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전쟁 | |||
1948~1949 제1차 중동 전쟁 (이스라엘 건국전쟁) |
1956 제2차 중동 전쟁 (수에즈 전쟁) |
1967 제3차 중동 전쟁 (6일 전쟁) |
1973 제4차 중동 전쟁 (욤 키푸르 전쟁) |
관련 문서: 소모전 | 레바논 내전 | 2차 레바논 전쟁 | 가자 전쟁 | 하마스 전쟁 | 3차 레바논 전쟁 | 이스라엘의 외교 | 다자관계 | 가자 지구 | PLO | 하마스 | 헤즈볼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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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역사 | 이스라엘/역사, 팔레스타인/역사 | |
정치 | 이스라엘/정치, 팔레스타인/정치 | ||
외교 |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 이스라엘-팔레스타인-아랍권 관계, 벨푸어 선언, 오슬로 협정 | ||
방안 | 일국 방안, 양국 방안, 삼국 방안, 영국 방안 | ||
사상 | 시오니즘, 반시오니즘, 팔레스타인 내셔널리즘, 반이스라엘주의, 반팔레스타인주의 | ||
민족 | 이스라엘인, 팔레스타인인, 유대인, 아랍인, 하레디, 이스라엘 아랍인, 이스라엘 무슬림 | ||
관련 단체 |
이스라엘
리쿠드팔레스타인
PLO,
파타,
하마스,
PIJ,
PFLP,
인민당,
DF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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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
이스라엘
골다 메이어,
이츠하크 라빈,
아리엘 샤론,
베냐민 네타냐후팔레스타인
야세르 아라파트,
마흐무드 압바스,
이스마일 하니예,
야히야 신와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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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 중동전쟁, 이스라엘 건국 전쟁, 나크바, 수에즈 전쟁, 6일 전쟁, 소모전(중동), 민항기 납치 및 테러( 엘알 426편, 엘알 253편, 엘알 432편, 트랜스 월드 840편, PFLP 동시다발 하이재킹 사건, 사베나 571편, 엔테베 작전), 검은 9월, 뮌헨 올림픽 참사, 1973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습, 욤 키푸르 전쟁, 레바논 내전, 골란 고원 분쟁, 제1차 인티파다, 제2차 인티파다,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철수, 파타-하마스 분쟁, 가자 전쟁( 2008-2009, 2012, 2014, 2021), 2021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위기, 2023년 알아크사 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 ||
기타 | 서동시집 관현악단 |
이스라엘 건국전쟁 | |
기간 | |
1948년 5월 15일 ~ 1949년 3월 10일 | |
장소 | |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이집트 왕국의 시나이 반도, 레바논 남부 | |
원인 | |
이스라엘 건국선언에 대한 아랍국가들의 반발과 선전포고 이스라엘과 아랍 연맹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통치권 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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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 국가 및 세력 | |
[[이스라엘| ]][[틀:국기| ]][[틀:국기| ]] |
[[틀:깃발| [[이집트 왕국| ]][[틀:국기| ]][[틀:국기| ]] [[요르단| ]][[틀:국기| ]][[틀:국기| ]] [[이라크 왕국| ]][[틀:국기| ]][[틀:국기| ]] [[틀:깃발| ]][[틀:깃발| ]][[시리아 공화국| ]] [[사우디아라비아| ]][[틀:국기| ]][[틀:국기| ]] [[레바논| ]][[틀:국기| ]][[틀:국기| ]] [[틀:깃발| ]][[틀:깃발| ]][[예멘 왕국| ]] |
]][[틀:깃발| ]][[아랍 연맹| ]]
지원 국가 및 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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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미국| ]]|
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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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 | |
대규모 팔레스타인 아랍인 난민 발생 이집트 왕국의 패전으로 인한 파루크 1세 축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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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 |
