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이시 맥그레이디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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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st :
2001-02 ·
2002-03 2nd : 2000-01 · 2003-04 · 2006-07 3rd : 2004-05 · 2007-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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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트레이시 맥그레이디 | |
헌액 연도 | 201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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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맥그레이디 Tracy McGrad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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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트레이시 라마 맥그레이디 주니어 Tracy Lamer McGrady Jr. |
출생 | 1979년 5월 24일 ([age(1979-05-24)]세) |
플로리다 주 바토우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오번데일 고등학교 |
신장 | 203cm (6' 8")[1][2] |
체중 | 102kg (225 lbs) |
윙스팬 | 219cm (7' 2.25") |
후원사 | 아디다스 |
포지션 | 슈팅 가드 / 스몰 포워드 |
드래프트 |
1997 NBA 드래프트 1라운드 9순위 토론토 랩터스 지명 |
소속 구단 |
토론토 랩터스 (1997~2000) 올랜도 매직 (2000~2004) 휴스턴 로키츠 (2004~2010) 뉴욕 닉스 (2010)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2010~2011) 애틀랜타 호크스 (2011~2012) 칭다오 더블스타 이글스 (2012~2013) 샌안토니오 스퍼스 (2013) 슈가랜드 스키터스 (2014)[3] |
등번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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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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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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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NBA의 농구 선수. 올랜도 매직 시절에는 동티맥 / 서코비라 불릴 정도로 전성기를 누렸으나, 계속된 부상과 워크에틱 문제로 전성기가 길지 못했던 비운의 선수이다.
화려하고 간결한 플레이스타일과 멋있는 이름을 가지고 있어 시그니처 농구화가 출시될 만큼 인기가 엄청났다. 별명은 자신의 이름과 성을 조합한 T-MAC.
2. NBA 드래프트 이전
플로리다 발토 태생인 맥그레이디는 원래는 야구선수가 꿈이었다. 집은 매우 가난했지만 그는 매일 공을 던지며, 가난과 배고픔의 설움을 달랬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 우연히 TV에서 페니 하더웨이의 경기를 보며 농구선수로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오번데일 고등학교로 진학해서는 학교의 에이스로 활약했으나, 학교 교사와의 갈등으로 인해 마운트 지온 고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된다. 마운트 지온 고등학교에서 활약했을 당시 97년 노스캐롤라이나 주에서 뛰고 있는 고교선수중 최고라는 평을 받았고, 많은 대학에서 그를 탐냈지만, 가정의 생계를 위해서 맥그레이디는 NBA 드래프트에 참가신청을 낸다.3. NBA 커리어
3.1. 토론토 랩터스
맥그레이디는 97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9순위로 토론토에 지명을 받게 된다. 팬들과 전문가들은 당시 팀의 GM이었던 아이재이야 토마스의 선택에 관심을 드러냈는데, 토마스는 인터뷰에서 "아직 맥그레이디는 모든것이 부족하지만 몇년후에는 엄청난 선수로 성장할 것."이라고 자신의 소견을 밝혔다.
하지만 루키시즌에 그는 많은 출전시간을 받지 못했다. 아무리 고등학교에서 날라다니는 선수였다고 해도 프로는 엄연히 다른 무대이고, 당시 팀의 백코트 주전중 하나인 덕 크리스티가 잘해주었기 때문에 맥그레이디를 굳이 종용할 이유는 없어보였다. 맥그레이디는 뛰지 못한다는 생각에 오죽했으면 "농구가 재미없다."라고 발언했을 정도. 그러나 당시 팀 감독이었던 다렐 워커가 성적부진으로 해고되고 부치 카터가 부임하면서 맥그레이디도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부치 카터는 맥그레이디의 성장을 위해서 물심양면으로 그를 도왔고, 맥그레이디를 위해 자유투 코치와 인터뷰 카운슬러까지 붙여줄 정도였으니. 티맥 역시 부치 카터를 삼촌이라고 부르면서 많이 따랐다고 한다. 물론 부치 카터도 성적부진으로 해고되면서 둘의 인연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렇게 맥그레이디는 조금씩 성장해 갔고, 99-00시즌 종료 2달전에는 붙박이 주전으로서 활약했다. 플레이오프에서도 3경기동안 두자리 수 득점을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했다. 하지만 당시 토론토는 누가 뭐래도 빈스 카터의 팀이었다. 사촌인 빈스 카터의 그늘에서 벗어나기로 마음먹은 그는 3년간의 토론토 생활을 끝내고 올랜도 매직으로 이적한다. 맥그레이디가 토론토에서 보낸 시간은 비록 루키계약의 짧은 3시즌에 불과했지만, 카터가 들어은 98-99시즌 부터 엄청난 덩크와 하이라이트를 만들어내며 주목받는 라이징 스타였다.
3.2. 올랜도 매직
올랜도 매직은 99-00시즌에 팀 베스트5중 3명이 드래프트도 받지 못한 선수들로 이뤄진 그야말로 외인구단이었지만 닥 리버스 감독의 형님 리더십과 뛰어난 지휘능력으로 5할승률을 기록해 작은 돌풍을 일으켰다. 올랜도는 당시 FA 최대어인 팀 던컨과 그랜트 힐을 동시에 영입해 단숨에 챔피언십 컨텐더로 뛰어오르려 했지만, 던컨이 스퍼스에 잔류하는 바람에 힐을 잡고 플랜 B로 맥그레이디를 영입했다. 마이클 조던- 스카티 피펜에 버금갈 슈퍼 듀오의 탄생을 기대한 팬들은 이 둘이 펼칠 콤비플레이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지만, 그랜트 힐이 발목부상으로 불과 4게임만 뛰고 시즌 전체를 결장하는 악재가 닥쳤다. 하지만 맥그레이디는 그동안 참아왔던 것을 한꺼번에 폭발시키며 슈퍼스타로 단숨에 발돋움했고 올랜도를 플레이오프로 이끌었다. 77경기에 출전해 무려 평균 26.8득점 7.5리바운드 4.6어시스트, 스틸과 블락을 각각 1.5씩 기록하는 올라운더급 스탯을 찍었으며, 이 시즌 맥그레이디는 기량발전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힐-맥그레이디의 슈퍼 듀오는 힐의 계속된 부상으로 제대로 가동되지 못했으며, 맥그레이디가 힘겹게 혼자 팀을 이끌어가는 상황은 다음 시즌도, 그 다음 시즌도 계속되었다. 23살이 된 맥그레이디는 02-03시즌에는 경기당 32득점에 팀내 카테고리 전부문 1위, PER 30.3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치를 기록하고 득점왕까지 차지하면서, 당시 기준 역대 최연소 득점왕 타이틀도 손에 넣었다. 그리고 그해 플레이오프에는 디트로이트를 3승 1패로 탈락직전까지 몰고 갔으나[4] 디트로이트가 천시 빌럽스를 중심으로 공격 맞불을 놓는 바람에 후반부에 가서는 방전되어 원맨팀의 한계를 드러내며 내리 3연패하여 탈락하고 말았다.
