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직 존슨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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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직 존슨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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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기록 보유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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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006F><colcolor=#fdb927> 최다 출장 |
코비 브라이언트 (Kobe Bryant) - 1346경기 (1996~2016) |
최다 득점 |
코비 브라이언트 (Kobe Bryant) - 33643점 (1996~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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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다 어시스트 |
매직 존슨 (Magic Johnson) - 10141개 (1979~1991, 19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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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다 리바운드 |
엘진 베일러 (Elgin Baylor) - 11463개 (1958~19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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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다 블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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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다 스틸 |
코비 브라이언트 (Kobe Bryant) - 1944개 (1996~2016) |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매직 존슨 | |
헌액 연도 | 2002년 |
매직 존슨의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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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등번호 32번 | ||||||||||||||||||||||||||||||||||||||
캐지 러셀 (1974~19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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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직 존슨 (1979~1991, 1996) |
→ | 영구 결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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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006F><colcolor=#fdbb30>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No.32 |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구단주 | |
로스앤젤레스 스팍스 구단주 | |
어빈 "매직" 존슨 주니어 Earvin "Magic" Johnson Jr. |
|
본명 |
어빈 에페이 존슨 주니어 Earvin Effay Johnson Jr. |
출생 | 1959년 8월 14일 ([age(1959-08-14)]세) |
미시간 주 랜싱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미시간 주립대학교 (학사) |
신장 | 206cm (6' 9")[1] |
체중 | 100kg (220 lbs)[2] |
후원사 | 컨버스 |
포지션 | 포인트 가드[3] |
드래프트 |
1979 NBA 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지명 |
소속 팀 |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1979~1991, 1996) 보로스 바스켓 (1999~2000)[4] 매직 그레이트 데인스 (2000)[5] |
지도자 |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1994 / 감독 대행) |
프런트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2012~ / 공동 구단주) 로스앤젤레스 스팍스 (2014~ / 구단주)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2017~2019 / 사장) 워싱턴 커맨더스 (2023~ / 공동 구단주) |
등번호 |
32번 - 레이커스 15번 -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 |
SNS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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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농구인이자 기업인. 現 LA 다저스의 공동 구단주, LA 스팍스의 구단주, 매직 존슨 엔터프라이즈 설립자. 현역 시절 포지션은 포인트 가드.NBA 통산 경기당 평균 어시스트 1위 및 통산 누적 어시스트 6위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 동시에 NBA 5회 우승, 파이널 MVP 3회, MVP 3회, 어시스트왕 4회, 스틸왕 2회, All-NBA 팀 10회[6] 선정 및 올스타 12회 및 올스타전 MVP 2회의 기록을 보유한 LA 레이커스의 프랜차이즈 스타 원 클럽 플레이어이다. 마법같은 노룩 패스 플레이로 본명 어빈 에페이 존슨보다도 매직이란 닉네임이 더 유명해진[7] 포인트 가드로, 1980년대에 사장되어가던 NBA를 래리 버드와 함께 다시 인기스포츠로 끌어올린 일등공신이다. 206cm의 큰 신장을 자랑하는 초대형 포인트 가드로, 큰 키를 활용하여 팀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땐 포워드를 넘어 센터까지도 소화 가능한[8] 멀티플레이어이기도 했다. 10번 이상의 트리플 더블을 기록한 것이 9시즌으로 이 부문 최다 기록 보유자라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9]
2. 커리어
2.1. 성장기
1959년 아버지 어빈 존슨 시니어(1934~2023 #)와 어머니 크리스틴 슬하의 6남매 중 하나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매직 존슨은 농구에 꽂혀 하루종일 연습을 했는데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렸을 때 모두 농구를 했기에 이미 농구 집안에서 태어난 자녀였다. 고등학생이 된 그는 그 당시 농구로 유명했던 (게다가 흑인들 위주였던) 섹스톤 고등학교로 가고 싶어했지만 사정상 백인이 많은 에버렛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 그 당시 아직도 인종차별이 심할 때라 처음에 매직도 섹스톤 학교에 가지 못한걸 후회했으나 인종차별을 견뎌내면서 농구하는 법을 익히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에게 패스조차 안했던 그의 팀원들이었으나 결국 확고한 철학을 지닌 조지 폭스 감독의 개입과 도저히 주체할 수 없는 농구실력은 결국 그가 에버렛 고등학교에서도 주전으로 뛸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매직의 유한 성격은 백인동료들 역시 그를 동료로 인정하게 만들었다.결국 그는 10학년 (고등학교 2학년) 때 한 경기에서 36득점 18리바운드 16어시스트라는 흠좀무한 성적[10]을 기록했고 평생 따라붙는 "매직" 이라는 칭호를 한 기자가 붙여주었다. 싱스테이트저널의 프래드 스타브리라는 기자가 고등학교 당시 그의 플레이를 보고 '마술같다'는 의미에서 별명을 "매직"이라고 붙여줬는데, 이때부터 이름대신 모두 매직이라고 부르기 시작해서 이름보다 별명이 더 유명해졌다. 오히려 매직이 본명인 줄 아는 사람이 대다수( 베이브 루스의 경우와 같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미들네임 식으로 Earvin 'Magic' Johnson으로 불리기도 한다.[11][12]
결국 매직 존슨은 이렇게 다재다능한 실력을 바탕으로 에버렛 고등학교를 전국 우승으로 이끌게 되며, 고향 근처에서 살고 싶었던 그는 대학을 미시간 주립대로 선택하여 대학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2.2. 미시간 주립대학교 시절
1977년 미시간 주립대학교 입학 후 그는 동기 제이 빈센트와 함께 저드 히드코트(1927~2017)[13] 감독의 지도를 받으며 뛰어난 실력을 바탕으로 1학년 때부터 선배 그렉 케슬러 등을 따라 17득점 8리바운드 7어시에 해당하는 성적을 거뒀으나, 1978년 NCAA 전국대회 8강에서 릭 로비[14]가 이끄는 켄터키 대학교에게 49-52로 아쉽게 탈락하고 만다. 그리고 1978-79 시즌에 본격적으로 칼을 간 미시간 주립대는 2학년이 된 매직을 바탕으로 동기 빈센트, 상급생인 케슬러 등도 포진시켜서 계속해서 승수를 쌓아나갔고, 결국 1979년 4월에 현재까지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본 대학경기라고 불리는 결승전에 진출하게 되는데 이 결승전에서 농구 역사상 최고 라이벌이라고 여겨지는 매직 존슨과 래리 버드(당시 4학년)가 경기를 하게 되었다.
이 유명한 경기의 승자는 매직이었다. 당시 경쟁자였던 인디애나 주립대는 거의 버드의 원맨팀이었기 때문에 미시간 주립대는 버드에게 더블팀, 트리플 팀의 집중경기를 했고 이로 인해 버드는 평상시보다 훨씬 저조한 경기를 펼칠수 밖에 없었기에 이 둘 사이의 라이벌전에서 첫 승은 매직이 가져가게 된다.
미시간 주립대를 우승으로 이끈 매직은 대학 농구의 MVP에 해당하는 Most Outstanding Player 상을 받았고, 1979 드래프트에 신청하게 된다.
2.3.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전설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에 의해서 1979년 NBA 드래프트 전체 첫 픽으로 뽑히게 된 매직은 가세하자마자 레이커스를 우승후보로 만들어놓았다.[15]레이커스가 전체 1순위를 가진 것은 약간 씁쓸한 행운에 가깝다. 원래 이 픽은 그해 꼴찌인 뉴올리언스 재즈의 것인데, 이 픽을 행사하기 3년전인 1976년 레이커스의 슈퍼스타 가드이자 UCLA의 레전드인 게일 굿리치가 자유계약선수로 재즈와 계약하면서 그때 있었던 베테랑 FA 보상 제도로 인해 굿리치를 잃은 대신 재즈의 신인 지명권을 받아왔던 것. 1979년 1라운드 픽을 가져오는데 그해 재즈가 전체 꼴찌를 하고, 동부지구 꼴찌를 했던 시카고 불스와 동전 던지기를 해서 최종적으로 1번 픽을 얻게 되어 매직 존슨을 얻게 된다. 그러나 굿리치는 이적 첫해인 1975-76 시즌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시즌 2/3을 날렸고 굿리치는 이전부터 자신이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 억지로 뛰게 했다는 사유로 레이커스에 소송을 제기했다. 이미 굿리치는 레이커스의 마지막 시즌 때 아킬레스건 부상을 달고 뛰었으며 이때문에 프리시즌 훈련캠프를 빠졌다고 무려 15만 달러의 벌금을 내야했기 때문.
다만 레이커스는 이 1픽으로 매직이 아닌 시드니 몽크리프를 뽑으려고 했다. 당시 매직이 1픽인 것은 너무 당연한 이야기였기에 이게 무슨 소린가 싶겠지만 사람들이 매번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것은 아니기에. 팀 사정 때문에 가드보다 센터가 필요해 2픽에서 마이클 조던이 아닌 샘보위를 뽑은 것 처럼 당시 가드가 필요했던 레이커스는 몽크리프를 선호했다. 카림(C)-윌크스(F)-댄틀리(F)-놈닉슨(G)으로 구성된 라인업이어서 포워드는 포화였지만 주전가드 한자리가 부족했다.[16] 매직이 가드인데 이건 또 뭔소리인가 싶겠지만 당시 NBA에서 매직을 포워드로 쓰려고 했지 가드로 쓰려는 이가 없었다. 단 한명만 빼고. 시드니 몽크리프를 뽑겠다는 결정을 감독 내정된 짐 맥키니에게 들고가자 맥키는 강하게 반대한다. "우린 달릴거라고. 그리고 누군가는 NBA에서 포워드로 써야한다고 주장하는 매직존슨이라는 녀석이 우리 팀의 포인트가드가 될거라고. 우리 한테는 리그 최고의 포인트 가드라고 할 수 있는 놈 닉슨이 있지만 이 녀석이 우리의 포인트가드가 될거야. 우리 한테는 리그 최고의 선수라고 할 수 있는 7풋 센터가 있지만 우리는 그저 달릴거고 매직은 우리와 같이 달릴거야."[17] 이런 맥키니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매직을 뽑게 된다.
이 당시는 2번이 스윙맨화 되기 이전이라 데니스 존슨-데니 에인지, 거스 윌리엄스-데니스 존슨처럼 1, 2번이 리딩을 분담하는게 당연했고 1 ,2번간의 포지션 이동이 활발했기 때문에 굳이 감독이 포인트가드는 매직이고 슈팅가드는 놈 닉슨이라는 구분을 하는 것이 이상할 수도 있으나 당시 맥키니가 구상하던 (훗날 쇼타임이라 불리는)런앤건 농구는 포인트 가드가 중심이 되는 새로운 방식이었고 여기서 포인트 가드는 매직이어야 한다는 것이 었다. 다만 아직 매직의 경험이 미숙했던 관계로 전통적인 1-2번의 형태로 공을 나누게 된다. 이 발언은 우리 팀은 압둘자바가 있더라도 매직을 뽑아서 매직을 중심으로 재편할 것이고 이 팀은 매직의 팀이라는 의미나 마찬가지였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처음엔 그 의미를 잘 이해못했다고.
루키 시즌에 결승에 진출해 Dr. J 줄리어스 어빙이 이끄는 필라델피아 식서스와 붙었을 때, 2승 2패로 동률이던 상황에서 센터이자 주장인 카림 압둘자바가 발목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투혼을 보여주며 5차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결국 압둘자바가 부상으로 뛸 수 없게 되자 모두들 '아 이젠 시망이구나'하고 좌절해 있는데 매직 혼자 "여러분, 걱정하지 마세요. 매직이 있습니다."라고 선언, 경기 시작 전 코치를 찾아가 "저 센터볼래요"라고 했던 매직은 웃음을 터트린 코치에게 농담 아니라고 부연해야 했다고 한다.
그러나 매직은 6차전에서 센터로 시작해 가드와 포워드 역할까지 수행했다. 경기 영상 사실 경기 장면을 보면 진짜 압둘자바처럼 골밑을 철저히 지키는 센터로 플레이한 건 아니고 가드와 포워드를 오가는 평상시의 플레이에 가까웠다. 1990년대 이후 농구를 본 팬들은 "어? 포스트업을 자주하니까 센터 역할을 한게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매직 존슨은 원래 포스트업에 이은 골밑 마무리와 훅슛으로 주로 득점하는 선수이다.[18] 오히려 중거리에서 약한데 점프슛이 없고 세트슛으로 쏘기 때문. 때문에 매직은 외곽에서 게임리딩을 하다가 패스를 찔러주기란 가드스러운 플레이 + 포스트업으로 쭉쭉 밀고 들어가다가 본인이 마무리 or 오픈된 동료에게 패스란 파워포워드스러운 플레이가 공존하는 선수였다.[19] 결국 42점 15리바운드 7어시스트라는 경이적인 활약으로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20] 결국 파이널 MVP는 압둘자바가 아닌 매직의 차지였고, 이는 최연소 파이널 MVP(만 20세)이자 사상 최초로 루키가 받은 파이널 mvp였다. 루키가 파이널 mvp로 선정된 일은 지금까지도 이 때가 유일하다.
