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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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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위기
2021 Israel–Palestine Crisis
(2021) המהומות בירושלים
الاشتباكات الإسرائيلية الفلسطينية 2021 /
مواجهات القدس2021
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기간 2021년 5월 6일 ~ 5월 21일
장소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원인
2021년 팔레스타인 총선의 재연기[1]
이스라엘 대법원의 셰이크 자라 아랍인[2] 추방 결정
이스라엘의 다마스쿠스 성문 폐쇄
알 아크사 모스크에서 열린 예루살렘의 날 경축행사에서의 무력 충돌
교전국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이스라엘 파일:팔레스타인 국기.svg 팔레스타인 시위대
파일:하마스 기.svg 하마스
PIJ(팔레스타인 이슬람 지하드 운동)
지지 의사 표명국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파일:유럽 연합 깃발.svg 유럽 연합[3]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파일:프랑스 국기.svg 프랑스
파일:독일 국기.svg 독일
파일:체코 국기.svg 체코
파일:헝가리 국기.svg 헝가리
파일:레바논 국기.svg 레바논
파일:시리아 국기.svg 시리아
파일:이란 국기.svg 이란
파일:중국 국기.svg 중국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튀르키예

[[러시아|]][[틀:국기|]][[틀:국기|]]
지휘관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베니 간츠 국방부장관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아비브 코차비 국방참모총장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아미캄 노르킨 공군참모총장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엘리 샤르빗 해군참모총장
파일:하마스 기.svg 이스마일 하니예 지도자
파일:하마스 기.svg 살레 알 아루리 군사령관
압드 알 아지즈 아우다 PIJ 지도자
지야드 알 나할라 PIJ 사무총장
영향
피해 규모
2명 전사
587명 부상
민간인 11명 사망[4]
해외 민간인 2명 사망[5]
160명 전사[6]
2000여명 부상
민간인 232명 사망[7]

1. 개요2. 배경
2.1. 이스라엘의 독립까지2.2. 분쟁의 심화2.3. 오슬로 협정의 실패, 이후 끝나지 않는 대립
3. 원인4. 전개
4.1. 알 아크사 모스크 충돌 사태
4.1.1. 5월 7일4.1.2. 5월 8일4.1.3. 5월 10일
4.2. 이스라엘-하마스 무력 충돌: 가자 지구 폭격4.3. 서안 지구4.4. 이스라엘- 레바논 국경4.5. 유엔/ 이집트의 중재 - 휴전
5. 휴전 이후
5.1. 6월5.2. 7월5.3. 8월5.4. 9월
6. 반응7. 여담8. 관련 자료
8.1. 실시간 정보

[clearfix]

1. 개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속한 이런저런 사건들 가운데 하나로서 2021년 5월 예루살렘의 舊시가지에 있는 알 아크사 모스크에서 일어난 시민들( 유대인 VS 아랍인)의 폭력 시위부터 이스라엘 경찰 이스라엘 방위군 팔레스타인 진영( 아랍인 민중 하마스)의 전면 대결까지 확대한 무력 충돌이다.

2.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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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짧고 간결한 요약 | Vox (2016)