이스라엘의 성공적 건국 및 승전, 아랍연합군의 패전 요르단 왕국의 요르단강 서안 지구 및 예루살렘 구( 舊)시가지 점령 이집트 왕국의 가자 지구 점령 시리아의 골란 고원 및 갈릴리 호 동안( 東 岸) 점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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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경
제2차 세계 대전 종결 뒤 영국은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에서 손을 떼게 된다. 무주공산이 된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지역을 둘러싸고 아랍인과 유대인 간의 충돌이 지속되었고, UN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분할안도 아랍인과 유대인 양측의 격렬한 반대[2]에 부딪혀 좌초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번지게 된다.1947년 UN 분할안에 따른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의 지도.[3] |
2. 전력
2.1. 이스라엘
1947년 11월 하가나는 1929년 폭동 이후로 잘 조직된 유대인 민방위군을 유지하고 있었다. 1936년~ 1938년의 폭동 이후로 2,000여 명의 직업군인과 한 달에 3~4일 정도 군사 훈련을 받는 만여 명의 지원자들이 이 정예부대의 구성원이었다. 이 기동부대는 25살 이상의 지역 단위 민방위군과 연계되어 있었으며 전체적으로 35,000명 정도가 하가나의 구성원이었다. 이들은 훈련되어 있기는 했지만 정규적인 군사 집단이 아닌 지하 조직 형태였기 때문에 화기 입수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1946년 다비드 벤구리온[4]은 유대인 공동체가 비유대인들의 습격에 대항하여 스스로 방어할 수가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결정하였고 동구권 진영의 무기들로 무장하기 시작한다. 1947년 9월, 하가나는 1만 정의 소총과 702정의 경기관총, 2,666정의 기관단총, 186정의 중기관총, 2인치 박격포 672문과 3인치 박격포 92문을 보유하기에 이른다. 47년 10월에서 48년 7월 사이, 무기 생산 능력을 갖추게 되었으며 이들은 3백만 발의 9mm 권총탄과 수류탄 15만 개, 기관단총 1만6천 정, 3인치 박격포 210개를 생산하였다. 하지만 1차 중동전쟁의 개전 시점에서 이스라엘군은 절대적인 무기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으나 싸움에 소극적인 아랍국가들이 병력을 잘 파견하지 않는 데 비해서 결사적인 인해전술로 맞섰다. 흔히 아랍군이 더 많았다고 착각하는데 이스라엘은 초기부터 3만 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했고 전쟁 후반기에는 10만 명으로 병력을 증강했지만 아랍군은 초기에 소수의 원정군만 보내면서 성의 없이 싸웠기 때문에 오히려 이스라엘에 비해 숫적 열세에 시달렸다.
그러나 여전히 무기는 부족하였고 평균적으로 하가나의 대원 3명당 1개씩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정예 부대도 3명당 무기 2자루 정도를 보유하는 것에 그쳤으며 그나마 M4(105) 30대와[5] 영국군이 남기고 간 셔먼 III '메이르" 1대라는 쥐꼬리만큼의 기갑 전력을 보유하고 있을 뿐이었다.[6] 이스라엘은 결국 전쟁 초기에 충분한 수량의 중기관총과 대포, 장갑차량이나 대전차, 대공 무기를 보유할 수 없었다.
2.2. 아랍 연맹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지역의 아랍인들은 국가적 무장 단체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청년 측의 무장 조직이 있었다. 약 11,000~12,000명 정도가 존재했으며 크게 후샤니 후타와 후샤니 나즈다 두 파벌로 분리되어 있었다. 팔레스타인 아랍인 진영은 100만이 넘는 인구에 비하면 병력이 아주 부족했는데 이는 1936년 팔레스타인 대반란 당시 영국군이 이를 철저히 분쇄하는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에 속한 아랍인 청장년 층의 상당수가 전사, 부상, 투옥, 망명하게 되면서 전투 인원의 심각한 부족에 시달리고 무엇보다도 전투 경험이 있던 세대가 증발하고 무기도 영국 당국에게 압수되면서 전투력이 붕괴되었기 때문이다.전쟁 발발 이후 팔레스타인 민족방위군이 새로 조직되었으며 12월 압드 알 카디르 후세이니는 시리아에서 훈련된 100여 명의 아랍 성전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도착한 뒤 몇몇 지원자들과 영국군 출신의 베테랑들과 합류한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민족방위군의 무장은 매우 열악했는데, 1942년 이슈브(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유대교도 자치정부)의 첩보에 의하면 팔레스타인 아랍인 진영에는 약 5만여 정의 화기가 있는 것으로 추산되었지만 굉장히 낡고 신뢰도가 낮았다고 한다.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자경단 조직들과 무관하게 개인적으로도 영국 식민부의 민정청에 총기를 요청하고 어떻게든 돈을 마련하여 총을 사서 조달하기도 했다.
