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위기 2021 Israel–Palestine Crisis (2021) המהומות בירושלים الاشتباكات الإسرائيلية الفلسطينية 2021 / مواجهات القدس2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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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 ||
기간 | 2021년 5월 6일 ~ 5월 21일 | ||
장소 |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 ||
원인 | |||
2021년 팔레스타인 총선의 재연기[1] 이스라엘 대법원의 셰이크 자라 아랍인[2] 추방 결정 이스라엘의 다마스쿠스 성문 폐쇄 알 아크사 모스크에서 열린 예루살렘의 날 경축행사에서의 무력 충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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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시위대 하마스 PIJ(팔레스타인 이슬람 지하드 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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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의사 표명국 | |||
미국 유럽 연합[3] 영국 프랑스 독일 체코 헝가리 |
레바논 시리아 이란 중국 튀르키예 [[러시아|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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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 베니 간츠 국방부장관 아비브 코차비 국방참모총장 아미캄 노르킨 공군참모총장 엘리 샤르빗 해군참모총장 |
이스마일 하니예 지도자 살레 알 아루리 군사령관 압드 알 아지즈 아우다 PIJ 지도자 지야드 알 나할라 PIJ 사무총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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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 | |||
피해 규모 | |||
2명 전사 587명 부상 민간인 11명 사망[4] 해외 민간인 2명 사망[5] |
160명 전사[6] 2000여명 부상 민간인 232명 사망[7] |
1. 개요2. 배경3. 원인4. 전개5. 휴전 이후6. 반응
6.1. 각국 반응
7. 여담8. 관련 자료6.1.1.
대한민국6.1.2.
미국6.1.3.
이스라엘6.1.4.
러시아6.1.5.
중국6.1.6.
영국6.1.7.
유럽연합6.1.8.
독일6.1.9.
프랑스6.1.10.
헝가리6.1.11.
체코6.1.12.
일본6.1.13.
하마스6.1.14.
터키6.1.15.
이란6.1.16.
레바논6.1.17.
시리아6.1.18.
바티칸6.1.19.
아일랜드
6.2. 국제기구8.1. 실시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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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속한 이런저런 사건들 가운데 하나로서 2021년 5월 예루살렘의 舊시가지에 있는 알 아크사 모스크에서 일어난 시민들( 유대인 VS 아랍인)의 폭력 시위부터 이스라엘 경찰과 이스라엘 방위군 및 팔레스타인 진영( 아랍인 민중과 하마스)의 전면 대결까지 확대한 무력 충돌이다.2. 배경
자세한 내용은 팔레스타인/역사 문서 참고하십시오.자세한 내용은 이스라엘/역사 문서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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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짧고 간결한 요약 | Vox (2016) |
2.1. 이스라엘의 독립까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의 악감정은 예전부터 누적되어져 왔었다. 로마 제국의 1차 유대 전쟁에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것을 시작으로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에 유대인의 예루살렘 출입이 제한되었는데, 당시 로마 제국은 유대인들을 겨냥하여 해당 지역을 고의로 팔레스티나 속주로 명명하였으며 유대-로마 전쟁 당시에는 유대인들과 사이가 좋지 못했던 근교 나바테아 일대의 아랍인 보조부대를 동원하였다. 4세기에 이르러 로마 황제들이 천주교 교회를 후원한[8] 결과로 팔레스티나 속주 일대의 유대인들이 동로마 제국의 박해를 받아 소수자로 전락한 시점부터[9]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약 1800년간 3개 대륙(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각 지역에서 유대인들은 수시로 박해를 받아왔었다. 특히 19세기 말에는 유대인들이 집중거주한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당시 해당 지역을 영유하던 러시아 제국의 선동으로 수많은 포그롬이 빈발했다. 그나마 반유대주의가 덜했던 서유럽에서조차 드레퓌스 사건을 비롯한 반유대주의 스캔들이 일어나면서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1890년대에 이르러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나라를 재건하자는 시온주의 운동이 일어났다.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예루살렘과 그 주변 지역은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의 결과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및 오스만 제국이 완패하면서 해당국들의 식민지가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의해 독립하거나 분할되었고, 대영제국과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의 아랍어권 지역들을 분할하여 점령한다. 오스만 제국은 1922년 아타튀르크 정권이 마지막 술탄 겸 칼리파를 폐위하는 방식으로 멸망한다. 영국과 프랑스는 국제 연맹을 내세워 영국령 팔레스타인과 프랑스령 시리아를 창건했으며, 오스만 제국의 아랍어권 지역들을 양도하는 조건으로 튀르키예의 전쟁배상금을 탕감했다.