2.1. 이스라엘의 독립까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의 악감정은 예전부터 누적되어져 왔었다. 로마 제국의 1차 유대 전쟁에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것을 시작으로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에 유대인의 예루살렘 출입이 제한되었는데, 당시 로마 제국은 유대인들을 겨냥하여 해당 지역을 고의로 팔레스티나 속주로 명명하였으며 유대-로마 전쟁 당시에는 유대인들과 사이가 좋지 못했던 근교 나바테아 일대의 아랍인 보조부대를 동원하였다. 4세기에 이르러 로마 황제들이 천주교 교회를 후원한[8] 결과로 팔레스티나 속주 일대의 유대인들이 동로마 제국의 박해를 받아 소수자로 전락한 시점부터[9]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약 1800년간 3개 대륙(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각 지역에서 유대인들은 수시로 박해를 받아왔었다. 특히 19세기 말에는 유대인들이 집중거주한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당시 해당 지역을 영유하던 러시아 제국의 선동으로 수많은 포그롬이 빈발했다. 그나마 반유대주의가 덜했던 서유럽에서조차 드레퓌스 사건을 비롯한 반유대주의 스캔들이 일어나면서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1890년대에 이르러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나라를 재건하자는 시온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예루살렘과 그 주변 지역은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의 결과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및 오스만 제국이 완패하면서 해당국들의 식민지가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의해 독립하거나 분할되었고, 대영제국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의 아랍어권 지역들을 분할하여 점령한다. 오스만 제국은 1922년 아타튀르크 정권이 마지막 술탄 칼리파를 폐위하는 방식으로 멸망한다. 영국과 프랑스는 국제 연맹을 내세워 영국령 팔레스타인 프랑스령 시리아를 창건했으며, 오스만 제국의 아랍어권 지역들을 양도하는 조건으로 튀르키예 전쟁배상금을 탕감했다.
한편 반유대주의 선동 산불처럼 늘어나는 3개 지역( 동유럽+ 서아시아+ 북아프리카)의 유대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탄지마트에 편승하면서 시온주의를 실현하려고 예루살렘 텔아비브 하이파 나사렛에 재정착하면서 유대인 공동체들을 재건하기 시작했는데, 영국이 아랍인들에게 오스만 제국의 후방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대신에 아랍인들의 독립국 건설을 지지한다고 후세인-맥마흔 서한으로 약속했으나, 영국은 이것을 지킬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고, 그 뒤에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그 일대를 나눠먹는다는 사이크스-피코 협정과 유대 민족의 주권국가 건국을 지지한다는 벨푸어 선언을 발표했다. 아랍인 공동체들의 입장에서는 피는 자기들이 흘렸는데 그걸 낼름 줏어먹으려는 도둑놈으로 보이겠지만, 오스만 제국 시절부터 존재한 유대인 공동체들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대영주인 영국과 프랑스 및 오스만 제국의 자산을 인수한 튀르키예에게 허락을 받았고, 자기네들도 제1차 세계 대전 참전해서 많은 피를 흘렸으니 당연한 몫이라고 반박했으며, 아랍인들은 하루빨리 아라비아 반도(아랍인 공동체들의 고향)에 돌아가라고 주장했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 및 유대인 공동체들과 아랍인 공동체들은 1919년 1월의 파이살-바이츠만 합의 1920년 4월의 산레모 결의 1921년의 카이로 회의에 참석하면서 갑론을박으로 논쟁하다가 이슈브(유대교도 자치정부)와 레바논(크리스트교도 자치정부)과 트란스요르단( 이슬람교도 자치정부)을 출범하는 것으로 매우 어렵게 타협했다.[10] 영국이 오스만 제국을 내쫓고 가나안을 다스리기 시작하자, 영국 정부의 허락과 함께 훨씬 더 많은 유대인들이 내륙의 황무지에 재정착하면서 민족 분쟁이 점점 늘었다. 영국령 팔레스타인을 다스리는 영국 식민부의 민정청도 본국과 협의하여 이민자를 제한하였고, 현지의 아랍인들과 아르메니아인들이 반발하면서 테러 폭동이 자주 일어났으니, 이슈브를 구성하는 유대인 공동체들은 정착촌경찰 민방위군을 창설하여 아랍인들의 습격에 맞서 싸웠으며, 소수민족 공동체들( 베두인/ 드루즈파/ 체르케스인)과 합작하면서 상호협력했다.[11]