아랍 연맹은 다양한 아랍국가에서 지원한 6천여 명의 자원자로 구성되어 있는 아랍 해방군을 조직했고 파우지 알 카우크지의 지휘 아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의 북부 지역과 사마리아에 파견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아랍인 진영의 극심한 분열 때문에 이들은 눈곱만큼도 연합 작전을 펼치려 하지 않았고 각자 이스라엘과 비밀 협상을 하면서 경쟁 파벌을 회치는 것을 도모했다.
트란스요르단은 서술했듯 영국군의 훈련 하에 정예 부대를 보유했으며 8천~1만 2천 명 규모의 부대가 4개의 보병 및 기계화연대로 조직되어있었으며 40문의 야포와 75대의 장갑차를 보유했었다. 가장 잘 훈련된 요르단군은 초기에 이스라엘군의 공세를 격퇴하고 유대인들을 철저히 압도하면서 유일하게 잘 싸웠다. 트란스요르단이 전쟁에 참여하는 동기에는 다음과 같은 배경이 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근원은 일반적으로 영국의 맥마흔 선언과 벨푸어 선언으로 평가되는데, 여기서 맥마흔 선언 당사자들은 ' 팔레스타인 민족주의'가 아니라 후세인 빈 알리였다. 이후 트란스요르단의 국왕이 되는 인물이 압둘라 1세인데 그 왕이 바로 맥마흔 선언의 당사자인 후세인 빈 알리의 아들이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시절만 해도 팔레스타인에겐 아랍 민족주의는 있어도 완전 독립국가라는 개념으로서의 팔레스타인 민족주의는 없었다. 아랍 제국이나 아랍 연합국의 일부로서 팔레스타인 정부를 추구한다는 의미의 팔레스타인 민족주의라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당시에 발생한 팔레스타인의 아랍 봉기의 사상은 아랍 민족주의였지, 완전히 독립된 국가로서의 팔레스타인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논란 자체는 존재하지만 압둘라 1세가 이스라엘과 밀약을 맺어서 팔레스타인을 갈라 먹었다는 증거는 없다.[7] 그리고 트란스요르단은 영국에게 배신당하여 잃어버렸던 기회를 잡게 되는데 이게 바로 제1차 중동전쟁이다. 그런 이유로 참여 목적이 다른 아랍 국가들과 달랐다.
이라크 왕국은 12개 여단 21,000명의 군대를 보유했으며 영국제 전투기 100여 대로 이루어진 공군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초기에 4개 보병여단을 파견했으나 최종적으로 만 5천 명에서 만 8천 명까지 증파했다. 5월 15일에는 이라크 공병대가 요르단 강에 가교를 건설하여 이스라엘 정착촌을 공격, 아주 조금의 성과를 거둔 바는 있다. 이후, 나블루스-예닌(제닌)-툴칼람 삼각지대 내에서 이스라엘군의 공격에 격심한 피해를 입었지만 위치를 고수한 바 있으며 이라크군은 예닌 지역을 사수하던 중 종전을 맞이했다. 그나마 좀 나은 케이스.