20세기 초반까지는 유럽에서 가나안 일대로 이주하는 유대인 인구보다는 미국으로 이민하는 인구가 훨씬 더 많았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홀로코스트를 겪은 것은 물론, 이슬람주의가 과격화되자 3개 대륙(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유대인들은 곳곳에서 일어나는 반유대주의 열풍( 테러, 폭동, 약탈, 학살)을 피하려고 목숨걸고 영국령 팔레스타인으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시골에서 의기투합한 유대인 민병대들이 곳곳에서 봉기했으며, 연합국의 당단군경(黨團軍警)으로 자원입대한 유대인들도 엄청나게 많았고, 이슈브의 민방위군도 영군의 일원으로 간판을 바꿔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와 남유럽의 곳곳에서 비시 프랑스,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의 침공에 맞서 싸웠다. 유대인 공동체들의 조직적인 후원으로 무려 100만명을 헤아리는 유대인 참전용사들이 갑자기 등장했으니, 1945년에 이르러 영국의 정치인들은 영국령 팔레스타인을 계속 유지하자고 외칠 만한 구실과 명분이 모두 사라졌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럼에도 영국은 아랍인 공동체들의 반발을 고려하여 최종 결정을 연기했으니, 이슈브의 당단군경으로 위장취업한 시온주의자 무장조직들은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모든 관청들에 대하여 테러와 암살을 강행했고, 4년간의 숨바꼭질에서[12] 마침내 완패했다고 판단한 영국은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미래에 대하여 유엔 총회에 공을 떠넘기고, 철수 작전을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랍인 무장조직들의 폭력투쟁(테러, 폭동, 암살, 습격)이 갑자기 늘어났다.[13]
1947년에 이르러 유엔 총회가 유대인 공동체들과 아랍인 공동체들의 생존권 영역을 반으로 나누고 예루살렘은 중립지대로 남겨두라고 요청했다. 유대인 공동체들은 영토와 국가를 얻을 수 있었고, 아랍인 공동체들은 영국으로부터의 해방과 동시에 독립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의 아랍인 나라들은 유엔 총회의 제안에 대해 유럽 열강들의 세력확장으로 보았다. 그로 인해 이듬해인 1948년, 이스라엘 건국전쟁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스라엘 진영이 악전고투 끝에 결국 승전했으니, 아랍인 공동체들에게 할당된 영토의 넓이가 대폭 줄어들어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가지게 되었고, 대세를 관망한 소수민족 공동체들( 베두인/ 드루즈파/ 체르케스인)은 이스라엘 진영에 합류하기 시작한 유대인 공동체들과 오늘날의 연봉협상처럼 협의하면서 계산기를 두들긴 끝에 카멜레온처럼 이스라엘 국민으로 변신했으며, 요르단강 서안 지구는 요르단 왕국이 점령하고, 가자 지구는 이집트 왕국이 점령했으니, 수십년간의 아랍-이스라엘 분쟁을 초래하게 되었다.
2.2. 분쟁의 심화
바야흐로 1967년, 6일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에서 또 아랍 연맹이 패해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제패하면서 무력으로 동서통일하는 이변(?)을 연출했으니, 이스라엘 정부는 새로운 영토를 군정 통치 지역( 요르단강 서안 지구와 가자지구와 시나이 반도의 북서부)과 민정 통치 지역(요르단령 동예루살렘→ 예루살렘 관구, 골란 고원→ 북부 관구, 시나이 반도의 남동부→ 남부 관구)로 재편성했다.시간이 흘러 1978년에는 30년간 아랍연맹과 이스라엘의 싸움으로 지속한 중동전쟁을 끝내기 위해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와 안와르 사다트(이집트 대통령)와 메나헴 베긴(이스라엘 총리)의 정상회담에서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 이뤄졌다. 이리하여 이스라엘은 이집트에게 시나이 반도를 반환했으니, 이것을 관망한 아랍 국가들은 전쟁의 허무함을 느꼈으며, 아랍인 민중들의 매우 큰 반발을 샀다. 결국 이집트 대통령이 암살당하면서 아랍과 이스라엘의 분쟁은 한 풀 꺾이게 되고, 대부분의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과 평화 협정을 맺는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는데, 햄릿의 말처럼(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팔레스타인의 분리독립은 이스라엘 국가의 전복을 뜻하고, 이스라엘 국가의 번영은 팔레스타인의 멸망을 뜻한다고 이스라엘 정치인들이나 팔레스타인 진영이나 동일한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PLO(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는 1960년대에 팔레스타인 영토의 전면 회복을 주장하며 창설했는데, 요르단과 레바논에서 깽판쳤기 때문에 조직의 규모가 매우 컸으니, 이스라엘 본토를 자주 습격했지만, 연전연패의 연속이었다. 이것이 눈엣가시였던 이스라엘은 레바논을 침공하여 1982년 레바논 전쟁[14]을 일으켰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그해 9월, PLO는 이스라엘 방위군의 베이루트 점령과 함께 결국 튀니지로 쫓겨나게 되어 그 세력이 약화된다.
