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론조 모닝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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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론조 모닝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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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론조 모닝 (Alonzo Mourning) - 684개 (1992~19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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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애미 히트 기록 보유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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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론조 모닝 (Alonzo Mourning) - 1625개 (1995~2003, 2005~2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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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다 스틸 |
드웨인 웨이드 (Dwyane Wade) - 1492개 (2003~2016, 2018~2019) |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알론조 모닝 | |
헌액 연도 | 2014년 |
알론조 모닝의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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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 [[샬럿 호네츠|샬럿 호네츠]] 등번호 33번}}} | ||||||||||||||||||||||
케니 개티슨 (1989~19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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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론조 모닝 (1992~19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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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샤클포드 (19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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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애미 히트 등번호 33번 | |||||||||||||||||||||||
알렉 케슬러 (1990~19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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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론조 모닝 (1995~2003, 2005~2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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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 네츠 등번호 33번 | |||||||||||||||||||||||
스테판 마버리 (1999~2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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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론조 모닝 (2003~2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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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무어 (2006~2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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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마이애미 히트 No. 33 | |
<colcolor=#fff> 알론조 하딩 모닝 주니어 Alonzo Harding Mourning J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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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70년 2월 8일 ([age(1970-02-08)]세) |
버지니아주 체서피크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출신학교 | 조지타운 대학교 |
신장 | 206cm (6' 9") [1] |
체중 | 118kg (261 lbs) |
윙스팬 | 230cm (7' 6.5") |
포지션 | 센터 / 파워 포워드 |
드래프트 |
1992 NBA 드래프트 1라운드 2순위 샬럿 호네츠 지명 |
소속 팀 |
샬럿 호네츠 (1992~1995) 마이애미 히트 (1995~2003) 뉴저지 네츠 (2003~2004) 마이애미 히트 (2005~2008) |
등번호 | 33번 - 샬럿 / 마이애미 / 뉴저지 |
종교 | 개신교 |
S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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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90년대를 풍미한 NBA의 올스타급 센터 중 하나. 별명은 조(Zo).2. 커리어
2.1. NBA 입성 이전
부모님이 10대의 나이로 자신을 낳은지라 양육원에서 자라왔고, 자신이 원해서 부모의 곁으로 돌아왔지만 그 부모가 이혼하는 등 평탄하지 않은 유년기를 보냈다. 주변 친구들의 권유로 농구를 시작한 모닝은 연습에 몰두하며 농구 실력을 발전시켜 나갔고, 인디안 리버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는 이미 뛰어난 센터로서의 자질을 보이며 모교의 51연승을 이끌고, 2학년 때는 평균 25득점 15리바운드 12블록이라는 무시무시한 수치를 기록하며 유망주로 각광받았다.이후 자신의 우상인 패트릭 유잉의[2] 모교 조지타운 대학교에 진학해, 입학한 해에 블록왕 타이틀을 거머 쥐고, 졸업반이 되어서는 올 아메리칸에 선정되는 등 순탄대로를 걸었고, 1992년 NBA 드래프트에서 2순위로 지명되었다. (1순위는 샤킬 오닐.)
2.2. 샬럿 호네츠 시절
샬럿에서는 드래프트 동기생이기도 한 샤킬 오닐이라는 괴물의 임팩트에는 못미쳤지만, 첫해에 평균 21.0득점, 10.3리바운드, 3.47블록으로 맹활약하며 올 루키 퍼스트 팀에도 선정되고, 작년 1순위 래리 존슨과 단신가드 먹시 보그스, 슈터 델 커리[3]의 힘으로 첫 플레이오프를 일궈낸다. 모닝도 보스턴 셀틱스와의 1라운드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버저비터를 터트리며 2라운드행을 이끌정도로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비록 2라운드에서는 자신의 우상인 유잉의 닉스를 만나 탈락했지만. 이후로도 올스타급 빅맨으로 활약했다.
