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2000년 5월 21일 새벽, 이은석이 경기도 과천시에 위치한 자신의 집에서 부모를 살해하고 시체를 토막내어 유기한 사건.박한상 존속살해 사건과 함께 한국 내 존속살인 사건의 대표적인 사례로, 존속살인+토막살인이라는 충격적인 범죄와 범죄를 저지른 이유가 가정폭력이라는 점 때문에 현재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2. 전개
2000년 5월 21일 새벽 당시 23세였던 이은석은 양주[1]를 통째로 비워 버린 다음 어머니가 자고 있는 방에 들어가 어머니를 망치로 살해하고 약 4시간 후 아버지도 같은 방법으로 살해했다. 어머니를 먼저 살해한 것은 특별한 이유가 없다고 증언했다. 직접적인 원흉이 가장 컸으니 본인도 모르게 먼저 손이 갔을 것이다.막상 어머니를 죽인 후 자신이 살인을 했다는 생각에 너무 무서워서 아버지는 죽이지 못하고 4시간 동안이나 방 앞을 왔다갔다하며 안절부절 못했지만 날이 밝아 오자 아버지가 잠을 깨서 이 광경을 볼 것을 걱정과 불안한 나머지 결국 아버지도 살해했다. 둘을 한 번에 죽이지 않고 수시간의 시간차를 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이은석은 무려 이틀에 걸쳐 시신을 토막내 여러 곳에 유기하고 청소 및 뒤처리를 했다. 시체를 오븐에 넣어 태우려고도 했으나 부피가 줄어들지 않는다고 해서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토막 살해한 것은 보복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무서워서 그랬다. 없던 일로 만들고 상황을 모면하고 싶었다. 시체만 없어진다면 무서움이 사라지리라 믿었다. 시체에 칼을 대니 정해진 듯 자동으로 모든 일을 할 수 있었다. 피범벅이 된 내 모습을 보고도 두렵지 않았다. 나는 이미 그때 제정신이 아닌 짐승이었기 때문이다.[2]
이은석의 인터뷰
시신은 청소부에 의해 발견되었고 사체의 지문을 토대로 신원을 확인하였다. 경찰의 가택수사 과정에서 집에 있던 이은석이 검거되었다. 사건 직후 경찰서 진술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나"라며 울먹였다.이은석의 인터뷰
여기서 더 놀라운 것은 이은석의 형의 반응인데 부모의 사망과 동생의 체포 소식을 듣고는 부모를 살해한 동생을 오히려 원망하기는커녕 "그럴 수도 있다. 나는 동생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하면서 공범 아니냐는 의심까지 받기도 했다. 물론 동생이 잘못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인정했고 당시 사건 현장에 없었다는 알리바이가 있었기 때문에 공범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긴 했지만 아무리 친동생이라고 해도 자기 부모를 죽인 사람을 두둔하고 나선 것을 보면[3] 이은석과의 사이는 딱히 이렇다 할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보이고 같은 집에 살아오면서 함께 멸시와 폭력을 당하던 가운데 그의 형도 느낀 것이 많았던 모양이다. 속으로 동생이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이해해 준 듯하다. 자신을 지켜주던 형 덕분에 그나마 버틸 수 있었지만 그 형이 대학교 입학 후 독립해 집을 떠나자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에 그동안의 스트레스들이 폭발해 토막 살인으로 이어지게 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만약 형이 나가지 않았다면 또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4]
이은석의 형은 이은석의 항소심 법정에 출석하여 "우리의 부모가 직장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갖는 만큼의 애정만 우리에게 줬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동생을 변호했다. 이 한 마디에 법정 방청석이 눈물 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이 세상 누구보다도 가장 친밀하고 서로를 아끼고 사랑해야 할 친부모자식 관계가 완전히 남남에 철저하게 업무 관계로 만나 서로의 이해 관계만을 따지는 사회생활과 비교해도 더 못난[5] 정도라니, 이 가정의 황폐함이 어느 정도였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이은석의 고등학교 동창들 역시 그를 두둔했는데, "체육 시간에 옷을 갈아입을 때 은석이의 몸을 보면 언제나 피멍투성이였다"고 말하며 가정폭력이 의심되는 정황을 증언했다. 이러한 증언들은 이은석이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것을 이용하여 범행에 대한 변명으로 이용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가정 폭력이 있었고 이에 설득력을 주었다. 당장 피해자의 친자식이었던 형부터가 자기 부모를 살해한 가해자인 동생을 옹호할 정도이다 보니 재판부도 배심원도 이를 단순히 면피성 변명이나 위증 같은 것으로 치부할 수만도 없었고, 재판정에서도 그 점을 참작해 원래 사형이 구형되었으나 무기징역으로 한 단계 감형되기에 이른다.[6]
위에 링크된 KBS와 MBC 보도에서 입장차가 드러났는데, KBS에서는 '인륜의 실종'에 초점을 맞춘 반면 MBC 측은 부모의 무관심과 학대에 초점을 두었다.