이스라엘 치하에서 머무르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수십년간 민족 분쟁을 겪으면서 외국인 영주권자나 무국적 불법체류자로 차별을 받았으며, 새로운 영토에 재정착해 농림업과 상공업을 일으킨 이스라엘 국민(유대인들과 비유대인들)의 인구도 점점 늘어났다. 참을 수 없던 그들은 결국 1987년부터 6년간 대반란을 일으켰으니, 이스라엘 국민들은 300여명의 사망자가, 팔레스타인 진영에서는 2000여명의 사망자가 나왔지만, 과학기술을 총동원한 이스라엘 정부의 총력전에 힘입어 기어코 진압에 성공하고 말았다.
같은 해에 PLO가 너무 세속적이고 타협적인 태도를 가진다며 이스라엘 국가의 전복을 선동하는 이슬람주의 무장단체 하마스가 가자 지구에서 설립됐다. 이렇게 갈등이 악화된 채로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독일이 통일되고, 소련이 해체되자, 미국과 영국과 프랑스의 압력으로 이스라엘 정부의 최고위층과 PLO 세력의 수뇌부가 화평을 위해서 대면하여 오슬로 협정을 이뤄냈다.
2.3. 오슬로 협정의 실패, 이후 끝나지 않는 대립
오슬로 협정은 이스라엘의 양보를 바탕으로 팔레스타인의 분리독립을 허용하는 첫걸음이었다. 그런데 각 국가의 강경파가 이 협정을 강력히 반대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하마스는 자살 폭탄 테러를 수차례 감행하며 협정을 방해했고, 이스라엘의 반대파들은 협정에 참석한 이츠하크 라빈 총리를 반역자로 규탄했다. 그는 2차 협정을 서명하고 얼마 있지 않아, 시위대의 총격에 맞아 사망했다. 이렇게 두 나라의 분쟁은 계속됐다.2000년에는 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의 정신을 이어받아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을 열었지만, 별 성과 없이 흐지부지 끝나게 되었고, 이 회담이 실패하자 평화는 오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게 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크게 반란을 일으켰고, 5년간 이스라엘 국민들은 1000명, 팔레스타인 진영은 3200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이 사태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팔레스타인과의 평화에 회의적인 시선을 주었고, 그 가치조차도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 인티파다는 분쟁의 성격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으며 그 여파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최근 15년여간은 소규모 전쟁과 폭격이 끊이지 않았다.
자세한 내용은 가자 전쟁 문서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2012년 11월 가자지구 폭격 문서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2014년 7월 가자지구 분쟁 문서 참고하십시오.
3. 원인
충돌이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이스라엘 대법원에서 예루살렘 시가지의 동쪽 방면에[15] 있는 특정 마을( 셰이흐 자라)의 아랍인 주민들을 추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16]그리고 이스라엘의 다마스쿠스 성문 폐쇄, 알 아크사 모스크에서 열린 예루살렘의 날 경축행사에서의 무력 충돌이 불을 지폈다.
4월 26일, 24일의 36발과 25일 하마스의 3발의 로켓포 공격으로 이스라엘 해군은 가자지구 방면에 할당한 어업수역을 15마일에서 9마일로 축소했다. #
또한 2021년 이스라엘 크네세트 선거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사실상 패배하여 연립정부를 구성해야 하는 상황에서, 국민의 불만을 외부의 적으로 돌리려는 네타냐후 정권의 노림수가 있다는 분석도 있다.
4. 전개
4.1. 알 아크사 모스크 충돌 사태
4.1.1. 5월 7일
- 2021년 라마단 마지막 주 금요일인 5월 7일, 알 아크사 모스크에서 예배를 마친 아랍인 수천명이 하마스 깃발을 들고 이스라엘 베냐민 네타냐후 정권이 예루살렘 시가지의 동쪽 방면에 위치한 셰이크 자라 지역에서 아랍인 주민을 내쫓고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는 데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자 이스라엘 군경이 출동하여 시위 진압을 하는 과정에서 알 아크사 모스크 내부까지 진입해 고무탄, 섬광탄, 최루탄 등을 사용한 강경 진압으로 20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 이 사태 이후 하마스는 까삼 로켓 등으로 예루살렘을 공격하였고, 이스라엘 공군이 가자 지구를 보복 폭격하는 등 이스라엘에 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다. #1
4.1.2. 5월 8일
- 라일라툴 까드르(거룩,권능의 밤 또는 코란 선포의 밤) 행사 도중에도 많은 충돌이 있었다. # 이를 두고 더 타임즈 오브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의 시위 세력에 하마스의 지원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 이스라엘 경찰은 폭동 진압복을 입고 섬광탄과 물대포를 사용하여 시위를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80여명이 부상당했다.
