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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4 02:23:37

파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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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내용

1. 개요

擺撥. 공문을 전달하기 위한 역참 체계.

2. 내용

조선 선조 30년에 도입된 제도로 기존의 봉수제 및 역로제도를 대체 보완하기 위해 등장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봉수제가 사실상 마비되고 국가 행정이 고도화되면서 더 빠른 속보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도입된 것. 중국 명나라의 파발 제도에서 따온 것이기도 하다. 인조의 장인이었던 한준겸이 최초 제안했다. 과거에는 오늘날과 같은 네트워크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국가 통치 차원에서 공문서를 전달하기 위한 체계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주요 교통 거점마다 역참을 설치하였고 파발마를 관리하도록 하여 파발꾼이 문서를 전달할 때 말을 갈아타며 최고 속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를 통해 중요한 정보가 신속히 전파되는 게 가능했다. 암행어사 마패에 새긴 의 수 역시 역참에서 징발할 수 있는 말과 관계가 깊다. 이러한 것은 '기발'이라고 하고, '보발'이라고 해서 사람이 걷거나 뛰어서 이동하는 것도 있었다. 굳이 기존의 역로만을 이용하지는 않았으며 지름길 등 최단거리로 이동하는 것을 추구했다. 이 파발길은 차츰 일반 백성과 상인들도 이용하기 시작했고 길이 닦이면서 준 국도의 역할을 하게 된다.

서울특별시 은평구 구파발에 그 명칭의 흔적이 남아있다. 후술된 서발의 첫 역참이었던 곳으로, 현재는 그 자리에 서울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이 들어서 있다. 당시의 역참이 현재의 구파발역으로 계승되었다고 생각하면 뭔가 묘하다. 한때는 법정동 구파발동도 있었지만, 은평뉴타운 개발과 함께 진관내/외동과 통폐합되어 소멸했다. 해당 지자체에서는 아예 지역축제로 파발제를 하는 등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

기반은 완전히 다르나 정부의 전자문서관리시스템이 이 체계의 후손이라 볼 수 있다.

1583년, 선조 16년부터 관련 법령이 정비되어 보발과 기발로 분리되어 운영되었는데 북발, 남발, 서발로 구분되어 있었다.
이 중 중국과 연락이 주로 이뤄지는 서발만 말을 활용한 기발이었고 북발과 남발은 보발이었다.

선조 대에 시작된 파발은 인조-효종을 거치면서 완벽히 체제를 갖추는데 기발의 경우 말을 활용하기는 했으나 밤에는 못움직였던 반면, 보발은 밤에도 진행이 가능해서 의외로 둘의 정보전달력 차이는 빠르면 1일, 늦어도 2일 밖에 차이가 안났다고 한다.

일본 에도시대에는 말을 타지 않고 역참마다 대기하는 사람이 릴레이 식으로 달려서 급한 편지를 전달하는 파발꾼이 있었는데 이를 비각(飛却, ひきゃく, 히캬쿠) 이라고 한다. 2인조로 릴레이로 밤낮없이 달리기 때문에 이틀에 570 km 라는 엄청난 속도가 가능했다고 한다. 이 비각이라는 말은 최소 고려시대 부터 구한말 개화기 까지 쓰였는데, 정중부가 비각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비각은 상당히 특이하고 잔인한데 빨리 달리기 위해 팔뚝을 줄로 얽어매서 피가 통하지 않게 하고 이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 팔을 빨리 휘젓게 만들어서 빠르게 달리도록 했다고 한다. 이렇게 팔을 얽어매고 봉인하는 것을 '봉비'라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노비의 여담 부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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