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레우코스 군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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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우코스 초대 군주 Seleucus I Nicator 셀레우코스 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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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출생 | 기원전 358년/기원전 356년/기원전 354년 | |||
마케도니아 왕국 에우로포스 | ||||
사망 | 기원전 281년 9월 | |||
트라키아 리시마키아 | ||||
재위 | <colbgcolor=#000> 셀레우코스 군주 | |||
기원전 312년 ~ 기원전 281년 9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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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제호 |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 Seleucus I Nicat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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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안티오코스(아버지) 마케도니아의 라오디케(어머니) 아파마(첫째 부인) 스트라토니케(둘째 부인) 아파마(장녀) 안티오코스 1세 소테르(장남) 아케우스(차남) 필라(차녀) 베레니케(삼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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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 | 입소스 전투 등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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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셀레우코스 왕조의 창건자. 디아도코이 중 한 사람으로, 알렉산드로스 3세 사후 정적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인 끝에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했다.2. 생애
사망 시의
마케도니아 왕국 에우로포스 출신이다. 부친은 필리포스 2세의 헤타이로이에 소속된 귀족 안티오코스였고, 어머니는 라오디케이다. 출생 신화에 따르면, 어머니는 닻의 상징이 새겨진 독특한 반지를 받았으며, 그는 허벅지에 닻의 문양이 새겨진 채 태어났다고 한다. 닻은 아폴론의 상징이므로, 그는 아폴론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 신화는 그가 훗날 셀레우코스 왕조를 건국했을 때 왕조의 상징을 닻으로 정하고 아폴론을 수호신으로 삼은 이유를 설명하고자 창조된 이야기일 것이다.
출생년도는 분명하지 않다. 로마 역사가 유스티누스는 셀레우코스가 생애 마지막 전투인 코루페디움 전투를 치를 때 77세였다고 기록했다. 이에 따른다면, 그는 기원전 358년생일 것이다. 반면 아피아노스는 73세였다고 하는데, 이에 따르면 기원전 354년에 출생했을 것이다. 에우세비우스는 75세라고 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기원전 356년이다. 유년기의 행적은 거의 알려진 바 없지만, 필리포스 2세의 궁정에서 일하면서 비슷한 나이대였던 알렉산드로스 3세와 함께 군사 훈련을 받고 아리스토텔레스 등 철학자들로부터 교육받았을 것이다.
알렉산드로스 3세가 페르시아 원정을 단행했을 때, 그는 '소마토풀락스'(sōmatophulax: 국왕 경호원)의 일원으로서 동행했다. 소마토풀락스는 왕의 신변을 지키는 7명의 개인 시종이었다. 기원전 330년 파르메니온이 반란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알렉산드로스 3세가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된 뒤, 알렉산드로스 3세는 이들을 고위직으로 승진시켰다. 아리아노스에 따르면, 셀레우코스는 기원전 326년경 '은방패 부대'로 일컬어지는 아르기라스피데스의 지휘관 중 한 사람이 되어서 히다스페스 전투에 참전했다고 한다. 이 부대는 기병과 보병 사이의 완충 역할을 했으며, 탁월한 기동성을 발판으로 전장에서 급박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또, 험준한 지형에서의 특수 임무도 충실히 맡았다. 기원전 324년 알렉산드로스 3세가 마케도니아 귀족과 페르시아 귀족의 화합을 이끌기 위해 수사에서 집단 결혼식을 올렸을 때, 그는 소그디아 귀족 스피타메네스의 딸 아파마와 결혼했다. 다른 장군들은 알렉산드로스 3세가 죽은 뒤 페르시아 여자들과 이혼했지만, 그만은 그녀를 지켰고, 아파마는 훗날 셀레우코스 왕조의 초대 왕후가 되었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3세가 바빌론에서 붕어했다. 서기관 에우메네스는 알렉산드로스가 사망할 당시 셀레우코스의 행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1]
페이톤과 셀레우코스는 사라피스의 성소로 가서 알렉산드로스를 이곳에 데려가야 하는지 물었지만, 신은 그를 그대로 두라고 하였다. 왕은 28일 오후 늦게 서거하셨다.