오닐의 임팩트에는 못미치더라도 매년 엘리트 센터의 상징인 평균 20득점-10리바운드 이상을 해 주었고, 깔끔한 외모와 호전적인 플레이 스타일로 주목받는 라이징 스타였다. 이런 모닝을 샬럿 입장에선 은퇴까지 함께 할 프랜차이즈 스타로 여겼고, 홈 구장 앞에 동상(!)까지 세워주며 그와 계속 가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러나 모닝은 3년차 시즌을 마치고 구단과 재계약 연봉 협상에서 이견이 발생하고, 이 차이를 좁히지 못하며 결국 구단 마찰을 빚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원인은 팀 동료 래리 존슨에게 당시로서는 엄청난 계약인 12년 8,400만달러의 계약을 안겨준 탓. 모닝은 래리 존슨 이상의 대우를 원했지만, 샬럿으로서는 그 요구를 들어줄래야 들어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2.3. 마이애미 히트 시절 part 1
결국 연봉 재계약 협상의 이견을 극복하지 못한 샬럿은 1995-96 시즌 개막을 단 하루(!) 앞둔 시점에서 모닝을 마이애미 히트로 트레이드 시켜버렸다. 이 댓가로 샬럿은 글렌 라이스, 맷 가이거 등을 받았다. 마이애미가 모닝을 영입할 수 있었던 배경은, 그 시즌부터 새로 감독을 맡은 팻 라일리가 강한 센터를 축으로 한 농구를 선호했기 때문.
재미있는 사실은 지금이야 마이애미에서 영구결번이 될 정도로 마이애미에서 커리어 하이를 찍은 모닝이지만, 당시만 해도 모닝의 마이애미 행은 팬들에게 매우 어색하게 받아들여졌다는 점이다. 팀의 간판스타가 시즌 개막을 단 하루 앞두고 트레이드 되어버린건 전무후무한 일인데다, 당시 신생팀 이미지를 벗지 못한건 마찬가지였어도 앞날이 창창해보였던 샬럿과 달리 마이애미는 루징 프랜차이즈로 인식되던 때여서 더더욱 그러했다.[4] 하지만 모닝은 명장 라일리의 지도와 더불어 이후 트레이드로 합류한 팀 하더웨이, PJ 브라운 등과 함께 팀을 플레이오프 막차로 이끄는데 성공했다. 물론 1라운드에서 72승 시카고에 시리즈스코어 0-3으로 스윕당하긴 했지만 히트가 이전의 약팀 이미지에서 플레이오프 컨텐더로 올라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모닝 또한 플레이스타일이 샬럿 시절보다 더욱 전투적으로 변했다. 샬럿 시절만 해도 깔끔한 용모와 플레이를 펼쳤던 그였지만, 히트 시절부터는 머리도 스킨 헤드로 밀고 코트에서 더욱 호전적으로 플레이하며 'Warrior(전사)'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이 시점.
그 다음 1996-97 시즌엔 61승을 거두면서 디비전 우승과 함께 컨퍼런스 파이널까지 진출하는 히트 구단 역사상 최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후 몇년간 컨퍼런스 최상위권에 위치하며 모닝 또한 1998-99 시즌엔 올 NBA 퍼스트팀 센터및 블록왕 2회, 2년 연속 수비왕 등극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이 시즌의 MVP는 유타 재즈의 칼 말론에게 돌아갔지만, 많은 사람들이 MVP는 모닝이 받았어야 했다는 말을 할 정도로 모닝에게 있어서는 최 전성기였던 시즌이었다.[5] 그러나 팀은 계속해서 플레이오프 탈락을 하며 고배를 마셨다. 특히 그 시점에서 라이벌리를 형성한 뉴욕 닉스에겐 늘 시드에서 앞서고도 3년 연속으로 업셋을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2.4. 마이애미 히트 시절 part 2
우승권 전력임에도 번번히 플옵에서 물을 먹던 히트는 밀레니엄에 시작되는 첫 시즌인 2000-01시즌을 앞두고 작정하고 전력보강을 했다. 당시 FA로 풀린 선수들 중 손꼽히던 포틀랜드의 브라이언 그랜트를 라이벌 뉴욕 닉스와의 쟁탈전 끝에 결국 영입하는데 성공했고, 에디 존스와 앤서니 메이슨이라는 준수한 주전급들을 잇달아 영입하며 순식간에 디펜딩 챔피언 LA 레이커스의 가장 강력한 대항마로 급부상했다.