이집트 왕국은 초기에 9천 명을 파견했는데 전황이 악화되자 최종적으로 4만여 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이집트의 파병 목적은 요르단이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과 레바논과 시리아를 합병해서 아랍의 맹주로 나대는 꼴을 봐줄 수 없다는 정치적인 목적이었지, 이스라엘과 열심히 싸우겠다는 의지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따라서 작전 수립 과정에서 군부는 철저히 배제되었고 내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계획적으로 병력을 축차투입했다. 거기에 파루크 1세는 어차피 싸움은 요르단군이 다 해주겠지만 겁쟁이 시오니스트 깡패들은 이집트군을 마주치면 다 겁에 질려 달아날 거라는 민족주의적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이 황당한 판타지를 공유한 아랍 연맹의 회원국들은 이후로도 이스라엘에게 처참하게 패하는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게다가 이집트군은 규모는 꽤 되었으나 영국군의 철저한 통제 하에서 제대로 된 훈련을 받은 일이 없었으며 주 목적은 국내 치안 유지였기에 해외 원정이라는 어려운 임무를 수행할 여력 자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보급 체계가 눈물겨워 국가 경계선 지역에만 병력을 배치했다. 초기에 병력 만 명으로 구성된 원정군이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에 파견되었으며 영국제 25파운드 포 6문과 6파운드 대전차포 8문, 1정의 중기관총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집트 공군은 30기의 스핏파이어와 4기의 허리케인, C-47 20기 등으로 폭격을 수행했다. 하지만 이스라엘 정착촌이 조금만 저항하면 겁을 먹고 전투를 회피해서 전략적 요충지는 하나도 점령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병력이 산개되었으며 이스라엘군이 아니라 가자 지구의 아랍인들을 더 공격했다.
시리아는 3개 보병 연대로 구성된 만2천여 명의 병력과 전차 대대를 파견하였다. 5월 15일부터 16일에 이들은 이스라엘의 제마크 마을을 공격하여 점령한 바 있으나 며칠 뒤에 다가니아에서 패주한다. 전반적으로 시리아군은 방어로 돌아선 6월 10일 이후 소규모의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스라엘의 정착민 촌락에 소규모의 공격을 가했다. 시리아의 참전 목적은 압둘라 1세가 시리아를 합병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함이었고 제일 싸울가 없는 나라 중 하나였다. 그래서 시리아는 전쟁 발발 직후에 그냥 팔레스타인 아랍인 진영에 무기와 자금만 지원하고 정규군을 투입하지 말자고 제안했으나 야심에 활활 불타던 압둘라 1세에게 씹혔다.
레바논은 규모가 작은 3천 5백 명의 군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천여 명의 침공군은 북부 갈릴리를 지나 이스라엘군과 교전하였으며 결국 1949년 3월 23일 휴전협정에 사인해 버렸다. 레바논 역시 압둘라 1세가 레바논을 합병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
3. 전개
제1차 중동전쟁의 전개 |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이 텔아비브 미술관의 홀에서 건국 선언문을 낭독함과 함께 전쟁이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이스라엘군과 팔레스타인 아랍인 진영의 아랍민족해방군 사이의 교전이었으나 팔레스타인 내부의 극심한 파벌 싸움 때문에 이들은 서로 이스라엘에게 자기네 경쟁 파벌을 조져달라고 로비나 하다가 각개격파당했고 그 이전까지 팔레스타인의 맹주를 자처하던 아민 알후세이니는 군사적 기반을 상실하면서 완전히 몰락한다. 이스라엘군은 점령지에서 아랍인들의 추방을 적극 조장하였는데, 이스라엘의 공식 역사학에서는 이스라엘이 아무런 압력을 가하지 않았는데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알아서, 혹은 주변 아랍 국가 지도자들의 선동 때문에 달아난 것으로 설명했으나 이스라엘이 정부 차원에서 이들의 소개를 도모했다는 것이 문서고 해금으로 증명되고 있다. 다만 이스라엘 스스로도 이것이 정치적으로 대단한 논란이 된다는 것을 알아서 민족 청소 수준으로 가혹하게 진행하진 않고 일선 군부대도 다 각자 다르게 행동해서 혼란스러웠다. 아랍계 기독교인, 드루즈파, 베두인 등을 어떻게 처리할지도 의견이 갈렸고 따라서 어떤 지역은 아랍인들이 종교 불문하고 쫓겨나고 어떤 지역은 무슬림만 쫓겨나고 어떤 지역은 종교 불문하고 보호를 받는 난장판이 벌어졌다.