2003년 여름에는 FIBA 아메리카 선수권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해서 미국팀의 금메달에 기여하기도 했다.[5]
03-04시즌에는 커리어 최고득점인 62득점을 기록하면서 다시 득점왕에 올랐지만, 당시 팀의 상태는 장난이 아니었고, 개막전 승리 후 내리 19연패를 기록하는 매우 막장상태였다. 플레이오프는 당연히 남의 잔치. 이때 팀에게 서서히 애정이 식어가던 중 휴스턴과 올랜도의 트레이드로 맥그레이디는 휴스턴 로키츠로 이적하게 된다.
03-04시즌 종료 후 매직은 1순위 지명권을 획득하여 04년 드래프트에서 드와이트 하워드를 뽑았으나 당시 맥그레이디는 이런 결정에 상당히 실망했다. 당장 강팀전력을 원했던 티맥은 자신과 같은 고졸출신 보다는 NCAA를 평정하며 검증된 에메카 오카포[6]와 같이 뛰고 싶어했고 결국 휴스턴으로 프랜시스[7], 커티노 모블리와 트레이드 되었다. 하지만 하워드는 루키 시즌부터 좋은 활약을 펼쳤으니 맥그레이디의 성급함이 본인 커리어에 큰 악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위 올랜도 시절은 그야말로 맥그레이디의 최전성기 시절이었다. NBA 최고의 스윙맨으로 그때 당시 포스는 장난이 아니었으나 그랜트 힐[8]의 기약없는 부상결장 때문에 거의 팀에서 원맨쇼를 하다보니 온갖 잔부상을 많이 당해야 했다.
다만 설사 04-05시즌 팀에 잔류하여 하워드와 원투 펀치를 구성했고 매직에 계속 잔류 했어도 동부 결승까지는 결국 무리였을 것이다. 실력과 스타성이야 리그 최고였어도 03-04시즌 티맥이 보여준 리더십은 그야말로 최악이였다. 팀 성적이 바닥을 치자 시즌 초반 부터 불평, 불만을 입을 달고 다녔고 정규시즌 내내 이런 모습은 전혀 바뀌지 않았고 팀 분위기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되었다. 따라서 매직 말년 시즌 보인 하워드의 행보 및 티맥과 비슷한 공 점유율을 가진 코비, 하든 등 흔히 말하는 에이스류 선수들과 그리 좋지 못한 호흡을 보인 하워드와 원투 펀치를 보일리 없을 것이고 무엇보다 하워드 역시 본인이 에이스이자 주목을 원하는 기질이 넘치는 선수이기에 이 조합은 그 결과가 분명 좋지 않았을 것 이다.[9]
3.3. 휴스턴 로키츠
T.Mac Time
휴스턴 로키츠는
야오밍이 버티고 있는 팀이었다. 로키츠는 맥그레이디가
야오밍과 함께 호흡다음은 당시 경기 해설자 마브 알버트와 스티브 커의 유명한 해설장면이다.
"
Rockets looking for a quick shot.
Bowen is all over, Mcgrady, foul was picked up..! And! (Kerr:Oh!!!)
It's a four point play! Tracy Mcgrady from Downtown!"
" 휴스턴에겐 남은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빨리 3점을 던지려고 하는데요... 보웬이 야오밍의 스크린에 걸렸고, 맥그레이디가 던컨의 파울을 얻고 던집니다...! 들어갔어요!!!!! (스티브 커: 어어!!!) 4점 플레이! 이럴 수가! 트레이시 맥그레이디가 3점을 터뜨립니다!"
SAS 78 : 74 HOU,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24.3초.
" 휴스턴에겐 남은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빨리 3점을 던지려고 하는데요... 보웬이 야오밍의 스크린에 걸렸고, 맥그레이디가 던컨의 파울을 얻고 던집니다...! 들어갔어요!!!!! (스티브 커: 어어!!!) 4점 플레이! 이럴 수가! 트레이시 맥그레이디가 3점을 터뜨립니다!"
SAS 78 : 74 HOU,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24.3초.
Brent Barry gets it in, Devin brown lost it!
Here comes Mcgrady, No timeouts remaining, Mcgrady, for the win! Yes!
브렌트 베리, 안쪽으로(던졌습니다), 데빈 브라운, 놓칩니다! 맥그레이디! 남은 타임아웃은 없습니다! 트레이시 맥그레이디, 휴스턴 로키츠의 승리를 위해! 들어갔습니다!
경기 종료, SAS 80 : 81 HOU, 휴스턴 로키츠 승리.
이 경기에서는 35초를 남겨두고 스퍼스가 거의 10점 정도 앞서고 있었다.