그런데 이런 히트에 생각지도 못한 재앙이 닥쳐왔다. 시즌 개막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인 2000년 10월경 모닝은 신장 이상, 정확히 말하면 국소분절사구체경화증이라는 병이 있다는것이 알려지며 무기한 결장을 하게 되었다. 시즌이 막바지에 다른 3월 말에야 간신히 복귀했지만 13경기밖에 뛰지 못했고, 그나마도 주전으로 나온 경기는 3경기에 불과했을 정도로 모닝은 이 시즌 팀에 전혀 도움을 되지 못했다. 이 시즌 히트의 로스터가 워낙 좋았던 탓에 모닝 없이도 50승을 달성하며 3번 시드로 여유있게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긴 했지만, 모닝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던 탓에 우승 도전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나마도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만난 6번 시드 샬럿에 3게임 연속 15점차 이상의 대패로 스윕당하며 탈락하는 수모를 당했고, 3경기에 주전으로 출전했지만 몸 상태 때문에 전성기의 반도 못미치는 활약을 한 모닝에 비난의 화살이 쏠렸다.[6]
그나마 시즌 말미에 복귀했기 때문에 다음 시즌은 더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모닝은 병의 후유증으로 전성기의 기량을 거의 잃어버린 상태였다. 01-02시즌은 모처럼 75경기를 출전해 경기당 32.7분을 뛰면서 팀의 주전 센터로 활약했지만, 그가 기록한 성적은 평균 15.7득점 8.4리바운드 2.5블록이라는 전성기에 한참 못미치는 활약이었다. 그나마 올스타 주전 센터로 선발된 것이 모닝으로서는 작은 위안이 되었다.
이렇게나마도 계속 뛰어준다면 좋았겠지만 신장병이 악화된 탓에 모닝은 그 다음 시즌인 2002-03시즌을 단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한 채 통으로 날리게 된다. 마침 이 시즌이 히트와의 계약 마지막 해였지만, 히트로서는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모닝과 재계약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모닝은 히트와 결별하게 된다.
2.5. 네츠, 토론토 시절
그래도 한 시즌을 휴식한 탓에 몸 상태에 자신이 있었던지 2003-04 시즌을 앞두고 뉴저지 네츠와 4년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고작 12경기를 벤치 멤버로 뛰고 신장병이 다시 악화되어 결국 은퇴를 선언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기준으로 25년간 보지 못했던 사촌인 쿠퍼의 도움으로 신장이식수술을 받는데 성공하고[7] 성실하게 운동을 해낸 결과 이듬해인 2004-05시즌에는 다시 코트 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활약은 미미했고, 결국 빈스 카터를 데려오기 위한 패키지로 묶여 토론토 랩터스로 트레이드 되었다.
다만 여기서 모닝이 잡음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트레이드 된 토론토에서 뛰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당시 모닝은 신장병으로 경기를 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며 바이아웃을 요구했고, 토론토도 본인의 의사를 존중해 바이아웃을 시켜줬다. 그런데 그렇게 바이아웃 되고 얼마 후 히트와 베테랑 미니멈 계약을 맺고 쌩쌩하게 플레이했다. 결과적으로 신장병 때문이 아니라 토론토에서 뛰기 싫었다는 것을 거짓말로 모면하려 한 셈. 당시 모닝은 신장병 때문에 소속팀 뿐 아니라 타팀 팬들로부터도 많은 응원을 받던 상황이었으나, 이 사건 때문에 많은 팬들이 모닝에게 등을 돌렸고, 지금도 일부 토론토
사실 엄밀히 말하면 당시 토론토 랩터스의 국내 팬들이 적었기 때문에 묻힌 것에 가깝다. 국내 팬덤은 슈퍼스타 위주로 형성되는 경우가 많은데 2005년 당시는 랩터스의 최대 스타인 빈스 카터가 떠났고 아직 2년차였던 크리스 보시를 중심으로 한 팬덤이 생겨나기 전이기 때문에(보시 팬덤은 전성기 때도 큰 규모는 아니었다) 랩터스 팬덤이 엄청나게 줄어든 상황이었다. 이때 토론토의 국내 팬덤은 카터로 유입되었다가 팀 자체에 정이 생겨 꾸준히 응원하는 소수의 팬덤 정도 밖에 남지 않았었는데 이들의 목소리는 샤킬 오닐과 드웨인 웨이드에 힘입어 메이저 팬덤이 된 히트를 응원하는 목소리에 묻힐 수밖에 없었다.(히트 팬들 입장에선 프랜차이저가 헐값에 돌아왔으니 보물이다.) 카터 딜이 형편없긴 했지만 그 딜에서 그나마 가장 가치가 높은 선수인 모닝이 이탈한 것 때문에 랩터스는 전력 면에서 손해를 봤을 뿐 아니라, 바이아웃 과정에서 잔여 계약 1천7백만 달러 중 9백만달러를 물어주는 금전적인 손해까지 봐야했다. 또한 바이아웃으로 방출된 선수라 그의 연봉 540만 달러가 샐러리캡에, 그 다음 시즌엔 400만 달러가 잡혀서 샐러리캡 유동성을 깎아먹어 이중으로 손해를 본 건 덤.