알렉산드로스 3세 사후 장수들은 긴급 회의를 열고 장시간 논의한 끝에 선왕의 이복형 필리포스 3세를 일단 왕으로 즉위시키고, 록사나가 임신한 태아가 아들이면 공동 왕, 딸이면 필리포스 3세가 단독 왕이 되기로 결의했다. 셀레우코스는 다른 장수들과 함께 페르디카스를 섭정으로 추대했고, 헤타이로이 지휘관 겸 궁정 천인대장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321년 페르디카스가 마케도니아로 보내려던 알렉산드로스의 유해를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도중에 가로채서 알렉산드리아로 가져가면서 제1차 디아도코이 전쟁이 발발했다. 셀레우코스는 페르디카스의 이집트 원정에 동행했지만, 전쟁은 시간이 지날수록 페르디카스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급기야 메디아의 사트라프 페이톤과 은방패 부대 지휘관 안티게네스가 페르디카스를 암살했다. 코르넬리우스 네포스는 셀레우코스도 이 음모에 가담했다고 주장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페르디카스 사후 새 섭정이 된 안티파트로스는 트리파라디소스에서 자신을 살해하려고 들었던 병사들을 막은 셀레우코스에게 보답하고자 바빌론의 사트라프로 임명했다. 당시 바빌론에는 페르디카스로부터 사트라프로 임명된 도키무스가 있었지만, 셀레우코스가 기원전 320년 10월이나 11월에 바빌론에 도착했을 때 싸우지 않고 도주했다. 바빌론은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속주 중 하나였지만 군사력은 미미했고, 페르시스의 사트라프 페우케스타스의 견제를 받았다. 하지만 셀레우코스는 개의치 않고 페르시아 신민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그들의 호의를 얻어냈다.
그 사이 제국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섭정 안티파트로스가 기원전 319년 사망하자, 폴리페르콘이 새 섭정에 등극했다. 그러자 안티고노스 1세는 그를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하며 군대를 동원했다. 이에 폴리페르콘은 에우메네스와 동맹을 맺어 대항했다. 셀레우코스는 제국이 두 개 세력으로 분열된 상황에서 안티고노스의 편을 들었다. 얼마 후, 메디아 총독 페이톤은 파르티아의 총독 필리포스를 암살하고 동생 에우데모스를 새 총독으로 삼았다. 이에 다른 사트라프들이 페우케스타스의 지휘하에 그에 맞서 싸웠다. 페이톤은 파르티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참패하고 바빌론으로 도주했다.
기원전 319년 에우메네스와 그의 군대가 바빌론 북쪽으로 이동했고, 안티고노스가 그보다 더 많은 군대를 이끌고 추격했다. 기원전 317년 가을이나 겨울, 페이톤이 바빌론에 도착하여 셀레우코스와 합류했고, 에우메네스는 기원전 316년 봄에 수사의 사트라프들로부터 지원을 받아낸 뒤 티그리스 강을 건너서 바빌론으로 진격하려 했다. 셀레우코스는 이에 맞서 3중전차 2대와 작은 배 몇 척을 보내 건널목을 저지하게 했고, 홍수를 저지하기 위해 설치했던 장벽을 파괴해서 홍수를 유발하게 했지만, 이 모든 조치는 허사였다. 하다못해 에우메네스를 따르는 장병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줘서 회유해보려 했지만, 이 또한 별 소용이 없었다.
