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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tures at Eleven 1982 |
The Principle of Moments 1983 |
Shaken 'n' Stirred 1985 |
Now and Zen 19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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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ic Nirvana 1990 |
Fate of Nations 1993 |
Dreamland 2002 |
Mighty ReArranger 2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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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nd of Joy 2010 |
Lullaby and... The Ceaseless Roar 2014 |
Carry Fire 2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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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플랜트의 주요 저널·여론조사 선정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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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플랜트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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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그래미 시상식[1] | ||||
올해의 앨범상 | |||||
제50회 ( 200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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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회 ( 2009년) |
→ |
제52회 ( 201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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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ver: The Joni Letters" - 허비 행콕 | → | " Raising Sand" - 로버트 플랜트 | → | " Fearless" - 테일러 스위프트 | |
올해의 레코드상 | |||||
제50회 ( 2008년) |
→ |
제51회 ( 2009년) |
→ |
제52회 ( 201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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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hab" - 에이미 와인하우스 | → | " Please Read the Letter" - 로버트 플랜트 & 앨리슨 크라우스 | → | "Use Somebody" - 킹스 오브 리온 |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앨범상 수상자 '''[[틀: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앨범상 수상자(2000년~2019년)|Grammy Award for Album of the Yea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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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ernatural | Two Against Nature | O Brother, Where Art Thou? Soundtrack | Come Away With Me | Speakerboxxx/The Love Below | |
산타나 | 스틸리 댄 | VA | 노라 존스 | 아웃캐스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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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ius Loves Company | How to Dismantle an Atomic Bomb | Taking the Long Way | River: The Joni Letters | Raising Sand | |
레이 찰스 | U2 | 딕시 칙스 | 허비 행콕 | 로버트 플랜트 & 앨리슨 크라우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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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rless | The Suburbs | 21 | Babel | Random Access Memories | |
테일러 스위프트 | 아케이드 파이어 | 아델 | 멈포드 앤 선즈 | 다프트 펑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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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ning Phase | 1989 | 25 | 24K Magic | Golden Hour | |
벡 한센 | 테일러 스위프트 | 아델 | 브루노 마스 | 케이시 머스그레이브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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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레코드상 수상자 '''[[틀: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레코드상 수상자(2000년~2019년)|Grammy Award for Record of the Yea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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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ooth | Beautiful Day | Walk On | Don't Know Why | Clocks | |
Supernatural | All That You Can't Leave Behind | Come Away With Me | A Rush of Blood to the Head | ||
산타나 (Feat. 롭 토마스) | U2 | 노라 존스 | 콜드플레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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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e We Go Again | Boulevard of Broken Dreams | Not Ready to Make Nice | Rehab | Please Read the Letter | |
Genius Loves Company | American Idiot | Taking the Long Way | Back to Black | Raising Sand | |
레이 찰스 & 노라 존스 | 그린 데이 | 딕시 칙스 | 에이미 와인하우스 | 로버트 플랜트 & 앨리슨 크라우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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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 Somebody | Need You Now | Rolling in the Deep | Somebody That I Used To Know | Get Lucky | |
Only by the Night | Need You Now | 21 | Making Mirrors | Random Access Memories | |
킹스 오브 리온 | 레이디 에이 | 아델 | 고티에 (Feat. 킴브라) | 다프트 펑크 (Feat. 퍼렐 윌리엄스 & 나일 로저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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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y with Me (Darkchild Version) | Uptown Funk | Hello | 24K Magic | This Is America | |
In the Lonely Hour | Uptown Special | 25 | 24K Magic | 싱글 | |
샘 스미스 | 마크 론슨 (Feat. 브루노 마스 | 아델 | 브루노 마스 | 차일디쉬 감비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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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ander of the Order of the British Empire[2] 로버트 플랜트 Robert Plan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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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728ED8><colbgcolor=#010640> 본명 |
로버트 앤서니 플랜트 Robert Anthony Plan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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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48년 8월 20일 ([age(1948-08-20)]세) | ||
잉글랜드 웨스트 미들랜즈 스태퍼드셔 웨스트 브로미치[3]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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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싱어송라이터 | ||
소속 | (1968 – 1980)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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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10640><colcolor=#728ED8> 학력 | 에드워드 4세 문법 학교 (중퇴) | |
종교 | 불명[4] | ||
신체 | 186cm, 82kg | ||
혈통 | 집시계 영국인 | ||
재산 | 약 $200,000,000[5] | ||
별명 | The Golden God | ||
활동 기간 | 1965년 – 현재 | ||
데뷔 |
1969년
1월 12일[6] ( 레드 제플린 데뷔일로부터 [dday(1969-01-12)]일째) |
||
1982년
6월 28일 (솔로 데뷔일로부터 [dday(1982-06-28)]일째) |
|||
데뷔 앨범 | |||
사용 악기 | 보컬, 하모니카, 퍼커션, 기타, 베이스 기타[7] | ||
장르 | 록, 블루스, 포크송, 컨트리 뮤직, 포크 록, 블루스 록, 하드 록, 헤비 메탈, 컨트리 록, 프로그레시브 록, 소프트 록, 얼터너티브 록, 뉴 웨이브, 포스트 펑크, 신스팝, 월드 뮤직[8] | ||
음역대 | 0옥타브 도 – 4옥타브 시[9] | ||
부모 |
부 로버트 찰스 플랜트 (1918 - 2004) 모 애니 케인 플랜트 (1920 - 1997) |
||
배우자 | 모린 윌슨 (1968 - 1983, 이혼) | ||
파트너 |
셜리 윌슨 (1969? - 1991?)[10] 패티 그래핀 (2012 - 2014) |
||
자녀 |
슬하 3남 1녀 장녀 카멘 제인 플랜트 (1968 - )[A] 장남 캐락 펜드래곤 플랜트 (1972 - 1977)[A] 차남 로건 로메로 플랜트 (1979 - )[A] 삼남 제시 리 플랜트 (1991 - )[14] |
||
레이블 | 애틀랜틱 레코드, 유니버설 뮤직 그룹, 스완 송 레코드 | ||
링크 |
[clearfix]
1. 개요
|
영국의 록 밴드인 레드 제플린의 보컬리스트[15]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레드 제플린 시절에 지미 페이지와는 역사상 최고의 기타-보컬 듀오로 꼽히는 플랜트-페이지를 구성하기도 했다. 1980년 레드 제플린의 해체 이후에는 솔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2009년 그래미 상을 받을 정도로 솔로 활동 평가도 매우 높은 편이다.
4옥타브에 이르는 넓은 음역과 풍부한 성량을 자랑하는 보컬, 찰랑이는 금발 머리, 잘생긴 외모, 웃통은 반쯤 벗고 다닌 패션으로 그루피 부대를 이끌고 다니는 등 수많은 여심을 사로잡고 무대 위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낸 1970년대 하드 록 및 헤비 메탈 신의 대표적인 음악가이다. 목소리 톤 자체도 매우 높은 편이기에 언뜻 들으면 여성처럼 들릴 정도로 높은 고음을 소화해낸다. 그의 보컬은 이안 길런, 프레디 머큐리, 액슬 로즈 등 동시대 및 후대의 수많은 보컬리스트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심지어 로저 달트리 등의 선배 록스타들과 마돈나, 레이디 가가 등의 팝 스타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다. 그를 빼놓고서는 하드 록, 메탈 보컬의 역사가 설명이 되지 않을 정도이다.
