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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렬(洪性烈, 1935.3.15 ~ 2001.10.25)
호는 범초(凡草), 66세
1. 배경
2001년 10월 25일,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에서 증산도 신도 3명이 증산도 행정실장의 지시를 받고 前 증산교 본부 종령이자 공주대학교 산업과학대학(구 예산농업전문대학) 교수인 홍성렬과 그 부인을 살해한 사건. 결코 단순한 살인사건이 아니며, 내막을 알려면 무려 7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강일순 계통 종교들에서 벌어진 내분의 뿌리를 살펴야 한다.1.1. 이상호,이정립 형제와 안세찬
증산계통 종교의 교조 증산 강일순(1871~1909)에게는 여러 제자가 있었으나, 그중 가장 큰 교단을 만든 이는 단연 차경석이었다. 차경석이 세운 보천교는 일제강점기에 한때 300~500만 신도를 헤아렸다고 하니, 식민지 조선의 당시인구를 생각하면 엄청난 숫자다.1.2. 증산교 본부의 설립과 6.25전쟁
그렇게 이상호·이정립과 안세찬은 함께 '대법사 증산교'를 개교한다. 대법사 증산교의 중심간부들은 오행에 따라 토주土主ㆍ 금주金主ㆍ 수주水主ㆍ 목주木主ㆍ 화주火主라 이름 붙인 5명이었는데, 이상호는 토주, 이정립은 목주, 안세찬은 수주였다. 불과 20대 중반에 불과하던 안세찬이 핵심 5인방에 들었음은 대법사 증산교에서 안세찬의 비중이 매우 컸다는 뜻이다. 교단 창립 직후 대법사 증산교는 의통제작에 착수하는데, 의통이란 다음과 같다.1.3. '범증산교사'와 증산도
증산교와 증산도는 그 뿌리가 같기에 서로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증산교와 증산도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얼어붙은 계기가 홍성렬의 '범증산교사(1994, 범증산교연구원)' 출간이었다. '범증산교사'는 강증산 사후 강증산의 친딸이 세운 교단( 증산법종교), 제자 혹은 제자의 제자등이 세운 교단(미륵불교, 문공신 교단, 안내성 교단 등등...)의 역사를 홍성렬이 직접 답사를 해가며 자료를 수집해 펴낸 역작이다. 그런데 안세찬, 안중건의 증산도에 대해서는 목차를 제일 뒤에 배치했고[5] 이상호ㆍ 이정립 형제와 안세찬이 만났을 당시, 그리고 6.25 전쟁이 끝나고 20여 년 후 안세찬이 다시 증산교를 찾아왔을 때의 이야기는 그간 안세찬ㆍ안중건 부자가 증산도 신도들에게 말했던 내용과 크게 달랐다. “범증산교사”의 증산도사의 일부분을 그대로 인용해본다.2.운산(雲山) 대법사(大法社) 간부와 불화(不和)
대법사(大法社)는 신묘(辛卯 1951)년 음력 2월에 원평 장승백이에서 호신부(護身符)와 인패를 만들 때 인육(印肉)의 제조에 필요한 경면주사(鏡面朱砂)15근을 운산이 자기의 연원(淵源)지역이라고 주장하는 공주(公州) 부여(夫餘)지방에서 거출하여 냈고, 의통구호단의 조직국장의 책임을 맡아 자긍(自肯)이 컸다고 한다, 그래서 운산이 호신호부(護身戶符)의 배부(配付)와 의통구호단의 인원배정(人員配定)을 자기의 연비(連臂)에 유리하도록 짠데다가 장승백이에서 만든 호신부와 인패를 자기 연비 교인들을 시켜 모두 가져 갔으므로 경상도(慶尙道)의 이원호(李元浩)같은 이는 '충청도 사람만 사람이냐 만일 안세찬(安世燦)연비의 의통구호단이 경상도에 내려오기만 하면 그냥두지 않겠다'고 분개했다.
당시 지방별로 많은 교인을 거느린 대연원주격(大淵源主格)인 경상도(慶尙道)의 이원호 배동찬(裵東燦), 경기도의 원제철(元濟喆) 유흥고(柳興?), 충청도의 김종렬(金鍾烈)등은 운산(雲山)의 처사가 부당함을 지적하고 사사건건(事事件件)대립하게 되자 운산(雲山)은 자기가 많은 교인을 포교하여 교세를 떨치게 하였고 의통인패의 제작을 가능케 하였으며 의통구호단을 조직해 놓으니 이 공로는 인정해 주지 않고 교주 청음과 남주는 자기에게 대드는 두령들 편을 들어 자기를 몰아 내려 한다고 오해하게 되었다. 이러한 오해는 교본부(敎本部)에서 박복만(朴福萬)을 시켜 자기를 해치려 했다고 까지 항의하게 되었으니 운산(雲山)이 청음(靑陰) 남주(南舟)밑에서 교(敎)를 함께 신봉할 수 없게 되어 신묘(辛卯 1951년)년 가을에 대법사(大法社)를 떠났다. 이로써 운산은 을유(乙酉 1945)년 9월 19일 대법사 창립에 참가한 이후 6년여간 몸담아 종교활동을 해온 대법사와 인연이 끊어지게 되었다,
대법사을 나온 운산은 공주군(公州郡) 유구(維鳩)에서 직조기(織造機)를 놓고 인조견사(人造絹紗)를 을미(乙未 1955)년까지 짰다. 병申 (丙申 1956)년에는 대전시(大田市) 중동(中洞)으로 이사하여 상업(商業)으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그 후에는 한의술(漢醫術)로 자녀의 학비를 보탰는데 넉넉지 못한 살림을 하면서도 커가는 자녀들에게 자기가 과거에 했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고 관심을 보이는 어린 아들들에게 여늬 사람과 다른 가정교육을 시켰다.
3. 운산의 용화동(龍簧) 재출입(再出入)과 연원논쟁(淵源論爭)
운산은 신묘(辛卯 1951)년 가을에 대법사를 떠나 교단과 외면한채 은둔(隱遁)생활을 하고 있다가 23년만에 다시 나와 증산교인과 접촉한 것은 갑인(甲寅1974)년 봄이었다.
