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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3 10:53:35

타이슨 챈들러

타이슨 챈들러의 수상 이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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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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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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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nd : 2010-11 · 2011-12

시카고 불스 등번호 3번
허시 호킨스
(1999~2000)
타이슨 챈들러
(2001~2006)
벤 월러스
(2006~2008)
뉴올리언스 호네츠 등번호 6번
아비다스 마치야우스카스
(2005~2006)
타이슨 챈들러
(2006~2009)
바비 브라운
(2009~2010)
샬럿 밥캣츠 등번호 6번
나지 모하메드
(2007~2009)
타이슨 챈들러
(2009~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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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댈러스 매버릭스 등번호 6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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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슨 챈들러
(2010~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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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데릭 피셔
(2012)
타이슨 챈들러
(2014~2015)
앤드류 보것
(2016~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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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타이슨챈들러.jpg
타이슨 클리오티스 챈들러
Tyson Cleotis Chandler
출생 1982년 10월 2일 ([age(1982-10-02)]세)
캘리포니아주 핸포드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출신학교 마누엘 도밍게즈 고등학교
신장 213cm (7' 0")
체중 107kg (235 lbs)
윙스팬 221cm (7' 3")
포지션 센터
드래프트 2001 NBA 드래프트 1라운드 2순위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 지명
소속 팀 시카고 불스 (2001~2006)
뉴올리언스 호네츠 (2006~2009)
샬럿 밥캣츠 (2009~2010)
댈러스 매버릭스 (2010~2011)
뉴욕 닉스 (2011~2014)

댈러스 매버릭스 (2014~2015)
피닉스 선즈 (2015~2018)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2018~2019)
휴스턴 로키츠 (2019~2020)
등번호 3번 - 시카고
6번 - 뉴올리언스 / 샬럿 / 댈러스 / 뉴욕
4번 - 피닉스 /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
5번 - 레이커스
19번 - 휴스턴
SNS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성장과정3. 프로 경력
3.1. 시카고 불스3.2. 뉴올리언스 호네츠3.3. 수렁과 부활3.4. 뉴욕 닉스3.5. 30대 이후
4. 플레이스타일5. 수상 내역6. 여담

[clearfix]

1. 개요

NBA의 농구선수. 커리어 처음에는 미숙한 점이 많았고 롤러코스터같은 선수생활을 보냈지만 경험이 쌓이면서 리그에서 손꼽히는 수비형 센터로 성장한 선수다.

2. 성장과정

챈들러는 두 형제와 어머니와 함께 그들 가족의 개인 농장에서 살았다. 챈들러의 조부는 챈들러가 3살 되던 해에, 나무에다 바구니를 달아놓고 농구를 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한다. 9년 동안의 농장 생활을 마감하고 어머니와 함께 캘리포니아 샌버너디노로 옮겨갔다. 이때 이미 챈들러는 키가 6피트까지 자라 있었다. 그것도 초등학생이 말이다(…). 이것 때문에 학교 친구들이 많이 놀려대서 챈들러는 몇번이고 학교를 그만두고 싶었다고 한다.

같은 주의 도시 컴튼으로 이주한 챈들러는 지역에서 유명한 농구 명문 마누엘 도밍게스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농구부에 들어간 후, 러셀 오티스[1] 감독에게 농구 수업을 받았다. 같은 학년에 같이 다니던 친구로는 훗날 역시 NBA 선수로 오게 되는 테이션 프린스가 있다. 도밍게즈 고등학교를 주 최고 팀으로 이끄는 과정에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현 토론토 랩터스의 가드인 더마 더로전은 그의 고등학교 시절 경기를 보고, "그는 마치 샤크같았다." 라고 회고했고 2009년 밀워키 벅스에 드래프트된 가드 브랜든 제닝스는 당시 도밍게스 고등학교 농구부의 시합 때 볼보이를 했는데 "여학생들에게 둘러싸여서 경기장에 오는 그를 보고 '나도 꼭 저렇게 돼야지'라고 생각했다." 라고 회고했다.

