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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로드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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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로드맨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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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미국 스포츠 사이트 the Athletic에서 NBA 출범 75주년을 기념하여 농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75명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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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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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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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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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로드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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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제아 토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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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chard Hamilton)
빌 레임비어
(Bill Laimbe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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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로드맨 명예의 전당.jpg
데니스 로드먼
헌액 연도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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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로드맨디트.jpg
<colbgcolor=#1d428a>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No. 10
<colcolor=#fff> 데니스 키스 로드맨
Dennis Keith Rodman
출생 1961년 5월 13일 ([age(1961-05-13)]세)
뉴저지 주 트렌턴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사우스이스턴 오클라호마 주립대학교
신장 201cm (6' 7")
체중 103kg (228 lbs)
윙스팬 221cm (7' 3")
포지션 파워 포워드 / 스몰 포워드
드래프트 1986 NBA 드래프트 2라운드 27순위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지명
소속팀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1986~1993)
샌안토니오 스퍼스 (1993~1995)
시카고 불스 (1995~1998)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1999)
댈러스 매버릭스 (2000)
토르판 포야트 (2005)[1]
등번호 10번 - 디트로이트 / 샌안토니오
91번 - 시카고
73번 - 레이커스
70번 - 댈러스
SNS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일생
2.1. 데뷔 이전2.2.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시절2.3. 샌안토니오 스퍼스 시절2.4. 시카고 불스 시절2.5. 황혼기 그리고 은퇴2.6. 영구 결번 명예의 전당 헌액2.7. 가정사
3. 플레이 스타일
3.1. 멘탈과 심리전
4. 전술적 가치
4.1. ' DET 로드맨'과 ' CHI 로드맨'의 차이4.2. '불스 로드맨'에 대한 보강
5. 수상 내역6. 말말말7. 기행8. 북한 관련 에피소드
8.1. 북미정상회담 관련 인터뷰 출연
9. 정치 성향10. 저서11.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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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nss-sports-rodman-6.jpg
"I didn't play the game for the money, I didn't play the game to be famous. What you see here is just more the illusion that I love to just be an individual that is very colorful."
"저는 돈 때문에 뛰지 않았고, 유명해지려고 뛰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보시는 건 단지 환상, 즉 제가 매우 컬러풀한 개인이 되는 것을 좋아했다는 환상입니다."
2011년 8월 13일 명예의 전당 헌액 연설 中
"내가 누구냐고? 무명 대학 나온 무명 선수다."
1986년 드래프트. 소개를 해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미국의 농구인. 별명은 'The Worm'.

201cm의 파워 포워드. 신체능력이 뛰어난 거구들이 판치는 NBA의 골밑에서 리바운드를 장악했다.[2] 91-92시즌부터 97-98시즌까지 7년 연속 리바운드왕을 차지했고, 시즌 평균 리바운드 18.7[3]을 찍은 적이 있다는 걸로 이미 설명 끝. 시즌 평균 리바운드 15이상인 시즌만 6번이다.

수비도 매우 강해서 올해의 수비선수상 2회(90, 91), 디펜시브 퍼스트 팀 7회(89~93, 95~96), 세컨드 팀 1회(94)에 선정될 정도였다. 출처 이노우에 타케히코가 지은 농구만화 슬램덩크의 주인공 강백호의 모티브가 됐으며[4], 공을 향해 몸을 던지는 허슬, 악착같은 리바운드, 지렁이처럼 달라붙는 끈적한 수비로 스코어러나 하이플라이어만 농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줬다.

파일:DennisRodman_01.jpg
로드맨이 어떤 선수인지 보여주는 사진. 리바운드 20개도 대단한데 공격 리바운드만 9개다.

2. 일생

2.1. 데뷔 이전

1961년 뉴저지 주 트렌튼에서 공군 조종사이던 아버지 필랜더 로드맨과 어머니 셜리 슬하에서 20여명의 자녀들 중 첫째로 태어났다.

데니스가 5살 때 그의 아버지는 가족을 버렸고, 어머니는 자식들을 키우고자 온갖 일을 도맡아 했다. 댈러스 교외의 오크 클리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로드맨은 덩치들에게 두들겨 맞기 일쑤인 약하고 왜소한 아이였다고 한다. 본인 말에 따르면 어머니한테 집에서 쫓겨난 적이 많다고. 어머니는 버릇을 고치려고 자물쇠까지 바꿔버려 어쩔 수 없이 친구집 뒷마당에 있는 쇼파 위에서 몇 밤을 보냈다. 지기 싫었던 어린 로드맨은 세차 알바를 하거나 빈병을 주워 버텼다. 그렇다고 로드맨 말처럼 풍찬노숙 어머니가 버린 건 결코 아니었다. 고등학교까지 학비 제대로 대고 학교도 계속 다녔다. 이혼도 안해주는 남편한테 제대로 양육비도 못받고 외벌이로 고생한 어머니가 많이 억울했을 듯.

ESPN 다큐멘터리 30 for 30에서 로드맨은 어린 시절 허구헌날 아버지가 어머니를 두들겨팼기 때문에 이것에 무감각해질 정도였다고 한다. 어머니를 패다가 마당 위로 질질 끌고 갈 때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도 로드맨의 추억 보정. 아버지는 5살 이후 집에 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필리핀에서 왕 노릇 하느라. 어머니가 로드맨과 남매들을 열심히 키운 것과 별개로 잘못하면 때리면서 훈육을 했다고 한다. 로드맨은 자라면서부터 애정결핍 증세를 보였는데 4살 때 어린이집에 맡길 때 엄마 곁을 떠나길 거부할 정도였으며, 여자들이 많은 가정 환경에서 자신보다 농구를 잘하던 친누나들에게 위축되어 살았다고 한다.[5]

로드맨은 사우스 오크 클리프 고등학교로 입학할 때만 해도 키가 겨우 168cm였다.[6] 길거리 농구를 하는 게 그의 낙이었고 매일 10시간 가까이 농구장에서 살았다. 고교 입학 뒤에도 농구를 좀하는 평범한 일반인 학생일 뿐이었다. 졸업 후 잡다한 알바를 전전했으며 공항에서 아르바이트 하던 도중에 기프트숍에서 시계를 50개 슬쩍한 게 걸려 유치장 신세를 진 적이 있긴 해도, 불우한 흑인 소년들이 흔히 저지를 수 있는 강력 범죄는 절대 손대지 않았다. 친구들한테 나눠줬던 시계를 모두 회수해서 풀려난다.( NBA.com의 로드맨 바이오 페이지)

1983년 고등학교 졸업 후 로드맨은 갈 곳이 없었고, 댈러스의 공항에서 야간 청소부로 일해야만 했다. 그러나 반전이 찾아왔으니 졸업 이후 키가 201cm까지 자란 것. 게인스빌에 있는 쿠크 카운티 칼리지(현 노스 센트럴 텍사스 칼리지)의 스카우터가 집에 방문했고 로드맨에게 '전액 장학금+기숙사+식비'까지 제공하는 조건을 준다. 여기까진 흔히 있는 NBA 스타의 불행한 인생사.( 관련 비화)

쿠크 카운티 칼리지에 입학한 후 14경기 평균 17.3득점, 13.3 리바운드라는 괴물같은 활약이었지만 학업성적도 따라줘야 하는 미국 학원 스포츠 풍토 때문에 성적 불량으로 팀에서 잘린다. 집에 돌아와서는 엄마한테 용돈을 타서 밤새 놀고 늦게까지 자는 백수가 됐다. 속이 시커멓게 된 모친은 출근을 하면서 '직장을 구해. 못구할 거 같으면 다시 나가.'라고 모질게 말했다고.

다행히 2개월 만에 사우스웨스턴 오클라호마 주립대학교에서 쿠크 카운티 칼리지와 같은 조건으로 스카우트를 제의한다. 미국 대학 농구의 주류인 NCAA는 아니었다. 하지만 하위 NAIA리그에서 잭 헤든 감독에게 가르침을 더 받으며 리바운드 1위와 .637의 필드골 성공률을 바탕삼아 1984-85 및 1985-86 시즌 두 차례 NAIA 전국대회에 연속으로 진출시켰고, 특히 1986년 대회에선 4강까지 갔다. 그런고로 올 아메리칸 팀에 연속으로 뽑힐 정도로 눈에 띄는 활약이었다. 덕분에 비 NCAA 출신으로 NBA 드래프트에 성공하는 입지전적인 인물이 된다.

고등학교 졸업 후 청소부로 일해야 했던 탓에 그는 1학년 시즌 당시 이미 웬만한 대학 졸업생들 나이인 22세였고, 3년 후 86년 드래프트에 나설 당시 25세였다. 이는 그보다 5년 먼저 NBA에 뛰어든 아이제아 토마스와 같은 나이였다. 굉장히 늦은 나이에 농구를 시작하고, 평생 화려함과 거리가 있었던 만큼 젊은 로드맨은 자신의 능력에 비해 확신이 없는 경우가 많았고, 그만큼 더 몸이 부서져라 뛰었다. 디트로이트 프리 프레스의 한 기자는 이를 두고 로드맨이 마치 "무언가에서 탈출하려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농구를 했다"고 표현할 정도.

2.2.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시절

1986년 NBA 드래프트 2라운드 27순위라는 낮은 픽으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 뽑혔다. 이때 이미 25세였다.[7]

당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는 배드 보이즈로 유명했다. 늘 보스턴 셀틱스의 그늘에 가려 있긴 했지만, PG 아이제아 토마스, SG 조 듀마스, SF 애드리안 댄틀리, PF 시드니 그린, C 빌 레임비어, 키 식스맨 SG 비니 존슨, PF 릭 마혼 등 충분히 우승 가능권이었다. 로드맨은 2년차 때 댄틀리가 부상으로 빠질 때까진 보결 신세였다. 로드맨이 스타팅으로 나온 첫 24경기에서 20승을 하면서 피스톤즈의 주전 자리를 굳히게 된다. 하지만 아직 식스맨 정도였다.

로드맨은 수비와 리바운드에 집중했고 몸을 던지는 허슬 플레이를 마다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피스톤스 감독 척 데일리가 그를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야생마에는 안장을 채우는 게 아니다 (You don't put a saddle on a mustang)'라며 로드맨이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밀어 주기도 했다.[8] 로드맨 또한 데일리를 '신(GOD)'이라고 부르며 절대적인 존경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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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투페이스로 로드맨을 격려하는 릭 마혼(44번)

이 시기 로드맨은 주전 PF였던 릭 마혼에게 배드 보이즈가 만든 모든 어둠의 기술들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인다. 릭 마혼은 그야말로 1970~80년대에 있던 전형적인 싸움대장형 파워 포워드로, 빌 레임비어와 함께 온갖 어둠의 기술들의 장인이었다. 스크린 장인에 여차하면 드잡이를 시전하는 Goon 역할에 충실한 선수였다. 릭 마혼은 1989년 세븐티식서스로 떠났지만 배드 보이즈들을 얼마나 잘 가르쳤던지, 자신조차 친정팀 피스톤스를 만나면 크게 혼이 났을 정도. 1990년 시즌 막판 4월 19일 경기에서 피스톤스와 세븐티식서스가 만났을 때였다. 마혼이 토마스한테 주먹으로 머리통을 얻어맞고 어이없다는 듯 웃는 모습이 백미. [9]

조폭두목같은 릭 마혼을 필두로 한 무슨일을 벌일지 모르는 미치광이 같은 빌 레임비어[10], 재빠르고 약삭빠르며 트래시 토크의 달인인 아이제아 토마스에게 은퇴 후에도 이를 가는 NBA 스타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게 마이클 조던 매직 존슨. 특히 칼을 갈던 칼 말론은 1991년 12월 4일 경기에서 골밑으로 파고들던 토마스를 오른쪽 팔꿈치로 가격해 40바늘을 꼬매게 만들었다. 말론은 벌금 만 달러에 한 게임 출전 정지를 받았다. 다른 스타들과의 불편한 관계 때문에 아이제아 토마스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드림팀에서 배제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11]

어쨌든 로드맨이 가세한 피스톤즈는 승승장구하며 1989년 1990년 동부 컨퍼런스 1위를 달성하고,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아직은 원맨팀 같던 시카고를 무자비하게 조지며 2년 연속으로 NBA 우승을 달성한다.

당시 피스톤즈의 성공 스토리 중심에는 로드맨의 성장과 더불어 마크 어과이어란 남자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1988-89시즌 당시 피스톤즈는 전 시즌에 레이커스와 파이널에서 명승부, 토마스의 어마어마한 활약 등으로 기대치가 커져 있었고, 2월까지 33승 12패로 괜찮은 성적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팀 케미스트리에서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에이드리안 댄틀리의 존재였다. 댄틀리는 1980년대 NBA최강의 득점기계 중 하나인 스몰포워드로서, 득점왕 2회 출신이었지만, 팀플레이를 중시하는 디트로이트로 오면서 공격롤과 출전시간이 눈에 띄게 줄어든 상태였다.[12] 노장 반열에 들었지만 여전히 위력적이던 댄틀리는 아이제아 토마스 위주로 돌아가는 공격시스템, 그리고 3년차 스몰포워드 데니스 로드맨이 자신의 출전시간을 서서히 갉아먹는 것을 매우 불쾌하게 여겼으며, 자신의 롤이 줄어든 것의 배후에 토마스가 있다고 의심했다. 이 때문에 팀 케미스트리가 떨어지며 1989년 1월에 팀은 8승 6패에 그치는 부진을 겪었다. 라커룸 내 갈등과 더불어 감독 척 데일리와 GM 잭 맥클로우스키와 갈등이 점점 심해지던 댄틀리는 결국 사고를 치고 마는데, 경기 도중 데일리가 로드맨과의 교체를 지시했으나 교체를 거부하고 감독에게 소리를 지르며 코트 위에 계속 있었던 것. 결국 로드맨이 눈치를 보다 다시 벤치로 갈 수 밖에 없었고, 데일리와 댄틀리는 한바탕 소리를 지르며 격하게 싸운 뒤 결국 댄틀리가 마크 어과이어와 트레이드되는 결말을 맞게 된다.[13]

1981년에 토마스보다 앞서 전체 1순위로 뽑힌 어과이어는 합류 당시 평판이 안 좋았다. 어과이어는 뛰어난 실력과 별개로 팀케미스트리를 망치는 이기적인 선수란 평을 듣고 있었으나, 그는 어린 시절부터 친구 사이였던 아이제아 토마스 덕분에 팀에 잘 녹아들었다. 또한 댄틀리와 달리 줄어든 롤에 대한 불만을 전혀 보이지 않으며 알토란 같은 득점지원을 해주었고, 팀은 30승 7패로 승률이 상승하며 플레이오프에서도 시카고 불스에게 당한 2패를 제외하면 전승을 하는 무서운 기세로 첫 우승을 차지한다. 로드맨은 이때 식스맨으로 평균 27분 출장했음에도 생애 처음으로 디펜시브 퍼스트팀에 선정된다.

어과이어는 이듬해에도 큰 역할을 한다. 1989년 오프시즌에 디펜딩 피스톤즈는 큰 타격을 입는데 이때 진행된 NBA 확장팀 드래프트에서 미네소타 팀버울브스가 팀 골밑의 기둥인 릭 마혼을 선택한 것. 더욱 잔인한 것은 한창 우승 퍼레이드가 이뤄지고 있는 도중 이 소식이 전해졌다는 것. 마혼은 퍼레이드 후 기념 행사에서 맥클로우스키에게 "저 분 덕분에 체중조절 성공했어요!"라면서 하이파이브를 하는데, 이 때 이미 그는 피스톤즈 선수가 아니었고, 행사 직후에 짐을 싸야했다. 자신이 즐겁게 농구하고, 동료들과 친하던 환경에서 팽당한 것이 충격적이었는지 마혼은 위에 언급된 30 for 30 다큐멘터리에서 25년 전 일임에도 불구하고 "인생 최고의 순간과 최악의 순간이었다"면서 눈물을 흘릴 정도.

어쨌거나 마혼이 빠진 피스톤즈는 그 빈자리를 파워포워드 존 샐리, 센터 제임스 에드워즈 등이 메웠음에도 골밑이 크게 약화되어 초반에 헤메게 된다. 피스톤즈는 좀처럼 페이스를 찾지 못하고 창단 2년차 팀이자 18승팀인 마이애미에게 패하는가 하면, 30승팀인 클리퍼스에게 패한 걸 시작으로 3연패를 당하기까지 하는 등 어려움을 겪는다. 이런 와중에 어과이어는 실로 대인배스러운 결단을 내리게 되는데, 데일리를 찾아가 자신의 주전 자리를 로드맨에게 넘기라고 제안을 한 것. 이에 대해 로드맨은 "그가 처음 날 찾아왔을때 충격을 받았죠. 식스맨 역할에 익숙해져있었으니까요"라고 회고했다.[14][15]

로드맨은 1990년 1월 23일, 시카고 불스와의 원정경기부터 피스톤즈의 풀타임 주전 스몰 포워드로 출전하게 된다.[16] 이 시즌에 로드맨은 평균 29분을 출전하며 8.8점 9.7리바운드 야투율 58.1%를 기록하지만 무엇보다 무서운 수비력으로 올해의 수비수상을 처음으로 수상하게 된다. 로드맨이 주전으로 올라가기 전 피스톤즈는 26승 14패, 승률 65%에 그쳤으나, 로드맨이 주전으로 올라온 이후 33승 9패 78.6%을 기록한다.

디트로이트 시절 당시 로드맨은 스몰 포워드로서 제임스 워디, 래리 버드 등 리그 내 내로라하는 슈퍼스타 스몰 포워드들을 막았다. 이후 떠오르는 불스 왕조를 상대하며 스카티 피펜을 주로 마크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피펜과는 악연이 있다.

1991년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3연패를 노리는 피스톤스와 불스가 맞붙었을 때 로드맨이 피펜을 여러차례 가격한다. 슛동작 후 착지할 때 밀어 크게 다칠 뻔도 했다. 후에 로드맨이 불스에 입단하기로 결정한 뒤 들은 첫번째 말이 '저기 부엌에 가서 스코티에게 사과하게'였다.[17]

1992년 로드맨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척 데일리가 해임되고 황금기의 멤버들이 트레이드되면서 피스톤스의 성적은 갈수록 떨어지고 1993년에는 플레이오프조차 진출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 시기 로드맨은 정신적으로 방황하기 시작하는데, 자살까지 생각한 적도 있다고 한다.

곧 그는 고향에서 멀지 않은 샌안토니오 스퍼스로 트레이드된다.

2.3. 샌안토니오 스퍼스 시절

당시 스퍼스는 에이버리 존슨, 숀 엘리엇, 데이비드 로빈슨 등으로 구성된 강팀이었으며 로드맨이 가세하여 정규 시즌 1위 등을 하는 등 좋은 성적을 올린다. 그러나 1995년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하킴 올라주원 휴스턴 로키츠에게 털려서 파이널 진출은 실패한다.

익히 알려진 바대로 샌안토니오에서 로드맨은 감독 및 타 선수들과의 불화로 엄청나게 잡음이 많았다. 샌안토니오에서는 데니스 로드맨이 규율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팀 케미스트리를 해치고 있다고 비판했고 로드맨은 적어도 자신은 게임을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구단이 별 쓰잘데기 없는 거에만 태클 걸고, 감독 밥 힐은 쪼다스러운 작전만 남발하고 있으며 데이비드 로빈슨은 팀을 이끌고 나갈 리더십이 없다고 깠다. 이러한 갈등이 표면화된건 1995년 컨퍼런스 파이널에서의 패배 이후였다.