운산이 오랜 은둔생활에서 벗어나 전에 자기의 연원지역(淵源地域)으로 생각되는 충남(忠南)의 아산(牙山) 서산(瑞山) 예산(禮山)등지에 가서 한말 가운데 대법사 창교주 청음(淸陰) 이상호(李祥昊),남주(南舟) 이정립(李正立)을 비난하고 대순전경(大巡典經)의 장절(章節)가운데 신빙성이 없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고 한 말은 전에 대법사(大法社)에 다니던 교인들로서는 수긍할 수가 없었다. 운산이 말하기를 자기가 대법사 창립에 참가하여 종교활동을 할때 청음(淸陰) 남주(南舟)에게 지도를 받는 입장이 아니라 동지적(同志的)인 것이었다고 하였는데 8.15광복후 대법사를 창립할 때의 운산의 처지는 그런 것이었다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8.15광복후 대법사창립에 참가한 운산은 임술(壬戌 1922)년 7월 22일생인 24세의 청년이었고 청음은 무자(戊子 1888)년 2월 27일생으로 57세요 남주는 을미(乙未 1895)년 2월 19일생으로 50세였으니 운산에 있어서 청음, 남주는 부집(父執)의 존장(尊長)이었다.
더욱이 청음, 남주 두분은 보천교(普天敎)의 방주(方主)였었고 보천교를 나와서는 대성(大聖)의 성훈(聖訓)과 성적(聖蹟)을 찾고 엮어 대순전경(大巡典經)을 간행하여 무진(戊辰 1928)년 동지(冬至)에 동화교(東華敎)를 세웠다가 계미(癸未 1943)년 8월에 체포되어 8.15광복후에 출옥한 교계(敎界)의 중진(重鎭)이었으니 연령으로 보나 신앙의 열력(閱歷)으로 보나 운산과 청음,남주 두 분이 평등한 동지적(同志的)인 인간관계가 성립되기는 어려웠으리라 보여지며 대순전경의 상당한 부분이 신빙성이 없다는 말에는 신앙생활의 기본이 되는 경전의 권위(權威)까지 허물고 무엇을 가지고 종교운동을 전개할 것인가 그의 종교적 양식(良識)을 의심하게 되었다.
운산이 과거에 자기의 연비가 많았다고하는 증산교의 아산지부와 서산지부의 월례회에 참석하여 그와 같은 주장을 하면서 앞으로 증산교 대법사(甑山敎大法社)는 연원주 중심으로 교단조직을 개편하여 새롭게 종교운동을 전개하자고 하였으나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어떤 교인을 말하기를 '운산이 20여년전에 자식을 낳아서 팽개쳤다가 그 자식이 천신만고끝에 성장하여 사람 구실을 겨우 하게 되니 나타나서 내가 네 아비니 나에게 효도를 하라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고 하였다. 운산이 청음, 남주의 인격을 격하(格下)하고 자기의 연원주(淵源主)가 종도(從徒) 이치복(李致福)이라고 하면서 옛 연원주인 자기를 중심으로 뭉치라는 말에 크게 반발한 것이었다. '운산이 23년전 포교할 때 교인들에세 청음, 남주를 따라 증산대성(甑山大聖)을 믿으라 했지 우리 보고 언제 이치복(李致福)을 따라 증산대성을 믿으라 했느냐 엄밀하게 말하면 23년전의 운산은 용화동 청음, 남주 앞으로 교인을 인도한 지로사(指路使)에 불과하였다'는 것이다.
운산이 자신의 연원주가 청음, 남주가 아니라고 한다면 청음,남주를 연원주로 생각하는 교인들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했다. 또 한편으로는 23년간 교단과는 완전히 인연을 끊고 연비교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사람이 불쑥 나타나서 내가 그대들의 연원주니 나를 중심으로 뭉쳐서 종교운동을 하자고 하는 것은 그가 그간 수도해서 고덕대현(高德大賢)이 되었을 지라도 하기 어려운 말인데 그렇지 못하다면 옛 연비되는 교인들과 모든 일을 상의하여 일을 하자 했어야 옳았다고 했다.
위와 같은 의론이 분분하면서도 몇몇 교인들은 옛 정을 생각하여 대전시 대사동에 있는 운산의 집을 오갔지만 아산 서산지방의 교인들과 운산과의 마음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운산은 을묘(乙卯 1975)년 10월 초순에 용화동을 방문하여 원로교인들이 있는 사석(私席)에서 자기의 소신을 말했으나 공감(共感)을 얻지 못했고 박기백(朴耆伯)같은 이는 운산의 주장이 경위를 가리지 못하는 억지에 불과하다고 평했다.
병진(丙辰 1976)년 동지(冬至)전날밤 교인 2백여명이 모인 도방(道房)에서 운산은 발언할 기회를 얻어 이제까지 가슴속에 품어온 신념과 울울한 심사를 장시간 피력하였는데 이 때 말한 얘기 가운데에도 교단을 초기부터 지켜온 도인들이 들을 때 긍정(肯定)하기 어려운 내용이 너무 많았다.
“내가 교단을 떠날 때 그 때 간부들에게 때가 있으면 내가 또 오리다. 교단을 잘 지키소 했는데 이제 와 보니 교단이 망했습니다. 이것은 교판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현재 임원들은 사표를 내고 물러가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 연원회의를 열고 세 다섯의 사정위원을 뽑아 교인들의 자격을 새로 부여해야 합니다. 내가 이 단체의 매듭을 지려고 왔습니다. 교판은 연원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대자연의 질서가 도덕이요 우주정신이 도덕률(道德律)이므로 체천측지(體天則地)한 우리 인사(人事)도 도덕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천지공사(天地公事)의 근원도 도덕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교판은 연원주를 타도하고 교단의 주도권(主導權)을 쥐려고 하니 교단이 망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연원주없는 교인이 어디 있습니까? 남의 농사 지은 것을 뺏어가는 것은 도적놈입니다. 내가 내 공로를 자랑하는 것 같습니다마는 젊은 청춘을 다 받쳐 많은 사람을 포교해 놓은 것은 누가 쌀거두어 먹으라고 해 놓은 것은 아닙니다. 나는 연원을 따지자면 이치복(李致福)씨 연원입니다. 나는 청음선생과 동지적인 입장에서 일을 했습니다. 불초 안세찬이 고약한 마음이 있다면 벼락을 맞게 해주십시오. 내가 유종의 미를 거두려 했지만 내가 이룬 단체에서 망신을 당했습니다. 나는 부모처자를 돌보지 않고 포교하여 많은 교인을 모으니 박복만이 같은 사람은 나를 해치려 하였습니다. 그 지도자가 나쁩니다. 동지끼리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나는 끝에 가서 출교명령(黜敎命令)을 받았습니다. 단체라는 것은 운영의 묘(妙)가 있어야 합니다.“
위 글은 그 당시 운산(雲山)이 말한 긴 이야기의 초록(抄錄)가운데에서 일부를 발췌(拔萃)한 것이기 때문에 운산(雲山)의 소신을 다 파악하기 어렵다고 말할는지 모르나 어떤 주장이 교단을 지켜온 교인들을 긴장케 하였는가는 짐작할 수 있다.