끝까지 물고늘어지는, 그렇게 함으로서 말도 안되는 점수차를 1994년 한 전설적인 선수가 포기하지 않고 혼자서 뒤집은 전례가 있는 플레이오프라면 혹시 또 몰라도, 정규시즌 게임에서 이 정도 점수차면 사실상 거의 끝난 경기라 해설자인 마브 알버트[10]와
스티브 커는 마무리멘트를 하고 있었고 관중들도 절반 정도가 경기장을 떠난 상황이었다.[11] 그런데 갑작스레 벌어진 이 사태(?) 때문에 지루해 하던 관중들이 흥분하고, 나가던 사람들은 들어와서 서서 구경하고 있고, 해설자까지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커는 미리 나가신 그 많은 분들은 지금 차안에서 (중계를 들으며) '우리가 무슨 짓을 한거지??'라도 하실 겁니다라며 미리 퇴장한 팬들의 마음에 비수를(?) 꽂았다.Here comes Mcgrady, No timeouts remaining, Mcgrady, for the win! Yes!
브렌트 베리, 안쪽으로(던졌습니다), 데빈 브라운, 놓칩니다! 맥그레이디! 남은 타임아웃은 없습니다! 트레이시 맥그레이디, 휴스턴 로키츠의 승리를 위해! 들어갔습니다!
경기 종료, SAS 80 : 81 HOU, 휴스턴 로키츠 승리.
이게 바로 그 플레이. 사실 저 티맥 타임이 펼쳐지기전까지 티맥의 스탯은 야투 8/25에 3점 1/8로 좋지 않은 상태였던게 아이러니.[12] 또한 상대팀 샌 안토니오는 수비도 최선을 다했고[13] 파울작전으로 얻은 자유투들을 데빈 브라운과 팀 던컨이 4개 모두 착실하게 성공시키면서 딱히 잘못한게 없었다. 막판 그 데빈 브라운의 결정적인 턴오버를 제외하곤... 그 실책만 없었더라도 평소에 식스맨으로 주로 나오다 이날 20점에 자유투 8개를 모두 성공시킨 데빈 브라운의 그날 활약은 던컨에 버금가는 활약이었다. 하지만 공격에 실패했어도 시간을 2초만 더 끌었어도 이겼을 상황에서 무리하게 공격하다가 그 2초를 버티지 못해 그 턴오버로 명경기의 희생양이자 역적이 되어버렸다.
07-08시즌에는 팀 22연승의 선봉장이었다. 이때 당시 휴스턴은 야오밍이 시즌아웃을 당한 상태였고, 티맥 역시 부상에서 자유로운 몸이 아니었던 탓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맥그레이디는 팀의 22연승에 중심에 있으면서 맹활약했다. 저 연승기간동안 거의 혹사에 가까울 정도로 많은 시간을 뛰었고 어떤 경기에서는 아예 쉬지도 못하는 때도 있었다.
하지만 휴스턴에서도 맥그레이디는 플레이오프 1라운드 이상을 경험하지 못했다. 불운이라고 하면 또 불운. 여기에 자신이 시즌아웃 당한 08-09시즌에는 팀이 2라운드 진출에 성공한것도 본인에게는 그리 좋게만 보일일도 아닌 듯 보인다.
얼마나 무릎이 좋지 않았는지 그는 마이크로 프랙쳐 수술을 받기에 이른다. 이 수술은 무릎연골의 재생을 돕는 수술인데, 이 수술을 받은 사람으로는 페니 하더웨이가 있는데 하지만 하더웨이는 당시 이 수술을 받고도 기량을 회복하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아마레 스타더마이어의 경우 이 수술을 받고도 2016년까지 nba에서 뛰었다.
이 수술을 받고 재활을 통해 09-10시즌에 복귀를 했으나 당시 감독이었던 릭 아델만은 맥그레이디의 건강에 의구심을 품고 그에게 많은 출전시간을 주지 않았다. 6경기동안 10분도 안되는 출전시간이었으니. 맥그레이디는 팀에 불만을 느꼈고, 휴스턴 역시 맥그레이디의 2천3백만 달러에 달하는 만기계약을 처분하고 싶어했다. 그때 뉴욕이 협상을 제의했고, 휴스턴은 맥그레이디를 트레이드 했다.
3.4. 뉴욕 닉스
뉴욕 닉스 팬들은 오랜만에 슈퍼스타급의 선수가 온 것을 환영했다. 맥그레이디는 2010년 2월10일에 뉴욕 닉스 소속으로서 데뷔전을 치렀다. 당시는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의 홈경기였는데, 관중들은 "We Want T-Mac"이라고 외치며 그를 환영해주었다. 이 경기에서 티맥은 32분간 뛰면서, 26득점 4리바운드 5어시스트를 기록하면서 오랜만에 전성기 시절에 버금가는 활약을 보여주었다.
간혹 20득점을 올리기도 했지만 오랜기간 경기를 뛰지 않아서 실전감각이 무뎌졌는지 전반적으로는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관중동원능력은 여전했으나, 뉴욕 닉스는 애초에 티맥을 오래 붙들 마음도 없었다. 당시 뉴욕 닉스의 목적은 오로지 닥치고 르브론 제임스 모셔오기 뿐이었고, 티맥은 그저 르브론 영입전에 뛰어들기 위해 샐러리를 비우기 위한 만기계약 카드일 뿐이었다.
시즌 종료후 FA가 되었지만 이미 예전의 기량을 보여줄수가 없게 된 티맥에 관심을 보이는 팀은 없었다. 시카고 불스에서 그에게 1년단기 계약에 백업 역할을 제안했을때 티맥을 이를 거부했다. 하지만 아쉬울게 없다는 듯 시카고 불스는 협상을 종료했고, 그 후 어느팀도 티맥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상황이 급박했는지 맥그레이디는 스스로 여러팀을 돌아다니며 워크아웃을 봐야하는 상황까지 몰렸다. 이 워크아웃이라는 것이 일반직장으로 얘기하면 면접시험과도 같은것인데, 맥그레이디가 굴욕을 감수하고 이걸 했던것. 그래도 NBA구단측에서 별로 반응이 없다가 간신히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와 1년 계약을 맺게 된다.
