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워디의 주요 수상 및 헌액 경력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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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 1987 | 19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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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영구결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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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ccac00> No. 8 & No. 24 | No. 13 | No. 16 | No. 21 | No. 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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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비 브라이언트 (Kobe Bryant) |
윌트 체임벌린 (Wilt Chamberlin) |
파우 가솔 (Pau Gasol) |
마이클 쿠퍼 (Michael Cooper) |
엘진 베일러 (Elgin Bayl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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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ccac00> No. 25 | No. 32 | No. 33 | No. 34 | No. 4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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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직 존슨 (Magic Johnson) |
카림 압둘자바 (Kareem Abdul-Jabbar) |
샤킬 오닐 (Shaquille O'Neal) |
제임스 워디 (James Worth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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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ccac00> No. 44 | No. 52 | No. 99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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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 웨스트 (Jerry West) |
자말 윌키스 (Jamaal Wilkes) |
조지 마이칸 (George Mikan) |
칙 헌 (Chick Hearn) |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등번호 42번 | ||||
제임스 에드워즈 (1977) |
→ |
제임스 워디 (1982~1994) |
→ | 영구 결번 |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등번호 00번 | ||||
마이칼 탐슨 (1987) |
→ |
제임스 워디 (1987) |
→ |
바이런 스캇 (19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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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No. 42 | |
제임스 애거 워디 James Ager Worth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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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61년 2월 27일 ([age(1961-02-27)]세) |
노스캐롤라이나 주 개스토니아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출신학교 |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
키 | 206cm (6' 9") |
체중 | 102kg (225 lbs) |
포지션 | 스몰 포워드 |
드래프트 |
1982년 NBA 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지명 |
소속팀 |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1982~1994) |
등번호 | 42번 - 레이커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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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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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커리어
2.1. NBA 입성 이전
명문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 입성한 워디는 1학년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의 감독이자 미국 대학농구계의 전설적인 감독 딘 스미스는 웬만해서는 1학년을 주전으로 내세우지 않았고, 이때까지 유일한 예외는 나중에 NBA에서 MVP를 차지하는 밥 맥아두였다. 그러나 스미스는 이례적으로 워디를 1학년임에도 주전으로 내세우게 된다.[2]1학년 시즌을 발목부상으로 일찍 접어야했던 그는 NCAA Division I 남자농구 챔피언십에서 당시 팀 동료로 샘 퍼킨스와 앨우드와 함께 준우승을 차지했고, 1982년 NCAA Division I 남자농구 챔피언십에서는 샘 퍼킨스와 당시 신입생이었던 마이클 조던과 함께 우승을 차지했다. 이때 제임스는 팀내 1옵션으로 평균 15.6점을 기록했는데, 얼핏 낮아보이지만 당시 감독이었던 딘 스미스는 팀농구를 매우 중요시하는 성격으로, 절대 한 선수에게 공격권이 몰리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면 그리 낮은 수치는 아니었다. 일례로 훗날 NBA에 데뷔하자마자 평균 28점을 퍼부으며 총득점 1위를 차지한 조던은 대학을 초토화시키던 시절에도 20점 전후를 기록했다.
당시 워디는 드래프트 최대어였지만 대학 최고의 선수는 아니었다. 당시 대학을 지배하고 있던 선수는 그의 동기이자 전국적인 규모로 인정받는 대학선수상 (네이스미스, AP, 존 우든, 오스카 로버트슨, NABC, 스포팅 뉴스)을 모두 석권한 랄프 샘슨이었다.[3] 샘슨이 드래프트 참가를 선언했다면 1순위가 샘슨, 2순위가 워디가 되었겠고, 실제로 샘슨은 드래프트 참가를 고려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1순위를 두고 동전던지기[4]에서 클리퍼스가 이기는 경우, 꿈도 희망도 없는 꼴찌팀 클리퍼스에서 뛸 것을 우려한 샘슨이 대학 잔류를 선언, 워디가 1순위로 지명된다.[5]
2.2. NBA 커리어
1980년대에 매직 존슨, 카림 압둘자바, 마이클 쿠퍼, 바이런 스캇과 함께 LA 레이커스의 '쇼타임 레이커스'를 이끌었다.1982년 드래프트 1라운드 1픽(전체 1픽)으로 LA 레이커스에 지명되었다. 1982년에서 1994년까지 NBA에서 12시즌을 뛰어 세 번의 우승(1985, 1987, 1988)과 세 번의 준우승(1983, 1984, 1989)을 이뤘고 일곱 번 올스타에 선정되었으며 ALL-NBA 3rd 팀에 두 번 선정되었다.
