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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06:28:45

아일랜드 대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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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대기근을 묘사한 유명작 "Gorta[1]", 릴리안 루시 데이비슨(Lilian Lucy Davidson)의 1946년 작품. 캔버스에 유화(油畵).

1. 개요2. 원인에 대한 고찰
2.1. 정설: 감자역병과 영국의 탄압 및 식민지배2.2. 오해
3. 진행과정
3.1. 아일랜드: 대기근(An Gorta Mór)3.2. 기타 일화들3.3.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청소(Highland Clearance)
4. 결과
4.1. 이민과 인구 감소4.2. 반영 감정4.3. 영어에 자리를 내준 아일랜드어
5. 문화적 영향6. 정책적 영향7. 기타8. 읽을거리9. 대중 매체10. 참고 자료

1. 개요

아일랜드어: An Gorta Mór(언 고르타 모르, 대기근), An Drochshaol(언 드로흐힐, 끔찍한 시기)
영어: Irish Great Famine(아일랜드 대기근)[2]
감자 역병을 보낸 건 물론 신이었지만, 그걸 대기근으로 바꾼 것은 잉글랜드인들이다.
(the almighty indeed sent the potato blight but the english created the famine.)
- 존 미첼(John Mitchel)
웨스트민스터로부터의 직접 통치가 1840년대 중반의 비참한 기근을 악화시켰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으며, 그때의 기근으로 100만 명 이상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했다. 감자를 못 쓰게 만든 것은 감자 역병균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수확 실패를 철저한 기근으로 바꾸어 놓은 것은 아일랜드의 영국 통치자들이 행한 독단적인 자유방임 정책이었다.
닐 퍼거슨Niall Ferguson, 『제국』Empire: How Britain Made the Modern World (2003), 민음사, 2006,
근대 들어 아일랜드 섬의 기근은 1740 ~ 1741년, 1845 ~ 1852, 1879년으로 총 세 차례 있었다. 그 중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던 두 번째 기근을 가리켜 '대기근'이라고 부른다.

영국 정부의 수탈로 인해 아일랜드에는 감자 이외에 먹을 것이 거의 없던 와중에[3] 감자가 병들어 버렸다.[4] 이후 기근에 대한 조치를 위해 아일랜드 구제방안이 영국 의회에서 꾸준히 제안되었으나 상원과 하원의 끝없는 반대로 실행되지 못하여 참사가 일어났다.[5]

당시 영국이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냐, 우간다, 인도 등 해외 여러 곳을 식민지로 두면서 본국보다 광할한 해외 영토를 보유하고 있었고 특히 오스트레일리아와 캐나다는 국토에 비해 인구밀도가 매우 낮아[6] 기존에 자리잡았던 원주민들이 차지한 땅 말고도 빈땅이 무척 많았기 때문에[7] 굶주리는 아일랜드인을 대규모로 개척 투입시키는 식으로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당시 당국의 무능함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많은 인구가 이민 가기는 했지만 손해를 더 키웠다.

기근 전 800만 명을 상회하던 아일랜드의 인구는 100만여 명이 아사했고 또다른 100만 명이 기근을 피해 이민길에 올라[8] 기근이 끝날 시점에는 총 인구의 25%가 없어졌다.[9] 이 수치는 200년 가까이 지난 21세기에도 회복되지 않아 아일랜드 섬의 주민 수[10] 는 도합 670만명 정도다.[11]

2. 원인에 대한 고찰

2.1. 정설: 감자역병과 영국의 탄압 및 식민지배

17세기 식민지 아일랜드로 이주한 영국 신교도들은 아일랜드 토착민(구교도)의 토지를 몰수하고, 이들을 소작농으로 만들었다. 19세기 중반 영국인의 수탈과 전염병으로 아일랜드에서 대기근이 발생했을 때에도 영국은 별다른 구제 조치를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당시 200만명이 굶어 죽고, 수백만 명은 미국 등 해외로 떠났다.
[조선일보]비극의 아일랜드 식민지史… 英착취로 200만명 굶어죽어

아일랜드에는 청동기 시대부터 켈트족이 정착해 살고 있었는데 잉글랜드 노르만 왕조에 정복당한 후인 12세기 후반부터 헨리 2세의 주도하에 잉글랜드의 침입이 계속되어 점차 예속화되어 갔다.

16세기 유럽을 강타한 종교개혁으로 잉글랜드의 국교가 성공회로 바뀌면서 잉글랜드는 아일랜드인에게 성공회를 믿을 것을 강요했다. 가톨릭을 믿는 아일랜드인들은 저항하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 1세부터 시작하여 올리버 크롬웰에 이르기까지 잉글랜드 지배층은 아일랜드인의 저항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다음 아일랜드 자영농들의 토지를 몰수해 아일랜드로 건너온 잉글랜드인들에게 나눠주었다. 잉글랜드인이나 성공회로 개종한 일부 아일랜드인들은 대규모 토지를 소유한 지주층이 되었으며 나머지 아일랜드인은 소작농으로 전락해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소작농들은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상대적으로 값이 싼 감자를 대량으로 재배했다.[12] 아일랜드인 소작농들이 먹는 감자는 주로 개인 텃밭에 심었다. 일 년 내내 감자 버터 밀크[13]만으로 버티는 수준이었다.[14] 대기근이 아일랜드를 덮치기 직전인 1846년에 조사된 결과에 따르면 성인 남성이 단 하루에 최대 6.35kg(14파운드)에 달하는 감자를 소비했다고 한다. 대식가로 명성이 자자한 조선인들조차 밥 한 공기에 약 690g 정도의 쌀을 먹었다고 하니 아일랜드인들은 어마어마한 양의 감자를 먹었던 것이다.[15] 결국 감자의 끝내주는 구황효과[16]로 어찌어찌 가난을 견딜 수 있게 된 아일랜드 하층민들은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게 되었고 아일랜드의 인구는 눈에 띄게 증가했다. 감자 부산물은 사료로도 쓸 수 있었기 때문에[17] 아일랜드인들에게 감자는 매우 소중한 작물이였다.

