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김일성 시대
|
||||
초대 박헌영 |
제2-3대 남일 |
제4-6대 박성철 |
제7-10대 허담 |
제11-13대 김영남 |
|
김정일 시대
|
김정은 시대
|
||||
제14-15대 백남순 |
직무대리 강석주 |
제16-17대 박의춘 |
제18대 리수용 |
제19-20대 리용호 |
|
김정은 시대
|
|||||
제21대 리선권 |
제22대 최선희 |
||||
}}}}}}}}} |
前 조선로동당 국제비서 겸 국제부장
강석주 姜錫柱 | Kang Sok Ju |
|
|
|
<colbgcolor=#d6b534><colcolor=#FFF> 출생 | 1939년 8월 29일 |
평안남도 평원군 | |
사망 | 2016년 5월 20일 (향년 76세) |
평양시 | |
학력 |
김일성종합대학 베이징대학 외국어학부 영어과 |
최종 당적 |
|
[clearfix]
1. 개요
북한의 전직 외교관 및 정치인.2. 생애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1939년 8월 29일에 가난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평양외국어대학에서 영어 전공을, 국제관계대학에서 불어를 전공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북한에서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평범한 도로교량설계원으로 일하다가 재능을 인정받고 김일성종합대학에 스카웃되었다고 한다. 북한에서 공개한 바에 따르면 외국 유학도 다녀왔다고 하는데 어느 나라인지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중국으로 다녀왔다. 강석주 회고에 따르면 베이징대학 외국어학부 영어과 유학을 다녀왔으며 이때 동창이자 훗날 중국 외교부장을 지내는 리자오싱[1]이었다. 강석주는 리자오싱과 룸메이트이기도 했는데, 리자오싱이 불 끄는게 귀찮아서 기숙사 전등줄에 발을 연결해서 자곤 했고, 자면서 뒤척이다가 수시로 불을 켜곤 해서 강석주가 짜증을 엄청 많이 냈다고 한다. 아무튼 강석주는 대학을 졸업한 후 북한으로 돌아와 외무성 지도원으로 배치되었다가 1969년에 중앙위원회 국제부 지도원으로 옮겼다. 이후 국제부 유럽담당 과장을 거쳐 1984년 1월 정무원 외교부 부부장에 임명되었으며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전임 외교부 제1부부장 김충일이 김정일 서기실로 영입됨에 따라 1987년 4월, 정무원 외교부 제1부부장으로 승진했으며 1987년 10월,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보선(공식 략력), 1988년 3월, 조선로동당 6기 13중전회에서 보선이 추인되었다.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5월 24일에 열린 최고인민회의 9기 1차 회의에서 외교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91년 5월, 허담 장의위원을 지냈다. 탈냉전기의 혼란 와중에 대남 외교를 주장하는 최우진에 맞서 국제비서 김용순과 함께 북미 직접 대화론을 주장하였다. 이후 북미대화의 주도권을 놓고 김용순과 경쟁하였으며, 김정일은 북한과의 직접 대화는 김용순에게, IAEA를 비롯한 국제기구와의 협상은 강석주에게 분담시켰다. 1991년 12월 조선로동당 6기 19중전회에 중앙위원회 위원에 보선되었으며 1992년 4월 1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일성 팔순기념 김일성훈장을 수훈받았다.
