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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19 02:29:35

모태신앙

1. 개요2. 종교생활의 특징과 문제점
2.1. 세뇌 논란
2.1.1. 반박1: '의심 불가'에 대한 잘못된 이해2.1.2. 반박2: 부모의 교육권
3. 종교학에서의 이해4. 종교별 사례
4.1. 모태신앙을 인정하지 않는 종파4.2. 모태신앙을 인정하는 종파
5. 관련 문서

1. 개요



어머니(胎) 안, 다시 말해 뱃속에 있을 때부터 종교를 접해 신앙을 가지는 것. 자기 의지나 결정권과 무관하게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나 보호자에게서 전수받은 신앙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는 모태신앙이라고 하면 모든 종교가 다 해당되지만 주로 유일신교(특히 기독교 중에서 개신교)에서 사용하는 단어이며 타 종교들은 모태신앙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기독교 종파 기준으로 모태신앙을 가진 신자들의 거의 대부분은 유아세례[1]를 받았고 가톨릭은 10살 전후로 첫 영성체를 했을 것이며 부모로부터 성당에서의 복사 활동을 권유받은 경우도 있다. 또한 가톨릭에서 아이에게 종교적 의식을 하는 세례는 특별한데 이는 교리 상 사람은 태어나서부터 타고난 죄인 원죄를 가진 사람이므로 그 죄를 신께서 사한다는 의식이 세례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군인들에게 약식 세례를 줄 정도. 이는 군인들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목숨이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에서는 신의 모습을 닮은 인간, 즉 자녀들을 낳고 번성하라는 교리가 있을 정도이며 그만큼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서 나온 자녀들은 모태신앙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교리가 교리이다보니 기독교에서 반 동성애(출산 불가) 여론이 절대적인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개신교 신자들의 경우 천주교 신자들보다 더욱 모태신앙의 정도가 강한데 만약 이름에 기독교 성인들의 이름이 있을 경우(대표적으로 요셉, 요한 등) 99% 모태신앙이라고 봐도 된다. 개신교의 경우 '부흥'이라는 이름 하에 포교 활동이 천주교보다 매우 왕성하다.

모태신앙인을 천주교에서는 '태중 교우', 성공회에서는 '뿌리 신자'라 부르기도 한다.

종교의 특성상 인간의 인격형성이나 경험, 지식의 축적 이전에 선입관을 주입, 형성시켜 두는 것이 교세확장에 유리하므로 은연중에 모태신앙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기 때문에 모태신앙으로 종교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에 대한 부심 형성되는 경우도 다소 있다. 자기가 먼저 '나는 모태신앙인데~' 식으로 언급을 하는 경우는 상당수가 자부심을 가지고 은연중에 입에 붙은 경우다. 일부 막장스런 교회에서는 목사 자녀, 장로 자녀, 집사 자녀 서열로 똥군기를 잡는다는 오싹한 괴담(?) 같은 이야기도 돈다지만 이것도 사실 모태신앙 여부와는 좀 거리가 있는 문제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보통 모태신앙들은 교회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유독 과도한 기대를 받기 때문에 청소년 시절에 "이건 내 진짜 모습이 아닌데..." 하면서 방황하기도 하며[2] 한편 아무개 권사 아들, 아무개 장로 딸이라면 당연히 이 정도는 해야지 하면서 신앙 페이를 강요받기도 한다. 게다가 교회 어른들이 죄다 자기 갓난아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고 자기 부모님하고도 친한지라 상당히 나이를 먹고서도 어린애 취급당하는 등 오히려 또 다른 부담스러운 면이 있다.

하지만 전술한 모태신앙에 대한 자부심과는 반대로 종교 안팎에서 모태신앙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많다. 종교결정권을 뺏긴 피해자라고 여기는 것인데 반종교주의자나 무신론자들 위주로 그렇게 생각할 것 같지만 일부 기독교 교단이나 신자들도 그렇게 여기기도 한다. 신자들은 여러 개인적 경험과 사고로 신앙을 갖게 되는 길이 있는데 모태신앙은 이 단계를 거치지 못하기 때문에 깊은 종교 생활을 할 수 없다고 믿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갖는 부모들은 보통 자식이 10대 후반이 될 때까지 종교를 강요하지 않는다.

