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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23 00:27:25

쌍용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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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6002d><colcolor=#fff> 쌍용그룹
雙龍 | SSANGYONG
파일:쌍용 국문 로고.svg 파일:쌍용 국문 로고 화이트.svg
국가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다국적 기업)
창립일 1939년 3월 15일
해체일 1997년 4월 30일 (그룹 구조조정 돌입)
2006년 4월 17일 ( 쌍용건설 계열분리)
규모 대기업
유형 복합 기업, 기업 집단
창업주 김성곤
회장 김성곤 (1939~1975)
김석원 (1975~1995)
김석준 (1995~1998)
김석원 (1998~2000)
본사
서울특별시 중구 저동2가 24-1[1]
(쌍용빌딩, 現 씨티센터타워)
사업 분야 시멘트, 건설, 자동차, 제지, 중공업, 무역, , 정유, 해운업, IT, 관광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웹 아카이브)

1. 개요2. 기업 정신
2.1. 1974~19892.2. 1989년 이후
3. 역대 로고4. 역사
4.1. 창업과 초기 성장기 (1939~1975)4.2. 김석원 체제 (1975~1995)4.3. 해체 (1995~2006)
5. 역대 임원6. 계열사 목록7. 산하 기관8. 공익재단9. 여담

[clearfix]

1. 개요

1962년 설립한 시멘트 업체인 쌍용양회공업을 모기업으로 하는 기업집단이었다.

이름인 쌍용은 쌍용양회의 첫 공장인 영월공장의 소재지인 서면[2] 쌍용리에서 따왔다. 현재 태백선 쌍룡역이 있는 그 동네다.

당시 홈페이지 도메인은 www.ssy.co.kr이었다.[3] 과거 주소였던 www.ssangyong.co.kr로도 접속이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이 두 홈페이지 도메인도 전부 쌍용양회가 소유하고 있다.

2023년 쌍용자동차 KG모빌리티로 사명을 변경하면서 사명에 '쌍용'이라는 이름이 존속[4]하는 회사는 쌍용C&E(시멘트, 한앤컴퍼니), 쌍용건설(건설, 글로벌세아), 쌍용C&B(제지, 모건스탠리PE), 쌍용정보통신(SI, 아이티센). 총 4곳이 있다. 쌍용C&E와 쌍용C&B는 사모펀드가 최대 주주로 있어 추후 매각이 된다면 사명을 변경할 가능성이 상당하다.

2. 기업 정신

2.1. 1974~1989

2.2. 1989년 이후

(1절) 온 세상에 펼쳐라 널리 펼쳐라
광활한 우주에 환히 비춰라
눈부시다 찬란하다 우리의 미래

(2절) 뛰는 가슴 안아라 힘껏 안아라
설레는 소리로 크게 외쳐라
높푸른 꿈덩이 황금빛 우리날

(후렴) 일하자 더욱 일하자 한없이 일하자
겨레 위해 나라 위해 인류를 위해
쌍용 쌍용 쌍~용 영원하라

3. 역대 로고

파일:Screenshot_20230521-163604~2.png
파일:Screenshot_20230521-163604~4.png 파일:쌍용 로고(1978-1989).svg 파일:쌍용 로고.svg
<rowcolor=#fff> 1963~1969 1969~1978 1978~1989[5] 1989~2006[6][7]

4. 역사

4.1. 창업과 초기 성장기 (1939~1975)

1939년 성곡 김성곤(1913~1975) 창업주가 경북 대구부에서 설립한 비누공장인 삼공유지합자회사를 모태로 했으며, 1948년 금성방직을 세워 면방직에 진출 후 고려화재 설립에도 참여해 금융업에 처음 손을 뻗었다. 1954년 연합신문과 동양통신을 인수해 언론사업을 시작했고, 1959년 학교법인 국민학원을 인수해 육영사업을 개시했다. 1962년 쌍용양회를 세워 '쌍용' 명칭을 쓰기 시작했으며 1967년에 태평방직과 금성방직을 대한농산에 팔았고, 같은 해 삼화제지와 금성해운을 세웠다. 1969년에 종합조정실을 발족해 그룹의 형태를 갖췄다.

김성곤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과 절친한 사이였는데[8] 1965년 민주공화당 재정위원장을 맡아 재벌의 정치자금 모금을 담당하였다.[9] 김성곤 회장은 집권당 정치인(공화당 재정위원장) 겸 재벌총수(쌍용그룹 회장) 겸 언론사주(동양통신 사장)로 정계, 재계, 언론계를 아울러서 1971년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그룹도 이 시기 급성장했다.[10] 이 시절에는 공무원 겸직금지 제도가 없어서 회장직 사퇴 없이도 회장직과 겸임해서 국회의원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은 정몽준, 김호연, 아들인 김석원처럼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려면 퇴직하고 공석으로 비우거나 바지사장을 앉혀야 한다.