20세기 초반까지는 유럽에서 가나안 일대로 이주하는 유대인 인구보다는 미국으로 이민하는 인구가 훨씬 더 많았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홀로코스트를 겪은 것은 물론, 이슬람주의가 과격화되자 3개 대륙(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유대인들은 곳곳에서 일어나는 반유대주의 열풍( 테러, 폭동, 약탈, 학살)을 피하려고 목숨걸고 영국령 팔레스타인으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시골에서 의기투합한 유대인 민병대들이 곳곳에서 봉기했으며, 연합국의 당단군경(黨團軍警)으로 자원입대한 유대인들도 엄청나게 많았고, 이슈브의 민방위군 영군의 일원으로 간판을 바꿔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와 남유럽의 곳곳에서 비시 프랑스,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의 침공에 맞서 싸웠다. 유대인 공동체들의 조직적인 후원으로 무려 100만명을 헤아리는 유대인 참전용사들이 갑자기 등장했으니, 1945년에 이르러 영국의 정치인들은 영국령 팔레스타인을 계속 유지하자고 외칠 만한 구실과 명분이 모두 사라졌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럼에도 영국은 아랍인 공동체들의 반발을 고려하여 최종 결정을 연기했으니, 이슈브의 당단군경으로 위장취업한 시온주의자 무장조직들은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모든 관청들에 대하여 테러와 암살을 강행했고, 4년간의 숨바꼭질에서[12] 마침내 완패했다고 판단한 영국은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미래에 대하여 유엔 총회에 공을 떠넘기고, 철수 작전을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랍인 무장조직들의 폭력투쟁(테러, 폭동, 암살, 습격)이 갑자기 늘어났다.[13]

1947년에 이르러 유엔 총회가 유대인 공동체들과 아랍인 공동체들의 생존권 영역을 반으로 나누고 예루살렘은 중립지대로 남겨두라고 요청했다. 유대인 공동체들은 영토와 국가를 얻을 수 있었고, 아랍인 공동체들은 영국으로부터의 해방과 동시에 독립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의 아랍인 나라들은 유엔 총회의 제안에 대해 유럽 열강들의 세력확장으로 보았다. 그로 인해 이듬해인 1948년, 이스라엘 건국전쟁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스라엘 진영이 악전고투 끝에 결국 승전했으니, 아랍인 공동체들에게 할당된 영토의 넓이가 대폭 줄어들어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가지게 되었고, 대세를 관망한 소수민족 공동체들( 베두인/ 드루즈파/ 체르케스인)은 이스라엘 진영에 합류하기 시작한 유대인 공동체들과 오늘날의 연봉협상처럼 협의하면서 계산기를 두들긴 끝에 카멜레온처럼 이스라엘 국민으로 변신했으며, 요르단강 서안 지구 요르단 왕국이 점령하고, 가자 지구 이집트 왕국이 점령했으니, 수십년간의 아랍-이스라엘 분쟁을 초래하게 되었다.

2.2. 분쟁의 심화

바야흐로 1967년, 6일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에서 또 아랍 연맹이 패해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제패하면서 무력으로 동서통일하는 이변(?)을 연출했으니, 이스라엘 정부는 새로운 영토를 군정 통치 지역( 요르단강 서안 지구 가자지구 시나이 반도의 북서부)과 민정 통치 지역(요르단령 동예루살렘→ 예루살렘 관구, 골란 고원→ 북부 관구, 시나이 반도의 남동부→ 남부 관구)로 재편성했다.

시간이 흘러 1978년에는 30년간 아랍연맹과 이스라엘의 싸움으로 지속한 중동전쟁을 끝내기 위해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와 안와르 사다트(이집트 대통령)와 메나헴 베긴(이스라엘 총리)의 정상회담에서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 이뤄졌다. 이리하여 이스라엘은 이집트에게 시나이 반도를 반환했으니, 이것을 관망한 아랍 국가들은 전쟁의 허무함을 느꼈으며, 아랍인 민중들의 매우 큰 반발을 샀다. 결국 이집트 대통령이 암살당하면서 아랍과 이스라엘의 분쟁은 한 풀 꺾이게 되고, 대부분의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과 평화 협정을 맺는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는데, 햄릿의 말처럼(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팔레스타인의 분리독립은 이스라엘 국가의 전복을 뜻하고, 이스라엘 국가의 번영은 팔레스타인의 멸망을 뜻한다고 이스라엘 정치인들이나 팔레스타인 진영이나 동일한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PLO(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는 1960년대에 팔레스타인 영토의 전면 회복을 주장하며 창설했는데, 요르단 레바논에서 깽판쳤기 때문에 조직의 규모가 매우 컸으니, 이스라엘 본토를 자주 습격했지만, 연전연패의 연속이었다. 이것이 눈엣가시였던 이스라엘은 레바논을 침공하여 1982년 레바논 전쟁[14]을 일으켰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그해 9월, PLO는 이스라엘 방위군의 베이루트 점령과 함께 결국 튀니지로 쫓겨나게 되어 그 세력이 약화된다.

