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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1 19:47:57

강조의 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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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시대 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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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 주도 세력
강조의 정변 <colbgcolor=#ffffff,#670000>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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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고려시대의 실패한 내란 }}}}}}}}}


1. 개요2. 배경3. 전개4. 결과5. 의문점
5.1. 목종의 국정 운영과 업적5.2. 목종의 건강5.3. 목종의 권력과 정치력5.4. 김치양과 천추태후 일파의 권세5.5. 김치양과 천추태후 일파의 행보5.6. 유행간의 대량원군 즉위 반대5.7. 궁궐 화재5.8. 대량원군의 승려 생활
6. 정변의 재구성7. 대중매체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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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康兆의 政變

1009년(고려 목종 12년, 기유년),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가 군사력을 동원해서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옹립하여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제2차 여요전쟁에서 요나라가 표면적으로 내세운 침공 명분이다.[1]

2. 배경

이 정변의 배경은 최소 십수 년 전의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의 제5대 왕인 경종은 27세라는 젊은 보령[2] 붕어하여 경종의 부인 중 한 명이었던 헌애왕후 황보씨는 졸지에 젊은 과부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한 순간에 부군을 잃고 독수공방하며 지내던 그녀에게 김치양이라는 남자가 승려 행세를 하며 그녀가 머물던 천추궁에 출입해 접근했다. 마침내 둘은 사통을 하기에 이르렀고,[3] 이에 추잡한 헛소문이 널리 번지게 되었으며, 이 소문을 들은 고려의 제6대 군주이자 헌애왕후의 동복오빠였던 성종은 김치양에게 곤장을 친 후 그를 멀리 유배보냈다.[4] 이렇게 헌애왕후의 사통 사건은 빠르게 마무리되는 듯 했다.

그러나 997년에 성종이 붕어하고 헌애왕후의 아들이 고려의 제7대 왕 목종으로 즉위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신왕의 모후였던 헌애왕후는 목종이 이미 18세라는 거진 어른에 가까운 나이였음에도 천추전(千秋殿)에 거처하며 섭정을 행했으므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천추태후'(千秋太后)로 불리게 되었다.[5][6] 권력을 잡은 천추태후는 김치양을 불러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을 하사했고, 불과 몇 년 사이에 비할 데 없이 총애하면서[7] 갑자기 우복야(右僕射) 겸 삼사사(三司使)에까지 파격 승진시켰다.[8]

관리의 인사권을 본격적으로 장악한 김치양은 많은 충신과 의로운 선비를 배척했고,[9] 본인의 친척과 일당들을 모두 요직에 앉혔으며, 권력을 바탕으로 뇌물을 공공연히 받고, 300여 간에 달하는 큰 집에 화려한 정원과 연못을 꾸몄다. 또한, 그 집에서 밤낮으로 천추태후와 관계를 맺었으며, 성수사(星宿寺)와 시왕사(十王寺)를 세워 그 절들에 자신의 역모에 귀신들이 돕기를 바라는 뜻의 기괴한 초상화들을 걸고, 역심이 담긴 글귀를 종에 새겼다. 목종은 마음 같아선 하루빨리 눈엣가시 같고 부패한 김치양을 내치고 싶었으나, 어머니 천추태후의 상심을 염려해 차마 시행하지는 못했다.

정작 목종 본인도 그 나름대로 문제가 있었다. 유행간(庾行簡)이라는 미남을 끌어들여 동성애 관계를 맺고, 그를 합문사인(閤門舍人)으로 벼락출세시켰을 뿐 아니라 자신이 교지를 내릴 때마다 반드시 유행간에게 먼저 물은 다음에야 시행할 정도로 지나치게 총애했다. 당연히 유행간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정도여서 측근 신하들은 그를 왕처럼 대했고, 유행간 또한 교만해져 관료들을 업신여겼다. 지은대사(知銀臺事)·좌사낭중(左司郞中) 유충정(劉忠正)이라는 발해인도 별다른 재능이 없었는데도 목종으로부터 큰 총애를 받았다. 목종은 유행간과 유충정에게 각각 수방(水房, 왕의 음식이나 연회를 담당하는 부서)의 관리들을 나누어 다스리게 했는데, 그 둘이 출입할 때 수행원들을 대동하는 것이 마치 왕처럼 분수에 넘쳤다고 한다.[10] 이는 목종 측근 세력의 지나친 권력 비대화와 그 때문에 국가 기강이 단단히 어지러워졌음을 의미하는 대목이다.

그러다가 1003년(목종 6년), 마침내 천추태후는 김치양의 아들까지 낳았다. 이렇게 되자 그 둘은 자신들의 아들을 목종의 후계자로 만들고자 했는데, 그 계획에 방해가 되는 사람이 목종에게 아들이 없을 시 왕위계승권자 1순위였던 대량원군 왕순이었다. 이에 김치양과 천추태후는 12세 소년이었던 왕순을 강제로 승려로 만들어 숭교사(崇敎寺)로 보냈다가 다시 삼각산의 신혈사(神穴寺)로 보낸 후 사람과 독이 든 음식을 여러 차례 보내 살해하려고 했다. 대량원군은 목종의 보호와 자신의 조심성,[11] 신혈사의 노승 진관(津寬)의 기지[12] 등으로 자신에게 닥친 죽음의 위기를 모면해 나갔다.[13]

1009년(목종 12년) 봄, 목종이 상정전(詳政殿)에서 연등행사를 관람하던 중에 궁궐 기름 창고에 불이 나 번져서 천추전까지 태우는 큰 화재 사건이 발생했다.[14] 목종은 잿더미가 된 전각과 창고를 보며 상심하다가 앓아누워 정사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되었다. 유행간, 유충정, 최항, 채충순 등 몇몇 신하들만이 목종의 병석에서 숙직했고, 재상을 포함한 나머지 신하들이 목종에게 병문안을 오면 유행간이
"왕께서 기력이 점점 나아지시니 나중에 따로 부르겠다고 하셨다."
라며 가로막았다.

3. 전개

병석에 누운 목종은 세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목종은 재추로서 숙직 신하 중 한 명인 채충순을 불러 대량원군으로 왕통을 잇게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18] 유충정은 의논을 위해 감찰어사(監察御史) 고영기를 보내 채충순과 최항을 불러들였고,[19] 목종은 그들과 논의한 끝에 선휘판관(宣徽判官) 황보유의(皇甫兪義)와 낭장(郞將) 문연(文演), 이성언(李成彦), 고적(高積) 등 10명을 신혈사로 보내 대량원군을 데려오게 하는[20] 한편, 추가로 채충순에게
"유행간이 대량원군의 왕위 계승에 반대하니 유행간이 알지 못하게 하라."
고 당부했으며, 개성부참군(開城府參) 김연경(金延慶)에게도 명하여 군사 100명을 거느리고 교외에서 대량원군을 영접하도록 했다.[21]

한편 목종은 보안 유지를 위해 김치양에게 붙은 것이 파악된 이주정을 서북면 도순검부사(都巡檢副使)로 임명해 즉시 떠나게 하고, 당시 서북면 도순검사(都巡檢使)를 맡고 있었던 강조[22] 궁궐로 불러 자신을 호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강조가 목종의 왕명을 듣고 출발하여 동주 용천역(龍川驛)에 이르렀을 때 내사주서(內史主書) 위종정(魏從正)과 안북도호(安北都護)의 장서기(掌書記) 최창(崔昌)을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은 강조에게,

라고 거짓말하며[23]
"속히 본진으로 돌아가서 크게 군사를 일으키셔야 (강조) 자신과 사직을 지킬 수 있습니다."
라고 했고, 그들의 말을 믿은 강조는 자신의 본영으로 돌아갔다.

천추태후는 강조가 오는 것을 막기 위해 자기 편 사람을 보내 절령[24]을 봉쇄했다. 이에 강조의 아버지는 종의 머리를 깎아 승려로 위장시키고,
"왕이 이미 죽었으며, 간흉들이 권세를 휘두르니 개경으로 군사를 끌고 와서 국난을 바로잡으라."
는 내용의 편지를 지팡이에 숨겨 강조에게 보냈다.[25]

아버지의 편지를 읽은 강조는 목종의 붕어를 확신하고, 부사(副使)인 이부시랑(吏部侍郞) 이현운(李鉉雲)과 함께 군사 5,000여 명을 이끌고 진군하다가 평주(平州, 현 황해북도 평산군)에 이르렀을 때 목종이 살아있는 것을 알고 한참 망설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휘하 여러 장수가
"여기까지 왔으니 그칠 수 없습니다."
라고 주장했으며, 결국 이에 동의한 강조는 목종까지 폐위시키기로 결심하고 계속 진군했다.

수도 개경에 진입한 강조는 분사감찰(分司監察) 김응인(金應仁)에게 군사를 이끌고 가서 대량원군을 데려올 것을 명령하고, 황궁에 들어가 목종을 만났다. 강조는 김치양 일파와 유행간 일파의 전횡이 국난을 불러온 것을 지적하며 자신이 모든 것을 수습하는 동안 용흥사(龍興寺)나 귀법사(歸法寺)에 가 있을 것을 권했고, 목종은
"이미 알고 있다."
라고 대답했다.

김응인에 앞서 목종의 명령으로 대량원군을 데려오기 위해 신혈사로 간 황보유의의 일행은[26] 강조가 보낸 김응인과 만나서 함께 개경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튿날 강조의 부하인 이현운이 군사를 거느리고 영추문을 들어오며 소란을 피웠고, 이에 놀란 목종이 두려워하며 유행간을 체포해 강조에게 보냈다.[27]

급사중(給事中) 탁사정(卓思政)과 낭중(郞中) 하공진(河拱辰)이 모두 강조에게 신속히 가담했고, 궁궐에 군사들이 난입하자 비로소 사태를 파악한 목종은 천추태후와 함께 통곡하며 채충순 및 유충정과 함께 법왕사(法王寺)로 갔다. 이에 최항이 강조에게
“옛적에도 이 같은 일이 있었던가?”
하며 따졌고, 강조는 아무 대답도 못했다.[28][29]

건덕전(乾德殿)의 어탑(御榻) 아래에 앉아서 대량원군 일행을 기다리던 강조는 갑자기 군사들이 만세를 부르자 놀라 일어나 꿇어앉으며,
“다음 임금이 오시지도 않았는데 이 무슨 소리인가?”
라고 말해 주위를 수습했다.[30]

마침내 황보유의 일행과 함께 도착한 대량원군이 연총전(延寵殿)에서 즉위식을 올리니 이가 곧 고려의 제8대 왕인 현종이었다.

4. 결과

김치양 부자와 유행간을 비롯한 7명은 처형되었고, 이주정을 포함한 30여 명은 먼 섬으로 유배를 떠났다.

폐위된 목종은 양국공(讓國公)이라는[31] 칭호를 받고,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 부암(傅巖) 등에 의해 감시를 받게 되었다. 천추태후와 함께 충주(忠州)로 향했는데[32][33] 목종이 최항을 통해 강조에게 말을 요청했으나, 한 필밖에 안 보내서 민가에서 한 필을 더 구했다.

폐주 목종이 적성현[34]에 이르자 강조가 상약직장(尙藥直長) 김광보(金光甫)를 보내 독약을 올렸으나, 목종은 마시기를 거부했다.

