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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비( 奴 婢)는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는 단순 소유물인 노예와 귀족의 장원에 예속된 농민인 농노 사이의 성격을 가지는 전근대 동아시아 사회에서 예속민 계층을 지칭한다.[1] 대부분의 사회에서 그렇듯, 노예는 곧 천민이지만 천민이 곧 노예를 뜻하지 않는 것처럼, 전근대 한국사회에서도 노비가 천민으로 취급되었지만 천민이 곧 노비는 아니었다. 다만 다른 종류의 천민들의 부정적인 대우와 겹치는 점이 많았으며, 경국대전에서는 언어상 천민은 곧 노비라고 일컬었지만 실제로는 여러가지 천민들이 있어서 천민=노비는 아니었다.[2]한반도 전근대의 신분제의 각 사회들은 공식 명칭이나 세부사항은 약간식 차이가 있었으나, 크게 귀족, 양인, 천민으로 신분을 나누었는데, 노비란 종속된 천민 남녀를 뜻하는 말로 노(奴)는 남성노비를 뜻하고 비(婢)는 여성노비를 뜻하는 한자다. 중국의 고서인 주례( 周 禮)에 따르면 "노(奴) 가운데서 남자는 죄예( 罪 隸)로 들이고, 여자는 용인( 舂 人)이나 고인( 槀人)으로 들인다."라는 문장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노(奴)는 남녀를 모두 뜻하는 단어였으나 후대에 남녀를 구분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죄예, 용인, 고인은 모두 국가에 귀속되어 노동을 하는 일종의 공노비를 뜻한다. 장례원은 춤과 음악을 관장하는 장악원과 함께 ‘장○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노비를 다루는 관청이다. 노비(奴婢)란 남자 종(奴), 여자 종(婢)이라는 뜻의 ‘종 예(隸)’자를 썼다.
아래는 출처의 기사 중 일부와 내용이 같다
2. 한반도 지역에서의 노비제의 역사
2.1. 고조선 ~ 삼국시대
고대에도 노예라는 개념은 존재했다. 다른 지역, 다른 나라, 다른 민족에서 예속민이 존재한 역사가 그러하듯 한민족의 노비의 시초는 고대로부터 시작된다.한민족에서 최초로 노비가 언급되는 것은 고조선의 8조법으로 고조선의 8조법에서는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그 집의 노비로 삼는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신교본 후한서(新交本後漢書)>의 삼한 사회와 관련된 기록에서는 한인 포로로서 잡힌 이들이 머리를 깎이고 밭에서 새를 쫓는 노동에 동원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한 후한서에서는 부여와 고구려의 노비제와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는데, 고조선의 범금8조가 물건을 훔친 자를 노비로 삼았던 것과 달리 사형자의 가족을 법적으로 노비화하는 것만이 규정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형태의 노비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부여와 고구려의 노비화에 관련된 이러한 규정은 고조선이 물건을 훔친 자를 그 집의 노비로 삼는 사노비 전통이었던 것에 반해 이들을 사노비가 아닌 관노비로 취급하였다는 특징을 가진다. 고조선 시대에는 물건을 훔친 자를 무조건 노비로 삼았지만, 부여-고구려 시대에 들어서는 주로 전쟁 포로와 사형자의 가족 정도만을 노비화하였고, 절도죄에 대해서는 일단 배상을 통해 해결하고 그것이 충분하지 않았을 때만 노비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부여와 고구려는 포로를 노비화하는 것과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삼국지 위서에서 남아있는 노복(奴 僕)이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포로 노비를 의미했던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단 이들 기록에서 주로 노복과 같이 자주 언급되는 하호(下戶)는 실질적으로 노복과 유사하지만 구별되는 공납 예속민 계층으로, 주로 점령에 의해 복속된 마을들이 공동체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공납을 바쳤던 것이다. 그러니까 일단은 자유민 계층인 민과 완전 예속민이자 노비계층인 노복의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적 계층에 가까웠다.[3]
부여-고구려계에 속하는 백제 역시 형벌 노비가 존재했다. 대표적인 것은 간통한 부인을 남편 집의 노비로 삼았던 관습. 그 외 전쟁 포로들을 노비로 삼는 일은 고대 국가가 그러하듯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2.2. 남북국시대
남북국 시대 중 통일신라에 대해서는 통일 후 전쟁이 줄어 전쟁에 의해 발생하는 포로 노비가 급감하였기 때문에 노비의 숫자가 이전에 비해 급감했을 것으로 추측된다.이와 관련된 기록으로 통일신라 촌락의 인구 구성을 보여주는 민정문서를 살펴보면, 4개 촌락의 구성원 442명 중 노비는 25구에 불과하였다고 나오기도 한다. 미야지마 히로시는 이 민정문서를 근거로 통일신라와 고려 초의 노비 비율이 조선보다 낮을 것이라 추측하기도 하였다. 어쨌건 남아있는 기록이 적기 때문에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으나, 신라 시기의 노비의 비율을 전체 인구 구성의 1할 정도로 추정하는 학자들이 있는 것이다.[4] 다만 해당 문서는 어디까지나 신라 촌락 문서에 기반한 주장이며, < 신당서>에서는 진골 귀족이 약 3,000여명의 노비를 거느렸다고 되어 있다.[5] 촌락문서 쪽이 당대 신라인이 직접 남긴 1차 사료로서 좀 더 나중에 외국인의 시각으로 작성한 신당서보다 가치가 높지만, 신라 전국의 조사기록이 아니라 그 중 일부 지역의 사례일 뿐이라는 게 단점. 민정문서에 나온 청주시 주변 지역의 노비 비율이 통일신라 다른 지방의 상황과 같을지 다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2.3. 고려 시대
고려 시대부터는 본격적으로 공노비와 사노비의 구분이 엄격해지기 시작한다. < 고려사>에 따르면 주로 모반이나 반란에 가담한 귀족과 그 가족, 그리고 이들에게 속한 사노비,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이들, 전쟁포로를 공노비로 삼았다고 나오는데, 이에 따라 고려시대에는 공노비화가 왕권 강화를 위해 사용되는 가장 강력한 처벌이었다고 이해되고 있다.반면에 고려 시대에서 사노비는 주로 경제적인 이유에 의해 만들어졌다. < 고려사>는 부유한 사람들이 빚을 지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노비로 만드는 것을 금지하고 있고, 자손이나 친척을 노비로 매매하는 행위 또한 분명하게 죄로 규정하고 있었다. 물론 법과 규제가 있다고 해서 불법적인 노비화가 아예 없진 않았고, 사실은 상당히 널리 이루어진 까닭에 관료들이 대놓고 우려할 정도였다. 하여간 고려 시대의 사노비 중에는 경제적 빈곤에 시달리다가 스스로를 팔아서 노비가 된, 본래 양인이었던 케이스가 많기는 하였다.
태조 왕건은 공신들의 반발을 피하기 위해 노비의 신분을 대대로 세습시키는 노비세전의 원칙을 인정한다.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만들어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를 양인으로 만들었으나 성종때 이르러 노비환천법이 등장하며 광종때 양인이 된 노비를 환천시켰다. 정종 5년에는 천자수모법을 제정하여 노와 비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비의 소유주에게 귀속된다 하였으며 양천교혼을 금지하였다. 이는 초기에는 잘 지켜졌으나 노동력의 수요가 급증한 후반에 들어서는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실제로 고려 초 대농장이 별로 발달하지 않았을 때는 법적 금지가 비교적 잘 지켜졌기 때문에 양천 교혼은 음성적으로 매우 조금씩만 이루어졌다. 그러나 고려 후반기인 12세기부터는 농장의 발달과 함께 노동력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천자수모법을 이용하고자 한 귀족들은 양인 남자와 비의 결혼을 독려하여 사노비의 증가를 꾀하곤 했다. 당연히 불법이었지만 주로 살 길이 막힌 양인들을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점차 일천즉천의 원리가 보편화되었는데 충렬왕 때는 부모 중 한쪽만 노비여도 노비가 되는 일천즉천을 관습법처럼 여기기도 하였다. 천자수모법( 賤 者 隨 母 法)의 내용은 양천교혼의 소생이 노비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법은 소유주가 서로 다른 노비 사이에 소생이 있을 경우 그 소속을 어디로 할 것인가를 규정한 것이다. 양천교혼은 자체로 불법이었고 양천교혼에 따라 출생한 사람은 부모 중 한 쪽이 천인이므로 천인 신분으로 귀속된다고 규정한 것이 일천즉천( 一賤 則賤)의 원칙이다. 따라서 충렬왕대의 기사는 일천즉천의 원칙을 재확인한 것으로 봐야 한다.
고려 시대의 노비정책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공노비와 사노비 문제를 둘러싼 왕과 귀족 간의 대립이었다. 실제로 고려 시대에는 왕과 귀족 간의 권력균형에 따라 공노비와 사노비에 대한 정책이 지속적으로 변해왔다. 일단 태조 왕건부터가 노비제를 통한 왕권의 강화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따라 집권 후 호족 계층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1,000여구의 사노비를 일부러 양민으로 속환시켜주기도 하였다. 반대로 고려 후기에 왕권이 약화되고 권문세족의 대토지 점유가 심해졌을 때에는, 이들에 의해 사노비를 보다 쉽게 늘리기 위한 정책들이 등장했다.
그런데 고려의 노비제는 그 자체로 왕과 귀족들 양편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핵심적인 수단이었으므로, 이를 유지하기 위해 왕과 귀족들이 협력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몽골에서 파견한 평장정사 기와르기스( 闊 里 吉 思)는 노비제의 폐단을 지적하며 제도를 적극 개혁하려고 하였으나 충렬왕과 대신들이 맹렬히 반대하여[6] 개혁이 실패로 끝난다. 활리길사가 물러난 후 충렬왕은 곧장 해방되었던 양민을 다시 노비로 되돌렸으니, 이 노비제 폐지에 대한 반발은 고려귀족들이 몽골제국의 간섭에 적극적으로 반발한 유일한 사례(...)이다. 그나마 공민왕이 전민변정도감을 통하여 불법적으로 점유한 토지와 노비를 해방시켜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고 노비제의 폐단을 줄이려 했으나 결과는 아시다시피 기득권의 저항에 부딪혀 실패로 끝났다.
이와 같이 노비 정책을 둘러싸고 왕과 그 외 기득권층이 보였던 갈등(때로는 협력) 양상은 조선 사회에도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7]
이렇듯 이후의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노비는 주인을 고소할 수가 없게 되는 등 노비제도의 악화가 일어나 여러 비판을 받지만 고려시대 역시도 그러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다.
2.4. 조선 시대
법제적으로 노비는 천민이나 일단 사람으로 인정받기는 했으며 나라의 백성으로 인식되었다.[8] 또한 재산권을 법적으로 보장받았으며[9] 재산을 매매하고 상속하며 양도할 수 있었다.[10] 다만 역모, 강상죄 외의 이유로 자신의 주인을 고소하는 게 금지되었을 뿐 남의 주인을 고소하거나, 민사소송을 벌이는 것은 문제가 없어 다른 자유민에 대한 법적인 권리는 있었다. 주인과 재산상속 문제로 대를 이어 30여 년 간 소송을 이어간 사례도 존재한다.[11] 물론 이런 법적인 권리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으나 그것은 사회적 불평등과 권력의 문제지 명시적인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다.절대다수가 스스로 자신을 의탁한 자매노비로 노비의 가격은 말의 1/3이었다. 대부분 흉년, 부채 등 생계가 긴급한 경우에 발생하였다.[12] 17세기 후반 상평통보가 시중에 돌기 시작하면서 노비 매매가 급증한 18세기 초반까지 급증하는 추세를 보인다. 하지만 이런 거래는 관아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일이였고 관아에서는 허가를 잘 해주지 않았으므로 실제로 사고 팔리는 노비의 수가 생각만큼 그리 많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노비와 주인의 관계를 신하와 임금 관계의 축소판으로 보는 관념 때문에 양반들부터 노비 매매를 천하게 여겨서 정 피치못할 사정이 아니면 잘 하지 않았다. 1687~1690년 노비 5,992명 중 거래된 노비의 수는 고작 14명이였다.
