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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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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도 아대륙이 워낙 넓은 탓에 여러 세력들이 많았고, 서쪽에서 들어온 공격자들 또한 제법 많았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인도 아대륙의 완전한 통일은 19세기에 들어서야 영국에 의해 이루어졌다. ( 인도 제국)

그러나 이를 두고 '인도는 통일 왕조를 이루지 못하고 분열만 하였다'라고 보는 것은 현재의 인도 공화국을 전제로 한 시각에서 인도사를 보려는 편협한 입장이 될 수 있다. 인도의 역사는 분열했던 국가 하나의 역사라기보다 유럽과 같이 수많은 세력들이 각축을 이뤘던 하나의 대륙의 역사에 가깝다. 인도의 면적은 유럽과 거의 같으며 인구는 유럽의 2배 이상이다. 유럽을 두고 '하나의 나라를 이루지 못하고 분열만 하였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유럽 국가들에게 서로 통일해야 한다는 관념이 없었듯이 인도 아대륙의 각 국가들에게도 서로 반드시 통일해야 한다는 관념이 없었기 때문에, 인도의 역사에 대해서만 그러한 척도를 들이대는 것은 불합리하다. 인도는 펀자브, 벵갈, 타밀 등의 수많은 지역들로 나뉘어 그 내부에 각각 민족/문화/종교/언어 면에서 독립적인 공동체들이 존재한다. 언어 또한 단순히 서로 다른 수준이 아니라 어족 수준에서 차이가 난다. 인도의 많은 사람들은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쓰지만 드라비다어족을 쓰는 사람들도 인도 인구의 대략 30% 정도로 적지 않다. 말이 30%지 인구 수로는 4억 명이 넘는다.

더군다나 유럽은 그리스 문자를 쓰는 그리스 키프로스를 제외하면 로마자 키릴 문자를 쓰기에 문자적으로는 어느 정도 통일성이 있는 반면, 인도는 한 나라임에도 지역별로 문자가 다르다. 힌디어 네팔어, 펀자브어 표기에 쓰이는 데바나가리 문자뿐만 아니라 아랍문자, 로마자, 구자라트 문자, 타밀 문자, 텔루구 문자, 올치키 문자, 벵골 문자. 말라얄람 문자, 칸나다 문자, 오리야 문자 등 지역에 따라 다른 문자가 쓰여지며 이 때문에 인도의 각 지역들 사이의 언어와 문화의 차이는 유럽의 국가들보다 더 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항목의 내용도 각지의 다양한 경향을 담기에는 역부족이며, 파키스탄 등 현재는 인도가 아닌 지역의 역사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정식으로 인도사를 공부하고 싶다면 주의해서 읽기를 바란다.

이러한 복잡한 사정 때문에 인도는 브라만교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이슬람교, 시크교 등 다양한 종교문화의 요람 역할을 했다. 인도 내부의 결과는 힌두교의 승리에 가깝지만, 그 힌두교 역시 지역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특히 남부와 북부의 문화는 큰 차이가 있는 편이며, 북부를 통일한 국가는 제법 많았던지라 인도 역사를 공부할 때에는 주로 북부를 위주로 배운다.

인도인 특유의 내세적인 신화 철학은 조, 경, 해의 시간이 밥먹듯이 튀어나오는 칼파의 시간관[1] 윤회 사상을 낳았다. 덕분에 인도인들은 현생에 대한 기록을 잘 남기려 하지 않았으며, 사료로 쓸 자료들도 대개 패엽으로 기록되어있기 때문에 보존성이 좋지 않아 남아있는 문서가 그리 많지 않다. 종교의 경전마저도 주로 암송으로 전해지는 형태였다. 이는 인도와 같이 세계사의 큰 축이었던 중국근데 이쪽은 문화대혁명으로 스스로 문자기록을 날려버렸다, 중동, 유럽이 풍부한 기록을 남긴 것과 대조적인데, 어느 정도냐면 인도의 고대사는 같은 시기 한국사보다도 참고할 기록 분량이 적다. 이슬람교가 유입된 11세기 이전까지 정식 역사서가 편찬된 바 없고 그 이후 한동안의 역사서 또한 인도의 통사를 꿰기에는 매우 조악한 수준이었다. 따라서 전근대사의 상당 부분은 타국의 기록이나 서사시, 종교 문헌 등에 의존한다.

2. 고대 인도의 역사 기록 전통

파일:Ajanta Painting Padmapani 03.jpg
아잔타 석굴의 벽화
인도에는 이슬람 세력의 도래 이전에 ' 역사' 개념이 희박하거나 존재하지 않았고 사료가 충분치 않았다. 이런 류의 주장은 11세기에 《인도의 역사》를 저술한 호라즘인 학자 알 비루니(Abu Rayhan al-Biruni, 973–1050?) 이래[2] 오랜 기간 이슬람 전통의 역사가들이 지속적으로 해 왔으며, 무굴 제국과 그 통치 기구, 문헌을 접수한 19세기 대영제국의 관료와 역사가, 그리고 인도의 문헌을 입수한 19세기의 유럽 동양학자들도 오랜 기간 견지하였다.

인도에서 역사 관념의 발달이 그리스–로마나 중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었고, 고대에 인도에서 사용한 문서 기록 매체인 패엽 등의 보존성이 낮아 오늘날 남아 있는 고대사 사료가 다른 주요 문명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것이 사실이기는 하다. 그러나 인도에서 역사 관념이 결과적으로 미성숙한 채로 남았다거나 아예 발달하지 않았다는 강한 주장은 이것과 조금 다른 문제인데, 인도 독립 후 20세기 중반부터 인도 학자들은 이러한 주장에 근대적 역사학을 토대로 조금씩 반론을 제기하기 시작하였으며, 21세기 현재 이러한 주장과, 나아가 인도사 사료의 구성 방식 자체는 인도와 영미권 인도사 학계에서 첨예한 논쟁거리이다. 오늘날 인도사를 정식으로 배우려면 우선 역사 기술 내지 사료학(historiography)만 별도로 심도 있게 다뤄야 할 필요가 있는데, 전통 시대 사료의 가치를 평가하고 인도에서 역사 개념의 발전을 이해하는 것이 인도 고대사를 이해하고 서술하는 데 필요불가결하기 때문이다. 이하에는 이 문제에 관하여 자와할랄네루 대학교(Jawaharlal Nehru University)의 역사학 교수 로밀라 타파르(Romila Thapar)가 2013년 저서에 서술한 관련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여 적어 둔다.[3]

인도에서 역사 전통의 발달은 그리스-기독교 문명권, 이슬람 문명권, 유교 문명권과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인도에서 역사 서술은 크게 브라만교 힌두교 전통과 불교 전통, 자이나교 전통에서 각각 다른 방식으로 발전하였다. 우선 브라만–힌두 전통의 역사 기록은 고대의 이티하사(Itihasa)–푸라나(Purana) 전통을 그 기원으로 하며, 이티하사–푸라나 전통은 기원전 첫 번째 천년기부터 기원후 7세기 무렵까지 브라만–힌두 전통에서 지배적인 역사 기록 양식이었다. '이티하사'는 산스크리트어로 '과거에 그러하였던 것' 즉 대략 역사를 뜻하는 단어이지만, 초기 이티하사 문헌은 역사 기록 그 자체를 위해 남긴 것이 아니라 베다 성전의 종교적 의미를 명료화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었다. 이티하사 문헌에는 준역사적인 서사시 《 마하바라타》, 허구적 서사시 《 라마야나》, 그리고 '푸라나'가 있다.

'푸라나'는 '오래된 것'을 뜻하며, 기원후 굽타 제국 시대를 전후로 하여 베다 시대 이래 구전으로 전승되던 푸라나가 문헌의 형태로 대거 작성되기 시작하였다. 푸라나에는 브라만–힌두 전통에서 우주 창조 설화 등과 함께 신, 반신, 전설적 영웅, 그리고 어느 정도 역사적인 군주와 성인의 행적이 설화적 필체로 기록되어 있다. 푸라나 문헌은 인도 고대사에 대한 사료로서 일정한 가치가 있으며, 이 푸라나에서 역사적인 사실을 추출해내는 방식으로 고대사를 연구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굽타 제국의 멸망 이후 약 7세기부터, 이티하사–푸라나 전통을 출발점으로 하여 힌두교 문헌에서 보다 전기(傳記)적, 연대기적인 서술 양식이 점차 종교적 내지 설화적인 것들에서 독립하여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새롭게 등장한 이러한 서술 양식으로 차리타(carita, 전기, 행전), 프라샤스티(praśasti, [특정 군주에 대한] 찬가)[4], 왕샤왈리(vaṃśāvalī, 연대기) 등이 있는데, 여러 문서와 비문에 남아 있는 이들 문헌은 이슬람 도래 이전까지 새로운 힌두 전통의 사료가 된다. 차리타 문헌의 예로는 가령 7세기에 작성된 바르다나 왕조 하르샤 왕의 전기 《하르샤차리타》(Harṣacarita) 등을 들 수 있으며, 대표적인 왕샤왈리 문헌으로는 12세기 초의 《제왕들의 강》(Rājataraṅgiṇī)을 꼽을 수 있다. 종합적으로, 기원후 첫 번째 천년기에 브라만–힌두 전통에서는 "종교 문헌에서 역사 의식이 서서히 출현"해 왔다고 평가할 수 있다.

불교 전통은 고대 인도의 기록 문화에서 브라만–힌두 전통의 주요 경쟁자였다. 브라만–힌두 전통에서 역사 기록이 종교 문헌에서 서서히 분리 독립해 나간 것과 달리, 불교 전통에서는 상대적으로 더 이른 시기부터 명확한 역사적 목적을 갖고 나름대로 내용의 진실성과 유효성을 검증하며 남긴 다양한 전기와 연대기 문헌이 존재한다. 이러한 불교 텍스트를 정리하고 집대성하는 작업은 고대부터 계속해서 이루어졌으며, 여기에서 불교적 형태의 역사 의식을 관찰할 수 있다. 불교 전통의 연대기에서는 특히 사건의 진실성과 인과 관계에 따른 서술이 브라만–힌두 전통에서보다 더욱 강조되었다. 아누라다푸라 왕국에서부터 편찬된 스리랑카의 연대기는 이러한 불교 연대기의 훌륭한 사례이다. 자이나교 전통은 상대적으로 브라만–힌두 전통과 불교 전통에 비해 문헌의 수가 적은 편이지만, 기원후 두 번째 천년기 초부터 프라반다(prabandha)라는 독자적인 전기 기록 양식이 자이나교 전통에서 발달하였고, 14세기 초에 집대성된 《프라반다친타마니》(Prabandha-cintāmaṇi)가 좋은 사례이다.

3. 역사

3.1. 인더스 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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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Indus_Valley_Civilization,_Mature_Phase_(2600-1900_BCE).png
파일:10371629_10152509907254846_6230814527205600131_n.jpg
인더스 문명 하라파의 복원도
아프리카 대륙에서 발원한 인류는 점점 세계 곳곳으로 뻗어나갔으며, 대략 200만 년 전에 인도 아대륙에 도착했다.[5] 인도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인류 화석은 인도 중부의 나르마다 계곡에서 발견된 50만 년 전의 화석이다. 아마 인류는 70만 년전까지는 산발적인 점조직처럼 인도에 조금씩 퍼져 살았고, 약 50만년 전에 이르러서야 인도 전역에 고르게 분포해 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현생 인류의 직접적인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는 다른 인류 종들보다 한참 늦게 등장했다. 대략 78,000년~74,000년 전부터 파키스탄 일대를 통해 유입된 호모 사피엔스는 점차 압도적인 조직력을 바탕으로 인도 전역을 차지하고 점차 문명을 꽃피워나가기 시작했다.

약 9,000년 전부터는 인더스 강 서안에 정착지들이 생겨났다. 7천년 전 발루치스탄 일대에서 생겨난 농경이 점차 동쪽으로 퍼지면서 인더스 일대에서 농경 문화의 씨앗이 흩뿌려졌다. 기원전 3300년 경부터는 본격적인 청동기 시대가 개막하며 인더스 문명이 시작됐다. 주로 현재 파키스탄 일대, 인더스 강 유역에서 번영했던 인더스 문명은 전성기 시절에 인구가 500만 명이 넘어가고 규모로만 따지면 이집트, 메소포타미아를 능가하는 거대한 문명을 이룩했다.