1994년부터 단장(General Manager)으로 팀의 운영에 참여하게 된 그렉 포포비치는 팀의 문화를 쇄신하기 위해 로드맨을 헐값에 덤핑으로 팔아치운다. 당시 로드맨은 오토바이를 타다가 어깨를 다친 것 때문에 포포비치와 충돌했으며, 이로 인해 그가 로드맨의 계약을 갱신해주길 꺼렸다고 한다.[18]

당시 로드맨의 트레이드 상대는 시카고 불스의 주전 센터인 윌 퍼듀였는데, 윌 퍼듀는 밴더빌트대 출신의 평범한 백인센터였고(득점력은 좋지 않았지만, 리바운드 능력은 나쁘지 않았다. 최소한 이후 불스의 주전 센터였던 룩 롱리보다는 득점과 리바운드 모두 나은 선수였다.) 샌안토니오도 로드맨 트레이드를 통해 전력 강화를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2.4. 시카고 불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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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J SHOOTS, RODZILLA REBOUNDS

디트로이트 시절 불스를 꺾기 위해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연구했던 경험 덕에 그는 불스에 쉽게 적응했고[19], 마이클 조던, 스카티 피펜과 함께 1995-96 시즌부터 NBA 3연패를 이루어내며 '역대 최강팀'중 하나를 논하는 자리에 항상 거론되는 라인업인 ' 슈퍼맨(조던) / 배트맨(피펜) / 로드맨'의 일원이 된다. 그 3연패 기간 파이널 상대팀인 1995-96시즌 시애틀 슈퍼소닉스, 유타 재즈 모두 로드맨의 포지션인 파워 포워드가 팀의 주축선수였는데 세번의 파이널에서 숀 켐프, 칼 말론을 매우 효과적으로 수비했다. 이 중 1995-96 시즌은 82경기중 72승 10패를 기록하는 압도적인 성적을 올리기도 했다.

1995파이널 5차전에서 스퍼스 감독 밥 힐은 로드맨이 팀연습에 무단으로 지각한 벌로 그를 주전 출장시키지 않았다. 당시 두 팀은 시리즈 전적 2대2로 팽팽히 맞서고 있었는데, 스퍼스가 홈에서 열린 5차전을 20점이 넘는 점수차로 패배하면서 6차전 원정까지 패배. 시리즈를 그대로 내주게 된다. 팀 성적(플옵탈락) 때문에 로드맨과 스퍼스의 갈등이 심해진게 아니라, 그전부터 문제가 심했다는 증거라고 봐야 할 것이다. 또 2011년에 로드맨이 데이빗 알드리지와 한 인터뷰에서는 로빈슨과 자신이 "자주 충돌했다(bumped heads a lot)"고 말하면서, 사이가 최악이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은 로빈슨이 "하킴 올라주원이나 샤킬 오닐처럼 더 공격적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서 아쉬움을 표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던 로빈슨은 로드맨에게 종종 "하나님에 대해 얘기하자"면서 "이 도시(샌안토니오)는 교회 가길 좋아하는 그런 사람들이야"라고 언급했는데, 로드맨은 "난 그딴 식으로 살 순 없어. 난 농구하러 왔지, 사람들이 날 좋아하게 만들려고 온 게 아니라고"라고 답했다.

그에 비해 시카고에서는 팬들의 우려와는 다르게 로드맨은 '생각보다는' 팀내에서 사고를 치지 않았다. 물론 연습에 지각하는 등 사소한 문제는 있었지만, 당시 불스는 조던의 보스 기질이 대단했기 때문에 로드맨은 아예 처음부터 조던에게 대들 생각 자체가 없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아래와 같다.
1. (자신의 생각에) 소프트한 로빈슨과 밥 힐보다 황제 리더십의 조던과 냉철한 승부사 필 잭슨을 훨씬 더 존중했다.
2. 독실한 신자로 사생활에 사사건건 태클을 건 로빈슨과 스퍼스 프런트와 달리 불스는 그가 농구만 잘하면 별 간섭을 하지 않았다.
3. 팀 성적 자체도 불스 시절이 더 좋았다.
4. 로드맨 자신도 실제로는 가정사 등으로 인해 부서지기 쉬운 성격이었으며, 이 때문에 척 데일리처럼 감싸주고 의지가 되는 형님이든가, 조던처럼 일만 잘하면 사적으론 안 건드리는 쿨가이형 상사 밑에서 일하는 게 부담이 훨씬 덜했다.[20]

조던/피펜/로드맨과 필 잭슨은 코트 바깥의 사생활은 터치하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당시 NBA에서 평균 나이가 가장 많은 팀중 하나이던 불스는 베테랑들이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하고 각자 알아서 하는 분위기였으며, 성격이 좋기로 유명한 존 샐리[21]나 조던과 예전부터 친했다는 론 하퍼 정도를 제외하면 서로간의 친목 분위기는 별로 없었다. 심지어 조던과 피펜도 서로를 굉장히 존중하는 사이었지만, 르브론과 웨이드처럼 사적으로 크게 친밀한 친구관계는 아니었다. 그러나 사적으로 친하지 않았을 뿐이지 이들간의 갈등이 따로 대두된 적은 없었다. 이는 당시 불스의 팀 캐미 자체가 조던의 강력한 리더십 아래[22]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팀이었기 때문이다.[23] 또한 구단에서도 로드맨의 머리 색으로 빌딩을 치장하는 등, 여러모로 보호 및 지지를 해주었기 때문에 시카고에서 로드맨은 큰 불만없이 선수생활을 잘 했던 편.

친분과는 별개로 코트 위에서는 세 선수가 그야말로 환상의 팀웍을 보여주는 걸 볼 수 있다. 슛 욕심이 전혀 없던 로드맨은 몸을 던져가며 살린 공을 조던/피펜에게 패스하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이때 세 사람의 관계는 "너가 할 거 알아서 하면 나는 상관 안한다"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조던은 열심히 안 하는 선수나 수준이하의 선수는 개갈궜지만, 로드맨은 밤새 클럽에서 술퍼마시고 놀고 여장을 하고 별 미친짓을 하더라도 코트 위에서는 몸을 날려가며 동료들을 살려주는 팀플레이어였으므로 조던이 터치할 이유도 없었다.

로드맨의 싸움을 조던과 피펜이 말린 적도 있다. 대표적으로 샤크와 한판 붙으려는 로드맨을 조던/피펜이 태클걸어서 넘어뜨린 다음 셋이서 웃으면서 일어선 장면이 있다. 경기 연장전 종료 직전에 나온 것으로[24] 지고 있는 레이커스 입장에선 자유투가 약한 로드맨이 잡고 있을때 재빨리 파울작전을 해야했고, 로드맨이 재빨리 작전타임을 부른 것 까진 좋았지만 제롬 커시가 파울하러 그를 가격한 것을 두고 로드맨이 신경질을 낸 것. 여기에 오닐까지 가세해 싸움이 일어나게 된 판이었다.[25] 근데 너무 급하게 말리려는 나머지 로드맨에게 조던과 피펜이 동시에 태클하는 꼴이 되자 본인들 딴에도 상황이 유쾌했는지 웃으며 일어난 것. 이 플레이 이후에 종료 직전에 결국 로드맨이 파울작전의 희생자가 되는데, 집중력을 발휘해 두개 모두 성공하는 멋진 모습을 보여준다.

참고로 로드맨이 은퇴 후 로빈슨과 조던을 평가한 글을 보면, 조던을 훨씬 더 존중했다는 걸 알 수 있다.[26] 또한 자신을 억누르려고만 하는 밥 힐에 비해 척 데일리나 필 잭슨을 높이 평가한 면도 있었다. 예전에 로드맨은 척 데일리 외에는 자신을 통제한 사람이 없다고 평가했다. 데일리는 로드맨에게는 은사였으며 단순히 감독-선수 간의 관계 이상이었다. 실제로 데일리의 딸의 회상에 의하면 데일리에게 로드맨은 마치 자식과 같다고 표현하고 있으며 다큐멘터리 "배드 보이즈"의 영상에서 척 데일리 앞에서는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구는 로드맨을 볼 수가 있다. 데일리만큼은 아니더라도 로드맨과 필 잭슨과의 관계 역시 단순히 비지니스적인 관계가 아니라 은사에 가까웠다. 로드맨은 2011년에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면서 자기를 소개할 인물[27]로 필 잭슨을 선택했다. 이 때 로드맨은 잭슨을 "나를 위해 울어준 유일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잭슨이 그의 아버지와 같은 인물(father figure) 중 하나라며 "존경할 수 있고, 언제든지 전화해서 대화할 수 있는 사람(somebody you can look up to and call any time of day)"이라고 말했다. 또한 자기가 무슨 얼간이 같은 짓을 하더라도 항상 곁에 있어주는 인물 중 하나라면서 감사의 뜻을 표했다.[28]

트래시 토크의 희생양이었다. 로드맨은 예상외로 성격이 많이 여려서 남에게 근거없는 욕은 안하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경기중에 뭐라고 떠들지 않고 경기에만 집중하려 했으나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에게 욕하거나 하면 진심으로 못견뎌하고 참고 참다가 폭발했다.[29] 이렇게 심리적으로 흔들어서 파울누적으로 경기 후반에 뛰지 못하는 약점을 발견한 상대팀들은 로드맨을 경기 후반에 피하려고 엄청난 트래시 토크를 날렸고 이 트래시 토크의 수준은 저 NBA에서도 참지 못할 수준이어서 옆에서 뛰던 동료인 조던, 피펜, 론 하퍼 등이 참다 못해 로드맨 대신 싸우고 응수하던 일도 자주 있었다. 로드맨에게는 여러모로 고마웠을 일.[30]

2.5. 황혼기 그리고 은퇴

1999년 1월, 조던의 2차 은퇴와 피펜의 이적으로 리빌딩을 시작한 시카고는 데니스 로드맨을 방출하기로 결정했다. 동년 1월 19일 에이전트 댄 맨리를 통해 은퇴 후 영화배우가 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21일 본인의 홈페이지를 통해 이를 번복했고, 같은 날 방출되었다.

2월 23일 FA로 풀려 LA 레이커스에 합류했지만 몇 경기 뛰지 못한 채 4월 16일 웨이버 공시되었다. 2000년 2월 3일, 새 구단주 마크 큐반의 부름을 받아 고향 팀 댈러스 매버릭스로 이적했고 38세의 나이에 평균 32분 출장에 14리바운드를 잡아내는 나쁘진 않은 모습이였지만 팀 케미 문제로 갈등을 빚었고 결국 그대로 은퇴한다. 전체적으로 LA에서도 댈러스에서도 데니스 로드맨은 심하게 겉돌면서 베테랑의 리더십은 커녕 팀 멤버의 한 축으로도 있기 버거워 했다. 이에 관해 스티브 내시는 "그는 매버릭스에서 뛰었지만 매버릭스가 되길 거부했다"로 로드맨을 평가했다. 결국 더이상 그를 불러주는 NBA 구단은 없었고, 같은 해 3월 팀에서 웨이버 공시되어 농구화를 벗었다.[31]

2.6. 영구 결번 명예의 전당 헌액

2011년 4월 2일(한국시간),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와 시카고 불스와의 경기에서 하프타임때 영구결번식이 치러졌다. 로드맨은 "내 번호 10번이 영구결번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왜냐면 팬들이 원하는 플레이를 보여줬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감격해했다.

2011년 2월 19일 명예의 전당 후보에 올랐으며, 2011년 4월 4일(미국시간). 드디어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물론 여기서도 기행은 멈추지 않아 청바지에 풀어헤친 흰색 셔츠를 입고 등장했다. 입성 소감에 대해서는 "믿기지 않는다."라고 표현했다. 자신의 행보를 돌이켜 봤을 때, 명전 입성은 힘들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고 한다. 실제로 많은 미국의 농구역사가, 세이버 전문가들, 바스켓볼 레퍼런스의 누적기록을 통해 평가하는 명예의 전당 입성지표에 로드맨의 명전 가능성을 정말로 반반, 50%로 잡았을 정도. 야구 명전에 비해 허들이 낮은 농구 명전임에도 이정도로 로드맨의 명전입성이 아슬아슬했던 건, 눈에 보이는 득점,어시 기록이 없다시피한 수비전문 선수인데다 팀의 리더나 에이스, 득점원과는 거리가 멀었던 선수였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대에 수비로 이름을 날린 벅 윌리엄스, 오티스 소프[32] 등의 파워포워드들이 바늘구멍만한 명전 입상 기회를 가진 반면, 로드맨은 수비 전문 선수로서는 최상급의 수상 이력과 5회의 우승 횟수를 통해 명전에 입성할 수 있었다.[33]

(1)주역으로서 많은 우승을 했다는 점, (2)블루워커임에도 올스타와 All-NBA Team을 챙기기는 했다는 점, (3)전문 분야인 수비에서 DPOY 2회를 비롯해 어마무시한 실적을 거두었다는 점,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빠졌다면 명전 입성이 어렵긴 했을 것이다. 여기서 1번을 거세한 커리어가 마크 이튼[34], 2번을 거세한 커리어가 마이클 쿠퍼[35]인 셈. 로드맨 본인은 자신의 명예의 전당 입성 이유에 대해, "선정 위원들이 나의 과거 부정적인 면을 봤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오, 그래도 꽤 했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자신을 "좋은 득점 능력도 없었고, 훌륭한 운동선수도 아니었지만, 팀의 한 부분을 차지했다"라고 평했다.[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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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의 전당 헌액 연설을 하는 눈시울이 붉어진 데니스 로드맨. 옆에 있는 사람은 필 잭슨.


그리고 같은 달 4월 14일. 명예의 전당 입성 행사에 참여해 연설을 했다. 이때 로드맨의 헌액 연설은 횡설수설도 많았지만, 여러번이나 눈물을 쏟고 감정에 북받쳐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본인의 솔직한 감정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낸 모습이어서 감동적이라는 평을 많이 받는다. 온갖 미사여구를 전부 빼고 허심탄회하고 소탈하게 중얼대듯 필 잭슨 감독 등의 인생의 은사를 언급할때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고, 내가 본 농구 선수중 역대 최강의 원투펀치는 조던과 피펜이다 라는 발언을 할때 관중석에 있던 피펜도 눈물을 글썽거렸다. 수여자로 참여했던 필 잭슨 감독도 마치 막내동생을 보는 듯한 애정의 눈빛을 보내고 자신의 이름이 언급될때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필 잭슨 감독을 비롯한 척 데일리 등의 은사를 언급하며 이분들을 한 사람으로 만든다면 그 사람은 완벽한 인간일 것이라는 진심이 담긴 명언을 남겼다. 이때도 그 뛰어난 패션센스는 여전했다.[37]. 로드맨은 이날 연설에서 "나는 돈이나 유명세를 위해 뛰지 않았다. 죽을 뻔한적도 많았고 마약 거래를 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었다. 실제 노숙 생활도 해봤고, 노숙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오랜 기간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냈다"라고 했다.

2.7. 가정사

그는 자서전 'Bad as I wanna be'에서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아버지인 필랜더(Philander Rodman Jr.)는 많은 돈을 벌었지만 우리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우리들을 한 번도 안아준 적이 없었다. 그래서 한동안 어머니를 미워했고 나도 비뚤어지고 이기적인 아들로 자랐지만, 이제 세월이 많이 흘러서 웃으면서 얘기할수 있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부친 필랜더(41년 생)는 베트남 참전 용사로 미 공군 소속이었다. 부친은 1970년이 되자마자 미국의 가족을 버리고 필리핀에서 애들을 자꾸 만들었다. 로드맨은 졸지에 무려 47명의 배다른 자식들 중 장남[38]이 됐고 필리핀에서 버거 체인을 운영해 많은 돈을 번 아버지는 여러 집 살림을 하는 주제에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미니 부부 싸움이 당연했다. 로드맨이 NBA에서 성공하면서 부친도 몇 번 경기장을 들르긴 했는데 살갑게 굴진 않았다. 2006년 로드맨이 마닐라에 갈 일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만나자는 걸 거절한 적도 있다. 명예 전당 헌액 이듬해인 2012년, 이벤트로 마닐라에 올스타 레전드로 참여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짧게 말을 나눈 게 전부. 필랜더 로드맨 주니어는 2020년 7월 17일 필리핀 팜팡가에서 전립선 암으로 타계했다. 향년 80세.

모친 셜리 로드맨(Shirley Rodman)은 어린 나이에 아이들 셋[39]을 낳고 남편에게 버림받는다. 이혼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양육비를 따질 계재도 아니었다. 남편은 필리핀으로 가버리고 도저히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마음을 독하게 먹은 그녀는 재혼도 안하고 외벌이로 긴 세월 아이들을 길렀다. 하루에 4탕을 뛰기도 했을 정도로 대단한 여걸이었다. 데니스가 노숙 얘기를 너무 떠들어 어린애를 학대한 것처럼 만들었지만 단순한 가출이었고, 외벌이 때문에 애들을 방임해서 키우긴 했어도 애 셋을 어엿하게 학교 다 보내고 먹여 살린다는 건 외벌이 엄마로서 대단한 일이었다. 여동생 둘도 대학교 다 다니면서 농구 선수가 됐다. 엄마랑 사이가 나빠 그가 손주들을 처음 보여준 건 은퇴 후도 7년이 지난 2008년 다큐 <Sober house>를 찍으면서 가족이 모였을 때였다.

로드맨은 1987년부터 만난 모델 애니 베이크스(Annie Bakes)와 사이에서 88년 생 딸 알렉시스 케이틀린(Alexis Caitlyn Rodman)을 얻었다. 92년 정식 결혼을 했지만 겨우 82일 만에 이혼 조정에 들어갔다. 그래도 로드맨은 종종 알렉시스와 함께 패션쇼나 각종 행사에 나타나는 등 잘 지내고 있는 듯하다.

다큐 마이클 조던 - 더 라스트 댄스에서 '데니스 로드맨의 여자친구로 사는 건 직업상 위험한 일'[40]이란 명언을 남긴 모델 출신 배우 카르멘 일렉트라(Carmen Electra)와 뜨거운 스캔들 끝에 98년 결혼했지만 결국 결혼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아 혼인무효소송을 제기한다.

1999년 캘리포니아에서 가수 미셸 모이어(Michelle Moyer)를 사귀면서 2001년 아들 데니스 주니어와 딸 트리니티 쌍둥이를 얻는다. 2003년 정식으로 세 번째 결혼식을 올리지만 결국 또 이혼 절차에 들어가 조정 기간을 거치다가 2012년 최종 이혼했다. 데니스 주니어는 2019년 NCAA 워싱턴 주립대학교에서 농구를 하고 있으며 198cm의 키에 86kg이란 스몰 포워드로서도 좀 애매한 피지컬이고, 스탯이 26게임 평균 1.7 포인트에 1.9 리바운드 0.3 어시스트로 NBA에 갈 가능성은 희박한 상태다.

트리니티 로드먼 역시 워싱턴 주립대에 입학해 2021년 NWSL 워싱턴 스피릿에 전체 2순위로 드래프트 되어 프로 데뷔했으며 2023년 현재 리그에서 가장 높은 주급을 받고 있는 주전 선수이다. 2022년에는 미국 여자 축구 대표팀에 선발되었으며, 주로 오른쪽 윙으로 출전하고 있다.

어쨌든 로드맨은 2011년 명예 전당 헌액 연설 마지막에 '현역시절 가장 후회되는 게 뭐냐고 남들이 물어본다면 난 좋은 아빠가 되지 못한것을 가장 후회한다라고 대답하겠다. 지금이라도 좋은 아빠가 되겠다'라고 했다. 하지만 은퇴 후 긴 시간 알콜의존증에 시달렸고 약물 문제도 있어서인지 재산을 지키지 못했다. 양육비도 모이어와 쌍둥이 둘에게 9억원이 밀려 20일 간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했다.

3. 플레이 스타일

수비와 리바운드에 극단적으로 치우쳐진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두 카테고리에 한해선 NBA 역사에서 손꼽히는 선수였다.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시절엔 스몰 포워드 파워 포워드을 오가며 올해의 수비수상을 두번이나 수상했고 파워 포워드에 정착한 이후 리바운드의 제왕으로 더더욱 이름을 날렸다.