범죄 예방을 위해선 무조건적인 처벌, 닥치고 사형 같은 단순한 감정적 처리보다 제3자 또한 범죄자들이 범죄까지 이르게 된 상황과 사정을 철저히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그 상황을 줄여나가는 것이 장기적으로 봐서 사회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더 이득이 된다. 아동 학대를 당했다고 해서 모두 다 부모를 죽이는 것은 아니고 존속살해까지 이르는 경우는 많지 않고, 극악한 살인마조차 인권이 보장되어 사형이 사실상 폐지된 판국에 아동 학대를 한 부모들은 죽여도 정당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누가 봐도 감형할 수밖에 없는, 적어도 이런 것도 무조건 사형이어야 하나 라고 망설일 수 있는 사건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즉, 살인이라고 다 일괄적으로 처벌받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이 사건은 아동 학대가 발단이었다는 점에서 단순히 존속살해 범죄로 그칠 게 아니라 아동 학대 방지 교육의 대표 사례로 적극 연구해서 이런 비극을 막아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단순히 '아동 학대를 하면 부모를 죽일 수 있으니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아동 학대를 하면 아이에게 끔찍한 정신적 트라우마를 안길 수 있고 그것이 결국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어 당사자나 그 주변인들이 되돌려 받을 수 있으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은석의 부모가 자식들에게 가혹한 학대를 자행한 이유에서도 그 이유를 충분히 찾아볼 수 있는데, 다름아니라 이들도 가정폭력과 아동 학대의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이은석의 어머니는 중학생 때 아버지(이은석의 외할아버지)를 여읜 뒤 홀어머니(이은석의 외할머니)로부터 훨씬 더 심한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고 자랐다. 소설책을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매맞았을 정도였다.[7][8]
이은석의 아버지도 비슷했다. 어린 시절 형(즉 이은석의 큰아버지)만 편애하고 자신은 본 체 만 체 하는[9] 아버지(이은석의 할아버지) 밑에서 엄청나게 많은 상처를 받고 자랐기 때문에 성인이 된 후에도 아버지와 형을 증오했으며, 성격이 놀랄 만큼 이은석과 유사했다.[10][11] 자신은 가족들에게 다정하게 대하지 않으면서도 가족들이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하기를 강요한 이유도 바로 어릴 때 받은 상처를 보상받기 위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보면 이은석 사건은 남녀 양 쪽 모두 결코 행복하지 않은 가정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끼리 만나 가정을 이룸으로써 생긴 비극이자 비정상적인 환경에서 비정상적인 인격을 가지게 된 이들이 부모가 되어 어떤 비극을 만들어내는지, 더 나아가 한 사람에게 있어서 제대로 된 가정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사건이고 극단적인 아동 학대의 대물림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12]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동 학대나 불행한 가정에서 지낸 사람이 다 그렇게 지내는 것이 아니며 이은석의 부모의 마음가짐이 제대로 되었다면 올바른 부모로서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해낸 사람들도 있다.[13] 그러나 마음가짐이 미숙했던 그들은 결국 과거 자신이 받은 상처를 아이들에게 되풀이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반복하고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증오했던 부모와 같은 괴물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나마 이은석의 형은 스스로 도망쳐서 살 길을 찾았지만 이은석은 도망치지도 못하고 패륜아에 중범죄자가 되어 남은 인생을 감옥에서 보내게 되었으며[14] 부모들 역시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가 낳은 친자식의 손에 끔찍하게 살해당한 이후 시신마저 토막나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최후를 맞았다.[15]
참고로 이은석이 시신을 유기하는데 3일이 걸렸는데, 자신의 범행이 발각되지 않기 위해서 부모의 몸을 토막내고 여러 장의 쓰레기 봉투에 나눠 담아 여러 장소에 토막낸 시신을 유기했기 때문이다. 환경미화원에 의해서 발견 되지 않았다면 미제사건이 될 뻔 했었다. 그나마 이은석의 자백 이후에 경찰은 아버지의 토막난 일부 시신은 찾는 데 성공했지만 어머니의 시신은 머리를 제외하고는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미 어머니의 시신의 대부분은 소각장에서 소각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만약 신고가 늦게 들어갔다면 부모님의 시신이 소각이 되어 증거가 모두 없어질 뻔 했으며, 집안에 있었던 부모님의 살해의 증거인 혈흔 역시 이은석이 없애 버렸을 가능성이 높다.[16]