단, 위 문단에 대해 반론 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매직 존슨은 원래 포스트업에 이은 골밑 마무리와 훅슛으로 주로 득점하는 선수이다. -> 이는 압둘자바가 노쇠화하고 난 이후의 이야기이다. 압둘자바는 포스트업시 공간을 많이 필요로 하는 선수로 이 당시 감히 압둘자바의 공간인 포스트로 함부러 들어갈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전 시즌에는 포스트업 마스터라 불리는 애드리안 댄틀리도 압둘자바와 공존이 힘들었다. 매직이 커리어가 진행되면서 포스트업 비중과 훅슛 비중이 늘어 났지만 이 당시는 그런 건 꿈도 못꿀 루키시즌이었다. 매직의 주요 득좀 루트는 드라이브인과 미들, 롱투 점프슛이었다. 결승 6차전은 평상시와 달리 인사이더 답게 플레이했다.[21]
2. 때문에 매직은 외곽에서 게임리딩을 하다가 패스를 찔러주기란 가드스러운 플레이 + 포스트업으로 쭉쭉 밀고 들어가다가 본인이 마무리 or 오픈된 동료에게 패스란 파워포워드스러운 플레이가 공존하는 선수였다. -> 이 역시 팻라일리 사임 후 던리비가 부임한 이후 이야기이다. 매직이 하프코트에서 주구장창 포스트업으로 밀고 들어간 건 던리비의 주문이었다. 매직이 커리어 후반으로 갈수록 포스트업 비중이 늘어나지만 그래도 던리비 이전에는 탑에서 포인트 가드 스러운 비중이 훨씬 높은 선수다. 오히려 87시즌 이전에는 거의 포스트업으로 밀고 들어가지 않는다. 탑에서 공을 지키기 위해 포스트업은 하지만 그건 당시 단신 가드 불문 모두가 하는 거였고.
당시 압둘자바는 리그 MVP였고 당연히 팀 내 독보적인 에이스였다. 그런데 갑툭튀한 신인이 한 시리즈 잘했다고 MVP와 모든 주목을 독차지한 것이다. 이때 매직은 21.5점 11.2리바운드 8.7어시스트 2.7스틸로 트리플 더블에 가까웠으나 압둘자바는 무려 33.4점 13.6리바운드 3.2어시스트 4.6블럭을 기록하며 양팀 통틀어 가장 압도적인 활약을 했다. 게다가 압둘자바는 어차피 6차전을 질 거라고 생각하고 홈에서 열리는 7차전을 준비하기 위해 필라델피아로 가지 않고 로스앤젤레스에 있었다. 지금은 NBA팀들이 전세기나 전용기로 이동하고 온갖 호화시설을 사용하지만 당시는 그렇게 환경이 좋지는 않았고 미국 끝과 끝인 필라델피아 - 로스앤젤레스 왕복비행을 하느니 컨디션 조절하면서 7차전 준비하는게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 그런데 갑자기 원정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졸지에 팀의 에이스가 팀이 우승하는 자리에 빠지게 되는 꼴이 되어 버린 것이다. 당시만 해도 상위시드팀 홈-하위시드팀 홈에서 번갈아가며 하는 경기수를 2-2-1-1-1로 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만 8번 결승에 올라간 레이커스가 서부 끝이고, 디트로이트가 강팀으로 부상하기 전까지 매번 파이널에 올라가던 필라델피아, 보스턴이 모두 동부연안 도시 연고팀들이라 이동거리가 장난아니게 길어지자 86년 파이널부터 2-3-2 시스템으로 바꿨다. 물론 이렇게 되면 상위시드팀에 불리[22]하다는 지적에 2014년부터 다시 2-2-1-1-1로 바꾼다.
성공적인 루키 시즌을 거뒀지만 신인상은 래리 버드가 가져갔으며, 이때 매직은 자신도 충분히 신인상이 될거라 생각했는데 현실은 버드에게 완전히 밀려서 실망했다고 한다. 다만 당시 MVP나 신인왕 투표 기록을 보면 알지만 (https://www.basketball-reference.com/awards/awards_1980.html) 신인시절 둘은 까놓고 말해 레벨이 달랐다. 둘의 나이 차이가 있어서 버드가 훨씬 완성된 상태로 데뷔했기 때문. 버드는 이 해에 전 시즌에 29승을 거둔 팀을 혼자 힘으로 리그 전체 1위인 61승으로 이끌며 MVP투표에서도 4위에 오르며 올 NBA퍼스트팀에 올랐다. 반면 매직은 좋은 활약을 보이고 올스타에 선정되긴 했으나 MVP 투표에서 한 표도 못 얻고, 퍼스트팀은 커녕 세컨팀에도 선정되지 못했다. 이 정도 차이가 나니 버드가 신인왕을 차지하는 건 당연한 거였고 투표에서도 버드는 63표를 얻은 반면 매직은 3표에 그쳤다. 둘의 커리어를 보면 초창기는 더 성숙했던 버드의 우세,[23] 중반기는 용호상박, 그리고 버드가 몸이 망가지고 난 이후 후반기는 매직의 확연한 우세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버드가 1984-85~1985-86 시즌 MVP를 차지한 이후 1986-87 시즌, 1988-89 시즌, 1989-90 시즌에 매직이 MVP에 올랐다. 그러나 매직의 팀성적이 더 우세했기 때문에 개인기량은 백중세지만 커리어 상으로 매직이 더 높게 평가받는 것.
매직의 이 발언은 HBO에서 방영한 A Courtship of Rivals Basketball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본인이 직접 한 발언이다. 객관적으로 실력 차이가 남에도 불구하고 막 우승을 거두고 루키로써도 나름 괜찮은 성적을 거두었던 매직이 버드가 받는 주목에 자극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때부터 슬슬 둘 사이의 라이벌 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버드 또한 1980-81 시즌에 파이널에 올라 휴스턴 로켓츠를 꺾고 첫 우승을 차지해 매직과 동률을 이루었다. 이후 레이커스는 1982 드래프트 1순위 지명권으로 훗날 큰 경기에 강한 선수로 거듭날 제임스 워디를 지명했고, 시즌 초반에 7승 4패를 기록중이던 폴 웨스트헤드 감독이 경질되고[24] 팻 라일리가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라일리의 부임과 함께 레이커스는 승승장구하면서 1982년에 필라델피아 76ers를 상대로 우승을 거두며 매직은 두번째 우승과 두번째 파이널 MVP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1984년에 다시 한 번 결승전에 진출했고 드디어 버드의 보스턴 셀틱스와 만나게 된다. 1차전을 잡으며 이기나 했지만 2차전과 4차전에서 매직이 실수를 저지르면서 결국 7차전에서 셀틱스에 무너졌고 버드에게 복수당했다. 매직은 이때의 패배가 그를 바꿔놓았다고 회술한다.
1985년에 이를 갈고 다시 결승에 진출했으며 이번에는 절치부심한 레이커스 멤버들과 (특히 압둘자바) 성공적으로 셀틱스를 이겨냄으로 작년에 대한 복수를 하게 된다. 그 다음해에는 아쉽게 휴스턴에 패배하면서 결승에 못 오르게 된다.[25] 그리고 바로 다음해(1987년)에 기다리던 버드와 또 만나게 되는데 이번에도 매직이 이기게 된다. 특히 4차전에 그 유명한 매직의 훅샷이 (그가 스스로 쥬니어 훅샷이라고 부르는) 나오게 되었는데 이 게임에서 탄력을 받으며 우승을 하게 된다. 이후에 버드가 건강상의 이유로 셀틱스가 부진하게 되며 매직과 버드는 다시 재회하지 못하게 되어 이 시리즈가 그 둘의 마지막 시리즈가 된다. 그리고 매직은 이 시리즈에서 그의 마지막이자 세번째인 파이널 MVP를 얻게 된다.
다음해에 매직은 그의 절친 아이제아 토마스의 "배드 보이즈"를 상대로 우승을 거두며 1960년대 보스턴 이후로 처음으로 2년 연속 우승을 거둔 팀이 되었고 다섯 번 째 우승을 거두게 된다.[26] 그 다음해인 1989년에 두번째 MVP를 수상하고 팀도 파이널에도 진출을 했으나 2차전에서 햄스트링 부상으로 일찍 아웃되면서 배드 보이즈에게 스윕당하고 만다.[27]
그 다음 시즌인 1989-90 시즌에 매직은 세번째로 MVP를 수상하나 2라운드에서 피닉스 선스에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며 매직의 역사상 가장 빨리 플레이오프에서 제거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 다음해에 매직과 레이커스는 파이널에 진출하나 상대는 디트로이트를 3전 4기로 물리치고 올라온 마이클 조던의 시카고 불스. 스카티 피펜의 수비에 고전하며 (그래도 18득점과 8리바운드 12어시) 우승에 실패하고 사실상 마지막 경기를 밟는다.
1991년 은퇴선언을 했지만 1991-92 시즌 올스타 득표에서 서부 가드 중 2위, 서부 전체로는 칼 말론, 클라이드 드렉슬러, 크리스 멀린에 이어 4위의 득표를 해버렸다.[28] 매직의 득표수는 65만 표가 좀 넘었는데 서부 1위 말론은 76만 표대였으며 전체 1위는 유일하게 백만 표를 넘긴 마이클 조던이 차지했고 전체 2위는 당시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 있었던 조던의 절친 찰스 바클리가 99만 여 표로 차지했다. 덕분에 92년 올스타 게임 주전으로 발탁되었고 당시 반시즌을 쉬었다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대활약. 게다가 결정적인 3점슛을 성공시키며 올스타전 MVP에 등극했다. 그리고 현역선수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NBA 드림팀 1기에 뽑히며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29]에서 금메달을 획득한다.
1995-96 시즌 중반에 현역 복귀를 선언하여 레이커스에서 32번을 다시 달고 뛰기도 했는데, 이때는 나이가 나이인지라 이전처럼 주 포지션이었던 포인트 가드로 뛰지 못하고 파워포워드로 플레이하였다. 마이클 조던과 잠시 매치업이 되는 등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으나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은퇴했다. 다시 은퇴할 때까지의 기록은 역대 통산 기록 평균에 꽤 뒤지긴 하지만 그럭저럭 준수했다. 복귀 당시 스탯은 14.6점 6.9어시 5.7리바로 커리어 평균에 크게 못 미쳤으며 36분 환산 스탯과 윈셰어 등 2차 스탯도 마찬가지였다. 센스는 여전했지만 전성기보다 크게 느려진 몸놀림과 무릎부상으로 예전같은 슈퍼스타는 아니었다. 닉 반 엑셀, 에디 존스 등 젊은 코어로 리빌딩을 마무리해가던 레이커스 입장에서는 전성기 기량을 잃은 과거의 전설이 사실 크게 필요하진 않았으며, 어차피 당시 레이커스도 우승과는 거리가 먼 로스터였고 매직 나이도 30대 후반이었기에 팬도 언론도 전성기 플레잉타임과 영향력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더욱이 4년 이상의 공백기간이 있었음에도 저 정도의 스탯을 보여준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따라서 매직의 복귀는 성공적으로 봐도 무방하지만 이미 20시즌 전 이야기 이고 관련기사들도 찾기 어렵다. 당시 농구잡지를 참고하는 것이 가장 객관적이다. 개인마다 생각하는 성공의 기준이 다르기에 각 자 판단에 맡기지만 매직은 이미 10시즌의 경력으로 이미 NBA 올타임 레전드 입성한 인물이기에 1995-96 시즌 복귀는 1991 파이널 이후 HIV로 인한 갑작스러운 은퇴에 대한 마무리이자 팬 서비스 차원의 선수경력이지 더 높은 곳을 가기 위한 복귀는 아니었기에 크게 중요한 시즌은 아니었다.