랩터스 프런트가 밉다고 해도 어차피 태업하고 있기 때문에 보낼 수밖에 없었던 카터를 보내면서 대가를 제대로 못 얻어온 것과[10], 자기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거짓말하고 팀을 떠나서 막대한 손해를 입힌 선수 중 팬들 입장에선 누가 더 밉겠는가? 그러나 당시 인기팀인 히트에 헐값에 합류하고, 몸값에 걸맞지 않는 맹활약을 연이어 하던 모닝이 영웅이 되었기 때문에 극소수에 불과한 랩터스 팬덤은 자기 팀을 사보타주한 모닝에 대한 불만을 낼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11] 현재는 시간도 많이 지났고, 랩터스가 우승을 했기 때문에 원망하는 감정이 사그러든 것이지, 당시 모닝이 한 것은 분명히 도리를 지키지 못한 행위였다.
2.6. 마이애미 시절 part 3
마이애미에서는 모닝의 전성기 시절 라이벌 격이었던 샤킬 오닐이 팀의 주축이었다. 그러나 모닝은 전성기 때의 다혈질적인 모습보다는 팀의 분위기를 잡는 역할과 수비형 백업 센터[12]로서의 모습을 보이면서 2005-06 시즌엔 히트의 첫 우승을 이끄는 데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블록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였는데, 경기당 20분만 뛰고도 평균 2.7블록을 기록했다. 48분 환산 기준으로는 경기당 무려 6.4블록에 해당하는 엄청난 수치다.
다음 시즌인 2006-07 시즌은 오닐의 결장이 잦아지며 상당한 경기를 주전 센터로 뛰었고, 경기당 20.3분을 뛰며 평균 2.3블록이라는 여전히 어마어마한 블록으로 인사이드를 지켰다.
자신의 15번째 시즌인 2007-08시즌에도 변함없이 활약하던 와중, 12월 19일 애틀랜타 호크스 전에서 무릎 슬개건이 파열되는 중상으로 결국 시즌을 조기에 마무리하게 된다.
본인도 자신의 경력이 이렇게 끝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했기 때문에[13] 2008-09시즌에 돌아온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나, 결국 2009년 1월 22일 은퇴를 선언했다. 다음달인 2월 28일 모닝의 33번이 영구결번 되었고, 2014년에는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3. 플레이 스타일
키는 센터 치고는 다소 작은 편이나[14] 230cm에 육박하는 엄청난 윙스팬, 단단한 몸빵과 탁월한 순발력으로 골밑에서 경합하며 수비와 허슬 플레이로 이름을 날렸다.모닝의 제일 가는 특기는 블록 슛. 루키 시즌에 3.5 블록을 기록한데다 백투백 DPOY를 수상했을 땐 무려 3.9, 3.7 블록을 찍어냈을 정도로 블록 타이밍을 잡는 능력이 가히 천부적이었다. 블록에 대한 의욕이 대단히 높아서 덩크도 끝까지 막으려다가 인유어페이스를 당한 장면이 많지만, 그만큼 멋진 덩크 블록 장면도 많이 만들었다.[15]
대인 수비 역시 훌륭했다. 4대 센터와 같은 정상급 센터들과의 일기토에선 신장의 열세로 고전하기도 했지만[16] 대부분의 빅맨들은 힘이 무척이나 강하고 운동능력과 투지를 고루 갖춘 모닝에게 로우포스트에서 쉽사리 들이대지 못 했다. 더불어 빠른 발을 살린 헬핑 디펜스는 장인의 영역에 있었으며, 육중한 체형에 비해 가로수비도 괜찮아 수비 방면에서는 빠지는 부분이 거의 없었다.
공격보단 수비로 만든 명성이 더 높지만 평균 20득점을 여러차례 넘긴 공수겸장이었다. 제법 다채로운 포스트업 스킬과 정교한 훅 슛, 아마추어 시절부터 좋았던 미드레인지 점퍼로 인사이드와 중거리를 오가며 득점했고, 여기에 자유투를 뜯어내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어 한 시즌에 평균 10개 이상의 자유투를 시도한 적도 있었다. 단, 자유투 성공률은 7할을 약간 밑도는 수준이었다.