팔레스타인 지역이 이렇게까지 허망하게 무너진 것은 위에서도 언급된 심각한 파벌 다툼 때문이었고 주요 도시들이 이스라엘군에게 함락되면서 팔레스타인 지식인과 도시인 사회는 완전히 붕괴된다. 팔레스타인의 생각보다도 너무 빠른 붕괴에 경악한 시리아와 레바논 및 이라크 왕국과 이집트 왕국과 요르단 왕국의 이슬람교도 아랍인들은 개입할 것을 정부에 요구하였다. 이를 무시하기에는 정권이 위험해질 것을 느낀 각국은 개입을 하게 되는데, 사실 아랍 국가들의 목표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대시리아 왕국 건설의 야심에 불타는 압둘라 1세였다. 압둘라 1세는 명목상 아랍 연합군 총사령관에 추대되었지만 각국은 눈곱만큼도 압둘라 1세에게 협조하지 않았고 압둘라 1세의 이집트 방문 때 이집트군은 압둘라 1세가 자기네 총사령부 근처에도 못 가게 하면서 견제했다. 여기에 사우디아라비아, 예멘은 자금과 자원병을 파견하였다. 또한 아랍 각지에서 지원자들로 구성된 아랍 해방군이 결성되어 파견되었으며, 팔레스타인의 무력 충돌 기간 동안 결성된 성전군도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참여했다.
이스라엘군의 전력은 그야말로 보잘것없어 세계 각지에서 수입한 잡다한 무기들을 되는 대로 지급해서 총기를 든 병사 10명이 있으면 그중 7~8명은 각자 다른 탄을 사용하는 총기여서 탄약 문제가 있었다. 어떤 부대에서는 소유한 총기에 넉넉한 탄약을 가진 병사가 주로 교전을 하고 나머지 부대원들은 그 병사가 쉴 동안 그 총을 돌려 쓰고 기지 방어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에 반해 영국의 지도를 받은 정예군을 보유했던 요르단, 강력한 공군력을 가진 이집트와 이라크, 프랑스제 기갑장비로 무장한 시리아의 전력은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초기에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점령 및 텔아비브와 예루살렘 가도 확보를 위해서 공세 작전을 펼쳤으나 잘 훈련된 요르단군의 공세에 처참하게 박살나고 오히려 예루살렘에서 축출당했다. 하지만 이를 제외한 나머지 아랍군은 어디까지나 요르단을 견제한다는 정치적 목적으로 파견되었고 전쟁 준비란 것이 안된 오합지졸들이라서 싸움 자체를 거의 하지 않거나 보여주기식 포격 및 점령한 일부 아랍 도시의 방어에만 치중했다. 요르단을 제외하면 가장 유의미한 군대를 보낸 나라는 이집트였지만 상술한 대로 싸울 의지도 능력도 없으면서 자기네들이 이긴다는 상부의 망상에 등떠밀렸기 때문에 일선 장교들의 불만은 엄청난 수준이었고 이러니 제대로 싸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반면 이스라엘은 키부츠에서 화염병을 만들고, 박물관에 전시되었던 대포까지 끌고 오는 등 결사적으로 저항하여 적군의 진격을 막았다.