추노 같은 드라마 때문에 노비들이 타의로 팔려서 가족과 생이별하는 일이 흔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노비를 사고 파는 일 자체가 드물었고 피치 못하게 팔아야 할 상황이면 가까운 지인이나 친인척을 우선했기 때문에 타지로 팔려가서 가족과 생이별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조선이 가져온 대명률에선 노비가 평민을 죽이면 사형이지만 반대의 경우는 사형을 면해주는 등 차등이 꽤 노골적이었다. 하지만 실록 등에서 확인되는 바에 따르면 이 규정은 실제로 적용되지 않았으며 양민이 노비를 죽이는 경우와 노비가 양민을 죽이는 경우 양자 다 처벌이 교형으로 동일했음이 확인된다.[13] 대명률은 조선에서 일반적인 법률 중 하나로 기능하긴 하였으나 절대적인 법률은 아니며 경국대전 등 조선의 법전과 상충되는 조항이 있으면 적용되지 않았다. 이 조항도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이외에도 지방의 향촌 규약인 향약에도 본인이 원하면 평민과 비슷한 위치에 가입할 수 있었다. #
노비를 이유 없이 처벌하거나 살해하면 법적으로는 처벌 대상이었으며 관노비를 성폭행하려 한 양반이 처벌을 받았다는 점, 이숙번의 노비가 이숙번의 성폭행 시도 중 주인의 얼굴에 칼부림을 했음에도 무죄를 받은 것을 보면 엄연히 불법적으로 일어난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한민국 일부 부유층의 갑질 행위가 그 특권을 법적으로 보장하고 있어서 생긴 일이 아닌 것처럼, 전근대 신분제 사회에서 지위와 권력의 차이로 빚어진 불평등 사례를 두고 그걸 국가가 방기했다고 보긴 힘들다. 어디까지나 노비가 사회적 약자라 법적인 보호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남편이 있는 노비와 성관계를 가지는 것 자체가 간통죄에 해당하는 일이였으며 적발시 처벌대상이였다. 이와 관련된 사례로는 내침장고(內沈藏庫) 제거(提擧) 박희무가 창고의 여종 성덕과 간통했다가 적발된 사례가 있는데 태종 6년 윤7월 8일자 기사에 따르면 박희무는 이 일 때문에 관직을 삭탈당하고 외방에 부처되는 처벌을 받았다. 또한 여종 성덕의 남편인 종 모지는 간통 현장을 보고 박희무를 폭행했는데도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는데 이는 간통현장에서 포획하여 징벌한 행위가 정당하다고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양자가 합의해서 한 성행위에 대해 이렇다는 거고 상대방이 원하지도 않는데 겁탈을 한다면 강간죄에 해당했다.[14] 또한 노비 본인이 아닌 그 가족이나 친족의 경우 같은 주인이 아니면 역모, 강상죄 외의 사안으로도 형사 고소가 가능했다. 그래서 다른 집안에서 일하는 친인척이 대신 고소하는 경우가 많았다. # 노비가 꼭 노비하고만 혼인한게 아니라 노비의 배우자가 양인인 경우도 많아서 신분상 제약이 없는 배우자가 대리로 형사고발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정 안되겠다 싶으면 미친 척하고 자기 주인을 고발하는 경우도 있었고, 이 경우에도 무조건 처벌한 게 아니라 사안에 따라 참작을 했다.
그리고 양반들이 노비들을 함부로 죽이거나 고문한 경우는 생각만큼 흔하지는 않았다. 우선 유교적 사회질서에서 노비는 재산이나 물건이 '아니라' 격은 낮지만 천성이 있는 사람으로 여겼고, 또 노비의 가치가 많이 떨어진 조선 후기에도 양반가의 잡다한 집안일을 꾸려가는데 꼭 필요한 존재라서 노비들을 함부로 죽이거나 불구로 만드는 것은 못 배워먹은 인간들이나 하는 짓으로 치부되었다. 양반들에겐 사병이 없다보니 노비들이 분노해서 자신을 죽이려 들면 막을 방법이 없다는 점도 한몫했다.
양반들이 아픈 노비들의 병간호를 직접해주고 약을 지어주거나, 노비들이 죽었을 경우 관을 마련해서 장례와 제사도 지내주고 # 노비들이 결혼할 때 비용을 지원해주며 주인집 식구들보다 밥도 더 많이주는 등 노비들을 인간적으로 대해주는 모습들이 자주 나타나는데 이는 노비제가 유교 사회에서 군신관계의 축소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 ##
대다수를 차지하는 외거노비는 주인의 제약이 크지 않았고, 자기가 노비를 부릴수도 있어서 먹고 살기 힘들다 싶으면 그렇게 꺼리지 않았다.
조선이 경제 전체를 노비의 노동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노예제 사회는 아니었다는 분석이 있다. 그러나 경제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작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노예의 한국 부분으로.
실제로 James B. Palais 같은 미국인 역사학자는 조선시대에 노비가 전체 인구에서 최소 30%~40%를 차지한 점을 들어 조선사회가 노예제 사회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15] 실제로 구한말 서양인들의 시선으로는 그렇기 비춰지기도 했다. 조선의 노비제도에 대한 정치국 극동과의 보고
물론 이에 반박하는 의견들 또한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이영훈 교수가 제임스 팔레 교수의 노예제 사회설에 강하게 반박하면서 제임스 팔레 교수가 타계할 때까지 계속 논쟁을 이어가기도 했다. 이에 대한 반박 의견들은 다음의 글들을 참고하면 좋다. 이영훈 교수의 반박 조선의 노비제 숙의 그러나 이영훈 교수는 최근에 자신의 예전 주장을 번복하고 팔레 교수를 지지하며 조선은 사실 노예제 사회가 맞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영훈의 역사비평] 14. 조선왕조의 정체는 노예제 사회
이와는 별개로, 일단 솔거노비는 주인 호적에 노비로 기재되었으며, 외거노비의 경우 별도로 호적을 만들어 스스로 호주가 되었다. 사노비가 국가에 부세를 납부하는 문서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다른 양인들과 마찬가지로 국가에 의무를 바치는 백성이란 뜻이다. 이 문서는 '조선의 노비는 서양의 노예와 같은가?'라는 질문에 '아니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중요한 증거이다.
노예 수는 적지 않지만, 경제가 노예에 의존해서 돌아가지 않은 사회에는 아테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들이 있다. 흔히 알려진 대로 아테네의 자유민들이 유한계급이라서 직접 민주주의에만 참여하고 지낸 것이 아니라, 대부분은 일을 하면서 정치에 참여했다. 노예들은 주로 가사나 교육을 담당했다. 단, 광산노예는 예외.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은 노비 비율이 전체 인구의 30 - 40% 내외였던 시기는 17세기 기준이라는 것이다. Rodriguez, Junius P.의 The Historical Encyclopedia of World Slavery(1997)에선 조선시대의 노비비율이 많을 때는 1/3에 이르렀지만 평균적으론 10% 수준이였다고 추정하기도 하였다. 15~16세기의 호적은 현재 제대로 남아있는 것이 없어 이 시기의 노비 비율을 정확히 추정하는데엔 한계가 있으며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다.[16] 게다가 17세기의 저 비율 자체도 논란이 있다.[17] 특히 조선 후기로 조선 인구구조에서 노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갈수록 극단적으로 줄어든다.
조선시대 노비는 사유재산 소유가 가능했으며 이를 법적으로 보장받았다.[18] 노비가 다른 노비를 소유할 수도 있었고, 재산도 양반보다 많은 경우가 있었으며, 주인과 사유재산 문제로 소송을 벌이는 일들도 꽤 있었다. 또한 노비가 되어도 노비생활을 하면서도 돈을 많이 벌어서, 양인 신분을 살 수도 있었다. 권내현 교수의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 어느 노비 가계 2백년의 기록'(2014)에 따르면 1720년 경상도 용궁현의 토지 중 약 10%를 노비가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87쪽)
일부 사례를 부풀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조선 후기에는 3대가 군역에 종사하면 면천시켜주는 법률이 생겨 중앙군이 천예화되고, 일정 돈을 내면 면천시켜주는 제도가 신설되고, 18세기에 노비 수가 급락했다.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 자연스러운 노비제 쇠퇴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를 극소수 일부라 단정짓는 건 다소 무리한 주장이다.
또한 노비가 성씨( 姓 氏)를 가지지 못하고 이름만 있으며 외모도 양인과는 달리 남자는 머리를 깎고, 여자는 짧은 치마를 입어 창두적각( 蒼 頭 赤 脚), 노비들을 창적(蒼赤)이라 부른 것은 여기에서 불러 의복과 이름에서 차별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역시 사실이 아니다.
권내현 교수의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 어느 노비 가계 2백년의 기록'(2014)에 따르면 많은 노비들이 성과 본관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나 성이나 본관이 호적에 기재되는 노비들도 많았다. 1678년 단성현 도산면의 주호 312호 중 노비는 128호였는데 이 중 성과 본관이 모두 없는 호는 35호였으며 나머지 노비들은 성과 본관 중 하나가 호적에 기재되어 있었다. 이 경우 주인의 성씨를 따라 쓰는 경우가 많았다는 통념이 있는데 실제 당시 호적을 보면 이런 경우는 일반적이지 않았다. 본관의 경우 자기한테 익숙한 본관, 즉 지리적으로 가까운 지역이나 자기가 사는 지역에 그 지역을 본관으로 쓰는 사람이 많은 지역을 선호하는 게 일반적이였고 또한 그 지역의 양반들이 가지고 있는 성과 본관은 회피하는 경향을 보였다. 2016년에는 노비들의 한글 계문서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도 노비의 성씨가 함께 적혀있다. #
여담이지만 이영훈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노비는 노예도, 농노도 아니다. 노비는 어디까지나 노비 그 자체일 뿐이다."[19]라고 주장하였으나[20], 현재는 정반대로 부정하고 있다.[21]
그리고 조선 시대에는 양민과 노비를 가르는 가장 큰 기준 중 하나가 왕권에 의해 부여되는 여러 의무에 있었는데, 주로 양민들은 신분적으로는 자유로웠으나 국가에 대한 여러 의무가 부과되었고 지역에 따라서는 양반들에 의한 이중적 불법 착취의 대상이 되기도하였다. 양민들은 상황에 따라 경제적으로 빈곤이 심화되면 스스로를 노비화시키기도 하였으며, 역으로 노비가 된 것이 불리하다고 생각되면 도망가 자유인이 되는 경우도 잦았다.[22]
조선시대에 노비는 군역의 의무를 지지 않았기 때문에[23] 국가의 입장에서는 노비를 줄이고 양인을 증가시키는 것이 이득이었다. 이에 따라 과거 고려시대에는 공노비와 사노비에 대한 정책으로 표현되던 왕과 귀족 계층의 갈등이 양인과 노비에 대한 정책을 통해 발현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중앙정부가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또 양천교혼의 폐단을 줄이고 양인을 늘리고자 노비종부법을 시행하기도 하였다.[24] 예를 들어 태종 때. 당시 양천교혼에서는 양인 남성과 여성 노비의 혼인이 절대적이었다. 법적으로는 일부일처제였으나 남성이 첩을 들일 수 있었기 때문에, 여성 노비를 첩으로 들이는 경우는 매우 잦기도 했고. 심지어 조선이 개창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조선왕조실록 중 태조실록에서부터 벌써 적실과 양첩, 종첩과의 구분이 나타난다. 실제로 노비 공급은 상당 부분 채무자가 자신의 딸이나 아내를 노비로 매매함으로써 이루어졌다.[25]
양천교혼을 하면 그 자손은 노비가 되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피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러나 정신이나 신체에 문제가 있는 사람부터 자손들의 처지가 어찌 될지는 신경 끄고 일단 결혼부터 하고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노비가 차라리 유리한 처지인 빈농들도 있고, 고려 때부터 이어져 온 일천즉천과 천자수모법을 이용해 자기 소유의 노비를 늘리고자 하는 양반들의 의도도 크게 작용했다. 또한 위에서 언급했듯이 여성 노비를 정처로 맞아들이는 게 아니고 천첩으로 삼는 경우는 자주 있기도 했다. 물론 신분을 초월한 사랑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자기들의 이익이 걸린 양반들이 온갖 방법[26]을 써서 양인의 자발적 노비화를 유도하고 지속적인 압력을 가하자, 노비종부법은 다시 일천즉천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현실적으로 노비가 국가와 양반의 이중 착취를 피하기는 대단히 어려웠다. 그래서 노비들 중에는 돈을 모아 족보를 위조하거나 몰래 양인에게 아이를 맡기는 등 자식만은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주려고 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나왔다. 결국 성종 조에 가서는 경국대전에 일천즉천이 명시화되면서 노비의 숫자가 갈수록 증가하게 된다.
그리고 조선 시기에는 납세와 군역을 피하기 위한 양인 계층의 자발적인 예속화가 크게 유행했는데 이를 협호( 挾 戶)라고 한다. 협호란 국가의 역이 부과된 양인들이 자발적으로 지역 유력자들에게 노비처럼 예속돼서 호구 조사를 피한 사람들을 의미한다.[27] 이들은 각 군현의 유력자들 밑으로 스스로 예속되는 대신 유력자들이 호구를 축소 보고해서 역을 피하게 해 준다. 그러면 이들은 유력자의 밑에 소속되어 노동력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사실 팔레 교수도 그렇고 위에서 서술한 양천교혼의 이유보다[28] 평민들의 경제적 몰락에 의한 자발적인 노비화가 증가의 주된 원인으로 보는 편이다.