로드맨의 리바운드 스타일을 간접적으로 보려면, 슬램덩크 산왕공고전 후반전 강백호의 각성모드를 보면 된다. 빠르고 짧은 점프와 끈질긴 몸싸움을 통해 짧게짧게 공을 쳐올려서 잡아내는 스타일. 재밌는 점은 만화에서 강백호의 플레이보다 현실의 데니스 로드맨의 플레이가 훨씬 더 대단했다는 것. 강백호가 전력을 이끌어낸 리바운드 플레이는 세 번을 뛰었지만 아래 움짤에서 보이듯 데니스 로드맨은 이걸 네 번을 해낸다. 중간 잔점프까지 합하면 도합 다섯 번인 셈이다.
파일:DennisRodman_03.gif
찰스 바클리와의 리바운드 혈투”

위 장면은 움짤로 유명하지만 후속 플레이를 보면 더욱 압권인데, 저렇게 리바운드를 따낸 다음에 레이업을 시도하다가 수비하던 핸더슨이란 선수에게 공을 뺏긴다. 이후 핸더슨은 앞장서서 달리던 찰스 바클리에게 패스해주고 바클리가 골밑슛을 하는데 뒤처져 있던 로드맨이 어느 순간 날아와서 블록해버린다. 반복해서 점프를 해 리바운드를 따낸다음 바로 풀점프로 레이업 시도, 직후에 순식간에 반대쪽 골대까지 달려가 풀점프로 블럭을 해버리는, 그야말로 야생마 같은 활동량을 보인다. 링크

이것은 로드맨 자신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특기이다.
누구도 흉내내지 못하고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리바운드 하나를 위해 세 번, 네 번 점프한다는 것이다. 나는 볼에 손을 밀착시킨다. 그러면 손가락으로 건드릴 때마다 볼이 내 손 쪽으로 당겨와 결국 확실히 두 손으로 붙잡을 수 있게 된다. 내 점프는 NBA에서도 가장 빠르다. 신속히 점프한 후에 일단 바닥에 착지하고 나서 스카이콩콩에 올라탄 것보다 더 재빠르고 탄력 있게 다시 공중으로 뛰어오를 수 있다. 대개의 선수들은 리바운드를 잡기 위해서 무조건 높이 점프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재빨리 여러 번 점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나는 점프하여 볼을 가볍게 치고, 점프하여 치고, 또 점프하여 가볍게 친다. 이렇게 다른 선수들이 한 번 뛰어오르는 동안 나는 세 번이나 뛰어오를 수 있다. 내가 세 번, 네 번 점프를 하는 동안 다른 녀석들은 숨을 헐떡거리며 정신을 못차린다.

게다가 의외로 연구파라서 어떤 선수의 슛이 어느 방향으로 많이 튄다거나 하는 연구도 많이 했다고. 슈뢰딩거의 점프슛 상대팀은 물론이고 같은 팀 선수들의 슛패턴 또한 비디오로 연구했다고 한다.[41] 덕분에 공격 리바운드를 많이 잡아준 선수. 결승전에서 11개의 공격 리바운드를 잡아내는 기록을 갖고 있기도 하다.(공격 리바운드만의 숫자다.)

역대 다른 특급 리바운더들과 비슷하게 공격 리바운드보다 수비 리바운드가 훨씬 더 많긴 했지만, 로드맨은 스타일상 공격 리바운드를 잡는데 좀 더 특화된 선수였다. 리바운드 항목에도 설명되어 있지만 공수 리바운드는 각각 요구하는 기술이 조금 다른데, 수비리바운드는 유리한 위치에서 지켜내는 리바운드 이기 때문에 체격과 힘같은 요소가 좀 더 중요하고 공격리바운드는 불리한 위치에서 따내는 리바운드라 민첩성과 활동량같은 요소가 더 중요하다. 그런데 로드맨은 민첩하고 체구가 리바운더치고 작은 편인데다 활동량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공격리바운더로서 재능이 압도적이었다. 로드맨이 공격리바운드할때는 일단 공이 날아가면 수비수와 몸싸움을 하면서 한발을 안쪽으로 슬쩍 걸치고 능구렁이처럼 안쪽으로 파고들고, 동시에 한팔을 수비수 팔에 끼는 등 꼼수를 통해 움직임을 막으면서 공을 잡는 게 여의치않겠다 싶으면 자유로운 한손으로 공을 자기쪽으로 쳐내 잡아낸다. '유리한 위치에서 리바운드를 지켜내는 능력'은 찰스 바클리 샤킬 오닐, 칼 말론같은 힘세고 덩치 좋은 선수들이 더 뛰어났지만, '불리한 위치에서 리바운드를 따내는 능력'으로 치면 로드맨을 따라올 선수가 없었다. 물론 기본적으로 로드맨 역시 (득점/어시스트 참여도는 미미해도) 공격할 때는 외곽에서 스크린을 걸어주고 기본적인 견제를 받았기 때문에(로드맨이 로우포스트에서 포스트업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골대-수비수-공격수 구도에 놓이는 건 마찬가지라 공수 리바운드 비율이 1:2를 좀 넘기는 수준이었고 당연히 수비리바운드도 리그 탑이었지만, 공격리바운드에서 좀 더 압도적인 능력을 자랑했다는 것.[42]

또한 로드맨하면 무슨 만화같이 오버스런 동작으로 리바운드를 잡는 경우도 많은데, 무슨 퍼포먼스같은 게 아니라 확실히 공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로드맨은 리바운드를 잡을 때 공을 놓치지 않도록 '찰싹' 소리가 날 정도로 두 손으로 공을 강하게 잡고, 잡는 동시에 몸 안쪽으로 공을 한번 넣어 확실하게 보호한다. 농구의 기본인 볼 프로텍팅에 충실한 동작으로, 로드맨의 볼에 대한 집념이 드러나는 모습이다. 이 때문에 보는 입장에서도 리바운드를 '맛깔나게' 잡는 선수라, 기행을 제쳐두고도 보는 재미가 확실히 있는 선수.[43]

대신 공격은 빈약하다(통산 평균 득점 7.3점). '한때는' 필드골 성공률 시즌 1위를 차지하기도 했지만[44][45], 90년대 초반 이후 공격은 포기하고 골밑 노마크 찬스가 아닌 이상에는 거의 팀원에게 돌렸다. 실제로 그의 시합을 보면 드리블이나 슛은 프로의 그것이라고 봐주기 매우 힘들다. 그런데 역으로 이 점이 마이클 조던과 불스에는 매우 플러스로 작용하였다는 것이 아이러니. 슛시도 자체를 아예 하지 않고, 올리는 득점은 골밑에서의 이지 찬스 또는 풋백 덩크, 팁인 정도가 전부이다. 단 이런 슛은 거의 놓치지 않았다. 다만 한 번은 전반에 3점을 던졌다가 어쩌다 들어갔는데 그걸 기억하고 후반에 다시 시도했다가 에어볼이 된 일이 있다. 그 슛 후 자신이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흔드는 모습을 기억하는 팬도 있을 듯. 어쨌건 트리플 더블의 가장 큰 장벽이 득점인 대단히 특이한 선수. 트리플 더블을 딱 한 번[46] 기록했다. 시야가 넓고 게임 흐름을 읽는 능력도 좋아서 공을 가지고 있는 시간이 매우 짧음에도 시즌 평균 3어시스트 정도를 기록하기도 했다.

보기하고 다르게 BQ(농구 IQ)가 좋았던 선수로 정평이 나있다. 실제로 그가 시카고로 이적한 후 첫 연습에서 그 어렵다는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하루만에 마스터했다는 얘기는 이미 정설. 잭슨의 인터뷰를 봐도 '매우 영리하고 팀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선수'라고 평가받고 있다. 잭슨이 그를 데려온 이유가 상기한 대로 그가 배드 보이즈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배드 보이즈 출신들은 자신들의 우승에 큰 걸림돌이었던 조던의 시카고와 피터지게 싸웠기에 박살내기 위해서라도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을 것이니, 수행하기도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그중에서도 머리가 좋았던 로드맨은 아니나 다를까 오자마자 트라이앵글 오펜스에 쉽게 녹아들어갔다. 당시 배드 보이즈 출신인 존 샐리도 비슷한 맥락에서 영입된 선수였다.

역대 최고의 수비수 중 하나이기도 하다. 힘과 근력, 스피드와 퀵니스, 강철체력까지 갖췄기 때문에 거의 전방위 수비수로 가드부터 센터까지 마크할 수 있었다. 디트로이트 시절에는 파워 포워드가 아닌 스몰 포워드 위치에서 매직 존슨, 래리 버드, 마이클 조던 등을 전담으로 마크하던 에이스 스토퍼였고, 시카고 시절에는 빅맨 롤을 맡아 칼 말론, 샤킬 오닐과 같은 선수들까지 막아냈다.

칼 말론이나 샤킬 오닐과 같이 자신보다 크고 무거운 선수들을 막을 때는 상대와 몸을 최대한 밀착하여 편한 자세로 공을 받지 못하게 했으며, 공이 투입된 뒤에도 세컨드 무브를 가져가기 힘들도록 압박했고, 슈팅 후에는 곧바로 박스아웃에 돌입해 상대를 리바운드에 가담하지 못하게 했다. 높이 자체는 상대적으로 낮았으나, 본인의 순발력과 바디 밸런스를 최대한 활용하여 필요한 순간에 짧게 여러 번 뛰어오를 수 있는 감각이 있어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었다. 또한 "The Worm"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상대의 리듬에 따라 몸을 밀착시켰다 떨어졌다 하면서 오펜스 파울을 유도하거나 불안정한 자세로 동작을 이어나가도록 유도했다. 빌 레임비어나 릭 마혼 등에게 배운 교묘한 반칙성 플레이를 중간중간 섞고, 심판의 눈을 피해 팔을 잘 이용한 것은 덤.

특히 오닐은 로드맨이 수비하기 전에는 시카고의(그외 모든 구단도) 페인트존을 초토화시키고 있었는데, 로드맨이 수비하자마자 득점이 주춤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당시 샤킬 오닐을 막던 센터 룩 롱리(218cm, 120kg)에 비해 좀 더 잘 막고 공격도 더 나은 모습을 보여줬다. 마치 슬램덩크에서 신현필을 수비하던 강백호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시카고 불스에서 뛰던 시기, 파이널에서 만난 상대팀인 시애틀 슈퍼소닉스 유타 재즈 숀 켐프 칼 말론이라는 걸출한 파워 포워드들이 팀의 핵심이던 팀이었는데 이 팀들을 세번이나 꺾을 수 있었던데에는 로드맨의 공도 결코 적지 않다.

특히 마이클 조던이 시애틀 백코트에 막힌[47] 96년 파이널의 진짜 MVP라는 얘기도 들었다. 시리즈 내내 숀 켐프를 효과적으로 막았고, 2차전에서는 3점차로 쫓기고 있던 상황에서 자유투를 성공시켜 게임을 승리로 이끌기도 했다.[48]

기록 측면에서는 92년부터 98년까지 7년 연속 NBA 리바운드 1위를 기록했고 커리어 하이는 92년의 평균 18.7개. 90년, 91년 DPOY(Defensive Player Of the Year, 올해의 수비 선수상)를 차지하였으며, 89년부터 96년까지 8년 연속 NBA All-Defensive Team에 뽑힌 바 있다(1st 7회, 2nd 1회).

윌트 체임벌린이나 빌 러셀이 시즌 평균 리바운드 20개를 밥먹듯이 했기 때문에 로드맨의 리바운드 능력이 상대적으로 과소평가될 수도 있지만, 60-70년대 NBA는 오늘날과는 룰이나 코트 규격 등이 판이하게 달라서 당시의 스탯을 오늘날의 기준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오늘날의 룰과 코트 규격이 보편화된 7-80년대 이후 뛴 선수들 중에 한 시즌 평균 리바운드 18개를 넘게 한 선수는 로드맨이 유일하다. 그리고 그의 신체조건은 포스트업 플레이어로서는 기준미달에 가깝다. 특히 득점이 아닌 수비와 리바운드로서는 더욱더 그러하다.[49]

조던의 신체에서 돋보이는 부분이 말도 안되게 빠른 방향전환과 순간적인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는 강력한 발목이라면, 로드맨의 신체조건에서 돋보이는 부분이 바로 강력한 하체다.[50] 로드맨은 커리어 내내 100kg 이하의 가벼운 신체를 지녔지만, 프로 초창기 때부터 하체가 워낙 강력했기에 자신보다 크고 강한 선수들과 매치업될 수 있었다. 피스톤즈 시절 시카고 시절보다 더욱 호리호리한 90kg 전후의 체격이었지만, 그보다 크고 강한 매직 존슨이나 제임스 워디같은 파워플레이어들과 매치업되곤 했다. 존슨과 워디 둘 다 포스트업이 강력한 선수들인데, 웬만한 스몰포워드는 물론이고 파워포워드들조차 속수무책으로 밀려나는 수준의 파워를 지닌 선수들이었다. 피스톤즈와 레이커스가 2년 연속으로 붙을 당시 주전이었던 에이드리언 댄틀리와 달리 로드맨은 강력한 하체를 바탕으로 이들의 포스트업을 버텨낼 수 있었기에 이를 바탕으로 팀 내 입지를 점점 넓힐 수 있었다.[51]

커리어 후반부에 빅맨으로 전환을 하면서 전반적인 운동능력은 전성기에 비해 떨어져 외곽선수들을 막는 능력은 많이 떨어졌으나, 반대로 센터들까지 커버가 가능할 정도로 파워가 보강되었다. 위에 언급된대로 샤킬 오닐의 포스트업을 버티기도 할 정도.[52] 당연히 이런 강력한 하체는 박스 아웃에도 도움이 되었는데, 로드맨이 강력한 리바운더로 군림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 하체 힘이 결정적이었다. 공격 리바운드의 경우 방향을 읽고 민첩하게 움직여서 따내는 리바운드지만, 수비 리바운드의 경우 유리한 위치에서 박스 아웃해서 지켜야 하는데 로드맨은 호리호리한 체격에 맞지않게 버티는 힘도 빅맨급으로 강력했다.

3.1. 멘탈과 심리전


시애틀과의 파이널 1차전에서 로드맨은 테크니컬 파울을 선언당했는데, 이 때 시애틀에서 로드맨을 자극시켜서 테크니컬 파울 1개를 더 끌어내어 퇴장시키기 위해 브릭코우스키라는 선수를 투입시켰다. 로드맨은 조금도 멘탈이 흔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브릭코우스키에게서 테크니컬 파울 2개와 플래그런트 파울을 끌어내 퇴장시켰다. 퇴장당하는 브릭코우스키 등 뒤에 대고 "Bang!" 하는 마무리까지.

브리카우스키는 로드맨보다 약간 더 큰 키에 힘이 세고 터프한 백업 빅맨이었으며, 싸움도 많이하고 플레이도 거친 선수였다. 로드맨보다 피지컬적으로 앞서고 더티플레이도 잘하는 선수라 로드맨의 체력을 소모시키고 흔들기 위해서 투입된 선수. 실제로 당시 필 잭슨이 경기 전에 작전을 지시하면서 "녀석들이 널 상대하기 위해 브릭을 보낼거야, 데니스"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로드맨은 아래 설명되듯 자신의 멘탈을 건드리는 트래쉬토크에는 약해도 어려운 상대를 만났다고 흔들리는 적은 없었으므로, 오히려 특유의 거친 플레이로 브리카우스키를 흥분시켜 불과 몇분만에 퇴장시켰다.
https://www.youtube.com/watch?v=htRsHwtsWic 이 장면을 보면 압권인데, 골밑에서 로드맨은 브리카우스키를 (점프하지 못하게) 팔짱을 끼고 밀어내려고 했는데, 브리카우스키의 힘이 더 세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로드맨이 마구 팔을 잡아당기고 브리카우스키가 열받아서 그를 노려보는 가운데 심판이 근처에 오자 마치 브리카우스키가 팔을 잡아당긴 것처럼 깽깽이를 뛰면서 연기를 한다. 여기선 파울이 불리지 않았지만 이때 조던이 파울을 얻어 자유투를 쏘는 동안 로드맨은 리바우드에 참가하지 않고 뒷짐을 지고 미소를 지면서 브리카우스키를 지긋이 바라본다. 이 영상에선 짤렸지만 조던이 두번째 자유투를 던졌을땐 리바운드는 커녕 아예 골대를 등진 상태에서 깡총깡총 백코트를 하는 능청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실제 로드맨은 심리전에서도 강한 선수였다고 평가 받는다. 로드맨과 상대해야 했던 레이커스의 제임스 워디는 회상하기를 "데니스는 내가 상대한 선수중에 최고의 운동신경을 가진 선수였다. 하지만 데니스가 더 무서웠던 이유는 사람들의 심리를 흐트러뜨리는 방법을 알기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한 일화로 로드맨이 자신의 엉덩이를 꼬집는 바람에 "얘 대체 뭐하는 애야?"라고 생각하게 함으로써 정신을 흩트려놨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걸 들은 로드맨이 "다 릭 마혼한테 배운거다"라고 받아치는 것이 일품.

경기 중 깽판을 자주 치고 테크니컬 파울을 밥먹듯이 받을 듯한 이미지이나, 오히려 상대방을 자극하여 스스로 플레이를 망치게 하는 스타일이다.96년 파이널에서 켐프가 덩크 후 바로 내려오지 않고 로드맨에게 다리를 걸쳐서 일부러 약을 올리는 유명한 장면이 있는데, 오히려 켐프의 등을 살짝 두들겨 주는 대인배스런 모습을 보일 정도. 이 선수가 얼마나 팀을 생각하고 승리를 열망하는지 알 수 있다. 괴팍한 행동들은, 당시 우승권팀 피스톤즈를 떠나 경쟁력 있게 살아남기 위해서 외형적으로 과도한 염색과 문신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실력이야 이미 유명했고 본인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어느정도 의도된 쇼맨쉽이라고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능한 행동들이다.

다만 로드맨이 빌 레임비어처럼 여우같이 상대만 잔뜩 약올리고 자기 자신은 적정선만 지켜서 퇴장을 피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로드맨 역시 자주 테크니컬 파울을 받고 감정조절을 못해 싸우다가 경기를 망치는 일이 종종 있었고, 위에 언급된 96 파이널에서도 장난을 치다가 테크니컬 파울을 받은 뒤 갑자기 빡쳐서 심판에게 대들다가 추가 테크니컬을 받고 퇴장당한 적이 있다. 97년에 애틀란타 호크스를 상대로 한 동부 준결승 2차전 홈경기에서 불스가 패했을때, 당시 로드맨은 플레이오프 첫 5경기에서 벌써 총 7개의 테크니컬을 받은 것에 빡친 스카티 피펜이 공개적으로 비난을 하기도 했다.[53]

실제로 로드맨은 통산 테크니컬 파울 212개로 역대 순위 5위이고, 4.3경기에 하나씩 한 수준. 위에 언급된 레임비어는 통산 121개에 8.8경기에 하나씩 한 수준이라 훨씬 빈도수가 적다. 퇴장만 하더라도 레임비어는 연속 685경기를 징계없이 뛸 정도라 징계결장이 꽤 되던 로드맨과 다르다.

포인트는 로드맨이 심리전에 강하긴 했으나 "플레이오프만 되면 절대 싸우지도 않고 퇴장도 안 당하던" 그런 선수는 아니었다는 것. 오히려 찰스 바클리처럼 감정표현이 격렬하고 항의도 꽤 하던 선수였다. 위에 언급된대로 심리전이 강한 선수긴 하지만, 성격 자체가 예민하고 섬세하다보니 욱할 때도 많았다. 굳이 따지면 레임비어와 바클리와 중간에 가까웠는데, 레임비어는 실제로 심리전을 걸어놓고 상대를 대놓고 때리기보단 맞는 스타일이었는데(물론 심판 몰래는 엄청 때렸다), 로드맨은 심리전이나 쇼맨쉽용 도발에도 능하긴 하지만 성격이 불같다보니 대놓고 싸울때도 종종 있었다.