운산의 말을 들은 원로 교인들은 그가 피력한 이야기들의 부당성을 아래와 같이 지적했다.[운산이 창교주(創敎主) 청음 이상호, 남주 이정립과 불화(不和)하고 교단의 간부들과 대립하여 떠난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누구에게 '때가 있으면 내가 또 오리다. 교단을 잘 지키소' 할 수 있단 말인가 어처구니가 없어 논평하고 싶지도 않다.] 하였고 '이제와 보니 교단이 망했습니다. 이것은 교판이라 할 수 없습니다. 현재 임원들은 사표를 내고 물러가야 합니다.' 했는데 자기야 말로 출교명령을 받아 나가서 20년 이상을 도장에 왕래하지 않은 사람이 교인대중을 어떻게 보고 교단이 망했느니 사표를 내라느니 할 수 있느냐. 신앙을 꾸준히 하다가도 5년 이상 도장에 나오지 않고 교인으로서 의무를 하지 않으면 다시 입교식을 하는 것이 우리 교단의 통례(通例)로 되어있다.
이런 통례로 본다면 아니 이런 교단의 통례를 구태어 들지 않고 일반 상식으로 봐도 안세찬은 교인대중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이다. 안세찬이 정상적인 정신상태로 한 말이라고 볼 수 없고 무엇이 씌어대서 그런 말을 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연원주없는 교단이 어디 있습니까 남의 농사 지은 것을 뺏어가는 것은 도적놈입니다' 라고 한 말은 증산대성(甑山大聖) 다음에는 청음, 남주 두분을 하늘처럼 믿고 입교한 교인들에게 '안세찬 내가 청음, 남주 밑에서 포교하고 일은 했지만 나는 연원을 따지면 이치복씨 연원이니 20년전에 나에게 도를 받은 이나 그 연비들은 나를 연원주로 받들어 일을 하자' 고 하면 그 말을 누가 옳게 보겠는가]라 하였다.
운산(雲山)은 그 뒤 몇 차례 용화동에 와서 같은 내용의 발언을 여러 교인들이 있는 자리에서 했으나 빗발치는 항의를 받았고 아들 중건(重建)을 시켜 색다른 교리강좌를 하다가 제지 당하였으며 연비교인들을 무례하다고 꾸짖다가 충돌하여 폭언이 오고가니 이로부터 왕래가 끊기게 되었다.
아산(牙山) 서산(瑞山) 공주(公州)지방의 교인으로 운산(雲山)과 인연이 깊어 그를 동정하는 몇몇 교인들은 그가 20여년 후에 다시 도장에 나왔더라도 겸허하게 지금까지 교단을 지켜온 분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고 여러 원로교인들과 상의해서 신앙생활을 계속할 의향을 밝혔으면 용화동에 다니는 옛 교인들의 호감을 사서 뜻밖에 교권을 쉽게 장악했었을 지도 모른다고 아쉬워했다.
운산(雲山)이 오랫동안 은거하였다가 다시 용화동에 나가서 옛 연비와 손을 잡고 새로운 종교 활동을 전개하려다가 신념의 차이로 좌절(挫折)하자 새로운 교단을 창설하려고 결심하게 되었다.
- 범증산교사 증산도사 -
대법사(大法社)는 신묘(辛卯 1951)년 음력 2월에 원평 장승백이에서 호신부(護身符)와 인패를 만들 때 인육(印肉)의 제조에 필요한 경면주사(鏡面朱砂)15근을 운산이 자기의 연원(淵源)지역이라고 주장하는 공주(公州) 부여(夫餘)지방에서 거출하여 냈고, 의통구호단의 조직국장의 책임을 맡아 자긍(自肯)이 컸다고 한다, 그래서 운산이 호신호부(護身戶符)의 배부(配付)와 의통구호단의 인원배정(人員配定)을 자기의 연비(連臂)에 유리하도록 짠데다가 장승백이에서 만든 호신부와 인패를 자기 연비 교인들을 시켜 모두 가져 갔으므로 경상도(慶尙道)의 이원호(李元浩)같은 이는 '충청도 사람만 사람이냐 만일 안세찬(安世燦)연비의 의통구호단이 경상도에 내려오기만 하면 그냥두지 않겠다'고 분개했다.
당시 지방별로 많은 교인을 거느린 대연원주격(大淵源主格)인 경상도(慶尙道)의 이원호 배동찬(裵東燦), 경기도의 원제철(元濟喆) 유흥고(柳興?), 충청도의 김종렬(金鍾烈)등은 운산(雲山)의 처사가 부당함을 지적하고 사사건건(事事件件)대립하게 되자 운산(雲山)은 자기가 많은 교인을 포교하여 교세를 떨치게 하였고 의통인패의 제작을 가능케 하였으며 의통구호단을 조직해 놓으니 이 공로는 인정해 주지 않고 교주 청음과 남주는 자기에게 대드는 두령들 편을 들어 자기를 몰아 내려 한다고 오해하게 되었다. 이러한 오해는 교본부(敎本部)에서 박복만(朴福萬)을 시켜 자기를 해치려 했다고 까지 항의하게 되었으니 운산(雲山)이 청음(靑陰) 남주(南舟)밑에서 교(敎)를 함께 신봉할 수 없게 되어 신묘(辛卯 1951년)년 가을에 대법사(大法社)를 떠났다. 이로써 운산은 을유(乙酉 1945)년 9월 19일 대법사 창립에 참가한 이후 6년여간 몸담아 종교활동을 해온 대법사와 인연이 끊어지게 되었다,
대법사을 나온 운산은 공주군(公州郡) 유구(維鳩)에서 직조기(織造機)를 놓고 인조견사(人造絹紗)를 을미(乙未 1955)년까지 짰다. 병申 (丙申 1956)년에는 대전시(大田市) 중동(中洞)으로 이사하여 상업(商業)으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그 후에는 한의술(漢醫術)로 자녀의 학비를 보탰는데 넉넉지 못한 살림을 하면서도 커가는 자녀들에게 자기가 과거에 했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고 관심을 보이는 어린 아들들에게 여늬 사람과 다른 가정교육을 시켰다.