이와 관련해서 일부 학자들은 단성호적과 숙종실록 등을 바탕으로 17세기 조선시대 전 인구의 30~40% 정도를 노비로 추산하고 있다. 숙종 7년 병조참판 이사명의 상소[29]에 따르면 조선 전체의 공사천호[30]와 폐질자(廢疾者)·유면자(流丐者)를 합치면 40여만호 정도였으며 호포 징수 대상자에 해당하는 평민은 70만여호 정도였다.[31] 숙종 4년 호적에 등록된 호는 1332446호였고 숙종 7년 호적에 등록된 호는 1376842호였다. 폐질자와 유면자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극소수였다고 가정한다면 전체 호의 약 25~30%가 공사천호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이 상소에서 관서지역 17만호 중 공사천은 3만여호 정도라는 발언도 나오는데 이 발언을 통해 한반도 북쪽 지역은 남부 지역에 비해 노비의 비율이 낮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32] 심지어 울산부, 단성 등 일부 지역에서는 노비의 비율이 인구의 50~60%에 육박하였고 1663년에는 한성부 호적에서 73%로 기록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좀 걸러서 봐야하는 게, 조선시대 호적은 전근대 행정력 미비와 세금, 군역을 피하기 위해 평민들이 호적에 등록되는 것을 기피하는 현상으로 인해 실제보다 노비비율이 높게 추산되었다는 점을 고려해야한다. 양반조차도 호적에 자신을 없는 사람으로 만들기도 했었다. 반면 노비의 경우 아예 가상의 노비가 호적에 등록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33]
정진영 교수의 '조선후기 호적자료의 노비기재와 그 존재 양상 : 대구 경주 최씨가 소장 호적자료의 분석'(2004)에 따르면 경주최씨 양반가의 분재기와 호적자료를 비교 분석한 결과 년도에 따라 기재율이 다르기는 하나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중반에 노비의 호적 등재률은 60~70% 정도로, 30~40%에 달하는 노비의 누락이 존재했든데 나이가 비정상적으로 많은 노비들이 다수 나타나고, 연령이 아예 기재되지 않은 노비들도 나타나는 등 호적에 등재된 노비들이 단순한 허수인 경우도 많았다.
노비 비율은 조선 후기로 사회경제적 변화에 맞춰 갈수록 계속 줄어든다. 이는 늘어나는 노비의 수로 인해 세금을 내지 않는 인원이 많아지고 양란까지 겪으면서 국가 재정이 악화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비의 수를 줄이고 평민을 늘리려는 정책들이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16세기에는 종모법이 논의되거나, 양란을 거치면서 병력을 충원하기 위해 노비도 포함된 속오군이 창설되기도 했다. 속오군에서는 적의 목을 베는 등 공을 세우면 노비 신분에서 해방시켜주기도 하였다. 특히 현종은 국가의 세수 증대를 위해 호구조사를 철저히 하는 과정에서 과세 대상의 적용을 엄격히 하는 등 국가의 토지 및 노동력을 장악하고자 도모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이후 보다 큰 왕권강화를 추구한 영, 정조 시기에 완전히 고착화되는데, 영조는 기존에 계속 논란이 되어 왔던 종모법을 확고하게 자리잡도록 만들었으며, 속대전에서 사노비가 100냥=쌀 13섬을 바치면 면천시켜 주도록 하는 것을 법제화하였다. 정조는 노비의 신공을 줄이거나 폐지하였고, 도망 노비를 추적하는 추쇄관 혁파를 통해 공노비 자체가 자체 붕괴하도록 부채질하였다.
이러한 노비 제도의 변화로 인해 17세기부터 노비제는 무너지는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34] 영조-정조 시기를 거치며 노비들의 도망이 극에 달하여 호적상 등재된 노비들의 숫자가 크게 감소하였다. 이영훈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이미 영조 시절에 조선의 노비 비율은 전체 인구의 10% 미만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Gwyn Campbell의 Structure of Slavery in Indian Ocean Africa and Asia(2004)에 따르면 18세기에 노비 비율은 크게 감소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이 시기의 노비호의 비율을 보면 단성은 1717년엔 27.6%, 1786년에는 8.8%이고 울산은 1729년엔 13.9%, 1765년엔 2.0%으로 기록되어져 있다. 대구는 1732년엔 26.6%, 1789년에는 5.0%이며 언양의 경우엔 1711년엔 8.2%, 1798년엔 1.4%로 기록되어 있다. 왜란과 호란 때문에 국가의 행정력이 크게 약화되었던 17세기 초중반보다는 신뢰성이 더 높다.
# 링크된 뉴스기사는 권내현 교수가 저술한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 어느 노비 가계 2백년의 기록'(2014)이라는 책을 추천하는 기사인데 호적대장을 통해 18세기에 노비의 비율이 크게 줄어들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서는 단성현의 도산면의 호적자료를 예시로 들고 있는데 1678년엔 이 지역의 남성 주호 중 노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40%가 넘었으나 1780년에는 10% 미만으로 급락했으며 이후에는 명맥만 유지하는 수준이였다고 서술하고 있다.(156쪽) 물론 이것은 18세기 기준이고, 그 이전 시기인 17세기에는 위에서 보았듯 더 높게 잡히고 있다. 책을 리뷰하는 기사 내용만 해도 30%를 노비 비율로 추산하고 있다.
세도정치 기간 동안 반 노비정책으로 크게 줄어들며 일시적으로 사노비가 증가하기도 하였으나 개혁은 꾸준히 이루어졌다. 1801년 정순왕후 김씨에 의한 66,000여명의 공노비 해방을 시작으로 1864년 궁노비 해방, 1886년 노비 세습제 폐지(사가노비절목)를 거쳐 1894년 갑오개혁과 함께 사노비도 완전히 폐지되었다.
19세기가 되면 호적상의 노비호는 거의 소멸하나 솔거노비 수는 호적상에서 오히려 증가하는 경향이 보여지는데 이는 실제 솔거노비 수가 증가한 것이 아니라 노비를 보유하지 않은 호여도 노비를 1명씩 솔거노비로 기재하는 관행이 정착된 결과라 해석된다. 이를 보여주는 사례가 1876년 대구 조암방 호적대장과 1897년 화곡면 호적중초이다. 1876년 대구 조암방 호적대장에 기재된 208호 중 187호가 노비를 1명 기재하고 있었으며 1호가 노비 2명을 호적에 기재하고 있었는데 호적에 등재된 노비 189명 중 나이가 제대로 기록된 노비는 3명에 불과했다. 1897년 화곡면 호적중초에서는 266호 모두가 노비를 1명씩 호적에 기재하고 있었는데 이들 중 나이가 기재된 노비는 전무했다. 김건태 교수는 이 현상을 노비를 소유하지 못한 호들이 노비를 1명씩 호적에 기재하는 관행이 자리잡아서 일어난 현상으로 해석하였다.[출처:] 이런 현상은 대구부 호적대장과 단성현 호적대장 등에서 확인된다.
이런 현상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시가 대구부 동상면 호적대장인데 19세기 중반부터는 거의 모든 호가 노비를 호적에 기재하고 있으며 호적에 기재된 노비 대부분이 연령도 적혀있지 않은 상태였다.[36] 이는 대구부 읍치 외곽의 가상의 노비가 유학호 증감 수와 연관되어 증감하던 것처럼 실제 노비인구의 수와 연관이 적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나이가 기재된 노비만을 실존하던 노비로 인정한다면 노비 수는 19세기 초중반에 급격하게 감소 중이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37]
노비를 여러 명 호적에 기재한 호들의 경우에도 노비 대부분이 실제로는 없는 노비인 경우가 많았던 것이 확인된다. 예를 들어 1831년 단성에 살던 심이도는 호적에 29명의 노비를 기재했는데 실제로 그에게 있는 노비는 1명이였으며 심찬한은 32명의 노비를 같은 해 단성현 호적대장에 기재했는데 그에게 실제로 있는 노비는 2명이였다.[38]
다만 이런 관행은 19세기의 인천부 영종지역의 호적이나 거제부 호적중초 등에선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거제부 고현면의 향리 호적중초에서는 노비가 아예 호적에서 나타나지 않으며[39] 1867년 인천부 영종지역에 살던 2781명 중 노비는 18명으로 전체 인구의 약 0.6%에 불과했다.[40] 특정 지역에서는 노비를 소유하지 못한 호가 가상의 노비를 1명씩 호적에 기재하는 관행이 나타났지만 특정 지역에서는 그런 관행이 나타나지 않은 이유는 불분명하다.
조선시대에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다물사리'라는 여자가 자기는 성균관 소속의 관비인 길덕의 딸이라서 자신도 관비라고 주장한 특이한 송사가 있었다. 노비 송사로 본 조선의 사법 풍경 2010-02-19
또한 조선왕조실록[41] 상의 기록 만으로도 관료의 집안이 역모에 연루되어서 "노비"로 "영속"되었다는 기사들이 상당히 나온다는 것을 고려하면 역모에 연좌된 자들의 가족들을 공노비나 사노비로 영속시키는 일이 상당히 관행적으로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연좌된 가족 중 16세 이하는 16세가 되는 해 공노비 등으로 영속시켰고, 이에 대해 일종의 대명률과의 법리 논쟁도 벌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2.5. 근현대
1886년( 고종 23년)에 노비세습제를 폐지하면서 노비의 자녀들은 자동으로 양인이 되었다. 양인 신분이므로 당연히 매매를 비롯한 노비 처우는 금지되었으며, 이후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를 폐지하면서 노비제 또한 완전히 폐지되어 공식적으로 남은 노비 전원은 양민이 되었다. # 물론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공식적으로는 완전히 폐지되면서 형식적으로는 노비도 같이 사라졌으나 모든 노비들이 자유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 능력이 있는데 노비라서 재능을 발휘할 수 없었던 극소수는 혜택을 받았으나 평범한 노비들은 신분만 머슴으로 전환되었을 뿐 이전과 같은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경제적으로 주인에게 예속된 상태였고 노비를 부릴 정도의 주인은 대부분 상류층이었으며, 또한 마을 자체가 작은 사회여서 주인에게 제대로 밉보이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그나마 자립 가능한 노비들만이 독자적으로 살 수 있었지만 이들이 대다수였으면 노비제가 그렇게 오래갈리가 없다. 주인들은 머슴들에게 의도적으로 적은 보수를 주면서 겉으로는 노동자로 대우했으나 실제 처우는 누가 봐도 노비였으며, 작은 사회에서는 누가 노비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노예들처럼 착취당하는 신세도 여전했다. 즉, 이들은 머슴으로 이름이 바뀌었을 뿐, 실질적인 처우는 여전히 노비와 마찬가지였으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서는 노비의 실질적 해방이 주요 토론 주제 중 하나였다.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을 전후해서 김좌진, 여운형, 이회영, 윤치호 등 계몽사상에 심취한 지식인들은 노비문서를 불태우며 가정 내의 노비들을 해방시켰다.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는 자신의 여성 노비 2명을 해방시키며 한 명은 며느리로 삼고 한 명은 수양딸로 삼는 혁명적 실천을 했다. 또한 1928년 계명구락부에서 노비 해방에 관한 논의가 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식민사관론자들의 주장과 달리 일제강점기 내내 현실적인 노비 계급이 실존했음을 알 수 있다.[42] 물론 이탈하는 걸 법적으로 막을 수는 없었으므로 신분제 폐지 이후 많이 줄어들긴 했으나 대신 이들에게 땅을 빌려주고 대신 인신까지 어느 정도 통제하는 소작농 형태로 부려먹는 경우가 급격히 늘어났다. 주인은 이들이 부당한 대우에 저항하면 해고하겠다는 위협으로 여전히 인신을 통제했으며, 어떻게 벗어난다고 해도 20세기 전반의 웬만한 나라가 다 그렇듯이 도시로 상경해도 공장에서 싼값에 부려먹히는 저임금 노동자 신세였기 때문에 운이 좋지 않으면 머슴에서 벗어나는 것이 삶의 질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일제 강점기 노동자와 소작농의 처우는 나빠지면 나빠졌지, 나아진 적은 없다.
광복 이후에도 당연히 노비는 있었으나 6.25 전쟁이 터지면서 사회가 뒤집어졌다. 다만 사회가 한바탕 뒤집혔다고 해도 전후기에도 한 동안 궁핍했던데다가, 실업률도 높아서 도시로 상경해봐야 실업자 신세인 경우가 많았던지라, 머슴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43] 그러나 1960년대 들어서 일거리가 점차 늘어나기 시작하자, 머슴들은 시골을 떠나고 도시로 대거 상경하게 되었고, 머슴고용비 또한 급속히 상승하였으며, 머슴의 대다수는 초등교육을 받은데다가 군입대를 한 경력까지 있었던지라, 이전처럼 막 대하기가 어려워졌고, 실질적인 노비는 급속하게 사라지게 된다. 1970년대까지는 지방의 낙후된 시골지역에서 그 존재 양상을 확인할 수 있으나 새마을운동을 거치면서 지방의 노비계급까지 폐지되었다.[44] 1980년대 이후로는 섬노예, 지적장애인 등의 사례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소멸하게 된다. 가끔 비하적 표현 등으로 비유적으로 용어가 쓰이기는 한다.[45]
현대에 정말로 사람을 노비처럼 부린다면 불법이며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며, 대표적으로 섬노예 등이 그러한 경우이다. 해안도서의 섬노예뿐만 아니더라도 타 지역에서 지적 장애인들을 시골 농가나 외진 곳에서 착취하는 범죄는 잊을 만하면 뉴스가 뜬다.
3. 노비의 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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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노비제에 있어서 가장 큰 분류로는 소속의 주체에 따른 분류가 있다. 이러한 분류에 따르면 국가에 예속되어 있으면 공노비, 개인에게 예속되어 있으면 사노비로 나뉜다.
- 공노비는 소속기관에 따라 내수사, 즉 왕실에 소속되어 일하는 궁노비는 내노비, 행정기관에 소속될 경우 시노비라고 불렀으며, 이들을 합쳐 내시노비라고 하였다. 감영이나 병영에서 일하는 노비는 영노(營奴), 관아에서 일하는 노비는 관노(官奴)라고 부른다.