이러한 막대한 영향력뿐만 아니라 초월적인 가창력으로 인해 보통 록 음악과 대중음악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보컬리스트이자 프론트맨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대중들에게 "최고의 가수" 투표를 하면 10위권 밖으로 떨어지는 일이 없고, 롤링 스톤이 선정한 "최고의 보컬리스트 100인"에서 15위[16]에 들었고, 동일 잡지에서 독자들의 투표로 선정한 "최고의 록 가수"에서 1위를 차지했다.[17]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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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오브 조이 시절 (1967년) |
레드 제플린 시절 (197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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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 활동 시절 (1993년) |
현재 (202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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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열 앨버트 홀에서의 "
What Is and What Should Never Be" 연주 (1970년) |
그릭 공연장에서의 "
Please Read the Letter" 연주 (2022년) |
자세한 내용은 로버트 플랜트/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
3. 뮤지션으로서의 재능
3.1. 보컬리스트로서
|
1971년 Since I've Been Loving You 라이브[18] |
|
1972년 Immigrant Song 라이브 |
||<tablewidth=100%><width=10%><tablebgcolor=#fff,#1c1d1f><tablebordercolor=#fff,#1c1d1f>Robert Plant is one of the most original vocalists of our time.
프레디 머큐리[19]||
프레디 머큐리[19]||
록 음악 역사상 최고의 보컬리스트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것과 동시에 대중음악사를 통틀어도 톱클래스로 꼽힐만한 보컬로 평가받는다. 그만큼 그를 추앙하고 영향을 받은 뮤지션들은 엄청나게 많은데, 대표적으로 로저 달트리,[20] 오지 오스본, 액슬 로즈, 프레디 머큐리,[21] 겐키 히토미, 게디 리, 데이비드 리 로스, 새미 헤이거, 잭 러셀, 김종서,[22] 마돈나, 레이디 가가 등이 있다. 역대 최고의 하드 록/ 메탈 보컬리스트를 논할 때 로버트 플랜트가 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Thank You나 The Rain Song과 같은 소프트 록 곡에서는 감정을 잡고 쏟아내는 식으로 다른 장르의 보컬 또한 소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지미 페이지는 처음 로버트의 노래를 들었을 때 “어째서 이 사람이 지금껏 무명이지? 성격에 문제가 있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높은 음역대를 가진 테너 성종의 록 보컬의 대명사로 통한다. 비음이 많이 섞인 엄청난 하이톤의 미성이 트레이드 마크이며, 이를 바탕으로 중고음을 굵직하게 긁어 처리하고,[23] 고음역대는 거칠고 선명한 두성으로 처리한다. 때문에 소리에서 굵직한 허스키함과 귀를 찌르는 날카로움이 공존하는, 어떻게 보면 상당히 모순되는 특성들이 어우러진 음색을 가지고 있다. 후대에 그를 모델로 삼고 연습한 보컬들 중에서도 그의 굵직한 허스키함과 중성적인 날카로운 하이톤을 모두 재현한 보컬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24] 이 야누스적인 카리스마는 그만의 독보적인 매력으로 평가되며, 그 포스는 정말 말그대로 압도적인지라, 무대에서 삑사리를 자주 내는데도 그 특유의 음색과 카리스마, 음악적 센스로 다 커버해 사람들을 열광시킬 정도다.
고음뿐만 아니라 저음역도 상당히 넓었는데, 0옥타브 대에서도 안정적인 보컬을 구사할 수 있다. Going to California 같은 노래에서 들을 수 있는데, 잔잔한 어쿠스틱 반주에 저음역대의 보컬이 매우 잘 어우러진다.
성량 또한 매우 크다. 라이브에서 목소리가 밴드 소리를 뚫고 나올 정도. 또한 리즈 시절에 라이브 중 스피커가 터진 적도 있다.[25] 또한 악기들의 발달로 레드 제플린 활동 당시보다 악기 소리가 훨씬 더 짱짱해진 현재에도 보컬이 밴드 소리를 뚫고 나온다.
로버트 플랜트의 전성기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72년까지로,[26] 이 시절 라이브를 들어보면 전성기 때 얼마나 어마어마했는지 알 수 있다.[27] 예로 1971년 몽트뢰 카지노 공연을 들어보면 애드리브로 지르는 3옥타브 중후반대의 샤우팅, 기타 소리마저 뚫고 나오는 어마어마한 성량 등을 볼 수 있다. 특히 유튜브에 공개되어 있는 1973년 매디슨 스퀘어 가든 공연, 1979년 네브워스 라이브 등과는 다르게 Rock and Roll, Black Dog, Stairway to Heaven 등의 히트곡들을 음을 낮추어 부르지 않고 원키로 부른 것이 백미.
|
1969년 Babe I'm Gonna Leave You 라이브 |
||<tablewidth=100%><width=10%><tablebgcolor=#fff,#1c1d1f><tablebordercolor=#fff,#1c1d1f>Songs like (Led Zeppelin’s) Babe I'm Gonna Leave You, I find my vocals on there horrific now. I really should have shut the fuck up!
1집 시절 보컬에 대한 본인의 평 ||
1집 시절 보컬에 대한 본인의 평 ||
1집 시절에는 중음에서 목을 잔뜩 긁어 무겁게 소리내는 것을 힘으로 고음까지 쭉 유지하는 방식을 썼다.[28] You Shook Me같은 곡에서 들을 수 있는데, Immigrant Song을 부를 때처럼 소리를 얇고 날카로운 질감으로 처리하는 게 아니라, 매우 무겁고 거칠게 처리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에너지 소모가 매우 심하고 성대에 엄청난 무리를 주는 창법이라[29] 상술했다시피 본인 또한 1집 시절의 보컬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2집 발매 이후, 1970년부터 날카로운 고음을 내기 유리한 식으로 창법을 변화시켜 왔고, 4집에서 절정을 맞는다. 그러나 1973년부터 부족한 자기 관리와 그 동안의 무리한 발성으로[30] 음색이 탁해지고 음역이 줄어 초창기보다 훨씬 거칠고 진한 음색과 창법을 보여주었다. 때문에 상술 되었듯이 전성기가 길지 않았으며, 당시 라이브에서는 몇몇 곡들을 낮추어 불렀다. 대표적으로 1973년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의 Black Dog, Rock and Roll 등이 있다.
이후로 창법을 변경하면서 고음역 회복을 줄기차게 꾀하였으나 결과는 별로 신통치 않았다.[31] 그래도 본래 엄청난 보컬리스트라 제 몫은 해냈지만,[32] 이전과는 다른 스타일의 보컬이 되어버렸다. 본래 날카로우면서도 허스키한 독특한 미성이었다면, 1970년대 후반의 보컬은 끈적하면서도 고음역대는 더 허스키하게 변했다.[33] 원래는 쉽게 소화하던 3옥타브 이상의 고음역대를 어렵게 소화하는 등 기량이 떨어진 모습도 보여주었다. 그러다가 레드 제플린 해체 후 1980년대 중반부터 목이 완전히 상해서 라이브 에이드에서는 고음을 거의 소화하지 못했다.[34]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이후에 철저한 관리와 창법을 변화시켜서 1990년대에 목소리를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고, 90년대 중반의 페이지&플랜트 투어에서 전성기를 연상시키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
2007년 Kashmir 라이브[35] |
노년기인 현재까지도 워낙 기본적인 가창력이 뛰어났던데다 밴드가 해체한 이후로는 관리도 잘 하였기 때문에 수준급의 보컬을 유지하고 있다. 노년의 인상과는 전혀 매치가 불가능한 목소리는 덤이다. 현재까지 흡연자에 음주를 즐겨하는 데다가 과거 마약을 달고 살았던 사람인데도 이 정도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그만큼 할 것은 다 하면서도 관리는 엄청나게 하였다는 의미. 젊었을 적처럼 날카롭진 않지만 그동안 창법을 꽤나 바꿔오며 적응해냈기 때문에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그래도 고령의 나이 때문에 몇몇 곡들은 키를 한두 키 낮추어서 부르고 있으나, Since I've Been Loving You 같은 곡들을 부를 때는 여전히 3옥타브 솔(G5)의 샤우팅을 보여주는 등 어마어마한 역량을 유지하고 있다. 록 밴드의 보컬들이 나이가 들면서 목소리가 엄청 나빠지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을 감안하면,[36] 그가 록 보컬리스트로서 얼마나 열심히 임하고 있을 것인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레드 제플린 시절 앨범들을 리마스터링하는 것 외에는 좀처럼 음악 활동을 하지 않는 지미 페이지와는 대조적으로 2020년대인 현재까지 꾸준히 앨범을 발매하고 라이브 투어도 계속 진행하고 있다. 레드 제플린 시절 히트곡들도 투어 셋리스트에 계속해서 포함시키는데 현재 자신의 목소리에 맞는 새로운 편곡을 거쳐서 그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다는 평. 또한 아무래도 나이가 있다 보니 전성기에 비해 목소리가 꽤나 두꺼워졌는데, 도리어 이 굵은 목소리가 현재 하고 있는 포크나 컨트리 음악에 매우 조화롭게 어우러진다는 평가가 많다.