이에 김광보가 폐주를 호위하는 중금(中禁) 안패(安覇) 등에게
"강조가 (목종이) 약을 거부하면 군사들을 시켜 죽이라고 명령했다. 따르지 않으면 우리가 멸족을 당하게 된다."
라고 협박하여 안패는 강조의 명령대로 그날 밤 목종을 시해한 후, 폐주가 자살했다고 거짓으로 보고했다. 당시 문짝으로 관을 짜 임시로 목종의 빈소를 관아에 차렸는데, 강조가 사람을 시켜 고을 창고의 쌀로 밥을 지어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천추태후 황보씨는 황주[35]로 돌아가 21년 동안 더 살다가 현종 20년( 1029년) 1월, 숭덕궁(崇德宮)에서 66세로 자연사했고, 유릉(幽陵)에 장사지냈다.

고려의 최고 실권자가 된 강조는 중대사(中臺使)가 되었다가 이부상서(吏部尙書)·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고, 얼마 후에 벌어진 제2차 여요전쟁에서는 고려군 총사령관이 되어 300,000명에 달하는 고려군을 이끌게 되었다. 그리고 2차 여요전쟁 중의 통주 전투에서 거란군의 포로로 잡힌 뒤 사망한다.

5. 의문점

정변의 배경은 이렇게 요약된다.
권력을 장악하여 자신의 강한 권력욕을 실현하는 태후와 그녀의 비호를 받는 김치양이 전횡을 일삼았지만, 목종은 나약해서 이를 막지 못했을 뿐 아니라 유행간 등을 지나치게 총애하며 상황을 악화시켰다. 태후와 김치양은 목종이 위독해지자 대량원군을 독살하여 왕씨의 대를 끊은 후, 자신들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 하는 음모를 꾸며서 고려의 사직은 매우 위태로웠다.

그러나 이를 의심케 하는 정황이나 생각할 여지가 있는 서술들이 상당히 많다.

5.1. 목종의 국정 운영과 업적

목종은 재위 초중기에 매우 의욕적으로 국정을 운영하는 모습을 보였고, 그로 말미암은 업적도 상당한데 간략히 정리하면 이렇다.

특히 목종의 가장 큰 업적이 수많은 인재를 등용했다는 것과[37] 북방에 많은 성을 새로 쌓거나 보수한 것인데[38] 이는 훗날 일어나는 제2차 여요전쟁, 제3차 여요전쟁에서 고려가 승리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39]

아이러니한 것이 만약 이러한 행보와 성과들이 목종 본인의 의지와 판단력에 의한 것이라면
'천추태후에게 목종이 휘둘렸다.'
는 《고려사》 기록의 신빙성이 떨어지고, 반대로 천추태후가 주도하여 이룬 성과들이라면
'천추태후는 전횡을 일삼는 악녀였다.'
는 기록의 신빙성이 떨어진다.[40] 이렇듯 오랜 세월을 거치며 굳어진
'목종 재위 시기의 고려는 태후의 전횡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는 통념에 대해 의문이 생기게 되고, 이는 정변과 직접 관련된 기록들을 살펴볼수록 더욱 커진다.

5.2. 목종의 건강

하루는 왕이 채충순을 불러 침실로 들어오게 한 후 좌우를 물리치고,
”과인은 병이 점점 회복되어 가고 있소. 그런데 바깥에서 왕위를 넘보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경은 알고 있소?”
라고 물었다. (중략)
“나의 병이 점점 위독하여 곧 세상을 뜰 것 같은데, 태조의 후손으로는 대량원군만 남아 있소. 경과 최항은 평소 충의를 지닌 신하이니 정성을 다하여 나라를 바로잡고 구원하여 사직을 다른 성(姓)에게 주지 않도록 하시오.”
라고 당부했다. (중략)
“내가 친히 선위(禪位)하고 싶으니 빨리 보내 늦지 말도록 하시오. 만약 나의 병이 나을 경우, 성종께서 나를 책봉했던 전례와 같이 일찌감치 후사를 못박아 놓으면 왕위를 넘겨다보는 자들이 없을 것이오.
- 《고려사》 <채충순 열전> 中 -

한 <열전> 안에서 목종이 자신의 건강을 얘기하는 것인데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 병이 회복되고 있다고 하면서 갑자기 점점 위독해진다고 하고, 드물게 회복하는 경우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위독하다는 것은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임에도 자신의 병이 나아서 확실히 대량원군을 후계자로 삼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강조의 정변 당시 30세라는 목종의 젊은 나이, 그가 활쏘기와 말을 잘 타서 술과 사냥을 좋아했다는 《고려사절요》의 기록,[41] 대량원군을 후계로 삼는 글을 쓰는 채충순에게 그가 직접 먹을 갈아 주었다는 기록,[42] 후술하겠지만 그가 대량원군 후계 작업에서 보인 치밀함, 폐위된 그가 충주로 향하면서 직접 천추태후의 말고삐를 잡거나 밥시중을 들었다는 기록 등 정변 당시 목종이 위독했다는 것을 의심케 하는 정황들이 매우 많다.

또한, 목종이 얼마 못 살 정도로 위독했다면 딱히 후환이 될 여지가 없는 그를 굳이 강조가 폐위하고, 심지어 암살하는 무리수를 둘 이유가 전혀 없었다는 것까지 고려하면[43] 목종의 건강이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나빴다는 기록은 완전한 허구 또는 과장일 가능성이 높으며, 실제로 목종이 후사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했다면 차라리 자신의 동성애 성향으로 후사를 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44]

5.3. 목종의 권력과 정치력

기록에서는 목종을 한마디로
'김치양과 천추태후가 나라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여 전횡을 일삼는데 어머니에게 가로막혀 이를 저지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되려 유행간 등을 지나치게 총애하여 더욱 정치를 어지럽게 만든 유약하고 무능한 군주'
로 묘사하는데, 전술했던 목종의 의욕적이고 적극적인 국정 운영 기록과 더불어, 기록을 연구해보면 볼수록 이를 의심케 하는 정황들이 많다.

1) 목종은 자신의 의지로 유행간과 유충정을 권신으로 만들고, 방해가 되는 이주정을 지체없이 서경으로 보내는 등 인사권을 마음대로 행사했다.
2) 목종은 대량원군 즉위 계획을 진행하면서 채충순, 최항, 황보유의, 김연경, 문연, 고적, 이성언, 강조 등 상당한 수의 신하들을 자신의 뜻대로 좌지우지했다.

이 기록들은
'김치양이 인사권을 독점하여 온 조정이 그의 일파로 가득 찼다.'
는 기록과 정면으로 배치되며, 목종 개인만을 보더라도 재위 기간 동안의 젊은 나이와 즉위의 정통성으로 볼 때 군주로서의 권력이나 정치적 기반이 약할 이유가 전혀 없다.

또한, 기록에서 목종이 김치양을 내치지 못한 이유를 김치양과 천추태후의 권력이 강해서가 아니라, '천추태후의 마음이 상할까 두려워서'로 드는 것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바꿔 말하면, 목종에게는 김치양을 제거할 권력은 있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고려 말의 대학자 이제현은 논평에서
'역사를 거울삼아 대비했어야 했다.'
라며 목종을 비난했는데, 반대로 우봉 최씨 세습 무신 정권에 휘둘린 고종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었으며, 되려 잘 참아서 왕실을 회복했다.'
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고종 이전, 무신정권 시대에 재위한 강종, 희종, 신종에 대한 《고려사》의 논평들 역시 하나같이 라고 서술하는 것과 목종에 대한 논평 내용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 목종이 전술했던 왕들과 달리 권신들(김치양과 천추태후 및 그들의 일파)을 제압할 권력은 있었음을 사관들의 논평을 통해서도 예상할 수 있다.

그리고 목종이 대량원군 후계 작업 과정에서 보인 치밀함은 전술했듯이 그가 위독했다는 사실을 의심케 하는 근거이면서 그의 정치력도 재고하게 만든다. 목종은 끝까지 유행간을 총애했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유행간이 자신의 계획에 방해가 되자 채충순에게
'유행간이 모르게 보안을 유지할 것'
을 당부했고, 마찬가지로 방해가 되는 변절자인 이주정을 서경으로 보냈다.

얼핏 보면 보안 유지를 위한 당연한 조치이니 대단찮아 보이나, 눈여겨볼 것이 목종은 이주정을 서북면 도순검'부'사로 삼아 서경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그 직책은 당연히 서북면 도순검사의 직속 부하인데 당시 서북면 도순검사는 강조였다. 요사》에는 강조가 서경 유수였다고 했으니 어떻게 봐도 목종은 이주정을 강조에게 보낸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목종은 김치양과 천추태후 몰래 이주정을 제압하기 위해 그를 강조의 직속 부하로 보냈고, 강조에게는 수도 개경으로 와서 자신을 호위하라는 명령과 함께 이주정을 제압 또는 제거를 지시하는 내용의 책략을 구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추가로 목종은 수방(水房)의 서리들을 유행간과 유충정에게 나누어 통솔하게 했는데[45] 이는 측근일지라도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비대화되는 것을 막기 위했던 조치로 볼 수 있다. 실제로 목종은 유행간이 대량원군 후계 작업에 반대하자 그를 배제하고, 유충정을 통해 채충순과 최항을 동원할 수 있었으므로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이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하면 목종의 권력과 정치력은 사실 기존의 인식과는 달리 상당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5.4. 김치양과 천추태후 일파의 권세

전술했듯이 목종의 왕권에 대해서는 약했는지를 의심하게 하는 정황들이 많은 반면, 김치양과 천추태후의 권세는 기록에서 묘사되듯이 온 나라의 요직을 그들의 일파로 채워 왕이었던 목종도 막을 수 없었고, 심지어 고려의 사직까지 위태롭게 할 정도로 강했는지를 의심케 하는 정황들이 많다.

일단 전술했듯이 많은 신하가 목종의 대량원군 후계 작업에 참여했으며, 목종에 의해 이주정이 서경으로 가는 것을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그저 수수방관했다. 이주정은 목종의 입직신료(入直臣僚)라서 김치양과 태후로서는 목종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데 훌륭한 정보원이었음에도 말이다.