인더스 문명은 하나의 통일 국가를 이루지는 못한 채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들처럼 여러 도시국가들끼리 교역하고 경쟁하는 구조였다. 당시 인더스에는 수 백개의 도시들이 있었지만 가장 두각을 드러내는 도시는 모헨조다로 하라파 등으로 수 만명에 달하는 인구를 보유한 당대의 대도시였다. 인더스 문명은 정교한 도시계획, 배수시스템, 화려한 야금술, 수공예 기술 등을 발전시키며 약 2천년에 걸쳐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인더스 문명도 기후 변화로 인해 점차 쇠락했다. 기원전 1900년 경에 이미 점진적인 쇠퇴의 조짐이 드러났고 기원전 1700년 경에는 대부분의 도시들이 버려지는 상태에 이르렀다. 대규모 가뭄과 기온 하강으로 인해 기근이 발생해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으며 저멀리 메소포타미아 고대 이집트로 향하는 교역로는 붕괴했다. 정기적으로 일어나던 홍수는 불규칙해졌고 물의 공급이 언제 이루어질지 확실치 않으니 농업 생산량이 급감했다. 결국 사람들은 도시를 떠나 더 기후적으로 살기좋은 동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갔고 인더스 문명은 무너지고야 말았다.

3.2. 베다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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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arly_Vedic_Culture_(1700-1100_BCE).png
파일:Late_Vedic_Culture_(1100-500_BCE).png
베다 시대 전기 베다 시대 후기
인더스 문명이 무너진 후인 기원전 1900년에 등장한 사람들이 바로 인도아리아인이었다. 중앙아시아를 거쳐 펀자브 일대로 유입된 아리아인의 한 분파로, 이 아리아인들이 정착해 북인도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시기를 베다 시대라고 부른다. 인도아리아인들의 경전인 베다가 만들어진 시대가 바로 이때이기 때문.[6] 아리아인들은 인더스 문명이 붕괴한 이후 인도 북서부의 공백을 채우며 베다 문명을 꽃피웠다. 처음에는 반쯤 유목민 생활에 가까웠지만, 시간이 흐르자 토착 문명과 합쳐지며 정주, 도시 생활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아리아인들은 초기에는 인도 북서부에만 머물러 살았다. 이들 역시 통일된 국가나 군주정을 이룬 것은 전혀 아니었고 부족이나 소도시 단위로 뿔뿔히 흩어져 살았다. 유목문화에서는 벗어나서 농경문화로 접어들었지만 , , 돼지 따위 등 가축을 기르는 등 유목민족의 풍습은 어느 정도 유지했다. 이렇게 살던 아리아인들도 시간이 지나자 점차 동쪽으로 확장해나갔다. 기원전 12세기에는 동쪽의 거대한 갠지스 평원을 정복했다. 비옥한 평원을 차지하자 농경은 더더욱 중요해졌고, 사회 계급도 더욱 세분화됐다. 사회를 4개의 계급으로 나눈 카스트가 등장한 시기도 이때다.

강력한 철기를 앞세운 아리아인들은 이를 바탕으로 여러 세력권들을 만들고 다녔다. 이들은 왕정, 과두정, 심지어 공화정까지 다양한 정치세력을 이루었는데, 이런 정치집단들을 바로 '자나파다'라고 부른다. 특히 개중 강력한 세력은 군주정을 채택한 쿠루 왕국, 판찰라 왕국, 코살라 왕국, 비데하 왕국 등이었다. 이렇게 수많은 왕국들이 난립하는 와중에도 약 16개의 왕국들이 유난히 두각을 드러냈기에 십육대국 시대라고 부른다.

3.3. 십육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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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ahajanapadas_(c._500_BCE).png
파일:Nanda_Empire,_c.325_BCE.png
십육대국 난다 왕조
십육대국 시대는 기원전 800년부터 기원전 600년까지 약 200여년에 걸친 시대다. 인도 북부를 중심으로 수많은 왕국들이 난립하던 시대였지만 개중 가장 강력한 16개의 왕국들이 있었기에 16대국으로 부르는 것. 개중 가장 두각을 드러낸 것은 바로 쿠루 왕국이었다. 인도 최초로 제대로 된 고대 국가의 체계를 갖춘 국가로서 강력한 군사력으로 다른 왕국들을 압도했다. 특히 파리크시트 왕과 자나메자야 왕 시대에 전성기를 맞아 한때는 인도 최강 세력으로 군림하기까지 했다.[7]

자나메자야 왕 사후 쿠루 왕국이 쇠퇴하자 베다 문화의 패권은 동쪽에 있는 판찰라 왕국으로, 그 다음으로는 훨씬 더 동쪽에 있는 비데하 왕국이 넘겨받았다. 이 기간 동안에는 16대국을 포함해 여러 군소 왕국들이 점점 몇몇개의 거대한 왕국들 아래에 통합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를 '마하야나파나'라고 부른다.

십육대국 시대의 종지부를 찍은 나라는 16대국들 중 하나이자 갠지스 강 중류에 있던 마가다 왕국이었다.[8][9] 인도판 진나라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마가다 왕국은 갠지스 강 남쪽의 비하르를 중심으로 세워진 국가로 첫 번째 수도는 라자그리하, 두 번째 수도는 파탈리푸트라였다. 기원전 345년 들어선 마가다 왕국의 난다 왕조[10]가 영토를 대대적으로 확장해 동쪽으로는 벵골, 서쪽으로는 펀자브, 남쪽으로는 빈디아 산맥까지 영토를 넓혔다. 전성기 시절에는 저멀리서 쳐들어온 알렉산드로스 3세의 침략도 격퇴하고 북인도 전역을 장악한 패권국의 면모를 드러내기도 했다.

3.4. 마우리아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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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aurya_Dynasty_in_265_BCE.jpg
파일:Magadha_Expansion_1.gif
마우리아 왕조의 최대 강역과 영토 팽창
인도 최초의 통일왕조. 당대의 최강대국 중 하나이자 불교의 발흥지다.

난다 왕조가 북인도의 패권국으로 군림하던 중,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라는 영웅이 태어났다. 찬드라굽타는 승려 차나키야의 도움을 받아 스키타이족, 페르시아인, 박트리아인 등 반-난다 세력을 싸그리 모아 난다 왕조를 공격했다. 난다 왕조의 국왕 다나 난다의 폭정에 지친 사람들은 찬드라굽타에 환호했고, 결국 전쟁에서 패배한 다나 난다가 기원전 322년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에게 양위하면서 마우리아 왕조가 전면에 등장한다.

마가다 일대를 장악한 마우리아 왕조는 수도 파탈리푸트라를 중심으로 서쪽과 남쪽으로 빠른 확장을 거듭했다. 찬드라굽타는 기원전 317년에는 인도 북서부를 완전히 장악했고, 심지어 셀레우코스 왕조와도 전쟁을 벌여 승리하며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일대에까지 영향력을 뻗쳤다.

마우리아 왕조의 폭발적인 팽창은 알렉산드로스 3세의 영향도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인도로 쳐들어와 인도 북서부의 세력들을 죄다 정복하고 약화시켜놓았는데, 마우리아 왕조가 이 권력의 공백을 교묘히 활용하여 인도 북서부를 빠르게 흡수할 수 있었던 것. 알렉산드로스 사망 이후 이 지역을 장악했던 셀레우코스 왕조는 다른 디아도코이들과 경쟁하느라 지나치게 먼 인도에까지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결국 역설적으로 헬레니즘 제국의 침략은 마우리아 왕조를 인도 최초의 (어쩌면 그리고 마지막) 통일 왕조로 만들었다.

마우리아 왕조는 먼치킨 아소카 대왕 때 전성기를 이루었다. 아소카 대왕은 본격적인 정복 전쟁을 펼치며 인도 아대륙 대부분을 정복했다. 영국이 인도 제국을 세우기 전까지 남북 인도 전체가 하나의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간 것은 이때가 유일할 정도.[11] 아소카는 단순히 외치 뿐만 아니라 내치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브라만교를 억제하기 위해 불교 진흥책을 폈고 제국 전역에 정신병원, 고아원, 병원, 양로원을 건설하는 등 복지 정책을 펼쳤던 것이다. 마우리아 왕조는 아소카 대왕이 기원전 232년 사망할 때까지 반세기 가까운 번영을 누렸다. 전 인도가 오랜만에 평화기에 접어들어 폭발적인 경제 성장과 종교적 변혁이 일어났고, 자이나교, 불교 등 인도의 사상이 스리랑카, 동남아시아, 동아시아,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유럽 등지로 수출됐다.[12] 여러 모로 고대 인도의 최전성기라 할만한 시기였다.

허나 번영을 누리던 마우리아 왕조 역시 아소카 대왕 사후 서서히 쇠락했다. 그나마 제국의 강역을 유지하던 5대 국왕 삼프라티 마우리아가 50년의 재위 끝에 사망하자 마우리아 왕조는 급속도로 축소되어 옛 마가다 지방으로 영토가 줄어들었다. 사타바하나 왕조 등을 포함해 남인도 지방들이 제일 먼저 반기를 들었고 기원전 180년대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이 쳐들어와 인더스 동편에 인도-그리스 왕국을 세우며 마우리아 왕조는 인도 북동부 일대로 쪼그라들었다. 결국 기원전 184년 푸샤미트라 슝가 장군이 반란을 일으켜 브리하드라타 왕을 죽이며 마우리아 왕조는 139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3.4.1. 남인도의 소국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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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00년 체라, 촐라, 판디아의 영역도
북쪽에서 마우리아 왕조가 맹위를 떨치는 동안, 인도 최남단의 타밀라캄[13]에서는 3개의 조그마한 드라비다계 소국들이 발흥했다. 바로 체라 왕조, 촐라 왕조, 판디아 왕조다.[14] 이 체라 왕조와 촐라 왕조, 판디아 왕조는 서로 치고받고 싸웠는데 기원전 6세기부터 300년대까지 이어진 이 시대를 '상암 시대'라고 부른다. 상암 시대는 3개의 왕조들이 약화된 틈을 타 250년 경 칼라브라 왕조가 남인도를 통일하면서 끝난다. 다만 7세기부터 칼라브라 왕조도 약해졌고, 이후 팔라바 왕조가 힘을 얻는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팔라바 왕조 문단 참조.

시대상으로만 보면 남인도 지방의 역사는 고대 체라, 촐라, 판디아 왕조가 피터지게 싸우다가 250년 칼라브라 왕조에게 멸망당하고 600년대에 팔라바 왕조로 이어지는 흐름이다. 다만 체라, 촐라, 판디아 왕조는 팔라바 왕조 이후에도 끈질기게 멸망과 부활을 반복하며 중세 시대에 다시 재기해 세력을 떨쳤다. 때문에 서술의 통일성을 위해 이 문단에서는 체라, 촐라, 판디아 왕조의 고대사 뿐만 아니라 중세사까지도 모두 서술한다. 연대를 헷갈리지 않도록 주의.

체라 왕조는 인도 남쪽 타밀 서부 해안가를 따라 넓게 펼쳐진 왕국으로 기원전 3세기에 처음 역사에 등장했다. 지리상으로 근접한 촐라와 판디아와 끊임없이 전쟁과 협상을 반복하며 지냈다. 특히 188년 즉위한 셍구투반 왕 시대에 국력의 정점을 찍었는데, 촐라 왕조의 왕위계승분쟁에 간섭해 자기 친척을 촐라 국왕으로 앉힐 정도였다. 체라 시인들은 셍구투반 왕이 히말라야의 신성한 돌을 얻기 위해 북인도까지 정벌했다고 칭송하기도 했다.[15] 이 시대에 원시적인 힌두교가 전파되고 2세기에는 자이나교가 유입된다. 워낙 지리적으로 무역을 하기 좋은 위치라 저멀리 로마 제국과도 교역한 것으로 유명하다. 허나 고대 체라 왕조는 200년대부터 서서히 쇠락하더니 5세기 이후에는 아예 기록에서 사라진다.

