성공하자 전여친이자 커트 코베인의 부인 코트니 러브는 남편이 자신의 밴드에 새로 가입한 여성 베이시스트 크리스틴 파프[25]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고 확신한 후 맞바람 상대로 새신랑인 빌리 코건을 점찍어서 다시 빌리 코건에게 접근을 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두 사람은 너바나의 투어일정으로 커트 코베인이 외국으로 갔을 때 단둘이 여행을 가는 등 서로의 배우자를 놔두고 밀회를 가지기 시작했다.

1995년, 크리스 퍼비언은 빌리 코건이 코트니 러브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고 빌리와의 별거에 들어갔고 결국 두 사람은 1997년 정식으로 이혼했다. 한편, 빌리 코건과 코트니 러브는 1995년부터 동거를 시작했으나 얼마 못가서 다시 헤어졌다. 빌리가 커트와 코트니의 딸 프란시스 코베인의 생일 파티에 불참하는 등 프란시스를 자신의 딸로 받아들이기 거부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자주 다투기 시작했다가 서로 다른 애인을 사귀게 되면서 완전히 갈라섰다고 한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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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코건과 옐레나 옘척

이후 빌리 코건은 1996년에 <Zero> 뮤직비디오를 찍을 때 처음 만났던 여성 디자이너인 옐레나 옘척과 사귀기 시작한다. 1998년에 발표한 스매싱 펌킨스의 4집 앨범 <Adore>의 고딕 컨셉은 전형적인 엘레나 옘척의 테이스트이다. 빌리는 4집 활동이 끝나면 밴드를 해체하고 옐레나 옘척과 결혼하여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는데 옐레나가 스매싱 펌킨스의 지속적인 활동을 주장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시작되었고 결국, 둘은 2001년 갈라졌다.

2000년대 이후 그의 여성편력은 헐리우드 스타들의 비밀 마사지 클럽에 드나드는 장면이 공공연히 찍힐 정도로 심해지기 시작했다. 2009년에는 제시카 심슨과 같이 있는 장면이 파파라치에 찍혔다. 이후 베로니카스의 멤버인 17살 연하(!)의 제시카 오리글리아소와 사귄다고 페이스북에 인증했다가 지금은 페이스북을 접었다. 대놓고 도둑질

밴드 베이시스트를 항상 여자로 채워서 밴드 여성 멤버들과 항상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니냐 입방아에 오를 때도 있다. 오리지널 멤버일때 다아시 레츠키 제임스 이하와 사귀다 깨졌으므로 설마 거기까지 마수를 뻗쳤을까 싶지만 즈완 시절의 베이시스트 파즈와는 실제로 사귀다 깨진 것이 확인되었다.

파일:billy-corgan-and-chloe-mandel.jpg

빌리 코건과 클로이 멘델

2013년부터 패션 디자이너인 클로이 멘델 (Chloe Mendel)과 동거 생활을 시작했다.

2015년 11월 16일, 빌리 코건과 클로이 멘델 사이에서 아들인 Augustus Juppiter Corgan이 태어났다.

2018년 10월 2일, 딸 Philomena Clementine Corgan의 탄생을 발표했다.

클로에 멘델의 인스타그램을 들어가면 아들과 딸의 사진을 볼 수 있다.

2024년 9월, 빌리 코건과 클로에 멘델이 셋째를 임신했다고 발표했다.

4.4. 프로레슬링 업계 진출

빌리 코건은 이전부터 프로레슬링 마니아로 유명했으며 자기가 직접 레지스탕스 프로라는 프로레슬링 단체를 설립하기도 했다.[27] 2014년 말 TNA가 여러 병크로 휘청거리자 TNA를 구매한다는 루머가 있었고 실제로 2015년부터는 TNA의 각본 담당 수석 프로듀서로 취임해 활동하면서, 방송에도 얼굴을 비추고 TNA 관련 질문에 답해주고 있었다. 이러한 이력 덕분인지 선수들을 자기 콘서트에 초청하며 선수와 단체의 인지도를 높혀주기도 했다. 2016년 8월 12일 결국 딕시 카터를 대신해 TNA의 새로운 사장이 된다. 그러나 음악씬에서 25년을 버텨온 양반이 이번에는 호구를 잡혀버렸다.. 결국 2016년말 퇴사하였다.

2017년 5월 1일 NWA를 전격 인수하였다.

NWA는 2017년 10월 1일부터 가맹 단체와의 계약을 모두 해지하고 신체제 확립을 선언했다. 이와 함께 기존의 수많은 벨트들을 모두 폐지시키고 새로운 NWA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으로 닉 앨디스[28]를 내세우며 기반 다지기에 전념하고 있다. 동시에 NWA 공식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여 닉 앨디스가 전세계를 순회하며 챔피언 벨트를 방어하는 모습과 그런 닉에게 도전장을 던진 레슬러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식으로 나름의 스토리라인을 만들고 있다.

