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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
1981년 예루살렘 구시가지와 성벽† העיר העתיקה בירושלים וחומותיה |
2001년 마사다 מצדה |
2001년 고대 도시 아크레 העיר העתיקה בעכו |
2003년 텔 아비브 화이트 시티 - 모더니즘 운동 "העיר הלבנה" של תל אביב, בזכות ריכוז של מאות מבנים בסגנון האדריכלות הבינלאומית במרכז העיר |
2005년 성서 텔 : 메기도, 하솔, 베르셰바 תלים מקראיים - שהם דוגמה להתיישבות בארץ ישראל מתקופת הברונזה ומתקופת הברזל: תל באר שבע, תל חצור ותל מגידו |
2005년 향교 교역로 - 네게브 지역의 사막 도시 דרך הבשמים - הערים הנבטיות: עבדת, ממשית, חלוצה ושבטה ומספר מצודות וחאנים בנג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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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하이파와 갈릴리 서부 지역의 바하이교 성지 המקומות הבהאים הקדושים בחיפה ובגליל המערבי |
2012년 카르멜 산 인류 진화의 유적지: 나할 메아롯 동굴 ・ 와디 엘 무그하라 동굴 אתרי ההתפתחות האנושית על הר הכרמל: מערות נחל מערות |
2014년 유대 저지대의 마레샤와 벧구브린 동굴군 - 동굴 세계의 소우주 מערות בית גוברין ומרשה בגבעות יהוד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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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베이트 셰아림의 네크로폴리스 : "유대인의 부활"에 관한 기념비 הנקרופוליס בבית שערים: ציון דרך בהתחדשות יהודי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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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네스코에는 이스라엘의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지 않다. 요르단이 등재 신청을 했고, 유네스코는 별다른 국가 분류 없이 '예루살렘'이라고만 표기한다. | }}}}}}}}}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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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한국어 | 고대 도시 아크레 |
영어 | Old City of Acre | |
아랍어 | مدينة عكّا القديمة | |
프랑스어 | Vieille ville d’Acre | |
국가·위치 | 이스라엘 북부 관구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2001년 | |
등재기준 | (ii)[1], (iii)[2], (v)[3] | |
지정번호 | 10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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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크레(Acre) 또는 아코(עַכּוֹ, 히브리어) 혹은 악카 (عكا, 아랍어)는 이스라엘 북부 관구에 위치한 항구도시이다. 하이파 만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세 십자군 최후의 근거지였다. 현재 인구는 4만 8천 명인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구시가지로 한정하면 5천 명이다. 이슬람, 기독교 시대의 성벽이 지중해와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뽐낸다. 신시가지에는 유대인, 구시가지에는 아랍인이 거주한다.2. 역사
십자군 및 오스만 시대 구조물들. |
2.1. 고대
아크레는 기원전 3천 년 무렵 초기 청동기 시대부터 유적이 발견될 만큼 유서깊은 도시였으며 본래 가나안인의 도시로 사실상 페니키아 문화권에 속한 도시였다. 기원전 2500년경 지중해에 수몰되어 도시가 버려졌다가, 기원전 2000년경 재건되었고 이집트 문헌에서 '악카'로 언급되었다. 기원전 18세기에는 투라 암무란 왕이 다스렸다 한다. 기원전 1450년경, 악카를 포함한 가나안 지역은 투트모세 3세의 이집트 신왕국에 정복되었다. 다만 현지 도시 국가 군주들은 이집트에 복속한 채로 자치를 유지했다. 기원전 14세기의 아마르나 서신에는 메기도의 왕 비리디야가 아멘호테프 3세에게 악카 왕 수라타가 포로를 마음대로 석방하여 이집트를 배신했다고 고발하는 내용이 있다. 당시 도시에서는 도기, 금속제품 등이 생산되어 각지로 수출되었다.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당시 악카는 이스라엘 부족 중 아셰르에 할당되었으나, 점령되지 않았고 페니키아 연맹의 일원으로 남았다. 다만 요세푸스는 솔로몬 시기 악카가 이스라엘 왕국령이었다고 기술했다. 기원전 800년경, 악카를 포함한 페니키아 해안은 아시리아 제국에게 정복되었다. 기원전 725년에 악카가 시돈, 티레와 힘을 합쳐 아시리아의 샬만 에세르 왕에 저항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이로써 보복을 당했는지 이후 도시가 한 차례 파괴된 흔적이 발굴되었다. 신바빌로니아 제국을 거쳐 아케메네스 제국 시절 악카는 중요한 항구 중 하나였다. 캄비세스 2세는 기원전 525년의 이집트 원정 시에 군대를 악카 인근 평원에 집결시킨 후 출정했고, 이때 악카는 보급 기지로써 시가지 확장 및 항구 개선이 이루어졌다. 페르시아의 안정적인 지배 하에 제철 도시로 번영하던 도시는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 3세에 저항했다가 크게 파괴되었다. 그리스인들은 악카를 그리스어로 순수하다는 뜻인 아케 (Ἄκη)로 불렀다.