4.1.3. 5월 10일
- 예루살렘 성전산 구역에서 팔레스타인 진영과 이스라엘 경찰의 충돌이 일어나 수백 명이 부상했다. #2(상세기록) 충돌은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예루살렘의 날을 앞두고 예루살렘 시내에 모여 수많은 돌과 무기들을 수집하면서 촉발되었는데, 예루살렘 지방경찰청은 즉각 유대인들의 현장 진입을 금지했다.
- 이 충돌로 인해 최소 305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아랍인이 부상을 입었고 이 중 7명은 심각한 상태이다. 이스라엘 경찰은 적어도 12명의 경찰이 부상을 입었다. 7개월 된 아기를 포함한 이스라엘 민간인들이 올드 시티 인근 자동차에서 던진 돌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
- 이스라엘 방위군은 폭력사태의 확대를 우려하여 가자 지구에 증원군을 파견했다.
- 하마스의 대변인인 사미 아부 주흐리는 충돌 사태에 대해 학살이라고 표현했으며, 이스라엘군 증원에 대해서는 무거운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했다. #
4.2. 이스라엘-하마스 무력 충돌: 가자 지구 폭격
자세한 내용은 2021년 이스라엘-하마스 무력충돌 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4.3. 서안 지구
-
2021년 5월 15일, 서안지구에서 이스라엘의 군사행동을 규탄하는 대규모 반이스라엘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대는 화염병과 돌을 던지고 흉기를 휘두르며 이스라엘군과 충돌했다.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시위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최소 11명이 숨지고 100여 명이 부상당했다. #
4.4. 이스라엘- 레바논 국경
- 5월 14일, 레바논과 팔레스타인 시위대가 이스라엘 북부 국경을 뚫고 진입했다가 이스라엘군의 총격을 받고 레바논인 1명이 사망했다. #
4.5. 유엔/ 이집트의 중재 - 휴전
이스라엘-하마스 휴전에 이집트 중재…바이든 압박도 통했다이스라엘-하마스 조건없이 휴전…이집트·유엔 중재
델 파타 엘시시 이집트 대통령은 휴전을 중재하기 위해 각각 안보 대표단 2개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역에 파견하고 이에 팔레스타인이 동의, 시간이 지나 이스라엘이 동의하면서 종전이 이루어졌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집트 정부가 휴전 중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전쟁으로 팔레스타인은 물론이고 이스라엘 또한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고 전했다. #
5. 휴전 이후
휴전 이후에도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향해 도발을 하는 사건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또한 레바논 무장단체인 헤즈볼라와의 교전도 발생했다. 헤즈볼라 문서의 이스라엘과의 교전 문단 참조.5.1. 6월
- 6월 15일 하마스가 이스라엘 측에 방화풍선을 날리자, 이스라엘 공군이 가자지구내 하마스 측 훈련소에 대한 공습을 감행했다. #
- 6월 17일, 이스라엘이 이틀 연속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공습했다. #
5.2. 7월
- 7월 2일, 팔레스타인이 또 방화풍선을 날리자 이스라엘 공군이 다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대한 공습을 단행했다. 이스라엘 방위군의 대변인실은 이날 성명을 통해 "이스라엘 공군의 전투기가 가자지구에 있는 하마스의 무기 생산 시설을 폭격했다"며 "이스라엘의 영토를 겨냥한 방화 풍선에 대한 대응"이라고 설명했다. #
- 이스라엘이 7월 25일 밤(현지시각) 가자지구 남북부에 위치한 하마스의 일부 거점에 공습을 했다. # 이번 폭격은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로 날려보낸 사제폭탄 열기구들에 대한 보복이라고 밝혔다.
- 7월 27일(현지시간)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는 보고서를 통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폭격 중 비군사 목표물에 3차례 공격이 이뤄져 시민 62명이 사망했다”라며 이스라엘이 지난 5월 팔레스타인 하마스와 전쟁을 치를 당시 민간인을 상대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
- 7월 28일(현지시간) 12세 팔레스타인 소년 모하메드 알 알라미가 요르단강 서안 북쪽 베이트 움마르 마을에서 아버지 차를 타고 귀가하던 중 이스라엘군이 쏜 총에 맞고 사망했다. #
5.3. 8월
- 8월 16일(현지시간) 가자지구에서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겨냥해 로켓포가 발사됐다. # 이스라엘군은 이날 가자지구에서 남부 스데롯을 겨냥해 발사된 로켓포탄을 아이언 돔 미사일로 요격했다고 밝혔다.