굳이 단점을 꼽자면 라이브 기복이 많다는 것이다. 다만 이는 이안 길런, 프레디 머큐리 등 당대 유명했던 고음형 보컬리스트들이 어느 정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단점이었으며, 이들이 정식으로 보컬 레슨을 받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또한 레드 제플린 팀 자체가 앨범의 최상의 퀄리티를 위해 녹음 시 라이브 걱정은 안하고 본인들 기량을 최대한 쥐어짜서 녹음하는 타입이라, 애초에 본인의 곡들을 라이브에서 애드리브까지 다 살려가며 소화하기엔 너무 어려운 곡들이었을 것이다.[37] 또한 컨디션이 좋을 때에는 음원 이상의 라이브를 보여주며, 라이브 기복이 있다고 그를 위대한 보컬리스트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창법과 스타일에 있어서 엘비스 프레슬리, 소니 보이 윌리엄슨 2세, 하울링 울프, 재니스 조플린, 스티브 매리엇, 로저 달트리 등의 보컬리스트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스몰 페이시스의 보컬리스트인 스티브 매리엇의 열렬한 팬이어서 무대 뒤, 대기실 등에까지 스토커처럼 쫓아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자연히 창법에 있어서도 스티브 매리엇으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았는데, 예를 들어 스몰 페이시스가 1966년에 발표한 You Need Loving을 들어보면 로버트 플랜트가 매리엇의 창법 스타일을 얼마나 많이 벤치마킹했는지를 알 수 있다.[38]
그의 진성 음역대는 0옥타브 도(C2)~3옥타브 시(B5)이며, 가성까지 포함하면 4옥타브 시(B6)이다. # 이에 범접하는 음역대를 가진 록 보컬리스트는 프레디 머큐리,[39] 액슬 로즈[40] 정도밖에 없으며, 다른 장르까지 보더라도 니콜라 세다,[41] 디마시 쿠다이베르겐,[42] 비타스[43] 정도밖에 없다.
3.2. 프론트맨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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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장르 프론트맨의 이미지를 구축한 아티스트이다. 찰랑찰랑한 긴 금발과 헤드뱅잉, 잘 빠진 몸매를 그대로 보여주는 상반신 노출, 어딘가 세상 일 따위 상관없이 내 갈 길 간다는 달관한 눈빛, 3옥타브 대에 이르는 샤우팅 등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른바 “록 보컬리스트”의 이미지를 떠올렸을 때 생각나는 특징 중 대부분은 로버트 플랜트와 믹 재거, 그리고 로저 달트리를 통해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44] 이러한 점은 후대의 록 프론트맨들에게도 그대로 전수되었으며, 특히 퀸의 프레디 머큐리는 라이브 공연에서 언제나 로버트 플랜트처럼 행동하려고 했다고 한다. 또한 80년대의 글램 메탈 신의 헤어스타일에도 꽤나 영향을 끼쳤으며 락 뮤지션뿐만이 아닌 70,80년대의 아이돌 팝 가수 레이프 가렛에게도 스타일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또한 공연에서 지미 페이지와의 호흡 또한 매우 잘 맞았기에 “최고의 보컬/기타 콤비”를 뽑으면 플랜트-페이지가 열 손가락 안에 자주 꼽힌다. 이들은 공연에서 관중을 조련하기도 하며 샤우팅과 기타를 이용해
3.3. 작사가로서
||<tablewidth=100%><width=10%><tablebgcolor=#fff,#1c1d1f><tablebordercolor=#fff,#1c1d1f>And as we wind on down the road
우리가 인생의 길을 달려갈 때
Our shadows taller than our soul
우리의 그림자가 우리의 영혼보다 더 커 보일 때
There walks a lady we all know
우리 모두가 아는 그 여인이 걸어와
Who shines white light and wants to show
흰 광채를 두른 채 보여주려 하오
Stairway to Heaven ||
우리가 인생의 길을 달려갈 때
Our shadows taller than our soul
우리의 그림자가 우리의 영혼보다 더 커 보일 때
There walks a lady we all know
우리 모두가 아는 그 여인이 걸어와
Who shines white light and wants to show
흰 광채를 두른 채 보여주려 하오
Stairway to Heaven ||
||<tablewidth=100%><width=10%><tablebgcolor=#fff,#1c1d1f><tablebordercolor=#fff,#1c1d1f>Oh, father of the four winds fill my sails
Kashmir ||
Kashmir ||
||<tablewidth=100%><width=10%><tablebgcolor=#fff,#1c1d1f><tablebordercolor=#fff,#1c1d1f>Once I stood beside a well of many words
Please Read the Letter ||
Please Read the Letter ||
작사가로서의 능력도 가히 최상급이라고 평가할 만한데, Stairway to Heaven, Kashmir 등 제플린의 대다수의 히트곡들의 작사를 맡았다.
역사와 문학 쪽에 조예가 깊은 로버트 플랜트답게 그가 쓴 가사들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며, 역사에 기반한 가사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가사가 시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45] Immigrant Song이 대표적인데, 이 곡은 중세 유럽 당시 바이킹이 잉글랜드를 침략하는 장면을 바이킹들의 시점에서 바라본 곡이다. 따라서 해당 곡에서는 북유럽으로 진출했던 게르만의 일파인 바이킹들의 신화인 북유럽 신화, 그들의 주요 본거지 중 한 곳이었던 아이슬란드의 간단한 역사와 지리적 특징 등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Kashmir 같은 경우에도 서구권 팬들로부터 그저 단순한 노래가 아닌, 실제 카슈미르를 여행하는 여행자의 모습을 매우 잘 그려낸 한 편의 문학 작품 같다는 평가부터 문학 작품들을 많이 읽지 않았으면 절대 쓸 수 없는 가사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그의 작사 능력은 가히 경탄할 만하다.
한편 로버트 플랜트 또한 과거 사이키델릭 록 뮤지션들처럼 마약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는데, 대표적으로 Stairway to Heaven 같은 경우는 마약을 하다가 약에 취해 무아지경에 빠져서 정신없이 썼던 가사이다. 해당 가사 같은 경우에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본인이 가장 놀랐다고.