3. 재판
재판에 회부된 이은석에게 법원은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내렸지만 이후 1년 뒤인 2001년 2심은 "그 동안 당해온 가정폭력을 참작해야 한다"며 무기징역을 선고했고, 대법원에서 형량이 확정되어 [age(2001-01-01)]년째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 사형이 거의 사문화되어 어지간해서는 무기징역으로 대체하는 시절이 아니라 사형이 매우 적극적으로 내려지던 2000년대 초반[17]이니까 존속살인범, 그것도 양 부모를 살해한 경우는 사형을 피할 수 없었는데도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것은 가정폭력이 감형 사유로 인정되었기 때문이었다.[18]당시 변호를 맡았던 변호사는 황산성과 최용근이다. 황산성은 이전에 패륜아 박한상에게 크게 데였던 적이 있었지만 이은석의 변호를 맡아 끝까지 수임했다. 이은석의 변호사는 이은석은 고등법원에서도 사형을 선고받고 대법원에서야 무기징역을 선고받을 것이라고 예측했으나 이은석의 형과 어머니가 다니던 성당에 다니던 사람들, 신부와 수녀들과 정진석 추기경까지 이은석의 감형을 위한 탄원서를 제출한 결과 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게 되었다.
가장 극악한 살인으로 취급되는 존속살인, 심지어 토막살인에 시체 유기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당시 시대상을 봤을 때 대단한 선처였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서 다르겠으나 그런 가정 환경에서 자란 이들이 결코 평범한 삶을 살기 어려운 것을 감안하면 보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즉 뒤늦게나마 사회로부터 보호를 받는 결과로서 그나마 다행인 판결로 보일 수도 있다.[19]
불행 중 다행으로 보이는 것은 형이 동생 편을 들어주어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토막 살인이라 하더라도 사건이 벌어진 지 20여 년 이후인 2020년대의 관점에서 볼 경우 이은석이 부모에게 당한 수준을 생각하면 무기징역도 가혹하고 징역 10년 이하로 형량을 조정하든가 심하면 정당방위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도 있다. 실제로 부모를 살해하는 것에 대한 인식이 매우 안 좋긴 하지만 이은석이 당한 학대를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아동 학대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고, 2014년 아동학대 특례법이 제정된 만큼 2010년대 이후에 벌어진 사건이라면 국민 여론과 더불어 이은석도 무기징역보다는 10~20년 내외의[20] 죄에 비하면 현저히 낮은 형량을 선고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설령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하더라도 이후 복역 중 가석방을 받았을 수도 있다.[21] 사실 2010년대 초반만 가도 구의동 고3 존속살인 사건을 본다면, 당시 가해자가 만 17~8세였음 감안해도 3년 수준을 받았기 때문에 23세 성인이 저질렀다 해도 형량은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이 사건은 부모의 차별과 아동 학대로 인한 피해가 큰 사건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렸으며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아동 학대의 심각성을 알리고 그 피해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거기에다 군대식이나 스파르타식 강압적 교육이 훗날 집안의 큰 화를 부를 수도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례임을 알 수 있다.
4. 기타
- 2001년 이훈구 교수가 쓴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나요』[22]는 이 사건을 주제로 한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은 이은석의 형이 "은석이의 허락 없이 책을 출간하였다"며 저자 이훈구와 출판사 대표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냄에 따라 일찍 절판되었다. 그는 "돈이 목적이 아니라 본인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출간이 문제였다"고 밝혔고, 이후 법원의 조정 내역에 따라 피고가 1천만 원을 부담하되 이를 원고인 그와 피고 공동의 이름으로 천주교 교정사목위원회에 기부하게 되었다. # 세월이 흘러 절판되어 현재는 도서관을 이용해야 할 듯.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에 디지털 스캔본이 올라왔긴 하나 굳이 열람하려면 국중도와 협약된 공공 혹은 대학도서관 원문검색용 컴퓨터로 접속해서 봐야 한다. 정말로 실물책을 구하고 싶다면 인터넷 헌책 서점들을 이용해도 된다. 물론 가격은 헌책치고 매우 비싸다.