2.1.1. 헬레니즘기
그후 디아도코이 시기 악카를 포함한 페니키아는 대왕의 친구였던 미틸레네의 라오메돈이 장악했다가 기원전 320년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점령했다. 다만 이듬해 에우메네스가 점령했고, 다시 기원전 317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령이 되었다. 다만 기원전 314년 안티고노스 1세가 페니키아를 정복했고, 기원전 301년 그가 전사한 후에도 아들 데메트리오스가 지배하다가 셀레우코스 1세와 맞서기 위해 기원전 287년에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게 페니키아를 넘기며 휴전했다. 비록 1차 시리아 전쟁 시에 셀레우코스 1세가 잠깐 점령했으나 곧 후퇴했다. 그후 반세기 넘게 페니키아는 프톨레마이오스 령으로써 안정을 누렸고, 기원전 260년경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악카를 일대의 주요 항구 도시로 개발하며 프톨레마이스라 명령하였다. 당시의 관습에 따라 지명은 페니키아 혹은 가나안의 프톨레마이스로도 불렸다. 프톨레마이스는 기원전 218년 안티오코스 3세가 일시 점령 했다가, 기원전 200년에 완전 정복하며 셀레우코스 왕조령이 되었다.뒤를 이은 안티오코스 4세는 프톨레마이스를 자신의 이름을 따 안티오키아로 명명했으나, 도시는 프톨레마이스-아케로 더 알려졌다. 마카베오 전쟁기인 기원전 165년, 유대 반군에게 패배해 갈릴리에서 축출된 셀레우코스 군대는 프톨레마이스로 밀려났다. 이후로도 하스몬 왕조의 위협에도 도시는 셀레우코스 령으로 남았고, 중요한 항구 도시로 여겨졌다. 한편, 하스몬 조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이던 데메트리오스 1세는 그를 시기한 로마 측의 지원을 받는 사촌 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의 반란에 직면했다. 기원전 153년, 알렉산드로스는 프톨레마이스에 상륙하여 왕을 칭했다. 이에 데메트리오스는 프톨레마이스의 조세를 예루살렘 성전에 배당하다는 제안으로 하스몬 국왕 요나단 압푸스와 연합하려 했는데, 결국 후자는 알렉산드로스와 동맹했다. 기원전 150년, 알렉산드로스는 데메트리오스를 전사시킨 후 프톨레마이스에서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딸 클레오파트라 테아와 즉위식 겸 결혼식을 올리며 요나단을 초대해 치하했다.
기원전 147년, 데메트리오스 1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 2세가 반란을 일으키자 프톨레마이오스는 사위를 돕는다는 명분 하에 프톨레마이스 등 시리아 해안을 장악한 후 데메트리오스 편으로 전향했다. 클레오파트라 역시 이혼 후 데메트리오스와 재혼했고, 기원전 145년 데메트리오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죽음과 함께 즉위했다. 동시에 프톨레마이오스는 시리아 해안을 얻었으나, 전투 중 부상으로 사망한 후 데메트리오스가 수복했다. 그후 데메트리오스는 프톨레마이스로 향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하던 요나단을 소환했고, 그가 응하자 최고제사장에 봉하는 등 화해했다. 하지만 이듬해 장군 디오도토스 트리폰이 알렉산드로스의 아들 안티오코스 6세를 옹립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요나단은 하스몬 왕조의 완전한 독립을 약속한 그와 동맹해 승리에 일조했다. 하지만 하스몬 조가 너무 커졌다 여긴 디오도토스는 스키토폴리스에서 요나단과 만나 그의 4만 군대를 해산하면 프톨레마이스 등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를 승낙한 요나단은 군대 해산 후 1천 호위대만을 이끌고 프톨레마이스로 향했다.
