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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36:26

민주당 구파와 신파

파일:55년 민주당 지도부.jpg
1955년 민주당을 대표하던 정치인들.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부터 신익희(구파), 장면(신파), 조병옥(구파), 박순천(신파).
파일:윤보선-장면.jpg
왼쪽부터 제2공화국 당시 구파를 대표하는 윤보선 대통령과 신파를 대표하는 장면 국무총리.

1. 개요2. 상세
2.1. 구파2.2. 신파
3. 계파 간 차이와 갈등

1. 개요


1955년 창당된 민주당의 대표적인 두 계파이다.

2. 상세

2.1. 구파

구파 신익희, 조병옥, 김도연, 김준연, 윤보선, 유진산, 윤제술, 백남훈, 허정, 김영삼

민주당 구파는 구(舊) 한국민주당 - 민주국민당 출신 인사들이다. 호남 기호 지방 중심의 토착 지주 유산 계급 출신 정치인 위주이다. 일제강점기부터 당대의 정치적 엘리트로서 민족 지도자적 위치를 차지해온 그룹이다. 1955년 사망해 민주당 창당에 합류하지는 못했지만, 한국민주당과 민주국민당에서 활동한 김성수는 대표적인 소위 '민주당 구파 스타일' 정치인이었다.

구파는 구파동지회라는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였다. 이후, 분당파협상파로 나뉘어 대립하다가 분당파는 신민당을 창당하였고, 협상파는 신파로 넘어가 합작파가 되었다.

2.2. 신파

신파 장면, 곽상훈, 현석호, 오위영, 박순천, 이철승, 정일형, 한근조, 김영선, 김대중

민주당 신파는 구파보다 연령대가 젊은 비주류 신진 소장파 세력이다. 장면을 위시로 하는 평안도 출신 흥사단 계열의 인사들과 1952년 부산정치파동 이후 합류한 자유당 탈당파[1], 미군정 이승만 정부에서 중용된 관료, 법조인 등 자수성가 테크노크라트들의 그룹이다.

신파는 민주당이라는 이름으로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였다. 그중에서도 노장파, 소장파, 합작파로 분열되어 있었다. 노장파는 신파 내에서 정치 경력이 길고 영향력이 강했던 이들이다. 이들은 이승만 정부에서도 요직을 거쳤고 그 이전에 일제 시대에 지식인으로 유명하던 이들이었다. 합작파는 본래 구파동지회에 있던 이들이었으나 신민당 창당을 반대하여 민주당에 잔류한 이들로 이후 신파계에 흡수된다. 소장파는 제3대 총선, 제4대 총선 즈음에 영입된 이들로 기존 정치계와 연줄이 닿지 않았기 때문에 선진 정치와 부패 일소를 주장하며 노장파 세력을 공격했다. 소장파 의원 32명이 신풍회를 조직하였고, 합작파는 정안회를 조직하였다. 노장파에서도 비주류로 구성된 중도파는 신풍회와 협력하려 했다.

3. 계파 간 차이와 갈등

구파와 신파는 교육 수준, 반(反) 이승만 정서, 의원내각제론 주장, 사유재산 시장경제 중심의 경제관을 제외하면 공통점이 많지 않았으며, 출신 학교부터 종교, 독립운동 여부, 사회적 계급, 직업, 재산, 출신지, 미국과의 관계 등에서 크나큰 차이를 보였다. 구파는 한민당의 전통적 지지층인 지주 계급 출신이었기 때문에 토지 개혁에 반대했으나 신파의 출신 정치인들은 관료 시절 토지개혁을 입안하고 집행하던 사람들이었다. 또한 정치 활동에 있어서도 구파는 개인적인 친분과 의리를 중요시하고 야합을 터부시 했지만 신파는 내각 설립에 앞서 자신들의 자리를 요구하는 민정구락부 의원들의 요구를 들어주며 적극적으로 세력을 구축하려고 하였다. 구파는 지방( 전라도, 경상도)의 개신교 신자가 많았으나 신파는 서울에 기반을 가지고 가톨릭계를 중심으로 연줄을 가지고 있었다. 독립운동에 있어서도 신익희, 조병옥, 김준연 등 구파는 유명한 독립운동가가 많았고 훗날 변절하였다해도 인지도가 높았던 김성수, 장덕수 등도 있었다. 특히나 한국민주당을 친일 정당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으나 이들은 소극적 동조 세력으로 물론 일제 시대에 큰 이익을 본 것이 사실이나 적극적인 친일 세력이라 볼 수는 없다. 반면 신파의 정치인들은 친일파 출신 지식인이 많았다. 주요한 박순천 등 적극적인 동조 세력은 물론 장면 총리 역시도 신사참배를 지지한 이력이 있었다.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구파는 미국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반탁운동의 영향과 미국의 정책으로 미군정 시절 내내 협력과 반목이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나 신파는 외교 일선에 있으면서 미국과 유엔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하였기에 상대적으로 미국과의 관계 역시 더 돈독했다.

결국, 여러 차이에서 비롯한 갈등이 제2공화국 당시 장면 내각이 수립된 이후, 당내 패권을 두고 크게 번졌다. 제5대 총선 후 민주당은 압도적 의석을 차지하였고 양원합동회의에서 대통령으로 구파의 윤보선을 선출하고 윤보선의 총리 지명만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윤보선은 구파의 김도연을 총리로 지명했고 동의안은 근소한 차이로 부결되었고 결국 신파의 장면을 지명하여 동의안이 통과되게 된다. 총리와 대통령은 선출되었으나 앞으로 길이 순탄치 않으리라는 것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장면 1차 내각은 구파 인사와 신파 인사가 모두 입각했으나 구파는 예상보다 입각한 구파 각료가 적자 불만을 나타냈다. 그리고 2차 내각 수립 전후를 해서 구파는 신민당을 창당하며 민주당 내의 신구파 갈등은 해결되었으나 민주당과 신민당의 권력 투쟁으로 제2공화국의 정치는 혼란해진다.

[1] 김영삼은 자유당 탈당파 출신임에도 유진산, 조병옥과 친분이 있어서였는지 신파가 아닌 구파로 분류되었다. 김영삼의 아버지 김홍조는 1930년대 말 정치망 멸치 어장과 어선 10여 척을 보유했던 거제도 제일의 갑부로, 김영삼 역시 계급적으로 구파와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김대중 장면의 추천으로 정계에 입문해서 정일형과 가까웠던 신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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