고학년때 팀을 주 챔피언으로 이끌었고, 성적은 31승 4패였다. 그 주 챔피언 결정전에서 챈들어는 26득점 15리바운드 8블록슛을 기록했다. 많은 대학팀들이 그를 노렸다. UCLA, 켄터키, 멤피스 대학교, 애리조나 대학교와 미시건 대학교가 챈들러에게 구애를 보냈지만, 챈들러는 대학진학을 하지 않고 2001년 NBA 드래프트에 참가 신청을 하게 된다.

3. 프로 경력

3.1. 시카고 불스

파일:attachment/타이슨 챈들러/TysonChanderBulls.jpg
챈들러와 커리.

당시 2001년 드래프트는 고졸 선수들에 대한 거품이 거의 절정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챈들러는 이 열풍을 등에 업고 1라운드 2순위로 LA 클리퍼스에 지명되었다. 하지만 당시 시카고 불스의 단장이었던 제리 크라우스는 큰 키에 팔이 길고, 볼을 잘 다루며 기동력이 출중한 챈들러를 눈여겨보고 있었고, 팀에 즉시 전력감으로 있던 엘튼 브랜드를 내주고 그를 데려왔다. 크라우스는 챈들러 말고도 같은해 드래프트에서 4순위로 지명한 에디 커리와 함께 챈들러를 팀의 미래로 낙점했다. 일례로 커리와 챈들러에게 각각 2번과 3번의 배번을 준 것은 두 사람이 불스의 미래임을 처음부터 공표한 셈.[2]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둘의 성장은 더뎠다. 신인 때부터 싹수를 보여준 케빈 가넷과 달리, 커리는 수비는 폭망에 장기인 공격력조차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3], 챈들러는 뛰어난 기동력과 블록슛 능력을 보여줬지만, 정말 부실한 공격 능력과 부실한 파울관리 능력으로 시카고 팬들의 속을 썩였다. 2년차 시즌에는 9.2득점, 6.9리바, 1.41블록을 기록해 기록이 어느정도 상승하는 모습과 함께 본인도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2003-04 시즌에 허리 부상을 당해 47경기를 날려먹어 더 성장할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시즌중에 브랜든 헤이우드나 아마레 스타더마이어와 언쟁을 벌이기도 했는데[4] 아이러니 하게도 저 둘과 훗날 팀 동료로 재회한다.

그는 2004년 3월 시즌아웃을 선언하며 재활에 주력했고, 2004-05 시즌에는 벤 고든과 함께 팀의 주축 식스맨으로 맹활약해 80경기중에 10경기만 선발 출전했지만 평균 8득점 9.7 리바운드를 잡아냈다. 플레이오프에서도 11.7점 9.7 리바운드로 대활약한다. 그리고 2005-06 시즌이 시작되기 전, 에디 커리의 이적으로 센터가 급하게 된 불스는 챈들러와 6년간 6천3백만 달러에 계약한다. 당시 팬들의 반응은 열에 여덟명은 "저건 누가봐도 오버페이임 ㅇㅇ", "또한명의 먹튀 탄생인가효?" 등의 절망적인 반응이 많았다. 아니나다를까, 79경기중 50경기에 선발로 출전했지만 전 시즌보다 기록치는 많이 하락했다. 파울관리는 전혀 개선이 되지 못했고, 플레이오프에서도 거의 잉여짓을 하고 있었다. 결국 시카고도 챈들러에게 한계를 느끼고 그를 뉴올리언스 호네츠로 트레이드 하게 된다.

3.2. 뉴올리언스 호네츠

파일:attachment/타이슨 챈들러/TysonChanderHornets.jpg

왼쪽부터 데이비드 웨스트, 크리스 폴, 타이슨 챈들러.