- 사노비의 경우 거주 형태에 따라 주인과 함께 거주하는 솔거노비와 따로 나와 거주하는 외거노비로 구분하는 것이 통례이다. 김석형의 1957년 논문 "조선시대 농민의 계급구성"에서 노비를 거주 형태에 따라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나눈다. 김석형의 논문에서 외거 노비가 농노와 같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이렇게 나누었다. 그런데 이영훈의 1987년 논문 "고문서를 통해 본 조선전기 노비의 경제적 성격"에서는 외거노비가 농노와 같다는 김석형의 주장을 반박한다. 외거노비와 솔거노비 사이에 이동이 상당히 빈번하게 이루어 졌기 때문에 외거노비가 농노라는 김석형의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거주 형태에 따른 분류가 아니라 상전 또는 국가에 바치는 재화의 형태에 따라 納貢(노비), 즉 재화로 부담하는 경우와 仰役(노비), 즉 노동력을 제공하는 경우로 분류할 것을 제안한다. 이영훈의 주장은 조선 전기 봉건제 설을 부정하고, 토지국유론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나온 것이다.
- 일반적으로 주인과 함께 거주하는 솔거노비는 공노비의 선상노비와 같이 주인에게 직접적으로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비가 주를 이루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극 등지에서 보는 일반적인 노비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이 솔거노비이다.
- 외거노비는 주인과 분리되어 거주하면서, 주로 신공을 납부하는 노비를 의미한다. 노비 유형에서 다수를 차지했다. 일반적으로 외거노비는 솔거노비에 비해 주인에게 독립적이며, 좀더 자유로운 생활이 가능했다는 특징을 가졌는데 이에 따라 외거노비들은 노비주의 허락 아래 가정을 꾸민다든지 사유재산을 모은다든지 하는 일이 가능했다.[46]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외거노비들의 토지소유가 늘어나면서 외거노비가 노비를 들여서 토지를 관리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다만 이러한 사노비의 신분은 주인에 자의에 따라 유동적인 측면이 있어서 언제든지 외거노비가 솔거노비로 전환될 수는 있었다. 또한 노비의 사유재산은 주인이 작정하고 빼았으면 일정 부분 강탈당할 수는 있었으며 외거노비 본인뿐만 아니라 자녀나 심지어 배우자까지도 얼마든지 임의로 처분할 수 있었다. 일례로 노비주들은, 노비가 자녀 없이 사망하였을 경우 재산이 주인에게 귀속된다는 것을 악용하여 노비의 재산 일부를 강탈하기도 했다. 노비의 자녀들을 매매하거나 상속하여 노비를 '자식 없는 종'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 이는 불법이었으나 양반들의 관행으로 여겨져 법에 제소할 성격의 문제로조차 여겨지지 않았다.[47] 그러나 주인이 노비의 재산을 마음대로 강탈하는 행위가 빈번했나 하면 그것은 또 아니다.[48]
사실 제소 자체는 할 수 있도록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었다. # 하지만 대부분의 노비들은 글을 못 읽었고 법을 몰라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분류로는 노비의 의무부담형태를 토대로, 관청 등지에서 직접적으로 노동력을 제공하는 선상노비와 일정량의 재물을 바치는 납공노비로 나누는 것이 있다. 서울에 거주하는 경거노비들은 거의 대부분 선상노비였으나, 지방의 노비들은 선상노비와 납공노비라는 두가지 형태가 혼재되어있었다. 납공노비가 제공하는 의무의 부담은 양인에 비해 배 이상 과중한 것이었는데, 일반적으로 양인의 경우 정남(丁男)에게만 국역이 부담되었지만, 노비의 경우 노와 비에게 모두 의무가 주어졌다. 이들 납공노비가 납입하는 신공은 국가재정의 상당량을 차지하여, 성종때에는 면포 72만 4,500여필, 정포 18만여 필에 달했다.
현재까지 학계에서는 위와 같은 사노비의 분류가 많이 쓰여왔으나, 실질적으로 이러한 분류에 대해서 사노비를 공노비와 같이 양역노비와 납공노비로 분류해야 한다는 주장[49]이나 양역노비와 솔거노비도 구분되는 존재였다는 주장[50] 또한 있어 노비의 유형분류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고려는 부모 중 한쪽만 노비여도 자식은 노비가 되었고 천자수모의 원리에 따라 자식의 소유권은 모계의 노비주에게 있었다. 노비주들은 노비를 늘리기 위해 자신이 가진 여성 노비를 양인 남성과 적극적으로 혼인시켰는데 이로 인해 양인의 수가 감소하고 노비의 숫자가 증가하였다. 조선의 태종은 이를 바로잡고자 노비종부법을 도입하였으나 세종 때 이르러 폐지되고 종친과 문무 관료의 자손에게만 예외규정으로 적용되게 된다. 대신 세종은 노비종모법을 도입하고, 성종 대부터는 그냥 일천즉천이 자리잡는다. 물론 시대에 따라 노비종부법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고, 범위가 조금씩 달라지며 양인과 천인의 숫자를 조절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러 그때까지 제로에 가까웠던, 양인 여성과 노비 남성의 혼인이 조금씩 늘어나면서 일천즉천은 종모법으로 간신히 완화된다.
기술관원인 취재는 응시제한이 없어 노비도 시험을 볼수 있었다. 또한 관청에서 근무하는 말단 공무원인 이원은 다수가 노비 출신이었고 이들은 조선의 실질적인 행정 업무를 담당하였다. 다만 과거에 합격해 관리가 된 관원(官員)과는 다르게 이들은 정식 봉급을 받지 못했고 처우 역시 노비 출신이라 상급자에게 밉보이면 노가다판으로 끌려가는 일도 다반사였다. 다만 생활비는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4. 주변국과의 비교
세계사가 고대 노예제-중세 봉건제-자본주의-사회주의로 나아가는 마르크스주의 사관의 영향으로[51] 간혹 인터넷 등에서 조선에 대한 비판으로 주변국에서는 일찍이 폐지되었던 노예제를 조선에서는 자국민을 대상으로 계속 유지했다는 의견이 있으며, 더 나아가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국민을 노예로 부린 나라라거나 조선의 신분제가 세상에서 가장 악랄한 신분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52] 일단 일본은 부라쿠민과 같은 특수계급이 존재하였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천민일 뿐 누군가의 소유물은 아니었고, 중국의 경우 노비는 존재하였으나 70세가 된 관노비는 양인으로 삼게 하거나[53] 노비 신분이 자식에게 세습되진 않아 부모가 노비라도 자식은 노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중국의 과학과 문명'이라는 서적에선 동아시아의 노예는 노동 유형의 차이를 제외하면 양민과 크게 다르지 않은 농노의 위치에 있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고려와 조선은 노비의 신분이 혈통적으로 세습되었는데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이러한 현실을 지적하며 중국에도 노비가 있지만, 모두들 범죄 때문에 노비가 되거나 스스로 몸을 팔아 고용된 것일 뿐이며 혈통을 따라 대대로 노비가 되는 법은 없다고 비판한 대목이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며 조선과 같은 시대인 중국 청나라에서도 집안에서 부리는 노비들이 같은 여자 노비인 하녀와 결혼하여 낳은 아이들은 가생자(家生子)라고 하여, 부모의 신분을 그대로 물려받아 관습적으로 세습 노비가 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한국의 노비 비중이 주변국에 비해서 컸다는 점도 있지만[54] 사실상 중국의 왕조들의 노비 인구는 호구 조사 증거가 없을 뿐 한국이나 일본보다 더 많거나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 한나라 시대에는 노비를 전문적으로 파는 시장인 노시(奴市)가 있어 집중적으로 노비 매매를 진행했다. 또한 한나라의 노비 대부분은 파산한 농민이 전락하여 형성되는데 노비는 각종 중노동에 종사했으며, 주인의 사적 재산으로서 마음대로 사거나 팔 수 있었다.[55] 아울러 중국 청나라 시대에도 노비를 사고 파는 시장은 엄연히 존재했는데, 매 번 장날이면 사방 멀리에서 팔려는 노비들이 몰려오곤 했다. 강희제 20년, 대동과 선부 등지는 연속 몇 해 동안 흉년이 들어 가난한 백성들이 아들과 딸을 팔았는데, 어린 아이는 백 문도 안 되고 성인도 은 1~2냥이 안 되었으며 크고 작은 수레들이 끊이지 않고 들이닥쳐 여러 손을 거쳐 판매되곤 했다.[56]
일본의 부라쿠민도 인신이 예속되었고 법과 제도적으로 천시받은 존재라는 점에서 하등의 차이가 없었고, 양인들과 뒤섞여 살았던 노비와 달리 다른 계급과 철저히 구분되고 배척되는 존재였다. 오히려 그런 부분에서 마르크스식 개념에서는 노비보다 더 노예에 가까운 존재였다. 또한 일본의 농민 혹은 농노들이 조선의 노비와 달리 노예가 아니었다고 잠정적인 결론이 있지만 육식금지령이나 마비키[57]같은 풍습만 봐도 조선의 노비들보다 생활 수준이 높았다고 단정짓기도 힘들다.[58] 일각에서는 몇몇 부농들의 사례만 보고 에도 시대가 조선보다 좋았다고 설레발치는 경우가 있지만 조선에도 사유재산을 가진 부유한 노비가 존재했으니 반박 가능하다. 또한 위의 수많은 분석에서 보듯, 조선의 노비들도 여러 측면에 있어 일본의 농노와 비슷한 위치[59]에 있었다는 해석도 적지 않다는 걸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다.
그리고 11~17세기 일본엔 게닌이라 불리는 계층이 존재했는데 이들은 주인에게 예속된 존재였으며 주인에 의해 매매, 양도 등이 이루어졌고 주인에 대한 어떠한 법적인 권리도 없었다. 주인이 게닌을 죽여도 일반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으며[60] 막부에선 주인과 게닌 사이의 일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이들은 말이 노예가 아닐 뿐이지 사실상 노예에 속하는 존재였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조선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이영훈 교수도 자신의 논문 '11~16세기 한국의 노비와 일본의 게닌(下人)'(2004)에서 오히려 게닌은 노비와 달리 다른 자유민에 대한 법적권리도 없었던 점, 게닌에겐 심한 노예상징이 강요되었던 점, 그리고 조선의 노비와 달리 일본의 게닌의 경우 주인과 게닌의 사이에 막부가 전혀 개입을 하지 않고 완전한 주인의 사유물로 공인했던 점 등을 들어 조선의 노비보다 더 노예적 범주에 가까운 존재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영훈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17세기 초중반 인구대장에서 일부 지역들에서 게닌의 비율이 전체 인구의 3,40%였음이 확인된다고 한다. 물론 일본 전체의 평균치는 이것보다 낮았으므로 게닌의 평균 비율은 17세기 조선의 노비비율보다 좀 낮긴 했지만 대신 조선의 노비보다 일본의 게닌이 더 노예적 성질이 강했던 것을 감안하면 어느 나라가 더 낫다고 말하긴 힘들다.
또한 에도 시대 일본은 기본적으로 사농공상[61]과 봉건제에 기초한 신분제 사회였다. 계약 노동 형태의 노예는 당시 형법의 강제 노동과 더불어 존속하였고, 피지배계층 대다수가 농노로서 이들은 거주 이전의 자유나, 어떤 농작물을 경작할지도 통제받는데다, 의식주에서도 매우 강한 제한을 받았다. 거기다 에도 후기로 갈수록 무명옷 입기 금지, 쌀밥 먹기 금지 등 이상한 제한이 붙는다. 즉, 에도 시대 평민(?)들은 동시기 조선 평민과도 비교해서 법적으로 보장된 권리가 매우 낮았으며, 심지어 동시기 조선 평민들은 과거제를 통해 양반으로의 신분 상승도 가능했었던데 비해, 성씨의 유무 차원[62]이라던가 의식주 권리 차원이라던가 경작물 선택 부분 등에서 보자면 조선의 외거노비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못하다고 볼 측면이 있는 게 당대 일본 평민(농노)들의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계약 노동 형태의 노예는 물론이고 일반 피지배계층 대다수가 자유롭지 못했다. # 물론 에도 막부 말기에 가면, 조선의 천민들이 그렇듯이 돈을 주고 몰락한 사무라이 가문의 양자로 들어가거나, 고용주인 다이묘로부터 해고당하여 낭인으로 전락한 떠돌이 무사로부터 족보를 사서 사무라이 신분이 되는 경우도 많았으며, 쿠로후네 사건 이후로는 난세를 틈타서 검술에 능한 평민들이 각 번의 다이묘나 막부의 중신들에게 중용되기도 했다. 신센구미가 이렇게 신분상승한 평민 출신 무사들이 주축이 된 집단이었다. 일본 역시 평화로운 세월을 오랫동안 보내면서 유교의 영향도 받았기 때문에 영민들에 대한 대우는 대체로 초기보다는 나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특히 막부 직할 영지는 다른 지역보다 세율이 낮았다. 신센구미같은 이들이 나타난 것도 이런 상대적으로 낮은 세율[63] 덕분에 부를 축적한 평민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물론 센킨고타이 같은 부역 부담이 상대적으로 심한 지역은 세율이 높았는데 대표적으로 고산케 중 하나인 미토 번이다. 이 지역은 초기에는 실제 생산량보다 석고가 높게 책정된 이유로 세율이 높았다. 이외에도 에도 시대에는 요시와라 유곽을 통해 수많은 농민 출신 여자들이 유녀로 팔려갔고 성착취를 당하다 버려졌으며, 사민평등이 끝났다는 일본 제국에서도 대공황 등의 이유로 자기 자녀들을 판매하는 가라유키상 등의 인신매매가 존재했고 적십자가 이를 구출해낸 사례가 있다. # 요시와라 유곽, 가라유키상 항목 참조. 해당 인신 매매들은 당시 에도 막부 및 일본 정부가 방조하고 합법적으로 유지시켜 줬는데 이걸 마리아 루스 호 사건 당시 노예선 선주측이 이것을 근거로 일본은 노예제 국가이니 자신들을 처벌할 수 없다고 변론하는 바람에 각국의 영사들 앞에서 망신당한 일도 있다. 게다가 16세기때는 다이묘들이 자기 영지 백성들을 포르투갈인들에게 조선의 노비보다 법적인 권리가 더 낮은 노예로 팔아버리기도 했으며[64] 그렇게 노예로 끌려간 일본인들만 수십만이었다.[65] 이 때문에 히데요시가 자국민의 인신매매를 금지시켰으나 조선보다 행정력이 약했기에 에도 막부에서도 또다시 노예매매가 성행해서 또 금지령을 내렸어야 했다.