- 후술할 <시사저널> 연재기사 '표창원의 사건추적'[23] 2012년 10월 16일 연재분에서도 이 사건을 다루었다.
-
책의 마지막 부분은 저자인
심리학과 교수의 2001년 6월 19일 마지막 면담일지인데, 다음과 같은 구절로 마무리된다.
"그와 작별하고 문득 뒤를 돌아보니, 그는 교도관과 그대로 멈춰서 있었다. 마치 돌아가던 비디오 플레이어에 정지 버튼을 누른 듯 그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아마 그의 정지 버튼은 10년 내지 15년 후에야 플레이 온 될 것이다."
책 출판 후 [age(2001-01-01)]년이 지났으나 이은석이 아직 석방되었다는 소식은 없다.[24] 모범수로 지낸다면 2020년부터 가석방 신청을 할 수 있으나, 본인이 석방을 원하지 않는다는 설도 있다. 사실 이제 와서 석방된다 하더라도 이미 일생의 상당 부분, 그리고 청장년기에 해당하는 20년이 넘는 긴 시간을 교도소에서만 보내 오면서 중년기에 접어들었기에 사회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5. 매체에서
- 2007년 11월 20일 Q채널(현 JTBC2)의 재연프로 살인자는 말한다에서 <명문 대학생의 토막 살해 사건, 파멸의 집>이라는 부제로 방영되었으며 여기서는 김동우라는 가명으로 나온다.
6. 유사 사례
- 안타깝게도 해당 사건 이후에도 명절 또는 가정 내에서 조부모 혹은 부모 입장에 선 자신의 잘못된 훈계, 훈육이 가정불화나 아동 학대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시민들이 많다. 문제의 사례들은 이러한 문화 지체 현상의 일부에 해당된다. 결국 자라는 자녀들은 분노하고 증오해서 복수 또는 절연하거나 최악으로는 살해까지 하는 등 극단적인 결과를 맞이할 수도 있다.
- 2년 뒤인 2002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에서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 사건의 범인도 범행 당시 젊은 대학생이었고 명문대 출신 아버지에게 오랫동안 억눌려 살아 왔다가 어느 날 밤에 집에 늦게 들어왔다고 혼난 뒤 "이제 이런 상황을 끝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자고 있는 아버지를 살해한 점이 유사하며 마찬가지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근데 이 사건의 범인은 아무 잘못도 없고 오히려 자신에게 잘해준 할머니도 살해했기 때문에 이런 사유로 동정 여론은 적은 편이다.
- 11년 후 서울특별시 광진구 구의동에서 이 사건과 매우 유사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의 범인은 시체 은폐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살인에 대한 최소형량인 5년을 면하고 징역 3년 정도로 끝났다.[25] 이 사건의 범인은 범행 당시 미성년자였기에 형량을 직접적으로 비교하는 건 크게 의미가 없고, 같은 이유로 형량에서 상대적으로 유리한 점도 있지만, 이와 동시에 2000년대 초반과 비교해 10년 정도 지난 2011년에 부모의 지속적 아동 학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상당히 변했음을 반영하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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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버지가 생전에 애지중지 보관해 오던 양주였다고 한다. 아버지가 그토록 아꼈던 양주였던 만큼 이것은 아버지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자 동시에 '어차피 죽을 사람에게 이런 건 필요 없겠지.'라며 이미 마음을 굳혔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2]
경찰청 범죄심리분석 자문위원인 신민섭 서울대 교수는 이러한 이은석의 "피투성이가 된 내 모습이 두렵지 않았다"는 말에 대해 일종의 정신적 마비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라고 평한다.
[3]
심지어 그의 형은 사건 이후 동생의 감형에 힘쓰기 위해 다니던 회사까지 그만두었을 정도라고 한다.