하지만 시내에 매복한 셀레우코스 군대에 의해 호위대가 대부분 살해되고 요나단은 포로가 되었다. 그후 디오도토스는 유대로 진격했으나 요나단의 동생 시몬 타시에게 격퇴되자 요나단을 죽여 보복했다.[4] 시몬 타시는 시리아 북부를 차지한 데메트리오스와 동맹해 독립을 얻어냈다. 기원전 138년, 데메트리오스가 파르티아에 사로잡힌 후 형수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한 동생 안티오코스 7세는 디오도토스를 격파하여 제국을 통합했다. 안티오코스는 바빌론 등 형이 잃은 실지를 수복했으나 메디아에서 전사하며 무위로 돌아갔다. (기원전 129년) 이후 파르티아에서 풀려난 데메트리오스는 클레오파트라와 재혼하고 재집권했는데, 후계 문제를 두고 다툼이 일었고[5] 클레오파트라는 자식들과 프톨레마이스로 도피했다. 데메트리오스는 이를 무시하고 이집트 내전에서 클레오파트라 2세 측으로 참전했다가, 분노한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보복으로 옹립한 시리아의 대립 군주 알렉산드로스 2세 자비나스에 의해 역공을 당했다.
기원전 126년, 패배한 데메트리오스는 프톨레마이스로 도주했으나 클레오파트라는 성문을 걸어 잠갔다. 아내에게 버림받은 데메트리오스는 배를 타고 티레로 도주했다가 붙잡혀 처형되었다. 그후 클레오파트라는 아들 셀레우코스 5세에 이어 안티오코스 8세와 공동 즉위했으나 지배 범위는 프톨레마이스에 그쳤고, 나머지 왕국은 알렉산드로스가 통치했다. 기원전 124년,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딸 트뤼파이나와 안티오코스를 결혼시켰고, 사돈의 이집트 군 파병 덕에 이듬해 알렉산드로스를 죽이며 왕국을 통일했다. 이후로도 클레오파트라는 안티오키아 대신 프톨레마이스에 머물렀다가 기원전 121년 아들을 독살하려다 역으로 독살되었다. 하지만 안티오코스 역시 기원전 114년부터 이복동생 안티오코스 9세와 20여년간 내전을 벌이며 제국은 크게 약화되었고, 프톨레마이스는 사실상 방치되었다.
그러던 기원전 103년, 하스몬 국왕 알렉산드로스 야나이가 프톨레마이스를 포위했다. 구원에 나선 도라의 조일로스가 격파되자, 주민들은 내전 후 키프로스에 할거하던 이집트 왕자 프톨레마이오스 9세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집트 귀환의 발판을 마련할 기회라 여긴 그는 함대를 이끌고 프톨레마이스에 당도했고, 알렉산드로스는 철수했다. 하지만 이로써 본의 아니게 프톨레마이오스 10세와 적대하게 될 것을 우려한 주민들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입성을 거부했다. 이에 분노한 그는 역으로 도시를 공격했고, 하스몬 조가 이집트와 동맹하자 포위를 이어가게 두며 직접 갈릴리를 공격해 유린했다. 한편 프톨레마이스 역시 결국 함락되어 대대적인 약탈을 겪었다. 이에 프톨레마이오스가 강해져 돌아올 것을 우려한 이집트 군대가 수륙 양면으로 출정했고, (클레오파트라 테아의 동생) 클레오파트라 3세가 프톨레마이스를 포위했다.
이에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 진격을 시도했다가 키프로스로 철수했고, 클레오파트라 3세 역시 유대를 직접 지배할까 고민하다 알렉산드로스를 책봉한 후 회군했다. 이렇게 프톨레마이스는 셀레우코스 령으로 남았고, 안티오코스 12세의 사후 시리아 북부를 정복한 아르메니아 왕국의 티그라네스 2세 기원전 69년 프톨레마이스를 포위해 점령했다. 다만 곧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의 로마군이 본토를 침공하자 티그라네스는 철수하며 프톨레마이스에서 사로잡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를 처형했다. 그후 명목상으로만 셀레우코스 령으로 유지되던 프톨레마이스는 기원전 64년, 폼페이우스의 시리아 정복과 함께 로마 령이 되었다. 기원전 34년, 로마 삼두정치의 일원인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 3세의 증손녀인)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7세와 결혼한 후 시리아 남부 영토를 선물했다. 이때 170여년 만에 프톨레마이스는 공식적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령으로 돌아왔으나, 불과 3년 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이 패배하고 왕조가 아예 멸망하며 재차 로마령이 되었다.