1975년 김성곤 회장이 사망한 후 장남 김석원(1945~2023)이 경영권을 승계했다.

4.2. 김석원 체제 (1975~1995)



1976년 쌍용중공업을 세우고 이듬해 쌍용종합건설을 세운 뒤 1976년 이란국영석유공사와 합작해 '한이석유'(현 에쓰-오일)를 세웠고, 1983년에 효성그룹으로부터 효성증권(현 신한투자증권)을 인수하고 1986년에 동아자동차까지 인수했다. 1997년 외환위기 직전에는 계열사로 쌍용(무역업-현 GS글로벌), 쌍용자동차(현 KG모빌리티), 쌍용중공업(현 STX), 쌍용양회, 쌍용건설[11], 남광토건, 쌍용화재(현 흥국화재), 쌍용정유(현 에쓰-오일), 쌍용투자증권(현 신한투자증권) 등을 거느린 총매출 25조원, 재계 순위 5~6위의 거대재벌이었다.

4.3. 해체 (1995~2006)

그러나 문어발식 경영과 과도한 부채로 위기 요인이 계속 누적되어 오다가, 1997년 외환위기에 직격탄을 맞았다. 열혈 자동차 애호가였던 김석원 회장의 자동차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화근이었던 것으로 지적된다.[12]

김석원 회장은 1986년 동아자동차를 인수하였고, 외국 자동차회사도 인수했다. 영국의 팬더 웨스트윈드라는 회사였는데, 1970년대 후반에 이미 망해서 법정관리 중이던 것을 모피를 수출하던 진도그룹에서 1980년 인수하였다가 1987년 쌍용그룹에 넘긴 것이다. 쌍용은 아예 생산라인을 국내로 옮겨와 칼리스타라는 자동차를 만들었으나 1994년까지 단 78대만 판매되고 단종되었다. 사실 1997년 이전까지 쌍용자동차를 제외한 나머지 계열사들은 대부분 흑자였다. 시멘트, 정유, 제지 등 경기를 별로 타지 않는 업종이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쌍용자동차 한 회사의 적자가 그룹 나머지 계열사 전체 흑자의 몇 배였다. 회장의 과도한 관심에 따른 고급, 고가차 위주의 정책이 적자가 누적된 원인이라는 분석이 있다.[13] 1990년대만 해도 소형차나 준중형차들이 한국 자동차 시장의 주류였는데, 쌍용자동차는 이 분야에선 전혀 힘을 못쓰고 있었다.[14]

이런 와중에 정작 김석원 회장은 금배지를 노리고 정치판을 기웃거리고 있었다.[15] 1996년 신한국당 공천을 받고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구 달성군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되었으나, 전두환 비자금 61억원을 사과상자에 담아 보관하고 있다가 들통이 나면서 큰 곤욕을 치렀다.[16] 이렇듯 최고경영자의 정치 외도와 각종 구설수로 힘든 사이에 경영실적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김석원 회장은 결국 쌍용자동차를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당시 자동차산업 진출을 목전에 두고 있던 삼성그룹과 자동차업계 만년 3위였던 대우그룹에 매각을 제안하였으나, 삼성은 빚이 너무 많다면서 거절했고, 대우는 쌍용그룹의 위급한 상황을 감지하고 가격을 후려쳤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물쭈물 하는 사이에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모든게 끝났다.

김석원 회장은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17] 경영에만 집중하겠다고 선언했으나, 이미 늦어도 한참 늦은 상태였다. 결국 국내외 채권단들이 김석원 회장의 경영권을 박탈하고 직접 구조조정을 진행하면서, 쌍용그룹은 해체 수순을 밟게 되었다. 한 마디로 개인의 취미와 회사경영을 구분 못한 무능한 재벌 2세 때문에 전체 그룹이 부실화 된 것이다. 2000년에는 모기업 쌍용양회에 일본 태평양시멘트 지분까지 유치하기도 했으나 2002년 워크아웃 후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았다. 이후 김석원은 2004년 회사자산 310억원을 빼돌렸다가 구속됐으나, 2007년 2월 노무현 대통령 취임 4주년을 기념해 특별사면을 받고 친인척 및 옛 참모들과 함께 재기를 모색하다가 신정아 게이트에 연루되면서 다시 구설수에 올랐다. 2008년 7월에는 위장계열사 4곳에 부당지원한 혐의로 징역 4년을 받고 항소했지만 이듬해 항소심에서 징역 1년 6개월 및 집행유예 2년을, 2011년 서울고법으로부터 징역 2년 6개월 및 집행유예 4년, 사회봉사 200시간을 각각 선고받았다. 이후 2023년 8월 26일에 세상을 떠났다.