별명은 빅 게임 제임스(Big Game James)인데 이는 별명에 걸맞게 큰 경기, 특히 컨퍼런스 파이널이나 파이널에서 맹활약하기로 유명했다.[6] 1987-88 시즌에는 생애 유일한 트리플 더블을 파이널 7차전에서 기록하면서 에이스인 매직 존슨을 제치고 파이널 MVP를 수상했다.
사실 객관적인 활약상 자체는 워디가 평균 22점-7.4리바운드-4.4어시스트-0.7스틸-0.6블락에 야투율 49.2% 자유투 73.5%, 매직 존슨이 21.1점-5.7리바운드-13어시스트-2스틸-0.1블락에 야투율 55% 자유투 86.6%로 매직에게 뒤진다. 그러나 불과 한 시리즈만으로 수상이 결정되는데다가 투표단의 수가 매우 적은 파이널 MVP는 전체적인 활약보다는 임팩트가 강한 선수들이 수상하는 경우가 있다. 비슷한 경우가 전체적으로 팀내에서 가장 잘했지만 세드릭 맥스웰에게 트로피를 내준 1981년의 래리 버드, 2015년에 안드레 이궈달라에게 트로피를 내준 스테판 커리.[7] 물론 이궈달라, 맥스웰과, 워디 세 선수 모두 "전체 활약을 따지면 에이스보단 못하다" 수준이지 시리즈의 전환점이 되는 중요한 활약을 했기 때문에 충분히 수상 자격이 있는 선수들이다. 워디의 경우 6차전에서 28점,야투율 54.5%로 팀 공격을 이끌었고, 무엇보다 7차전에서 "빅 게임 제임스"답게 36점-16리바운드-10어시스트-2스틸에 아투율 68.3%로 몬스터 게임을 한 것이 수상에 결정적이었다. 당시 피스톤즈의 주전 SF는 아드리안 댄틀리였고, 피스톤즈는 상황에 따라 파워포워드 존 샐리 (211cm), 백업 스몰 포워드 데니스 로드맨 등을 워디에게 붙혔으나 탱크같은 파워와 뛰어난 운동능력을 지닌 그는 어떤 포워드가 그에게 붙어도 포스트업으로 밀어붙히거나 큰 선수들이 붙으면 페이스업으로 돌파하는 등 막기 힘든 모습을 보였다.[8]
12시즌 동안 평균 득점 17.6점(FG 52.1%), 5.1리바운드, 3.0어시스트, 1.1스틸을 기록했다. 커리어 하이인 1989-90 시즌에는 득점 21.1점(FG 54.8%), 6.0리바운드, 3.6어시스트, 1.2스틸을 기록해 이해에 ALL-NBA 3rd팀에 선정되었다. 별명에 걸맞게 플레이오프에는 통산 9시즌동안 평균 득점 21.1점(FG 54.4%), 5.2리바운드, 3.2어시스트, 1.2스틸로 정규시즌보다 나은 성적을 기록했다.
1980년대 LA 레이커스의 매직 존슨- 카림 압둘자바-제임스 워디의 3인방은 보스턴 셀틱스의 래리 버드- 케빈 맥헤일- 로버트 패리시의 3인방과 자주 비교되곤 했다. 이들 6명은 나중에 모두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은퇴 후 그의 등번호 42번은 LA 레이커스에서 영구결번되었다.