타이슨 챈들러의 짧았던 제 1 전성기. 당시 그의 합류에 팬들은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반응이 많았지만 챈들러는 호네츠에서의 첫 시즌 평균 9.5점 12.4 리바운드를 기록했다. 특히 뉴올리언스 드래프티인 슈퍼 포인트 가드 크리스 폴과 펼치는 픽 앤 롤은 픽 앤 롤이 아닌 픽 앤 덩크로 불리웠고, 이건 호네츠의 주 공격루트가 되었다.

2007-08 시즌에 처음으로 평균 더블더블을 기록했고, 호네츠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다승인 56승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는데 1등 공신이 되었다. 뉴올리언스는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댈러스 매버릭스를 4-1로 격파하고 샌안토니오 스퍼스와 만난다. 2라운드에서 뉴올리언스는 샌안토니오에게 패배했어도 챈들러는 이때 팀 던컨을 꽁꽁 묶는데 성공했다. 7차전때 던컨의 야투는 5-17이었으니.

2008-09 시즌에 부상을 당해서 이전 두 시즌보다 못한 활약을 펼쳤다. 뉴올리언스는 그의 과거 부상전력과 남은 계약기간에 부담을 느끼고 그를 오클라호마시티 썬더로 트레이드 시키려고 했다. 이 트레이드는 거의 성사 직전까지 가다가 파토가 나버렸는데, 이유는 챈들러가 메디컬 테스트 통과를 못해서. 이 때문에 챈들러는 상당히 분노했다고.

3.3. 수렁과 부활

파일:attachment/타이슨 챈들러/TysonChanderBobcats.jpg

챈들러는 2009년 7월 신인상을 수상한 뒤로는 주춤하던 언더사이즈 센터인 에메카 오카포와 트레이드되어 꼴럿 샬럿 밥캣츠로 트레이드된다. 샬럿은 2009-10 시즌에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룩하지만 챈들러는 시즌 내내 부상에 시달리면서 12M 가까이 먹는 주제에 6.5득점 6.3 리바운드라는 참담한 성적을 거뒀고, 플레이오프에서는 올랜도 매직 드와이트 하워드를 나름대로 잘 막았지만 팀은 0-4로 스윕당하며 광탈.

파일:attachment/타이슨 챈들러/TysonChanderDallas1.jpg

댈러스 팬들은 그에게 챈장군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5]

샬럿에서 1년동안 삽질만 한 챈들러는 다시 댈러스 매버릭스로 트레이드되는데, 댈러스에서 완전히 기량을 되찾는다. 챈들러는 에이스인 더크 노비츠키의 든든한 보디가드가 되어 댈러스 수비의 중심으로 활약했고, 처음으로 NBA 디펜시브 팀 자리를 차지하면서 플레이오프에 진출한다. 플레이오프에서도 노비츠키나 다른 양궁부대가 득점에 힘쓰는 동안 골밑 단속을 단단히 하면서 댈러스 우승의 주역이 되며 우승반지를 득템하는 기쁨을 누렸다.

3.4. 뉴욕 닉스

파일:attachment/타이슨 챈들러/TysonChanderKnicks.jpg

댈러스가 재계약에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자 챈들러는 사인 앤 트레이드 방식으로 뉴욕 닉스로 발을 옮긴다.[6] 챈들러 영입을 위해 천시 빌럽스가 쫓겨나면서 백코트가 개판이 됐기 때문인지 닉스는 시즌 중반까지 고전을 면치 못하다 제레미 린이 갑툭튀하면서 되살아났고, 챈들러는 시즌 내내 고군분투하며 닉스의 골밑을 수호했다. 뉴욕 닉스의 수비를 이전 시즌보다 한층 업그레이드시키는데 공헌한걸 인정받아 닉스 선수중 역대 최초로 올해의 수비수상을 수상한다.