고대 체라 왕조는 그렇게 사라졌지만 중세에 한 귀족가문이 고대 체라 왕조와의 혈연을 주장하며 체라 왕조를 부활시켰고, 이 체라 왕조를 따로 '콩구 체라 왕조'라고 구분해서 부른다. 하지만 콩구 체라 왕조는 역사 내내 얻어터지기 일쑤였다. 팔라바 왕조, 카담바 왕조, 판디아 왕조, 라슈트라쿠타 왕조 등 인근 국가들에게 정복당한 채 속국으로 지냈다. 결국 콩구 체라 왕조마저도 9세기 말에 촐라 제국에게 패배하며 완전히 멸망했다. 콩구 체라 왕조의 마지막 잔재였던 '페루말 체라 왕조'도 12세기에 촐라 제국에게 정복당하면서 체라 왕조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촐라 왕조는 본디 타밀 동부 해안가에 위치한 소국이었다. 하지만 상암 시대까지만 해도 큰 두각을 드러내는 국가는 아니었고, 그나마 바다 건너 스리랑카를 공격해 50년 가량 지배했다는 점이 눈여겨볼만하다. 촐라 왕조는 체라 왕조, 판디아 왕조와 투닥거리며 싸우다가, 250년 칼라브라 왕조, 그다음에는 팔라바 왕조의 공격을 받고선 뿔뿔히 흩어져 멸망했다. 촐라 왕족들은 저 남인도 구석에 처박힌 쩌리 속국으로 연명하다가, 848년 팔라바 왕조에게 반란을 일으켜 촐라 제국을 세우면서 드디어 전성기를 맞는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촐라 제국 문단 참조.
파일:pandyan_empire_map.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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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디아 왕조[16] 칼라브라 왕조
인도 최남단에 자리한 판디아 왕조는 무려 4번이나 세워지고 망하기를 반복한 다사다난한 국가다. 상암 시대의 판디아 왕조는 특별히 대단한 국가는 아니었고 촐라와 체라와 투닥투닥거리며 싸우다가 국력이 약화되어 250년 경 칼라브라 왕조에게 멸망당했다. 6세기 들어 칼라브라 왕조가 약화되자 북쪽의 팔라바 왕조의 도움을 받아 부활할 수 있었다. 부활한 판디아 왕조는 인도 최남단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었지만 팔라바 왕조와의 전쟁에서 깨지며 열세를 면치 못했다. 팔라바 왕조가 약화되자 좀 기를 펴나 싶었으나 슬슬 강해지기 시작한 촐라 제국의 침략을 받으면서 920년에 2차로 멸망한다.

촐라 제국이 인근 서찰루키아 왕조와의 전쟁으로 힘이 약해지자 판디아 왕조는 12세기 말 바로 반란을 일으켰다. 판디아 왕조는 슨들라 판디아 왕 아래에서 호이살라 왕조마저 패망시키며 남인도의 강국으로 등극했다. 당시 판디아 왕조는 인도 최남단을 몽땅 집어삼킨 것은 물론, 저멀리 안드라프라데시까지 북쪽으로 영토를 넓혔으며 스리랑카 북부까지 정복했다. 수도 마두라이는 화려한 힌두 사원들이 그득그득한 아름다운 도시로 변모했다. 하지만 이렇게 강력했던 판디아 왕조도 북쪽에서 밀고 내려오는 이슬람 세력에는 답이 없었다. 결국 1335년 델리 술탄국에게 수도 마두라이가 함락되며 판디아 왕조는 3차로 멸망한다.

판디아 왕조가 멸망한 뒤 수도 마두라이에는 잠시간 마두라이 술탄국이 들어섰다가 50년도 안되어 비자야나가라 제국이 꿀꺽했다. 본거지를 잃은 판디아 왕조의 잔존 세력들은 텐카시로 거점을 옮겨 '텐카시 판디아 왕조'를 세웠다. 텐카시 판디아 왕조는 마두라이를 점령해 재기를 노리기도 했지만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저항으로 얼마 못가 다시 마두라이를 빼앗기고 쫒겨났다. 비자야나가라 제국은 마두라이에 일종의 총독직인 '나야크'를 임명했고, 이 나야크는 1529년 반란을 선포해 마두라이 나야크국을 세웠다. 이 마두라이 나야크가 1618년 텐카시 판디아를 흡수하면서 판디아 왕조는 4차이자 영영 멸망하고야 만다.

위에서 언급한 체라, 촐라, 판디아 왕조의 고대 시기를 끝장내버린 칼라브라 왕조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남인도의 고산 부족 출신이었던 칼라브라 왕조는 체라, 촐라, 판디아가 힘이 약해진 틈을 타 3세기 경 남인도를 통일했다. 불교, 자이나교를 주로 믿었고 힌두교의 원형이 된 브라만교는 상대적으로 약했다. 기록의 베일에 싸인 왕조로, 약 300년 동안 남인도를 지배하다가 500년대부터 약화되어 부활한 판디아 왕조, 팔라바 왕조에게 멸망당해 6세기에 사라진 것만 알려져 있다.

3.5. 고전기

3.5.1. 고전기 초기

3.5.1.1. 슝가 왕조 사타바하나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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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ap_of_the_Satavahanas.png
슝가 왕조 사타바하나 왕조
한때 인도 전역을 주름잡던 마우리아 왕조가 아소카 대왕 이후 급속히 쇠퇴하면서 인도는 다시 분열 상태에 들어갔다. 이 시대부터 델리 술탄 왕조의 등장과 촐라 왕조의 멸망으로 이슬람 왕국들이 본격 등장하는 시기까지를 고전기[17]라고 일컫는다.

고전기에 가장 먼저 두각을 드러낸 왕조는 바로 슝가 왕조였다. 마우리아 왕조의 푸샤미트라 장군이 왕을 죽이고 들어선 후계 국가로, 마가다 일대를 중심으로 인도 북동부의 넓은 영토를 지배했다. 푸샤미트라 슝가는 36년의 통치 끝에 아들 아그니미트라에게 왕위를 물려줬고 이때까지만 해도 슝가 왕조는 그럴듯한 패권국의 지위를 유지했다. 사타바하나 왕조, 마하메가바하나 왕조,[18] 인도-그리스 왕국들과 활발히 전쟁을 벌이며 국력을 과시했던 것. 그러나 아그니미트라 왕이 죽자 슝가 왕조의 패권은 급속도로 붕괴했다. 인도 북부와 중부 일대는 조그마한 소왕국과 도시들로 산산히 쪼개졌고 슝가 왕조는 기원전 73년에 패망하고야 말았다.[19]

마우리아 왕조의 본거지인 마가다 일대가 슝가 왕조에게 넘어갔다면, 인도 중부는 사타바하나 왕조가 세워져 번성을 누렸다. 사타바하나 왕조는 본디 마우리아 왕조의 봉신국으로 시작했지만 마우리아가 약해지자 독립을 선포하고 떨어져 나간 왕조다. 안드라프라데시 주의 아마라바티를 수도로 삼고 데칸 고원과 인도 중부를 중심으로 막강한 세력을 떨쳤다. 기원전 1세기 경에 최전성기를 누렸고, 무역으로 번성했고 불교 힌두교를 후원하며 북인도와 남인도의 문화 교류를 촉진하기도 했다. 남인도에는 아리아인들의 문화를 전해줬고 북인도에는 드라비다인들의 문화를 전달해줬던 것. 뿐만 아니라 슝가 왕조, 인도-그리스 왕국, 인도-스키타이 왕국, 서사트라프 등 북인도 세력들의 남진을 막아내며 남인도 문화를 수호하는 방파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다만 이 사타바하나 왕조 역시 200년대 즈음에 더 작은 국가들로 뿔뿔히 분열되었다가 바카타카 왕조에게 사라졌다.
3.5.1.2. 쿠샨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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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샨 왕조
이 시기 인도 북서부에서는 이전부터 인도에 진입했던 스키타이의 일파인 샤카족, 그리스-박트리아 왕국, 인도-파르티아 왕국, 쿠샨 왕조[20] 등이 들어서면서 격변을 맞는다. 특히 가장 두각을 드러낸 것은 바로 쿠샨 왕조였다.

쿠샨 왕조는 서기 1세기 중반 경 쿠줄라 카드피세스가 세운 국가로 아프가니스탄에서 발원해 북인도로 영토를 넓혔다. 특히 카니슈카 1세 대왕 시절에 아프가니스탄 전역을 장악하고 인도 북중부 평원을 다스리는 거대한 대제국으로 발돋움했다. 쿠샨 왕조는 무역에 누구보다 진심이었다. 인도양을 통한 로마 제국과의 해상 무역에 열을 올렸고 실크 로드를 통한 중국과의 육상 무역을 장려했다. 덕분에 인도의 대승 불교 위진남북조시대의 중국을 거쳐 동아시아 전반으로 확산되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그리스와 인도의 양식이 결합된 간다라 예술이 이때 정점을 찍었다.[21] 이렇게 번성하던 쿠샨 왕조는 명군 바수데바 1세의 통치를 마지막으로 200년대에 힘을 잃고 분열되다가 인근 사산 왕조에게 복속당하며 빛을 잃었다.[22]

3.5.2. 고전기 후기

3.5.2.1. 굽타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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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타 왕조 바카타카 왕조
북인도의 패권을 장악한 쿠샨 왕조가 망하자 북인도는 잠시 분열기로 접어들었다가, 320년 굽타 왕조가 들어서면서 다시 하나로 통일된다.

300년대 초반 찬드라굽타 1세가 창건한 굽타 왕조는 인더스 강 일대 전부를 장악했고, 사무드라굽타, 찬드라굽타 2세, 쿠마라굽타 등 연이은 명군들의 치세 하에 한 세기 넘는 기간 동안 전성기를 구가했다. 2대 사무드라굽타는 북인도의 여러 왕국을 정복하여 그 영토를 합병했고 남인도의 여러 왕국을 굴복시켜 영향권에 두었으며, 3대 찬드라굽타 2세는 사카 왕조를 무너뜨려 북인도의 서부 해안 지대를 확보하는 일련의 군사적 성공을 과시했다.[23] 또한 중국인 여행자 법현이 저술한 불국기의 기록에 의하면 이 당시의 인도는 국민은 평화를 누렸으며 각종 복지 시설이 잘 구비되고 치안이 원활하게 유지되는 안정된 사회였다고 한다. 그야말로 고전기 인도의 황금기였던 것이다.

이때 브라만교를 기반으로 힌두교가 성립하는 등 인도 고전 문화의 기틀이 섰다. 그리스계 신앙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브라흐마 - 비슈누 - 시바의 3신 신앙이 이때 본격화되었으며, 왕은 힌두교의 화신(' 라자')으로서 권위를 누렸다. 이전부터 전래되던 마하바라타, 라마야나 등의 전승이 문헌으로 정리되었으며, 칼리다사 등의 시인이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힌두교의 등장으로 불교는 위축되었으나 학문적 연구와 미술적 발전은 계속되었고, 0의 개념과 십진법을 기반으로 한 아라비아 숫자를 처음으로 만든 것도 이 시기 이 동네의 업적이다. 물론 이것도 중동인들을 거쳐서 넘어가는 바람에 숫자 이름부터 저 모양이 됐지만... 이외에 지전설, 지구 구형설 등의 과학 발전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5세기경 굽타 왕조는 훈족 계통의 유목민족 에프탈과 지속적으로 충돌하면서 약화되었고 결국 이들에 의해 나라가 망하고 만다. 대부분의 속국들이 독립을 선포하며 굽타 왕조는 급속도로 붕괴했고 북인도는 다시 분열됐다.

북인도에서 굽타 왕조가 전성기를 누리고 있을 무렵, 인도 중부의 데칸 고원에서는 바카타카 왕조가 패권을 잡았다. 기존 데칸의 패권국이었던 사타바하나 왕조가 멸망한 뒤 250년에 등장한 왕조로 다시 데칸을 통일하고 전성기를 구가했다. 전성기 시절에는 북쪽으로는 말와와 구자라트, 남쪽으로는 카르나타카, 서쪽으로는 아라비아해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특히 루드나세나 2세 시절에는 굽타 왕조와 결혼 동맹을 맺고 굽타 왕조의 문화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바카타카 왕조는 예술과 문화 쪽으로도 유명한데, 그 유명한 아잔타 석굴을 건설한 왕조이기도 하기 때문. 이렇게 문화적 전성기를 누리던 바카타카 왕조는 5세기까지만 해도 강력한 국가였지만 500년대 들어서 급격히 약화되더니 기록 속에서 사라졌다.
3.5.2.2. 지방 왕조들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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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다나 왕조 팔라바 왕조 카담바 왕조
굽타 왕조의 붕괴 이후, 인도에서는 유럽처럼 중소 국가들의 투쟁사가 전개된다. 흔히 굽타 왕조의 몰락을 인도 고대사의 끝으로 본다. 이 시기에는 수많은 군소 왕조들의 등장해 흥망을 거듭했는데 주요 국가들에는 팔라바 왕조, 카담바 왕조, 바르다나 왕조 등이 있다.