하지만 청나라 훨씬 이전의 통일 왕조인 송나라 시대에도 방호(旁户)라고 하여 사천과 섬서 지역의 소작농들은 대를 이어 세습하면서 지역의 부호들을 위해 노비처럼 일을 해줘야 했다. 아울러 중국 명나라와 청나라에는 악호(樂戶), 타민(惰民), 세부(世仆), 반당(伴當), 단민(蛋民) 같은 세습 천민 집단들이 존재했다. 이들 천민들은 옷차림과 가옥 등에서 모두 엄격한 규제를 받았고, 규모가 작은 수공업에 종사하거나 노동에만 종사할 수 있을 뿐, 농민이나 장사꾼이 될 수 없었다. 또한 과거 시험에 응시할 자격도 없었으며, 그들과 다른 신분의 사람들과 결혼하지도 못했다. 청나라가 망하고 나서 들어선 신해혁명 이후에서야 혁명이 일어나 농노비 해방이 이루어졌고, 성씨가 없었고 족보도 없었던 인구 89% 이상을 차지하던 중국 백성들이 성씨[66]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민적법이 실행되어 한족으로 등록이 되었다는 것이다. 중화민국 시대(1911~1949년)에 가서야 중국의 백성과 천민 집단들은 비로소 없어졌다. 그러나 현재에도 농민공 문제가 새로운 신분차별로 대두하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경우를 놓고서 중국과 일본의 신분제 문제들이 조선 노비제의 형태와 조금 달라 보였을 뿐이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중국과 일본은 농노제 문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지방 귀족들이 농민을 농노처럼 부릴 수 있는 권리가 컸다는 의견도 있어서 농민들이 노비 역할을 대신했다고도 보는 시각도 있다.
노비를 노예로 보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외국 학자들도 정복활동이 거의 없고 국가적 변동이 크지 않은 것을 노비제의 원인으로 둘 뿐. 딱히 조선의 노비제를 두고 조선인 특유의 비윤리성을 주장하거나 한민족의 민족성을 폄하하지는 않는다. 사실 외국 학자들은 마르크스주의 역사 도식을 회의적으로 보기에 노예제가 고대의 특징이 아니라고 보는 것도 한몫한다.
무엇보다도 조선의 경우 근현대에 들어서 노비 비율이 한자리 수로 떨어지지만 태국의 경우 20세기초까지도 전국민의 30%가 노예였다가 점진적으로 폐지되었다. # ##
서유럽에서 일찍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인 나라인 아일랜드도 자국민들을 잘만 노예로 부려먹었고[67], 근세 미국으로 이주했던 영국인들도 같은 영국인들과 아일랜드인들을 연한계약하인 이라는 이름의 세습 노예로 부려먹었다. 그밖에 루이 14세 시절의 프랑스에서도 자국의 가난한 빈민들을 갤리선의 노젓는 노예로 보내서 실컷 혹사했다. # 또한 농노제도 당시에 있어서 비윤리적인 종속제도로 비판을 받았다. 그나마 서유럽에서는 농노가 권리도 많았고 확실했기에 농노제가 15세기 이전부터 축소되기 시작했지만[68] 동유럽에서는 19세기 중엽까지 자국민의 절반 이상을 농노로 부리면서 권리를 더욱 악화시킨채로 유지했다. 티베트에서는 아예 전국민의 90%가 1800년대까지 농노였고 1900년대 초반에 폐지했다.
즉 타국과 조선은 신분제가 달랐기에 1:1 비교를 할 수는 없지만 인권의 개념이 정립되지 않았던 전근대 타국에서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조선의 노비와 비슷한 비윤리적인 신분에 종속되어 있었다.
5. 여담
- 고려와 조선은 일천즉천(一賤則賤), 즉 "부모 중 한쪽이 천한 신분이면 자식도 천한 신분이다."라는 사상이 사회 전반에 펴져서, 사대부나 기타 양인이 여종을 건드리거나 첩으로 들여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도 노비로 취급했다. 천인 출신 부모 중에 양인 남자와 천인 여자가 결혼한 케이스가 반대 케이스보다 월등히 많아서, 자식의 신분이 어머니를 따라간다는 모변전래(母邊傳來)로 보기도 한다. 이런 특징 때문에, 한 양인이 자신의 재산(=노비)을 늘리기 위해 자신의 노비와 양인을 결혼시켜 자식을 낳게 하여 노비를 양산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보편적이었던 것은 아니고[69] 위에서 상기한 듯이 노비가 급증한 주된 이유는 아니다.
- 노비제도가 공식적인 국가 제도로서 폐지된 것은 조선 후기이나, 이것이 실질적으로 사회 전반에서 사라진 건 한국 전쟁 이후라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70] 8.15 광복 이후 큰 사회적인 혼란 과정에서 기존의 신분을 알 수 없게 된 데다, 좌우 이념 대립 과정에서 개개인의 신분보다는 이념 노선과 능력이 중시되면서 기존의 신분과 관련된 관습의 상당수가 부정되었는데, 이는 한국 전쟁을 기점으로 더욱 가속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역 토호들이 멀쩡한 사람들을 사실상의 노비로 삼아 현대판 노예처럼 착취하는 건 지금도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전라남도 신안군에서 자주 발견되는 섬노예가 있고, 서울에서도 경기장에서 노예로 부려먹은 예도 있다.
- 일반적으로 노비로 인식되지만, 실질적으로는 노비와는 어느 정도 구분되어 이해해야 할 신분으로 머슴이 있다. 머슴은 농가 또는 양반의 집에 고용되어 그 곳에서 거주하면서 '새경'이라는 형태로 임금을 받는 노동자를 의미하므로 노비와는 다르다. 머슴은 중종 대에 나온 최세진의 < 훈몽자회>에서도 언급되는 등 그 역사가 오래되었는데, 갑오개혁 이후에 노비들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된 양반들이 이들을 머슴으로 전환하면서 머슴이 노비와 동일시되는 경향도 있었다. 노비들을 머슴으로 이름만 바꿈에 따라 본래 노비가 아니었던 머슴도 괜히 사회적 인식과 대우가 좋지 않게 되었다.
- 갑오개혁 이후 노비 제도가 폐지되면서 대부분의 노비는 해방되었지만, 실제로는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 태반이라 일부 젊은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양반집에 그대로 매인 채로 머슴으로 전환되어 과거 했던 일을 그대로 이어갔으며, 당연한 일이지만 주변 사람들도 이들에 대한 대우를 노비 시절과 크게 달리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젊은 노비들은 신분제 폐지를 환영했지만 일부 나이든 노비들은 오히려 노비 제도가 없어짐으로써 양반집에서 그걸 명분삼아 해방을 핑계로 그냥 내치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우려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노비제도가 폐지된 이후에도 이들의 처지를 이용한 양반들의 횡포로 그전과 큰 차이가 없는 노동 착취와 인권 유린에 시달렸으며, 단지 합법으로 포장하기 위해 상당히 적은 보수를 지급했는데 최저임금제가 없었던 시절이었고, 이렇게 짜게 부려먹어도 단속대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도시지역에서도 하루 12시간 근무가 당연시될 정도로 근로기준법이 공공연하게 무시되었다보니 그깟 시골에까지 가서 단속할 여력이 있을턱이 없었다. 머슴은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농촌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존재였다고 한다. 다만 이들이 이탈하는 걸 법적으로 막을 수는 없었으므로 젊은이는 도시로 떠났고, 머슴 생활을 한 지 오래된 노인들만 남았다고 한다. 머슴과 노예
- 다른 국가와 달리 조선 시대 노비 대부분은 침략이나 정복을 통해 획득된 이방인이 아니라, 조선 사회 내부에서 채무, 범죄 등 사건과 관련해서 생겨난 사람들이었다.[71] 이에 따라 "양민 ↔ 노비"로의 신분 이동이 비교적 쉬웠던 것. 도망가서 양민 행세를 하면 노비인지 양민인지 구별하기가 힘들었다. 노비주는 노비를 추쇄하는 일에 적지 않은 인력과 자금을 소모해야 하였기 때문에 노비주의 추쇄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덕분에 단점도 있었다. 원한이 있거나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노예 출신이라고 소송을 걸기도 했기 때문이다. 도망 노비의 주인들이 도망 노비의 가계 기록을 50년 넘게 작성하여 그들의 후손이라도 노비로 삼으려 했으나 실패에 그치는 일도 있긴 있었다. 도망간 지 60년이 지나면 노비의 주인은 그 일을 가지고 소송할 수 없었다. 숙종 43년에는 그 기한이 30년으로 줄어든다. 그러나 이런 막장 가계 기록[72]을 작성하여 협박을 하거나 억울한 사람을 노비로 삼는 것에 성공하기도 했다.
- 경제력에 따라 노비주와 노비 간의 갑을관계가 역전되거나 무의해진 사례도 많았다. 가령, 노비가 부자이고 주인은 가난한 경우라면[73], 노비가 공명첩이나 족보 매매를 통해 신분 세탁을 하고 자신의 막대한 재력을 이용해 사또나 지역 유지들과 유착 관계를 맺기도 했다. 그러면 추쇄하러 온 주인이 되려 문서를 위조해서 엄한 사람을 노비로 만들려했다는 죄를 뒤집어쓰면서, 처벌받고 내쫓겨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물론, 노비나 노비주나 서로 속 편하게 해결하려고, 노비가 직접 노비주에게 자기 몸값을 물어주고 자유를 사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자기 주인을 사주해서 주인네 집안의 문중들에게 노비 본인과 그 가족들을 족보에 넣으라고 시키는 건 덤이다.[74] 또, 주인과 노비가 둘 다 가난한 경우도 있었는데[75], 이러면 노비주가 노비를 해방시켜주거나[76], 생활고를 견디다 못한 노비가 알아서 주인을 버리고 달아나는 경우도 상당히 존재했다.