이때 챈들러는 필드골 성공률이 무려 67.9%로 리그에서 가장 높은 선수이기도 했는데, 이보다 높았던 선수는 레전설 윌트 체임벌린 뿐이었다. 프론트 코트 파트너인 아마레 스타더마이어가 맛탱이가 간 2012-13 시즌에도 시즌 평균 더블-더블을 기록하며 12년 커리어중에서 처음으로 올스타 선발, 조아킴 노아와 공동으로 디펜시브 퍼스트 팀 센터 부문에 뽑혔다. 후반기에 부상을 당하며 한동안 전열에서 이탈하고, 플레이오프에서는 컨디션 저하로 인해 로이 히버트에게 별 힘을 못쓰고 털리긴 했지만.

3.5. 30대 이후

2013-14 시즌 초반인 11월 5일 오른쪽 종아리뼈 골절로 4주에서 6주 정도 결장하게 됐고, 그 동안 닉스는 수렁에 빠졌다. 20경기 결장 후 12월에 복귀했으며 카멜로 앤서니를 제외한 닉스 선수중에서는 그나마 제몫을 해 주고는 있으나 침체된 팀 상황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파일:attachment/타이슨 챈들러/TysonChanderDallas2.jpg

2014년 드래프트 하루 전날에 레이몬드 펠튼과 묶여 댈러스로 트레이드 되었다.[7]댈러스에서는 75경기에 출장하면서 시즌 평균 더블더블을 기록, 비교적 건강한 시즌을 보냈지만 댈러스는 시즌 전 기대하고는 달리 그다지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라운드에서 광탈,

파일:external/sports.cbsimg.net/102115_tyson.jpg
챈들러는 이후 피닉스 선즈와 4년 $52M의 계약을 맺는다. 나이를 감안하면 마지막 거액 계약이 될 듯.

파일:Tyson Chandler Game Winner.gif
2017년 12월 26일 멤피스를 상대로 선수생활 최고의 플레이가 될 만한 덩크를 성공시켰다.

2018년 11월 4일, 선즈와 바이아웃으로 계약을 해지하고 3일뒤 2.1밀 미니멈 계약으로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에 입단했다. 이 시즌 레이커스는 르브론 제임스, 라존 론도등의 베테랑이 합류하긴했으나 빈약한 빅맨 라인업에 신음하고 있었다. 저베일 맥기 혼자서 30분넘게 뛰어야하는 상황인데 그 빈시간을 처리할 방법이 없었던것. 만나는 빅맨들에게 영혼까지 털린 레이커스는 챈들러 영입이라는 처방을 내렸다.

11월 8일에 열린 미네소타 전에서 챈들러는 맥기의 백업으로 나와서 타운스를 사력을 다해 막아냈다. 신예 공격머신인 타운스를 완전히 틀어막아 승리의 1등 공신이 되었다. 다만 1경기로 판단하긴 이르고 그가 레이커스의 백업을 채워줄 적임자인지는 지켜볼 문제이다.

11월 12일, 애틀랜타 전에서 챈들러는 레이커스가 1점으로 리드 중인 4쿼터 몇 초 안남은 상황에서 호크스의 마지막 공격인 트레이 영의 플로터 레이업을 아슬아슬한 블록 슛[8]으로 막아 팀의 3연승이자 자신이 필요한 이유를 증명해내었다.

2019년 7월 13일 휴스턴 로키츠와 1년 계약을 맺었다. NBA에서의 19번째 시즌을 맞이하여 등번호도 19번으로 달았다. 그러나 휴스턴이 극단적인 스몰 라인업을 가동하는 바람에 경기에 거의 출전을 하지 못했다. 결국 시즌 후 방출되었다.

4. 플레이스타일

7피트 1인치의 장신에 긴 윙스팬을 보유한 빅맨이라 그냥 서있기만 해도 코트에서의 존재감이 대단하며, 블록 슛에만 집중하지 않으면서도 페인트존 장악과 리바운드 적립에 능숙하다. 또한 사이즈에 비해 민첩하고 운동량도 많아 헬핑 수비도 뛰어나다. 수비력만을 놓고 봤을때는 당시 리그에서 조아킴 노아, 드와이트 하워드 등을 제외하면 비벼볼 센터가 없을 정도. 공격시에는 드리블러를 위해 서주는 스크린이 일품이고 앨리웁같은 받아먹기를 매우 잘한다.