특이하게 멘탈이 강하면서도 약한 선수였는데, 순수하게 경기 측면에서 상대방이 도발하면 잘 흔들리지 않았다. 돈 넬슨 항목에 나와있다시피 댈러스가 97-98시즌 당시로선 생소했던 '해킹', 즉 경기내내 그에게 대놓고 고의로 파울하는 작전을 했을 때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12개 중 9개를 성공시키며 평상시 자유투 성공률을 훨씬 상회하는 모습에 리바운드 27개까지 잡았다. 그런데 위에 언급된대로 상대방이 시비를 걸거나 (본인이 생각하기에) 불공정한 판정을 당할 때는 갑자기 폭발하는 경우가 많았다. 성격 자체는 굉장히 예민하고 감정기복도 잦았지만, 농구 자체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에서는 흔들리지 않고 안정적으로 뛸 수 있는 선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은 아이재아 토마스, 마이클 조던, 척 데일리, 필 잭슨같이 코트 안밖에서 절대 흔들리지 않는 강력한 멘탈과 동료들을 주도하는 리더들이 그와 잘 맞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사족으로 그는 악동 이미지이고 물리적인 충돌 사례도 여러번 있었지만 딱히 현피가 강하지는 않았다. 사실 배드보이즈 출신 중에 "파이터" 이미지가 있는 선수는 릭 마혼과 아이재아 토마스 말고는 거의 없었는데, NBA에서 알아주는 싸움꾼이었던 찰스 바클리는 은퇴 후 Open Court에서 피스톤즈 선수들 중 싸움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선수는 토마스와 조 듀마스, 그리고 존 샐리 밖에 없다고 평한 적이 있었다.[54] 싸울 줄 안다는 토마스나 듀마스는 아무래도 체격이 딸리고, 마혼은 피스톤즈 경력이 짧으니, 피스톤즈는 그 거친 이미지와 별개로 선수 개개인만 보면 오클리나 바클리, 래리 존슨 같은 주먹은 딱히 없었던 셈.[55][56] 로드맨 역시 쌈닭 기질이야 있었지만 키나 체급이 빅맨치고 확실히 떨어지는 편이었고, 자신과 주로 시비가 걸리는 빅맨들을 상대로 덩치와 완력에서 밀리다 보니 싸워서 재미보긴 어려웠을 법 하다.

4. 전술적 가치

레전드로서 로드맨의 평균 이하의 낮은 득점력을 가지고 로드맨의 가치를 폄하하는 일부 의견이 있지만, 로드맨이 지닌 리바운더로서의 능력과 수비력은 부족한 득점력을 메꾸고도 남았다.

조던이 첫 번째 은퇴에서 복귀한 후에 시카고 불스가 역대 최강의 팀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로드맨의 강력한 인사이드 플레이와 수비력 덕분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실제로 91~93년까지 첫 번째 파이널 3연패를 했던 시카고 불스보다 95-98 당시의 불스를 역대 최강의 끝판왕으로 꼽는 이들도 있는데 이를 보더라도 로드맨의 전술적 가치는 농구팬들의 생각보다 엄청난 것임을 알 수 있다.[57]

한 팀에 강력한 리바운더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공격 기회가 늘어난다는 것이고 이는 전체적인 팀의 득점력을 엄청나게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위대한 슈터라도 필드골 성공률이 60퍼센트를 넘길 수 없다는 것은 10번 던지면 4번은 실패하고 2번 던지면 1번은 실패한다는 소리이다. 이때 만약 그 팀에 로드맨 같은 강력한 리바운더가 있다면 4번 중 2번은 다시 공격 기회로 돌릴 수 있을 것이고 그만큼 팀 전체의 득점력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때문에 마이클 조던이 신체적 전성기인 30대 초·중반을 지나고서도 압도적인 득점력으로 리그를 학살할 수 있었던 것에는 로드맨의 역할도 컸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 실제로 97-98시즌 시카고 불스의 시즌 리바운드수는 전체 2위(1위는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인 3681개였는데 이중에 로드맨이 잡은 리바운드는 무려 1201개로, 이는 다른 주전 4명(조던, 롱리, 하퍼, 피펜)이 잡은 리바운드 수를 모두 합친 것(1333개)과 거의 비슷하다.[58] 물론 다만 2차 3연패 시절 불스는 수준급 빅맨이 키가 작은 로드맨 뿐이라 골밑 위압감 자체는 리그 바닥권에 가까웠지만, 그 로드맨조차 없었다면 불스의 골밑은 정말 상대 빅맨들의 놀이터가 됐을 것이다.

로드맨의 전술적 가치는 리바운드뿐만 아니라 수비에서도 빛을 발한다. 상기했듯 80년대 후반부터 리그 정상급 수비로 이름을 떨치는 로드맨이 있었기 때문에 시카고 불스의 파이널 상대인 시애틀이나 유타는 상대적으로 어려운 경기를 펼칠 수밖에 없었다[59]. 실제도 97년도 파이널 경기를 보면 로드맨의 악착같은 수비에 페이스가 흐트러지는 칼 말론을 볼 수 있다. 아무리 강팀이라도 팀의 주 득점원이 2명이 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시카고만 하더라도 팀의 주 득점원은 조던이었고 조던이 막히는 날엔 시카고도 답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60]. 따라서 로드맨같이 수비 스페셜리스트가 존재한다면 상대팀의 입장에서는 그만큼 경기가 힘들어진다.[61] 농구라는 스포츠에서 자신의 득점이나 어시스트 같은 눈에 잘 띄는 지표를 포기하고 수비에만 매달리는 것은 쉽지않은 일이다. 그러나 로드맨은 데뷔할 때부터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리바운드와 수비를 특화하다 못해 그 방면만 갈고닦은 선수이기 때문에 감독으로서는 로드맨만큼 디펜스에서 매력적인 선수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62]

결국 시카고 불스 왕조의 건설에는 로드맨의 공도 상당히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한 경기에 리바운드를 15개씩 잡아내고 오펜스 리바운드를 5~6개 넘게 잡아내며 상대팀 인사이드를 초토화시키고 에이스의 득점력을 반 이하로 무력화시키는 선수는 지금에선 찾을 수도 없고 앞으로도 보기 힘들 것이다. 그만큼 80~90년대 NBA 팬들은 로드맨이라는 전무후무한 스타일의 선수를 볼 수 있어서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4.1. ' DET 로드맨'과 ' CHI 로드맨'의 차이

우선 불스에서의 첫시즌 만큼은 '전성기의 마지막 연장선' 정도로는 볼 수 있는 기량이었다. 디펜시브 퍼스트팀에 리바운드왕을 차지했고, 출장경기수가 조금만 더 많았더라도 충분히 올스타나 All-NBA 서드팀에 뽑힐 가능성도 있었다(64경기 출장). 리바운드 측면에서도 그는 뛰어난 활약을 펼쳤는데, 파울트러블로 많이 뛰지 못했던 1라운드를 제외하면 2라운드부터 전경기 두자리수 리바운드를 올려줬으며, 골밑이 강한 닉스 시리즈에서 15.6개, 올랜도전에서 15.8개, 시애틀 시리즈에서 14.7개를 기록했다. 공격리바운드 10개를 넘긴 경기만 세번(10개, 11개, 11개)이었으며 20+리바운드도 두번(20, 21개), 19개 경기도 세번 있었다. 또한 숀 켐프를 파이널 6경기 23득점 .553 야투로 제어하며 우승에 큰 공을 세웠으며, 이 해의 파이널 MVP 투표만 보아도 숀켐프가 3표 로드맨이 2표로 숀켐프를 막아낸 로드맨의 공로를 인정받을 만 했다.

다만 첫시즌 이후의 불스 로드맨은 전성기 기량에서 상당히 내려온 편이었다. 로드맨하면 떠오르는 게 최정상급의 수비력이지만, 그의 all-defense team 선정은 1995-96시즌이 마지막이었고 그 다음부터는 세컨팀에도 선정되지 못했다. 즉, 불스 시절의 로드맨은 첫 우승 당시를 빼면 리그에서 아주 손꼽히는 수비수라 보기 어려웠다는 것.[63] 또한 리바운드 장악력 측면에서도 이전과 차이가 제법 나는데, 정규시즌에서 리바운드왕 3연패를 하긴 했지만 플레이오프에서는 96시즌에 13.7개를 기록한 이후 97플옵에선 8.4개, 98플옵에선 11.9개에 그쳤으며, 97 및 98 플옵을 자세히 들어다보면 당시 그의 리바운드 장악력이 들쭉날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97년의 경우 특급 리바운더로 올라온 이후의 플옵 활약 중 가장 미진한 시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 워싱턴을 맞아 1라운드에서 평균 9개를 기록했다.[64]
(2) 애틀랜타를 맞아 2라운드에서 평균 5개를 기록했다.[65]
(3) 알론조 모닝과 PJ 브라운이 버티는 마이애미를 상대로는 그나마 35.2분동안 평균 12.4개를 잡아주며 제몫을 했다.
(4) 유타와의 파이널에선 7.7개를 기록하며, 매치업 상대이자 로드맨과 같은 블루워커가 아닌 에이스 말론에게 리바운드마저 밀렸다.

98플옵은 그나마 상황이 좀 낫다.
(1) 뉴저지를 상대로 1라운드에서 13.7개를 기록.[66]
(2) 샬럿 호네츠를 상대로 41.6분을 뛰며 17.6개라는 압도적인 수치를 기록.[67]
(3) 그러나 인디애나를 상대론 비교적 아쉬운 9.9개로 하향.[68]
(4) 유타와의 재전에선 8.3개로 또다시 말론에게 밀렸다.

시카고 로드맨의 전술적 가치는 전성기 로드맨에 비해서는 꽤나 떨어진다는 것. 그러나 시카고 불스에 합류할 당시 로드맨은 이미 30대 중반에 접어들던 나이였다. 98플레이오프에선 노화가 눈에 띄게 보이는 로드맨, 등부상으로 제 컨디션이 아닌 피펜 때문에 조던이 거의 하드캐리를 해야했다. 위의 서술은 시카고 불스 왕조에 있어 로드맨이 큰 공헌을 했다는 걸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전성기 로드맨을 기준으로 삼아 불스시절 로드맨의 공헌도를 재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는 걸 지적하는 것이다. 불스 시절 로드맨은 1급 수비수였지만 리그 최고의 수비수는 아니었고, 이때 로드맨을 상대로 한 에이스는 득점 반토막은 커녕 거의 자기 몫을 해줬다.[69][70] 정규시즌에는 극강이었던 리바운드 능력 역시 플옵에서는 기복이 심했던 만큼 더더욱 디트&샌안시절의 로드맨과 동격으로 두기 어려운 것.

또한 디트 로드맨과 불스 로드맨은 스타일 측면에서도 다소 차이가 있다. 원래 로드맨은 20분대의 출장시간에도 10개 가까운 리바운드를 잡을 정도로 리바운드가 강한 선수였지만, 아예 파워포워드로 정착하면서 연속으로 평균 18개라는 상식 밖의 수치를 잡아내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반대급부로 행동반경이 골밑으로 제한되었기에 이전처럼 상대 에이스를 봉쇄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고 골밑수비수 역할을 주로 맡는다. 게다가 키가 작았고, 나이가 들면서 운동능력이 떨어진 것 때문에 골밑 수비력이 훌륭하긴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훌륭한 수비수긴 했지만 97, 98 시즌에는 전성기에는 확연히 못미치기는 했다는 것. 종합적으로 평가하면 로드맨의 플레이스타일과 전술적 가치는 디트로이트 시절과 스퍼스 시절, 시카고 시절을 따로 볼 필요가 있다. 시기별로 구분을 해두자면,

1.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의 경우, 그는 리그 최강의 에이스 스토퍼였으며 역대 최강의 수비수 중 하나였다. 또한 출장시간 대비 뛰어난 리바운더였다.

2. 이때까지 디트의 센터-파워포워드 주전은 빌 레임비어-제임스 에드워즈로 로드맨은 주로 SF로 출장했으며[71] 3번 자리에서도 12개 가량의 리바운드를 잡아냈다. 이후 에드워즈가 팀을 떠나고 레임비어가 노화하면서 로드맨은 골밑에서 더 큰 역할을 맡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주로 파워포워드로 출장하여 두 시즌 연속 경기당 18개의 리바운드를 잡기 시작한다.
→ 흔히 말하는 로드맨의 최전성기는 이때였다. 수비력 자체는 약간 더 기동력이 좋고 젊었던 1번 시기가 조금 더 앞섰지만 기존의 기동력과 수비력이 크게 저하되지 않으면서 여전히 수비왕에 준하는 수비력을 뽐냈고, 리바운드는 단연 리그 최강이었다.

3. 스퍼스 시기는 망아지같던 로드맨이 운동량이 점점 줄어들던 시기이다. 로드맨은 여전히 리그에서 가장 왕성히 움직이는 선수 중 하나였지만 나이가 들면서 발도 조금 늦어지고 체력도 예전만큼은 아니게 되면서 활동반경이 골밑 위주로 좁아졌다. 그러나 All-NBA 서드팀에 선정되었을 정도의 저력을 보여준 시기이기도 하다.

4. 시카고 시절 로드맨은 완연히 행동반경이 골밑이 되었다. 이 시기 그의 수비력은 여전히 뛰어났지만, 운동능력의 저하로 이전만큼 외곽까지 수비커버를 나가는 빈도수가 줄고 압박 능력이 예전에 비해 떨어졌다.[72] 물론 찰거머리 수비와 교묘한 플레이로 상대의 신경을 긁는 건 도가 텄고, 빈약한 시카고 골밑에서 보드장악력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선수였기에 공헌도 자체는 확실한 선수였다.

4.2. '불스 로드맨'에 대한 보강

로드맨을 포함한 2차 쓰리핏 구간의 불스를 '빅3 구성으로 봐야 하는가'에 대해 여러 커뮤니티 등지에서 논의가 오간 바 있다. 아래는 이에 대한 정리.

96-97시즌 당시 시카고 지역의 가장 유명하고 주요 신문인 시카고 트리뷴, 그것도 조던과 불스에 대해 최고 전문가 중 하나로 인정받는 샘 스미스가 쓴 기사를 참고해보자. "NBA 파이널이건 아니건, 로드맨을 버릴 때가 왔다"는 제목의 기사이다. 이때 스미스는 파이널 4차전까지 로드맨이 필드골 성공률 38.2%, 8.4리바운드에 그치면서 당시 NBA기록이던 17개의 테크니컬 파울을 적립했고, 재즈를 상대로 고작 7개의 리바운드와 야투성공률 27%에 그쳤음에도 불스가 그 없이 승승장구했다는 점, 심지어 4차전 직후에 라스베가스에 갔다왔다는 점[73], 그리고 상대팀 에이스인 칼 말론을 딱히 본인 능력으로 잘 막은 게 아니라는 점[74], 로드맨이 월요일의 미디어 세션 이후 다시 갈 예정이라고 한 것에 대해 경기에 대한 열정이 완전히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는 점 등을 지적했다. 게다가 로드맨은 4차전 1쿼터 당시 택도 없는 슛 네개를 쏴서 다 놓치는 과정에서 필 잭슨이 타임아웃 도중 "슛 좀 그만 쏘라"고 하자 바로 라커룸으로 직행해 2쿼터까지 돌아오지 않는 항명 행위까지 했다.[75]

꼭 스미스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로드맨은 7.5점 (야투율 48.6%) 14.7리바운드 2.5어시스트로 좋은 활약을 펼친 96 파이널과 달리 97파이널에서는 존재감이 굉장히 적었다.[76] 실제로 그가 97-98시즌에 후보로 많이 나오게 된 것은 이런 불안정한 경기력 탓이 컸다. 스카티 피펜이 절반 정도 결장한 98시즌 초반 시카고 불스의 초반 라인업은 처절할 정도인데[77], 당시 로드맨이 별다른 부상이 없었단 걸 생각하면 시즌 초 팀의 신뢰를 단단히 잃었던 셈.[78] 물론 이와같은 부진에는 이유가 있었다. 1996-97 시즌 막판에 로드맨은 무릎부상을 당해 마지막 13경기를 결장했다.[79] 게다가 97, 98파이널에 연속으로 말론에게 압도당한 것은 그냥 실력이다. 물론 말론은 로드맨보다 두살이나 어리고 훨씬 더 좋은 선수니 압도당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유일한 장점인 리바운드에서조차 밀리는 게 문제인 것. 종합하자면 당시 노장이던 로드맨은 운동능력 저하, 피지컬의 한계, 계속되는 부상으로 인해 실력이 계속해서 떨어졌다. 이 때문에 마지막 두 시즌에서 그는 전성기는 물론이고 1995-96시즌과 비교해도 눈에 띌 정도로 기량이 떨어졌다.

거듭 얘기하지만 말년의 로드맨 한정이다. 물론 만 34~37세의 포워드가 실력 떨어지는 건 전혀 이상한 게 아니다. 당연하지만 위의 서술은 로드맨의 전술적 가치에 대해 객관적으로 살펴보자는 거지 레전드였던 그의 가치를 폄훼하자는 게 아니다. 이 당시 만 36~37세였던 로드맨이 전성기에 비해 기량이 떨어졌다고 해도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농구선수로서는 할아버지에 가까운 나이에도 리그 최강의 리바운더이자 좋은 수비수로 활약한 로드맨이 얼마나 훌륭한 선수였는지 보여준다.

불스 로드맨이 이전에는 탑급 블루워커에 대한 로망으로 과대평가를 다소 받았다면, 그 반대급부로 지나치게 퇴물 취급을 하며 과소평가 하는 시각도 존재하다 보니 이제와서는 평이 갈리는 편이다. 객관적으로 불스 시절 로드맨의 활약을 종합하면 첫번째 및 세번째 시즌에는 All-NBA Team급에는 조금 못미치는 활약을 펼쳤고, 플레이오프에서는 96시즌에는 엄청난 활약이었으나 이후로는 정규시즌에 못미치는 모습을 보였다.

사족을 덧붙히면 로드맨은 불스에선 올스타 선발에 있어 상당히 유리한 위치였다. 보통 한 팀이 독보적으로 뛰어난 시즌을 보내면 그 팀에서 세명 내지 네명까지도 올스타에 선정되는 경우가 많은데[80], 불스는 96에 72승, 97년엔 69승으로 모두 독보적이었기 때문에 로드맨도 뽑힐 만 했었다.[81] 다만 96시즌에는 결장이 많았고(47경기 중 이미 12경기 결장), 97시즌에는 폼 자체가 올스타급과는 거리가 있었다. 98시즌 불스는 35승 14패(71.4%)로 34승 12패(73.9%)인 인디애나에 근소하게 뒤쳐진 동부 2위를 달리고 있었고 로드맨도 단 2경기만 빠졌다. 이 정도 성적이면 올스타 두명이 선발되는 경우가 많고[82] 당시 피펜이 부상 중이었기 때문에 조던에 이어 로드맨이 선발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즉, 출장경기가 적은 96년과 97년은 제외한다 치더라도, 98년에 로드맨은 팀성적과 출장경기수 모두 팀 내 두번째 올스타로 선발될 당위성이 충분했음에도 그는 올스타에 뽑히지 못했다.

그러나 '실적'을 따지는 데 있어선 올스타보단 All-NBA Team이 더 객관적인 지표라고 할 수 있는데, Award Voting을 살펴볼 경우 첫 시즌인 96시즌은 57점을 획득하여 아슬아슬하게 서드팀에 들지 못했다. 98시즌에는 41점으로 All-NBA Team을 수상하지 못 한 선수들 중 다섯번째(포워드 중 두번째)에 해당되는 점수를 획득하였고, 이 두 시즌은 포스팀이 있었다면 턱걸이로나마 선정될 수 있었던 수준이었다. 즉, 로드맨은 올스타 리저브 멤버를 뽑는 감독들에게는 비교적 박한 평가를 받았을지 몰라도, All-NBA Team 투표자들에게는 오히려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는 것. 실제로 로드맨 스퍼스 시절에는 한번도 올스타에 뽑히지 못했지만[83] 정작 선정 인원수가 더 적은(15인, 포워드 6인) All NBA Team에는 뽑힌 바 있다.