2.1.2. 로마 제국령
로마 시대 프톨레마이스에서 주조된 동전
로마령 페니키아 시기에도 도시는 프톨레마이스 혹은 아케라 불렸고, 로마화가 진행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치세에 그의 친구인 헤로데 대왕이 시내에 김나지움 (체육관)을 세웠다. 기원전 4년, 헤롯의 사후 유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프로콘술 푸블리우스 퀸크틸리우스 바루스가 프톨레마이스 에서 군대를 모아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진압했다. 로마 시대에 제방이 건설되며 현재 항구의 기초가 형성되었고, 점차 확장되었다. 클라우디우스의 치세에는 '콜로니아 클라우디아 펠릭스 프톨레마이스 게르마니카 스타빌리스'의 정식 명칭을 가진 식민 도시가 되었다. 레반트에서 이는 베리투스, 아엘리아, 카이사레아 마리티마와 함께 로마가 세운 4대 식민 도시 중 하나로써 많은 퇴역병들이 정착해 일대의 로마화를 주도했다. 팍스 로마나 하에서 무역으로 번영한 도시는 자체적으로 동전을 주조했고, 갈릴리의 외항으로써 중시되었다.
아크레는 또한 페니키아의 티레, 베이루트와 가나안의 카이사레아, 야파 등을 이어주는 연락항 역할도 하였다. 사도행전에서도 바울이 티레에서 아크레로 향했다는 언급이 있다. 로마화가 진행되었어도 주민들은 대부분 현지 페니키아인 및 유대인이었고, 2세기 중반에 이르면 로마인들이 2세기에 걸쳐 도입한 라틴어는 점차 현지어 및 그리스어로 대체되었다. 다만 로마 풍속과 종교는 상당 부분 잔존했다. 서기 66년, 1차 유대 반란 진압에 나선 유대 총독 게시우스 플로루스는 프톨레마이스의 유대 주민들을 학살했고, 이듬해 베스파시아누스가 이끄는 진압군이 이곳에서 갈릴리로 진격했다. 130년에는 바르 코크바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로마군이 프톨레마이스를 기지 삼아 출정했다. 한편 1차 유대 반란 당시의 예루살렘 파괴 후 유대인들이 대거 프톨레마이스에 정착했고, 이로써 천년 넘게 이어진 페니키아 정체성이 점차 약화되며 갈릴리 및 팔레스티나의 일부로 여겨졌다.[6]
2세기 중반 무렵 도시의 인구는 2만에 달했다. 190년을 전후로 하여 프톨레마이스에는 기독교가 전파되었고, 레반트의 주요 기독교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기독교 공인 후인 351년, 동방 부제 콘스탄티우스 갈루스는 유대 반란을 진압하며 프톨레마이스의 주류를 이루며 로마에 반감을 보이던 유대 주민들을 재차 학살했다. 이로써 인구가 크게 감소한 도시는 동로마 제국기에 중소 항구로 유지되었다. 6세기 무렵 프톨레마이스를 방문한 한 이탈리아 인은 주민이 대부분 기독교도고, 아름다운 성당들이 많다고 기록했다. 3세기 가량 침체기를 보내던 도시는 636년 야르무크 전투 후 아므르 이븐 알 아스가 이끄는 이슬람 제국군에게 점령될 당시 인구 1천의 어촌에 불과했다. 이슬람 정복 후 도시는 기존의 셈계 지명을 회복하여 악카 (عكا)로 불렸다.
2.2. 중세
아크레 항구
동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악카는 636년 혹은 638년에 아므르 이븐 알 아스 혹은 슈라빌 빈 하사나애게 저항 없이 항복하여 우르둔 군관구에 소속되었다.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 1세는 악카 등 시리아 해안 도시들을 요새화했고, 악카와 티레를 키프로스 약탈의 거점으로 삼았다. 또한 시리아의 페르시아 인들을 정착시켜 악카의 인구를 늘렸다. 669년, 동로마 해군이 역습을 가해 오자 무아위야는 목수 및 조선 기술자들을 악카로 파견해 함대를 건조했다. 이후 악카는 반세기 이상 우마이야 왕조의 해군항으로 중시되다가, 8세기 초중반 칼리파 히샴이 티레로 조선소를 옮겼다. 다만 9세기 압바스 왕조 시기 악카는 재차 군항이 되었고, 861년 칼리파 알 무타와킬이 전함 및 주둔군을 두어 주요 해군 기지로 삼았다.