이스라엘 치하에서 머무르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수십년간 민족 분쟁을 겪으면서 외국인 영주권자 무국적 불법체류자로 차별을 받았으며, 새로운 영토에 재정착해 농림업과 상공업을 일으킨 이스라엘 국민(유대인들과 비유대인들)의 인구도 점점 늘어났다. 참을 수 없던 그들은 결국 1987년부터 6년간 대반란을 일으켰으니, 이스라엘 국민들은 300여명의 사망자가, 팔레스타인 진영에서는 2000여명의 사망자가 나왔지만, 과학기술을 총동원한 이스라엘 정부의 총력전에 힘입어 기어코 진압에 성공하고 말았다.

같은 해에 PLO가 너무 세속적이고 타협적인 태도를 가진다며 이스라엘 국가의 전복을 선동하는 이슬람주의 무장단체 하마스가 가자 지구에서 설립됐다. 이렇게 갈등이 악화된 채로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독일이 통일되고, 소련이 해체되자, 미국과 영국과 프랑스의 압력으로 이스라엘 정부의 최고위층과 PLO 세력의 수뇌부가 화평을 위해서 대면하여 오슬로 협정을 이뤄냈다.

2.3. 오슬로 협정의 실패, 이후 끝나지 않는 대립

오슬로 협정은 이스라엘의 양보를 바탕으로 팔레스타인의 분리독립을 허용하는 첫걸음이었다. 그런데 각 국가의 강경파가 이 협정을 강력히 반대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하마스는 자살 폭탄 테러를 수차례 감행하며 협정을 방해했고, 이스라엘의 반대파들은 협정에 참석한 이츠하크 라빈 총리를 반역자로 규탄했다. 그는 2차 협정을 서명하고 얼마 있지 않아, 시위대의 총격에 맞아 사망했다. 이렇게 두 나라의 분쟁은 계속됐다.

2000년에는 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의 정신을 이어받아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을 열었지만, 별 성과 없이 흐지부지 끝나게 되었고, 이 회담이 실패하자 평화는 오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게 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크게 반란을 일으켰고, 5년간 이스라엘 국민들은 1000명, 팔레스타인 진영은 3200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이 사태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팔레스타인과의 평화에 회의적인 시선을 주었고, 그 가치조차도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 인티파다는 분쟁의 성격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으며 그 여파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최근 15년여간은 소규모 전쟁과 폭격이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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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원인

충돌이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이스라엘 대법원에서 예루살렘 시가지의 동쪽 방면에[15] 있는 특정 마을( 셰이흐 자라)의 아랍인 주민들을 추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16]

그리고 이스라엘의 다마스쿠스 성문 폐쇄, 알 아크사 모스크에서 열린 예루살렘의 날 경축행사에서의 무력 충돌이 불을 지폈다.

4월 26일, 24일의 36발과 25일 하마스의 3발의 로켓포 공격으로 이스라엘 해군은 가자지구 방면에 할당한 어업수역을 15마일에서 9마일로 축소했다. #

또한 2021년 이스라엘 크네세트 선거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사실상 패배하여 연립정부를 구성해야 하는 상황에서, 국민의 불만을 외부의 적으로 돌리려는 네타냐후 정권의 노림수가 있다는 분석도 있다.