다만 Hulu가 제작한 다큐 레거시:LA 레이커스 트루 스토리에 나온 내용은 위와는 조금 다르다. 위에는 전성기가 지난 매직을 크게 필요로 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당시 구단주 제리 버스는 매직의 복귀를 원했다. 그렇기에 매직 본인은 별로 원치 않았지만 버스의 강력한 요청으로 감독직을 맡게 된것. 매직의 은퇴후 쇼타임 멤버들이 대거 떠나면서 관중수도 급감했고,[30] 92-93시즌엔 제리 버스가 구단을 인수한 후 처음으로 5할승률에 실패했으며, 그 다음 시즌엔 아예 플레이오프 진출에도 실패했다. 구단인수 첫해에 우승을 맛보고 총 9번의 파이널 진출, 5번의 우승이라는 황홀한 순간만 맛보던 그에게 있어 이 결과는 용납할 수 없는 결과였다. 거기다 제리 버스 본인 자체도 '로스엔젤레스에 연고를 둔 프로팀에는 슈퍼스타급 선수가 필수'라는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매직을 그리워했다. 그리고 매직 본인도 정상적인 체육활동이 가능해지면서 꾸준히 훈련을 했다. 참고로 매직의 복귀는 오히려 닉 반 엑셀, 에디 존스같은 젋은 영건들이 더 원했다. 특히 닉은 36세의 매직의 기량에 감탄하며 '함께 뛰면 그에게 많은걸 배울수 있겠다.' 싶어서 그에게 함께 뛰자고 권유했고, 매직도 자신이 아끼는 후배들인 닉과 에디 곁에 경험많은 자신이 있으면 플옵진출 이상을(우승)노릴수 있을거라 확신하고 복귀를 하게 된것. 매직은 복귀후 32경기를 뛰었는데 이 기간동안 팀은 22승 10패라는 좋은 성적을 찍고 53승을 기록하게 된다. 홈구장은 매직을 보기위해 팬들이 몰리면서 표판매가 폭등했다.
그러나 저 기간동안 매직과 젋은 영건들의 마찰이 있었다. 매직이 분명 레이커스의 전설인건 사실이었지만 당시 팀의 리더는 엄연히 닉 반 엑셀이었다. 매직은 젊은 영건들에게 자신의 말대로 따를것을 요구했고, 이는 자유롭에 플레이하길 원하던 닉에겐 커다란 스트레스였다. 심지어는 아예 매직이 더 많이 공을 요구하자 닉은 더욱 불만이 쌓일수 밖에 없었다. 그 영향으로 감독인 델 헤리스와도 더 심하게 다투고 결국 심판판정에 항의하다 심판을 밀치는 행위로 나타난것. 그렇게 그 해 레이커스는 정규시즌에는 좋은 성적을 찍었지만 팀의 케미스트리는 박살나있었고, 플레이오프에서 정규시즌 성적이 무색하게도 1라운드 광탈 후 매직은 완전 은퇴를 선언했다.[31] 다큐멘터리 내용으로만 보면 매직의 복귀는 성공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 이상의 성적을 매직 본인은 기대했겠지만 당시 레이커스의 젊은 영건들은 그정도의 준비는 되지 않았다고 보는게 타당하다. 또한 매직 본인도 기량면에서 더 이상 전성기에 그가 아니기도 했고, 무엇보다 서로간의 가치관 차이로 인한 팀워크의 붕괴가 결정적이었다. 그 당시까지 쇼타임 레이커스의 종언을 인정하지 않았던 레이커스 수뇌부도 매직의 복귀가 통하지 않자 사실을 직시해야했다.
2.4. 은퇴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내고 있었으나 1991년 HIV 보균자임을 밝히며 에이즈의 공포속에 돌연 은퇴를 선언, 세간의 충격을 불러 일으켰다[32]. 참고로 기자가 "누가 당신에게 에이즈[33]를 옮긴 것 같습니까?"라고 물으니 너무 많은 여자와 잠을 자서 잘 모르겠다라고 대답했다고(…).[34]그럼에도 다음해 NBA 올스타전 선발은 물론[36] 초대 드림팀에 선발되며[37]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당연하게도 NBA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며 등번호 32번은 영구 결번. 1995-1996 시즌엔 일시적으로 현역 복귀까지 했으며, 은퇴 이후 30년이 지난 후에도 건강한 상태로 외부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관리만 잘 한다면 HIV도 극복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당시 HIV보균자라는 사실은 대중에게 에이즈 환자와 다름없이 여겨지는 상황이었다. 그 때만 해도 에이즈는 걸리면 바로 죽는 공포의 병이라 에이즈 환자는 절망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매직 존슨은 건강하고 정상적으로 살았고, 이는 일반인과 환자들의 인식을 변화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현재까지도 완치제는 없지만 HIV 억제 치료제를 꾸준히 복용하면서 관리하면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만성병으로 인식되고 있다. 에이즈 관련 약품이 개발완료되어 시판되기 직전단계에서 많은 제공을 받는다고도 한다.
3. 수상 내역
수상 내역 |
NBA 챔피언 5회 (1980, 1982, 1985, 1987-1988) NBA 파이널 MVP 3회 (1980, 1982, 1987) NBA 정규시즌 MVP 3회 (1987, 1989-1990) 올-NBA 퍼스트 팀 9회 (1983-1991) NBA 어시스트왕 4회 (1983-1984, 1986-1987) NBA 올스타 12회 (1980, 1982-1992) NBA 올스타전 MVP 2회 (1990, 1992) 올-NBA 세컨드팀 (1982) NBA 올-루키 퍼스트팀 (1980) NBA 올해의 스틸왕 2회 (1981-1982) NCAA 챔피언 (1979) NCAA 파이널 포 MOP (1979) 네이스미스 명예의 전당 헌액 (2002)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 |
4. 플레이 스타일
매직의 플레이는 불규칙한 바운드로 성큼성큼 드리블치다가 예측못할 타이밍에 갑자기 대상 선수를 보지 않고 찔러주는 노룩패스를 빼곤 설명할 수 없다. 워낙 패스가 마법같다고 하여 그의 닉네임 '매직'이 생길 정도.
우선 큰 키에 팔도 길어서 패스할 때 속도감이 배가 된다. 그의 현역시절 기준이나 지금이나 이 정도 신장이면 3~4번 포워드로 뛰는게 정상인데, 206cm의 큰 키로 탑에 서서 자기보다 작은 상당수 가드들의 머리 위로 킬패스를 붕붕 날려댔다. 섣불리 높은 수비를 하려 한다면 우월한 몸빵으로 밀어붙이는 포스트업 백다운으로 공간을 확보하고, 거기서 훅 샷과 킬패스를 날리니 환장할 노릇. 그렇게 압도적인 피지컬과 그 이상의 공간감각 및 대담한 패스웍으로 레이커스의 쇼타임 농구를 주도했으며, 은퇴한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역대 최고의 게임 리딩 능력과 코트 내에서의 시야를 가졌던 선수로 평가받고 있다.
속공 상황에서 보여주는 창의적인 킬패스가 트레이드 마크이고 이는 아래 Show Time 부분에 기재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하프코트 오펜스를 이끄는 능력이 속공보다 떨어지는 선수는 결코 아니었다. 실제로 매직의 플레이를 풀경기로 보면 킬패스 위주의 하이라이트와 달리 생각보다 정적인 플레이도 많이 즐겼음을 알 수 있는데, 매직의 포스트업은 역대 최고의 퍼리미터 디펜더인 조던&피펜조차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라 지공은 지공대로 위협적이었다. 이는 매직이 최고의 수비수들 앞에서 단독으로 득점을 짜낼 역량이 충분히 있는 선수였음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매직의 득점 볼륨이 높지는 않음에도 무서운 공격수였던 이유가 이것인데, 그는 일단 체격과 포스트업 능력이 어지간한 공격형 파워포워드 급이라 어지간한 3번까지는 인사이드에서 찍어누르며 득점하는 게 가능했다. 그렇다고 빅맨을 붙이자니 퍼리미터에서 매직의 페이스를 따라가지 못하고, 필연적으로 다른 포지션에서 미스매치가 발생할테니 매치업 견적을 짜는 게 굉장히 까다로웠던 것. 더군다나 그 득점력보다도 훨씬 뛰어난 게 바로 패싱 능력이라 더블팀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38]
레이커스가 '런앤건 팀은 우승하기 어렵다'라는 속설아닌 속설과 거리가 있었던 것도 이 덕분이다. 기본적으로 런앤건 컬러의 팀은 화려하고 기대득점이 높은 대신 지공의 완성도와 수비력은 다소 낮은 경우가 많은데, 매직의 레이커스는 속공을 즐겼지만 지공에 자신이 없거나 수비가 약한 팀은 아니었다. 애초에 매직과 자바라는 포스트업과 훅 샷의 장인들을 보유한 팀이 지공을 못한다면 그게 더 이상하고, 수비진 역시 리그에서 손꼽히게 좋았다. 즉, 이 팀은 '지공을 못해서' 속공을 택한게 아니라 순전히 '속공이 너무 좋아서' 쇼타임 팀이 된 케이스. 실제로 압둘자바 은퇴 이후 매직은 하프코트 오펜스의 비중을 늘리며 다시 한 번 파이널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또 한가지 장점은 커리어 통산 7.2에 커리어 하이 9.6 리바운드를 잡아낸 탈가드급 리바운더였다는 점이다. 가드가 직접 수비 리바운드를 확보한다면 빅맨으로부터 볼은 전달받는 과정이 생략되고 바로 속공을 전개할 수 있다는게 장점인데, 리바운드 능력이 좋았던 매직은 잡자마자 바로 속공을 달려나가거나 정확한 아웃렛 패스를 던져주며 곧바로 템포를 끌어올리곤 했다. 2010~20년대에는 속공 빈도를 높이기 위해 센터가 박스아웃에 전념하고 메인 핸들러에게 리바운드 기회를 몰아주는 형태가 자주 보인다는걸 생각하면 이는 무시못할 장점이다.
가드~포워드를 모두 소화할 수 있고 비상시에 센터를 볼 수 있을 정도로 농구의 모든 포지션에 정통했다.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올라운드 플레이어. 농구 역사에서 포지션 파괴자의 원조라고도 할 수 있다. < 슬램덩크>에서 최강캐릭터 중 하나로 묘사되는 윤대협의 모티브가 매직 존슨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한데, 그 이유도 여기에 있다. 포워드부터 유사시 센터까지 소화할 수 있는 거구로 어지간한 정통 포인트가드를 압도하는 시야와 패싱스킬을 보여준 것. 커리어 첫 파이널 시리즈에선 압둘자바가 부재한 6차전에서 (완전히 센터로 뛰었다고 보긴 어렵지만) 센터를 자처하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고, 은퇴 후 복귀했을 땐 스몰포워드로 활약하기도 했다.
4.1. The Show Time
매직의 전매특허는 역시 전광석화같이 상대의 혼을 빼놓는 화려한 패스. "쇼타임"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1980년대 레이커스의 농구는 런앤건이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된 화려한 빠른 템포의 농구였고, 그 중심에는 단연 매직이 있었다. 특유의 노 룩 패스는 말 그대로 매직을 보는 듯 하다. 선수생활 시 같이 뛰었던 선수가 "매직의 패스는 마치 나와 그 사이의 사람을 뚫고 와 버리는 것 같다"라고까지 표현. 심지어 몇몇 패스는 경기장에서 뛰는 선수들 뿐만 아니라 카메라맨조차 속아서 공을 놓쳐 버리고는 했다. 때문에 그의 하이라이트 필름은 현대의 기준으로 봐도 매우 화려하다.
위 영상 2분대에 주로 나오는 것처럼 매직은 그야말로 파워패스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패스를 엄청나게 강하고 빠르게 예측불허의 타이밍으로 던졌기 때문에 팀원들조차 조금이라도 방심하고 있다간 패스 캐치 타이밍이 늦어서 공을 놓쳐서 턴오버가 되고 매직의 폭풍 갈굼을 당하는게 일상이었다. 이때문에 매직 중심으로 팀이 짜인 쇼타임 레이커스는 그의 패스를 받아낼 수 있는 선수만 한 팀에서 뛸 수 있다는 암묵적인 조건이 있었다. 매직의 후배이자 쇼타임 레이커스의 주전이었던 제임스 워디 역시 데뷔 초에는 매직의 패스가 너무 강해서 받기 어려웠다고 밝힌 적이 있다. 대신 그런 언제 킬패스가 날아올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경기의 집중력을 높여주고 레이커스 특유의 런앤건과 속공의 위력을 극대화하는 원동력이었다. 다만 이런 화려한 패스 때문에 턴오버가 상당히 많았던 건 흠.[39]
일단 매직은 동포지션을 압살하는 수준의 떡대와 드리블링으로 상대 수비진 한가운데까지 압박해들어오기 때문에 지공상황에서도 상대 수비를 끌어모을 수 있는데, 이때 강한 어깨와 자신만의 패싱레인 읽는 타이밍으로 자신에게 시선이 쏠려서 레이커스 팀원을 놓치는 걸 보자마자 순식간에 패스를 발사하였고 팀원들은 이를 본능적으로 잡아 마무리했다. 매직은 특유의 슛폼으로 풀업점퍼를 즐기지 않아서 1대1 수비 때 슛 선택지가 제한적이었던 편임에도, 이 본능적인 타이밍과 떡대 및 어지간한 빅맨급 피니쉬 스킬[40]로 트리플 스렛이 되기 때문에 공들고 밀고들어오면 수비수들을 되려 압박했다.