결국 에우메네스가 티그리스 강을 건너 바빌론으로 진군하자, 셀레우코스는 저항을 포기하고 페이톤과 함께 안티고노스에게로 달려갔다. 안티고노스는 에우메네스가 지중해로 이동하는 걸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고, 셀레우코스는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에우메네스의 퇴로를 차단했다. 이후 안티고노스는 파라이타케네 전투와 가비에네 전투에서 에우메네스를 격파하고, 그를 사로잡은 뒤 처형했다. 이리하여 제국의 실권을 장악한 안티고노스는 페이톤이 자신의 병사 일부를 매수해 반란을 도모하는 걸 눈치채고 곧바로 처형했다. 기원전 315년 여름 바빌론에 도착한 안티고노스는 셀레우코스에게 바빌론에서 벌어들인 수입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셀레우코스는 이 요구를 거절했다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50명의 기병과 함께 이집트로 달아났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디아도코이 중 가장 강대한 세력을 갖춘 안티고노스에 공동 대응하기로 하고, 카산드로스, 리시마코스와 연합하여 기원전 314년 안티고노스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기원전 314년 봄 안티고노스가 로도스 섬과 동맹을 맺고 티레를 포위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육군을 이끌고 티레로 향하는 한편, 셀레우코스에게 100척의 함대를 맡겨서 로도스를 압박하게 하였다. 셀레우코스는 카리아의 사트라프 아산드로스로 하여금 프톨레마이오스와 동맹을 맺게 했고, 에리트라이를 공격하여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 뒤이어 키프로스로 이동한 그는 메넬라오스가 이끄는 10,000명의 용병 및 100척의 함선과 합세한 뒤 키티온을 포위하고, 안티고노스 함대의 반격을 격퇴했다. 한편 프톨레마이오스는 기원전 312년 가자 전투에서 안티고노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를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안티고노스가 바빌론의 사트라프로 지명했던 아게노르의 아들 페이톤이 전사했다.
데메트리오스 1세가 트리폴리로 후퇴한 뒤, 프톨레마이오스는 시돈으로 진격하는 한편 셀레우코스에게 800명의 보병과 200명의 기병을 줘서 바빌론에 복귀하도록 했다. 셀레우코스는 가는 길에 페르시아인들을 모집하여 3,000명의 군대를 갖춘 뒤 재빨리 바빌론을 장악했다. 후대 역사가들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역사가 그가 바빌론으로 복귀한 해인 기원전 312년에서 시작한다고 기술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안티고노스는 메디아의 사트라프 니카노르와 아리아의 사트라프 에바고라스에게 셀레우코스를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셀레우코스는 자신의 한정된 병력으로는 회전으로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기습을 감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적군이 티그리스 강을 건너기 위해 준비중일 때 극비리에 접근하여 습지에 군대를 숨겨놓은 후, 밤에 기습 공격을 가했다. 에바고라스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전사했고, 니카노르는 달아났다. 남겨진 장병들은 셀레우코스에게 항복했다. 이렇게 해서 훨씬 많은 병력을 확보하게 된 그는 메디아와 수사를 정복하고, 페르시아, 아리아, 파르티아와 같은 인근 지역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안티고노스는 프톨레마이오스와 휴전 협정을 맺은 뒤 기원전 311년 바빌론을 공격했다. 그러나 기원전 309년까지 이어진 전쟁에서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하고 철수해야 했으며, 양자는 곧 휴전 협정을 맺었다.
안티고노스가 지중해에 관심을 돌린 사이, 셀레우코스는 이란과 박트리아의 지배권을 굳혔다. 기원전 306년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가 탈취한 펀자브와 서북 인도 일대를 탈환하기 위해 원정에 착수했다. 그러나 찬드라굽타의 강력한 군대를 상대로 고전하다가 1년만에 평화 협정을 맺었다. 셀레우코스는 아라코시아와 게드로시아, 드랑기아나 및 그 외의 모든 인도 접경 영토를 포기하고, 딸을 찬드라굽타와 결혼시키는 대신 인도 코끼리 500마리를 받았다. 원정을 마치고 본거지로 귀환한 셀레우코스는 카산드로스가 보낸 사절단으로부터 안티고노스에 대항하는 동맹에 함께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그는 이를 수락하고, 대군을 이끌어 소아시아로 진격했다.