- 8월 22일, 이스라엘군은 성명을 내고 이날 새벽 가자지구 내 하마스의 무기공장·저장소 4곳을 전투기로 폭격했다고 발표했다. # 이번 공습은 가자지구 경계 지역에서 발생한 폭력 시위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이스라엘 측은 주장했다. 전날부터 이어진 이 시위는 1969년 이스라엘인이 알 아크사 모스크에 불을 지른 사건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시위를 진압하던 20대 요원이 팔레스타인 시위대가 쏜 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고 이스라엘 경찰은 밝혔다. 하마스는 이번 시위에 수천명이 참가했으며 이스라엘의 진압으로 민간인 41명이 다쳤다고 집계했다. 이 중 13세 소년을 포함한 2명이 위중한 상태라고 하마스는 전했다.
5.4. 9월
- 9월 2일(현지시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와 이스라엘 경계선에서 시위가 벌어져 충돌하는 과정에서 26세 팔레스타인 남성 1명이 복부에 총을 맞고 숨졌다. #
- 9월 6일 새벽 북부 베트셰안의 길보아 교도소에서 반이스라엘 투쟁을 이끈 혐의로 수감됐던 죄수 6명이 탈옥했다. # 이중에는 팔레스타인을 이끄는 파타 당의 군사조직 '알아크사 순교여단'의 고위직을 지낸 '자카리아 주베이디'도 포함됐다. 주베이디는 살인미수를 포함한 20여 건의 범죄에 연루돼 재판을 받고 있었다. 나머지 5명 또한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서 반이스라엘 투쟁을 활발히 벌였다. 6명 중 4명이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이들은 모두 한 방에서 있었다.
이날 오전 4시경 인원 점검 때
탈옥 사실을 알게 된
교도소 측은 성인 남자가 통과할 수 있을 만큼 큰 구멍이
화장실
싱크대 밑바닥에 있고, 이 구멍이
교도소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땅굴과 연결된 것을 발견했다. 이들은
감방에 숨겨놓은 녹슨 숟가락으로 수개월 동안 구멍을 판 것으로 알려졌다. 교도소 바깥으로 나온 이들은 자신들을 기다리던 차량을 타고 유유히 사라졌다.
탈옥범 6명 중 3명은 이전에도 길보아 교도소에서 탈옥을 시도한 전력이 있다. 이런 그들을 같은 감방에 지내게 내버려 둔 것 자체가 추가 탈옥의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나 다름없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들의 탈옥 당시 감시탑에 근무하던 직원 또한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 또한 밝혀졌다.
이들의 탈옥사실이 알려지자
요르단강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축하 행진(...)을 벌였다.
하마스 또한 "용맹한 팔레스타인 군인의 승리"라고 환호했다. 6명 중 일부는 이미 국경을 넘어
요르단으로 도망친 것으로 알려졌다.
하마스는 탈옥범들을 지원하기 위해 국경 부근에서 헬륨을 넣은 풍선에 인화성 물질을 달아 이스라엘 쪽으로 날려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이에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인화성 풍선 공격에 대응해 하마스의 로켓 제조 공장과 군사 시설을 공습했다.
#
- 9월 11일, 이스라엘 교도소에서 땅굴을 파서 탈출한 팔레스타인인 6명 중 4명이 이스라엘 경찰에 붙잡혔다. # 또한 이스라엘 경찰은 이날 낸 성명에서 "동 예루살렘의 옛 시가지에서 흉기로 보안 요원을 공격한 팔레스타인인을 사살했다"고 밝혔다. #
이스라엘군 대변인은 성명을 통해 하마스의 로켓 생산 및 비축 시설, 그리고 지하터널 등을 타격했다고 밝혔다. 성명은 "이스라엘은 민간인을 겨냥한 테러 단체의 공격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앞으로도 가자지구 발 도발 행위에 공습으로 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공격은 전날 저녁 이스라엘 남부 스데롯을 겨냥한 하마스의 로켓포 발사에 대한 대응이다. 로켓은 이스라엘의 저고도 방공망인 아이언 돔에 격추됐지만, 경보 발령 이후 대피 과정에서 이스라엘 주민 1명이 다쳤다.