눈여겨볼만한 국가는 바르다나 왕조다. 굽타 왕조가 무너지자 북인도는 수많은 과두정들과 군주정 국가들이 판치는 쟁탈전으로 되돌아갔다. 개중 580년에 세워져 델리 일대를 지배하던 바르다나 왕조가 있었는데, 606년 즉위한 하르샤 왕 시절에 최전성기를 맞는다. 전성기 시절에는 북인도 대부분을 장악하며 옛 굽타 왕조에 필적하는 영토를 자랑했다. 하르샤 왕은 40년 동안 북인도를 통치하며 평화를 구가했고, 중국의 승려 현장 신라 혜초가 인도를 방문한 것도 이 시대다.[24] 하지만 647년 하르샤가 죽자 반란이 일어났고 느슨한 봉건체제였던 바르다나 왕조는 순식간에 무너지며 북인도도 다시 분열된다.

한편 남방에서는 힌두계 왕국인 팔라바 왕조가 등장했다. 당시 인도 최남단에서는 전통적으로 체라 왕조, 촐라 왕조, 판디아 왕조가 삼분지계를 이루며 다투고 있었는데, 250년에 칼라브라 왕조가 등장해 잠시간 남인도를 통일한 상태였다. 그러던 중 350년에 세워진 팔라바 왕조가 본격적으로 세를 확장하더니 마헨드라바르만 1세(571년 ~ 630년)와 싱하바르만 1세(630년 ~ 668년) 시절에 최전성기를 맞아 인도 최남단 대부분을 지배했다. 다만 7세기 후반부터는 남인도의 새로운 강대국 찰루키아 왕조, 라슈트라쿠타 왕조 등의 침략을 받으며 점차 약해지더니 9세기에 촐라 제국의 침략으로 결국 멸망했다.

카르나타카를 중심으로 발흥한 카담바 왕조 역시 이 시기의 주요한 패권국들 중 하나였다. 345년 마유라사르마 왕이 세웠고 팔라바 왕조를 격파하며 세를 키웠다. 카담바 왕조는 카쿠스타바르마 왕 시절에 고점을 찍었다. 카쿠스타바르마는 저 북쪽의 굽타 왕조와도 결혼 동맹을 맺으며 세를 과시했고 4세기 중반 칸나다와 타밀나두 지방을 중심으로 독립을 누렸다. 하지만 6세기 들어서 세력이 약화되더니 찰루키아 왕조 라슈트라쿠타 왕조의 봉신국으로 전락, 525년 완전히 멸망했다.

3.6. 중세 초기

3.6.1. 프라티하라 왕조, 팔라 왕조, 라슈트라쿠타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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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티하라 왕조 팔라 왕조 라슈트라쿠타 왕조
북인도를 통일한 굽타 왕조의 붕괴 이후, 잠시 바르다나 왕조가 패권을 잡았지만 초스피드로 몰락하고 다시 분열기가 열리는데, 이 시기부터 무굴 제국의 등장 이전까지를 흔히 인도사의 중세로 본다. 중세 초기 북인도에서는 프라티하라 왕조 등 구자라트계 왕조 VS 벵골의 팔라 왕조 VS 데칸의 라슈트라쿠타 왕조 이렇게 3개의 국가가 천하삼분지계를 이루며 8~10세기 동안 200년에 걸쳐 서로 치고받고 싸웠다.

프라티하라 왕조는 옛 바르다나 왕조의 잔재 속에서 탄생한 국가로 북인도 최후의 힌두계 패권국이었다. 739년 즉위한 나가바타 1세 시절에 대대적인 확장을 거듭했는데, 특히 우마이야 왕조의 인도 침략을 격퇴하는 등 이슬람의 인도 침입을 성공적으로 저지한 북인도의 방파제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25] 나가바타 2세 치하에서는 북인도의 최강국으로 등극했고 미히라 보자, 마헨드라팔라 1세 등 연달아 명군들이 즉위하며 황금기를 누렸다. 특히 마헨드라팔라 1세 시절에는 그 영토가 서쪽으로는 신드, 동쪽으로는 비하르, 북쪽으로는 히말라야산맥에 이르렀을 정도. 프라티하라 왕조는 북인도를 거점으로 팔라 왕조 라슈트라쿠타 왕조와 끊임없이 싸우며 삼각 구도를 형성했다. 최전성기에는 팔라 왕조까지 제압하며 북인도 전체를 아우르는 대제국으로 발돋움했지만 남쪽의 라슈트라쿠타 왕조에 비하면 약간 열세였다.[26] 다만 900년대부터 점점 무너지더니 1018년 가즈니 왕조에게 결정타를 얻어맞고 사라진다.

벵골 지방에서는 팔라 왕조가 등장했다. 고팔라 1세가 750년 세웠고 인도 최후의 불교계 제국이기도 하다. 팔라 왕조는 벵골의 무역로라는 거대한 젖줄을 틀어쥐고 엄청난 부를 쌓았다. 팔라 왕조는 다르마팔라, 데바팔라의 재위기인 6세기 후반, 7세기 초중반에 최전성기를 맞았는데 이때 프라티하라 왕조의 수도 카나우지마저 한시적으로 함락하고 명목상으로 북인도를 잠시간 통일하기까지 했다.[27] 다만 870년대부터 쇠퇴해 벵골 일부로 영토가 축소되었다가, 978년 마히팔라 1세 시절에 다시 부흥했다. 마히팔라 1세는 다시 벵골을 통합하고 갠지스 강 일대와 바라나시까지 진출했다. 다만 1038년 마히팔라 1세가 눈을 감자 다시 칼라추리 왕조, 서찰루키아 왕조, 세나 왕조 등에게 얻어맞으며 쇠락하다가 멸망한다.

팔라 왕조는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국가이지만 여러 모로 벵골 지방의 역사적 황금기나 다름없는 나라였다. 불교를 융성히 대접하여 수많은 경전과 탄트라가 만들어졌고 활발한 해상교역으로 스리위자야, 아바스 왕조, 티베트 제국과도 교류했다. 당시 벵골은 수많은 나라들에서 찾아온 상인들로 북적거리는 국제항이었고 이슬람교가 처음으로 벵골에 전파된 것 역시 바로 이 팔라 왕조 시대다.

한편 남쪽 데칸 지방에는 라슈트라쿠타 왕조가 세워졌다. 기존 패권국 찰루키아 왕조의 속국이었으나 753년 독립을 선포, 찰루키아 왕조를 멸망시키고 데칸을 차지했다. 데칸 왕조들 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영토를 자랑하던 국가로, 915년 북인도의 깡패였던 프라티하라 왕조마저 꺾어버리고 히말라야까지 국경을 확장했다.[28] 전성기 시절에는 세계 4대 강국으로 불릴 정도로 인도 내에서도 압도적인 국력을 자랑했다. 불교 자이나교를 크게 후원했고 수학, 예술, 문학의 발전을 꾀했다. 다만 라슈트라쿠타 왕조 역시 920년대부터는 북쪽의 영토를 잃어버리며 점차 쇠락하다가 949년 남쪽에서 힘을 기르던 촐라 왕조와 전쟁을 벌이며 큰 타격을 입었다. 결국 972년 마지막 국왕 인드라 4세가 옛 찰루키아 왕조의 잔당 서찰루키아 왕조에게 패배하면서 완전히 멸망한다.

3.6.2. 찰루키아 왕조 서찰루키아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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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astern_Chalukya_Maximum_Extent.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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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루키아 왕조 동찰루키아 왕조 서찰루키아 왕조
543년 세워진 찰루키아 왕조는 앞서 언급한 라슈트라쿠타 왕조가 들어서기 이전 데칸을 지배하던 패권국이었다. 카담바 왕조가 멸망한 이후 마이소르 북부 바다미 지방에 도읍했기에 '바다미 찰루키아'라고도 따로 부르기도 한다. 풀라케신 2세 시절에는 데칸 서북부를 통합하고 남하정책을 펼쳐 팔라바 왕조 칼라브라 왕조와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다만 642년 팔라바 왕조와의 싸움 도중 풀라케신 2세가 전사하고 수도 바다미가 함락되며 잠시 위축되는가 싶더니, 결국 그 아들 비크라마디티야 1세가 팔라바 왕조의 수도 칸치를 점령하며 복수에 성공했다.

찰루키아 왕조는 비크라마디티야 2세 때 다시 전성기를 맞았다. 비크라마디티야 2세는 구자라트 지방으로 쳐들어온 아랍 무슬림들의 공격을 격퇴했으며 칼라브라 왕조, 촐라 왕조, 판디아 왕조, 체라 왕조 등 인도 최남단의 소국들 전부를 압도하는 국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비크라마디티야 2세 사후 속국이었던 단티 두르가가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753년 단티 두르가가 최후의 찰루키아 왕 키르티바르만 2세를 꺾고 라슈트라쿠타 왕조를 세우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찰루키아 왕조 자체는 753년에 무너졌지만 찰루키아 왕조의 방계이자 동부 해안가를 거점으로 삼은 동찰루키아 왕조는 무너지지 않았다. 동찰루키아 왕조는 풀라케신 2세가 데칸 동부의 벵기 지역을 정복하고 그의 형제 쿠브자 비슈누와르다나를 부왕으로 임명하면서 시작됐다. 벵기 부왕령이 점차 자치를 획득하면서 독립적인 왕국으로 발전했던 것. 하지만 동찰루키아 왕조는 모체인 찰루키아 왕조에 비하면 국력도 약했고 왕권도 대단히 불안정했다. 허구한날 라슈트라쿠타 왕조에게 털려나가는게 일상이었으며 1189년에 결국 촐라 제국에게 정복당하며 멸망했다. 이렇게 약한 정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찰루키아 왕조가 중요한 이유는 뒤에 설명할 서찰루키아 왕조의 탄생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서찰루키아 왕조는 찰루키아 왕조 멸망 200년 만에 옛 찰루키아 왕족들이 동찰루키아 왕조에서 돌아와 라슈트라쿠타 왕조를 쓰러뜨리고 찰루키아를 재건하면서 생겨난 제국이다. 라슈트라쿠타 왕조가 10세기 후반 약화되자 찰루키아 왕족 출신인 타일라파 2세가 반란을 일으켜 973년 라슈트라쿠타 왕조의 수도 만야케타를 함락하고 건국했다. 서찰루키아 왕조는 만야케타를 수도로 삼고 기존 라슈트라쿠타 왕조의 데칸 영토 대부분을 그대로 흡수하며 데칸의 강대국으로 떠올랐다.

당시 남쪽의 촐라 제국에서는 라자라자 1세라는 명군이 탄생하며 무섭게 힘을 키우고 있었다. 촐라 제국은 동찰루키아 왕조와의 결혼을 통해 동찰루키아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는 한편 서(西) 강가 왕조[29]를 정벌해 서찰루키아를 위협했다. 서찰루키아 왕조는 대를 이어 촐라 제국과 전쟁을 벌이며 팽팽히 맞섰다. 그러던 중 1076년 비크라마디티야 6세가 즉위하면서 변환점을 맞는데, 서찰루키아 최고의 명군으로 불리는 비크라마디티야 6세가 무려 50년 동안 통치하며 안정과 번영을 구가했던 것. 1118년에는 벵기 지방을 공격해 촐라에게서 빼앗아왔고 1126년 사망할 때까지 북쪽의 고르 왕조와 함께 인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다만 비크라마디티야 6세가 죽자 그때부터 서찰루키아 왕조도 서서히 쇠퇴했다. 1127년에 동(東) 강가 왕조[30]가 독립해 해안가 영토가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촐라 제국과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두 제국 모두가 함께 진이 소진됐다. 1157년 카르나타카 일대에서 칼라추리 왕조가 일어나 패권에 직격타를 입혔고, 1163년에는 동부 지역이 카카티야 왕조로 독립하며 뭉텅이째로 떨어져 나갔다. 그나마 마지막 황제 소메쉬바라 4세가 제국을 부활시키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실패하고 휘하 장군에게 살해당하면서 끝장났다. 이후 남인도 지방에서는 기존의 촐라 제국 서찰루키아 왕조라는 2개의 거대한 패권국들이 스러지고, 카카티야 왕조, 야다바 왕조, 호이살라 왕조 등이 등장해 패권 다툼을 이어갔다.

3.6.3. 촐라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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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 제국 촐라 제국의 영향권
촐라 제국은 고대 촐라 왕조의 잔재들이 끈질기게 살아남아 다시 부활한 왕조이자 팔라바 왕조의 봉신이었던 비자야라야가 세운 나라다. 당시 남인도에서는 팔라바 왕조 판디아 왕조가 경쟁하고 있었는데, 비자야라야는 팔라바 왕조를 도와 판디아 왕국을 물리치고 새로운 나라를 세웠던 것. 897년 비자야라야의 아들 아디트야 1세가 팔라바 왕조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기존 팔라바 왕조의 영토 대부분을 흡수하며 촐라 제국을 세웠다.