2018년에는 콜트 카바나, 플립 고든, 코디와 같은 ROH 소속 선수들과의 경기를 주선하며 ROH와 연계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며 영 벅스와 코디가 주최하는 ALL-IN 흥행에도 참가했다. 기존에 WWE에서 시원치 않은 대접을 받다가 방출당한 WWE 출신 레슬러들도 자유분방한 NWA에서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며 주목할 만한 커리어를 만들기도 했다.

2018년 10월 21일 출범 70주년 흥행을 PPV로 개최하게 되었으며, 이날 NWA 내셔널 헤비웨이트 타이틀을 부활시킨다.

2020년에 들어서도 NWA의 TV PPV 계약이 성사되지 못해 전문가와 팬들의 우려가 나오던 중에 2020년 6월, 부사장인 데이브 라가나가 "스피킹 아웃" 캠페인으로 고발되자 사임되고,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사태가 장기화된 이유로 테이핑 제작이 무기한 중단되면서 고위 스태프들과 계약 선수들이 대거 이탈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2020년 7월, 레이븐이 한니발 TV와의 인터뷰에서 "빌리 코건이 인수 초기와 다르게 의욕을 잃었다는 얘길 단체 내 선수들에게 들었다. 그는 NWA를 운영하는데 환멸을 느끼는 중이며 단체운영을 끝내고 싶어한다."고 저격을 했고 빌리 코건이 공개적으로 그럴 생각이 없다고 반박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2022년 닉 앨디스가 NWA와의 불화로 재계약을 하지 않고 프리랜서가 된다고 선언하면서 빌리 코건의 독선적인 일 처리 방식과 편향적인 취향으로 인해 자신과 NWA 사이에 불화가 생겼음을 밝혔는데 이런 앨디스의 인터뷰가 나온 후 불과 20분도 안 돼서 빌리 코건이 NWA에서의 남은 계약 기간동안 엘디스에게 출장 정지 징계를 때렸다. #[29]

이후 NWA를 부활시킨 1등 공신 중 한명으로 프로레슬링 팬들 사이에서 평가가 좋았던 빌리 코건에 대한 여론이 180도 반전되었다. 2023년 현재 프로레슬링 팬들은 빌리 코건을 비판하는 중.