3.5.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유니폼을 입은 티맥.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서의 티맥은 과거 동부지구를 개발살냈던 포스의 그 티맥이 아니었다. 하지만 짬밥을 콧구멍으로 먹은것은 아니었는지, 그 특유의 농구센스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주로 백업 포인트 가드 및 주전 슈팅 가드로 뛰면서 게임 리딩과 볼 배급을 맡으면서 디트로이트의 공격을 이끌었다. 그리고 몇몇경기에서는 덩크슛도 성공시키면서 어느정도 예전의 향수를 불러일으킬만한 활약을 하긴했다.
하지만 여전히 부상의 여파는 남았는지 디트로이트 시절에도 10게임 정도를 결장했고, 당시 디트로이트의 상황은 티맥이 그래도 어느정도 뛸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것이 팀의 백코트가 부상병동으로서 그야말로 제대로 돌아간 적이 거의 없었다. 올해 디트로이트와의 계약이 종료되었는데, 과연 그가 다른팀의 부름을 받을수 있을지 팬들이 주목하고 있다.
3.6. 애틀란타 호크스
한동안 조용하다가 애틀란타 호크스와 1년 계약을 맺었다는 뉴스가 나왔다.애틀란타 호크스 시절.
디트로이트 시절과 비슷한 역할이었으나 호크스에서 그의 역할은 벤치 멤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고 결국 커리어를 통틀어 가장 저조한 성적을 남겼다. 자유계약선수가 되었으나 전과 마찬가지로 어느팀도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결국 티맥은 방향을 틀어 중국프로리그팀인 칭다오 더블스타 이글스와 1년계약을 맺게 되었다.
3.7. 칭다오 더블스타 이글스
CBA 칭다오 더블스타 이글스에서의 티맥
2012-2013시즌에 31.6분이라는 그리 길지않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32경기(1경기는 출장정지)평균 25점. 7.2 리바운드, 5.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건재한 모습을 어느정도는 보여주었지만 소속팀 칭다오는 해당시즌에 8승 24패로 최하위에 머무르고 말았다.
3.8. 샌안토니오 스퍼스
그리고 2월 17일 이후에도 무적선수로 있다가 샌안토니오 스퍼스와 계약했다는 소식이 발표되면서 1년만에 NBA에 복귀하게 되었다. 규정상 3월 1일까지 NBA와 계약한 적이 없는 외국리그 선수는 플레이오프 출전이 가능하기 때문에 카와이 레너드의 백업 스몰 포워드로 플레이오프 출전하게 되었는데, 가비지 타임에나 나와서 득점 없이 시간만 때우는 신세. 그래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1라운드는 돌파했고, 팀은 계속 승승장구하여 드디어 커리어 처음으로
4. 코비 브라이언트와의 관계
“The guy that always gave me the most problems was Tracy McGrady. He had all the skills and all the athleticism, but he was 6’9 and he was very tough to figure out.”
“항상 나에게 가장 많은 문제를 준 사람은 트레이시 맥그레이디였습니다. 그는 모든 기술과 엄청난 운동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키가 6피트 9인치이었고 파악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항상 나에게 가장 많은 문제를 준 사람은 트레이시 맥그레이디였습니다. 그는 모든 기술과 엄청난 운동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키가 6피트 9인치이었고 파악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코비 브라이언트는 2013년 8월 TV 토크쇼 미국의 코미디언 지미 키멜과의 인터뷰에서는 자신이 가장 상대하기 힘들었던 선수로 트레이시 맥그레이디를 언급했다. "206cm(공식 신장은 203cm)의 키로 엄청난 운동능력과 모든 기술을 다 갖췄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 그것도 스테판 마버리, 길버트 아레나스, 앨런 아이버슨, 카멜로 앤서니, 케빈 듀란트를 모두 언급하면서 마지막에 제일 상대하기 힘들었던 선수라고 맥그레이디라고 언급을 했다.
위의 동영상 29:44부터 31:05에 나온다. 한국어로 말하듯이 번역하면 "앨런 아이버슨이 정말 막기 어려웠다. 필라델피아에서 날 상대로 44점을 넣었던 경기가 생각난다. 스테판 마버리도 나와 할 때 50점을 넣었고, 길버트 아레나스는 60점을 넣은 적도 있었다. 카멜로 앤서니는 항상 막기 어렵다. 케빈 듀란트도 힘들다. 정말 많은 선수들이 있었다 그런데 내게 정말로 가장 큰 문제는 안겼던 선수는 트레이시 맥그레이디였다. 그는 모든 기술을 다 갖추고 있는데다 엄청난 운동능력까지 다 좋았다. 키도 206cm로 커서 정말 곤란했다."
그리고 2013년에 은퇴한 맥그레이디 역시 이에 화답하듯 자신이 가장 상대하기 어려웠던 선수로 코비를 언급했다. 그만큼 이 둘은 2000년대 당시 '서코비 동티맥'이라고 엮이며 서로가 서로에게 자극받는 관계에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NBA 데뷔 전부터 친한 친구였기에 2020년 코비가 사망했을 때 티맥이 인터뷰에서 슬피 우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코비 브라이언트는 NBA 선수들 사진을 찍던 Andrew D. Bernstein과 함께 그의 NBA 선수시절 여러 사진과 글로 "The Mamba Mentality: How I Play" (맘바의 정신: 어떻게 내가 경기하나) 책을 2013년에 출판했는데 그 책을 보면 브라이언트가 선수시절 상대하던 선수들이 있는데 트레이시 맥그레이디도 있다. 챕터 이름은 "Tracy McGrady Had Some Magic to his Game." 한글로 번역하면 "트레이시 맥그레이디는 그의 경기에 마술을 가졌었다."
5. 플레이 스타일
로케츠는 퀵샷을 노리고 있고… 보웬이 딱 달라붙어있고… 맥그레이디, 파울을 얻어내는데요…! 4점 플레이 기회를 만들어냅니다! 맥그레이디가 외곽 깊은 곳에서 꽂습니다!