이렇듯 매직은 장신 포인트 가드의 모든 것을 보여준 선수이지만, 정작 매직 자신은 농구 인생 최악의 선택을 NBA에서 포인트 가드를 주포지션으로 선택한 것으로 꼽는다. 포인트 가드는 부지런히 움직여야하고 수비 때는 낮은 자세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매직이 수비하러 따라 다니기에는 허리와 무릎에 무리가 많이 갔기 때문이다. 덕분에 매직은 선수생활 내내 무릎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 게다가 그의 큰 사이즈는 공격 시 유리함을 가져다 주었으나 수비시 빠른 선수들에게 고전한다는 약점도 가져다 주었다. 그래서 전성기에도 수비시에는 놈 닉슨, 바이런 스캇(전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감독)같은 보조 가드들이 상대 포인트 가드를 맡고 매직은 상대 슈팅 가드, 스몰 포워드와 매치업하는게 많았다.[41] 실제로 그의 뒤를 잇는다고 주목받았던 수많은 장신 1번들은 부상에 신음하곤 했다.[42] 그래도 매직은 이러한 장신 가드들 사이에서는 좋은 내구성을 타고났던 편으로, 통산 어시스트는 10141개로 5위, 통산 게임당 평균 어시스트는 11.19개로 1위를 기록했다.
4.2. 매직의 슈팅력과 득점 방식
우선 매직의 중거리 슈팅력은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정확한 편이었다. 특히 자유투가 뛰어난 편이었는데, 버드 수준은 아니라도 커리어 84.8%에 1988-89 시즌에는 91.1%로 리그 1위를 한 적도 있었다. 다만 원래부터 자유투를 엄청 잘하는 건 아니고 루키 시즌 81%, 그 다음에는 76%, 76%, 80%, 81%으로 괜찮은 수준이었다가 점점 성공률이 늘어난 케이스.3점슛 자체는 당대 기준으로도 그다지 뛰어난 편은 아니고 그냥 괜찮은 편 정도였다. 매직은 데뷔 후 9년차때까지 매시즌 경기당 3점슛 시도 갯수가 1개가 안되었고 성공률이 1,2할대를 오갔다. 1982-83 시즌에는 시즌 내내 21개를 시도해 단 한개도 성공시키지 못했다. 다만 1980년대 중반까지 선수들은 3점 자체를 시도하는 것을 생소하게 생각해 안 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때 통계들은 큰 의미가 없다. 실제로 래리 버드도 경기당 1개도 안 쏘던 시절이 허다하다.
아무래도 3점이 대중화되기 전인 1980년대를 주무대로 삼았던 선수이기에 유의미한 시도를 가져간 시즌이 많지 않은 편. 매직이 3점을 하나의 옵션으로 활용했다고 볼 만한 건 경기당 2.4개를 시도 하고 0.8개를 넣었던(31.4%) 1988-89 시즌 부터이고, 그 다음 시즌에는 1.3개 성공/3.5개 시도 (38.4%), 그 다음에는 1개 성공/3.2개 시도 (32%), 복귀 후에는 0.7개 성공/1.8개 시도(37.9%)였다. 즉 매직은 3점 슛을 장점까진 아니라도 시즌별로 보면 하나의 옵션으로 장착에 성공했고, 슈팅력을 꾸준히 키워서 초창기보다 후반기에 더 슛을 잘하던 선수라고 할 수 있다.[43][44][45]
중거리 슛을 보자면, 매직은 수비가 헐거워지면 미들을 기습적으로 정확하게 잘 꽂아넣는 선수였다. 또한 매직은 풀업점퍼를 잘 쏘지 않았지만 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크게 두가지인데 일단 매직은 풀코트 속공 상황이건 하프코트 상황이건 선패스를 위해 동료들을 항상 보고 있으니 냅다 드라이브인 하다 슛부터 쏘는 경우가 당연히 많지 않고, 드라이브인 상황에서 골밑으로 돌진하여 떡대와 스피드 및 그리고 절묘한 레이업 기술로 득점하는 것이 당연히 풀업점퍼보다 확률이 높으니 그대로 골밑으로 드라이브인 해 들어가는 것이다. 그렀다 하더라도 시간이 얼마 없거나 골밑에 공간이 없어 못들어갈 때는 간간히 풀업을 시도했고 나름대로 잘 성공시켰다.
매직이 고득점한 경기들의 영상을 통해 그가 어떻게 득점했는지 보자. 매직은 커리어 하이가 46점이던 선수라, 아래 영상들은 매직치고 충분히 고득점을 한 경기들이다.
매직이 루키로 무릎부상으로 출전이 불가능했던 압둘자바를 대신해 센터로 나와서 팀을 우승으로 이끄는, 아마도 매직의 커리어에 길이남을 대표적적인 경기이다. 우승이 결정된 6차전에서 매직은 야투 23개를 쏴서 14개를 넣었다. 이 영상에서는 14개 중 13개가 나와있다. 초창기라 포스트업을 많이 하기보다는 돌파나 컷인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1. 드리블을 하다가 수비수가 공간을 주자 세트슛으로 득점을 한다.
2. 돌파후 레이업
3. 돌파 후 레이업[46]
4. 돌파 후 자유투라인 부근에서 한손 슛
5. 패스 받은 후 페인트존 바로 밖에서 훅슛
6. 공격리바운드 후 풋백득점
7. 돌파 후 레이업
8. 공간이 나자 20피트 지점에서 세트 포지션에서 점프슛
9. 삼점라인 바로 안쪽에서 세트 포지션에서 점프슛(해설자가 Magic will take a set shot on Bobby Jones라고 직접적으로 언급)
10. 돌파 후 레이업
11. 공격리바운드 후 팁인
12. 골밑슛
13. 패스받아 덩크슛
30세의 매직은 MVP에 올랐으며, 43점을 기록했다. 1990년 서부 준결승 5차전이다. 여기서 그는 필드골 26개를 시도해 15개를 넣었다.
1. 리바운드 후 풋백
2. 로우포스트에서 백다운 후 왼손 훅슛
3. 속공 과정에서 레이업
4. 속공 과정에서 레이업
5. 포스트업하다가 오른쪽 훅슛
6. 속공 과정에서 레이업
7. 속공 과정에서 레이업
8. 포스트업하다가 골밑슛 미스 후 리바운드해서 풋백
9. 기습적인 컷인 후 레이업
10. 포스트업하다가 스핀무브 돌파 후 레이업
11. 로우포스트에서 포스트업하다가 뱅크슛
12. 속공에서 패스받아 점프슛
13. 포스트업하다가 돌파후 욱여넣기 슛
14. 속공 과정에서 레이업
15. 22피트 지점에서 세트 포지션에서 점프슛
11번 득점코스의 경우 골밑에서 점프하며 한손으로 슛을 올리는 건 샤킬 오닐도 자주 하는 플레이였다. 이 경기에서 매직은 상당히 많은 득점을 기록했는데 43점을 넣는 도중 15개의 필드골을 하면서 절대 다수가 로우포스트에서 포스트업이며 레이업/골밑슛이고, 먼거리에서 세트 자세에서 슛을 하는 걸 볼 수 있다. 이러한 슛은 그 특성상 갑자기 올라가 쏘는(pull-up) 슛에는 적합하지 않아 밀착수비를 제치고 쏠 순 없지만, 수비가 헐거울때 쏘면 그 안정감 때문에 쏘기 편한 폼이기 때문이다.[47]
이 영상은 1991년 휴스턴과의 플레이오프 경기이다. 당시 만 31세이던 매직은 퍼스트팀 멤버였으며 신체적으론 조금 하락세였으나 기술적으로 완성된 시점. 여기서 그는 38점을 득점했는데, 영상에서는 필드골 14개 중 6개가 묘사되어 있다. (실질적으로 7개)
1. 로우포스트에서 백다운하다가 골밑에서 레이업, (이후 동일한 과정 이후 훅슛 마무리하려다 블럭당함)
2. 로우포스트에서 포스트업하던 제임스 워디의 패스를 받아 세트 포지션에서 점프해서 3점슛.
3. 다시 로우포스트에서 포스트업하다가 돌파 후 레이업
4. 또 백다운하다가 베이비훅슛
5. 속공에서 코스트 투 코스트 레이업 (해설자가 매직이 연속으로 "two easy lay-ups"를 넣었다는 걸 보면 영상에서 생략된 그 전 득점도 레이업이란 걸 알 수 있다.)
6. 로우포스트에서 백다운하다가 또 돌파 후 레이업
여기서 보듯이 그는 당시 기준으로 봐도 3번 내지 4번, 현재 기준으로 보면 빅맨에 가까운 플레이를 했다. 득점이든 패스든 거의 모든 플레이를 포스트업 상태에서 백다운하며 시작했으며, 중거리슛 위치에서 턴어라운드 점퍼가 아닌 훅샷으로 마무리하거나 골밑돌파를 했다. 심지어 슈팅가드인 바이론 스콧이 여러번 그에게 엔트리패스를 넣어주는데, 이는 마치 조던이 피펜에게 엔트리 패스 받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는 조던보다도 더욱 로우포스트에서 득점하는 빈도가 높았고, 포스트업 실력이 더욱 뛰어났으며 특히 훅 슛은 넘사벽의 완성도를 자랑했다는 것.[48]
포스트 훅 뿐만이 아니라 러닝 훅에도 능했다. 숙명의 라이벌인 래리 버드의 보스턴 셀틱스와 맞붙은 87년 결승 4차전에서, 상대 수비에 줄 곳이 없자 직접 본인이 드리블하며 들어가 훅슛을 성공시킨 'Baby Hook Shot'은 명장면 중의 하나. 참고로 매직은 압둘자바의 주무기 스카이훅을 그나마 비슷하게라도 따라하고, 이걸 경기 중에 응용해서 자신의 주무기로 써먹은 유일한 선수였다.
4.2.1. 매직의 슛은 세트슛인가?
- 매직의 슛이 점프슛인지 세트슛인지는 제법 갑론을박이 오가는 주제이다. 우선 세트슛이라는 용어의 문제일 뿐, 매직 존슨은 점프와 동시에 쏘는 슛을 주로 쏘는 것이 맞다. 이는 매직은 양발점프가 낮은 유형의 신체적 특징을 가진 선수여서 한발 점프가 아닌 양발을 붙인 상태에서 하는 점프슛은 높이 뛰지 못한다. 하지만 점프를 높이 하지 못하는 것과 점프슛이 약한 것은 전혀 별개의 이야기다. 일단 상술했듯이 매우 정확한 슛을 가지고 있었고 장신의 신장과 긴팔, 그리고 자신의 슛이 블럭당하지 않는 수비수와의 거리감을 매우 정확하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매직은 점프슛을 거의 블럭당하지 않았다. 높이 점프할 수 있느냐 혹은 풀업점퍼를 쏘느냐 아니냐는 결과적으로 수비의 방해를 받지 않고 높은 확률로 슛을 성공시키기 위한 것이고 매직은 낮은 점프력의 점퍼로도 수도 없이 수비수를 괴롭히고 높은 확률로 성공했다.
또한 그는 엄격한 의미의 풀업 점퍼를 잘 쏘지 않았을 뿐, 한 두발 드리블로 드라이브인 할 듯 움직이다가 점프슛을 쏘는 것도 풀업이라고 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드리블 점프슛은 자체는 충분히 많이 사용하는 옵션이었다. 이것이 풀업점퍼처럼 보이지 않는 것은 매직의 드라이브인이나 드리블 자세가 굉장히 높기 때문에 낮은 자세로 드라이브인 하다 위로 몸을 일으켜 점프슛하는 것보다 덜 역동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높은 드리블 자세에서 이어지는 점프슛의 이점이 있었던 것은 드리블 하다 공을 잡고 슛모션을 가져가서 슛까지 이루어지는 동작이 간결하기 때문에 슛모션이 빠르지 않음에도 수비수들이 블러킹을 시도하기에 이미 한발 늦어버리기 때문에 매직의 점프슛을 잘 막지 못한 것. 이러한 매직 특유의 슛자세는 특유의 낮은 양발점프를 극복하기 위해 높은 드리블 자세를 활용한 결과물로 수비수들이 제대로 잘 막지 못한 공격옵션 중 하나였기 때문에 점프슛이 약한 것은 아니다.