단점은 많이 부족했던 패싱 능력. 코트비전이나 피딩은 영 좋은 평가를 받지 못 했다. 추가로 명예의 전당급 센터치고는 리바운드 능력이 좀 떨어졌는데, 평균 10개 이상의 리바운드를 잡아낸 시즌이 네 시즌 뿐이며 커리어 평균 리바운드는 8.5개에 그친다. 다만 리바운드는 클래스 대비 아쉽다 정도였지 약점으로 지목되는 수준까진 아니었고, 기량과 출전시간이 급격히 하락하기 전까진 시즌 평균 9개 이상은 항상 유지했다.
투쟁심이 워낙 강해서 터프한 모습을 자주 노출했는데, 이는 모닝이 자기보다 큰 센터들을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 중 하나였지만 가끔씩 화가 지나칠 때가 있었다. 일례로 1997-98 시즌 플레이오프에서는 친정팀 동료였던 래리 존슨과 주먹질을 한 적이 있으며,[17] 데니스 로드맨과 싸움을 벌인 일도 유명하다. 당시 싸움이야 흔하다면 흔했지만 다혈질이라 흥분이 플레이를 망칠 때가 있었고 특히 상술한 로드맨과 만나면 유독 신경전에 말려들어 멘탈이 흔들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4. 수상 내역
수상 내역 |
NBA 챔피언 (2006) NBA 올스타 7회 (1994–1997, 2000–2002) 올-NBA 퍼스트 팀 (1999) 올-NBA 세컨드 팀 (2000) NBA 올해의 수비수상 2회 (1999, 2000) NBA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 2회 (1999, 2000) NBA 올해의 블록왕 2회 (1999, 2000) NBA 올-루키 퍼스트 팀 (1993) 1994 FIBA 세계 선수권 대회 캐나다 금메달 2000 시드니 올림픽 금메달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2014) |
5. 기타
코트 밖에서는 팬들에 대하여 항상 신사적인 매너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재단을 운영하며 자선사업과 봉사활동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을 정도로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준 선수이다.특히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보니 고아들에게도 많은 관심을 쏟는다고 한다. 현재는 마이애미 히트의 부사장을 지내고 있다.
1994년 중앙일보에 "알론조 모닝의 NBA 통신"이라는 칼럼을 연재한 적이 있다. 1화 그 당시 NBA의 인기가 절정이어서 가능했었던 기획인 듯.
4대 센터 시기의 가장 큰 피해자 중 하나이다. 알론조 모닝은 통산 올디펜스 팀 2회에 그쳤는데, 29세가 되어서야 첫 선정되었다. 그런데 딱 두번 있는 디펜스팀이 둘 다 퍼스트팀, 심지어 둘 다 수비왕이었다. 즉 22세에 데뷔한 선수가 커리어 첫 6시즌 동안은 디펜스 세컨팀에도 한 번 못 오르다가, 29세가 되어 갑자기 2년 연속 수비왕을 했다는 것.
이런 괴악한 현상은 그의 포지션 경쟁자였던 디켐베 무톰보, 하킴 올라주원, 데이비드 로빈슨이 셋 다 역대급 수비수였기 때문이다. 위에 언급된 6시즌간 96년의 게리 페이튼을 제외하곤 하킴과 무톰보가 전부 수비왕을 나눠먹었으며, 심지어 94-95시즌에는 하킴은 디펜스팀 탈락, 로빈슨이 퍼스트팀에 올랐는데 정작 수비왕인 무톰보는 세컨팀에 그치는 괴현상도 일어났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 하킴은 무톰보를 밀어내고 세컨팀에 올랐다. 즉 저 셋은 백중세의 수비력이었기에 매번 서로를 백지장 차이 하나로 밀고 밀리면서 수비팀을 독식한 것.
모닝의 수비력은 99시즌 이전에 이미 완성된 상태였다. 그는 루키시즌에 무려 3.5블록을 기록할 정도였고, 5년 연속 2.7개 이상 블록을 기록한 수비수였다. 심지어 그가 이끄는 96-97시즌 마이애미 히트는 실점 리그 3위, 페이스를 감안한 디펜스 레이팅은 리그 전체 1위인 최강의 수비팀이었다. 그런데 이 팀의 수비에이스인 모닝이 아닌, 그의 조력자이자 모닝보다 수비력이 확연히 한 수 아래였던 파워포워드 P.J. 브라운만 수비 세컨팀에 오르는데 그쳤다.
물론 99시즌 이전까지 모닝은 히트에서 70경기를 넘긴 적이 없을 정도로 은근히 부상이 잦은 선수였지만, 저 정도 이력이라면 58경기에 그친 98시즌과 60경기에 그친 94시즌을 제외하면 충분히 수비세컨팀 정도는 노려볼 만했다. 그런데도 무관에 그쳤다.