촐라 제국은 명맥만 남은 판디아 왕조를 공격해 승리했고 북쪽의 라슈트라쿠타 왕조마저도 공격했다. 물론 949년 라슈트라쿠타 왕조에게 패배해 일시적으로 물러났지만 곧 정복에 성공했다. 촐라 제국은 985년 즉위한 라자라자 1세 시절에 전성기를 맞았다. 동찰루키아 왕조, 판디아 왕조, 서 강가 왕조, 체라 왕조를 모두 흡수했고 바다 건너 스리랑카까지 진출했다. 특히 아랍인들이 장악하고 있던 해상 무역에 진출해 인도양의 섬들을 정복하고 동남아시아까지 패권을 휘둘렀다.

라자라자 1세의 뒤를 이어 1014년 즉위한 라젠드라 1세 역시 아버지를 따라 해상 제국의 길을 이어갔다. 촐라 해군은 스리위자야 해군을 격파하며 동남아까지 진출했고 200년 넘게 스리랑카를 좌지우지했다. 북으로도 진출을 멈추지 않아 서찰루키아 왕조는 물론 팔라 왕조와도 전쟁을 벌여 갠지스 강까지 진출했다. 이 시대 촐라 함대는 인도 해상 기술의 정점을 찍었다. 촐라는 버마, 베트남 해안가, 안다만 니코바르 제도, 수마트라, 말레이 반도 등 동남아시아 곳곳을 정복했으며 당시 촐라 제국은 남인도 최대의 해상 제국이었다.[31]

다만 라젠드라 1세 사후에도 촐라 제국은 서찰루키아 왕조와 끝없는 전쟁을 벌이며 기력을 소진했다. 두 제국 모두 오랜 전쟁 끝에 힘을 잃고 한꺼번에 망해갔다. 촐라 제국은 그래도 12세기 중반까지는 유능한 군주들이 재위하며 어느 정도 버텼지만 1100년대 중후반 들어서는 완전히 옛 위세를 상실했다. 옛 판디아 왕조가 부활해[32] 촐라를 괴롭혔고 마지막 국왕 라젠드라 3세가 1279년 판디아 군대에게 박살나면서 기록 속에서 영영 사라졌다.

3.7. 중세 후기

3.7.1. 이슬람 술탄국들의 등장

3.7.1.1. 가즈니 왕조 고르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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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니 왕조 고르 왕조
한편 8세기를 넘어 북부 인도에 이슬람 세력이 유입되면서 인도 역사는 새로운 장을 맞게 된다. 바로 이슬람 계통의 가즈니 왕조 고르 왕조가 등장한 것. 이 시기 이후의 인도 역사는 델리 술탄국을 중심으로 한 이슬람 세력이 인도 곳곳으로 퍼지는 과정이다. 역사학계는 가즈니 왕조부터를 인도 중세 후기로 분류한다.

당시 아라비아에서는 아바스 왕조의 힘이 갈수록 약화되고 무력을 거머쥔 무슬림 군벌들이 세력을 기르고 있었다. 옛 노예 출신인 맘루크 군벌들은 이집트,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등 이슬람권 전체에 손을 뻗쳤고, 개중에는 부유한 인도를 노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 인도는 소왕국들로 분열되어 있어 돈은 넘치도록 많은데 그걸 지킬 무력은 없었기 때문.[33]

수많은 아프가니스탄계 튀르크 무슬림 세력들이 인도를 침공했지만 개중 가장 돋보이던 인물은 가즈니 왕조의 창시자 술탄 마흐무드였다. 그는 997년과 1030년 사이에 무려 17번이나 인도를 침공해 어마어마한 재화를 쓸어갔다. 다만 술탄 마흐무드를 포함해 무슬림 군벌들은 이때까지만 해도 인도를 정복해 거기에 눌러앉겠다는 생각까진 하지 않았다. 가즈니 왕조 역시 펀자브 서부 일대만을 조금 점령하는 데에 그쳤고 더이상 인도 쪽으로 진출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술탄 마흐무드가 죽자 가즈니 왕조는 바로 무너졌다.

최초로 인도에 정착한 무슬림 왕조는 바로 고르 왕조다. 고르 왕조의 무이즈 앗 딘 무함마드는 1173년 북인도를 정복해 직접 다스리겠다는 야심을 품고 인도로 진격했다. 무함마드는 델리를 포함해 북인도 도시들 상당수를 정복했고, 가즈니 왕조의 옛 세력들을 흡수하는 데에 성공하며 북인도에 무슬림 정권이 들어설 수 있는 기틀을 닦았다. 다만 고르 왕조의 좋은 날도 잠시, 1206년에 무함마드가 암살당하자 고르 왕조는 빠르게 쇠퇴했다. 고르 왕조가 무너진 뒤 1206년 북인도에서 휘하 장군 출신이던 쿠트브 웃딘 아이바크가 델리를 수도로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니 이게 바로 인도의 중세를 상징하는 델리 술탄국이다.
3.7.1.2. 델리 술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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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 술탄국의 강역 변화
고르 왕조는 1206년 무함마드 고리의 죽음으로 군벌들이 분립하면서 멸망하고, 델리 술탄 왕조가 들어서 1200년대부터 1500년대 초까지 약 300년 넘게 북인도를 통치했다. 하지만 왕권이 완전히 확립되지는 못해 델리 술탄국 내에서도 노예 왕조 - 할지 왕조 - 투글루크 왕조 - 사이드 왕조 - 로디 왕조 순서대로 무려 5개의 왕조가 교체되기도 했다.

델리 술탄국의 첫 번째 왕조이던 노예 왕조[34]는 술탄 일투트미쉬 시기에 남방을 정벌하고 북인도 대부분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다만 일투트미쉬가 죽자 급격히 무너지며 1290년 할지족이 세운 할지 왕조에게 정권을 찬탈당했다. 할지 왕조의 술탄 알라 웃 딘 할지 몽골 제국의 침략을 막아내고 남쪽의 호이살라 왕조, 카카티야 왕조, 판디아 왕조를 무릎꿇리는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알라 웃 딘 할지가 죽자 할지 왕조도 급속도로 무너졌고, 1320년 가지 말리크를 새로운 술탄으로 추대하며 투글루크 왕조가 시작된다.

투글루크 왕조는 델리 술탄국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 왕조였다. 2대 술탄인 무함마드 빈 투글루크는 수도를 남쪽으로 천도하면서까지 남방 정벌에 열을 올렸다. 덕분에 델리 술탄국은 인도 최남단 카르나타카까지 정복하는 기염을 토했다. 벵골 최후의 힌두 왕조였던 세나 왕조[35]를 멸망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투글루크 왕조 역시 내전과 기근, 가뭄이 연달아 겹치면서 망해갔다. 쇠퇴해가던 투글루크 왕조의 목숨줄을 끊은건 바로 티무르였다. 1398년 델리를 정복한 티무르는 8일 밤낮으로 델리를 약탈하고 투글루크 왕조를 반신불수로 만들어버렸다. 결국 티무르의 신하를 자처한 키즈르 칸이 1414년 투글루크 왕조를 무너뜨리고 사이드 왕조를 개창했다.

티무르의 봉신국을 자처했던 사이드 왕조는 5개의 왕조들 중 가장 약한 국력을 가진 왕조였다. 키즈르 칸과 후계자들은 투글루크 왕조의 강역을 회복하려 발버둥쳤으나 실패했다. 결국 펀자브의 유력 귀족 바흐룰 로디가 1451년 술탄위를 양위받으며 델리 최후의 왕조 로디 왕조가 들어섰다. 로디 왕조는 괄리오르를 정복하고 1504년 아그라 건설, 경제 개혁, 왕권 강화에 힘쓰며 로디 왕조의 전성기를 이어갔다. 그러나 폭압적인 이브라힘 샤가 즉위해 악정을 펼치자 이에 반발한 귀족들이 아프간 출신의 바부르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응답한 바부르가 1526년 파니파트 전투에서 이브라힘 샤를 꺾고 델리에 입성해 무굴 제국을 세우면서 델리 술탄국도 멸망했다.

델리 술탄국은 중세 인도의 르네상스를 연 왕조였다. 인도 문화와 튀르크-페르시아 문화를 융합해 화려한 이슬람 문화를 꽃피웠으며 건축, 문화, 종교,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델리 술탄국이 인도를 이집트-아라비아-페르시아로 이어지는 광대한 이슬람 네트워크에 포함시키면서 화려한 아랍-페르시아 문화가 인도로 대거 유입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몽골 제국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며 인도를 지켜내는 데에 성공하기도 했다. 다만 무슬림 지배층들이 토착 힌두교도들을 억압하고 힌두 사원들을 파괴하는 등 기존의 힌두 문화에 대한 억압이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3.7.1.3. 바흐마니 술탄국 데칸 술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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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마니 술탄국 데칸 술탄국
북인도에서 델리 술탄국이 있었다면 남인도에서는 바흐마니 술탄국이 있었다. 델리 술탄국이 약화된 틈을 타 아프간계 장군인 알라웃딘 하샨 샤가 1347년 건국한 술탄국이다. 바흐마니 술탄국은 데칸의 힌두계 소왕국들을 병합하며 힘을 키워나갔다. 1385년 알라웃딘이 죽을 즈음에는 이미 광대한 영토를 가진 중부 인도의 최강국으로 등극했다.

바흐마니 술탄국은 남쪽의 비자야나가라 제국과 다투며 성장해나갔다. 특히 1397년 즉위한 피루즈 샤 바흐마니 시절에 황금기를 맞았는데, 델리 술탄국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인도의 지식인들을 데칸으로 끌어모아 바흐마니 술탄국을 인도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피루즈 샤 본인도 종교학, 식물학, 기하학, 논리학에 정통했고 6개가 넘는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능력자였기에 가능했던 일. 피루즈 샤의 뒤를 이은 아흐마드 샤 1세는 외부 확장에 열을 올렸다. 아흐마드 샤 1세는 수도를 옮겨가면서까지 비자야나가라 제국과의 전쟁에 몰두했고[36] 결국 비자야나가라를 꺾고 남인도 최강국에 등극하는 데에 성공한다. 아흐마드 샤 1세 역시 예술에 후원을 아끼지 않았고 바흐마니 술탄국은 계속 번영을 누렸다.

바흐마니 술탄국은 1480년대까지 번성했지만, 수니파 시아파의 갈등, 황실 분쟁, 재정 파탄으로 인해 쇠락했다. 결국 바흐마니 술탄국은 1518년 아마드나가르, 골콘다, 비다르, 베라르, 비자푸르 이렇게 5개의 국가들로 분리되어 나갔고 바흐마니 술탄국은 붕괴했다. 인도 학계에는 이 5개의 술탄국들을 모아 데칸 술탄국이라고 부른다.

바흐마니 술탄국이 멸망하고 들어선 5개의 데칸 술탄국들은 서로 다투기도 하다가, 외부의 침략이 벌어지면 힘을 합치기도 하며 투닥투닥거리면서 지냈다. 특히 힘을 합쳐 전통의 라이벌 비자야나가라를 공격해 멸망시키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아마드나가르, 골콘다, 비다르, 베라르, 비자푸르 이렇게 5개의 술탄국들이 있었는데, 베라르는 아마드나가르에게 1574년 흡수당했고 비다르는 비자푸르에게 1619년 흡수당했다. 아마드나가르, 비자푸르, 골콘다 술탄국은 서로 싸우다가 결국 모두 다 1600년대에 무굴 제국 아우랑제브에게 정복당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3.7.2. 남인도의 힌두교 세력

3.7.2.1. 호이살라 왕조, 카카티야 왕조, 야다바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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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이살라 왕조 카카티야 왕조 야다바 왕조
서찰루키아 왕조 촐라 제국의 붕괴 이후 남인도에서는 땅을 갈라먹은 힌두 왕국들이 서로 치고받고 싸우기를 반복했다. 여러 왕국들이 있었지만 가장 두각을 드러낸 것은 호이살라 왕조, 카카티야 왕조, 야다바 왕조 이렇게 3개의 힌두 왕국들이 있었다. 이 3개의 힌두 왕조 모두 델리 술탄국에게 멸망당했지만 힌두교도들은 비자야나가라 제국을 세워 이슬람 세력에 대한 저항을 계속한다.