결국 6월 11일 UN의 중재로 30일 동안 휴전이 선언되면서 양쪽 모두 숨고르기를 할 시간을 벌었고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소련의 허가 아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무기를 수입하면서 뒤늦게야 이스라엘군의 본격적인 무장이 시작되었다. 참고로 이후의 중동전쟁들과는 정반대로 동유럽을 위시로 한 사회주의권은 일제히 이스라엘을 옹호하면서 아랍을 영국 제국주의의 무능한 주구들로 매도하는 선전전을 전개하였다. 반면 미국, 영국, 프랑스는 유엔에서 선포한 무기 금수 조치를 아주 잘 지켰기 때문에 서방제 무기로 무장했던 아랍군은 탄약이 다 떨어져서 더 싸울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이 사태를 알고 경악한 요르단은 어떻게든 휴전 협정을 연장하려고 했지만 시오니스트들이 별거 아니라는 망상에 휩싸인 다른 아랍 국가들은 이를 죄다 거부했다.[8] 그리고 7월 8일 이집트군의 기습으로 전쟁이 재개되자 그 사이에 철저한 무장을 갖춘 이스라엘군은 방어에서 아랍 연합군에 대한 전면 공세로 전환하여 전세를 역전시켰고, 예루살렘과 텔아비브 주변 거점을 점령하며 가나안 지역의 안전을 확보하였다. 요르단만 가까스로 예루살렘을 사수했고 나머지 군대는 다들 참패하고 패주한다. 결국 10일 후인 7월 18일 UN의 중재 아래 2차 휴전이 선언되었다. UN은 전쟁을 끝낼 중재안으로 또다른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내놓았지만, 양쪽 모두 이를 거부하고 이스라엘 측은 도리어 분할안을 제안한 스웨덴 대표 폴케 베르나도테를 암살하는 배은망덕한 짓을 저지른다.[9] 결국 평화 협상은 실마리를 얻지 못한 채 10월 15일 다시 전쟁이 재개되었다. 이 와중에 이라크와 이집트, 시리아는 영국 스파이들이 후방을 교란해서 그런 것이라는 정신승리나 시전하고 있었고 요르단은 아민 알후세이니의 팔레스타인 병력이 자기네 영토에서 설치지 못하도록 때려잡는데 주력했다. 압둘라 1세는 이스라엘과 비밀 협상을 해서 웨스트뱅크의 영유권을 확보하려다가 들키는 바람에 아랍의 공적으로 찍혀서 비난을 받았고 심지어 시리아는 웨스트뱅크까지 이스라엘에게 줘버리자고 막말을 시전한다.
전쟁이 재개되자 이스라엘은 북쪽 갈릴리 호 일대를 노린 공세를 펼쳤고 단 10여 일 만에 아랍 연합군을 시리아와 레바논으로 몰아내고 갈릴리 지역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그 다음 목표로는 아랍인들이 많이 살고 있어 차지하기에는 아직 애로사항이 있는 가자 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지구 대신 무주지나 다름없던 남쪽 네게브 사막을 향한 파상공세를 펼쳤다. 당시 이집트는 군사적으론 참패를 하면서도 요르단 견제에만 눈이 멀어서 가자 지구에 팔레스타인 정부를 수립했고 이 때문에 열받은 요르단은 이스라엘을 응원하는 막장 상태가 된다. 이집트는 병력이 4만 명까지 증강된 상태였지만 이 문서에서 내내 강조되었듯이 준비가 안된 상태라서 네게브 사막 전체를 이스라엘에게 내어주고 이스라엘군은 시나이 반도까지 진격했다. 결국 이집트는 요르단에 도움을 구걸하기로 했지만 막상 요르단에 도착한 수상 누크라시는 자존심만 앞세우며 "제대로 싸우지도 않는 요르단의 도움 따위 필요없다!"라고 악을 쓰는 트롤링을 저질렀다. 당연히 빡칠 대로 빡친 요르단은 이집트가 망하든 말든 계속 신경쓰지 않았고 사우디아라비아와 예멘이 지원의사를 표명했지만 실제로 도와주진 않았다. 이라크만 이스라엘 북부에 상징적으로 포격을 해서 지원하는 시늉만 했다.
요르단이 더 싸울 생각이 없는 상태에서 이집트가 굴욕적으로 패주하게 되자 아랍 국가들은 각자 차례대로 이스라엘과 휴전을 체결하였고 1949년 3월 10일 홍해와 접한 항구도시인 에일라트를 점령한 이스라엘 군인들이 이스라엘 국기를 게양하면서 제1차 중동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이 났다.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면적의 78%를 장악했고, 나머지 지역 중 가자지구는 이집트가, 동 예루살렘을 포함한 요르단강 서안지구는 요르단이 점령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장악한 지역에 살고 있던 70만 명이 넘는 팔레스타인인이 고향을 떠나 난민으로 전락했다.