3. 운산의 용화동(龍簧) 재출입(再出入)과 연원논쟁(淵源論爭)
운산은 신묘(辛卯 1951)년 가을에 대법사를 떠나 교단과 외면한채 은둔(隱遁)생활을 하고 있다가 23년만에 다시 나와 증산교인과 접촉한 것은 갑인(甲寅1974)년 봄이었다.
운산이 오랜 은둔생활에서 벗어나 전에 자기의 연원지역(淵源地域)으로 생각되는 충남(忠南)의 아산(牙山) 서산(瑞山) 예산(禮山)등지에 가서 한말 가운데 대법사 창교주 청음(淸陰) 이상호(李祥昊),남주(南舟) 이정립(李正立)을 비난하고 대순전경(大巡典經)의 장절(章節)가운데 신빙성이 없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고 한 말은 전에 대법사(大法社)에 다니던 교인들로서는 수긍할 수가 없었다. 운산이 말하기를 자기가 대법사 창립에 참가하여 종교활동을 할때 청음(淸陰) 남주(南舟)에게 지도를 받는 입장이 아니라 동지적(同志的)인 것이었다고 하였는데 8.15광복후 대법사를 창립할 때의 운산의 처지는 그런 것이었다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8.15광복후 대법사창립에 참가한 운산은 임술(壬戌 1922)년 7월 22일생인 24세의 청년이었고 청음은 무자(戊子 1888)년 2월 27일생으로 57세요 남주는 을미(乙未 1895)년 2월 19일생으로 50세였으니 운산에 있어서 청음, 남주는 부집(父執)의 존장(尊長)이었다.
더욱이 청음, 남주 두분은 보천교(普天敎)의 방주(方主)였었고 보천교를 나와서는 대성(大聖)의 성훈(聖訓)과 성적(聖蹟)을 찾고 엮어 대순전경(大巡典經)을 간행하여 무진(戊辰 1928)년 동지(冬至)에 동화교(東華敎)를 세웠다가 계미(癸未 1943)년 8월에 체포되어 8.15광복후에 출옥한 교계(敎界)의 중진(重鎭)이었으니 연령으로 보나 신앙의 열력(閱歷)으로 보나 운산과 청음,남주 두 분이 평등한 동지적(同志的)인 인간관계가 성립되기는 어려웠으리라 보여지며 대순전경의 상당한 부분이 신빙성이 없다는 말에는 신앙생활의 기본이 되는 경전의 권위(權威)까지 허물고 무엇을 가지고 종교운동을 전개할 것인가 그의 종교적 양식(良識)을 의심하게 되었다.
운산이 과거에 자기의 연비가 많았다고하는 증산교의 아산지부와 서산지부의 월례회에 참석하여 그와 같은 주장을 하면서 앞으로 증산교 대법사(甑山敎大法社)는 연원주 중심으로 교단조직을 개편하여 새롭게 종교운동을 전개하자고 하였으나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어떤 교인을 말하기를 '운산이 20여년전에 자식을 낳아서 팽개쳤다가 그 자식이 천신만고끝에 성장하여 사람 구실을 겨우 하게 되니 나타나서 내가 네 아비니 나에게 효도를 하라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고 하였다. 운산이 청음, 남주의 인격을 격하(格下)하고 자기의 연원주(淵源主)가 종도(從徒) 이치복(李致福)이라고 하면서 옛 연원주인 자기를 중심으로 뭉치라는 말에 크게 반발한 것이었다. '운산이 23년전 포교할 때 교인들에세 청음, 남주를 따라 증산대성(甑山大聖)을 믿으라 했지 우리 보고 언제 이치복(李致福)을 따라 증산대성을 믿으라 했느냐 엄밀하게 말하면 23년전의 운산은 용화동 청음, 남주 앞으로 교인을 인도한 지로사(指路使)에 불과하였다'는 것이다.
운산이 자신의 연원주가 청음, 남주가 아니라고 한다면 청음,남주를 연원주로 생각하는 교인들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했다. 또 한편으로는 23년간 교단과는 완전히 인연을 끊고 연비교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사람이 불쑥 나타나서 내가 그대들의 연원주니 나를 중심으로 뭉쳐서 종교운동을 하자고 하는 것은 그가 그간 수도해서 고덕대현(高德大賢)이 되었을 지라도 하기 어려운 말인데 그렇지 못하다면 옛 연비되는 교인들과 모든 일을 상의하여 일을 하자 했어야 옳았다고 했다.
위와 같은 의론이 분분하면서도 몇몇 교인들은 옛 정을 생각하여 대전시 대사동에 있는 운산의 집을 오갔지만 아산 서산지방의 교인들과 운산과의 마음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운산은 을묘(乙卯 1975)년 10월 초순에 용화동을 방문하여 원로교인들이 있는 사석(私席)에서 자기의 소신을 말했으나 공감(共感)을 얻지 못했고 박기백(朴耆伯)같은 이는 운산의 주장이 경위를 가리지 못하는 억지에 불과하다고 평했다.
병진(丙辰 1976)년 동지(冬至)전날밤 교인 2백여명이 모인 도방(道房)에서 운산은 발언할 기회를 얻어 이제까지 가슴속에 품어온 신념과 울울한 심사를 장시간 피력하였는데 이 때 말한 얘기 가운데에도 교단을 초기부터 지켜온 도인들이 들을 때 긍정(肯定)하기 어려운 내용이 너무 많았다.
