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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권-위구르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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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명2. 중국과의 관계
2.1. 서북공정2.2. 문화적 차이2.3. 탄압
2.3.1. 2010년대 이후
2.3.1.1. 위구르 인권 문제가 과장되었다?
2.4. 독립운동
3. 중국 본토의 위구르인 디아스포라
3.1. 유고족3.2. 후난성 위구르인3.3. 베이징의 위구르인 디아스포라
4. 대만과의 관계
4.1. 갈등
5. 관련 문서6. 외부 링크

1. 설명

중화권 동튀르키스탄 지역 간의 상호 관계, 중화권과 위구르 민족과의 상호 관계 관련한 문서이다.

2. 중국과의 관계

2.1. 서북공정

시 주석은 "중국은 다민족 국가이며 다양성과 통일성은 우리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서도 "신장 민족 문화의 뿌리는 중국 문명에 있다"고 했다.[1] 다양한 민족의 존재 자체는 인정하지만 중화 민족이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소수민족이 '동화 대상'임을 못 박은 것이다.
#

중국 입장에서는 해당 지역이 전통적인 중국의 변방이라고 해당 지역의 중요성을 축소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고대 중국의 식문화와 기마술, 전투마차, 청동기 기술, 중세 초 중국 불교와 중국 음악 등등은 오늘날의 동튀르키스탄 지역을 거쳐 중국으로 전파되었다는 것은 중국 입장에서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해당 지역은 중동의 청동기 문명 및 기마술이 유입되는 통로였기에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같은 가축 외에도, 밀, 포도, 호두, 완두 같은 작물 역시 중앙아시아와 중동에서 해당 지역을 통해 중국으로 전파되었으며 중국 불교 중 교종은 쿠라마지바 등 중앙아시아 지역 불교 승려들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 당나라의 음악 당악은 서역 음악이 아니면 설명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될 당시 아직 중화문명의 중심지는 화북지방이었고 인도의 문물이 동서남북으로 교역이 활발했던 위구르 지역을 거쳐 오는 것이 당연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의 유교와 도교 같은 제자백가 사상들은 중앙아시아나 중동, 인도로 전파되지 못하였다. 종교 이외에도 역경 같은 중국 전통 역법이나 천문학 역시 제대로 전파되지 못했다. 외국인 입장에서 한문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중화주의자들은 위구르가 마치 기원전 2000년경부터 꾸준히 중국의 영역이었던 것처럼 주장하지만[2] 위구르에 한족이 직간접적으로 지배권을 행사한 경우는 기원전 108년 전한, 후한[3], 수나라 중후기부터 당나라 초기, 그리고 청나라 말기에 한정되며 청나라 통치도 야쿱 벡 반란 이전에는 엄연히 만주족의 통치로 한족의 신장 지역 유입은 최대한 제한되었다. 오호십육국 시대에도 북방 왕조들이 동튀르키스탄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긴 했지만 해당 지역의 행정에는 제대로 된 한문이 사용되지 못하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위구르인들이 중국어의 방언을 사용하였다는 식의 이런 중화주의자들의 주장은 남아공의 줄루족이 자신들이 영국하고 관련이 있으니까 인도를 자신들의 식민지였다고 주장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수준이다.

전근대에 한족 군인들이 직접 해당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한 경우는 전한, 후한, 그리고 당나라 때의 고선지의 군사 작전[4]에 의한 것인데 비교하자면 1) 한나라 군대가 타림 분지를 침략했던 시기에는 고조선 역시 전한의 한무제의 공격을 받아[5] 멸망하고 한사군이 세워졌으며, 2) 당나라가 안서도호부를 세웠던 시기 안동도호부를 세웠다가 신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발해가 건국되는 과정에서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서 철수하였던 바 있다. 고대 중화 왕조들은 타림 분지의 오아시스 도시들과 만주 일대의 한민족들의 국가를 모두 북방 유목제국의 동맹으로 파악하였고, 북방 유목제국의 공세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타림 분지와 한반도를 동시에 공격하곤 했다. 다시 말해서 신장(동투르키스탄)이 꾸준히 중국의 영역이었다는 주장은 시진핑이 주장한 "한반도는 중국의 일부"라는 망언과 일맥상통하는 패권주의적 주장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6]
He then went into the history of China and Korea. Not North Korea, Korea. And you know, you’re talking about thousands of years …and many wars. And Korea actually used to be a part of China. And after listening for 10 minutes I realized that not — it’s not so easy. You know I felt pretty strongly that they have — that they had a tremendous power over China. I actually do think they do have an economic power, and they have certainly a border power to an extent, but they also — a lot of goods come in. But it’s not what you would think. It’s not what you would think.