1801년 아일랜드는 그레이트 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에 합병되었다. 대기근이 일어나기 직전인 1840년대 후반의 아일랜드 인구는 800만 명 정도였는데 인구의 1/4이 무려 86%의 토지를 독점하고 있을 정도로 빈부 격차는 심각했고 그만큼 빈민의 수도 많았다. 아일랜드의 농업은 기본적으로 영국이 필요로 하는 , , 돼지를 키워서 영국에 수탈당하는 플랜테이션 체제였다.

이런 배경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아일랜드가 대영제국 이이제이 전략을 통해 현지 정치체제를 해체하고 플랜테이션을 강제한 제국주의의 첫 실험장이자 희생자였다는 것에 주목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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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아일랜드 감자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아이리시 럼퍼(Irish Lumper) 품종. 매우 새하얗고 생산량이 많은 게 특징이다. 레이지 베드(Lazy Bed)라고 부르는 텃밭에 심고 해초를 비료로 주어 길렀다. 주로 버터밀크와 함께 먹었다. 대기근 이후에 희귀해졌다가 2008년에 다시 기르기 시작했다. 점질감자이기 때문에 현대 서양에서는 딱히 즐겨 먹지 않지만 아일랜드 학교들에서는 이 품종을 역사교육 겸 돼지 사료용으로 여전히 재배한다.

2.2. 오해

'당시 아일랜드 감자의 종이 한 종류 뿐이라서 병이 돌자 이런 사태가 일어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아일랜드 대기근은 식물 병리학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진균류가 식물병을 일으킨다는 최초의 입증인 동시에 한 가지 품종만 심는 것이 어떤 재앙을 불러일으키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아일랜드 대기근의 가장 큰 원인은 종 다양성의 문제가 아니다. 애초에 기술적으로 진균병을 이길 수 있는 감자 품종은 없다. 일조량이 부족하면서 덥고 습기찬 날씨는 진균에게 최적의 환경이기 때문에 어느 작물도 견디지 못한다. 열대기후 내성의 끝판왕인 카사바도 강렬한 햇빛이 없으면 말짱 꽝이다. 그런데 아일랜드의 기후는 극단적인 서안 해양성 기후로 일조량이 부족하여[18] 현대 기술 없이는 곡물 경작이 극히 어려웠고 영국 정부의 곡물 수탈과 더불어 인구가 불어나서 먹을 게 부족해진 아일랜드인들은 감자만 먹을 수밖에 없었고 이런 상황에서 역병으로 감자가 다 사라지고 구제마저 끊기면서 재앙이 일어난 것이다.

일각에서는 아일랜드인들을 탓하며 왜 감자만 주요 먹거리로 재배했냐고 비난하며 다른 작물들을 먹거리로 삼았어야했다고 비난하나 이는 현실을 모르는 무지함에 불과하다. 아일랜드에서 호밀을 경작할 수 있었던 곳은 더블린 주변의 영국인 거주지역뿐이었고, 영국인들은 감자를 먹지 않았으므로 당연히 기근을 피해갔다.[19]

대표적인 식량작물인 옥수수도 (애초에 종자를 살 돈도 없었지만) 지력을 엄청나게 소모하는데다 일조량이 많이 필요한 C4 식물 특성상 아일랜드 기후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재배할 수도 없었다.[20][21] 벼는 곡물 중에서 독보적으로 습기에 강하다지만 아열대 특유의 강한 햇빛과 무더위가 없으면 도열병으로 죽는다. 결국 메밀이든 귀리든 사이좋게 비맞아 녹아내리는 아일랜드에서 제대로 자라는 식량작물은 꽃과 전혀 상관없는 덩이줄기를 캐먹는 감자 뿐이었다. 전통적으로 아일랜드에서 살아온 켈트족은 본디 유목민족으로 고기를 주식으로 삼았기 때문에 굶어죽지 않을 수 있었으나 영국의 식민통치가 시작되자 고기도 밀과 함께 수탈당하여 먹을 수 없었다.

3. 진행과정

3.1. 아일랜드: 대기근(An Gorta Mór)

1842년 미국 동부의 감자 농장은 대규모의 감자 역병으로 인해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이 역병은 순식간에 북미 전역으로 확산된 뒤 다시 배를 통해 전 유럽으로 번졌다.

감자 역병균의 포자는 잎에서 증식하기 시작해 섭씨 10도 이상, 습도 75% 이상인 조건, 그러니까 여름만 되면 쉽게 조성되는 조건에서 이틀 정도만 있으면 작물 전체로 퍼진다. 만약 이때 가 내리면 포자가 빗물을 타고 땅에 스며들어 식용으로 쓰이는 덩이줄기 부분까지 퍼지게 되며 병균 포자가 바람을 타고 다른 곳으로 날아가 작물을 전염시키기도 한다. 역병에 걸린 감자는 이파리 끝과 줄기에 짙은 반점이 생기기 시작하고 감염된 덩이줄기는 갈색으로 변하면서 다른 세균이 침입하면서 2차 감염으로 썩어 버린다. 진균은 덥고 축축한 기후에서 매우 빨리 감자밭 한 뙈기를 하루밤새에 악취가 풍기는 시커먼 흙덩이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하필 이 시기, 그러니까 1845년 여름의 아일랜드는 유난히 비가 잦았던 탓에 밀과 같은 다른 작물의 작황도 엉망이었을 뿐만 아니라 감자 역병이 돌기 최적인 환경을 제공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1845년 가을 감자 수확이 시작되면서 대재앙이 막을 올렸다.

이때 영국 정부는 역병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적극적인 구제 활동을 펼쳤기 때문에 문제가 커질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미국과 영국 본토에서 정부가 직접 밀을 공급하여 1845년 겨울 동안 70만명을 구제했고 1846년에는 곡물법을 폐기하여 밀의 수입을 자유화함으로서 식량의 유통량을 늘리는 한편 간접적으로 식량의 가격을 조정하려 했다.