4. 전개

4.1. 알 아크사 모스크 충돌 사태

4.1.1. 5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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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 5월 8일

4.1.3. 5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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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이스라엘-하마스 무력 충돌: 가자 지구 폭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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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서안 지구

4.4. 이스라엘- 레바논 국경

4.5. 유엔/ 이집트의 중재 - 휴전

이스라엘-하마스 휴전에 이집트 중재…바이든 압박도 통했다
이스라엘-하마스 조건없이 휴전…이집트·유엔 중재

델 파타 엘시시 이집트 대통령은 휴전을 중재하기 위해 각각 안보 대표단 2개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역에 파견하고 이에 팔레스타인이 동의, 시간이 지나 이스라엘이 동의하면서 종전이 이루어졌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집트 정부가 휴전 중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전쟁으로 팔레스타인은 물론이고 이스라엘 또한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고 전했다. #

5. 휴전 이후

휴전 이후에도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향해 도발을 하는 사건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또한 레바논 무장단체인 헤즈볼라와의 교전도 발생했다. 헤즈볼라 문서의 이스라엘과의 교전 문단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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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6월

5.2. 7월

5.3. 8월

5.4. 9월

이날 오전 4시경 인원 점검 때 탈옥 사실을 알게 된 교도소 측은 성인 남자가 통과할 수 있을 만큼 큰 구멍이 화장실 싱크대 밑바닥에 있고, 이 구멍이 교도소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땅굴과 연결된 것을 발견했다. 이들은 감방에 숨겨놓은 녹슨 숟가락으로 수개월 동안 구멍을 판 것으로 알려졌다. 교도소 바깥으로 나온 이들은 자신들을 기다리던 차량을 타고 유유히 사라졌다.
탈옥범 6명 중 3명은 이전에도 길보아 교도소에서 탈옥을 시도한 전력이 있다. 이런 그들을 같은 감방에 지내게 내버려 둔 것 자체가 추가 탈옥의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나 다름없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들의 탈옥 당시 감시탑에 근무하던 직원 또한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 또한 밝혀졌다.
이들의 탈옥사실이 알려지자 요르단강 서안 지구 가자 지구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축하 행진(...)을 벌였다. 하마스 또한 "용맹한 팔레스타인 군인의 승리"라고 환호했다. 6명 중 일부는 이미 국경을 넘어 요르단으로 도망친 것으로 알려졌다.
하마스는 탈옥범들을 지원하기 위해 국경 부근에서 헬륨을 넣은 풍선에 인화성 물질을 달아 이스라엘 쪽으로 날려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이에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인화성 풍선 공격에 대응해 하마스의 로켓 제조 공장과 군사 시설을 공습했다. #
이스라엘군 대변인은 성명을 통해 하마스의 로켓 생산 및 비축 시설, 그리고 지하터널 등을 타격했다고 밝혔다. 성명은 "이스라엘은 민간인을 겨냥한 테러 단체의 공격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앞으로도 가자지구 발 도발 행위에 공습으로 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공격은 전날 저녁 이스라엘 남부 스데롯을 겨냥한 하마스의 로켓포 발사에 대한 대응이다. 로켓은 이스라엘의 저고도 방공망인 아이언 돔에 격추됐지만, 경보 발령 이후 대피 과정에서 이스라엘 주민 1명이 다쳤다.

6. 반응

6.1. 각국 반응

현재 세계 곳곳의 시민들은 이스라엘의 강경진압으로 인해 촉발된 사태이므로 이스라엘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중동은 물론 아시아 유럽, 심지어 미국에서도 이스라엘 규탄시위가 벌어졌다. #

2014년 7월 가자 지구 분쟁 당시 미국 외에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폭격을 맹비난했던 것과 다르게, 세계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스라엘 지지 국가와 팔레스타인 지지 국가가 분명하게 나뉘고 있다. 분쟁 전개 자체(하마스의 로켓포 공격 이후 팔레스타인 측의 일방적인 민간인 피해)는 2014년 당시와 큰 차이가 없지만, 당시 이스라엘과 미국을 비판했던 서유럽, 북유럽 국가 민간 측에서 유럽 난민 사태 이후 이슬람과 무슬림에 대한 반감이 증가한데다가, 70~80년대 반이스라엘 보이콧에 앞장섰던 오늘날 아랍에미리트와 사우디아라비아가 2010년대 후반부로 이란을 견제하기 위한 차원에서 이스라엘과 친교를 맺고 비판을 줄이는 상황이라 이스라엘을 도덕적으로 비판한다고 해서 실질적으로 남는게 없다.