3. 수상 내역
수상 내역 |
NBA 챔피언 3회 (1985, 1987, 1988) NBA 파이널 MVP (1988) NBA 올스타 7회 (1986–1992) 올-NBA 서드 팀 2회 (1990, 1991) NBA 올-루키 퍼스트 팀 NCAA 챔피언 (1982) |
4. 플레이 스타일
빠르고 득점력이 뛰어난 올라운드형 스몰 포워드. 속공찬스에서 매직과 워디의 속공 플레이가 매우 유명했는데 사람들은 이를 Magic to Worthy 라고 불렀다. 워디는 206cm로 당시로선 파워 포워드가 더 어울리는 체격과 힘을 지녔는데 스몰 포워드에 걸맞은 스피드까지 지녀서 막기가 굉장히 어려운 선수였다. 페이스업 상태에서 빠르고 경쾌한 퍼스트 스텝을 통해 골밑까지 파고들어가거나 포스트업 상태에서 재빠르게 스핀무브로 수비수를 제치고 들어가곤 했다. 또한 스피드만 빨랐던게 아니라 포스트업 플레이도 상당히 능했다. 그는 명문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서 딘 스미스 밑에서 뛰며 탄탄한 기본기를 다지고 나왔는데, 이 때문에 풋워크가 대단히 좋았다.[9] 그의 포스트업 완성도가 얼마나 뛰어났는지 2014년 당시 코비 브라이언트가 그에게 포스트업 관련해 조언을 구할 정도였다 코비는 전성기이던 00년대 중반부터 이미 대단히 뛰어난 포스트업 능력을 갖고 있었다.체격도 큰 데다가 힘 자체가 굉장히 좋은 편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스몰 포워드는 포스트업만으로 벌써 제압당하고 들어가며, 빠르게 돌파로 들어가던 중이라면 빅맨들도 공중에서 붙으면 밀려날 정도였다. 그야말로 "탱크"가 연상될 정도로 빠르고 강력한 선수로서, 저 체격으로 스피드까지 붙으면 막을 길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오픈코트에서 위력은 르브론 제임스에 버금갈 정도로 강력했다.
워디의 특기 중 하나는 "Statue of Liberty" 덩크로 워디의 전매특허는 아니었지만[10] 뛰어난 점프력과 스피드를 지닌 워디가 오픈코트에서 뛰다가 거의 자유투라인 부근에서 떠서 찍는 덩크를 따라갈 선수는 거의 없었다.
수비도 디펜시브 팀에 들어갈 정도로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뛰어난 편이었다.
다만 현재 스몰 포워드들과 차이가 나는 점이라면 보다 골밑 가까이에서 플레이했던 당시 스몰 포워드들의 특성상 워디 역시 골밑에서 하는 득점이 많았다는 점.[11] 이 때문에 3점슛은 커리어 통산 500개가 안되며, 마지막 두 시즌에서 경기당 1.4개씩 던진게 가장 많이 시도한 시즌이며 성공횟수는 0.4개에 불과하다. 점퍼의 경우 1990년대 이후 스몰 포워드들에 비해 완성도가 떨어지고, 대신 포스트업이나 속공에서 이어지는 골밑 마무리 능력은 매우 뛰어났던 케이스. 따라서 현대 기준으로는 슈팅 가드보다는 파워 포워드, 스윙맨보다는 코너맨에 더 가까운 플레이어였다고 정리할 수 있다.[12]
1980년대 초중반까지 매직 존슨- 카림 압둘자바에 이은 팀내 3인자였고 1980년대 중후반 압둘자바의 노쇠화 이후에는 팀내 2옵션였다. [13] 동시대의 래리 버드와 도미니크 윌킨스에 가리는 감이 없지는 않지만 시대를 풍미했다고 말할 수 있다. 팀내에 매직이나 압둘자바, 바이런 스캇 같이 우수한 동료들이 많았기 때문에 정규시즌 스탯은 아주 뛰어나지는 않지만 플레이오프만 되면 정규시즌보다 훨씬 더 좋은 활약을 펼쳤기 때문에 정규시즌 스탯에 비해 높은 평가를 받는다.