호이살라 왕조는 초기에는 서찰루키아 왕조의 총독으로 임명받아 권력을 얻었다. 이후 호이살라 왕조는 기회만을 노리다가 베라 발라라 2세 재위기인 1193년 독립을 선포했다. 호아살라 왕조는 쇠퇴해가던 촐라 제국을 공격해 크게 영토를 넓혔고, 데칸을 놓고 판디아 왕조, 카카티야 왕조, 야다바 왕조 등과 경쟁했다. 호이살라 왕조의 팽창 정책은 성공적이었고 호이살라는 1200년대 말 데칸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북부에서 델리 술탄국이 밀고 내려오자 호이살라 왕조도 답이 없었고, 30년에 걸친 치열한 저항 끝에 마지막 왕 베라 발라라 3세가 1343년 마두라이 전투에서 전사하며 멸망하고야 말았다.[37]

카카티야 왕조 역시 서찰루키아 왕조의 신하였다가 1163년 독립한 국가다. 1212년 몰락하는 촐라 제국을 공격해 힘을 얻었고 1270년에는 경쟁국 야다바 왕조를 공격, 데칸 동부의 패권자로 떠올라 전성기를 누렸다. 1289년 경 인도를 방문한 마르코 폴로가 카카티야 왕조에 대한 찬사를 남기기도 했을 정도. 그러나 영광도 잠시, 1303년 카카티야 왕조의 재화에 눈독들이던 델리 술탄국이 카카티야 왕조를 공격했다. 1323년 투글루크 왕조가 공격하자 맹렬하게 저항했지만 수적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5개월 간의 포위 공격 끝에 항복하며 멸망했다.

야다바 왕조 서찰루키아 왕조의 신하였지만 1187년 반란을 일으켜 서찰루키아를 멸망시키고 그 영토 대부분을 흡수했다. 전성기 시절에는 서찰루키아를 연상케 할 정도의 강역을 자랑하며 호이살라 왕조, 카카티야 왕조와 경쟁하기도 했다. 그러나 야다바 왕조의 불행은 데칸 최북단에 자리잡아 델리 술탄국의 최전선에 있었다는 것. 야다바 왕조 역시 델리 술탄국의 할지 왕조에게 공격당해 치명타를 입고 1317년 멸망당했다. 그나마 끝까지 저항해 호이살라 왕조와 카카티야 왕조가 델리 술탄의 침략을 대비할 시간을 벌어줬다는 점에서 남인도의 이슬람화를 조금이라도 늦췄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38]
3.7.2.2. 비자야나가라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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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피의 비루팍샤 사원 비자야나가라 제국
델리 술탄국이 전 인도를 이슬람화시키려 할 때, 남인도에서 그걸 막아섰던 세력이 바로 비자야나가라 제국이다. 그야말로 남인도 힌두교의 방파제.

당시 남인도는 기존의 호이살라 왕조, 카카티야 왕조, 야다바 왕조, 판디아 왕조 등 힌두 왕국들이 델리 술탄국 앞에서 맥없이 쓸려나가는 상황이었다. 이 때 등장한 세력이 바로 비자야나가라 제국이다. 비자야나가라는 당시 어느 소국의 국경을 지키던 장수 출신 하리하라 1세와 부카 1세 형제가 세웠다. 하리하라 1세와 부카 1세는 1336년 비자야나가라를 수도로 삼아 독립을 선포했고, 힌두교 유민들을 흡수하며 빠르게 성장했다.

비자야나가라 제국은 호이살라 왕조, 마두라이 술탄국[39]을 빠르게 흡수해버리고 데칸의 바흐마니 술탄국과 대립했다. 비자야나가라는 남인도 대부분을 장악한 채로 바흐마니 술탄국과 치열하게 싸워댔다.

비자야나가라 제국은 1424년 즉위한 데바 라야 2세와 1509년 즉위한 크리슈나 데바 레야 시절에[40] 그 국력이 정점에 달하여 인도 아대륙 내에서 제일의 세력을 자랑했다. 데바 라야 2세 시기의 비자야나가라 제국은 스리랑카와 미얀마에게서까지 조공을 받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바흐마니 술탄국은 1518년 스스로 붕괴해 5개의 데칸 술탄국들로 갈라졌다. 그러나 비자야나가라와 데칸 술탄국들 사이의 갈등은 계속됐다. 비자야나가라는 처음에는 데칸 술탄국들 중 최남단에 있는 비자푸르 술탄국의 영토 일부를 빼앗는 등 승기를 잡기도 했지만, 1565년 탈리코타 전투에서 패배하며 무너지다가 1646년 5개의 데칸 술탄국들이 힘을 모아 협공해오자 끈질기게 버텼지만 결국 멸망했다.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멸망 이후 남인도에는 마이소르 왕국이 세력을 잡는다.

3.8. 무굴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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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제국 붉은 요새
명목상 인도의 두 번째 통일왕조. 화려한 문화를 자랑하던 강대한 이슬람 제국이다.

1526년 무굴 제국이 들어서면서 북인도의 국가 흥망사는 안정기에 접어들게 된다. 무굴 제국은 티무르 제국의 후예이자 아프가니스탄 출신인 바부르가 세운 국가로, 기존의 패권국 델리 술탄국을 멸망시키고 북인도를 장악했다. 바부르의 후계자 후마윤 시대에 잠시 수르 왕조에게 땅을 빼앗기고 멸망당할 뻔 했지만, 얼마 안가 인도로 돌아와 제국을 회복했다. 무굴 제국은 1556년 즉위한 악바르 대제에 이르러 제대로 된 행정체계와 군사 체계를 갖추고 북인도 전체를 장악한 대제국으로 떠올랐다.

악바르 대제는 행정, 군사 개혁으로 내실을 다지는 동시에 지역 강국 수준이던 무굴 제국을 북인도를 아우르는 대제국으로 끌어올렸다. 게다가 비무슬림들에게 매기는 세금 지즈야를 감세하는 등 종교의 관용을 베풀어 이슬람, 힌두, 시크교도들 사이의 안정을 꾀하는 한편, 동시에 예술을 사랑해 문화에 엄청난 후원을 베풀었다. 라지푸트 공주들과 결혼해 피정복지의 반발을 무마했으며 사티, 조혼 폐지, 과부의 재혼 허가 등 여권 신장에도 관심이 많았다. 여러 모로 대제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군주였다.

악바르의 뒤를 이은 자한기르, 샤 자한 역시 능력있는 군주였다. 자한기르나 샤 자한 둘다 악바르에 비하면 종교적 관용 면에서는 퇴보했지만 군사적, 경제적으로는 악바르의 정책을 그대로 이었다. 무굴 제국은 계속 경제적, 문화적인 풍요를 누렸고, 특히 경제 성장이 폭발한 샤 자한 시대에는 세계 1위 경제대국이라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샤 자한이 건축광이었던 탓에 유명한 타지마할, 붉은 요새, 아그라 요새 등 인도의 유명한 건축물들도 죄다 이 시기에 지어진 것들이다. 다만 샤 자한은 과도 만만치 않은 군주였다. 그가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타지마할 등 건축 프로젝트에 쏟아붓는 바람에 국가의 부채가 폭증했고 종교적으로도 서서히 분란이 일어나는 등 혼란의 씨앗이 심어지던 시기기도 했다.

무굴 제국은 1618년 즉위한 아우랑제브 재위기에 영토적으로 최전성기를 맞았다. 아우랑제브는 데칸 원정을 떠나 30년 가까이 영토 확장 전쟁에 주력했다. 덕분에 무굴 제국의 영토는 2배 가까이 늘어났고 마우리아 왕조 이래로 2000년 만에 인도를 재통일한 왕조라는 명예를 얻었다.

하지만 아우랑제브의 재위는 그 그림자도 심각했다. 아우랑제브의 무리한 원정으로 국고는 파탄났고, 특히 심각한 비무슬림 차별 정책으로 인해 힌두교도, 시크교도, 자이나교도들의 불만이 폭발 직전까지 이르렀다. 아우랑제브 말기 무굴 제국은 겉으로는 거대한 초강대국이었지만 속은 이미 곯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아우랑제브 사후 무굴 제국은 내부 반란과 황실 분쟁, 외세의 침략으로 인해 22년 만에 델리만 겨우 통치하는 지방 정권 수준으로 전락한다.

무굴 제국은 1707년 아우랑제브가 죽자 30년 후 아프샤르 왕조 나디르 샤에게 치명타를 얻어맞고 일개 소국으로 축소됐다. 무굴은 마라타 제국, 두라니 왕조, 시크 왕국 등 인근 세력들의 보호국이 될 정도로 처지가 비참해졌고 황제가 수도 델리를 벗어나 도망다닐 정도였다. 1803년에는 영국 동인도 회사의 얼굴마담으로 전락해 델리만을 근근히 다스리는 수준으로 떨어졌고 1857년 세포이 항쟁이 진압되며 공식적으로 멸망했다. 이후 인도에는 인도 제국이 들어선다.

3.8.1. 마라타 제국, 시크 왕국, 마이소르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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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타 제국 시크 왕국 마이소르 왕국
1707년 무굴 제국의 아우랑제브가 사망하자 무굴 제국은 급속도로 붕괴하며 인도에 대한 패권을 잃어버렸다. 이때 수많은 세력들이 일어나 인도의 패권을 두고 싸웠는데, 수많은 세력들이 있지만 인도 내에서는 마라타 제국, 시크 왕국, 마이소르 왕국 등이 가장 주요한 세력이었다. 특히 이 시대의 핵심은 바로 영국의 인도 정복이다. 인도에 군침을 흘리던 서구 열강들은 무굴 제국 시절부터 인도 곳곳에 조차항과 조계를 설치해두고 있었는데, 무굴이 무너지고 혼란이 도래하자 이때를 틈타 본격적으로 군대를 파견하며 인도 정복에 열을 올린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영국이 인도 전역을 차지하는데 성공한다.

마라타 제국은 아우랑제브의 정복전쟁에 반발해 마하라슈트라의 토후 시바지 본슬레가 차트라파티로 추대되며 1674년 남인도에서 결성된 힌두교 연맹이었다. 명재상 바지라오 1세의 지휘 하에 붕괴하는 무굴 제국의 영토를 야금야금 먹어치웠다. 전성기인 18세기 중반에는 인도 아대륙 중북부 대부분을 정복하기에 이르렀고 1737년에는 무굴 제국의 수도 델리까지 함락했다. 가장 강성했을 때는 무굴 황제를 갈아치우고 대신 재상이 그 자리에 앉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을 정도. 전성기 시절의 마라타 제국은 남쪽으로 타밀나두, 북쪽으로는 페샤와르, 동쪽으로는 벵골, 서쪽으로는 파키스탄에 이를 정도로 넓은 영토를 자랑했다.

이대로만 계속 갔다만 마라타 제국이 무굴의 뒤를 잇는 통일 힌두 제국이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1761년 아프간계 두라니 왕조와 벌인 제3차 파니파트 전투에서 패배하며 북서부로 진출이 좌절됐고 펀자브 일대의 시크 왕국이 득세하며 북부 영토 대부분을 잃어버리며 세가 꺾였다. 가장 큰 문제는 당시 대영제국이 인도를 넘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벵골 쪽으로 진입해 들어온 영국군은 마라타 제국과 전쟁을 벌였다. 마라타는 1775년 일어난 1차 앵글로-마라타 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 1803년의 2차 전쟁, 1815년의 3차 전쟁에서 패배하며 결국 영국 동인도 회사의 지배를 받는 여러 토후국으로 나뉘어 멸망했다.[41]

시크 왕국은 1799년부터 1849년까지 펀자브 일대를 중심으로 인도 아대륙의 북서부를 지배한 시크교 제국이었다. 당시 시크교도들은 아우랑제브의 탄압에 질려 스스로를 보호할 무력을 키우면서 그 세가 상당한 상태였는데, 무굴 제국이 혼란에 빠지자 아예 영웅 란지트 싱을 중심으로 독립을 선포했던 것. 란지트 싱이 뛰어난 전략가인데다 타고난 군사적 재능이 있었기에 시크 왕국은 서구식 훈련을 받은 대군을 운용할 수 있었다. 전성기에는 펀자브 중부, 물탄과 카슈미르, 페샤와르를 다스리는 상당한 강국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인도의 웬만한 왕조들이 다 그렇듯이 시크 왕국도 창건자인 란지트 싱이 죽자 바로 쇠락했다. 특히 영국이 신드를 막 합병하고 펀자브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터라 시크 왕국의 위기는 더욱 심각해졌다. 1845년 이런 야욕을 막고자 선공을 가했지만 처참하게 패배했고 카슈미르를 통째로 빼앗겼다. 영국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신세로 전락하자 분노한 시크교도들은 1848년 다시 군대를 모아 저항했으나 역시 패배했다. 결국 영국이 직접 통치로 전환하고 마지막 군주 둘레프 싱을 폐위하면서 시크 왕국도 멸망한다.