#
[4]
"독립할 때 동생도 같이 데리고 나가지 그랬느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물론 형 본인도 그런 생각은 했겠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형이 집을 나갈 때는 대학에 막 입학했을 때였고 이은석은 만 18세도 되지 않은 경제적 능력이 없는 미성년자였다. 현실적으로 20살에서 21살 정도에 자취할 집을 구하고 집세나 관리비, 식비와 같은 경제적 여건을 해결하기 시작할 텐데 이제 막 독립해서 사회로 나온 20~21살 대학생은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어려운 판국이다. 설령 이은석이 아르바이트 등의 경제 활동을 하려고 해도 미성년자는 부모님의 동의서가 필요한데(무조건 부모만 동의가 가능하며 형제 등의 가족은 권한이 없다) 이은석의 부모의 상태를 생각하면 동의해 줬을 리도 없다. 보통 한국에서 대학에 입학하고 1~2년 정도(빠르면 한 학기) 지나면 군대에 가야 하는데 형이 집을 나오면서 이은석을 데리고 나왔고 아르바이트를 겸하면서 대학생활을 한다고 한들 형이 군대에 가 버리고 나면 다시 2년 동안 이은석은 자신이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는 한 부모의 집으로 돌아가 같이 살 수밖에 없다.
[5]
아무리 세간에
똥군기가 심하다고 소문난 집단을 가더라도 저 정도로 사람을 극단적으로 괴롭히지는 않는다. 사실상 가정판
임병장 사건이나 다름없는 수준이며 어쩌면 가족 관계이기 때문에 임병장 사건보다 더 잔혹하고 슬픈 사건일 수 있다. 최소한 직장 상사는 퇴사하면, 학교 동급생들은 졸업하면, 군대 선임은 전역하면 다시 안 볼 사이가 되지만 부모는 그럴 수 있을까? 말로는 호적에서 파버리겠다느니 뭐니 해도 실제 법 규정상 호적에서 혈연을 지우는 건 불가능한 게 현실이다. 따라서 동급생, 학교 교사, 직장 상사, 군대 선임, 동아리 선배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보다 부모에게 신체적, 정서적, 성적 학대를 당하는 것의 정신적 고통이 더 크다.
[6]
시사저널에 따르면 검거된 뒤 형과 면회하기를 거부했던 이은석은 2000년 5월 26일 형과 긴 대화를 나누었는데, 면회를 마치고 나온 형은 “동생이 사형만 면한다면 평생 뒷바라지하겠다. 친구가 되겠다”라고 참담한 심정을 토로했고, 형과 대화를 끝낸 이은석은 입술을 굳게 닫은 채 더 이상 논리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펴지 못하고 그제서야 두려움에 떨며 ‘후회한다’는 말만을 중얼거렸다고 한다.
[7]
이 외할머니라는 사람은 훗날 이은석의 가족과 한 집에 살면서
치매에 걸리는 바람에 이은석의 어머니의 성격을 더 악화시키기도 했다.
[8]
이은석의 어머니도 이은석의 가방에서 동화책을 발견하자 야단을 쳤다고 한다. 가히 학대의 대물림이라 할 만하다.
[9]
큰아들은 사업하다가 실패해 집안을 말아먹을 지경이 됐는데도 절대 혼내지 않고 감싸주기만 하는데, 다른 자식에게는 그런 애정을 보이지 않고 무조건 '자식 된 도리로서 부모를 부양해야 할 것 아니냐'며 의무만을 강요했다고 한다.
[10]
이런 뒷배경 때문에 이은석의 집에는 단 한 번도 친척들이 방문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사건 이후 이은석의 형이 사형만은 막아 보려고 구명 운동을 할 때도 다른 친척들은 도와주지 않고 멸시하고 비난하였으며 이은석의 형을 도와준 곳은 천주교 쪽 종교 단체였다.
[11]
또한 아버지가 형만 편애하고 자신을 홀대했듯 자신도 자신의 자식 중 장남만 편애하고 차남인 이은석은 본 체 만 체 했다고 한다. 그나마 이은석의 형이 아버지와는 다르게 이은석을 이해해주고 위해주는 행동을 했다는 것은 차이점이 있다.
[12]
실제로 심리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아동 학대는 30%가 심리적으로 유전된다고 한다.
[13]
실제로 빅토리아 여왕의 부군인
앨버트 공은 부모가 사이가 나쁘다 못해 서로 바람을 피울 정도로 갈라져 있었고 이후 이혼으로 쫓겨난 어머니의 장례식에도 못 가는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만은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이후 빅토리아 여왕을 돕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애처가, 좋은 아버지가 되었다.
