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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2 17:44:32

마이클 콜린스(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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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아일랜드의 공영방송 RTÉ가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발표한 명단이다.
<rowcolor=#191919>1위 2위 3위 4위 5위
존 흄 마이클 콜린스 메리 로빈슨 제임스 코널리 폴 데이비드 휴슨
공동 6위
노엘 크리스토퍼 브라운 스티븐 게이틀리 필 라이넛 패트릭 피어스 아디 로체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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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주석 국왕
마이클 콜린스 리암 토마스 막 코스가르 조지 5세 에드워드 8세 조지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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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아일랜드 자유국 임시정부 주석
마이클 콜린스
Michael Collins | Mícheál Ó Coileáin
파일:Michael_Collins.jpg
본명 영어
마이클 존 콜린스
Michael John Collins
아일랜드어
미할 샨 오켈랸
Mícheál Seán Ó Coileáin
출생 1890년 10월 16일
영국 아일랜드 코크 자치주 우드필드
사망 1922년 8월 22일 (향년 31세)
아일랜드 자유국 코크 자치주 빌나블래스
국적
[[아일랜드|]][[틀:국기|]][[틀:국기|]]
직업 정치인, 군인, 독립운동가
서명 파일:마이클 콜린스(정치인) 서명.svg
{{{#black,#white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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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lack><colcolor=#fff> 학력 킹스 칼리지 런던
정당
(조약찬성파)[1]
종교 가톨릭
재임 제1대 아일랜드 자유국 임시정부 주석
1922년 1월 16일 1922년 8월 22일
제2대 아일랜드 자유국 재무부 장관
1919년 4월 2일 1922년 8월 22일
제1대 아일랜드 자유국 내무부 장관
1919년 1월 22일 1919년 4월 1일
아일랜드 자유국 타흐트 달러[2]
1921년 5월 1922년 8월
아일랜드 공화국 형제단[3]
1920년 11월 1922년 8월 22일
군 경력
계급 총사령관
복무 1909년 1922년
참전 부활절 봉기
아일랜드 독립 전쟁
아일랜드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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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st_of_Miche%C3%A1l_%C3%93_Coile%C3%A1in.jpg
마이클 콜린스의 흉상
1. 개요2. 생애3. 평가4.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아일랜드 정치인, 군인이자 독립운동가.

2. 생애

파일:마이클 콜린스_01.gif
연설 중인 마이클 콜린스(1922)
1916년 아일랜드 공화주의자들의 무장투쟁이었던 부활절 봉기에 참여했다. 봉기 종료 후 체포되었으나 주동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살아남았다.[4]

1918년 영국 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다른 신 페인 소속 하원의원들과 함께 의회 등원을 거부하고 아일랜드 국민의회(Dáil Éireann)를 차렸으며 아일랜드의 독립과 아일랜드 공화국 건국을 선포했다.

1919년 여름 마이클 콜린스는 아일랜드 공화동맹의 단장으로 추대되었고, 9월에는 아일랜드 공화국군 정보부장으로서 IRA 사실상의 중요 지도자로 활약하게 되었다. 또한 대통령인 데 벌레라에 의해 재무장관직도 맡게 되었다.

마이클 콜린스가 이끄는 IRA의 전략은 게릴라전 및 주요 요인의 암살 및 테러였다. 그는 영국의 주요 인사에 대한 암살을 노리는 특수부대를 창설하였으며, 미국 등에 이주한 아일랜드인을 중심으로 일종의 애국 공채 등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였다. 또한 주로 외교 활동을 독립 수단으로 삼은 대통령 에이먼 데 벌레라[5]가 부재할 때 아일랜드 공화국을 이끌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마이클 콜린스가 자신의 위치를 위협한다고 여긴 데 벌레라에게서 끊임없는 견제를 받아야만 했으며, 둘의 사이는 좋지 못했다.

1921년 아일랜드 독립 전쟁의 휴전 후 협상에서 데 벌레라는 마이클 콜린스를 대표로 내세웠다. 이유는 당시 영국 국왕 조지 5세가 회담에 참석하지 않는데, 그와 동급인 대통령인 자신이 참석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아일랜드 측에서는 마이클 콜린스와 아서 그리피스를 중심으로 한 대표단이 협상에 참여하게 되며[6], 1921년 12월 6일 최종적으로 협상안이 체결되었다. 이 협상안은 아일랜드 국민의회에 의해 최종적으로 비준되어 아일랜드 자유국(Irish Free State, Saorstát Éireann)이 탄생했다. 이는 많은 논란을 일으켰으며, 이 협상안에 반대하여 대통령 데 벌레라가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당시 IRA 대원의 70%가 이 조약에 반대하여 아일랜드 자유국 정부군에 대해 다시 게릴라전을 일으키게 되었다.

조약의 주요 내용 중 문제가 된 것은 영국군은 얼스터 지방의 6개 카운티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철수하나, 아일랜드는 아일랜드 자유국이라는 이름으로 대영제국 자치령으로 남으며, 아일랜드 의회 의원들은 영국과 국왕에게 충성 서약을 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또한 이 조약은 결국 아일랜드의 남북 분단을 영구화한 조약이 되기도 했다. 현재까지도 북아일랜드는 영국령으로 남아 있다.

