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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19:14:02

팀 하더웨이

팀 하더웨이의 수상 이력
{{{#!folding ▼
파일:오륜기(여백X).svg
2000

베스트팀
파일:NBA 로고.svg
1st : 1996-97
2nd : 1991-92 · 1997-98 · 1998-99
3rd : 1992-93
파일:NBA 로고.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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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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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 Bo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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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wyane Wade)
팀 하더웨이
(Tim Harda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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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킬 오닐
(Shaquille O'N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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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9a01b> 알론조 모닝
(Alonzo Mourning)
유도니스 하슬렘
(Udonis Hasl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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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팀하더웨이명전.png
팀 하더웨이
헌액 연도 2022년
}}}||
파일:하더웨이.jpg
<colbgcolor=#000> 마이애미 히트 No. 10
<colcolor=#fff> 티머시 두에인 하더웨이 시니어
Timothy Duane Hardaway Sr.
출생 1966년 9월 1일 ([age(1966-09-01)]세)
일리노이주 시카고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출신학교 텍사스 대학교 엘패소
신장 183cm (6' 0")
체중 79kg (175 lbs)
윙스팬 190cm (6' 3")
포지션 포인트 가드
드래프트 1989 NBA 드래프트 1라운드 14순위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지명
소속 팀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1989~1996)
마이애미 히트 (1996~2001)
댈러스 매버릭스 (2001~2002)
덴버 너기츠 (2002)
인디애나 페이서스 (2003)
지도자 플로리다 핏불스 (2005~2006)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코치 (2014~2018)
등번호 10번 - 골든스테이트 / 마이애미 / 댈러스 / 덴버
14번 - 인디애나
가족 아들 팀 하더웨이 주니어
SNS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1. 개요2. 커리어
2.1. NBA 입성 전2.2. NBA 입성 후
3. 은퇴 후4. 플레이 스타일5. 여담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파일:Mr.crossover.jpg
MR.KILLER CROSSOVER

미국의 농구인으로, 183cm의 작은 신장으로 킬러 크로스 오버 공격을 무기로 삼는 포인트 가드.

2. 커리어

2.1. NBA 입성 전

1966년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태어나 고교 시절을 카버 군사학교에서 보냈는데, 이때 농구부에서 뛰면서 밥 월터스 감독에게 지도를 받았다. 1985년부터 텍사스 대학교 엘파소 캠퍼스에 입학 후 농구부에서 돈 해스킨스(1930~2008)[1] 감독에게 가르침을 받아 후배 안토니오 데이비스, 편입생 그렉 포스터 등과 함께 재학 기간 내내 1987 및 1989년 NCAA 전국대회에서 32강까지 각각 찍어줬고, 4학년 때인 1988-89 시즌에 평균 22득점, 4개의 리바운드, 5.4개의 어시스트를 남기면서 올 웨스턴 애슬레틱 컨퍼런스(WAC) 퍼스트 팀과 올해의 선수상은 물론, 183cm이하의 우수한 선수에게만 수여되는 프란시스 포멜로이 네이스미스상을 수상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NBA 드래프트 1라운드 14순위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로 지명을 받고 NBA 무대에 오르게 된다.

2.2. NBA 입성 후

파일:external/www.mercurynews.com/20140806__mitchrichmond1.jpg

신인시절, 당시 등번호 5번을 착용했다가 1990년에 선배 마누트 볼이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로 떠난 뒤에는 대학교 시절에 착용했던 10번으로 변경. 하더웨이는 미치 리치몬드, 크리스 멀린과 함께 손을 잡고, 당시 인기 힙합그룹이었던 Run DMC를 패러디한 Run TMC[2]를 결성했다.

1991-92시즌은 평균득점 23.4에 평균 어시스트 10개, 1992-93시즌에는 평균득점 21.5에 평균 어시스트 10.6을 기록해 2년 연속 평균득점 20개, 어시스트 10개 이상을 기록한 선수 가운데 리그 점수에서는 5명째가 되었다. 또 2번째로 가장 빠른 통산연속 5000개, 통산 어시스트 2500개를 달성했다.

1995-96시즌 도중에 마이애미 히트로 이적해 팻 라일리 감독의 지도 아래, 알론조 모닝등과 함께 뛰게 된 하더웨이는 리그에서 손꼽히는 포인트가드의 플레이 레벨을 일찍이 되찾고, 사우스이스트 디비젼을 대표하는 강호 클럽이 되었다. 같은 디비젼에서 손꼽히는 성적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라이벌 팀인 뉴욕 닉스와 시카고 불스에게 저지당해, 결국 우승은 실패로 넘어 가 버리고야 말았다.