Rockets looking for a quick shot… Bowen is all over him… Mcgrady, foul was picked up…! And, it's a potential four point play! Tracy Mcgrady from downtown!
- 티맥 타임 당시 해설
Rockets looking for a quick shot… Bowen is all over him… Mcgrady, foul was picked up…! And, it's a potential four point play! Tracy Mcgrady from downtown!
- 티맥 타임 당시 해설
공식 착화신장 6 ft 8 [14]에 윙스팬이 상당히 길었기 때문에 주포지션인 2번 기준에서 우월한 신체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스몰포워드나 파워포워드까지 볼 수 있는 신장의 스윙맨이 부상 전에는 여기에 어마어마한 가속능력과 역대최고로 평가받는 퍼스트스텝[15]을 지니고 있었고, 점프력 또한 덩크 콘테스트에 출전할 정도로 뛰어났다. 이에다 티맥은 많은 볼 소유에도 커리어 평균 경기당 2.2개 정도의 준수한 턴오버를 기록하며 화려하지만 의외로 안정적인 볼핸들링이 가능했고 평균 5개를 웃도는 어시스트 숫자에서 보이듯 시야도 준수했다. 이 때문에 단숨에 수비를 찢고 들어가 마무리까지 가능한, 대단히 위협적인 돌파 득점원이였다. 거기다 언급받지 못하는 점이 있는데 젊은 시절에는 우월한 신체 조건 덕분에 공격 리바운드 능력 또한 매우 뛰어난 선수였다. 커리어 첫 7시즌 동안 무려 경기당 2개를 잡아냈다.
하지만 이런 툴을 지닌 티맥을 NBA 2회 득점왕으로 만들어주었던 진정한 무기는 바로 점프 슛이었다. 가공할 돌파력을 갖췄음에도 그는 커리어 내내 점퍼를 우선하는 선수였는데, 어마어마한 타점의 점퍼는 감이 잡히면 미드레인지와 3점라인 바깥 모두에서 상대의 림을 폭격했으며, 여기에 특유의 퍼스트스텝이 더해지자 지옥의 이지선다가 완성되었다. 떨어지면 바로 풀업점퍼를 쏘고, 붙으면 바로 돌파하는 말은 쉽지만 실현은 어려운 득점의 정석을 보여주었다. 이렇듯 페이스업에 최적화된 것처럼 보이는 티맥이지만 사실 자신보다 신장이 작은 상대로는 망설임 없이 포스트업을 가져갔으며 완성도 또한 꽤나 높았다. 티맥의 득점 장면을 보면 포스트업이나 페이스업에서 바로 풀 업 점퍼를 쏘거나, 헤지테이션이나 포스트업 페이크 무브를 한두 번 섞은 이후 돌파나 점퍼를 택하는 장면들이 대부분으로, 동시대의 코비가 특유의 유연성과 볼핸들링을 바탕으로 온갖 드리블 스킬을 마스터해 상대를 농락했다면, 그는 보다 더 시원시원하고 직선적인 플레이를 즐겼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전성기에도 프레임이 전반적으로 얇은 편이었기 때문에 림어택의 비중이나 성공률이 S급까지는 아니었고, 오히려 리그 평균을 밑돌았다.[16] 또한 주무기였던 점퍼, 더 자세히 말하자면 전체 야투 비중의 50%를 넘게 차지했던 3점과 롱투도 성공률 자체는 평균 또는 평균 이하였다. 물론 골밑 성공률과 점퍼 성공률 모두 티맥이 받던 견제의 수준과 공격 비중을 감안하면 참작의 여지가 있지만, 경기를 보면 대부분의 슛을 수비를 달고 쏘는 셀렉션이였기에 돌파와 슛 모두 당대 A급 정도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이런 역동적 움직임들을 가져가던 올랜도 - 휴스턴 시절 혹사를 통해 온갖 잔부상이 축적되었고 결국 그의 등과 무릎은 그의 퍼스트스텝과 키에 비해 유독 낮았던 드리블 자세, 순간의 민첩한 움직임들을 감당해내지 못했다. 03-04 이후로 야투율이 현격히 떨어졌던 것도 바로 이런 부상으로 인한 운동능력 악화[17]에 있다. 그리고 자기관리가 다른 6성 슈가들에 비해 완벽하지 못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빨리 져버리는 원인이 되었다.
사실 티맥은 2004년의 핸드체킹 금지 조치 이전에 전성기를 보낸 선수란 점에서 돌파를 많이 할 여력이 안되는 선수였다. 당시에는 핸드체킹의 존재로 인해 림어택 자체가 체력소모가 상당히 많이 되는 플레이였다. 8,90년대보다는 덜 거칠었지만 00년대 초반엔 이로 인해 리그 전체적으로 페이스가 느렸고, 골밑돌파보다는 미드레인지의 비중이 훨씬 큰 시절이었다. 맥그레디나 위에 언급된 가넷, 코비 브라이언트 모두 운동능력과 사이즈를 갖춘 선수들이었음에도 돌파보다는 중거리 비중이 훨씬 높았던 것. 이 중 가장 프레임이 얇은 티맥은 그 빠른 퍼스트 스탭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뚫어내려 부딪히면서 돌파를 많이 하기보다는 사이즈 우위를 활용해 상대 위로 점퍼를 쏘는 것이 체력안배 차원에서 필수였던 것. 체력소모와 더불어 당시엔 2010년대 이후만큼 선수들의 전반적인 외곽슛 능력이 뛰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수비 범위도 비교적 좁았다. 즉 핸드체킹으로 인한 체력소모+상대적으로 좁은 돌파공간 때문에 돌파를 하는게 더 힘든 상황이었다. 만약 2010년대 이후에 뛰었다면 이때보다는 돌파를 많이 하는 스타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국내 일부 팬들 한정으로 수비가 약하다는 오해가 있는데 가장 큰 라이벌이었던 코비에 비교해서 안좋은 것이다.