매직의 경기를 보면 초창기건 후반기건 대부분 '세트 포지션에서 점프와 동시에' 쏘는 걸 볼 수 있다. 종합적으로 보면 초창기의 매직은 탑에서 푸시하는 포스트업도 능수능란 했지만, 페이스업 상황에서 활발한 운동량은 물론 볼터치 감각이 탁월했기 때문에 컷인, 스쿱 레이업, 골밑슛은 물론이고, 전성기 압둘자바에 유일하게 견줄수 있는 완벽한 훅슛을 올릴수 있었다. 그만큼 다양한 패턴의 원핸드 슛을 남들보다 먼 거리에서 높은 성공률로 넣을 수 있기에 풀업 점퍼의 필요성이 거의 없었고, 무릎에 부담을 덜 주면서도 슛거리를 늘리는 방법으로 최대한 빨리 던지는 원모션 세트슛 급 점퍼[49]를 구사했다. 즉 전성기에도 매직은 슈팅 스킬셋이 빅맨의 그것과 거의 동일했고 커리어 말미에는 부상으로 활동반경이 줄은만큼 빅맨처럼 활동하며 득점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매직의 중장거리슛의 절대 다수는 세트된 상태에서 점프와 동시에 쏘는, 흔히 세트슛이라고 알려진 슛이었다. 그러나 점프 후에 슛을 쏘든 점프와 동시에 슛을 쏘든 점프슛이 맞기 때문에, 매직 존슨은 점프슛을 쏜 것이 맞으며 점프슛 능력이 당시 기준으로 좋은 것도 맞다. 또한 이 정의대로는 가만히 점프하지 않고 쏘는게 대부분인 자유투를 제외한, 점프와 동시에 쏘는 슛은 모두 점프슛이란 걸 알 수 있다. 즉, 샤킬 오닐이 3점 슛을 가끔 쏠때 세트된 상태에서 살짝 점프하면서 쏘거나 하는 것 역시 점프슛인 것이고 자유투 하듯 쏘지 않는 이상 진짜 세트슛으로 필드골을 쏘는 선수는 사실상 프로건 아마추어건 없다시피 하다. 즉, 엄밀히 정의를 따지면 사실상 NBA의 극초기[50]를 제외하면 프로수준에서 진짜 세트슛은 자유투를 제외하곤 없다.
- 다만 저런 식의 사전적인 의미의 '움직이지 않고 쏘는' 세트슛만 세트슛이라고 부르는 것은 문제가 있는게, 이 의미는 사실상 매직의 현역시절부터 이미 사장되었던 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위 영상에서 매직이 "점프와 동시에 슛을 쏘는" 장면에서 NBA해설가도 이를 당연한 듯 계속 세트슛으로 부르고 있으며, 국내에서건 해외에서건 지금도 이런 슛(두 발을 고정한 상태에서 점프와 동시에 슛을 쏘는)은 세트슛이라 많이 불린다. 래리 버드만 해도 초반에는 점프 후 슛을 하다가 운동능력이 떨어진 이후에는 점프와 동시에 슛을 했는데, 3점슛 콘테스트를 보면 "버드는 세트슛을 쏘는 선수니까요"라고 해설한다. 1980년대쯤 되면 자유투를 쏘는 것처럼 몸을 고정한 상태에서 필드골을 쏘는 선수는 농구 극초기 이후 없어진지 수십년이 지난 상태였기 때문에, 농구 전문가들이 모두 매직처럼 쏘는 슛을 세트슛이라고 하고 있고, 현재도 해당 슛을 점프슛이라고 하면 못 알아듣는다.
실제로 농구 전문가들이 해설하는 2000년 NBA 3점슛 콘테스트의 영상을 한번 보자.
여기서 해설하는 인물들은 2000년 기준으로 지도자 생활이 30년 됐고 NBA 올해의 감독상까지 탄 마이크 프라텔로, 1960년대부터 방송생활을 해 경기해설만 37년간 한 전설적인 해설자 마브 앨버트, 현역 NBA선수였으며 올스타 출신인
대니 에인지, 그리고 사이드라인 리포터를 맡은 사람은 역대 최고의 여자농구선수 중 하나인 쉐릴 밀러이다. 이들의 전문성을 의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며, 특히 NBA를 40년 가까이 해설한 앨버트나 NBA코치 생활을 1970년대부터 해온 프라텔로는 권위자가 맞다. 그런데 이들도 점프와 동시에 슛하는 걸 세트슛이라고 부르면서 콘테스트에서 점프슈터와 세트슈터의 차이를 지적하면서 이게 어떻게 변수로 작용할 것인지 논의하고 있다. 보면 알겠지만 참가자들 중 사전적인 의미에서의 세트슛을 쏘는 선수는 없다.[51][52]
이쯤되면 "점프와 동시에 슛을 쏘는 것이 세트슛이다"란 것은 잘못된 용어가 아니라, 시대에 따라 의미가 바뀐 것이고 사전적인 의미에서 업데이트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리고 저 슛이 세트슛이라고 불린 것은 최소한 버드와 매직이 현역이던 시절부터다. "점프하면서 쏘는 슛은 세트슛이 아니고 점프슛이다"라고 해도, 1980년대부터 농구의 본고장 전문가들이 그걸 세트슛이라고 불렀는데 점프슛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쨌거나 부인할 수 없는 것은, 1980년대부터 농구를 가장 잘 아는 미국의 전문가들과 농구관련 인물들은 저 슛을 점프슛이 아닌 세트슛이라고 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농구 전문가들은 매직 존슨이 세트슛을 쏜다고 해왔다. 즉, "매직이 세트슛을 쏜다는게 헛소리"라고 한다면 88년 NBA3점슛 콘테스트에서 매직과 동일하게 점프와 동시에 슛을 쏜 래리 버드가 세트슛을 쏜다고 한 해설자도 헛소리를 한 셈이며, 00년 콘테스트에서 프라텔로, 앨버트, 에인지, 밀러 모두 헛소리를 한 셈이고, 저 슛을 세트슛이라고 불러온 농구계의 절대다수가 전부 헛소리를 해왔다고 하는 셈이다.
- 정리하자면 이러한 갑론을박은 용어에 대한 이해 차이로, "점프와 거의 동시에 슛을 쏘는 것"이 매직의 주요 슈팅방식이라는 것에 대한 이해는 동일하나, 이를 두고 세트슛이라고 부르느냐 점프슛이라고 부르느냐의 차이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세트슛으로 부르는 것은 사전적인 의미로만 보면 잘못된 것으로, 이 역시 점프슛이라고 부르는 것이 엄밀히 말해 맞다. 그러나 동시에 실전에서는 국내는 물론 현지에서도 절대다수의 전문가들은 이러한 슛을 세트슛으로 정의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며, 저런 '사전적 의미'가 80년대부터 이미 사장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정리하자면 어느 한쪽이 옳고 그르다기 보단 그만큼 용어에 혼용이 있다는 정도로 알아두자.
5. vs 래리 버드
자세한 내용은 매직 존슨 vs 래리 버드 문서 참고하십시오.6. 은퇴 이후
6.1. 감독으로서
그가 떠난 레이커스는 제임스 워디와 바이런 스캇 등 쇼타임 레이커스의 멤버들이 노쇠화되어 성적도 점점 하락해 마침내 1993-94 시즌에는 커다란 슬럼프에 빠져 플레이오프에 못 갈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에 구단은 시즌 중반에 해고당한 랜디 펀드(Randy Pfund)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시즌 막판에 가서야 매직을 불러오게 되었다.
부임 초반에는 5승 1패로 플레이오프 진출 가능성이 생겨 당시 레이커스 홈구장인 잉글우드 포럼에 팬들이 연신 몰려들었지만, 이후 10연패를 당하면서 정규시즌 33승 49패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고, 시즌 후 구단주 제리 버스가 다음 시즌에 1400만 달러의 연봉을 제시하며 정식 감독에 오를 것을 제의했지만, 그는 감독직을 거절하고 대신 주주로 경영에 참여한다.
6.2. 사업가로서
결국 감독으로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대신 사업수완에는 재능이 있어서 선수생활 은퇴 이후 사업으로도 매우 크게 성공했다. 은퇴한 운동선수 중 사업으로 가장 성공한 인물 중 하나이며, 특히나 자신의 브랜드를 활용해 큰 돈을 번 마이클 조던이나 르브론 제임스같은 후배 선수들과 달리 뛰어난 사업 수단으로 성공한 진짜 사업가란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53], NBA의 은퇴선수의 롤모델로 손꼽히고 있다. 현재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부사장직을 맡고있으며, 'Magic Johnson Development Corporation'이라는 자신의 기업을 만들어 사업에 크게 대성공했고 지금은 ' Magic johnson Enterprises'로 이름을 바꾸었다. 현재 매직 존슨의 회사는 4개의 도시에 매직존슨 극장을, 그리고 미국 전역에 114개의 스타벅스, 39개의 버거킹, 13개의 피트니스 센터를 가지고 있다.당시 매직은 로스엔젤레스에서도 흑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우범지역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갱들이 우글거리는 흑인 지역에서 성공하기 힘들다는 주변의 평가를 물리치고 직접 갱단을 설득하고 흑인들을 주로 고용하면서 그들에게 직업을 제공하고 그들이 그 급료로 소비를 하면서 지역경제를 끌어올리고 범죄율과 실업률을 낮추는 등 사업에서도 마법을 부린다는 평가를 받았다. 경제잡지 포브스에서 주목받는 흑인 기업가 중 한명으로 뽑히기도 했다.[54] 2012년에 30년지기 친구이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워싱턴 내셔널스 사장이었던 스탠 카스텐과 같이 컨소시엄을 이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인수에서도 나섰다. 그만 홀로 인수한다면 어렵겠지만 메이저리그 인맥이 많은 카스텐과의 협조 때문에 미국에서도 다저스 인수에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그리고 결국 다저스 인수쟁탈전에서 승리하게 되어 공동구단주가 됐다. 덕분에 막장으로 전락한 맥코트 구단주 시기 선수들에게 연봉을 줄 돈도 없어 중계권을 헐값에 팔아넘기려다 무산되는 등 망해가던 다저스는 안정적인 자금줄을 확보하며 재도약 발판을 마련할 수 있게 됐다.
류현진의 입단식에도 얼굴을 비췄다. 현역 때 비해 더욱 후덕해진 모습. 앞으로 류현진과 관련해서 국내 팬들에게도 자주 모습을 보일 것으로 보인다.
류현진이 완봉승을 기록하자 트위터를 통해 칭찬하기도 했다. 기사
전 야구선수 노마 가르시아파라, 그의 부인이자 미국 여자축구의 전설인 미아 햄, 유튜브의 창립자 채드 헐리 등과 함께 다시 한번 컨소시엄을 이뤄서 2017년 MLS에 참가할 로스앤젤레스의 신생 축구 구단 창단 작업에 들어갔다.
2014년에는 WNBA팀 로스앤젤레스 스팍스[55]를 인수해 구단주가 되었다. 스팍스는 2016년 WNBA 정상에 올랐고, 구단주 매직 역시 오랜만에 농구로 우승했다.
2017년 2월 3일, 매직이 다시 레이커스의 프런트로 돌아온다는 기사가 나왔다. 자세한 기사는 여기를 참조.