단적인 예시로 2010년대 대표적인 빅3 구성으로 통하던 마이애미 히트의 3인자 크리스 보시는 4년간의 올느바 점수가 02/02/59/01로, 올NBA팀에 근접한 시즌이 한번이다. 또한 히트 이후 새로운 빅3를 구성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3인자 케빈 러브는 01/00/00/01로 형편없는 점수를 받으며 올느바 수상은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저 둘은 서부에 비허 스타뎁스가 약하던 10년대 동부라는 환경 덕분에 올느바에 근접하지 못한 시즌에도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즉, 보쉬는 올NBA팀 언저리급 시즌이 한번, 로드맨은 두번인 것이란 얘기가 된다. 뒤의 두 시즌은 플레이오프 활약이 떨어졌음을 지적받기도 하고 실제로 위에도 로드맨 플옵 활약이 기재되어 있지만, 정작 빅3의 대표적인 모델인 히트&캡스에서도 앞서 언급한 보시&러브, 노쇠화가 온 후반기 웨이드 등이 플레이오프에서 활약이 안좋았던 적이 있고, 역사상 최대의 슈퍼팀이라 불리는 2010 후반대의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도 17시즌 클레이 탐슨의 경우 플옵에서 폼이 영 좋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 팀은 특정 구성원이 플옵에서 부진했다는 이유로 빅3(골든스테이트는 빅4)가 아니라는 말은 듣지 않는다.

불스시절의 로드맨은 흔히 말하는 에이스&슈퍼스타보단 특급 롤플레이어에 가깝지만, 올느바 경쟁력을 토대로 '빅3의 3인자' 정도로 평하는 부류는 있을 수 있다. 애시당초 그냥 예전처럼 실력 좀 되던 선수들 세명이면 빅3라 부르는건지[84], 올스타에 나란히 뽑혀야 빅3인지, All-NBA Team에 선정되거나 이에 준하는 선수가 세명이어야 빅3인지, '에이스 롤'을 맡던 1~2옵션 출신이어야만 빅3에 포함되는지, 에이스 타입이 아니더라도 기량과 네임밸류가 올스타 or 올느바급이면(ex 드레이먼드 그린) 빅3에 포함되는지, 결성 직전까지의 활약과 결성 이후의 활약 중 어느 것이 판단 잣대가 되는지 등[85], 빅3의 정의와 기준에 대한 명확한 합의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로드맨이 '빅3의 3인자가 맞냐 아니냐'를 논하는 것 자체가 명확한 답이 나올 수 없는 주제이고 크게 의미있는 주제도 아니라는 것.

단, 애시당초 정형화 된 기준이 없는 '빅3'가 맞냐 아니냐를 따지면 의견이 갈릴지 몰라도, '슈퍼팀'이라는 키워드로 따진다면 조던-피펜-로드맨의 불스는 '아니다'에 가깝다. 애시당초 슈퍼팀이라는 건 그저 올스타~올느바급 세명이 있어야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빅3급에 해당되는 선수들이 인위적으로 모인 팀을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 조던/피펜이라는 팀 드래프티 조합에서 또다른 드래프티인 호레이스 그랜트가 로드맨으로 대체된 것을 두고 슈퍼팀이라고 부르기는 힘들다는 것이다.[86] 또다른 예시로 커리-그린-탐슨이라는 드래프티 3인방으로 빅3를 만든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역시 일반적으로 '슈퍼팀'이라 불리진 않았다. 이 완성된 조합에 무려 케빈 듀란트가 합류하면서 슈퍼팀의 대명사가 된 것. 이제와서는 결성 과정을 떠나 그냥 빅3, 혹은 빅2라도 뎁스와 구성이 좋고 강하기만 하다면 슈퍼팀으로 뭉뚱그리는 경우가 많아 불스가 이에 포함되는 경우도 있긴 하다.[87] 그러나 팀의 강약을 떠나서 슈퍼팀이라는 명칭의 '원래 의미'에 의거한다면 로드맨이 뛰던 시기의 불스가 이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추가로 엄밀히 따지면 올NBA팀 실적은 기량을 따지는 지표가 아니라 그 시즌의 성과를 따지는 지표이다. 뭔 차이냐는 의문이 들 수 있는데, 사실 마이클 조던이나 르브론 제임스같이 팀에서 확고부동한 에이스로 무한신뢰받고 있는 선수들의 경우 차이가 없다. 그러나 로드맨이나 보쉬처럼 3옵션 선수의 경우 차이가 난다. 간단히 말해 원래 에이스급으로 20-10을 기록하는 선수 A가 있고, 에이스급은 아니고 특급 롤플레이어인 선수 B가 있다고 치자. 일반적으론 당연히 A가 월등히 좋은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만약 A,B가 이들보다 더 뛰어난 선수들이 있는 팀에 가서 조력자 역할을 해야할 경우, 어차피 다른 팀에서 하던 궂은 일을 하는 B가, (원래 더 실력이 좋지만) 자기가 하던 일이 아닌 생소한 궂은 일을 해야하는 A보다 더 좋은 실적을 낼 수 있는 것이다.

즉 불스 시절 로드맨이 히트 시절 보쉬와 대동소이한 실적을 낸 것은 맞다. 그러나 이를 두고 보쉬/러브보다 더 뛰어난 기량을 지녔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 두 선수 모두 한 팀의 에이스로서 평균 20점 10리바운드 이상을 기록한 시즌이 여러번에 프랜차이즈를 이끌 슈퍼스타로 평가받던 선수였다. 당연하지만 로드맨은 데뷔 때부터 계속 롤플레이어였다. 좀 더 와닿을 만한 예를 들면 2016년의 경우 올NBA 세컨팀에 드레이먼드 그린이 올랐으나, 그가 나란히 세컨팀 포워드 자리를 차지한 케빈 듀란트만큼 좋은 선수라거나, 써드팀에 오른 폴 조지보다 윗급의 선수라고 여기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이때 그린은 퍼스트팀표를 40장 받아 36장 받은 듀란트를 앞섰다. 동일한 케이스로 이 시즌에 그린은 듀란트와 동급의 성과를 냈지만, 누가봐도 기량 자체는 듀란트가 월등히 더 뛰어나다.

로드맨과 보쉬/러브도 마찬가지 케이스이다. 선수로서 로드맨은 장단점이 극명히 갈리는 선수였고, 한번도 팀의 에이스급으로 평가받은 적이 없다. 그가 전성기였던 93년 당시 그의 트래이드 대상은 커리어 통틀어 2회 올스타/올NBA팀 0회인 션 엘리엇이었으며, 엘리엇은 그때까지 17.2점 4.6리바운드 3.8어시스트가 커리어하이인 선수였다.[88] 히트 합류 전 보쉬나 러브처럼 리크루팅을 받거나, 맥시멈 연봉을 오퍼받을 선수가 아니었다는 것이다.[89] 로드맨은 자신에게 딱 맞는 옷을 입어 최대한의 실적을 냈기에 맞지도 않는 역할을 해야했던 보쉬보다 약간 앞섰지만, 재능이나 기량 면에선 보쉬가 더 뛰어났던게 맞다.

사실 흔히 말하는 '1옵션감'들이 셋이나 모여 전원이 제 기량을 100% 발휘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케빈 가넷/ 폴 피어스/ 레이 알렌의 빅3를 굴린 보스턴 셀틱스를 그 예로 들 수 있는데, 이 중 3옵션이었던 알렌은 빅3의 조화를 위해 3점 슛과 오프 볼 무브의 비중을 늘려야 했다. 물론 그렇게 한 결과 훌륭한 시너지를 발하긴 했지만, 달리 말하면 알렌처럼 알찬 육각형의 다재다능한 선수가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을 적잖이 덜어내야 할 정도로 '3옵션이 된 1옵션급 선수'는 포기해야 할 것이 많다. 그리고 마이애미 히트의 빅3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로 히트 합류 초기에 3인자 크리스 보쉬는 예상보다 활약이 못했는데, 이는 그의 활동반경이 미드레인지이고 빅맨치곤 돌파를 즐기던 타입이라 르브론/웨이드와 동선이 겹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그는 장거리에서 캐치앤슛 비중을 늘리고 수비에 좀 더 힘을 쓰면서 이전보다 더 큰 공헌을 할 수 있었다.

불스의 조던-피펜-로드맨이 상술한 빅3들과 달리하는 점이 있다면 서로의 영역이 겹치지 않았다는 점. 피펜은 올라운드 플레이어이지만 스코어링보단 플레이메이킹과 수비에 특화된 선수였고, 로드맨은 아예 수비와 리바운드에 능력이 극단적으로 치중된 선수였다. 때문에 이 둘은 조던과 공존했을 때 '낭비되는 재능'이랄게 따로 없었다. 강력한 수비력이라는 공통분모는 서로 방해될 것 없이 빛을 발했고[90], 그 외에는 조던이 스코어링과 보조 핸들링을, 피펜이 메인 핸들링과 적당한 득점 지원을, 로드맨이 보드장악을 책임지며 각자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는 구성이었으니까. 즉, 알렌과 보쉬는 3인자가 되기 위해 가진 옵션을 일정부분 내려놓아야 할 선수들이었다면, 로드맨은 오히려 낮은 순번일수록 빛을 발하는 툴을 가진 선수였다.

올NBA팀 실적 위주로 보면 불스시절 로드맨과 히트시절 보쉬는 둘 다 수상에 실패했고, 수상에 근접한 시즌이 로드맨은 2번, 보쉬는 1번이어서 사실상 대동소이하다. '포스팀이 있었다면 턱걸이로 선정될만했다'는 것은 2013년의 보쉬도 마찬가지니까. 그러나 실질적인 기량 자체에서 둘은 확실히 차이가 있다.

이 점에서 용어 자체도 애매한 '슈퍼팀'과 '빅3의 일원'을 논하는데 혼선이 있게 된다. 위에 언급된대로 '당대 최강팀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세 선수 중 세번째 비중을 가진 선수'로서는 로드맨과 보쉬가 동일하며, 실적도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에이스급의 선수 세명이 모인 슈퍼팀의 일원'이라면 보쉬는 해당되지만 로드맨은 해당되지 않는다. 사실 이건 애초에 슈퍼팀이란 개념 자체가 희미했던 90년대와, 슈퍼팀이 생겨난 2010년도에 빅3란 용어의 의미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에 생기는 혼선이다. 90년대, 00년대만 하더라도 그냥 팀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세 명이면 빅3였다. 00년대 초반 가장 대표적인 빅3가 바로 밀워키의 글렌 로빈슨/레이 알렌/샘 카셀였다. 그러나 슈퍼팀의 시대가 열리면서 빅3에 대한 개념이 바뀐 것이다.

즉 이 문단의 목적인 '불스 시절 로드맨의 위상은 정확히 어느 정도였나'를 따져보면, 선수 개인의 기량이나 리그 내 평가로 크리스 보쉬처럼 에이스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슈퍼스타는 결코 아니었으나, '자신에게 딱 맞는 롤을 줘서 최대한의 효율을 발휘할 때는 올스타나 올NBA서드팀에 거의 근접할 정도의 실적을 낼 수 있는 특급롤플레이어'라고 이해하는 게 가장 정확하다.[91] 물론 이는 정규시즌 한정이고, 플레이오프에서는 96년을 빼곤 큰 도움이 되지 못했으며, 96파이널에선 맹활약했지만 97,98파이널에선 둘 다 아쉬운 모습을 보였다.

5. 수상 내역

수상 내역
파일:nbachampionfts.png NBA 챔피언 5회 (1989-1990, 1996-1998)
파일:NBA 로고.svg NBA 리바운드왕 7회 (1992-1998)
파일:NBA 로고.svg NBA 올해의 수비수상 2회 (1990-1991)
파일:NBA All Star.png NBA 올스타 2회 (1990, 1992)
파일:NBA 로고.svg 올-NBA 서드 팀 2회 (1992, 1995)
파일:NBA 로고.svg NBA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 7회 (1989-1993, 1995-1996)
파일:NBA 로고.svg NBA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 (1994)
파일:HOF-Logo.png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2011)

6. 말말말

내가 막는 상대가 에이즈에 걸렸던 말던 상관하지 않는다. 어찌됐든 그를 내던져버릴 것이다.
에이즈 환자였던 매직 존슨의 복귀에 대해

7.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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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그 증거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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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가서 보니 웨딩드레스를 입은 본인이었다. 알고보니 자신의 자서전 홍보를 위한 낚시였던 것. 웨딩드레스 복장 덕분에 그는 한 패션잡지가 선정한 '가장 옷 못입는 여성'에 뽑히기도 했다.

8. 북한 관련 에피소드

북한 관련하여 매우 특이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엄청난 친북 성향이라기보다는 김정은 개인과 친분이 있어 수 차례 북한에 초대받아 방문하였는데, 이 때문에 미국-북한 간 외교관계에 희한한 변수로 떠올랐다. 방북 이슈가 없었다면 한국에서는 그저 농구팬 사이에서만 회자되고 기억될 법했으나, 로드맨이 북한을 방문함으로써 농구에 별 관심 없는 일반인에게도 자신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한국 시각으로 2013년 2월 26일, 북한을 전격 방문했다. 미국의 묘기 농구단인 할렘 글로브트로터스 선수들과 함께 왔는데 농구 클리닉을 위해 방북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에서는 김정은이 데니스 로드맨의 팬이여서 그를 초청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오기도 했다. 실제로 김정은이 농구광이며 데니스 로드맨의 광팬인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데니스 로드맨의 방북은 북한 강석주 내각 부총리가 계획했다고 한다. 방북 이후 북한 측의 극진한 대접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훗날 로드맨이 밝히길 자신이 첫번째 초대선수가 아니라 2013년에 김정은이 마이클 조던에게 오라고 초대했지만 조던은 거절했고 자신은 Yes라고 대답하여 간 것이라고 밝혔다. 기사

북한 측도 로드맨과 김정은이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장면을 지속적으로 방영하기도 했다. 그래서 로드맨은 '인간 김정은'에게 감화되었는지 귀국 후 "김정은에 대한 오해를 풀고 싶다"며, "김정은은 독재자가 아니라 좋은 사람(Good Man)"이라고 주장하고 돌아다니고 있다.[100]

로드맨의 어린 시절 가족에 대한 트라우마와 이로 인한 어린애같은 성격, 한 번 믿음을 주기 시작한 상대는 끝없이 신뢰하고 의지하는 그의 성향을 보면 이런 태도는 당연하다. 로드맨 본인이 국제 정세에 그리 밝은 편이 아니라 북한정권의 해악에 대해 잘 모를 가능성이 높은데, 어딜가나 또라이 취급받는 자신을 따뜻하게 받아주었다면 앞뒤 가리지 않고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정은 본인이 NBA광팬인데다 시카고 불스를 좋아했기 때문에 로드맨에게 더욱 호의적으로 대했을 것이다. 실제로 로드맨의 그간 행보는 전혀 계산적이지 않고 자기가 싫어하는 대상(ex:밥힐 감독, 데이빗 로빈슨)은 무조건 까고, 자기가 인정한 대상(필 잭슨, 척 데일리, 마이클 조던 등)은 무조건적으로 치켜세우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로드맨은 LA레이커스 입단 인터뷰 당시에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거나, 명예의 헌액 당시 지나치게 흥분한 상태에서 연설을 하다가 감정에 북받혀 눈물을 펑펑 쏟기도 할 만큼[101] 감정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이런 로드맨이 "친구"로 받아들인 김정은이라면, 아무리 김정은이 쓰레기라도 그걸 생각하기보다는 덮어놓고 옹호를 할 것이 명확했다. 하여튼 간에 결론은 이 사람은 북한 관련 전문가, 한반도 관련 전문가는 커녕 해당 사건 이전엔 딱 일반적인 미국인 평균수준으로 한국에 대해서 알고 있다가 농구란 인연 하나로 덜컥 국빈초청 받아서 실컷 재밌게 관광이나 하고 자기가 보고 온것만 얘기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로드맨을 옹호하자면 본인은 결코 이거 이상 자기가 무슨 대단한 대북전문가인양 행세한 적도 없다. 그런데 이런 문맥은 무시하고 한국 언론이나 대중에서 로드맨의 의견을 개인으로서 김정은도 아니고 북한 정권에 대한 대단한 증언으로 악인용하는 게 문제다.

한번은 호텔에서도 김정은을 찬양하는 목소리를 높이다가 호텔바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물론 쫓겨난 것은 김정은을 찬양해서가 아니고 그냥 단지 시끄러워서. 여하튼 원래도 각종 기행 때문에 로드맨을 향한 언론이 그렇게 좋다고 보긴 힘든 상황이였으나, 김정은 찬양을 시작한 이후로는 더더욱 로드맨을 향한 언론의 태도가 냉소적으로 변했다.

게다가 2013년 4월 북한이 북한에서 반북 운동을 전개했다는 혐의로 북한 관광사에서 일하던 한국계 미국인 케네스 배(배준호)[102]를 구금한 뒤 15년의 노동형을 선고했는데, 로드맨은 트위터를 통해 버락 오바마의 무능함을 비판하고 나서면서 '친구' 김정은에게 자신을 돕는 셈 치고 그를 석방하라는 트윗을 날려서 언론의 웃음거리가 되기에 이르렀다.

2013년 9월에 북한을 또 방문했다. 이번에는 친구인 김정은을 만나러 간 것이며 외교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케네스 배 석방 문제를 협의할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미국 정계에서는 심각하게 불편한 기색인데 로버트 킹 북한인권특사의 방북이 좌절된 이래 민간인인 로드맨이 북한을 가서 김정은을 만나면 사적으로라도 배의 이야기를 꺼낼 가능성이 높고, 북한이 이를 수락해 배를 석방한다면 미국 외교관들은 웃음거리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로드맨이 방문을 끝내고 돌아왔지만 미 정치권의 우려와는 달리 케네스 배가 석방되지는 않았다. 자신이 김정은과 리설주의 딸인 김주애를 안아보았다고 한다. 로드맨은 자신은 북한 사람과 미국 사람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한다.

10월 17일 영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김정은에게서 초대받았을 당시 경험을 말하면서 "김정은은 세계의 어느 갑부들도 놀랄 만큼 호화로운 생활을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증언은 로드맨의 의도와는 반대로 "아, 그래? 역시 김정은은 주민들을 굶주리게 하면서 핵개발과 사치에만 열을 올리 놈이었군!!"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만 강화시킬 소지가 더 크다. 다르게 보자면 로드맨이 무슨 대단한 북한 정권의 의견을 대변한다니 이딴게 아니라 첨예한 정치적, 시사적 문맥 같은거 생각 안하고 그냥 자기 생각만 말하는 속편한 사람이란 것도 알 수 있다.

2013년 12월 19일 북한을 3번째로 방문했다. 장성택이 숙청된 이후 첫 방문이라 누가 누굴 숙청하느니 하며 인터넷상에 드립이 넘쳐나고, "정말 북한에 뭔가 좋은 거라도 있나보다"라고 기쁨조 성접대라도 받는 게 아니냐는 억측이 횡행하기도 했다. 최지룡은 로드맨이 리설주와 간통해서 리설주가 흑인 아기를 낳는 만평을 그리기도 했으며 애국청년 변희재에서도 변희재가 등산을 갔을때 그와 같이 식사하면서 국정원이 대북심리전으로 김정은, 리설주, 로드맨 그룹섹스하는 플래시 드라마를 만들어야 한다는 개드립이 나오기도 했다.

2014년 김정은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서 다시 농구팀과 방문했다.