파일:187577909_2933210520291869_8912472228217264733_n.jpg

6.1.1.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6.1.2.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6.1.3.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이스라엘

6.1.4. 파일:러시아 국기.svg 러시아

6.1.5. 파일:중국 국기.svg 중국

6.1.6.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6.1.7. 파일:유럽 연합 깃발.svg 유럽연합

6.1.8. 파일:독일 국기.svg 독일

독일 정부 대변인은 EU의 휴전 촉구 성명에서 "양측은 정치적 협상 재개를 위한 여건 조성을 위해 신속한 휴전을 위한 이니셔티브를 지원해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고 밝혔다.
또한 메르켈 총리는 요르단 압둘라 2세 국왕과 화상통화를 하며 중동의 무력충돌이 고조되고 있는 것과 관련해 휴전을 위한 노력을 지원하기로 합의했다고 독일 정부 대변인이 밝혔다.

6.1.9. 파일:프랑스 국기.svg 프랑스

또한 마크롱 대통령은 파리에서 압델 파타 엘 시시 이집트 대통령과 만나 휴전을 위한 중재 방안 등을 논의했다. #

6.1.10. 파일:헝가리 국기.svg 헝가리

6.1.11. 파일:체코 국기.svg 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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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12.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6.1.13. 파일:하마스 문장.svg 하마스

6.1.14.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터키

6.1.15. 파일:이란 국기.svg 이란

6.1.16. 파일:레바논 국기.svg 레바논

6.1.17. 파일:시리아 국기.svg 시리아

6.1.18. 파일:바티칸 국기.svg 바티칸

6.1.19.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아일랜드

6.2. 국제기구

6.2.1. 안전보장이사회

7. 여담

파일:From UN Human Rights Council.png
대개 중국의 위구르 인권 문제를 비판하는 나라들이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서는 잠잠한 편이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에서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나라들이 위구르 인권 문제에서는 소극적인 성향이 이번에도 다시 한 번 반복되었다. 예외가 생겼다면 에르도안 정권 이후 위구르 인권 문제나 팔레스타인 인권 문제 모두에 목소리를 내는 터키,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집권 이후 중국의 신장 재교육 캠프를 옹호하면서 # 동시에 이스라엘과 친교관계를 늘리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있다.
중국의 신장 재교육 캠프를 비판하던 미국과 체코, 프랑스가 # 이번에는 이스라엘 지지 쪽으로 기울었고 반면 중국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지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스라엘과 중국을 동시에 비난하는 세력은 매우 드물어 아일랜드 신페인 정도밖에 없다.