모기업이던 쌍용양회는 채권단이 최대 지분을 갖고 2대 주주인 일본 태평양시멘트가 경영권을 행사해 오다가, 채권단과 태평양시멘트가 2016년 한앤컴퍼니라는 사모펀드에 지분을 매각하였다.

5. 역대 임원

6. 계열사 목록

7. 산하 기관

8. 공익재단

9. 여담

앞서 말했듯 현풍중학교 및 현풍고등학교를 운영하는 현풍학원과 국민대학교를 운영하는 국민학원을 소유했던 적이 있는데 아직도 국민대 이사진 중에는 쌍용그룹 출신 인사나 쌍용그룹에 관련되었던 인사가 많으며 현 국민대 이사장도 창업주 김성곤 회장의 손자인 김지용 씨가 재임하고 있다.[27] # # #

스포츠로는 창업주 김성곤 회장이 학창시절 유도를 했었고, 한때 대한유도회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오랜 기간 유도단을 운영하였다. 1982년부터 1992년까지 김석원 회장이 한국스카우트연맹 회장을 맡기도 했다. 이때문에 1991년 강원도 고성에서 열린 세계 잼버리에 쌍용그룹에서 많은 인력과 물자를 지원하였다.

파일:external/thumb.ad.co.kr/200306_kms_1.jpg
광고를 전공한 이들이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지나치다 한 번은 봤을 "오늘은 속이 불편하구나"로 시작되는 기업광고를 낸 곳이다. 이 작품은 1984년 스승의 날을 기념하여 주요 신문에 게재했던 것으로서, 보릿고개 시절에 유년기를 겪고 산업화 시기에 청장년기를 보낸 당시의 사람들에게 폭발적인 공감을 얻어, 지금까지도 한국적인 기업PR의 주된 성공사례로 종종 회자되곤 한다.

이 기업에서 발행했던 사외보인 '여의주'가 유명했는데, 2013년 4월호를 끝으로 발행이 중단되었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는 정계에 입문하기 전까지 쌍용의 임원으로 근무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유세용 차량인 소독차(...)가 뉴 코란도 소프트탑이다.

계열사인 (주)쌍용이 90년대에 PC 게임 시장에 진출했던 적이 있었는데, 화제작인 게임들을 유통했다. id 소프트웨어을 출시하였고, 루카스아츠 스타워즈 게임 시리즈 일부와 샘 앤 맥스, 에이도스 인터랙티브 툼 레이더 시리즈 코만도스 등을 출시하기도 했다. 또한 미국의 게임 유통사인 EB Games와의 제휴로 국내에 EB Games 매장을 여러 군데 오픈한 후, 1999년에는 인터넷 게임 쇼핑몰 '조이파크'를 오픈했으나 2001년 황선규 등의 주도 하에 'GNC인터렉티브'로 독립했다. 그러나 당시 온라인 게임의 대중화로 패키지 시장이 사양화되자 모바일 게임으로 방향을 틀었다가 2018년에 문을 닫았다.