2:2 플레이는 뛰어나지만 포스트에서 자기 스스로 공격을 성공시키는 능력은 전무하다고 봐도 되며, 중거리슛같은 무기도 보유하고 있지 않은 게 단점. 이 때문에 불스 시절 "에디 커리의 공격력과 타이슨 챈들러의 수비력이 합쳐지면 리그 최고 센터" 라는 반 농담도 있었을 정도. 이건 챈들러의 빈약한 공격력을 비꼬는 말임과 동시에 에디 커리의 민망한 수비력과 보드 장악능력을 비꼬는 말이기도 하다.[9] 커리어 내내 잔부상을 달고 살아온 유리몸이기도 하다.

5. 수상 내역

수상 내역
파일:nbachampionfts.png NBA 챔피언 (2011)
파일:NBA 로고.svg NBA 올해의 수비수상 (2012)
파일:NBA-Allstar2021.png NBA 올스타 (2013)
파일:NBA 로고.svg 올-NBA 서드 팀(2012)
파일:NBA 로고.svg NBA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 (2013)

파일:NBA 로고.svg NBA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 2회 (2011, 2012)
파일:FIBA-Logo.png 2010 FIBA 세계 선수권 대회 터키 금메달[10]
파일:오륜기(여백X).svg 2012 런던 올림픽 금메달

6. 여담

댈러스 시절인 2014년 12월 3일,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와의 경기에서 챈들러는 볼이 아니라 농구화를 쳐내는 모습을 보이며 홈 팬들에게 큰 웃음을 주기도 했다. 상황을 설명하자면, 모리스 스페이츠가 챈들러를 벗겨내려고 풋워크를 하던 도중 신발이 벗겨지며 균형을 잃었다. 커리가 패스를 받은 뒤, 그 자리에 있던 신발을 코트 밖으로 걷어냈고, 플레이가 지속되었다. 매버릭스가 슛을 실패한 이후 수비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커리가 스페이츠에게 신발을 던져줬는데... 이걸 챈들러가 쳐내버린 것.

리그에서 손꼽히는 외모의 소유자로 준수한 외모에 더불어 몸매비율이 상당히 좋다. 부상당할 시엔 유니폼이 아닌 수트 차림으로 경기장에 나타날 때가 있는데, 패션감각도 상당히 괜찮은 듯.

뉴욕,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휴스턴, 피닉스 미국 상위 5개 대도시 연고를 모두 경험한 이력을 가졌다.[11] 짐 잭슨, 이쉬 스미스 등 유명 져니맨들도 해당 사항 없으며 MLB, NFL, NHL 다른 경쟁 종목에서도 찾기 힘든 특이 사례.