지미 페이지는 로버트 플랜트가 쓴 Stairway to Heaven의 가사를 보고 크게 감탄하여 이후 작사에서는 손을 떼버리고 로버트 플랜트에게 전부 맡겼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3.4. 솔로 음악가로서
존 레논, 조지 해리슨, 폴 매카트니, 필 콜린스, 루 리드, 시드 바렛, 로저 워터스, 스팅, 피터 가브리엘, 브라이언 이노 등과 더불어서 밴드 활동 외에 솔로 활동으로도 인정받는 몇 안되는 아티스트 중 한 명이다. 보통 밴드, 그중에서도 레드 제플린과 같은 레전드급 밴드에 몸담았던 음악가들은 솔로 활동이 밴드의 성공에 비해 부진하는 경우가 많다. 보통 음악가들의 전성기는 5~10년 정도인데, 밴드 활동은 아무리 못해도 10년은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솔로 활동을 시작할 때 쯤에는 전성기에서 약간 빗겨나 있는 데다가, 밴드 시절과는 달리 음악적 충고를 해줄 사람이 없어지니 어딘가 부족한 면도 생기게 된다. 그래서 로버트 플랜트도 신보를 제작할 때마다 " 지미 페이지가 여기 있으면 좋았을 텐데" 타령을 매일 했다고 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버트 플랜트는 레드 제플린의 유산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만의 음악적 스타일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초기 커리어는 하드 록으로 시작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시대의 흐름에 맞춰 팝 록, 신스팝, 뉴 웨이브를 수용했고, 1980년대 말기에는 얼터너티브 록, 포스트 펑크도 시도했다. 2000년대 이후로는 음악적 색체가 더욱 다양해져서 아메리카나, 컨트리 뮤직, 심지어는 월드 뮤직도 선보였다.[46]
놀라운 것은 이러한 엄청난 음악적 스펙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앨범들의 평가가 꽤나 준수했고, 상업적으로도[47] 성공을 거뒀다는 점이다. 약 300만 장 가량이 팔린 Raising Sand를 비롯하여 그의 앨범들은 대부분 빌보드 차트, UK 차트 상위권에 진입했다. 그는 1,000만 장 이상의 음반 판매고를 기록하고 있으며, 평론적으로도 올타임 음악가로 불릴 정도로 평가가 높다. 로버트 플랜트는 어클레임드 뮤직 선정 올타임 아티스트 855위에 랭크되었다. 더욱 유의미한 것은 1980년대 661위, 1990년대 488위, 2000년대 168위로 오히려 순위가 시간이 지날수록 상승하고 있다는 점이다.
4.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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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와 모린 |
20세의 어린 나이에 모린 윌슨과 결혼하였다. 그러므로 로버트는 레드 제플린이 데뷔하기 전부터 배우자가 있는 몸이지만 레드 제플린으로 활동하는 내내 그루피들과 어울리며 가정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았다. 그럼에도 모린과의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는데 모린에게 로버트가 헌정한 Thank You는 모린을 향한 로버트의 마음을 알 수 있다. 모린과의 사이에서 딸인 칼멘과 아들인 캐락, 로건을 두었다. 그루피들과 어울리던 시절에도 로버트는 자녀들을 각별하게 아꼈는데 1976년에 개봉한 The Song Remains the Same에서는 로버트가 자녀들과 어울리는 단란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연하지만 로버트가 자녀들과 같이 촬영한 사진도 많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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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락, 로버트, 칼멘 |
그러나 1977년에 5세이던 캐락이 위장질환으로 사망한다. 레드 제플린의 미국 투어로 인해 영국에 없었던 로버트는 캐락의 마지막을 지켜보지 못하고 캐락을 떠나보낸다. 자녀들을 아끼던 로버트는 절망하여 그 자리에서 투어를 종료하고 영국으로 귀국하여 1년이라는 시간을 칩거한다. 다시 활동을 시작한 로버트가 캐락을 잃은 아픔을 토대로 만든 노래가 8집인 In Through the Out Door에 수록된 All My Love와 I'm Gonna Crawl. 1980년에 모린과 이혼한 로버트는 11년이 지난 1991년에 모린의 여동생인 셜리와 만남을 이어가다가 아들인 제시를 얻는다. 모린이 낳은 칼멘, 로건과 셜리가 낳은 제시는 외사촌인 동시에 형제자매인 황당한 그림이 그려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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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와 로건의 비교 사진 |
1979년에 태어난 로버트의 차남인 로건은 로버트와 흡사한 외모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금발에 벽안인 로버트와 다르게 로건은 흑발에 벽안이다.
5. 다른 음악가와의 관계
현대 유명 음악가와까지 친분을 맺고 있는 록 음악계의 대표적인 마당발인 링고 스타나 데이비드 보위만큼은 아니지만 활동 당시 로버트 플랜트는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뮤지션들과도 친분을 맺었는데, 이는 후술할 그의 사교적이고 유쾌한 성격 때문으로 추측된다.5.1. 지미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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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제플린 시절 지미 페이지와는 매우
그러나 워낙 친했기에 밴드 활동 내내 시도때도 없이 친목질을 하는 바람에 둘 사이에서 소외되고 자신의 역할이 세션맨에 불과하다는 불만을 느낀 베이시스트 존 폴 존스가 활동 중반기와 후반기에 일시적으로 밴드를 탈퇴하기도 했다. 물론 존 본햄의 설득으로 다시 밴드에 재가입했다.
그런데 레드 제플린 해체 후엔 지미 페이지와 로버트 플랜트의 사이가 예전만큼 좋지 못하다. 해체 후 둘이 간혹 같이 공연하거나 만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의견 불일치와 사소한 다툼 등 트러블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2007년 재결성 공연에서 로버트 플랜트는 지미 페이지에게 무언가 불편함과 불쾌감을 느꼈다고 하며, 이 때문에 2023년 현재까지 레드 제플린 재결성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5.2. 기타 음악가
*
비틀즈록 음악계의 거장인 만큼 비틀즈를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
존 레논과는 친분이 없으나, 존 레논이 헤비한 노래를 좋아했기에 생전에 레드 제플린의 팬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로버트는 존 레논의 아들인
줄리안 레논과 친분이 있어서 1980년대와 근래에 찍은 사진들이 존재한다.
폴 매카트니 또한 레드 제플린의 팬이라고 하며, 특히 로버트 플랜트와는 서로 존경하는 사이라고 한다.
조지 해리슨과도 친분이 있어[49] 1972년
크리스마스를 조지 해리슨과 함께 보냈으며, 이후 1990년대에도 같이 찍은 사진들이 존재한다.
*
핑크 플로이드
로저 워터스와는 상당히 친한 사이로, 후술할 로버트 플랜트가 당했던 큰 교통사고 당시 워터스가 플랜트의 재활을 도운 적이 있으며, 서구권에서는 식물에게
물을 준다는 밈이 있다.
데이비드 길모어와도 친한 사이로, 데이비드 길모어가 개최한
파티에 참석해서 즐기는 사진을 인터넷에서 볼 수 있다. 다만 음악적인 교류를 하지는 않았다.
*
더 후보컬적인 부분에서
로저 달트리에게 영향을 짙게 받았으며, 1968년 데뷔하기 이전부터 지미 페이지를 통해 더 후의 멤버들을 만나게 되면서 더 후와 친해졌다고 한다. 최근 로저 달트리의 인터뷰에 따르면 아직까지 친하게 지낸다고 한다.
-
퀸
퀸 멤버들이 레드 제플린의 광팬이었으며, 로버트 플랜트 또한 퀸에 대한 존경심을 몇 번 드러낸 바 있다. 프레디 머큐리와는 1977년 이전에 공식석상에서 마주친 적은 없으나, 프레디가 “로버트는 나에게 퀸 노래 중에서 Killer Queen을 제일 좋아한다고 말했다”라고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기에 사적 친분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이러한 인연으로 프레디 머큐리 추모 콘서트에 참가하여 다른 퀸 멤버들과 합동 공연을 하였다.
-
에릭 클랩튼,
제프 벡
야드버즈 시절 기타리스트였으며 제플린 시절 동료였던 지미 페이지의 절친이었기에 이들과도 친분을 맺었다. 에릭 클랩튼과는 1984년에 열린 필 콜린스의 결혼식에서 합동 공연을 한 적이 있다.
*
브라이언 존슨
AC/DC가 레드 제플린의 영향을 받은 밴드인 만큼 AC/DC의 보컬인 브라이언 존슨과 친분이 있다. 이 인연으로 브라이언 존슨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또한 2017년에는 브라이언 존슨, 폴 로저스와 합동 공연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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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눕 독의외로 갱스터 힙합의 거장인 스눕 독과도 친분이 있다. 2008년 컨트리 뮤직 어워드에서 처음 만났고 친분을 맺어 사진도 찍었다고. 전혀 연관성이 없는 60년대 영국 히피와 90년대 미국 서부 갱스터의 조합이라 서구권의 팬들도 놀랐는지 레드 제플린의 히트곡인
Black Dog과 스눕 독의 첫 데뷔 당시 예명인 Snoop Doggy Dogg를 합쳐서 Black Doggy Dogg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
로우(밴드)
또한 90년대 새드코어 밴드였던 로우의 팬이었다고 한다. 로우 멤버였던 미미 파커가 2022년 11월 타계했을 당시 추모 공연을 하기도 했다.