민간에 있어서도 악카는 팔레스타인의 주요 항구로 번영했다. 870년대, 시리아를 장악한 툴룬 왕조 시기에 대대적인 요새화가 이루어져 상산들의 안전을 보장했다. 9세기 말 ~ 10세기 중반의 혼란을 거쳐 악카는 파티마 왕조 령이 되었다. 985년, 악카를 방문한 아랍 지리가 알 무카다시는 요새화된 해안 도시로 넓은 올리브 과수원을 지닌 큰 도시가 있다고 묘사했다. 1047년에 방문한 페르시아인 여행가 나시르 호스로는 도심부에 대리석으로 된 금요 (회중) 사원이 있고, 그 바로 남쪽에 사도 살레흐의 영묘가 위치한다고 기록했다. 또한 도시의 규모는 가로 0.3km에 세로 1.25km 였고, 이는 십자군 시기의 시가지보다 큰 규모였다.
2.2.1. 십자군 전쟁기
십자군 시기 도시 지도
기사단 성채 (시타델)
1099년 예루살렘 함락 후 1차 십자군은 점차 레반트 해안 요새 도시들을 공략했다. 1103년, 보두앵 1세의 첫 악카 공격은 격퇴되었다. 다만 1104년 5월, 보두앵은 20여일 간의 포위 끝에 악카를 함락했다. 이후 도시는 생장다크레 혹은 줄여서 '아크레' (Acre)로 불렸다. 십자군 시기 아크레는 야파와 함께 예루살렘 왕국의 주요 항구로써 순례객, 상인, 군사들로 북적였다.
베네치아 공화국과 제노바 공화국은 동로마 제국을 거치지 않고 아크레에서 향신료와 비단 등 동방 물산을 직수입하여 엄청난 이익을 얻고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1130년대 도시의 인구는 역대 최대인 2만 5천에 이르렀고, 왕국 내에서 예루살렘에 이은 제2의 도시였다.
12세기 후반 무렵 아크레는 동지중해의 주요 무역항 중 하나로써 예루살렘 왕국의 부의 원천으로 여겨졌다. 당시의 한 잉글랜드 사가는 아크레의 세수가 잉글랜드 왕국 전체보다 많았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1185년, 안달루스 출신의 지리가 이븐 주바이르는 아크레 내에 여전히 무슬림 공동체가 있었으며 작은 모스크에서 예배를 드렸다고 기록했다.
1187년의 하틴 전투 후, 아크레는 살라흐 앗 딘에게 저항 없이 항복하였다.
2.2.1.1. 아크레 공방전 (1189-91)
자세한 내용은 제3차 십자군 원정 문서의
아크레 공방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아크레 해안 성벽
1189년 8월, 석방된 예루살렘 국왕 기 드 뤼지냥은 잔병을 수습하여 피사 공화국 해군과 함께 아이유브 왕조령 아크레를 포위했다. 이에 살라딘은 대군과 함께 포위군을 포위했지만, 3차 십자군의 열풍과 함께 유럽 제후들이 속속 당도하며 십자군은 성벽과 2차 포위맡 사이에서 불어났다. 이때 뤼베크, 브레멘 출신의 독일 상인들이 야전 병원을 세운 것에서 후일의 튜튼 기사단 (독일기사단)이 유래되었다. 1191년,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가 이끄는 십자군 본대가 당도하며 아크레는 결국 항복하였다. 이후 도시는 미수복 상태인 예루살렘을 대신하여 예루살렘 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3차 십자군은 아크레를 거점으로 하여 팔레스타인 해안을 대부분 재점령할 수 있었다.
2.2.1.2. 예루살렘 왕국의 수도 (1191-1291)
6차 십자군 후 아크레는 약 30여년간 왕이 부재한 상황에서 구호기사단의 관할이 되었다.
한편 13세기 중반 들어 7차 십자군이 대실패로 귀결되는 등 십자군측 열세가 명확해지자, 프랑스의 루이 9세 등은 아크레에 대한 대대적인 요새화에 나섰다.