일부 선진국들에서 관찰되는 폐쇄적인 종교공동체(ex. 아미쉬) 혹은 하레디 공동체 탈출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전체 모태신앙으로 잘못 일반화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폐쇄적인 공동체는 모태신앙으로 인해 인간관계가 얽힌 경우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나기 힘들어지며 이들을 위한 심리치료나 쉼터 등 도움을 주는 단체들이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 있다. 한국 천주교와 개신교계, 유럽권 기독교계는 자녀가 모태신앙임에도 교회출석률이 저조하여 교세가 쇠퇴하고 있거나 쇠퇴가 예상되는 상황이다.

2. 종교생활의 특징과 문제점

문제는 종교라는 것이 세습, 상속되는 신분이나 재산 같은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아무리 어릴 때부터 종교적으로 교육되어 온다고 할지라도 종교의 핵심 교리들은 난해하거나 가치관이 엇갈리는 교리가 많다. 종교를 처음부터 가지고 있다고 해서 종교 자체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보장은 없으며 종교가 바라는 인간상이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십중팔구 종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관습적인 모습만을 몸으로 습득해서 의미도 모른 채로 표출하게 된다. 예를 들면 교회를 그냥 친구들과 만나서 밥과 간식 먹고 노는 곳쯤으로 생각하거나 기도문은 달달 외울 줄 알지만 정작 기도문의 의미는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등 "형식과 의례"에는 익숙할지 몰라도 진정한 "신앙"을 갖게 될지는 의문이고 그 "신앙" 이 100% 동일하게 전수될지도 보장할 수 없다. 개중에는 정반대로 자신의 모든 도덕윤리의 잣대를 세속과는 한참 동떨어진 혼자만의 종교적 관점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지만 역시 자신이 믿는 바에 대해 충분한 지적인 깊이를 갖고 고찰하지 않은 이상에야 자기 종교의 가르침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해 본 것에 불과하다. 모태신앙이어도 인격형성의 중요과정인 사춘기라는 과정이 있기 때문에 이 단계에서 떨어져나가 원래 부모가 원하던 종교상에서 반대되는 종교관을 가지게 되는 경우도 있다.

사춘기를 넘기더라도 더 나이를 먹어 20대 중후반이 넘어가게 되면 인생의 여러 중대한 실패나 고통, 누군가와의 사별, 사회의 부조리 등을 처음으로 '나의 일'로서 겪어보게 되기 때문에 악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뼈저리게 절감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3] 이때쯤이면 모태신앙들은 본격적으로 "내가 믿는 것이 내가 처한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는데 이러한 내면적인 투쟁을 종교심리학에서는 종교중립적 단어로서 종교적 분투(religious struggle)라고 부른다. 그 결과 기존의 신앙이 강화되거나 체계화될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는 냉담자의 길로 접어들곤 하며( 사례)[4] 개종이나 무신론자로 전향하는 사례도 나온다. 세속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모태신앙은 썩 "수지맞는" 장사는 아닐 수 있다. 군대에서 훈련소라면 몰라도 자대 가면 냉담자로 가기 참 쉽다.[5]

모태신앙이 신자간의 계급적 격차 같은 것으로 인식되는 경우에는 도덕적 해이로 이어지기도 한다. 다시 말해 정말 의미도 모르고 맹목적으로 '해왔으니 한다' 식의 종교관이 형성되거나, 거짓되거나 비뚤어진 형태의 믿음이나 숭배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전자는 시간, 세대가 좀 지나면 전통이나 관습 정도로 순화되기도 하지만 후자는 주변 사람에게 피해를 주거나 기반이 되는 종교 자체가 변질되어 전승되는 형태로 나타난다. 중근세 유럽에서는 전 국민이 모태신앙이었으나 인간 내면의 악한 본성[6]을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 이름을 내세워 합리화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마녀사냥, 종교재판 등과 같은 반윤리적 행태가 널리 벌어졌다. '다른 사람이 화내는 것은 지옥에 갈 죄지만 본인이 화내는 것은 비느하스의 창'이라는 식으로 본인이 원하는 대로 죄를 짓기 위하여 종교를 이용해먹는 것은 성경이 매우 강력하게 경고하는 죄다.[7]