“내가 교단을 떠날 때 그 때 간부들에게 때가 있으면 내가 또 오리다. 교단을 잘 지키소 했는데 이제 와 보니 교단이 망했습니다. 이것은 교판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현재 임원들은 사표를 내고 물러가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 연원회의를 열고 세 다섯의 사정위원을 뽑아 교인들의 자격을 새로 부여해야 합니다. 내가 이 단체의 매듭을 지려고 왔습니다. 교판은 연원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대자연의 질서가 도덕이요 우주정신이 도덕률(道德律)이므로 체천측지(體天則地)한 우리 인사(人事)도 도덕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천지공사(天地公事)의 근원도 도덕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교판은 연원주를 타도하고 교단의 주도권(主導權)을 쥐려고 하니 교단이 망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연원주없는 교인이 어디 있습니까? 남의 농사 지은 것을 뺏어가는 것은 도적놈입니다. 내가 내 공로를 자랑하는 것 같습니다마는 젊은 청춘을 다 받쳐 많은 사람을 포교해 놓은 것은 누가 쌀거두어 먹으라고 해 놓은 것은 아닙니다. 나는 연원을 따지자면 이치복(李致福)씨 연원입니다. 나는 청음선생과 동지적인 입장에서 일을 했습니다. 불초 안세찬이 고약한 마음이 있다면 벼락을 맞게 해주십시오. 내가 유종의 미를 거두려 했지만 내가 이룬 단체에서 망신을 당했습니다. 나는 부모처자를 돌보지 않고 포교하여 많은 교인을 모으니 박복만이 같은 사람은 나를 해치려 하였습니다. 그 지도자가 나쁩니다. 동지끼리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나는 끝에 가서 출교명령(黜敎命令)을 받았습니다. 단체라는 것은 운영의 묘(妙)가 있어야 합니다.“
위 글은 그 당시 운산(雲山)이 말한 긴 이야기의 초록(抄錄)가운데에서 일부를 발췌(拔萃)한 것이기 때문에 운산(雲山)의 소신을 다 파악하기 어렵다고 말할는지 모르나 어떤 주장이 교단을 지켜온 교인들을 긴장케 하였는가는 짐작할 수 있다.
운산의 말을 들은 원로 교인들은 그가 피력한 이야기들의 부당성을 아래와 같이 지적했다.[운산이 창교주(創敎主) 청음 이상호, 남주 이정립과 불화(不和)하고 교단의 간부들과 대립하여 떠난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누구에게 '때가 있으면 내가 또 오리다. 교단을 잘 지키소' 할 수 있단 말인가 어처구니가 없어 논평하고 싶지도 않다.] 하였고 '이제와 보니 교단이 망했습니다. 이것은 교판이라 할 수 없습니다. 현재 임원들은 사표를 내고 물러가야 합니다.' 했는데 자기야 말로 출교명령을 받아 나가서 20년 이상을 도장에 왕래하지 않은 사람이 교인대중을 어떻게 보고 교단이 망했느니 사표를 내라느니 할 수 있느냐. 신앙을 꾸준히 하다가도 5년 이상 도장에 나오지 않고 교인으로서 의무를 하지 않으면 다시 입교식을 하는 것이 우리 교단의 통례(通例)로 되어있다.
이런 통례로 본다면 아니 이런 교단의 통례를 구태어 들지 않고 일반 상식으로 봐도 안세찬은 교인대중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이다. 안세찬이 정상적인 정신상태로 한 말이라고 볼 수 없고 무엇이 씌어대서 그런 말을 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연원주없는 교단이 어디 있습니까 남의 농사 지은 것을 뺏어가는 것은 도적놈입니다' 라고 한 말은 증산대성(甑山大聖) 다음에는 청음, 남주 두분을 하늘처럼 믿고 입교한 교인들에게 '안세찬 내가 청음, 남주 밑에서 포교하고 일은 했지만 나는 연원을 따지면 이치복씨 연원이니 20년전에 나에게 도를 받은 이나 그 연비들은 나를 연원주로 받들어 일을 하자' 고 하면 그 말을 누가 옳게 보겠는가]라 하였다.
운산(雲山)은 그 뒤 몇 차례 용화동에 와서 같은 내용의 발언을 여러 교인들이 있는 자리에서 했으나 빗발치는 항의를 받았고 아들 중건(重建)을 시켜 색다른 교리강좌를 하다가 제지 당하였으며 연비교인들을 무례하다고 꾸짖다가 충돌하여 폭언이 오고가니 이로부터 왕래가 끊기게 되었다.
아산(牙山) 서산(瑞山) 공주(公州)지방의 교인으로 운산(雲山)과 인연이 깊어 그를 동정하는 몇몇 교인들은 그가 20여년 후에 다시 도장에 나왔더라도 겸허하게 지금까지 교단을 지켜온 분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고 여러 원로교인들과 상의해서 신앙생활을 계속할 의향을 밝혔으면 용화동에 다니는 옛 교인들의 호감을 사서 뜻밖에 교권을 쉽게 장악했었을 지도 모른다고 아쉬워했다.
운산(雲山)이 오랫동안 은거하였다가 다시 용화동에 나가서 옛 연비와 손을 잡고 새로운 종교 활동을 전개하려다가 신념의 차이로 좌절(挫折)하자 새로운 교단을 창설하려고 결심하게 되었다.
- 범증산교사 증산도사 -
범증산교사 출간을 계기로 증산교와 증산도의 관계는 급격히 냉각되었고, 안세찬ㆍ안중건 부자는 홍성렬을 두고 공개적으로 비판하곤 했다. 안중건의 설교 중 일부는 증산도 발간 월간지 “증산도 문화소식[6]”지 1999년 10월에 개재되었다. 공식지라서 최대한 순화한 표현임을 알아두자. 저작권 보호를 위해 스캔본은 생략하고 16년 후 플래카드 재판 판결문에서 인용한 부분만 알아보자.
난법은 역사를 그릇되게 해석하고 그 뿌리를 부정한다는 것이다. (중략) 지금 제 3변 도운에도 난법자들이 활개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 증산도는 가만히 앉아 당하고만 있다. 잘 알다시피 증산도에 대해 크고작은 흠집내기, 상처내기를 일삼고, 증산도의 도통맥과 도의 연원과 뿌리를 근원적으로 부정하는 자들이 있다. 더욱이 문제되는 것은 그들이 바로 증산도에서 도를 받은 자들이라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홍성렬 김탁[7] 같은 자다. (중략) 홍성렬(1935년 생, 65 세)은 『범증산교사』 등의 책자를 통해 가장 집요하고 악랄하게 상제님 도정 집행을 방해하는 훼도자라 할 수 있다.
대전지법2014고정661 판결문 11p
대전지법2014고정661 판결문 11p
그런데 홍성열이 범증산교사를 출간한 이후 서울에서 신원 미상의 괴한들에게 폭행당한다. # 아카이브 훗날 증산도 신도들에게 살해당한것을 생각해 본다면 이 테러도 증산도 신도들이 저질렀을 가능성이 크다.