아랍 연합군은 압도적인 전력이었지만 실상은 통합된 지휘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서로 간의 불신으로 인해 단합이 전혀 되지 않아 전쟁을 효율적으로 진행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들은 얼마 전까지 영국 및 프랑스 식민 지배를 받았으며 나아가 당시에는 왕가와 반왕파들의 갈등과 내전이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보통 아랍 연합군이 수적, 화력 면에서 우세했던 것에만 집중하지만 사실 이들은 장비는 우수할지 몰라도 내부적으로 극심하게 분열되어 문제가 이스라엘보다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집트만 해도 파루크 왕가에 불만이 큰 장교들은 일부 작전을 무시했으며 다 이겨 놓고도 일부러 후퇴하여 패배를 자초했다. 이는 만일 이집트군이 승리하면 왕가에 대한 지지가 커질 테고, 그러면 왕가를 뒤엎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장교단은 자신들의 의사도 묻지 않고 자기네를 사지로 밀어넣은 왕정에 대한 불만이 이 전쟁을 기점으로 폭발하였으며 국왕이 패배의 책임을 자기네에게 뒤집어씌워서 숙청할까봐 선수를 치자는 분위기가 팽배하게 된다. 결국 전쟁에 패배하면서 쿠데타의 명분을 얻은 군부는 3년 만에 파루크 국왕의 무함마드 알리 왕조를 가말 압델 나세르의 군사 쿠데타로 뒤집어엎었다.
다른 나라들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귀족 출신으로 우쭐거리는 장교와 강제 징집된 사병들의 갈등도 커서 되려 유럽인 교관들이 "장비만 좋지, 이건 허수아비 군대다." 라고 회고하며 비웃을 정도였다. 그나마 베두인족으로 구성된 정예군을 가진 요르단군의 경우 지금까지도 미국이나 영국 군사 기관들과 교류하는 아랍권의 최정예 군대로 통한다. 다만 요르단은 근본적으로 소국인 데다 가난하고 석유가 없어서 이 훌륭한 군인들에게 사우디아라비아나 쿠웨이트 같은 장비발을 세워줄 수는 없다는 점 때문에 대세에는 영향을 주기 힘들었다. 반면 이스라엘의 결사적인 저항은 표면적인 전력 이상의 위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전쟁의 승패와는 관계없이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구시가를 포함한 중요 지역을 탈환하거나 추가로 점령하기 위해서, 아랍 연맹의 회원국들은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기 위해 전력을 집중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결국 제3차 중동전쟁으로 비화된다.
4. 여담
이스라엘 건국전쟁 기간 동안 이스라엘군은 소련의 동의로 군수품을 수출하는 계약이 성사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받은 독일제 무기로 무장하고 싸웠고, 아랍 연합군은 영국군이 남기고 간 대량의 영국제 무기로 싸우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했다. 특히 이스라엘이 쓴 독일제 무기는 상당 부분이 체코에서 생산한 물량이었고, 독립 초기 이스라엘을 중동의 반서방 거점(다른 중동 국가가 다 친영미 계열이던 시절이니)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소련이 체코에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 공급을 지시했기 때문에 프라하 공항에서 한동안 이스라엘행 무기 수송기만 이륙하던 때도 있었다.이스라엘군이 보유했던 메서슈미트도 실은 독일제 오리지널이 아니라 체코제인 아비아 S199였고,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우지 기관단총도 그 원형은 체코제의 Vz.25 기관단총이다. 심지어 이스라엘은 체코가 보유하고 있던 Kar98k 소총 생산시설을 통째로 구입해서 Kar-98K를 생산, 한동안 제식 소총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전후 이스라엘은 빠르게 친미 노선으로 갈아탔기 때문에 이오시프 스탈린은 격노하여 책임자들을 숙청했으며 소련 내부의 유대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했다. 이로 인하여 반파시즘유대인위원회 위원장 솔로몬 미호옐스가 암살되었으며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부인인 폴리나 젬추지나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몰로토프에게 이혼당하고 체포당했다. 소련의 유대인 탄압은 크렘린 의사 음모 사건으로 절정에 이르렀으나 1953년 스탈린이 급사하면서 흐지부지되었다.