시대의 흐름으로 인해 룰 변화로 인해 피지컬한 수비가 과거에 비해 현저히 적어지고, 외곽슛 능력의 전반적인 향상으로 돌파 공간이 향상되면서 2024년 현재 NBA는 중거리슛보다 돌파가 훨씬 효율적인 공격수단이 된 상태이다. 이 때문에 최근 NBA에서 트레이시 맥그레이디와 같은 선수 유형은 거의 없다.[20] 스탯상으로는 27득점, 7리바운드, 5어시스트, 플레이스타일상으로는 뛰어난 운동능력을 지녔지만 터프한 풀업 점퍼가 우선이 되는 유형인 선수가 티맥인데 현역 SG 중 이와 비슷한 선수는 그나마 시카고의 잭 라빈을 꼽을 수 있다. 다만 스탯에서 잭 라빈은 티맥과 비교하면 득점 볼륨, 리바운드 숫자가, 어시스트가 조금 적지만 골밑, 3점 효율이 더 높으며, 플레이스타일 상으로는 미드레인지 비중은 대폭 감소시키고 3점 비중을 늘린, 매우 현대화된 티맥이라고 볼 수 있다.
6. 수상 내역
수상 내역 |
올-NBA 퍼스트 팀 2회 (2002-2003) 올-NBA 세컨드 팀 3회 (2001, 2004, 2007) 올-NBA 서드 팀 2회 (2005, 2008) NBA 올스타 7회 (2001-2007) NBA 득점왕 2회 (2003-2004) NBA 올해의 기량발전상 (2001)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2017) |
7. 농구화
- 토론토 랩터스에서 데뷔 시부터 아디다스와 계약을 맺어 아디다스를 계속 신었다. 그리고 올랜도로 이적하는 시즌에 시그니처 농구화로 아디다스 T-Mac 시리즈를 출시. 특히 티맥2는 올랜도에서 전성기를 보내던 시절 농구화로 판매량도 엄청났고, 티맥의 활약과 함께 미국에서도 아디다스 농구화로서는 드물게 전국적인 열풍을 일으켰다. 르브론 제임스도 고등학교 시절에는 나이키 울트라플라이트와 함께 티맥2를 자주 신었고, 그 무렵 우리나라 동네 코트에서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
워낙 빼어난 디자인으로 유명한 티맥2였고, 이듬해 나온 티맥3는 티맥2의 디자인을 기조로 아디다스의 토션 기술을 발 뒷축 전체를 감싸는 3D 토션으로 개량시켜 티맥2와 함께 시리즈 최고의 명기로 꼽힌다. 특히 03-04 올스타전에서는 왼발에는 빨간색, 오른발에는 파란색 티맥3를 신고 나와서 지금도 최고의 올스타전 농구화를 주제로 반드시 언급되는 신발.
다만 그 해 티맥이 부상으로 시즌을 거의 소화 못하는 바람에 티맥2에 비해 판매량은 다소 부진. 올림픽 시즌을 맞이해서 티맥 3.5가 나왔다.
- 휴스턴으로 이적한 첫 해에 나온 티맥4는 신발끈이 없이 플라스틱 구조물로 신발을 조이는 새로운 기술을 장착. 하지만 이런 변화가 발에 부담을 주었는지 티맥 3.5를 신고 뛰는 일이 더 많았다. 이후로도 해당 시스템을 적용한 농구화가 단 하나도 나오지 않은걸 보면 아디다스의 실패한 실험. 티맥타임 시에 신고 있던게 바로 티맥4.
- 티맥5는 티맥2, 티맥3와 함께 최고의 평가를 받는 신발. 힐카운터를 농구코트 나뭇조각으로 만들어 안정성을 더했고, 스트랩까지 있어 피팅감이 티맥 시리즈에서 독보적으로 좋은 신발. 더불어 휴스턴 유니폼에 맞춘 검빨 컬러웨이가 환상적인 인기를 끌었다. 숀 브래들리 위로 덩크를 꽂았을 때 신고 있던게 티맥5.
- 티맥6는 당시 아디다스가 개인 시그니처를 모두 패밀리 룩 디자인으로 통일하는 바람에 이전 시리즈에 비해 시그니처로서 특징이 다소 부족한, 아디다스의 삼선을 크게 강조한 디자인으로 나왔다. 그리고 이후 티맥은 아디다스와 계약은 계속 했으나 더이상 시그니처 시리즈가 발매되지는 않았다.
8. 여담
- 어린 시절을 주로 할머니의 손에 의해 키워졌다. 근데 이것이 때로 티맥을 비난하는 요소로 잘 쓰였다. 03-04시즌에 올랜도가 거의 막장으로 치달았을 때 티맥이 은퇴 발언까지 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미국 내에서는 "할머니 손에서 자라더니만 사내놈이 아주 시끄럽게 징징댄다."라고 까였다.
실제로 토론토에서 뛴 루키시즌에도 출전시간을 받지 못하자 "농구가 재미없다."고 발언하기도 하는 등 좀 성숙하지 못한 언행을 하기도 했다. 급기야는 출전시간 달라고 떼를 쓰다가 팀 내 베테랑에게 "엄마 젖이나 더 먹고 와 짜샤!!"라고 갈굼만 받기도.
- 그의 모습을 본뜬 레고 미니피겨가 레고 스포츠 시리즈 3567 제품으로 출시된 적이 있었다.
- 참고로 빈스 카터와 친척이다.[21] 카터가 세계를 경악하게 했던 2000년 슬램덩크 대회에서 같이 경쟁했고 나름대로도 흠좀무한 덩크를 보여줬지만 카터의 임팩트가 정말 무지막지했기 때문에 누구도 티맥의 덩크를 기억하지는 못한다. 그래도 카터와 함께 길이길이 남...긴 했다. 카터가 팀원과 함께 하는 덩크 과제에서 티맥 뛰어넘기를 한 덕분에(…).