이후 시진핑 주석은 한국과 중국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북한이 아닌 한국에 대해서 말이죠. 아시다시피 수천 년 동안의 (역사와) ... 전란에 대해서 우린 이야기했습니다. 한국은 사실상 중국의 일부였다는 것도요. 그리고 한 10분 정도 이야기를 들어보았는데 그리 쉬운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알다시피 나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 대륙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솔직히 나는 중국이 (강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으며, 또 확실히 광활한 대륙 전반에 걸쳐 국경을[7]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중국은 많은 것을 수입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자분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다른 것이죠.
WSJ의 트럼프 대통령 인터뷰

한반도와 베트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동튀르키스탄과 중국과의 관계도 일방적인 종속 관계로 단순화할 수 없다. 일례로 거란족들이 중앙아시아에 건국한 카라 키타이의 경우 서방의 나라들의 교류를 할 때 중국 영토에 있는 것도 아니고 한족 신민들이 별로 없었음에도 불구 자신들을 적극 "중국의 황제"라고 과장 광고를 하면서 권위를 내세우던 편이었다. 고려 시대 외왕내제를 시행하며 탐라국을 번국처럼 삼거나 베트남에서 외왕내제를 하며 이웃 민족들에게 권위를 내세운 것과 같은 맥락이다. 거란족 난민들이 세운 카라 키타이의 왕족들은 중앙아시아 서쪽의 이웃 국가들에게 자신들이 마치 중국 전체의 지배자라도 되는 것처럼 과장하기를 좋아했다. 카라 키타이를 건국한 야율대석이 데려온 사람들 중 중국인은 드물었으나[8] 중국어는 주로 외교적 위신을 위해 상징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실질적으로 행정을 비롯해 일상 생활에 사용된 언어는 튀르크계, 페르시아계 현지어였다. 한반도와 베트남 역시 행정이나 외교에서는 한문이 사용되었으나, 일상 문화에서는 중국어와 별개의 현지어가 사용되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결론적으로 동투르키스탄 지역의 경우 중국으로부터 유교, 불교를 받아들이기보다는[9] 상술한대로 오히려 중국에 서역의 문물을 전파하는 역할을 맡았다. 중국의 물산을 가지고 다른 지역과 교역함과 동시에 타 지역 문물을 중국으로 수출하는데 적극적이었던 지역이다.[10] 오늘날 중국에서 동튀르키스탄 지역 역사를 전부 중국사에 욱여넣으려는 이유는 소수민족 동화 정책 이외에도 이런 부분을 간과할 수 없다. 과거 중원을 중심으로 한 유교적 가치관과 다르게 오늘날 중화 패권주의 입장에서는 중국, 중국인들이 항상 해외로 진출하고 적극적으로 교류한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2.2. 문화적 차이

신장 지역은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으로 인도, 페르시아, 이슬람, 티벳, 투르크 문화의 영향 역시 골고루 받은 지역으로 중화 문화보다는 중앙아시아 이슬람 문화권에 훨씬 더 가까운 편이다. 하지만 이런 차이를 무시하고 위구르어가 중국어의 방언이라는 역사 왜곡을 대놓고 주입시키니 세속주의적인 위구르인들도 반감을 가질 수 밖에 없다.

현대 중국의 다수민족인 한족이 위구르인들을 보는 관점에는 이런저런 옥시덴탈리즘 오리엔탈리즘이 뒤섞여있다. 중국의 식민지 주민이 된 위구르인들에게 이런저런 스테레오타입이 따라붙게 마련이다. 1978년 이후에는 위구르인들에 대한 직접적인 탄압이 완화되었지만[11] 다른 한편으로는 위구르인들은 중국 미디어 내에서 관능적이고 이국적인 모습의 " 오랑캐"로서 묘사되기 시작했다. 한족 시각에서 위구르인들은 "이국적인 옷을 입고 웃으면서 노래부르고 춤추는 사람들"이라는 비교적 긍정적으로 정형화된 이미지 외에도 극단주의 성향으로 중국인들에게 테러 위협을 가하고 마약 밀매 등의 범죄를 저지른다는 부정적인 스테레오 타입까지 따라붙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중국 내에서 위구르인들의 입지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사회적 입지 즉 "열등하고 범죄적이며 이국적인 집단"과 다를 바 없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위구르인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에서 살고 있는데, 뜬금없이 다수자 집단이 그들보고 "이국적인 소수민족"이라는 딱지를 붙이면 반가워할 이유가 없다.

중앙아시아를 포함한 이슬람권과 러시아에서는 중국을 키타이 혹은 카타이라고 칭하는데 이는 원래 요나라를 건국한 키탄( 거란족)들을 지칭하던 명칭이다. 중세 위구르 상인들은 요나라의 수도 연경을 오고가며 교역하였던 바 있다. 위구르어로도 중국인을 까따이라고 부르는데 오늘날 중국 정부에서는 한족이나 중국을 함부로 까따이라고 부르지 못하도록 검열하고 있다.