-
스티브 알비니 (
빅 블랙)
빅 블랙의 Songs About Fucking을 듣고 스티브 알비니 팬이 되었다고 한다. 훗날 페이지와 플랜트의 Walking into Clarksdale 앨범을 낼 때 알비니를 프로듀서로 불러오기도 했다.
6. 디스코그래피
6.1. 정규 앨범
- Pictures at Eleven (1982)
- The Principle of Moments (1983)
- Shaken 'n' Stirred (1985)
- Now and Zen (1988)
- Manic Nirvana (1990)
- Fate of Nations (1993)
- No Quarter: Jimmy Page and Robert Plant Unledded (1994)
- Walking into Clarksdale (1998)
- Dreamland (2002)
- Mighty ReArranger (2005)
- Raising Sand (2007)
- Band of Joy (2010)
- Lullaby and the Ceaseless Roar (2014)
- Carry Fire (2017)
6.2. 싱글
6.2.1. 빌보드 핫 100 3위~10위
- Sea of Love (1984, 3위)
6.2.2. 빌보드 핫 100 11위~20위
- Big Log (1983, 20위)
6.2.3. 빌보드 메인스트림 록 차트 1위
- Other Arms (1983)
- Little by Little (1985)
- Heaven Knows (1988)
- Tall Cool One (1988)
- Hurting Kind (I've Got My Eyes on You) (1990)
- Most High (1998)[50]
6.2.4. 빌보드 메인스트림 록 차트 2위~10위
- Burning Down One Side (1982, 3위)
- Big Log (1983, 6위)
- In the Mood (1983, 4위)
- Ship of Fools (1988, 3위)
- Tie Dye on the Highway (1990, 6위)
- Your Ma Said You Cried in Your Sleep Last Night (1990, 8위)
- 29 Palms (1993, 4위)
- Calling to You (1993, 3위)
- I Believe (1993, 9위)
6.2.5. 기타 차트 성적
- Please Read the Letter (2007, 버블링 언더 핫 100 차트 20위)
- Rich Woman (2007, 버블링 언더 핫 100 차트 18위)
7. 여담
- 개요 문단에 있는 사진은 로버트 플랜트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라고 한다. 이 사진은 1973년 샌프란시스코 공연에서 찍힌 사진인데, 당시 공연이 개막할 때 천 마리의 비둘기들을 관객들을 향해 풀었는데, 그중 한 마리가 날아오르지 않고 로버트 플랜트의 손 위에 앉았을 때 찍힌 것이다. 로버트 플랜트는 이 사진을 직접 복사해서 가지고도 있다고.
- 동양인들이 생각하는 게르만, 켈트의 전형적인 스테레오타입인 금발벽안에 흰 피부를 가지고 있지만 그의 어머니는 흑발에 다소 어두운 피부[51]를 가진 롬인, 즉 집시이다. 따라서 로버트 플랜트는 집시 혈통이다.
- 팬 서비스가 좋은 록스타로 유명하다. 레드 제플린 활동 시절부터 현재까지 사인을 엄청 잘 해주며, 휴대폰이 보급된 현재에는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면 팬들이 원하는 포즈로 같이 찍어준다고 한다.[52] 트위터와 인스타그램, 레딧 등지에 이러한 인증샷들이 자주 올라온다.
- 크라프트베르크의 최연장자인 ‘랄프 휘터’와 생일이 같은데, 로버트 플랜트가 2살 아래다.
파일:식물옹 기타.jpg
* 간간히 기타를 연주하기도 했다. 레드 제플린 해체 후에는 본인이 직접 기타를 연주하기도 했는데, 솔로를 연주하기도 했다.
# 지미 페이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인지 상당히 비슷한 스타일로 연주한다는 평이 많은 편.
- 17세라는 어린 나이에 음악 활동을 시작했고 메이저 데뷔도 1968년에 하는 등 빨랐기에 동시대의 아티스트 중에서는 나이가 상당히 어린 편이며, 후배 밴드들의 구성원과 나이가 비슷하다.[53]
- 필 콜린스의 앨범이자, 1980년대 팝 음악의 메가 히트작인 No Jacket Required의 앨범 이름에 본의 아니게 영감을 줬다. 이에 대한 일화는 문서 참조.
* 풍성한 금발 머리 때문에 젊은 시절에는
로저 달트리를 은근히 닮았었다. 이 둘은 활동 당시 음악적인 면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받았었다.
- 당대의 많은 록스타들이 그러하듯 여러 그루피 등 수많은 여자들과 바람을 피웠다. 2010년대 들어서는 ‘밴드 오브 조이’ 활동을 같이 했던 미국의 싱어송라이터인 패티 그리핀과 교제 중이었으나 2014년에 결별했다고 밝혔다.
-
창법 때문일진 몰라도 노래 부를 때
목소리가 조금
많이야한 편이다. 또 무대에서 성적 매력을 과시한다며설쳐대서레드 제플린 무명 시절엔 안티들에게 까이기도 했다. 당시 레드 제플린의 노래를 듣던 청소년들은 부모님이 오시면 소리를 줄였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왜 자신에게 성적 매력 강조를 운운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런 인상은 Led Zeppelin III부터 두드러지기 시작했는데, 이전까지는 목을 강하게 긁는 남성적인 보컬을 선보였다면 이때부턴 그런 창법에 부담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약간 허스키하면서도 얇은 고음을 내는 쪽으로 창법에 변화를 줬기 때문.
- 다른 레드 제플린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견해를 드러내지 않았기에, 로버트 플랜트가 어떤 정치적 성향을 가졌는지는 레드 제플린 활동 당시부터 현재까지 팬들의 떡밥거리가 되고 있다.[55] 다만 브렉시트를 계기로 영국 정부가 투어를 전보다 어렵게 만들었다고 정부를 비판하는 공개 서한에 서명한 것으로 보아, 정치적인 이유든 경제적인 이유든 브렉시트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56]
- 프레디 머큐리와는 록 음악의 역사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 보컬 실력 면에서 록 음악 역사상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점 때문에 해외에서는 팬들에게 자주 비교의 대상이 된다.[57] 프레디 머큐리 외에도 가창력 부문에서 로니 제임스 디오와도 비교되기도 한다. 물론 이 정도의 클래스의 보컬들이면 굳이 비교하는 게 무의미한 수준. 사실상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린다고 보면 된다.[58]
- 두 아티스트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레드 제플린과 퀸이 모두 현역이던 때, 로버트 플랜트와 프레디 머큐리는 어느 공원의 벤치에 둘이 앉아서 “우리가 보컬리스트로서의 생명이 끝나면 뭘 하면서 살아가야 할까?”라는 주제로 토론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암울한(?) 주제와 별개로 로버트 플랜트는 70대 중반인 현재까지 4옥타브 대의 음역을 유지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과, 프레디 머큐리는 죽기 직전까지 최정상급의 가창력을 유지했다는 점 때문에 프레디 머큐리의 요절을 더욱 안타까워하는 팬들이 많다.
- 젊은 시절에는 지미 페이지처럼 종교적으로 흑마술, 오컬트에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었으나, 이후 나이가 들어서 점차적으로 믿지 않게 되었다. 현재에는 종교에 관련해서 확답을 내놓지 않고 있다. 그래서 팬들 사이에서는 그의 종교에 대해 기독교, 무종교( 범신론/ 이신론), 혹은 불교까지 다양한 가설들이 나오지만 어느것도 확실하지 않다.
- 레드 제플린 시절에 다른 아티스트들처럼 마약을 했지만[59], 지미 페이지처럼 심한 마약 중독에까지 이르진 않았고, 나름 절제하려고 노력하며 건강에도 신경쓰는 타입이었다.