한편 최남단에서는 마이소르 왕국이 힘을 키우고 있었다. 원래 마이소르를 중심으로 한 작은 소왕국이었는데 비자야나가라 제국이 망한 이후 남인도의 최강국으로 떠올랐다. 한편 영국은 남인도에도 꾸준히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고, 이에 마이소르의 술탄 하이다르 알리는 서양식 군대체계와 무기를 도입해 영국을 저지하려 총력을 다했다. 마이소르 왕국은 무려 4번에 걸쳐 영국과 전쟁을 벌였다. 1766년 첫 전쟁에서는 마이소르가 승리했지만, 영국이 외교전을 펼쳐 마라타 제국을 꼬드겨 마이소르를 고립시키는 등 갈수록 상황이 나빠졌다. 결국 1798년 4차 전쟁이 일어났고, 여기서 배신자가 티푸 술탄을 암살하며 결국 마이소르 왕국은 영국에게 복속된다.[42]

3.8.2. 영국의 인도 식민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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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인도 정복 과정[43]
영국은 무려 200년에 걸쳐서 차근차근 인도를 식민지화했다. 무굴 제국이 강성하던 시절부터 이미 항구를 조차하고 조계를 설치하는 등 발판을 마련해둔 다음, 무굴 제국이 쇠퇴하고 혼란기가 찾아오자 그때서야 난립하는 왕국들을 하나하나 집어삼킨 것이다. 그 결과 영국은 자기 본토보다도 몇 십배는 거대한 인도라는 땅덩어리를 통째로 집어삼킬 수 있었다.

유럽인들은 중세 이래로 인도라는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항로를 갈구했다. 결국 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로의 항로를 찾아내고야 말았고, 포르투갈이 가장 먼저 인도로 진출해 고아, 봄베이 등에 교역소를 세웠다. 다음으로 네덜란드가 진출했고, 그 뒤를 영국과 프랑스가 뒤따랐다.[44]

영국 동인도 회사는 무려 1600년에 설립됐다. 동인도회사는 극도로 교묘하게 인도에 진출했다. 1611년에 인도 동부 해안가에 처음으로 공장을 지었고, 1612년에 무굴 황제 자한기르에게 수라트에 공장을 설립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아 인도로 첫 발걸음을 뗐다. 1640년에는 비자야나가라 제국에게도 동일한 허가를 받아 남인도의 마드라스에도 진출했다. 찰스 2세 포르투갈로부터 결혼 지참금으로 받은 봄베이를 영국 동인도회사에 넘겨줬고 20년 후 동인도회사는 봄베이에 교역소를 설립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영국 뿐만 아니라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 덴마크 등 수많은 서구 열강들도 앞다퉈 인도 진출에 열을 올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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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시 전투
무굴 제국이 1700년대 이후 무너지고 인도의 혼란이 심해지며 동인도회사의 인도 진출은 한층 가속화됐다. 동인도회사는 무너지는 무굴 황제를 협박했다. 1757년 로버트 클라이브 플라시 전투에서 승리했고 1764년에는 북사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7년 전쟁의 플라시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프랑스라는 최대 경쟁국을 쳐낼 수 있었던 것은 사실상 영국이 인도 전체를 집어삼켜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증수표였다. 더이상 유럽 경쟁국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진 영국은 샤 알람 2세를 협박해 벵골의 징세권을 뜯어냈다. 동인도회사는 점점 영향력을 넓혀나갔으며 1773년에는 비하르, 오리사 등 갠지스 하류 전체를 집어삼켰다.

동인도회사는 무굴 제국의 잔재들을 빠르게 흡수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1757년 플라시 전투로 당시 인도에서 가장 부유한 벵골 수바를 먹어치울 수 있었다. 동인도회사와 영국인들은 무굴 황제의 대리인을 자처하며 벵골의 징세권을 뺏어갔으며, 1772년에는 그 가면마저 벗어던지고 그냥 영국 땅으로 편입해버렸다. 인도 데칸 지방의 하이데라바드 왕국도 마찬가지였다. 하이데라바드 왕국 역시 원래는 무굴의 봉신국이었는데, 맨 처음에는 마라타 제국의 봉신국이 되었다가 1798년에는 영국에 항복하고 번왕국으로 전환됐다. 다른 대부분의 지방들도 비슷한 수순으로 영국에게 잡아먹혔다.

영국은 무굴 제국이 몰락한 후 들어선 인도 토착 세력들을 모두 무릎 꿇리는데 성공했다.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1766년부터는 마이소르 왕국과 전쟁을 벌였고, 1772년부터는 마라타 제국과도 전쟁을 벌였다. 결과적으로 1798년에는 마이소르를 굴복시켰고 1815년에는 마라타를 정벌했다. 당시 인도에서 가장 강력한 토착 세력이었던 마라타 제국을 굴복시킨 영국에게 더이상의 적수는 없었다. 시크 왕국마저도 영국의 압도적인 화력에 순식간에 무너졌고 1848년 완전히 멸망하고야 말았다.

영국이 아무리 식민대국이었다지만 그 넓고 사람많은 인도를 완벽히 통치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동인도회사는 회사가 직접 다스리는 회사령과 토후들에게 일정 자치권을 부여한 번왕국들을 나눠 통치했다. 델리, 아삼, 신드 등 대도시들과 일부 지방들은 동인도회사가 직접 관할했지만, 하이데라바드, 마이소르, 카슈미르, 시킴 등 상당수의 지방들은 기존 지배층을 그대로 유지했다. 이들은 대신 영국의 헤게모니를 인정하고 세금과 병사들만 꼬박꼬박 영국에 바치면 되었다. 기존 인도의 지배계급들은 자신의 부만 빼앗지 않는다면 딱히 영국에 저항할 생각이 없었고, 영국의 이러한 통치는 1857년 세포이 항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그럭저럭 잘 굴러갔다.

3.9. 인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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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제국
인도의 세 번째 통일왕조. 브리티시 라지(British Raj)라고 불리던 대영제국의 식민지이다.

근세 이후 인도 각지에 침투하던 유럽 세력은 대체로 프랑스 영국 동인도 회사로 요약된다. 그러나 7년 전쟁 플라시 전투에서 영국군이 인도 현지 군대와 합세한 프랑스를 격파하면서 인도에서의 독자적인 지배력을 굳혔고, 영국 동인도 회사령 인도라는 동인도 회사 소유의 식민지를 건설하며 본격적인 식민개발에 열을 올렸다. 이후 18세기부터 19세기 초반까지 각지 중소 국가들을 격파하고 영국이 실질적으로 전 인도를 지배하게 되었으나, 무굴 제국 황실은 형식적으로나마 존속했다. 영국은 무굴 황제의 대리인 자격으로 세금을 걷고 인도 곳곳을 다스렸다.

그러나 1857년 세포이 항쟁이 일어나며 격변이 일어났다. 세포이들은 무굴 황제를 중심으로 결집했고, 이에 위기를 느낀 영국은 항쟁을 진압한 후 무굴 제국을 폐지해버렸다. 동시에 동인도 회사 역시 폐지하며 인도를 영국 정부 직속 관할로 바꾸어버렸다. 이 시기부터를 바로 인도 제국이라고 부른다. 1877년에는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의 여제에 등극하면서 온전히 인도를 지배하게 된다.

영국은 디바이드 앤 룰이라는 원칙을 철저히 지켰다. 무슬림들과 힌두교도들 사이의 갈등을 교묘히 이용했고 귀족과 평민, 가진자와 없는자, 강자와 약자를 갈라서 영국에게 저항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영국은 인도 전역에 철도를 깔아 막대한 양의 물자를 수탈해갔고,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120만 명에 달하는 인도인들을 징병해 전장으로 끌고나갔다. 1905년에는 벵골 분할령으로 벵골을 나누려 시도하다가[45] 실패했고, 1943년에는 그 악명높은 벵골 대기근이 터지며 수백만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비극을 낳았다.

식민 지배 시기 인도인들은 끊임없이 자치, 독립운동을 벌였다.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 자와할랄 네루와 인도 국민 회의 계통의 독립 운동, 진나가 이끄는 무슬림 연맹 등의 독립 운동 등이 계속되어 인도의 주권을 찾으려 노력했다. 대체로 인도의 독립 운동은 영국의 지배 아래에서 점차 자치권을 확대하는 과정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도입하면서 자신들의 의석 보장을 원하는 이슬람교와 자신들에게 유리한 일방적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힌두교 세력이 서로 대립하며 충돌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인도의 독립 요구는 한층 더 거세졌다. 인도는 250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파견했다. 다만 인도는 미얀마를 점령한 일본군과 맞서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일본군을 이용해 영국을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하려 한 찬드라 보스의 활동도 있었던 것이다. 1942년에는 마하트마 간디의 지도 하에 대대적인 저항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영국은 동남아시아에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일본 제국에 모든 힘을 집중해야 했으므로 이들 운동을 신속하게 무력 진압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이같은 강제진압도 더이상 명분이 없었고, 식민지 해방이라는 시대적 흐름 앞에서 영국의 인도 지배는 금이 쩍쩍 가기 시작했다. 특히 전선에서 돌아온 인도인 장병들이 대놓고 영국의 인종차별과 식민통치에 불만을 표하며 더이상 인도의 독립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었다.

3.10. 독립과 인도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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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분단 독립을 축하하는 인도인들
제국주의의 쇠퇴, 새로운 국제질서의 형성, 그리고 인도의 일본 제국주의 세력 확대 저지의 공을 인정받아 1947년 영국은 인도를 자치령으로 지정해 사실상 독립을 승인했다. 인도의 독립 기념일(자치령 선포일)은 8월 15일, 즉 우리나라의 광복절과 같다.[46]

그러나 이 과정에서 무슬림과 비무슬림 간의 사실상의 종교 내전이 발발하여 수십만 명이 사망하고 수천만 명이 피난길에 오르는 가운데[47] 무슬림 다수 지역인 인더스강 유역과 동벵골 지역이 파키스탄 자치령으로, 그 밖의 나머지 지역이 인도 자치령으로 서로 분리 독립하게 되었고, 독립 후에도 몇 년간 영국 국왕을 모시다 1950년 개헌하여 대통령을 뽑고 영국 국왕을 섬기지 않는 공화국인 인도 공화국으로 정식 출범한다. 이 과정에서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대립이 격심해져 마하트마 간디의 암살이 일어나기도 했고, 불가촉천민의 인권 보장을 요구하는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의 활동도 있었다. 결국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인도 자치령은 종교의 차이로 분할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인도 분단이 현실화 되었다.

인도는 파키스탄과 여러 갈등을 겪었다. 인도 공화국 파키스탄 공화국으로 분리 된 후에도 소규모 산발전을 치렀다. 파키스탄이 카슈미르를 침공해서 일부를 정식 영토로 편입시키기도 했으며 방글라데시가 파키스탄에게서 독립할 때도 인도가 방글라데시를 지원하면서 파키스탄과 치열하게 경쟁했다.

인도의 현대사는 자와할랄 네루의 네루-간디 가문이 주도했다. 자와할랄 네루 총리 이후 인도 국민회의가 사실상 반쯤 독재정치를 했는데, 이때 제3세계 운동과 녹색 혁명, 사회주의 민족주의를 결합한 국가적 산업화 정책을 폈다. 인디라 간디, 라지브 간디, P. V. 나라심하 라오 총리를 중심으로 한 인도 국민회의 정권 아래에서 인도는 빠른 경제적 발전을 이룩했다. 이후 1990년대에 빠르게 성장하면서 현재는 BRICS 중의 한 국가로 꼽히며( 브릭스의 인도), IT 산업 등의 분야에서 앞서 나가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1990년대 이래로 아탈 비하리 바즈파이 총리를 필두로 오랫동안 장기집권을 이어왔던 인도 국민 회의가 몰락하고 인도 인민당 등 야당 세력들이 등장하는 양상이다. 인도 국민회의는 테크노크라트 출신 만모한 싱을 내세워 2004년부터 10년간 다시 장기집권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부정부패 스캔들이 연달아 터지며 다시 정권을 나렌드라 모디의 인도 인민당에게 내줬다. 이후 2014년 집권한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힌두 중심주의, 경제적 자유주의를 내세우며 압도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강한 국정 드라이브를 거는 중이다.