그러나 1845년의 겨울을 넘긴 아일랜드 소작농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비록 곡물법의 폐기로 밀 관세가 철폐되었으나 감자 역병으로 농사를 망친 지역은 아일랜드만이 아니었으므로 외국에서 많은 식량을 들여올 수 없었다. 그로 인해 폭등하는 식량 가격을 안정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식량이 아일랜드로 들어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아일랜드로 들어온 식량의 대부분은 항구 도시와 그 인근 지역에만 유통되고 대부분 지역에는 유통되지 못했는데 이것은 브리튼 본토에서는 이미 철도혁명 등으로 유통과 운송수단이 개선되었지만 아직 아일랜드는 일부 지역 외에는 철도 등 운송,유통 수단이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일랜드에서 밀을 비롯한 작물은 1845년의 흉작을 제외하면 계속해서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심지어 가축의 수출은 대기근 내내 증가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곡물 생산량과 수출량은 폭락했다. 농가의 소작농들이 땅값을 내지 못하고 토지에서 쫓겨나거나 도망치고 식량을 구할 수 있는 항구나 구빈소가 있는 도시로 향했기 때문에 더 이상 농사를 짓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 환금 작물을 재배하고 남은 자투리 땅에 감자를 심어 식량을 자급자족하던 아일랜드의 빈농들이 수입 식료품을 구입하기는 힘들었다.[22] 그나마도 아일랜드뿐만 아니라 전 유럽을 휩쓸었던 대기근으로 인해 수입 가격이 폭등했다. 아일랜드에는 제 돈 주고 밀을 사먹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밀과 가축 대부분이 계속 수출되고 있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1846년의 곡물 수출은 아일랜드 자체 소비를 위해서 1/3 수준으로 폭락했다. 또한 정부는 공공 공사를 시행하고 공사비 전액을 현지에서 지출함으로써 아일랜드인 노동자를 먹여살렸다.

그래도 기근 첫해에는 정부가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 개입했기 때문에 상황이 양호한 편이었다. 그런데 정권이 교체되고 자유당이 집권하자 자유방임주의적 원칙에 따라 직접적인 개입에 제동이 걸렸다. 쉽게 말해 물고기를 주는 것보다는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는 논지였다. 이런 논지로 직접적인 구호가 아닌 철도나 항만 건설을 통한 고용증대로 식량을 구입해 생활할 수 있도록 하고 아일랜드의 부족했던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여 식량 운송과 유통이 용이하게 하여 반복되는 기근 사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으로 정책기조가 장기적 대책 수립으로 전환되었다. 이런 주장에는 곡물 상인들이 자기네 이익이 저하된다며 반발을 한 것과 직접적인 구호를 위해 긴급하게 확보한 옥수수 등이 운송수단 부족으로 항만에서 썩어가는 것 등이 원인이 되었다.

결국 업자들의 반발과 정부의 정책 판단 착오로 난민들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은 줄었고 공권력은 기근에도 불구하고 식량공급에 신경쓰지 않았다. 1845년에 5만 명이었던 아일랜드인 이민자 숫자는 1846년 10만 명으로 폭증했다. 그나마 1846년에 아일랜드를 탈출한 이들은 이후에 닥쳐올 최악의 사태를 보지 않고 떠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행운아였다. 자유당이 집권한 1846년 여름부터 정부는 식량 공급을 포기했다. 더군다나 씨감자도, 씨감자를 묻을 땅도 잃어버린 빈민들에게는 1846년의 기록적인 폭설과 한파가 기다리고 있었다. 대기근 시대 사망자의 대부분이 1846~1847년의 겨울에 발생했다.[23]

아일랜드인들은 입에 넣어 소화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먹어서 목숨을 부지해야 했는데 유럽에서는 거의 식용으로 쓰지 않는 해조류까지 닥치는 대로 채취해 먹는 지경까지 갔다.[24] 이때 많이 먹었다는 적갈색 해조류에는 '아이리시 모스(Irish Moss)'라는 별명까지 붙었고 지금도 저 해조류로 만드는 젤리나 음료수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25] 어찌나 상황이 참혹했던지 식량을 지켜야 할 영국군 장병들이 상부의 명령 없이 굶주리고 있는 아일랜드 민간인들에게 식량을 직접 나눠줄 지경이었다.

1846~1847년 겨울의 참사 이후 아일랜드에서는 빈농이고 지주고 모두 몰락하기 시작했다. 1847년 2월 자유당 정권은 뒤늦게 구제소를 마련하고 무료 식량 공급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자유주의에 따르자면 정부가 그 책임을 도맡아서는 안 되었다. 그러자 자유당 정권은 새로운 병크를 더 추가했는데 6월에 해당 지역 납세자들이 모든 책임을 떠맡도록 법제화해 버렸다. 토지 소유주들이 구제소에 의존해 목숨을 이어가던 아일랜드인 300만 명의 구호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막대한 구제 비용을 감당해야 했던 아일랜드 지주들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자기 토지에서 굶어 죽어가는 소작농들을 쫓아내기 시작했지만 이렇게 쫓겨난 소작농들을 대신해 농사를 지어 지주들에게 지대를 낼 사람은 이미 아일랜드에 존재하지 않았다. 주 소득원을 자기 손으로 내쫓아 버린 지주들은 줄줄이 빚더미에 올라 서로 땅을 떠넘기며 무너졌다. 오히려 이들의 땅과 농장을 영국인들과 친영파인 아일랜드 신교도들이 헐값에 대거 매입했다. 아일랜드의 구교도와 신교도간의 경제적 격차는 더욱 심해졌고 아일랜드인의 반영 감정은 증폭되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1849년 아일랜드를 방문했는데 이때 여왕이 방문한 항구도시인 코브(Cobh)는 이를 기념해서 도시 이름을 '여왕의 도시'란 뜻의 퀸스타운(Queenstown)으로 바꾸었다.[26] 당시만 해도 빅토리아 여왕에 대한 아일랜드인들의 감정은 나쁘지 않았고 비교적 호의적으로 여왕을 환영했다. '저 고귀하고 아름다운 여왕님께서 우리 아일랜드의 참상을 직접 보시면 영국에서 보다 효과적인 지원 정책을 추진하겠지' 하는 기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왕은 퀸스타운과 그 근교만 방문했고 당연히 해당 지역들은 여왕의 방문을 앞두고 사전에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여왕은 아일랜드인들이 윤택해 보이는 모습만 목격할 수 있었다. 따라서 빅토리아 여왕은 아일랜드의 현실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떠났고 그러니 아일랜드에 대한 관심도 오래가지 않았다.