여러 심리적 악영향이나 종교적 의의 때문에 종교인들 사이에서도 모태신앙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현직 목사가 쓴 한국교회 모태신앙에 대한 비판서 그러면서도 모태신앙을 부추기는 행위(유아축복, 유아캠프 등)가 이루어지는 이유는 실질적, 잠재적인 교인의 확보 및 그로 인한 수익, 교세, 전도수단이 확보되기 때문이다. 모태신앙이었다가 냉담자나 무신론자가 되는 경우가 있다고는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이미 모태신앙인 사람이 믿음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과 비신자인 성인들에게 새로운 믿음을 전도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쉬울런지는 명백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봐도 교세 확장에 유리한 쪽이 어느 쪽인지는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메이저 종교에서 모태신앙이란 개념을 포기하는 일은 일어나기 힘들다고 봐야 할 것이다.

2.1. 세뇌 논란

주입받은 교리로 인한 구속력이 상당하다는 견해도 있다. 모태신앙은 선택권 없이 주입되어 아기 때부터 평생 동안 ‘교육’, 나쁜 말로 하면 ‘세뇌’를 받았기 때문에 상당히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이다. 실제로 모태신앙자들이 완전한 비종교인 혹은 무신론자가 되는 비율은 전체의 0.1% 이하다. 이들은 프리드리히 니체를 예로 든다. 니체의 삶을 보면 아래 사례들이 명백하게 보여진다. 그는 기독교의 행태를 부정했지 예수를 부정하지는 않았으며 장례식도 기독교식으로 치러졌다. 신은 죽었다는 말로 유명한 사람임에도 끝내 기독교에서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했다.

첫번째로 " 의심하지 말라"는 구절이다. 이 구절 때문에 모태신앙인들은 현대인이라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비판적인 사고방식을 애초에 정상적으로 갖지 못한다고 한다. 어떤 종교집단이든 일평생 다니다 보면 문득 드는 의문점과 세속의 비판으로부터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는데 이 구절이 주박이 되어 기독교에 대해서 의문을 품고 다시 생각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때로 의문을 품을 때도 있지만 ‘의심하지 말라’라는 구절이 자꾸 귓가에 맴돌아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고 한다. 모태신앙으로 자라면 이런 식으로 합리적으로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을 상실한다. '의심이 죄라도 한번 해보고 회개하면 되지 않냐?'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거기에 대한 대책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부 교회에서는 ‘죄를 지으면 회개하였더라도 그 행동 자체는 지옥에 간다’는 형이상학적인 논리를 내세운다. 회개에 대한 모순을 이 논리로써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모태신앙이 벗어나기 힘든 또다른 이유는 '공포심'이다. 신앙인으로 남으면 달콤하고 행복한 미래가 있지만, 벗어나면 고통만이 있다는 두려움이다. 모태신앙인들은 평생을 자신들이 특별하고 선택받은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주입받으며 자라왔다. 그렇게 태어났을 때부터 들어 왔고 믿어 왔던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 완전히 생소한 길을 걷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 불안하고 절망적인 것도 있고 혹여 벗어나고 싶어지더라도 "죽고 보니 진짜 하나님이 있으면 어떡하지?"하고 두려워져서 더 이상 생각하기를 거부하기도 한다.