현재 미국인 중에선 세계 최고의 정보기관인 CIA, NSA 등을 제치고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며 유일하게 북한의 통수권자인 김정은을 4번이나 만난 인물이다. 이 때문에 미 행정부는 현재 미국에서 로드맨보다 못한 정보기관이라는 비아냥을 듣고 있다. 그래서 자존심이 상했는지 미 행정부는 로드맨의 앞으로 예정된 북한행에 관심을 기울이고 집중적으로 감시 및 제재를 할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북한을 자주 방문하는 이유는 HBO가 로드맨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북한을 방문한 NBA 농구스타라는 이슈만으로도 엄청난 시청률을 예고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겠다. 첫 번째 방북 분량은 이미 지난 6월에 방영되었다. 미국인들에게 상당한 관심을 끌기는 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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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7일엔 친선 농구경기를 하기 위한 방북 후 CNN의 아침 뉴스 프로그램인 New Day에 출연했다가 김정은을 두둔하는 발언을 하며 피랍자인 케네스 배 씨에게 잘못이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며 욕설을 퍼붓는 등 앵커[103]와 설전을 벌였고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다. 그간의 비판이 본인은 상당히 억울했던지 "나의 방북은 세계를 위한 위대한 생각인데 사람들은 항상 내가 하는 것을 무시한다. 마이클 조던 르브론 제임스 같은 이들도 세계를 위해 멋진 일을 하는데 왜 나한테만 이러느냐"고 했다. 문제의 CNN 인터뷰 영상

쿠오모가 케네스 배의 석방에 대해 말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을 하자 로드맨은 화를 내고 욕설을 섞어가며 "케네스 배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고 있느냐.[104] 마이크 뒤에 숨어 있는 당신과 달리 우리야말로 평양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라고 밝혔고 더불어 김정은에 대해 로드맨은 "그는 나의 친구이며, 나는 그를 사랑한다(I love my friend)"고 밝혔고, 마침내 쿠오모 역시 빡돌아서 "지금 고모부를 죽이고 미국인을 인질로 삼은 패륜아를 사랑한다는 거냐?"며 화를 내어 양측간에 고성이 오갔다.

결국 같이 딸려간 선수 찰스 스미스가 이 정도로 세계 여론이 우릴 비판할 줄은 몰랐다고 하며, 자신들은 평화를 바랄 뿐이고 로드맨이 김정은을 친구라 부르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라며 쉴드를 시도해봤지만, 로드맨이 말을 자르고 끼어들어서는 "앵커 당신은 지금 마이크 뒤에 앉아있지만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하기 위해 직접 북한에 왔고, 언젠가는 우리 덕분에 북한의 문이 열릴 것"이라며 근자감을 표출하여 폭풍 욕설 세례를 당하는 중이다. 이후 로드맨은 이 건에 대해 자신이 술에 취해 있었다며 사과했다.[105] 이에 대해서 북한에서 김정은 욕을 하라고 시킨 앵커가 잘못했다는 개드립성 옹호도 있었다.

2014년 1월 8일에는 김정은의 앞에서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국내 네티즌들에게는 폭풍으로 까이고 있다.

여러모로 장성택 처형 사건 이후 김정은에 대해 악화된 국제 여론덕분에 로드맨의 방북 기행 역시 더더욱 안좋은 평판을 얻고 있음은 분명하다. 정작 본인은 장성택 처형건과 자신과 김정은의 친분은 무관하며 관심없다는 반응(…). 미국의 모 하원의원은 로드맨을 일컫어 " 히틀러와 점심식사 같이할 양반"이라고 비판했고, 2008년 공화당 대선 후보로도 출마했던 거물급 상원의원 존 매케인도 로드맨을 '백치'(idiot)라고 부르며 비판에 합세했다.

한편 로드맨의 방북을 지원하던 도박업체가 인권단체들의 압박에 지원을 끊겠다고 하며, 앞으로 로드맨 일행의 방북 비용은 북한이 부담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폭풍같이 까이고는 방북을 중단한다며 눈물까지 흘리며 밝혔다.

그런데 2014년 5월 5일, 한 패션문화잡지에서 지난 1월 방북 때 장성택을 봤다는 다소 황당한 주장을 한 글이 실렸다. 그러나 장성택의 숙청은 일개 언론이나 정부 기관의 카더라 수준이 아닌, 아예 북한 정부 자체가 숙청을 대놓고 공표하는 상황인지라 데니스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물론 북한에서 장성택의 목숨만 붙여놓고 어딘가에 감금했을 가능성은 아주 작게나마 있을 수 있지만, 이 가정으로도 로드맨이 멀쩡한 장성택을 보았을 리는 없다. 로드맨이 일부러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면 단순히 장성택과 외모나 이름이 조금 비슷한 인사를 착각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11월 8일 케네스 배가 석방됐다. 데니스 로드맨은 자신이 선처를 호소해 석방됐다고 주장했다.

아무튼 이런 로드맨의 방북이 모티브가 되어 디 인터뷰라는 영화가 제작되었다. 토크쇼 진행자가 김정은을 암살한다는 내용인데 영화 중간에 농구하는 장면만 봐도 누구를 모티브로 했는지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예기치 않는 엄청난 폭풍을 몰고온다. 자세한건 디 인터뷰 문서 참조.

2017년 6월 13일 5번째 방북한다고 미 CNN이 북한 내 복수의 관계자를 인용해 보도했다. 기사 이번 2017년] 6월에 북한을 방문하는 것에 대한 인터뷰에서 북한의 문호를 개방하겠다고 말을 하였으며, 이 시점에 맞추어서 북한에 수감된 오토 웜비어가 석방되었다. 오토 웜비어는 혼수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인도적인 차원에서 석방이 된 것으로 북한에서는 발표하였다. 또한 이 때쯤에 도널드 트럼프의 저서 중 하나인 협상의 기술을 건네주었다.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에 따르면 로드맨의 기행은 북한 내에서도 충격을 주고 있다고 한다. 할렘 글로브트로터스의 유니폼을 선물해 김정은이 이를 들고 흔들며 자랑하는 모습이나, "베스트 프렌드"인 김정은에게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거나 맞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김정은을 신적 존재로 믿게 교육하는 북한 사회에서는 낯선 풍경이라고 한다. 아니, '민족의 태양' '절세의 위인' '우대한 선군영장' 등 수백 가지의 찬양 수식어가 따라붙고 온 세상이 우러러보는 인물이라며 신처럼 여기라 교육받는 김정은이 한낱 '싸구려 러닝셔츠'를 선물로 받고 흔들어대며 자랑해대고 김정은을 '베스트 프랜드'라고 부르며 옆자리에서 태연하게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담배까지 피워대던 모습[106]만 봐왔던 사람들은 미국의 일개(?) 농구선수인 로드먼이 온 세상이 우러러본다는 김정은을 '하대'하는 듯한 모습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107] #

그리고 북미정상회담이 다가오자, 로드맨도 트위터로 싱가포르로 가서 가능한한 모든 지원을 하겠단 트윗을 남겼다. 그리고 회담 당일 CNN과의 인터뷰에서 오바마 정부가 자신의 요청을 묵살하고 오히려 자신을 24시간을 감시했다는 충격적인 폭로를 했다. 근데 이건 그럴 만도 한 게, 어느 나라건 간에 대놓고 자국의 적국을 자주 드나들거나 적국을 옹호하는 자라면, 당연히 자국 정부나 첩보기관의 어그로를 끌 수밖에 없다. 그러니 로드맨같은 부류를 요주의 인물로 보고 감시하지 않을 수 없는 판국이다.[108]

데니스 로드맨의 북한 방문에 대해서는 TV 조선에서 데니스 로드맨의 평양 방문기라는 방송을 번역하여, 2017년 6월 18일 방영하였으며, 북한의 실상과 데니스 로드맨의 방북에 대한 여러가지 뒷이야기를 방영하였다. 해당 다큐멘터리 제작에는 북한 정부도 개입했는데, 계약서도 제대로 쓰지 않고 무작정 들이밀었다가 다큐멘터리 시작에 장성택 처형이 나오는 바람에 북한 측이 발칵 뒤집혔다. 어떻게든 그걸 지우라고 애걸복걸에 협박도 불사했지만 그걸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고 관련자들만 죽어났다고 한다.

최근에 진행된 한 인터뷰에선 김정은이 어렸을 적 불스의 팬이었다며 마이클 조던을 북한으로 초청하려 했는데, 조던이 거절하여 다음으로 로드맨을 불렀다고 한다. 이에 흔쾌히 수락한 로드맨은 북한에 도착해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수만 명의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박수쳐주는 줄 알고 놀랐다하며 관중 속 어느 한 사람을 보고 한마디 했는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저 땅꼬마 새끼는 누구야?" 라고 한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우리의 지도자입니다"라고 하였으나 그 대답에 다시 "너희의 무슨 지도자?"라고 하였다고 한다. <데니스 로드맨의 평양 방문기>를 보면 김정은을 만나서 건배를 하던 중 "당신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개판 좀 쳤지만 당신은 잘 하고 있다."라고 발언했고 최고존엄 모독 발언에 김정은도 어안이 벙벙해져서 잠시 가만히 있다가 그냥 허허 웃었다고 한다.

8.1. 북미정상회담 관련 인터뷰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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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N에서 북미정상회담이 이루어짐에 따라 회담 이후 데니스 로드맨과 인터뷰 시간을 가졌다. 여기서 로드맨은 김정은에 대한 얘기와 김정은과 트럼프가 만날 것이다라는 자신의 주장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고 비웃었다고 말하며 인터뷰 도중 눈물을 흘렸다. 이에 CNN 크리스 쿠오모 앵커는 매우 당황한 모습을 보였고,[109] 로드맨은 북미정상회담이 잘 성사되어서 매우 기쁘다고 얘기하며 오바마한테도 이야기했지만 무시당했다라고 이야기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싱가포르에 직접 가기는 하였지만, 김정은을 만나지는 못했으며 오토 웜비어 사망 이후 내려진 미국 시민권자들의 방북 금지령은 여전히 유효하고 북한이 서방인물들에 대한 입국금지를 2023년 12월 현재까지 풀지 않아 재방북 가능성은 요원하다.

어쨌거나 김정은은 로드맨이 자신의 실드를 치는 것을 흡족하게 본 모양인지 2022년 12월에 발간한 김정은 숭배 책자 <세계가 본 김정은령도자>에서 로드맨의 일화를 2개나 실으면서 로드맨을 선견지명이 있는 미국인으로 칭찬해주었는데, 소개된 일화 중 하나가 바로 로드맨이 북미정상회담을 보고 눈물 흘리는 장면이다. 나머지 하나는 2013년 로드맨의 방북이며, 로드맨이 자신의 셔츠를 김정은에게 바친 것이 김정은이 자신을 친구라고 부르면서 친필수표(사인)까지 내려주자 감명받은 로드맨이 김정은에게 흠모되어 조공으로 바친 것이라고 주장했다.

9. 정치 성향

도널드 트럼프의 팬이며 그의 몇 안되는 흑인 지지자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110] 트윗으로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하고 찬양하는 트윗을 여러번 날린 적이 있다. 실제로 트럼프와 친분이 있는 사이기도 하다. 상술했듯 로드맨이 김정은에게 트럼프의 책을 선물한 적 있다고 한다. 이는 북한에게 우호적이던 그의 행보와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트럼프가 취임한 직후만 해도 이런 로드맨의 모습은 상당히 모순이라는 평가가 있었지만, 2018년 이후 트럼프가 북미정상회담을 추진하는 등 급속도로 북한과 접촉하는 모습을 보면 격세지감이다.

10.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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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관련 문서