올NBA팀도 마찬가지로, 그는 99시즌 퍼스트팀, 00시즌 세컨팀이 올NBA팀 수상이력의 전부이다. 그런데 무관에 그친 6시즌동안 그의 평균 스탯은 21.1점 10.1리바운드 2.9블록 야투율 52.3%였고 올스타전에도 네번이나 나갔다. 올스타전에 못 나간 것은 결장이 잦은 98시즌과 루키시즌이던 92-93시즌 뿐인데, 92-93시즌 그의 스탯은 78경기 출장, 21점 10.3리바운드 3.5블록 야투율 51.1%였다.
93년도 올스타에 선정된 센터들은 수비왕이자 퍼스트팀 멤버/MVP 투표 2위 하킴 올라주원(26.1점 13리바운드 3.5어시스트 4.2블록 야투율 52.9%), 세컨팀 멤버이자 MVP투표 4위 패트릭 유잉(24.2점 12.1리바운드 2블록 야투율 50.3%), 서드팀 멤버 데이비드 로빈슨(23.4점 11.7리바운드 3.7어시스트 3.2블록 야투율 50.1%), ), 신인 동기이자 신인왕 샤킬 오닐 (23.4점 13.9리바운드 3.5블록 야투율 56.2%)로 딱 봐도 모닝보다 월등한 활약상이었다.
이 시즌에 20-10을 기록한 센터(빅맨이 아닌 순수 센터만이다)만 무려 6명으로, 모닝과 20.2점 10.2리바운드 4.4어시스트 야투율 57.1%를 기록한 브래드 도허티 둘 다 올스타에 뽑히지 못했으며, 13.8점 13리바운드 3.5블록 야투율 51%를 기록한 무톰보는 올NBA팀 투표 단 한장조차 못 얻었으며, 각각 3.5블록한 모닝과 무톰보, 오닐은 수비왕 투표에서 단 한표도 못 얻었다. 한마디로 웬만큼 잘해선 센터로 주목 받기 정말 힘든 시대였다.
본인이 팀을 박차고 나가기는 했으나 현재까지 샬럿 호네츠 구단의 최고의 선수로 거론되고 있다.[18] NBA 75주년 팀에는 들어가지 못했으나 디 애슬레틱 잡지 선정 75인에는 호네츠 전성기 멤버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들어갔다.[19]
[1]
맨발 기준 206cm (6' 9") / 착화 신장 208cm (6‘ 10“).
[2]
모닝의 33번 등번호도 유잉을 존경해서 달았다고 한다. 재밌는 우연은 모닝의 드래프트 동기이자 1순위 지명자인 샤킬 오닐 역시 유잉을 존경해 아마추어 시절 33번을 달았다는 것이다. 사실 유잉의 대학시절은 그야말로 어마무시했고 전국적인 인기를 자랑했기 때문에 그 때 딱 초~중학생 정도 나이였을 모닝이나 오닐의 우상이 되는 게 이상하지 않다. 게다가 당시 유잉은 젊은 센터들 중 가장 피지컬한 스타일이었기에(유잉이 점퍼위주의 다소 정적인 스타일이 된 건 프로에서 부상 때문에 몸이 많이 망가진 이후이다. 대학 시절 그는 전성기 드와이트 하워드나 초창기 샤킬 오닐처럼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더욱 인기를 끌었다.
[3]
스테판 커리와
세스 커리의 아버지로도 유명하다.
[4]
엄밀히 말하면 마이애미의 문제보다 모닝이 샬럿의 미래로 여겨졌던 것이 컸다. 당시 호네츠는 모닝,
래리 존슨,
먹시 보그스 트리오에 대한 기대감이 어찌나 컸던지 세 선수의 초상화를 도시 중심의 퍼스트 유니온 뱅크 건물에 거대한 벽화로 남길 정도였다. 웃긴 건 이 벽화가 그려진게 95년. 즉, 대대적으로 거대벽화까지 그리면서 "이 친구들은 우리의 미래입니다!!"라고 홍보했는데 불과 몇달만에 팀과 계약갖고 싸우다가 이적했다(…). 게다가 다음해인 96년엔 존슨이 닉스로, 97년에는 보그스까지 떠났으니... 그려진지 몇 달만에 어색해진 이 벽화의 처분 역시 논란이 되었는데, 팬 투표 결과 마스코트인 벌 "휴고"의 모습을 대신 그려넣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투표한 호네츠 팬들 중 일부는 "최소한 마스코트는 절대 떠날 일이 없겠지..."라고 했는데, 운명의 장난인지 10년도 안되어 휴고 역시 팀 전체와 함께 뉴올리언즈로 떠났다(…). 결국엔 돌아왔지만...
