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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신의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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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
두산 베어스 등번호 54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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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동 (1984~1984.7.1.) |
→ |
김영신 (1985~1986) |
→ | 영구 결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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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31230><colcolor=#c8ab37> 두산 베어스 No.54 | |
김영신 金榮伸 | Kim Young-Shin |
|
출생 | 1961년 11월 9일 |
강원도 원주시(현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 |
사망 | 1986년 8월 15일 (향년 24세) |
경기도
고양군
송포면 법곶3리 (현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송포동)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단계초등학교 (졸업) 원주중학교 (졸업) 상문고등학교 (졸업)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학 / 학사) |
포지션 | 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 입단 | 1985년 1차 지명 ( OB) |
소속팀 | OB 베어스 (1985~1986) |
병역 | 예술체육요원[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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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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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시절 선동열(좌측)과 함께 찍은 사진. |
베어스의 유망주 포수였으나, 성적 부진과 저조한 출전 등의 압박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친 비운의 선수이다.
2. 선수 경력
아마추어 선수 시절 1984 LA 올림픽 야구 국가대표팀 포수로 출전하는 등 유망주로 손꼽혔다. 상문고와 동국대를 거쳐, 1985년 OB 베어스에 1차 지명으로 입단하였다. 하지만 김경문과 조범현 등 주전 포수들과의 경쟁에서[4] 밀리면서 출전 기회가 줄어들었다.3. 사망
1986년 8월 15일 경기도 고양군 송포면 법곶3리[5] 앞의 한강 하류에서 익사체가 떠내려 오는 것을 부근 경계 초소의 초병이 발견하였다. 경찰 수사 결과 익사체의 신원은 김영신으로 판명되었고 성적 부진을 비관하여 스스로 강에 몸을 던진 자살로 결론을 내렸다. OB 베어스 측은 김영신의 영결식을 치르고 그를 애도하는 의미에서 김영신의 등번호 54번을 KBO 영구 결번 처리하였는데, 이는 앞서 언급했듯이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KBO 영구 결번 사례다. 최고의 유망주였으나, 주전 경쟁에 밀리며 자신의 성적과 신세를 비관해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선수.[6]김영신의 사망 소식을 알리는 신문 기사.
만약 당시에 트레이드가 활성화됐다면 OB가 아닌 다른 팀에서 기회를 잡을 수 있었을텐데[7] 불행하게도 당시에는 트레이드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인 시절이었고[8] 선수가 스스로 트레이드를 요청하거나 선수의 진로를 열어주기 위한 트레이드가 이루어진 사례도 매우 드물었다.[9] 결국 김영신의 비극적인 죽음은 리그 내 선수 트레이드 활성화로 선수 활로 모색의 필요성을 일깨워 준 사건으로 꼽힌다.
4.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 ||||||||||||||||
연도 | 팀명 | 경기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볼넷 | 사구 | 삼진 | 출루율 | 장타율 | OPS |
1985 | OB | 13 | .190 | 4 | 0 | 0 | 0 | 2 | 1 | 0 | 1 | 0 | 4 | .227 | .190 | .418 |
1986 | 9 | .091 | 1 | 0 | 0 | 0 | 0 | 0 | 0 | 0 | 0 | 1 | .091 | .091 | .182 | |
KBO 통산 (2시즌) |
22 | .156 | 5 | 0 | 0 | 0 | 2 | 1 | 0 | 1 | 0 | 5 | .182 | .156 | .338 |
5. 여담
- 선수 시절 팀 선배인 투수 박상열[10]과 얽힌 에피소드가 있는데, 1985년 시즌 중반 삼성 라이온즈와의 대구 원정 경기 후 박상열이 아들을 얻은 기념이라며 숙소인 수성관광호텔에서 동료들끼리 한 잔 하다가 술이 다 떨어지자 근처의 수성못 포장마차에서 2차까지 치렀다. 술자리를 끝내고서는 김영신이 박상열과 잔뜩 취해서 숙소로 돌아가던 중에 박상열이 수성못에서 수영 내기를 하자고 제의했고, 김영신이 수영 못한다고 하자 박상열은 "내가 해병대 출신이다. 물에 빠지면 건져줄게"[11]라는 통에 결국 김영신은 박상열과 수성못에 뛰어들었지만 김영신은 절반도 못 가 돌아왔다. 그런데 물에 들어간 지 한참이 되었는데도 박상열이 나올 생각을 않자 김영신은 큰일났다 싶어 숙소로 뛰어가 김성근 감독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고 선수단은 발칵 뒤집혀 밤새도록 수성못 주변에서 박상열을 애타게 찾았지만 대답 없는 메아리일 뿐이었다. 동이 틀 무렵 더 이상 안되겠다 싶어 경찰에 신고하려던 차에 자기 방이 아닌 계형철의 방 침대 밑에 곯아떨어져 있던 박상열이 발견되었고,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김성근이 박상열을 2군으로 내려버리면서 박상열 수성못 익사사건(?)은 일단락 되었다.[12] 그리고 이듬해 김영신은... 기사
- 2013년 9월 23일 루리웹에 자신의 넷째 삼촌이 김영신 선수라는 인증글이 올라왔는데, 사인볼이나 기념사진 등 야구박물관에 전시해도 될 엄청난 물건들이 주루룩 튀어나왔다.[13]
- KBO 리그 1호 영구 결번의 주인공이어서 영구 결번 지정자가 늘어나거나 영구 결번이 거론되는 선수가 나올 때 언론에 그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6. 관련 문서
[1]
1983년 아시아야구선수권 대회 우승
#
[2]
現
두산 베어스
[3]
준영구결번 대우까지 포함하면 롯데 자이언츠 소속이었던 NO.20
임수혁도 있긴 하다.