[1] 2009년 들어 성추행 혐의 등으로 물의를 빚은 바 있다. [2] 둘의 번호를 일렬로 놓으면 마이클 조던의 등번호 23이다. [3] 지금 모습으로 보면 상상이 안되겠지만 데뷔 당시 챈들러는 (고등학교 기준) 중거리 슈팅력이 있다는 것과 볼핸들링 능력 때문에 케빈 가넷처럼 다재다능한 선수가 되리라고 평가받았다. 또한 에디 커리는 강한 힘과 좋은 운동능력, 뛰어난 골밑득점 감각 때문에 모제스 말론(마찬가지로 고졸선수)같은 선수가 되리라고 기대받았다. 불스의 장미빛 전망대로라면 가넷+말론의 역대급 골밑이 탄생했겠지만 이 둘은 끝내 불스에서 기량이 만개하지 못했다. 그나마 챈들러는 수비형 센터로 뭔가 터질듯 하다가 뉴올리언스 이적 이후 수준급 빅맨으로 성장하여 나중엔 수비왕까지 오르지만, 커리는 수준급 득점력에도 불구하고 끔찍한 수준의 수비와 덩치가 아까운 리바운드 능력으로 인해 뉴욕 시절 먹튀로 전락하고 30세 조금 넘은 젊은 나이에 NBA를 완전히 떠나게 된다. [4] 루키 시즌부터 잘나가던 아마레는 챈들러를 포함한 01클래스의 고졸선수들이 망해서 고졸들의 위상이 떨어졌다고 욕했는데, 아이러니하게 동갑내기인 둘의 30대 이후를 비교하면 아마레는 11시즌까지만 잘하고 다음시즌 득점이 한시즌만에 8점이나 폭락하곤 부상과 재활을 반복하며 제대로 뛰지도 못하고어마어마한 먹튀가 된데다가 16시즌에 조기은퇴한 반면 챈들러는 12시즌에 올해의 수비수, 13년엔 생애 최초의 올스타가 되는 등 훨씬 훌륭한 커리어를 보냈다. 둘이 만 30세가 된 13시즌부터 아마레가 은퇴하던 16시즌까지 기록을 보면 분명 챈들러는 수비/아마레는 공격이 특기인 선수임에도 아마레의 장점인 득점력(10.6점)조차 챈들러(9.6점)와 비슷하다. [5] 짧은 시간동안 고질적인 문제였던 센터자리를 완벽하게 채워주었기 때문. 수비에선 더할 나위가 없었고 골밑을 단단히 걸어 잠그는 그의 용맹함에 이러한 별명이 붙었다. 아울러 모든 선수와도 그랬지만 팀내 에이스였던 노비츠키와의 조합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한명은 외곽에서 한명은 골밑에서. 이를 지휘하는 마에스트로 키드 [6] 챈들러가 뉴욕으로 이적했을 당시 댈러스 팬들은 별로 걱정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당시 팀에 브랜든 헤이우드라는 센터가 있었고 오프시즌 동안 라마 오돔까지 영입하면서 골밑을 강화했기 때문. 그러나 시즌이 흐르면서 챈들러는 포인트 가드들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태에서도 잘 버티며 닉스의 수호신이 되었지만 댈러스에서 브랜든 헤이우드는 어설픈 플레이로 일관했고 라마 오돔은 멘탈붕괴급의 기량을 선보여 댈러스 팬들을 속터지게 했다. 댈러스 팬들 : 챈들러만 있었어도!! ㅠㅠ [7] 당시 댈러스팬들은 그를 상당히 반겼는데 우승공신이기도 하거니와 타이슨 챈들러 또한 댈러스란 팀에 애착이 상당히 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타이슨 챈들러가 팀을 다시 떠날 당시 성적을 떠나 많은 팬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큐반: 유리몸이어서... [8] 조금만 타이밍이 늦었어도 골텐딩이 됐을 상황이었다 [9] 따지고보면 커리의 공격력만 떼놓고 봐도 골밑 득점감각은 좋지만 공격범위가 좁고 득점패턴이 단순하고, 당시 챈들러는 아직 수비왕급은 아닌데다 리바운드도 전성기 때조차 열개 언저리에서 놀았다. 두 선수 모두 공수 둘다 득점은 30점에 가까웠고, 수비왕이거나 이에 버금간 4대센터 (오닐 제외. 오닐은 수비력은 상대적으로 처지지만 공격력이 압도적이었다) 수준엔 못 미쳤다. 다만 00년대는 센터수준이 전반적으로 떨어졌기 때문에 오닐 다음으로 부각되던 야오밍이나 드와이트 하워드에는 충분히 비벼볼만 하거나 우세했을수도...물론 의미는 없지만. [10] 이 대회까지는 세계 선수권 대회로 불리다 2014년부터 월드컵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11] 그 외의 소속팀 연고인 댈러스, 샬럿 역시 전미 상위권 대도시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