물론 당시 콜린스도 좋아서 이런 협상안에 서명한 것은 아니었으며, 그가 데 벌레라를 비롯한 조약 반대파 의회 의원들을 설득할 때 한 말도 '이 조약을 발판으로 더 완전한 독립을 이룩하자'는 식의 점진론적 관점에서의 찬성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영국이 국력을 크게 소진하고 경제난으로 휘청거리고 있었던 덕이 컸지만, 제국주의가 굳건했던 당시에 IRA가 이 정도 자치권을 얻어낸 것도 놀라운 성과였다. 일각에서는 당시 영국이 IRA의 게릴라전과 연이은 영국군 간부, 정치인 저격 암살에 당황하여 IRA 병력과 무장 수준을 실제보다 훨씬 과대평가해 상당한 양보를 했다는 설도 있다.[7] 이처럼 비정규전 게릴라전에서 마이클 콜린스의 군사 지휘력은 상당한 수준으로, 일부에서 현대 게릴라전의 선구자라고 찬양받기도 했다. 그러나 장기적인 동원력, 군사력으로 따지면 당시 아일랜드는 현실적으로나 잠재적으로나 도저히 영국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IRA의 실질적 지도자였던 마이클 콜린스가 당시 한계에 다다른 IRA 조직의 상황을 알고 현실적인 선택을 했다는 게 가장 일반적인 평가이다. 지금도 이 조약에 대해서는 당시 아일랜드의 입장에서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심지어 한때 마이클 콜린스의 동지이자 라이벌이었고, 조약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인해 그와 완전히 갈라선 인물이자, 후에 완전히 독립된 아일랜드의 대통령이 된 데 벌레라조자 "당시로서는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으며, 나는 틀렸고, 콜린스가 옳았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이리하여 아일랜드 자유국이 성립되었으며, 사임한 데 벌레라의 뒤를 이어 아서 그리피스가 대통령으로, 마이클 콜린스는 총리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데 벌레라와 로리 오 코너등의 강경파는 그들을 따르는 IRA 조직과 함께 아일랜드 자유국을 부정하였고 이를 타도하기 위한 무장 투쟁에 돌입했으며, 아일랜드 자유국 또한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리하여 아일랜드 내전이 발생하게 되었다. 콜린스는 전쟁을 끝내려고 영국과의 협상안의 체결로 인해 IRA 강경파들에게 배신자로 주요 타깃이 되었으며, 결국 1922년 8월 22일 매복하고 있던 IRA 단원의 총격에 의해 살해당했다.

3. 평가

마이클 콜린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앞서 서술된 대로, 심지어 그의 라이벌이자 정치적 반대파였던 에이먼 데 벌레라에게서조차 "나는 틀렸고, 콜린스가 옳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이다.

아일랜드에서는 대체적으로는 독립의 아버지, 독립운동가로서 추앙을 받고 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평가가 더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현 IRA 조직[8]을 중심으로 한 북아일랜드 가톨릭 교도, 또는 강화조약 반대파들로부터는 배신자이자, 아일랜드 영구 분단의 원흉으로 지탄받기도 한다. 다시 말해, 입장에 따라 이견이 갈리거나, 심지어는 극과 극의 평가를 받기도 하는 복합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4. 대중매체에서



[1] 현대 아일랜드 정치에서는 신 페인보다는 중도우파 정당인 피너 게일이 콜린스의 정치적 유산을 이어가고 있다. [2] 타흐트 달러(아일랜드어: Teachta Dála). 아일랜드 의회의 하원인 달 에련(Dáil Éireann)의 구성원, 즉 하원의원이다. [3] 당시엔 IRA가 아닌 IRB였다. 즉 IRB는 IRA의 전신. [4] 당시 콜린스는 지도부 중 한 명인 플렁킷 백작의 전속 부관이었고, 플렁킷 백작의 아들 조지프 플렁킷은 총살당했다. 그 외에 에이먼 데 벌레라는 미국 시민권자라서, 콘스턴스 마르키에비치 백작부인은 여자라는 이유로 처형을 면했다. [5] 아일랜드 공화국은 독립 선포 당시에는 대통령이 없었지만 1921년에 대통령직이 창설되고 대통령으로 데 벌레라가 선출되었다. [6] 영국 측 대표는 자주 바뀌었으며, 후에 영국 총리가 되는 네빌 체임벌린이 고정 멤버로 참여하였다. 영국 측 대표 중에는 유명한 윈스턴 처칠이 포함되기도 했다. [7] 영국 정부에서는 협상안 통과 전까지 타결을 자신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영국 측에서는 협상 당시 이 협상이 결렬된다면 단기적으로는 승리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국내외 조건이 맞물려 폭발해 아일랜드 전역을 상실할 수 있음을 우려하고 있었다. 신생국 소련(당시 소비에트 러시아)의 아일랜드 독립운동 세력 지원, 진압으로 더 분노하게 될 아일랜드인의 재봉기, 거듭되는 전쟁 동원에 반감을 품은 영국 본토 민중의 저항 등등... [8] 무장 투쟁 노선은 포기했지만 말이다. [9] 이 때 영국군 병사가 포로들에게 돈을 받고 물을 파는데 자존심 때문에 아무도 돈을 내지 않자 혼자서 돈을 내고 옆에 있던 지미에게 물을 준다.(근데 그 물마저도 영국 병사가 침을 뱉어 버렸다.) 실리를 최우선으로 중시하는 콜린스의 성격을 표현한 듯. [10] 봉기 주동자들을 가려내는 도중 마이클 콜린스에 대해 묻는 영국군 장교에게 친영파 아일랜드 경찰이 마이클 콜린스의 이름을 말하며 그냥 별볼일 없는 놈이라 평하는 깨알같은 모습도 보여준다. 이 역시 실제 역사를 잘 고증한 부분. [11] 실제로 1920년 9월부터 12월까지 콜린스가 이끄는 IRA가 더블린 일대에 암약 중이던 영국 스파이 다수를 제거하는데 이것이 시즌 2의 주요 사건이자 배경이다. [12] 실제로 벌어진 사건으로 1920년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도 불린다. [13] 조약이 간발의 차이(64:57)로 통과되자 콜린스는 내전을 예견하고 기뻐하지 않는 것으로 묘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