2. 범행과 검거
2.1. 이●●의 살인교사와 장○○, 심○○, 이○○의 범행
2001년경, 증산도에는 장○○이라는 신도가 있었는데 그는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반드시 행하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장○○은 어떠한 계기로 홍성렬이 나쁜 사람임을 알고 죽이겠다고 결심하고는, 증산도 본부에서 행정실장이었던 이●●를 찾아가 자기 뜻을 전한다. 당시 행정실장은 증산도에서 상당히 높은 위치였는데, 이●●가 홍성렬 살인을 지시했음이 훗날 밝혀졌다. 이●●는 장○○에게 같은 증산도 신도인 심○○를 소개시켜주었다. 심○○는 범행이 두려워 같은 신도였던 이○○에게 범행을 제의해 홍성렬 살해를 시행할 3인조를 구성하였다.2.2. 이●●의 자살과 미궁에 빠진 수사
피해자가 대학교수이자 지역의 유명인사인 터라 초미의 관심 속에 수사가 진행되었다. 현장감식 끝에 경찰은 방명록의 쪽지문[8]과 머리카락 수십 점을 증거로 채취했다. 그러나 쪽지문으로는 주민등록 데이터베이스와 비교해 신원을 특정할 수 없었다. 인근 거주자 및 우범자, 방문자들의 DNA를 검사해봐도 현장에서 발견된 머리카락의 DNA와는 일치하는 사람이 없었다. 관련 학자들은 조속한 수사를 촉구하기도 했다.- "종교학자 테러" 수사 촉구 (경향신문, 2002년 1월 31일) #
2.3. 반전, 3인조 살인범 잡히다
미제사건으로 남은 지 9년 후인 2010년 초, 대한민국 경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개발한 첨단 지문감식기법을 적용해 사건현장에서 발견된 쪽지문을 입력해 보았다. 새롭게 개발된 기술을 통해 쪽지문을 보이지 않는 융선 부분을 추정, 복원했더니 일치율이 가장 높은 지문은 역시 살인범 이○○의 것이었다. 드디어 사건의 실마리가 잡히는 순간이었다.언론에서는 주로 '전직 교수부부 살인사건' 정도로 알려졌고 증산계통 교단 신앙인들 사이에서는 '홍범초 살인사건', '홍사건' 등으로 통한다. 아래 링크 뉴스기사들을 전부 살펴보면 ' 증산도'라는 교명을 피해 '증산교' 또는 '종교단체'라고만 썼다.
* 과학수사의 힘…9년 만에 덜미 잡힌 '종교살인' (SBS 뉴스, 2010년 4월 13일) #
* 지문 자국이 밝힌 9년 전 살해사건! (YTN, 2010년 4월 13일) #
* 9년 미궁에 빠진 종교 지도자 부부 살해범 검거 (뉴스타운, 2010년 4월 13일) #
* 9년만에 깨어난 지문, 살인자 찍다 (동아일보, 2010년 4월 14일) #
* 집념과 과학수사, 9년 전 살인사건 해결 (스포츠한국, 2010년 4월 30일) #
* 홍성열씨 부부 변사체로 발견 (예산뉴스 무한정보, 2010년 10월 27일) #
프로파일러이자 20대 국회의원 표창원이 사건에 관해 여러 편 글을 썼다.
종교적 배후를 의심할 만한 살인사건의 분석과 피의자 면담조사를 맡은 적이 있다. 이 종교는 일반에서는 이단으로 치부되고 있지만 전국에 교당을 가지고 았을 만큼 위세가 대단했다. 그런데 한 신도가 자신들의 교단의 정통성에 대해 계속 문제를 제기해온 전직교수를 살해한 것이다. 경찰은 정황상 살인을 교사한 배후가 있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피의자는 처음부터 입을 닫아버리고 "다 내 책임이 다. 그냥 처벌해 달라"며 진술을 거부했다
이런 경우는 말문을 열고 대회를 시작하게 하는 것이 관건이다. 알겠으니까 얘기나 좀 하자 당신에 대해 좀 알고 싶다. 이런 일이 또 일어나게 해서는 안 되지 않느냐" 하는 식으로 사건과 관련이 없는 주제로 대화를 시작해 상대방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이다. 피의자도 이미 자신의 행동이 옳지않음을 알고 있었고, 피해자에 대한 미안함을 느끼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 부분은 일단 접어두고 심리적 부담이 낮은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어린 시절 가장 즐거웠던 기억, 꿈, 취미 등에 대한 대화는 누구와 나눠도 부담없는 소재다. 특히 이 사건의 피의자는 어릴 때부터 책을 유난히 좋아했던 인물로 해당 종교 역시 책을 통해 접하게 되었다고 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책 얘기를 나누는 동안 그는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잠깐 잊어버리고 그간의 억눌려 있던 상황을 벗어나 대화의 주도권을 쥐어나가기 시작했다.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신을 살인범이 아닌 존중받아야 할 인간으로 생각해 주는 것만으로도 라포가 형성된 것이다.
그렇게 어느 정도 마음이 열리면 대화의 내용을 점차 사건 발생 시점으로 근접시킨다. 그러면 분위기가 조금씩 침울해지고 조용해 지긴 하지만, 그동안 자신이 열어놓은 문이 있으니까 갑자기 돌변할 수는 없다. 한번 열린 문이 다시 닫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물론 사안이 사안인 만큼 심리적 저항이 있긴 하지만,이 역시 일정 한계점에 이르게 되면 결국은 놓아버릴 수밖에 없다. 그는 결국 종단의 중견 간부가 자신을 불러 사건을 사주했음을 털어놓았다.
숨겨진 심리학(2011.3 표창원, 토네이도) 160,161p
이런 경우는 말문을 열고 대회를 시작하게 하는 것이 관건이다. 알겠으니까 얘기나 좀 하자 당신에 대해 좀 알고 싶다. 이런 일이 또 일어나게 해서는 안 되지 않느냐" 하는 식으로 사건과 관련이 없는 주제로 대화를 시작해 상대방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이다. 피의자도 이미 자신의 행동이 옳지않음을 알고 있었고, 피해자에 대한 미안함을 느끼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 부분은 일단 접어두고 심리적 부담이 낮은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어린 시절 가장 즐거웠던 기억, 꿈, 취미 등에 대한 대화는 누구와 나눠도 부담없는 소재다. 특히 이 사건의 피의자는 어릴 때부터 책을 유난히 좋아했던 인물로 해당 종교 역시 책을 통해 접하게 되었다고 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책 얘기를 나누는 동안 그는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잠깐 잊어버리고 그간의 억눌려 있던 상황을 벗어나 대화의 주도권을 쥐어나가기 시작했다.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신을 살인범이 아닌 존중받아야 할 인간으로 생각해 주는 것만으로도 라포가 형성된 것이다.