3.2. 기타 일화들

대기근 중에 영국이 옥수수 가루를 배급했고 아일랜드인들이 이걸 유황 가루로 착각해서 폭동을 일으켰다는 잘못된 소문이 있다. 당시 아일랜드는 이스터 섬마냥 고립된 섬이 아니었고 외부에서 여러 수단을 통해 식량이 유입되었다. 이미 많은 아일랜드인들은 미국에 진출해 있었고 그들 덕에 상당한 식량이 아일랜드로 유입되었다. 다만 낙후된 수송능력 때문에 식량이 제때 도착하기 어려웠고 아일랜드 항구에 도착해도 그 구역에서 다 소모되었다. 드넓은 아일랜드 전역을 담당하기는 불가능했다. 알려진 것처럼 옥수수를 유황 가루로 인식해서 사람들이 감자를 찾으며 폭동을 일으켰다는 것은 루머에 불과하다. 옥수수 가루라도 제대로 공급됐으면 대기근이라고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량조차 채우지 못한 배급량 덕에 사람들은 옥수수를 아주 멀겋게 끓인 조차 먹기 힘들었다. 게다가 설령 죽을 받더라도 위에서 말한 이유로 그냥 물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받기도 힘든데 겨우 받은 것도 엉망이었으니 사람들이 들고 일어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출처 또 당시 대부분의 아일랜드인은 맷돌이 없었다. 현재 흔히 사람들이 즐겨먹는 옥수수는 스위트콘과 찰옥수수로 알려진 감미종과 나종으로 그냥 삶거나 찌거나 구워먹으면 그만이지만 당시 주식으로 먹던 옥수수는 아주 단단해서[27] 맷돌로 갈아 옥수수 가루를 만들어 먹어야 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밀가루도 먹어야 하므로 맷돌이 동네마다 있었는데 아일랜드는 감자밖에 먹을 게 없으니 맷돌이 거의 없었다. 때문에 영국 정부가 급히 미국 옥수수 화물선을 아일랜드로 보냈지만 단단한 옥수수를 먹을 수가 없었다. 영국에서 맷돌까지 급히 보내주고 나서야 옥수수 가루를 내 죽을 먹을 수 있었고 아일랜드인은 난생 처음 맷돌로 옥수수 가루를 내며 '영국 총리의 유황 가루'라고 투덜거렸다. "아일랜드인들은 감자 외에는 요리할 줄 모른다"는 말은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채 아일랜드인들의 민족성을 탓하는 영국인들의 인종차별적인 발언이었으나 그렇다고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던 셈이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황제였던 압뒬메지트 1세(Abdülmecit)는 아일랜드와 별다른 접점이 없었음에도 인도적인 차원에서 1,000파운드를 지원했다. 이에 아일랜드인들이 황제의 관대한 호의에 감사하는 편지를 보내고 일부 도시에서 오스만 제국의 상징인 초승달을 도시 문장에 추가하는 등[28] 지원 자체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그러나 압뒬메지트 1세가 구호를 위해 1만 파운드를 보내려고 했는데 빅토리아 여왕이 자기는 2천 파운드만 보냈다며 1천 파운드만 기부해 달라고 요구했다거나 금전 지원이 좌절되자 터키 선원들이 영국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에 식량을 적재한 선박 3척을 전달했다는 것은 각색된 일화일 가능성이 높다. 아일랜드, 압뒬메지트의 도움에 163년만에 감사를 표하다.(튀르키예어)

3.3.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청소(Highland Clea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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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랜드 클리어런스 당시 버려진 농가의 폐허.

덜 알려진 이야기지만 같은 시기에 스코틀랜드 서북부 고원 지대인 하이랜드 지역도 상황이 비슷했다. 감자 역병과 영국 정부의 미흡한 대응으로 인한 기근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하이랜더들의 대규모 아사와 이주가 벌어졌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반 스코틀랜드는 농업 혁명에 힘입어 인구가 폭증해 이미 맬서스 트랩에 걸린 상태였다. 하이랜드 인구만 자그마치 30만, 영국군에 복무하던 하이랜더 연대원들만 7만이 넘었는데 이는 춥고 척박한 산악 황무지인 하이랜드의 생산력으로는 도저히 지탱할 수 없는 규모였다. 거기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급격히 팽창했던 전시경제가 종전으로 인해 줄어들자 정부에 광물을 공급하던 하이랜드의 지주들은 경제적으로 몰락했고 비누 및 유리 제작의 원료이자 하이랜드 서부 대서양 연안의 주요 수입원이었던 다시마 소다 정제 산업도 값싼 스페인산 소다재의 수입으로 인해 가격 경쟁력을 잃어 붕괴했다. 설상가상으로 여기에 스코틀랜드의 주식이던 감자까지 역병으로 썩어버리니 하이랜더 다수가 경제와 인구 부양력이 처참하게 무너진 고향을 떠나 로우랜드 잉글랜드, 또는 바다 건너 캐나다 미국 등지로 이주했다. 지주들마저 빚더미에 올라앉은 상태에서 기근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틀어 '하이랜드 청소(Highland Clearance)' 또는 ' 게일인 퇴거'라고 하며 하이랜드 인구는 아직도 이 사건 이전의 수치를 복구하지 못했다.

