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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2 21:55:59

부여(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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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1. 개요2. 역사3. 백제 부여씨의 분파
3.1.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
4. 부여 여씨의 인물5. 백제 부여씨의 인물
5.1. 전설상의 인물
6. 기타

1. 개요

扶餘氏

백제 국성.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시조 온조왕 부여 왕가에서 나온 데서 따서 지은 것이 성씨의 유래이다. 온조의 아버지는 부여의 왕족 우태 혹은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성왕 추모라고 했는데, 전자라면 부여 왕실의 직계 후손이고, 후자라 해도 고구려 건국 설화에 따르면 동명성왕 추모가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결국 백제 왕실은 부여 계승 의식을 드러낸 것이었다. 경쟁자인 고구려보다 더 정통성 있는 부여의 적통임을 주장한 것이었고, 사비시대 성왕이 ' 남부여'로 국호를 바꾼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2글자 복성이지만 줄여서 여(餘)씨로 축약 표기하는 관습이 당시 백제에서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런 축약 표기는 중국이나 일본 기록에서 많이 확인된다. 예를 들면 위덕왕 부여창은 여창(餘昌)으로 기록되는 등. 백제에서는 부여씨뿐 아니라 다른 성씨도 사씨(沙氏)는 본래 사택씨(沙宅氏)로, 목씨(木氏)는 본래 목리씨(木刕氏)로 여겨지는 등 복성을 단성으로 줄여 부르는 사례가 많았다.

2. 역사

삼국사기》에 의하면 부여씨는 온조왕 시기부터 사용되고 있는데, 중국이나 일본 측 기록과 교차되는 최초의 부여씨는 4세기에 재위한 근초고왕(? ~ 375년)이다. 《 진서》(晉書)에 의하면 여구(餘句)로 등장하는데, 이는 부여씨를 여씨로 축약한 것이다. 이후로도 중국 측 기록에서는 축약해서 '여(餘)'로 칭하는 경우가 종종 나온다. 정작 진짜 부여는 근초고왕이 즉위하는 346년에 모용선비에게 멸망당한다는 것이 아이러니.

백제멸망전 백제부흥운동을 거치면서 백제 부여씨들은 상당수가 당나라로 끌려가거나[1] 일본으로 망명했다.[2] 신라가 통일한 한반도에 잔류한 부여씨들은 정황상 서씨(徐氏)와 여씨(余氏) 등으로 성씨를 바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야 '부여씨'라는 성씨를 그대로 쓰는 사람은 더 이상 한중일 3국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3] 대한민국에서는 부여 서씨[4], 이천 서씨[5], 의령 여씨[6]가 부여씨의 후예를 자처하고 있는데, 보다시피 부여씨에서 서씨, 여씨로 글자를 바꾸었다고 족보에 전하고 있다. 복성인 '부여'를 한 글자로 줄여 칭하는 관습은 백제 당대의 중국 측 기록에도 종종 나오는데 이런 관습을 공식화한 것이다.

3. 백제 부여씨의 분파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
정말 의외의 가문이 부여씨 분파일 가능성도 있다.

3.1.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

4. 부여 여씨의 인물

부여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餘)씨'로 표기되어 있는데 백제의 왕성 부여씨처럼 국호였던 부여에서 따온 성씨일 가능성이 크다.[15]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16] 다만 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은 명백하고,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이긴 한데, 이들이 모두 부여의 주민들을 대거 쓸어갔었던 모용계 국가에서만 활동했다는 점에서 대체로 부여의 유민이었을 것으로 유력하게 여겨지고는 있다.[17]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19]

5. 백제 부여씨의 인물

백제의 군주들에 대해서는 백제/왕조 참조.

진손왕, 태아랑왕, 해양군의 경우 왕진이의 후손들이 만든 가공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해당 문서 참조.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윤충, 의직, 충상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21]