만약 전성기 때 레이커스가 아닌 다른 팀에 있었다면 그의 전성기 전체를 레이커스와 셀틱스가 꽉 잡고 있어 우승 반지는 못 얻었겠지만 팀의 에이스이자 리그 내 손꼽히는 스몰 포워드로 충분히 활약했을 것이다. NBA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뽑힐 정도니 당연하다.[14] 여담이지만 당시 레이커스는 디펜딩 챔피언인데다 스몰 포워드 자리에 올스타에 3번 오른 자말 윌크스란 좋은 선수가 있었기에 이런 초특급 유망주를 식스맨으로 쓰는 호사를 누렸다.
5. 은퇴 후
- LA의 지역방송국 스펙트럼 스포츠넷에서 전력 분석을 맡고 있다.
- 2015년에 LA 레이커스의 어시스턴스 코치로 뛰기도 했다.
6. 기타
- 그의 트레이드 마크는 고글(보호안경)인데, 1985년 3월 유타 재즈와의 경기에서 눈 부상을 당한 이후로 커리어 내내 항상 고글을 착용했다[15].
- UNC 주전 선수로 활약할 당시 갓 입학했던 마이클 조던과 1대1 대결을 자주 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워디가 남긴 말이 압권이다. "처음 대결할 때에는 제가 더 잘했죠. 한 2~3주 동안은요." 그가 조던의 역량을 얼마나 인정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16]
- 레이커스에 드래프트 된 후 토크쇼에 출연했는데, 주전자리를 노리냐는 질문에 "전 이 팀에서 많은 걸 배우는게 목표입니다." 라는 다소 판에 박힌 대답을 했지만, 속으로는 본인실력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내심 주전자리를 탐냈다. 하지만 위에 언급된대로 3번 자리에는 자말 윌크스가 있었기 때문에 트레이닝 캠프 첫날에 평범하게 생긴 주전 파워포워드인 커트 램비스가 눈에 들어왔고 속으로 워디는 '그래 저자리는 내꺼다.' 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무명대학에 3라운드 픽 출신으로 어렵게 주전자리를 차지하고 우승까지 경험해서 어느정도 잔뼈가 굵어졌던 램비스가 워디의 속내를 눈치채고 본인도 속으로 "그래 어디 자신있으면 뺏어봐라"라고 되내이며 연습때마다 제임스 워디를 거칠게 몰아부쳤다. 결국 램비스의 이같은 모습에 워디도 결국 두손 들고 얌전히 벤치행을 받아들였다는 훈훈한(???) 얘기...
- 댈러스 매버릭스로 트레이드 될 뻔 했었다. 1986년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레이커스가 당시 랄프 샘슨/하킴 올라주원의 트윈타워가 버티던 휴스턴 로켓츠에게 패해 파이널 진출이 좌절되자 구단주 제리 버스가 "우리도 트윈타워를 만들자"라는 생각으로 당시 매버릭스가 1986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7순위로 뽑은 파워포워드 로이 타플리와 매버릭스의 스몰포워드 마크 어과이어를 받아오고 워디를 내주는 딜이었는데 이건 당사자인 워디 본인이나 당시 감독이었던 팻 라일리 심지어 단장인 제리 웨스트도 몰랐다고 한다. 제리 웨스트가 자신의 단장직까지 걸고 "이 거래를 하시면 반드시 후회합니다."라고 극구 반대했고 제리 버스도 너무 성급하다고 생각했는지 결국 딜을 철회했다. [17]
7. 관련 문서
[1]
1987년 12월 11일에 개최된 보스턴 셀틱스전 한정으로 00번을 착용했다.
참조
[2]
여담이지만 스미스의 역대 세번째 1학년 주전이 바로
마이클 조던이다.
[3]
샘슨의 기세는 그야말로 무서워서 1년 전인 2학년 시절에도 네이스미스, 존 우든, 오스카 로버트슨 상까지는 받았으며, 다음시즌인 4학년 시즌에도 거의 석권할 뻔했다. 이때 유일하게 그로부터 스포팅 뉴스 선정 상을 뺐어간 선수가 바로 2학년
마이클 조던. 조던은 본인의 3학년 시즌에 모든 상을 석권하고 NBA에 진출한다.