문화적으로도 이는 치명타였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아일랜드어의 켈트계 친척 언어이자 하이랜드의 민족어인 스코틀랜드 게일어도 브리튼 본섬과 떨어진 서북부 헤브리디스 제도를 제외하면 거의 사라졌다. 하이랜드에서 로우랜드의 민족어인 스코트어 영어가 완전한 우세를 점한 것도 이 사건 이후다. 아직까지도 로우랜드와 하이랜드 사이에는 지역감정이 좀 있는 편이며 하이랜드 황무지에는 대이주 당시 버려진 농가의 폐허들이 지금도 여럿 남아있다.

4. 결과

4.1. 이민과 인구 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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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스타운(Queenstown) 항구에서 미국 뉴욕으로 떠나는 아일랜드 주민들.
결국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많은 아일랜드인들은 고국을 뒤로 한 채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아르헨티나 등으로 이민길에 올랐다. 2010년 통계에 의하면 아일랜드계 미국인의 수는 3,467만 명에 달해 독립국 아일랜드 인구의 7배를 넘기는 수준이다.[29]

아일랜드는 대기근 이후 현재까지 기근 전의 인구 수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대기근 직전 800만이었던 아일랜드 인구는 대기근 이후 이민으로 인한 인구 유출이 지속되었다 보니 독립 당시 400만 명으로 내려 앉았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도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를 합쳐도 700만 명 정도다.

4.2. 반영 감정

이 사건은 아일랜드의 반영 감정의 주요한 기원으로 꼽힌다. 아일랜드에서는 미국으로 가는 이민이 급증했고 도착 후에는 이탈리아계, 아프리카계들과 함께 남북 전쟁이 한창이던 북군에 동원되어[30] 아일랜드계 미국인이 증가하는 계기가 되었고 보스턴에는 당시의 이주를 기념하는 공원이 있다.[31]

또 미국으로 이주해 온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은 동포들을 굶어죽도록 그대로 내버려 둔 영국에게 복수하려는 증오심에 불타서 아일랜드 전설에 나오는 전사들의 모임인 '페니언'에서 이름을 따 온 무장 조직인 페니언 민병대를 만들어 1866년부터 1886년까지 20년 동안 영국의 영토였던 캐나다로 쳐들어가 영국군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잠재적 적국인 영국[32]을 돈 한 푼 안 들이고 견제하려는 속셈에서 그냥 눈감아 주었다. # 한편 이로 인해서 미국을 경계하게 된 캐나다는 통일 연방을 결성했다.

이때 아일랜드의 통속요인 < Johnny I Hardly Knew Ye>가 미국에 전파되어 <When Johnny comes marching home>이라는 곡으로 재탄생하였다. 전자는 19세기 초 영국의 실론 원정에 동원된 아일랜드인들의 역사적 배경을 거름으로 삼아 탄생한 곡이나, 후자로 변모하면서 미국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한 곡으로 개작되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것이 시작이 되어 한국을 비롯한 해외에도 이 곡의 곡조가 널리 전파되어 알려지게 된다.

4.3. 영어에 자리를 내준 아일랜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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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아일랜드 지배는 12세기 중반에 이루어졌지만,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아일랜드섬 주민들의 모국어는 아일랜드어였다. 지도에서 나오는 영어 사용 지역도 이주해 온 잉글랜드인들이 정착한 지역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상당한 세를 유지하던 아일랜드어 화자 다수 지역은 아일랜드 대기근이 발생한 기점으로 급격하게 감소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아일랜드어는 이 대기근을 계기로 영어에 밀리면서 다수 언어의 지위를 상실하고 서부의 오지에서나 사용되는 언어로 전락하고 말았다. 대기근으로 인해 상당수의 사람들이 죽거나 이민을 떠나면서 아일랜드어 화자들의 수가 대폭 감소했고, 남은 주민들도 아일랜드의 경제력이 크게 취약해지면서 생계를 위해 영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다. 물론 7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아일랜드어를 탄압하고 영어 사용을 권장한 영국 당국과 아일랜드어의 보급과 아일랜드어의 교육과 보존에 미온적이었던 아일랜드의 가톨릭 교회 등 대기근 말고도 다른 요인들도 있으나 아일랜드어 화자 수가 대폭 감소하게 된 데에는 대기근이 결정타가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33]

대기근이 끝난 19세기 말부터 아일랜드어 부흥 운동이 전개되고 독립 이후에도 아일랜드 공화국 정부는 아일랜드어를 제1국어로 지정하는 등 적극적으로 아일랜드어 부흥 정책을 실시하였으나 갈수록 아일랜드어 비중이 낮아져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이러한 이유로 아일랜드 국민 대다수는 모국어가 영어이며 아일랜드어는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한다. 아일랜드 정부가 공용어로 아일랜드어를 지정하며 혼신을 다해 복구하려 들고 있지만 현재로선 아주 조금씩 느릿느릿하게 화자가 늘어날 정도로 미미한 수준이라 명목상에 지나지 않으며(가장 사용 비율이 높다는 어린이 계층에서도 15%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한다) 현실적으로 영어가 거의 유일한 공용어인 상황. 영국 입장에서는 700년 식민지배가 해내지 못한 아일랜드어 말살 정책을 대기근으로 해낸 셈.