[5]
99시즌은 유독 절대강자가 없던 시즌이었다. 그 전까지는 시카고 불스의 마이클 조던이 확고부동한 1인자였고, 그가 MVP를 뺏긴 97시즌의 경우 유타가 역대 최고성적 (64승)을 거뒀고 조던의 장기집권을 우려한 이탈표가 컸다. (실제로 이때 MVP는 역대 가장 논란이 많은 케이스이기도 하다. 점수차이도 적었고) 그러나 99시즌은 동부에서 3팀이 최고 승률 타이 (33승)를 기록했고 서부에서도 유타와 스퍼스가 37승으로 타이를 기록할 정도로 확 돋보이는 팀이 없었다. 이 상황에서 아직 2년차에 불과한 던컨이나 공격력이 최정상급 선수치곤 탁월하지 않은 데다 팀성적도 좀 애매한 모닝 대신 입증된 레전드인 칼 말론이 수상한 것이다. 실제로 이때 말론은 1위표 44장, 2위 모닝이 36표, 3위 던컨이 30표를 받았는데, NBA에서 MVP는 수상자가 1위표의 과반 이상을 득표하는게 일반적인 것을 감안하면 이때 말론은 표를 상당히 적게 받은 것이며, 모닝이나 던컨은 아깝게 상을 놓쳤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모닝은 이때가 유일한 수상 기회였기 때문에 더욱 아까운 케이스.
[6]
이 시리즈에서 30.3분을 뛰면서 평균 11.7득점 5.3리바운드 2.2블록을 기록하며 부진했다.
[7]
이때 모닝에게 신장을 주기 위해 적합성 검사를 받은 사람 중에는 그의 절친한 선배
패트릭 유잉도 있었다.
[8]
트레이드된 선수가 해당 팀에서 뛰는 것을 거부할 경우 소속팀이 더 많은 벌금을 물릴 재량권을 갖는다는 조항이다.
[9]
하지만 모닝의 태도보다는
빈스 카터를 트레이드하고 거의 아무것도 못 받아온 거에 대해서 토론토 프런트에 더 분노한 게 많다. 또한 지금은 빈스 카터도 용서해주고 팀도 창단 첫 파이널 우승을 차지하는 등 잘나가는 마당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힘든 시기부터 함께하지 않거나,
1990년대 후반 이후에 태어난 최근에 유입된 랩터스 팬들은 모닝이 트레이드돼서 저런 짓을 했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많다.
[10]
어느 시장이나 마찬가지지만 급하게 처분해야하는 자산은 원래 가치에 비해 헐값에 처분할 수밖에 없다.
[11]
실제로 당시 모 커뮤니티에선 04-05시즌 연봉을 기부했다는 모닝 기사에 수십개의 칭송댓글이 달렸으나, "떼 써서 수백만 달러 꽁으로 받아내고 수십만 달러로 생색낸다"는 댓글은 집중포화를 맞았다. 물론 어쨌거나 좋은 일을 한 사람에게 비아냥거리는 것은 좋지 않으나, 그만큼 모닝에 대한 쓴소리를 하면 곧장 공격을 받곤 했다. 히트 팬들은 랩터스 팬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이 많았으며, 히트 팬들에게 모닝은 영웅이었기 때문. 참고로 당시 모닝이 기부한 것은 (잔여 계약 바이아웃으로 뛰지 않고 토론토에서 받아낸 연봉과 별개로) 새로 체결한 베테랑 미니멈 연봉 백만달러 중 히트에서 지불한 30만 달러였다.