6. 반응
6.1. 각국 반응
현재 세계 곳곳의 시민들은 이스라엘의 강경진압으로 인해 촉발된 사태이므로 이스라엘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중동은 물론 아시아와 유럽, 심지어 미국에서도 이스라엘 규탄시위가 벌어졌다. #2014년 7월 가자 지구 분쟁 당시 미국 외에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폭격을 맹비난했던 것과 다르게, 세계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스라엘 지지 국가와 팔레스타인 지지 국가가 분명하게 나뉘고 있다. 분쟁 전개 자체(하마스의 로켓포 공격 이후 팔레스타인 측의 일방적인 민간인 피해)는 2014년 당시와 큰 차이가 없지만, 당시 이스라엘과 미국을 비판했던 서유럽, 북유럽 국가 민간 측에서 유럽 난민 사태 이후 이슬람과 무슬림에 대한 반감이 증가한데다가, 70~80년대 반이스라엘 보이콧에 앞장섰던 오늘날 아랍에미리트와 사우디아라비아가 2010년대 후반부로 이란을 견제하기 위한 차원에서 이스라엘과 친교를 맺고 비판을 줄이는 상황이라 이스라엘을 도덕적으로 비판한다고 해서 실질적으로 남는게 없다.
6.1.1. 대한민국
- 대한민국 외교부는 13일 대변인 논평을 통해 "최근 이스라엘 및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폭력사태가 확대되고 있음에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 특히 가자지구로부터의 무차별적 로켓 공격과 이에 대한 대응과정에서 아동을 포함한 대규모 민간인 사상자가 지속 발생하고 있는데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 "아울러 정부는 예루살렘 성지에 대한 현상유지가 존중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며, 관련 당사자들이 두 국가 해법에 기초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 항구적 평화 정착을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에 협조해나갈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
- 5월 26일 한동대학교의 채플 시간에 강사로 초청된 이성자 워싱턴인터네셔널갈릴리교회 목사가 맹목적으로 이스라엘의 무력 사용을 옹호하고, 이를 하나님의 섭리라고 칭하는 발언을 해 큰 논란이 되었다. #
6.1.2. 미국
-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의 무력충돌 중단을 요구했지만 "자국 영토로 수천 발 로켓포 공격이 날아든다면 이를 방어할 권리가 있다."며 늘 그렇듯 이스라엘을 지지했다. #
- 미국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여행자제를 권고했다. #
- 그러나 바이든 행정부가 이스라엘에 8000억 원이 넘는 무기를 판매하기로 결정했던 사실이 드러나 미국이 앞에서는 휴전을 지지하면서 실제로는 이스라엘에 무기 지원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논란도 일고 있다. #
6.1.3. 이스라엘
- 이후 네탸냐후 총리는 "적들은 우리를 공격한 행위에 대해 치른 대가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하마스는 예상하지 못했던 충격을 받았고 우리는 그들을 몇 년 전으로 되돌려 놓았다"며 "이스라엘 시민들에게 평온함을 되찾을 때까지 폭격을 계속할 것"이라며 국제사회의 휴전 압박 속에서도 전쟁을 계속할 것이라 밝히고 있다. #
6.1.4. 러시아
- 가자지구 내 러시아 국민과 독립국가연합(CIS) 회원국 국민들을 대피시키라고 명령했다. #
6.1.5. 중국
- 중국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무력 충돌 중단을 촉구했다. 그 중 이스라엘의 자제를 좀 더 강조하였다. #
- 왕이 외교 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은 샤 메흐무드 쿠레이시 파키스탄 외무장관과의 통화에서 “특히 독립국가를 세우려는 팔레스타인의 권리가 지속적으로 침해되며 이스라엘과의 대립이 격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왕이 부장은 “중국은 팔레스타인 국민의 정당한 국가 권리 회복과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을 지지하며 유엔 등 국제기구가 건설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말하며 사실상 미국과 달리 팔레스타인을 지지하였다. #
- 2021년 5월 16일 열린 안보리 회의에서 중국 왕이 부장은 전 회의에서 미국의 성명 발표 반대로 이-팔 분쟁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한 것에, 한 국가의 저지로 안보리가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
6.1.6. 영국
- 영국에서 반유대주의 선동 사태가 일어나자 # 보리스 존슨 총리는 트위터에 "우리 사회에는 반유대주의가 있을 자리가 없다"며 "영국 유대인들은 오늘 우리가 목격한 부끄러운 인종차별을 견뎌낼 필요가 없으며, 나는 그들을 지지한다"는 글을 올렸다. #
6.1.7. 유럽연합
- EU는 이스라엘의 방어권을 인정하며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안보리 회의 이후 휴전을 촉구하는 성명을 내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방어권은 명확히 인정하고 있다. #
6.1.8. 독일
독일 정부 대변인은 EU의 휴전 촉구 성명에서 "양측은 정치적 협상 재개를 위한 여건 조성을 위해 신속한 휴전을 위한 이니셔티브를 지원해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고 밝혔다.