중국에서도 위구르인들을 식민지배하는 과정에서 이들을 한족과 동화시키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안 한 것은 아니다. 청나라 때 만주족들의 입지가 점점 약화되면서 19세기 말 한족들이 이 지역에 서당을 설치해서 위구르인 학생들을 반강제로 서당에서 한학을 교육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문화적 차이를 무시한 일방적인 한화 정책이 위구르인들에게 먹혀들 리가 없었다. 결국 이러한 실패로 끝났고 나중에는 실용성 논란으로 폐지되었다. 이후 러시아나 터키에서 온 같은 투르크-무슬림 계열인 타타르인들이나 터키인들이 동투르키스탄 지역에 새로 새운 서구식 신식 학교들이 위구르인 사회에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던 바 있다.
한족은 우루무치를 비롯한 신장 북부와 동북부의 도시들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들은 주로 고소득 전문 직종과 정부 공무원으로 일한다. 신장의 위구르인들은 외국 방문객들에게 자신들이 대규모 프로젝트, 특히 에너지 분야의 프로젝트가 만들어 낸 새로운 직업에서 배제되고 있음을 느낀다고 말했다. 위구르인들은 또한 공통적으로 자신들은 신장 남부의 도시들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건설 현장에서 일할 기회가 없다고 불평했다. 이드 카 모스크 주변에서 새로운 건물을 짓는 노동자들과 구 카슈가르의 위구르 구역에서 도로를 포장하는 사람들, 호탄의 구 바자르를 철거하고 중심 번화가의 주요 개보수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모두 한족이었으며, 이들은 멀리 떨어진 타슈쿠르간에도 있었다. 더욱이 내가 대화를 나누어 본 노동자들은 신장 동쪽에 있는 성들에서 왔다고 말했다. 신장 당 제1서기이자 정치국의 일원이었던 왕러취안은 외국 언론인들에게 "신장의 많은 소수 민족들이 '더럽고 힘들며 고된 일'을 원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면서, 이 상황에 대해 흔히 들을 수 있는 해명을 했다. 쓰촨 출신의 한 노동자가 서방의 기자에게 한 논평은 좀 더 미묘한 이유가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가 없어요. 우리는 그들의 언어를 모릅니다."라고 쓰촨 성 출신의 건설 노동자 장비종이 말했다. "우리 쓰촨 사람들은 쌀밥과 돼지고기 그리고 강한 향이 있는 음식을 좋아하지요. 현지의 소수 민족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쌀밥도 먹지 않아요."

정작 대다수의 위구르인들은 쌀밥을 좋아하고, 이들이 먹는 쌀밥인 플롭에는 여러가지 향신료가 들어간다. 인터뷰를 한 노동자 장비종씨가 위구르인들이 쌀밥을 즐겨먹는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다면, 아마도 그를 고용한 노조 간부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한편으로 이는 여러 곳에서 진행되는 개발 프로젝트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이기도 하다.
유라시아의 교차로 신장의 역사 / James A. Millward

중국인들 역시 과거 장제스가 주장한 "위구르인들은 중국인의 일부"[12]라는 주장은 어폐가 있다 생각하는지 위구르인의 이슬람 문화가 한족들의 생활과 너무 달라서 중국 내에서도 한족과 마찰을 빚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피상적인 인식과는 대조적으로 위구르인들은 무슬림 민족 중에서 매우 세속적인 편에 속한다는 시각도 있다. 신장 위구르 지역 지하 자원 개발의 이익이 일방적으로 한족에 돌아가다시피 하는 상황에 대한 반발이라 봐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는 암만 이역만리의 차이여도 두 세대 정도만 거치면 충분히 동화된다. 당장에 영어를 사용하는 홍콩과 싱가폴, 그리고 수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그 예시다. 만일 위구르인들이 힘에서 열세일 뿐 아니라 중국으로부터 받는 떡고물이 괜찮다면 자발적으로라도 중화권에 동화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중국은 위구르를 식민지배 하고 있는데다, 노동착취부터 자원탈취까지 위구르에 안 좋은 것들만 다 저지른다.

2.3. 탄압

오늘날에도 중국 정부는 19세기 말 실패했던 한화 정책을 답습하여 위구르인들에게 고유 문화를 금지하며 한족화를 강요하면서 일어나는 신장 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위구르인들 입장에서는 여기에 반감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 위구르 전통 문화 및 민족 운동은 전반적으로 이슬람 근본주의와 거리를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13] 중국 정부는 세속화만이 위구르인의 독립 요구와 테러를 막는다는 엉뚱한 주장만 반복하고 있다. 근현대 위구르 민족운동가들은 대부분 세속주의자이거나 아니면 공산주의자였고, 현재도 위구르 독립운동은 세계 위구르 회의[14] 같은 친서구-세속주의 성향 단체가 주도하고 있다. 이미 세속적인 위구르인들보고 세속화를 시키겠다니, 위구르인 입장에서 보면 정당한 경제적, 세속적 요구까지 다짜고짜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리즘으로 몰아가는 셈이다. 中 최대 '에너지 보고' 인데…위구르인 "금사발 들고 굶주려"

