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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0 22:20:03

만적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에서4. 같이보기

1. 개요

" 장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將相寧有種乎)"[1]
『고려사절요』 14권 「신종(神宗)」 (개성의 북산에서.)
萬積
(? ~ 1198)

고려시대 노비 만적의 난의 주동자. 고려 진승, 스파르타쿠스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2. 생애

만적의 난을 일으킨 중심 인물로 당시 무신 집권자였던 최충헌의 노비였다고 추측된다. 사실 만적이 최충헌의 사노비였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으나[2] 만적이 <고려사> 열전 최충헌 편에 있어서 최충헌의 사노비라고 추정을 하고 있을 뿐이다. 돌쇠나 마당쇠처럼 우직한 이미지를 떠올리는 경우도 있는데 일각에서는 김준처럼 무장이나 가병에 가까운 인물로 추정하기도 한다.

1198년( 신종 1년) 개경 뒷산에서 노비 몇 명과 함께 나무를 하다 노예제에 불만을 품고 종들을 불러모아 천인을 없애버리며 정권을 장악하자고 거사를 논의한 뒤 누런 종이 수천 장을 오려서 정(丁)이라는 글씨를 적어놓고 종이를 표지로 삼게 했다. 정자 표지를 달고 날짜를 정해 흥국사에서 출발해 격구장에 대오를 정비해 한꺼번에 북을 올려 거사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한 날 흥국사에는 몇 백 명만 모였기에 적은 수로는 거사를 기약할 수 없다고 판단해 다른 날 보제사에서 다시 모이기로 했는데 순정이라는 종이 주인인 율학박사 한충유에게 이를 고해바치고 말았다. 결국 만적은 100여 명과 함께 붙잡혀 강물에 던져지는 것으로 죽음을 맞았으며 순정은 포상금을 받고 평민이 되었다.

3. 대중매체에서

4. 같이보기


[1] 만적이 처음 한 말은 아니다. 중국 진나라 시절 진승·오광의 난에서 진승이 이야기한 것이 유행어처럼 민간에 퍼져, 이것이 이후 한반도로도 흘러들어왔을 것이라 추측된다. [2] < 고려사>에는 만적이 사동(私僮)이라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