6.1.9. 프랑스
-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정부 수반,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통화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겨냥해 로켓포를 발사한 것을 강력히 규탄하면서도 휴전을 희망한다고 말했다. 아바스 수반에게는 하루빨리 평화를 되찾을 수 있도록 영향력 발휘를 부탁했고, 네타냐후 총리에게는 이스라엘의 방어권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
6.1.10. 헝가리
6.1.11. 체코
6.1.12. 일본
- 일본 공식 정부의 의견은 이슬람권과의 경제 교류에 차질이 생길까봐 하지 않았지만 일본 방위성 차관이 이스라엘과 함께 한다는 트윗을 올렸다. #
6.1.13. 하마스
- 그들은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어떤 휴전 제의도 받은 적이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하마스의 지도부는 유엔, 이집트, 카타르와 휴전을 위한 소통을 지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휴전협정을 제안했고 하마스가 동의했다고 이스라엘 매체가 밝혔다. 그러나 하마스는 이집트의 휴전 제안을 수용했다는 이스라엘 매체의 보도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6.1.14. 터키
-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터키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상대로 감행한 무모한 공격에 가장 강력한 방법으로 대응했다"며 전 세계가 침묵하더라도 터키는 이스라엘의 박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 밝혔다. #
-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팔레스타인 수반과 통화하며 이스라엘의 강경진압을 비판했다. #
6.1.15. 이란
6.1.16. 레바논
6.1.17. 시리아
- 이스라엘에 로켓포 3발을 발사했다. 마찬가지로 인명피해는 없다. #
6.1.18. 바티칸
6.1.19. 아일랜드
- 하원에서 민족주의 좌파 야당 신페인이 주도하여, 이스라엘 서안지구 정착촌을 "합병시도"로 정의하고 그것을 "국제법 위반"으로 비난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아일랜드는 EU에서 유일하게 이스라엘을 비난하는 국가가 되었다. # 하지만 극좌 야당 "이윤보다 사람이 먼저다"가 제안한 주아일랜드 이스라엘 대사 추방안은 연정여당인 피어너 팔, 피너 게일, 녹색당의 적극적 반대로 부결되었다.
6.2. 국제기구
6.2.1. 안전보장이사회
- 5월 16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무력 충돌에 대해 회의를 열기로 했다. 5월 10일과 5월 12일에도 분쟁과 관련된 회의가 열렸으나, 이스라엘이 낀 문제에서 항상 그렇듯 미국의 성명 발표 반대로 성명이 나오지 못했다. #
- 5월 16일 안보리는 첫 공개 회의 후 즉각 휴전을 권고했다. #
7. 여담
대개 중국의 위구르 인권 문제를 비판하는 나라들이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서는 잠잠한 편이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에서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나라들이 위구르 인권 문제에서는 소극적인 성향이 이번에도 다시 한 번 반복되었다. 예외가 생겼다면 에르도안 정권 이후 위구르 인권 문제나 팔레스타인 인권 문제 모두에 목소리를 내는 터키,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집권 이후 중국의
신장 재교육 캠프를 옹호하면서
# 동시에 이스라엘과 친교관계를 늘리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있다.
- 이 사태로 인해 한국-이스라엘간 FTA 협정 체결을 위해 방한했던 가비 아쉬케나지 이스라엘 외교장관이 정의용 외교부 장관과의 회담을 앞두고 급히 귀국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대해 한국측은 이해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YTN 다행히 한-이스라엘간 FTA 협정은 정식으로 타결되었고, 대한민국은 이스라엘과 FTA를 체결한 최초의 아시아 국가가 되었다. YNA 그러나 그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측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비판을 많이 받아 곤욕을 치렀다.
8. 관련 자료
8.1. 실시간 정보
- LiveUAMap에서 제공하는 지도기반 이-팔 분쟁 실시간 뉴스 피드
- 언론사 실시간 뉴스 피드
[1]
2006년 이후 정상대로라면 4년 후인 2010년에 열렸어야 했지만 파타와 하마스 간 분쟁으로 10년 넘게 선거가 연기되었으며, 파타와 하마스는 07년부터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에 따로 정부를 차리고 있다.
[2]
팔레스타인 국민이 아닌
영주권자들도(주로
요르단 왕국의
신민) 존재한다.
[3]
체코와
헝가리가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나머지 국가들은 이스라엘의 자위권만 인정할 뿐 휴전을 촉구하고 있다.
[4]
아랍계 이스라엘인 2명, 인도인 1명, 태국인 2명 포함
[5]
태국 국적자.