1992년 1월, 김용순이 미국을 방문하고 국무차관 아놀드 켄터와 차관급 회담을 가졌지만, 김용순의 파격적인 북미 수교 제안에 미국은 응답하지 않았다. 이에 실망한 김정일은 강석주를 더욱 중용하게 되었지만, 동시에 미숙한 보고서를 제출하여 1차 북핵위기를 일으켰다고 크게 불만을 가졌다. 그러던 중 1992년 9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IAEA 정기이사회에 북측 대표단장으로 참석한 오창림 참사가 김정일이 남조선 대표단과 접촉하지 말라고 친필 문건으로 지시했음에도 제때 훈령을 받지 못해 한국 대표단과 접촉하여 식사를 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김정일은 강석주에게 너 혼자 다 해먹으라고 폭언을 퍼붓고 전화기를 집어던졌고, 외무성의 보고 수신을 거부하였다. 김동수 박사 증언에 따르면 김정일이 아예 외교부를 폭파시키라고 길길이 날뛰었고, 이후 국제부 부부장 권민준이 이끄는 조직지도부와 국제부 검열 그루빠가 들이닥쳐 외무성을 개박살을 내놨고, 강석주는 직무정지 처분을 당했다. 강석주와 김영남 모조리 다 주석단에 끌려나와 엉엉 울면서 조리돌림당하고 자아비판당했고 김영남은 용서받았다. 강석주에게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던 김용순은 강석주를 강력하게 비판했지만, 김정일은 강석주를 완전히 숙청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그에게 외교부 소속 농장 혁명화 처분을 내려 평양 인근 농장에서 돼지 똥 치우는 일을 한 달 정도 시키고 다시 복귀시켰다.[2] 이때 최수헌 부부장도 아오지 탄광 가서 구르고 왔다고 한다.
1993년 6월, 북핵 문제가 불거지자 북한 외교의 실질적 설계자 역할을 담당하며, 북미 고위급 회담의 북측 대표로 출석하였으며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당시 강석주의 협상 상대는 미 국무부 북핵특사 로버트 갈루치로 이 둘은 이후 오랜 기간 북미협상의 최전선에서 계속 만나게 된다. 강석주의 외교감각은 태영호의 책에서 자주 언급되기도 하였다. 1994년 7월, 김일성,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8년 7월,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9월 5일,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에서 김일성 헌법이 도입되자 내각 외무성 제1부상으로 유임되어 2010년 9월까지 재임하면서 북한 외교 실무진의 최고 실세로 군림하였다.
2001년 1월, 김정일의 상하이 순방, 2001년 8월, 북러 정상회담, 2001년 9월, 북중 정상회담, 2002년 8월, 김정일의 연해주 순방, 2002년 9월, 1차 북일정상회담 등에 배석하면서 김정일의 최측근 외교 전문가로 계속 활동했다. 그러던 중 2002년 10월 4일, 북한을 방문한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 제임스 켈링와 회담을 가졌는데, 대단히 오만한 말투로 켈리를 맞이하며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 계획을 가지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으며, 그보다 더 강력한 무기도 만들게 되어 있다고 폭탄발언을 하였다. 배석했던 켈리 차관보가 당황하여 "방금 말한 것에 대해 우리가 오해하면 안된다. 지금 발언을 한번 더 되풀이해달라."라고 요청하자, "부시 정권이 이처럼 우리들에 대해 적대시 정책을 취하는 이상 우리가 HEU(고농축 유라늄) 계획을 추진한다 해서 무엇이 나쁜가. 그것은 미국의 적대시 정책에 대한 억지력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켈리가 북한은 우라늄 고농축을 북미관계가 좋았던 2000년부터 했다고 반박했으나 강석주는 묵살하고 기본 합의는 미국의 부정행위에 의해 무효가 되었다고 주장하며 북한의 주권 인정, 북한에 대한 불가침 보장, 북한에 대한 금수 해제 및 북일 경협, 남북 경협 방해 금지, 경수로 건설 지연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다. 이에 미국측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면서 제네바 체제는 붕괴되고 2차 북핵위기가 시작되었다.[3]
하지만 계속해서 북한 외교의 선봉장으로 활약, 2003년 8월, 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2004년 4월, 김정일의 중국 순방, 2004년 5월, 2차 북일정상회담 등에 계속 배석하였다. 2007년 백남순 외무상이 사망한 이후 김정일은 김영일(1944) 내각의 새 외무상으로 강석주를 임명하려 했으나 강석주의 건강이 좋지 않아 결국 외무성 제1부상으로 남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2009년 3월, 1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2010년 9월 23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내각 부총리에 임명되면서 김계관에게 외무성 제1부상 자리를 넘겨주었는데, 태영호의 증언에 따르면, 이는 조직지도부 부부장 리제강이 파견한 외무성 당비서 안광태와의 갈등 때문이었다고 한다.