물론 극단주의 성향의 무장 단체가 없는 것이 아니다. 중국 정부는 위구르 관련해서 사건 터졌다 하면 미국 내 위구르 분리주의 단체 소행이라고 주장하거나 아니면 동투르키스탄 이슬람 운동(East Turkestan Islamic Movement; ETIM)이라는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가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ETIM은 2016년 여름 이후 실체가 불분명한 단체로 전락했다. 왜냐하면 ETIM는 탈레반과 연계되어 있었고, 그 탈레반은 2001년 이래로 비(非)파슈툰계 무장단체를 미군에 맞선 총알받이로 내세워 줄곧 소모시켰기 때문이다. 탈레반은 기본적으로 파슈툰 최상부가 우즈벡, 타지크, 투르크멘 등의 비파슈툰계 무장단체를 지휘하는 형태로 운영된다. 따라서 미군의 공습에서 가장 먼저 죽음에 내몰린 전사들은 한때 중앙아에서 맹위를 떨친 우즈베키스탄 이슬람 운동(이하 IMU) 대원 등 비파슈툰계 군벌들이었다. IMU는 2010년까지 근근히 명맥을 이어갔지만 조직원들이 대부분 소모된 이후 최근에는 탈레반 조직에 완전히 흡수되었다. 그렇다면 한때 우즈베키스탄을 위협하고 키르기스스탄 남부를 유린하며 타지키스탄 내전까지 개입하며 큰 위세를 떨친 IMU가 이렇게 와해된 현재, ETIM 이라고 무사할 수 있을까? ETIM은 초기부터 IMU에 비해 규모도 작고 조직력도 허술한 군소단체였다. 현재는 투르키스탄 이슬람당으로 개명했다고 하나 역시 그 활동이 거의 감지되지 않는다. 2020년 11월 5일, 미국이 동투르키스탄 이슬람 운동을 해외 테러단체(FTO)에서 지정 해제한 것 역시 ETIM이 갑자기 착해져서 혹은 미국 보기에 예뻐서가 아니라, 활동이 감지되지 않기 때문이다. # # ETIM도 위구르인을 모집해야 조직을 유지할 수 있으나, 동튀르키스탄에서 타지키스탄이나 아프가니스탄으로 넘어가는 밀입국 루트는 굉장히 제한적이며 타슈쿠르간 자치현의 다프타르의 중-아프간 국경은 2001년 이래 계속 폐쇄된 상태이다. 다른 한편으로 2009년 우루무치 유혈사태 당시에도 중국 정부는 레비야 카디르 같은 일부 친일 인사들이 획책한 분열주의 폭동으로 규정했으나 해외 위구르 독립운동 단체들은 해당 유혈사태가 외부 개입이 유도되지 않은 평화 시위에서 시작되었으며,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은 중국 내 만연한 위구르인에 대한 차별 대우 및 경제 발전 성과 소외라고 지적하며 중국 공산당 측의 주장을 일축했다. 게다가 당시 위구르인들은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를 흔들며 시위했는데 이는 시위의 목적이 중국인과 위구르인 사이의 평등을 요구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계 위구르 회의는 우루무치에서 일어난 유혈 시위 사태로 최대 800명의 위구르족들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
BBC 뉴스나이트 프로그램은 다른 나라로 망명한 전직 수감자를 인터뷰했다.

"그 사람들은 내가 잠을 자게 허락하지 않았고, 몇 시간동안이나 나를 매달고 때리곤 했다. 두꺼운 나무와 고무 방망이, 뒤틀린 철사로 만든 채찍, 피부를 관통하는 바늘, 손톱을 당기는 펜치 등이 있었다. 이런 도구는 언제나 사용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듯 탁자 위에 놓여있었다. 다른 수감자들의 비명소리도 들렸다. "- 오마르

"저녁 식사 때였다. 최소 1,200명의 수감자들이 빈 플라스틱 그릇을 손에 들고 있었다. 음식을 먹으려면 친(親) 중국 노래를 불러야 했다. 마치 다들 로봇 같았고 영혼을 잃은 듯 했다. 그 사람들 중 상당수를 잘 알고 있다. 함께 앉아서 음식을 먹곤 했지만, 지금 그들은 마치 교통사고 후 기억 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 아자트

2.3.1. 2010년대 이후

2011년 9월 11일, 레비야 카디르 의장은 중국 당국이 9.11테러를 빌미로 위구르족 7,000명을 구속, 수감시켰다고 밝혔다. #

2012년 8월 2일, 신장 위구르 자치구 당국이 관리와 학생들의 라마단 참여를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면서 논란이 일어났다. #

2014년 6월 15일,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위구르족이 신호 위반을 했다는 이유로 공안에게 사살당했다. # 7월 2일, 신장 위구르 자치구 당국이 공무원, 학생의 라마단 참여를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 7월 11일, 레비야 카디르 의장은 중국 당국에 대화를 촉구했다. # 8월 7일, 레비야 카디르 의장은 7월 28일에 야르칸드에서 일어난 소요에서 공안이 위구르족 2,000여명을 학살했고 시신을 어디론가로 치웠다고 밝혔다. # 8월 22일, 중국 공안이 무장하지 않은 위구르족 농민 3명에 발포(!)하면서 3명이 사망한 일이 발생했다. # 9월 23일, 중국 법원이 일함 토티 교수에게 징역형을 선고했다. #