[12]
시즌 중반에 모닝의 히트 합류가 확정되자 많은 팬들은 1992년 드래프트 1순위-2순위의 막강한 트윈타워를 기대했으나, 모닝과 오닐이 함께 뛸 때는 심히 좋지 않은 효율을 보였다. 이론적으로 보면 키가 센터치고 작지만 기동력이 뛰어나고 점프슛이 뛰어난 모닝이
파워 포워드로 뛰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었지만 문제는 모닝이 커리어 내내 센터로만 뛰어왔다는 것과 샤킬 오닐은 느린 발과 아예 없는 중거리 슛으로 인해 센터 외 포지션 소화가 아예 불가능한 선수였다는 것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오닐에게 파워 포워드를 시키지 않는다는 게 당연하니 넘어가고, 모닝의 경우 커리어 초반의 래리 존슨이나 중후반의 PJ 브라운, 브라이언 그랜트 등은 모두 중거리 슛이 가능하고 행동반경이 비교적 넓은 순수 포워드였다(센터겸비가 아니란 말) 이러니 모닝은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순수센터에 가깝게 자리를 잡았다. 실제로 바스켓볼 레퍼런스(http://www.basketball-reference.com/players/m/mournal01.html)의 play-by-play 항목을 보면 모닝이 파워 포워드로 가장 많이 뛴 시즌은 뉴저지 시절인 04, 05시즌으로 그의 커리어에서 가장 위력이 약했던 때였다. 센터 둘이 뛸 때는 둘 다 골밑에만 있으면 상상 이상으로 공수가 뻑뻑해지기 때문에 한 사람이
파워 포워드 역할을 맡아줘야 하는데, 두 선수 모두 이런 역할을 할 수 없었으니 문제였다. 이 때문에 두 선수는 같이 뛸 때가 거의 없었다.
[13]
참고로 찰스 바클리의 경우 1999-00시즌을 치르던 중 무릎 인대 파열이라는 중상을 당해 어이없이 은퇴할 위기에 놓였지만, 이렇게 경력을 끝낼 순 없다며 초인적인 노력으로 재활끝에 시즌 막판 기어이 복귀하여 은퇴 경기를 치른 사례가 있었다.
[14]
맨발기준 6피트 9인치(206cm)로 스카우터들에게는 7피트(213cm)로 속였다고 한다.
[15]
원래 인유어페이스를 유독 많이 당한 선수는 수비를 못 하는 선수가 아니라 오히려 덩크에도 적극적으로 블록을 시도할 정도로 열정적인 수비수인 경우가 많다.
[16]
오닐과 올라주원은 로우포스트에서 1대1로 제어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한 선수들이었고, 로빈슨은 4대 센터 중 제일 큰데 제일 빠르기까지 해서 보통 센터 매치업에서 키는 밀려도 발은 안 밀리던 모닝이 상당히 까다로워하곤 했다. 또한 유잉의 경우 특유의 타점 높은 페이드어웨이와 훅 슛을 정말 잘 써먹어서 유잉보다 작은 선수가 유잉을 막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17]
하더웨이를 위해 스크린을 걸어주던 모닝이 스크린에 걸린 존슨을 밀었는데, 존슨이 이후 박스아웃하는 과정에서 모닝을 밀자 서로 밀치다가 결국 주먹을 휘두르게 된 것. 웃지못할 해프닝이 있는데 둘이 싸움이 붙자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단신(175cm)인 뉴욕의 제프 밴 건디 감독이 모닝을 막기 위해 달려들다가 모닝이 휘두르는 눈먼 팔에 밀쳐져 바닥에 내팽개쳐졌고, 모닝에 다리에 필사적으로 메달리는 처참한 모습을 연출했다. 흥분해 밴건디 감독의 존재도 모르고 싸우다가 '이건 또 뭐야'라는 듯 바닥을 보고 밴건디를 떼어내려는 모닝과 밴건디를 구출해(?) 가는
찰스 오클리의 모습이 압권. 밴건디는 이에 대해 훗날 팟캐스트에서 "왜 범죄자들이 '순간적으로 정신이 나갔었다(temporary insanity)'고 주장하는지 알겠다"고 했으며, 이후 자신의 모습을 영상으로 확인했을때 스스로가 "완전 멍청이(absolute fool)"처럼 보였다고 회고했다.
[18]
모닝이 최고의 선수로 거론되는 구단은 2004년 신규 창단된 후에 2014년 연고이전했던
뉴올리언스 호네츠로부터 1988년~2002년의 역사를 되돌려받은 샬럿 밥캣츠-샬럿 호네츠를 의미한다. 뉴올리언스로 이전한 호네츠의 경우에는
크리스 폴과
앤서니 데이비스 등이 최고의 선수를 다투고 있다.
[19]
로버트 패리시와
드와이트 하워드는 75인에 선정되었으나 두 선수는 호네츠에서 뛴 기간이 짧다. 감독으로 선정된
래리 브라운 역시 밥캣츠 시절 감독으로서 몇 시즌 팀을 맡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