5. 문화적 영향

이 기근을 주제로 하여 아일랜드인들을 모욕하는 'Famine Song(직역:기근 노래)'이라는 곡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영국 축구 경기장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이 노래의 가사가 영국에서 잉글랜드와 나머지 3개 지방( 북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간의 지역감정을 직접적으로 자극하기 때문이다. 훌리건들은 폭동을 일으키며 이 노래를 즐겨부른다.
아일랜드 가수 패디 라일리의 노래. 가장 잘 알려진 버전이다.
대신 아일랜드 쪽 축구팬들이 많이 부르는 노래는 피터 세인트 존(Peter St. John)이 작사, 작곡한 < 아덴라이의 들판>인데 듣는 사람 입장에선 이건 이거대로 눈물바다다. 무슨 노래인고 하니 아이가 굶어죽게 생기자 절박해진 남성이 높으신 분[34]의 옥수수 창고를 털었다가 붙잡혀서 오스트레일리아[35] 끌려가기 전날에 아내와 생이별하는 슬픈 노래다. 대놓고 훌리건 짓을 하기에는 이 노래의 가사가 너무 슬프기도 하고 인종차별 요소가 없는 데다 축구장에서 이걸 부르는 사람들도 꽤 얌전하기 때문에 축구장 금지곡은 아니다. 다만 한국 축구팬들은 이 가사보다는 The Fields of Anfield Road로 알려진 리버풀 FC 개사 버전으로 부르는 게 더 익숙하다. 리버풀 FC 자체가 셀틱 FC와 친하게 노는 팀이기도 하고 아일랜드에도 팬이 꽤 있기 때문에 어색한 버전은 아니다.

오히려 아일랜드의 각종 스포츠 대표팀이 뛰는 경기에서 단골 메들리로 불리는 노래다. 대신 가사가 너무 슬퍼서 분위기가 처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인지 간혹 Our love was on the wing~ ( Sinn Féin![36]) We had dreams and songs to sing ( IRA!)처럼 가만히 듣다 보면 무서워지는 추임새를 넣기도 한다.

다만 이 사건은 최근까지 아일랜드에서는 논의가 크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으로 이민 갔던 빈민들의 자손들에게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졌고 이들이 아일랜드에 투자하기 시작하면서 아일랜드 내에서도 관심이 생겼다. 예를 들어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들에서는 대기근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걸리버 여행기를 쓴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가 지은 겸손한 제안이 이 기근을 두고 쓰여진 것[37]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100년 전에 쓰인 글이다. 하지만 당시 아일랜드와 영국의 관계와, 100년이 넘도록 비참한 현실이 해결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자료일 것이다.

제임스 프레체빌, 휴고 위빙이 주연한 아일랜드 영화 블랙 47(2018)이 이 시절을 다루고 있다. 집도 먹을 것도 없어서 황야에 살다가 얼어죽는 가족, 수프 한 그릇에 신앙을 포기해야 하는 가톨릭 신자[38], 아일랜드인들의 기근 따위엔 신경쓰지 않는 영국 관료 등 당시 아일랜드의 참혹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6. 정책적 영향

이후 아일랜드는 국가 주요 사업으로 식량자급률을 관리하여 식량안보지수(GFSI)가 2019년에는 2위 2020년에는 1위를 할 만 큼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다.

7. 기타

영국이 튀르키예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비난하자 튀르키예는 이 사건을 꺼내들며 맞받아쳤다. 상술했듯 오스만 제국이 대기근 당시 아일랜드를 지원해 주었기에, 아일랜드인들은 누가 누굴 비난하냐며 영국을 신나게 욕했다. 함께 튀르키예를 비난한 덴마크에게는 1783년 라카기가르 화산 폭발에 이은 아이슬란드 기근[39]으로 역공을 시도하다가 빈축만 샀다.

2011년과 2016년에 캐나다 퀘벡주 해안가에서 발견된 인골들이 대기근 시기인 1847년 당시 아일랜드 이주민들을 태워 캐나다로 오다가 난파된 배에 탑승했던 아이들로 밝혀졌다. #

대기근 당시 미국 오클라호마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인 촉토족이 당시 돈으로 약 170달러(21세기의 가치로는 약 5000달러)를 모금해서 아일랜드 구호 단체에 기부한 적이 있었다.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유행하자 아일랜드에선 이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대한 구호 기금을 모금하였다. #

비틀즈의 멤버로 유명한 폴 매카트니의 증조할아버지는 원래 아일랜드의 가난한 농부였지만 이 사건이 일어나자 리버풀로 이민을 왔다. 이 때문에 폴 매카트니의 족보는 고조대부터는 확인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8. 읽을거리

100만 명 굶어 죽은 대기근…19세기 아일랜드에 무슨 일이
아일랜드 감자 대기근
"전국민이 거지인 나라, 아일랜드밖에 없을 것"