- 경신대기근과 같은 재난 상황에서는 노비들이 좀더 경제적으로는 윤택한 편인 유력자의 노비나 공노비로 본인의 신분을 세탁하기도 했는데, 어차피 생활고때문에 노비로 들어간 마당에 무작정 자유민의 신분으로 되돌아가봤자 딱히 경제적으로 나아지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왕이면 좀더 부유한 사람의 노비로 다시 들어가거나, 꾸준히 숙식을 제공받거나 각종 휴가를 보장받는 등으로 복지가 좋은 편인 관노가 되려는 경우가 적지않았다[77]. 이런 경우는 믿음직한 영향력인 유력자나 공권력 밑에서 호가호위하려는 의도도 있었는데, 이러니저러니해도 노비로 살 수밖에 없다면 그나마 좀더 힘있는 노비주 밑에서 최소한의 경제권이라도 보장받으려는 의도가 컸던 것이다. 그래서 성균관 소속의 노비들인 반인들은 공공기관인 국립대학 소속이라는 점을 악용해서 거꾸로 양반들에게 패악질을 부리거나[78], 자신들의 거주지인 반촌[79]을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으로 만들어서 부를 쌓는 등의 위세를 과시하기도 했다.[80]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때도 이는 다르지 않아서, 전쟁을 피해 달아난 피란민이나, 경제적으로 몰락해 하층민이 된 사람들처럼 곤경에 처한 이들이 일부러 유력자에게 스스로를 팔아넘기기도 했다. 이런 경우, 유력자들에게는 노비가 곧 재산이라서, 재산 보호 차원에서 자기 노비에게 갑질하거나 시비가 붙은 사람에게 보복을 가하기도 하고, 노비들에게 양질의 숙식을 제공하는 등의 복지를 제공하기도 했다. 물론, 어찌되었거나 남에게 예속되는 신분으로 전락한 게 좋은 건 아니라서, 이렇게하는 경우는 그야말로 밑바닥까지 몰리고 몰렸을 때만 그랬을 뿐이다.[81]
- 경국대전에는 공노비를 3년마다 추쇄해 속안을 작성하게 했고 20년마다 1번씩 정안을 작성하게끔 규정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노비추쇄도감을 통해 150년 동안 6차례[82]의 대규모 추쇄가 이루어졌는데 성종 10년에는 그 숫자가 35만 2,565여 명으로 집계되었다. 공권력은 사노비의 추쇄에도 협조적이었는데 원칙상 사노비의 관리는 노비주의 몫이었으나 추쇄하는 과정에서 관청과 노비주가 공조하며 노비주의 이권을 보호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노비 추쇄 제한 조치가 이루어졌으나 불법적인 노비 추쇄는 꾸준하게 나타났고 이것은 커다란 사회 문제로 발생하기도 하였다. 또한 반노비제 정책이 실시되던 숙종~정조 시기에도 관아에서는 입안을 발급하여 노비 주의 소유권을 강화해 주는 등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83]
- 노비 가족은 부부와 미혼의 자녀만으로 이루어진 4~5명 정도의 소가족이 대부분이었다. 노비주들은 노비가족의 자녀들을 1~2명씩 분할하여 자신의 자녀들에게 형식상 상속함으로써 노비주 일족이 노비 가족을 공동으로 소유, 관리하는 구조를 만들었고 이러한 공동소유, 공동감시를 통해 노비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 미국이나 카리브 해안 국가들에서는 남성 노예가 여성에 비해 값이 높았고, 조선 역시 일단은 노의 가격이 공식적으로 비의 가격보다 높았다. 그런데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었고, 특히 후기로 갈수록 노비의 거래량 역시 여성 노비가 남성 노비에 비해 자주 거래되었고, 가격 역시 비가 더 높게 매겨지는 경우가 많아진다. 이것은 밖에서 농사일을 주로 하는 남성 노비의 경우 도주의 위험성이 높고, 지주-소작의 농업 경영이 주류를 이루면서 남성 노비의 노동력이 가치가 낮아졌기 때문이다. 또한 남성 노비는 주로 단일 대상이 거래가 많이 된 반면, 여성 노비는 어린 자녀가 동반된 2~3인 형태의 거래가 많았다. 특히 20세 즈음의 여성 노비의 가치가 가장 높았는데 이는 자녀 생산을 통해 노비를 증식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또한 전반적으로 노가 비보다 비쌌던 것은 사실이나, 비의 경우 주인 남성의 첩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가졌으면 시세보다 훨씬 높게 거래되었다.[84]
- 외거노비의 경우 혼인률은 70%에 이르렀지만 솔거노비는 혼인율이 20%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혼인을 하지 못했던 대다수의 솔거노비들은 다수의 불특정 이성과 관계를 맺거나 노비주의 암묵적 동의를 받고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기도 하였다. 또한 젊은 여성 노비의 경우는 상전의 성 노리개가 되는 일이 잦았는데[85], 이에 따라 아버지를 알 수 없거나 밝힐 수 없는 자녀를 출산하는 일도 많았다. 그나마 소유주와 여성 노비 사이에 태어난 아이를 소유주가 얼자로 공인하거나 속량 또는 면천시켜주면 나은 경우였고 종모법이나 천자수모법이 나오게 된 것도 이러한 이유가 연관되어 있었다. 유전자 검사가 없던 시절이라 누구 씨인지 밝혀내기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기 때문에, 비가 아이를 낳으면 일단은 노비로 간주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었다.
- 함경도를 비롯한 한성 이북 지역은 노비의 숫자가 적었기 때문에 삼남지방에 비해 노비의 가격이 몇 배 이상 높았다. 때문에 남부 지역의 도망노비나 갈 곳 없는 떠돌이들을 유혹해 함경도 등지에 파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86]
- 대토지를 보유한 양반들은 소작보다는 주로 노비를 이용하여 농사를 지었는데 그 방법에는 작개(作介)와 가작(家作)이 있었다. 여기서 가작이란 주인집 주변의 토지에서 농사를 짓고 그 생산된 농산물을 전부 주인이 가지는 방법을 말한다. 작개란 주인집에서 멀리 떨어진 토지를 경작하는 방법인데 사경(私耕)이라 불리는 질낮은 토지를 노비에게 주어 생활하게 하고 작개라는 불리는 질 좋은 토지의 생산품은 주인이 가지는 방식을 말하였다. 작개에서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노비가 얻는 이익은 없었기 때문에 노비들은 작개보다는 사경에 힘을 쏟았고 주인들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 폭력으로 대응하였고, 공권력 또한 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소유주의 편이었다. 수확량이 적거나 혹은 씨 뿌리기, 잡초 제거 등을 소홀히 하였을 경우 곤장 최대 70대까지 치게 하였는데 당시의 곤장은 30대만 맞아도 죽을 수 있는 무시무시한 형벌이었다. 이 외의 사적 폭력 역시 당시 사회에 만연해 있었다.[87] 영조는 남형금단사목을 발표하여 노비를 함부로 죽이거나 체벌하는 일을 막고자 노력하였으나 오랫동안 내려온 관습을 없애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작개제는 17세기 이후 소농경영에 밀려 쇠퇴했으나 사경(私耕)은 새경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현재까지도 일부 농촌지역에서 쓰이고 있다.
- 조선시대 자매노비(自賣奴婢) 즉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양인의 집에 투탁한 경우는 금전이나 곡식을 납부하면 바로 양인신분으로 상승되었는데 아마도 이를 자개라고 지칭했을 가능성이 높다.
- 간혹 조선시대에 노비문서에 수개(壽介)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인간을 개에 빗대어 "수캐" 를 점잖게 표현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수개란 말 그대로 "목숨을 의지하는 사람" 을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는 조선시대를 지나치게 반 인권적이었던 시대로 깎아내리기 위한 주장이다. 문인들 중에서도 서정주의 〈자화상〉의 맨 앞과 맨 뒤 구절을 이렇게 연결해서 해석하는 사람들도 가끔이지만 있다. 사실 이름을 천하게 짓는 것은 노비보다 왕족에서 더 흔한 일이었다. 그래야 귀신이 잡아가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고종도 어렸을 때 이름은 '개똥이'였다.
- 조선시대 노비에 대한 국가의 처우방식을 가장 직접적으로 느끼는 방법은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노비에 대해 검색하는 방법이 있다. 의외로 단순하고 직접적인 방법. 예를 들어 조선왕조실록의 첫 편인 태조실록부터 벌써 공 있는 자에게 노비를 나누어 주거나, 죄인의 처족으로서 노비된 자를 풀어주거나, 여성 노비가 양인의 종첩이 되어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의 상속권은 어찌 되는가 등을 세세히 논한다. 그 외 세조가 자신조다 윗 항렬인 종친이 여성 노비를 강간하자 아래 항렬인 자신은 벌을 줄 수 없다고 논한 일, 이숙번이 강간하려 하자 15세 여노비가 이마를 칼로 찌르니 조정에서 무죄라고 판명하거나, 주인의 권세를 믿고 조정 내에서 양반을 구타한 사례, 반대로 여종이 강간으로부터 도망치자 적반하장으로 관가에 신고를 하거나, 여종을 일방적으로 구타하여 죽음에 이르게까지 한 경우까지 그 기사가 수천 개에 달할 정도로 매우 많다. 그리고 양반들이 쓴 일기에서도 노비의 상벌에 대해 쓴 기록이 많다.[88]
- 조선왕조실록뿐 아니라 민간 사료에서도 노비의 처우는 자주 드러난다. 예를 들어 여종에 대한 처우는 박했으며 성폭행에 가까운 일도 자주 벌어졌는데, 묵재일기에서는 여종 향복(香福)이 양반인 이천택(李天澤)에게 강간당한 사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강간당한 여종이 오히려 처벌을 받는 모습이 묘사된다. 또한 부북일기에서는 군관이 부임할 때 각 군관에게 배정되어 수발을 드는 기생 방직기(房直妓)가 등장하는데 방직기는 일종의 '현지첩'이었다. # 다만 종종 방직기가 모자르게 되면 여자 노비가 이를 대체하는데 부북일기에 등장한 사례(박취문 일기, 인조 23년 7월 22일~23일)를 보면 경성부사는 남편이 죽은 후 수절을 지키고 있는 여종 태향(苔香)을 불러서 군관을 모시도록 요구하였다. 하지만 태향은 이를 거부하였고 이에 경성부사는 태향의 어머니와 오빠를 잡아다 곤장을 치게 함으로써 태향이 강제로 군관을 데리고 집에 데려가도록 했다. 여성의 정조를 강조하는 유교 윤리가 노비에게는 예외였다는 사례. 이렇게 군관을 물적으로, 성적으로 모시게 되는 여자 노비를 방직비(房直婢)라고 하였다. 또한 시침(侍寢)이라고 하여 조선시대 여자 노비는 주인의 손님에게 성접대를 제공하기도 했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이민즙(李敏楫)의 노비인 강지(姜之)와 함께 잔 이문건, 이사겸 (李士兼)의 노비인 소애(小艾)와 잠자리를 함께 한 유희춘 등이 있다. # 당시의 기록을 보면 이런 시침을 대수롭지 않게 기술하고 있는데 이를 보면 당시 이런 관습은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남편이 있는 여노비들은 건드리지 않았다.
- 일본의 혐한 극우들이 노비에 대한 걸 꺼내들며 일본이 한국보다 신분적으로 좋았다 뭐다[89]라고 하는 경우도 있지만 혐한 세력이 날조한 역사 왜곡일 뿐이다. 불쏘시개인 <추한 한국인>에서 일본 혐한 극우가 가짜 한국인 시늉을 내며 이렇게 언급하는데 그야말로 소설 쓰듯이 마구 썼는데 개판이다. 이를테면 엉터리 한국인으로 쓴 자신이 노비들만 사는 마을에서 자랐다고 적었다가 일본 내 한국학 연구학자들에게도 신나게 까였는데, 노비들만 사는 마을이 존재할 리 없었기 때문. 즉 일본의 부라쿠민이랑 비슷하겠지하고 대충 끼워맞춘 것일 뿐이다. 굳이 비슷하다면 백정들이 사는 마을이라든지 조선도 천민 계급이 따로 사는 곳이 있긴 했다. 그러나 이 책자에서는 백정은 언급도 하지 않으며, 나중에는 중인층만 따로 모여 사는 마을이라고 수정했다가 이것 또한 신나게 비웃음당했다. 중인층만 사는 마을도 기록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일본 사회에서 부라쿠민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90] 출신들은 엄청난 차별과 탄압을 받았고, 지금도 일본 극우들이 혐오한다.[91] 이런 지적에 3년 뒤에 나온 <추한 한국인 2>에서는 좀 조사했는지 변명했지만 이후 출판사 측과 수익 분배 문제로 법정 싸움까지 가서 출판사가 가짜 한국인이 썼다고 밝혀졌다.
- 조선시대를 다룬 창작물에서는 드라마성을 위해 노비가 극단적인 환경에 처하는 사례가 주로 나오는 편이다. 다만 노비가 글을 읽는 다는 이유로 린치를 하거나 하는 경우는 과장된 부분이다. 글 읽는 노비는 그냥 재주 좋은 노비지 불이익 받을 일이 아니다.[92] 오히려 노비가 글을 읽고 학문이 뛰어났다면 노비이면서 서당을 열고 훈장으로 활동하면서 양반들한테도 정선생이라고 불렸던 정학수처럼 스타 강사로 대우를 받았다. #1, 2# 현대인들이 조선 시대 노비에 대해 얼마나 무지하고 편향된 시각을 가졌는지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 노비 문서는 대개 이두문으로 작성되었다.[93] 이런 류의 문서는 대체로 서식이 정해져 있었는데, "無他上典宅有用處(다름이 아니라 상전댁이 쓸 데 있어)"로 시작해 노비의 신상 명세를 나열한 후 "幷以買得爲有在乎(함께 매득한)", "永永放賣爲乎矣(영영 방매하오되)"로 노비의 신상 명세와 본론을 언급한 후, "此牌子導良明文成給事(이 배자에 따라 명문성급할 일이다)" 혹은 "用此文告官卞正事(이 문서를 써서 관아에 고해 바로잡을 일이다)" 등으로 마무리한다. 이외에도 다양한 형태가 존재한다.
- 양반들끼리 충돌이 나면 해당 양반들을 주인으로 둔 노비들이 자기 주인을 편든답시고 상대편측 노비들한테 서로 시비걸고 싸우는 일들도 많았다. 이로 인해 양반들 사이의 충돌은 비교적 가벼웠는데 정작 노비들이 자기 주인 편든답시고 상대측 노비들과 서로 시비붙는 바람에 일이 커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이렇게 일이 커지게되면 서로 충돌났던 양반들은 자기들 끼리의 충돌이 노비들 사이의 싸움으로 확장된 만큼이나 서로 뒷수습 하느라 애를 먹곤 했다.