셋째는 모태신앙인들은 어렸을 때부터 믿고 따라 왔던 주변 사람이 대부분 신실한 기독교인이다. 모태신앙인들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자라 왔기 때문에 이때까지 내가 믿고 따라왔던 신뢰하던 어른들이 '틀린' 사람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감히 하기 어렵다. 신앙을 버렸다가, 혹시라도 그간 알고 지내온 다른 신앙인들과 인간관계가 끊길까봐 두려워 용기를 내기 어려워한다. 다시 말하지만 지인의 대부분이 기독교인인 경우가 많은 모태신앙인들에게 있어 기독교계란 세상의 전부에 가깝고 이들이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다는 것이 글자 그대로 사회적 매장일 수 있다.
넷째는 교리에 대한 양심이다. 모태신앙인들은 비종교인에게는 없는 또 하나의 양심이란 것이 형성되는데 교리에 대한 양심이 그것이다. 이 또한 어렸을 때부터 교육(혹은 '세뇌'라고 비판받던 그것)을 받아 왔기 때문이다. 교리를 어겼을 시[8] 양심이 찔리는 것이다. 여기서 어렸을 때부터 교육받아 온 모태신앙인들은 누구보다 양심의 가책이 강하게 작용된다. 모태신앙인들은 양심의 가책을 두고 ‘하나님 존재의 증거’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사실 양심이란 것은 교육에 의해 작용하는 감정일 뿐이다. 어렸을 때 어른들이 잘못된 것과 옳은 것의 기준을 정해 주입하고 나면 그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거리껴지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9]사도 베드로한테도 있던 사례이니 일반 평신도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역설적이게도 마귀의 존재가 기독교에 있어 최대의 무적방패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들을 뚫고 나와 기어이 의심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건 다 마귀 탓이라고 하는 것이다. 심한 경우 조금이라도 기독교에 비판적이면 마귀의 역사[10]라고 교육한다. 비종교인 친구가 마귀가 든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이 문서마저 마귀의 역사라고 생각한다면 성공적으로 세뇌받은 모태신앙인이다. 심한 경우 기독교에 반대되는 의문과 생각과 유혹이 들어도 '내가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을 보니 마귀가 나를 현혹하는 중이구나!'[11] 한 마디면 모든 게 해결(?)되므로 그것으로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게 된다. 이 단계까지 왔다면 그냥 개독교 그 자체라 벗어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기독교를 믿는 부모가 자녀들에게 강압적인 기독교 교육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들이 자신의 행동의 근거로 삼는 기독교 교리를 살펴보자면 당장 십계명 중에서 사람을 향한 계명 중 가장 먼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구절이 나오고 같은 모세오경 레위기 19장 3절에는 한발 더 나가 부모를 경외하라는 구절이 나온다. 하나님 이외의 대상을 하나님보다 더 경외하는 행위를 우상숭배라며 터부시하는 성경에서 하나님 이외의 대상을 경외하라고 기록된 유일무이한 구절이다. 사무엘상에서는 사울 왕이 아말렉 족속들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소와 양들을 남기자 사무엘이 사울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사무엘상 15장 22절)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많은 기독교인 부모들이 이러한 구절들을 악용하여 자녀들에게 부모의 종교, 사상, 이념, 직업을 이어받을 것을 강요한다.[12]

2.1.1. 반박1: '의심 불가'에 대한 잘못된 이해

이런 비판적 관점은 실제로 응집력이 강한 컬트 같은 종교공동체의 아동 및 청소년들을 설명하기에는 적절할 수 있으나 이외의 경우에는 설명의 타당성이 떨어진다는 한계가 있다.

우선 유의해야 할 것은 세속사회와의 접촉을 어른들이 최대한 차단하는 아동 학대에 준하는 상태에서 각종 종교적 협박과 으름장으로 세뇌의 효과를 최대한으로 달성한 사례들만을 가지고 모든 모태신앙자들의 경험을 일반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상기됐던 바- 의심에 대한 거부감, 새로운 시각에 대한 불안, 인적 네트워크, 교리를 어길 때의 양심의 가책, '마귀의 역사' 운운은 전부 위 문단에서 설명한 원인으로 인해 나타난다. 이와 같은 종류의 사회화는 비단 종교뿐만 아니라 권위주의 폐쇄성을 드러내는 사회적 공동체 내에서라면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다. 이를 뒤집어서 말하면 똑같이 모태신앙이라도 부모 및 주변 환경으로부터 개인의 사상의 자유를 보장받으면서 세속 사회와 전방위적으로 접촉했던 사람들은 위의 문제점을 거의, 혹은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 꼭 장대익 교수처럼 신앙을 버리지 않더라도 김용민이나 진중권처럼 합리적인 차원의 종교비판을 하는 사례도 있다.