9. 대중 매체

10. 참고 자료



[1] 제목인 "Gorta"는 아일랜드어로 기근을 의미한다. "Burying the child"(아이를 묻다)라는 직관적인 영어 별명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잘 보면 왼쪽의 여성의 손에 쥐어진 포대기 끝자락에 튀어나온 작은 발 한쌍이 보이기 때문이다. [2] 언론에서는 Irish Potato Famine(아일랜드 감자 기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3] 아일랜드는 땅이 척박한 데다 얼마 없는 기름진 땅마저 부자와 영국인들이 가져갔다 보니 싸고 영양가가 풍부한 탄수화물 채소인 감자에 기댈 수 밖에 없었고 온 국토와 농장이 감자 농원이 되었다. [4] 감자 기근의 원인은 감자의 원산지인 남미 국가 페루가 고향인 phytophthora infestans라는 난균이었으며 이것이 미국에서 대규모로 번지고 아일랜드까지 넘어왔다. 특히 감자 말고도 식량들이 워낙 넘쳐나서 금방 감자 역병을 극복하였던 미국과 다르게 감자밖에 없었던 데다 부드럽고 따뜻한 바람이 부는 아일랜드는 감자 진균에게 이상적인 환경이었다. [5] 특히 자유방임주의 이론을 내세우며 정부가 개입하면 아일랜드 경제가 무너진다고 주장했다. [6] 21세기에도 1km2당 인구밀도가 3~4명대 정도인데 당시에는 오스트레일리아나 캐나다나 오타와, 밴쿠버, 퀘벡주, 캔버라, 시드니 같은 일부 대도시의 인구 밀집지역을 제외하면 그야말로 허허벌판이었다. [7] 하지만 영국을 비롯한 서양은 그 넘치는 땅을 차지하고도 원주민들이 대대로 살아온 땅이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원주민들을 학살하거나 오지로 내쫓는 일이 빈번했다. [8] 특히 종교 박해가 없는 미국으로 많이 갔는데 지금도 미국인 중에는 아일랜드계 미국인이 많으며 미국 동부에는 아일랜드계로 가득 찬 도시들도 많다. [9] 외침 없이 이 정도로 나라의 인구가 준 경우는 라나발로나 1세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같은 전무후무한 폭군/독재자가 등장한 경우밖에 없다. 참고로 라나발로나 1세는 영토 확장을 통한 내전으로 단 6년 만에 메리나 왕국의 인구를 500만 명에서 250만 명, 즉 절반으로 줄였고 마시아스 응게마는 '아프리카의 폴 포트'라고 불릴 정도의 학정으로 인구가 32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적도 기니 인구의 최소 1/6을 죽이고 1/3을 해외로 도피하게 해 10년 동안 그 어떠한 기근, 전란도 없이 인구의 1/7 가량을 줄였다. [10] 아일랜드 + 북아일랜드 인구. [11] 1844년 800만 명이었던 아일랜드섬의 인구는 1907년 440만 명으로 최저점을 찍었다가 현재는 680만명까지 회복했다. 그러는 동안 1844년 1400만 명이었던 잉글랜드의 인구는 현재 5600만 명으로 4배 증가했다. 160년간 잉글랜드의 인구는 4배 증가했으나 아일랜드섬의 인구는 도리어 감소했다. 1844년에는 잉글랜드 인구가 아일랜드 인구의 고작 1.75배였으나 현재는 8배나 차이가 나게 된 것이다. 다만 이때 북아메리카로 이민을 간 아일랜드인의 후손인 아일랜드계 미국인, 아일랜드계 캐나다인을 모두 합치면 4천만 명 정도는 된다. [12] 당시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는 감자를 '악마의 작물'이라고 폄하하며 거의 먹지 않았다. 대신 돼지 사료용으로만 재배했으며 프랑스와 벨기에, 독일, 오스트리아 같은 나라들에서만 식용으로 쓰였다. 거기에 그 독일도 초기에는 돼지 사료로 쓰는 감자를 왜 먹어야 하냐며 먹는 걸 기피했다가 프로이센 왕국 프리드리히 대왕이 계책을 부려 감자를 널리 보급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감자는 당시 유럽인들에게 천시받던 채소였다. 아일랜드인들은 물고기를 잡거나 보관할 환경이 좋지 않아서 생선을 많이 먹진 않았다. 아일랜드에서 해산물을 많이 먹게 된 것은 대기근 이후의 일이다. [13] 아일랜드에서 생산된 우유는 버터로 만들어져 영국으로 수출되었고 소작농들은 찌꺼기마냥 남은 버터 밀크만 먹어야 했다. [14] 으깬 감자와 버터 밀크로 만든 요리는 현대에도 콜캐넌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아일랜드 요리 문서 참조). [15] 물론 곡식인 쌀에 비해 감자는 수분 함량이 많으므로 단순히 무게로만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그걸 감안해도 충분한 칼로리를 섭취하기 위해 엄청난 양을 먹은 것은 자명하다. 게다가 아일랜드인들이 요리를 하기 위해서 질 낮은 이탄을 사용했기 때문에 소화흡수율이 떨어져서 대식가가 된 측면도 있다. [16] 감자 구황작물의 끝판왕이다. 단위 면적당 칼로리는 쌀보다 약간 낮지만 생장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1년 동안의 칼로리 생산량은 가장 높다. 여기에 더해 우유와 감자의 영양학적 시너지는 거의 완전식품에 준하는 수준이어서 대다수의 아일랜드인들은 말 그대로 버터밀크와 감자만 먹고도 큰 영양결핍 없이 살아갈 수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감자 문서 참조. [17] 먹고 남은 감자 찌꺼기, 감자 잎, 감자 뿌리(우리가 먹는 감자 부위는 뿌리가 아니고 덩이줄기다)를 돼지들에게 먹였다고 한다. [18] 하루에도 맑았다 흐렸다 비 왔다를 반복하는 날씨를 보인다. [19] 헨리 홉하우스 저, 역사를 바꾼 씨앗 5가지 참조. [20] 옥수수의 원산지인 아메리카 지역에서도 옥수수가 온화한 날씨에 일조량이 많은 북아메리카 서남부와 동남부,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서인도 제도 지역에서만 자생이 가능하고 기후상 춥고 북극과 가까운 유콘 준주와 누나부트 준주, 노스웨스트 준주 등 캐나다 북부와 미국 알래스카 주 등 북아메리카 북부 지역에서는 자생하지 못하는 데다 지력 소모가 심해서 비료를 계속 치지 않으면 효율성이 떨어지는 곡물이다. [21] 대한민국의 '교과서에 나오는 과학 학습만화 - 환경'이라는 학습만화에서는 아일랜드인들이 감자를 키우니 실컷 먹겠다고 좋아하다가 대기근이 일어나자 '다양하게 심을 걸 그랬다'고 후회하는 장면을 넣어 대기근이 감자만 심은 아일랜드인들의 잘못인 것마냥 묘사하는 역사왜곡및 오류를 저질렀다. 