2.2.1.3. 1291년 아크레 함락
자세한 내용은 십자군 전쟁/목록 문서의
종결
부분을
참고하십시오.구도심 북쪽의 구호기사단 성채 내부 연회장 & 항구 남쪽의 현재는 수몰된 템플기사단 성채로 이어지는 지하 터널 |
십자군의 무역 거점이자 보급기지로 번영을 누렸던 아크레는 맘루크 왕조에 정복된 이후 지역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사페드[7]에 내주고 서서히 몰락했다. 맘루크 왕조도 베네치아, 제노바 같은 도시들과 교역을 활발하게 벌이는 입장이었지만 변방의 아크레보다는 알렉산드리아를 무역항으로 더 선호했던 것이다.
2.2.2. 맘루크 왕조기
다시 아랍 지명인 악카로 환원된 도시는 십자군 귀환 시의 재활용을 방지한다는 맘루크 정책에 따라 다른 해안 도시들처럼 대대적으로 파괴되었다. 무슬림들에게 신성하게 여겨진 나비 살리흐 열묘, 아인 바카르 샘 정도만이 남겨졌다. 1321년, 하마 영주 겸 지리가 아불 피다 무함마드는 한때 장인들이 가득했던 악카는 맘루크 점령 후 여전히 폐허 상태이고, 넓은 항구만이 계속 사용된다는 기록을 남겼다. 맘루크 시기 악카는 내륙의 사페드에게 팔레스타인 북부의 중심지 자리를 내주었다.2.3. 오스만 제국 시대
1737년에 프란치스코회가 세운 세례 요한 성당
1516년, 일대는 오스만 제국령이 되었다. 1596년 기준 악카는 사페드 리와 (군)에 속한 나히야 (읍)였고, 90여 가구가 거주했다. 다만 전략적으로 중요하여 인구가 수백임에도 불구하고 나히야의 치소가 된 것으로 보인다. 주민들은 매년 밀, 보리, 목화, 염소, 물소, 벌꿀 등의 특산물 및 관세 등 전체 수입의 1/4인 20,500 악체의 세금을 냈다. 그중 절반은 종교적 자선 기구인 와크프에 배당되었다. 1697년, 악카를 방문한 영국인 학자 헨리 먼드렐은 프랑스 상인들의 칸 (카라반사라이) 알-일프란즈와 모스크 및 초라한 오두막들만이 있다고 기록했다.
2.3.1. 아크레 정권
아크레 항구 일대 옛 오스만 건물들의 스카이라인
아크레 구도심 북부와 제자르 파샤 모스크
18세기에 갈릴리 지방의 아랍인 태수였던 자히르 알 우마르가 이 지역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간파하고 사람들을 악카에 정착시키고 요새를 재건했다.[8] 악카는 다시금 항구 도시이자 전략적 요충지로 거듭났다. 자히르는 십자군 시기 유적을 재활용하여 악카의 성벽을 재건했고 카라반사라이, 모스크, 공중 욕탕 등을 세웠다. 40여년간 악카를 중심으로 팔레스타인 대부분 지역을 독립적으로 다스리던 자히르는 1775년, 오스만 조정의 토벌로 전사하였다. 다만 이후로도 토벌군의 일원이던 아흐마드 제자르 파샤가 집권한 것을 시작으로, 반세기 가량 세습적인 '악카 맘루크 정권'이 이어지며 팔레스타인 지역은 자치를 누렸다.
제자르 파샤는 포위 당시 파손된 악카의 성벽을 보강했다. 또한 본래 도시가 속한 시돈 에얄레트는 이미 치소가 사실상 악카로 이전된 것이 결국 제자르 파샤에 의해 공식적으로 반영되어 아크레 에얄레트로 불리기도 했다. 1780년, 제자르 파샤는 프랑스 정부의 항의에도 악카의 프랑스 상인들을 축출했고 영사 배치도 거부했다. 제자르 파샤 역시 카이사레아 및 아틀리트 유적을 활용하여 알 자자르 모스크, 칸 알 움단 등을 세웠다. 그는 또한 악카에서 누가 잘못을 하거나 실수를 하면 바로 코나 귀를 자르는 공포 정치로 악명 높았으며, 자신을 알현하는 유럽인들에게는 종이를 꽃 모양으로 선물해주기를 좋아하는 특이한 취미도 갖고 있었다.