[6]
하마스 159명,
헤즈볼라 1명
[7]
가자 지구 213명,
요르단강 서안 지구 17명, 아랍계 이스라엘인 1명, 레바논인 1명
[8]
㉠
갈레리우스의
세르디카 칙령(
신앙의 관용을 보장한 칙령) ㉡
콘스탄티누스 1세의
밀라노 칙령(
신앙의 자유를 공인한 칙령) ㉢
테오도시우스 1세의
테살로니카 칙령(
로마의 국교로 선언한 칙령)
[9]
380년대부터 反유대인 폭동들과 국교화 여론에 대응하여
로마 원로원의
로마법과
로마 황제의
칙령에서
반유대주의
법률들이 많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동로마 제국의 유대인 정책에 대하여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은 사람은 프랑스 역사학자
미레유 하다스 르벨의
히브리 민족을 시군구 도서관과 대학교 도서관에 직접 찾아가 빌려 읽거나
인터넷 서점을 통해서 싼 값에 구입하는 것을 추천한다.
[10]
공교롭게도 유대인 공동체들의 주장은 아타튀르크 정권의 관점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로잔 조약에 반영했으니, 가까운 미래에
체코와
슬로바키아 및
터키와
이스라엘에게 매우 든든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11]
영국은
지방분권형 경찰체제로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치안을 유지했는데, 식민부 민정청의 중앙수사국과 3개의 영지경찰(도시/시골/변경) 및
영군
헌병대와 이슈브가 운영하는 3개의 정착촌경찰(도시/시골/변경)이 각각 따로 존재했다. 오늘날의
이스라엘 경찰은 이슈브 정착촌경찰과
유대인
레지스탕스와
외국
군경
경력자들을 밑천으로 삼아서 창설한 관청이니, 100년 전의 영지경찰과 전혀 무관하며,
일손이 부족해
임시로 고용한
영지경찰 부역자는
이념국가를 지향한 건국영웅들이 보기에는 미래의
제5열로 의심받아
해마다 자격심사로 대부분을 해고했다.
[12]
이슈브 산하의 시온주의자 무장조직들 VS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중앙수사국과 영지경찰+
영군의
야전군과
헌병대+
MI5
[13]
트란스요르단(이슬람교도 자치정부)와 이슈브(유대고도 자치정부)는
요르단강 서쪽 방면의 아랍인 공동체들에 대하여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으니,
아민 알 후세이니를 비롯한
이슬람주의자 아랍인들이 아랍인 공동체를
감언이설로 선동했고, 영국이 차례로 철수하자,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면서
활빈당처럼 신나게 날뛰었다. 첩보를 입수한 이슈브의 수뇌부는
로잔 조약으로
불온
분자
들을 뿌리뽑은
터키의
경험과
체코의
경험을 철저하게 분석하면서
폴란드의
경험과
핀란드의
경험도 신중하게 연구했으며, 영국의 완전철수 직전에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전역에서
비유대인들의 완전소탕을 다짐했다. 곧이어
이스라엘 건국전쟁이 발발하자, 로잔 조약의 수혜국을 자처한
터키와 체코가
이스라엘 진영과 요르단 왕국을 협찬했다.
[14]
레바논 전쟁의 파급력과 규모가 상당히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훗날
9.11 테러를 일으킨
오사마 빈라덴이 어렸을 때 헬기가 레바논의 고층빌딩을 공습하는 것을 보고 테러를 결심하게 됐다고 한다.
[15]
예전에는 요르단령 동예루살렘이었고, 오늘날에는 이스라엘 치하에서 서예루살렘 지방의 부도심으로 재구성한 예루살렘 구시가지를 가리킨다.
[16]
지도를 잘 보면 이스라엘 정부청사들(내무부, 법무부, 공안부, 경찰청, 과학기술부, 건설교통부 등등)이 근처에 있으며,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의
인문계 캠퍼스(
하르 하초핌 캠퍼스)와
연결되는
대중교통
네트워크의 중요한 거점이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폭동과 테러가 발생할 확률이 매우 높으며, 실제로 반이스라엘 폭동과 범죄가 자주 일어나고 폭탄테러 사건까지 가끔 일어나서
공안부의 보통경찰과 교통경찰과 국경경찰 및
국방부의 육해공군 헌병대와
신 베트가 철두철미하게 감시하고 있다. 다만 그렇다고 이스라엘 국민들의 안전을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보기는 그런 것이 이스라엘 정부가 아랍인 공동체들을 몰아내는 수작으로 예루살렘
수도권의 외곽을 확장하거나
오슬로 협정에 따라 팔레스타인의 영역으로 예정한 공간까지 이스라엘 국민들이 거주하는
신도시와
뉴타운을 완공한 다음에 안전을 핑계로
공권력을 동원해 그 지역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을 밀어내는 행위를 상습적으로 일삼아서 팔레스타인인들의 분노가 커진 나머지 범죄와 테러가 증가한 것이니,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이 초래한
자업자득이라고도 할 수 있다.
[17]
다만 한국의 4단계 여행경보인
여행금지와 다르게 방문 한다고 법적 처벌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