쇼샤 기관총이 공식적으로 투입된 마지막 전쟁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전쟁에서 시리아군이 쇼샤를 운용한 것이 쇼샤가 공식적으로 운용된 마지막 기록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운용되었다는 비공식 정보도 있으나 이는 불확실하다.
이스라엘 점령군에 의한 학살과 아랍인 추방이 자행되었는데, 이는 이스라엘 정부의 공식적 입장은 아니었고 일선 지휘관들의 독단 행동이었다. 당시 잔류한 아랍인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헌법 개정을 통해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기존의 통설은 이스라엘 정부의 조직적 아랍인 추방은 없었다는 것이었지만 어느 정도 조장, 묵인한 정황이 있다는 새로운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그리고 일부 학살이 벌어진 것 때문에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은 아랍인들이 이를 믿지 못하고 자발적으로 피난을 떠나는 일도 벌어졌다. 재밌는 것은 이스라엘 학계는 차차 이스라엘 정부에 비판적인 반면 아랍 쪽에 동정적으로, 팔레스타인 학계는 이스라엘 정부의 동기를 이해하는 면모로 서로 바뀌고 있다.
5. 창작물
마이클 셰이본의 대체역사소설 유대인 경찰연합에서는 이스라엘이 이 전쟁에서 지는 바람에 아랍 국가들에게 멸망당한다.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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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랍 연맹 사무총장
[2]
아랍인들은 UN의 분할안에 의해 아랍계의 영토가 절반의 이하인 45%였으며, 그마저도 지중해 연안 대부분을 차지하는 유대인 지역에 가로막혀
월경지 형식으로 분리된 것이 불만을 품었고,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로 가장 비옥한 올리브 농경지들이 아랍 영토로 분류된 점, 그리고 이스라엘 영토는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불모지인 점, 예루살렘 인근 지역이 아랍계 지역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국제 공동 구역에 포함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도 양측 모두가 불만을 품었으며, 당사자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예루살렘을 자신들의 수도로 건설해 나갔다. 특히 예루살렘은 1948년부터 1967년까지 줄곧 요르단이 점령했다가, 3차 중동전쟁 이후 이스라엘에게 빼앗겨 1994년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출범할 때까지 줄곧 이스라엘의 수도가 되었다.
[3]
어디까지나 대강의 구상으로 만들어 놓은 영토일 뿐이지, 공식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유대인과 아랍인 국가들의 영토가 저러지는 않았으며, 당시에는 모두 영국의 식민지였다. 다시 말해 확정된 영토가 아니다.
[4]
초대 이스라엘 총리이자
베냐민 네타냐후 이전의 최장 임기 총리. 임기는 1948년 5월 17일~1954년 1월 26일, 1955년 11월 3일~1963년 6월 26일로 도합 4,875일을 집권했다.
[5]
처음에는 좀 멀쩡한 걸 사려고 했으나 대부분의 나라들이 판매를 거절했고 수소문 끝에 이탈리아에서 고철로 스크랩 처리한 걸 얻어왔다. 이것들도 무장이 제거된 상태라서 스위스에서 가져온 독일제 크루프 7,5cm M1911 곡사포를 갖다 박았다.
[6]
이 셔먼 메이르를 얻은 과정이 골 때리는데 영국군 초병들을 이스라엘 여자들이 미인계로 끌어내서 자리를 비우게 만든 다음 숨어 있던 이스라엘 민병대가 가지고 튀었다고 한다.(...)
[7]
(젊은 독자를 위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역사 / 노아 플룩, 마틴 쇼이블레 지음; 유혜자 옮김, 2016) 참고.
[8]
아랍 측은 이때 자기네가 삽질한건 싹 무시하고 서구 자본주의 세력이 유대인들에게 대규모 무기 지원을 해줬다는 구라를 공식 역사관으로 삼아서 역사 교육과정에 포함시켰다.
[9]
왜 이스라엘의 베르나도테 암살이 배은망덕한 짓이냐면 베르나도테는
홀로코스트에서 유대인들을 구해낸 인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입장에서야 자국 편이라 믿었던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았다고 여겼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