[14]
만에 하나 감형되든 사면되든 해서 나온다고 해도 이미 전과자, 살인자 딱지가 그에게 남아 있다. 사회가 그가 당했던 가정폭력을 정상참작해서 충분한 배려를 해준다고 해도 본인 역시도 망가졌던 정신을 제대로 치유하기란 힘들 뿐더러 존속살해에 시신 유기까지 저질렀다는
트라우마에 시달려 정상적 사회 생활을 해내기도 힘들 것이다. 단, 복역한 지 20년이 지났기 때문에 모범수 가석방은 가능하다.
[15]
하지만 그 이은석의 부모를 희대의 인성파탄자로 만든 진정한 원흉인 조부모 세대와 친척들은 제대로 된 대가라곤 거의 치르지 않았다. 사회적으로 크게 공론화된 일이니 평판이 저하된 것이 대가의 전부다. 적어도 자기 자녀들에게 영원히 비밀을 지키는 것은 힘들 것이고, 자녀들이 부모가 한 일을 알고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된다면 부모로서 뒤늦게라도 반성해야 함이 옳다. 물론 그런 일은 보통 일어나지 않는다.
[16]
혈흔은 락스로 아무리 세척하고 청소를 한다고 해도 높은 혈액 속에 있는 혈장 단백질은 쉽게 없어지지 않아서 아무리 청소한다고 한들 증거는 계속 남게 되어있다. 하지만 이은석에게 시간이 더 있었다면 아예 거실 바닥 장판과 화장실 욕조를 바꿔버렸을 수 있다. 이미 시신을 유기할 때도 여러 장소에 유기했을 정도로 치밀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은석은 운전을 할 줄 몰라서 오로지 도보로 다니면서 시신을 유기했는데도 어머니의 사체의 대부분 거의 완벽하게 유기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당시 CCTV도 많이 없어서 길거리를 활보하면서 유기해도 동선을 파악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정말 시간이 더 있었더라면 집안에 남아있었던 잔여 증거를 인멸하는데 더 치밀하게 행동했을 것으로 보인다.
[17]
단,
사형 선고만 계속되었을 뿐 사형 집행 자체는 20세기였던 1997년 12월 30일에 했던 것이 마지막이고 이후 한국에서는 [age(1997-12-30)]년째 사형 집행을 하고 있지 않다. 지금도 한국에는 수십 명의 사형수가 사형 집행을 당하지 않고 감옥에 살고 있다. 늙어서 자연사하거나
자살하는 사형수가 나올 정도.
[18]
대신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람들은 모범수나 좋은 일을 많이 한다면 복역한 지 20년이 지나
가석방 조치를 받을 수도 있다.
[19]
한 마디로 최악의 막장 가정에서 자랐으니 사회에서 정상적으로 살아남는 것이 어려운 현실인데(당장 상술한 학교나 군대에서 왕따를 당한 일화를 생각해 보자), 무기징역이 보호조치로 보일 정도로 큰 사건이 일어났으니 그만큼 씁쓸함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20]
그보다 더 적은 형량을 받았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21]
물론 이론상으로는 가석방이 되어 석방이 된다 해도 망가진 인격으로 사회생활이 사실상 불가능하여 교도소에 계속 수감하는 것이 나은 상태다.
[22]
이 글을 보면 얼마나 그가 고통과 많은 상처를 받았는지 이해가 갈 정도이다.
[23]
2013년
<프로파일러 표창원의 사건추적>으로 단행본화.
[24]
다만 정치범이나 연예인 범죄자가 아닌 이상 가석방 사실은 원래 잘 보도되지 않는다. 수감 중에도 교류하던 사람이 아닌 이상 가석방되었다는 정보 자체를 얻기도 힘들고, 가석방 소식을 알 정도로 친분을 유지했다면 굳이 언론에 가석방 사실을 제보해서 전과자라고 상기시켜줄 이유도 없다.
혜화동 무장 탈영병 총격 난동사건에서도 가석방 보도가 없다는 이유로 나무위키에서 아직 수감중으로 착각하고 있었으나 실상은 2013년에 이미 가석방이 되었던 경우가 있다. 요는 아직 복역중인 것이 확인된 것이 아니라면, 가석방 보도가 없다고 아직 수감중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는 것. 딱히 무기수가 아니더라도, 유기징역의 경우도 가석방 보도가 없었다고 만기출소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25]
이 사건의 범인의 아버지는 이은석의 아버지와는 다르게 아이가 아내에게 아동 학대를 당하고 있었다고 밝히면서 자식을 이해해 주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아내의 성향을 알면서 왜 아들을 집에 두고 나갔느냐는 등의 비판은 피할 수 없었고 그것 때문에 욕을 많이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