* 1976년 영화인
The Song Remains the Same에서 중세 유럽의 기사 분장을 하고 열연을 펼쳤다. 그리고 후술할
브라이언 존슨의 방송에서 저 복장을 그대로 입고 출연했다![60] 참고로 이 당시 길쭉한 대검을 하나 들고 나오기도 했는데, 브라이언이 칼을 보고 놀라 웃자 로버트는 "사람들이 이 칼만 보면 칼 얘기만 그렇게 해댄다."라며 소소한 불평(?)을 하기도 했다.
참조
* 1992년에 열린
프레디 머큐리 추모 콘서트에 참여해서
Innuendo,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을 불렀으나, 당시 감기에 걸렸어서 라이브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 한국 팬들에게서 불리는 별명은 식물(Plant)옹.
* 영국인답게
축구를 매우 좋아한다. 레드 제플린 활동 당시부터 현재까지 동네에서
조기축구를 자주 하며
EPL의 축구팀
울버햄튼 원더러스 FC를 매우 열광적으로 응원한다. 또한 로버트 플랜트는 울버햄튼의 서포터이기도 하다.[62]23/24 시즌 풀럼전에는 직관하여 승리요정이 되기도 하였다.[63]
#
* 해외에서는 Watch Robert Plant while
Roger Waters라는 유명한 밈이 있다. 로버트 플랜트의 성인 Plant가 영어로 ‘심다’을 뜻하고,
로저 워터스의 성인 Waters가 영어로 ‘물’을 뜻하는 점을 들어 "로버트가 심고 로저가 물을 준다"라는 언어 유희를 하는 것. 여기에
달과
별을 하늘에 띄워 놓거나, 옆에
장미꽃이나
종이 한 장을 하나 곁들이는 등의 기출 변형도 존재한다. 참고로 이들의 성씨는
링고 스타를 제외하면 모두 예명이 아닌 원래 성씨이다.
- 우리나라의 가수 김종서가 로버트 플랜트와 노래 스타일이 비슷한데, 실제로 김종서는 로버트의 열렬한 팬이다. 창법뿐만 아니라 무대 매너까지 로버트와 흡사한데, 김종서는 로버트 플랜트를 롤 모델, 귀감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본인 노래도 당연히 잘 부르지만 레드 제플린 노래를 부를 때도 놀라운 수준의 가창력을 보이는데 아시아에서 로버트 플랜트의 노래를 가장 잘 커버한다는 평이 있다.
- 무대에 설 때면 대부분 상의는 입지 않거나 그 위에 헐렁한 재킷을 걸친 상태로 올라왔는데, 문제는 항상 바지는 꽉 끼게 입어서 바지 위로 굵직한 무언가가 돌출되었다는 것.
7.1. 성격
매우 유쾌하고 사교적인 성격이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1974년 5월에 로버트, 지미, 존 본햄은[64] 어릴적 우상이자 오랜 팬이었던 엘비스 프레슬리의 공연을 보기 위해 당시 엘비스의 공연이 열리고 있던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공연을 관람한 뒤에 호텔을 방문하여 엘비스를 만난 적이 있었다. 당시 엘비스는 레드 제플린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처음엔 잠깐만 시간을 내주려 했으나, 로버트의 재치 있는 입담에 푹 빠져서 결국 2시간 동안이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계속 했다는 일화까지 있다. 이때 엘비스의 매니저는 그들이 있는 방 문을 두드렸으나 문을 잠그면서까지 대화를 계속했다고.
에피소드를 추가하자면, 엘비스는 레드 제플린이 최신 인기 밴드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음악을 들어본 적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65] 그래서 제플린의 음악보다는 당시에 매스컴에 많이 나오던 제플린에 관한 가십성 소문들에 대해 관심 있었는데, 특히 순회 공연 때마다 수많은 그루피족과 질펀하게 어울린다는 소문에 대해 궁금해했다고 한다.
기혼자였던 로버트로서는 이에 대해 답변하기가 곤란한 처지였는데, 다음과 같은 재치 있는 답변으로 잘 넘어갔다고 한다. "그런건 소문일 뿐이고 우리는 무척 가정적인 사람들입니다. 우린 호텔에 머물 때 딴 짓 안 하고 오직 당신의 노래를 부르면서 휴식시간을 보내는 게 유일한 즐거움입니다(일동 웃음)." 곤란한 질문도 서로 기분 좋게 넘어가게 하는 플랜트의 재치있는 언변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플랜트의 장기였던 엘비스 흉내 모창을 보여줬는데, 특히 엘비스의 ‘Love Me’를 부를 때 노래나 표정이나 워낙 비슷하게 흉내내서 엘비스를 포함한 모두가 폭소를 터트렸다고 한다.
또한 음악에 대한 편견이나 권위 의식 역시 없어 여러 후배 밴드들의 음악이 마음에 든다고 공식적으로 샤라웃하는 경우도 많다.
7.2. 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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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로열 앨버트 홀 공연 中 |
늙어서도 미노년인데, 젊었을 때는 정말 엄청난 꽃미남이었기 때문에 지미 페이지와 함께 엄청난 그루피들을 몰고 다녔다. 금발벽안과 흰 피부를 가졌으며 북유럽 신화 혹은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신을 떠올리게 하는 외모를 가졌다. 실제로 전성기 때에는 60~70년대 특유의 패션과 어우러져 북유럽 신화 속의 신 혹은 바이킹 같다는 말이 많이 나왔다.[66] 이는 동양적인 외모를 가진 지미 페이지와 대조를 이루며 레드 제플린의 인기 상승에 기여했다. 섹시한 록 스타 순위를 꼽을 때 커트 코베인, 믹 재거, 로저 테일러, 액슬 로즈, 리암 갤러거 등과 함께 결코 빠지지 않는 대단한 외모의 소유자이다. 거기에다가 엄청난 고음의 목소리로 색기를 발산해댔을뿐더러 외모 또한 미소년이었던 탓에 여성 그루피뿐만 아니라 남성 그루피까지 주변에 꼬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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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1970년에서 1971년 사이에 수염을 길게 길렀던 적이 있다. 수염을 기르면 북유럽 신 같은 느낌이 더욱 극대화된다. 특히 수염을 기르고 Immigrant Song을 부를 때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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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헤어스타일에 대해서 당시 레드 제플린의 안티들은 로버트 플랜트가 당시 유명했던 로저 달트리를 배꼈다고 마구 비난했다고 한다. 그러나 로저 달트리가 직접 등판하여 자신은 로버트 플랜트와 친한 사이이며, 자신을 따라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미 페이지는 로버트 플랜트의 헤어스타일이 너무 부러웠는지 고데기를 해서 억지로 곱슬을 하고 다녔는데, 그루피들에 의하면 이것 때문에 머리에서 탄내가 풍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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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40세 당시의 로버트 플랜트 |
백인의 노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감안하면, 1980년대에는 40대가 맞는지 의심되는 수준의 동안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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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중반의 로버트 플랜트 |
그러나 1990년대 중반에 나잇살이 붙고 얼굴에 주름이 늘어나면서 갑자기 폭삭 늙어버렸는데, 2007년과 현재 모습을 비교해 보면 다른 게 거의 없다.
칭찬만 있던 건 아니고, 걸핏하면 웃도리를 벗어던지고, 옷을 입더라도 단추를 잠그는 일 없이 털이 숭숭 난 가슴을 다 드러냈기에 레드 제플린 안티들에게는 노출증 환자냐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똑같이 가슴털을 드러내고 웃통을 까고 노래한 퀸의 프레디 머큐리는 고릴라 같다고 욕을 듬뿍 먹었지만 플랜트는 그나마 얼굴이 잘 생겨서 덜 욕을 먹은 정도.[68]
[1]
그래미 시상식의 가장 중요한 상들로 여겨지는 올해의 레코드상, 올해의 앨범상, 올해의 노래상, 최고의 신인상만이 기록돼있다. 나머지 부문의 상들은 따로 문서 내 수상 목록에 수록해주길.