2015년 7월 1일, 세계 위구르 회의의 딜사트 라시트 대변인은 중국 당국의 위구르족 종교 활동 단속에 대해 비판했다. # 10월 19일, 세계 위구르 회의의 레비야 카디르 의장은 시진핑의 영국 방문에 대해 피로 얼룩진 것이라고 비판했지만, 중국 외교부는 카디르 의장의 말을 일축했다. # 레비야 카디르 의장은 시진핑 정권의 출범 이후, 위구르족 탄압이 늘어났다고 비판했다. #

2016년 2월 3일, 중국 당국이 위구르족 11명을 감형한 것에 대해 세계 위구르 회의는 정치 코미디라고 비판했다. #

2017년 들어 중국 정부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대한 통제가 엄청나게 강해져서 비밀수용소가 들어선 이후 위구르인이 구금되어 공산주의 교육을 받게 되었고 그곳에서 분리주의, 극단주의, 테러리즘 등 이른바 '3대 악' 을 배격할 것과 중국에 대한 애국심 등을 배우게 되었다고 하지만 사실상 세뇌. # # 심지어 이런 세뇌교육으로 인해 자살하는 사람도 나왔을 정도. 또 지하철을 탈 때 실명을 등록할 것을 요구했다. # 한편, 이에 대해 AP통신 기자는 지구상에서 경찰의 감시가 가장 심한 곳이라 할 수 있다고 전했다.

2017년 7월 5일, 세계 위구르 회의의 딜사트 락시트 대변인은 중동에서 유학온 위구르족, 성지순례를 하러 온 위구르족들이 중국으로 귀국한 뒤에 창지시 교도소에 수감됐다고 밝혔다. #

2018년 8월 13일, 중국 정부는 신장 재교육 캠프에 위구르족 100만명을 수감한 것과 관련해 구금의혹을 부인했다. #

2019년 3월 18일, 중국 정부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5년간 테러리스트 1만5천명을 잡았다는 보고서를 발표하자 세계 위구르 회의는 중국 정부의 발표를 비판하는 성명을 냈다. #

2019년 12월 5일 국민일보 기사 한국일보 기사에 의하면 사실상 위구르 동화정책은 실패로 끝났고 중국공산당 간부들은 사직서를 써서라도 빠져나가려고 하나 받아주지 않고 이주 정책으로 이주한 한족들 역시 이주를 허가해 주지 않아서 강제로 묶여있는 상황이다. 특히 2019년 홍콩에서 정치 위기가 터진 이후에는 감시도 심해지고 불안도 심해진 상황이다.

수용소에 수감된 위구르인들을 상대로 고문과 폭행, 신체훼손 외에도 여성 수감자를 대상으로 한 성고문과 강간이 비일비재하다는 폭로가 연이어 나오고 있다.

열흘간 성고문 뒤 집단강간 중국 경찰 위구르족 여성 집단 강간 후 자랑하고 다녀 집단 강간에 전기 고문까지... 집단강간 폭로 위구르 여성에, 中 "가족 여기 있다" 협박전화, 중국 대사관 측은 증거 정황에도 불구 발뺌 BBC 기사

페이스북에서 중국 해커들이 위구르족 독립 운동 관련 계정 등을 감시 혹은 방해하기 위해 가짜계정을 만들어 활용한다는 정황이 보고되었다. # ## 해킹의 주 타킷은 신장 위구르 자치구 출신으로 튀르키예, 카자흐스탄, 미국, 시리아, 호주, 캐나다 등 해외에 거주하는 약 500명의 위구르족들이다. #

2020년 6월 29일, 중국 정부가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위구르족들을 대상으로 불임수술, 낙태를 강요한 사실도 알려졌다. #

10월 14일, 중국의 위구르족 집단학살과 인권유린의 혐의로 중국 당국을 조사하라는 위구르 측의 제소를 ICC가 기각시켰다. #

2021년, 세계 위구르 회의와 티베트 독립단체들이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최에 항의하는 시위를 진행했다. #

위구르족 탄압을 비판하는 책이 출판됐다. #1 #2

2022년 9월 2일, 세계 위구르 회의 등 위구르족 단체와 인권단체들이 중국의 인권탄압에 독립조사를 촉구했다. # 12월 4일, 위구르족 감시에 관여한 중국 감시장비기업이 영국에서 인종인식 광고를 홍보해 논란이 일어났다. #

2023년 7월 25일, 호주 브리즈번의 한 대학교에서 홍콩 유학생들이 위구르족 학살, 티베트와 홍콩 탄압을 지지하냐는 항의에 중국 유학생들이 호통치자 홍콩 유학생과 중국 유학생 간의 싸움이 일어났다. #