- 위에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근육질이긴 하지만 약간 마른 몸매 덕분인지 유니폼빨이 정말 잘 받는 선수 중 한명이다. 당시 최악의 유니폼 중 하나로 손꼽히는 토론토 랩터스의 초창기 유니폼도 아무렇지도 않게 잘 어울리는 편.
- 우리나라에는 2006년 8월에 방문해, 농구클리닉을 통해 국내 유망주들을 지도해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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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뒤 독립리그에 도전하고 있다. 농구말고
야구!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스카우트와 훈련 중이며,
로저 클레멘스도 그의 훈련을 도와줬다고 한다. 구속은 85~86마일(136~8km/h 가량) 정도 나오고 슬라이더가 좋다고 한다. 클레멘스의 평에 따르면 제구도 나름 괜찮은 편이지만 타자를 세워 놓고 해봐야 견적이 나올 것 같다고. 그리고 독립리그 구단인 슈가랜드 스키터스에 입단했으나 결국 독립리그에서도 썩 좋은 성적을 내지 못 하였다. 그러나 인기 덕분에 독립리그 올스타전에도 출전했고, 결국 2014년 7월 17일에 짧았던 독립 리그 선수 생활을 마치고 야구계에서도 은퇴했다. 통산 기록은 4차례 선발등판에 0승 2패 6.2이닝(…) 10볼넷 0삼진(…).
조던은 더블 A이기라도 했지[22]
- 1997년 드래프트 당시 시카고는 연봉에 큰 불만이 있던 스카티 피펜을 토론토로 보내고 맥그레이디를 받아오는 트레이드를 진행하려고 했으나 이 사실은 안 조던의 반대로 무산되었다.[23]
- 데뷔 시절 부터 아디다스 협찬을 받았고 시그니처는 01/02시즌부터 나왔는데 맥그레이디가 최전성기(02/03)에 신은 티맥 2 는 나이키 위주의 농구화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킬 정도였으니 당시 맥그레이디 인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 플레이스타일이나 포지션이 비슷한 후배인 제일런 브라운과 좋은 선후배관계로 보인다. 인스타그램에 브라운 nba 타드를 올리기도 했고, 오프시즌에는 훈련도 시켜주었다. 그리고 이런 슈팅가드 유형 중 맥그레이디와 가장 비슷하기도 하다.
- 유명한 공개프로포즈 실패 영상에 찬조출연하기도 했다. 2000년대 중후반~2010년 사이 휴스턴 로케츠의 한 홈경기에서 한 남성이 공개프로포즈를 한 적이 있는데, 상호간의 관계가 깊지 않았는지 이런 참사가 일어나고 말았다. 실패한 후 침울하게 퇴장하는 남성, 어느 순간 그의 손에 쥐어진 맥주, 위로하는 마스코트, 웃참하다가 남성의 퇴장 후에야 빵 터진 맥그레디의 모습이 압권. 참고로 해설자는 (당시 유행처럼 너도나도 하던) 이런 프로포즈에 대해 비판적이어서 "한번쯤은 여자분이 거절하는 걸 보고 싶네요"라고 했다가 진짜 거절하자 "진심 아니었던 거 알죠?"라고 수습한다음 어메이징하다며 당시 NBA의 공식 홍보 문구인 "Where amazing happens"라고 언급했다.
- 2022년 NBA 75주년 팀에 선정되지 못하고 제외된 선수들 가운데 드와이트 하워드, 토니 파커, 파우 가솔과 함께 가장 논란이 심한 선수이기도 하다. 당장 맥그레이디의 커리어를 보면 올 NBA 팀 7회 선정에 퍼스트팀 2개, 세컨드팀 3개, 서드팀 2개에 올스타 7회 선정되고 2001년 기량발전상 수상, 득점왕 2회 수상하면서 자격은 충분하고, 그리고 파이널 진출이나 우승에 실패한 걸로 저평가 된거면 데미안 릴라드, 카멜로 앤서니 둘 중 하나를 빼고 맥그레이디를 넣는게 나았다라는 의견이 굉장히 많은 편이다.
9. 관련 문서
[1]
1997년 NBA 드래프트 측정. 착화 기준 203cm (6' 8") / 맨발 신장 201cm (6' 7")
[2]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교로 진학하지 않고 바로
NBA 드래프트에 참가하였기에 현재는 신장이 더 클 것이란 예상이 많다. 206cm로 표기되는 주완 하워드 등 동료 선수들과 키가 비슷하고, 내한 당시 맨발키가 205cm인 김주성과의 신장 차이가 매우 적어 이런 추측이 더 많았는데, 맨발 신장 203cm/착화 206cm에 가까울 것이란 추측이 많다.
[3]
미국 야구 독립 리그
[4]
티맥에게 안타까운 사실은 02-03시즌부터 플옵 1라운드가 5전 3선승제에서 7전 4선승제로 확대된 것....다시 말해 1년전이었다면 3승1패가 된 시점에서 1라운드 통과하고 2라운드에 진출할 수 있었다.
[5]
03년 대표팀이 사실상 2004년 드림팀 로스터를 구성해야 하는데 아이버슨, 던컨만 아테네 올림픽에 참가했고 나머지 선수들은 불참. 결국 동메달에 그쳤다.
[6]
2019-20 시즌에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에서 잠시 뛰었던 그 선수 맞다.
[7]
당시
스티브 프랜시스도 휴스턴에서 야오밍과 합이 굉장히 좋았고 올스타주전으로 뽑히는 등 전성기에 돌입하는 시기였다.
[8]
매직은 힐, 티맥 영입 당시 팀의 운명을 걸 정도 였다. 하지만
힐이 장기 부상으로 시즌아웃급이 3시즌이였고 힐에게 들어가는 연봉값이 샐러리캡에 많은 비중을 차지했기에 전력강화가 쉽지 않았고 결국 티맥 원맨팀에 그쳤으며, 매번 동부 하위 시드PO 턱걸이로 합류하여 항상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
[9]
하워드는 이후 레이커스, 로케츠, 호크스, 호네츠로 거의 매시즌 팀을 옮기는 중인데 개인 스탯은 여전히 좋은 수치를 보이고 있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본인 자리를 디조던, 고베어, 드루먼드, 카펠라에게 넘기고 있으며 2010년 대 이후
드마커스 커즌스, KAT, 엠비드 등 20득점, 10리바운드와 동시에 기록하는 선수들이 등장하여 마침내 센터 기근의 시대에 막을 내렸다.