또한, 김치양과 천추태후가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면 당연히 상당한 군권(軍權)도 있었을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은 획득이든 유지든 무력을 바탕으로 하며, 어느 나라이든 최고 권력자에게 국군 통수권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그 이유이고, 그래서 마오쩌둥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라고 말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강조의 정변에서 김치양과 천추태후 일파는 목종이 대량원군을 데려오는 계획을 진행하고, 강조가 수도 개경으로 진입하는 동안 어떠한 군사적 대응도 하지 못한채 말 그대로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목종이 대량원군을 호위하기 위해 보낸 인원은 10명 정도였고, 그나마 황보유의 같은 문신이 포함된 숫자였다. 대량원군이 가까이 왔을 때 그를 영접하고 호위하기 위해 목종이 개성부참군(開城府參) 김연경(金延慶)과 함께 보낸 병력도 100여 명이었다.[46] 그런데 김치양은 목종이 대량원군을 데려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며칠 간 눈치만 살폈다고 한다.[47]

김치양과 천추태후 두 사람이 강조를 막으려 했던 조치 또한 기록상으로 볼 때 군대를 동원한 것이 아니라, 기껏해야 천추태후가 강조의 소식을 듣고 절령에 사람을 보내 통행을 제한한 것이 전부였다. 백번 양보해 실제로는 그들이 강조를 막으려고 군대를 동원했었는데 기록이 누락되었다고 가정해도 결국 강조는 개경 진입에 성공했으니 김치양과 천추태후는 방어자의 이점을 업고도 5,000명 정도의 군대를 막지 못할 만큼의 병력만을 동원한 것이었다. 태후가 강조의 움직임을 파악해서 절령을 봉쇄했고, 강조의 아버지가 이 봉쇄를 넘어 아들인 강조에게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 종을 보냈으며, 그 편지를 읽고 강조가 군대를 동원했으니 태후와 김치양이 강조의 움직임을 몰랐거나 대비할 시간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서 김치양과 천추태후가 인사권을 장악해서 모든 요직에 자신들의 사람들을 앉혔고, 그 권세를 토대로 반란을 계획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사실이라면 군부의 요직들은 김치양 일파가 독점 또는 상당 부분을 차지했어야 정상인데[48] 목종이나 강조의 움직임을 알고 있었고, 대비할 시간 또한 충분했던 그들이 이렇듯 많은 군사력을 동원한 정황이 전혀 없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더군다나 당시 고려에서는 조선과 달리 사병(私兵)도 합법적으로 거느릴 수 있었다. 김치양이 재산을 크게 불려서 300여 간에 달하고 정원과 호수마저 화려한 집을 지을 정도였다면 사병을 육성할 재력도 그에게 충분히 있었을 것이고, 하다 못해 그와 천추태후의 친족들 및 따르는 일파들이 많았다면 그들의 사병들만이라도 동원해서 강조의 군대까진 몰라도 100여 명의 대량원군 일행은 쉽게 제거할 수 있었을 텐데 기록상으로 보면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목종의 행보와 강조의 움직임을 모두 알면서도 말 그대로 가만히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렸다.

김치양과 태후 일파의 세력이 크지 않았음을 직접 드러내는 기록도 있다. 강조는 정변 이후 유행간과 김치양 부자를 포함해 7명을 처형하고, 역시 양쪽 모두를 합해 30여 명을 귀양보냈는데 이는 당시 조정을 양분한 두 일파를 전부 제거하는 정변이었음에도 피를 굉장히 적게 본 것이었다.[49] 곧 있을 거란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어 인재 손실을 최소화할 필요성이 있었음을 고려해도 불온한 인물들을 숙청하지 않았다가 그들이 전시에 변절하면 엄청나게 위험하므로[50] 강조가 인재 손실을 염려하여 반드시 제거해야 할 사람들까지 살려뒀을 가능성은 낮다. 따라서 이 대목은 분명 김치양과 태후 일파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음을 드러내고 있다.
천추태후가 목종이 (당시로서는 장성한 나이인) 18세임에도 섭정을 했다.
는 기록은 흔히 읽는 이들로 하여금 당시 기준으로 18세는 장성한 성인으로 여기게 하면서, 섭정은 불가피한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행하는 것이라는 사실들을 떠올리게 하여, 섭정으로서 불필요한 권력을 휘두르는 천추태후와 그와 대비되게 군주로서 큰 약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통제하지 못하는 유약한 왕 목종의 모습을 연상하도록 한다.

그러나 이 기록이 사실이라도 '천추태후는 권력욕이 강했다.'는 근거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목종이 천추태후에게 재위 내내 휘둘렸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는 것이 목종은 18세에 왕위에 올랐으며, 12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다시 말해서 목종이 친정해도 되는 상황인데 천추태후는 장기간 섭정을 계속하며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고, 목종은 이에 속수무책이었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기록이 사실임을 가정하면 내용상으로는 거짓이 아니면서,
'목종이 태후 때문에 김치양을 제거하지 못했고, 정변 직전에 위독했다.'
는 기록과 함께
'정변 직전의 고려는 목종이 막강한 권력을 가진 천추태후와 그녀의 비호를 받는 김치양을 제압하지 못해 정치가 어지러웠다.'
는, 사실과 전혀 다르거나 과장된 상황을 암시하여 현종의 집권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의 서술일 수 있다.[51] 쉽게 말하면 목종이 비록 장성한 상태로 즉위했으나, 재위 초기여서 그가 국정을 전부 파악하고 운영하는데 어려움이 있자 천추태후가 왕실의 큰어른으로서 잠시 정치에 참여한 것 정도의 사실을
'현종의 집권 이전 고려는 군주인 목종이 18세임에도 불구하고, 천추태후가 섭정하며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비정상적인 모습이었다.'
로 비약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진짜 천추태후가 '섭정'이었는지도 의문이다. 조선시대의 《 동사강목》에서는 이 대목을
“어머니 황보씨를 높여서 왕태후(王太后)로 삼고, 함께 청정(聽政)했다.”
라고 서술했는데, '(수렴)청정'과 '섭정'은 엄연히 다르다.

수렴청정(垂簾聽政)은
'임금의 뒤에서 발을 내리고(수렴=垂簾) 신하들의 의견을 듣는다(청정=聽政)'
라는 뜻으로 청정의 주체가 특정 날짜에 군주와 조정에 동행하여 조언하고, 반문을 받는 형식이었다. 세자가 받는 후계자 수업의 일종인 대리청정(代理聽政)도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반면 섭정(攝政)은 전한 초기 여후의 '임조칭제'(臨朝稱制)에서 비롯되었다. 여후는 황제를 대신해 조회에 참석하고, 명령을 내렸는데 이 여후의 명령을 (制)라고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한 마디로 청정이 임금을 '보좌'하는 정도였다면 섭정은 임금을 '대신'하여 정치를 하는 것이었는데 전술했듯이 목종은 섭정을 받을 이유가 전혀 없었으니[52] 천추태후의 정치 관여는 최대로 따진다 해도 《동사강목》에서 쓰인 '청정'이란 표현이 알맞을 것이다.

그러나 '청정'이란 것이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막후정치인데 전술했던 목종의 행보를 천추태후가 막후정치를 행하던 실세라고 볼 수도 없다. '막후정치'의 실세는 왕명을 대신하는 결정을 내릴 수 없음은 물론 임금과 함께 정전에 가는 일조차 드물 정도로 '섭정'보다는 직접적으로 드러내며 정치를 하는 측면은 적었으나, 그래도 인사권만큼은 확실히 장악하여 주요 보직 상당수에 자신의 측근들을 임명했다. 그들이 실세 권력자와 함께 먼저 국사를 논의하여 결정된 사안을 시행할 것을 임금에게 요구하거나, 반대로 임금이 먼저 그들과 상의한 후 그들이 실세 권력자에게 임금과 논의한 사항을 전달하면 실세 권력자가 가부 또는 수정할 것을 논의하여 임금에게 요구하는 형태로 진행되면서 임금에게는 그에 대한 거부권이 거의 없다고 볼 정도는 되는 것이 바로 막후정치였다.

얼핏 보면 막후정치의 대명사인 흥선대원군 신정왕후 조씨와 동맹을 맺고, 운현궁을 거점으로 삼은 후 신안동 김씨 세도정치에 의해 배제되었던 전주 이씨 친족들을 기용하는 방식으로 정치를 행했으니 천추전을 거점으로 김치양과 함께 정치를 한 천추태후와 가장 유사한 형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명목상 청정을 끝내고도 죽을 때까지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자신의 아들인 고종의 왕위를 위협하며 갈등을 빚은 흥선대원군과[53] 목종이 자신과 김치양을 제압하려고 군대를 움직이는데도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던 천추태후 황보씨의 권세가 동일했다고 볼 수는 없다.

생전 천추태후가 여후 서태후는커녕 정희왕후 윤씨, 문정왕후 윤씨, 정순왕후 김씨, 신정왕후 조씨, 하다 못해 명성황후 민씨가 가졌던 권력 정도는 있었는지, 후술할 그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보들을 종합하여 고려하면 이러한 의심은 더욱 커진다.

5.5. 김치양과 천추태후 일파의 행보

일단 기록에서는 기괴한 초상화와 종에 새겼다는 글귀를 김치양이 역심을 품고 있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로 드는데, 너무 추상적인 서술인데다 그 그림이나 글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나 해석이 담긴 기록조차도 전혀 없다. 이는 후술하겠지만 현종이 즉위 전에 지었다는 두 수의 시들이 기록에 남아있는 것과 대비되며, 그 초상화와 글귀의 내용이 명백히 역심을 드러냈다면 현종에게 유리한 사실임에도 기록에서 누락된 것은 미심쩍은 대목이다.

또한,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역모 계획이 자신들의 아들을 왕(목종)의 후계자로 만드는 것이었다는 기록도 매우 부자연스럽다. 물론 김치양이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 했다면 이는 역성(易姓)[54]이므로 군사를 동원하지 않았더라도 반역임에 틀림없으나, 김치양과 태후가 목종도 속수무책일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쥔 상황에서 자신들의 아들을 옥좌에 앉히려고 생각해 낸 방법이 '목종의 후계자로 만든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봤을 때 개연성이 떨어진다.

김치양과 태후의 이 계획은 김치양 아들의 장성과 목종의 노쇠가 동반되어야 하는데, 기록상 태후와 김치양은 이 계획을 그들의 아들이 태어난 1003년에 세웠다. 그런데 당시 목종은 20대 초반이었고, 설령 1009년에 이 계획을 세웠더라도 김치양의 아들은 겨우 7세이고, 목종은 30세의 어엿한 청년이었다. 몇 년이 될지 몇십 년이 될지 모르는 반란 계획을 세우는 것은 너무 이상하고 갑작스럽다.[55] 실제로 이 계획이 적당한 시기에 창칼을 앞세워 목종을 협박해 강제로 후계자 자리를 얻어낸다는 계획이라 해도 이상한 것이 그렇게 되면 급작스런 군사 반란으로 목종을 폐위시키는 것보다 명분적인 측면이든 성공 확률이라는 실리적인 측면이든 아무런 이점이 없다. 순순히 역성을 허락하고 자신의 손으로 사직을 끝낼 왕은 절대로 없으므로,[56][57] 어차피 저항을 받아야 된다면 갑작스런 군사 반란을 계획하는 것이 훨씬 개연성이 높다.

물론 위화도 회군 이후의 태조 이성계, 무인정사 이후의 태종 이방원, 계유정난 이후의 세조 이유, 12.12 사태 이후의 전두환이나 아예 생전에 왕좌에 오르지도 못한 조조 사마소 등 실권자가 하루빨리 왕좌에 앉을 기회만을 호시탐탐 기다리며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도 권력과 위상은 먼저 확고히 다지고 더더욱 키워나가지만, 전술했듯이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강조의 정변 당시까지도 그렇지 못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정황들이 많다.