2010년 9월 29일, 조선로동당 제3차 당대표자회에서 정치국 위원에 선출되어 7차 당대회가 열리던 2016년 5월까지 재임했다. 2010년 11월, 조명록 장의위원, 2011년 1월, 박정순 장의위원, 2011년 12월, 김정일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2012년 2월 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 2193호에 따라 김정일훈장의 1차 수훈자로 선정되었다. 2013년 12월, 김국태 장의위원을 지냈다. 2014년 3월, 1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2014년 4월 8일 정치국 회의에서 김영일의 뒤를 이어 국제부장 겸 국제비서에 임명되면서 4월 9일, 최고인민회의 13기 1차 회의에서 내각 부총리에선 물러났다. 2014년 7월, 전병호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2015년 6월, 조선로동당 대표단장으로 쿠바를 방문, 라울 카스트로를 만났다. 암의 영향으로 이때 살이 쏙 빠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2015년 11월, 리을설 장의위원, 2015년 12월, 김양건 장의위원을 지냈다.
2016년 5월에 열린 조선로동당 7차 당대회에서는 위독한 상태임을 감안했는지 정치국에선 탈락했으나 예우상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7차 당대회가 끝난지 겨우 10여일 만인 2016년 5월 20일 오후 4시 10분에 식도암과 이에 따른 급성호흡부전으로 사망했다. 로동신문은 이를 발표하며 사망 소식을 대대적으로 알리나 김양건 전 통전부장의 장례식과는 다르게 김정은은 불참하고 대신 최룡해가 주최하였다. 당중앙위원회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연명으로 부고를 발표, "강석주동지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충직한 혁명전사,경애하는 김정은동지의 견실한 혁명동지이며 주체혁명위업의 종국적승리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하여온 우리 당과 인민의 훌륭한 아들이다. (...) 강석주동지는 위대한 주체사상,선군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고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당의 위업에 무한히 충실하였다. 강석주동지는 당과 혁명에 대한 끝없는 충실성과 조국과 인민에 대한 헌신적복무정신,확고한 혁명적원칙성과 겸손한 품성으로 하여 우리 당원들과 인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라고 아주 후하게 칭송하였다. 따로 발표된 략력에서도 "강석주동지는 당과 수령에 대한 백옥같은 충정을 지니고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당의 령도에 무한히 충실하였다. 강석주동지는 비록 서거하였으나 우리 당과 혁명,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바친 그의 투쟁공적은 길이 남아있을것이다."라고 그를 기렸다.
장의식 거행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당중앙위원회 비서 직함으로 안장되었다.
3. 경력
임기시작 | 임기종료 | 비고 |
정무원 외교부 제1부부장 | ||
1987년 4월? | 1998년 9월 5일 | 직함 개편 |
내각 외무성 제1부상 | ||
1998년 9월 5일 | 2010년 9월 23일 |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해임 |
내각 부총리 | ||
2010년 9월 23일 | 2014년 4월 9일 |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임명 최고인민회의 13기 1차 회의에서 조동 |
조선로동당 6기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 ||
2010년 9월 28일 | 2016년 5월 9일 |
3차 당대표자회에서 선출 7차 당대회에서 은퇴 |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국제부장 | ||
2014년 4월 8일 | 2016년 5월 9일 |
2014년 4월 8일 정치국 회의에서 임명 7차 당대회에서 은퇴 |
조선로동당 6기 중앙위원회 국제비서 | ||
2014년 4월 8일 | 2016년 5월 9일 |
2014년 4월 8일 정치국 회의에서 임명 7차 당대회에서 은퇴 |
4. 장의위원회 구성