8. 관련 자료

8.1. 실시간 정보



[1] 2006년 이후 정상대로라면 4년 후인 2010년에 열렸어야 했지만 파타와 하마스 간 분쟁으로 10년 넘게 선거가 연기되었으며, 파타와 하마스는 07년부터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에 따로 정부를 차리고 있다. [2] 팔레스타인 국민이 아닌 영주권자들도(주로 요르단 왕국 신민) 존재한다. [3] 체코 헝가리가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나머지 국가들은 이스라엘의 자위권만 인정할 뿐 휴전을 촉구하고 있다. [4] 아랍계 이스라엘인 2명, 인도인 1명, 태국인 2명 포함 [5] 태국 국적자. [6] 하마스 159명, 헤즈볼라 1명 [7] 가자 지구 213명, 요르단강 서안 지구 17명, 아랍계 이스라엘인 1명, 레바논인 1명 [8] 갈레리우스 세르디카 칙령( 신앙의 관용을 보장한 칙령) ㉡ 콘스탄티누스 1세 밀라노 칙령( 신앙의 자유를 공인한 칙령) ㉢ 테오도시우스 1세 테살로니카 칙령( 로마의 국교로 선언한 칙령) [9] 380년대부터 反유대인 폭동들과 국교화 여론에 대응하여 로마 원로원 로마법 로마 황제 칙령에서 반유대주의 법률들이 많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동로마 제국의 유대인 정책에 대하여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은 사람은 프랑스 역사학자 미레유 하다스 르벨 히브리 민족을 시군구 도서관과 대학교 도서관에 직접 찾아가 빌려 읽거나 인터넷 서점을 통해서 싼 값에 구입하는 것을 추천한다. [10] 공교롭게도 유대인 공동체들의 주장은 아타튀르크 정권의 관점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로잔 조약에 반영했으니, 가까운 미래에 체코 슬로바키아 터키 이스라엘에게 매우 든든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11] 영국은 지방분권형 경찰체제로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치안을 유지했는데, 식민부 민정청의 중앙수사국과 3개의 영지경찰(도시/시골/변경) 및 영군 헌병대와 이슈브가 운영하는 3개의 정착촌경찰(도시/시골/변경)이 각각 따로 존재했다. 오늘날의 이스라엘 경찰은 이슈브 정착촌경찰과 유대인 레지스탕스 외국 군경 경력자들을 밑천으로 삼아서 창설한 관청이니, 100년 전의 영지경찰과 전혀 무관하며, 일손이 부족해 임시로 고용한 영지경찰 부역자는 이념국가를 지향한 건국영웅들이 보기에는 미래의 제5열로 의심받아 해마다 자격심사로 대부분을 해고했다. [12] 이슈브 산하의 시온주의자 무장조직들 VS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중앙수사국과 영지경찰+ 영군 야전군 헌병대+ MI5 [13] 트란스요르단(이슬람교도 자치정부)와 이슈브(유대고도 자치정부)는 요르단강 서쪽 방면의 아랍인 공동체들에 대하여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으니, 아민 알 후세이니를 비롯한 이슬람주의자 아랍인들이 아랍인 공동체를 감언이설로 선동했고, 영국이 차례로 철수하자,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면서 활빈당처럼 신나게 날뛰었다. 첩보를 입수한 이슈브의 수뇌부는 로잔 조약으로 불온 분자 들을 뿌리뽑은 터키의 경험과 체코의 경험을 철저하게 분석하면서 폴란드의 경험과 핀란드의 경험도 신중하게 연구했으며, 영국의 완전철수 직전에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전역에서 비유대인들의 완전소탕을 다짐했다. 곧이어 이스라엘 건국전쟁이 발발하자, 로잔 조약의 수혜국을 자처한 터키와 체코가 이스라엘 진영과 요르단 왕국을 협찬했다. [14] 레바논 전쟁의 파급력과 규모가 상당히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훗날 9.11 테러를 일으킨 오사마 빈라덴이 어렸을 때 헬기가 레바논의 고층빌딩을 공습하는 것을 보고 테러를 결심하게 됐다고 한다. [15] 예전에는 요르단령 동예루살렘이었고, 오늘날에는 이스라엘 치하에서 서예루살렘 지방의 부도심으로 재구성한 예루살렘 구시가지를 가리킨다. [16] 지도를 잘 보면 이스라엘 정부청사들(내무부, 법무부, 공안부, 경찰청, 과학기술부, 건설교통부 등등)이 근처에 있으며,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 인문계 캠퍼스( 하르 하초핌 캠퍼스)와 연결되는 대중교통 네트워크의 중요한 거점이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폭동과 테러가 발생할 확률이 매우 높으며, 실제로 반이스라엘 폭동과 범죄가 자주 일어나고 폭탄테러 사건까지 가끔 일어나서 공안부의 보통경찰과 교통경찰과 국경경찰 국방부의 육해공군 헌병대 신 베트가 철두철미하게 감시하고 있다. 다만 그렇다고 이스라엘 국민들의 안전을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보기는 그런 것이 이스라엘 정부가 아랍인 공동체들을 몰아내는 수작으로 예루살렘 수도권의 외곽을 확장하거나 오슬로 협정에 따라 팔레스타인의 영역으로 예정한 공간까지 이스라엘 국민들이 거주하는 신도시 뉴타운을 완공한 다음에 안전을 핑계로 공권력을 동원해 그 지역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을 밀어내는 행위를 상습적으로 일삼아서 팔레스타인인들의 분노가 커진 나머지 범죄와 테러가 증가한 것이니,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이 초래한 자업자득이라고도 할 수 있다. [17] 다만 한국의 4단계 여행경보인 여행금지와 다르게 방문 한다고 법적 처벌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