6.3. 운영진으로서
2017년 2월 17일에 짐 버스에 의해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사장으로 고용되었다.[56] 본인이 선수시절 뛰던 팀이니 어떻게든 레이커스를 정상으로 돌려놓겠다고 약속을 했고 많은 기대를 불러모았지만 2018년까지 큰 움직임이나 활약은 없었다. 하지만.....2018년 6월 오프시즌이 시작되자마자 2년 안에 레이커스에 슈퍼스타를 데려오지 못하면 물러나겠다 라는 발언을 했고 그리고 7월에 그 르브론 제임스와 계약함으로 인해 자신의 약속을 지키게 되었다. 카와이 레너드가 레이커스 행을 희망함으로 인해 르브론과 같이 카와이를 붙여주기 위해 많은 트레이드를 하느냐 마느냐 말이 많았지만 스퍼스의 제안에도 중요한 유망주들을 내주기를 거부하면서 버텼는데 이것이 꽤나 좋은 평판을 받고 있다.[57] 게다가 매직은 내년에도 슈퍼스타를 데려올 계획이 있다면서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여줌으로 한동안 슬럼프에 빠졌던 레이커스에 새힘을 불어넣어줄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그러나 르브론 제임스 영입으로 큰 기대를 모았던 레이커스의 2018-19 시즌은 대실패로 마무리되었다. 특히나 시즌 도중의 앤서니 데이비스 트레이드 시도 파문으로 팀 분위기는 나락으로 떨어졌고 르브론의 병장 농구는 이런 막장 사태에 기름을 끼얹어 버렸다. 이런 와중에도 팀 관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ESPN 평론가 스티븐 A. 스미스 등은 매직 존슨을 초짜 경영자라고 맹비난하기도 했다. 매직 존슨이 전 사장의 흔적을 지운다고 트레이드했다가 뉴욕의 왕이 되어버린 디안젤로 러셀은 덤이다.
결국 4월 10일 매직 존슨은 사장직을 사임했다. 이런 소식을 전하면서 에이드리언 워즈내로우스키(Adrian Wojnarowski) 기자는 "매직 존슨은 사장으로 있을 때 일을 열심히 하지 않았다.", "여행이나 자주 가고 스카우팅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도 않았다."며 극딜을 퍼부었다. 트윗[58]
훗날 그가 영입을 추진한 앤서니 데이비스와 르브론 제임스가 2019-20 시즌 우승에 기여했고 르브론 제임스는 파이널 MVP에 오르며 뒤늦게나마 결실을 보았다.
7. 동영상
매직 존슨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상 (1991, 링크는 1996년 개정판이다.)
8. 말말말
"매직은 다른 선수들과는 다른 기질을 지녔습니다. 보통은 24세~26세에 스타가 되는데 매직은 겨우 19세에 스타가 되었죠. 그는 슈퍼스타라는 운명을 타고난 선수임에 틀림없었습니다.
ㅡ제리 버스,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구단주
ㅡ제리 버스,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구단주
"매직은 다른 모든 플레이어들 보다 머리 하나 그리고 어깨 하나는 위에 있었다(뛰어났다). 난 매직만큼 잘하는 다른 누구를 본적이 없다"
ㅡ ( 래리 버드, 시카고 선 타임스).
ㅡ ( 래리 버드, 시카고 선 타임스).
"매직은 단 세번의 슛만을 쏘고도 경기를 지배할 수 있는 유일한 선수이다"
ㅡ 줄리어스 어빙
ㅡ 줄리어스 어빙
"매직은 어릴때 (물론 나의 아버지를 빼고는) 내가 가장 좋아했던 선수였다. 레이커스가 챔피언쉽을 차지하던 시절 나는 그 당시 매직이 하던 플레이들을 따라해보곤 했었다. 나는 매직이 모든 사람들을 게임에 끌어들였다는 점을 사랑한다. 그의 팀메이트, 팬들, 모든 사람들을."
ㅡ 코비 브라이언트
ㅡ 코비 브라이언트
이 이외에도 NBA의 전설이었던 그에 대한 매우 많은 평가들이 있다.
9. 기타
- 아들이 자신이 게이라고 커밍아웃을 했다. 아버지인 매직 존슨은 아들의 커밍아웃을 받아들이는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 국산 만화 달숙이에 나오는 매직 쫀슨은 이 캐릭터를 패러디한 것.
- 마이클 잭슨과 매우 돈독한 사이로 유명하다. 1991년 발매한 마이클 잭슨의 앨범 Dangerous의 수록곡 "Remember the Time" 뮤직 비디오에 출연하기도 했다. 초반부에 파라오의 시종으로 나와서 왕비를 기쁘게 해줄 광대들을 소개하는 역할로 나온다. 또한 퍼렐 윌리엄스의 "Happy"에도 등장한다. #
- 사우스 파크 시즌12 1편에선 HIV에 감염된 카일[61]과 카트맨이 치료법을 찾기 위해 그의 저택을 찾는 전개가 나오는데, 끝내 찾아낸 치료법은 달러 입자 용액을 혈관에 주입시켜 에이즈 바이러스를 섬멸하는 것.
- 농구 만화 슬램덩크의 윤대협, DEAR BOYS의 후지와라 타쿠미(디어보이스)는 매직 존슨을 모델로 한 캐릭터이다.
- NFL의 로스앤젤레스 램스가 2016 시즌부터 세인트루이스에서 다시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오는 것이 확정되고 시즌 티켓 예매를 시작했는데 돌아온 램스의 시즌 티켓 1호 예약자가 됐다. #
- 예전에 팀 동료 제임스 워디와의 호흡에 대해 인터뷰하던 도중 말실수를 했는데, 서로 텔레파시가 통한다는 뜻의 ESP(ExtraSensory Perception)라고 하려다가 "우리는 ESPN[62]이 있는 것 같아요!(It's almost like we have ESPN)"라고 했다가 이게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거의 흑역사가 된 적이 있다. 상식적으로 NBA 선수가 ESPN을 모를리가 만무하기 때문에[63] 단순한 말 실수로 보이지만, 그의 인기와 당시 위상 때문에 "멍청한 스포츠 선수들이 하는 말이 이렇다"라는 식으로 엄청나게 퍼져서 "역사상 가장 멍청한 1001가지 발언(1001 Dumbest Things Ever Said"" 등 여러 책에도 소개되었다.[64]
- 1995년도에 카림 압둘자바와 함께 매직 올스타라는 팀 이름으로 방한해서 기아자동차/연세대 농구팀 등과 경기를 했다. 결과는 당연히 매직 팀의 승리. 당시 신문에 기아자동차의 센터 한기범이 카림 압둘자바를 막느라 고생하는 모습이 실리기도 했다. 추가로 1996년도에 한국의 피자헛에서 그의 실제 손바닥 사이즈가 담겨있는 농구공을 피자와 함께 판매한 적도 있으며, 이렇듯 당시 매직은 대한민국서도 꽤나 인지도가 있는 스포츠 스타였다.
- 1981-82 시즌에는 당시 레이커스 감독인 폴 웨스트헤드 감독과 심각한 갈등을 빚은 적이 있었다. 이는 웨스트헤드가 매직 존슨의 플레이 스타일과는 정반대인 지공 위주의 농구를 펼치려 했기 때문인데 결국 제리 버스 구단주는 매직 존슨의 손을 들어주고 웨스트헤드를 경질하였다. 그리고 그 자리를 매직에게 우호적인 어시스턴트 코치 팻 라일리로 대체하였다. 하지만 매직은 팬과 언론으로부터 감독을 내쫓은 건방진 선수라는 비난을 얻었는데 매직은 그 비난 여론을 파이널 우승으로 잠재웠다.
- 제리 버스와는 단순히 고용주 & 고용인의 관계가 아닌 거의 부자지간의 정을 쌓았을 정도로 친밀했다. 제리 버스는 매직을 정말로 애지중지했고[65] 다른 동료들이 매직과 제리의 사이가 사적으로도 돈독한 걸 그리 반기지 않았을 정도로 친밀했다. 거기에 제리 버스는 그에게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25년간 2500만 달러라는 계약을 주었다. 매직도 제리 버스를 아버지같은 분이라고 했을 정도. 매직이 에이즈로 은퇴를 하게 되었을 때 제리 버스는 너무 큰 충격을 받고 흐느꼈다는 표현을 쓸 정도로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66]
- 나이키의 창업자인 필 나이트의 자서전에 매직 존슨에 대한 이야기가 살짝 나온다. 필 나이트는 그가 포지션이 애매해서 뜨지 못할 것이라며 그에게 스폰을 하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 나이트는 자신의 실수 중에 하나였다고 밝혔다. 물론 후에 마이클 조던이라는 또다른 역대급 슈퍼스타를 영입하는 데 성공했지만 말이다. 단, 매직 존슨 본인에 따르면 #, 매직이 졸업했을 당시 나이키를 포함해 당시 모든 신발 회사들은 그와 계약하기 위해 제안을 했으나, 나이키는 돈을 제안할 수 없어서 주식을 주겠다고 제안했다고 한다.[67][68] 결국 매직은 컨버스를 선택했는데, 재밌게도 훗날 컨버스는 나이키의 자회사가 된다.
- 2022년 5월 NBA 플레이오프 중 발표된 뉴스에 따르면 NBA에 컨퍼런스 파이널 MVP가 신설되며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 MVP 트로피 명을 매직 존슨 어워드로 결정했다고 한다. 동부는 그의 라이벌 래리 버드 어워드. #
- 전설적인 펑크록 밴드 레드 핫 칠리 페퍼스가 1989년 발매한 앨범 Mother's Milk의 4번 트랙의 제목이 'Magic Johnson'이다. 매직을 "마법의 남자"로 묘사하고 그의 업적과 매력에 대한 감탄을 표현한 곡.
10. 관련 문서
[1]
프로필상 신장이며, 드래프트 전 신체검사 결과가 공표되지 않던 시기에 선수생활을 했기 때문에 정확한 맨발/신발신은 신장은 불명이다.
[2]
현역 시절 체중. 현재는 훨씬 더 나간다.
[3]
커리어 첫 4년은 올스타 포인트 가드 '놈 닉슨'과 리딩 롤을 분담하며 공식적으로 가드로 표기되었으며 바스켓볼 레퍼런스같은 사이트에서는 슈팅가드로 표기되었다. 다만 공식적으로 쇼타임의 초대 감독인 짐 맥키니가 첫시즌부터 팀의 포인트가드는 매직이라고 못박았으며, 오히려 놈 닉슨을 언급하며 놈 닉슨이라는 리그탑 포인트가드가 있으나 이팀의 포인트가드는 매직이라고 인터뷰하였다. 즉 공식적으로 놈 닉슨이 슈팅가드였다. 쇼타임의 창시자는 짐 맥키니이며 이 쇼타임의 구상이 매직을 포인트가드로 두고 팀의 중심축으로 삼는 런앤건 개념이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매직이 중심이 되어 펼치는 쇼타임농구는 79-80 시즌 프리시즌 캠프에서 이미 완성되었고 이를 완성한 이가 팻라일리도 폴 웨스트헤드도 아닌 짐 맥키니였다고 놈 닉슨 본인이 회고하기도 했었다. 이런 쇼타임 구상은 짐 맥키니가 신임 구단주인 제리 버스와의 감독 면접 과정에서 선보였고 제리 버스가 흥행을 위한 사업적인 관점에서 채택하여 감독으로 선임하였기 때문에 이후 감독들은 이런 맥키니의 구상을 철저히 따라야 했다. 이를 보좌하기 위한 코치로 대학에서 속공전술로 유명한 폴 웨스트헤드를 코치로 영입했고 수비코치로 팻라일리가 임명되었다. 짐 맥키니가 교통사고를 당한 후 당연히 런앤건 담당이었던 폴 웨스트헤드가 감독이 되어 맥키니의 사상을 이어받아 우승을 한다. 다만 그 이후 대학에서 펼치던 자신의 런앤건 농구를 하려하고 이에 따라 매직이 주도하는 속공이 아닌 런앤건 전술의 부속으로서의 속공농구를 하려고 하다 경질된다. 흔히 지공농구를 하려다 잘렸다고 오해받지만 맥키니의 쇼타임 농구가 아닌 자신의 런앤건 농구를 하려다 제리버스의 역린을 건드려 잘린 것이다.
[4]
스웨덴 리그
[5]
덴마크 리그
[6]
9년 연속 퍼스트팀
[7]
본명을 표기해야만 하는 올림픽에서도 장내 아나운서가 "어빈 '매직' 존슨" 이라고 소개할 정도다.
#
#
[8]
신인시절 필라델피아와의 1980 파이널 6차전에서 5차전에서 부상을 입은 압둘자바를 대신에 센터로 나서 42득점 15리바운드 7어시스트를 달성하고 파이널 MVP까지 수상한다. 포지션은 센터였지만 경기 운영방식은 별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필라델피아가 수비에서 고전했다.
[9]
기본적으로 올타임 누적 경기당 평균 스탯이 트리플 더블에 가까우며(19.5득점/ 7.2리바운드/ 11.2 어시스트), 트리플 더블 통산 누적 횟수는 138회로 역대 3위.