그 후, 댈러스 매버릭스와 덴버 너기츠에서 뛴 후, 자유 계약 신분이 되었다. 2002-03시즌 도중에 자유계약 신분으로 인디애나 페이서스에서 뛴 후,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3. 은퇴 후

파일:external/www.gannett-cdn.com/636089414217766129-USATSI-9018728-115794393-lowres.jpg
2005년에 ABA 팀 플로리다 핏불즈[3] 창단에 참여해 공동 주주도 맡았는데, 여기서 초대 사장과 단장, 감독까지 1인 4역을 맡아 2006년까지 재직했다. 2014년부터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의 어시스턴트 코치에 취임하여 지도자로써의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4. 플레이 스타일

평균 20득점-10어시스트를 두 시즌 연속으로 할 정도로 득점력과 시야가 모두 뛰어났던 포인트 가드로, 앨런 아이버슨과 더불어 크로스오버의 역대 최고봉이라고 불린다.

종합적인 볼핸들링의 경우 카이리 어빙, 크리스 폴 등 현재의 실력자들이 꿀릴 게 없거나 오히려 앞서지만, 크로스오버 드리블로 한정할 경우 아직도 하더웨이나 아이버슨을 따라갈 자가 없다는 의견이 많다. 아이버슨의 경우 크로스오버시 좌우 폭이 매우 크며[4] 크게 흔들어 상대를 완전히 한쪽으로 몬 뒤 반대쪽으로 전광석화같은 속도로 파고들며 수비를 제낀다. 반면 하더웨이의 크로스오버는 아이버슨보다 좌우 폭은 좁지만 크로스오버시 반박자 빠르게 짤라주듯 반향을 급전환하여 상대의 스탭이 못 따라가게 만들어 돌파한다. 화려함에 있어서 아이버슨이 앞서지만 위력은 하더웨이도 딸릴게 없다.

돌파 이후 마무리가 좋고, 3점 슛도 당대에는 한 손에 꼽힐 정도로 많이 쏘는 편이라 득점력이 뛰어났다. 또한 시야나 전체적인 리딩이 좋고, 마인드도 이타적인 편이라 무리해서 공격욕심을 내는 경우도 드물었다. 운동능력에 의존하기보다는 기술이 뛰어난 선수라 비교적 많은 나이까지 기량을 유지했고, 만 30세이던 97년 (1966년 9월생)에 퍼스트팀, 32세이던 99년까지 세컨팀에 올랐다.

반면 작고 통통한 편이라 운동능력이 저하된 이후엔 수비에서 별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게 가장 잘 드러난게 그의 소속팀인 3번 시드 히트가 6번 시드 샬럿 호네츠를 1라운드에서 만난 01년 플레이오프였다. 당시 그는 전성기는 지났지만 14.9점 6.3어시스트를 기록하는 수준급 실력자였는데, 배런 데이비스 등 젊고 운동능력이 빵빵한 샬럿의 가드들을 막지 못해서 3전 전패를 하며 업셋을 당하는 굴욕을 당했다.

5. 여담

아들이 현재 NBA에서 뛰고 있으며 이름은 팀 하더웨이 주니어이다. 외모는 아버지 젊었을 적과 많이 닮았지만 아버지와 다르게 198cm의 슈팅가드로, 득점력이 좋은 편이다. 2013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24번으로 뉴욕 닉스에 드래프트되어 현재 애틀랜타 호크스에서 뛰었고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다.

안타깝게 실력은 아버지에 한참 미치지 못해 네번째 시즌이었던 2017시즌 종료 기준으로 올-루키 퍼스트팀에 오른 것 말고는 수상이력이 아직까지 없다. 아버지가 4년차 때 이미 20점 10어시스트를 2년 연속하고 3회 올스타, 올NBA세컨팀 1회, 써드팀 1회에 오른 걸 생각하면 상당히 비교가 된다.

다만 2017년에 거액계약을 맺은 이후 이전까지 평균 14.5점에 그쳤던 개인기록이 많이 올라 18시즌, 21경기를 소화하고 있는 시점으로 17.8점 4.2리바운드 3.3어시스트를 기록하고 있다. 아버지의 기록에 비하면 리바운드를 제외한 모든 기록이 처참하게 밀리지만 성장 중이란게 고무적이다.

여담이지만 팀 하더웨이 주니어는 2017년에 4년/7천1백만 달러라는, 그의 실력이나 기록에 비해 억소리나는 계약을 맺었는데, 이 때문에 그와 비교도 안될 정도로 뛰어난 선수지만 선수생활 내내 연봉으로 총 4천6백만 달러 조금 넘게 번 그의 아버지와 비교가 되고 있다.[5]

커다란 흑역사가 하나 있는데, 2007년 올스타 주간 당시에 커밍아웃한 전직 NBA선수에 대해 논하는 과정에서 공개 인터뷰를 통해 동성애자들을 싫어한다고 고백한 것이다. 당시 그는 "전 게이들이 싫어요, 게이들 주변에 있는 것도 싫어하고요. 전 동성애혐오자(homophobic)이에요. 그건 이 세계나 미국에 있어선 안 돼요"라고 멘트를 날렸다.