애초에 '신앙을 의심해선 안된다'는 그리스도교 교의는 "아무런 검토도 하지말라"는 반지성적 의미가 아니며, '방법적 의심'(Dubium methodicum)은 그렇기에 교리적으로도 아무 문제가 없다. 신학에서는 '방법적 의심'이라는 방법론을 당연하게 사용하고,[13] 그리스도인 부모가 반지성주의적으로 아이를 양육한다면 '모태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그 부모가 무식한 것에 불과하다.
fidem, si poteris, rationemque conjunge
할 수 있는 한, 신앙을 이성과 결합시키십시오
보에티우스
42. QUAMVIS autem praedicta veritas FIDEI CHRISTIANAE humanae rationis capacitatem excedat, haec tamen quae ratio naturaliter indita habet, huic veritati contraria esse non possunt.
앞서 말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가 인간 이성의 능력을 넘어선다 할지라도, 자연적으로 주어져 있는 이성이 지니는 [진리]는 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와 상반될 수 없다.

...46. ...Non igitur contra cognitionem naturalem aliqua opinio vel fides homini a Deo immittitur.
결과적으로 신은 자연적 인식에 상반되는 어떤 견해나 신앙도 인간에게 주입하지 않는다.
- 토마스 아퀴나스, 《대이교도대전》Summa Contra Gentiles I,7. n.42, n.46 신창석(역)

일상적인 예를 들자면, 아이가 "왜 주일에는 꼭 미사/예배를 참례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할 수는 있다. 이런 질문은 딱히 그리스도교를 적대하는 질문도 아니고, 단지 자기에게 설명을 해달라고 부모에게 요청하는 것일 뿐이다. 정상적인 신자 부모는 이런 질문을 듣고나서 "감히 의심을 하다니!"라며 아이를 혼내는 게 아니라, 왜 주일마다 미사/예배를 참례해야 하는지를 설명해주려고 할 것이고, 만약 대답을 하지 못하겠으면 주변에 물어보거나 "나도 모르겠단다"라며 솔직하게 인정을 할 것이다. 즉 모태신앙이 '의심' 자체를 원천봉쇄하고 있다는 건, 신학적으로 보든 일상의 쉬운 사례에서 보든 터무니없는 오해이다.

2.1.2. 반박2: 부모의 교육권

성인이 될 때까지 사상, 철학, 이데올로기 등을 교육 받지 않고 백지 상태로 미성년자 시절을 보내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 이미 아동 시절이나 유치원생 시절에도 수많은 사상을 성인들에게 교육 받으며, 이중에는 "민주정치는 옳다"처럼 사회가 자명하게 받아들여지는 사상 뿐만이 아니라, "개인주의적 자유는 제한될 수 없는/있는 권리이다", '외국인보다 자국민이 소중한 건 맞다/아니다"처럼 사회가 논쟁하는 사상들도 분명하게 존재한다. 그리고 동서고금 모든 문명에서는 여기서 부모에게 교육을 '할' 권리를 인정하여왔다.

이는 전근대 국가만의 특징이 아니며, 현대 국가에서도 성문법으로든 관습으로든 판례로든 인정되고 있는 권리이다. 독일의 경우 연방헌법재판소에서는 부모의 교육권(교육을 ‘할’ 권리)의 내용에 형성권(자유롭게 자녀 교육을 형성할 권리), 결정권(교육의 목표와 수단에 관해 결정할 권리), 이행권(자녀교육에 대한 책임을 형성하고 결정한 방법에 따라 이행할 권리)이 있다고 보며, 심지어 14세 미만의 아동에 대해선 종교적 자유의 단독 행사보다 부모의 교육권이 우선한다고 해석한다.
교육권은 교육에 대한 국민의 기본권으로, 부모의 교육권은 자녀의 교육에 관한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그 부모가 가지는 권리라고 할 수 있겠다. 헌법재판소는 부모의 교육권의 내용 요소로서 ‘형성권’, ‘결정권’, ‘이행권’이 있음을 제시한 바 있다. ‘형성권’은 자유롭게 자녀 교육을 형성할 권리, ‘결정권’은 교육의 목표와 수단에 관해 결정할 권리,‘이행권’은 자녀교육에 대한 책임을 형성하고 결정한 방법에 따라 이행할 권리를 말한다.
이석민, 「국공립학교에서의 종교의 자유」, 헌법재판연구원, 2020