현존하는 오스만 시기의 아크레 성벽. 십자군 시절 외벽을 따라 세워졌다. 매우 넓고 깊은 해자가 특징이다.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을 벌이던 1799년 무렵 악카는 오스만령 시리아에서 3번째로 큰 도시로써 인구가 2만이 넘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69일간 아크레를 공격했으나 영국인 수병 88명의 지원을 받은 자자르 파샤의 오스만 군대 4천 명이 이를 격퇴하였다. 영국 해군이 대포를 운반하던 프랑스 해군을 격퇴하여 프랑스 군은 소형 포와 보병대만으로 공성전을 수행해야 했고, 한번은 성벽을 격파해 성내로 진입하기도 했으나 제자르 파샤가 준비해 둔 예비대에게 밀려나자 나폴레옹은 결국 철수를 결심했다.
이 패전은 나폴레옹 군사경력 중 최초의 공성전 실패 사례였다. 한편 악카 방어에 가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시드니 스미스가 이끄는 영국인 수병들은 예루살렘의 성묘교회를 순례할 수 있는 자격을 얻고 방문하게 된다. 이는 십자군 전쟁 이후 최초로 서유럽 군인들이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이기도 했다. 그후 1806년에 집권한 술레이만 파샤는 13년간 안정적으로 통치했고, 악카는 나폴레옹의 파괴에서 완전 회복하여 번영했다. 1819년에 술레이만 파샤를 계승한 압둘라 파샤는 자신을 추대한 유대인 재상 하임 파르히를 숙청, 1822년 다마스쿠스 총독 다르위시 파샤 및 파르히 가문의 5개월에 걸친 아크레 포위도 격퇴하고 중앙 집권적 통치에 나섰다.
2.3.2. 근대화 시기
압둘라 파샤의 궁전. 후일 이브라힘 파샤를 거쳐 바하이교의 지도자 압둘 바하가 거처하였다.
1831년 가을, 시리아 정복에 나선 이집트의 메흐메드 알리는 아들 이브라힘 파샤 휘하의 원정군을 팔레스타인으로 보냈다. 근대화된 이집트 군대는 손쉽게 팔레스타인 대부분을 장악했고, 압둘라 파샤는 악카에서 6개월 가까이 농성했지만 1832년 5월에 성벽이 뚫리자 결국 항복했다. 이로써 악카는 8년 후 오스만-영국 연합군의 개입 전까지 이집트 령으로 남았다. 1840년 11월, 오스트리아-오스만-영국 함대는 악카를 포격해 시가지에 큰 피해를 입혔다. 이집트 주둔군은 오스트리아 황제의 6촌인 프리드리히 대공이 직접 상륙에 나서자 철수했고, 이로써 악카는 오스만 령으로 회복되었다.
1870년경의 악카 도심부
다만 포격으로 파괴된 악카는 1841년, 시돈 (아크레) 에얄레트의 치소를 근대화 되던 베이루트에 내어주고 아크레 산작의 중심지로 남았다. 1866년, 아크레 산작은 다마스쿠스를 중심으로 한 시리아 빌라예트에 소속되었다가 1888년 신설된 베이루트 빌라예트로 이관되었다. 1831-32년과 1840년의 포위 이후 회복하지 못하여 야파, 하이파에 밀려 인구 5천 수준의 소도시로 쇠퇴하던 악카는 1913년 히자즈 철도의 하이파 지선 개통으로 나블루스 및 다마스쿠스 등지와 연결되며 재차 인구가 늘었다. 다만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팔레스타인 도시들 중에서는 가장 늦은 편인 1918년 9월, 영국군에게 점령된 후에는 다시 갈등의 장이 되었다.
2.4. 근현대
옛 십자군 구호기사단 성채의 폐허를 활용한 오스만 시기의 성채 겸 감옥. 영국 지배기 팔레스타인 최대의 감옥이었다.
1922년 기준 아크레에는 무슬림 4883명, 기독교도 1344명, 바하이 102명, 유대인 78명, 드루즈 13명 등 6천 4백여명이 거주했다. 20여년이 지난 1945년에는 무슬림 9890명, 기독교도 2330명, 유대인 50명, 기타 90명 등 1만 2천여명이 거주했다. 영국 당국은 아크레 성채를 감옥으로 변모시켰고, 체제에 저항한 유대인 및 무슬림 민병대원들을 수감시켰다. 수감자에 대한 처형 역시 벌어졌다. 1929년 폭동을 일으킨 3인의 아랍인이 이듬해 처형된 것에 이어 1936년 팔레스타인 대반란 후에는 108명의 아랍 가담자들이 처형되었다.