- 위원장: 최룡해.(정치국 상무위원 겸 근로단체 담당 부위원장)
- 위원: 황병서(총정치국장), 박봉주(내각총리, 이상 정치국 상무위원), 김기남(선전선동부장), 최태복(최고인민회의 의장), 리수용(국제부장), 김평해(간부부장), 오수용(계획경제부장), 곽범기(경제 담당 부위원장), 김영철(통일전선부장), 리만건(군수공업부장, 이상 당 부위원장), 양형섭(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로두철(내각부총리 겸 국가계획위원장), 리명수(총참모장), 박영식(인민무력상), 김원홍(국가보위상), 최부일(인민보안상, 이상 정치국 위원), 김수길(평양시 당위원장), 김능오(평안북도 당위원장), 박태성(평안남도 당위원장), 리용호(외무상), 임철웅(내각부총리), 조연준(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리병철(군수공업부 제1부부장), 노광철(제2경제위원장 혹은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 리영길(제1부총참모장, 이상 정치국 후보위원), 리용무, 오극렬(이상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김덕훈, 김용진, 리무영(이상 내각부총리), 김영대(사회민주당 중앙위원장), 류미영(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 리일환(근로단체부장), 안정수(경공업부장), 리철만(농업부장), 최상건(과학교육부장), 리영래(민방위부), 김정임(당력사연구소장), 김중협(문서정리실장), 김만성(총무부장), 김용수(재정경리부장, 이상 당 부장), 홍인범(당중앙위원회 검열위원장), 김경옥(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리재일(선전선동부 제1부부장), 최휘, 김성남(국제부 제1부부장), 전일춘(39호실장, 이상 당 제1부부장), 정명학(검열위원회 제1부위원장), 김히택, 김계관(외무성 제1부상), 리룡남(대외경제상), 김정숙(대외문화련락위원장).
5. 수훈
6. 여담
- 김정일의 저팔계 외교를 실질적으로 담당 및 수행한 사람이다.
- 김정일의 신임을 받았으나 1년동안 혁명화로 농장에서 똥지개를 지면서 손가락 하나가 날라갈 정도로 고생했다고 한다. 이건 강석주만이 아니라 부부장급 이상 간부들은 혁명화 안 갔다 온 사람이 드물정도로 거의 간부들 되려면 통과의례나 훈장처럼 생각한다고. 당시 혁명화를 당한 이유는 강석주가 정무원 외교부 제1부부장 시절에 김용순이 이끌던 중앙위원회 국제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이에 국제부에서 앙심을 품고 강석주가 당의 지도를 무시하고 나댄다고 나쁘게 보고하여 혼이 난 것이라고 한다.
- 친형 강석숭이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당력사연구소 소장이었는데 구호나무 아이디어를 내서 외국에서 특수 잉크까지 수입하여 수만개씩 찍어냈다고 한다. 전임 외교부 제1부부장 김충일이 김정일의 명령으로 김정일 서기실로 옮기자 외교부장 김영남이 강석주를 제1부부장으로 추천했는데 김정일은 자기가 좋아하고 신임하는 강석숭의 동생이란 소리에 말이 끝나자 마자 좋다고 외쳤다고 한다.
- 깨는 일화가 있는데, 아사히 신문 기자 마키노 요시히로의 취재에 따르면, 외무성 회식 도중 갑자기 옆에 있던 여성 직원의 가슴을 만지면서 "많이 컸구나"라고 성추행하였는데, 직원은 비명을 지르거나 반항하기는커녕 김정일의 총애를 받는 강석주에게 정말로 커진건지 확인해달라고 아양을 떨었다고 한다.
- 박인권의 깜빵 시리즈 10권 평양여감방에서 김정은의 대표적 측근으로 등장해서 같이 술을 마신다. 근데 눈곱만큼도 실제 강석주와 닮지도 않고 군복 차림이다. 같이 등장한 다른 측근들도 다 그 모양.
[1]
1940년생으로 98년부터 2001년까지 미국 주재 중국 대사를,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중국 외교부 차관을,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중국 외교부장을 지냈다.
[2]
한편 오창림은 평성시로 추방당했으나,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빵 장사를 하면서 그런대로 먹고 살면서 생각보단 잘 지냈다고 한다.
[3]
여기에 대해 태영호는 켈리가 북한이 HEU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물을 제시하면서 압박하자 강석주가 미국이 여기에 협상이 아니라 압박을 하러 온 것 같다고 비난하면서 미국이 조선을 이렇게 압박하면 우리는 핵무기보다 더한 것도 가질 수 있다고 했고, 이를 켈리가 강석주가 부인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