[10]
흠좀무라고는 하지만, 보통 NBA의 레전드들은 대부분 고교시절 이 정도의 성적을 보였다. 이 정도 성적을 가진 고교 선수가 아니라면, 스카우터들이 처다보지도 않는다. 당장 고등학교 졸업 당시 전국구 유망주긴 했지만 톱까진 아니고, 자기가 원하던 노스캐롤라이나 스테잇으로부터 스카웃받지도 못한
마이클 조던의 4학년 스탯이 26.8점 11.6리바운드 10.1어시스트였다.
카림 압둘자바는 무려 71연승에 고교 시절 내내 79승 2패를 기록했다. 다만 매직의 저 성적은 레전드들 중에서도 탁월한 축에 속하는 것은 맞다.
[11]
매직이 은퇴한 이후인 1993년에 1라운드 23번으로
시애틀 슈퍼소닉스 지명되어 데뷔한 센터 엘빈 존슨(Ervin Johnson)이라는 선수가 있다. 스펠링이 Ervin으로 매직과 약간 다르다. 엘빈 존슨은 시애틀 슈퍼소닉스, 덴버 너기츠, 밀워키 벅스,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등에서 활동한 평범한 몸빵형 센터로 이렇다할 주목을 받지 못하고 커리어를 마감했다.
[12]
흥미롭게도 매직은 자신과 래리 버드를 중심으로 한 다큐멘터리에서 어빈 존슨과 매직 존슨을 다른 자아로 설명한다. 어빈 존슨은 인간미를 가진 말 그대로 인간으로서의 자신이고, 매직 존슨은 승부욕에 넘치는 농구 선수라고. 래리 버드 역시 동조하며 자신은 매직보다는 어빈이 좋다고 받아쳤다.
[13]
1927년 5월 27일 노스다코타 주 하비에서 아버지 매리언 조지 히드코트(1901~1933)와 어머니 폰 그랜트 월시 릭스(1904~1978) 사이에서 출생. 3살 때 아버지를 디프테리아로 잃고 교사였던 어머니를 따라 외가가 있는 워싱턴 주 맨체스터로 이사갔다. 청소년기 때 포트 오카드에 있는 사우스 킷샙 고등학교에서 3종목을 터득한 후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미 해군 V-5 예비 조종사 훈련을 받았고, 종전 후 워싱턴 주립대학교에 입학해 잭 프리엘(1898~1995) 감독 밑에서 농구를 배웠다. 1950년 스포캔 밸리의 웨스트밸리 고등학교에서 감독으로 데뷔하여 1964년 모교인 워싱턴 주립대로 옮겨 마브 하쉬먼(1917~2013) 감독을 보좌했고, 1971년 몬태나 대학교 감독으로 전근가서 임기 5년 동안 마이클 레이 리차드슨을 발굴하며 1974-75 시즌 빅 스카이 컨퍼런스 우승, NCAA 전국대회 16강을 일궈냈다. 1976년부터 미시건 주립대로 옮겨 19년간 재직하며 매직 외에 테리 펄로, 그렉 케슬러, 제이-샘 빈센트 형제, 케빈 윌리스, 스캇 스카일스, 스티브 스미스, 숀 리스퍼트, 에릭 스노우 등을 발굴하거나 육성했다. 훗날 후임 감독이 될 톰 이조에게도 영향을 많이 끼치게 했다. 지도자 생활을 마친 후 핸드볼과 골프를 즐기며 미시건 주립대를 사랑해왔으나, 인생 말년에는 곤자가 대학교 농구부를 더욱 응원했다.
[14]
1978 드래프트에서 전체 3위로 인디애나 페이서스에 지명되어 1986년 방출 시까지 총 4개 팀을 거쳤고, 은퇴 후 켄터키 주 루이빌에서 부동산업자로 변신하여 최근 eXp 리얼티에서 중개인으로
근무 중이다. 그의 대학 시절 등번호 53번은 모교 켄터키대에서 영구 결번돼 있다.(
공식 페이스북)
[15]
웃지 못할 에피소드로 매직은 첫 경기를 이기고 우승을 한 것처럼 좋아했는데 그 정도가 너무 지나쳐서 주변인들이 제발좀 그러지 말라고 할 정도였다. 이러한 매직의 성격과 실력은 레이커스를 강호로 만들었고 결국 루키임에도 불구하고 올스타에 선정되고 레이커스는 60승을 거두게 된다. 결국 레이커스는 파이널에 진출하였고 우승을 하는데 그 과정이 극적이다.
[16]
물론 스타팅 포워드도 스몰 포워드가 두명인 문제가 있었지만 가드 자리가 시급했다. 다만 댄틀리는 시즌 직전 유타로 트레이드 되고 레이커스는 우승한다. 훗날 댄틀리는 디트로이트에서 뛰다가 댈러스로 트레이드되고 디트로이트는 우승한다.
[17]
Pearlman: “I could have written a book just on the 1979-80 Lakers. First they hire Jerry Tarkanian to be their coach then his agent is murdered so he doesn’t take the job. Then they hire Jack McKinney who is this guy nobody knows about. Then they have this 6’9” rookie point guard who they didn’t even want to draft initially, they wanted Sidney Moncrief, then they decide to take him and Jack McKinney says ‘We’re gonna run. And this guy Magic Johnson, some people want him to be a forward in the NBA, he’s not he’s going to be our point guard. Even though we already have arguably the best point guard in the NBA in Norm Nixon, this guy is going to be our point guard. And we’re just going to run teams to death, and even though we have this 7-foot center who is arguably the best player in the NBA, he’s going to run with us.’
[18]
포스트업으로 유명한 마이클 조던보다 포스트업 빈도수가 훨씬 잦고 능력도 앞서면 앞섰지 떨어지지 않는다.
[19]
이때 압둘자바를 대신해서 센터로 점프볼을 한 것은 "내가 당신의 빈 자리를 메우겠다"는 제스쳐에 가까웠으며 실제로 그렇게 했다.
[20]
1위는 1962 파이널에서 61득점을 올린
엘진 베일러. 공동 2위는 55득점으로 1967 파이널에서
릭 배리가, 1993 파이널 4차전에서
마이클 조던이 각각 기록했다(이 시리즈에서 조던은 파이널 시리즈 역대 최다인 평균 41점을 올리며 쓰리핏을 달성하게 된다). 4위는 1969 파이널에서
제리 웨스트가 기록한 53득점으로 그 유명한 '파이널 준우승 MVP'가 나온 시리즈에서였다.
[21]
더 정확히 말하면 6차전 내내 포지션이 바뀌었고 그때 그때 마다 자기 포지션에 맞게 플레이 했다. 닉슨(G)-쿠퍼(G)-윌크스(F)-촌스(F) or 랜스버그(F)-매직(C)/닉슨(G)-쿠퍼(G)-매직(F)-랜스버그(F)-촌스(C)/ 매직(G)-닉슨(G)-쿠퍼(F) or 윌크스(F)-촌스(C) : 이런식으로 멤버 로테이션에 따라 계속 포지션이 바뀌었고 센터로 나올 때는 도킨스를 마크하면서 골밑을 사수하고 센터로서 역할을 했다. 특히 닉슨(G)-쿠퍼(G)-윌크스(F)-촌스(F) or 랜스버그(F)-매직(C) 이 라인업은 6차전에서 갑자기 결정한 것이 아닌 5차전 압둘자바가 부상으로 나간 이후 다시 돌아올 때까지 가동된 라인업이고, 이때 매직은 인사이더로 골밑을 철저히 지키면서 오히려 필라델피아와의 점수차를 벌려버리며 시리즈 2:2 동률 상황에서 압둘자바의 부재 속 결정적인 승기를 가져 온다.
[22]
홈 2연전에서 1패라도 하게 되면 1승1패 상태에서 원정 3연전을 치르는 부담이 있고, 2대2로 시리즈 전적 타이인 상황에서 5차전을 이기는 팀이 통계상 절대적으로 유리한데, 이 경우 그 중요한 5차전을 무조건 하위시드 팀의 홈에서 치르게 된다.
[23]
매직은 4년차가 되어서야 퍼스트팀에 올랐다.
[24]
이 때 매직 존슨 본인이 웨스트헤드를 자르지 않을 거면 자신을 트레이드 해달라고 요구했다. 구단주 역시 웨스트헤드를 탐탁지 않게 여겨 그 전부터 해고하고자 했다고 한다.
[25]
이 해 MVP는 버드로, 3년째 연속으로 MVP를 수상하고 팀을 67승으로 이끌면서 역대 최강의 팀 중 하나를 이끌게 된다. 팀 전체가 부상으로 얼룩진 1987년부터 셀틱스는 서서히 하락세에 접어드는데, 아이러니하게 1986셀틱스와 쌍벽을 이루는 매직 시대 최강의 스쿼드가 바로 1987년 레이커스. 압둘자바가 노화했지만 아직 좋은 기량을 유지하는 가운데
제임스 워디, 바이론 스캇 등 영건들이 성장하고 매직이 최전성기를 달리는 등 신구조화가 절묘하게 이뤄지면서 쇼타임 레이커스의 절정을 달렸다. 라일리 감독은 이 시즌에 팀의 중심을 압둘자바에서 매직으로 넘겼고, 매직은 득점 커리어하이까지 경신하며 생애 첫 정규시즌 MVP에 오른다.
[26]
우승의 과정은 매우 극적이었는데, 더티할 줄만 알았던 배드 보이즈의 수비는 엄청난 높이와 조직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안 레이커스 선수들은 매우 당황했고 5차전까지 2승 3패를 당하고 있었다. 6차전도 전반에 디트로이트가 리드를 가져가며 우승을 넘겨주나 싶었지만, 토마스가 3쿼터에 치명적인 발목 부상을 당하면서 분위기가 넘어갔고, 6차전에서 레이커스가 1점차 승리를 거둔다. 이후 7차전에서는 워디가 36득점 16리바운드 10어시스트를 달성하면서 폭주했고, 토마스는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레이커스가 결국 3점차로 승리하고 리핏을 이루게 된다.
[27]
이 시즌 이후 카림 압둘자바는 은퇴를 선언했으며, 그의 마지막 경기인 파이널 4차전에서 디트로이트 선수, 팬들에게도 박수를 받으며 화려하게 퇴장했다.
[28]
매직이 올스타에 선정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공식적으로 은퇴가 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매직이 HIV 보균자라는 것을 알린 시점은 1991년 10월인데, 이때는 이미 1991-92 시즌을 위한 트레이닝 캠프가 소집되고 선수단 구성이 완료된 이후였다. 때문에 매직은 공식적 은퇴가 아닌, 부상자 명단에 등록되어있었기 때문에 출전이 가능했다.
[29]
드림팀 다큐멘터리에서는 당시 커미셔녀였던 데이비드 스턴과 선수들이 왜 다른 나라들은 프로를 내보내는데 NBA에서는 꼭 대학생들을 내보내서 당하게 해야 하나는 의문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미국도 프로농구 선수들을 내보내기로 결정하고 당시 가장 화제의 선수인 조던을 설득하였는데 조던이 거절하자 일단 상징적이었던 매직 그리고 버드를 설득한 다음에 그들을 주축으로 선수들을 모으고 결국에는 조던을 다시 설득하는 데 성공하며 드림팀이 결정되었다.
[30]
아예 27개 구단중 관중동원수 24위를 기록한 시즌도 있었다.
[31]
실질적인 커리어는 이 시즌이 마지막이지만, 이후 스웨덴 리그에서 자신이 이름을 빌려준 팀인 매직 M7 보로스(현 보로스 바스켓)에서 일부 경기에 출전하거나 덴마크 리그의 매직 그레이트 데인스에 합류하는 등 유니폼을 입는 일이 있었다.
[32]
비슷한 시기 록 밴드 퀸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가 에이즈로 사망하여 충격이 더했다.
[33]
정확히는 HIV. 에이즈는 HIV 감염후에 발생할 수 있는 질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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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명이 넘는다고 하며,
마돈나도 그 중 하나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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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절친했던 기자에 의하면 그 당시에는 핸드폰도 이메일도 없던 시절이라 많은 여자들이 매직과 관계를 갖고 싶으면 호텔에 있던 매직의 락커에 키를 두고가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박스에 매일 수십 개의 키가 들어있었다고...
[36]
놀랍게도 이 올스타전의 MVP이다. 한손을 치켜들며 생애 마지막 올스타전 3점슛을 꽂아넣으며 뒤돌아서는 장면은 레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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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V는 비말 감염등의 강한 전염성이 있는게 아니라 성적인 접촉, 혈액간 전이등의 특수한 경로로 감염되기 때문에 체육활동은 가능했다. 은퇴 후 소속 클럽팀이 없는 상태였지만 1990-91 시즌까지도 NBA 파이널 진출에 확고부동 주전으로 활약할 정도로 경기력에 문제는 없었고 워낙 상징성이 큰 선수여서 아무도 선정에 이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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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시대에
니콜라 요키치가 그렇듯, 시야와 패스각이 확보되는 장신 선수가 패싱 능력을 최상급으로 갖추었을 때 더블팀을 요리할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39]
906경기를 뛰면서 3506개의 턴오버를 기록했고 평균으로 환산하면 3.9개이다. 1983-84 시즌에는 4.6개의 턴오버를 하기도 했다.