기원전 301년, 리시마코스와 연합한 셀레우코스는 입소스 전투에서 안티고노스를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안티고노스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고, 그의 영역은 프톨레마이오스, 카산드로스, 리시마코스, 그리고 셀레우코스에 의해 분할되었다. 리시마코스는 아나톨리아 서부를 가졌고,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유대 지방을 차지했으며, 카산드로스의 동생 플레이스타르코스는 킬리키아와 뤼키아를 가졌다. 나머지 영토는 셀레우코스에게 귀속되었다. 그 후 자신이 얻은 영토를 확고히 장악하는데 10여년의 세월을 보냈고, 이때 많은 공을 세운 아들 안티오코스 1세를 294년에 공동 통치자로 삼아 동부 영토를 관할하게 했으며, 자신은 서부 영토를 다스렸다. 그는 이 시기에 안티오키아와 셀레우키아를 건설했다.
또한 294년에는 후처인 스트라토니케를 아들과 결혼시켰다. 스트라토니케는 아들 안티오코스보다 더 어린 나이였는데, 안티오코스는 이 어린 계모에게 사랑에 빠져서 계모를 사랑한다는 죄책감과 애정이 겹쳐서 상사병을 앓았다. 이를 알게 된 셀레우코스는 아들과 결혼시킨 것.
기원전 286년 킬리키아를 공략한 데메트리오스 1세의 군대가 급료를 받지 못해 불만이 많다는 걸 눈치채고, 사람을 몰래 보내 거액의 돈을 줄 테니 자기 편에 서라고 꼬드겼다. 이후 킬리키아에 도착한 셀레우코스는 데메트리오스 1세의 군대 앞에 투구를 벗으며 정체를 드러냈고, 장병들은 곧바로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결국 데메트리오스 1세는 셀레우코스의 수중에 들어가 아파메이아에 수감되었고, 그곳에서 몇년간 감금되었다가 사망했다. 이후 리시마코스가 아들 아가토클레스를 살해하면서 민심이 등을 돌리자, 셀레우코스는 이를 기회삼아 소아시아 전역을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기원전 282년 겨울, 리디아의 코루페디움으로 진격한 그는 그곳에서 리시마코스를 상대로 맞붙어 대승을 거뒀고, 리시마코스는 전사했다. 이로써 자신의 제국에 서부 소아시아를 추가했고, 발칸 반도로 진출할 발판이 마련되었다.
셀레우코스는 페르가몬 등 소아시아 해안가의 여러 도시국가로부터 충성 맹세를 받아낸 뒤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를 정복하고자 헬레스폰트 해협을 넘어 발칸 반도에 진입하면서, 그리스의 여러 도시 국가에 자신을 민주주의와 자치권을 회복하기 위해 폭정을 저지르는 압제자들로부터 해방시켜줄 인물로 소개했다. 그러나 기원전 281년 9월 리사마키아 인근에 도착한 뒤 희생제를 치르고 있을 때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에게 암살당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는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세 말년에 이복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후계 다툼을 하다 패하자 이집트를 떠나 리시마코스의 궁정에 망명했다가, 리시마코스가 죽은 뒤 셀레우코스에게 귀순했다. 그런 그가 셀레우코스를 암살한 이유에 대해서는 셀레우코스를 죽이고 그의 영토를 탈취하려 했다는 설, 은인인 리시마코스의 원수를 갚기 위해 그랬다는 설,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매수에 넘어갔다는 설 등이 제기되나 어느 쪽이 맞는 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가 암살된 뒤 제국의 서부 일대는 혼란에 빠졌고,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누스는 한동안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에서 활동하며 독자적인 세력권을 갖추었다. 하지만 안티오코스 1세가 동부 사트라프들의 지지에 힘입어 시리아와 소아시아의 질서를 회복하는 데 성공했고, 제국은 이후로 300여 년간 이어졌다. 한편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는 기원전 279년 켈트족의 침략에 저항하다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