5. 기타



[1] 2013년부터 연인관계였으며 주로 패션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다. 아버지가 유명 패션 디자이너인 Gilles Mendel. 프랑스와 대만 혼혈이다. [2] 감성적이고 시적인 가사를 잘 쓰며, 2004년에는 아예 'Blinking with Fists'라는 시집을 낸 적도 있다. 뉴욕 타임즈 베스트 셀러에도 올랐었다. [3] 시카고에서 연주한 멜랑콜리 투어 오프닝 공연에서 칩 트릭을 게스트로 부른 적이 있다. [4] 사실 빌리 코건 같은 개성적인 음색의 보컬은 음역이나 성량에 있어서 약점이 있는 경우가 많다. 더 호러스의 보컬리스트 패리스 배드완도 비슷한 케이스라서 소프라노 애인이 아예 보컬 트레이닝을 해줬을 정도. [5] 스매싱 펌킨스와 절친한 밴드였으며 아예 다아시 레츠키는 밴드메이트 제임스 이하와 헤어진 후 1993년, 캐서린의 드러머 캐리 브라운과 결혼했다. 캐리 브라운은 제임스 이하가 만든 곡 Blew Away를 녹음할 때 드럼을 맡기도 했다. 녹음 당시 지미 체임벌린이 휴가 중이었다고 한다. [6] 유튜브에 빌리 코건이 이 페달을 시연하는 영상도 있다. [7] Helix 멀티 이펙터에서 앰프 모델링 기능을 뺀 페달. [8] 풀 네임은 윌리엄 데일 코건. 아들인 빌리 코건의 풀 네임은 윌리엄 패트릭 코건이라 미들네임이 다르다. [9] 배다른 동생 리키는 이혼 전에 생긴 아들이었다. 참고로 동료였던 제임스 이하의 동생도 장애인이다. [10] 단, 빌리 코건은 여러 인터뷰에서 "비록 아버지가 기타리스트였지만 자신은 어디까지나 독학으로 기타를 익힌 기타리스트"라고 언급하고 있다. 어느정도 영향을 받았지만 독자적인 노선을 구축했다고 보는게 정확할 듯. 참고로 아버지하고는 애증의 관계였다고 한다. 초기엔 상술한 이유로 사이도 안 좋고, 아들의 음악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나중에는 사이가 괜찮아졌는지 열렬한 팬이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2021년 타계. [11]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빌리 코건이 추구하는 음악은 그런지가 아닌 하드락,헤비메탈이며 2집 또한 얼터너티브로 분류하고 있지만 하드락 앨범에 가깝다. [12] 2집의 프로듀서 부치 빅은 당시 밴드의 상황을 "리허설 때 멤버들은 메일 서로 싸웠고 회의할 때에는 멤버들 사이에 고성이 수시로 오갔다. 그래서 나는 '이 밴드는 이제 끝났다'라고 생각했었다."고 회고했다. [13] 전작들은 악기를 각각 따로 녹음했다고 한다. [14] 이건 더블 앨범이라 앨범 판매량을 두배로 계산해서 집계된 결과이기도하다. 즉, 450만개 x 2 = 900만장. [15] 4집 <Adore> 앨범 제작 당시 제임스 이하는 우울증이 심각한 상태였던 다아시 레츠키를 염려하여 빌리 코건에게 다아시가 정신건강을 회복할 때 까지 그녀에게 휴가를 주자는 제안을 했고 이에 <Adore> 앨범의 베이스는 빌리 코건과 제임스 이하가 반반 맡아서 연주하였다고 한다. [16] Adore 앨범은 약 200만장이 팔렸다고 한다. [17] 밴드를 나간 다아시는 영화 배우로서의 데뷔를 준비했으나 이내 코카인 소지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어 배우로서의 활동이 좌절되었다. 이후 저작권 소송 건 제외하면 근황이 알려지지 않았다가 2009년 방송에 출연해서 미시건 주(州)의 시골에 정착했다고 밝혔다. 2016년 건강이 회복되었다며 활동 재개를 선언했다. [18] 멜리사는 투어 세션 멤버로 5집 앨범 레코딩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19] 트랜스포머 1에서 미카엘라가 범블비를 뒤에 매달고 후진하는 장면에 나온다. [20] 빌리 코건, 제임스 이하, 지미 체임벌린 [21] 이 때 커트의 시니컬한 반응을 본 후 코트니가 작사한 곡이 바로 Doll Parts였다고 한다. [22] 크리스 노브셀릭은 훗날 밝히기를 커트와 코트니의 관계는 연인 사이보다는 섹스 파트너에 가까웠다고 한다. 너바나의 멤버들은 어느 날 LA의 한 카지노에 놀러갔는데 커트와 코트니가 마주치자 너바나의 다른 멤버들이 있는 것을 전혀 신경쓰지 않고 둘이 격정적으로 스킨쉽을 하기 시작했다고... 커트 코베인은 영국의 방송에 출연하면서 "나는 이곳에 계신 분들께 락 그룹 멤버인 코트니 러브가 세상에서 가장 섹스를 잘한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어요"라는 멘트를 하기도 했다. # [23] 다만, 빌리 코건이 훗날 밝히기를 스매싱 펌킨스 1집 Gish 때까지는 상습적으로 LSD를 복용했었으며 90년대 스매싱 펌킨스로 활동 했을 때 공연 뒷풀이에서 메스암페타민이나 MDMA를 했다고 한다. [24] 한창 스매싱 펌킨스가 2집으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었던 시기의 인터뷰에서 인터뷰어가 빌리 코건과 커트 코베인을 비교하자 빌리 코건은 대놓고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그와 나는 기타를 연주하는 손조차 정반대다."(빌리 코건은 왼손잡이인데 오른손으로 기타를 연주하고 커트 코베인은 오른손잡이인데 왼손으로 기타를 연주한다.)라고 말하기도... [25] 원래 크리스틴 파프는 밴드 메이트인 에릭 얼랜드슨과 연인 사이였지만 크리스틴의 헤로인 중독 문제 때문에 1993년 크리스마스 무렵 헤어졌다고 한다. 참고로 크리스틴 파프는 원래 마약을 하지 않았으나 홀의 멤버로 가입하면서 커트 코베인과 코트니 러브의 영향을 받아 헤로인을 하기 시작했다고. [26] 그래도 빌리 코건은 홀의 3집 앨범 작곡과 프로듀싱에 참여하는 등 코트니 러브와 인연을 계속 이어나갔다. 빌리 코건은 2010년 홀의 컴백 앨범 제작에도 참여했다. [27] 현재는 다른 사람에게 소유권을 넘긴 상황 [28] TNA에서 매그너스로 활동했었다. [29] 결국 닉 앨디스는 NWA에서 나와서 WWE에 입사하여 현재는 스맥다운 GM으로 활동하고 있다. [30] 참고로 릴리안 기시는 해당 앨범 발매 당시 살아있었지만, 별다른 코멘트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