[10]
TNT의 농구 간판 캐스터
[11]
경기장을 자주 가는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수천, 수만명이 한꺼번에 퇴장하면 장난아니게 혼잡하기 때문에 사실상 승부가 끝난 시합에서는 관중들이 일찍 퇴장한다.
[12]
경기 끝나기 전 집에 가는 홈팬들이 중계영상에 잡힐 정도로 승부는 누가 봐도 뻔한 상황이었다.
[13]
중간에 던컨이 훼이크에 속아서 추가로 4점플레이를 내준건 아쉬울 수 있을지언정 아무도 큰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14]
이조차도 6 ft 9이 실제 신장이 아닌지 의문이 제기된다. 공식적으로 6 ft 9의 착화 신장인 르브론과 바로 옆에서 찍힌 사진을 보면 등을 살짝 굽힌 상태로 고개를 위로 든 르브론과 정수리 위치 차이가 거의 나지 않기 때문에 쭉 편 상태에서는 같은 신장일 것으로 보인다
[15]
그의 긴 다리길이에 기인한다.
[16]
기술수준과 별개로 골격이 갸냘픈 선수들은 골밑플레이의 비중을 비교적 적게 가져가는 경향이 크다. 몸이 호리호리하게 가벼운 선수가 골밑에서 빅맨들과 부딪히는 플레이를 하면 같은 플레이를 하더라도 체력소모가 크고 부상위험이 커지기 때문. 비슷한 예로 7푸터임에도 스윙맨급 프레임이었던 케빈 가넷 역시 로우포스트 득점기술이 뛰어났음에도 주무기는 무려 전체 야투 비중의 50%를 차지하는 미드레인지였다. 이런 선수들은 지켜보는 팬들 입장에선 돌파/골밑득점을 잘하는데도 외곽에서 많이 쏘니 답답할 수 밖에 없지만, 체력안배란 걸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페이스 조절을 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두 선수 모두 전성기 당시 소속팀 내 비중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17]
그래도 휴스턴 시절까지는 all nba선수
[18]
퍼스트팀 선수들이 워낙 특출난것이지 디퍼스트에 꼽히지 않더라도 좋은 수비수였다고 평가를 받는 선수는 무수히 많다.
[19]
정확히 말하면 축복받은 운동능력과 체격, 탁월한 센스로 수비기술 자체는 굉장히 뛰어나지만, 공격을 하면서 이런 수비력을 48분 보여줄만한 체력이 없었다. 이 때문에 수비공헌도 자체는 떨어지는 것이다. 48분 장기전인 NBA에서 체력은 굉장히 중요하다.
마이클 조던이나
르브론 제임스처럼 역대 톱을 다투는 선수들의 경우 기술이나 피지컬적인 측면에선 그들에 근접한 동시대 라이벌들이 있었지만, 저런 모습을 공수에서 오랫동안 보여줄 수 있는 강인한 체력이 있기에 저들을 능가하고 한 시대의 톱으로 군림할 수가 있었다.
케빈 가넷이 공수에서 막대한 부담을 지던 미네소타 시절 이후 공격부담이 많이 덜어진 보스턴 시절 전성기 수준 수비력을 보여준 것과 마찬가지 논리로, 수비는 피지컬이 절대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티맥처럼 프레임이 얇고 체력적으로 (저런 괴물들에 비해) 열세인 경우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위에 언급된 피지컬 괴물 르브론도 나이가 들면서 수비력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고, 역대최강 수비수 중 하나였던 조던도 워싱턴 시절 복귀했을 때 공격력보다 수비력의 저하가 더 컸다. 커리어 후반에 접어드는 선수들이 전성기에 비해 가장 눈에 띄게 저하되는 능력 중 하나가 수비력이다.
[20]
위에 언급됐듯이 티맥의 스킬셋과 피지컬이라면 현재 NBA에서는 돌파 위주&3점슛을 섞어 공격하는게 가장 효율적이다. 다만 그가 전성기이던 시기엔 골밑까지 매번 돌파하면 체력소모가 극심했기에 중거리슛 위주로 자리잡은 것이다. 이건 역대 최고수준의 돌파력을 지녔음에도 중거리슛 위주였던
마이클 조던이나 그와 플레이스타일이 흡사했던
코비 브라이언트도 마찬가지다.
[21]
한국식으로 촌수를 따지면 7촌 사이이고 맥그레이디가 한 항렬 높다. 자세한 관계는 빈스 카터 문서 참조.
[22]
실제로 조던이 보여준 기량은 평범한 마이너리거의 것이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야구로 밥벌어먹고 살만한 더블A 선수급은 되었다. 조던의 스포츠 재능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리고 프로선수가 다른 스포츠에 도전하는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다만 조던은 운동능력이 아직 빵빵하던 30세였고 티맥은 35세에 가까운데다가 부상으로 운동능력을 많이 잃었다는 것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23]
이는 페이롤을 줄이려고 부단히 노력한 제리 라인스도프 구단주의 의향이 반영된 무브였다. 라스트 댄스에도 나오지만, 라인스도프는 당시 불스 선수 중 돈줄인 조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적극적으로 잡을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조던은 한 시즌 정도 더 뛸 의지가 있었음에도, 말년에 원맨팀에서 개고생해야할 판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은퇴를 확정지은 것이다. 2인자인 피펜을 주고 97년 당시 당시 18세 고졸 루키인 티맥을 데려온다는 것 자체가 우승은 포기하잔 말이기에 철저히 비지니스적인 행보였고, 실제로 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