[4]
이때는 양 컨퍼런스 꼴찌 팀들이 동전던지기로 1순위를 정했고, 서부 컨퍼런스 꼴찌 클리퍼스와 드래프트 지명권을 트레이드해온 레이커스가 동전 던지기를 했다. 당연히 레이커스는 디펜딩 챔피언이니 꼴찌는 아니었지만.
[5]
아이러니하게 만약 샘슨이 드래프트에 나섰더라면 클리퍼스는 커녕 명문 레이커스에서 행복한 데뷔를 할 뻔했다. 심지어 샘슨은 나중에 하킴 올라주원과 뛸때 볼 수 있듯 파워포워드 소화가 가능했기 때문에 센터 카림 압둘자바와 초장신 트윈타워를 구성해서 무시무시한 위력을 보였을 것이다. 물론 이 경우 휴스턴 때보다 더 달리는 농구를 했을 것이기 때문에 선수생활이 더 짧아졌을 순 있지만, 어쨌든 80년대에 레이커스의 위력은 더욱 무서웠을 것이다.
[6]
89년에 63승을 기록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는 역대급 강팀이자 최강의 수비팀으로 플레이오프에서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 시카고 불스를 제외한 모든 팀을 스윕해버릴 정도였는데, 이때 플레이오프에서 이 팀을 상대로 한번이라도 40점을 넘긴 선수는 마이클 조던과 제임스 워디 단 둘 뿐이었다.
[7]
그렇다고 이상이 완전히 임팩트 수상은 아니다. 워디는 대패한 4차전에서 7점으로 부진해 평균을 확 깎아먹은 것 뿐이지 시리즈 내내 원투펀치에 걸맞은 활약을 했으며 네 경기에서 팀내 득점 1위를 하며 좋은 활약을 했다. 워디나 이궈달라, 맥스웰처럼 에이스보다 못하긴 하지만 그래도 '비벼볼만한' 수준이 되면 임팩트로 뒤집을 수 있는 정도.
[8]
이때 초반에 댄틀리가 어느 정도 맞불을 붙히기도 했으나 워디를 상대로 그나마 버텨준 것은 교체투입된 로드맨이었다. 당시 로드맨은 불스 시절에 비하면 훨씬 말랐으나 특유의 강력한 하체 덕분에 그보다 힘이 훨씬 센 워디의 포스트업에 속수무책으로 밀리진 않았다. 이 때 모습 덕분인지 88-89시즌에 로드맨이 훨씬 더 큰 역할을 맡게되고, 적어진 비중에 불만을 표하던 댄틀리는 시즌 도중 트래이드가 된다. 그리고 리벤지 매치가 된 89파이널에서 레이커스는 평균 25.5점을 넣은 워디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부상으로 출장시간이 준 매직의 공백을 못 이기고 스윕당하고 만다.다만 이때도 그는 최종 4차전에서 40점을 넣으며 체면치레를 했다. 위에 언급됐다시피 막강전력이던 피스톤즈를 상대로 플레이오프에서 40점을 넘긴 건 그와 조던 뿐이었다.
[9]
마이클 조던이 제임스 워디의 포스트업을 보고 배웠을 정도로 포스트업이 뛰어나다.
[10]
팔을 위로 쭉 뻗고 날아가는 모습이 자유의 여신상 같다고 붙은 이름. 테런스 스탠스베리란 선수가 덩크 콘테스트에서 선보이기도 했다.
[11]
비슷한 케이스가 커리어 초창기에 3번으로 뛴
찰스 바클리. 물론 당시에도 슈팅 가드에 가깝게 뛰는
조지 거빈같은 스몰 포워드들이 있긴 했다. 거빈은 한때 NBA의 대세였던 2-3번을 오가는 스윙맨의 시초격 선수 중 하나로, 전성기 때 두 명의 가드와 함께 출전했고 스몰 포워드로 뛰었으며 스몰 포워드에 맞는 체격을 갖고 있었으나 플레이스타일은 누가봐도 슈팅 가드였다. 이 때문에 그는 역대 포지션 랭킹에서는 슈팅가드로 분류된다. 사실상 스몰 포워드 포지션에서 출전한 슈팅 가드.