[1] 핀란드 리그 [2] 참고로 NBA는 80년대부터 평균 신장이 201~203cm를 오갔다. 즉, 로드맨은 딱 중간정도 되는 체격으로 자기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선수들을 제치고 리바운드를 쓸어담은 것. [3] 91-92시즌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시절. [4] 이 때문에 사건사고나 논란거리가 많았던 선수치곤 미화를 받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들이 있다. [5] 나중에 누나 데브라와 킴은 루이지애나 공과대학교와 스티븐 F. 오스틴 대학교에 각자 재학할 적에 올 아메리칸까지 올랐고, 특히 데브라는 1981 및 1982년 NCAA 여자농구 전국대회에서 두 차례 우승 트로피를 따게 했다. [6] 본인이 다큐멘터리에서 1년에 1피트(30.5cm)가 자랐다고 한다. [7] 로드맨은 배드 보이즈의 막내란 이미지지만 주장 아이제아 토마스와 동갑이고 (데뷔는 토마스가 5년이나 빠르다.) 고참급인 빌 레임비어보다 불과 두살 아래였다. 시카고 불스에서도 조던-피펜-로드맨 트리오 중 나이는 제일 위지만 연차는 제일 막내포지션 로드맨이 상대편 선수와 시비가 붙자 조던이 뒤에서 안고 "그만해 데니스! 그만해!(That's enough, Dennis. That's enough)" 하고 혼내는 영상도 있다.(That's enough는 보통 부모들이나 선생들이 아이들 따끔하게 혼낼 때 많이 쓰는 말이다.) 그러나 불스 왕조 해체 후 마음을 잡지 못했다. 1999시즌 레이커스 시절엔 팀 분위기를 개판치다가 짤렸다. 안타까운 것은 짤린 다음 시즌에 필 잭슨 감독이 레이커즈에 부임했는데, 한 시즌만 버텼으면 달랐을 수도 있다. 2000 시즌에 댈러스에서도 적응 실패. [8] 그 당시 로드맨이 얼마나 순진했냐면 데일리가 로드맨에 관해서 평가하기를 "로드맨은 농구를 열심히 하는거 밖에는 아무것도 모른다"라고 할 정도. 이 점은 필 잭슨도 마찬가지였는데, 로드맨은 두 사람에 대해 진심으로 존경심을 표하며 father figure이라고 부른다. 두 사람 모두 로드맨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단 걸 보여주는 것. 불스 시절 로드맨은 피스톤즈 시절과 다르게 코트 밖에서 사고를 적잖히 치고 있었지만, 불스도 최대한 자유로운 그의 성격을 존중해주고 로드맨도 조던과 잭슨을 존중해 어느 정도 적정선은 지켰다. 실제로 로드맨은 조던에게 개길 생각도 못 했다는 스티브 커를 포함한 동료들의 증언도 있다. 반면 그를 컨트롤하려고 한 밥 힐은 욕만 드립다 먹고 결국 그를 버려야했다. [9] ESPN 다큐멘터리 '30 or 30'의 배드보이즈 편에서 사건에 대해 마혼이 코멘트한바 있는데, 마혼은 피스톤즈 동료들과 끈끈한 사이였고 팀을 떠난 것도 본의가 아니었다. 1989-90 당시 새로 창단된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에 의해 확장드래프트에서 지명된 이후 필라델피아로 트레이드된 것.(미네소타에서 뛰길 거부했다) 이 소식을 듣게 된게 하필이면 우승 퍼레이드 도중이었는데, 이 때문에 마혼은 2014년에 제작된 해당 다큐멘터리에서 이에 대한 얘기를 하던 도중 눈물을 보일 정도로 섭섭해했다. 그런데 당시 피스톤즈 동료들은 이런 마혼의 사정과 상관없이 그를 진짜 적처럼 대하며 적대적으로 나선 것. 필라델피아는 피스톤즈를 위협하는 신흥강호 중 하나였기에 플레이오프 직전에 더욱 거칠게 대한 것이다. 결국 이 갈등은 이후 레이업하던 마혼을 로드맨이 하드파울하자 그가 욕을 퍼붓고, 그 마혼의 얼굴에 빌 레임비어가 모욕적으로 공을 들이밀자 폭발하려던 와중에 생뚱맞게 레임비어를 극혐하던 찰스 바클리가 갑툭튀해 레임비어와 난투를 벌이게 된다. [10] 다만 레임비어는 또라이 이미지와 달리 항목에도 나와있다시피 매우 침착하고 계산적인 선수였다. 그는 상대 선수들을 몰래 때리고 도발했지만 결코 퇴장이나 징계까지 가는 일은 피하도록 선을 지켰다. 실제로 그는 징계 없이 6년 넘게 연속출장한 기록을 갖고 있기도 한데, 이는 NBA역대 5위에 해당된다. [11] 특히 조던의 압박이 매우 컸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아이재아 토마스의 오랜 동료이자 배드보이즈의 멤버이던 존 샐리는 훗날 인터뷰에서 토마스의 드림팀 합류를 막은 것은 조던이 아닌 매직 존슨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조던은 당시 토마스에 대한 코멘트 자체를 거부했었고, 드림팀 합류 과정에서 이와 관련된 억측이 이어지자 아예 인터뷰에서 "이제 아이재아 토마스 관련 질문은 그만해주세요"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12] 그는 1985-86시즌 당시 유타에서 평균 29.8점을 올렸으나 바로 다음 시즌인 1986-87시즌에 피스톤즈에서 21.5점을 넣는데 그쳤다. [13] 댄틀리는 2014년에 방영된 ESPN의 "30 for 30" 배드 보이즈 편에서도 인터뷰로 "아이제아 토마스가 배후에 있었다"는 의심을 풀지 않았다. 정작 GM 맥클로우스키는 "토마스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고 했지만. [14] 당시 영상을 보면 데일리 감독이 작전지시를 할때 로드맨이 눈치를 보며 "마크(어과이어) 투입하실 건가요?"라고 하자 데일리가 단호하게 "아니야!"라고 하고, 서서 지시를 듣던 어과이어가 로드맨의 어께를 두들기며 격려해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참 선배(드래프트 연도로 치면 5년 차이다), 그것도 주장과 친하기까지 한 선배의 주전 자리를 대신 꿰차게 된 것은 심성이 여린 로드맨 입장에서 다소 껄끄러울 수 있는데, 당사자인 어과이어가 이를 받아들이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서서 격려해주었기 때문에 로드맨이 부담없이 적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토마스는 로드맨이 자신에게 "당신들이 괜찮으면 받아들이겠다"고 했다고 회고했다. [15] 바로 이것이 어과이어와 댄틀리의 차이였다. 실력으로 말하자면 댄틀리가 몇수는 위일지언정 댄틀리는 자존심이 높은 선수였기에 그가 로드맨에게 자리를 내준다는것은 상상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어과이어는 실력만 놓고보면 로드맨에게 한참 앞서지만 피스톤즈로 온 이후로는 그런것은 염두에 두지 않고 승부를 위해서 모든걸 내줄 수 있는 그런 마인드를 가졌던 것이다. [16] 이후 두번째 우승과 1991시즌까지 피스톤즈의 주전라인업은 토마스-조 듀마스-로드맨-빌 레임비어-에드워즈로 센터 두명을 올리는 트윈타워 라인업을 쓰게 된다. 시카고의 파워포워드인 호레이스 그랜트가 레임비어와 악연이 높은 것도 자주 매치업되었기 때문. [17] 사실 팬들에게는 스퍼스 시절과 불스 시절 기행이 잘 알려져있지만 선수로서 로드맨은 피스톤즈 시절이 훨씬 거칠고 더티했다. NBA는 90-91시즌부터 플래그런트 파울 처벌을 강화하는데(플래그런트 2개 적립시 즉시 퇴장), 이전까지 플래그런트 파울 처벌은 '파울당한 팀의 감독이 자유투 던질 선수를 직접 지정할 수 있다' 이것 뿐이었다. 즉 조던처럼 자유투 잘 쏘는 선수들한테는 플래그런트 파울은 일반 파울이나 마찬가지였던 것. 이 상황이니 당시 피스톤즈의 기조는 "파울을 하려면 상대방을 (득점을 확실히 못하게) 무너뜨려라"였고, 이런 수비가 극에 달한 '조던룰'의 대상자 마이클 조던은 로드맨이 대놓고 공중에서 잡아채 내동댕이쳤던 적도 많다. [18] "유일한 문제점은 나와 포포비치의 사이가 안 좋았다는 점이다. 왜냐면 나는 새 계약을 하길 원했는데, 그는 (새 계약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스퍼스)은 윌 퍼듀를 받고 날 트래이드했다"(The only thing that wasn’t right was me and Popovich didn’t get along, because I wanted a new contract and he wouldn’t give me one. So, they decided to trade me for Will Perdue.) 아래 로빈슨 관련 인터뷰 링크 참고. [19] 필 잭슨 감독과 처음으로 만난 미팅 자리에서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마스터할 수 있냐는 잭슨의 질문에 전혀 문제될 게 없으며 "그 전술은 마이클 조던을 찾아내 그에게 공을 건네주는 거잖아요"라고 답했고, 잭슨은 그 대답을 마음에 들어했다. [20] 이게 웬 생뚱맞은 소리냐라고 할 지는 모르겠지만 로드맨이 은퇴한 후 심리학자들의 행동분석에 의하면 그의 성격이 실제로는 대단히 여리고 타인의존적인 점이 많다고 한다. [21] 이미 로드맨과는 배드 보이즈 시절부터 친분이 있었다. 그 당시 존 샐리가 회상하기를 자기가 광적인 애였고, 로드맨은 양같이 순한 아이었다. 물론 이는 코트 밖에서 성격을 얘기한것이다. 샐리는 성격이 굉장히 외향적이고 활발한 인물이었지만 로드맨은 과묵하고 소심한 성격이었기 때문. 시카고 시절에도 기행이 많고 흥분하면 횡설수설하는 성향이 있지만 원래 말을 많이 하는 인물이 아니다. 반면 코트위에서 샐리는 상당히 매너가 좋은 선수였지만 로드맨은 굉장히 피지컬하고 거칠었다. [22] 로드맨이 조던과 문제를 일으키긴 커녕 개길 생각도 못 했다는 점은 스티브 커를 포함한 여러 선수가 증언한 바 있다. 실제로 1997-98시즌 도중 오랜만에 많은 경기에 출전하며(80경기) 스카티 피펜의 공백을 메운 로드맨은 시즌 도중 휴가를 요청했는데, 이때 로드맨은 잭슨을 통해 조던을 불러 그의 허락을 구했으며, 48시간 휴가 후에도 그가 복귀하지 않자 로드맨을 직접 끌고온 것도 조던이었다. 이때 휴가를 요청받았을 때 조던의 반응은 "씨x 휴가갈 사람은 나지"(실제로 조던은 복귀 후 단 한 경기도 결장하지 않았다)고 했으며, 조던이 로드맨의 아파트에 쳐들어갔을때 같이 있던 로드맨의 연인 카멘 일렉트라는 재빨리 숨었다고 한다. 30대 중반이 넘은 남자들인데도 뭔가 귀여운 에피소드고 실제로 이에 대해 얘기하는 조던의 영상을 보며 피펜과 로드맨 모두 껄껄 웃었다. 어쨌든 '그 로드맨이' 동료 빠졌다고 얌전히 사고 안 치고 뛰는거나, 조던에게 굳이 휴가를 허락받거나, 잡아오러 왔다고 얌전히 복귀하는 걸 보면 로드맨이 조던을 완전히 리더로 인정하고 따른 걸 알 수 있다. [23] 실제로 조던은 같은 팀의 빌 카트라이트와 호레이스 그랜트, 피펜은 훗날 로켓츠에서 찰스 바클리/포틀랜드에서 라시드 월러스, 로드맨은 스퍼스/댈러스/레이커스의 동료들과 갈등을 빚었다고 보도되었으나 불스 시절에는 조던/피펜/로드맨간 마찰이 생겼다는 보도는 없었다. 또한 그렇게 조던과 갈등을 빚은 그랜트와 카트라이트도 인간적으로 서로 불편해한 정도였지 이게 경기력에 지장을 주거나 (인터뷰 등을 통해) 외부에 드러나는 일도 없었다. (실제로 그랜트는 조던에 대한 불호와 별개로 그의 실력은 역대 최고라고 항상 인정한다) 즉 조던이란 인간에 대한 호불호는 있을 지언정, 조던이 있는 팀에서 그의 리더십에 반발해 경기에 지장이 있는 일은 없었다. [24] 1996-97시즌 초반에 12월 17일 경기인데, 직전 오프시즌에 샤킬 오닐을 영입한 레이커스는 이미 두각을 나타내고 있던 젊은 스타들 닉 반 엑셀, 에디 존스와 함께 본격적으로 우승후보라고 할 수 있는 전력을 갖추게 되었다. 불스는 이날 경기 내내 끌려가며 4쿼터를 10점 이상 뒤진 상태에서 시작했는데, 쿠코치가 4쿼터와 연장에 신들린 듯 3점슛 소나기를 퍼부어 연장전에서 겨우 역전, 23초를 앞두고 2점차로 간신히 앞서는 상황에서 로드맨이 수비리바운드를 잡은 상황이었다. [25] 즉, 여기서 로드맨이 괜히 주먹을 날리는 등 뻘짓을 해 테크니컬 파울을 받게 되면 자유투1개 + 공격권을 잃게 되고 상대편에는 불붙은 반 엑셀이 있기 때문에 기껏 얻은 리드를 날릴 가능성이 높았고, 이 때문에 엉뚱한 짓을 저지르기 전에 다급하게 말린 것이다. [26] 로드맨은 조던과 피펜이 최고의 원투펀치 중 하나라면서, 르브론보다 조던이 비교도 안되게 뛰어났다는 걸 여러 번 강조했다. 참고로 이 인터뷰는 조던 찬양보다는 르브론 까는 게 주된 내용이다. [27] 보통 자신의 농구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게 관례이다. 또한 소개자는 이미 명예의 전당 멤버여야 한다. 조던의 경우 어린 시절 우상인 데이빗 톰슨을 선택했고, 스카티 피펜은 마이클 조던을 선택했다. [28] 마이크 타이슨의 실질적 아버지였던 커스 다마토같은 경우다. [29] 이것도 멘탈의 일부라면 일부겠지만 2006 월드컵 결승전에서 지네딘 지단이 폭발한 걸 생각해보자. 지단이 1998년 월드컵 이후 멘탈이 약해서 흥분 잘하던 선수인가? [30] 로드맨의 이상한 멘탈은 김정은을 보러 북한에 찾아가서 친선경기를 가진 후 미국방송사와 생중계 인터뷰를 할 때 아나운서가 친구인 김정은을 비난하자 생방송 중에 필요이상으로 흥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조던은 상대팀이 동료들을 괴롭히는 걸 절대 두고보지 않았다. 1992년 플레이오프 닉스 시리즈 도중엔 피펜과 싸움꾼으로 유명한 자비에 맥다니엘 사이 분위기가 과열되자 피펜을 끌어내고 본인이 맥대니얼과 머리를 맞대고 으르렁거리는 장면이나(이 때 슬로모션으로 조던의 입모양으로 보면 'bitch'라고 한 게 또렷하게 확인된다), 론 하퍼를 가격한 상대 선수에게 심판 몰래 배빵을 날리고 "한번만 더 그러면 가만 안 두겠다"고 한 건 유명한 일화다. 로드맨이 즐겁게 농구했던 피스톤즈와 불스엔 이렇게 자신이 믿고 따를만한 강력한 리더(토마스, 조던)과 이해심 깊고 사람을 잘 다루는 감독(데일리, 잭슨)이 있었으며, 둘 중 하나라도 없던 다른 팀에선 매번 사고를 쳤다. 어찌보면 이런 팀들, 그것도 역대급 강팀들에서 꽤 오랫동안 뛸 수 있었던게 행운인 셈. [31] 핀란드 리그에서 1경기 뛴적이 있다. [32] 쏘프는 전성기를 감안해도 로드맨보다 확연히 아래이긴 하지만 20-10을 기록한 적 있는 엘리트 빅맨이고, 벅 윌리엄스는 올스타 3회, 올NBA세컨팀 1회, 올디펜스 퍼스트팀 2회, 세컨팀 2회에 선정된 선수이다. 결과적으로 올스타 1회를 제외하면 메이저 수상 이력이 없었던 쏘프야 그렇다 쳐도, 윌리엄스는 반지만 없을 뿐 딱히 로드맨보다 딱히 급이 낮은 선수가 아니었음에도 명전에 가지 못했다. 로드맨과 윌리엄스가 공유하는 강점은 리바운드와 수비였는데, 로드맨이 그 두 분야에서 역대급의 능력을 가진 선수였다면 윌리엄스는 그정도는 아닌 대신 평균 18점이상 기록 한 적이 세시즌을 정도로 괜찮게 득점지원을 해주던 선수였다. (실제로 먼 후대의 브룩 로페즈가 갱신하기 전까진 브루클린 네츠 구단의 통산 누적 득점 1위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로드맨은 한 번도 못 오른 세컨팀을 수상한 적 있는데다 올스타 선정은 더 많고, 그가 전성기를 보낸 80년대 초중반에도 서드팀이 있었다면 올NBA팀 이력이 한두 차례 늘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33] 결국 수비 카테고리에서만 이루어지는 수상인 DPOY와 디펜시브팀은, (입성 확률에 어느정도 메리트가 있기야 하겠지만) 그것만으로 All-NBA Team 수상 횟수와 올스타 선정 횟수가 각각 한 번 뿐인 로드맨을 명전으로 보내줄 정도는 못 된다. 그보단 많은 우승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비슷한 예로 클레이 탐슨의 경우 All-NBA 서드팀 2회, 올스타 5회 정도의 커리어로 명전급이라기엔 어중간한 위치에 있지만, 무려 4번의 우승을 거둔 덕에 명전 입성 확률이 굉장히 높다고 여겨진다. [34] 로드맨과 동일하게 올스타 1회 및 DPOY 2회 이력을 가진 역대 최고의 수비형 센터 중 하나였다. 로드맨보다 디펜시브팀 이력이 적고 All-NBA Team에 뽑히지 못하긴 했지만, 이건 그의 전성기 때 센터 포지션에 미친 오버롤의 공수겸장들이 몰려있었던 탓이 크다. (추가로 서드팀은 이튼이 데뷔한지 4시즌 뒤에야 신설되었다.) [35] 레이커스 황금기의 일원으로서 로드맨과 동일한 5회의 우승을 자랑하고, DPOY와 수많은 디펜팀 이력을 자랑하나 올스타, All-NBA Team에는 한 번도 선정되지 못했다. [36] 참고로 위의 명예의 전당 입성지표는 바스켓볼 레퍼런스에서 임의로 정한 기준에 불과하며, 결국 투표단 각자의 견해에 따라 명전 입성이 결정되기 때문에 입성에 명확한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예로 팀 하더웨이 크리스 웨버는 각각 큰 논란을 빚은 바 있어 명전 입성이 기약없이 늦춰지다가 20년대에 들어 겨우 들어갔고[111], 마크 프라이스 케빈 존슨의 경우 이렇다 할 큰 논란은 없었음에도 아직까지 명전에 입성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들 넷은 우승이 없는 걸 감안하더라도 클래스로 보나 수상이력을 보나 로드맨보다 훨씬 윗급의 선수들이었다. 이렇듯 명전이 단순히 기량 및 수상이력의 고저만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고, 애초에 투표단의 성향이 계속 똑같이 유지되는 것도 아니기에 '정확히 어떻게 해야 헌액되는가'를 아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37] 하지만 그가 입었던 자켓은 나름의 의미를 부여했는데 자켓 팔 부분엔 자신의 NBA커리어 중 가장 영광의 순간에 달았던 백넘버 10번과 91번이 새겨져 있었고 등에는 불타는 농구공 형상에 위아래로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와 시카고 불스의 팀 이름이 새겨져있었다. [38] 정확히는 47명의 아이들을 16명의 여자에게서 얻었다. [39] 데니스, 킴, 데브라 [40] Dennis Rodman's girlfriend was an 'occupational hazard' [41] 이 부분은 만화 슬램덩크의 주인공인 강백호를 통해 오마주 된다. 다만 강백호의 설정상 아직 전부 개화되진 않았어도 리바운드에 한해선 천재였기때문에 리바운드가 아닌 점프슛 연습으로 달리 그려진다. [42] 로드맨보다 공격리바운드가 뛰어나다고 볼만한 선수는 역대 통틀어봐도 공수 리바운드율이 1:1에 달하는 모제스 말론 뿐인데, 모제스는 로드맨과 동일하게 크지 않은 신장, 많은 활동량을 자랑하는데다가 당대 최강급 파워와 로우포스트 주득점원이란 특성상 공격시 활동반경이 로드맨보다 더 골밑에 가깝다는 장점 덕분에 위치상 훨씬 유리했다. [43] 보통 궂은 일 위주 선수들은 팀 입장에선 소중하지만 묵묵히 궂은 일만 하기 때문에 보는 재미는 없는 경우가 많은데, 로드맨은 거의 모든 플레이를 에너지가 넘치게 하기 때문에 이런 면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리바운드는 말할 것도 없고, 특유의 통통 튀듯 뛰어가는 모습이라든지 극적인 플레이를 성공시키고 나서 세러모니도 단연 돋보인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에너지 넘치는 듯한 선수. [44] 이것도 로드맨의 '공격력'을 논하기엔 큰 의미는 없는 것이, 그가 주도적으로 공격한 것이 아니라 받아먹기로 레이업/덩크/골밑슛, 리바운드 후 풋백득점만 한 것으로 필드골 성공률 1위한 것이다. 물론 받아먹기 득점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건 로드맨이 주도적으로 득점기회를 만들기보단 상대 수비가 다른 곳에 쏠려 오픈찬스가 난것에 가깝단 소리. 비유하자면 집중수비를 받는 주득점원이면서 절묘한 위치선정으로 오픈을 만들어내는 칼 말론, 활발한 움직임으로 스크린을 타고 오픈찬스를 만드는 레지 밀러 류의 선수들과 달리, 스스로 공격력은 약하지만 팀플레이를 통해 오픈찬스가 생기는, 뉴올리언즈 시절 풋백과 레이업/덩크로 주로 득점하던 타이슨 챈들러 류에 가깝다는 말. [45] 물론 챈들러든 로드맨이든 기본적으로 득점감각이 있다. 로드맨은 NAIA 정도의 대학리그에선 평균 24점씩 넣는 게 가능했고, 챈들러는 드래프트 당시 볼핸들링과 중거리가 뛰어나다고 평가받았다. 단지 그러한 능력들이 NBA에서 스스로 득점을 창출할 수 있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을 뿐. 그래도 챈들러의 경우 높이가 높이인 만큼 받아먹기와 풋백 등의 플레이 만으로도 평득 두자리수 시즌이 여러번 있었고, 로드맨도 찍어내는 공격 스탯만 보면 리그에서 완전 바닥이라고 말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46] 1996/01/16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상대로 기록했다. 그런데 이 때 기록이 딱 10득점/21리바운드/10어시스트로, 마이클 조던에게 한 패스가 어시스트가 되면서 달성했다. [47] 근데 막혀서 평균 득점 27.3점. 물론 마이클 조던의 NBA 파이널 기록 중 가장 낮은 기록이 맞긴 맞다. 야투율도 .415로 역대 마이클 조던 파이널 기록 중 가장 낮았다. [48] 진지하게 접근하자면 그래도 조던의 공헌도가 불스에서는 가장 높았다. 로드맨의 리바운드가 압도적으로 높은 만큼 조던의 득점이 압도적으로 가장 높았으며(팀내 2위인 피펜과 평균 12점 차이가 났다.) 선수의 전체적인 생산성을 평가하는 Gamescore로 보면 조던 18.5 vs 로드맨 10.2로 차이가 많이 났다. 물론 스탯만 갖고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수비력같은 기록되지 않는 공헌도는 간과되는 면이 있지만, 수비공헌도가 높은 건 조던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이때 조던이 필드골 성공률이 낮은 편이었지만 조던같은 선수는 매 경기더블팀/트리플팀을 달고 다니며 상대팀 수비를 흩어 놓기 때문에 단순히 드러난 스탯만 보고 판단하기 힘들다. 로드맨이 당대 최고의 수비수 중 한명이었듯이, 조던 역시 가드 포지션에서 역대 최고의 수비수였으므로. [49] 로드맨의 체격은 팀 동료인 피펜과 거의 비슷하다. 