2024년 3월 7일, 마싱루이 신장 위구르 자치구 당서기는 이슬람의 중국화는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
2.3.1.1. 위구르 인권 문제가 과장되었다?
중국 및 대한민국의 친중 성향 인사들 측에서는 물론 여기에 대해 여러가지 반박을 내놓는다. 한족들이 78년부터 수십년간 엄격한 한자녀 정책을 적용받았던 것과 다르게, 위구르인들을 포함한 소수민족들은 계획생육정책에서 예외가 주어져 농촌 지역 위구르인들은 3자녀까지 벌금 없이 출산이 가능하였으며, 가오카오 시험에서도 가산점을 받았다는 것이다.[15] 물론 신장 재교육 캠프가 시행되는 시점 전후로 중국의 한자녀 정책은 폐지되었고, 소수민족을 대상으로 한 보통고등학교학생모집전국통일고시 가산점도 폐지되는 추세이다. 2010년대 후반 이후 상황에서 보면 신장 재교육 캠프에서의 강제 수용 인권 침해 및 강제 불임수술과 집단 강간 등 제노사이드가 벌어지는 마당에 이런 일부 특혜만 언급한다는 것은 엄연한 논점일탈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은 중국과 소련의 관계, 소련 붕괴 이후에는 국제 사회와 중국과의 관계에 따라 꾸준히 바뀌어왔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소련과 친하거나 소련과 국력 차이가 벌어져서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던 시절에는 소수민족에 대한 관용책이 시행되었으나[16] 반대로 중국이 소련과 서로 사이가 나빠진 상황에서는[17] 문화대혁명 당시 티베트인, 위구르인, 회족 포함 여러 소수민족들이 전통 문화 유산이 사라지고 극심한 탄압을 받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2010년대 아랍의 봄이 하나씩 실패한 이후 아랍-이슬람권은 팔레스타인, 카슈미르 문제 등에 대해서 단합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고, 이는 중국 입장에서는 중화민국 시절부터 숙원사업이었던 위구르인 동화정책을 비교적 욕을 적게 먹어가며 위구르인들을 동화시킬 절호의 기회인 셈이다.[18] 전후맥락을 다 자르고 위구르인 탄압이 약했던 시절 주어진 특혜만 강조하는 것은 그야말로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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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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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중국 본토의 위구르인 디아스포라

중국에 원나라, 명나라가 들어섰던 시절에는 상당수의 위구르인들이 감숙성, 섬서성 지역에 정착하면서 오늘날 회족 조상들의 한 갈래를 이루기도 했다. 물론 원나라 시대나 명나라 시대 들어온 위구르인들이 다 무슬림은 아니었고 당시에는 아직 불교나 기독교 신도도 많았으며, 중앙아시아에서 중국으로 넘어온 무슬림들이 다 위구르인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무역하러 오는 상인들 외에도 관료로 일하기 위해 뽑혀온 사람, 왕위 계승권을 위해 다투다가 밀려나서 피난 온 경우, 혹은 전쟁을 피해서 피난 온 경우 등등. 물론 이렇게 중국으로 넘어온 위구르인들은 이민 2세대, 3세대가 지나면서 원래 사용하던 위구르어, 서유구르어 등을 잊어버리고 중국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위구르인들 중 불교나 마니교를 믿던 사람들은 대개 한족들과 그대로 동화되거나 아니면 유고족으로 편입되었던 반면, 기독교나 이슬람교를 믿던 사람들은 감숙성, 섬서성을 중심으로 한 중국어를 사용하는 무슬림 민족들인 회족들과 동화되었다. 회족의 회(回)자부터가 원래 오늘날에 신장 지역을 일컫던 명칭이된 회흘(回紇), 회골(回鶻)에서 나온 말이기도 했다.[19]

3.1. 유고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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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후난성 위구르인

명나라 때 귀순한 위구르인 용병 대장 할라 바시(Hala Bashi; 哈勒巴士)가 휘하 위구르인 부하들을 이끌고 먀오족 반란을 진압한 공로를 인정받고 이후 부하들과 후난성에 정착하였다. 현재도 후난성에는 할라 바쉬와 그 부하들의 후손들은 오늘날에도 6천여 명 가까이 거주한다. 이들은 중국 정부에서 공식적으로는 위구르족으로 분류하지만, 거의 완전히 한화되어 위구르어를 거의 구사하지는 못하며, 대부분 족보에 나온 선대 위구르인 조상들에게 유교식으로 제사를 지낸다 한다. 한국과 비교하자면 설장수의 후손 경주 설씨와 비슷한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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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베이징의 위구르인 디아스포라