가령 부모가 아이를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키울거야'라고 교육 목표를 세우고 그 수단으로 매주 주일학교에 보내는 것은 '부모의 결정권'이며, 교육을 '할' 권리로 헌법상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부모의 '교육권'은 다른 주체의 '교육권'에 의해 제한을 받을 수도 있지만, 부모의 '교육권'은 어느정도까지는 국가의 '교육권'과 서로 동등한 관계에 있다고 해석되고 있다.(참고: 이석민, 「국공립학교에서의 종교의 자유」, 헌법재판연구원, 2020) 미국의 경우도 상황은 유사하다. 판례[14]를 보면, 아미시 부모의 교육권과 위스콘신 주의 교육권의 충돌에서 연방대법원 부모의 편을 들어줬다.[15]

물론 자녀가 일정한 나이를 넘어서면 종교적 자기 결정권이 부모의 교육권보다 우선함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 사이에서도 당연한 상식이다. 나이 먹은 자녀가 배교할 때 그것을 막아설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없으며, 애초에 그런 종교강요가 잘못되었다는 건 신실한 그리스도인 부모들도 거의 누구나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아동에 대한 종교교육이 '세뇌'라는 것은 동서고금 당연하게 인정되어 온 부모의 교육권을 왜곡하는 워딩일 뿐이다. 부모는 자기가 생각하는 옳은 가치를[16] 아이에게 교육할 권리가 있으며, 이는 반민주적인 것도 반인권적인 것도 전근대적인 것도 아닌 자연스러운 풍경일 뿐이다.

3. 종교학에서의 이해

종교학에서는 모태신앙 여부를 종교성(religiousity)을 결정짓는 큰 요인 중 하나라고 본다.

종교학에서는 개인의 '종교성'을 결정짓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로 부모세대의 관습과 의례행사(practice of liturgy)을 드는데, 한국적 모태신앙 개념은 이에 해당한다. 종교성이란 한 개인이 기독교, 불교, 유교 등의 개별 종교나 무신론/과학맹신 등의 비관습종교에 대하여 충성심을 갖고 해당 신념을 굳게 갖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종교성을 결정짓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가 어렸을 때 자신의 부모가 그러한 종교나 신념을 굳건하게 행사했는지의 여부라는 것이다. 만약 부모가 이미 종교에 깊이 감화되어 매주 모임에 참가하는 모습을 직접 보이거나 세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를 종교의 틀[17]에서 해석하는 모습을 계속 보이면 그 모습을 보고 자녀도 해당 종교에 귀의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측면에서 종교학에서 이해하는 종교는 세습이 맞다. 다만, 종교학에서는 종교가 가지고 있는 교리가 진리인지 혹은 객관적 사실에 부합하는지 여부에 중점을 두지 않고 사람들은 왜 종교성을 지니는가, 즉 왜 교회에 나가고 어떤 비이성적 신념에 봉사하는가를 연구한다는 점에서 유의할 것.

4. 종교별 사례

한국 천주교 주교 대부분은 모태신앙 출신이지만 유수일 하비에르 전 군종교구장은 모태신앙이 아니다.

4.1. 모태신앙을 인정하지 않는 종파

4.2. 모태신앙을 인정하는 종파

유아세례를 인정하는 대부분의 종파들이다.