- 간혹 미국이 그러는 것처럼 한국도 조선의 노비에 대해 배상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미국은 헌법과 인권을 통해 건국한 근대 국가이기에 자국민에 대한 노예제에 책임이 있는 반면 현재 한국과 달리 조선은 신분제에 기초한 전근대 국가였기 때문에 그러한 책임이 없다. 그 논리대로라면 조선과 동시대에 노예와 농노가 있었던 타국들도 배상해야 하지만 해당국가들에도 그런 논의는 없다.[94]
- 특이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노비의 역할 중 하나가 비각노(飛脚奴)이다. 흡예(皀隸) 또는 조례(皁隷)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주로 노비가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흡예는 인터넷에 자료가 많이 없으나 조례는 국어사전에 나오는 말로 관에서 일하던 칠반천역 중 하나라고 한다. 주로 고려시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개화기 때 까지도 운영되었던 모양. 파발이 흔히 말을 타고 가는 것으로만 알려져 있는데, 말을 타고 소식을 전하는 것은 기발(騎撥), 사람이 발로 뛰는 것은 보발(步撥)이라고 한다. 보발은 말 그대로 발로 뛰는 우체부 같은 역할. 이 역할을 담당한 노비를 비각노라고 하는데 특이한 점은 비각노는 '옷소매를 걷어 올린 후 어깻쭉지 밑 팔뚝에서부터 피가 통하지 않게 가는 새끼줄을 억세게 죄어맨 다음에 그 새끼를 풀지 못하도록 도장을 찍는데' 이를 봉비(封臂)라고 한다. 봉비란 국어사전에도 나오는데 '기능이나 기술을 함부로 남용하지 못하도록 사람의 팔을 묶어 제재를 가하던 일'이라는 뜻. 팔을 이렇게 묶어 버리는 이유는 피가 통하지 않을 때 팔을 빨리 휘두르면 그만큼 고통이 덜하다고 한다. 그리고 팔을 빨리 휘젓는 만큼 걸음도 빨라지니 보발이 빨리 전달될 수 있다는 논리. 개화기 때 까지 양반집에서 사적으로도 봉비한 비각을 이용한 모양이다. 낙향한 권신들을 위해 지방과 서울을 오가며 심부름을 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전근대 인권의식의 끝판왕이라고 할만하다. 기록에 따르면 정중부가 봉비를 하고 보발을 했다는 것으로 보아 꼭 노비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 일종의 공무로서도 행해진 모양. 웹링크 정중부 이규태 코너 2003년 9월 22일 월간 독립기념관
6. 주요 인물들
- 만적: 만적의 난을 일으켰다.
- 김준
- 반석평
- 안용복: #
- 정명수: 조선에 큰 해악을 끼치긴 했지만, 정명수 개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출세한 것은 맞다.
- 이상좌
- 이만강: 말년에 신분을 속인것이 들통나 결국 유배되었다.
- 이의민
- 장영실
- 정충신: 17세 때, 권율의 노비로 들어갔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혼자서 평양에 피난을 갔던 선조 임금을 찾아가 권율의 장계를 전달했다. 일본군 점령지를 혼자서 들어간 공로를 인정받아 선조 임금으로부터 면천을 받았고, 이후 부원수와 경상도 병마 절제사까지 지냈다.
- 정막개(鄭莫介): 원래는 의정부(議政府) 관아의 관노비였는데, 1513년 박영문과 신윤무가 반역을 모의했다고 조정에 고발하여 중종 임금으로부터 절충장군(折衝將軍)과 상호군(上護軍)이라는 정3품 벼슬을 받았다. #1, #2
- 한금
- 정학수: 본래는 성균관에서 일하던 노비였으나, 어깨 너머로 배운 학문 실력이 굉장히 뛰어나서 양반들조차 그를 정선생이라 부르며 존중했다. 정학수는 나중에 서당을 열고 훈장이 되었는데, 그한테 학문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스타 강사였던 셈. #1, #2
- 임복(林福, ? ~ ?): 조선 성종 임금 무렵의 사노비로 1485년 흉년이 들자 같은 해 7월 24일 2천 석의 곡식을 나라에 바친 대가로 노비 신분에서 풀려났고, 이에 1천 석의 쌀을 더 바치자 그의 아들 4명도 모두 노비 신분에서 풀려났다.
[1]
농노와 비슷하게 보기에는 노비는 거래 가능한 소유물 취급을 받은 것이 사실이며, 그렇다고 노예와 같다고 보기에는
노예로 보기에는 거주권의 자유(외거노비 한정)를 가지거나
사유재산을 형성하고 소유했으며, 송사 자격이 있는 등 법의 보호를 받았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노비신분을 면천할 수 있었다. 이는 외국의 일부 서적들이나 노비를 노예로 간주하는 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다만 사유재산과 스스로 신분을 면천 받을 수 있다는 점, 학대하는 주인을 고소할 수 있다는 점은 로마의 노예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지역과 시대에 대해서는
노예와
농노제 문서를 참조
[2]
신량역천은 공식 신분이
양민이고 대우가 천민 급인 이들을 말한다. 단어 자체가 신분은 양인이되 역이 천하다는 뜻이니까. 당연히 공식 신분부터 천민인 노비와 다르다. '천민=노비' 의 반례는 신량역천이 아니라
백정 쪽이다. 중국의
수나라 이래 고려까지 일반 백성을 칭하던 말인 백정이지만, 조선시대에
도축에 종사하는 천민들을 부르는 말로 격하되었기 때문. 다만 신량역천의 대우는 천민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에, 말 그대로 이름만 양민인 이들이었다.
[3]
관련 문헌 : 조법종(Cho Bup-jong), "한국 고대사회 노비제의 특성", 한국사학보/15, 2003., 263-281, 고려사학회
[4]
관련 문헌 : 『역사적 실체를 찾아서-양반』, 미야지마 히로시 저, 노영구 옮김, 출판-(주)도서출판 강(1996.6.20) 96-97p
[5]
단, 이 숫자는 정확히 3,000명이라기보다는,
의자왕
삼천궁녀 썰이 그렇듯 그냥 '많다'는 당시의 문학적 표현일 가능성도 크다.
[6]
충렬왕이 직접
원나라
황제에게 노비제 개혁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고려사절요/권이십이/충렬왕/경자 26년(1300)
출처
[7]
관련 문헌 : 朴起賢, "高麗時代 奴婢에 관한 硏究", 2002., 학위논문(석사), 全州大學校
[8]
세종실록 105권, 세종 26년 윤7월 24일 신축 3번째기사
[9]
이는 타지역 노예들과 크게 구분되는 점 중 하나이다.
[10]
출처: 유승원, 사대부시대의 사회사- 조선의 계급·의식·정치·경제구조, 역사비평사, 2020, pp 271~272
[11]
출처: 김건숙, 소송을 통해 본 조선후기 노비의 記上抵抗 -1718년 求禮縣 決訟立案을 중심으로,『역사학연구』36, 2009
[12]
이정수, 김희호, 「조선후기 奴婢賣買 자료를 통해 본 奴婢의 사회ㆍ경제적 성격과 奴婢,『한국민족문화』31, pp. 371~372
[13]
유승원, 사대부시대의 사회사- 조선의 계급·의식·정치·경제구조, 역사비평사, 2020, pp 275~276
[14]
한국과 조선에 대한 지나치게 부정적인 일본어 위키백과에서조차 관노를 성폭행한 양반이 처벌받았다는 기록을 인용하면서 조선왕조는 신분에 상관없이 성범죄에 엄격했지만 일본과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편법으로 빠져나가는 구멍이 많았다는 서술이 있다.
[15]
다만 팔레 교수는
남북 전쟁 이전
미국 남부도 노예제 사회였다고 말하면서, 조선이 다른 나라에 비해 특별히 나빴다는 평가를 하기 위해 한 말은 아니라고 한다. 애초에 팔레 교수는 노예제 사회가 고대 사회의 산물이 아니라고 보는 사람이다.
#
[16]
15~16세기의 노비 비율을 파악하려면 당시 신료들의 발언이나 군적을 참고해야 하는데 당시 신료들은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수를 과장해서 말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군적의 경우 군역에서 제외되는 계층에 속하는 사람의 수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대략적으로 파악이 되는데 문제는 노비말고도 양반,
아전, 백정,
고공, 장인, 목자, 재인,
승려 등 군역에서 제외되는 계층의 수가 많았으며 이들의 수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파악이 안 된다는 점이다. 이러다보니 학자마다 의견이 서로 다르게 나올 수밖에 없다.
[17]
당시에는 과세를 피하기 위해 호적에 평민으로 등록되지 않게 하려고 통계를 조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양반층조차도 호적에 자신을 없는 사람으로 만들 정도였다.
[18]
유럽의
농노도 사유재산 소유가 가능했다.
[19]
출처: 이영훈,「한국사 연구에서 노비제가 던지는 몇가지 문제」,『
한국사 시민강좌』40, 2007 pp.155~159.
출처
[20]
때문에 전근대 계급사회 어디에나 존재하던 피지배 하층민으로 보면 되지 굳이
고대 로마의 노예,
중세 유럽의
농노, 미국 흑인 노예 이렇게 비교하며 이것을 노예냐 농노냐로 굳이 구분할 필요가 있냐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고대 로마의 경우에도 노예가 주인의 집 밖에 따로 살면서 노동에 종사하는 경우는 무수히 많았다. 그러나 이들의 형태나 처우가 조선의 노비와 똑같지는 않았다.
[21]
사실 이영훈은 이런 식으로 자기 주장을 자주 뒤집는데, 자기 스스로 연구한 결과물이 "조선후기사회는 소농촌락(자영농+소작농)사회다"인데 방송에 나와서는 "조선은 노예제사회다."라고 정 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다. 또한 2007년에 낸 책인 대한민국 이야기에서는 일본군 위안부가 국제법에 금지된 성노예라고 했다가 2019년에 낸 책인 반일종족주의에서는 위안부가 자발적인 매춘부라고 정 반대의 주장을 폈다. 그리고 이걸 문제삼아 질문하는 기자한테 "당신은 그때와 지금이 같으냐?"라고 욕을 하면서 주먹질을 하기까지 했다.
[22]
평민 삶의 질이 노비만 못한 이 문제는 지방세력이 훨씬 강성하고 백성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던 고려시대에 훨씬 더 심했다. 광종의
노비안검법은 (한반도가 미개간지이라서 달리 갈데도 없으니) 주거지, 지방세력에 매여있다는 처지는 전혀 달라지지 않는데 노비시절에는 부담할 필요 없던 세금은 대대적으로 물리는 평민 입장에선 실질적인 메리트가 거의 없는 법안이다.
[23]
다만, 유사시에는 당연히 이들도 군에 입대해서 싸웠으며, 공노비 일부나 납공노비의 경우 호적과 양안에 등록되어 지세를 납부했다.
[24]
참고로 오해를 피하자면 사회적 양상에 따라 때로는 노비종부법이 때로는 노비종모법이 양인을 늘리는데 유리해지기도 했다.
[25]
이렇게 노비가 된 여성들는 조선의 일부다처제에 튼 비중이 되었으나 전근대사회의 낮은 의료와 육체노동의 강도로 남성의 수가 항상 여성보다 적어(산업재해로 인한 사망+유아기 시절 사망+여성보다 짧은 수명+스트레스를 술담배로 푸는 경향) 큰 혼란으론 이어지지 않았다. 당장 여진족이 쳐들어와도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끌어가며, 조선에서도 반역자들은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노비로 삼는 등의 처우도 있다.
[26]
사기와 날조도 많았고, 공권력 역시 이를 방조했다.
[27]
협호는 주호의 원조를 받아 생존하는 대부분의 농민들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주호는 국역이 배정된 즉 납세 대상으로 지정된 사람들을 말한다. 그럼 주호와 협호의 관계가 문제되는데, 이영훈은 주호의 경제적 보조를 통해 협호는 생존을 기대하는 상태였다고 주장했고, (조선시대호적대장연구반) 연구자들은 경제적 예속만이 아니라 다른 조건들도 개입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들의 논쟁은 2000년대 초에 있었던 <단성호적> 연구로.
[28]
사실 저런 논리대로라면 노비보다도 권리가 없었던 미국 노예들은 한국보다 비율이 더 컸어야 했다.
[29]
http://sillok.history.go.kr/id/ksa_10712015_005
[30]
공사천에는 역리, 조례, 백정, 무당 등도 들어가기 때문에 이들이 모두 노비라 보긴 힘들다. 다만 이들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해보면 공사천의 대부분은 공노비 또는 사노비라 봐도 무방하다.
[31]
이 둘을 합쳐 원호가 100만여호라 하는 걸 보면 35~40만호를 반올림해서 40여만 호라 한 것으로 보인다.
[32]
다만 평민들은 군역과 조세부담 때문에 호적에 등록되는 것을 회피하는 경향이 강해서 노비에 비해 호적에 등록되는 비율이 낮아 호적에서 나타나는 노비의 비율은 실제비율보다 높았을 것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이사명의 상소에서는 관서지역의 공사천의 비율을 말하며 다른 지역도 관서지역과 비슷할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는데 이 발언이 단순히 개인적인 주장일 수도 있지만 저 35~40만호 중 폐질자와 유면자의 비율이 낮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말일 수도 있다. 폐질자는 심한 병에 걸렸거나 장애가 있어 군역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을 말하고 유면자는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을 말한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유민이 조선 사회의 만성적인 문제였던걸 감안하면 이들의 수가 무시할 수 없는 수였을 가능성이 높으나 이 당시 조선의 전체 유민의 수가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수는 알 수 없다. 만약 유민의 수가 많았다면 호적에서의 공사천호의 비율은 25~30%보다 낮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사명의 주장대로 관서지역과 다른 지역의 공사천 비율이 비슷했다면 호적에서의 공사천호의 비율은 대략 15~20%정도였을 것이다.
[33]
19세기 초반부터는 일부 지역에서 노비를 보유하지 않은 호들이 가상의 노비 한 명씩을 호적에 등록시키는 일이 지역적 관행으로 자리잡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
[34]
단, 현종-숙종조에는 경신대기근의 여파로 노비가 증가하였다.