[1] 서울특별시 중구 수표로 34 [2] 한반도면. [3] 현재 본 도메인으로 접속하면 쌍용그룹의 모태였던 쌍용양회 홈페이지로 접속된다. [4] 및 CI를 옛 파일:쌍용 국문 로고.svg 파일:쌍용 국문 로고 화이트.svg 로고를 사용 [5] 1978년 도입되어 1989년까지 사용한 쌍용그룹의 심벌마크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권명광 교수팀이 제작한 것인데, 1977년 쌍용그룹의 의뢰를 받고 1년동안 작업하여 만든 것이였다. # 전체적인 형상은 용의 비늘 모양이라고. [6] 1989년 창립 50주년을 맞이해 제정된 쌍용그룹의 심벌마크는 2마리의 용을 의미하는 회색S + 빨간색S로 이루어진 것인데, 이 마크의 의미는 기간산업과 첨단산업의 조화, 기업과 소비자 간의 조화, 노동자 사용자 간의 조화를 뜻한다. 그룹 직원들은 앞의 S를 회색, 즉 시멘트 색으로 한 것이 쌍용양회를 의미하고 뒤의 S는 나머지 계열사를 의미하는, 즉 쌍용양회와 아이들 같은 의미라고 나름의 의미를 만들었다. 단, 해외 합작사인 쌍용정유(현 S-oil)만은 앞 회색 부분을 파란색으로 바꿨다. [7] 그룹 로고 규정은 심벌마크를 알파벳 SS처럼 사용하지 말기이다. 즉 심벌마크+angyong 이렇게 써서 Ssangyong이라고 표기하면 안된다. 하지만 이런 규정에도 불구하고 각 계열사에서는 이를 무시한 심벌마크+angyong 식의 표기를 많이 썼다. CI 부서에서 주의를 줘도 잘 안되는 모양. 그리고 서구권 일부에서는 조크로 ßangyong으로도 쓰는 듯. [8] 삼공유지를 경영하면서 박정희의 형 박상희를 남몰래 도왔다고 하고, 해방 이후에는 박상희와 함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북지부 결성에 앞장섰으며, 해방정국 시기 미군정 시기 친일경찰의 횡포에 의해 일어난 대구 10.1 사건에서 박상희, 황태성과 같이 핵심적 위치에서 활동한적 있었다. 박상희를 통해 박정희와 친해졌다고. 나이차가 나는 큰형 박상희를 사실상 아버지처럼 따랐던 박정희와도 사석에서 자녀들의 결혼 문제를 상의할 정도의 친분을 가지게 되었다. [9] 당시 정부발주 공사와 해외차관의 10%를 무조건 상납하게 하였다. 재벌들도 창구 단일화로 한쪽에서만 뜯기게 되자 오히려 좋아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뇌물의 제도화이다. [10] 여담으로 이 시기 가봉에 백화점을 세웠다가 한국인 직원들이 현지 가봉인들에게 인종차별을 해버려서 이에 크게 분노한 가봉인들에게 큰 낭패를 본 일이 있었다. 한국-가봉 관계 항목 참조. [11] 아파트 브랜드로는 더 플래티넘을 쓴다. [12] 같은 시기 유명 클래식카만 100대 이상을 소유하고 있다는 자동차 애호가로 유명했던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도 자동차 산업에 무리하게 진출했다가, 외환위기 직후에 간신히 포기하고 삼성그룹을 지키는데 성공했다. 삼성은 삼성화재, 삼성생명 등 금융계열사를 통해서 동원할 수 있는 자금이 쌍용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1997년 외환위기에도 자동차를 포기하고 몇몇 공장과 비주력계열사를 매각하는 수준의 부분적인 구조조정만으로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반면에 쌍용은 쌍용차의 부실이 워낙에 심각한데다가, 뚜렷한 캐시카우가 없었고, 쌍용화재 등 금융계열사의 규모가 삼성에 비해서 현저하게 작았다. [13] 당시 기아차도 고급차와 고가차 위주 정책을 폈다가 시원하게 망했고, 재계 8위 기아그룹의 부도에 한몫했다. [14] 쌍용차가 준중형차 분야의 선구자가 될 기회는 있다. 그러나 일본 기업과 기술제휴를 맺기 싫다는 독불장군 회장의 황소고집 때문에 순조롭게 진행되던 스바루 레오네 라이선스 생산 계획이 그대로 엎어졌고, 그 결과 쌍용은 현대 엘란트라, 대우 에스페로, 기아 세피아가 모두 잘 팔리는 광경을 그저 구경만 해야했다. [15] 1971년 10.2 항명 파동으로 인해 반 강제로 정계를 은퇴한 부친 김성곤 회장의 유언은 "절대로 정치를 하지 마라"였다. [16] 당시 청와대 검찰총장의 중단압력을 무시하고 사건을 수사했던 주임검사는 결국 좌천되자 사표를 제출하고 삼성그룹 법무팀으로 스카웃된다. 이 인물이 바로 훗날 삼성의 비자금을 폭로하고 삼성을 생각한다를 출판한 김용철 변호사이다. [17] 이로 인해 1998년에 치러진 대구 달성군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사람이 엄삼탁을 꺾고 당선된 박근혜. [18] 창업주 김성곤의 둘째아들, 김석원의 동생이다. [19] 배우 김동원의 장남이자 가수 김세환의 친형. [20] 가수 겸 예능인 탁재훈의 부친. [21] 2012년 7월 이후의 건설업계는 초상집 분위기. 100대 건설사 중 20개 이상이 부도 혹은 워크아웃 상태이다. [22] 세아그룹과는 무관한 회사이다. [23] 그 악명높은 주수도의 제이유가 맞다. [24] 폭스바겐과 GM도 제휴관계였다. 전자는 냉전시기에 제휴했고 후자 상해GM은 외환위기때 제휴했다. [25] 1995년 킴벌리크라크와 합병됨. [26] Clean & Best의 약자. [27] 전임 이사장은 김성곤 회장의 조카이자 쌍용그룹 총괄부회장, 쌍용양회 회장을 지낸 김채겸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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