5.1. 전설상의 인물

6. 기타

5세기 말 남제로 파견된 고구려의 인물 여노(餘奴, 생몰년도 미상)가 있으나 백제 부여씨나 부여 여씨인지는 불명이다.
[1] 의자왕, 부여융, 부여효, 부여태 등의 백제 왕족들. [2] 백제부흥운동의 수뇌부에 속한 부여선광, 부여자신, 억례복류 등의 백제 왕족들. [3] 서씨와 여씨는 물론 대성팔족의 후예로 추정되는 구씨(具氏), 백씨(白氏), 임씨(林氏)가 그러했듯 신라에도 상당수가 잔류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백제 왕족으로 추정되는 충상, 백제부흥운동을 주도한 부여충지 부여충승 문무왕에게 항복하여 신라로 넘어갔다. [4]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을 시조로 삼는다. [5] 부여 서씨를 비롯한 달성, 대구 등 여타 본관들의 대종(大宗)으로, 부여 서씨에서 중시조로 삼는 서존(徐存)이 다름 아닌 서희의 현손자다. 다만 부여 서씨와는 달리 백제 왕실의 후손을 자처하지는 않는다. [6]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을 시조로 삼는다. [7] 원문은 속일본기의 《天平宝字五年(七六一)三月庚子【十五】》○庚子。百済人余民善女等四人賜姓百済公。라는 구문. 귀실씨가 새로운 성씨를 하사받은 기록과는 달리 여기서는 원래 귀실씨였다는 기록이 따로 없는 걸로 보아 출자가 다른 사람들인데 귀실씨가 받은 것과 같은 성씨를 준 것으로 추정된다. 余民善女의 경우 단독 이름이 아닌 여민선(余民善)의 딸(女)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8] 다만 실제 근초고왕과 동일인물일 가능성은 낮은데, 해당 단락에서 등장하는 '근속왕'(近速王)이라는 인물은 왕이 아닌 국인, 즉 신하로 나와 있고 시기적으로 많이 차이가 나서 할아버지-손자 관계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9] 《신찬성씨록》에는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의 후예를 자처하는 가문도 기록되어 있다. 준왕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마한왕의 직위를 박탈당했지만 그의 후예는 남아서 계속 제사지냈다고 하는 기록이 《 후한서》, 《 삼국지》 등을 통해서 나오는데 해당 가문으로 추정된다. [10] 출처는 노중국 교수의 《백제의 성씨와 귀족가문의 출자》, <<대구사학>> 89, 2007. [11] 정확하게는, 오우치 가문이 다른 가문들에 비해 백제 왕조혈통에 유달리 집착(?)했다고 봄이 옳다. 백제왕조 후손 주장이 조선으로부터 팔만대장경과 영지, 무역독점권을 얻기 위한 쇼였다는 평과는 별개로, 이전부터 오우치 가문은 다른 가문들에 비해 자신들이 백제 왕조의 혈통임을 뚜렷히 그리고 공공연하게 주장해왔다. 이 때문에 동시기 전국시대의 다이묘들조차도 '오우치 가문 사람은 고려인이다.'라는 인식을 가졌을 정도. [12] '백제의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해'(解)를 성씨로 삼았다.' - 《삼국유사》 권2 <기이> -남부여 전백제 북부여조- 여담으로 일본서기 기록에 위덕왕이 고구려장수에게 일기토를 걸었을때 고구려왕실과 성이 같다 언급하였다. 즉 고구려와 백제는 해성을 가지고 있고 촌수가 멀어지면서 부여씨와 고씨로 나뉘어졌다 추정이 가능하다. [13] 문안식, <백제의 시조 전승에 반영된 왕실 교대와 성장과정 추론> , 《동국사학》40 한국교육학술정보원, 2004. [14] 《일본서기》는 《삼국사기》와 달리 22대 문주왕을 21대 개로왕의 왕모제(王母弟), 즉 동복아우로 표현하고 있다. 모씨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왕모제를 동복아우가 아닌 왕의 어머니 형제인 외삼촌으로 해석하고, 남조 측 사서에서 문주왕과 동성왕을 여씨 + 이름의 축약형이 아닌 모도, 모대로 표현하고 있어 모씨 설을 주장했었다. 다만 왕모제는 주로 동복아우를 뜻하는 말인데다가 동성왕 역시 출자가 문주왕이 아닌 부여곤지로 기록되어 있어서 설득력을 잃었다. [15] 다만 여기서는 백제처럼 부여씨의 축약형으로서의 여씨가 아닌 그냥 여씨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16] 출처는 여호규, 《백제의 요서진출설 재검토: 4세기 후반 부여계 인물의 동향에 관련하여》(2001), 강종훈, 《4세기 백제의 요서 지역 진출과 그 배경》. [17] 사마염이 중국으로 팔려온 부여인 노예들을 속환시켜준 기록을 비롯해, 285년과 346년으로 모용선비족 침공으로 끌려간 부여인만 6만여명에 달했다. [18] 모용농은 여암의 난을 진압한 뒤 요동과 현도를 장악한 고구려를 공격하여 요동과 현도를 재탈환하게 된다. 단, 고구려가 요동을 완전히 상실하지 않고 일부를 점거하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19] 출처: 《위진남북조시기 중국의 코리안 디아스포라-고조선・고구려・부여계 이주민 집단 연구》. [20] 인명이 아니라 당나라의 관직명이다. [21] 성충과 윤충의 부여씨설은 조선상고사를 지은 신채호가 주장했고, 의직의 부여씨설은 이도학 교수가 주장했다. [22] 백제 멸망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왕족들은 쿠다라노코니키시씨, 쿠다라노아손씨, 타카노노미야츠코씨 등으로 사성받았다. [23] 의자왕의 3남인 부여효는 멸망 당시 다른 왕족들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간 점으로 볼 때 부여효일 가능성은 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