아무리 청소년용 도서라 순화와 단순화가 들어갔다지만 이 정도면 국가 단위의 고인드립이다. [22] 이것은 아일랜드 특유의 토지 제도에 기인하는데 일반적인 소작제도는 소출의 일정 비율을 소작 비용으로 지주의 몫이 되고 나머지는 소작농의 몫이지만 화폐경제가 발달하지 못한 아일랜드에서는 상당히 많은 거래가 물물교환으로 이루어졌고 이것은 토지나 주택임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즉 빈농은 농지를 빌려서 소작농 생활을 한 게 아니라 자신의 가족을 먹여살릴 텃밭과 주택의 임대료를 지주의 농장에서 몸으로 때웠던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모든 것을 가져갈 수 있는 빌린 텃밭에는 효율이 좋은 감자만 몽창 심었다. 지주 탓만 할 수도 없는 게 파머스턴 같은 사람은 이러한 토지를 합리화하기 위해 대기근 10년 전부터 개선하려고 했고 대기근 시기 중소지주 중 많은 사람이 결국 파산했다. [23] 기근에 의한 굶주림과 영양실조뿐 아니라 발진티푸스까지 퍼져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1846년 겨울 음식이나 연료조차 없었고 식수나 생활용수를 뜰 힘조차 없었던 환자들은 오두막이나 토굴에서 추위와 싸워야 했다. 발진티푸스뿐만 아니라 영양 상태가 좋았다면 그다지 치명적이지 않았을 재귀열도 퍼져나갔다. 집 근처에 피 묻은 배설물이 있다면 그 집에는 반드시 이질 환자가 살고 있었다. [24] 유럽이라고 아예 해조류를 안 먹는건 아니라서 척박한 웨일스이라고 해조류를 빵과 같이 먹던 역사가 있고 지금도 먹는다. [25] 지금은 구황식품 용도보다는 식품첨가물 카라기난을 추출하는 데 훨씬 많이 사용한다. [26] 아일랜드가 독립한 후 원래 이름인 코브로 바뀌었다. [27] 현재 팝콘용으로 사용하는 폭립종 옥수수 정도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28] 튀르키예의 국기는 오스만 제국 시절인 1844년 제정된 것이다. 공화국 수립 후에도 규격만 좀 더 확실히 정해서 계속 사용 중이다. [29] 아일랜드계 미국인은 유독 자신들의 혈통을 중시해서 조상 중 한 사람만 아일랜드계인 사람도 자신을 아일랜드계라고 당당히 주장하여 미국 내 민족집단에서 상당히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비교하자면 영국계 이민자들은 미국 백인 인구의 태반을 차지할 정도로 엄청나지만 혈통에 집착하지 않아서 통계에서 수치가 매우 낮게 잡힌다. [30] 영화 갱스 오브 뉴욕의 시대적 배경이 되며 이민을 온 유럽인들이 가족 모두가 시민권을 얻기 위해 오자마자 남자들이 군대에 입대하고 가족들과 이별하는 장면이 나온다. [31] 식량난 때문에 미국으로 이주한 거라 이 시기에 남군으로 간 아일랜드계는 소수였다. 그러나 남북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아일랜드계는 남부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오하라 일가도 아일랜드 출신이다. [32] 미국의 건국 계기부터가 인지조례 홍차조례 등 영국의 식민지 수탈이었고, 미국의 건국부터가 영국과의 치열한 혈전 끝에 이뤄졌으니 미영관계가 처음부터 하하호호하는 관계였을 리가 없다. 건국 이후에도 얼마 안 지나서 미영전쟁이 발발했고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타국과의 전쟁을 상정하고 만든 색부호 전쟁 계획 중 가장 구체적으로 짠 게 대영제국의 완전 해체를 목표로 한 적색 전쟁 계획(war plans red)이었다. 미영관계가 혈맹으로 맺어진 건 제2차 세계 대전부터의 얘기다. [33] 대기근 이전 80만 명에 달하던 아일랜드어 단일 화자의 수는 대기근 직후 32만 명으로 절반 넘게 감소했다. [34] 잉글랜드계 박사 찰스 트리벨린 경. 아일랜드의 기근 문제를 해결한다고 미국에서 옥수수를 들여왔으나 이건 가축 사료용 옥수수라서 맛이 없었다. 게다가 이 트리벨린이란 자는 당시 이 기근에 대해 주옥같은 망언을 쏟아냈다. The Fields of Athenry 문서 참고. [35] 당시에 영국은 죄수들을 호주로 보냈다. [36]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좌파 개혁주의)가 결합된 아일랜드의 좌파 민족주의 정당으로, 아일랜드 독립전쟁 시기까지 올라가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Sinn Féin이라는 말 자체가 아일랜드어로 we ourselves 정도의 의미를 지닌다. 아일랜드에서는 한동안 한자릿수 의석을 차지하는 군소정당이었으나 나름대로 탄탄한 지지 기반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이 정당의 과격파가 바로 IRA와 연결된다. 2016년 총선에서 양대 보수 정당과 노동당이 싸그리 폭망하는 가운데 158석 중 무려 23석을 쓸어담아 압승을 거두었다. 2020년 총선에서는 더욱 약진하여 득표율로 전체 1당의 지위를 달성했다. [37] "이럴 바에 다 죽을테니 소수를 희생시켜 다수를 살리자. 아일랜드에서 수출품은 감자뿐이고 감자도 지금 흉작이니, 갓 낳은 아기를 잉글랜드에 수출하는게 어떻겠냐. 진미 좋아하는 귀족들에겐 이만한 고기가 없을테고, 아기 하나 가지고 최소한 3인분의 고기가 나올테니 만찬으론 그만이다. 내가 알기로는 겨울에 아기를 갈라 소금에 절여 눈 속에 식히고, 후추를 좀 뿌리면 최고의 진미가 된다더라." - 본문 중. [38] 수프 한 그릇으로 배교하는 모습이 이 영화에서 그대로 묘사된다. 마을 한켠에 영국인 개신교 목사가 천막을 차리고 개신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에게만 음식을 나눠주고 그 바깥에선 가톨릭 신부가 '저 음식을 먹으면 천국에 가지 못하오!'라며 처량하게 외치는 모습이 나온다. [39] 아이슬란드 가축의 80%가 죽는 등의 타격으로 아이슬란드 인구의 4분의 1 가량이 사망했다. 아일랜드 대기근과는 달리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였다. 아이슬란드를 지배하던 덴마크에서도 이 기근으로 약 8만에서 20만명이 사망했다. 이 화산폭발은 전 유럽에 기근을 가져왔고 프랑스 혁명의 기폭제가 된 화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