동직문(東直門)을 나서서 열하를 향하여 몇 리를 못 가서 북경의 교군 30여 명이 어깨에 가마채를 메고 발을 맞추어 간다. 그리고 회회국(回回國 이슬람 국가) 사람 십여 명이 뒤를 따르는데 얼굴이 사납고, 코가 크며, 눈은 푸르고, 머리와 수염이 억세게 났다. 그 중 두 사람은 눈매가 맑고 고우며, 복색이 가장 화려하였다. 붉은 전립을 썼는데, 좌우 가장자리 끝을 말아 붙이고 앞뒤 가장자리는 뾰족하여 마치 아직 피지 않은 연 잎사귀 같았다. 이리저리 돌아볼 때는 경망스러워 보기 우스웠다. 마두(馬頭)들은 추측만 하고 그를 회회국 태자(太子)라고 불렀다. 앞섰다 뒤섰다 작반을 해서 간 지 사나흘 동안 때로는 말 위에서 담배도 서로 나누어 피우곤 했는데, 그 행동이 꽤 공순하였다. 하루는 한낮이 되어 너무 덥기에 말에서 내려 도중 삿자리 가게 아래서 쉬고 있는데 두 사람이 뒤따라 와서 역시 말에서 내려 마주 대면하여 의자에 앉았다.
...
《당서(唐書)》를 상고해 보면, "회흘(回紇)의 일명은 회골(回鶻)이다."하였고, 《원사(元史)》중에는 외올얼부[畏兀兒部]가 있는데 외올(畏兀)은 곧 회골이었고 회회는 또 회골의 변한 소리다. 또 《고려사(高麗史)》에,“원(元)의 사람이 고려 사람으로 하여금 외오얼[畏吾兒] 말을 가르쳤다.”하였으니, 외오얼은 또 외올(畏兀)의 변한 말이다. 합밀은 한(漢) 때에는 이오(伊吾)에 속한 땅이요, 당(唐)에 이르러서는 이주(伊州)에 속한 땅이다. 고려 말기에 설손(偰遜)이란 이가 곧 회골 사람으로서 원에 벼슬하다가 공주(公主)를 따라 동으로 와서 이내 고려에 벼슬을 하였고, 이조(李朝)에 들어와서 벼슬한 설장수(偰長壽)는 곧 설손의 손자이다.
- 열하일기 합밀왕(哈密王)편 / 박지원

일부 위구르인들이 몽골 팔기에 소속되어 베이징에 주둔했기 때문에 조선에서 온 사절단과 조우할 때도 있었다. 열하일기에 나오는 합밀왕(哈密王)의 합밀은 투르판 분지 동부의 하미(쿠물)을 의미한다. 하미는 청나라의 강희제 치세에 청나라의 조공국이 되었다.

청나라의 건륭제가 신장 지역을 점령한 이후 베이징에는 약 300여 명의 위구르인들이 체류했는데 이들 중에는 팔기군 소속 외에도 음악인, 무용수들이 많았다. 후에는 규모가 더 늘어나 광서제 시절에는 2천여 명 정도의 위구르인 음악가와 무용수들이 궁중에서 일했다. 자금성에서 음악이나 무용 일을 맏던 위구르인들은 상당수가 신해혁명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고 1930년에는 약 800여 명만 남은 상태였다고 한다. 베이징에 잔류한 위구르인 후손들은 위구르어를 잊어버리고 북경어를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문화혁명이 끝나고 1980년대 초 무렵부터 위구르인들이 다시 베이징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1985년 베이징에서 민간 시장이 공식적으로 허용되면서 알티샤르 지역의 특산품들을 판매하는 소상인들이 왔다. 이들은 주로 투르판에서 생산된 건포도와 위구르식 양꼬치 등을 파는 노점상을 열었다. 위구르 요리가 베이징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노점상에서 정식으로 식당을 개업하는 사람들도 생기고, 1992년에는 베이징에만 33개의 위구르 레스토랑이 운영되었다 한다. 위구르인들의 베이징 이주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가 중국 내 다른 지역과 비교해서 평균 교육 수준은 조금 더 높지만 소득 수준이 상당히 더 낮은 이유로 활발하게 이루어지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베이징에 새로 이주한 위구르 농민공들의 빈곤 문제가 지적되기도 하였다.

4. 대만과의 관계

대만에 거주하는 위구르인들은 주로 국공내전 이후 중국 대륙의 공산화를 피해 대만으로 도망쳐온 사람들 및 그 후손들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의 주요 인물이었던 율바르스 칸이 있다. 오늘날 기준으로는 대만 내 한족 및 회족과 동화되었다. 관계는 원만하지만은 않다. 중화민국이 대륙에 있던 시절 한족과 위구르족들의 마찰도 심했으며, 중국 국민정부가 이 지역에서 군마나 곡물을 과도하게 공출해갔기 때문이다.

위구르에 남아있던 중국국민당 잔존 세력들은 국부천대 이후에도 중화인민공화국에 저항하기도 했다. #

천안문 6.4 항쟁 당시 강경파로 유명했던 위구르 출신 학생 외르케시 될레트(ئۆركەش دۆلەت/Örkesh Dölet/Өркәш Дөләт)가 미국으로 망명 이후 대만에 정착한 바 있다.

2016년 2월 17일, 대만 국민당 정부가 종교의 자유와 관련된 회의에 외국에 망명한 위구르 대표와 티베트 대표의 출입을 막자 논란이 일어났다. #

4.1. 갈등

대만의 위구르족도 중국 대륙만큼은 아니지만[20] 어느 정도 한족과의 갈등이 있다. 그나마 같은 무슬림 후이족계 대만인, 중국 대륙과 분리된 대만만의 정체성을 추구하는 본성인과는 원만하게 지내는 편이지만 중국 공산당처럼 하나의 중국을 추구하는 외성인과의 갈등은 나름대로 심각한 편이다.