2.4.1. 1차 중동전쟁 (이스라엘 독립전쟁)
술레이만 파샤 시기에 세워져, 1948년 유대 민병대 측의 세균존 대상이 된 알 카브리 수도교
1947년 유엔 팔레스타인 분할안에서 아크레는 아랍 국가에 배정되었다. 다만 그해 3월, 유대 자본이 운영하는 팔레스타인 전기 회사의 기술자 4인과 영국군 5인이 인근 영국 공군 기지에 케이블 매설을 하러 가던 도중 아랍 민병대의 지뢰 공격을 받았다. 그러자 유대 민병대인 하가나가 도시 외곽의 다리를 폭파시키고 기차를 탈선시키는 등 보복했다. 5월에는 유대 민병대 측의 차량 폭탄 테러 후 200명이 넘는 수감자가 탈옥하는 일이 있었다. 비록 주모자들은 처벌되었지만, 이로써 영국은 팔레스타인에 지배의 지속성에 대해 회의감을 품게 되었다. 1948년, 1차 중동전쟁의 전운이 일자 유대측 카르멜 제21 연대는 아크레로 향하는 알 카브리 수도교를 파괴하여 도시로의 수자원을 차단했다.
이에 아랍 측이 보수를 하면 유대 측은 물에 티푸스나 이질 균을 타는 세균전에 나섰다. 이렇게 수도교가 차단된 상황에서 그해 4-5월, 유대 측은 지하수를 퍼올리는데 필요한 전기마저 차단하였다. 이로써 식수가 부족해진 도시는 전염병까지 엄습하며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고, 결국 5월 16일에 카르멜 부대가 저항한다면 모두 학살할 것이라며 최후 통첩을 선포하고 공세에 나서자 시내의 유지들은 회의 끝에 17-18일 밤에 항복했다. 아크레에는 교전 및 병으로 사망한 60여 구의 시신이 있었고, 전체 아랍[9] 인구 1만 7천 중 3/4에 해당하는 1만 3천 5백여명이 도시를 떠나 난민이 되었다.
2.5. 현대
구도심 일대와 항구
1950년대에 구도심 동쪽과 북쪽 근교 지역에는 여러 유대인 마을들이 생겨났고, 주로 모로코 출신 유대인들이 정착했다. 다만 구도심에는 여전히 아랍 무슬림이 대다수를 이루었고, 기독교도 역시 가까이 모여 살았다. 한편 유대-아랍 분쟁과 함께 인구가 줄었던 바하이 신도들은 안정이 회복되자 아크레에 재차 정착했고, 바흐지 저택 주변에 모여들었다.
1990년대에는 구소련 출신의 유대인들이 수천 규모로 정착했다. 2000년 전후로는 아크레 북부에 살던 유대인들이 대거 나하리야의 새 시가지로 이주하고, 근교 마을들의 아랍 주민들이 그 자리에 입주하며 아랍 인구가 1/3 가까이 이르게 되었다. 2008년 10월, 유대 명절인 욤 키푸르 날에 아랍 주민이 유대인 구역에 차를 몰고 지나간 것을 유대 주민들이 문제 삼으며 5일 간의 난투극이 벌어졌다. 2011년 기준 아크레에는 1만 4천의 아랍인과 3만의 유대인이 거주했다. 2020년 기준 전체 주민 중 32%가 아랍계고, 구도심의 경우 95%가 아랍계이다.
3. 대중문화에서
- 게임 어쌔신 크리드의 주무대 중 하나로 등장한다.
[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3]
특히 번복할 수 없는 변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졌을 때 환경이나 인간의 상호 작용이나 문화를 대변하는 전통적 정주지나 육지·바다의 사용을 예증하는 대표 사례
[4]
물론, 프톨레마이스 할양 약속은 백지화되었다.
[5]
데메트리오스가 파르티아 공주와 얻은 자식을 염두에 두자 클레오파트라가 반발한 것
[6]
다만 행정 상으로는 여전히 페니키아 속주에 속했다.
[7]
오늘날 이스라엘 북부 내륙에 위치한 소도시
[8]
버려졌던 십자군 시절 유적을 재활용했다.
[9]
무슬림 및 기독교도 포함