이 사건 이후 하더웨이는 NBA 홍보대사직을 박탈당하고 2007년 올스타 주간 모든 행사에서 출입금지 당했다. 이후 그는 세번이나 농구 명예의 전당 최종 후보에 올랐으나 세번 다 미끄러졌다. 물론 하더웨이가 우승이 없긴 하지만, 그동안 무난히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크리스 멀린, 디켐베 무톰보, 랄프 샘슨, 레지 밀러 등의 수상실적이 그와 비슷하거나, 실적이 오히려 못한 선수들도 있다는 걸 생각하면 하더웨이의 숱한 탈락에는 동성애 혐오발언의 여파가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의심되는 것도 사실이다. 실상 의심 정도가 아니라 본인을 포함해 농구계 전체가 그렇게 보고 있다. 2020년에 또 후보에 올랐다 탈락하자 자신의 발언 여파를 뼈저리게 느끼며 "구걸하진 않겠다"고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심지어 과거 은사도 "사람들이 뒤끝이 있기 때문에 (hold a grudge) 넌 영원히 헌액되기 힘들거다"라고 했다고...

하더웨이는 이 발언에 대해 후회한다고 밝혔으며, 성소수자들을 위한 단체를 지지선언하고 플로리다에서 동성애 결혼을 합법화할 것을 촉구하는 탄원서에 첫 서명자가 되고, 성소수자 관련 시위에 참석하는 등 성소수자 지지 활동을 해왔다.

또한 미국의 4대스포츠의 현역 선수로선 사상 최초로 커밍아웃한 제이슨 콜린스에게 지지한다는 전화를 하기도 했다.

망언 이후 반성하는 태도 덕분인지 그에 대한 여론이 나아졌고, 뒤늦게 2022년에 명예의 전당 헌액자로 결정되었다.

6. 관련 문서



[1] 1930년 3월 14일 오클라호마 주 이니드에서 아버지 폴 유니스 해스킨스(1905~1979)와 어머니 오팔 L. 해스킨스(1915~1996) 사이에서 태어나 오클라호마 A&M 대학교(현 오클라호마 주립대학교) 재학 시절 명장 헨리 아이바(1904~1993)의 가르침을 받아 1951년 NCAA 전국대회에서 4강까지 가는 데 공헌했다. 1952년 졸업 후 아마추어 리그인 AAU 팀 아르테시아 트라벨러스에서 뛰었다가 1955년 벤자민 고등학교 감독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 6년 간 학교 세 곳을 전전하다 1961년부터 38년간 UTEP 농구부를 지휘하며 1966년 NCAA 전국대회 때 바비 조 힐, 해리 플로노이, 윌리 워슬리, 데이빗 라틴 등 흑인 선수 5명을 스타팅 멤버에 넣어 팻 라일리 등 백인 선수들로 구성된 켄터키 대학교를 이겨 인종차별의 벽을 넘었으며, 팀 하더웨이, 안토니오 데이비스, 그렉 포스터 외에 놀란 리차드슨(전 아칸소 대학교 감독), 짐 반스, 네이트 아치발드, 데이브 페이틀 등 농구인들을 발굴했다. 특히 1966년 우승 당시의 일화는 2005년 제임스 가트너 감독의 영화 <글로리 로드>로 다뤄졌다. 1997년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및 2006년 미국 대학농구 명예의 전당에 각각 헌액되었고, 그의 코칭 트리에 속한 인물로는 전술한 놀란 리차드슨 외에 팀 플로이드(전 UTEP 감독), 제리 헤일(전 오랄 로버츠 대학교 감독), 모 아이바(헨리 아이바의 아들, 전 텍사스 크리스찬 대학교 감독), 진 아이바(헨리 아이바의 조카, 전 베일러 대학교 감독), 딕 헌세이커(전 유타 밸리 대학교 감독) 등이 있다. [2] 파일:external/lifeofdad.com/tmc.jpg [3] 2006년 CBA로 옮긴 뒤 '마이애미 마제스티'가 됐다가 이듬해 켄터키 주 파이크빌로 옮겨 '이스트 켄터키 마이너즈'가 됐다. 2009년 CBA가 해체된 후 ABA로 갔지만 활동은 없어 사실상 유령 구단이 됐다. [4] 아이제아 토마스의 경우 이런 드리블은 지양하라고 한다. 좌우폭이 클 경우 드리블을 하다 점프슛으로 전환할 경우 슛이 불안정해지고 슛 자세로 가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 이 때문인지 아이버슨의 외곽슛은 뛰어난 편은 아니다. [5] MVP급 선수였던 실력에도 커리어 내내 4천3백만 달러 좀 넘게 번 찰스 바클리가 이와 관련해 미는 드립이 있는데 "엄마 때문에 죽겠어요(Mom, you're killing me)" 너무 일찍 낳아줘서 엄청 손해봤다는 드립이다. 참고로 이 드립이 처음 나온건 크리스 웨버가 바이아웃되면서 받은 금액이 4천만 달러로 바클리의 통산 연봉과 비슷하다는 자료가 Inside the NBA에서 나오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