만약 중국 공산당이 무너졌을 때 외성인들이 지지하는 국민당이 중국 대륙을 되찾는다면 그들이 추구하는 하나의 중국 원칙에 의해 신장 위구르 자치구가 독립에 실패한 채 그대로 중국 대륙을 되찾은 중화민국의 영토가 되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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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혀 근거없는 이러한 유사역사학적 주장으로 과거 장제스(...)가 위구르인들을 대상으로 했던 억지 주장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2] 해당 주장은 원래 중국 사서에 있는 주장도 아니고 중국 공산당이 했던 주장이 아니라 국공내전 시기 장제스가 서왕모 관련 신화를 바탕으로 했던 주장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에는 국내 친중공 성향의 사람들 중에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이런 주장을 그대로 따라하는 사람들이 있다. [3] 그나마도 후한은 대부분의 기간을 위구르의 동남부 극히 일부 지역만을 양주(凉州)의 일부로 지배한것 뿐이었다. 고고학적 연구 결과를 대조한 결과 위구르 지역 대부분은 당시 아프가니스탄을 중심으로 한 쿠샨 왕조의 영향력이 더 강했다. [4] 당나라 치세 초반의 서역원정군은 대부분 돌궐 동맹군에 의해 이루어졌었다. [5] 한나라는 타림 분지 일대를 흉노의 오른팔, 고조선을 흉노의 왼팔로 취급하였다. [6] 애초에 신장이라는 말부터가 새로운 영토라는 뜻이다. 인지부조화라고 볼 수 있다. [7] 정황상 '무역 장벽'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8] 야율대석이 중국에서 가돈으로 피신할 당시 그를 따라온 인원은 80~200여 명 정도였다. 이 중 한족이 얼마나 되었을지는 미지수이다. [9] 오히려 불교는 상술된 것처럼 오늘날의 동투르키스탄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중국으로 유입된 종교이기도 하다. [10] 대표적인 예로 호탄은 중국의 뽕나무와 누에, 비단 제조술을 중동으로 전파하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인도산 면을 중국으로 전파하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였다. 호탄과 근접했던 고창회골이 중국으로 주로 수출하는 품목 중 하나가 자국에서 생산된 목면이었다. [11] 1978년 이전에는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중화민족의 단일화 정책에 따라 한족들과 같은 시간을 보내거나 통혼 혼혈을 장려하였으며, 이슬람에서 금기시하는 돼지고기나 술을 먹는 것을 강요받기도 하였다. 한 편 후술할 신장 재교육 캠프가 들어서면서 강압적인 동화 정책이 과거로 회귀하였다. [12] 장제스는 중국 고대 신화와 근대 민족주의를 자기 멋대로 결합시켜서 "위구르족이 본래 중국 민족의 지파 즉 황제의 후손이었으나 지리와 역사라는 불행한 사건으로 분기되었을 뿐"이라는 오늘날 상식 기준으로 이해하기 힘든 주장을 피력하였다. [13]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같은 걸프 아랍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에서 외교 차원에서 중국의 위구르 인권 탄압 관련해서 별다른 싫은 소리를 안하거나 위구르인들의 분리독립 운동 관련하여 별 다른 지지를 보이지 않는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14] 인도 다람살라에 위치한 티베트 망명정부를 벤치마킹하여 해외에 망명한 위구르인들도 독일 뮌헨 세계 위구르 회의라는 단체를 조직하였다. 중국은 해당 단체가 가짜 뉴스를 전파하는 테러 단체라고 주장하면서 교섭 자체를 거부하는 중이다. [15] 미국과 같은 역차별 논란이 많은 인종별 쿼터제가 아니라, 시험에서 5점, 10점, 20점 가산점을 주는 방식이다. [16] 소련에서는 레닌주의에 입각하여 소수민족의 자치를 보장하는 정책을 시행했으며, 동시에 제3세계에 사회주의를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었는데, 이웃 국가에서 대놓고 소수민족에게 1자녀 정책을 강요하면 이런 소련의 입장도 어색해질 수 밖에 없었다. [17] 스탈린 사후 수정주의 논쟁이 벌어지면서 중소관계가 악화되었고 이후 중소 국경 분쟁도 일어났었다. [18] 비교하자면 중국은 티베트 자치구에 상당수의 중국인들을 이주시켰고 티베트인들 중 중국인들과 결혼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면서 티베트인 민족 정체성이 점차 희석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경우 한족들을 대량 이주시켰음에도 한족과 위구르인들이 서로 결혼을 안 하고 위구르인 민족 정체성이 별로 희석되지 않다보니 중국 측에서는 제 2의 홍콩이 되는 것 아닌가 위기를 느끼는 것 [19] 한때는 중국에 정착한 기독교인과 유대인도 회회인(回回人)이라 칭하였는데, 이를테면 기독교인은 십자회회(十字回回), 유대인은 남모회회(藍帽回回) 등등 회회 앞에 특징을 붙여 칭했다. [20] 대만은 종교의 자유가 제대로 보장되고 있으며 이것이 중국 대륙마냥 도로 퇴보한 게 아니라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