[출처:]
김건태, 朝鮮後期 私奴婢 파악방식, 역사학회, 2004
[36]
1843년 전체 노비 중 83.4%, 1846년 전체 노비 중 90.7%, 1852년 전체 노비 중 98.8%
[37]
출처: 권기중, 호적대장을 통해 본 조선후기 노비층의 증감현상 - 대구부 동상면을 중심으로,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5
[38]
출처: 권내현,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만 여정: 어느 노비 가계 2백년의 기록', 역사비평사, 2014
[39]
출처: 김현구, 조선 후기 沿海民의 생활상 : 18∼19세기 巨濟府를 중심으로, 부산경남역사연구소, 2001
[40]
출처: 임학성, 19세기 후반 仁川 島嶼지역의 주민 구성 : 1867년도 '永宗鎭戶籍大帳'의 사례 분석, 인하대학교한국학연구소, 2008
[41]
조선왕조실록 -
http://sillok.history.go.kr/search/searchResultList.do
[42]
위에도 말했듯이 일본 제국 내에서도 인신매매 사례는 많았다.
[43]
1950년대 말 기준으로는 도시 실업률이 절반에 육박한다는 말이 나올지경이었고, 이 당시 사회최고 엘리트 계층인 대학생들(이 당시에 대학교보다 급이 낮은 중학교, 고등학교도 학비가 없다고 진학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마저도 기껐 공부해도 취직이 안되었었고 이 것이
4.19 혁명의 원인 가운데 하나라는 분석이 나왔을 정도였다.
[44]
최규석의
대한민국 원주민에 보면 6.25 이후에도 종들이 사는 '아랫마을'이 남아 있어서 그곳 노인들도 윗마을 어린이에게까지 존댓말을 썼다는 작가 모친의 증언이 나오는데 이 아랫말은 산업화로 인해 주민들이 도시로 떠나며 자연 소멸되었다고 한다.
#
[45]
개돼지,
국개론 같은 용법이다.
[46]
법적으로 노비가 재산을 소유할 수 없다는 조항은 없었고, 자녀에게 재산을 상속시켜 줄 수도 있었다.
[47]
관련 문헌 : 조선시대 노비의 삶과 생각 박현모 2010.07.10
#
[48]
여담 항목에 서술된 작개와 사경를 예시로 들면, 주인들은 노비들이 작개지 경작에 힘쓰도록 조치를 취하지 작개지 소출의 부족분을 충당한다는 명분으로 사경지의 소출을 마음대로 강탈하거나 처분하지는 않는다. 앞선 관련 문헌의 사례에서도 주인이 '자식 없는 종'으로 만들기는 했으나 1/3만 뜯어가고 나머지는 멀쩡히 두 딸에게 상속되었다. 노비의 사유재산 소유권이 완전히 부정되었다 하기는 어려운 것
[49]
이영훈 '조선시대 솔거.외거노비 구분재고'
[50]
전형택, '조선후기 고문서에 나타난 앙역노비의 성격'
[51]
사실 이 도식을 만든 마르크스조차도 역사전개가 이러한 '경향성'을 나타낸다는 것이지,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다를 수 있다고 경고했다.
[52]
마르크스주의 사관을 받아들인
뉴라이트 계열의 인사들이 이런 주장을 한다. 사실
뉴라이트는 원래
마르크스주의 사관을 추종하던
극좌파
운동권 출신인데, 한 예로
뉴라이트의 대부인
이영훈은 학생운동을 하다 군대에 끌려간
운동권이었다
식민지근대화론 비판 허수열 "이영훈 경제통계 모두 엉터리"
[53]
《당육전》 〈상서형부(尙書刑部)〉 편. 단, 조선에서도 60세를 넘으면 노비가 납부와 동원에서 제외되었다.
[54]
다만, 조선의 노비 비중이 전근대 통계의 한계로 실제보다 과장됐을 확률이 크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55]
중국을 말한다 6권/ 90쪽. Encyclopedia of Antislavery and Abolition Peter P. Hinks, John R. McKivigan Greenwood Publishing Group, 2007.
[56]
출처: 한권으로 읽는 청나라 역사 하권(27~30쪽)경지출판사
[57]
어머니가 갓 낳은 아기를 목졸라 죽이는 악습인데, 그 이유는 바쳐야 하는 세금이 하도 많아서 도저히 아이를 먹여 기를 형편이 못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마비키가 하도 극성을 부려서 에도 막부 시대에 일본의 인구는 2700만 명 내외 수준으로 유지되어 그 이상 늘어나지 않았다.
[58]
조선통신사 기록을 봐도, 배타고 가던 와중 노역꾼들이비 노비들이나 먹는 밥을 일본인 가이드 2명에게 줬더니 그들이 걸신들린듯 먹어 치우고 더 달라는 거 보고 다들 비웃었다는 기록도 있었다.
[59]
계층이동이 거의 불가능함, 거주의 자유 제한, 사유재산은 존재함
[60]
노비를 살해한 양반같은 경우에는 적어도 불법이었고 솜방망이 처벌이라도 받았다.
[61]
몇몇 거상들이 사무라이에게 영향을 미칠 정도로 경제적인 능력 가졌다는 점에서 조선에 비해 일본이 특별할 수준으로 상인들을 대우해줬다는 편견이 있으나 대부분의 상인들이 합법적인 루트로 권력을 가지는 경우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62]
위에서 보듯 성씨를 가지지 않는 것을 노예의 상징 중 하나로 보지만 그것조차도 엄격하게 적용된 것은 아니었다.
[63]
거기에 더해 일본은 에도시대 경제가 급성장한 반면 세금의 기준이 되는 석고는 막부 초기 기준을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았고 기타 과세 대상이 되는 범위가 좁았기 때문에 실제 세부담은 명목상의 세율보다 낮았다.
[64]
한국 같으면 통일 신라시대에서나 가능했을 일이다.
[65]
조선의 노비들도 매매가 가능했다지만 실제로 매매한 횟수는 전술한 이런 사례보다 적다.
[66]
다만 과거에 이미 귀족들 성씨를 자신의 성씨로 삼은 백성들이 많이 확인된다. 중국에서 황제가 된 사람들 성씨가 많은 건 황족 인구가 많은 게 아니라 백성들이 조상을 날조했기 때문이다.
[67]
중세 시대부터 아일랜드는
바이킹과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았고, 종교개혁,
올리버 크롬웰의 드로이다 학살과
자코바이트 운동 이후로 영국의 아일랜드에 대한 취급이 박해지면서 아일랜드인들의 처지도 정복하러 온 영국계 귀족들(그리고 이들에게 빌붙어 권세를 누리던 일부 토착 상류층들)과 상류층들에게 밀려나 소작농이 된 하류층들로 양극화되기 시작한다.
[68]
그조차도 완전히 폐지된건 18세기에서 19세기이다.
[69]
양천교혼 자체는 명목상 기피 대상이었다.
[70]
일제강점기 때 사라진 것은 더더욱 아니다.
[71]
가끔씩 조선시대를 까내리는 사람들이 조선이 유일하게 자국민을 노예로 쓰는 미개한 나라라고들 하는데 유일한 나라는 아니다. 단순히 세계사만 봐도 자국민을 노예로 쓴 나라는 매우 많았다. 단적으로, 옆 동네
일본에서는
전국시대 기간에 붙들린 전쟁포로를
유럽 각국에 노예로 대거 팔아먹었고,
에도 막부 시기에도 죄없는 사람을 유곽이나 등지로 팔아먹는
인신매매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예초에 노비제도 자체도 조선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다.)
[72]
사실상 조작이 어렵지는 않았다.
[73]
노비에게 독자적인 재산권이 인정되었으므로 이런 일이 얼마든지 가능했다. 특히
상평통보의 발행과 이로 인한 상업의 발전으로 인해 민중들의 전반적인 경제력이 상승한 뒤로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노비주들이 대거 몰락하면서 자기 노비보다도 가난해지는 경우도 적지않이 생겼다.
[74]
허영만의
부자사전에서는
조선시대에 사채업으로 부를 쌓은 노비가 자기 주인의 것을 포함해서
양반들의 족보 여러 개를 담보로 삼았다가, 그들이 빚을 못 갚은 걸 핑계삼아서 이를 강탈한 사례를 언급하고 있다. 당대 기준으로도 아스트랄한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이 부자 노비의 막강한 재력때문에 고을 사또조차 데꿀멍하는 판국인데다, 노비가 살던 마을에 홍수가 나자 대뜸 큰 돈을 기부해서 수해 복구를 돕기도 해서, 그 누구도 뭐라할 수 없었다고 한다.
[75]
이 경우도 상공업의 발달 과정에서 낙오되어 하층민으로 전락하게 된 사례에 속한다.
[76]
윤리적인 이유가 있기보다는 노비도 엄연히 숙식을 제공해줘야하는 사람인지라, 조금이라도 먹을 입을 줄이려는 의도가 컸다.
[77]
때문에 사노비가 못난 주인 밑에서 벗어나겠다고 본인과 자녀의 노비 문서를 위조해서 관노 행세를 한 사례도 있었다.
[78]
성균관에서 지내는 제사에 쓸
고기를 독점 공급한 것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기들한테 갑질하려는
양반에게 '감히
공자님이 드시는 고기를 올리는 사람에게 망발을 지껄인다'며
역관광을 시전하거나,
면신례를 핑계삼아서 선배 유생들의 지령을 받고 후배 유생들을 폭행하거나 모욕하기도 하여, 왕에게 이에 관련된 상소가 올라갈 지경이었다.
[79]
오늘날의
종로구
명륜동 일대.
[80]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
유교
근본주의 성향 인사들의 비밀 단체인
밀본의 본부가 반촌에 있다거나, 그 두목인
정기준이 반인으로 위장해있다는 설정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81]
신라 때의 설화인
효녀 지은 이야기에서, 노모를 봉양하던 처녀인 지은이 생활고를 견디다못해 귀족의 노비로 스스로 팔려갔다가, 이런 속사정을 들은 귀족이 그녀의 효심에 감격하여 몸값만 내주고 바로 노비 신분에서 풀어줬다는 내용이 나온 게 이것 때문이다. 설화 속의 지은의 노모도 딸이 자기를 봉양하려다가 노비로 전락했다는 얘기를 듣고, '나 하나 때문에 내 딸이 신세를 망쳤다'며 통곡하는 것으로 나온다.
[82]
태종 14, 세종 21년, 세조 7년, 성종 10년 중종 9년 명종 11년
[83]
관련 문헌 : 조선 후기 노비 가격의 구조와 수준, 1678-1889 / 한국학 자료센터
[84]
김종성 "조선의 노비들"에 나온다.
[85]
물론 불법이긴 했다.
[86]
양성지의 상소문에 함경도에 대해 언급되었다고 어느 경제학자가 상소문에 있지도 않은 글을 상상하며 쓴 기사가 있고 그 기사로 인해 파생 기사들이 생겼는데 실제 http://sillok.history.go.kr/id/kga_11211002_003 상소문 전문을 보면 함경도에 대한 언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양성지가 대가세족은 노비를 가지고 있다고 언급하긴 했으나 그건 중국과 다르다는 뜻이 아니었으며 중국과 달리 한반도에 단군 이래 7대 밖에 왕조가 없는 이유는 화이의 풍습이 중국은 야박하여 다르고 한반도엔 대가세족이 많아 간사한 영웅에게 넘겨다 볼 수 없었다고 했지 노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한국에선 이 상소문을 잘못 이해하고 노비에 대해 비판할 때 양성지를 인용하는 경우가 있다.
[87]
원칙으로는 노비라 할지라도 주인이 함부로 죽일 수는 없었다.
[88]
다만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도 메이드에 대한 성적인 학대나 체벌, 폭력이 성행했으며 21세기 일본에서도 직장 내 폭력이나 과로사 등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 사회적 지위에 따른 폭력을 가지고 딱히 조선만 뭐라 하긴 힘들다.
#
#2 20세기 중후반은 물론이고 21세기 극초반 한국군 및 학교에서도 이 이상의 가혹행위가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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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만약 전근대 일본이 조선보다 신분적으로 좋았다면 조선의 천민들조차 시행하지 않았던 수천번의 민란이 일어날 이유가 없다.
[90]
과거에는 이런 곳을 부락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이런 말 자체가
부라쿠민에 대한 혐오발언으로 간주되어 금기시되므로, 동화지구라는 말로 바꿔서 부르는 일이 많다.
[91]
심지어 혈통 상
부라쿠민 출신이 아닌데도 단지 부라쿠민과 결혼했거나, 부라쿠민들이 많이 사는 동네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부라쿠민 취급받기도 한다. 부라쿠민에 대한 차별이 매우 극심하다는 증거다.
[92]
오히려 재산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할 줄 아는 게 많으면 주인 입장에서 좋은 것이었다.
[93]
조금 지체있는 가문에서는 제대로 된
한문으로 작성하기도 했다.
[94]
차라리 이 논리는 일제 구헌법에 기초한 일본제국의 자국민 인신매매와 현재 중국의 농민공, 한국의 독재 시기에 발생한 각종 인권유린에 적용해야 옳다. 조선의 노비제의 축소와 폐지는 미국의 노예제 폐지와는 다른 과정을 거쳤으며, 미국은 인종을 단위로 노예의 후손을 특정하고 현재에도 차별이 가능하지만 한국은 전부 족보 조작과 산업화를 통해 사라졌기 때문에 특정할 수도 없기 때문. 이는 일본의 노예, 농노제에 대해서도 일본인들이 정부에 별 말이 없는 것과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