5. 관련 문서



[1] 단,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 침례회 등 일부 교단은 제외. [2] 꼭 방황이 아니더라도 교회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면서 생겨난 이미지 내지는 프레임에서 벗어나기 굉장히 힘들기 때문에 교회에서 자신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닌 "남들이 기대하는 모습"에 맞춰줘야 하는 부담이 생긴다. 칼 융의 "페르소나" 개념이 떠오르는 부분. 일부 심한 경우 어릴 때 감수성 풍부한 성격 때문에 눈물이 많았다면 대학교 들어갈 때까지 "어이쿠 저 울보가 어느새?" 소리를 듣기도 한다. [3] 어른의 사정이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닌 수준의 나이가 되면 청소년들이 생각하는 악의 문제 따위는 어디까지나 관념적인 입바른 소리에 불과하다고 느껴질 정도다. 특히 대한민국과 같이 안정적이고 안전한 사회의 청소년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4] 그렇다고는 해도 이런 과정을 거친 세속적 개인은 그렇지 않은 비종교적인 개인에 비해서 종교에 대한 이해와 통찰의 정도가 좀 더 깊다고 간주할 수 있다. [5] 과거보다는 덜하지만 아직도 선임, 장교, 부사관들이 기독교, 더 크게는 모든 종교의 종교행사에 관여하는 것에 대해 외압을 행사하여 막는 경우가 상당수 있다. 단순히 그 종교나 인원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 때문만이 아니라 종교행사에 참가하거나 차출되는 경우 그만큼 결원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오전에 편하게 쉴 수 있으니까. [6] 그리고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안에서 나오는 것은 곧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같은 여러 가지 악한 생각들이다. 이런 악한 것들은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코의 복음서 7장 20-23절) [7] 예수께서는 성전 뜰 안으로 들어가 거기에서 팔고 사고 하는 사람들을 다 쫓아내시고 환금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성서에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리리라.' 했는데 너희는 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하고 나무라셨다.(마태오의 복음서 21장 12-13절)
이 뱀 같은 자들아, 독사의 족속들아! 너희가 지옥의 형벌을 어떻게 피하랴?(마태오의 복음서 23장 33절)
[8] 예: 안식일 주일에 일을 하거나, 주일에 돈을 쓰거나, 술을 마시는 것 등이 있다. [9] 극단적인 예시지만 이슬람권의 악습인 명예살인을 들어보자. 무려 살인이다. 모든 문화권에서 엄벌하는 흉악범죄 행위다. 그럼에도 가해자들은(심지어 대부분 가족에게) 그런 행위를 저지르고 나서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은 사례가 많다.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어릴 때부터 교육받았고, 이로 인해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10] 마귀의 행위를 기독교에서 저렇게 지칭하기도 한다 [11] 실제로 설교 중에 의심하는 것은 마귀가 현혹하는 것이라 가르친다. [12]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개신교인 가정(특히 아버지가 목사 장로인 가정)에서 자녀(특히 아들)에게 "너는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니 꼭 목사가 되어야 한다."며 자녀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로 신학대학 혹은 신학과를 보내는 경우다. 자녀가 이를 거부하면 상술한 성경 구절들을 들먹이며 이래도 아빠 엄마 말 안 들을 거냐며 윽박지른다. 니체도 이런 마찰을 겪었고 이로 인해서 대학교 입학 후 첫 두 학기 동안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13] 당장 '삼위일체론'만 하더라도, 흔히는 "이성으로 설명 못하고 무지성으로 믿는 것"이라는 단순화가 흔히 일어나지만, 신학에서 말하는 건 "이성으로 연역할 수 없다"이지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다"가 아니다. 고대 교회는 명백하게 삼위일체론을 인간의 말로 설명하기 위해 논쟁했고, 삼위일체론이 "고대인의 무지성 신앙고백"이었다면 20세기 현대신학에서 새삼스럽게 삼위일체론 르네상스가 일어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14] Wisconsin v. Yoder 406 US 205 (1972). [15] 사건 요지: 1970년대까지 위스콘신 주에서는 공립/사립을 막론하고 16세까지 의무교육을 하였고, 이는 미국의 다른 주들보다 2년이 더 길었다. 그런데 세 명의 아미시 부모들이 초등학교 8학년 후에는 종교적 이유에 따라서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위스콘신 주는 이 세 부모에게 유죄판결을 하였으나 연방대법원은 의무교육기간을 다른 州의 경우들보다 2년 더 늘린 위스콘신 주의 이익은 그러한 의무교육기간 연장의 적용을 받지 않고자 하는 아미시의 종교적 이익보다 우선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모들의 손을 들어줬다. 또한 보충의견( Concurring Opinion)에 의하면, 본 사건 아미시 아동들의 신앙은 그들 부모의 신앙과 서로 다르다고 가정할 수가 없고 따라서 해당 사건은 그 부모들의 종교의 자유에 기초해 적절하게 결정되었다.(Stewart 대법관) [16] '민주정치는 옳다'처럼 사회가 합의한 자명한 사상 뿐만이 아니라, 종교, 인생관, 심지어 정치적 견해와 지지정당까지. [17] 이때의 종교는 개신교, 불교 등 협의의 종교뿐만 아니라 과학맹신 등에도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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