[2]
3등급 CBE
대영제국 훈장 수여자.
[3]
버밍엄과 가깝기 때문에 보통 버밍엄 출신이라고 한다.
존 본햄도 버밍엄 출신이지만 두 사람이 사는 곳은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
서울로 비유하자면 로버트 플랜트는
강남구, 존 본햄은
노원구 정도의 지역에 살았다.
[4]
과거에는
알레이스터 크로울리를 추종하는 등
흑마법 사상에 심취해 있었으나, 현재에는
기독교,
이신론,
범신론,
불교 등 다양하게 제기될 뿐 본인이 명확히 밝힌 적은 없다.
[5]
#. 한화 약 2,800억 원.
지미 페이지보다 2천만 달러 정도 많다.
[6]
미국 기준.
[7]
물론 보통은 보컬만 한다.
[8]
레드 제플린 활동 시절에도 활동 장르가 많았었지만 해체 이후에는 그야말로
폴 매카트니급으로 소화 가능한 장르가 넓어졌다. 물론 늙어서는 음악 성향이 보수적으로 변했는지 주로 컨트리 음악을 하고 있다.
[9]
가성을 포함한 음역대이다.
[10]
전 아내인 모린 윌슨의 여동생으로, 정확히 얼마나 사귄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1969년에 발매된 곡인
What Is and What Should Never Be가 셜리 윌슨과의 불륜을 바탕으로 쓰여진 곡이기에, 이들의 관계는 대중들의 추측보다 꽤나 오래됐을 가능성이 높다.
[A]
모린 윌슨 소생
[A]
[A]
[14]
셜리 윌슨 소생
[15]
보컬 이외에도
탬버린도 자주 쳤다.
리암 갤러거처럼 노래하면서 탬버린도 같이 쳤던 건 아니고
지미 페이지의 기타 솔로 때 탬버린을 치곤 했다. 또한 하모니카를 연주하기도 했는데, 연주 실력이 상당하다.
Bring It On Home,
Nobody’s Fault but Mine 등의 곡에서 그의 하모니카 연주 실력을 알 수 있다.
[16]
이는 록 가수중 6번째로 높은 수치다.
엘비스 프레슬리,
존 레논,
밥 딜런,
폴 매카트니,
리틀 리처드 다음. 게다가 해당 리스트는 롤링 스톤이 다른 리스트랑 비교해봐도 확연하게 소울이나 R&B 쪽에 유리하게 줄세우기를 한 편임에도 불구하고 20위권 안에 들었다.
[17]
당장 2위가
프레디 머큐리, 3위가
보노니 할 말은 다한 셈이다. 그야말로 최고의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18]
무관중 라이브 이기는 하나 원곡보다 더 어렵게 불렀다.
[19]
프레디 머큐리는 평소에도 레드 제플린에 대한 존경심이 엄청났는데, 그는 로버트 플랜트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보컬리스트로 꼽힌다. 이와 동시에 프레디 머큐리 본인도 역대 최고의 보컬리스트 중 한 명으로 항상 꼽힌다.
[20]
로버트 플랜트보다 선배임에도 그의 영향력을 언급했다.
[21]
후술하겠지만 보컬뿐만 아니라 퍼포먼스 쪽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22]
아마추어 시절에 로버트 플랜트를 카피하며 노래 연습을 했을 정도로 그의 팬이다. ‘레드 제플린 커버는 아시아 최고’라는 소리도 종종 들을 정도.
[23]
I Can't Quit You Baby 등
1집에서 이 점이 크게 두드러진다.
[24]
그와 보컬 스타일적인 면에서 쏙 빼닮았다고 평가받는
김종서도 음색은 중성적인 음색의 록 보컬리스트인
러시의
게디 리와 벗지의 버크 쉘리와 비슷하다고 평가된다.
[25]
이는 그의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도 한 몫할 것이다. 여성의 목소리로 착각될 정도로 하이톤의 음색으로 4옥타브를 훌쩍 넘기는 샤우팅을 애드리브로 지르고 다녔으니 스피커가 터질 만도 하다. 또한 라이브 중 스피커가 터졌다는 등의 상황은 성량이 매우 큰 보컬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애로사항이었다. 대표적으로
겐키 히토미.
[26]
즉,
4집 시절까지.
[27]
다만 1971년~1972년 공연의 영상 자료는 매우 드물며, 공연에 간 팬이 녹음기로 녹음한 녹음 자료 몇 개만 유튜브에 올려져 있다. 약 50년 전의 녹음기이다 보니 음질은
영 좋지 않지만 이런 자료들이라도 남아 있는 것이 다행일 따름.
[28]
겐키 히토미가 이 시절 로버트 플랜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가 레드 제플린 곡을 커버한 걸 들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29]
로버트 플랜트가 타고난 피지컬이 워낙 좋아서 이렇게 소리를 내도 창법이라고 취급을 받는 거지 방법 자체는 성대에 힘을 있는 대로 주고 호흡도 대충 되는 대로 때려박아서 내는 생목 그 자체의 발성이다. 실제로 초창기의 곡들을 들어보면 듣기 좋은 것과는 별개로 인골라도 매우 심하고 호흡 처리 역시도 불안정해 음을 오래 끌면 성대가 가해진 힘을 버티지 못하고 덜덜 떨려서 나는 비브라토가 들린다. 이런 데도 소리가 듣기 좋았으니 얼마나 좋은 하드웨어를 타고났는지 알 수 있다.
[30]
초고음역대의 노래를 부르면서 4옥타브 이상의
샤우팅을 애드리브로 발사하고 다녔다.
이 영상을 보면 3옥타브 솔(G5) 이상의 고음만 40번이 나온다.
[31]
3옥타브 초반대까지는 쥐어짜면 그럭저럭 가능했으나 그 이후 음역대는 거의 올라가지 않았다.
[32]
이 시절의 로버트 플랜트의 공연이 궁금하다면 1979년 네브워스 라이브를 보면 된다. 당시 컨디션이 가장 좋았던 라이브 중 하나로, 이 공연에서 부른
Kashmir는 역대급 라이브로 평가받는다.
[33]
역설적으로 레드 제플린 전체 커리어를 통틀어 이때가 제일 발성적으로 안정적이었던 시절이었다. 목이 제 컨디션이 아니니 강제적으로 호흡을 사용하면서 샤우팅을 배제하고 진성 위주로 노래할 수밖에 없었다.
[34]
다만 이는 당시 감기에 걸린 탓도 컸다.
[35]
Kashmir는 창법이 바뀐 후인
6집의 수록곡이며,
Whole Lotta Love 정도를 제외한 초창기 곡을 부를 땐 고음을 전부 낮추어 불렀다. 그러나 레드 제플린의 곡들은 대다수가 3옥타브를 훌쩍 넘기는 어마어마한 고음 파트가 존재하기에, 한 음 낮춰 부른다고 해도 대부분 최고음이 2옥타브 후반대에서 3옥타브 초반대인데, 노년의 나이에 이 음을 전부 소화한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더군다나 키만 낮추었을 뿐이지 애드리브로 지르는 샤우팅이 대부분 3옥타브 초중반대이며, 한 음 낮추어 부른
Rock and Roll은 음원에서의 음 그대로 불렀기 때문에 1970년대 중반 때 불렀던 것보다 음이 더 높다.
[36]
대표적으로
이안 길런과
액슬 로즈가 있다.
[37]
50년대
블루스 뮤지션들 스타일에 영향을 받아 굵고 거칠게 노래하는 창법을 가지게 된 플랜트가 고음을 라이브에서 하나하나 디테일하게 다 살려 라이브하기엔 레드 제플린 1~4집의 곡들이 대체로 너무 고음역대다. 4집의 히트곡
Black Dog은 여성 보컬들이 자주 커버하는 노래이다.