비록 카스트 제도를 비롯한 구습이 강하게 작용하는 문제가 있다고 하지만, 여성 인디라 간디와 소수 종교인 시크교도 만모한 싱[48]이 수상 자리에 오르고 불가촉 천민 출신인 람 나트 코빈드가 대통령이 되는 등 가시적인 성과도 많이 있었다. 반면 인구 문제는 해결이 쉽지 않아 현재 14억을 넘어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고, 힌두 민족주의 정당인 인도 인민당의 아탈 비하리 바즈파이가 집권한 1998년부터 2004년 사이에는 파키스탄과의 핵무기 경쟁이 심각했다. 힌두교 근본·민족주의는 인도의 여러 골칫거리 가운데 하나.

인도는 영연방 국가이다. (비교 대상으로, 파키스탄은 한때 탈퇴했으나 다시 영연방에 가입했다) 그러나 영국 여왕을 국가원수로 모시지 않고 대통령을 선출하는 공화제 국가인 건 엄연하다. 어마어마한 인구수 때문에 미국을 제치고 "지상 최대의 민주국가"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현재 여당인 인도 인민당의 세력이 가장 크지만 인도 독립 이후 인도 정계를 주도해왔던 인도 국민회의의 세력은 여전히 크고, 공산당이 선전하는 지방 정부도 제법 있다. 덤으로 마오이스트들도 따라온다

4. 관련 항목


[1] 한국어로 劫으로 알려져있는데, 우주가 창조되고 파괴되는 1겁의 시간은 약 43억년의 시간이며 브라흐마의 하루에 해당되며, 브라흐마 시바는 1겁이 끝나면 우주를 없애고 또 만든다고 한다. 그리고 이걸 브라흐마 시간으로 100년( = 36000 칼파) 동안 계속한다. [2] 알 비루니는 인도인들이 "사건들의 역사적 배열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왕조의 연대기를 정확하게 기록하는 일에 부주의했으며, 어쩔 줄 모르는 채로 되는 대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고 썼다. [3] Thapar, Romila. 2013. The Past Before Us: Historical Traditions of Early North India.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4] 단, 비문에 남은 초기 형태의 프라샤스티는 기원후 2세기 등 이보다 훨씬 일찍 기록되기도 했다. [5]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호모 에렉투스가 인도네시아에 180만년 전에 이미 도달한 점, 136만년 전에 동아시아에 도달한 점을 근거로 대략 200만 년 전에는 이미 인도에 정착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6] 정확히는 기원전 1500년부터 기원전 500년까지다. [7] 이 시기의 경전은 베다 계통의 문헌(이를 '스루티(shruti)'라고 한다)에서 우파니샤드 등의 '스무르티(smriti, 베다 이외의 후세의 모든 문헌)' 등에 대한 연구로 넘어가는데, 이 시대의 사상은 통일적 질서에 대한 탐구가 두드러진다. [8] 한편 이 시기 분열 속에서 브라만교의 지나친 의식 중시에 반발하여 자비와 평등을 역설한 석가모니(고다마 싯다르타)의 불교와 살생 금지, 고행 금지 등의 계율을 강화한 바르다마나의 자이나교가 발생하였다. 이는 당시에 등장한 윤회 사상에 근거한 것으로, 불교와 자이나교, 힌두교는 모두 윤회 사상에 큰 기반을 두어 후의 인도 역사와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9] 석가모니는 일종의 존칭으로, 그가 있었던 '샤카족의 위대한 사람'이란 의미이다. 석가모니의 종족인 오늘날 네팔지역의 샤카(Shakya)와 뒤에 나오는 BC 2세기 이후 인도로 유입된 동부 이란 유목민사카(Saka)는 전혀 다른 집단이다. [10] 마가다 왕국은 하나의 단일 왕통이 쭉 이어진 국가가 아니다. 브라하드라타 왕조, 하리얀카 왕조, 시슈나가 왕조 등 단일 왕국 내에서 여러 차례 왕조가 갈아치워졌다. [11] 굽타 왕조나 무굴 제국의 경우에는 일시적으로 남인도 국가들의 복종을 받기는 했지만 영토로 지배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아소카 왕 때에도 실론(현재 스리랑카) 등 완전히 통일하지 못한 땅은 있었다. 물론 그래서 영국이 잘 했다는 것은 죽어도 아니고. [12] 해상 무역이 기원전 2세기경부터 흔적이 보이는데, 이들이 남긴 문화는 참파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고대에는 이슬람교 상인들이 활약을 펼치기 전까지 바다(해상) 무역에서 큰 활약을 했다. [13] 타밀족들이 살던 인도 최남단 지방. [14] 다만 체라, 촐라, 판디아 모두 단일 왕통이 이어진 왕국이 아니고 하나의 왕국 안에서 수많은 왕조들이 바뀌고 갈아치워지기를 반복했다. 뿐만 아니라 여러 차례 멸망당했다가 부활하기를 반복해서 남인도사를 공부하다보면 헷갈리는 부분이 있다. [15] 다만 체라 시인들의 칭송시를 제외하면 어디에도 셍구투반이나 체라 세력이 북인도로 진출했다는 말이 없기에 과장된 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16] 해당 사진은 1200년대 3차로 부활한 판디아 왕조의 강역이다. 기원전의 고대 판디아 왕조는 이보다 한참 작은 인도 최남단의 영토 일부분만을 다스렸다. [17] 인도 중왕국으로도 부른다. (BC 200년대 ~ 1279)라고 부른다. [18] 마하메가바하나(산스크리트어: महामेघवाहन, 기원전 2세기 또는 기원전 1세기 ~ 서기 4세기)는 마우리아 제국이 쇠퇴한 이후 칼링가를 지배하던 고대 왕조였다. [19] 슝가 왕조의 붕괴 후 마가다에는 칸바 왕조가 들어섰지만 영토도 작을 뿐더러 4대 45년만에 사타바하나 왕조의 공격을 받고 망해서 큰 인지도는 없다. [20]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인데, 한나라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장건을 보내 찾아간 대월지와 큰 관련이 있는 민족이다.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와 '쿠샨' 왕조로 불렀다. [21] 한편 이시기 인도 남부에서는 간다라 미술과는 다른 양식의 마투라 미술이 등장하였다. [22] 엄밀히 말하면 사산 제국 아래의 분봉국으로 연명하며 망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여러 분파로 쪼개져 난립하다가 중앙아시아 분파들은 키다라인들에게, 북인도 분파는 굽타 왕조에게 복속당하며 완전히 사라진다. [23] 한편으로는 찬드라 굽타 2세가 지금의 아무 다리아 일대까지 원정했다는 일부의 견해도 있다. [24] 왕오천축국전의 배경이 바로 이 바르다나 왕조 시절의 인도다. [25] 동로마 제국이나 프랑크 왕국이 이슬람의 유럽 침공을 저지한 것과는 달리 이쪽은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26] 당시 세계 4대 강국이 아바스 왕조, 당나라, 동로마 제국, 라슈트라쿠타 왕조로 꼽는다. [27] 다만 이때도 얼마 못가서 프라티하라 왕조, 라슈트라쿠타 왕조에게 패배하고 영토를 빼앗기면서 패권이 오래는 못갔다. [28] 북인도 기반의 국가들이 남인도로 돌격한 적은 수없이 많지만 남인도 기반의 국가가 북인도로 돌격한 사례는 많지 않다. 남인도 계열의 국가들은 히말라야는커녕 갠지스 강을 넘은 경우도 희귀하다. [29] Western Ganga Dynasty. 350년부터 1000년경까지 지속된 카르나타카의 지역 왕조. 팔라바 왕조가 약화되자 독립해 자치적인 왕국을 세웠고, 이후 찰루키아 왕조, 라슈트라쿠타 왕조의 속국으로 살았다. 라슈트라쿠타 왕조가 무너지자 잠시 독립을 찾았다가 얼마 못가 촐라 제국에게 멸망당한다. 영토적으로는 작은 소국이지만 현대 카르나타카 남부의 문화에 큰 기여를 한 왕조다. [30] 현재 인도 동부 해안가인 오디샤 지방 대부분을 다스렸던 왕조. 5세기 초부터 무려 20세기까지 오디샤 일대를 다스린 힌두 왕조였다. [31] 이 시대가 남인도 세력이 동남아시아까지 지배한 유일한 시기이기 때문에 인도의 국뽕들이 좋아하는 시기기도 하다. [32] 판디아 왕조 역시 촐라 왕조처럼 비슷하게 여러 번 멸망과 부활을 반복한 나라다. 무려 4번이나 세워졌다가 망하기를 반복한 다사다난한 나라. [33] 반드시 인도의 재화를 노리고 이쪽으로 넘어오는 것만은 아니었다. 잘랄 웃 딘과 같은 호라즘 제국의 잔당세력이 본거지에서 쫒겨나 인더스 강 너머로 도피한 경우도 있었다. [34] 주 지배층이 개종한 무슬림 노예 출신인 맘루크였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35] 1070년 건국된 힌두계 왕국. 팔라 왕조가 멸망하자 그 뒤를 이어 벵골을 다스렸다. 고르 왕조의 공격을 받아 망할 뻔하다가 겨우 살아났지만, 결국 투글루크 왕조에게 멸망했다. [36] 이는 전임 피루즈 샤가 비자야나가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했던 탓이 컸다. 아흐마드 샤 1세가 전쟁 패배의 책임을 물어 1422년 피루즈 샤를 쫒아내고 술탄직을 차지했기에 아흐마드 샤 1세는 반드시 비자야나가라를 꺾어야만 했다. [37] 호이살라 왕조의 잔당들은 비자야나가라 제국에 흡수되어 델리 술탄국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다. [38] 물론 호이살라와 카카티야 모두 델리 술탄국에게 멸망하지만, 힌두교도들은 굴하지 않고 저항 운동을 계속해 델리 술탄국의 통치를 벗어던지는 데 성공한다. [39] 델리 술탄국 휘하의 토후가 판디아 왕조를 몰아내고 세운 술탄국. 건국한지 50년도 안 돼서 비자야나가라 제국한테 망했다. [40] 비자야나가라 제국 역시 델리 술탄국처럼 여러 왕조가 교체된 나라다. 상가마 왕조 - 살루바 왕조 - 툴루바 왕조 - 아라비두 왕조 순으로 교체됐다. 데바 랴아 2세는 상가마 왕조 출신이고 크리슈나 데바 라야는 툴루바 왕조 출신이다. [41] 마라타 동맹은 인도 역사에서 두 가지 주요한 의의를 가지는데, 첫 번째로 힌두교의 부흥과 무슬림 지배 계급의 몰락의 분수령이 되었고, 두 번째는 인도 역사의 중심지가 내륙에서 해안 지방으로 옮겨갔다는 점이다. 중앙아시아의 육로 무역이 쇠퇴하고, 해상 무역이 증가하는 추세에 따라 마라타 동맹의 중심 지역들은 상당수가 해양 도시였다. [42] 마이소르 왕국은 아예 국체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인도 제국 내에서도 막강한 번왕국으로 존속했고 마이소르 왕족들도 나름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마이소르 왕국은 1947년에야 인도 자치령에 흡수됐다. [43] 1780년 이전 영국의 영토
1780년 ~ 1800년 사이에 영국이 정복한 영토
1800년 ~ 1815년 사이에 영국이 정복한 영토
1815년 ~ 1846년 사이에 영국이 정복한 영토
1846년 ~ 1876년 사이에 영국이 정복한 영토
1876년 ~ 1912년 사이에 영국이 정복한 영토
영국령 실론. 영국이 1796년에 정복
[44] 생각하는 것과 달리 수많은 유럽 열강들이 인도에 식민지를 세우고 영토 확장을 시도했지만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인도 토착 세력들의 무력이 상상 이상으로 강했을 뿐만 아니라,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유럽 개척자들이 인도에 진출하기에는 아직 화력도 무력도 모자랐기 때문. 네덜란드는 인도로 진출하려다 패배해 쫒겨났다. 심지어 그 영국마저도 전성기의 무굴 제국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깨갱하고 수그린 적이 있을 정도다. [45] 힌두교도들이 많은 서벵골과 무슬림들이 많은 동벵골을 분할했다. 영국은 행정효율화를 목적으로 내세웠으나 인도인들은 갈라치기가 목적이라 여겼고 결국 극렬한 반발 끝에 1911년 벵골 분할령은 폐지된다. [46] 파키스탄은 인도 독립 하루 전인 8월 14일 독립하였다. [47] 독립 전후 종교를 따라 양측의 조국으로 떠난 피난민 수는 1500만 명, 많으면 2천만 명에 달한다. 인류 역사상 최대규모의 집단 이주였다. [48] 터번으로 잘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