더군다나 조선과 달리 고려는 지방 분권적인 측면이 강했고, 심지어 초기라면 왕실이 대표인 호족 연합 정권에 가까웠다. 존속 기간을 보더라도 당시 고려 왕실은 아직 100년도 되지 않았으므로 모든 백성들과 신하들이 고려 왕실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들의 의식에 자신들은 고려의 신민이라는 생각과 왕씨 사직에 대한 충성심이 확고히 자리잡힌 상황이 아니었다.[58][59] 훗날 고려 왕조에서 일어난 이자겸의 난, 무신정변, 이성계의 조선 개창 등과 비교해도 반란이 성공하기 쉬운 상황이었는데도 김치양과 천추태후가 이런 행보를 보였다는 것은 굉장히 부자연스럽다.

대량원군 암살 시도 기록은 개연성은 고사하고 황당할 정도이다. 일단 김치양과 천추태후의 아들이 태어나서 그들에 의해 대량원군이 강제로 승려가 된 해가 1003년이고, 강조의 정변은 1009년에 일어났으므로 그들은 자그마치 6년이나 궁 밖에 살면서 변변한 호위도 못 받는 대량원군을 제거할 여유가 충분히 있었다. 경호가 없다면 자객이나 방화가 독살보다 더 확실한 제거 방법이기도 하고, 이를 차치해도 독살이 실패했다면 태후와 김치양이 다양한 방법의 암살 시도를 했어야 정상이며, 실제로 있었다면 상세히 기록해서 김치양과 태후를 비난할 수 있는데 기록된 구체적인 암살 시도라곤 고작 독살 미수 단 하나뿐이다. 두루뭉술하게 태후가 대량원군을 죽이려 여러 번 사람들을 보냈다는데 이 암살자들로부터 대량원군을 지켜낸 건 오직 진관이라는 노승 한 명 뿐이고, 그가 6년 동안 고려 최고의 권력자들이 계획한 암살 시도를 저지한 방법이란 것이 대량원군을 구덩이에 숨긴 후 찾아 온 암살자들에게 "대량원군께서는 현재는 멀리 놀러나가셨소!"라고 둘러대고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종합하면 '막강한 권력을 가진 김치양과 천추태후가 자신들의 계획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인 대량원군을 제거하려 했는데 궁 밖에서 변변한 호위도 못 받는 그를 확실히 제거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할 생각도 않고, 오로지 독살만을 고집하다가 번번이 노승 한 명의 거짓말에 속아서 6년 동안이나 실패했다.'는 황당한 결론이 나온다.

역모란 것은 실패하면 자신과 주변인들의 목숨을 잃게 만드는 것으로, 당연히 당사자는 성공을 위해 치밀하게 계획하여 분명하고 신속히 행동하는데, 이렇듯 김치양 일파에게서는 이런 모습을 전혀 찾을 수 없다.[60]

전술한 모든 것을 종합해 고려하면 목종과 천추태후, 김치양과 관련된 모든 기록에 미심쩍거나 서로 모순되고 말도 안 되는 부분들이 매우 많아서 '군주 목종조차도 도저히 통제할 수 없을 만큼 김치양과 천추태후의 권세가 고려를 좌지우지했고, 심지어 그들이 역모를 계획하여 고려 왕실이 위태로울 정도였다.'는 정변의 배경이 되는 상황 자체가 심히 의심된다.

5.6. 유행간의 대량원군 즉위 반대

유행간은 간신 여부와 별개로 엄연히 목종의 친위 세력이었기에 김치양과 천추태후 일파와는 정적 관계에 있었다. 따라서 김치양의 아들이 왕이 되면 유행간 본인은 숙청 대상 1순위가 되므로 유행간은 왕씨 사직과 목종에 대한 충성심 여부를 떠나서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대량원군의 즉위에 무조건 찬성해야 앞뒤가 맞는다.

그런데 그는 같은 처지에 있었던 유충정과는 달리 대량원군의 즉위에 반대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보인다. 유충정이 목종의 후계 작업에 적극 참여하여 채충순과 최항에게
"내가 가면 수행원이 많아 보안이 새어 나가므로 두 분께서 손수 오시오."
라고까지 했는데, 이것도 가까이에 있는 유행간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목종은 강조가 유행간 제거를 주청했을 때,
"무슨 말인지 이미 알고 있소!"
라며 거부하다가 이현운이 하도 행패를 부리니 겁을 먹고 비로소 강조에게 유행간을 보냈다고 한다. 목종은 유행간이 대량원군 즉위를 반대하며 자신의 뜻을 거스르자 그를 철저히 배제하고 자신의 계획을 진행했지만, 결국 마지막까지 그를 비호한 것인데, 이것도 참 이상한 대목이다.

아마도 유행간이 김치양 일파의 회유로 이주정처럼 변절했는데 목종이 이주정의 경우와 달리 구체적으로 그 사실을 파악하지 못 했을 수도 있고, 변절이 아니라 유행간이 김치양과는 별개의 목적으로 대량원군 즉위를 반대했을 가능성도 더러 있다. 설사 전자라고 해도 목종에게 대량원군 후계자 책봉을 반대했다면 이유를 들었을 것인데 타당성이 전혀 없는 말을 했다가는 변절 사실이 탄로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므로 나름의 일리 있는 주장을 했고, 그래서 목종은 부득이하게 유행간을 자신의 계획에서 배제하되 그를 내칠 의도는 없었다고 보여진다.

5.7. 궁궐 화재

전술했듯이 목종은 실제 위독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목종이 병을 핑계삼아 신하들도 만나지 않고 누워 있었던 것은 정황상 다른 사유때문이었을 것이다. 기록에는 목종이 앓아 누운 원인을 궁궐의 기름 창고에 화재가 나서 창고는 물론이고 전각이 불탔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 화재 기록에 매우 의미심장한 사실 두 가지가 있다.

1) 천추태후의 거처 천추전(千秋殿)에 옮겨붙은 것.
2) 당시 궁궐 안에서 연등행사가 벌어지고, 목종이 이에 참여한 것.

상상에 많이 의존해야 하나, 이 화재가 어머니인 태후를 의식해 정치적으로 김치양을 제거할 수 없으니 사고를 위장해 김치양을 제거하기 위해서 목종이 의도한 화재일 가능성이 있다. 아무 이유도 없이 궁궐 안 전각에 느닷없이 불이 나면 방화라는 것이 까발려지는 건 시간문제이므로 일단 천추전과 매우 가깝고 큰 불을 내기 용이한 기름 창고에 몰래 불을 내 천추전을 태우는 큰 사태를 발생시킨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럴 때 목종 자신의 어머니인 태후가 천추전에 함께 있어선 절대로 안 되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김치양 제거가 목표여도 어머니까지 덤으로 죽게 할 수는 없었던 효자 목종은 궁궐 안에서 연등행사가 벌어지는 때를 노린 것이다. 왕궁 안에서 벌어지는 왕실 행사, 더군다나 군주가 참석하는 행사라면 왕실의 최고 큰어른인 태후도 반드시 참석하는 것이 기본 도리이므로 연등 행사에 참석하느라 태후가 천추전을 비우고 김치양만 남은 그 절호의 기회를 노려 계획을 시행한 것이다.

물론 말 그대로 가설이긴 하나, 일단 이것이 사실이고 전술한 목종의 건강이 실제로는 나쁘지 않았다면 이후에 목종이 병을 이유로 두문불출한 이유도 여러 가지로 추론이 가능하다. 자신의 계획이 실패해서 낙심하여[61] 정말로 스트레스 때문에 건강이 나빠졌을 수도 있고, 결국은 어머니를 거스르고 김치양을 숙청하는 것이 정녕 옳은가를 고민하고 확정되면 은밀히 진행하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으며, 위독한 척 연기하여 김치양의 반란을 유도해 확고한 숙청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다.

5.8. 대량원군의 승려 생활

물론 고려시대에는 왕위 계승권이 없는 왕자들을 출가시켜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했는데 그러한 사람들을 소군(小君)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정당한 왕위 계승권자가 있을 때 그에게 왕위 계승권이 없는 왕자들이 정치적으로 부담을 주는 일을 막고자 한 것이었고, 당시 목종의 아들이 없을 경우 유일한 왕위 계승권자였던 대량원군은 그에 해당되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에 기록에서는 천추태후가 자신과 김치양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서 강제로 한 것이라고 했지만, 전술했듯이 목종의 권력과 정치력이 태후와 김치양에게 밀리지 않았다고 볼 여지들과 실제로 목종이 마음을 먹자 순식간에 후계자 작업이 진행된 것, 태후와 김치양이 목종이나 조정 신하들에게 드러내놓고 '자신들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데 현재 유일한 왕위 계승권자인 대량원군이 부담돼서 출가시킨다.'라고 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대량원군의 출가에 목종이 동의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는 권력 구도 문제로 추정된다.

강조의 정변 직전 대량원군을 보호하려는 목종의 행보 때문에 신빙성을 의심할 수 있으나, 입지가 확고해진 후계자의 위상과 권력이 미래를 염두에 두려고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재임 중인 군주를 위협할 정도로 커지거나, 심지어 능가하여 오랜 시간 함께 한 동지나 부자지간이라도 예외 없이 갈등과 견제가 일어나는 예는 수없이 많다.

더군다나 대량원군은 당시 유일한 왕위 계승권자였다.[62] 왕조 국가에서 국통을 이어나갈 유일한 존재가 재임 중인 군주를 능가하는 위상과 영향력을 지니기는커녕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위험한 환경에 방치되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따라서 전술한 모든 것들과 구체적으로 기록된 대량원군 암살 시도가 독살밖에 없는 미심쩍은 정황, 실제로 목종이 치밀하고 상당한 정치적 감각의 소유자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개연성있는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6. 정변의 재구성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지므로 많은 역사적 기록이 당시 집권자와 그 세력들에게 유리하게 쓰여지는 것이 사실이고, 이 때문에 당대의 진실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 정변의 최종 승자인 현종이 자신의 집권에 대한 정당성을 높이기 위해 직전의 권력자들인 김치양, 천추태후, 목종은 물론 정변을 실질적으로 진행한 강조에 대한 기록들까지 전부 조작했을 가능성도 물론 있다.

그러나 그런 논리로 역사적 사료를 모두 의심하고 무시한다면 역사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의미가 없다. 또한, 이 정변을 분석하기 위한 주요 사료인 《 고려사》와 《 고려사절요》는 《 조선왕조실록》과 달리 정변으로부터 먼 훗날인 조선 시대에 당대의 기록들을 종합해 작성한 것으로, 당시 집권자인 현종이라 해도 모든 역사적 기록들을 조작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더군다나 목종과 강조에 대해서는 유리한 기록들도 존재하는데 관련 기록들이 모두 현종의 정통성을 높이기 위한 창작이라면 이런 기록들이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 따라서 많은 기록들이 사실이고, 다만 현종에게 유리하게 약간의 윤색이나 과장이 가미되었다고 가정하면 개연성이 있는 이야기를 재구성할 수 있다.