[40]
정석적인 점프슛만 엎어져서 쏘는 세트슛 자세라서 느리고 타점 낮은 문제였지 원 핸드 슛 스킬은 매우 다양했다, 스쿱샷,레이업 정확도도 수준급에, 웬만한 빅맨도 흉내못낼 베이비 훅 슛 스킬로 베이스라인에 어중간한 거리에 몰려서도 득점을 성공시킬수 있었다.
[41]
그리고, 아직 포인트가드를 한 걸 후회하지 않던 젊은 시절, 앞에 언급된 2년 선배 놈 닉슨과의 포인트 가드 경쟁이 자존심 싸움까지 번져서 결국 놈 닉슨이
샌디에이고 클리퍼스로 트레이드 되었다. 그 맞트레이드 상대가
바이런 스캇.
[42]
수많은 그의 후계자 후보 중 가장 위협적이었던 올랜도 매직 출신 가드
앤퍼니 하더웨이가 결국 누적된 무릎 부상으로 무너지면서 기량이 급격하게 쇠퇴한 것이 그 예시. 매직의 은퇴 무렵 피펜, 페니,
그랜트 힐 등 장신인데 포인트 가드의 역할을 수행 가능한 선수들이 인기를 얻자 리그 전체적으로 장신 포가 만들기 붐이 일었는데, 제일린 로즈와 스티브 스미스가 대표적이었는데 둘 다
포인트 가드로서는 별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고 스윙맨으로서 나름 괜찮은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이 매직 존슨 프로젝트가 실패하고 세기 말을 맞이하면서 리그에서 다시 한 번 스타 만들기에 돌입했는데 그게 바로 제2의 조던 찾기....
[43]
장점이라고 할만한 선수는 매직과 비슷하게 쐈을 때 4할을 여러번 넘기던 래리 버드, 3점슛을 주요 옵션으로 장착한 이후부터 매시즌 경기당 한개 이상 성공시키고 이후 9시즌동안 38.5%를 꾸준히 기록해준 대니 에인저 정도이다. 매직과 성공률과 성공/시도 갯수가 가장 유사한 선수는
마이클 조던인데, 그는 1989-90 시즌에 1.1개 성공/3개 시도 (37.6%)했다. 즉, 매직은 당시 조던과 마찬가지로 3점슛을 하나의 옵션으로 활용할 수 있는 선수였지만, 장점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44]
굳이 조던과 비교하자면 매직의 3점 장착이 조금 더 빨랐고, 매직은 3점 메이드 탑5에 들어갔던 시즌도 있지만 조던은 탑10에 들어간 시즌조차 한번도 없다. 매직이 3점을 장착한 이후 리그 탑 10위권 근처의 3점성공을 보이던 선수였다는 점에서 당연히 3점 스페셜리스트는 아니지만 조던수준의 옵션보다는 나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장착'의 기준이 경기당 삼점슛 성공횟수 1회 이상이라고 보면 매직은 이 기준을 충족시킨 적이 1989-90, 1990-91 두시즌 뿐, 조던 역시 1차 은퇴 전까지 1989-90, 1992-93 두 시즌으로 별 차이가 나진 않는다. 매직이 2.4개를 던져 0.8개를 성공시킨(성공률 31.4%) 1988-89 시즌을 장착했다고 한 시즌 차이. (그 전 시즌에 그는 0.2개 성공/0.8개 시도였다.)
[45]
두 선수 모두 삼점슛을 경기당 1개 이상 성공하는 마이너 옵션 중 하나로 장착한 시즌은 1989-90 시즌이다. 이 당시 매직은 1.3/3.5개 (38.4%), 조던은 1.1개/3개(37.6%)였다. 매직과 조던 사이에 차이가 나는 건 1990-91 시즌으로 조던이 자제하기 시작해 시도수가 1.1개로 줄어든 사이(31.2%) 매직은 3.2개를 쏴서 1개를 성공시켰다. 이후 조던은 1992-93 시즌에 다시한번 유의미한 시도수를 기록. 이렇듯 이 둘이 3점을 유의미한 옵션으로 활용했던 구간으로 비교하자면 얼추 비슷한 수준으로 묶어진다고 볼 수 있다.
[46]
4:58에 점퍼 쏘는 선수는 매직이 아님. 자세히 보면 매직은 포스트업에서 패스빼주는 선수다.
[47]
이 때문에 3점슛에 익숙하지 않은 1980~90년대 빅맨들이 3점을 쏠때는 이 자세로 쏘는 경우가 많다. 샤킬 오닐의 몇 안되는 3점은 전부 이런 슛이며 알론조 모닝도 마찬가지. 심지어 중거리에서 훌륭한 점퍼를 자랑했던 하킴 올라주원과 야오밍 역시 3점은 이 자세로 쐈다. 저 선수들은 저 거리에서 견제받을 일이 거의 없기에 블럭당할 걱정 없이 안정적으로 쏠 수 있는 것.
[48]
참고로 조던은 훅 슛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49]
흔히 말하는 앞으로 엎어지듯 홱하고 쏘는 점퍼
[50]
"점핑 조" 펄크스가 점프슛을 대중화하기 전부터 점프슛이 대중화된 이후. 사실 그 이후에 1980년대까지 위에 언급된 세트된 상태에서 점프하며 쏘는 슛, 즉 세트슛으로 널리 알려진 슛을 쏘는 선수들은 많았으나 이 역시 엄밀히 따지면 점프슛이라고 해야 되므로.
[51]
특히 밀러는
앨런 아이버슨을 인터뷰하며 "세트샷을 쏘던데요? 당신 점프슈터잖아요?"라고 묻는데, 아이버슨 역시 분명히 매직과 마찬가지로 점프와 동시에 슛을 쐈다. 즉, NBA전문가들은 매직이나 아이버슨처럼 "점프와 동시에 쏘는 슛"을 분명히 세트슛이라고 부르고 있다.
[52]
88년 3점슛 콘테스트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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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리 버드의 슛에 대해 논하던 중 해설자가 "저 세트슛은 힘을 많이 낭비하지 않거든요(.that set shot, he doesn't waste a lot of effort)"라고 설명한다. 2분50초에 나온다. 여기서 버드는? 마찬가지로 점프와 동시에 쏘는 슛을 쏘고 있다. 버드는 매직과 동기다. 즉, 버드와 매직이 현역시절부터 저런 슛을 세트슛이라고 불러왔던 것이 맞다. 참고로 87, 86년 대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세트슛이라고 부른다.
[53]
은퇴선수 중 가장 부자는 은퇴 당시 5억 달러 재산을 21억 달러로 불린 마이클 조던이지만(매직은 6억 달러 정도), 조던은 압도적인 자신의 인지도를 활용한 조던 브랜드와 샬럿 호네츠 인수 등 기존에 존재하는 사업으로 돈을 번 거기 때문에 "사업이 성공했다"고 하기 애매하다. 물론 조던의 이름을 딴 레스토랑이나 여러 사업체가 있지만 그리 성공적이진 않은 편. 엄밀히 말하면 단일 스포츠선수 브랜드론 역대 최강인 조던 브랜드를 활용한 나이키의 사업 파트너지, 사업 수단이 좋다고 하긴 힘들다. 사업전략을 주도하는 건 어디까지나 나이키이기 때문. 르브론 제임스 역시 연봉과 스폰서십 외에 많은 사업을 통해 농구선수 출신으론 두번째로 억만장자(10억 달러)가 되었지만, 조던과 마찬가지로 큰 돈을 번 것은 본인의 인지도와 브랜드를 활용한 사업이 대다수이다.
[54]
비록 재산은 스포츠선수 출신으론 최초로 10억달러 자산가가 된 조던에게 크게 밀리지만 사업가로선 조던보다 월등히 평가받을만하다. 조던의 수익 대부분은 조던 브랜드와 본인의 네임밸류에 기댄 광고에서 나오기 때문에 조던이 사업을 잘했다기보단, 스포츠 역사상 가장 가치가 높은 자신의 명성에 기댄 게 크기 때문. 물론 이것도 사업적 안목이 있어야 가능한거긴 하지만 매직이 더 뛰어나다는 것.
[55]
레이커스, 클리퍼스, 킹스와 같은
스테이플스 센터를 사용하고 있다.
[56]
정확히는 특별 자문으로 고용되었다가 지니 버스에 의해 사장으로 올라선것이고 지니 버스는 오빠인 짐 버스와 당시 단장이었던 미치 컵책을 해고했다. 후에 짐 버스는 지니 버스와 법적 분쟁까지 가게 된다.
[57]
어차피 레너드는 1년 후에 자유계약 선수로 풀리게 되어있기에 굳이 1년 더 일찍 쓰자고 유망주를 내줄 필요는 없었던것. 솔직히 레이커의 전력은 르브론을 제외하면 범용한 수준이지만 르브론 하나만 있어도 플옵에서 활약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굳이 무리하는 것이 더 무리수이기도 하다.
[58]
하지만 이 기자는 극렬 안티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까이자 르브론까로 유명한 사람이니 어느 정도 거를 필요는 있다.
[59]
It could be argued that he's the one player in NBA history who was better than Michael Jordan.
[60]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에서 12년간을 뛴 스몰포워드로,
매직 존슨,
카림 압둘자바와 함께 3번의 우승 (1985, 1987, 1988)을 차지할 수 있도록 큰 공헌을 한 선수이다.
[61]
카트먼한테 전염됐다.
[62]
미국에서 가장 큰 스포츠 채널 중 하나.
[63]
이걸 국내로 비유하자면, 한국 국내 아이돌들이
Mnet이 뭔지 모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64]
여기 소개된 멍청한 발언 중 농구선수 편에서는
제이슨 키드의 "우리는 이 팀을 360도 변화시킬 겁니다", 1980~90년대 선수였던 리온 우즈의 "당신은 동생과 혈연관계가 어떻게 되나요?",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선수였던 척 네빗의 "제 누나가 출산 예정인데, 제가 삼촌이 될지 숙모가 될지 모르겠어요" 등 심하게 어이없는 발언이 있어서 한 글자차이 말실수 정도인 매직으로선 좀 억울한 감도 있다.
[65]
일주일에 두세번 정도 이탈리아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주말에 경기가 없으면 제리 버스의 모교 USC대학 풋볼팀 경기도 같이 관람했으며, 심지어는 제리 버스가 매직을 플레이보이 맨션에 데려다주기도 했다고 한다.
[66]
다큐멘터리 '레거시: LA 레이커스 트루 스토리'에서 제리의 딸 지니 버스는 아버지가 우는 것을 딱 두 번 본 적이 있는데 한 번은 할머니(제리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다른 한 번은 매직이 은퇴를 했을 때라고 한다.
[67]
"돈을 제안하지 못하고 주식을 주겠다고 했다"는 건 1979년 당시 나이키가 공격적으로 성장하고 있어 규모나 시장점유율에 비해 자금사정이 그리 원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나이키는 이미 미국 런닝화 시장의 절반을 점유하고 있었다. 자금 문제는 나이키가 1980년에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되면서 상당 부분 해결한다.
[68]
애초에 매직은 NBA에 데뷔할 당시 NCAA 우승팀의 에이스이자 전미 최고의 유망주였는데, 그런 그가 포지션을 이유로 '애매한' 유망주였다면 당시에는 거의 없던 저학년(2학년) 포인트 가드 전체 1순위 선수가 되긴 힘들었을 것이다. 79년 당시 후발주자였던 나이키는 비록 러닝화 사업으로 크게 성공을 하긴 했지만 자금 상황도 넉넉치 못했고, 농구화 라인은 특히나 빈약했다. 70년대에 스펜서 헤이우드에게 10% 나이키 주식 or 10만 달러를 제안하기도 했는데, 헤이우드는 당시로선 거액이었던 10만 달러를 택했고 매직 역시 훗날 나이키의 미래에 대해 확신하지 못해 주식 대신 돈을 오퍼한 컨버스를 택했다고 밝혔다. 즉 79년 당시 아쉬운 입장이었던 건 농구화 시장에 뛰어든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나이키지, 전미 최고의 유망주였던 매직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