쉽게말해 카와이 레너드급의 체격으로 파워 포워드를 맡은 것. [50] 더 구체적으론 그의 두터운 허벅지. 마이클 조던이나 스카티 피펜같은 선수와 비슷한 키와 몸무게를 지녔지만, 유독 허벅지만큼은 이들보다 월등히 두꺼웠고, 그만큼 강력했다. 스피드나 점프력은 둘에 못 미쳤고 특히나 순간움직임에선 조던에 비할 바가 못 되었지만, 두터운 허벅지 덕분에 둘을 훨씬 상회하는 파워와 로우포스트 수비력을 지녔다. [51] 특히 88년 파이널을 보면 이 점이 명확하다. 득점왕 출신 댄틀리는 피스톤즈에서 가장 세련된 득점기술을 지닌 선수였으나, 탱크같이 크고 강력하며 빠르기까지 한 워디를 결코 막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로드맨은 워디의 포스트업에 잘 밀려나지 않았기에(물론 88 파이널 MVP였던 워디가 로드맨에게 봉쇄당한 건 절대 아니다), 비교적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 [52] 다만 칼 말론이나 4대 센터들처럼 힘과 기술을 겸비한 상대들에겐 많이 털렸는데, 말론 같은 경우 포스트업으로 밀어내는 게 아니라 강한 힘과 많은 활동량으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해 점퍼를 넣거나 골밑으로 돌파하는 스타일이었지 1대1을 많이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기에 한계가 있었다. 4대 센터들의 경우 어느 정도는 막아줘도 계속 로드맨이 매치업하기엔 힘들 정도의 체격 차이가 있었고. [53] 이때 로드맨의 경기력 자체가 졸전이었던 것도 컸다. 이 시리즈에서 불스 빅맨들은 전체적으로 보드장악력에서 형편없는 모습을 보였는데, 룩 롱리가 19분 뛰면서 리바운드 3개, 로드맨이 5개, 그 외에 포지션 불문하고 벤치 총합 리바운드가 6개였다. 마이클 조던이 총 리바운드의 절반에 가까운 16개를 잡아내며 팀 리바운드는 애틀란타와 비슷할 수 있었는데, 피펜은 로드맨에게 "리바운드에서 팀 1위를 하지도 못할 거면, 테크니컬 파울에서도 1위하지 말라. 그런 건 필요없으니까"라고 돌직구를 날렸다. [54] 그러나 샐리는 "more of a lover than a fighter라고 평했는데, 실제로 샐리는 성격이 무난하게 좋고 매너도 좋은 선수였다. [55] 레임비어, 로드맨, 제임스 에드워즈를 필두로 한 디트로이트의 빅맨들을 중심으로 한 피스톤즈는 싸움을 하기보다는 상대를 거친 수비로 마구 몰아세우는 스타일이었는데, 피스톤즈가 논란이 되자 NBA는 1990-91시즌부터 플래그런트 파울 처벌을 강화하면서 이런 식의 우격다짐 농구를 제재하게 된다. [56] 피스톤즈는 터프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더티했던 팀이었다. 이 팀에서 가장 악명높은 작자가 싸움을 거의 안 하고 잘 하지도 못하는 빌 레임비어란 면에서 짐작해볼 수 있다.(사실 레임비어의 가장 큰 특기는 파울로 상대 부상입히기+잔뜩 약올린다음 상대를 폭발하게 해서 일부러 맞고 퇴장을 유도하는 일종의 자해공갈이었다) 진짜 터프한 팀은 바로 뉴욕 닉스로, 전성기 때 찰스 오클리, 앤서니 메이슨, 자비에 맥다니엘스 등 90년대 팬들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진저리가 날만한 터프가이들이 즐비했다. [57] 기존 버전에는 2차 3연패 팀을 역대 최강의 끝판왕으로 꼽는데 이견이 없다고 했는데, 감독 필 잭슨부터가 1차 3연패 팀이 더 강하다고 하는 등 이건 의견이 첨예하게 갈리는 이슈이다. http://bleacherreport.com/articles/559442-ranking-the-best-phil-jackson-championship-teams 이는 한 매체의 의견일 뿐이지만, 실제로 96시즌을 제외한 97, 98시즌의 불스는 그렇게까지 평이 높지가 않다. 또한 98시즌의 불스는 6번 우승팀 중 최약체였다는 것에 많이들 동의하는 편. 또한 2차 3연패 팀의 강함을 오롯히 로드맨의 공으로만 돌릴 수 없는 게, 피펜 역시 떠오르는 스타 정도의 위치였던 1차 3연패보다 홀로서기 이후인 96우승 당시 기량이 원숙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96시즌 이후 피펜은 잦은 부상으로 인해 그 전에 비해 활약이 줄기도 했고. [58] 참고로 시카고 불스는 로드맨이 뛴 3년간 리바운드 순위가 전체 4위-2위-2위였는데 불스는 역시 리바운드로 유명했던 찰스 오클리가 떠난 87-88년 이후 로드맨이 합류한 95-96전까지 한 번도 전체 리바운드 순위 10위 안에 들어간 적이 없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고무적인 수치이다. [59] 두 팀 다 팀의 주 득점원이 파워 포워드다. [60] 피펜도 득점 능력이 있고 스티브 커와 같은 리그 정상급의 슈터가 있었지만 아무래도 마사장의 폭발적인 득점력엔 못 미친다. [61] 위에 링크된 샤킬 오닐 디펜스 영상을 보라. 그 전까지 시카고 인사이드를 초토화시키던 오닐이 로드맨이 붙고 나서는 득점은 커녕 슛을 쏘는 것에도 상당히 애를 먹는다. [62] 실제로 2015년 파이널의 경우, 무명에 가까운 매튜 델라베도바가 MVP 스테판 커리를 집요하게 쫓아다니면서 밀착 마크한 덕분에 전력이 불리하다고 평가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가 골든스테이트를 상대로 한때 시리즈 전적 2승1패로 앞선 적이 있었다. 비록 전력의 차이, 그리고 델라베도바가 커리의 운동량을 결국 극복하지 못하며 한계를 보이는 바람에 3연패를 당하고 우승을 내주고 말지만. [63] 불스에서의 로드맨과 그 이전까지의 로드맨의 가장 큰 차이점은 기동력과 활동량이다. 불스에서의 로드맨은 (물론 절대적으로 보면 활동량이 많은 편이긴 하나) 이적할 때 이미 만 34세였기 때문에(시즌종료 기준 35세) 그전에 비해 활동량이 크게 줄었다. 전성기의 로드맨은 상대를 압박하는 강력한 맨투맨 수비와 전방위 압박을 가하는 팀수비력을 겸비한 선수였지만, 노장이 된 로드맨은 기동력이 줄면서 팀수비력이 크게 줄었다. 또한 발이 조금씩 늦어지다보니 리바운드 장악력을 위해 멀리까지 나가 상대팀의 공격을 견제하는 수비는 어느 정도 포기하기도 했다. [64] 시카고보다 전력이 훨씬 떨어지지만 7피트7인치에 달하는 조지 뮤레산, 크리스 웨버, 주완 하워드로 이어지는 무지막지한 사이즈를 자랑한 워싱턴 불리츠를 상대로 그는 또 파울트러블에 시달리며 32.3분 출장, 평균 9개의 리바운드를 잡았다. 그가 유일하게 두자리수를 잡아준 건 3차전 뿐인데, 무려 41분이나 출장했음에도 고작 10개에 그쳤다. [65] 특급 리바운더인 디켐베 무톰보와 준수한 빅맨 크리스찬 레이트너가 버티고 있었으며, 당시 로드맨은 몸상태가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19.8분을 뛰는데 그쳤기에 정상참작의 여지는 있다는 것. 하지만 공격을 포기하고 수비랑 리바운드만 하는 스페셜리스트가 20분 정도 뛰면서 5개 잡은건 36분이나 48분 환산해도 그리 높은 수치가 아니다. [66] 당시 네츠엔 13, 14개씩 리바운드를 잡아내던 센터 제이슨 윌리엄스가 있었다. 물론 이때 윌리엄스는 로드맨의 매치업이 아니었다. 윌리엄스의 매치업은 리바운드 장악력이 떨어지는 룩 롱리, 로드맨의 매치업은 마찬가지로 리바운드가 약한 키스 밴 혼이었다. [67] 키는 작지만 강철같은 근육의 앤서니 메이슨, 올스타급에 준하는 센터 블라디 디박이 있었음에도 로드맨은 둘을 합친 것과 비슷한 수준의 리바운드를 기록했으니, 97과 98 플옵을 통틀어 가장 잘 한 시리즈라고도 할 만 했다. [68] 인디애나 시리즈에서 로드맨은 시리즈 내내 파울트러블에 시달리며(6반칙만 두 경기에 평균 4.7개 파울) 29.4분을 뛰며 리바운드가 9.9개에 그쳤다. 게다가 당시 인디애나 골밑은 데일/안토니오 데이비스 듀오는 어차피 수비와 리바운드가 주 임무인 블루컬러워커인데다 주전 센터 릭 스미츠는 키가 너무 커(223cm) 롱리가 막지 않을땐 그나마 키라도 되는 토니 쿠코치가 주로 막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저 리바운드 수치. 공격은 없고 수비도 그렇게 뛰어나지 못했는데 리바운드까지 10개 남짓이란 건 심각한 문제다. 승리하긴 했지만 벼랑끝까지 몰렸던 7차전에서 5파울에 27분 뛰면서 리바운드를 고작 6개 잡아낸 건 덤. [69] 불스 로드맨의 맞상대로 가장 대표적인 선수는 2~3년차 파이널에서 만난 칼 말론이었는데, 물론 말론도 97파이널엔 23.8점, 98파이널엔 25점으로 확실히 97 정규시즌(27.4점) 및 98 정규시즌(27점)에 비해 볼륨 자체는 줄었다. 그러나 유타의 경우 당시 팀 전체의 평균득점이 정규시즌에 비해 97년에는 15.9점, 98시즌엔 무려 22.9점이나 줄었다. 즉, 팀 전체가 부진한 와중에 말론 혼자 공격에서 제 몫을 해준 셈이다. 97파이널에서 말론은 슈팅 난조로 확실히 부진했으나 두번째 파이널에서는 팀 득점의 31%를 담당하며, 팀 득점의 26.7%를 담당했던 정규시즌보다 더 좋은 활약을 했다. [70] 또한 불스 로드맨이 아무래도 언더사이즈 파워포워드로서 훨씬 큰 상대를 막아내다 보니 몇번 수비 성공하는 임팩트가 '락다운'으로 포장되기도 하는데, 96 당시 샤킬 오닐을 수비한 걸 갖고 "로드맨이 샤킬 오닐을 봉쇄했다"라고 하는 의견들이 대표적. 당시 오닐은 시리즈 평균 27점을 64% 확률로 넣으며 기록하며 정규시즌(26.6점), 플레이오프(25.8점)에 비해 오히려 약간 더 좋은 활약을 했다. 게다가 위에 언급했다시피 96시즌의 로드맨은 3연패 기간동안 수비력이 가장 좋았던 시절이었다. 위에서 보듯이 불스는 엘리트 빅맨을 잘 막는 팀은 아니었으며, 특히 센터를 상대로 약점을 보였다. 아무래도 애초에 100kg인 로드맨이 145kg의 근육덩어리인 오닐을 막아내리라 아무도 예상치 못했기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거지, 전체적인 활약을 보면 오닐은 그다지 제어하지 못했다. [71] 90시즌 초반부터 팀은 원래 주전 SF인 에이드리언 댄틀리를 트레이드하고, 종합적으로는 댄틀리보다 못한 선수였지만 수비와 리바운드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로드맨을 주전으로 기용하기 시작했다 [72] 로드맨은 더티한 수비수로 유명하지만 더티플레이 이전에 압도적인 운동능력으로 상대방을 괴롭히는 선수였다. 실제로 단신 빅맨들은 키를 커버하기 위한 운동능력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점프력과 기동력에서 크게 저하된 30대 중반 이후의 로드맨은 이런 존재감이 적어졌고, 이 때문에 의외로 매치업을 봉쇄하지는 못했다. [73] 심지어 그래놓고 로드맨이 4, 5차전에서 맹활약한 것도 아니다. 스티브 커, 필 잭슨 등 당시 그의 동료들이 "시카고 시절 로드맨이 밤새 파티하고 놀아도 다음 경기에선 매번 맹활약을 했다"며 좋게 포장하긴 했지만, 4차전 이후 라스베가스에서 놀고 온 로드맨은 5차전에서 2점 7리바운드란 형편없는 활약을 했고, 6차전에서도 1점 11리바운드를 기록했다. 불스는 로드맨의 공헌도와 큰 상관없이 두 경기를 승리했다. [74] 당시 로드맨은 말론이 슛을 하게 공간을 두고, 당시 자유투가 6할에 그칠 정도로 슈팅이 부진했던 그가 쏘는 슛이 빗나가면 리바운드를 잡곤 했다. 98 파이널에서 (그때도 말론을 딱히 잘 막은 건 아니지만) 훨씬 끈적한 수비를 선보이며 말론과 코트에서 레슬링하던 장면의 임팩트가 커서 그렇지, 로드맨이 말론을 괴롭혔다고 보긴 어렵다. [75] 추가로 유타 주민들 대부분이 믿는 몰몬교를 비하했다는 구설수까지 존재했다. [76] 98파이널에선 8.3점(야투율 46.2%) 8.3리바운드 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77] 첫 경기에서 론 하퍼-조던-토니 쿠코치-룩 롱리에 주전 파워포워드로 후보 포워드 제이슨 캐피를 넣었다. 그러나 셀틱스에 일격을 당하자 쿠코치를 후보로 내리고 조던을 스몰포워드로 올린 다음 랜디 브라운까지 가드 세명을 돌리는 스몰라인업을 돌리다가 6경기째가 되어서야 로드맨을 주전으로 올렸다. [78] 공격력 때문에 로드맨 대신 캐피를 넣었다고 볼 수도 없는 게 캐피의 득점력은 물론 로드맨보단 낫지만 지극히 평범하고, 결정적으로 공격밖에 없는 포워드 쿠코치를 개막전 스몰포워드로 세웠으면서 로드맨을 뺐다. 쿠코치는 피펜보다 득점능력은 더 좋은 선수이지만 수비가 훨씬 약하단 걸 생각하면 수비강화가 필요한데 로드맨을 빼고 3년차 실력없는 포워드 캐피를 넣었단 걸 생각하면 로드맨이 어지간히 믿음이 안 간 셈이다. [79] 워싱턴 시리즈와 호크스 시리즈에서 극악의 부진은 이 여파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매치업 상대 레이트너는 "토니도 부상이 있고, 데니스도 약간 다쳤다"면서 자신감을 표했을 정도. 실제로 그는 호크스 시리즈에서 출장시간 관리를 많이 받았으며(대승한 3차전에선 파울트러블도 없었는데 7분밖에 안 뛰었다) 마이애미 시리즈를 기점으로 제 컨디션에 가깝게 돌아왔다. [80] 한 팀에서 세 명 이상이 올스타에 선발되는 경우는 생각보다 흔하다. 90년대만 따지고 봐도 98년 레이커스 네명, 97년에도 소닉스 세명, 95년에도 소닉스 세명, 94년 불스 세명, 닉스 세명, 91년에 셀틱스 세명, 포틀랜드 세명, 90년에 셀틱스와 레이커스에서 각각 세명씩 선발되었다. 위 리스트를 보면 알겠지만 컨퍼런스 1위 팀이 아니라도 세명이 선발되는 경우(56승을 거둔 91년 셀틱스)도 있고 인기투표 개입 없이 감독선발로만 세명이 선발된 경우 (91년 셀틱스, 94년 닉스, 91년 포틀랜드)도 있다. [81] 올스타 주간 전까지는 96년엔 42승5패, 97년엔 42승 6패란 미친 페이스를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올스타 세명을 선발할 당위성이 충분했다. [82] 실제로 페이서스에선 레지 밀러 외에 릭 스미츠가 처음으로 올스타전에 나왔다. [83] 특히 94시즌과 95시즌은 서부 강호인 샌안에서 로빈슨 다음가는 2인자의 입지로 올스타에 뽑힐 당위성은 있었다. [84] 예전에는 빅3라 부르는 기준이 지금처럼 까다롭고 다양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밀워키 벅스의 빅3가 있는데, 당시 글렌 로빈슨 레이 앨런은 서드팀 레벨에 간신히 드는 수준이었고 샘 카셀은 당시까지 올스타/올NBA 이력도 전무했다. 한 팀에서 실력좋은 3인방이 두드러지면 그냥 빅3로 불렸던 것 [85] 단적인 예시로 캐브스의 러브는 결성 직전에는 명백한 All-NBA Team급 스타 플레이어였지만 결성 이후에 올느바는 쳐다보지도 못했다. 1옵션을 맡던 선수가 3인자로 밀려난 여파라고 볼 수 있지만, 정작 카이리 어빙이 떠나 확고한 2옵션으로 올라오고 팀의 득점옵션이 부족해 충분히 러브를 밀어주기 위한 시도가 있었던 18시즌조차 단 1점을 받는데 그쳤으니 명쾌한 변명의 여지가 되진 못한다. [86] 그도 그럴게 로드맨은 말썽 및 캐미 이슈로 인해 스퍼스가 싸게싸게 처분하려던 것을 불스가 주워온 것에 가깝다. '우리끼리 뭉쳐서 우승하자!' 라며 자의로 모인 것은 아니라는 소리. [87] 애시당초 '인위적'이라는 기준 자체에 대한 지적도 나오는 편. [88]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피스톤즈의 로드맨+아이재아 모리스+2라운드 지명권+1라운드 지명권과 스퍼스의 엘리엇+데이비드 우드+1라운드 지명권의 패키지 딜이었다. 우드나 모리스 둘 다 듣보잡들이나 완전히 폐급인 모리스보다는 우드가 좀 더 윗급인 선수였고, 피스톤즈가 2라운드 지명권을 하나 더 얹어줬으니 결과적으로 이 트래이드에서 로드맨과 엘리엇은 비슷한 가치라고 평가받은 셈이다. [89] 실제로 보쉬는 빅3 시절이 끝난 다음 당연한 듯 맥시멈 연봉을 오퍼받고 계약했다. [90] 만약 각각 역대급 수비형 센터인 루디 고베어 디켐베 무톰보를 한 팀에서 동시에 기용한다면 적어도 요즘같은 트렌드에선 시너지는 커녕 엄청난 마이너스가 되겠지만, 이들셋은 포지션부터 달라 아무 문제가 없었다. [91] 히트 시절 보쉬와 불스 시절 로드맨의 기량이 극명히 차이난다는 건 이 점을 보면 명확하다. 로드맨이 최대의 효율일 때와, 보쉬가 최악의 효율일 때의 실적이 결과적으로 큰 차이가 없기 때문.(올NBA서드팀 될 '뻔한' 시즌 1회vs2회) [92] Bad as I wanna be에서 영화 《데몰리션 맨》의 웨슬리 스나입스를 따라한 것이라고 밝혔다. [93] 당시 게임 중에도 이런 기믹을 살린 게임들이 있었다. 닌텐도 64로 발매된 NBA Hangtime은 선수 선택 화면에서 버튼을 누르면 로드맨의 머리 색이 바뀌어 (기본색은 초록색) 다양한 색을 선택할 수 있었고, 같은 시스템의 Kobe Bryant on NBA Courtside에선 그냥 알아서 머리색이 바뀌었다. [94] 데니스 로드맨 본인이 밝힌바에 따르면 당시의 마돈나는 거친 매력의 운동선수를 선호했다고 한다. 그래서 둘이 굉장히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는데 갑자기 관계가 틀어지면서 후에는 그냥 친구로만 지낸다고. 카더라에 따르면, 마돈나가 로드맨의 아이를 6명씩이나 낳고 싶어했고 로드맨은 그걸 원치 않아서 헤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95] 이게 아래에도 있는 영화 《더블 팀》인데, 결과는? 골든 라즈베리에서 '최악의 신인상, '최악의 남자 조연상', '최악의 스크린 콤비상'의 3관왕을 영화에 선사했다. 이 영화는 서극 감독의 할리우드 데뷔작이다. [96] 감독과 주축선수들이 떠나는걸 보면서 사람들에게 주목 받지 못 하면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 그리고 본인도 샌안토니오로 팔려가게 되자 염색을 하기 시작했다. [97] 다만 해당 출연분이 프로그램 초반 시즌 부분일 수 있다. [98] 말 그대로 Blank Comment라고 부르는데, 아이폰 인스타그램의 오류인지는 몰라도 음성 키보드를 활성화시키는 마이크 버튼을 눌러서 댓글을 달면 그냥 빈 댓글이 만들어진다. [99] 샤킬 오닐, 코비 브라이언트, 팀 던컨이 세운 왕조, 끝으로 NBA 사상 마지막 낭만우승으로 불리는 디르크 노비츠키 정의구현까지. [100] 다만 김정은 이상의 독재자들인 아돌프 히틀러 폴 포트개인적으로는 친절하고 배려심 많은 사람이었으니 로드먼이 김정은을 '좋은 사람'이라고 착각한 것은 그렇게까지 이상하지는 않다. 이디 아민 역시 개인적으로는 유쾌하고 농담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101] 다만 이때 연설 자체는 로드맨의 솔직한 심경 고백과 더불어 감동적이었다는 반응이 훨씬 많다. [102] 빙그레 이글스 초대 감독이었던 배성서 감독의 아들이다. [103] 크리스 쿠오모. 현 뉴욕 주지사 앤드류 쿠오모의 동생이다. [104] 여기에 쿠오모가 "그래서 무슨 일을 했는데요?"라고 묻자, 로드맨은 "당신이 말해봐라, 무슨 일을 했냐"고 하자 쿠오모는 "모르죠. 아직 그들(북한)이 혐의를 발표도 안했잖아요"라고 답했다. 결국 배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말 못했다. 이 때 로드맨 상태를 생각하면 본인도 몰랐을 가능성도 있다. [105] 이는 단순한 면피성 구라는 아니고 당시 로드맨은 심각한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중국과 북한에서 술에 취해서 자주 난동을 부렸다. 2014년, 김정은 생일 기념 방북 때도 초대연에서 술에 취해서 욕설을 퍼붓고 일행들과 싸우는가 하면 김정은을 데리고 오라고 마구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원래 로드맨은 경기 후 원산의 별장에서 김정은과 따로 며칠 보내기로 했으나 별장에서도 너무 술에 취해서 행패를 부리는 통에 취소되기도 했다. [106] 북한에서는 고위 간부들도 김정은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입까지 가려야 한다고 한다. 일례로 2023년에도 김정은의 딸 김주애에게 전직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이던 박정천이 무릎을 꿇고서 귓속말로 속삭이는 장면이 화제가 될 정도였다. 겨우 10살밖에 안 된 아이에게도 이럴 정도인데 하물며 ' 최고존엄'인 김정은을 어떻게 대할지는 상상이 불가능하다. [107] 이 광경을 직접 목격한 평양 주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린 김정은을 신처럼 보게끔 교육받았단 말입니다. 우리 지도자에게 양키가 난닝구를 선물한 것도 우릴 거지로 여기나 싶어 자존심 상하는데, 지도자란 사람이 미국 놈한테 스프링(러닝의 북한 사투리) 쪼가리나 받고선 입이 귀까지 째져서 우릴 향해 흔들며 자랑한단 말입니다. 전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위대한 영도자는 무슨 개뿔. 저거 바보 아니냐 싶더라고요." 이 사태(?)는 거의 임수경 방북 사건과 맞먹는 충격을 안겨줬다고 할 수 있다. [108] 한국에서도 일심회 사건이라 하여, 노무현 정부 시절 종북주의자 단체를 매의 눈으로 감시하다가 국정원을 동원해서 개발살낸 일이 있었는데, 좌우 막론하고 그 누구도 이를 뭐라하지 않았다. [109] 크리스 쿠오모는 로드맨이 북한 방문 인터뷰 때 비난한 앵커다. 로드맨이 언젠가 북한의 문이 열릴 거라는 말을 기억한다고 얘기한다. 참고로 크리스 쿠오모는 마리오 쿠오모 전 뉴욕 주지사의 아들이자 앤드류 쿠오모 전 뉴욕 주지사의 동생이다. [110] 다만, 정치 성향이 실제로 공화당 성향에 가까워서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트럼프와의 친분 때문에 그를 지지하는 것에 가깝다. 트럼프 본인 또한 전통적인 공화당의 성향과는 거리가 한참 있는 인물이다. 사족이지만, 트럼프를 지지한 스포츠계 셀럽 중 유명한 사람은 또 다른 NBA 레전드인 칼 말론 로저 클레멘스, 헐크 호건, 마이크 타이슨 정도.


[111] 하더웨이는 지나친 동성애 혐오발언으로 논란을 빚었고, 웨버는 대학에서의 금품수수 스캔들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