우선 정변의 핵심 인물인 현종과 강조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고려사》 <현종 총서>를 보면 현종이 즉위 전에 시냇물과 뱀을 두고 지었다는 2개의 시가 있는데, 이를 보면 확실히 현종은 강조의 정변 이전부터 고려의 왕위에 오를 야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ruby(一條流出白雲峯, ruby=일 조 유 출 백 운 봉)] 한 가닥 물줄기 백운봉(白雲峰)서 솟아나와
[ruby(萬里蒼溟去路通, ruby=만 리 창 명 거 로 통)] 머나먼 큰 바다로 거침없이 흘러가네.
[ruby(莫道潺湲巖下在, ruby=영 도 잔 계 암 하 재)] 바위 아래 샘물이라 업신여기지 말아라
[ruby(不多時日到龍宮, ruby=불 다 시 일 도 용 궁)] 머지않아 용궁에 다다를 물이니까.
<시냇물>(溪水).

[ruby(小小蛇兒遶藥欄, ruby=소 소 사 아 요 약 란)] 뜰 난간에 또아리 튼 작은 뱀 한 마리
[ruby(滿身紅錦自班斕, ruby=만 신 홍 금 자 반 란)] 붉은 비단같은 무늬 온 몸에 아롱지네.
[ruby(莫言長在花林下, ruby=막 언 장 재 화 임 하)] 꽃덤불 아래서만 노닌다고 말하지 말라
[ruby(一旦成龍也不難, ruby=일 단 성 용 야 불 난)] 하루 아침에 되기 어렵지 않을 테니.
<작은 뱀>(小蛇).[63]

그리고 강조는 여러 가지 기록을 종합해 볼 때 확실히 고려의 충신이었다. 정변 직후 군사들이 역성혁명에 성공한 줄 알고 만세를 부를 때 마음만 먹으면 스스로 왕이 될 수 있는 상황임에도
"아직 다음 임금께서 오시지도 않았는데 어찌 이러는가?"
라며 수습했고, 제2차 여요전쟁이 일어나자 최고 권력자임에도 스스로 전장에 나아가 싸웠으며, 통주 전투에서 거란군에게 참패하고 사로잡혀 포로가 된 후 요성종에게 직접 투항도 권유받고 살을 베어내는 고문도 당했지만 끝내 자신은 고려의 신하라며 투항을 거부하고, 자신과 반대로 항복한 이현운을 발로 차며 욕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이 모든 기록들을 고려하면 강조가 고려에 대한 충성심이 확고한 인물이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추가로 강조 일파로 분류되는 인물들인 하공진 양규를 분석하면 이는 더욱 확실해진다. 하공진은 정변 당시 강조에게 가담했는데 정변 직후 일어난 제2차 여요전쟁에서 많은 신하가 현종을 버리고 흩어지는 상황임에도 끝까지 피난가는 현종을 수행하다가 추격하던 거란군에게 거의 따라잡히게 되자 스스로 거란군 진영을 찾아가서 요성종
"왕(현종)께서는 여기서 수천 리 떨어진 남쪽으로 가셨습니다."
라는 거짓말로 속여 거란군의 철수를 이끌어냈다. 이때 요나라로 끌려가 인질이 된 하공진은 강조의 경우처럼 요성종에게 직접 거란의 신하가 될 것을 권유받고 장가까지 새로 가는 후한 대접을 받으면서도 결국 고려로 도망가려다가 발각되었고, 끝끝내 요성종의 투항 요구를 거부하다가 처형당했다.[64]

강조의 정변에 양규가 참여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정변 이후 거란과의 전쟁이 임박한 상황에서 강조의 후임으로 서북면 도순검사가 된 것으로 볼 때 강조의 일파였음이 분명하다. 그는 제2차 여요전쟁의 서전인 흥화진 전투에서 승리했고, 통주 전투의 참패 이후 거란군이 강조의 명령을 사칭해 항복을 권하자
"나는 왕명을 받고 왔으니 강조의 명령은 받지 않는다."
라며 거부했으며, 남하하는 거란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활약으로 하공진과 더불어 거란군의 철수를 이끌어냈을 뿐만 아니라 철수하는 거란군을 공격해서 포로가 된 많은 고려 백성을 구출하고 장렬히 전사한 인물이었다. 전술한 두 명과 강조를 볼 때 (비록 이현운 같은 예외도 있으나) 강조 일파가 고려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집단이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황해도 《신천 강씨 족보》에 따르면 시조부터 14세손까지 오직 독자로 가계가 이어지는데 그중 강억이란 인물이 이부상서를 역임했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강조가 역임한 직책이 이부상서라는 것과 '조'(兆)는 '억'(億)의 10,000배라는 이유로 반역자로 간주되는 자신들의 직계 조상을 족보에서 지울 수도, 그대로 드러낼 수도 없었던 후손들이 이렇게 이름을 바꿔 적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65] 다시 말해서 강조와 그의 일파들은 고려의 중심 세력인 패서 계열의 인물들로 추정되므로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을 정황 또한 충분하다.[66]

또한, 목종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강조가 개경 진군을 한참 주저했다는 기록으로 봤을 때 강조는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심과 별개로 목종 개인에 대한 충성심도 갖고 있었던 듯 하다. 《고려사》 <강조 열전>에서
'강조는 목종 때 여러 관직을 거쳐 승진했다.'
라고 되어 있으므로 개연성이 높다. 도순검사 같은 사(使) 계통의 관직은 토착 세력과 달리 현지를 통제하기 위해 중앙에서 파견되어 그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이므로 강조가 서경에서 가지고 있었던 권한과 지위는 철저하게 중앙과 자신을 임명한 임금의 권위에 기반한 것이었다. 원래 중앙의 추밀 대간으로서 지방에 파견된 것이었기 때문에 강조가 다른 토착 세력과 달리 중앙의 계승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본론으로 들어가면 일단 정변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이 기록에서 묘사한 대로 목종의 왕위와 고려 왕조가 위태로울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나, 유행간과 김치양 등에 의해 나라가 몹시 어지러웠다는 것은 분명 사실인 듯 하다. 애국심이 강했던 강조는 오랫동안 정치를 어지럽히는 양쪽 세력 모두에게 불만을 품고 제거할 생각이 있었으나, 유행간 일파를 제거하려면 그를 비호하는 목종을 거슬러야 했으므로 차마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목종은 천추태후를 등에 업은 김치양의 권력이 점차 커지는 것을 우려하다가 자신의 유고시 왕통을 계승해야 하는 대량원군을 독살하려는 사건까지 일어나자 대량원군의 후계 구도를 확고히 하여 고려 왕조의 사직과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고 했다.

하지만 유행간은 이에 반대하는데 목종의 권력이 공고화되고 대량원군의 후계 구도가 확실해지면 김치양과 태후 세력 견제를 위한 자신의 필요성이 사라지므로, 그동안 많은 악행을 한 자신이 목종에 의해 숙청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고, 사실 이주정처럼 목종을 배신했는데 목종이 이주정의 경우와 달리 그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유행간이 둘 중 어느 쪽이었는지는 불명이지만 어느 쪽이었든 아마 그는 목종이 (동성애자였다는 것이 사실이라도) 부인도 있고, 불임이란 정황도 없으며, 나이도 젊으니 목종의 아들이 태어나길 기다리자고 주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이 아니라면 딱히 다른 왕위 계승권자가 없는데 대량원군을 반대할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종은 위독한 상태가 아님에도 칭병하며 보안을 유지하고, 또 다른 심복인 유충정을 통해 몇몇 신하들과 함께 대량원군 후계 계획을 계속 진행하면서 강조에게 자신을 호위하러 올 것을 지시했고, 강조는 이에 따랐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목종이 보안을 철저히 유지한 것이 되레 독이 되고 말았는데, 몇몇 신하들을 제외하면 목종을 만나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자, 목종이 위독하거나 또는 이미 죽었는데 이것이 숨겨지고 있다는 오해가 널리 퍼져 강조 부자가 잘못 판단한 것이었다. 강조는 위종정과 최창의 말,[67] 자신의 아버지가 보낸 편지의 내용을 믿고
'목종이 이미 죽었으니 김치양 일파뿐 아니라 목종의 비호를 받던 유행간 일파도 제거하여 정치를 바로잡겠다.'
는 생각으로 대군을 이끌고 개경으로 진군하게 된다.

그러나 강조는 진군 도중에 목종이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고민하게 된다. 목종이 아직 엄연히 살아 있으므로 강조 자신의 계획대로 유행간 일파를 제거하려면 그를 비호하는 목종도 함께 제거해야 되고, 그렇다고 계획을 중단했다가 나중에 이 사실을 목종이 알게 되기라도 하면 강조 자신이 반역죄로 처벌받게 되기 때문이었다. 목종에 대한 충성심으로 고민하던 강조였지만, 그의 부하들 모두 상황이 더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음을 주장하자 결국 목종까지 폐위할 결심으로 기존 계획을 강행한다.

이 대목의 신빙성이 의심된다는 주장도 있는데, 위화도에서 회군한 태조 이성계와는 달리 강조는 이미 목종으로부터
'개경으로 와서 나를 호위하라.'
라는 왕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목종의 생사 여부와는 무관하게 강조의 개경 진군은 왕명에 따른 것이었므로 문제가 없으니 목종이 살아 있다는 것이 강조가 진행하던 진군을 주저할 이유도, 주저하다가 강조와 그의 부하들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해서 정변 강행을 주장할 이유도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강조가 진군 도중에 자신이 알던 것과 달리 목종이 살아 있는 것을 파악했다면 목종이 자신에게 명령한 대로 개경으로 가서 목종을 호위하면 그만이었었고, 딱히 진군을 주저하거나 정변 강행을 결심할 이유도 없었으므로 이 기록은 정변 주체들(현종, 강조)이
'이 정변은 정권 장악을 위한 의도가 아니라 강조가 불가피한 상황에 처해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
이라고 정당화하기 위한 날조라는 주장이다. 이 시각에서 볼 때 강조는 목종에 대한 충성심 없이 단지 정권을 차지하려고 정변을 일으킨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므로 강조가 목종 또는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심과 목종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기록들, 더 나아가서 이 정변과 관련된 모든 기록의 신빙성도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강조는 개경 장악을 목적으로 병력을 5,000여 명이나 동원하여 진군하던 상황이었다. 김치양 일파가 목종이 동원한 100여 명 남짓의 대량원군 일행도 제압하지 못한 사실을 상기하면, 5,000여 명의 군대를 동원해서 개경으로 진군한 것이 목종의 호위를 위한 것이라는 변명은 통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당시 강조의 직책은 '서북면 도순검사'였으므로 그가 지휘하는 병력이 거란과의 국경이자 고려 제2의 수도인 서경(평양)을 지키는 정예 야전군 병력인 것까지 고려하면 강조 본인과 그의 부하들은 더더욱 반역죄를 피할 수 없으므로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

목종이 폐위되면서
'태후와 함께 통곡했다.'
라고 하는데, 이는 모자간의 지나친 권력 다툼으로 결국 둘 다 화를 입게 되었음을 한탄한 것으로 추정되며, 강조 휘하의 군사들이 만세를 부른 행동을 고려해보면 아예 역성혁명이 일어나 왕씨의 사직이 무너졌다고 생각하며 통곡했을 수도 있다.

추가적인 반란을 막기 위해 강조가 자신의 손으로 목종을 시해한 것도 확실해 보인다. 강조나 현종이 아니라면 목종을 죽여서 이익을 얻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두 사람 중 한 명 이상은 반드시 목종 시해에 개입한 것이 틀림없다.