그렇게 어느 정도 마음이 열리면 대화의 내용을 점차 사건 발생 시점으로 근접시킨다. 그러면 분위기가 조금씩 침울해지고 조용해 지긴 하지만, 그동안 자신이 열어놓은 문이 있으니까 갑자기 돌변할 수는 없다. 한번 열린 문이 다시 닫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물론 사안이 사안인 만큼 심리적 저항이 있긴 하지만,이 역시 일정 한계점에 이르게 되면 결국은 놓아버릴 수밖에 없다. 그는 결국 종단의 중견 간부가 자신을 불러 사건을 사주했음을 털어놓았다.
숨겨진 심리학(2011.3 표창원, 토네이도) 160,161p
위 글로 보건데, 표창원이 3인 중 한 명을 직접 대면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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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의 적 없애러 살인까지 저질렀나 (한겨레, 2013년 9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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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재판
1심[11]에서 장○○은 12년형, 심○○,이○○은 18년형을 선고받았고 항소심[12]에서 장○○은 10년형, 심○○,이○○은 16년형으로 일부 감형되어 현재 대전교도소에 수감중이며 장○○은 2020년 만기 출소했고 나머지 범인은 2026년 출소할 예정이다.3. 플래카드 재판
3.1. 안병섭·안정주의 증산도 쿠데타와 플래카드 게시
안세찬은 슬하에 7남 2녀를 두었고 대부분이 증산도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으나 3남 안중건(안경전), 4남 안병섭(안원전), 5남 안정주가 교단 발전에 크게 힘썼다. 안세찬은 2011년에 3남 안중건에게 후계를 맡기고 2012년에 만 89세 일기로 사망한다.증산도는 홍성렬 살인교사, 집단폭력, 성금 비공개를 국민 앞에 사죄하라!
2013년 4월 (증산도교육문화회관 및 전국 주요도시)
2013년 4월 (증산도교육문화회관 및 전국 주요도시)
홍성렬 사건 진실규명, 성금 및 재정공개, 말도수 등 도전조작 진실규명 촉구!
2013년 5월 4일 (증산도교육문화회관 앞)
2013년 5월 4일 (증산도교육문화회관 앞)
증산도는 증산도 쿠데타의 주동자인 안정주를 포함한 플래카드 게시자들을 명예훼손의 혐의로 전국적으로 고소했다. 검찰은 이들 모두에게 50~100만원에 약식기소했고 대전에 거주하는 안정주, 강동훈, 노상균은 이에 불복해 정식재판을 신청했다.[14],[15]
3.2. 살인범 장,심,이의 출석과 고소 취하
이 재판은 안정주가 기존에 피소된 사건[16]에 병합되어 심리되었다. 검찰의 공소는 위 3인이 홍성렬 살인사건뿐만 아니라 증산도가 집단폭력을 가했다는 허위사실을 유포해 증산도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것이었다.2014고정661 사건
1) 2014고정661 명예훼손 사건의 공소사실 중 나항은 진실규명을 촉구하는 내용에 불과하여 구체적인 사실의 적시가 없어 공소사실 자체로 범죄로 되지 아니하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여지가 상당하다.
2) 가항의 공소사실 중 ① '집단폭력' 부분은 증인 고○○, 노상균의 각 법정진술 (증산도 행정실장 이○○의 지시를 받고 증산도 신도 고○○ 등 네 명이 김○이라는 사람을 집단으로 폭행하였고, 이후 증산도 대표자인 안중건으로부터 100만 원의 사례금을 받았으며, 노상균이 증산도 수석 수호사일 때 신도들을 동원하여 이○○, 임○○, 최○○ 등을 납치·폭행한 사실이 있으며, 강○○ 수호사는 김○○라는 사람을 쇠파이프로 내리쳐 폭행한 사실이 있음)에 의하더라도 사실인 것으로 보이며, ② '홍성렬 살인 교사' 부분은, 홍성렬 살해 사건의 정범인 장○○, 이○○, 심○○는 모두 증산도의 독실한 신자들이었고, 살인 교사범인 이○○은 증산도사상연구소의 행정실장으로 신앙이 깊고 주요 보직에 있던 간부였으며(장○○은 이○○으로부터 활동비 150만원을 받은 사실이 있음),증인 노상균의 법정진술(안중건 등이 도훈이라는 교육을 통해 '천지에 정의가 있다면 어떻게 홍성렬 같은 놈이 이 세상을 돌아다닐 수 있겠느냐, 우리 신도 가운데 정의로운 사람이 한 명만 있다면 어떻게 홍성렬이 살아서 움직일 수 있느냐라 는 발언을 한 바 있음) 및 증산도 문화소식(1999년) 중 안중건 기고글 "개벽의 혼불, 제세핵랑군"등 증거에 의하면 증산도 교단에서 (증산도를 비판하던) 홍성렬을 제거할 것을 암묵적으로 지시하였다고 볼 정황이 여럿 존재하므로, 검사가 제출한 증거들 만으로는 2014고정661호 사건 공소사실 가항과 같이 피고인들이 적시한 내용이 허위 라는 점에 관한 증명이 부족하다고 볼 여지가 상당하다.
3) 그러나 이 사건 각 명예훼손죄는 피해자의 명시한 의사에 반하여 공소를 제기 할 수 없는 죄(형법 제307조 저12항,제312조 제2항)인바, 피해자 재단법인 증산도유지 재단은 이 사건 공소제기 이후인 2015. 3. 12. 위 사건과 관련하여 피고인들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 의사를 표시하였으므로, 형사소송법 제327조 제6호에 의하여 피고인들에 대한 위 사건의 공소를 기각한다(형식적 소송조건의 흠결이 있는 이상, 법원은 유·무죄 선고를 할 수 없고, 공소기각의 재판을 하여야 한다. 대법원 1994. 10. 14. 선고 94도 1818 판결 등 참조).