[12]
사실 코너맨 자체가 스윙맨과 빅맨의 경계에 있는 애매한 분류다. 00년대 이후 코너맨들이 빅맨보단 스윙맨 쪽에 좀 더 가까운 경우가 많았고 10년대 후반부터는 아예 포워드 두 자리를 윙 타입의 선수들로 채우는 것이 대세인 데 비해, 80~90년대에는 상술했듯 스몰 포워드가 비교적 안쪽에서 플레이했다보니 코너맨이라고 불릴만한 선수들도 대부분 인사이드와 중거리 기반의 클래식 포워드들이었고 내외곽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스윙맨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워디의 경우 탁월한 운동능력과 스킬로 스윙맨스러운 플레이도 가능했지만, 주 행동 반경은 당대의 다른 포워드들과 마찬가지로 안쪽이었다.
[13]
1986-87, 1987-88, 1988-89 세 시즌동안 플레이오프 한정 팀내 공격 1옵션이었다. 1988년에는 팀의 에이스인 매직 존슨을 제치고 파이널 MVP를 수상
[14]
참고로 당시 2순위는 올 NBA 세컨팀까지 오른 테리 커밍스, 그리고 3순위는
도미니크 윌킨스이다. 그의 재능으로 보면 도미니크 윌킨스처럼 폭발적인 득점력으로 리그를 뒤흔든 불운의 에이스로 기억됐을 가능성이 높다.
[15]
카림 압둘 자바 역시 눈부상 이후 보호 차원에서 고글을 썼다. 다만 이 둘은 보호 목적을 위해 쓴 돗수 없는 고글이었으며 실제 시력 문제로 돗수 있는 고글을 쓴 인물은
NFL 선수였던 에릭 디커슨이었다. 시카고 불스의
호레이스 그랜트 역시 시력 문제로 90-91시즌부터 고글을 쓰기 시작했으나, 커리어 도중 라식 수술을 했다. 이때문에 그랜트는 불스 시절엔 안경을 낀 모습이 자주 나오나(당연히 91시즌 전에는 안경을 안 꼈다) 말년인 레이커스 시절이나 은퇴 이후엔 안경을 끼지 않는다.
하킴 올라주원도 초창기에 고글을 썼다.
[16]
당연한 얘기긴 하지만 이는 역대 최고의 선수가 된 후배를 위한 일종의 립서비스로, 당시 1옵션은 15.6점을 올린 3학년 제임스 워디, 2옵션은 14.3점을 올린 2학년 샘 퍼킨스, 그리고 3옵션은 13.5점을 올린 1학년 조던이었다. 물론 딘 스미스가 주전으로 내세운 역대 세번째 1학년 선수가 된 조던의 활약은 대단했지만, 수치를 떠나 타힐즈의 절대적인 에이스는 워디였다. 그만큼 조던의 재능과 성장세가 무서웠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된다. 여담으로 워디가 조던을 인정하는 만큼 조던 역시 워디를 인정하기 때문에 자신이 뽑는 베스트5 안에 유잉과 매직과 조던 본인과 영혼의 파트너 피펜과 더불어 항상 워디를 포함시킨다.
[17]
타플리는 루키 퍼스트팀, 88년에 올해의 식스맨상을 타는 등 좋은선수였지만 부상이 잦았고, 90-91시즌 당시 음주운전으로 걸린 이후 마약 규정 위반으로 영구 제명 당하며 유망한 커리어를 스스로 내버렸다. 어과이어는 댈러스의 독보적인 에이스로서 득점수치상으로는 워디보다 월등히 높았고 확실한 올스타였지만, 워디만큼 높은 평을 받는 선수는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워디의 전성기였던 80년대 후반 그의 활약이 없었더라면 (저 두 선수를 받아왔다고 해도) 레이커스가 87,88년 연속 우승을 하는 것은 힘들었을 수 있다. 특히 간발의 차이로 우승한 88년 파이널 당시 최종전에서 매직조차 묻어버리는 대활약을 한게 워디란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