다만 정말로 현종이 목종의 시해에 관여했는지의 여부는 현재로선 알 수가 없다. 조선 후기 안정복은 저서 《 동사강목》에서
'현종이 목종의 시해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거란에서 이 사실을 문책하자 비로소 알았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라며 현종도 목종 시해 개입자 중 하나임을 주장했다.[68] 그러나 정변 직후에 거란과의 제2차 전쟁이 일어났으니 당시 최고권력자인 강조가 작정하고 '목종이 자결했다.'는 거짓 보고를 현종에게 올리면서 현종 주변의 궁인들과 신하들에게 입단속을 시켰다면 그 짧은 기간 동안에 현종이 목종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몰랐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확실히 강조는 목종의 죽음에 매우 큰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목종은 전횡을 일삼는 유행간을 비호하는 등 문제가 있었지만 당시 고려는 중앙 집권 체제가 확립되었거나 장기간 존속되어 안정된 국가가 아니었으므로[69] 군주가 자신의 지위와 생존을 위해 친위 세력과 공생 관계를 맺고, 다소 지나칠 정도의 권력을 부여하는 것은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다.[70] 또한, 목종은 자신이 폐위된 상황임에도 책임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며 현종을 잘 보필할 것을 최항에게 당부했고, 정변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천추태후에게도 자식으로서의 효성을 다 했는데, 이를 통해 목종이 매우 선량하고 사람이 좋았음을 알 수가 있다.

무엇보다도 목종은 전술했듯이 여러 차례 강조를 승진시키고 후계 작업에도 참여시킬 만큼 신뢰했는데, 강조는 목종의 은혜와 신뢰도 배반하고 끝내 목종의 목숨까지 빼앗은 그야말로 배은망덕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정변 당시 최항이
'옛적에도 이런 일이 있었느냐.'
라고 강조에게 따지자 그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것, 목종 사후[71] 목종의 능호, 시호, 묘호를 모두 강조 자신이 직접 지은 것,[72][73] 거란군에게 통주 전투에서 참패해 정신적으로 무너진 강조가 목종의 혼령을 보고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시옵소서!"라며 잘못을 빌었다는 기록 등을 고려하면 강조는 '전횡을 일삼는 유행간 일파를 제압해 정치를 안정시킨다.'는 명분의 정당성이나 정변 당시 상황이 불가피했다는 것과는 별개로 강조 자신이 목종을 배신한 사실을 떳떳치 못하고 옳지 못한 행위라고 여기며 목종에 대해 마음의 짐을 가졌음이 분명하다.

또한, 강조는 전술했듯이 거란이 자신을 응징하겠다며 고려를 침공해오자 이례적으로 최고권력자이면서도 손수 대군을 이끌고 거란군을 막으러 전장에 나섰는데, 물론 정변 직후라 함부로 남에게 대군을 맡길 수는 없었고, 만인을 이해시킬 명분도 없이 왕을 폐위해버리고 시해한 자신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큰 전공을 세워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도 작용했을 수 있다. 그러나 전술했듯이 거란의 회유와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히 죽음을 맞을 정도의 강한 정신력을 가진 강조가 통주 전투에서 대패하자 정신적으로 무너지고 목종의 혼령을 떠올리며 사죄했다는 기록은[74] 그만큼 강조 본인도 목종을 시해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크게 느끼고 있었고, 그 때문에 일어난 국난을 자신의 손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으로 출전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현종의 경우도 그렇다. 전술했듯이 안정복은 《동사강목》을 통해 현종이 목종 시해 개입자 중 하나고, 강조와 더불어 정변의 주체였을 가능성을 주장했으며, 현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지었다는 두 시의 내용까지 고려하면 더욱 그렇게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어차피 목종에겐 왕위를 물려줄 아들도 없었고, 목종 본인 역시 믿을 수 있는 신하들과 함께 현종을 확실한 왕위 계승자로 세우려는 상황이었다. 분명히 왕위에 대한 야심이 있었다고 해도 정당히 왕위를 계승받을 예정이었던 현종의 입장에서는 실패할 경우 꼼짝없이 반역자로 전락해버리고, 설령 성공하더라도 정변을 주도한 강조에게 정치적 지분을 나눠줘야 하는 정변을 원할 이유가 없었기에 정변을 직접 주도했을 가능성은 낮다.

그러나 현종에게 최대한 유리하게 생각해도 그 역시 암살 위기에 처한 자신을 보호해주려 애쓴 목종의 죽음에 도의적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강조와는 달리 비록 상상의 영역이기는 하지만, 현종도 목종의 죽음에 대해 죄책감과 무거운 책임감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현종처럼 어린 시절 또는 왕위에 오르는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던 군주는 폭군이 되는 경우가 매우 많은데,[75] 되려 그가 고려 왕실의 중시조(中始祖)이자 한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 중 한 명이 된 것은 바로 자신이 옹립되면서 시해당한 목종에 대한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한 노력의 결과일 수 있다.[76][77]

선량했던 은인을 죽음으로 몰아 넣은 책임을 지기 위해 강조는 한국 역사에 드물게 최고권력자이면서도 스스로 전장에 앞장섰고, 현종은 온 힘을 다해 국난을 극복하고 태평성대를 열었다는 이야기가 성립된다. 물론 많은 부분을 상상에 의존해야 하나,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이야기이다.

7. 대중매체

사실 고려사 자체가 2000년 < 태조 왕건> 이후 정통 사극이나 퓨전 사극을 통해서 간간이 나오고 있지만,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그렇게 많은 드라마에서 비추지 못했다. 워낙 사료 자체가 적을 뿐더러 관련 인물들에 대한 평가 및 논란이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KBS의 사극에서 이 부분을 다룬 장면이 몇 있다.

7.1. 강감찬

1973년 작 KBS 강감찬에서는 해당 드라마 자체가 워낙 오랜 옛날 드라마인데다 필름마저 소실되었기에 정확한 내용은 확인할 수 없으나, 동아일보로 남아 있는 정보 일부에 따르면 목종이 대량원군에게 양위할 뜻을 강감찬에게 알려주어 강조의 반란을 획책했다거나 강조의 날조된 서약으로 인해 목종이 적성현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7.2. 천추태후


2009년작 KBS2TV 천추태후에서는 극 후반부에 이 사건이 먼저 조명되었는데, 드라마 자체가 역사 왜곡 천추태후 미화로 논란이 많은 편이라 사건 자체로도 왜곡이 많다. 강조의 개입 이후 목종의 최후는 과거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날 것 같아 눈치를 보던 이현운과 안패가 문화왕후의 지시대로 강조의 명령을 사칭해 살해한 것으로 각색했다.

7.3. 고려 거란 전쟁



2023년 작 고려 거란 전쟁의 메인 스토리로서 3회에서 이 사건이 다뤄졌다.

김치양이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기 위해 목종이 백성들을 불러모은 연회에 불을 질렀다가 이것이 크게 번진다. 김치양이 목종이 죽었다는 헛소문을 퍼뜨린 것과 동시에 군사들을 동원해 왕궁을 포위해 압박하자 목종은 사람을 보내 강조에게 김치양을 처단하라는 명을 내렸지만, 이 사람이 김치양의 군사에게 사살되면서 저지된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목종이 죽었다는 얘기를 들은 강조는 김치양을 몰아내고 대량원군을 새 임금으로 세우기 위해 군사를 이끌다가 목종이 아직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접한다. 이에 숙영지에서 고심하던 강조에게 이현운이 "그대로 진격합시다. 어차피 김치양을 몰아내야 하니, 변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고 말하자, 강조는 태후가 있는 한 목종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며 군사를 이끌고 개경을 공격하며, 유방, 탁사정, 하공진 등이 지휘하는 황실 호위군의 항복을 받고,[78][79] 강조가 따로 보낸 군사들이 김치양과 그의 아들 현을 그 자리에서 처형해 버린다.

목종은 강조의 심정을 이해한다면서도 강조를 진정시키기 위해 유행간을 붙잡아 앉혀놨지만, 강조는 "난 아무 죄 없다. 난 그저 황제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이 모든 게 다 황제의 탓이다."라며 목숨을 구걸하는 유행간을 망설임 없이 죽여버리고 황궁 안으로 들어가 저지하는 유충정까지 덤으로 살해하고 궁 안으로 들어가 목종과 천추태후를 개경 바깥으로 나가도록 한다.[80] 그리고 목종과 천추태후를 유배보내면서, 개경 바깥으로 나가자 미리 강조의 지시를 받은 부하들이 목종을 시해한다.