[4]
"포수사관학교"라고 불리는 OB-두산 베어스는 프랜차이즈 역사를 통틀어 쟁쟁한 포수가 많이 들어왔고 그의 여파로 경쟁에서 밀리는 선수도 나타났다. 김경문과 조범현의 뒤에는 정종현이라는 3번째 포수가 있었지만 두 사람의 벽을 넘기란 힘들었고 1990년대에 와서는
김태형과
이도형이 있었으며 그 뒤로는
최기문,
진갑용,
홍성흔 등이 들어왔다. 결국 최기문과 진갑용이 홍성흔에게 밀리면서 각각 롯데와 삼성으로 트레이드 된 이후에 빛을 보게 됐다. 또
양의지가 갑작스럽게 뜨는 바람에 백업으로 있던
최승환과
용덕한이 밀려나가 트레이드가 되기도 했다.
[5]
현
고양시
일산서구
법곳동
[6]
비슷한 결번 사례로, 2010년 2월 5일 미야코지마 스프링캠프 숙소에서 추락사한
오릭스 버팔로즈의 오제 히로유키(향년 25세)의 41번 역시 오제를 애도하는 의미에서 2019년까지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김영신과 달리 오제는 입단 후 바로 1군 자리를 꿰차며 주전으로 자리잡아가던 중이었고, 유서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살일 가능성은 낮다.
[7]
예나 지금이나 제대로 된 포수 자원은 정말 구하기 어려워서 포수 영입에 있어서 각 구단들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경우가 많다. 하물며 선수층이 지극히 얇았던 1980년대 중반이었기에 포수 영입의 필요성은 더 강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프로야구 출범 초창기로 2군 리그마저 없을 정도로 리그 저변이 취약했고, 트레이드에 대한 인식이 '팀에서 입지가 좁아져 쫓겨난다'는 부정적이었던 시절이기에 트레이드의 'ㅌ'자도 꺼내기 어려웠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8]
당시 트레이드는 구단이 선수에게 보복적으로 하는 것이 많았고 선수 입장에서는 내 고향, 내 직장에서 버림 받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특히 당시 트레이드 대상이 되면 이는 팀에 쓸모없는 존재, 다시 말해 '퇴물이라서 정리한다.'와 비슷한 의미였다. 그 예로서 유명한
최동원-
김시진,
김용철-
장효조 트레이드. 그리고 1980년대에는 연고의식이 강해서 내 고향 선수를 다른 팀으로 보내는 것은 금기나 다름없던 시절이었다. 이 인식이 사라진 것은 김영신이 세상을 떠나고 한참 뒤인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부터였다.
[9]
KBO 리그 1호 트레이드 당사자인
서정환의 경우가 선수가 요청해 트레이드된 대표적인 사례지만 이런 사례가 몇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할 정도로 드물었다.
[10]
전
고양 원더스,
한화 이글스 코치. 김성근 감독의 최측근으로 유명하다.
[11]
사실 박상열은 해병대가 아닌 육군 경리단에서 복무했다.
[12]
그 와중에 외야수
윤동균은 최주억 수석코치에게 "대구에 사는 친척을 만나고 오겠다"며 대충 둘러대고 무단 외출을 했는데 이 사실도 들통나는 바람에 무려 110만원의 벌금을(...) 물어야 했다. 이 당시 110만원은 현재 가격으로 치면 대략 400만원 이상 정도의 거금이었다. 사실 윤동균 정도면 팀내 최고참이라서 어느 정도 넘어갈 수 있었지만 박상열 사건 이후 분위기가 워낙 살벌해서 최주억 코치도 해명을 못할 상황이었다고 한다.
[13]
기증하라는 댓글이 많지만, 작성자가 댓글로 김영신의 큰형인 아버지가 소중하게 간직하는 거라 힘들 거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