[38]
이 곡은 윌리 딕슨이 작곡하고 머디 워터스가 1962년에 녹음해서 발표한 'You Need Love'란 곡을 스몰 페이시스가 1966년에 커버한 곡이다. 이 스몰 페이시스의 커버 버전과 머디 워터스의 원곡을 레드 제플린이 짜깁기 한 뒤 편곡해서 녹음한 곡이 바로 그 유명한 '
Whole Lotta Love'다.
[39]
프레디는 음역의 정확한 넓이가 밝혀지지 않았다. 주변인들이 프레디의 최고음을 들어본 적 없다고 하였고 본인도 고음을 선호하지 않았으며그게 4옥타브 파(F6), 저음역도 상당히 넓었다. 이 때문에 프레디가
바리톤이라는 추측도 있다. 확인된 음역은 0옥타브 파(F2) - 4옥타브 라(A6)
[40]
음역대가 무려 -1옥타브 파(F#1) - 4옥타브 라#(A#6)로, 록 보컬리스트 중에서는 음역대가 가장 넓다. 하지만 이는 전성기 기준이며, 현재는 목이 엄청 상하고 살이 엄청 쪄서
정글에 있는 것을 다 쳐먹은 것 같은 보컬,
미키마우스가 뀍뀍대는 소리 같다는 혹평을 들으며 팬들에게 폭풍 까임을 당한다.
[41]
-1옥타브 도(C#1) - 8옥타브 파#(F#10)으로 라이브는 아니지만 전 세계 음역 1위
[42]
-2옥타브 솔(G0) - 6옥타브 레(D8)로 공식적으로 전 세계 음역대 1위
[43]
소위 아쟁총각이라 알려진 가수로, 음역대는 0옥타브 레(D2) - 5옥타브 시(B7)
[44]
포이즌(록밴드),
머틀리 크루,
스키드로우(밴드)등 후대 헤비 메탈 밴드의 프론트맨들은 모두 긴 금발과 고음역대의 소유자이다.
[45]
표현과 비유가 재치있다고 평가받는
믹 재거의 가사와는 다른 부분이다.
[46]
지미 페이지는 반대로 고전 헤비 메탈, 블루스 색체의 음반들을 몇장 발표했다. 평가는 대체로 좋지 않다. 그나마
데이비드 커버데일과 합작한 앨범
Coverdale–Page가 상업적으로도 성공했고 평가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래도 지미 페이지는 지미 페이지인지 어클레임드 뮤직 선정 올타임 아티스트 2210위에 선정되었다.
[47]
그나마 1980년대 후반 앨범들이 차트에서 약간 부진했다.
[48]
물론 로버트뿐만 아니라 모든 레드 제플린 멤버들이 엘비스의 열렬한 팬이었다.
[49]
조지 해리슨은 1973년 열린 존 본햄의 생일 파티에 초대 손님으로 참석하였고, 지미 페이지가
The Rain Song을 작곡할 계기를 심어주는 등 비틀즈 멤버 중에서도 특히 레드 제플린과 친했다.
[50]
지미 페이지와 콜라보
[51]
어디까지나 통계적인 부분이다. 롬인이 속한
인도아리아인에는
칼라쉬인,
카슈미르인처럼
금발벽안이 흔하며 피부색이 밝아 유럽계 백인과 생김새가 거의 흡사한 민족들도 있으며,
로힝야족,
벵골인처럼 피부색이 매우 짙은 민족들도 있다.
[52]
레드 제플린 현역 시절에는 아무래도 1960, 70년대이다 보니 휴대폰 보급이 전혀 안 되어 있었기에 사진 요청 자체를 할 수가 없었다. 물론 이 당시에도
팬들이
원하는 것을 다 해 주는 등 팬 서비스는 훌륭했지만.
[53]
후배 밴드인
퀸의 구성원 중
존 디콘,
로저 테일러를 제외하면 전부 로버트 플랜트보다 나이가 많으며, 로버트 플랜트와 비슷한 연배의 밴드로는 1971년에 데뷔한
이글스, 1975년에 데뷔한
보스턴 등이 있다.
[54]
이러한 성향은 그가 써내려온 가사에서도 확연히 드러나며, 앞서 설명했듯이 로버트의 가사는 굉장히 섬세하고 문학적인 표현들로 가득하다.
[55]
부유한 집안 출신이므로 보수 성향일 것이라는 추측부터 당대 대부분의 음악가들처럼 진보 성향일 것이라는 추측까지 있으나, 확실한 것은 밝혀지지 않았다.
[56]
이 공개 서한에 서명한 유명 아티스트로는
로저 워터스,
닉 메이슨,
브라이언 메이,
로저 테일러,
존 라이든,
리암 갤러거 등이 있다. 그러나 전술한 아티스트들이 브렉시트에 정치적인 견해를 들며 반대한 것과 달리, 로버트 플랜트는 브렉시트를 반대하는 명확한 이유를 말한 적이 없으며(심지어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것인지도 불명이다), 브렉시트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정치 성향을 판단할 수 없기에 어느것도 확실하지 않다.
[57]
다만 레드 제플린과 퀸이 1대 1로 비교되는 일은 드물다. 애초에 퀸은 레드 제플린의 영향을 짙게 받은 밴드였으며, 레드 제플린은 동시대에 같은 장르를 추구했던
딥 퍼플,
블랙 사바스나, 동시대에 활동했던 또 다른 거대 밴드인
핑크 플로이드와 자주 비교당하는 편이다.
[58]
사실 프레디 머큐리가 로버트 플랜트의 영향을 짙게 받았으나, 이 둘의 보컬 스타일은 꽤나 달랐다. 로버트 플랜트가 3~4옥타브 대의 초고음 샤우팅을 폭발적으로 뽑아내는 헤비 메탈적인 이미지였디면, 프레디 머큐리는 2옥타브 후반대의 중고음을 폭발적으로 뽑아내는 다소 팝적인 이미지였다. 로니 제스 디오 또한 이들과 전혀 다른 스타일의 보컬이었다.
[59]
1960~1980년대 서구 록 아티스트 중에서 마약을 안 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물론 프랭크 자파처럼 마약을 안 했던 뮤지션도 있었지만, 그런 경우가 오히려 아주 예외적인 경우였다.
[60]
영화를 촬영한 장소에서 방송을 했기 때문이다.
[61]
원제는 Brian Johnson’s A Life on the Road.
[62]
하지만 플랜트를 제외한
레드 제플린의 나머지 멤버들은
축구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하다.
[63]
참고로 이 날
황희찬 선수는 부상으로 인하여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64]
존 폴 존스는 여기서도 유일하게 소외되었다.
[65]
엘비스는 자기를 구시대 가수로 만들어버린 1960~70년대 후배 세대의 록 음악, 이른바 "요즘 것들"에 대한 반감이 심했다. 그래서 최신 음악은 일부러 멀리 했고, 자기가 예전부터 좋아하던 올드 송들이나
가스펠 음악을 주로 들었다. 사실 최신 트렌드 음악엔 별 관심 없고 자기가 어릴 때 좋아했던 음악을 계속 듣는 것은 비단 엘비스뿐 아니라 다른 많은 뮤지션들도 그러한 편이다. 반면 데이비드 보위처럼 늘 최신 음악에 관심을 기울이며 새로운 물결을 계속 흡수하려고 노력하는 경우도 있으며, 최근에는
에릭 클랩튼이
저스틴 비버의 음악에, 지미 페이지가 힙합에 빠졌다고 밝혀 충격(?)을 주기도 했다.
[66]
The Song Remains the Same에서 중세 기사로 분장한 모습을 보면 바로 이해가 갈 것이다.
[67]
레드 제플린이 여전히 인기 있는 해외에서는 히피펌을 한 장발의 남성을 거리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으며, 국내에서도 가끔씩 보이기도 한다.
[68]
사실 프레디 머큐리도 잘생긴 편에 속한다. 1970년대까지는 인기가 많았으나, 1980년대부터 특유의 콧수염과 패션 때문에 가려질 뿐. 실제로 여성 팬들에게는 콧수염 좀 깎으라는 의미로 면도칼을 잔뜩 선물받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