강조가 목종을 시해한 후에는 목종이 태자로 삼는다는 명을 받고 개경으로 오는 대량원군을 맞아들여 반란을 일으켜 목종을 시해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보위에 오르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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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디까지나 표면상의 명분일 뿐으로 실제로는 5년 전인 1004년 북송의 제3대 황제인 진종 전연의 맹을 맺어 당분간 양면전선의 걱정이 없게 된 요나라의 제6대 황제인 성종 야율융서가 본격적인 중원 진출에 앞서 후방에 있는 고려를 제압해두려고 한 것이었다. 마침 이 정변으로 고려의 내부 상황이 어수선했으니 요성종으로서는 적기였다. 내세운 명분은 제1차 고구려-당 전쟁과 같았으나, 실제 침공 의도와 당시 국제적인 상황으로 보면 조선의 병자호란과 흡사했다. [2] 寶齡, 군주의 나이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3] 김치양은 양기가 강해서 음경에 수레바퀴를 걸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4] 김치양과 같은 예가 후술할 현종의 부친 왕욱이다. 그는 헌애왕후와 마찬가지로 경종의 왕후이자 헌애왕후와 성종의 동복 여동생인 헌정왕후 황보씨와 사통하여 그녀를 임신시켰고, 이를 알게 된 성종에 의해 사수현(泗水縣, 현 경상남도 사천시)으로 귀양을 가 생을 마치게 되었다. 근친상간이나 과부의 정절 등의 문제가 아니라 왕후였던 여자와 사통한 것이 문제였다. [5] 이는 천추태후의 권력욕이 대단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군주가 즉위 당시 너무 어려서 섭정이나 수렴청정을 받더라도 보통 군주가 14 ~ 16세가 되면 본격적으로 친정이 시작되었다. 사회적으로도 그 나이대가 되면 장성했다고 여겨져 보통 그 나이대에 혼인을 많이 했고, 또한 남자면 군역의 의무도 부과되기 시작했다. 물론 조선 성종 명종은 20세부터 본격적으로 친정을 시작했지만, 성종은 형 월산대군을 제친 다소 무리했던 즉위와 성종의 정치적 후견인이자 장인인 한명회가 자신의 딸 공혜왕후의 요절 등으로 정치적 입지가 흔들리는 상황이었고, 명종은 수렴청정을 하는 모친 문정왕후가 한국사에 손꼽히도록 권력욕이 강한 여자였기 때문이다. 당시 기준으로 장성한 상태로 즉위했고, 어릴 때부터 궁에서 자랐으며, 이미 10세에 성종으로부터 왕위를 보장받았던 목종은 섭정이 굳이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명종과 유사하면서 오히려 더 심한 경우로 봐야 한다. 방계 계승이라 왕궁에서 나고 자라지 못해서 입지가 불안하여 16세에 즉위하고도 잠시 수렴청정을 받은 선조조차 고작 1년 후인 17세부터 정식으로 친정을 한 것을 고려하면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다. [6] 천추태후가 본래 권력욕이 강했을 수도 있지만, 성종에 의해 김치양과 생이별을 하는 경험을 통해 권력욕이 생겼을 수도 있다. [7] 《고려사》 <반역 열전> - 김치양 - 에서는 당시 상황이 ‘목종이 즉위하자 ~ 비할 데 없이 총애하면서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천추태후의 김치양 총애를 말하는 것인지, 목종도 처음에는 김치양을 총애했다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김치양은 목종 본인의 입장에서는 (본인의) 모친이자 선왕 경종의 왕후와 사통한 인간이니만큼 좋은 감정을 가졌을 리가 만무하고, 또한 당시 천추태후가 섭정을 했으므로 인사권과 결정권 모두 천추태후에게 있었을 것이니 전자에 무게가 더 실린다. 그러나 목종이 사통 사건 당시 너무 어렸고, 성종이 아무래도 왕실의 체면과 관계된 일이라 조용히 처리했었다면 목종이 김치양의 정체를 몰랐을 수도 있으므로 후자도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다. [8] 어느 왕의 재위 기간이냐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합문통사사인은 정7품~종6품, 우복야는 정2품 정도이니 그야말로 초고속 승진이었다. [9] 출처 : 《고려사》 <열전> - 경종 후비- [10] 출처 : 《고려사》 <폐행 열전> - 유행간 - [11] 음식을 먹기 전에 참새와 까마귀에게 던져줬다. (출처 : 《고려사》 <채충순 열전>) [12] 자신의 방 안에 구덩이를 파 놓고 대량원군을 암살하려는 사람들이 올 때마다 그 구덩이에 대량원군을 숨기고 위에 침상을 덮은 후 대량원군이 놀러 나갔다며 돌려보냈다. [13] 이에 훗날 왕이 된 대량원군은 신혈사를 진관사로 개칭했고, 진관사는 왕실의 많은 지원을 받게 되었다. [14] 이에 천추태후는 장생전(長生殿)으로 옮겨갔다. [15] 유충정은 거절했다고 한다. [16] 이주정의 벼슬이 《고려사》 <강조 열전>에는 전중감(殿中監), 《고려사절요》에는 지은대사 공부시랑(知銀臺事工部侍郞)으로 기록되어 있다. [17] 사실 이주정은 천추태후의 친족이었다고 한다. (《고려사》 <반역 열전> - 강조 -) [18] 어머니에게 막혀 김치양을 제압하지 못하고 있었던 목종이었으나, 자신의 유일한 후계자인 대량원군에 대한 암살 시도 사건에 유충정이나 이주정 등 자신의 병석 숙직까지 맡길 정도로 신뢰하는 측근들까지 김치양이 포섭을 시도하거나, 이미 포섭했다는 사실까지 접하자 왕씨의 사직을 지키기 위해 더는 망설일 수 없다는 위기감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19] 이때 유충정은 '자신이 가고 싶지만 나는 수행원이 많아서 보안 유지가 안 된다.'고 채충순과 최항이 오라고 했는데, 두 사람은 논의 끝에 ‘사사로운 일이 아니라 종묘사직에 관련되었으니 (유충정에게) 가야 한다.’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원래는 유충정과 그 둘의 관계가 좋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20] 일행이 많으면 행군이 더디다는 이유로 적은 사람만 지름길로 빨리 보내자고 채충순 등의 신하들이 건의했고, 목종이 동의했다. (《고려사》 <열전> - 채충순 - ) [21] 출처 : 《고려사》<열전> - 황보유의 - [22] 요사》(遼史)에는 서경(평양) 유수라고 되어 있다. 서경 유수는 보통 중서문하성의 재신이 겸직하고 개경에 머무르며 원격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경우가 많아서 실제로 현지에 머무르는 치안 및 군사 장관에 해당하는 순검사를 유수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다. [23] 《고려사》 <강조 열전>에는 이들이 모종의 이유로 조정에서 쫓겨나, 항상 조정을 원망하며 반란을 모의하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24] 현 황해북도 연탄군 자비령(慈悲嶺) [25] 그 종은 죽을 힘을 다했는지 강조에게 도착하자마자 죽었다고 한다. [26] 황보유의가 대량원군을 데려가려 하자 신혈사의 승려(진관으로 추정)가 또 대량원군을 해치려는 사람이 온 줄 알고 숨겨놨다가 황보유의가 자세히 설명하자 데려왔다고 한다. [27] 아마 유행간을 내치라고 강조가 간언했는데, 목종이 거절한 것으로 추정된다. [28] 출처 : 《고려사》 <반역 열전> - 강조 - [29] 쉽게 말하면 '왕이 신뢰했는데 되려 신하가 왕의 뒤통수를 친 적도 있었냐?'고 따진 것이다. [30] 이는 단순한 일이 아니라 아주 큰 사건으로 만약 강조가 군사들에게 호응했다면 고려 왕조가 끝나는 역성혁명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후술하겠지만 이 일을 통해 강조라는 인물과 당시 시대적인 상황을 간접적으로 파악해 볼 수 있다. [31] 말 그대로 나라를 양도한 공작이란 뜻이다. [32] 목종이 최항에게 새 임금(현종)을 잘 보좌할 것을 당부하며 ‘고향에 가서 늙고 싶으니 새 임금에게 그렇게 전해 달라.’고 했는데 목종의 친증조모이자 제4대 광종의 모후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 유씨(劉氏)가 충주시 출신이었다. [33] 이때 목종은 모후 천추태후가 말을 타면 직접 말고삐를 잡았고, 천추태후가 식사를 하면 직접 밥시중을 들었다고 한다. [34] 積城縣, 현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35] 黃州, 현 황해북도 황주군 [36] 대표적으로 서희가 있다. [37] 기록상에 드러난 인원만 약 250여 명 정도이다. 관리들에게도 인재를 천거하게 하여 천거된 자들의 행보에 따라 천거자에게도 상벌이 내려질 것을 공표했다. [38] 이에 병사들이 너무 힘들어하자, 목종은 군심을 달래기 위해 6위(六衛)에 소속된 병사들의 잡역을 면제해 주었다. [39] 각각 대표적인 예를 하나씩 들면 목종 시기에 등용된 조원(趙元)은 귀주 대첩으로 대표되는 제3차 여요전쟁에서 거란군 10,000명을 죽이거나 사로잡는 전공을 거둔 인물이었고, 목종 시기에 축성된 흥화진(興化鎭)은 두 전쟁 모두에서 고려에게 첫 승리를 가져다 준 전장이었다. [40] 물론 능력과 인성은 별개이므로 유능하면서도 부패한 사람도 얼마든지 있는 것처럼 전횡을 부리면서도 업적을 세울 수는 있다. 그러나 비교적 유능하다면 지지 세력도 상당할 것이므로 어지간히 전횡을 부리지 않은 이상 정변이 일어나고, 심지어 성공하기는 쉽지 않으니 여전히 의문이다. [41] 그 때문에 정사를 게을리했다며 비판하고 있다. [42] 채충순이 "제가 할 테니 힘 쓰지 마세요."라고 하니 목종이 "마음이 바빠서 힘든 것도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43] 어떠한 이유라도, 혹은 아무리 권력이 크다 해도 군주 또는 군주였던 자를 시해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엄청난 부담이다. 사마소가 자신을 공격한 조모를 휘하의 성제가 살해하자, "천하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겠는가!"라며 크게 놀라고 당황하다가 결국 성제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여 삼족을 멸한 것과 최충헌이 자신을 죽이려 했던 희종을 폐위했지만 죽이지는 않은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인조반정 성공 직후 인조와 반정 주도 신하들은 인목대비의 추인이 반드시 필요했으나, " 이혼(광해군) 부자의 목을 베어 오면 하겠다."는 그녀의 말에 입을 모아 "임금을 폐위한 적은 있어도 죽인 적은 없습니다."라며 반대했고, 원한에 사무쳐 있었던 인목대비도 "내가 좀 지나쳤다."고 동의한 것도 같은 맥락의 경우였다. 반대로 임금을 시해한 이의민의 경우, 이 점이 꼬투리잡혀 경대승의 집권기에는 몸을 사려야 했다. 물론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면 명림답부처럼 왕을 시해하고도 뒤끝이 좋은 사람도 있었지만 일단 묘사상 차대왕은 폭군이었다. [44] 후술하겠지만 동성애와 불임은 별개의 문제이나, 목종이 이성을 완전히 배척할 만큼 성향이 강했다면 후사를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45] 《고려사》 <폐행 열전> - 유행간 - [46] 출처 : 《고려사》 <황보유의 열전> [47] 출처 : 《고려사》 <김치양 열전> [48] 5공 노태우 정권 시절에 서울 근처에 있으면서 전투력을 보유한 제9사단 수경사, 대한민국의 최정예부대인 공수부대의 주요 보직을 하나회가 독점한 것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49] 심지어 문인위(文仁渭)라는 사람은 오랫동안 천추궁사(千秋宮使)로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태후의 최측근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이 성실하고 진솔해서 강조가 직접 변호하여 살려주었고, 훗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까지 되었다. (《고려사》 <반역 열전> - 김치양- ) [50] 최충헌 집권 당시 거란 유민들이 고려를 침입했을 때 천민에 불과한 양수척들이 거란군의 길잡이 역할을 해서 고려군이 크게 고전했는데, 전직 또는 현직 조정 신료나 장군의 배신이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51] 이와 같은 맥락으로 신빙성을 의심받는 경우가 훗날 1차 왕자의 난에 대한 기록인데 당시 노쇠한 태조 이성계는 꼭두각시여서 정도전 일파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했고, 이성계가 위독해지자 정도전이 아예 나라를 찬탈하려던 것처럼 묘사된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는 수십 년간 동북면 군벌의 우두머리이자 홍건적, 왜구, 여진족, 원나라 군벌, 고려 권문세족 등을 모조리 꺾은 불패의 명장으로 군왕까지 오른 인물이고, 1차 왕자의 난 이후에도 10년이나 더 살았으므로 태종 이방원의 집권 명분을 정당화하려는 날조 혹은 과장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 것이다. [52] 반례로 고려 헌종은 14세에 요절할 정도로 몸이 너무 약했으므로, 그의 재위 기간인 3년 가량을 모후인 사숙태후 이씨가 임조칭제 방식으로 정무를 봤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사후인 예종의 치세때, 사숙태후 자신보다 먼저 선종의 비가 되었던 정신현비 이씨를 제치고 선종과 함께 합사되었다. 