대전지법2013고정717 판결문 10~11p
증산도에 반기를 드는 이들을 처벌받게 하려다 도리어 아주 불리한 재판기록을 남겼으니
혹 떼려다가 하나 더 붙인 격이다.1) 2014고정661 명예훼손 사건의 공소사실 중 나항은 진실규명을 촉구하는 내용에 불과하여 구체적인 사실의 적시가 없어 공소사실 자체로 범죄로 되지 아니하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여지가 상당하다.
2) 가항의 공소사실 중 ① '집단폭력' 부분은 증인 고○○, 노상균의 각 법정진술 (증산도 행정실장 이○○의 지시를 받고 증산도 신도 고○○ 등 네 명이 김○이라는 사람을 집단으로 폭행하였고, 이후 증산도 대표자인 안중건으로부터 100만 원의 사례금을 받았으며, 노상균이 증산도 수석 수호사일 때 신도들을 동원하여 이○○, 임○○, 최○○ 등을 납치·폭행한 사실이 있으며, 강○○ 수호사는 김○○라는 사람을 쇠파이프로 내리쳐 폭행한 사실이 있음)에 의하더라도 사실인 것으로 보이며, ② '홍성렬 살인 교사' 부분은, 홍성렬 살해 사건의 정범인 장○○, 이○○, 심○○는 모두 증산도의 독실한 신자들이었고, 살인 교사범인 이○○은 증산도사상연구소의 행정실장으로 신앙이 깊고 주요 보직에 있던 간부였으며(장○○은 이○○으로부터 활동비 150만원을 받은 사실이 있음),증인 노상균의 법정진술(안중건 등이 도훈이라는 교육을 통해 '천지에 정의가 있다면 어떻게 홍성렬 같은 놈이 이 세상을 돌아다닐 수 있겠느냐, 우리 신도 가운데 정의로운 사람이 한 명만 있다면 어떻게 홍성렬이 살아서 움직일 수 있느냐라 는 발언을 한 바 있음) 및 증산도 문화소식(1999년) 중 안중건 기고글 "개벽의 혼불, 제세핵랑군"등 증거에 의하면 증산도 교단에서 (증산도를 비판하던) 홍성렬을 제거할 것을 암묵적으로 지시하였다고 볼 정황이 여럿 존재하므로, 검사가 제출한 증거들 만으로는 2014고정661호 사건 공소사실 가항과 같이 피고인들이 적시한 내용이 허위 라는 점에 관한 증명이 부족하다고 볼 여지가 상당하다.
3) 그러나 이 사건 각 명예훼손죄는 피해자의 명시한 의사에 반하여 공소를 제기 할 수 없는 죄(형법 제307조 저12항,제312조 제2항)인바, 피해자 재단법인 증산도유지 재단은 이 사건 공소제기 이후인 2015. 3. 12. 위 사건과 관련하여 피고인들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 의사를 표시하였으므로, 형사소송법 제327조 제6호에 의하여 피고인들에 대한 위 사건의 공소를 기각한다(형식적 소송조건의 흠결이 있는 이상, 법원은 유·무죄 선고를 할 수 없고, 공소기각의 재판을 하여야 한다. 대법원 1994. 10. 14. 선고 94도 1818 판결 등 참조).
대전지법2013고정717 판결문 10~11p
3.3. 플래카드 민사재판
증산도는 형사고소와 동시에 김병철, 강동훈, 노상균에게 각각 2천만 원 민사소송도 제기했다. 그러나 손해배상의 근거인 형사사건에서 패소함이 결정적이라 1심[19]에서 패했고 항소심[20] 에서도 패소했다. 상고심[21]에는 국내 유수의 법무법인을 수임했음에도 기각되어, 현재 홍성렬 살인사건 규명을 요구하는 플래카드와 관련된 모든 민,형사재판은 증산도의 패배로 종료되었다.4. 미디어
{{{#!wiki style="margin: -5px -10px" https://youtu.be/7YUNSkm5FyI?si=i4gVa1soIJ9pL7zQ |
홍교수 부부 피살사건 1:12:00 부터 |
5. 둘러보기
대한민국의 살인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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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 공덕동 유부녀 반나체 피살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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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N · 김상범 유괴 살인 사건K L ? · 임병석 법정증인 살인사건 · 인천 일가족 살인사건 · 박분례 보험 살인사건I (~1975) · 유네스코 지하다방 인질사건N 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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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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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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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www.jsd.or.kr/c/jsd/intro/341/396/342
[2]
대순전경 초판 12장 27절
[3]
이중성 천지개벽경
[4]
이에 이상호ㆍ이정립 형제가 분노하여 안세찬이 가져간 의통에 부여된 신적 권능을 무효로 해달라고 천지에 기도하는 의식을 치르었다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진다.
[5]
홍성렬이 증산도를 나쁘게 보았기에 그랬다고 볼 수만은 없다. 증산도는 강증산의 친딸이 만든 교단(증산법종교), 주요 제자가 만든 교단(김형렬의 미륵불교, 문공신 교단, 안내성 교단) 등에 비한다면 정통성 순위에서 크게 밀린다.
[6]
몇 년 후 월간개벽으로 변경되어 현재도 정기출판 중이다.
[7]
김탁은 신원미상의 괴한들에게 폭행당한 후 현재까지 은둔하고 있다.
[8]
손가락 일부만 접촉해 부분적으로 남겨진 지문
[9]
증산도의 경전.
증산도 참조
[10]
링크
아카이브
[11]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원 2010고합23
[12]
대전고등법원 2010노280
[13]
증산도는 동양우주론의 무극,태극,황극의 삼극설을 차용해 무극은 강증산과 고판례, 태극은 안세찬, 황극은 안중건이라고 내부적으로 가르친다. 안세찬 영결식 당시 그의 관에 덮은 명정에 '태극제 안운산 종도사'라고 쓰여 있었고, 제일 앞에 서는 만장에도 '태극제 안운산 종도사'라고 쓰여 있었다.
증산도참조
[14]
대전지법 2014고정661
[15]
타 지역의 플래카드 게시자중 신원이 특정되어 고소당한 이들은 전부 민형사 재판에서 패소했다.
[16]
대전지법 2013고정717
[17]
실제로 반대파에 대한 폭행으로 인해 실형을 선고받은 증산도 간부가 있다.
[18]
전술했듯이 피고 중 한 명이 안중건의 친동생 안정주였음.
[19]
대전지법 2014가소333183
[20]
대전지법 2015나104792
[21]
대원2016다2104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