목종과 천추태후 모자와 극명히 대비되는 사례이다. [53] 그래서 고종은 자신의 아버지임에도 장례식에 참여하지 않았다. 조선이 명분과 예를 중시하는 성리학 위주의 유교 사회였음을 고려하면 흥선대원군이 생전 고종에게 얼마나 위협적이었고, 그로 말미암은 골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알 수 있다. [54] 바꿀 역, 성씨 성, 왕실의 성을 바꾼다는 뜻으로, 쉽게 말해 왕조를 교체한다는 뜻이다. 사극에서 종종 등장하는 역성혁명이라는 단어가 바로 이 뜻이다. [55] 이는 그 당시 시기의 사회문화나 풍습을 토대로 어느 정도 유추해볼 수 있다. 옛날에는 아무래도 평균 수명이 짦았으므로 현대인들과 조상들의 인생 사이클이 달랐던 것은 널리 알려진 상식이다. 조선 시대만 해도 보통 10대 중반쯤에 결혼하고, 늦어도 10대 후반에는(현대인 기준 중고등학생 때다.) 첫 번째 자식을 보았으므로 20대까지 자식이 없으면 집안의 걱정거리였다. 따라서 30세 가까이 되도록 자식이 없다면 당시 위생이나 의학 관점에서 그대로 후사를 보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아무리 당대의 인식을 감안해도 목종이 불과 20대인데 끝내 자식을 보지 못 한 채로 죽을 것을 생각하고 반란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부자연스러우며, 후술할 유행간의 대량원군 후계자 책봉 반대 명분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추론이 가능하다. [56] 실제로 목종은 김치양의 역모가 구체화되자, 천추태후 때문에 주저하던 행동을 개시했다. [57] 중국의 5대 중 마지막 왕조였던 후주에서 태조 곽위 시영에게 제위를 물려줘서 역성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는 곽위의 아들들이 모두 죽었기에 자식에 준하는 사위인 시영에게 물려준 것으로 대안이 없으니 그랬을 뿐이었다. 그나마도 시영은 양자로 들어가 즉위할 때는 '곽영'이었고, 즉위 이후에야 다시 '시영'으로 환원한 것이었다. 물론 목종이 유일한 왕위 계승권자라고 지목한 대량원군에 대한 김치양과 천추태후의 암살 시도는 자신들의 아들 외에는 대안이 없도록 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지만 이 또한 설령 암살이 성공해도 자신들이 살해 혐의를 피해야 하고, 목종이 늦게나마 후사를 볼 가능성까지 무릅써야 하는데, 너무도 부자연스럽다. [58]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이 정변에서 강조가 어탑 아래에 앉으니 군사들이 역성혁명이 일어난 줄 알고 만세를 부른 것과 곧 일어나는 거란의 제2차 침공에서 현종이 남부지방으로 피난을 가면서 동행하던 신하들도 뿔뿔이 와해지고, 일개 아전에게까지 수모를 당한 것이 증거이다. 심지어 약 200년 후에도 김사미·효심의 난, 최광수 고구려 부흥 운동, 이연년 형제의 난 등의 사건들이 일어난 것을 고려하면 당대의 국가에 대한 개념이 조선 왕조나 현대와는 180도 달랐음을 쉽사리 이해할 수 있다. [59] 이해를 돕기 위해 긴 존속 기간으로 사직의 권위가 생긴 반례를 들자면 조조가 충분한 권력과 위상이 있었음에도 생전에는 400년 동안 지속된 한나라 사직의 권위를 의식해 황제는 끝끝내 되지 못했던 것, 역시 약 400년의 존속 기간이 지난 고려 말기 권문세족의 전횡에 홍건적 왜구가 침입하는 내우외환에도 끝내 수나라 당나라가 멸망할 때처럼 국토가 사분오열되지 않은 것, 조선 말기 임오군란에서 장기간 쌓인 분노가 폭발하여 이성을 잃고 폭동을 일으킨 구식 군인들도 막상 왕궁을 범하는 일만큼은 크게 주저한 것 등이 있다. [60] 이해를 돕기 위해 연개소문의 쿠데타를 반례로 들면, 연개소문은 반대파 신료들을 한꺼번에 행사에 초대하여 단시간에 모두 살해하고, 이와 동시에 왕궁 창고에도 불을 질러 정적들의 사병들과 왕궁 방어군의 눈을 그 곳으로 돌린 후, 그 틈을 타서 왕궁에 진입하여 영류왕을 시해했다. 치밀한 계획과 신속한 움직임으로 반격당할 여지를 최소화한 것이다. [61] 기록에서 나오듯이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까지는 아니나 [62] 당시 태조 왕건의 손자 중 생존자로, 왕건과 제9비 동양원부인 유씨(東陽院夫人 庾氏)의 차남 효은태자의 아들들인 동양군(東陽君) 왕림과 온결공(溫潔公) 왕정이 있었지만, 제4대 광종 때 효은태자가 반역죄로 사약을 받아 죽었으므로 왕위 계승권이 없었다. [63] 신증동국여지승람》 <사천현>조에 따르면 두 번째 시를 지은 곳은 현종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자 현종의 아버지 왕욱의 유배지였던 사천시 배방사라고 하며, 절은 현재 터만 남아 있다. [64] 자신의 호의를 배반한 것을 괘씸히 여긴 요성종은 하공진을 처형하고, 그의 시체에서 심장과 간을 꺼내 사람들에게 먹게 했다고 한다. [65] 사실 무신정변 주동자 중 한 명이었다가 처참하게 암살당한 이의방과 그의 권세에 빌붙어 권력을 누렸던 이준의도 《 전주 이씨 족보》에서 지워졌고, 그들의 동생인 이린 역시 족보에 애매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보면 충분히 강조도 그렇게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66] 흔히 대중에 널리 퍼져 있는 인식과는 달리 고구려의 중심지는 평안도-황해도-경기도 북부 일부였고 당연히 668년 고구려의 멸망 이후에도 이 지역 사람들은 고구려 유민 의식이 강했다. 대표적인 예로 태조 왕건의 후삼국 통일에 혁혁한 공을 세운 박수경의 할아버지인 박직윤은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기도 전에 자신을 고구려의 관직명인 대모달로 칭했다고 하며, 고려의 후삼국 통일 공신들도 이 지역 출신이 가장 많았다. 또한, 학계에서는 왕건의 역성혁명도 천도와 국호 변경 등으로 고구려 계승 의식을 버리려 하는 궁예에 대한 패서 호족들의 반감이 직접적인 원인이었거나, 최소한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67] 위종정과 최창 역시 오래 전에 조정에서 쫓겨났다면 목종의 상태를 알기 어려웠을 것이므로 의도적으로 강조를 속인 것이 아니라 같은 오해를 했다고 추정된다. 여담으로 이 두 사람은 이 때문에 귀양을 가게 되었다. (출처 : 《고려사》 현종 2년) [68] 《동사강목》 제6하, 기유년 목종 12년 2월 [69]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되어 군주가 신하들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것은 조선시대 이후였고, 이전의 왕조들은 봉건제에 가까웠다. 그나마 삼국 중 가장 왕권이 약한 걸로 평가되는 백제도 700여 년이나 존속한 권위 때문에 의자왕의 지나친 왕권 강화에 반발하여 나당연합군이 침입해왔을 때 부여씨 왕가에 등을 돌린 백제의 귀족 및 호족 세력들도 막상 백제가 멸망하자 상당수가 백제부흥운동에 동참해서 3년이나 항전이 지속되었지만, 당시 100년도 채 안 된 상태였던 고려 왕조에게는 이런 권위조차도 없었다. 전술했듯이 강조의 만세 사건과 현종이 피난길에서 겪은 수모가 이를 증명한다. [70] 환관들이 막강한 권력을 누린 경우가 많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71] 기록에는 '제멋대로 했다'라고 부정적으로 표현되었다. [72] 다만 현종 3년에 가서 이 모든 것을 다 뜯어고쳐 올렸다. 목종이란 묘호도 강조가 아니라 후임자 현종이 올린 것이었다. [73] 사실 이 부분을 강조가 목종에 대해 죄책감을 가졌다는 근거로 삼기 어렵다는 반론도 있는데, 묘호와 시호는 물론 능호까지 별로 좋지 않은 뜻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올려진 민종(愍宗)의 '민'은 '근심하다'는 뜻이었고, 시호의 뒷 글자인 '영'자 역시 나약한 군주에게 붙여지는 것이었으며, 능호인 공릉(恭陵)마저 '공손하다'는 뜻이 반영된 별로 좋지 않은(왕은 공손할 이유가 없고 그래서도 안 되므로) 시호였는데, 훗날 현종이 목종의 업적 등 여러 부분을 고려해서 그에 걸맞게 다시 바꾼 것이었다. 그러나 강조로서는 현종의 즉위와 본인이 일으킨 정변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폐위된 목종을 다소 격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음을 고려해야 한다. [74] 강조가 패전 직후 요성종에 의해 처형당했으므로 사관이 야사의 내용을 명분론에 입각해 서술했을 수도 있으나, 야사라는 주석도 없으며, 정황상 강조 주변의 고려 패잔병 중 생존자가 목격했을 가능성도 있다. [75] 그 대표적인 예로 동오의 손호와 조선의 연산군이 있다. 광해군이나 의자왕은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광해군이 지나치게 궁궐 공사를 크게 벌인 것과 의자왕이 말기에 지나치게 친위 세력을 육성하고 사치를 즐긴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학계에서는 추정한다. 쉽게 말해서 불우했던 시절의 트라우마가 터진 것이다. [76] 이와 유사하게 당태종 이세민이 ' 정관의 치'라고 불리는 중국사 최고의 태평성대를 연 원인이 현무문의 변으로 형제와 어린 조카들을 모두 죽이고 부친 고조 이연을 강제로 밀어내다시피하며 황제에 오른 도덕적 부담감이라고 보는 주장도 있다. [77] 물론 그런 마음의 짐이 아니더라도 현종은 정말 정치를 잘 해야만 하는 입장에 놓여 있었다. 우선 목종이 시해당한 것은 빼도 박도 못할 사실이므로 백성들 중에는 현종 자신을 전왕을 죽이고 새로운 왕이 된 자로 여기며 안 좋게 보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즉위한 지 1년도 안 되어 거란의 제2차 침공이 벌어졌고, 통주 전투에서 대패하여 자신은 나주까지 피난을 떠나는 한심한 신세가 되었다. 어찌저찌 나라가 망하는 건 피하고 거란과 강화하긴 했지만, 백성은 그런 왕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고려사》의 기록대로라면 목종 시기는 김치양이 천추태후를 배후에 업고 전횡을 맘껏 부린 때였다. 당연히 백성으로서도 좋게 여겼을 리가 없는데, 그렇다면 목종, 천추태후, 김치양 모두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현종을 두고 앞서 말했듯 전왕을 죽이고 신왕이 되었다며 안 좋게 본 사람도 있었겠지만, 한편으론 목종 시절보다 더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주까지 도망친 관계로 민심이 많이 악화되었을 것이고, 이 상황을 극복하려면 자신이 잘 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78] 정확히는 유방을 필두로 한 황실 호위군이 저항 없이 성문을 열어주며 길을 내주는 것으로 묘사했다. [79] 또한 목종은 강조가 개경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긴 했지만, 그게 자신의 명을 따르기 위한 게 아닌 반란을 일으키기 위함임을 알게 되면서 크게 두려워한다. [80] 이 때 강조는 "조금만 더 빨리 결단(=김치양과 유행간을 축출하는 것)만 내렸더라면 제가 반역자가 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실제로 드라마상 묘사를 보면 강조의 정변이 일어나는 것이 일의 진행 타이밍이 약간씩 어긋난 것이 쌓이고 쌓여 일어나는 것으로 묘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